띡.
띡.
띡.
소파에 드러누워서 한참을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꿔보던 이영이 에라이, 하고 리모컨을 내던졌다.
설인데 어떻게 재밌는거 하나를 안하냐. 설특집이라고 하는 오락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어디가 웃음포인트인지를 모르겠다. 차라리 평소의 오락프로그램들이 소소한 재미가있었다.
까르륵, 티비속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얼굴도 예쁘고, 키도 크고, 심지어 몸매도 좋았다. 종자가 다른거지,종자가.
확실히 예쁜 여자 아이돌들의 모습은 중독성이 있긴했다. 아무 내용이 없어도 약먹은 것처럼 계속 보게 된다.
이영에게 강현과의 며칠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떠오르는 기억에 이영이 볼을 긁적였다.
뭐하고 있으려나 이렇게 빈집을 지키고 있을줄알았으면 그냥 서울에 있을걸 그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점점더 보고 싶어진다.
소파에서 일어난 이영이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가지고 나왔다. 핸드폰 문자화면에 '뭐해?'라고 쳤다가 그러고보니 부산 도착했다는 연락도 안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다시썼다.
'부산왔다고 연락한다면서 깜빡했다 잘 도착했어 지금 뭐해?'
무슨 편지 쓰냐! 쓴것을 확인한 이영이 소리쳤다.
구구절절 쓴것은 지우고 다시 평범하게 '밥먹었어?'라고 쳤다가 시간이 몇신데 안먹었겠나 싶어 또 지웠다. 그렇게 한참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나니 왠지 습 피곤해져서 문자고뭐고 그냥 소파에 드러눕고 말았다.
문자 한 통 보내는 게 이렇게 피곤한 일일 줄이야. 대체 뭐가 평범한 건지를 모르겠달까. 잠시그렇게 숨을 고르고있는데 이마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에서 띠딩,하고 문자알람음이 울렸다.
엑?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벌떡일어난 이영이 핸드폰화면을 켰다.
'부산 내려왔냐?'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쳇. 수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실망한 이영이 핸드폰을 옆으로 던져놓고 다시 누었다. 하지만 시체놀이도 잠시, 몇초만에 도로 손을 뻗어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었다.
'뭐해?'
이번엔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전송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던져놓고 자신은 소파에 찰싹 달라붙어 시체놀이. 신경쓰지않는척 던져놓았지만 온신경은 핸드폰을 향해있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왠지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왜 답변이 없지. 못 봤나? 아님 보고도 귀찮아서 씹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찰나.
Trrrrrrrrrrrr.Trrrrrrrrrrrrrrrr.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이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곧바로 집어든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은 분명 우강현이었다.
어쩌지?어쩌지? 문자를 했으니 당연히 문자가 올 줄 알았지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 두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모르던 이영이 뒤늦게 흠흠, 하고 목소리를 고른 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다행히 나오는 목소리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뭐야, 너.'
하지만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따지는 듯한 강현의 말투에 조금 쫄았다. 쓸데없는 문자질이냐는 건가 싶었으나 다행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내려가면 전화한다며, 지금 도착했냐? 어?'
헤에, 내전화 기다렸구나.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도 이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상대가 이영의 얼굴을 보지못하는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래서. 넌 뭐하는데?'
대꾸없는 것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강현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나? 난 왕따놀이 중이야."
'쌍둥이들은.'
"친구들이랑 스키타러간다고 나 버리고 가버렸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서운했다. 단순히 더를 버리고 친구들과 놀러가버린것때문만은 아니고, 예전에는 자신이 내려오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제옆에 딱 달라붙어있던 녀석들이 이제는 따로 자기의 스케줄이라는 걸 만들만큼 커버렸구나 싶어서 대견하기도 하고 이제는 제가 필요없게 되었구나 싶어서 씁쓸해지는 부모의 기분이랄까.
'그래?'
"엄마도 등산간다고 가버리고."
'그럼 정말 혼자야?'
"어! 엉엉."
입으로 우는 소리까지 내자 수화기를 타고 피식,하고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를 들으니 이영도 피식하고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럴거 뭐하러 내려간거야?'
"내말이."
'밥은'
"이제 먹으려고."
강현의 물음에 거짓말처럼 배가 출출해졌다.
'그래? 그럼나 삼십분이면 도착하니까 먹지말고 있어. 집주소 문자로 찍어보내고.'
" 어?"
잠시 눈을 깜빡하던 이영이 뒤늦게 설마, 하고 되물었다.
"지금 너 어딘데?"
'지금 막 톨게이트 지났다.'
"정말?!"
'나오라고 하려고 했더니 식구들 없다니까 집으로 가면 되겠네.'
"나 전화안했다고 밥 못먹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어떻게 알았냐.'
푸시식. 잔뜩 기대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뭐야."
하긴. 진짜 부산에 내려올리가 없잖은가. 당연히 그럴줄알았다 싶으면서도 혹시나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제 사탕을 빼앗긴 기분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시간상으로 치면 떨어진지 하루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보고싶다니 이상했다. 제 마음이 아닌것 가았다. 그나마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강현이 던진 돌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잠깐이지만 이대로 나가 KTX를 타버릴까 생각도 했다.
'송이영.'
"어."
'문자로 주소 찍으라니까.'
".......뭐야 농담이라며."
입가는 다시 말려올라가는데 이상하게 말투는 퉁명스러워졌다.
'내가 언제? 니가 전화 안해서 내려가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했지.'
"진짜 내가 전화 안해서 내려오는거라고?"
'대체 얼마나 오래 걸리기에 아직 도착을 안 했나 싶어서.'
말은 그렇게 해도 나름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했었는데 정말 이영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다렸으면 왜 네가 전화는 안했는데?"
'........'
부산까지 달려올정도로 그렇게 전화를 기다렸다면 제쪽에서 먼저 해볼수도 있지않나. 이영이야 제 정신이 들고나니 무슨말을 해야할지 몰라 못했다고 치지만 강현은 그렇지도 않을것 아닌가.
그런 이영의 물음에 강현은 한참 대꾸가 없었다. 전화를 했든 안했든 어쨌든 오고있다는 사람에게 괜히 따지고 들었나,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그러게.'
툭, 하고 흘러나온 대답.
마치 스스로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에 초조하게 할말을 고르고 있던 이영이 잠시 굳었다.
'괘씸해서 보러갈 생각에 그 생각은 못했네.'
헤에?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이영의 얼굴에 확, 하고 미소가 번졌다.
뭐야, 저랑 똑같았구나. 저만 연락하고 싶고, 저만 보고싶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것을 깨달은 이영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까지 얼마나 걸려?"
'글쎄, 주소 쳐봐야 알겠지만 늦어도 한 시간?'
"빨리와."
'그렇게 배고프면 먼저 밥먹고 있어도 돼.'
하지만 고픈것은 밥이 아니었다.
"보고싶어."
'......'
수화기 너머로 흐르는 침묵이 느껴졌다. 못 들었나 싶어 이영이 한번더 입을 열었다.
"보고 싶다고."
'너말야, 나 지금 운전중이라는거 알고는 있냐?'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알고있지."
날 뭘로 보는거야, 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한껏 가라앉은 강현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사고나면 다 니 책임인줄알아.'
엑?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여이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