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는 충영의 머리에 든 생각은 수진을 만나야 한다는 것 한 가지뿐이었다.
갑자기 터진 이번 일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자신 혼자서는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충영은 수진이 다니는 학교로 가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진아. 나야. 급한 일이다. 문자 좀 줘.)
잠시 후 수진에게서 바로 답글이 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응. 큰일이 생겼다. 지금 네 학교 앞이야. 시간 되는 대로 빨리 만나자.)
(알았어. 곧 나갈게.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잠시 기다리자 수진이 정문 앞에 나타났다.
“오빠!”
“수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 오빠가 학교까지 찾아오고.”
“조용한 데로 좀 가자.”
충영이 수진의 손을 잡고 학교 앞 벤치로 갔다.
“앉아 봐.”
수진이 벤치에 앉자 충영은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그녀에게 말했다.
“성연이가 말이야.”
“응.”
“수진이 네 방에다 몰래카메라 종류를 설치했나봐.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그게 무슨 말이야?”
수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자 충영은 오늘 성연에게 불려가 당했던 일을 모두 말했다.
‘......!’
그의 말을 듣고 수진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어찌 그런 여자가 우리집에 들어왔을까...”
충영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 도청되고 있을지 몰라.”
“어떻게?”
“영화 같은 거 보면 옷 같은데다가 도청장치를 설치하기도 하잖아?”
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 정도까지일까?”
“모르겠어.”
“으음.”
수진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문자를 보낸다.
(어떻게 할까?)
(어디 조용한 호텔에 가서 얘기하자.)
(응. 오빠가 운전해.)
충영은 수진을 차에 태우고 가까운 호텔로 갔다.
룸을 빌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먼저 옷부터 벗었다.
수진이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시트로 몸을 가렸다.
충영은 그녀와 자신의 옷을 모두 모아 욕실로 가서 그곳에 두고 문을 닫았다.
달칵-
충영은 알몸으로 시트를 들추고 수진의 곁에 누웠다.
“이제 괜찮을 거야.”
충영이 수진의 몸을 안아주자 그녀가 물었다.
“오빠! 대체 그 성연이란 여자 어떤 여잘까?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거 있으면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말해 봐.”
“내가 볼 땐 또라이 같기도 하고, 성격파탄자 같기도 한데.... 명기하고도 사이가 아주 안 좋아.”
충영은 이제 명기의 사정을 봐줄 형편이 아니라서 저번 명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다 수진에게 해줬다.
“아아. 진짜 이상한 여자가 들어왔네. 어쩜 좋지?”
수진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자 충영이 물었다.
“정말 인터넷에 그 동영상을 올리면 어떡하지? 그럼 우린 끝장인데...”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럴까?”
“응. 그렇게 되면 그 여자도 타격이 클 거니까. 남의 방에 불법 도청을 하는 게 모르긴 몰라도 큰 범죄에 해당할 거고, 아빠가 알면 우리한테 큰 화가 닥치겠지만 가문의 망신을 시킨 그 여자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오빠 말 들어보니까 그 여자, 어떻게 하든 명기 오빠한테 자식을 낳아서 우리 기업을 가로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스로 같이 파멸할 짓을 하겠어?”
“아하! 수진이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 그렇지만 장인어른한테 이르면 어떻게 되지? 만일 장인어른이 아시면 우릴 가만 두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식들 중에서 명기와 경쟁을 할 인재들이 다 사라지는 거니까 성연이 걔 입장에선 그렇게 하고 싶을 거 같은데...”
“그것도 쉽진 않아. 아빠가 알면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어날 텐데 그 와중에 아빠가 그 여자를 인정하고 자식을 후계자로 물려줄 마음이 들까? 내가 아빠라면 안 그럴 것 같아. 집안의 수치를 드러낸 그 여잘 마음속에서 접고 더 밀어낼 것 같아. 그리고 오빤 가만있겠어. 나도 가만있지 않고 반드시 갚아 줄 테지만 오빠도 복수할 것 같은데...”
“그럴 말이라고 하니? 아까도 그 개자식을 죽여 버릴 뻔 했다. 어찌나 화가 솟던지 이성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그 년 목을 조르고 있더라고.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목 졸라 죽여 버렸을 거야. 그리고 다른 건 다 참겠지만 수진이 널 괴롭게 하는 건 죽어도 내가 못 봐. 일이 터지면 그년 죽여 버리고 교도소 갈 거니까.”
충영이 분개하자 수진은 그의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아빠가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우리 둘이서 한국 땅 떠나 살자. 설마 우리 둘이서 살만한 곳이 없을까...”
“수진아. 그러면 네 꿈은 영영 사라지잖아?”
“할 수 없지. 옛날엔 대성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다른 건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오빠가 내 맘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이젠 대성의 후계자보다 오빠가 더 소중하니까 괜찮아.”
충영이 감동하여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고맙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안 만들 거야. 수진이 너한테만은 절대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하지만 그 여자가 오빨 가만 두겠어?”
“뭐. 내게 요구를 하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줘야지. 그러면서 기회를 볼 거야. 참고 살다보면 뭔가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겠지. 그때까진 어쩔 수 없어. 수진이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년도 쉽사리 폭로를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으니까 미리 겁먹고 움츠러들 필요는 없잖아? 죽을 지경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오빠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그건 상관없어. 그리고 수진이 넌 당분간 모르고 있는 걸로 하자. 그년이 알게 된다면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지만 걔가 알게 될 때까지 만이라도 넌 모르는 척 해. 그래야 그년이 너한테 집적대지 않지.”
“후. 오빠한테만 짐을 다 맡긴 기분이라 찝찝해.”
“그렇지 않아. 그년 말을 들어주면서 나도 준비를 좀 할 거야. 돈을 모아야겠어. 나중에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면 모은 돈으로 한국을 뜨자. 내 몸 하나 튼튼하고 수진이 너 머리 좋으니까 어디 간들 우리가 굶어죽기야 하겠니?”
“그래. 상황이 어려워지면 나한테 꼭 말해줘.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연락할게.”
“응. 그리고 그 여자 만날 때는 항상 녹음기를 휴대하고 만나도록 해. 그 여자, 머리는 영리한 것 같지 않으니까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 반드시 실수가 나올 거야. 그때를 대비해서 그 여자가 하는 말은 하나도 빼지 않고 녹음을 시켜 둬.”
“그래. 알았다.”
충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진이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이제 우리 당분간 섹스는 못 하겠네?”
“그럴 것 같다. 정 하고 싶으면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할 수밖에...”
충영이 수진의 몸 위로 올라타며 말하자 그녀가 그의 등을 끌어당기며 그와 만난 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훗. 지금 하게?”
“응. 앞으로 할 것까지 다 오늘 해버리자.”
충영이 키스하자 수진이 그의 입술을 빨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래. 오늘은 아주 오래오래 해 줘.”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욱 뜨거워진 몸과 마음으로 이내 하나가 되었다.
수진을 학교로 데려다 준 뒤 충영은 녹음기를 파는 곳으로 가서 휴대용, 소형, 대형, 가릴 것 없이 가장 성능이 좋은 것으로 몽땅 골라서 샀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충영은 백화점으로 돌아가는 중에 차 안에서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다음날.
백화점으로 출근해서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성연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야. 지금 백화점에 와 있는데 잠깐 볼까?)
(여기 강남?)
(그래.)
(어디에 있어?)
(1층 정문 앞.)
(잠깐만 기다려. 지금 갈게.)
충영이 발이 안 보이게 뛰어 1층으로 내려가자 로비에 성연의 모습이 보였다.
‘씨팔 년이... 얼굴 하난 진짜 눈이 부시게 예쁘네.’
스키니 진에 티셔츠 차림의 간편한 복장이지만 날씬한 몸매와 혼이 나갈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 가질 않아 지금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온통 집중돼 있다.
“성연 씨!”
충영이 가까이 다가가 부르자 성연이 그를 보고 활짝 웃는다.
“어머. 사장님!”
“이렇게 제가 근무하는 백화점까지 다 찾아주시고... 영광입니다.”
충영이 공손하면서도 다정하게 나오자 성연이 눈가에 이채를 띄우며 그를 본다.
“호호. 사장님이 환대해주시니까 기분이 좋은 데요.”
“당연하죠. 가족이잖아요?”
“참! 맞다. 우리는 가족이죠? 호호. 그걸 이제야 알았네.”
성연이 전혀 몰랐다는 듯 말하자 충영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놀고 있네. 씨팔년이...’
하지만 겉으로는 시종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대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안 하셨다면 저와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그럴까요? 나, 스테이크 먹고 싶은데... 사주실래요?”
“그러시죠. 근처에 잘하는 집 있습니다. 제가 그리 모시죠.”
“호호. 좋아라. 어서 가요.”
성연이 팔이라도 낄 듯 가까이 다가오자 충영은 그녀와 함께 백화점을 나섰다.
양식당에 들어가 충영이 룸을 잡았다.
둘만 있는 조용한 방에서 식사를 모두 마치고 디저트를 먹으며 성연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데... 생각은 해봤어?”
그녀가 생글거리며 웃는데 그 모습이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워 충영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명기 말이 맞구나. 저 아름다운 얼굴이 언제 표독하게 변할 줄 모르니까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도 무서워진다.’
충영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라 네 말대로 해야지. 하지만 조건이 있어.”
“흐응. 지금 조건 달 형편이 아닐 텐데?”
성연이 묘한 표정을 짓자 충영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나도 여기 백화점 일이 적성에 맞고 지금 모든 게 다 부족한 게 없으니까. 될 수 있으면 이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나도 사내자식이고 자존심은 있거든. 남자의 모든 게 다 무너진다면 여기 생활만 고집할 수 없지. 그래서 최악의 경우 성연이 네가 다 까발린다면 나는 수진이하고 여기 한국을 뜰 거야. 뭐, 둘이서 외국 나가면 굶어죽기야 하겠니? 모아놓은 돈도 조금은 있고. 수진이한테는 얘기 안 했지만 수진이도 내 말에 동의할 거야. 걔가 머리는 영리해도 아버지 사업에 그다지 큰 욕심은 없거든.”
충영이 말을 하고 성연의 눈치를 보았다.
‘......!’
충영의 말이 조금은 의외였는지 그녀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드러낸다.
“으음. 한국을 뜨겠다?”
“그래. 뭐,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 거고. 어지간하면 그냥 여기서 살아야지. 외국 나가서 살아본 적도 없고. 그러니까 날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서로 합의점을 찾잔 말이야.”
“좋아. 네 조건을 얘기 해 봐.”
“내 조건은 간단해. 첫 째로 수진이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걔는 건들지 말아.”
“그거야 조건도 아니다. 난 걔한테는 전혀 관심 없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다음은?”
“다음은 한 가지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는 들어줄 수 없으니까 선을 넘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 예를 들어서 남자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는다거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나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또?”
“없어.”
“좋아. 그럼 결정된 거지? 넌 지금부터 내 노예야. 맞지?”
“응. 그래도 호칭은 서로 편하게 말을 놓는 걸로 하자.”
“그래. 호칭 같은 건 아무 상관없고 오히려 서로 말 놓는 게 나도 편해. 아우. 이거 이제까지 사는 재미가 눈꼽만큼도 없었는데 이 귀여운 자식 땜에 내 인생에 갑자기 활력소가 생기네. 아우! 너무너무 좋아.”
두 눈이 감길 정도로 좋아 죽겠다고 웃는 성연의 모습을 보자 충영은 소름이 끼쳤지만 겉으로는 그녀를 따라 웃었다.
“하하!”
“밥 다 먹었으면 나가자.”
성연이 일어서자 충영이 따라 일어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응. 오랜 만에 삼촌도 좀 보고 내 부하들 잘 있는지 얼굴이나 보여주려고.”
“나는 일해야 하는데...”
“아이. 오늘 하루만 땡땡이 쳐. 사장이 그것도 못해?”
성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바짝 붙는데 탄력 있는 그녀의 가슴이 팔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으음. 본부장에게 전화 좀 해 보고.”
충영이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본부장님. 난데 오늘 백화점에 특별한 일 없죠?”
“예. 별 일 없습니다.”
충영이 전화를 걸 때 존대를 하면 공식적인 일이란 걸 수빈이 알고 백화점 상황에 대해 알아서 말을 해 준다.
“음. 내가 밖에 나와 있는데 사적으로 볼 일이 좀 있어서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본부장이 내 대신 해주고 급한 일 있으면 전화로 연락 줘요. 예. 수고.”
전화를 끊고 충영이 성연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됐어. 가지.”
충영이 협조적으로 나오자 성연은 기뻐서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호호. 가자.”
식당을 나선 성연은 자신의 차에 충영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차로 20분 정도를 가서 어느 건물 앞에 멈추고 성연이 그를 향해 말했다.
“다 왔어. 내려.”
충영이 조수석에서 내리자 성연은 그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복도를 지나치며 가끔 만나는 남자들이 성연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하는데 충영이 보니 얼굴이나 체격이 꼭 조폭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충영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우리 작은 아버지 일하는 곳이야. 참. 우리 작은 아버지가 조폭두목인거 알고 있어?”
“으응. 명기한테 잠깐 들은 것 같아.”
“그 새끼는 입도 싸네. 좆도 밤일 하는 능력은 제로에 가까우면서...”
성연의 안색이 변하자 충영이 얼른 말했다.
“명기가 나한테는 비밀 없이 다 말하거든. 내 입에서 다른 사람한테 말 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그래? 그럼 밤일 못하는 것도 얘기 했겠네?”
“응. 어느 정도는...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어떡하든 노력해 본다고 그러던데... 조금 좋아지진 않았나?”
충영이 웃으며 묻자 성연이 코웃음 쳤다.
“흥. 좋아지기는커녕 아예 요즘은 얼굴 마주치는 것도 피하는데 뭘. 얼굴만 매끄럽고 잘 생겼지, 하는 행동은 좀생이에다 진짜로 밥맛이야. 우리 새끼들보다 훨씬 못해.”
“새끼들이라니?”
“응. 삼촌 부하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서 많이 친하지. 자 소개시켜 줄 테니까 들어가자.”
성연이 충영의 손을 잡더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충영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성연이 데려간 곳은 방이 아니라 체육관 같은 곳이었는데 넓은 그곳에서 지금 여려 명의 남자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모습을 보자 충영은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어때? 우리 애들이 체력단련 하는 곳이야.”
“좋은데. 아주 좋아.”
충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연이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널 여기 데려온 이유가 있어.”
“뭔데?”
“삼촌이랑 정식으로 한 판 붙어보라고.”
“뭐? 옛날 상견례 때 그...”
“응. 팔씨름 했던 삼촌 말이야. 그 삼촌이 우리 조직에서 싸움으로는 일인자야. 이제껏 남과 겨뤄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때 처음으로 패배를 당해 마음고생을 좀 했거든.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한테 낯도 안 서고 본인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해서 내가 꼭 한 번 붙여주고 싶었는데 너하고 나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니? 오늘 한 판 붙을 수 있지?”
충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이런 쪽으로 도전해 오는 사람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으니까... 언제든지 콜이야.”
“와우. 역시...”
성연이 웃는데 이번엔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해서 웃는 거란 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중앙으로 다가가자 운동하고 있던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아니. 아가씨!”
“오랜만에 오셨네요.”
성연은 그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삼촌은 어디 갔어?”
“예. 잠깐 밖에 나가셨는데 곧 오실 겁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분은...”
사람들이 충영에게 관심을 보이자 성연이 그를 소개했다.
“너희들도 들어 봤지? 우리 삼촌을 팔씨름으로 이긴 사람.”
“예. 대성그룹 회장님의 큰 사위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바로 이 분이야. 오늘 나랑 친구 하기로 했고 그 기념으로 삼촌하고 정식으로 무술을 겨루기 위해 온 거니까 빨리 삼촌 찾아서 데려 와.”
“야아.”
그녀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이거 돈 주고 볼 수 없는 큰 시합이 되겠네. 야. 빨리 가서 동수 형님 모셔 와라.”
“예.”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충영은 성연의 인도로 구석에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우리 삼촌이 지금 넘버 투야. 옛날에는 내 보디가드 겸 조직에서 행동대장으로 있었는데 내가 결혼한 뒤로 작은 아버지 바로 밑의 이인자가 됐지.”
“아. 어쩐지 실전에 뛰어난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더라.”
충영이 칭찬하자 성연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고 그 다음이 바로 삼촌이야.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날 보호해주고 내 말이라면 뭐든 안 들어준 적이 없을 정도로 날 예뻐해. 지금은 결혼해서 그 두 사람을 별로 볼 수가 없는 게 제일 아쉽다.”
“삼촌의 심정을 알만 하다. 나도 수진이를 어렸을 때부터 네 삼촌이 너한테 하듯 그렇게 돌봐왔었거든.”
“아. 그러다 정 들었구나?”
“응.”
충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연이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나도 한참 사춘기 때는 삼촌한테 이상한 마음 품기도 했었는데... 워낙 나한테 잘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격투기에도 뛰어나니까 한때 우상처럼 따르던 시절도 있었어. 만약 내 친삼촌이 아니었다면 벌써 내가 꼬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났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내 엄마하고 둘도 없이 친한 남매지간이라서 내가 포기했지.”
“잘 했다. 근친은 좀 그렇잖아? 할 때는 짜릿하겠지만 뒤끝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가 볼 때 나, 미친 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성은 있는 년이야. 의리도 있고 날 믿고 따르는 놈들에게 절대로 배신 같은 거 안 해.”
“그렇구나. 내가 확실히 성연이 너 좀 잘 못 본 거 같다.”
충영이 동조하자 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내 말만 잘 들으면 내가 봐줄게. 시아버지에게 이르거나 인터넷 같은 데 올리지 않는다고. 알았지?”
“응. 고맙다. 나도 잘 할 게.”
왠지 두 사람 사이에서 분위기가 급진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충영이 할 때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거구의 남자가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삼촌!”
성연이 소리치며 일어서자 충영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김동수가 성연에게 웃어 보이더니 곧바로 충영을 향해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예. 오랜만입니다.”
“삼촌. 오늘 여기 충영 씨랑 개인적으로 친구 하기로 했거든. 그 기념으로 우리 식구들한테 소개도 시키고 삼촌하고 정식으로 한 번 겨뤄 보기 위해 왔어. 어때? 이 친구는 좋다고 하는데, 삼촌도 괜찮지? 저번 팔씨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좀 그렇잖아?”
“나야 그러면 고맙긴 하지만...”
동수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충영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좋습니다. 사실 이제껏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상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겨뤄보고 싶습니다.”
충영이 시원하게 나오자 동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주위가 대번에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로 변했다.
“그럼 뭘로 겨루면 좋을까?”
성연이 고민하자 동수가 말했다.
“젊은 친구보고 고르라고 해라.”
“하하. 저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운동을 시작한 놈입니다. 일대일로 겨루는 거라면 뭐든 자신 있으니까 그쪽에서 정하시죠.”
충영이 어찌 보면 건방지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 있게 나오자 동수도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듯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럼 격투기로 하는 게 어떨까? 크게 다치면 안 되니까 글러브는 끼고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휴식시간도 없고 몸의 어느 부분이든 다 사용가능.”
“좋습니다. 대신 운동하다 발생하는 사고는 서로 묻지 않기로 하죠.”
“허허. 정말 자신감 하나 끝내주는군.”
동수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충영의 얼굴을 보았다.
어찌 보면 적진이랄 수 있는 곳에 단신으로 와서 이토록 큰 소리 칠 수 있는 담력은 보통 사람에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성연이 말했다.
“말은 그만 하고 시합 들어가죠. 이봐. 여기 이 친구하고 삼촌한테 맞는 옷 좀 가져와. 그리고 글러브도 가져오고.”
“예, 아가씨.”
잠시 후 급조된 링이 만들어지고 그 가운데 충영과 동수가 섰다.
팬티 차림의 두 사람을 보고 사람들의 감탄사가 쏟아졌다.
“야. 저 정 사장 좀 봐라. 몸이 완전 예술이다.”
“그래도 우리 동수 형님이 이기겠지?”
“모르겠는데 저 몸을 보면 그냥 단순하게 운동한 게 아니야. 완전 프로의 몸이다.”
성연이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저 남자, 몸만 좋은 게 아니야. 너희들은 내 상견례 때 못 봐서 그러는데 힘이 아주 장사야. 오죽하면 삼촌이 힘에서 밀렸겠냐고.”
“그래도 격투기는 형님이 이기겠죠?”
“아니. 난 저 정 사장이 유리하다고 보는데?”
“음.”
다른 놈이 참견한다.
“저 몸을 봐도 박빙의 승부가 될 것 같습니다. 동수 형님이 체격은 커도 전부 근육으로 형성된 몸인데 저 정 사장도 만만치가 않네요. 더구나 키가 형님보다 훨씬 크고 다리가 길어서 만약 발차기에 능하다면 어려운 승부가 될 것 같은데요.”
성연이 말했다.
“내가 그 집 가서 들은 바로는 저 정사장이 근접해서 싸우는 걸로는 못하는 운동이 없단다. 원래 내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시아버지가 키운 사람인데 재능이 뛰어난 데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오직 운동에만 모든 시간을 다 쏟았대. 그리고 일대일로 싸워서 지금까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고...”
“야! 굉장한 사람이구나. 소문을 듣자니 회사 경영에도 뛰어난 인재라고 그러던데요.”
“그런 것 같아. 이제 시작한다. 잡담 그만하고 보자.”
충영은 자세를 잡고 동수의 몸을 보았다.
‘......!’
자신보다 키는 작지만 곰처럼 커다란 덩치에다 그게 전부 근육으로 이뤄져 있어 마치 영화나 게임에서 나오는 괴물처럼 엄청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충영은 자신이 있었다. 저번 팔씨름에서 느낀 건데 힘은 자신이 세다는 것을 알았고 그 동안 사업 때문에 연습을 게을리 했었지만 그때 팔씨름을 계기로 다시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있다.
동수가 두 손을 펴고 천천히 다가오자 충영은 바로 발을 날렸다.
충영의 긴 다리가 동수의 얼굴을 때리자 그가 얼른 두 손을 들어 막았다.
탁-
둔탁한 소리가 나며 동수가 오던 걸음을 주춤거렸다. 가드를 했지만 충영의 발에 실린 힘이 강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때 충영의 몸이 돌더니 곧바로 돌려차기가 날아왔다.
휙-
동수는 충영의 연이은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퍼벅-
팍-
순식간에 공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상대를 탐색했다.
동수의 주먹에 팔을 맞은 충영은 그의 몸을 쳐다보았다. 돌려차기로 동수의 허리를 맞췄지만 거리가 가까운 상태에서 가격한 거라 정통으로 맞지 않았고 타격은 그만큼 크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한 번씩 주고받자 관전하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둘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탓!”
이번엔 동수가 기합을 지르며 권투자세로 충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충영은 동수보다 다리가 길어서 발차기를 하는 것이 유리했지만 동수의 달려드는 동작이 빨라서 이번엔 타이밍을 잃고 두 손을 모아 같이 권투 자세를 취했다.
휙-
동수의 오른 팔이 복부를 향해 뻗어오자 충영은 피하지 않고 왼팔을 접어 방어하면서 동시에 오른 팔을 훅으로 날렸다.
퍽-
이번엔 제대로 꽂혔다.
동수의 왼쪽 옆구리에 훅이 박히자 동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도 충영의 왼팔에 막힌 자신의 오른 팔을 돌려 충영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퍽-
조금 늦었지만 동수도 충영의 옆구리에 한 방을 먹이자 주위에서 그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충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전의를 더욱 불태웠다. 자신이 먼저 가격했기 때문에 충격은 동수 쪽이 훨씬 더 받았고 자신은 한 번 방어한 다음 두 번째로 급조한 듯 지른 주먹에 맞은 거라 그다지 충격이 크지 않았다.
동수도 처음 접전에서는 자신이 조금 밀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부분이 또 맷집 좋은 거라 크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충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주먹을 날리는 듯 모션을 취하다 발차기를 하자 충영은 무릎을 들어 발을 막고 동수를 향해 총알같이 달려들었다.
“어엇!”
키가 큰 충영이 이렇게 근접한 거리로 달려들지 몰랐던 동수가 헛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충영의 몸놀림이 빨라 충영이 뻗은 주먹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퍽-
“어후!”
안타까운 탄성이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동수가 동물 같은 반사신경으로 주먹을 휘둘러 충영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팍-
옆구리를 맞은 충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는 손 끝에 느낀 감으로 얼굴을 맞은 동수의 충격이 꽤 컸다는 것을 느꼈고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를 향해 소나기 펀치를 계속 날렸다.
퍼벅- 퍽- 퍼벅-
얼굴과 몸에 무차별 난타를 당하는 동수도 이에 질세라 충영을 향해 두 주먹을 연이어 뻗기 시작했다.
퍽- 퍼벅-
두 사람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난타전을 벌이자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그들의 격투를 지켜보았다.
충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 응수타진 하듯 몇 수 겨뤄봤을 때 동수를 이길 충분한 자신이 생겼었다. 자신의 장점인 긴 다리와 테크닉을 이용하면 손쉽게 승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전투가 붙자 자신의 장점으로 이길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 충영의 정신상태는 성연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인 불안과 분노가 쌓여 있어 어디론가 분출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마침 동수란 상대를 만나 그에게 모든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다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퍽- 퍼퍽- 퍽-
마치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면 큰 일 날 것처럼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상대를 향해 끊임없이 펀치를 날렸고 그 덕분에 호사를 누리는 건 구경꾼들의 눈이었다.
“야. 이런 난타전을 봤나?”
“난타전이면 맷집 좋은 동수 형님이 유리하지. 형님이 이겼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했다.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걸로 예상했던 충영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맷집 좋은 동수가 오히려 조금씩 뒤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형님이 밀리잖아?”
그들은 몰랐다. 그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도 기술이 적용되고 많이 맞은 사람과 적게 맞은 사람, 충격이 큰 펀치를 날린 사람과 펀치를 작게 날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충영은 동수와 근접전을 하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그의 공격을 보았다. 그가 자신보다 약간 느리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펀치를 날리면 최대한 그 펀치를 작게 맞고 자신은 크게, 그리고 그가 큰 타격을 받을 만한 곳을 골라서 때리는 여유까지 부릴 수가 있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충영의 펀치를 무수히 맞은 동수는 시간이 지나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
동수가 뒤로 밀리며 약간의 틈이 생기자 충영은 마음먹고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그가 크게 휘두르는 펀치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동수가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회다.’
발차기를 할 공간이 생기자 충영은 체육관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옆차기를 했다.
퍽-
강하게 뻗어 찬 발이 정확하게 동수의 옆구리에 꽂히자 충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하지만 충영은 뒤이어 돌진해 오는 동수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내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놀란 생각은 잠시, 충영은 뻗은 발을 얼른 회수하며 안정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약간은 방심했고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의 동작은 완전치가 못해 그가 자세를 잡았을 땐 이미 동수의 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퍽-
“으윽!”
명치에 동수의 주먹이 꽂히자 충영은 숨넘어갈 것처럼 신음소릴 내며 뒤로 두 걸음을 순식간에 물러섰다.
“와아!”
“역시 동수 형님이다.”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충영은 두 다리를 바닥에 굳건하게 딛고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이 놈 봐라. 방심했다간 질 수도 있겠는데?’
충영은 난생 처음으로 패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세를 신중하게 잡았다. 상대가 글러브를 끼고 있었으니 다행이지 만약 맨주먹이었다면 자신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충영은 자신이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기술이 좋다고 자만했던 마음을 버렸다.
상대를 경시했던 마음을 버리자 몸도 편안해지고 승부욕은 더욱 불타오른다.
충영은 두 주먹을 툭툭 서로 마주치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동수 역시 충영을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이다. 자신이 참고 기다리며 날렸던 회심의 일격을 맞고도 별다른 충격 없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충영의 모습을 보니 문득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타앗!”
충영이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자 동수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서자 충영은 더 이상 무리하게 달려들지 않고 탐색하듯 조금씩 다가가며 그를 압박했다. 선을 그어 경계를 정한 곳까지 밀리다 나중에야 그것을 깨달은 동수가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짓더니 충영을 향해 돌진해왔다.
“얍!”
동수가 곰처럼 달려들자 충영은 그걸 피하려는 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몸을 피하는 듯 했던 충영의 몸이 다시 동수 쪽으로 틀어지더니 그의 오른 발이 그대로 동수의 몸에 꽂혔다.
퍼억-
강력한 옆차기가 달려오는 동수의 옆구리에 정통으로 박히자 동수의 몸이 달려오던 힘에 못 이겨 충영의 몸을 두 팔로 안고 그대로 앞으로 쏟아졌다.
동수가 자세를 잃고 자신의 몸을 끌어안자 충영은 한 발로 버티며 뒤로 겅중겅중 뛰며 눈앞에 보이는 동수의 등을 향해 팔 뒤꿈치를 그대로 내리 찍었다.
퍽-
“으윽!”
인정사정없이 내리 꽂히는 충영의 이번 공격은 타격이 너무 커서 동수가 굵은 신음소릴 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충영의 발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동수의 얼굴을 걷어찼다.
퍼벅-
“욱!”
앞으로 주저앉던 동수의 몸이 다시 뒤로 꺾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후우!”
충영이 긴 한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펴자 그제야 사람들이 승자인 그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대단하네. 동수 형님을 저렇게 보내버리다니.”
“정말 멋진 시합이야. 앞으로 이런 경기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야.”
“경기 시간이 쉬는 시간 없이 10분이 넘었어.”
“대단한 체력들이야.”
충영이 동수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으응. 괜찮아.”
동수가 아직도 흐린 시선으로 충영을 보는데 얼굴이 피범벅에 말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충영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있는 것은 당연했고 동수에게 자신도 수없이 맞았기 때문에 얼굴이 장난 아닐 것이다.
충영이 동수의 몸을 부축하고 성연에게 가자 그녀가 동수에게 물었다.
“삼촌. 괜찮아?”
“으응. 괜찮다.”
“괜찮은 것 같지 않은데? 병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 정도는 아니야. 정 사장! 내가 졌어. 젊은 친구가 정말 대단하네. 맷집도 좋고 기술은 나보다 여러 수가 앞서던데. 정말 탄복했네.”
동수가 충영 앞에서 고개를 숙이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단합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충영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찬사에 미소를 지으며 동수에게 말했다.
“하하. 나도 오늘 처음으로 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진심입니다.”
“자.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성연이 충영의 손을 잡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친구하고 가끔 놀러 올 테니까 그렇게들 알고.”
충영이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다음에 올 때 제가 거하게 한 잔 쏘겠습니다.”
“하하. 기대하겠습니다.”
“잘 가십시오. 형님.”
사람들의 막대한 환대를 받으며 충영은 성연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차를 타고 가다 한강이 보이자 성연이 갑자기 고수부지로 빠졌다.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우더니 그녀가 코를 킁킁, 거렸다.
“으후! 땀냄새...”
“으응. 나도 백화점 들어가기 전에 좀 씻어야 할 텐데.”
“가만있어 봐.”
성연이 충영의 와이셔츠 단추를 급하게 풀자 그의 맨 가슴이 드러났다.
“흐음. 이 냄새...”
성연이 그의 품에 파고들더니 겨드랑이에 얼굴을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작은 젖꼭지에 가져가 혀를 내밀어 꼭지를 핥았다.
“으음!”
젖꼭지에 자극이 오자 충영이 신음소릴 낸다.
쭉쭉-
콩알보다 작은 그의 젖꼭지를 성연이 혀로 핥다가 입술로 빨고 또 이로 잘근잘근 씹기도 한다.
“이 땀냄새... 너무 좋아.”
성연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가슴을 탐하자 충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만지려다 흠칫, 망설였다.
‘만지면 또 싫어하는 것 아닐까...’
워낙 성격이 변화무쌍한 여자라 이렇게 만지는 것 하나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점점 젖꼭지로부터 오는 자극이 강하게 느껴지자 충영은 결심하고 손을 뻗어 성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아니나 다를까, 그가 머리카락을 만지자 성연이 애무를 그만 두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나. 누가 내 몸 만지는 거 아주 싫어하는데...”
성연이 그렇게 말하자 충영은 얼른 그녀에게서 손을 거둬들였다.
“미안.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정도는 봐줄게. 괜찮아. 지금 내 기분도 좋고...”
성연이 별로 싫은 표정을 짓지 않고 말하자 충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 좀 보고 싶다.”
성연이 충영의 자지가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손을 뻗어 지퍼를 내린다.
충영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녀가 혁대를 풀고 팬티를 끌어내리자 이미 발기하여 분기충천한 자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머! 역시. 엄청난 물건이야. 이렇게 큰 게 그 좁은 속에서 있기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성연이 주저하지 않고 귀두를 입에 물었다.
“으음!”
성연이 자지를 빠는데 힘은 있지만 그 기술이 별로 뛰어나지 않아 충영은 그녀가 말과 행동은 상스럽게 하지만 남자 경험은 별로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연이 오랜 시간 동안 자지를 빨자 충영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며 말했다.
“조금 만져도 돼?”
“우웅.”
성연이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지를 입에서 빼지 않는다.
성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충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비록 머리카락이지만 그의 손길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었고 성연도 그의 애무가 싫지 않은 듯 흐응, 신음소릴 연신 흘리며 그의 자지 빨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자지를 빨던 성연이 갑자기 그것을 뱉어내더니 소리쳤다.
“하아. 미치겠다. 하고 싶어.”
“그럼 가까운 호텔로 갈까?”
충영이 부드럽게 유혹하자 성연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갈등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흔든다.
“아니. 참아야지. 명기 새끼가 맘에는 안 들지만 그래도 내 남편이니까 자식 하나 낳을 때까지는 참을래.”
성연이 그에게서 물러나자 충영은 옷을 정리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정말 의외다. 성연이 너를 내가 정말 잘못 본 거 같아.”
“왜? 내가 바로 섹스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응.”
성연이 웃는 충영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원칙이 있고 삶의 철학도 있어. 어때? 이제 내가 좀 근사해 보이지 않니?”
말을 하며 성연이 웃는다.
“하하. 그래. 그런 것 같다.”
“이제 그만 가자. 너도 얼굴이 점점 더 붓는 것 같은데 사우나도 하고 좀 쉬어라.”
“응. 근처 사우나에 내려주고 가라.”
“오케이.”
충영을 사우나에 내려주고 성연이 차를 출발하자 그는 사라지는 그녀의 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성연이 너란 여잔 어떤 여자냐? 후우... 아직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 조금 더 지켜볼 수밖에...”
하지만 성연이 상황을 막장으로 몰고 갈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아 충영은 조금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충영이 성연의 노예가 되기로 한 날로부터 3개월이 조금 못 되는 어느 날.
충영은 드디어 대성백화점 본사 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본사로 들어가기 이틀 전 충영은 화양지점으로 출근했다.
송지영 본부장과 이기영 비서실장, 그리고 말단비서인 최나윤까지 불러 충영은 그들을 데리고 본사로 가겠다고 말했고 그 전부터 그에게 말을 들어온 세 여자는 긴장하면서도 기대가 넘치는 표정으로 기꺼이 충영을 따라가겠다고 했다.
박기식 사장대행에게 간단한 인수인계를 하고 충영은 식당가로 갔다.
한식당 한가위에 들러 그는 한창 일하고 있는 직원들 중에서 경진을 찾았다.
‘어! 저렇게 몸매가 좋은 여자가 직원으로 있었나?’
직원들 중 유난히 뒷모습이 예쁜 한 여자를 발견하고 충영의 눈이 그녀를 계속 쫓았다.
전반적으로 날씬한 몸에다 다리가 길고 히프가 볼록 튀어나와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고 있는 몸매다. 날씬한 허리에 몸을 약간 틀어주니 탄력 있게 솟은 가슴 라인이 환상적이다.
‘어라? 경미잖아?’
끝내주는 몸매라고 생각했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충영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참. 방학이구나.”
방학이면 경미와 경희가 엄마와 언니를 도와 같이 일을 하러 나오는데 오랜만에 들르다보니 그걸 깜박한 것이다.
‘누가 이제 고1이라고 생각하겠냐?’
경미의 몸이 성인여자보다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는데 좆 달린 남자라면 그녀의 몸을 보고 음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3년이나 기다려야 하나?’
경미가 대학 들어가면 자신의 여자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부쩍 여인으로 성장해가는 경미를 보니 더 이상 미룰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경미야!”
충영이 부르자 경미가 그를 보더니 곧바로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오빠!”
그녀가 자신을 향해 펄쩍 뛰어오르자 충영은 그녀의 몸을 안아서 곧바로 위로 올렸다.
“어이쿠. 우리 경미. 몸이 무거워졌네?”
경미가 그의 허리에 두 다릴 감더니 그의 목을 두 팔로 얼싸안았다.
“오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그러게 일주일만인가?”
충영이 웃으며 말하는 데 옛날에 화양지점에만 근무할 때는 날마다 경미와 식구들을 봤었다. 경미도 방학이면 아침부터 나와서 일을 돕고 방학이 아니더라도 학교가 파하면 바로 백화점으로 오기 때문에 충영과 날마다 얼굴을 보고 살았었다. 그런데 충영이 강남과 화양을 둘 다 관리하게 되자 그게 불가능해져서 이렇게 며칠 만에 한 번씩 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제 본사로 가면 더욱 뜸해질 것 같아서 충영은 경미의 몸을 꼭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경미야. 오빠 많이 보고 싶었어?”
“응. 오빠는? 경미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그러니까 경미 보러 지금 왔지.”
“응. 오래 있다가 가라.”
“하하. 알았다.”
충영은 몸에 와 감기는 경미의 촉감이 너무 좋아서 그녀를 놓아주기가 싫었다. 안아보면 몸이 뻣뻣한 여자가 있고 나긋한 여자도 있다. 그리고 경미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만점인 몸은 남자로 하여금 자꾸만 안아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귀여운 녀석!’
충영은 미소를 지으며 경미의 몸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어느 누가 있어서 경미처럼 자신을 대놓고 반길 여자가 있겠는가? 경미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만이 속으로 품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고 충영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반기며 따르는 경미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오빠!”
충영이 고개를 들어보니 경희가 밖에서 들어오며 그를 부르고 있다.
“경희야.”
경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한다.
“본사로 발령받았다며? 축하해.”
“응. 고맙다.”
“축하는 하지만 본사로 가면 오빠랑 지금처럼 자주 보지는 못 하겠네?”
“그래도 자주 올 거야. 우리 경미랑 경희 보러 와야지.”
“그래.”
경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보는데 그녀 역시 마음에서 아직 충영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대학생활을 즐겁게 하면서 가끔 남자도 만나는 모양이지만 몸을 섞는 것은 충영과만 했다. 충영도 자신에게 몸과 마음을 주고 있는 경희를 마다하지 않고 그녀와 시간이 날 때마다 따로 만나서 주기적으로 섹스를 해오고 있었다.
“언니 불러올까?”
경희의 말에 충영이 묻는다.
“언니 어디 있어?”
경미가 대답한다.
“주방에 엄마랑 같이 있어.”
“그럼 경희가 가서 언니 좀 불러 다오.”
“응. 알았어.”
경희가 주방으로 가자 충영은 경미의 뺨을 만지며 그녀의 얼굴을 따뜻한 표정으로 보았다.
‘......!’
여자나 남자 모두 나이가 무기다.
이제 한창 피어나는 꽃처럼 경미의 얼굴 역시 생기 있고 아름답게 보인다.
“오빠!”
문득 경미가 전과 다른 음성으로 그를 부른다.
“응. 왜?”
“나, 이제 3년 있으면 대학생이 돼.”
“응, 알고 있어.”
경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보는데 순진한 그녀인지라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이 얼굴에 다 나타나 있었다.
지금 여자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경미를 충영은 가만히 안아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경미. 오빠가 경미 사랑하는 거 알지?”
“응. 나도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경미의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키스라도 하고 싶은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다.
“오빠!”
경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충영은 주방 쪽을 보았다.
‘......!’
그곳에서 세 여자가 자신을 향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경희와 경진, 그리고 그들의 엄마인 미옥까지 보이는데 세 여자 모두 자신과 몸을 섞은 사이다. 물론 미옥은 용평에서 단 한 차례 몸을 섞은 뒤 다시는 곁에 두지 않았지만...
“언제 본사로 가는 거야?”
경진이 다가와 묻자 충영은 먼저 미옥을 향해 인사한 뒤 경진에게 말했다.
“내일 하루 쉬고 모레부터 출근이야.”
“아. 이제 자주 못 보겠네?”
“그래도 시간 내서 들를 거야. 여긴 신임 사장한테 특별하게 신경 써달라고 말 했으니까 아무 염려하지 말고 장사에만 전념해.”
“응. 장사는 이제 궤도에 올라서 열심히만 하면 돼. 아직 식사 시간 되려면 멀었으니까 차나 한 잔 마시자.”
“그래.”
탁자 하나를 잡아 앉은 뒤 충영은 차를 마시며 경진과 얘기를 나눴다.
“오빠. 우리 이번에 집을 옮길 계획이야. 좀 큰 데로.”
“그래? 잘 됐다. 돈은 충분해?”
“응. 장사가 잘 돼서 돈 걱정은 없어. 모두 오빠 덕분이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다 어머님이랑 경진이 네가 고생한 덕분이지.”
“그래도 이런 좋은 장소가 있으니까 돈도 벌 수 있는 거지. 이렇게 목이 좋은 곳이라면 어느 누가 들어와도 안 될 수가 없어.”
“하하. 아무튼 큰 데로 이사한다니까 내가 기분이 좋다. 어차피 다섯 식구들 모두 계속 같이 살아야 하니까 좀 넉넉한 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40평대로 하려고. 방 네 개짜리로 구하면 각자 방을 하나씩 쓸 수 있으니까...”
“그래. 잘 됐다.”
충영이 웃는데 경진이 그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요즘 경미가 진짜 공부 열심히 해. 3년 후에 꼭 대학 간다고.”
“하하. 그래?”
충영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자 경진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꼭 종교 믿는 것처럼 대학 갈 날만 기다리고 있어. 경미 같은 애들은 뭐 하나 정해주면 그걸 맹목적으로 믿고 지키려는 게 있거든. 아무튼 오빠 책임이 막중하다.”
“경미는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내가 꼭 지켜줄 거야. 집 옮길 때 돈 부족하면 말 하고.”
“아니. 대출 받을 거야. 이 정도는 우리 힘으로 하고 싶어.”
“그래. 우리 경진이는 정말 마음씨가 착해. 천사가 따로 없다니까.”
충영이 칭찬하자 경진이 그의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오빠 앞에서만 그래. 오빠한테 이렇게 천사라는 말 듣고 싶어서...”
“하하. 아닌 것 같은데? 넌 원래부터 천사였어.”
“호호호.”
두 사람이 크게 웃자 경미가 충영의 뒤에서 그의 목을 두 팔로 안으며 말했다.
“오빠. 경미도 같이 웃을래.”
“그래. 우리 경미. 이리 와.”
충영이 두 팔을 벌리자 경미가 그의 무릎에 앉더니 대뜸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
“하하.”
충영은 경미의 몸을 안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이쪽 식구들과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화양 지점과 강남을 오가며 인수인계를 마친 충영은 다음날 백화점 휴무일에 맞춰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 마침 백일을 맞이한 딸을 보기 위해 정희의 집으로 찾아갔다.
딩동-
문이 열리자 충영은 아기를 안고 자신을 맞이하는 정희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와.”
정희의 엄마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자 충영은 그녀를 향해 준비한 선물을 내밀고 물었다.
“아버님은요?”
“응. 잠시 나가셨는데 점심시간에 맞춰서 곧 돌아오실 거야.”
“예.”
충영은 정희에게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
품에 안긴 딸이 그를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는다.
커다란 두 눈이 자신을 보며 웃자 충영은 그 어떤 명화를 본 것보다 더욱 큰 감동을 받으며 뺨을 고사리 같은 손에 댔다. 그러자 딸 지성이 아빠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후후. 우리 지성이가 한 번씩 볼 때마다 쑥쑥 자라는구나.”
충영이 대견하여 지성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아빠인줄 아나 봐. 우리 지성이가 굉장히 좋아하네.”
정희가 옆에서 웃고 있자 충영이 물었다.
“그런 거야? 난 잘 모르겠는데...”
“응. 원래 낯을 안 가리는 편이긴 하지만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평소에 침착한 편인데 지금은 굉장히 들떠있어.”
“하하. 우리 딸... 얼굴이 엄마 닮아서 참 예쁘게 생겼어.”
“호호.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셔. 지성이도 아버지를 제일 따르고.”
그때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정희의 엄마가 끼어들었다.
“내가 요즘 지성이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네. 정희 아버지가 어찌나 손주만 좋아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하고 일만 마치면 우리 지성이 얼굴 보려고 딴 데 새질 않아요. 더구나 입에서 술 냄새 날 까봐 그 좋아하던 와인도 잘 안 마신다니까.”
“하하.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기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지성일 보면 마음이 괜히 뿌듯하고 왠지 제가 어른이 된 것 같고, 좀 묘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손주가 있다는 걸 아시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텐데...”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충영이 정희에게 말했다.
“그런데 지성이 할아버지는 이름을 짓는 게 좀 독특하신 것 같아.”
“......?”
정희가 쳐다보자 충영이 웃으며 말했다.
“정희 씨는 이름이 박정희, 그리고 우리 딸은 박지성. 모두 유명하다 못해 한 방면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잖아?”
“나도 그게 좀 못마땅해서 아버지한테 항의를 해 봤는데 그분은 전혀 그런 의도로 하신 게 아니라 그냥 책을 찾아 연구해서 가장 좋은 이름을 지으신 거라니까 달리 할 말도 없어 그냥 수긍하고 말았죠. 그리고 부모님 집에서 얹혀사는 주제에 내가 뭐라 따질 형편도 아니고...”
“후후. 우리 지성이도 나중에 크면 한 자리 하려나?”
충영이 지성의 얼굴을 보고 까꿍, 하며 어르자 아이가 기어이 까르르, 소릴 내며 웃는다.
“어어. 웃었다. 우리 딸이 날 보고 웃었어.”
충영이 딸의 얼굴을 보고 같이 웃는데 이런 단순한 일로 마음이 이토록 흡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충영은 과연 자식이란 게 뭔지, 가족이란 게 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어제 봤던 경진의 식구들도 가족이지만 여기 정희의 식구도 자신의 다른 가족인 것이다.
낮에 점심식사를 하며 정희의 가족들과 한 때를 보낸 충영은 집으로 와서 모처럼 명기와 술을 한 잔 할 기회를 가졌다.
충영의 방에서 와인으로 건배를 하고 난 뒤 명기가 충영에게 말했다.
“내일 본사 사장으로 정식 출근이라며?”
“응.”
“축하한다. 충영이 넌 한 번 경영에 발을 들여놓더니 거침없이 올라가는구나.”
“명기 너도 마찬가지잖아? 네가 맡은 건설회사 잘 나간다며? 지금 재계에서 소문이 자자해.”
“후후.”
명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 가정을 완전히 팽개치고 일에만 매달리는데 성과라도 좀 있어야지.”
“왜? 성연 씨하고는 아직도야?”
“응.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이번 주엔 병원에도 가봐야 해.”
“병원에? 왜. 누가 아파?”
충영이 연이어 묻자 명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게 아니라 아기 때문에.”
“뭐? 성연 씨 임신했어?”
“아니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이 안 된다고 성연이가 같이 검사 좀 해보자고 그런다.”
“아직 이른 거 아냐? 결혼한 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그러게 말이다. 사 개월인가? 아무튼 몇 번 노력하긴 했지. 그런데 성연이는 초조한 가봐. 무슨 결혼한 목적이 아기를 갖기 위해선지 필사적이야. 두 사람 사이에 누가 문제가 있는지 검사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대책을 찾자고 하는데 마땅히 거절할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검사하러 가는 것도 얼굴 부끄러운 일이고. 하여간 한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나를 성가시게 한다.”
“으음.”
충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명기에게 말했다.
“검사 정도는 받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성연 씨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어차피 명기 너도 아길 갖기는 해야 하잖아? 그냥 하자는 대로 해 줘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우리 지정병원에는 가기 싫어. 영진이 누나도 입원해 있는데 나까지 가서 이목을 끄는 게 싫다. 그렇다고 성연이가 잘 아는 병원도 그렇고. 충영이 너 어디 추천해줄 만한 병원 없냐?”
“음. 잘 알진 못하지만 이번 집사람 임신문제로 검색해 본 병원이 있긴 해. 산부인과 쪽에서도 임신과 관련된 분야는 성림병원이 잘 본다고 그러던데. 그리 한 번 가 봐라. 서로 모르는 데로 가는 게 공평하고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할게. 아무튼 결혼하고 나니까 하기 전보다 좋은 게 별로 없다. 어쩌다 수빈이 생각도 가끔 나고...”
“그래?”
“수빈인 강남에서 계속 잘 근무하고 있지?”
“그럼. 그런데 이번에 나 본사로 가면 수빈이도 본사로 영입할까 생각 중이야. 수빈이 걔가 워낙 일을 잘 하니까 많은 도움이 되더라. 너도 알다시피 머리 쓰는 쪽은 내가 젬병이잖아?”
“후후. 그래라. 수빈이만 생각하면 내가 마음이 너무 무겁다. 수빈일 버려서 내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내 대신 충영이 너라도 수빈이한테 잘 해 줘라.”
“응. 그럴게.”
“충영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내가 수빈이한테 연락해도 걔가 날 만나줄까?”
“명기야.”
충영이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으응. 뭐 지금 연락할 생각은 없어. 염치도 없고. 하지만 요즘 가끔씩 수빈일 생각하면 한 번씩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글쎄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닌 것 같아. 말은 안 하지만 수빈이 마음 속에 아직 너에 대한 상처가 남아 있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그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도록 해라.”
“알아.”
명기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당장은 절대로 연락 못 하지. 결혼한 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염치없이 그럴 수가 있겠니? 아무튼 수빈이 내치지 말고 잘 해 줘라. 나중에 어찌될지 모르니까.”
“응. 알았다.”
충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명기야. 수빈이는 이미 내 여자가 됐는데 어쩌냐?’
그리고 문득 명기가 만약 수빈이와 다시 연락을 한다면 수빈이 그를 만나줄까, 아니면 아예 자신을 버리고 명기한테 가버릴까... 그게 궁금해졌다.
본사에 정식으로 출근한 충영은 긴장을 버리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처음 혼자 들어갔던 그는 이내 수빈과 송지영, 그리고 이기영 실장과 비서 최나윤까지 다 불러들여서 자신의 최측근에 두고 본사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장 업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간 어느 날.
본사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는 충영의 휴대폰에 성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쩐 일이야?”
충영이 묻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화가 잔뜩 난 성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로 좀 와.”
“거기가 어딘데?”
“성림병원. 차 가져오지 말고 택시 타고 와.”
‘성림병원이면...’
며칠 전 명기가 검사를 받기 적당한 곳을 묻자 충영이 추천해준 병원이다.
“알았어. 지금 갈게.”
충영은 두말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성림병원으로 갔다.
산부인과 앞에서 성연을 만난 충영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잔뜩 긴장했다. 지금껏 그가 보아온 성연의 얼굴표정 중에서 지금이 가장 최악이었던 것이다.
‘......!’
의자에 앉아 있던 성연은 충영을 보자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성연이 화를 내며 주차장으로 가자 충영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우. 씨팔... 진짜로 화가 나 미치겠다.”
성연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녀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한 충영은 그녀를 절대로 건드리지 않고 가만있었다. 그 동안 괜히 위로한답시고 건드렸다가 뒷감당도 못하고 봉변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충영에게 운전을 맡긴 성연은 조수석에서 분에 못 이겨 두 손으로 콘솔박스를 탕탕,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씨팔. 명기 그 재수 없는 새끼.”
이쯤 되면 충영도 그녀에게 말을 안 걸 수가 없다.
“왜 그래?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충영이 차를 출발시키며 묻자 성연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씨팔. 네 제일 친한 친구, 명기 새끼하고는 자식을 가질 수 없단다.”
“왜? 명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
“어우 씨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충영은 몹시 궁금했지만 꾹 참고 운전에 열중했다.
“어디로 갈까?”
충영이 다시 조심스럽게 묻자 성연이 툭 던지듯 말한다.
“집으로 가.”
“응.”
충영이 운전에 정신을 쏟을 때 성연이 말을 꺼냈다.
“명기하고 나는 같이 아기를 만들 수 없는 체질이란다.”
“왜?”
“우선 명기의 정자는 활동량이 부족하대. 그리고 내 난자는 너무 기가 세다고 하나? 아무튼 내 난자와 명기 정자가 합쳐지니까 내 난자 안에서 명기 정자가 흐물흐물 다 녹아버리더래. 흐흐. 몇 번을 실험했는데 그때마다 한 번도 다르게 나오지 않고 모두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며... 그 젊은 의사 새끼가 자기도 말로만 들었지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며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 나를 쳐다보는데 하마터면 그 새끼 면상을 갈겨버리려다가 그냥 욕만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나왔다.”
“정말 그런 경우도 있는 거야?”
“나도 모르지. 이번에 처음 그런 말도 들었으니까.”
“그래서 속궁합이란 말이 생겼나?”
충영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성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 생각 했다. 난 그저 속궁합 좋다는 말은 성기 사이즈가 딱 맞고 섹스하기 좋은 그런 것만 생각했는데 내가 이런 더러운 경우를 당하고 보니까 아기를 갖는 데도 궁합이란 게 있는 거구나, 생각이 들더라.”
“그것 참...”
충영도 할 말이 없어 한 동안 침묵을 지키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성연이 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지. 그러니까 의사 하는 말이 내 난자는 활동성이 아주 강한 정자와 결합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임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야.”
“현대의학이 발달했는데 그런 것도 해결 못 할까?”
“100프로 불임이란 건 없으니까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대. 정자의 활동을 최대한 증가시켜서 수정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 사실 지금의 의학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그런다. 명기의 정자는 내 난자에 닿기만 해도 그냥 녹아버린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다. 나하고 명기가 얼마나 안 맞으면 난자하고 정자가 그럴 수 있을까?”
“으음.”
충영은 지금 성연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동기야 어떻든 성연은 결혼한 이래 오직 임신하기 위해 모든 심력을 다 쏟아 부었는데 그 결과가 이리도 참담한 것이라 실망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씨팔. 아버지가 알면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는데...”
풀 죽은 음성으로 성연이 중얼거리자 충영이 물었다.
“왜? 홍기준 씨... 혹시 친 아빠가 아니야?”
“아니. 친 아빠, 맞아. 나 태어날 때 제일 먼저 한 게 친자확인검사라는데 아닐 리가 없지.”
“뭐야. 친자확인검사를 제일 먼저 했다고?”
“우리 집안은 원래 그런 집안이야. 그리고 아빠라는 사람은 무섭고 치밀한 사람이지. 겉으로 보기엔 작은 아버지가 조폭두목이라 사람들이 제일 경계하지만 진짜로 무섭고 두려운 사람은 우리 아빠야. 작은 아버지는 대지도 못해. 친 딸이라고 평소에는 예뻐해 주다가도 실수라도 하면 절대로 봐주는 법이 없어.”
충영은 두려움에 떠는 성연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이런 지랄 맞은 성격이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씨팔.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냐? 마음이 편해야지.’
충영은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뭐 알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부모가 등 떠밀어서 한 결혼에, 너는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왔고... 뭐가 문제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네 아버지도 다 이해해 주실 거야.”
“그렇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니까? 이 문제는 무조건 내가 해결을 해야 해.”
성연이 침묵을 지키자 충영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 차가 집에 도착하자 성연이 그에게 말했다.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렸다가 눈치껏 내 방으로 들어와.”
“응.”
집으로 들어가자 마침 화영도 출타 중이라 충영은 안심하고 성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성연이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충영은 먼저 문을 잠갔다.
“여기 앉아.”
성연의 바로 옆에 충영이 앉자 그녀가 물었다.
“너, 혈액형이 뭐야?”
“O형.”
“나도 O형이고 명기는 A형이니까... 그럼 어떻게 되지?”
“뭐가?”
“몰라서 물어? 너하고 내가 아기를 갖게 되면 혈액형은 속일 수 있는 거냐고?”
“뭐? 너하고 내가 아기를 갖는 다고?”
“그래. 나하고 너 사이에 아기가 만들어지면 그 아기의 혈액형이 명기와 나의 아기기 나왔을 때랑 일치하는 점이 있을 수 있냐는 말이야.”
“나도 몰라. 그런 것은...”
“씨팔. 너도 멍청한 놈이지? 둘 다 머리가 별론데 그 사이에서 아기가 나오면 머리 영리한 놈 기대하긴 틀렸구나.”
“야. 난 싫어. 너하고 그런 쪽으로까지 엮이긴 싫다.”
충영이 대놓고 말하자 성연이 코웃음을 쳤다.
“야. 너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야. 이미 너하고는 한 배를 탈 생각을 해서 사실대로 다 말을 해준 거라고. 그런데 여기서 너만 빠지면 난 어쩌라고. 내가 너 말고 다른 남자한테서 아길 갖게 되면 너한테 최고로 약점만 잡히는데, 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그럴 바엔 너하고 수진이 문제 모두 다 까발리고 이혼하는 게 낫지.”
“이런...”
충영은 성연에게 화를 내려다 이를 깨물며 참았다.
어차피 그녀가 원한다면 자신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과 성연이 관계를 그런 식으로 맺는다면 어차피 수진과 자신에 대한 성연의 위협은 물 건너가게 된다. 성연이 같이 죽자는 식으로 나오지 않는 한 그 비밀을 까발리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엄연히 성연이다. 그녀의 말을 거절할 형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말대로 하면 일이 더욱 꼬이게 되고 끝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충영이 심란한 표정을 짓자 성연이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며 다정하게 말한다.
“아직 정한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혈액형이 안 되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할 거니까.”
“나중에 친자검사하게 되면 어쩌려고?”
충영이 걱정스럽게 묻자 성연이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먼저 검사해서 갖다 바칠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태어났을 때도 우리 아빠는 내가 자기 자식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친자검사부터 했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었대? 너희 아버지는...”
“결혼을 두 번이나 했고 또 다른 여자들도 많았는데 아빠는 여자에게서 한 번도 임신을 시켜본 적이 없었어. 그러다 여고 3학년인 우리 엄마를 보고 첫 눈에 반해서 강제로 몸을 강탈한 거지. 그런데 우리 엄마가 처녀였어. 처녀인데다 나중에 임신까지 하게 됐는데도 아빠는 엄마가 자기 자식을 낳지 않고 다른 놈의 씨를 낳은 것이 아닌 가 의심해서 친자검사를 했다는 거야. 뭐. 이해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 아빠네 집안이 원래 손이 귀한 집이거든. 작은 아버지도 자식이 없고 오직 아빠에게서 나온 나만이 유일한 자식이지.”
“최고의 상속녀구만.”
충영이 부러운 듯 말하자 성연이 코웃음을 쳤다.
“소용없어. 아무리 상속녀라 해도 아빠는 자기 맘에 안 들면 바로 매질이야.”
“정말? 널 때린 다고?”
성연이 충영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는다.
“한 번 볼래? 그 동안 소장해 놓은 동영상이 많은데 내가 처음 찍었던 것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거든. 그게 화질은 안 좋아도 꽤 자극적이야.”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자.”
충영이 호기심에 고개를 끄덕이자 성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테입 하나를 꺼내왔다.
“이건 오래된 거긴 한데 아주 짜릿하고 재미있어. 다른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건데 너한테만 보여주니까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발설하면 안 돼?”
성연이 당부까지 하자 충영은 막대한 호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응. 너하고 한 배를 탔으니까 보여주는 거야. 사실 이게 우리집의 최대 수치거든.”
성연이 테입을 넣자 얼마 안 가서 화면이 떴다.
‘......!’
흐린 화면에 알몸으로 남녀 두 사람이 나오는데 충영이 자세히 보니 꽤 낯이 익은 얼굴들이다.
‘누구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보는데 남자는 오십 대 중반 정도, 여자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가 꽤 나 보인다고 충영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채찍으로 여자를 후려친다.
“아악!”
등에 채찍을 맞고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데 백설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등에 새겨지는 붉은 자국을 보자 충영의 마음에 차가운 선 하나가 그어졌다.
‘뭐야? 여잘 채찍으로 때려? 저게 말로만 듣던 그 가학물인가?’
짝- 짝-
영상에 남자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하게 잡히자 충영은 훅, 하고 신음소릴 냈다.
‘저 남자는 바로...’
남자의 얼굴은 성연의 아버지인 홍기준이었다. 지금보다 머리숱이 많고 주름살도 적었지만 분명 성연의 아버지 홍기준이 맞았다.
‘그렇다면...’
여자의 얼굴을 보고 충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바로 성연의 엄마인 김미자였던 것이다. 미자의 얼굴은 저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짝-짝-짝-
“아아. 아파요. 제발...”
미자가 연이어 가해지는 채찍질에 두 손을 모으고 애원하자 기준은 봐주는 게 아니라 더욱 세게 채찍을 때렸고 그녀는 조금이라도 맞는 부분을 줄이려고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
“이 년! 몸 똑바로 안 해.”
기준의 호통에 미자가 몸을 펴자 그는 서지도 않고 덜렁거리는 자지를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대뜸 미자의 풍만하게 솟은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그것을 터뜨릴 것처럼 강하게 주물렀다.
“아악! 아파. 살살. 제발...”
미자가 애원하면 할수록 기준은 더욱 힘을 주며 미자를 괴롭혔고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야차처럼 흉측해보였다.
퍽-퍽-퍽
처음엔 채찍이더니 다음엔 주먹질이다.
얼굴이든 몸이든 기준이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러 미자를 때리자 그녀의 입과 코에서 피가 터지고 몸은 바로 멍이 들며 얼룩이 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축 쳐져 있던 기준의 자지가 발기했다.
“으음. 엉덩이 대봐.”
기준이 발기한 자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명령하자 미자가 얼른 그의 앞에 엉덩이를 내밀며 개처럼 엎드렸다.
기준이 기다란 좆으로 미자의 엉덩이를 툭툭, 치더니 항문에 귀두를 갖다 댄다.
‘뭐야? 자지도 이상하고 항문에다 할 생각인가?’
기준의 자지는 굵기에 있어서 평균보다 가느다란 편이었지만 길이는 훨씬 길어서 꼭 꼬챙이처럼 보였다.
기준이 그렇게 기다란 자지를 항문에 대고 몇 번 문지르다 강하게 찔렀다.
“헉!”
미자가 몸을 부르르 떠는 가운데 기준은 긴 자지를 끝까지 다 넣고 왕복을 하기 시작했다.
퍽퍽퍽퍽퍽-
“아으으.”
기준이 힘차게 움직이다 손을 앞으로 뻗더니 미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아악!”
마치 말을 타며 고삐를 잡아채는 것처럼 기준이 미자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있는 힘껏 엉덩이를 움직인다.
“아아. 제발. 그만... 아파.”
“흐흐. 그래. 아파서 죽어라.”
기준이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미자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잡아챘다. 그러자 그녀의 목이 뒤로 확 꺾였고 기준은 그녀의 목을 뒤에서 감고 조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는 듯 미자가 억눌린 신음소릴 내는 가운데 기준의 좆질이 더욱 거세졌다.
“으으으. 씨팔 년!”
기준이 욕을 하며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하다 마침내 사정에 이른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후우!”
사정이 끝나자 기준이 미자의 항문에서 자지를 빼냈다.
‘......!’
충영은 기준의 좆을 보면서 여자의 가슴과 보지가 사람마다 다르듯 남자의 자지도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의 자지는 길고 가느다란 게 자신과 비교하면 굵기는 훨씬 가늘고 길이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길었다.
충영은 섹스가 끝난 후 미자의 얼굴을 보았다.
‘......!’
뭔가 이상했다.
섹스할 때는 그렇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그녀였고 끝난 후의 얼굴과 온 몸도 참혹한 모습이었는데 얼굴표정은 의외로 나쁘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여자들이 섹스를 하고 난 후 보이는 나른하고 기분 좋은 표정을 미자도 똑같이 짓고 있었다.
‘뭐야? 여자도 만족한 건가?’
충영은 처음엔 미자가 기준의 강압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끝난 후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도저히 그녀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테입이 다 되자 성연이 비디오를 끄고 충영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볼만 하지?”
“으응. 그런데 너무 충격적이다.”
“그래. 나도 처음 이걸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니까. 우리 아빤 완전히 변태야.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거든.”
성연이 약간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기억이 날 때부터 아빤 나랑 엄마를 많이 때렸어. 평소에 잘해 주다가도 잘못을 저지르면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거야. 엄마는 특히 심하게 때리고 나도 사정을 봐주진 않아.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무서웠는데 점점 크다보니까 나중에 이상한 걸 발견하게 됐지.”
“그게 뭔데?”
“아빠는 우리를 때리면서 흥분하는 거야.”
“뭐?”
충영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렸을 때는 몰랐어. 내가 잘못하면 그냥 때리기도 하고 발가벗겨서 때리기도 했어. 그런데 나는 발가벗고 맞는 게 더 좋았어. 왜냐하면 아빠가 날 알몸으로 만들어 때리면 훨씬 매질이 약하고 빨리 끝났거든. 어릴 땐 그저 안 아픈 게 좋으니까 아빠가 날 벗기면 속으로 좋다고 생각했어. 오늘도 많이 맞지는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다 중학교엘 가서 또 심한 잘못을 해서 아빠한테 맞는 날이 있었지. 그때 뭔가 느낌이 오더라고. 내 옷을 벗기더니 채찍으로 얼굴이며 몸을 때리는데 그 새끼의 눈이 이상하게 변하는 거야. 그, 뭐랄까, 음흉하고 더러운 눈빛. 그리고 밑을 보는데 아빠 자지가 바짝 서 있는 게 보였어. 씨팔... 날 때리면서 흥분하고 있구나, 그때 깨달았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나도 이성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을 때였거든.”
“으음!”
“고등학교엘 가니까 그제야 알몸으로 때리는 것은 그만 뒀지만 매질은 지금까지도 계속이야.”
“동영상은 언제부터 찍은 거야?”
충영이 묻자 성연이 바로 대답한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바로 찍은 거야. 내 첫 작품이지.”
충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부터 동영상 찍는 것에 취미를 붙였구나.”
성연과 친하게 지내면서 충영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게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고 또 보는 것만큼 촬영하기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성연이 고등학교 때 부모의 섹스 장면을 촬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이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내친 김이라고 생각했는지 성연이 자기 부모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하고 삼촌은 째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부모가 모두 교통사고로 죽고 남매만 세상에 남겨지니 엄만 초등학생인 삼촌을 먹여 살려야 해서 학교 다니면서 알바를 계속 뛰었어. 그렇게 하다 엄마가 고3때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조폭 건물의 경리로 들어가게 됐지.”
“아.”
“엄마가 거기 간 이유는 삼촌때문이었어. 중학교 때부터 삼촌은 싸움에 능해서 다른 사람하고 붙어 진 적이 없는데 하필 한 놈 때려눕힌 게 작은 아버지 회사에 다니던 조폭의 동생이었지. 그 보복으로 삼촌이 끌려들어가고 엄마는 동생 때문에 봐달라고 사정하러 작은 아버지 회사에 갔어. 그때 하필 거기 들른 아빠가 엄마의 얼굴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해서 바로 경리 일을 보게 된 거지. 그렇게 몇 달을 다니다 엄마는 아빠한테 낚여서 몸을 주고 나까지 임신하게 됐어. 그러자 아빠는 엄말 따로 빼내 세컨드로 만들고 삼촌은 조직에서 계속 뒤를 봐주게 됐어.”
“으음. 그렇게 인연이 만들어진 거구나.”
충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나를 낳고 내가 아빠 핏줄이 확실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때부터 엄마와 삼촌의 대우가 확 달라졌어. 그렇지 않아도 운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삼촌은 조직에서 급부상하는 재목으로 커갔고 엄마는 아빠가 이혼을 하고 호적에 올려주자 정식으로 아빠의 와이프가 된 거지. 어때. 이제 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는지 대강 짐작이 가지?”
“응. 너도 순탄한 인생은 절대로 아니구나.”
충영의 말에 성연이 쓴 웃음을 짓는다.
“그래. 내 소원은 우리 아빠가 빨리 뒈져서 이 세상에 없어지는 거야. 변태 새끼. 교통사고라도 나서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나이가 꽤 있으니까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냐? 엄마하고는 나이 차가 꽤 나지?”
“응. 스무 살 정도 차이 나.”
“그럼 20년만 참으면 되겠다.”
충영이 웃으며 말하자 성연이 입술을 깨문다.
“20년이 지나도 살아있으면 그때는 내가 그 놈을 콱 죽여 버릴 거야.”
“하하. 그런 생각은 버려.”
충영이 부드럽게 말하며 성연의 어깨를 쓰다듬자 그녀가 그의 몸을 침대로 밀었다.
“어어!”
충영이 쓰러지자 성연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타더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갖다 댔다.
‘......!’
그 동안 꽤 친하게 지냈지만 입술끼리 닿는 것은 처음이다.
충영이 가만있자 성연이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네가 있어서 정말 위안이 돼. 이 집으로 오기 전에는 삼촌이 내 보디가드였는데 지금은 충영이 네가 내 수호천사야. 특히 오늘 같은 때 네가 없었다면 난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서 아마 미쳐버렸을 거야. 너하고는 끝까지 걸 거니까 그렇게 알아.”
성연이 다시 고개를 숙여 키스하자 충영은 그녀에게 입술을 내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야. 난 네 수호천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난 수진이 수호천사야. 제발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충영은 속으로 간절하게 외쳤지만 한창 분위기에 젖어서 달콤한 키스를 하고 있는 성연의 귀에 들어갈 리 만무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회사에 있는 충영에게 성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
“나 지금 집에서 출발했어. 강남에 있는 한국호텔로 가는 중이니까 거기서 만나.”
충영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한 시간 있다가 갈 테니까 방 잡고 다시 연락해.”
“응. 알았어.”
전화를 끊고 충영은 생각했다.
이틀 전에 성연은 어디서 알아봤는지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도 혈액형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자신의 배란기에 맞춰 섹스를 하자고 요구해왔다.
성연이 자신을 택한 이상 충영은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 성연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자신만큼 확실한 남자가 없을 것이었다. 뒤탈 걱정도 없고 신체 건강한 데다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하다. 이처럼 확실한 임신도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화를 끊고 잠시 더 업무를 본 뒤 충영은 시간에 맞춰서 백화점을 나섰다.
“후우. 정말 이러다가 나 끝장나는 거 아닐까?”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충영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충영이 아무리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또 성연이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라 해도 이번만은 내키지가 않았다.
만약 성연이 임신을 해서 자신의 아기를 낳고 그게 세상에 알려진다면 자신은 얼굴을 들고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저질러 놓은 것들이 많은데 만약 들통이 나면 부모를 비롯해서 자신을 알고 있는 여자들이 엄청 실망할 것인데 생각만 해도 아찔한 기분이 든다.
“씨팔... 할 수 없잖아?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제 와서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
충영은 중얼거리며 품속에 들어 있는 소형녹음기의 성능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딩동-
벨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리며 성연의 얼굴이 보였다.
충영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문을 닫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샤워부터 할까?”
성연이 묻자 충영이 고개를 저으며 침대로 가서 앉았다.
“이리 앉아 봐.”
성연이 앉자 충영은 감춰둔 녹음기를 의식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성연아. 내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난 아무래도 이번 일이 내키지가 않는다.”
“뭐?”
성연이 째려보자 충영은 일부러 주눅이 든 어투로 말했다.
“명기를 생각해도 그렇고. 장인어른이나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성연이 너 명기랑 이혼하고 다른 남자랑 새 출발하는 게 어떨까?”
순간 성연이 손을 들어 충영의 뺨을 때렸다.
철썩-
유난히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충영이 속으로 쾌재를 부를 때 성연이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야. 이 새끼야. 이제 와서 너만 빠져나가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아니. 흥분하지 말고 내 말 들어봐. 난 그저 이렇게 사람을 속이는 일은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알았어. 나도 구차하게 사정하지 않을 게. 그럼 명기하고 이혼하고 너 수진이랑 찍은 동영상 까발리면 되겠다. 그지? 그렇게 할까?”
“아니. 그러지 마.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충영이 사정하자 성연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난 그래도 너만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후우. 너하고 나는 사정이 많이 다르지. 넌 결혼해서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을 이 집안 식구들하고 같이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런데 식구들을 배신하는 이런 일을 어떻게 쉽게 할 수 있겠냐고.”
“흐음.”
성연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네 말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선택권이 없어. 날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 우리 둘만 조심하면 탄로 날 일이 없잖아? 한 번만 도와주면 내가 너 다 봐줄게. 수진이하고 찍은 것도 절대로 노출 안 시키겠다고 약속하고 너한테 잘 할게. 응? 네가 내 아길 낳게 해주면 내 남편은 바로 너야. 너한테 잘 할 거니까 제발... 응?”
성연이 울 것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짓자 충영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충영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 마지못한 듯 말을 꺼냈다.
“알았어. 정말 내키지 않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어쩔 수가 없네. 성연이 너 먼저 들어가라.”
충영이 욕실을 손으로 가리키자 성연은 행여나 그의 마음이 변할 까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사라졌다.
성연이 안 보이자 충영은 바지 속에 들어있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껐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은 뒤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충영이 들어가자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던 성연이 그의 몸을 보았다.
‘......!’
순간 언제 화를 내고 투정을 부렸냐는 듯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더니 눈에 빛을 발하며 그의 몸을 훑어본다.
“정말 멋진 몸이야.”
자신의 몸을 보며 감탄사를 발하는 성연의 알몸을 충영은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