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영아. 너도 가자.’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무리 중에 한 명인 병호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꺼낸다. 송이라는 별명으로 못 부르게 된 이후에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어딜?’
책상 위에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내려놓던 이영이 되물었다. 뭐 애들끼리 당구라도 치러 가나 했더니.
‘과 총회.’
란다.
‘야. 나 너희과 아니잖아.’
‘뭐 어떠냐?’
혹시 모르나 싶어서 친절하게 알려줬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놔. 이젠 별걸 다 가재.’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장난스럽게 한마디 받아치고 책상 위에 출력해온 트레싱지를 꺼내 펼쳤다.
‘그러지 말고 가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병호가 이번엔 좀 더 적극적으로 권한다.
‘뭐야. 농담이 아니었던 거야?’
‘농담 아닌데?’
헐. 이놈 참 웃긴 놈일세.
‘야. 너희 과 과 총회를 내가 왜 가.’
‘어차피 과 총회는 우리도 안가. 뒤풀이 가자는 거지. 뒤풀이.’
‘뒤풀이면 더 못가지.’
‘왜. 너 우리과 애들이랑 많이 알잖아. 인우나 강현이도 갈 테고.’
이게 그런 문제냐! 라고 반박하려던 이영이었으나 정작 물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강현이도 가?’
그럼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야 하는 건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먹는 게 당연했었는데 이제는 혼자 식당에 가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았다.
‘니가 가자고 하면 갈걸?’
‘뭔 소리야.’
‘강현이 이런데 잘 안 오거든.’
‘헐. 그러니까 목적은 내가 아니라 강현이었구만?’
아무래도 강현이 끼면 여학생들 참석률이 높아질 것을 노리고 그런 모양이다.
‘뭐 그런 것도 있고.’
‘내가 메인이라도 갈까말까인 판에. 됐어. 안가 안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이영에게 병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오늘 뒤풀이 집은 장군갈비집인데.’
‘콜.’
병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바로 한 이영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내가 가잔다고 그 녀석이 갈까 모르겠네?’
일단 공짜 고기에 넘어가긴 했는데 뒤늦게 살짝 불안해졌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이영과는 달리 병호는 전혀 걱정 없는 얼굴이다.
‘니가 가자고 하면 갈걸? 우강현이 너 엄청 챙기잖아.’
‘무슨 그 녀석이 잘 챙겨. 맨날 천날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작업하는 거 족족 태클 거는 것도 모자라서 하루에 하나씩 매스 작업 해오라고 숙제까지 내준다고.’
너도 봤지 않냐고, 분통을 터트리는 이영을 향해 병호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얘가 뭘 모르네. 우강현은 원래 남한테 뭐 안 시켜. 아니 남한테 관심자체가 없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래.’
‘뭐야. 너희도 강현이한테 물어보잖아.’
강현이 흉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 빈정 상한 이영이 한마디 하자 병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물어보면 알려주긴 하지. 그런데 옆에서 계속 보고 있다가 지적하고 그러는 건 너한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그리고 사실 누가 자기 작업하기도 바쁜데 남의 작업까지 신경 쓰냐. 관심 있는 여자애도 아니고.’
‘……그, 래?’
‘게다가 넌 공대도 같이 한다며? 우강현이랑 같이 팀 짜고 싶어서 줄 선 사람이 몇인데.’
‘…….’
‘근데 애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사실 인우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지만 넌 고작 몇 달이잖아. 그런데도 오히려 우강현이 너랑 있을 때 좀 더 벽같은 게 허물어진다고 해야 하나? 좀 사람 같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게 있거든. 그래서 너랑 있을 때는 사람들이 강현이한테 말 잘 걸잖아.’
‘……에이. 무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왠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기분. 초딩도 아니고 제일 친해 보인다는 말에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이 스스로도 어이없기 했지만 솔직히 기뻤다. 피식피식, 참아보려고 해도 자꾸만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맞다니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그렇게 말한 병호가 뒤쪽을 가리킨다. 이영이 고개를 돌렸다. 강현과 인우가 작업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인우. 너 오늘 총회 올 거지?
병호의 물음에 인우가 핸드폰을 확인하고서 되물었다.
'아, 오늘이야?'
'어. 6시까지 102호로 오면 돼.'
'노땅이 총회는 무슨. 튀풀이나 가면 되지. 뒤풀이는 어딘데?'
'장군갈비.'
'알았어. 7시쯤 가면 되지?'
'뭐 먼저 가서 먹고 있어도 되고. 우강현. 넌?'
'난 패스.'
물론 강현은 가볍게 거절하려고 했으나,
'에이. 그러지말고 가자. 이영이도 너 가면 간대.'
일순 멈칫한 강현이 이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따.
'진짜야?'
다소 어이없어 하는 눈과 마주하니 뒤늦게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제가 가자고 하면 강현도 가겠다고 나올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더 컸다.
'뭐, 장군길비 고기도 좀 고프고.'
변명하듯 말하는 이영에게 강현이 한마디 한다.
'고기보다 술이 더 고픈 게 아니고?'
'그거야 말하면 입아프고.'
헤헤헤, 하고 간신배마냥 웃는 이영에 작게 한숨을 내쉰 강현이 조용히 병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7시까지라고?'
'어? 어. 좀 늦어도 상관은 없고.'
'저 녀석 안 들키게 구석으로 빼줘.'
'물론이지.'
밝은 목소리로 병호가 냉큼 대답했다.
'진짜 가게?'
병호와 강현의 대화를 멍하게 듣고 있던 이영이 뒤늦게 되물었다.
'뭐야. 가고 싶다며.'
막 이영의 옆으로 와서 책을 내려놓던 강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황당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진짜 간다고 할 줄은 몰랐지.'
확인해보려고 한 것이긴 해도 정작 이렇게 바로 가겠다고 할 줄은 이영도 예상 못했다.
'너 어제 내준 매스작업 안하려고 거기 가자고 꼼수 쓴 거지?'
'아, 아니야.'
그런 의도는 절대 없었다.
'그럼 했어?'
'당연히! 못했지.'
눈치를 보는 이영에 강현은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5시 반이니까 빨리 끝내면 고기 한 점은 먹을 수 있겠네.'
'차라리 빨리 먹고 와서 하면 안 될까요?'
흐음. 불쌍한 표정을 짓는 이영에 잠시 고민하던 강현이 대답했다.
'술은 안 먹겠다고 하면 생각해볼게.'
'빨리 끝내야지.'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곧바로 책상 쪽으로 고개를 박는 이영에 강현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영과는 달리 강현은 이영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송이영아. 술 없다.'
'야. 술 없으면 직원을 부르든가 니가 가져오지 이영이는 왜 시켜.'
다른 테이블에 있다가 자리를 옮겨오던 인우가 병호에게 핀잔을 했다.
'뭔 소리야. 말아놓은 소맥 다 떨어져서 만들라고 그런 건데.'
'소맥?'
'이영아. 만들어봐.'
인우의 물음에 병호가 이영에게 눈짓을 하자 씨익 하고 웃은 이영이 일단 맥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맥주가 어느 정도 채워지자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높이를 확인하고 다시 소주병을 기울여 잔을 채운다. 그리고 한 번 더 맥주잔을 들어 높이를 확인 한 뒤 인우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마셔봐.'
하는 것만 봐서는 폭탄주가 아니라 무슨 엄청난 약이라도 만들어내는 줄 알겠네. 피식 하고 웃은 인우가 손을 뻗었다. 대수롭지 않게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던 인우의 눈이 이내 휘둘그레졌다.
'야. 이거 뭐야?'
'완전 대박이지. 아주 그냥 입에 짝짝 붙지?'
'내가 남천동 황금비율이거든.'
턱을 들어 잘난 척을 하는 이영에 인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1차로 갔던 고깃집에서부터 귀여운 외모와 안 어울리게 소주를 물처럼 먹더니 2차에서는 폭탄주 제조까지 하고 있다. 강현이 놈이 재밌어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되었다. 피식피식 웃으며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자리에 강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강현이는?'
'화장실 간다고 갔는데.'
'그래?'
'그러고 보니까 화장실 아까 가지 않았어?'
술 먹느라고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강현이 자리를 비우고 나간지 꽤 오래 되었다.
'화장실 가서 빠져죽었나.'
'담배 피러 나갔나?'
여기저기서 추측이 난무했으나 사실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은 하나였다.
'또 고백 받고 있는 거 아냐?'
농담처럼 꺼낸 말이지만 이내 말을 꺼낸 병호를 필두로 모두들 침묵.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강현이 때문에 옆에 얼쩡거리던 여자 신입생들이 보이질 않았다.
'요즘 좀 뜸하다 싶더니.'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들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고 보니 여자랑 다니는 거 못 보긴 했네.'
'그러네.'
'왜지?'
'왜래?'
물음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움직였다.
'......나?'
강현의 이야기가, 정확히는 고백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맥주잔-내용물은 자신이 말아놓은 소맥-을 홀짝이고 있던 이영이 갑자기 제게로 몰리는 시선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너도 몰라? 니가 강현이랑 제일 친하잖아.'
모른다. 사실 최근에 강현이 여자랑 다니는 걸 본적이 없다는 것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기가 싫었다.
'......글쎄. 계속 과제하느라 바빠서 그랬나?'
'에이. 과제 많은 게 뭐 하루 이틀이냐?'
모른다고 하면 강현과 가장 친한 사이인데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들을 것 같아 괜히 허세를 부리다가 핀잔만 들었다.
Trrrrrrrr. Trrrrrrrr
머쓱해진 이영이 뒷머리를 듥적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왔다, 너.'
'나 아닌데?'
'나도. 너 아냐?'
'내건 진동.'
서로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들어 보이거나 아니라고 고래를 내젓는 와중에도 전화벨으 계속해서 울렸다. 서로 시선만 마주하고 있던 이들 중 인우가 문득 깨달았따는 듯 이영을 향해 말했다.
'이영이 네 쪽에서 나는데?'
'어?'
인우의 지적에 가방을 뒤적여서 꺼낸 핸드폰은 침묵상태. 나 아닌데? 라고 말하려던 이영이 멈칫했다.
'강현이 꺼네.'
벨소리가 나고 있는 곳은 강현의 가방이었다.
'꺼내서 받아봐.'
그래도 될까 싶었지만 벨소리가 끊어질 기미를 보이질 않아 일단은 이영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는 따로 단축번호 없이 번호만 떠있었다.
'누군데?'
'몰라. 이름이 없네.'
서로 난감하게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다행히 전화가 끊겼다. 주인만큼이나 위압감을 주는 핸드폰이었다.
'급한 전화는 아니겠지?
이영의 물음에 인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급하면 또 오겠지 뭐.'
그렇겠지. 하고 도로 가방에 핸드폰을 넣어두려고 하던 참이었다.
Trrrrrrrrrrr. Trrrrrrrrrrrr
다시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에 모두들 펴정이 난감해졌다.
'갔다주게?'
'급한 걸지도 모르잖아.'
일어서는 이영에게 인구가 뭐 그럴 것까지 있냐고 물어봤지만 뭐, 화장실도 다녀올 겸, 하고 대답한 이영이 테이블을 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