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6)

*

"오빠 내 말 듣고 있어요?"

"어?"

날이 선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서 진아가 불퉁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이영은 제가 학생식당에 앉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본래는 이영 혼자 온 것이었으나 식판을 들고 빈자리로 가는 도중에 점심을 먹고 있던 무리와 마주쳤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진아를 보니 왠지 양심이 따끔거려서 합석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일부러 가지 않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조용히 무리에 합류했다.

"아, 미안, 뭐라고 했어?"

한창 신이 나서 떠들고 있던 이야기의 주제는 다들 크리스마스이브에 무엇을 하며 놀 것인가.

고작 하루 노는데 무슨 그렇게 할 얘기가 많은가 싶을 정도로 먹는 내내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그 와중에도 식판의 밥이 줄어드는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자기네들끼리 잘만 이야기 하더니 이영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새 제 쪽으로 화제가 옮겨진 모양이었다. 미안하다는 듯 난처한 웃음을 지어보이자 진아의 눈초리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요?"

"그냥, 뭐…….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

대충 얼버무리고 화제를 돌렸다.

"요즘 왜 강현 오빠랑 같이 밥 안 먹냐구요."

"강현이는 지금 강의 듣잖아."

"그치만 평소에는 기다려서 같이 먹잖아요."

그랬지. 강의시간이 맞지 않는 탓에 이영이 작업실에서 기다리다가 강현의 강의가 끝나면 건물 앞으로 가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 보통의 일과였다.

헌데 이영이가 그걸 안하니 밥을 같이 먹을 일이 없는거다. 정확히 고백하고 사귀기로 한 날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근 일주일째 그런 상태.

사실 지난 근 2년간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 했었던 일이다. 고백하고 더러운 호모라고 아예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된다, 고백하고 차이고 강현이 이영을 피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고백하고 차이고 그래도 친구는 된다, 고백하고 받아들여주지만 생리적으로 남자랑은 안 되겠다고 한다, 등등 정말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예상하고 또 예상했지만 그 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고백하고 사귀고 키스한다,라는 경우는 진짜 한 번도 예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사귀게 되면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불안했다. 물론 좋았다. 고백하고 사귀기로 한 날만. 그것도 반쯤 정신이 나갔었던 시간을 빼면 몇 시간도 안된다.

다음날이 되니 금방이라도 강현이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안 되겠더라, 라고 하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났다.

설사 그런 말을 듣게 되더라도 오늘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서 괴했던 것이 어영부영하다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훌쩍 지나버렸다.

내심. 제가 안하면 강현이가 미리 전화해서 밥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지 않을까 했는데 전화는커녕 문자 한통이 없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우울해졌다.

밥 먹었냐는 문자라도 한 통보내면 손가락이 부러지나? 흥칫핏. 다소 제멋대로인 생각을 하며 조용히 대꾸했다.

"그냥, 배도 고프고 그래서."

으,짜.

짜다고 조금 베어 먹고 그대로 놓아둔 계란말이를 저도 모르게 삼킨 이영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좀 전에 조금 베어 먹은 부분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아예 소금덩어리다.

"둘이 싸웠어요?"

쿨럭. 막 넘기던 계란말이가 목에 탁 걸렸다. 추하게 켁켁 대는 이영에게 진아가 급히 물 컵을 건네주었다.

"싸, 우긴."

"참 오빠. 오빠는 크리스마스에 뭐해요?"

이영을 잔뜩 당황하게 해놓고 제멋대로 다른 주제로 넘어가버린다. 휙, 휙, 지나가버리는 여자아이들의 대화에 따라가려니 숨차다.

"글쎄. 별 계획 없지 뭐."

여전히 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잔기침을 하던 이영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는 대수롭지 않게 물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시 오빠 그날 강현오빠랑 놀아요?"

"어? 글쎄."

뭐, 일단은 사귀는 사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기대는 하는데, 워낙에 그런 걸 챙기는 녀석이 아니라 어떻게 될지는 이영도 알 수 없으니 대답이 시원찮아싿.

물론 작년 크리스마스는 둘이 함께 보냈지만 꼭 크리스마스라서가 아니라 연말을 아예 쭉 제 집 -넓디넓은 제 집 두고 굳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용케 좁은 이영의 원룸에서 지내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 에서 과제하느라 보낸 거였으니 크리스마스에 만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부탁인데 그날 다른 약속 잡아주면 안 돼요?"

"……."

아. 그거였나. 그제야 진아의 질문 의도를 파악했다.

"네? 그래주시면 안 돼요? 오빠가 약속 있다고 하면 강현오빠도 다른 약속 잡을 텐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으니 진아가 귀여운 얼굴로 이영의 팔을 흔들며 졸라댄다.

그렇게 좋은가. 어린 진아는 제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물론 어린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거겠지.

키가 좀 작은 것이 흠이지만 얼굴이 워낙 예쁘고 그럼에도 애교가 많아서 건축학과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서도 좋다는 남자들이 한 트럭은 될 만큼 인기가 많았다.

사실 이영이 이렇게 갑작스런 고백을 하게 된 원인도 알고 보면 바로 진아에게 있었다.

강현에 대해서 자꾸 이것저것 물어볼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 급기야 고백할거니까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평소처럼 그냥 모르는 척을 해버릴 것을 괜히 떠본답시고 강현에게 진아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가 예쁘지, 귀엽기도 하고, 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이 사건의 발단.

평소처럼 별 생각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겠거니 하고 물은 것인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좋은 대답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진아는 말할 것도 없이 강현조차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영이 나서서 둘이 잘되게 해주는 것이 친구로서의 올바른 자세겠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만 상상해도 뱃속에서 자꾸 뜨거운 것이 휘몰아쳤다.

물론 그동안 강현이 만나는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주로 육체적인 관계가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영이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어느새 끝이 나 있곤 했다. 그렇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강현의 여자 친구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던 강현이 진아에게는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하면서 이영은 제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오는 여자 막는 성격도 아니고 진아가 고백하면 두 사람이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만 문제는 이영이 봤을 때 이 두사람이 이어지면 지금까지처럼 가벼운 만남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든다는 거다.

그동안이야 즐기려고 만나왔다지만 이제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가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굳이 독신이 아니고서야 결혼을 전제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상황에서 애교 많고 미인인데다 건축가 아버지까지 둔 진아는 이영이 보기에는 마치 강현에게 맞춰진 것 같은 신붓감이었다.

게다가 보통 이런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이영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강현에게 진짜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에, 그것도 이영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물론 언제라고 준비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두 사람을 감시하고 지켜보는 것이 매일 계속되면서 불안과 초조함이 극에 달한 이영이 결국 그렇게 어이없는 고백을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얼떨결에 사귀는 사이까지 되었다.

너무 생각지도 못한 결론이라 그런가. 태주는 복에 겨워서 저런다고 이죽거렸지만 자꾸만 불안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진아를 앞에 두고 보니 어쩐지 왠지 드라마 속에 흔히 나오는 주인공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둘이 이어지지 못하게 막는 못돼먹은 악녀 역을 맡게 된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다.

결국 모든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잘되고 악녀만 비참해졌다는 것을 떠올리니 더더욱.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맨밥만 우물거리고 있던 그때, 진아가 이영에게 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한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며 소리쳤다.

"어? 강현오빠! 여기요!"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는 그 이름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이영이지만 얼굴을 구기며 도로 고개를 돌렸다.

하필 진아와 있을 때 마주칠 건 뭐람.

"난 수업이 있어서."

강현이 오기 전에 냉큼 식판을 들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진아에게 붙잡혔다.

"내가 강현오빠한테 문자쳤어요. 이영 오빠랑 싸워서 요 며칠 강현오빠 분위기 장난 아니게 살벌하거든요. 크리스마스는 커녕 말도 못붙이겠잖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화해하구 풀어요. 네?"

 강현이 천천히 걸어오는 사이에 진아가 귀에다 작게 속삭였다. 말은 좋지만 결국 자기 데이트 신청하게 둘이 해결해라, 라는 거 아닌가. 싸운 거 아니라니까. 이영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빠 점심-."

"다 먹었어?"

코 앞까지 걸어온 강현이 진아의 말을 자르며 -아예 진아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걸어오는 내내 강현의 눈은 이영에게만 닿아있었다.- 이영에게 물었다.

으응. 이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이 이영의 앞에 놓인 식판을 집어 들었다. 어? 하며 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강현은 이영의 식판을 정리대에 밀어 넣고 있었다.

"오빠."

자리에서 일어나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이영에 비해 진아의 행동이 빨랐다.

"오빠 크리스마스 날 뭐해요?"

진아의 물음에 강현이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도 무뚝뚝한 말투이긴 했지만 무성의하지는 않았따. 뭔가 기분상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솔로들끼리 같이 놀지 않을래요? 내 친구들은 다들 남친이랑 약속있대구. 그날 이영 오빠도 약속 있다는데."

"……."

미간을 살풋 찌푸린 강현이 이영에게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냐, 라고 묻는 눈동자에 이영은 입술만 달싹였다.

"그쵸. 이영오빠?"

쐐기를 박는 진아의 말에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이영이 결국 으응.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멍청한 놈."

태주가 딱 잘라 말했다. 뭐 이런 덜 떨어진 놈이 다 있냐, 하는 표정에도 이영은 조용히 소주잔을 들어 홀짝인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이영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던 태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앞에 놓인 잔을 채우려다가 병이 비어있는 것에 빈 소주병을 들어올렸다.

"이모, 여기 소주 한병 더요."

"약속, 있는 거 아니야?"

제법 힘을 준 차림새의 태주를 흘끔거리며 이영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광택이 흐르는 진남색 정장에 가죽이 덧대어진 아이보리색 명품 트렌치코트까지. 고급 레스토랑에서 칼질 좀 해야 할 것 같은 차림새로 이런 시장 바닥같은 곱창집에 앉아있으니 태주 혼자 너무 튀었다.

"그런 생각 있는 놈이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런 목소리로 전화를 하냐."

이영 딴에는 미안해서 한 소리였지만 그런 소리에 그냥 얌전히 아니라고 할 태주가 아니다.

보통은 정해진 파트너 없이 그때그때 마음 맞는 놈이랑 즐기는 타입이고 그것이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지만 올해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며칠 전 reinbow에서 만나 베드인 한 녀석이 꽤 마음에 들어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자는 약속에 오케이 한 것.

완벽세팅을 하고 집을 나설 때까지는 꽤 괜찮은 하루였다. rainbow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다 죽어가는 이영이 놈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잠깐 꽤 취향이었던 남자의 몸이 눈앞에서 아른아른 거렸지만 결국 신촌으로 택시를 돌리고 말았다.

"헤헤."

얼굴을 팍 찌푸리는 태주를 향해 이영이 간신배처럼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무슨 일을 당하든 말든 계속 모르는 척 했어야 했다고 매번 땅을 치고 후회해보지만 제 발등 제가 찍은 것을 누굴 원망하겠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인아주머니가 가져온 소주를 따랐다.

"대체 뭐가 문젠데? 고백해서 사귀게 됐으면 다 잘된 거 아니야?"

"……그렇지만, 녀석이 그냥 내가 불쌍해서 받아준 거면 어떡해?"

"역시 사람은 화장실 들어오기 전이랑 나온 후가 이렇게 달라요. 이전엔 사귀어 주기만 해도 좋겠다고 하더니 이젠 왜 사귀어주는지 이유까지 따지냐?"

"그랬다가 실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는 안될 거 같다, 라고 할 것 같단 말이야."

뭐,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 이영이 걱정하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런 얘기 나오기 전에 니가 알아서 그 여자애랑 이어주기라도 하게?"

"미쳤어?"

막 소주잔을 비우던 이영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게 쓸데없이 착한 척은 왜 해."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하는 이영이 불쌍해보였는지 태주도 더이상 말없이 조용히 이영의 빈잔을 채웠다.

"어차피 헤어질 것까지 각오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

"그렇지. 분명 그런데. 이상하게 잘되니까 더 불안해."

솔직한 심정이었다.

"뭐래."

"뭔가 이게 끝이 아닐 거 같고. 사실은 깨면 꿈일 거 같고."

"논다. 아주. "

아무래도 짝사랑을 너무 오래해서 온 부작용이지 싶었다.

"진짜 연락도 없냐?"

"없어!"

"넌 언제 해봤는데."

"안해봤는데?"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이영에 태주가 미간을 접었다.

"너좀 웃긴다? 너는 안하고 걘 해야 한다는 건 어느 나라 법칙이냐?"

"그치만……진짜 진아 만나고 있으면 어쩌냐."

무서워서 확인도 못했던 모양이다. 꾸물꾸물 다시 땅을 파는 이영에 태주가 혀를 쯧쯧 찼다.

"사실 만나고 있어도 할 말은 없지. 계속 피하고 크리스마스도 먼저 약속 잡아버린건 너잖아."

"……."

가슴에 쿡쿡 태못을 박는 태주에도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영에 조금 심했나 싶어진 태주가 물었다.

"고기 더 먹을래?"

"니가 사냐?"

시무룩해있는 줄 알았더니 이런 건 또 놓치질 않는다.

"아줌마. 여기 대창 2인분 추가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태주가 손을 들어 추가 주문을 넣었다.

"진짜 안갈래?"

두 번 권하는 일 없는 태주가 한번 더 묻는다. 둘이 있는 내내 전화통에 불이 나는 것을 본 이영이 그만 일어나자고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난 됐어."

이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알아? 우강현보다 괜찮은 놈 건질지?"

"그건 불가능해."

이 와중에 깨알같이 지 애인 자랑하고 앉았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태주가 미련없이 몸을 틀었다.

"송."

막 멈춰선 택시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말고 태주가 고개만 들었다.

"어?"

"아무리 그래도 불쌍해서 남자 사귀는 놈은 없어.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그런 소리 나오는 거지. 몇 년을 알고 지냈어도 성향알고 욕하고 침 뱉는 놈들이 얼마나 수두룩한데."

상냥한 말투는 아니지만 결론은 이영을 위로해주는 말이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오늘은 와주지 않았는가.

"간다."

고맙다, 미안하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은 낯부끄러워서 시큰해진 코끝만 문질거리고 있으니 태주가 먼저 인사를 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곧바로 출발해버리는 택시 뒤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영이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파카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에잉. 술을 어중간하게 먹었더니 그새 다깼다. 아쉬우나마 집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소주 일잔 하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양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이영이 커플일색인 거리로 종종걸음을 쳤다.

"어디 갔다와."

복도를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이영이 제자리에 멈췄다. 현관문에 기대서있던 강현이 몸을 바로했다.

"남이사. 어딜 갔다 오든 말든."

제 말에 강현이 피식, 하고 웃었다.

"술 먹었어?"

"그래 먹었다. 어쩔래."

술기운이 돌아서 그런지 하고 싶은 말이 술술 나온다. 제대로 차려입은 차림새의 강현을 보니 더더욱 벨이 꼬였다. 저렇게 차려입고 진아를 만나고 왔을 걸 생각하니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났다.

"누구랑 먹었는데?"

"누구랑 먹든. 너랑 상관없잖아. 지는 여시 같은 기집애랑 데이트한 주제에."

그때까지도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강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누구랑 먹었냐고."

"……."

새파랗게 빛을 내는 눈동자에 왠지 술기운도 확 달아났다. 그래서 강현이 화가 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호, 혼자, 먹었는데."

"정말이야?"

끄덕끄덕끄덕.

당황한 이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새파란 빛이 사그러졌다. 그제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이영이었으나 이내 발끈해서 외쳤다.

"뭐! 뭐! 내가 누구랑 술을 먹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저는 진아랑 놀다온 주제에. 소심하게 흥칫핏, 하고 있는데 작게 한숨을 내쉰 강현이 묻는다.

"전화는 왜 안받아."

"어? ……전화했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영이 파카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술기운 때문에 행동하나하나가 크고 둔했다.

열쇠, 지갑, 영수증, 손끝에 닿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꺼내보다가 한참만에 겨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이영의 입가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항상 먼저 연락하는 것도, 먼저 찾아가는 것도, 항상 이영이었다. 헌데 믿을 수 없게도 제 핸드폰에 새겨진 건 부재중 통화 17통.

"왜, 전화했는데?"

물론 아닌 척 입술을 삐죽거려보지만 술때문인지 좀처럼 표정관리가 안된다.

"진아랑 데이트하느라 바빳을 텐데 전화할 시간도 있었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찌푸려지는 강현의 표정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대놓고 질투하는 남자라니. 여자도 아닌 주제에. 기가 죽어 제 발끝만 내려다보는 이영의 머리위로 강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쁜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었던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먼저 다른 약속 정해버린건 너잖아."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억울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보통 남들이 다 오해도 풀어주고하더만,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네가 아무 말도 안했잖아."

기껏 시간 비워놨다고 말했는데 정작 자기는 약속 있다고 하면 내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지금까지처럼 당연히 나랑 보낼 줄 알았지. 게다가 애인 사이면 보통은 그러지 않나?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던건가?"

하지만 열심히 생각하고 땅만 판 본인과는 정반대로 강현은 당당했다.

"……그렇다고 치사하게 진아를 만나냐?!"

"누가 누굴 만나."

미간을 더 좁힌 강현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치만, 진아랑 만나기로-"

"난 그런 약속 한적 없는데."

설마.

잠시멍하게 강현의 얼굴을 보던 이영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무심코 내뱉어진 이영의 손이 강현의 코트에 닿았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있어야 캐시미어 코트조차 서늘해진단 말인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휘둥그레지는 이영의 눈을 보며 강현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러게, 전화는 왜 안받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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