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30/36)

정희가 백화점에 도착하자 충영은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딩동-

정희가 벨을 누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충영은 긴장으로 가볍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문이 열리고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부인이 그와 충영을 맞았다.

“정희야.”

정희의 어머니라고 생각한 충영은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오느라 수고했어요. 추운데 어서 들어갑시다.”

안으로 들어간 충영은 정희의 어머니에게 들고 온 와인 두 병과 홍차를 건넸다.

“뭘 이렇게... 그냥 와도 되는데...”

그녀가 물건을 받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생각보다 초라한 아파트였다.

강남이라고는 해도 건물이 낡았고 평수도 30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평범한 아파트다.

“여기 앉아요. 차라도 내 올 까요?”

“예. 주십시오.”

“엄마. 아빠는?”

정희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들어오셨다.”

“응. 충영 씨. 앉아요.”

정희가 거실에 방석을 깔고 권하자 충영은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

“불편할 텐데 정희 씨도 좀 앉아요.”

“예.”

정희가 막 그의 곁에 앉으려는데 문 쪽에서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문이 열리자 충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

tv에서 가끔 보던 바로 그 얼굴이 정희를 향해 미소를 짓다 충영을 발견하고 금방 굳어진다.

“안녕하십니까?”

충영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자 박성준이 흐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아내가 주방에서 나와 반갑게 맞자 성준이 그녀를 향해 활짝 웃는다.

“그래. 하루 종일 잘 있었소?”

“예. 어서 들어오세요. 피곤하죠?”

“아니. 하하. 집에 와서 당신 얼굴 보면 피곤이 다 풀리는 데 뭘.”

충영은 그의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속으로 약간 충격을 받았다. 정희에게 듣기로 둘 다 60을 넘겼고 결혼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텐데도 서로를 대하는 모습들이 꼭 신혼부부처럼 보였고 그 표정에 가식이라곤 한 올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손님 왔으니까 얘기하기 편하게 서재로 가실래요?”

아내가 묻자 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재에다 차 좀 준비해 줘요.”

“예. 기왕 어렵게 걸음 했으니까 식사까지 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참. 이름이...”

“예. 정충영입니다.”

충영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긴장한 것 같네? 호호. 우리 남편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너무 어려워 말고 편하게 얘기해요. 그리고 저녁 먹고 갈 거죠?”

“예.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충영이 성준과 함께 서재 방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차가 들어오고 둘만 남게 되자 성준이 충영에게 말을 꺼냈다.

“듣자니 우리 정희와 깊은 사이라고? 지금 뱃속에 있는 아기 아빠이기도 하고.”

“예. 그렇습니다.”

충영이 고개를 숙이자 성준이 그에게 물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나?”

“아닙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언론 같은 데서 평해 놓은 걸 보고 들은 게 전부고 대표님이 정희 씨 아버님이란 사실도 며칠 전에서야 알았으니까요.”

“으음. 그래. 정희가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아빠에 대해 말하고 다니는 아이는 아니지. 난 정희한테 말을 듣고 정 사장에 대해 좀 알아봤네.”

“예.”

충영이 긴장했다.

“뭐. 들리는 평은 괜찮고 특히 김동민 회장한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더군.”

“예. 회장님이 분에 넘치게 절 많이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렇게 발 벗고 나서는 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회장님이 안 계셔서 지금 우리 대성그룹이 흔들리고 있고 가족들도 가장이 처음으로 구속되는 일을 겪다보니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제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사실 남의 가족 얘긴 듣고 싶지 않네. 내 개인적인 욕심이야 정 사장이 그 집안에서 나와 정희에게 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니까. 하지만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걸 원치는 않아. 정희도 남의 행복 망치는 거 질색으로 여기는 착한 아이니까 그쪽까지 욕심은 없네.”

“네.”

충영은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희한테서 자네 장인 석방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보니 참 인생 허망하고 어이가 없더구만.”

“죄송합니다.”

“평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 딸자식 때문에 어긋나게 생겼어.”

충영은 죄인처럼 고개만 숙였다.

“물론 처음 정희한테 말을 들었을 때 거절했네. 그런데 이 녀석이 사흘 동안 밥도 안 먹고 죽을 것처럼 기운을 못 차리니 나한테는 그게 고문보다 더 무서운 압박이더군. 자칫하다 딸자식하고 그토록 바라던 손주까지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내 이상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더란 말이지.”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성준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충영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고개 들고 나 좀 보지?”

“예.”

충영이 고개를 들자 성준이 그에게 말했다.

“뭐, 내 이상이나 가치관 같은 것들 정 사장한테 얘기해봐야 본론에서 어긋나기만 할 테고 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내가 정 사장 부탁을 들어주면 자넨 내게 뭘 줄 텐가? 설마 아무 조건 없이 청탁을 들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성준의 말을 듣는 순간 충영은 전에 미화의 남편 문성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충영은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대표님께서 이번에 힘을 써주신다면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게 뭔가?”

“사실 3일 전만 하더라도 정희 씨가 제 아기를 임신하고 잇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이제 알게 됐으니 정희 씨를 평생 책임지겠습니다. 물론 지금 제 아내를 버릴 수도 없으니 정희 씨와의 관계는 비공식적이 될 수밖에 없고 정희 씨와 제 자식들은 평생 남편이나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살아야 하겠죠. 하지만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것뿐이고 절대로 정희 씨나 제 자식들의 눈에서 눈물 나지 않게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가만. 지금 자식들이라 했나?”

“예. 정희 씨가 자식 욕심이 많아서 네 명 정도는 낳고 싶다고 하더군요.”

“허어. 그 녀석도 참...”

“정희 씨는 평생 저 아니면 다른 남자는 두지 않겠다고 했으니 부족하지만 제가 처한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정희 씨를 위해 줄 겁니다.”

“으음.”

“그리고 이건 대표님께서 원하실지, 잘 모르는 부분이라 조심스러운데요.”

“말해 보게.”

“만약 이번에 장인께서 석방되시면 대표님 신세를 지셨다는 것도 알게 될 거고 주고받는 것이 확실하신 그분께서 가만있지는 않을 걸로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드리려고 할 텐데, 만약 받으실 마음이 있으면 충분하게 사례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인 후원은 아니지만 뒤에서 보이지 않게 대표님 대통령이 되실 때까지 우리 대성이 끝까지 돕겠습니다.”

“정 사장이 그럴 위치에 있나?”

“예. 이번에 대표님이 도와주시면 그런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 까요?”

“물어보게.” 

“대표님은 대통령에 대한 비전이 확실하게 있으신가요?”

“물론. 정치에 뛰어든 이상 최고의 목표는 바로 그 자리지.”

성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충영이 대답했다.

“저도 백화점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하나의 꿈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대성의 오너, 즉 김동민 회장님의 후계자가 되는 것입니다.”

“으음.”

성준이 조금 놀랐는지 신음소릴 내며 충영의 얼굴을 보았다.

“사위라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 할 체력과 의욕이 있고 담력도 누구 못지않게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제 역량이 되는 한 대표님을 제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무조건 후원하겠습니다. 무조건 대표님 편이 돼 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정희 씨 친 아버님이시니까요.”

충영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성준이 뭔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한 동안 고요한 적막이 서재에 흐르다 성준이 충영에게 말한다.

“좋아. 내 정 사장을 한 번 믿어보지. 한 배를 타겠다는 말이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절 믿어주셔도 좋을 겁니다. 제 사전에 배신이란 단어는 결코 없으니까요.”

충영이 웃으며 말하자 성준도 그와 동화된 듯 따라 웃었다.

“젊은 친구가 배짱이 있어. 그래. 사업을 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신뢰가 가지.”

“그럼 이제부터 사석에선 아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좋도록 하게. 자. 이제 나갈까? 배가 조금 고프군.”

“예.”

충영과 성준이 웃는 낯으로 서재를 나오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정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충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희가 살며시 충영의 손을 잡자 그 모습을 보고 성준이 농을 건넸다.

“이 녀석. 이제 아빠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구나. 졸지에 아빠가 투명인간이 됐네.”

“아이. 아빠도. 내가 이 세상에서 아빨 가장 사랑하는 거 잘 알면서...”

정희가 충영의 손을 놓고 성준에게 다가가 그의 뺨에 뽀뽀를 한다.

“아이고. 이거 우리 딸한테 얼마 만에 받아보는 서비스냐. 어이. 자네. 좀 자주 집에 와야 할 것 같네. 이거 그 동안 찬바람이 쌩쌩 불더니만 모처럼 사람 사는 집 같네. 여보. 그렇지 않소?”

“호호. 그러네요. 자. 거실에 상 차렸으니 가서들 앉으세요. 여기 정 사장이 당신 좋아하는 와인을 두 병이나 가져 왔어요.”

“그래? 허허. 어디 보자. 백화점 사장이니 그럴 듯한 걸로 사왔겠지?”

성준이 밝은 낯으로 상 앞에 앉자 충영의 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와인에 대해 잘 모릅니다. 술은 가리지 않고 잘 마시는 편이라서요.”

“어디. 정희야. 와인 가져와 봐라.”

“예.”

정희가 와인을 주자 성준이 병을 들어 상표를 읽는다.

“음. 로마네 꽁띠.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딱 골라서 가져왔군. 자. 먼저 한 잔 마셔볼까?”

“제가 하겠습니다.”

충영이 그에게서 병을 받아 마개를 땄다.

와인 잔에 술을 따르자 성준이 냄새를 한 번 맡더니 절반 쯤 들어 있는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린다.

“흐음. 좋군. 자. 자네도 한 잔 하지.”

“예.”

충영이 잔을 받고 그에게도 다시 술을 따랐다.

“여보. 음식 하고 같이 들어요. 내일도 바쁘게 일하실 거면서.”

아내의 말에 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럽시다. 당신하고 정희도 어서 앉아. 같이 식사합시다.”

“예.”

네 사람이 한 상에 둘러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충영은 분위기가 더할 수 없이 푸근하고 좋아서 꼭 정희가 아내고 성준과 그 부인이 장인장모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박성준의 힘은 대단했다.

그렇게 갖은 노력을 했어도 이뤄지지 않았던 동민의 석방이 충영과 성준의 만남 이후 이틀 만에 극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동민은 그를 반기는 식구들을 일일이 안고 축하를 받았다.

특히 충영의 차례가 되자 동민은 그의 몸을 안고 한 동안 놓지 않았다.

식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동민이 충영을 놔주며 말했다.

“자식. 이제부터 넌 내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다. 알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화영이 묻자 동민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아직 모르고 있나? 누가 날 검찰 손에서 풀려나게 했는지 말이야.”

“혹시. 정 서방이?”

“뭐야. 충영이 너 식구들한테 말 안 했어?”

동민이 묻자 충영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뭐, 제 입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운 일이라서요...”

“하하. 녀석. 이렇게 큰 일을 하고서도 겸손하기까지 하니. 내가 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자. 모두들 들어라. 이번에 충영이가 전적으로 힘을 써서 내가 풀려났다. 나도 자세한 건 우리 충영이한테 들어야하겠지만 아무튼 충영이 때문에 석방된 거는 분명한 사실이야. 고맙다 우리 아들.”

동민이 충영의 어깨를 치고 다음 그의 앞으로 다가온 수진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 공주. 이 아빠가 수감됐을 때 제일, 너무너무 보고 싶었던 막내 딸.”

수진을 보던 동민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수척해진 얼굴로 동민이 울자 수진이 그 모습을 보고 먼저 다가가 그의 몸을 안았다.

“아빠. 울지 마.”

그렇게 말하는 수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분위기가 숙연해지는 가운데 충영은 두 사람의 우는 모습을 보고 아빠에게 항상 무뚝뚝하게 대하던 수진이 사실은 동민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민이 수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준 뒤 부드럽게 말했다.

“아빠가 우리 공주 말을 좀 더 새겨들을 걸, 너무 성급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 아빠 경영 스타일이 원래 그러니까.”

“응. 아빠. 그 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수진의 부드러운 위로를 받으며 동민이 가족들 모두에게 말했다.

“내가 수감돼서 생각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우리 가족들이야. 나를 나오게 한 것도 가족이고... 가족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어. 그리고 어려운 일 겪었지만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모두에게 약속하마.”

“당신. 너무 무거운 분위기 만들지 말고 이제 좀 웃고 즐깁시다. 좋은 날이잖아요?”

화영이 말하자 동민이 손뼉을 치고 소리쳤다.

“맞다! 와인. 나오면 와인부터 마시겠다고 했지. 빨리 와인창고에 가서 가장 좋은 놈으로 가져 와. 안에 있으면서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이 와인이야.”

“호호. 이제야 당신답네.”

화영이 웃으며 말했다.

식사가 끝나자 동민이 충영을 따로 불렀다.

서재에 둘만 남자 동민이 잔에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시며 충영에게 물었다.

“날 빼내 준 사람이 누구냐?”

“아버님. 그분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요. 그래도 아버님한테는 얘기해 드려야겠죠.”

“그래. 나는 알고 있어야지.”

“아버님만 알고 계세요. 그 외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하고 정말 어렵게 관계를 맺었는데 깨지면 우리에게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니까요.”

“그래. 알았다니까. 궁금해 죽겠다. 그 분이 누구냐?”

“지금 여당대표로 있는 박성준입니다.”

“뭐라고? 지금 박성준이라고 했냐?”

“예.”

“그 청렴하기로 유명한 박성준이 맞아?”

“예.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아버님을 석방시키기 위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청탁을 넣었으니까요.”

“으음.”

동민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와인을 단번에 마시고 다시 술을 잔 가득 따랐다.

“충영이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동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충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그 동안 사실 고생 좀 했습니다. 아버님이 그렇게 되시니까 회사 분위기도 엉망이고 우리 식구들도 초상집처럼 변했죠. 그래서 저도 백방으로 안 알아본 데가 없이 발로 뛰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부탁부터 하고 봤는데 우리 백화점 고객 중에 한 분이 그 박성준 대표와 친분관계가 있어서 어렵사리 그분을 뵐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무조건 빌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우리 대성그룹이 평생 그분을 후원할 것이라고요. 참, 이런 말들은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말이 아닌데 워낙 급해서 그냥 나오는 대로 다 말했습니다.”

“아니. 괜찮다. 잘 했어. 그보다 박성준이란 사람을 좀 아는데 그 사람이 이런 청탁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닌데... 참, 충영이 네 능력이 대단한 건지, 그 사람한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한 번 만나서 넌지시 떠봐야겠다. 만약 그 사람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용이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진데 말이야.”

“아버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아버님만 알고 계십시오. 명기나 다른 식구들한테도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 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신신당부했거든요.”

“그래그래. 네가 말하지 않아도 박성준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튼 정말 충영이 네 능력이 대단하구나. 어떻게 그런 거물을 포섭할 수가 있었는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냈어.”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그 분이 저를 좀 잘 보셨는지, 제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한다고 그러더군요. 저도 나중에 성공하면 이번 일을 두고두고 보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 박성준을 봐서라도 너한테 앞으로 더 중요한 일을 맡기마.”

충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거 아닙니다.”

“그래. 네 맘 안다.”

“그런데 아버님. 저도 궁금하네요. 제가 그 동안 정신없이 뛰면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 봤는데요. 석방되는 것이 무척 어려웠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쉽게 나올 수 있었습니까?”

“네 말이 맞다. 처음에 날 수감한 검사가 그러더라. 명확한 주가조작의 증거가 있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말이야. 실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긋나긋해져서는 내게 묻더라. 정충영이 누구냐고.”

“으음!”

“내 사위라고 했더니 그 놈이 그러는 거야. 사위 잘 둔 줄 알라며 순전히 너 때문에 풀어주는 거라고. 형식적인 절차는 이런 거지... 주가조작은 내 밑의 부하직원이 주동한 걸로 뒤집어쓰고 나 대신 들어갔다. 어차피 그 직원은 내가 들어가더라도 같이 공모한 죄로 형을 살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죄를 더 크게 쓰고 들어간 거야. 대신에 조금 형을 살고 나면 감형과 사면으로 더 빨리 나오도록 조치한다는 시나리오지. 물론 나오면 고생한 만큼 특별대우해주면 되고 말이야.”

“아. 일이 그렇게 된 거군요.”

“뭐. 이쪽 일이란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지. 권력을 잡고 있는 편에 서 있으면 프리패스야.”

“저도 이번에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 이번 인연을 기회로 그 박성준 대표는 우리가 꼭 잡도록 하자. 그 사람만 끌어들이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예. 그 분이 절 잘 보신 것 같으니까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충영이 너만 믿는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명기냐?”

“예.”

“들어와라.”

동민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명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라.”

명기가 앉자 동민이 그에게 말했다.

“명기야. 너 이제 본격적으로 선 좀 봐야겠다.”

“예?”

명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동민이 충영과 명기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결국은 이 세계가 돈과 권력이야. 돈과 권력이 합쳐지면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고 위로 쭉쭉 뻗어갈 수 있는 거야. 특히 이번 일로 인해 뼈저리게 느낀 사실인데 내가 수감돼서 고생하다 이제야 나온 것은 순전히 돈과 권력이 부족해서다. 자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고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인수합병을 했을 텐데 돈이 부족해서 그런 불법적인 주가조작까지 하게 된 거야. 더구나 지금 우리가 인수하려고 하는 회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공에 붕 떠있는 상태인데 그 회사를 끌어들일 자금이 없어.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한다면 이제까지 들인 돈과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고. 그래서 말인데 명기 네가 이번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겠다. 너도 이제 28살이니 결혼할 때도 됐고 널 정치인의 집안과 결혼을 시킬까, 아니면 재벌가와 사돈을 맺을까, 잣대를 굴리고만 있었는데 이젠 좀 상황이 급하게 됐어.”

“아버지.”

동민이 당황해하는 명기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정치 쪽은 다행스럽게도 충영이가 맡을 수 있게 됐으니 이제 명기 너는 자금 쪽을 맡아라. 일단 선을 보고 그 중에서 현금보유력이 뛰어난 재벌가를 잡도록 하자.”

“아버지.”

명기가 다시 부르자 동민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왜? 말해라.”

“저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요.”

명기가 동민의 기세에 눌려 말을 하지 못하자 충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명기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이런 자리에서 수빈의 말을 꺼낸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 동민이 명기에게 말했다.

“혹시 너. 지금 사귀는 여자라도 있는 게냐?”

“아! 아 예. 만나는 여잔 있습니다.”

“그래?”

동민이 호기심을 보이자 명기의 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어떤 집 아가씨냐? 우리와 비슷한 가문의 여식인가?”

“아, 아닙니다. 대학 다닐 때 같은 학과 후배로 가끔씩 만나왔던 아인데 아버지가 관심 가질 만한 애는 아닙니다.”

“허허. 그래도 우리 명기가 여잘 만나고 있었다니 궁금하구나. 그래. 그 집 부모는 뭐하는 데?”

“저, 그게. 부모님이 의사와 교수라고 알고 있는데 저도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가볍게 만나는 사이라서...”

“아. 다행이다. 가볍게 만났으니 뭐 헤어지는 것도 어렵지 않겠구나. 그 후밴가 뭔가 하는 아가씨는 이제 정리하도록 하고, 이 아비가 정해준 여자들하고 선을 보도록 해. 물론 하나뿐인 인생이니까 네 의견도 충분히 존중하마. 지금 우리 회사 상황이 시급하여 하루라도 빨리 네가 선택을 해주면 좋겠지만 평생 네 인생이 걸린 일이니 너무 다그치면 안 되겠지. 일단 선을 봐서 여러 여자들을 만나 봐. 그 중에서 너와 내가 동시에 마음에 들면 결정하는 거야. 어때? 아빠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 하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민의 기세에 눌린 명기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재에서 나온 충영은 자신의 방으로 갔다.

‘......!’

영진은 벌써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그 모습을 잠깐 본 뒤 충영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씻고나오자 바로 휴대폰에 문자가 떴다.

(잠깐 볼 수 있어?)

수진에게 문자가 오자 충영은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답글을 쳤다.

(갈 수 있어. 지금 갈까?)

(^^ 응. 빨리 와.)

충영은 또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수진의 방으로 갔다.

똑똑-

“들어와요.”

수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충영은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자신을 부르는 수진의 표정이 햇살처럼 환하자 충영은 보람을 느끼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쉬고 있었어?”

“응. 그런데 오빠. 왜 말 안 했어?”

“뭐. 내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거 쑥스럽잖아? 내 자랑하는 거 같고.”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주지.”

“생색내는 거 싫어서.”

“정말 고마워.”

수진의 말에 충영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말로만 하면 그렇잖아?”

“그럼 뭐? 다른 보상을 바라는 거야?”

수진도 그의 의도를 눈치 채고 웃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래. 고마우면 보답을 해야지. 우리 산정호수에서 하고 그 이후로 1년이 지난 거 알아?”

“알아.”

“좀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그래서. 이번에 아빠 풀려나게 한 보상으로 내 몸을 요구하는 거야?”

“응. 난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수진이 그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좋아. 이번에 오빠 너무 고생했으니까 오빠 요구 들어줄게.”

“정말?”

충영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다 얼른 그녀의 몸을 안았다.

“지금 할까?”

“아이. 지금은 안 되지.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기왕 한 번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맞다. 내가 우리 수진이만 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흐흐. 그럼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충영이 음흉한 미소를 짓자 수진이 그에게 말했다.

“한 3일 정도 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나야 언제든지 좋아. 장소는? 밖으로 나갈까?”

“오빠는?”

“나는... 이 방에서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여기서 끝까지는 안 해봤잖아? 스릴도 있을 것 같고.”

“음. 어차피 오빠 원하는 대로 하자고 생각했으니까 좋을 대로 해.”

“야. 난 아버님 나온 것보다 수진이가 내 부탁 들어주는 게 더 기쁘다. 하하. 이거 오늘부터 3일 동안 잠 못자게 생겼는걸?”

충영이 너무 기뻐하자 수진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떠오른다.

“오빠는 내가 그렇게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하니? 좋고말고.”

“백화점 쉬는 날이 언제야?”

“이틀 후지.”

“그럼 그날로 하자.”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충영이 수진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하자 그녀도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백화점 휴무일이 되자 충영은 집에서 사람들의 근황을 살폈다.

명기는 점심때부터 저녁까지 선 약속이 세 곳이나 잡혀 있어 정신없는 하루가 될 것 같았고 영진도 오후에 모처럼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충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민도 화영과 부부동반으로 정치인들과 약속이 돼 있어 오후가 되자 집안이 텅 빈 것처럼 조용했다.

충영은 하늘이 돕는다고 생각하며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 사람 아무도 없다. 가도 돼?)

수진에게서 바로 문자가 왔다.

(응. 지금 와.)

충영은 문자를 보자 바로 총알같이 그녀의 방으로 튀어나갔다.

똑똑-

“들어와요.”

수진의 목소리에 충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며 웃었다.

“빨리도 왔네.”

“당연하지.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충영이 문을 잠그고 웃으며 다가가자 수진도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이제 대학 2년생이 되는 수진의 얼굴은 인생의 절정기를 맞고 있는지 그야말로 광채가 날 정도로 아름다워 그냥 단순하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정말 아름다워.”

충영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자 수진이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몰라. 그렇게 빤히 보면 얼굴 닳겠다.”

수진이 고개를 숙이자 충영은 떨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리고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잡아챘다.

“우읍!”

그가 수진의 입술을 입안으로 들여 격렬하게 빨자 수진이 반항하듯 몸을 비틀다 이내 그녀도 그의 얼굴을 붙잡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쪽쪽쪽-

수진이 숨이 막혀 할 때까지 입술과 혀를 붙들고 있다가 충영이 아쉬운 듯 간신히 그녀의 입술을 내주었다.

“하아! 숨 막혀.”

수진이 붉어진 얼굴로 충영의 얼굴을 밉지 않게 흘기자 충영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들고 침대로 갔다.

“오빠! 잠깐만... 나 안 씻었어.”

“그게 더 좋아. 씻으면 지금 수진이 몸에서 나는 이 향기로운 냄새가 다 사라져서 싫어.”

“내 몸에서 냄새가 나?”

충영이 수진의 몸을 침대에 놓고 말했다.

“응. 아주 좋은 냄새. 수진이 몸에서는 아주 향기롭고 풋풋한 여자냄새가 나. 그런데 또 그게 이 오빨 미치게 해.”

“아. 오빠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데...”

“그래? 맡기 싫은 냄새야?”

“아니.”

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자극적인 냄새. 그게 남자 냄샌가 봐.”

“아아. 미치겠다. 더는 못 참겠어.”

충영이 수진의 옷을 빠른 속도로 벗겨갔다.

순식간에 수진을 알몸으로 만들고 자신도 옷을 다 벗은 충영은 수진의 몸 위로 올라타 그녀의 몸 전체를 자신의 넓은 품으로 가뒀다.

“수진아. 이게 얼마만이냐?”

충영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하자 수진이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오빠!”

한 동안 말없이 수진의 몸을 끌어안고만 있던 충영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더니 그때부터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충분했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차고 넘쳤기에 충영은 수진의 몸 구석구석을 하나도 빼지 않고 손과 입술, 그리고 혀를 총동원하여 애무했다.

“아아. 오빠!”

지금의 충영이 마음먹고 애무를 하면 사실 견딜 여자가 없었다. 경락을 하며 익힌 손기술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의 입술이 돌아다니며 성감대를 정확하게 짚어내며 자극하면 삽입을 하기 전에 여자가 이미 절반은 절정에 이르고 만다.

수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유달리 다른 사람에 비해 인내심이 많은 것일 뿐 수진의 몸도 그 어느 여자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런 그녀의 몸을 충영이 바짝 달구자 나중엔 수진의 입에서 먼저 그를 요구하는 말이 나왔다.

“오빠! 안 되겠어. 그만 애 태우고 들어 와. 응? 어서.”

수진이 항문을 혀로 간질이고 있는 충영을 향해 애원하자 그가 얼굴을 떼고 그녀에게 물었다.

“넣을까?”

“응. 어서. 더 이상 못 견디겠어.”

“나도 사실은 지금 폭발할 지경이야.”

충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자 수진이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어서. 오빠! 어서.”

수진이 열에 들뜬 목소리로 재촉하자 충영은 자지를 그녀의 보지에 끼우고 입구를 찾았다.

“으으!”

꿀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입구가 쉽게 열리지 않자 충영은 초조하게 신음소릴 내며 작은 구멍을 향해 힘을 주고 쑥 밀었다. 순간, 비좁은 입구가 힘겹게 열리더니 그의 큰 귀두를 간신히 수용했다.

“하악!”

불같이 뜨거운 알맹이를 삼키고 수진이 급박하게 신음소릴 냈다.

“아아. 수진아. 어째 전보다 더 작아진 것 같아. 빡빡해.”

충영이 자지를 왕복하며 조금씩 밀고 들어가자 수진도 숨이 넘어가는 소릴 내며 그의 등을 끌어당겼다.

“하악. 오빠. 옛날보다 더 커진 것 같아. 아아.”

“아파?”

“아니. 좋아. 아아. 좋아서 그래. 으응.”

몇 번 왕복하여 자지를 끝까지 밀어넣은 뒤 충영이 포만감 가득한 소릴 내뱉었다.

“아아. 정말 좋다. 수진이 거기 최고야.”

“정말? 나는 오빠 것이 더 좋은 거 같아. 너무 커서 다른 데 신경을 쓸 수가 없는데... 너무 좋아. 흐응.”

“오랜만에 하는 거잖아?”

“응. 사실 너무 하고 싶을 때도 많았는데 참았어. 오빠하고 이렇게 하고 싶었어. 아아. 오빠. 좋아.”

충영이 원을 그리며 맷돌을 갈 듯 찍어 누르자 수진이 입을 딱 벌렸고 그 벌어진 입을 충영이 단숨에 자신의 입안으로 끌어들여 거침없이 빨았다.

“흐읍!”

수진의 입술을 자신의 입에 가둔 채 충영은 하체만 움직여서 자지를 왕복하기 시작했다.

퍽-퍽-퍽-퍽-퍽-퍽-

처음 시동을 걸 듯 부드럽게 움직이다 입술을 떼고 본격적으로 좆질을 가했다.

퍽퍽퍽퍽퍽퍽퍽-

그의 굵고 단단한 자지가 힘차게 움직이자 수진의 눈빛이 흐려지며 입에서 연신 더운 숨을 내뿜었다.

“하아. 하아. 하아.”

‘......!’

수진의 평소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며 충영은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큰 희열을 느꼈다.

‘누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평소 수진의 얼굴이나 태도를 보면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만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 수가 적고 태도도 분명하다. 근접하기가 쉽지 않은 성격이다. 얼굴은 천사처럼 아름답고 신분과 학벌 역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는 그녀가 지금 평소 총명한 눈에 초점까지 잃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 그뿐인가, 충영의 좆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대체 그 누가 그녀를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충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충영은 지금 희열에 몸을 떨고 있었다.

충영이 자신을 보자 수진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오빠!”

“응?”

“너무 좋아.”

“그러니까 우리 이제부터 자주 하자. 이렇게 좋은 걸 왜 참아?”

수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았어.”

“정말? 이제부터 자주 하는 거다?”

충영이 기뻐 다시 확인하듯 묻자 수진이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럴게.”

“아아. 수진아. 사랑해.”

충영이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 격렬하게 키스하자 수진이 답례라도 하듯 그의 입속에 자신의 혀를 넣고 휘저었다.

“하아. 나도. 나도 오빠 사랑해. 이제 나도 안 참을래.”

“수진아.”

충영이 그녀의 몸을 안고 폭풍처럼 질주했다.

퍽퍽퍽퍽퍽퍽-

“하아아.”

“으으.”

충영은 수진의 몸을 붙들고 정액을 토해낼 때까지 쉬지 않고 좆질을 했다.

퍽퍽퍽퍽퍽퍽퍽-

앞으로 계속 수진과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끓어올라 체위를 바꾸지 않고 사정할 때까지 그대로 폭주했다.

“아아아. 오빠! 난 몰라. 으으으.”

그의 절륜한 정력에 수진이 먼저 백기를 들고 그에게 애원했다.

“어서. 해 봐. 오빠!”

수진이 절정에 이르자 그렇지 않아도 좁디좁은 보지가 한꺼번에 압력을 가하며 충영의 자지를 끊어버릴 듯 강하게 조여 왔다.

“으으으. 간다.”

충영도 짐승 같은 신음소릴 토해내며 절정에 오른 수진의 자궁에 정액을 쏟아 부었다.

“후우.”

사정이 끝나자 충영이 긴 숨을 내 쉬며 수진의 몸을 안았다.

그가 아쉬운 듯 수진의 앙증맞은 젖꼭지 하나를 입에 물고 부드럽게 빨자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둘 다 여한이 없을 만큼 만족했기에 절정의 여운을 즐기는 그들의 손길도 여유롭고 한없이 부드러웠다.

아직 자지를 빼지 않은 채 충영이 수진에게 물었다.

“집에서 하니까 어때?”

“좋아. 밖에서 하는 것보다 마음이 더 편해.”

“그래? 난 들킬 염려 때문에 수진이가 더 불안해 할 줄 알았는데...”

“그 점은 있지만 우리 방에서 하는 거라 그런지, 더 기분이 아늑하고 편안해.”

“다행이다. 나도 좋았어. 왠지 수진이 너랑 신혼기분 내는 것 같고 아주 만족이야. 그럼 앞으로도 집에서 하는 거지?”

“응, 그 대신 조심해야 해.”

“당연하지. 날마다 해달라고 보채지 않을 거니까 안심 해.”

충영이 입술에 키스하자 수진이 그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빠!”

“응?”

“갈수록 오빠가 더 좋아져.”

“어쩌지? 난 안 그런데.”

수진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충영은 웃으며 말했다.

“난 옛날부터 항상 수진이 널 최고로 사랑했으니까 지금도 옛날하고 똑같아. 미안하지만 옛날보다 지금 더 널 사랑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

“뭐야? 그래도 옛날보다 날 더 사랑해 줘.”

수진이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충영이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알았어. 옛날보다 지금 널 더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랑할게.”

“응. 나도 그럴 거야.”

수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데 그 얼굴을 충영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이렇게 예쁜 녀석이 내 여자라니...’

충영은 수진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잠깐이지만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동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아버님.”

“그래. 나다. 너 이리 좀 나와야겠다. 지금 시간 있지?”

“예. 나가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지금 부부 동반 파티가 있는데 마침 박성준 대표도 부인과 같이 나왔다.”

“예.”

“내가 말 좀 걸어봤더니 그 양반 태도가 아무래도 나하고는 말을 섞기 싫어하는 눈치다. 얼른 좀 나와라.”

“예. 지금 가겠습니다.”

충영은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동민이 말한 곳으로 나갔다.

파티장에서 충영은 화영을 먼저 발견했다.

‘......!’

그곳에 모인 여자들은 거의 다 나이가 든 여자들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화영의 미모는 눈부실 정도로 돋보였다.

“장모님!”

그가 가까이 가서 그녀를 툭 건들며 말했다.

“어머!”

화영이 그를 보고 놀라더니 이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몸을 안았다.

“여기 어쩐 일이야?”

곧 키스라도 할 것처럼 화영이 반갑게 굴자 충영은 낮에 수진과 질펀한 섹스를 했는데도 다시 자지가 발기하며 성욕이 끓어올랐다.

“예. 아버님이 불러서 왔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영이 그의 귀에 입술을 댔다.

“이런 데서 자기 보니까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어. 하고 싶어.”

“통했나보다. 나도 지금 안에서 그게 자꾸 커지고 있어 주체를 못하겠어.”

“이잉. 어쩌지?”

화영이 충영의 아랫도리를 보다 실제로 그곳이 점점 볼록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앓는 소릴 낸다.

“아우. 미치겠네. 내가 왜 이러지?”

“그런데 장모님은 진짜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요. 여기서 보니까 삼십 대로 보여. 누가 이제 나이 50이라고 믿겠어요?”

“호호. 여기서 사람들한테 그런 말을 계속 듣긴 들었어.”

화영이 눈을 반으로 접으며 기분 좋은 웃음을 웃는데 그들의 곁으로 동민이 다가왔다.

“충영이 왔구나.”

동민을 보자 충영은 화영에게 했던 표정을 싹 지우고 그에게 말했다.

“예.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 가요?”

“글쎄다. 아까 만나고 헤어졌으니까 모르지. 같이 찾아보자.”

“예. 어머님도 같이 가시죠.”

충영의 말에 화영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래. 집에서 말고 이런 데서 보니까 진짜 반갑네. 어디, 우리 사위하고 같이 다녀볼까?”

충영은 성준을 찾으러 다니면서 동민과 화영이 소개시켜주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특히 화영은 충영을 소개시키면서 시종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그녀의 얼굴엔 충영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님. 박 대표 저기 있네요.”

충영이 성준을 먼저 발견하고 동민을 불렀다.

“그래. 가자.”

동민도 성준을 보고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

“하하. 대표님.”

동민이 성준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돌려 동민을 보더니 이내 충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음. 정 사장!”

성준이 자신을 부르자 충영은 곧바로 다가가 그에게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잘 있었나?”

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하는데 충영은 그의 태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그 속에 내재된 강한 카리스마를 느끼고 속으로 감탄했다.

‘이거. 저번에 집에서 봤을 때와는 천지차이구나.’

그때 집에서는 좀 약해보이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가족사랑으로 인해 그렇게 느낀 것일 뿐,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고 보니 그의 인상이나 태도에는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충영은 그 곁에 있는 성준의 부인에게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정 사장도 잘 지냈죠?”

“네.”

동민이 성준에게 인사와 함께 뭐라 말을 걸자 성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대답을 했다. 하지만 일반 정치인이 기업가에게 하듯 평범한 얘기들을 나눌 뿐 성준은 동민에게 절대로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성준이 충영에게 말했다.

“정 사장! 나하고 둘이서 얘기 좀 할까?”

“아, 예.”

성준이 충영을 특별하게 따로 부르자 동민이 눈에 이채를 띄고 두 사람을 보았다.

“정 사장.”

“예, 아버님.”

둘만 있는 자리에서 충영이 더 친근한 어조로 부르자 성준이 웃으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집에 한 번 들르지? 정희가 많이 보고 싶어 하던데...”

“예. 아기 때문에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만 어쩐지 제 맘대로 드나들기가 좀 어색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그래. 그 맘 잘 알고 이해하네. 그리고 김동민 회장에게는 말을 해 놨네. 앞으로 나하고 뭔가 일을 진행하려면 정 사장을 통해서만 하겠다고 말이야.”

“아. 예. 감사합니다. 아버님.”

“김 회장도 확실하게 느낄 정도로 말해 놨으니까 그 양반도 정 사장을 전보다 더 중히 여길 걸세. 그렇게 알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김 회장한테 더 요구해서 해 보게. 기회란 왔을 때 움켜잡아야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충영이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아직 그럴 생각은 없었다. 동민이 아직도 한창 일할 나이에다 자신은 30이 채 못 된 피라미다. 거기에다 동민은 자신이 사랑하는 수진의 친 아빠이기 때문에 그의 기분을 거스르면서까지 더 욕심을 부릴 생각은 아직 없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자. 들어가지. 같이 너무 오래 있으면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내릴 수 있으니까.”

“예.”

충영은 일부러 성준의 곁에 딱 붙어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동민이 충영에게 물었다.

“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더냐?”

“예.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다만 사람들 이목이 무서우니까 앞으로 대성과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저하고만 대화를 하시겠다고 그러셨습니다. 한 다리라도 더 걸쳐지면 나중에 사고 날 때 감당하기 힘들다고요.”

“그래. 아무튼 대단하다. 충영이 네가 그 분한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걸 오늘 뼈저리게 느꼈으니, 앞으로 우리 대성에서 정치 쪽으로 로비할 일이 있으면 네가 좀 맡아줘야겠다.”

그때 화영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여보. 정 서방의 나이가 아직 어린데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 거 아닌가요? 백화점 일만 해도 버거울 텐데.”

“하하. 걱정 말아. 내가 알아서 조절 할 테니까. 아무튼 우리 충영이한테 일을 맡기면 기대 이상으로 해내니까 내가 갈수록 믿음이 간다니까? 그리고 참. 충영아.”

“예.”

“명기 말이야. 너도 그 녀석이 여자 만나고 있었던 거 알고 있었냐?”

“예.”

충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영이 물었다.

“명기가 여지를 만나요?”

“응. 가볍게 만나고 있다는 데 그 녀석 안색을 보니까 그런 것 같지가 않더라고. 내가 사람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아는 사람인데 명기 같은 풋내기를 보고 짐작을 못하겠어? 충영이 너 속일 생각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 해 봐. 명기가 지금 만나는 여자하고 가벼운 사이는 아닌 거지?”

“으음.”

충영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동민이 이미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 해 봐, 이거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속이지 말고 그대로 말해야 한다?”

동민의 강한 어투에 충영이 어쩔 수 없이 수빈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으음.”

충영의 수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동민이 생각에 빠졌다.

“여보. 명기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는 거예요?”

화영의 말에 동민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건 절대로 안 돼. 지금 우리 회사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빠졌는지 당신은 몰라서 하는 말이오. 그 건설회사를 인수합병하려면 이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자금이 엄청나게 들어가게 생겼는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리고 저번에 명기 얼굴을 보니까 그 녀석도 그 사귀는 여자한테 그다지 큰 미련은 없어 보이던데, 오늘도 선을 세 번이나 보게 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니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명기도 내 뜻대로 따라 올 거요.”

“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명기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면서까지 추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있어요.”

“예.”

화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충영은 동민과 화영이 안방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서 명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충영아.”

“지금 어디냐?”

“방금 집에 도착했다.”

“그래? 지금 나 거실에 있는데 얘기 좀 할까 해서...”

“잘 됐네. 나도 너랑 할 얘기가 있는데. 거실에서 기다려라.”

“응.”

명기가 들어오자 충영은 그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술 한 잔 할까?”

명기가 충영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마실까?”

“와인이나 한 잔 하자.”

“가져올게. 옷 갈아입고 있어라.”

충영이 나가서 와인을 가져와 명기와 한 잔 씩 마셨다.

“오늘 선을 세 곳이나 봤다며?”

충영이 웃으며 묻자 명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맘에 드는 아가씨라도 있었나 봐. 얼굴 표정이 밝은데?”

“어. 나중에 얘기할게. 우선 네 말부터 듣자. 내게 할 말이 있다며? 그게 뭐야?”

“오늘 아버님하고 나갔다 들어오는데 차 안에서 명기 너 여자친구에 대해서 묻더라. 수빈이 말이야.”

“그래서?”

명기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응하자 충영은 약간 놀랐지만 계속 말했다.

“아버님은 대충 눈치로 다 알고 계시더라. 명기 네가 여자친구랑 가볍게 만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하긴...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그래서?”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라고 물으시는데 도저히 그 분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네가 수빈이하고 전부터 꽤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 날 보자고 했구나?”

“응. 네가 전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래서 비밀 지키고 있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심각해서 도저히 아버님을 속일 수가 없더라고.”

“그래. 잘 했다.”

명기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하자 충영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차피 수빈이하고는 결혼까지 갈 상황이 아니니까 아버지가 아신다고 해도 별 문제는 안 돼. 오히려 그렇게 친하게 지낸 여잔데 아버지와 회사를 위해 내 뜻을 꺾어야한다고 어필할 수 있으니 나에겐 더 점수 딸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충영이 놀라 명기에게 물었다.

“수빈이하고 헤어질 생각이야? 마음 굳혔구나?”

“아버지하고 둘이서 얘기 좀 나눴는데 우리 회사 상황이 꽤 심각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회사를 잃으면 그 동안 들어갔던 돈들이 다 허공에 날려가고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는데 내가 사랑을 원한다고 수빈이와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해 봐. 난 아버지한테 완전히 신임을 잃고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질 거야. 충영아.”

“응?”

“난 솔직히 너와 영진이 누난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 같은 거 생각도 안 해 봤어. 오직 수진이만이 내 경쟁상대라고 생각했지. 아빠가 수진이를 엄청 예뻐하는 데다 걔 머리가 보통 뛰어난 게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데 이젠 내 생각이 달라졌다.”

“어떻게.”

“너하고 영진이 누나도, 특히 충영이 너 말이야. 너도 확실한 내 경쟁자야.”

“아이고. 이거 큰 일 났네.”

충영이 엄살을 피우자 명기가 그를 보며 웃었다.

“뭐. 그래도 아직은 내가 가진 카드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번 결혼 같은 거 말이야.”

“그래. 아무래도 명기 네가 그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면 아버님이 많이 좋아하시겠다.”

“당연한 얘기지. 후계자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모르지만 대성의 오너가 될 욕심이 있다면 사실 아버지 말씀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수빈이가 상처 많이 받겠네.”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수빈이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하지만 오늘 선을 보고 완전히 마음을 굳혀버렸다.”

“......?”

충영은 명기의 얼굴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오늘 선 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구나?”

“응. 마지막 세 번째 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충영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명기의 얼굴을 보고 그의 마음이 확실하게 정해져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엄청 미인이었나 보네? 수빈이보다 더 예뻐?”

“너도 나중에 볼 기회가 있겠지. 나,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여자는 정말 처음 봤다. 외모로만 보면 완전 최고야.”

명기가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말하자 충영은 문득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부모가 뭐하는 집안인데?”

“우리처럼 기업가는 아니야. 아버지가 제2금융권의 큰손으로 유명한 분인데 부동산 재벌에다 현재 한국에서 현금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소문나 있지. 너도 이름 들으면 알만한 분이야.”

“누구?”

“홍기준.”

“아. 들어봤지. 그런데 그 양반은 소문이 좀...”

“그래. 나도 알아. 들리는 평이 썩 좋은 분은 아닌데 그 딸은 막상 보니까 꽤 괜찮더라.”

“몇 살인데?”

“스물 넷. 엊그제 대학 졸업했고 나하고 첫 선을 본 거라고 그러더라. 그 동안 남자는 만나 본 적도 없고 손목 한 번 잡아 본 적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데 도저히 안 믿기는 거야. 그렇게 예쁜 여자가 남자하고 사귄 적이 없다니...”

충영이 웃으며 말했다.

“여자가 너무 예쁘면 오히려 남자가 안 꼬여. 서로 눈치만 보든지 남자가 있으려니 지레 짐작하고 대시도 못해보는 경우가 많거든.”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엄청난 미인이야. 지금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송희 탤런트도 그 여자에 비하면 추녀라고 생각될 정도니까.”

“설마.”

충영이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명기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한 번 직접 보면 알 거야.”

“그럼 수빈이는 어쩌냐? 저번에 우리 백화점 왔을 때 말 하는 거 들으니까, 부모 반대는 알고도 있고 각오하고도 있지만 명기 네가 워낙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으니까 둘이서 잘 해 볼 거라고 그러던데.”

갑자기 명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도 수빈이 생각만 하면 미치겠다. 그래도 처음 사귀던 여친이고 그땐 진짜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거든. 마음도 잘 맞고 사업 파트너로도 손색없는 데다 무엇보다 걔가 나를 많이 사랑해 주는데 조건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 게 느껴지는 녀석이야.”

“진짜 괴롭겠다. 나도 옛날 경진이한테 딴 여자와 결혼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죽을 맛이더라고. 그때 경진이한테 말하고 괴로워서 소주 6병을 마셨다.”

“후우. 너도 그랬구나. 어쩌지? 수빈이 걔는 나만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거기다 너는 나보다 더 오래 만났고 지금은 같이 일까지 하고 있잖아? 진짜 말하기 어렵겠다.” 

“어쩌지?”

명기의 근심이 깊어지자 충영이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명기가 혹시라도 좋은 대책을 들을까, 하여 솔깃한 표정으로 충영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끌면 더 힘들어지니까 말은 해야 해. 회사 형편이 이렇게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수빈이도 계속 만나자고 하는 거야.”

“계속 만나다니?”

“뭐, 말하자면 두 집 살림을 하는 거지. 결혼은 오늘 선 본 여자랑 하고 수빈이는 애인으로 계속 두면 되잖아? 솔직히 명기 네가 워낙 착실해서 그렇지, 네 위치 정도 되면 결혼하고 애인 하나 정도 두는 것도 못할 거는 없지 않냐?”

“으음.”

명기가 그런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놀란 표정으로 충영의 얼굴을 보았다.

“수빈이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걔가 겉으로는 유순해 보여도 자존심이 굉장하거든.”

“명기 널 사랑한다며? 사랑은 자존심도 뛰어넘는 법이야. 명기 네 형편이 보통 집안과 다른데 어쩌냐? 둘 사이를 유지하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냐? 생각 해 봐.”

“아아. 그러면 나야 좋긴 하지만 힘들어. 여러가지로 쉽지 않아.”

“뭐가 어려운데? 말 해 봐.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울게.”

“우선 수빈이한테 그런 말하는 게 가장 어렵다. 걔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도덕군자요, 착한 남자로 알고 그 점을 좋아하는데 만약 애인으로 남아달라는 말을 듣는다면 나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바뀔 거야. 그리고 결혼할 여자한테도 너무 미안한 노릇이고.”

“그래도 내가 생각해기엔 그 방법이 제일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명기야. 나는 지금 네 마음이 제일 궁금하다. 수빈이한테서는 정이 다 떠난 거냐? 오늘 만난 여자 외에는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충영이 묻자 명기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겠어.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이 무척 괴로웠거든. 아버지 말씀을 따라야 할 것은 기정사실로 굳혀져 가고, 수빈이한테 너무 미안하고 그런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사실 어떻게 하면 수빈이가 상처를 덜 받고 물러나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든다.”

“음. 수빈이하고는 거의 끝났다고 봐야겠네.”

“아쉽기는 한데, 그렇게 된 것 같아.”

“그럼 수빈이한테 말 잘 해라. 내 경험으로는 마음 정했으면 되도록 빨리, 그리고 변명 같은 거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비는 게 가장 좋을 거야. 그렇게 하고 잘 안 되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울게.”

명기가 충영을 보며 밝게 웃었다.

“그래. 고맙다. 넌 진정한 내 친구야. 이제 충영이 네 위치가 높아져서 어떻게 보면 날 경쟁자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런 거 생각하지 않고 날 돕겠다는 게 느껴지니까 참 마음이 뿌듯하다.”

“하하. 경쟁하더라도 선의의 경쟁을 하고 우리 대성그룹이 잘 되는 쪽으로 해야지. 어차피 명기 네가 후계자가 돼도 나머지 식구들을 그냥 내버려두겠어? 가족이니까 당연히 챙길 몫은 챙겨주겠지. 그것만 해도 일반인이 보기엔 엄청날 것이고 또 우리 대성이 성장해야 그 몫도 서로 커지겠지. 그리고 그런 계산적인 것을 떠나서도 너하고 내가 어떻게 자랐는데 의리를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겠냐? 나 그런 놈 아니라는 거 네가 잘 알잖아?”

“하하. 잘 알지. 아무튼 이번에 나 혼자 안 되면 네 힘도 좀 빌리자. 수빈이가 옛날과 달리 요즘은 너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으니까 너도 좀 도우면 한결 나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라.”

그 뒤로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충영은 명기의 방을 나왔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충영은 명기를 만나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상견례를 한다고?”

충영이 놀라 명기의 얼굴을 보았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부모님들도 다들 동의한 거야?”

“응.”

명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당사자는 조금 천천히 해도 상관없는데 양 쪽 부모님들이 더 적극적이시라 앞으로 사흘 후에 양가 상견례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와우. 진짜 빠르네.”

충영이 놀라 고개를 흔들다 물었다.

“수빈이는? 말했어?”

“응. 너하고 말하고 나서 바로 그 다음 날 얘기했어.”

“그래? 충격이 컸겠다. 수빈이는 뭐래?”

명기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놀라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나가버리더라.”

“회사는. 혹시 사표를 쓰지 않았어?”

“아니. 똑같이 출근하고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래서 더 불안하다. 대체 수빈이가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나한테 욕이라도 하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래. 차라리 뺨이라도 맞으면 낫겠다, 싶지. 그런데 계속 출근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수빈이가 아직도 명기 널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닐까?”

“후우. 이미 여기는 상황이 다 끝났는데, 마음이 답답하다.”

“내가 한 번 만나볼까?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만약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좋은 말로 잘 달래서 단념하도록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계속 이대로 두다가 나중에 너 결혼할 때 무슨 일이라도 벌이면 양쪽 집안에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면 아버님이 많이 노하실 거야.”

“그러게.”

“일단 상견례부터 하고 보자. 상견례까지 하면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는 거니까 수빈일 설득하기도 더 쉽지 않겠냐?”

“그래. 수빈이는 너한테 좀 부탁할게. 내가 이런 쪽으로는 한 번도 경험이 없어서 무척 마음이 괴롭고 난감하다. 충영이 네가 수빈일 만나게 되면 상처 받지 않고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말 좀 잘해다오.”

“알았어. 전보다는 수빈이하고 친해졌으니까 내가 잘 타일러볼게.”

사흘 후 상견례가 예정대로 거행됐다.

장소는 강남에 있는 대성호텔 그랜드룸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형식으로 행해졌는데 그곳에서 명기와 결혼할 여자를 본 충영은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정말 미인이군.’

키가 165는 넘어 보이는데 날씬한 몸매와 더불어 여자의 얼굴이 가히 살인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흐음. 명기가 그런 말을 할 만하구나.’

객관적인 평을 하자면 솔직하게 수진이나 수빈이보다 예쁜 것은 사실이었다. 

갸름한 얼굴형은 물론이고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야말로 충영이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뭐 저렇게 생긴 여자가 다 있냐? 명기 녀석. 벌어진 입 좀 봐.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질 않네.”

영진이 명기와 여자를 보고 중얼거리다 충영에게 물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래요?”

“24살. 이번에 대학 졸업했다네.”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하여간 정말 예쁘게 생겼네.”

“마네킹 같지 않아? 예쁘다는 데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난다. 난 저런 스타일은 그다지 안 댕기는데...”

“후후. 우리 남편이 의외로 눈이 높구나. 자기 말 들으니까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난 성격이 역시 더러운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여자의 자연스러운 질투심이겠지.”

“호호. 아무튼 명기 녀석 신나하는 모습 보니까 괜히 샘이 나네.”

“그러지 마. 될 수 있으면 예쁜 마음을 가져야 아기도 빨리 갖지.”

“알았습니다. 서방님. 이번에 왠지 느낌이 좋다고 의사가 그랬거든요? 나도 감이 좋아서 어쩌면 또 임신할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래? 기대가 된다.”

둘이서 얘기를 주고받는데 가족들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충영은 여자의 아버지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자 그를 주목했다.

“홍기준입니다. 제 딸이 무남독녀라서 애지중지 키운 데다 남자하고 사귄 적도 없어 너무 세상물정을 모릅니다. 부족한 점이 있어도 잘 봐주시고 가르쳐주십시오.”

‘홍기준... 예사 인물이 아니야.’

충영은 그의 날카롭게 생긴 얼굴을 보며 며칠 전 정희의 집에서 만난 박성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성준이 동민과 사돈을 맺는다는 홍기준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세간의 평가처럼 성준도 홍기준에 대해 그다지 좋은 평을 하지 않았다. 홍기준이 부를 쌓아온 방식이 정상적이지 못한 데다 폭력조직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한국의 마피아란 말까지 듣고 있다고 했다.

충영의 시선이 홍기준의 옆에 있는 동생 홍기성에게 돌려졌다.

‘저 자가 폭력계의 대부라는 바로 그 홍기성인가?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는데...’

충영은 홍기준의 뒤를 이어 동생 홍기성, 그리고 기준의 딸이자 명기의 아내가 될 홍성연, 그리고 성연의 어머니까지 차례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머리 속에 담아두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성연의 옆으로 가 한 남자에게 고정이 되었다.

‘......!’

키가 180이 조금 넘을까, 키는 충영보다 작았지만 체격은 충영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게 생긴 남자로 한 눈에 보기에도 운동선수처럼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소개할 때 홍기준이 말했다.

“성연이 외삼촌입니다. 제 처남인데 지금 나이는 사십 다 돼 가지만 지금도 운동이라면 뭐든 만능이고 특히 격투기에 소질이 있어서 우리 성연이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디가드해 오고 있습니다. 이런 말하기엔 뭐하지만 일대일로 승부를 겨룬 적이 수없이 많았는데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을 만큼 격투에 능한 친구죠.”

홍기준이 자랑스럽게 얘기하자 동민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섰다.

“하하. 이것 참 공교롭군요. 우리 가족 중에도 운동 천재에다 격투기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는 남자가 있는데 말입니다.”

동민의 말에 홍기준의 식구들 모두 그의 얼굴을 보며 관심을 드러냈다. 특히 기준의 동생 홍기성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며 동민에게 물었다.

“누구신지 무척 궁금하군요. 우리 식구들이 모두 운동 쪽에 관심이 많아서 운동 잘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동민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마침 그쪽은 소개가 모두 끝난 것 같으니까 우리 식구들도 소개 하면서 말씀 드리죠.”

동민이 가족들을 소개하자 홍기준과 그의 동생 기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화영을 비롯하여 수진까지 가족들 누구도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없이 다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충영을 아껴둔 동민은 마지막으로 그를 소개시켰다.

“내 큰 사위 정충영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운동 천재가 바로 이 친구죠.”

“아!”

홍기준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충영. 들어 봤습니다. 지금 재계에서 젊은 인재로 급성장하고 있는 친구라는 말은 들었는데 운동까지 잘합니까? 하하. 이거, 체격이 훌륭하네.”

“그렇죠? 충영이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고 명기나 수진이를 보디가드 했었습니다. 성연이 외삼촌하고 정말 흡사한 부분이 많군요.”

그때 기준의 동생 기성이 또 나섰다.

“말이 나온 김에 저 두 사람 뭐 겨뤄보는 방법이 없을 까요. 간단하게라도 실력을 보고 싶은데.”

“하하. 아우야. 네 급한 성질은 나이가 들어도 안 고쳐지는구나. 하긴, 나도 좀 궁금하긴 한데, 사돈어른. 어떻게 양가 화의를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두 사람 실력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동민도 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저도 좋습니다. 우리 충영이가 항상 이기기만 해 와서 지는 모습도 한 번 보고 싶거든요.”

동민이 은근히 자랑하자 기준도 이젠 물러설 수 없는 표정으로 성연의 외삼촌, 김동수에게 물었다.

“처남! 괜찮겠지?”

“예. 회장님이 원하시면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충영이 기준을 대하는 동수를 보니 말로만 처남이지 실제로 하는 행동은 꼭 조직 보스에게 충성하는 조폭 부하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 성연이 입을 열었다.

“아빠! 격투기를 하면 아무래도 다칠 수 있으니까 여기서 간단하게 팔씨름을 한 번 하는 게 어때요?”

기준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오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누가 이기든 다칠 염려도 없고...”

영진이 조금 까칠한 표정으로 나섰다.

“우리 남편이 조금 불리한 거 아닌가요? 키는 남편이 훨씬 크지만 체격이 차이가 나는데. 저쪽은 팔 힘쓰는 운동만 한 것 같아요.”

충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수진의 얼굴을 찾았다. 

‘......!’

수진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해보라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이쪽을 향해 도전해오는 상대를 그냥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충영은 사랑하는 여자가 해보라는 표정을 짓자 두 번 생각해 보지 않고 영진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당신은 가만있어요.”

“으응.”

충영의 말 한 마디에 영진이 끽소리도 하지 않고 순종하자 동민이 충영에게 물었다.

“어때? 네 전공은 아니다만 한 번 해볼래?”

“예. 팔씨름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힘겨루기죠. 저는 뭐든 괜찮습니다.”

충영이 자신 있게 나서자 기준도 동수에게 말했다.

“한 번 해 봐라.”

상견례 장이 졸지에 팔씨름 장으로 변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훨씬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원탁을 준비해 서로 마주 보는 자세로 두 사람이 서자 기성이 나섰다.

“제가 심판을 보겠습니다.”

충영은 기성이 나설 자리가 아닌 데도 자꾸 설치고 나서자 그가 조폭두목이란 소문이 거의 사실이라는 감이 왔다. 아마도 그가 우두머리고 지금 앞에 서 있는 동수가 행동대장 정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내심 불안해졌다.

‘이거, 장인어른이 사돈을 잘못 택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리 지금 대성이 현금에 대한 압박이 심하기로 이런 위험한 집안과 연결이 된다는 게 어딘지 마땅치 않게 생각이 든 것이다.

‘질 수 없다.’

충영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속으로 다짐했다.

초면에 상대의 기를 꺾어 여기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서 있을 때는 충영의 키가 커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게 보였는데 탁자를 두고 마주 엎드리자 동수의 커다란 체격이 더욱 위압감을 주며 마치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이 먹이를 앞에 두고 웅크리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이 오른 팔을 탁자 위에 내밀자 충영 쪽의 사람들도 불안감이 많이 가셨다. 체격은 동수가 훨씬 컸지만 두 사람의 팔뚝 크기는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야! 정 사장. 팔뚝 좋다. 힘이 펄펄 넘쳐 보여. 다시 봤는데...”

기성이 감탄을 하며 두 사람의 팔을 끌어다가 서로 마주잡게 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는데 기준이 동민에게 소리쳤다.

“잠깐만요. 사돈어른.”

“예. 말씀하시지요.”

“상견례에서 이런 팔씨름 하는 장면은 인생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 크게 내기 한 번 하죠.”

동민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좋습니다. 사돈은 뭘 걸 건가요?”

“저희 쪽이 지면 이번 인수합병 하시는데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전부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동민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액수도 다 알고 계실 텐데...”

“하하. 저는 자식이라곤 우리 성연이 하나뿐입니다. 뭐, 이번 내기가 아니라도 그 정도는 해드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동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으로 기준의 얼굴을 보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이번 인수하게 될 회사를 나중에 명기와 성연이 사이에서 난 자식에게 물려주죠. 그럼 공평하겠습니까?”

기준이 통쾌하게 웃는다.

“하하하. 역시... 회장님의 배포가 하늘을 찌르십니다. 좋습니다. 내기는 성립됐으니까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기성아. 시작해라.”

“예.”

기성이 힘찬 음성으로 대답하며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을 감싸 쥐었다.

“준비!”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가문의 체면에다 큰 내기까지 걸려 있어 장내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시작!”

기성이 크게 소리치며 손을 떼자 충영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강력한 힘을 느끼고 순간 당황했다. 상대가 초장에 끝내버릴 기세로 엄청난 힘을 가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충영은 그 힘에 대항해 오른 손목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아아!”

충영의 손이 옆으로 넘어질 듯, 하다 다시 똑바로 원위치하자 성연 측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운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단번에 끝낼 수 있었는데...”

충영과 동수의 손이 가운데서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두 사람의 팔뚝을 보며 더할 수 없이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굵은 지렁이 수십 마리를 붙여놓은 것처럼 두 사람의 팔에는 힘줄과 근육들이 불뚝거리는데 한 눈에 봐도 그들이 막대한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두 사람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5분이 넘어가자 두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에 땀이 흐르는지 옷이 몸에 딱 달라붙어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때 동수의 입에서 장내가 떠나갈 정도로 엄청난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타아앗!”

마지막 일격이라도 가하듯 동수가 기합을 내며 힘을 쓰자 다시 충영의 손이 점점 옆으로 기울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성연의 가족들이 애타게 부르짖는 가운에 이번엔 충영의 입에서 낮고 굵은 기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이잇!”

그러자 기울어지던 그의 손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고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엔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야. 역전이다.”

“잘한다.”

충영의 식구들이 활기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끝내버려.”

“조금만 더...”

그때 동수가 다시 한 번 기합을 질렀다.

“야압!”

기울어가는 손을 원위치 시키려고 그가 발버둥을 치는데 그의 정수리에서 허연 김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나 많은 힘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고 그의 노력 덕분에 그의 손이 점점 올라왔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오면 원위치가 될 그 순간에 충영의 입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야앗!”

마치 야수가 울부짖듯 원초적이고도 강한 수컷의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며 충영이 마지막 힘을 쏟아냈다.

그러자 원위치 하려던 동수의 손이 다시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으으!”

동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막아내자 충영도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며 그를 막바지로 몰아갔다. 여기서 그가 회생하면 충영도 더 이상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기 때문에 뒤를 돌아볼 여지없이 그를 찍어 눌렀다.

동수의 손이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까지 내려가자 영진이 소리쳤다.

“이제 끝났잖아요. 시합 중지 시켜요.”

하지만 기성은 미련이 남았는지 중지를 시키지 않았고 그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 듯 동수가 다시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이익!”

지지 않으려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동수가 힘을 쓰는데 발악하듯 느껴지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지만 그 처절한 투혼에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두 사람의 마지막 승부를 지켜보았다.

동수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자 그쪽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거의 다 진 시합이 다시 역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익!”

충영의 이마에서도 허연 김이 올라오며 그의 목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툭툭, 붉어지는데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놀람과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충영이 지금 얼마나 가공할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는지 사람들은 충분히 느끼고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위로 올라오던 동수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뚝 꺾여 바닥에 떨어졌다.

탁-

잠시 침묵이 흐르다 이내 충영 쪽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야아.”

“이겼다.”

기성이 손을 들어주자 충영은 사람들에게 답례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요즘 운동이 부족했다 싶었는데 이토록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되다니...’

충영이 쓴 웃음을 지으며 동수에게 다가갔다.

그가 팔을 벌리자 동수가 충영의 몸을 안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손을 통해 힘을 겨루다보니 상대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이 들어 두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허깅을 했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은 두 남자가 상대를 안고 서로를 격려해 주자 최선을 다해 싸운 그들에게 사람들은 아낌없는 칭찬의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하하. 충영이는 명목으로는 사위지만 실제로는 제 아들이나 한가집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이토록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네요. 정말 그쪽 선수 대단하군요.”

동민이 칭찬하자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충영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최곱니다. 우리 동수 실력을 내가 아는데, 정말 산 위에 또 산이 있다는 말처럼 정충영 씨,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하하.”

자리가 정돈되고 식사를 하면서 기준이 동민에게 말했다.

“내기는 내기니까 약속은 분명하게 지키겠습니다.”

동민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오늘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시합이었습니다. 사돈께서 이처럼 호탕하시니 저도 나중에 분명하게 약속하겠습니다. 이번 인수할 건설회사는 앞으로 명기한테 맡겨서 잘 키우도록 하고 나중에 성연이가 명기 자식 낳게 되면 그 놈에게 회사는 물려주도록 하지요.”

“오오. 역시... 사돈어른. 대단하십니다. 이거 하루라도 빨리 결혼시키고 싶은 데요. 어떻게 내일이라도 식을 올릴 수 없을 까요?”

“하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애들도 다행히 서로 마음이 있는 것 같으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날을 잡도록 하죠.”

“좋습니다. 뭐든 사돈께 다 맡길 테니까 그저 우리 딸자식 놈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서로 돕고 서로 성장해 나가야죠. 저희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돈만 많이 가지고 있을 뿐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도 그 방법을 잘 모르거든요. 경험 많으신 사돈께서 뭐든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두 집안 어른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자 밑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친해지며 격의 없이 어울렸다. 물론 그런 분위기를 이끈 것은 충영과 동수의 팔씨름 덕분이었다.

충영은 수진의 모습을 찾아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진아!”

충영이 가까이 다가가 부르자 그녀가 그의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오빠! 오늘 너무 멋있었어. 정말 남자답고 마지막엔 가슴까지 막 두근거렸어. 최고야.”

수진의 입에서 극찬이 쏟아지자 충영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정말? 후후. 수진이한테 이런 칭찬을 받을 줄이야... 이거 오늘 기분 최곤데?

“호호.”

충영이 수진의 웃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곁에서 말을 걸었다.

“정충영 씨.”

충영이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바로 옆에서 성연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충영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성연이 그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이. 이제 한 집안 식구가 될 텐데 너무 어색하게 대하신다. 전 이 삼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여기고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삼촌보다 더 힘이 센 남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정말 아까 멋있었어요.”

충영은 성연의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는 동수에게 눈인사를 한 뒤 그녀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젊어서 지구력이 조금 앞섰을 뿐이죠. 운이 좋았습니다.”

충영이 겸손의 말을 하자 성연이 동수에게 물었다.

“삼촌도 그렇게 생각해?”

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승부는 확실하게 내가 진 거야. 충영 씨 같은 남자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다.”

동수가 웃으며 말하자 성연이 충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 봐요. 삼촌이 확실하게 패배를 시인하잖아요?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두 사람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네요? 형부가 처제를 많이 사랑해 주시나 봐요? 처제도 형부를 잘 따르고.”

성연이 수진과 충영을 번갈아가며 묘한 눈초리로 보자 충영은 조금 당황했다.

‘이 여자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눈치도 엄청 빠른 것 같은데...’

충영이 변명하듯 황급히 말했다.

“성연 씨를 삼촌이 어렸을 때부터 보호해 준 것처럼 저도 여기 수진이를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보호하며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래서 수진이도 저를 명기하고 똑같이 오빠로 대해주고 친하게 지내고 있죠.”

“아아! 그렇군요. 어쩐지...”

성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 두 사람을 주시하자 수진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더니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둘만 남게 되자 성연이 충영에게 말을 걸었다.

“명기 씨 집안 분들은 다 인물이 좋으세요. 하나 같이 잘 생기시고... 그 중에서도 충영 씨가 가장 멋지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충영은 진짜 당황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명기의 아내가 될 여자가, 더구나 상견례 자리에서 다른 남자가 제일 멋있다고 서슴없이 말을 내뱉는 그녀의 정신상태를 충영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아. 고맙습니다. 인물이야 우리 명기가 단연 최고죠. 저는 살면서 우리 명기처럼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성연 씨도 너무 아름다우시고... 정말 두 분 보면 너무 잘 어울려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충영의 말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물론 명기 씨가 얼굴은 아주 잘 생겼죠. 그런데 나는 얼굴이 잘 생긴 남자보다 강한 남자를 더 좋아해요. 우리 집안이 원래 강한 사람들을 선호하는 집안이고 그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계속 성연이 듣기 곤란한 말을 하자 충영은 누가 들을 까 염려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성연 씨가 예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 우리 장모님하고 얘기 나누시는 성연 씨 어머님을 보세요. 너무 젊고 미인이시네요.”

충영이 눈으로 가리키는 곳을 성연은 보았다.

‘......!’

그곳엔 성연의 어머니, 김미자가 화영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충영이 보기에 그녀의 외모가 꼭 성연을 닮았다. 그리고 나이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60이 훨씬 넘어 보이는 홍기준과 비교하면 거의 30살은 차이가 나 보였다.

마치 아버지와 딸처럼 심하게 나이 차가 나는 미자의 얼굴을 보며 충영이 말했다.

“어머님이 너무 젊고 아름다우세요.”

그러자 성연이 그의 곁에 더욱 바짝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그 사연을 말씀드릴까요? 뭐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데...”

“아, 아닙니다. 말씀하기 곤란한 일이라면 안 하셔도...”

“아니에요. 충영 씨한테는 말씀 드릴게요. 우리 엄마가 사실 아빠의 세 번째 부인이에요. 아빠가 두 번 결혼한 부인들이 모두 아기를 갖지 못해 이혼하고 우리 엄마가 저를 낳아서 아빠와 결혼한 거죠. 어때요 별 이상한 얘기 아니죠?”

“예. 물론입니다.”

충영은 자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건네는 성연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그를 구제해주기라도 하듯 명기가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구제해주는 것은 좋은데 그의 안색이 굉장히 심각했다.

“충영아.”

“응.”

“잠깐 나 좀 보자.”

“응. 왜?”

“잠시만...”

명기가 충영의 손을 잡고 성연에게 양해를 구한 뒤 둘이서만 밖으로 빠져나갔다.

얼굴이 돌처럼 굳어진 명기가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막 말을 하려하자 충영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혹시 수빈이 문제냐?”

“어떻게 알았냐?”

명기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충영이 대답했다.

“지금 네 얼굴이 말해주고 있다. 네가 지금 수빈이 문제 아니면 이렇게 당황할 일이 없잖아?”

“그래. 큰 일 났다. 지금 수빈이가 여기 호텔 커피숍에 있다고 문자가 왔어.”

“그래?”

충영도 놀라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러게 말이다. 도저히 감도 안 오지만 그것보다 지금 커피숍에 있으니까 좀 내려와서 자길 만나라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충영아. 어쩌냐? 내려가서 만나봐야 할까?”

“음. 그래야 할 것 같긴 한데. 가서 수빈일 좋은 말로 잘 타이를 수 있겠냐?”

“아니. 자신 없다. 수빈이가 내 부모님 만나겠다고 나오면 걔 통제할 능력도 없는데 너무 난감할 것 같아.”

“내가 가볼까?”

마치 그의 이 말을 기다렸는지 명기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줄래? 아무리 생각해도 충영이 네가 좀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아. 오늘만 좀 넘기고 나면 그 다음은 어찌 해 볼 여유가 생기지 않겠냐? 이렇게 갑작스럽게 당하고 보니 아무 대책도 안 떠오른다.”

“알았다. 어른들께는 백화점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인사 하고 내가 가볼게.”

“그래. 부탁 좀 한다. 어떻게든 수빈이 마음 좀 바꿔 봐라.”

“알았어. 최선을 다해볼게. 그런데 명기야. 조금 과격한 방법을 써도 되겠냐?”

“왜? 겁을 주려고?”

“아니. 그렇게 하고 싶진 않지. 하지만 수빈이가 말을 안 듣고 막가자는 식으로 나온다면...뭐. 그럴 애는 아니지만 말이다.”

“뭐든 해라. 수빈이 걔가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뒤끝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말을 꺼냈으면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할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런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을 골라서 내 뒤통수를 치는 거잖아? 걔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나라고 매너 차릴 필요는 없지. 뭐든 네 맘대로 하고 이번 혼사에 피해만 가지 않도록 해 줘. 너도 오늘 봤다시피 지금 분위기로 봐서 결혼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고 아버지도 이제 자금 걱정 하지 않게 돼 한숨 돌리셨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난 아버지한테 완전히 신임을 잃게 될지도 몰라.”

“알았다. 좀 심각하긴 하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너무 걱정 마라.”

“그래. 이번에 신세 지면 내가 다음에 꼭 갚을게.”

“야야. 그게 무슨 말이냐? 너하고 나 사이에 무슨 신세 운운... 걱정 말고 너는 들어가서 성연 씨랑 그 가족들한테 점수나 많이 따 둬라.”

“알았다.”

그제야 명기의 얼굴에 웃음이 걸리는 걸 보고 충영은 그와 함께 룸으로 들어갔다.

명기와 함께 상견례 장으로 들어간 충영은 동민에게 급한 일이 백화점에 생겼다며 먼저 나가겠다고 말했다.

동민의 허락을 받고 충영은 명기에게 다가갔다.

성연과 함께 있는 그에게 충영이 말했다.

“백화점에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

“그래. 일 잘 봐라.”

명기의 곁에 있던 성연이 충영에게 물었다.

“왜요? 먼저 가시게요?”

“예. 백화점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제가 가보려구요.”

“어머. 서운해라. 우리 식구들이 충영 씨 무척 좋아하는데 조금만 더 계시지...”

“하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그나저나 두 분 잠시만 같이 서 보겠습니까? 그림이 너무 좋아서 사진 한 장 찍고 싶네요.”

“호호. 좋아요.”

성연이 명기 곁에 바짝 서자 충영이 두 사람의 얼굴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조금 더 다정한 포즈로 한 장만 더 부탁할까요?”

충영의 말에 성연이 명기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찰칵-

사진을 찍고 충영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서 그림이 예술이네요. 휴대폰에 저장해두고 시간 나면 한 번씩 봐야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이야 영광이죠.”

성연이 충영에게 뇌살적인 미소를 보이자 충영은 얼른 명기에게 시선을 돌려 그에게 말했다.

“갈게.”

“응. 일 잘 해결해라.”

명기가 간절한 표정을 담아 충영에게 말했다.

룸을 나와 충영은 호텔 1층으로 갔다.

커피숍을 찾아 들어간 그는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는 수빈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빈의 모습을 보다 충영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

기척을 느낀 수빈이 고개를 들고 충영의 얼굴을 보았다.

“오랜만이네. 그 동안 잘 지냈어?”

충영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수빈이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

충영도 입을 열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역시 예쁜 얼굴은 뭘 해도 예쁘구나.’

충영은 수심이 가득한 수빈의 얼굴이지만 여전히 빛이 날 정도로 예쁜 것을 보자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먹고 싶다...’

지금 수빈을 보는 충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이제 임자 없는 몸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임자였던 명기가 어찌됐든 그녀를 떼어내 달라고 부탁하여 지금 나온 상황이 아니던가. 

더구나 수빈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는 충영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다. 물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수진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수빈이야말로 그가 육체적으로 평가하자면 가장 먹고 싶은, 먹음직스러운 여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동안은 수빈이 명기의 여친이라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뭔가 자신에게 말을 할 줄 알았던 충영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수빈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오빠가 나왔어요? 난 명기 오빨 불렀는데...”

충영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기는 지금 여기 나올 입장이 못 되거든. 그래서 내가 대신 나왔어.”

“명기 오빠. 이제 보니 비겁한 남자네요. 자신이 할 일을 친구에게 떠넘기다니.”

“지금 상황이 어쩔 수가 없거든.”

“상견례 말인가요?”

충영이 수빈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안 거야?”

“그런 거 알자고 마음먹으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으음.”

충영이 신음소릴 내다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수빈인 어쩔 심산이야? 지금 상견례 장으로 쳐들어가기라도 할 셈인가?”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수빈이 충영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같이 가지 뭐. 내가 상견례 장으로 안내할게.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문제니까 명기 부모님도 수빈이의 마음을 아시는 게 좋을 테지.”

충영이 금방이라도 같이 갈 태세를 보이자 수빈이 오히려 망설였다.

‘......!’

수빈이 망설이자 충영은 내심 안도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수빈의 성격 상 절대로 상견례 장에 혼자 쳐들어갈 리 없다는 것을 알고 먼저 질러본 거지만 만에 하나 그녀가 가겠다고 하면 그때는 자신이 그녀를 강제로라도 말려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수빈이 망설이자 충영은 주도권을 잡은 김에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충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빈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충영 오빠!”

“일어 나. 일단 나가자.”

충영이 반 강제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커피숍을 나왔다.

“어쩔 거야? 이대로 상견례 장으로 갈까?”

이제는 수빈이 절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충영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었다.

수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망설이자 충영은 그녀에게 말했다.

“가기 힘들면 오늘은 수빈이가 양보하고 다음 기회를 봐. 그리고 주차장으로 가자. 내가 수빈이 집까지 데려다줄게. 여기 있다가 상견례 끝나고 사람들이라도 내려와서 수빈이와 부딪치면 일이 크게 벌어질지도 몰라. 응?”

수빈은 거의 포기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자존심 때문에 그냥 이대로 물러나기도 어려운 듯 보였다.

충영은 그녀의 결정을 돕기 위해 곁으로 바짝 다가가 손을 잡아끌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자. 다음에 내가 기회를 만들어볼게. 그때 명기를 만나든지 명기 부모를 만나던지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라고. 응? 내가 수빈이 도와줄게. 자. 같이 가자.”

충영이 강한 힘으로 끌자 그렇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거의 포기하고 있던 수빈이 그의 힘에 마지못한 듯 이끌려 주차장으로 갔다.

달칵-

수빈을 조수석에 태우고 충영은 안전벨트까지 매 주었다.

“집에 갈 거지? 데려다줄게.”

시동을 걸며 충영은 일부러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데리고 어디라도 가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아마도 아쉬운 쪽은 수빈이 쪽이 훨씬 더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런 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은 여잔 한 명도 없을 거란 생각에 충영은 먼저 튕긴 것이다. 만약 수빈이 집에 가겠다고 하면 집에 바래다주는 척하면서 다른 곳으로 빠질 생각이었다. 그때 수빈이를 설득해도 늦지 않고 만약 지금 수빈이가 먼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녀가 먼저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이라 충영은 그녀와의 시간에 훨씬 더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고단수의 잔머리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고 차가 호텔을 빠져나오자 수빈이 충영에게 말했다.

“지금 집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

충영은 내심 뛸 듯, 기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오늘은 내가 수빈이 운전기사 노릇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충영이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하자 수빈도 이제 그의 처지까지 생각해주며 묻는다.

“오빠도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요?”

“응. 들어가 봐야지. 수빈이가 집에 곧장 간다고 했으면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수빈이가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면 내가 운전이라도 해주고 싶어. 그게 명기를 대신해서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호의니까.”

“명기 오빠 얘긴 지금 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 안 할게.”

“오빠가 나한테 미안할 필요는 없어요.”

“응.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으면 말해.”

충영의 말에 수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다가 보고 싶다.”

충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 옛날 네 명이서 처음 강원도에 갔던 그 바다 기억해?”

“경진 씨랑 넷이서 갔던 그 바다요?”

“응.”

충영이 수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난. 지금도 가끔씩 그때가 생각 나. 이상하게 그때 생각하면 마음이 참 포근하고 기분이 좋아지거든. 거기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어때? 지금 시간이면 갔다가 늦게라도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도 되겠어?”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나도 지금은 그저 서울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벗어나고 싶어요.”

“좋아.”

충영은 수빈을 데리고 차를 몰아 동해안에 도착했다.

옛날 네 명이 왔던 그 바닷가를 찾아 일박을 했던 호텔 앞에 도착하자 충영은 그 호텔로 들어가진 못하고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어떻게 할까? 날이 오늘은 좀 차가운 것 같은데 그냥 근처 카페 같은 곳에나 가서 좀 쉴까? 기분이 그러면 술이나 한 잔 하던지...”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까지 왔으니까 백사장이나 한 번 걷고 싶어요.”

“그렇게 해.”

충영은 수빈의 말을 따랐다.

차에서 내려 백사장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매섭게 두 사람을 강타했다.

휘이잉-

“안 추워? 날씨가 굉장히 추운데 옷이 너무 얇다.”

충영이 투피스 정장 차림의 수빈을 보며 소리쳤다. 그녀도 여기 동해안 백사장까지 오게 되리라곤 생각하지도 않아서 그냥 평상복 차림이었고 무척 추워보였다.

“괜찮아요. 조금 춥게 내버려두죠 뭐.”

마치 자학하는 투로 말하며 수빈이 먼저 모래사장을 걸어갔다.

충영은 그녀의 몇 발자국 뒤에서 호위하듯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

계절이 겨울에서 이제 막 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데다 오늘은 겨울이 마지막 기승이라도 부리는지 매서운 추위를 뽐내고 있어 사람들이 바닷가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스산한 광경을 보는데 충영은 절로 옛날과 비교가 됐다.

옛날 충영과 경진, 그리고 명기와 수빈, 네 사람이 같이 왔을 때는 날도 따뜻했고 사람들도 많아 절로 생동감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마치 수빈의 마음처럼 모든 것이 얼어붙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참 동안 수빈의 뒤를 따라 걷던 충영은 그녀가 비틀거리자 얼른 다가가 몸을 부축했다.

“괜찮아? 이런. 몸이 얼음처럼 차갑네. 얼른 돌아가자.”

수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자 충영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다.

“괜찮아요.”

“괜찮긴. 그러다 큰 병 나. 얼른 돌아가자.”

“아니. 조금만 더 걷다가...”

충영이 부축한 몸을 풀지 않자 수빈은 그의 품에 안기다 시피하며 백사장을 계속 걸었다.

바닷물이 성난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것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도 하다 수빈은 다시 걷고, 또 걷다가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충영은 수빈을 방해하지 않고 그녀의 몸만 꼭 끌어안고 있었다.

수빈이 또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여기... 옛날에 어떤 남자들이 나한테 시비를 걸다 충영 오빠한테 혼났던 곳 맞죠?”

“응.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때가 참 좋았는데...”

충영이 옛날을 생각하며 웃다 수빈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어졌다.

‘......!’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충영은 수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며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또 다른 마음엔 그녀를 안고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 싶은 성욕이 끓어올랐다.

충영은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던 코트를 걷어내 자신의 몸에 둘렀다. 

따뜻하게 감싸주던 코트가 사라지자 수빈의 몸이 한기에 떨리더니 그녀 스스로 충영에게 바짝 붙었다. 순간 충영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코트를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둘러썼다.

코트 안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자 충영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입술을 그녀의 눈가에 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았다.

아마도 충영을 명기로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추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은 것인가, 충영이 자신의 눈가에 혀를 대고 애무해도 수빈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수빈이 목석처럼 가만있자 충영은 입술을 점점 내렸다. 

오똑 솟은 코를 비비면서 내려온 충영의 입술이 마침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

수빈의 차가운 입술에 충영의 따뜻한 입술이 닿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입술끼리 닿고 있을 때는 가만있더니 충영의 혀가 나와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자 수빈이 그제야 그에게서 물러나며 입술을 뗐다.

“오빠!”

그만 하라는 듯 수빈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자 충영은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더욱 잡아당기며 그녀의 입술을 다시 덮었다. 

“우읍!”

이번엔 확실하게 수빈이 거부의사를 밝히며 뒤로 물러나려하자 충영이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그녀의 입술을 완벽하게 자신의 입속으로 끌어당겨 쭉쭉 빨았다.

충영이 거칠게 입술을 빨자 수빈이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밀었다.

하지만 충영의 몸은 요지부동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의 입술만 하염없이 충영의 입속에서 농락당하고 있었다.

쭉쭉-

충영의 키스가 지속되자 수빈의 반항이 거세졌다.

그녀가 계속 힘을 주고 그의 몸을 미는데 그녀가 반항할수록 충영도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단단하게 쥐고 계속 입술을 빨았다.

“우응.”

계속 충영의 몸을 밀다 지친 수빈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충영은 그녀를 따라 앉으며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수빈이 이를 앙다물고 있어 혀가 좀처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수빈의 반항이 심했지만 충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계속 혀를 밀어 수빈의 치아를 두드렸다.

충영이 집요하게 입술을 물고 늘어지자 수빈이 먼저 지쳐버렸다. 

자신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 추운 백사장에서의 키스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의 입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

수빈의 꽉 다물린 앞 치아가 조금씩 열리자 충영의 혀가 영활한 뱀처럼 이 사이를 뚫고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승리의 개선군처럼 그의 혀가 입안 곳곳을 헤집고 다니자 수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그의 굵고 커다란 혀가 자신의 입안을 가득 채우며 모든 곳을 다 맛보며 다니는데 마치 그의 혀에 자신의 모든 것이 그대로 노출돼 발가벗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빈의 입안을 마음껏 애무하고 충영의 혀가 물러나자 수빈이 얼른 그의 두 손에서 얼굴을 빼냈다.

“하아! 하아! 하아!”

얼굴을 떼자 그제야 참고 참았던 호흡이 원활하게 된다.

수빈이 두 사람의 머리를 덮고 있는 코트를 홱 제치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충영이 약간 멋쩍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까는 너무 추워보여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해버렸네. 미안해. 지금은 그다지 안 춥지?”

충영의 말에 수빈은 그를 계속 노려보면서 자신의 몸을 체크했다.

‘......!’

그의 말대로 언제 추웠는지 모르게 지금은 몸에 열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언제 울었는지 슬픈 감정도 다 사라지고 그저 충영에게 화만 나 있었다.

“미안해. 수빈이가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수빈이는 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이상형이야. 아까는 수빈이 그렇게 예쁜 얼굴로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이성을 잃어버렸어. 미안해.”

충영이 거듭 사과하자 수빈은 더 이상 화를 내기도 곤란했다. 어쨌든 자신이 빌미를 제공한 부분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요.”

수빈이 코트를 그에게 주고 먼저 걷자 충영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차에 도착해서도 수빈이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자 충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지? 저녁때가 넘었는데. 수빈이 점심은 먹었어?”

충영의 말을 듣자 수빈은 그제야 뱃속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부터 간단하게 빵 한 개와 커피만 마셨을 뿐 아무 것도 입에 대질 않았다.

수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

어느새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고 차에 시동을 걸지 않아서 다시 한기가 느껴지며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온다.

부릉-

충영이 차에 시동을 걸며 수빈에게 말했다.

“식사나 아니면 간단하게 술이나 한 잔 하지? 지금 바로 서울까지 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거야. 나도 지금 배가 좀 고프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응.”

수빈이 허락하자 충영은 기쁜 낯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바닷가에서 서울로 향하는 도중에 멋진 카페를 발견한 충영은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길가에서 골목길로 약간 들어간 곳에 카페는 위치해 있었는데 산속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 넓은 정원을 갖추고 있어 아늑하면서도 정취가 있는 곳이었다.

수빈도 마음에 들었는지 차에서 내려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충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그들을 맞자 충영은 그에게 물었다.

“조용한 룸이 있나요? 방해받지 않고 식사나 술 좀 하고 싶은데.”

“예. 있습니다. 특실도 있는데 그리 모실 까요?”

“그럽시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간 충영은 수빈에게 물었다.

“식사 할까?”

“아니. 술이나 마실래요.”

“그래.”

충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점원에게 술을 시켰다.

“날이 추우니까 따뜻한 술을 좀 마시고 싶은데 사케를 좀 데워서 가져다줄 수 있죠?”

“예.”

충영은 안주와 술을 시키고 수빈의 얼굴을 보았다.

‘......!’

얼어 있는 얼굴이 안쓰러워 충영이 부드럽게 물었다.

“춥지? 조금만 있으면 따뜻해 질 거야.”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웠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수빈이 돌아왔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니 다시 청순하면서도 화사한 옛 모습으로 회복돼 있었다.

‘음. 녀석. 화장실에서 얼굴을 다듬고 왔군.’

수빈이 자신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자 충영은 속으로 기쁜 마음이 솟아났다.

하지만 충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이 거부하는 데도 그가 무리하게 키스를 했기 때문이다.

충영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 수빈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런 차가운 모습을 보였지만 시종 웃으며 그녀를 대했다.

술이 나오자 수빈이 도자기로 된 잔을 두 손으로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갓 데운 술이라 잔이 따뜻했고 그 온기를 느끼려는 듯 수빈은 소중한 보물 다루듯 잔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으음.”

수빈이 미약하게 신음소릴 냈다.

“왜? 안 좋아?”

충영이 묻자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빈속이라 그러나 봐요. 조금 어지러워서... 이제 괜찮아요.”

“안주 좀 먹어.”

충영이 안주를 전부 그녀 앞으로 놓자 수빈이 그 중에서 과일 한 조각을 입속에 넣는다.

충영도 사케가 조금 식자 술을 단숨에 한 잔 다 비우고 점원에게 다시 술을 시켰다.

충영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도 수빈은 제지하지 않았다. 운전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될 법도 하건만 수빈의 신경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듯 했다.

수빈도 작정한 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사케 두 잔이 들어가자 그녀의 볼이 붉어지는데 차갑던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살아나 마치 추운 겨울을 뚫고 목련이 꽃을 피워 올리는 느낌이 들었다.

‘......!’

충영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수빈이 물었다.

“왜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수빈이가 너무 예뻐서...”

“칫!”

수빈이 차갑게 웃는다.

“오빠가 아무리 그래도 난 오빨 사랑하지 않아요. 내 맘 속엔 오직 명기, 그 사람뿐이라고요.”

“으음.”

충영은 마음이 약간 아팠지만 이해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들이 꽤 있었지만 모든 여자가 다 자신을 사랑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수빈은 명기가 첫 남자에 그하고만 3년 가까이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명기가 비록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지만 아직 수빈의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고 오늘 충영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정리해 줘야 한다.

하지만 여자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또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인지 여기 도착하자 제일 먼저 그녀가 한 일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좋게 다듬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충영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진데? 나도 수빈일 사랑하지 않아.”

충영의 말에 수빈이 약간 충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수빈이가 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거든. 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목매달며 쫓아다니는 그런 남자가 되는 것은 싫고, 또 날 사랑해주는 여자도 있으니까. 다만 수빈이를 보면 뭔가 목이 타고 갈증을 느껴. 아까 바닷가에서 내가 무례를 범한 것도 그런 이유야.”

충영이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꺼냈다.

“처음 수빈이를 봤을 때 너무 예뻐서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었어. 상상에서나 그리던 여자가 현실로 내 눈앞에 나타났지. 하지만 그 여자는 내 제일 친한 친구와 바로 파트너가 됐고 또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너무 잘 어울리기까지 했지. 내가 끼어들 자리라곤 전혀 없었어. 그러다 나는 경진이란 여잘 좋아하게 됐고 그때 우리 네 사람은 바닷가로 놀러갔었어.”

충영의 얘기가 길어지자 수빈이 술을 홀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때 그 바닷가에서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수빈일 보는데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정말 묘한 게 남자의 마음인지, 분명 경진일 좋아하고 그 아이와 깊게 사귀자는 악속까지 서로 한 상태였는데도 수빈일 보니까 내 마음은 수빈이한테로 푹 빠져드는 거야. 그런 내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지. 내가 수빈이한테 넋이 빠져 있으니까 경진이가 그때 나한테 그랬어. 수빈이 정말 예쁘다고. 나이가 동갑인데도 어쩌면 수빈이는 그렇게 예쁘고 머리도 영리할까, 경진이가 수빈일 무척 부러워했었지.”

“경진 씨는 잘 있나 모르겠네요.”

수빈의 말에 충영이 대답했다.

“경진이 지금도 가끔은 만나.”

“예?”

수빈이 놀라 그의 얼굴을 보았다.

“친구로 만나는 거야. 옛날처럼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경진이가 너무 착하고 마음이 예쁘거든. 그래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좀 돕고, 그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난 한 번 마음에 둔 사람이면 그 사람 좀처럼 배신 안 하 거든.”

“으음.”

수빈이 생각에 잠기자 충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남자들이 수빈일 괴롭혔는데 난 그놈들을 쫓아내면서도 그들이 너무 이해가 되는 거야. 수빈이처럼 예쁜 아가씨를 보고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지. 그런 옛 생각이 나서 아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어. 그리고 아까 한 일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충영이 다시 한 번 사과하자 수빈이 풀린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됐어요. 이제 지나버렸으니까 생각 안 할 래요.”

충영이 그녀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수빈이는 어때? 난 솔직하게 말했는데 수빈이 솔직한 생각도 듣고 싶어. 오늘 같은 자리는 앞으로 다시 안 올지도 모르니까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마음을 털어놔보자.”

수빈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난 사실 털어놓을 무엇도 없어요. 살면서 공부만 하다 처음으로 남잘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명기 오빠였고 그 사람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내 모든 것을 다 줘도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 바닷가에서...”

충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바로 그 바닷가 호텔에서 명기한테 네 처녀를 줬지.’

수빈이 계속 말했다.

“명기 오빠와는 모든 것이 다 잘 맞았어요. 생각하는 것이나 가치관도 같았고 지적 수준도 비슷해서 대화를 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 즐거웠죠.”

충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옛날 명기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그때 명기는 수진이와 수빈이에 대해 비교를 했는데 수진이는 동생이지만 너무 머리가 영리해서 뭔가 대화를 하면 자신이 항상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데 수빈이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뛰어난 정도여서 말 할 때 참 편하다고 했었다. 물론 거기에는 명기를 사랑하는 수빈의 배려심도 깔려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학교 다닐 때도 좋았지만 강남에 있는 백화점으로 직장을 나갈 때도 참 좋았어요. 서로 공부한 것을 토론하고 백화점의 성장을 위해 각자의 아이디어를 꺼내 서로 공유하고... 물론 명기 오빠가 우리들의 장래에 대해 애기할 때 희망적인 말을 한 것은 아니에요. 어머니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반드시 반대할 거라며 나한테 어느 정도는 각오도 하라고 그랬죠. 하지만 참고 이기면 자신이 반드시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혼하겠다고 굳게 약속했었는데...”

수빈이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막으려고 술을 단숨에 다 마셨다.

“아직도 난 믿기지가 않아요. 명기 오빠가 날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한 차례 악몽을 꾼 것이고, 꿈이 깨면 오빠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아요.”

충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다시 나타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명기와 결혼은 이제 안 되는 걸로 결정이 났어. 오늘 상견례를 하면서 아마 날짜까지 다 잡았을 거야. 당사자는 급하지 않지만 양가 부모들이 워낙 결혼을 서두르고 있거든.”

“믿을 수 없어요.”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명기 오빠가 그럴 리 없어요. 아마도 부모의 강압에 의해서 그런 거겠죠. 하지만 오빠가 너무 무책임해요. 아무리 부모가 반대하고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어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을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하려고 할까... 더구나 내가 만나자고 하니까 본인이 직접 나오지도 않고 충영 오빨 보내다니.”

충영은 이쯤에서 그녀의 마음에 확실한 충격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빈이는 명기하고 결혼할 그 여자 본 적 있어?”

“아니. 본 적 없어요. 부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한, 지극히 운 좋은 여자라는 것밖에 몰라요.”

“내가 오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한 번 볼 거야?”

수빈이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 보여줘요.”

충영이 휴대폰을 꺼내 아까 찍은 사진을 찾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사진을 보던 수빈의 안색이 싹 변했다.

‘......!’

그녀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명기와 다정한 포즈를 취한 성연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녀도 성연의 얼굴이 그토록 뛰어나리라곤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한 장 더 있는데...”

충영의 말에 수빈이 다음 영상을 나오게 했고 거기에는 성연이 명기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그는 행복에 겨운 얼굴로 웃고 있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수빈의 안색이 밀납처럼 창백해졌다.

“오빠가 이럴 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수빈이 그 사진을 보고 또 본다.

충영은 그녀가 휴대폰을 돌려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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