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안녕."
잠깐 멈칫하긴 했어도 강현도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작
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니 그제야 의문이 생각났다.
"그런데 느그 내일 온다 안했나?"
"스키 타다가 성일이 다리 뿌러짓다."
"뭐!?"
스키가 그렇게 위험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방금 막 자각했다.
"느그는, 느그는 안다쳤나."
"당연하지."
하아. 이영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영에게 이일
이가 입고 있던 두꺼운 파카를 벗어던지며 부연설명을 했다.
"성일이는 다리 뿌러져서 병원 갔는데 우리끼리 놀기가 좀 그래
서. 성일이 아버지는 그냥 우리끼리 놀아도 된다고 하셨는데 영 분
위기도 안 좋고 그래서 그냥 왔다. 하루 종일 타니까 좀 질리기도
하고."
웬일로 그런 배려를 했나 했더니 아무래도 마지막 이유가 제일
큰 것 같았다. 실컷 탔으니 미련 없다 이거겠지.
"엄마는?"
"엄마 친구들이랑 등산 간다고. 저녁 드시고 오실 걸."
"헹. 나 배고픈데."
"저녁 안 먹었나."
"아니. 먹었지."
그런 당연한 소리는 왜 하냐는 듯 반응이다. 저렇게 잘 먹는데 그
게 다 어디로 가는 질 모르겠다.
"엄마한테 치킨 시켜달라할라 했는데."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모양새가 꼭 장화신은 고양이에 나오는 그
잔망스러운 고양이 같다.
"시키라. 내 돈 있다."
"진짜? 진짜?"
"어. 시키라."
진짜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반짝거리는 이일과 달리 이
영은 시종일관 무뚝뚝하다. 그러든 말든 목적한 바를 이룬 이일은
왁, 하고 정체불명의 소리를 지르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모
아놓은 쿠폰들을 뒤적거린다. 아마도 가장 쿠폰이 많은 걸로 시킬
모양이었다. 그런 이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이영이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문제 있나 싶어 물었으니 강현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열
심히 쿠폰을 뒤적거리던 이일이 다시 물었다.
"형. 몇 마리 시키꼬?"
"이랑이한테도 먹을 거냐고 물어봐봐."
"이랑이는 치킨 안 먹는다."
"그럼 두 마리 시키라."
"나 많이 먹을 건데. 형 친구랑 형이랑 한 마리 가지고 되나?"
아마도 키가 큰 강현 때문에 제 먹을 양이 줄까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세 마리 시켜. 내가 살게."
옆에서 보고 있던 강현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의아한 표정
을 짓는 이영과 달리 강현을 보는 이일의 시선이 반짝반짝했다.
"그러면 매운 양념이랑, 후라이드랑, 마늘도 시키야지~."
평소 양념반 후라이드반으로만 시키느라 먹어보지 못했던 마늘
맛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이일이었다.
그렇게 이일이 치킨집에 주문을 넣는 사이 이영은 조용히 옆에
앉은 강현을 흘끔거렸다. 인사도 안하고 간다고 하더니 치킨까지 시
켜주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치킨이 먹고 싶었나. 혼자 고개만
갸웃갸웃거린다.
"형형. 무봤나 촌닭 먹어봤어요?"
주문을 마치고 후다닥 돌아온 이일이 물었다. 치킨으로 호감도가 급 상승한 모양이었다.
"서울에는 없는 건데."
"서울에도 체인 생겼다."
턱을 치켜들며 자랑하는 이일을 이영이 가볍게 눌렀다.
"아, 진짜가?"
"안 먹어봤는데, 맛있어?"
민망해서 콧잔등을 슥슥 문지르는 이일의 체면을 세워준 사람은 강현이었다.
곧바로 이일의 설명이 쏟아졌다.
"거기 진짜 맛있는데. 떡도 들어가고, 소면도 주거든요. 그거 나중에 양념에 비벼먹으면 되요."
"그래?"
"형 매운거 잘 먹어요?"여기 좀 맵은데. 서울 사람들은 그런 거 잘 못 먹잖아요. 매운 양념 말고 좀 덜 매운 걸로 시킬걸 그랬나?"
"매운거 좋아해."
의외로 호응을 잘해주네. 말은 안 해도 이일과 강현의 대화에 이영의 관심이 집중되어있었다.
"아. 매운 거 좋아하면 서면에 엄청 유명한 낙지볶음집 있거든요. 거기 진짜 맛있는데. 내일 먹으러 갈래요?"
피식, 제멋대로 약속까지 잡는다. 듣고 있던 이영이 슬쩍 끼어들었다.
"야 오늘저녁에 올라간다."
"왜? 오늘 온거 아니가?"
"어, 그렇긴 한데........"
"자고 가지 왜?"
그러게. 내말이. 이영이 속으로 꿍얼거렸다.
말 못하는 이영과 달리 이일은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자고 가세요. 내는 엄마 방에서 자면 되니까 우리방에서 둘이 자면 되겠네."
지금은 이일 혼자 쓰고 있지만 이영이 서울 가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함께 쓰던 방이다.
사실 책장이며 옷가지를 빼고는 그때와 크게 바뀐것은 없었다.
"내일 일이 좀 있대."
"그럴까?"
난처할 것 같아 이영이 대신 이유를 말한 것과 강현이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은 거의 동시었다.
엥? 이영의 고개가 강현에게 닿았다.
"네네! 작고 내일 낮에 서면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형 남포동 찹쌀호떡 모르죠? 부산 와서 안 먹고 가면 안 되는건데. 그러니까 자고 가세요.네?"
"그래.그럼"
저에게나 먹힐 법한 먹을 걸로 졸랐음에도 강현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뭐야, 대체. 눈살을 찌푸린 이영이 강현을 향해 외쳤다.
호떡이야, 낙지볶음이야!?
물론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이랑아,치킨 먹어."
이일이 강현의 카드를 들고 배달원에게 달려간 사이 이영은 주방에서 컵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이랑이 방문 앞에서 말을 했다.
"이랑이 안 먹는다니까. 치킨 피자 그런 건 입에도 안 댄다."
"이랑이가 원래 안 먹나?"
특별히 안 먹거나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아 기억을 더듬는데 신이 나서 치킨 박스를 열던 이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아빠처럼 암 걸릴까봐 무서워서 안 먹는대."
"뭐?"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이영을 눈치채지 못한 이일이 계속 말을 이었다.
"위암이 그런거 먹어서 걸리는 거라고. 그런데 아빠는 치킨 피자 같은거 입에도 안 댔잖아. 그런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러면서도 치킨을 세팅하는 손은 쉴 새가 없다.
말없이 콜라를 따르고 있던 강현이 심각한 얼굴을 한 이영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번뜩 정신이 든 이영이 손바닥으로 슥슥, 얼굴을 문질렀다.
"이랑아! 치킨~"
애써 밝은 목소리로 소리를 높이던 그떄 달칵, 하고 문이 열리고 이랑이 밖으로 나왔다.
"먹으라고."
이영이 조금 맥빠진 목소리로 잘린 뒷말을 마저 이었다.
"살찌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랑이 슬그머니 이영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여기."
강현이 콜라 잔을 앞에 놓아주며 덧붙였다.
"살쪄도 예쁠 거 같은데."
"우웩"
일순 제가 한 말인줄 알고 흠칫 했던 이영은 이내 그것이 이일이 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웩,우웩, 토 나온다는 시늉을 하는 이일에게 이랑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들었다.
"우째 눈도 깜짝 안하고 저런 낮간지러븐 소리를 하지?"
역시나 이영이 하고 싶은 말을 이일이 대신해준다.
"왜? 사실이잖아."
하지만 태연한 강현의 태도에 세 사람 모두 잠시 멈칫한다. 다시한번 더 이일이 우웩,우웩, 토 나온다는 시늉을 했지만 이번엔 이랑도 스매싱을 날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영은 이랑의 귓볼이 살짝 달아오른 것을 분명히 보았다.
에라이, 이런 죄 많은 남자 같으니라고
"형 여자들한데 엄청 인기 많죠?"
다시 치킨다리를 뜯던 이일이 물었다.
역시나 치킨다리를 뜯고 있던 강현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킨다.
"나? 아닌데?"
"에이. 거짓말한다."
"난 남녀불문하고 인기 많은데?"
그리고 다시 한 번 흐르는 침묵.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 더 빈정 상한다.
"형 그럼 여자 친구 있어요?"
"응."
왠지 표정관리가 힘들다.
"예뻐요?"
남자라면 백이면 백 다 묻는 질문. 절로 귀가 쫑긋 했으나,
"아니."
쳇,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이영이 혀를 찼다.
"안 예쁜데 왜 사겨요?"
다시 한 번 쫑긋.
"웃겨서."
에라이. 이영 혼자 노느라 바쁘다.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거든."
아네.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놔주세요.
해탈한 이영이 조용히 닭날개를 뜯었다.
"에이, 그래놓고 사실 알고보면 엄청 미인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뭐, 내눈엔 예쁘긴 하지."
그렇게 말하는 강현의 눈은 이영에게 닿아있었다.
뭔데, 뭐. 이제와서 수습해봐야 아무 소용 없거든요?
흥칫핏. 그러면서도 입술이 삐죽삐죽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형이 말해봐봐."
"어,어?"
이일이 몰래 강현과 시선을 맞추고 있던 이영이 이일의 기습 질문에 당황했다.
"강현이영 애인. 완전 미인이재?"
"어? 미인, 인가?"
"뭐꼬. 안봤나?"
"보긴, 봤는데."
이건 뭐 제 입으로 제 칭찬을 할 수도 없고. 이영이 좀처럼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니 이일은 당연히 한 가지 이유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말도 못하게 못생겼나?"
"아니!? 못생긴건 아니고."
그렇다고 못생겼다고 하긴 싫었다. 이영이 눈으로 강현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강현은 태연히 콜라만 홀짝인다.
"그냥 보통?"
빤히 보는 강현의 시선에 이영이 턱을 치켜 올린다. 뭐, 그래도 이정도면 보통 조금 위는 되지.
"에?"
하지만 이영의 대답에 이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
"강현이 형 정도 되면 예쁜 여자가 쌔고 쌨을 텐데 왜 그냥 보통 여자를 만나는데? 그 여자 혹시 돈 많아요?"
"많아?"
오히려 강현이 이영에게 되묻는다. 뭐하는 거야. 당황한 이영이 이일의 눈치를 살폈지만 평소 눈치라고는 쥐뿔 없는 녀석이 지금이라고 알아챘을리 없다.
"아마 없는 거 같은데."
강현이 다시 빙글거리며 말했다.
"그럼, 진짜 사랑하는 갑네."
"풉!"
막 머금었던 콜라를 뿜어냈다. 이랑과 강현은 뒤로 물러섰으나 이일은 손으로 치킨위를 지켰다.
"아, 형. 진짜 더럽게."
이일의 핀잔에 이영이 항의했다.
"니가 쓸데없는 소릴 하니까 그렇지."
"내가 뭐? 저렇게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강현이 형이 돈도 없고 생긴것도 그저 그런 여자를 만난다는데 그 이유 말고 뭐가 있노."
아마도 치킨 세 마리로 강현을 돈 많은 집 자식으로 본 모양이었다.
물론 실제로도 돈 많은 집 자식이기오 하지만.
"돈이 없다기 보다는 그냥 평범한 집안이,일껄."
하마터면 일인칭으로 말할뻔 했다.
"그게 뭐 다른데. 어차피 부자 아닌거는 똑같잖아."
그건 그렇지. 할 말이 없어진 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 기분은 더럽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대였다.
"그러게, 그건 진짜 사랑하는 거지."
"풉!"
"아쫌!"
다시 한 번 쏟아지는 콜라세례에 이일이 기겁을 한다. 하지만 이번엔 이영의 귀에 이일의 목소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영의 시선이 강현에게 닿아있았다.
"그렇다는데?"
그런 이영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강현이 씽긋 웃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자꾸만 목덜미로, 귀로 ,얼굴로 피가 몰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띵동.
"엄마다!"
초인종 소리에 이일이 벌떡 일어났다. 이랑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른다. 강현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흐트러진 셔츠를 바로 잡았다. 밑단을 잡고 탁탁, 펴서 주름진 부분을 폈다. 가장 늦게 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느그 언제 왔노?"
집안으로 들어서던 어머니가 쌍둥이들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아까. 엄마 성일이 다리 뿌러졌다?"
"아이고, 조심들 안하고."
"나는 조심했다."
"밥은,"
등산화를 풀면서도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에게 이일이 자랑하듯 대답했다.
"지금 형 친구가 치킨 사줘서 먹고 있었다."
"형 친구?"
막 등산화를 벗고 거실로 들어서던 어머니도 쌍둥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강현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이영이 대학친구 우강현입니다."
강현이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엄마."
인사를 했는데도 말없이 보고만 있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이랑이 어머니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엄마야. 뭐 이리 훤칠한 아가 다있노."
"헤헤. 나도 처음 봤을 때 엄청 놀랬는데. 연예인이 우리집에 있는줄 알았잖아."
신기해하는 어머니의 반응에 이일이 저도 그랬다고 종알종알거린다. 사실 쌍둥이들이 처음 강현을 봤을 때 멈칫했던 것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아니라 순전히 강현이 누무 잘 생겨서였던 것.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자신도 처음 강현을 만났을 때 가족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근데 느그 술 먹었나?"
"어? 아닌데?"
다들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반응에 어머니가 턱짓으로 이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영이 얼굴이 왜 저렇게 벌겋노?"
예고도 없이 사랑고백을 들어서, 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