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6)

  '신분증 주세요.'

  일단 가져온 책을 대출대 위에 올려놓고 지갑을 찾았다. 헌데 가방 안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하고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 바지 뒷주머니도 확인했다. 심지어 가방을 들어 탈탈 털기까지 했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그러는 사이 어느새 이영의 뒤쪽으로 줄이 늘어져있었다. 난감해진 이영이 일단 옆으로 물어섰다. 괜스레 가슴팍과 엉덩이를 다시 한 번 더 만지작거렸지만 금방만 해도 없었던 것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저기.'

  혹시 어디 떨어트린 것이 아닐까 싶어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뒤 쪽에 서있던 사람이 툭, 하고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며칠 전에 학생식당에서 봤던 강현의 친구가 서있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강현이랑 같이 봤었는데'

  멍하게 서있으니 아무래도 못 알아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영이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아니. 기억 안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지금 뭘 좀 잊고 와서 그 생각하느라.'

  '지갑 잊고 오셨어요?'

  '……네, 뭐.'

  이영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날도 생각했지만 은근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일단 그럼 이거 제 신분증으로 빌려드릴까요?'

  '헉? 그래도 될까요?'

  '연체만 하지 않으신다면 상관없죠.'

  '그럼 부탁 좀. 이거 2주전에 예약해 놓은 건데 오늘 안 빌리면 다음사람한테 넘어가버리거든요.'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싶어서 염치불구하고 부탁했다. 책을 건네받던 인우가 책을 보고 어?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왜요?'

  '아뇨. 일단 대여하고 올게요.'

  잠시 대출대를 다녀온 인우가 책을 건네주었다.

  '음료수라도 사야 하는데.'

  '나중에 사시면 되죠. 그런데 어디 떨어트린 건 아니에요?'

 안 그래도 어디 흘린 게 아닐까 싶어 잠시 당황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오전 중에 지갑을 꺼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방에 놓고 온 거 같아요.’

‘아, 그럼 뭐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고맙습니다.’

‘뭘요, 곤란할 때 돕고 그러는 거죠.’

요즘은 흔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책 쓰신 분 강현이 아버진 거 모르죠?’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갑을 못 찾을 때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정말요?’

우강진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성공한 건축가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이름만 대면 아는 그런 대단한 사람을 아버지로 두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자란 이영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분 책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강현이한테 빌려요.’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게다가 이 소리를 듣고 나니 더욱더 거리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이영의 대답에 인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친하지도 않은데 강현이가-.’

강현이가, 까지 말을 한 인우가 뭔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그런데, 점심 먹었어요? 지갑 없어서 못 먹었을 거 같은데.’

도서관에 들렀다가 먹으려고 했던 거니 엄밀히 말하면 못 먹은 건 아니다. 물론 이제는 못 먹게 되었지만. 자취방에 다녀올까, 뒷말을 기다리던 것도 잊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우가 이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도 안 먹었는데 가요. 식권 꿔드릴게요.’

‘아,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화기애애한 인사를 나누느라 좀 전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이영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말 놓으면 안 될까? 저 강현이랑 나이도 같은데.’

‘아. 그럴까, 그럼?’

‘어! 나 진짜 하면서도 어색하서 손발이 오그라들 뻔 했다.’

‘나도.’

본래 말을 트는 건 이렇게 평범하게 트는 건데.

「꼬우면 너도 까던가.」

참으로 비정상적이었던 강현과의 첫 만남이 떠올라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인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

‘어? 강현이네.’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언제 봐도 참 잘났다 싶은 얼굴. 하지만 지금 강현의 옆에 선 사람은 예전에 계단에서 봤던 사람도, 며칠 전 공대 앞에서 봤던 사람도 아니었다.

헐. 또 바뀌었다. 게다가 이번엔 이전 두 사람보다 훨씬 더 미인. 물론 이전 두 사람이라고 해서 미인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다. 부러움에 이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런 이영의 표정을 읽은 인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인우에게는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저거 강현이 연례행사야.’

‘연례행사?’

‘본래도 인기 많지만 학기 초에 유난히 더 여자들이 붙거든.’

아직 성격을 모를 때니까. 라는 말은 입안으로 삼켜졌다.

‘뭐 학기 초 지나면 좀 뜸해지긴 하더라.’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 때, 걸어오고 있던 강현이 불현듯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힉. 묘하게 날이 선 시선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귀신같은 놈,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그건 인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어이. 우강현.’

하지만 이내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을 지운 인우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강현이 옆에 선 여자에게 뭐라고 몇 마디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두 사람 쪽으로 와버렸다. 당황한 얼굴로 잠시 서있던 여자가 뒤늦게 얼굴을 팍, 찌푸렸다. 곧바로 날이 선 눈초리가 이영과 인우에게 향했다.

에? 왜 우리한테? 하지만 저런 미인이 화를 내니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죽을듯한 기세로 노려보던 여자가 이내 휙, 하고 몸을 돌려버렸다. 또각또각또각, 다소 신경질적인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한 두 사람과 달리 정작 원인제공자는 태평하기만 했다.

‘어떻게 둘이 같이 있어?’

‘여자 친구 가는데.’

당황한 이영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강현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가라고 했으니 가겠지. 둘이 어떻게 같이 있냐고.’

헐. 저런 여자 친구한테 가라고 했단 말인가. 좀 전에 유명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강현이 더욱더 대단해보였다.

제가 궁금한 것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는 강현의 성격을 아는 인우가 대신 대답을 했다.

‘도서관에서 책 빌리다가 만났어. 지갑을 놓고 와서 내가 빌려줬거든.’

‘무슨 책?’

‘너희 아버지 책.’

‘그래?’

순차적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이영이 과제가 있어서, 하고 덧붙였다.

‘이주나 기다려서 빌렸다고 하길래 담에는 그냥 너한테 빌리라고 했다.’

‘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인우에 이영은 당황했다.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결정해놓고 통보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인우야 오랜 친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자신은 그런 사이도 아닌데 그런 뻔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냐. 아냐. 그냥 도서관에서 빌리면-.’

이영이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그런 뻔뻔한 사람이 아님을 피력했지만 정작 강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필요하면 말해.’

‘어. 고마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영이 냉큼 대답했다. 빌려주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디자인 책, 그중에서 특히 신간들은 대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학기 초에 빌려가 놓고 연체료를 물더라고 학기말까지 계속 가지고 있는 얌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에 자료로 필요한 책들을 모두 살 수 없던 차에 뜻밖의 행운이었다.

내가 뭐랬냐고, 어깨를 으쓱이는 인우에 이영도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건에는 작업실 없어?’

‘아니, 없는 건 아닌데. 나이든 복학생이 끼기 힘든 분위기랄까.’

본래도 실내건축학과의 경우에는 여학생들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다 자신이 휴학하던 기간 동안 유난히 여학생의 비중이 많이 늘었다. 게다가 예전에 염색체만 여자일 뿐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던 동기들과 달리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딱 봐도 일반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같은 층에 긴 생머리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좋은 향기를 풍기고 다니는 여자들이 많아진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나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복학하고 처음 과 작업실 문을 열었던 이영은 일순 문 쪽으로 집중된 여학생들의 시선에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섰다.

‘그럼 우리 작업실로 올래?’

‘그래도, 돼? 난 실건축인데.......’

‘상관없지 않나?’

인우가 동의를 구하듯 강현을 보았다.

‘꼭 과 사람만 써야 한다는 법은 없지.’

성의 없이 대충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또 일리가 있었다. 단과대 도서관도 다른 과 학생들이 사용하기도 하니까. 물론 그것도 이렇게 아는 얼굴이 있을 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럼 그럴까?’

자취방이 바로 학교 앞이긴 해도 집에서 작업을 하면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수업 중간에 비는 시간 같은 것을 그냥 흘려보내곤 했는데, 이렇게 되면 확실히 시간 절약에 도움이 되었다. 

재황이 놈도 제법 쓸모 있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이영이 입안에 넣은 오이무침을 씹었다.

'끙.‘

올 때는 나도 등록금 내는 학생이니까! 가슴을 쭉 내밀고 호기롭게 오긴 했는데 작업실이라고 써진 이름표는 보니 왠지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제 강현이랑 왔을 때와는 전혀 기분이 달랐다. 왠지 그땐 뒤에 든든한 빽이 있는 느낌에 누가 물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물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한참 만에 막 문을 붙잡으려고 손을 내뻗던 그때.

‘고사 지내냐.’

‘힉-!’

갑자기 등 뒤로 다가선 인물 덕분에 저도 모르게 꼴사나운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바싹 붙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한 강현이 이영을 보고 있었다.

‘하아.’

아는 얼굴을 보니 긴장이 풀리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심하고 나니 놀란 것이 왠지 억울해졌다.

‘기척 좀 내고 다녀!’

발끈해서 빽-소리를 지르는 이영을 물끄러미 보던 강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한마디 한다.

‘쫄긴.’

‘누, 누가 쫄았다고 그래?!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고.’

변명하듯 말하는 이영도 그런 강현을 따라 자연스럽게 작업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어.’

작업실에 있던 한 무리가 강현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 강현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다. 

‘실측 과제 어떻게 됐어?’

창가 옆 테이블 -강현과 친구들이 쓰는 테이블이라고 했다. -로 가서 크로스로 매고 있던 원통 도면 가방을 벗고 있는데 강현이 물었다. 함께 듣는 건공 과제였다.

‘그건 아직 시간이 좀 있잖아. 도면 또 빠꾸 먹어서 다시 쳐야해. 교수가 내일까지 가져오래’

수정만 벌써 세 번째. 교수는 아무래도 날 살려둘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내일까지면 건공도 똑같은 거 아냐?’

‘어? 건공은 다음 주까지 아니었어?’

‘아닌데?’

‘무슨 소리야. 내가 몇 번을 확인했는데. 니가 잘못안거야.’

거드름을 피우며 핸드폰을 꺼내어 날짜를 확인하던 이영이 이내 뭉크의 절규에 나오는 얼굴로 변신했다.

‘말도 안 돼!!!’

몰아치는 과제로 정신없는 사이 감쪽같이 일주일이 없어져버렸다고 억울해하는 이영을 강현은 미친놈 보듯 했다.

‘일단 도면부터 쳐.’

어라?

절규하던 이영이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주섬주섬 도면가방에서 도면을 깨내면서 슬그머니 물었다.

‘보여, 줄 거야?’

‘일단, 치라고.’

보여줄 거구나! 이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

착실하게 대답한 이영이 도면을 펼쳤다. 하나를 해결했지만 또 다른 헬 게이트가 이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툭. 정수리 위에 차가운 것이 놓였다. 이영이 얼른 손을 들어 그것을 붙잡았다. 차가운 콜라 캔이었다.

‘땡큐.’

나갔다 왔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강현의 손에 들린 것은 자판기 커피. 비싼 테이크아웃커피만 먹을 것 같은 비주얼로 잘도 저런 걸 먹는다 싶었다.

‘이거 비례가 좀 안 맞지 않아?’

이영이 막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사이 도면을 슬쩍 들여다보던 강현이 한마디 한다. 윽. 슬쩍 봐도 보일만큼 안 맞는 건가.

‘티 많이 나?’

‘뭐, 획기적이긴 하네.’

안 그래도 내심 그렇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아픈 델 찔린 기분이었다.

‘교수가 계속 임팩트가 약하다고 해서 고치다 보니까.’

‘아무리 임팩트가 있어도 비례가 안 맞으면 아무 소용없잖아.’

그걸 누가 모르나.

‘젠장. 하도 고치다 보니까 이젠 뭐가 고친 거고 뭐가 안 고친 건지도 모르겠어.’

이영이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연필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여다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몇 시간을 한 자세로 앉아있었던 터라 온몸의 뼈들이 일제히 않는 소리를 냈다.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몇 번째 수정인데?’

‘3번째.’

흘끔 내려다보던 좀 전과 달리 강현은 본격적으로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있던 이영도 슬그머니 그 옆으로 다가섰다.

‘교수가 왜 심심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긴 하다.’

‘......뭐?’

되묻는 이영의 얼굴이 조금 굳어있었다.

‘좋게 말하면 심심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좀 촌스럽달까.’

‘.......’

이영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강현의 평이한 목소리에 더 기분이 상했다. 도면을 향하고 있던 몸을 다시 틀던 강현이 굳어있는 이영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이영의 표정을 읽었을 텐데도 강현은 태연했다. 태연한 얼굴을 보니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넌 뭐 얼마나 세련됐는데? 하고 강현이 제작 중이던 모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거기엔 누가 봐도 완벽해 보이는 삼층 건물 모형이 있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구조로 보이지만 뭐하나 지적할 것이 없었다. 자신이 삼일 밤을 꼬박 새서 만들어냈던 모형이 얼마나 어설펐는지를 떠올리니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느낌은 있어. 그러니까 교수가 자꾸 수정하라고 시키는 거겠지.’

사람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라고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또 묻게 된다.

‘무슨 느낌?’

막 포근하고 안정감 있고 그런 건가? 내심 기대를 했던 이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현이 심상히 대답했다.

‘딱 서민 아파트 보는 느낌.’

‘.......’

이영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표정이 사라졌다.

‘너 자료 잘 안보지?’

‘보거든?’

‘그냥 책이나 인터넷으로 보는 거 말고 직접 가서 보는 거 말야.’

‘......그런 거 보러 해외여행 다니고 그럴 여유 없거든?’

불퉁하게 대답하는 이영에게 강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한 자료라는 걸 해외의 유명건축물만 있다고 생각하는 게 촌스럽다는 거야. 굳이 해외 아니더라도 한국에도 볼 곳은 많아. 건축물도 그런데 하물며 미술관이나 전시관같은 곳은 가보지도 않았겠네.’

‘과제하기도 벅찬데 그런데 갈 시간이 어딨냐.’

‘그건 다름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야?’

‘.......’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잠시 말없이 대치하던 이영이 한 쪽 구석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고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쾅. 요란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아오. 재수 없는 새끼. 지랑 나랑 뭐 언제부터 봤다고 저런 소리를 막 하고 지랄이야. 뭐? 서민적? 그래, 나 서민이다. 서민인데 니가 뭐 보태준거 있어? 너 같은 잘난 집안 자식이 서민의 고충을 아기나 하냐고. 이영이 속으로 이를 벅벅 갈았다.

하지만 그렇게 씩씩대며 내려가던 이영의 표정이 점차 시무룩해졌다. 사실 뭐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라서 더 아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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