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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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위에 엎드려있던 주경이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정말 결심한 거야?”

“응...”

그녀가 내게로 다시 뺨을 갖다 붙이고는 음미라도 하는 양 ‘부르르~’ 잘게 떨자 그 여운이 질 속을 울려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녀와 관계를 가질 때 제일 큰 장점이 바로 이거였다. 결혼 후 당분간은 아이를 가지지 않고 둘만의 신혼생활을 즐기기로 장석과 합의한 덕에 늘 피임을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마음껏 질내사정을 하고 후희까지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느긋함이 참 좋았다.

“서운해?..”

“아니야.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고개를 짤래짤래 흔드는 주경, 왠지 마음이 짠하다. 몸을 뒤집어 올라탔다. 그러자 이 작고 보드라운 여체가 침대의 쿠션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꼭 껴안았다.

“사랑해, 주경 씨..”

“나도..”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엉덩이 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 때문이야...”

“응? 나? 내가 왜? 성우 씨..”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콧등에다 살짝 입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등을 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됐어...이렇게 안고 있을 때는 주경 씨를 모두 가진 것 같지만...마지막에는 늘 내 여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거든...”

“성우 씨...”

“사랑하는 사람의 떠나는 뒷모습이 아니라 돌아오는 걸 맞이하면서 정면에서 얼굴을 보고 싶어..”

“그랬구나...미안해...”

주경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큼은 그녀가 내게 줄 수 없는 거니까. 왠지 서글퍼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탐스러운 엉덩이를 콱~ 거머쥐며 비장한 투로 말했다.

“음~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젠 좋은 사람의 역할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냥 악당이 되겠어...”

“서, 성우 씨?”

“장석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지금 이대로 당신을 보따리에다 꽁꽁 싸서 아주 멀리 도망갈 거야..”

“킥~ 그러면 사랑하는 은영이는 어쩌고?”

그제서야 장난인 걸 깨달은 그녀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나는 일부러 그 물음에 짐짓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까짓 거~ 이왕지사 악당이 되기로 했으니까 철저하게 나쁜 짓을 해야지...걍 보따리를 하나 더 싸지, 뭐~~”

“이 엉터리 욕심쟁이~”

“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난 악당이니까~ 그건 오히려 칭찬이야~”

내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는 놀렸다. 그러자 주경은 다른 쪽으로 공략해왔다.

“그러면 불쌍한 우리 그이는?”

“응? 장석이?”

“응.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뺏긴 것만해도 억울한데...제일 친한 친구에다 아내 다음으로 가까운 여자인 은영이까지..그렇게 되면 그이 곁에는 아무도 없잖아?”

“어....”

비록 농담이었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장석이 기탄없이 마음을 여는 상대는 주경의 말대로 우리 셋밖에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어색해지기 시작하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슬며시 말을 이었다.

“흠, 흠...그렇네? 그건 너무 심한 것 같긴 해...그렇다고 한 명을 포기하기엔 난 이기적인 놈이라 싫고...어쩌지? 아~ 맞다...이러면 되겠다...”

“응? 어떻게?”

“내가 둘 다 데리고 사는 대신에 주경 씨가 장석이랑 몰래 바람을 피워도...모른 척해줄게...”

“아흑~”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서히 회복한 기둥을 크게 한번 휘젓자 그녀의 몸이 출렁거리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치~ 진짜 악당이야~ 남의 마누라를 훔쳐놓고는 돌려주진 못할 망정 기껏 선심을 쓰는 게 그거야?”

“흠, 흠...그, 그래..난 악당이니까..”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지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농담이래도 과히 기분이 좋을 일이 없었다. 똑같이 데리고 산다면서 누군 보상차원에서 내돌리고 누구는 고이고이 모신다는 의미가 되니 말이다.

“하, 하지만...악당이라도 역시 우정은 소중하니까...은영이도 아주 가끔은..보내주도록 할까?”

“킥~ 호호호호~ 성우 씬 정말 너무 재미있어~ 앙~ 사랑해~~”

내 소심한 양보에 주경이 목을 와락 껴안으며 키스와 함께 다리를 올리더니 아랫도리를 돌렸다. 자지를 잘근잘근 씹어오는 질의 쾌감에 나 역시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당기며 천천히 박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주경과 장석을 처음 만난 날, 은영의 외도를 의심하는 와중에 이 부부라면 스와핑이라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잠깐이지만 생각했던 게 기억났다. 진지하게 시작했던 조금 전의 이야기가 결국 장난으로 끝나긴 했지만 왠지 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주경과 이렇게 될 걸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미리 내 양심에다 방패막이를 만들어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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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보내면서 그 쓸쓸한 등을 보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널 맞이하고 싶어...”

“자기...”

품에 안겨있던 은영이 키스를 해왔다. 달콤한 타액을 넘겨받으며 손에 잡힌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왠지 눈에 익은 광경이라고? 맞다, 바로 어제 주경과 사랑을 나누면서 비슷한 대화를 했었으니까. 물론 똑같은 이야기가 오가게 된다면 발칵 뒤집어질 터이니 마, 상, 포, 차 다 떼고 말할 생각이지만.

“자긴 내가 그렇게도 좋아?”

“물론이야...사랑해, 은영아...”

그 말을 들은 은영이가 또다시 내 가슴팍에다 뺨을 마구 비비며 속삭였다.

“나..정말 울보인가 봐...자기가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마다 가슴이 떨려서 자꾸 눈물이 나...흑...”

“울보라도 괜찮고 바보라도 괜찮아, 그 어떤 모습이라도 넌 정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니까..”

내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이 나올 만큼 혀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그렇다고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전에는 감정을 절절하게 전달하는 기술이 부족했다면 지금은 일취월장했다는 차이일 뿐이다.

“처음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가 절대 아니야...후후후~”

“아앙~ 자기~”

항문 속으로 쑥 밀어 넣은 손가락에 은영이 퍼덕거렸다. 언젠가 그녀가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었지, 꼭 알고 싶으면 들여앉히라고.

“자기야, 지금 말해줄게..사실은...”

“쉿~!!”

그때는 은영이 내 입술을 누르며 말을 막았었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내 손가락에 닿은 촉촉하고도 도톰한 입술의 선명한 붉은 빛깔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날 사랑하지?”

“응.”

“그러면 됐어. 이젠 그런 건 상관없어. 아니, 설혹 결혼 후에 네게...”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네가 돌아와 잠들 곳이 내 품이라는 걸 잊지만 않으면 돼...”

주경을 겪으면서 생긴 변화였다. 남자의 외도는 지나가는 가벼운 사고 정도지만 여자의 바람은 절대 용납이 안 된다던 남자들의 일반적인 사고에서 많이 깬 것이다. 주경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장석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충분히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포용력이 생긴 것이다. 물론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그런 여유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막상 장석처럼 당한다면 또 어떨지 자신하진 못하지만 어쨌던 지금의 심정으론 정말 그랬다.

“자기야?”

“후후후~ 진짜야...내가 너한테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벌을 받는다고 받아들여야지, 안 그래?”

“그건...아흑~”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말하고서 뭐라고 덧붙이려는 은영의 가랑이 사이로 내려가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다급한 신음과 함께 무릎을 세우고는 허벅지를 넓게 벌려주었다. 이 매혹적이고 음란한 광경이라니! 내 여자다.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위로 떠받치며 뜨거운 온천 속으로 혀끝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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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를 들었다가 아차 싶었다. 대학동창모임에서 여자들끼리만 1박2일로 놀러 간다고 들었던 걸 깜박했던 것이다.

“그래, 맞아, 장석이한테 가봐야겠다...이 녀석도 홀아비 신세일 테니...간만에 남자끼리 뭉치지. 그나저나 퇴근했을 라나?”

한참을 받지 않아 막 끊으려던 순간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장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여보세요?”

“나야, 뭐해? 벌써 집이야?”

TV의 뉴스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야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무조건 칼퇴근이지, 꽃 같은 각시가 있는데...근데 웬일이야? 이 시간에..”

“웬일은? 숨겨놓은 아가씨라도 있는 거야? 숨소리가 수상하던데?”

“무, 무슨 큰 일 날 소리를?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

농담으로 던진 말에 펄쩍 뛰며 정색을 하니까 오히려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때였다.

“여보야~ 누군데 그래?”

“으, 응~ 성우..”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주경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주경 씨는 안 갔어?”

“어딜?”

“오늘 대학동창모임에서 놀러 간다고 은영이가 그랬는데...”

“그래? 자기, 오늘 동창모임에서 놀러 가는 거 왜 이야기를 안 했어? 괜히 나 땜에...그냥 갔다 오지 그랬어...”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성우 씨?”

“네, 주경 씨....”

“여보야, 나 가운 좀 갖다 줄래? 약간 추운 것 같아....”

그리고 곧 이어지는 말은 송화기를 손으로 가렸는지 조금 울리는 듯했다.

“성우 씨, 내가 나중에 따로 전화할 테니까...그이에게 딴소리는 마...알았지?”

“응? 응..그래..”

이 상황은 도대체 뭐지? 그렇게 약간은 멍한 상태로 장석과 통화를 끝낸 후 주경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온 건 내가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한참 후인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다음날 아침에 직접 와서 이야기하겠다며 간단하게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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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뒤척 뜬눈으로 보내다가 먼동이 트자마자 일어났다. 어젯밤부터 갑자기 전화기가 꺼져있던 은영에게서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의심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지만 주경이 올 때까지는 꾹 참아야 했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말이다.

‘딸깍~’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흘깃 시계를 보자 벌써 10시였다.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은 채 몇 시간을 넋을 놓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왔어? 장석이는?”

“으, 응...시댁에..시아버님께서 부르셔서...아침은? 안 먹었지? 밤을 샜구나?”

“뭐..좀 자기는 했어...”

“휴~ 성우 씨...”

가까이 다가온 주경이 내 얼굴을 품에다 꽉 껴안았다. 포근하고도 따스한 느낌이 전해지자 칼날처럼 곤두서있던 신경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하더니 피곤이 몰려오면서 졸음이 쏟아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곁에 앉혔다.

“이젠 이야기해줘...은영이 지금 어디 있어? 알고 있지?”

“으, 응...성우 씨 전화를 받고 난 다음에 잠깐 통화했었어...”

그 이후에 전화기를 꺼놓은 모양이다. 궁금증 이전에 화부터 치밀었다.

“일단은 따뜻한 물에 샤워라도 좀 하고 나와....”

“주경 씨!”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기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상태도 안 좋고..내 말 들어...”

“...그래...미안해...”

“괜찮으니까 어서...”

차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신이 들었다. 주경이 옳았다. 당장에만 해도 애꿎은 그녀에게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는가!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았던 탓에 뻣뻣한 다리를 끌고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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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

차가운 물이 뼛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다. 온몸이 떨렸지만 안개가 낀듯한 머리 속이나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슴은 여전했다. 그때 갑자기 물줄기가 뚝 끊어졌다.

“으, 응?”

“아휴~ 이게 뭐야? 따뜻한 물에 씻으라니까? 감기 들겠어...”

뒤쪽에서 부드러운 살갗이 느껴지더니 주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양팔이 내 가슴을 껴안더니 온몸을 찰싹 붙여왔다. 뭉클한 젖가슴이 눌러오더니 곧 온기가 번져나가며 오한을 덜어주었다.

“주경 씨...”

“가만 있어봐...응?”

마치 애무를 하듯이 가슴을 더듬던 두 손을 아래쪽으로 내리더니 자지와 불알을 거머쥐고서 주물럭거렸다. 빠르게 퍼져가는 짜릿한 감각, 순식간에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후릅~ 할짝~”

“주경...”

이제는 쭈그리고 앉아서 내 자지를 아주 맛있게 빨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혼란스러우면서도 두 여자가 공모해서 뭔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분노가 솟아났다. 그리고 덩달아 치미는 불 같은 욕정. 주경의 머리채를 확 휘어잡고서 아랫도리를 거칠게 들이밀었다.

“우욱~ 흐읍~”

목젖을 찔려서 눈물까지 고여 헛구역질을 하는 주경에도 나는 무심코 점점 더 빠르고 거칠게 박아댔다. 주경은 괴로워하면서도 결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능한 입을 더욱 크게 벌리려 애쓰며 움직이기 편하게 해주려고 했다. 애처롭고도 갸륵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 속은 터질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으아아아~”

“우읍~ 꿀꺽~ 꿀꺽~”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끝까지 박아 넣은 자지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정액을 주경이 모두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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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음이 좀 가라앉았어?”

“..고마워...그리고 미안해...”

“아니야..나도 좋았어...”

그게 좋았을 리가 없다. 괴롭기만 했겠지. 더더욱 미안해졌다.

주경이 욕실로 따라 들어와 나를 자극한 이유를 뒤늦게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정액을 쏟아내고 나자 긴장은 물론 피로마저 조금 가시며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야근 후 사우나를 하고서 마사지를 받은 때와 비슷한 효과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빠르게 그리고 무리 없이 그렇게 만드는 데는 섹스만한 게 없다는 걸 말이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제는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까 이야기해줘...”

“...응...성우 씨...알았어...”

주저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결심한 건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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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응~ 나, 은영이. 어제 잘 들어갔어?”

“응, 고마워...참~ 어제 우리 실수가 너무 많았지? 미안해..”

“아니야...그럴 수도 있지..뭐~”

약혼자인 장석을 인사시키려 만났던 은영에게서 다음날 오후쯤에 전화가 온 것이었다. 전날의 낯부끄러운 해프닝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은영이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주경아...너..혹시 명계 씨..소식 들은 적 있어?”

“누구? 명계? 그 나쁜 놈? 그 자식은 왜?”

“으, 응...그, 그냥...”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한때는 사랑했다가 상처만 주고 간 남자. 지금은 그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가끔씩 추억을 떠올릴 때면 야릇한 기분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경에게는 그 이름이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왜? 혹시 만난 거야? 어디서?”

명계와는 주경만이 아니라 은영마저도 얽힌 사연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지금껏 은영은 솔로인 주경 앞에서 자신이 사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결혼할 사람을 소개받은 어제서야 비로소 은영 자신도 깊이 사귀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살짝 귀띔해주었었다.

“빨리 말해봐~ 계집애야~ 불어, 응?”

그런 은영의 속내를 잘 알기에, 주경은 이젠 명계에 대한 감정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니 편하게 다 말해보라고 살살 달랬다. 꽤나 흥미를 돋우는 사건이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녀의 설득에 한참을 망설이던 은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은...어제 우연히 만났어...나도 그때 이후로 처음이야..”

“뭐~ 정말이야? 어디서 만난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속사포같이 쏘아지는 질문에 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뱉었다. 놀랍게도 그들과 헤어진 후 남자친구를 찾아갔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딱 마주쳤단다.

“어머~ 어머~ 그럴 수가? 정말 소설이다~ 그래서? 응?”

“..나 어쩌면 좋아...”

착 가라앉은 은영의 말을 듣는 순간 주경은 뭔가 머리 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명계라는 인간에 대해서였다. 말끔한 외모와 화술로 주변 여자란 여자는 다 집적거린 바람둥이, 물론 그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말이다.

“너 설마? 그런 거야? 잤어?”

“............”

“세상에...너 미쳤니? 지금 남자친구를 사랑한다며?”

침묵은 곧 긍정을 의미했다. 아무리 그 놈이 첫사랑에다 첫 남자였다지만 어이가 없었다.

“..그게 이젠 잘 모르겠어...그 사람이 날 정말 사랑하는 건지...내 자신 역시도...”

은영은 지금의 남자친구가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특출난 점은 없지만 깔끔한 외모, 안정적인 직장, 교육자 집안 등등 여러 가지 면을 고루 갖추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깊은 만큼 마음이 따스하고 다정했지만 그렇다고 바람둥이도 아니라서, 이런 남자라면 평생을 믿고 같이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좋았단다. 문제는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 같긴 한데 3년이 다되어가는데도 도통 결혼 비슷한 말조차 꺼낸 적이 없다는 거였다.

“..명계 씨가 애인이라도 만나러 왔냐고 묻는데 나도 모르게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해버렸어...”

“휴~ 그래서..이젠 어쩌려고? 내가 잘 모르니까 네 남자친구와의 일은 뭐라 못하겠지만...그 인간만은 절대 반대야..그냥 실수였다 생각하고 잊어버려...너 설마 지금까지 그 자식하고 같이 있는 거 아니지?’

“아, 아니야...난...”

그러면서 은영이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명계와 우연히 정사를 치른 후 사무실로 찾아간 일과 거기서 벌어진 야릇한 상황들 그리고 결국에 남자친구의 집으로 왔다고 말이다.

“나...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

명계와 엉겁결에 이루어진 정사에서는 불안감 때문에 뭘 느끼고 말고 할 정신도 없었는데, 남자친구의 손길을 받으면서 죄책감으로 가슴이 옥죄는 중에도 뒤늦게야 그게 떠오르면서 미치도록 흥분했다는 것이다. 주경은 은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 역시도 과거 명계와의 뜨겁던 정사가 떠올라 아래쪽이 젖어오는 걸 깨달았다.

“..너도 지금 젖었니?’

“주, 주경아!”

“솔직히 말해봐....그 놈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그거 하나만큼은 엄청 잘했으니까...내가 지금껏 만난 남자 중에 최고였어...”

“아흑~”

“어머머머? 너 지금 혼자 만지는 거야?”

“꺅~~~”

“은영아~ 은영아~ 무슨 일이야?”

야릇한 분위기에 젖어가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으로 주경은 기겁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이어진 통화에 안심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은영의 남자친구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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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모든 게 밝혀졌다. 충격이 너무 컸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꼭 남의 일같이만 느껴지고 있었다.

“미안해...성우 씨...그때 사실은 은영이와 미리 입을 맞추었어. 그래서 우리가 헤어진 시간을 1시간쯤 부풀렸어. 그이는 워낙 취해서 잘 모르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딱 맞아떨어졌다. 허탈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겠지?”

“...맞아...은영이...어젯밤부터 그 남자랑 있어. 하지만...”

내가 그저 무심결에 움찔하는 걸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주경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성우 씬, 은영이 사정을 잘 모르지? 자기 이야긴 거의 안 하는 애니까..”

“..들은 기억이 없어...”

어떻게 보면 흔하디 흔한 이야기일수도 있었다. 은영이 어릴 적에 이혼하고서 재혼한 아버지, 알게 모르게 가해지는 계모의 냉대, 이복형제들과의 갈등 등등 그녀는 집에서 늘 겉돌았다. 그렇다고 새 가정을 꾸려 잘만 살고 있는 엄마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독립을 하고 싶어도, 절대 반대하면서 ‘네 마음대로 살 거면 네 몫은 한 푼도 없다’라는 유산을 빌미로 한 아버지의 엄포에 꼼짝도 못했다. 나를 만나면서부터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구실로 하는 외박을 아버지가 어느 정도는 눈을 감아주었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 데려 와보라는 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질질 끌다가 마침내 인내가 다한 아버지에게 정말 쫓겨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겐...”

“성우 씨가 그럴 여지를 전혀 안 줬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명계가 프러포즈를 했었나 봐.”

말문이 막혀버렸다. 진심인지 그저 은영의 몸을 노린 건지는 몰라도 명계는 바로 다음날부터 수시로 전화를 해 결혼하고 싶다고 애원했다. 결국 그 끈질김에 다시 만났다가 어찌어찌 호텔로 가게 되고, 그렇게 이어지는 밀회 속에서 실제로도 은영의 아버지께 인사를 드려 위기를 모면했다. 지금도 주말마다 하는 은영의 외박을 그와 같이 보내는 걸로 안다고 했다.

“성우 씨가 은영이하고 그렇게 약속했다고 들었을 때 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었어...지금은 엉망이 됐지만...”

그때의 은영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와의 결혼을 결심하고는 나와의 사랑 또한 지킬 생각으로 말이다. 내내 속아왔음에 분노하면서도 왜 이리 가슴이 저린 걸까? 자꾸만 은영의 눈물이 떠올랐다.

“은영인 착한 애야...너무 착해서 거절하는 법을 잘 몰라...”

맞다. 그녀가 내 부탁을 거절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가슴이 묵직해지면서 숨이 막혀왔다.

“뻔히 들킬 걸 알면서 나한테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인 건...자기 대신 내가 성우 씨한테 다 이야기해주길 바란 거야...”

지금까지처럼 그냥 속이고서 내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면 될 일인데 정말 어리석은 여자다. 뭐가 잘 났다고 이런 짓을 한 거지? 아니면 그냥 떠나버리던지...은영을 비웃어보려 했지만 잘되지를 않는다. 가슴 속이 점점 더 젖어 든다.

“이제부턴 성우 씨가 선택할 문제야...은영일 정말 사랑한다면...휴~ 나도 잘 모르겠어...뭐가 옳은지..”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은영은 여전히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랬기에 결혼하자는 내 말에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밝혔을 것이다. 말이 곧 씨가 된다더니, 장석의 입장을 내가 당한다면 과연 그렇게 담담할 수가 있을까를 얼마 전에 생각했더니 곧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나도 처음엔 은영이가 사귄다는 사람이 궁금하기도 했고...이 상황이 약간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가벼운 마음이었어...하지만...”

주경은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안쓰럽고 안타까워 미칠뻔했단다. 나중에야 그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탓이란 걸 알게 됐지만 말이다. 이렇게나 좋은 사람을 양다리를 걸치며 속이는 은영이 너무 밉기도 하면서, 그래도 친구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 내게 너무나 미안했단다. 그래서 자꾸만 챙기고 혹시 상처를 받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마음 속에 내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자기 사무실에 찾아간 날...사실은 명계를 만났었어...”

“허~~”

친구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나에 대한 자신의 욕심도 컸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만나본 결과 실제로 은영과의 결혼을 결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날 주경이 내게 안길 작정으로 찾아온 거였다.

“미안해...정말...”

“아니야...고마워...주경 씨..”

“서, 성우 씨...”

나도 모르게 뺨으로 뜨거운 물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당황한 주경의 가슴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나...너무 피곤해. 조금만 잘게...미안하지만 이대로 있어줄래? 부탁이야...깼을 때 혼자인 게 너무 싫을 것 같아서..”

“흑...걱정 마. 어디 안 갈게...자기 곁에 있을 거야...흑....”

내 머리를 꼭 껴안은 채 주경이 훌쩍대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듯한 게..아마 자장가인 것 같다. 졸음이 마구 밀려들었다. 너무나 졸려서 이대로 잠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데도 왜이리 눈물이 그치지 않는 걸까? 노래 소리가 점점 더 아득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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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쯤에서 끝내도 여운이 남은 마무리로 괜찮을 것 같은데....여백이 너무 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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