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누군가를 발견한 이영이 걸음을 서둘렀다.
'정인우!'
'어, 송이영이.'
부르는 소리에 마주오던 인우도 이영을 보고 인하산다.
'상현이는?'
'아직 빈소에 있지. 난 오늘 내야 하는 리포트가 있어서 일단 그거 내러 잠깐 왔어.'
'전화가 안 되던데.'
'그래? 배터리 다 됐나보네?'
'친한 친구였어?'
'뭐. 나보다도 강현이가 많이 친했지. 성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좀 안 좋은 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연락 안 하고 지낸지 꽤 됐었거든.'
'무슨 일로?'
'교통사고라는데, 그냥 단순한 교통사고는 아닌 거 같어라고. 경찰도 왔다갔다 하고.'
'그래서 지금 다시 가는 거야?'
'집에 잠깐 들러서 옷 좀 갈아입고 가려고. 연 이틀 입었더니 땀냄새 나.'
'고생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이영에 인우가 피식, 웃었다.
'니 표정이 왜 그러냐. 누가 보면 네 친구가 상 당한 줄 알겠다.'
'그러게. 내 기분이 왜 이렇게 별루냐.'
이영이 멋쩍은 듯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런 이영이 전혀 이해가 안 ㅗ디는 것도 아니었다.
'뭐, 같은 나이 대에 죽은 사람 얘기 들으면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그런가봐. 게다가 내 기분이 이런데 강현이나 네 기분은 어떻겠나 싶기도 하고.'
'너까지 꿀꿀하게 그럴 거 뭐 있어. 그나저나 이틀동안 혼자 작업해서 미안해서 어쩌냐?'
'밥 시시면 되죠.'
'와. 기분은 꿀꿀해도 챙길 건 챙기는 구나. 야무진데, 송이영이?'
'당연하지.'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장지는 언제 가는데?
'내일 오후에. 난 모레쯤 나올 수 있을 거 같고. 강현이는 모르겠네.'
'괜히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루 더 쉬어도 돼. 혼자 해도 별 불만 없으니까. 진도가 좀 안 나가서 문제지만.'
'쉬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그렇게 되나?'
이영이 볼을 긁적거리자 인우가 농담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모레 보자.'
'저기'
인사를 하고 걸음을 내딛으려는 인우를 이영이 붙잡았다.
'왜?'
'아니야'
'뭔데'
'아니라니까. 가.'
고개를 내저은 이영이 후다닥 걸음을 내딛는다.
하마처면 강현에게 전화좀 하라고 전해달랄 뻔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어쩌려고 그랬나 싶었다. 여자 친구도 아닌데 단순히 걱정된다는 용건으로 전화라니. 요즘 자꾸 어디까지가 보통의 친구로서 해도 되는 행동인지를 잊어버려서 문제였다.
그나마 말하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이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Trrrrrrrrrrrrrrrrrrrr.Trrrrrrrrrrrrrrrrrrrrrrrr.Trrrrrrrrrrrrrrrrrrrr.
한참을 뒤척이다 막 잠이 들었던 참이었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더듬더듬, 잠결에 이영이 머리맡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핸드폰을 집어 귀에 댔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어, 왜'
이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할 녀석은 기껏해야 그 녀석밖에 없으니까.
[누가 전화하기로 했나 보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에 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확인한 핸드폰 액정화면에는 02로 시작하는 번호가 떠 있었다.
아마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공중전화로 한 모양이었다. 모르는 번호는 안 받고 넘기는 성격이라 이렇게 잠결에 받은게 천만다행이었다. 막둥이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에 전화 오면 구박 안하고 받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다시 대답했다.
'아니 우리 막둥인 줄 알고.'
[아, 이일이?]
수화기를 타고 피식, 하는 웃음 소리가 전해진다. 그리고 침묵.
'괜찮냐?'
[그냥, 얼떨떨해.]
전화 받았을 때 강현의 표정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영이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실없는 소시는 잘해도 위로 같은 건 좀처럼 재주가 없다.
'아무생각 하지 말고 잠 좀 자.'
보통 이영이 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하지만 의외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적어도 이영은 자기 전엔 그렇게 복잡하게 느껴지는 문제들이 자고 일어나면 조금 태평해지곤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영이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나 너희 집에 가도 되냐?]
잠시 생각하던 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런데 언제 오려고?'
[나 지금 니네 집 앞이야. 올라갈게.]
그리고 딸칵.
'에?'
잠시 전화기를 들고 멍하게 있던 이영이 뒤늦게 강현의 말을 제대로 인식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영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신발을 신고 문은 열고 나가려다가 곧 걸음을 멈췄따. 생각해보면 마중 나가는 것도 좀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결국 이영은 문틈으로 고개만 쏙 빼고 강현이 복도 끝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계단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복토 끝에 어스름한 불이 들어오고 이내 강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로 들어서던 강현도 얼굴만 쏙 빼고 있는 이영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쳤다. 이영이 멋쩍게 손을 들어보이자 씩, 하고 웃은 강현이 걸음을 빨리했다.
어? 이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집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걸어오는 강현은 검은색 정장차림이었다.
'자, 잠깐.'
급히 손을 앞으로 내밀며 멈추라는 제스처를 했다. 문 앞으로 다가서던 강현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왜? 강현이 눈으로 물었지만 이영은 대답도 없이 집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미등까지 꺼지고 이내 깜깜한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지만 이내 닫혔던 문이 열리고 이영이 뭔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뒤로 돌아.'
영문은 모랄 멀뚱하게 서있는 강현에 이영이 다시 한 번 더 재촉했다.
'돌아보라니까?'
황당하긴 했지만 강현도 군말 없이 돌아섰다. 뒤를 돌자마자 팍, 하고 등으로 뭔가가 날아왔다. 아픈 것은 아니지만 기묘한 느낌에 강현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에도 그것은 두어 번 더 반복되었다.
어번엔 아주 구석구석 골고루.
등을 맞고 사방으로 튀는 하얗고 작은 알갠이는 분면 소금이다.
'원래 상갓집 다녀오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거 해야 해.'
고개를 돌리니 맛소금을 봉지 째 들고 삐죽, 웃고있는 이영이 보였다.
'서민틱하긴.'
피식, 하고 웃은 강현이 중얼거렸다.
'뭐얏?!'
이영이 발끈했다.
'그런데 그거 맛소금으로 해도 되는 거야? 좀 더 굵은 소금으로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굵은 소금 갈면 맛소금이잖아.'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닐 건데.'
'뭐! 그럼 집에 있는 게 맛소금 밖에 없는데 어쩌라고. 서민틱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런 건 또 따지냐?'
투덜대는 이영에 씩, 하고 웃은 강현이 옷에 묻어있는 소금을 털어냈다. 손이 닿지 않는 등 쪽은 이영이 털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것은 다 털어낸 뒤 강현이 똑바로 서서 물었다.
'이젠 들어가도 되냐?'
'어'
이영이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열었다. 강현이 집안으로 들어서고 이영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방안으로 들어선 강현이 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린 것 같은 얼굴. 과제로 며칠 밤을 샐 때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왜 집으로 안가고. 피곤해 보이는데 가서 쉬지.'
'그러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강현에 이영이'그렇다고 가라는 말은 아니고'하고 변명했다.
'많이 친했나봐?'
'뭐. 그렇지.'
'잠은 안와?'
'원래 안 왔는데.'
남의 일인 양 건성으로 질문에 대답하던 강현이 문득 고개를 들어 이영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왜 너 보니까 잠이 오지?'
이상하다는 듯 가만히 웃는 강현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끌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말했다.
'그럼 좀 누워.'
'그럼 사양 않고.'
이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현이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상의도 벗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너도 와서 자.'
헉. 눈도 감고 있으면서 어떻게 알았지. 이영이 소리도 없이 가만히 서있었으니 당연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찔리는 구석이 있는 이영은 급히 불을 끄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송이야.'
이번엔 얌전히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강현이 다시 이름을 불렀다.
'왜.'
나 이번엔 안 훔쳐봤는데. 당연히 또 보고 있다고 뭐라고 하려는 것인 줄 알았던 터라 대꾸하는 목소리가 불퉁했다. 하지만 이내 강현이 한 말을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넌 그러지 마라. 그놈처럼 말없이 사라지거나 그러지마. 내 옆에 있어.'
-!!!
마치 고백과도 같은 속삭임. 얼굴로 열기가 몰렸다.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천하의 우강현이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할 수 있는 친구. 물론 제가 가진 마음과는 확연히 다른 색을 띠고 있는 이야기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나, 나도.'
차마 눈을 마주치고는 할 수 없어 천장만 뚫어져라 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이영의 대답에도 강현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 기묘한 침묵에 이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헤에. 어느 새 강현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있었다. 제 쪽을 보고 누워있던 터라 고스란히 잠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을 보니 겉으로 티가 안 나도 피곤하긴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무런 경계 없이 순식간에 잠이 든 강현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차라리 고백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어쩌면 잘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혹여 받아주지는 않더라도 그냥 친구사이로는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같이 강의를 듣고, 함께 작업을 하고, 밥도 같이 먹겠지만 이렇게 말도 없이 문득 찾아온다거나, 경계 없이 같이 잠이 든다거나,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고백한다거나 하는 일은 이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했다.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보다 평범한 친구 사이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이제는 눈앞의 이 평온한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냥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설사 강현이 고백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게 과연 얼마나 가겠는가. 기껏해야 삼 개월도 안 갈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보다는 우정이라도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쪽이 백배는 낫다.
지금은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도 조금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렇게 결론지은 이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내가 이렇게 미련한 놈인지도 모르고."
"뭐?"
"………아."
혼잣말을 도 입 밖으로 내서 했나 보다.
사나워진 눈초리에 눈치만 보고 있는데 다행히 인덕션 위에 올려둔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주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강현과 마주 앉아 있던 이영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끄고 미리 준비해놓은 잔에 물을 부었다.
"그래서 구멍 뚫리겠어?"
이미 다 녹아 저을 것도 없는 커피를 밥숟가락으로 무한 반복해서 젓고 있는 이영에게 강현이 한마디 한다.
슬그머니 숟가락을 싱크대 위에 놓고 식탁에 다시 앉았다. 돼지코가 새겨진 머그컵 두 개가 사이좋게 식탁에 놓였다. 그리고 다시 흐르는 침묵.
"날 좋아한다고?"
"컥."
하필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와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간 타이밍에 강현의 입이 열렸다. 게다가 질문조차 스트레이트. 덕분에 목으로 넘어가야 할 커피가 기도로 넘어갔다.
쿨럭쿨럭쿨럭쿨럭쿨럭.
미친 듯이 터지던 기침이 겨우 진정되어 고개를 들었던 이영은 다소 한심하다는 표정의 강현과 눈이 마주쳤다. 진짜 이게 무슨 추태인가 싶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확인 차 묻는 건데 그냥 친구로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지?"
"……으응."
비난하는 눈빛은 아니지만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식탁에 놓인 머그잔 손잡이만 응시했다.
"너 호모야?"
"……응."
잠시 고민했지만 너한테만 그렇다고 했다가 괜히 착각이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는 강현에 고개는 점점 더 숙여졌다.
"그래 그럼. 오늘부터 사귀는 건가?"
"응. ……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이영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거의 식탁에 닿을 것 같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왜?"
그러나 정작 깜짝 놀라는 자신의 반응에 오히려 강현이 왜 그러냐는 표정이다.
"뭘, 해?"
"사귄다고."
"누가. 너랑, 나랑?"
멍청하게 되묻는 이영의 반응에 강현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너 나 좋아한다며."
"으응."
"그럼 내가 받아들이면 사귀는 거 아냐?"
그런 거야?! 그런 거였어?!
"……그게,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봐서."
"하."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하는 이영의 말에 강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니가 생각한건 뭔데?"
"……글, 쎄."
고백도 얼떨결에 한 이 마당에, 그런 것까지 생각해 놨을 리가 없었다.
"넌 그럼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기만 하려고 했던 거야? 난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기대를 아예 안했다면 거짓말이고 사람인지라 기대를 하긴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겠다는 말 정도까지는 몰라도 이렇게 단박에 사귀는 걸로 결론이 날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뿐이다.
얘도 보면 참 극단적이다.
"그건 그렇지만, 넌, 여자가 좋잖아."
"그건 그렇지."
"……."
뭐야. 사람 놀리나.
잠시 기대에 찼던 이영의 눈에 곧바로 실망감이 어리고 고개가 아래로 푹, 떨구어 졌다. 그런 이영에 강현이 이내 뒷말을 뒷붙였다.
"하지만 너라면 괜찮을 것도 같아서."
발딱 이영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사귄다고 해도 어차피 지금까지랑 다를 것도 없잖아."
"……다르거든?"
"뭐가 달라. 밥도 같이 먹고 수업도 같이 듣고 심지어 주말에도 거의 같이 지내잖아. 과제하느라."
"……."
어쩐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쉽다 했다.
결국 녀석이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친구 사이의 연장일 뿐. 오히려 싫다고 하는 것보다 더 상처 입었다.
하지만 덕분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달라. 사귀면 우리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해야 해. 알고나 있어?"
이영의 대답에 정작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건 강현이다.
"설마 이 나이에 손만 잡고 연애할까봐? 그런 건 나도 취미 없는데."
"……정말, 네가 나랑, 키스하고 섹스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이영에 강현이 씨익, 하고 입 꼬리를 올린다. 그런 강현의 웃음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이영이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니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강현의 동작이 더 빨랐다. 어느새 강현의 오른손은 이영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시험해보던지."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강현이 팔을 제 쪽으로 당겼다. 새까만 눈동자가 가까워진다고 생각한 순간 강현의 입술이 이영의 입술을 눌러왔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뭐하는-."
이영이 펄쩍 놀라 머리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이미 강현의 왼손이 이영의 뒤통수를 감싸쥐고 있었다.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뻗대는 괘씸한 머리통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잠까- 읍."
항의하려고 열린 입안으로 강현의 혀가 불쑥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이영이 진 게임이었다.
밀어내려던 이영의 손이 갈 곳을 몰라 허공을 배회했다.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강현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이영의 가는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그 와중에도 질척이는 혀는 부지런히 이영의 입안을 휘저었다. 치아 하나하나를 훑고, 잇몸을 더듬은 뒤, 입천장을 진득하게 문지른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각도를 달리해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쪽.
영원히 끝날 거 같지 않던 입맞춤이었다. 이러다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마치 제 맘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젖은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말했잖아. 너랑이라면 괜찮을 거 같다고."
반쯤 넋이 나간 이영을 향해 속삭이며 강현이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