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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136/154)

136화

“뭐가 확실하다는 것이냐? 답답하니 이제 그만 속 뒤집고 어서 털어놓으래도.”

“책을 읽을 때 건성건성 읽으시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잖아요. 방금 형님께서 읊으신 내용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 무엇인가요?”

“핵심? 어디보자...황금선도인가? 아니면 만년지투?”

“에효, 뛰어난 머리의 결과물 어쩌고 자화자찬하시더니 맹탕이시네요. 핵심은 바로 ‘새로운 질서’잖아요. ‘새로운’이란 단어가 던지는 의미가 무엇이겠어요? 당연히 구시대의 유물이나 존재와 대비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무엇이지 않겠어요?

제가 처음부터 가졌던 의구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년에 한번 나타난다는 귀한 황금나무가 어째서 옥황상제의 영역이 아니라 아무 곳에나 불쑥 솟아나냐는 말이지요.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어떤 힘이 치밀하게 안배하고 선택한다는 느낌 아닌가요? 아니면 필요에 의해 그렇게 이끌려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요. 마치 운명처럼 말이지요.”

“그럼 네 말은 이 황금나무가 나를 선택했다는 뜻이냐? 운명처럼?”

“그렇다고 제발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진 마세요. 유쾌하지 못했던 제 지난날이 떠오르니까요. 아무튼 그것이 첫 번째 정황증거에요. 나무는 그 어디에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고유의 영역을 존중하는 천계의 특성상 우선권은 그 영역을 다스리는 자에게 있다. 고로 누구를 불문하고 선택받을 수 있다.

이해되시죠?”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하지만 그만한 증좌로 모험을 걸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는데...”

“하하하, 급하시긴. 아직 세 가지나 더 있으니 차근차근 들어보세요. 자, 그럼 두 번째 정황증거. 바로 영체의 모습입니다.”

“영체의 모습? 지금 이 모습을 말하는 것이냐? 이게 어때서?”

“형님도 알다시피 영체는 그 뚜렷한 형상이 없는 게 정상이죠. 이미 육신이라는 허울을 벗었으니 자유로이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님이나 저나 어째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상하고 궁금하지 않으세요? 참, 그리고 제가 옥황상제의 모습을 아직 안 봐서 모르겠는데 그 양반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나요?”

“상제? 당연히 그도 우리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어째서 ‘당연히’ 라고 그리 쉽게 단정 지으시는 거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셨죠?”

“그, 그러게?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고정관념이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인간계에서 살다 이곳 천계로 넘어오셨으니 타성에 젖어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넘기신 거죠.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세요. 만 년 전에 존재했던 상제의 정체가 꼭 인간이란 법은 없으니까요. 다른 무언가 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둬야죠. 안 그래요?”

“그렇구나. 꼭 인간이란 보장은 없겠어. 허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또 그러신다. 그만한 영력을 지닌 양반이 그깟 모습 하나 자유로이 못 바꿀까요?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지상계에서 넘어오는 다수의 영혼들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기에 그리 모습을 바꿨을 수도 있어요.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형님이나 저의 모습이 인간이란 점인데 제 짐작으론 아마도 담겼던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습이 유지되는 것 같아요. 뚜렷한 형상이 없는 물도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잖아요.”

“네 말은 사람의 육신이 그릇이고, 영혼은 그 안에 채워진 물이다?”

“바로 그거예요. 장시간 담겨 있었으니 그릇의 모양대로 굳어지고 닮아가는 것이 당연하죠. 마치 그릇에 담긴 채 얼어버린 물처럼 말이에요.”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두 번째 정황증거란 것이냐?”

“당연히 정황증거가 되죠.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고 요구하는 만년지투잖아요. 그것에 부합되는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란 말이죠. 더 나아가 보통의 인간이 아닌 무공을 익힌 고수. 무언가 감이 오지 않으세요? 내공심법의 발전으로 탄생한 무림의 고수가 황금선도의 영력을 제어하고 다스릴 가능성이 높다는 반증이죠. 안 그래요?”

“그럼 네 말은 황금선도가 나를 선택한 까닭이 영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무림의 내가고수, 한 발 나아가 그것이 가능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란 말이냐?”

“이제야 감이 오시네요. 형님도 알다시피 자연에 산재한 수많은 기운들을 특성화시키고, 세분화 시켜 힘으로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존재가 바로 무림의 인간들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귀기로도 모자라 색기까지 사용하는 저도 당연히 포함되고요. 이것을 바꿔 말하면 황금선도는 만년지투를 통해 어떠한 기운이든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인간, 즉 무림고수였던 인간을 새로운 질서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형님의 영역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고요.”

“하기야 같은 인간이라도 무공을 익힌 고수와 평범한 인간이 지닌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천양지차이긴 하지. 그럼 천계에 도래할 만년의 새로운 질서는 무공이란 말이지?”

“두 말하면 입 아프죠.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님이나 제가 유리하다는 것이죠. 형님 말씀대로 영체에 혈도라는 것이 존재하진 않지만 이미 한 번 가보았던 익숙한 길이지 않습니까. 없는 거야 있다 여기면 크게 문제될 것 없으니 지금 지닌 영력으로 시험해보면 그만이고요.”

“그래, 듣다 보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야. 충분히 시도해볼 여지가 있겠어. 설사 상제가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만 년 전의 인간이라면 잘해봐야 돌로 도끼나 만들어 무식하게 짐승이나 때려잡았을 것이니 내 상대가 되진 않을 터. 이거 무럭무럭 용기도 생기고 욕심도 나는구나.”

“이제야 형님다운 패기와 강호를 주름잡았던 도색성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시네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자, 그럼 이제 세 번째 이유인데 이건 의외로 간단해요. 아직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 세 번째 증거입니다.”

“아직 열리지 않았다?”

“네. 꼭 운명처럼 형님이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우연도 계속 중첩되면 필연이 되듯 10여 년 전에 나타난 나무에 아직도 황금선도가 열리지 않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마치 전장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처럼 형님이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뜻이죠. 형님 말씀대로라면 열매가 언제 열릴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면서요. 그리고 열매가 열려야 만년지투도 열리는 것이고. 만약 형님이 저와 함께 보냈던 시기에 열매가 열렸으면 인연이 아니려니 하겠는데 아직도 이리 멀쩡히 서 있잖아요? 그리고 무슨 운명의 고약한 장난인지 제가 미쳐 날뛰는 바람에 비명횡사 당했고, 덕분에 열매가 열리기 전 형님께선 자석에 이끌리듯 이리 선계로 돌아왔잖아요. 그리고 제가 또 누굽니까? 영체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귀문의 문주이지 않습니까? 이런 조력자가 떡하니 형님 옆에 있다는 것 역시 필연이에요. 더 볼 것도 없이 이건 뭐 아귀가 맞아떨어져도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니 이젠 소름까지 돋네요. 보이세요, 여기 닭살 돋은 거?”

“그래, 보인다 보여. 그럼 이제 마지막 이유만 남았구나?”

“이게 또 무지 신빙성 있는 확실한 정황증거입니다. 그럼 형님께서 황금선도를 취해야만 하는 마지막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죠. 그 이유는 바로 옥황상제의 태도입니다.

형님이 말했다시피 옥황상제가 염라대왕 몰래 제 영혼을 회수한다는 것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율을 무시한 채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일을 서슴없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초조하다는 것입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이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럼 네 생각엔 도대체 상제가 무엇 때문에 초조했다 여기는 것이냐?”

“만년지투밖에 더 있겠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형님의 부탁을 들어줬겠습니까? 그만큼 절실히 황금선도가 필요했다는 뜻이지요. 어차피 자신의 물건이고 자신밖에 감당 못한다면 굳이 그런 모험을 하진 않았겠죠. 바꿔 말하면 상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누군가가 그 열매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사라질 수 있음을. 그리고 누구든 능력이 되면 그 영력을 흡수할 수 있음도. 아마도 영력을 감당 못해 존재가 소멸된다는 둥 하는 말은 겁주기 위한 거짓소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상제 입장에선 만에 하나 객기라도 부려 내가 그 과일을 덥석 먹을까봐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후후, 원래 뒤가 구리고 욕심으로 똘똘 뭉친 종자들이 시야가 좁잖아요. 쉽게 생각해보자고요. 천상계를 다스리고 조율하는 상제라는 자리가 어디 보통 자립니까? 그만한 자리에 앉아 자그마치 만 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천상계를 어찌 다스렸는지는 몰라도 분명 공이 적지 않을 테지요. 그런데 만년지투를 앞두고 사사로이 형님과 거래를 하였습니다.

그럼 그동안 자신이 쌓은 행적은 뭐가 됩니까?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너무 부끄럽지 않을까요? 그 모든 걸 감수하고 황금선도를 탐해 인과율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만큼 자리에 연연하고 욕심이 많다는 반증이지요. 이미 형님과 거래를 한 순간 상제로서의 자격상실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예상이지만 상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황금선도의 역할이 무엇인지, 만년지투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그자는 어렵지만 바른 길 대신 쉽고 빠른 지름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기우일지 모르나 노파심에 한 말씀 드릴게요. 혹시나 제 예상이 맞아 형님께서 천상계를 다스리는 상제가 되신다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원래 가야할 때를 알고 떨어지는 꽃과 낙엽이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니 형님은 상제 그놈처럼 꼼수 부리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세요. 결과를 담백하니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세요. 그래야 참으로 떳떳해집니다. 안 그러면 앞서 열심히 살았던 거 지금의 누구처럼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제 진심 아시겠죠?”

길천은 비담의 말이 진심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 역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황금선도를 얻었다는 기쁨보다 비담이 자신의 곁에 머물고 있음에 더 큰 고마움과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덥석 비담을 끌어안은 채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고맙다 담아. 우형은 네가 있어 너무나 기쁘구나. 고맙다, 고마워.”

“켁, 갑자기 이러시면 숨을 쉴 수가 없잖습니까?”

“영체가 무슨 숨을 쉰다고 그리 호들갑이냐. 크하하하!!!”

“알았으니 그만 풀어주세요. 답답합니다.”

길천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슬그머니 포옹을 풀었다. 비담은 짐짓 켁켁 대는 시늉을 해 보이다 따스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길천을 향해 미소 지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를 보며 웃음 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황금나무 아래 털썩 자리를 잡고 앉은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형님, 황금선도는 언제 열릴까요?”

“글쎄, 책에 명확한 시기는 적혀 있지 않아서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럼 우선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되겠네요.”

“아마도 그래야겠지. 그런데 담아, 넌 황금선도가 욕심나지 않느냐? 가설대로라면 너 역시 황금선도의 영력을 흡수하여 상제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후후, 너라면 이 형님이 선뜻 양보해줄 용의도 있다.”

“에이, 행여나 그런 말씀 마세요. 누구 앞길을 망치려고 그리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악담을 퍼부으신담. 헤헤, 전 누구보다 제 그릇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가리 해봤자 골치만 아프고 잘 할 자신도 없어요. 그리고 제 천성이 그런 자리 부담스러워 좋아하지도 않아요. 전 말이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유유자적 사는 것이 소망이랍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감투일랑 씌우지 마세요.”

“허허, 농이 아니라 내 진심이다.”

“저도 농담한 거 아니에요. 뭐 형님 마음이 정 그러시면 만년지투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오른팔 시켜주세요. 그것도 형님이니까 들어드리는 거예요. 저도 더 이상은 양보 못합니다. 만년지투 끝나면 제 구역에서 모든 거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 겁니다.”

비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길천은 밀려오는 뿌듯함과 아쉬움을 조용히 묻은 채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알았다. 네 뜻이 그러하니 우선은 존중하마.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연습을 해볼까?”

“그러는 게 좋겠네요. 언제 열매가 열릴지 모르니 미리 길을 닦아 놓으셔야죠. 제가 호법을 설 테니 안심하고 시작하세요.”

“그래, 너를 믿는다.”

길천은 신뢰 가득한 눈으로 비담을 한 차례 응시한 후, 이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곤 끝없이 자신의 영체 내부를 관조하며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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