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6)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과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던 이영이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만요'

 올라가는 계단에 술에 취해 쪼그려 앉은 여자와 그 옆을 지키고 선 남자가 보였다. 술집계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딱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을 때다.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영은 쪼그려 앉은 여자를 피해 계단을 마저 올랐다. 선선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올라 있어서인지 그다지 차가운 공기도 아닌데 상쾌하게 느껴진다.

 어딨지? 이영이 살짝 열기가 느껴지는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학가 술집이 모여 있는 골목답게 조금만 으슥한 곳이면 어김없이 술 취해 부비작거리는 커플들이 있었다. 혹시나 하고 눈으로 훑었지만 다행히 강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디 간겨. 입구에서 서서 두리번거리던 이영이 조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몇 걸음 나가자 저 골목 안쪽에서 담배를 피고있는 강현의 모습이 보였다.

 담배 피러 간 거 맞잖아. 고백은 무슨. 이영의 입가에 삐죽,미소가 번졌다.

 '우강-'

 하지만 강현을 부르며 다가서던 이영이 이내 손을 반쯤 든 채로 멈칫했다. 뒤늦게 강현의 옆에 서있는 여자를 본 탓이었다.

 희영이랬지. 어깨까지 드리워진 웨이브 머리에, 가슴에 프릴이 달린 하얀색 블라우스와 몸에 딱 피트 되는 검은색 하이웨스트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자는 2차 내내 시종일관 이영의 옆자리에 앉아서 이영이 무슨 말만 하면 예쁘게 웃어주던 여자 후배였다. 내심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했는데, 사실 진짜 관심은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말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담배를 물고 있는 강현은 다소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런 강현의 옆에 선 여자후배는 일방적으로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로 이영이 얘기하면 예쁘게 웃기만 하던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한 번 쭉 빨아들인 강현이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담배 끝을 탁탁, 털어 담뱃불을 끄고 바닥에 던졌다. 강현이 고개를 꺾어 뭐라고 하자 -대충 그만 들어가자는 것 같았다.-여자애의 표정에 실망감이 어렸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강현이 먼저 걸음을 디뎠다. 그런 강현에 여자애가 황급히 강현의 소매를 붙잡았다. 소매가 당겨지는 느낌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먼저 붙잡을 땐 언제고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슬그머니 부끄러운 척 고개를 살짝 떨군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는 살짝 숙인 각도 그대로 깜빡깜빡. 눈을 깜빡인다.

 그 모습이 귀여웠을까. 강현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이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뭐야. 왜이래. 이영이 제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사이 강현은 여자애 쪽으로 아예 몸을 틀었다.

 '강! 현아.'

 정신을 차렸을 땐 저도 모르게 강현의 이름을 불러버린 뒤였다. 갑자기 불린 제 이름에 강현이 다시 몸을 틀었다.

 '뭐, 야. 너. 화장실 간다더니. 여기서 뭐해.'

 난감한 마음을 감추려고 이영이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담배 한 대 핀다고. 왜?'

 대답하는 강현의 뒤쪽에 숨어 있던 여자애가 이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했다. 참 이상했다. 좀 전만 해도 그렇게 순진해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꼭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로 보인다.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썸씽이 있어 보이는 상황. 평소의 이영이라면 눈치 빠르게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을 것이다.

 '애들이 너 어디 갔냐고 찾길래.'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 없이도 잘만 놀더만.'

 핀잔하기는 해도 강현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담배 다 폈으면 그만 들어가자.'

 안절부절못하는 후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영은 모르는 척 그렇게 말했다.

 '오빠.'

 이영 쪽으로 걸음을 내딛는 강현에 후배가 다급하게 다시 강현을 부른다. 강현의 시선이 후배에게 향하는 것에 이영이 한 번 더 재촉했다.

 '안 가? 나 먼저 간다?'

 술기운도 있었고 약간 우쭐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제 쪽으로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영의 생각을 비웃듯 강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강현의 대답에 이영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서렸다. 잠시 멍하게 서있는 이영을 향해 강현이 쐐기를 박았다.

 '금방 들어갈게.'

 그리고 '들었지? 들었으면 그만 좀 꺼져줄래?' 라고 말하는 듯한 후배의 눈과 마주하자 그제야 이영도 제가 남녀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럴래? 그럼 뭐. 나 먼저 들어갈게.'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이영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직진하다가 가게 입구에서 재빨리 좌회전. 그렇게 가게 안으로 몸을 숨긴 이영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무안하고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무안하고 부끄러운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냥 먼저 들어가라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배신감이 든다는 거였다.

 내참. 누가 보면 내가 강현이를 좋아하는 줄 알겠네.

 '푸하하하하.'

 제가 생각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린 이영이었으나 점점 이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자꾸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하하...... 하.'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어색하게 입으로만 웃던 이영이 말도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게 다 강현 효과 때문이었다. 사실 제가 마음에 있는 것은 강현이가 아니라 그 후배 여자 쪽이었던 거다. 계속 마음에 들어서 막 시답지 않은 드립도 치고 그랬는데 정작 강현이한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게 밸이 꼬인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여자 친구도 있었는데 내가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은가.

 그렇게 결론은 내고 나니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아. 핸드폰.'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려던 이영이 뒤늦게 자신이 강현을 찾으러 나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냥 말까. 잠시 고민하던 이영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끼리 핸드폰 가져다주는 걸로 고민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자꾸 이렇게 조심스럽게 굴고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도 들고 그러는 것이라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하겠다고 호기롭게 결심한 이영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게를 나와 좀 전에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호기롭게 걷던 이영의 걸음이 점점 느릿해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

 처음엔 잘못 본 것 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분명 두 사람의 키스신이었다.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어찌 보면 요즘 세상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커플은 흔하디흔한 일이라 그렇게 충격적인 장면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강현이라는 데 있었다.

 까치발로 선 여자가 강현의 팔에 매달렸다. 근사한 근육으로 뒤덮인 강현의 팔이 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고개를 움직인 강현이 각도를 달리해 입술을 겹쳤다. 질척하게 젖은 살덩이가 겹쳐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 후배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소리.

 '아응.'

 흠칫. 이영은 제가 낸 소리인줄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예쁜 여자와 키스하는 강현이 아니라, 강현과 키스하는 여자에 자신을 대입했다는 것을.

 그때까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서있던 이영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음을 확인한 뒤에는 몸을 돌려 뛰었다. 이번엔 입구에서 멈춰서지도 않았다. 그대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가게 안까지 한 번 쉬지도 않도 달렸다.

 '왜 그래? 누구랑 시비 걸렸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이영에 놀란 인우가 물었다.

 하지만 이영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은 소주병을 먼저 들었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다들 서로 시선을 주고받아 보지만 당연히 이영이 이러는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얘 강현이 찾으러 나간 거 아니었어?'

 '뭐야. 뭔데 그래.'

 턱으로 흘러내린 소주를 손등으로 훔치는 이영에게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다.

 '목이, 말라서.'

 '에이.'

 '뭐야.'

 뜸을 들이던 이영이 대답하자 잔뜩 기대했던 친구들이 던진 과자와 물티슈 그 외 가벼운 물건들이 날아왔다.

 '사실은 뭐 야한 거라도 보고 온 거 아냐?'

 그냥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 장난에 이영이 곧바로 낚여들었다. 순식간에 이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시들해졌던 사람들의 눈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정말이야?'

 '뭔데, 뭔데? 뭐 봤는데?'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게 뭔데?'

 '뭐긴 니가 생각하는 그거지.'

 '으악, 말도 안 돼! 길에서 그런 걸 한단 말야?!'

 '뭐야.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너도 생각했다며.'

 야한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활기가 넘쳤다. 자기들끼리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느라 정작 이영은 뒷전으로 미뤄졌다. 이대로 넘어갈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우강현 여자랑 있는 거 보고 왔지?'

 핵심을 찌르는 병호의 물음에 이영의 얼굴이 아주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어? 진짜?'

 '뭐 했는데?

 '.......'

 그냥 봤다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얼굴만 붉히니 도대체 뭘 봤길래 이러나 싶어 다들 더 달려들 밖에. 쯧쯧, 혀를 차던 인우가 멈칫했다.

 '야. 우강현 온다.'

 인우의 고갯짓에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헐레벌떡 들어오던 이영과 달리 강현이 느긋한 걸음으로 테이블로 걸어왔다.

 '뭐야. 또 내 얘기 하고 있었어?'

 묘하게 조용한 분위기로 대충 파악한 강현이 피식, 하고 웃으며 이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강현이 옆자리에 앉는 순간 이영의 어깨가 흠칫, 하고 굳었지만 다행히 강현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게 왜 자리를 비워. 술자리에서 자리 비우면 안 되는 거 몰라?'

 '그래? 그래서 또 뭐로 날 까고 있었는데?'

 그렇게 물으며 강현이 갑자기 이영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하지만 몰래 강현을 흘끔거리고 있다 눈이 떡하니 마주친 이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얘 술 많이 먹었냐?'

 그제야 벌겋게 달아오른 이영을 발견한 강현이 앞에 앉은 인우에게 묻는다.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 한 상황이라 뭐, 좀? 이라고 어영부영 대답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병호가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건 또 뭔 소리야. 강현의 시선이 병호에게로 옮겨갔다.

 '너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길래 너 찾으러  갔던 송이가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 오냐?'

 다시 제게 닿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영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대체 뭘 했던 거야?'

 '뭐, 기껏해야 키스정도밖에는 안했는데.'

 태연히 중얼거리는 강현에 인기 없는 남자들이 일제히 눈에 쌍심지를 켰다.

 '기껏?!'

 '와. 키스가 기껏이냐!'

 '완전 재수없어~!'

 부러움이 섞인 야우와 강냉이가 다시 쏟아졌다. 날아드는 과자를 옆으로 피하며 강현이 이영에게 고개를 틀었다. 아예 목까지 시뻘게진 이영은 강현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닳고 닳은 요즘 세상에 고작 키스 정도로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예비역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영답기도 해서 강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게 그렇게 자극적이었어?'

 피식하고 웃은 강현이 어린아이에게 하듯 손을 뻗어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그런 강현의 친구들도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탁.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단숨에 가라앉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영이 강현의 손을 쳐낸 소리였다. 지켜보던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나, 갈래.'

 주섬주섬 가방을 움켜 쥔 이영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가게를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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