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6)

 "형형, 이제 바이킹 타러 갈거재?"

시간이 끝나고 두 사람에게 달려온 이일이 트램펄린에 내리자마자 다음 탈 걸 생각한다.

 "힘도 안드나?"

 "노는데 뭐가 힘드노."

 "힘들진 않은데 발은 무겁다."

트램펄린 위에 있을 때는 중력을 덜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땅에 내려오면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터라 이일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기분 이상하다고 제자리에서 뛰었다가 빠르게 걸었다가 하는 이일을 보며 이영이 킬킬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기?"

설마 또 헌팅?!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팍 찌푸르며 고개를 돌렸던 이영이 일순 굳었다.

 "송이영 맞지?"

반갑다는 듯 인사를 해도는 사람은 현진이었다. 단발머리였던 머리가 이제는 등까지 늘어뜨려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굳어있던 이영도 이내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 누군지 몰라봤었다. 그리고 몰라봤다는 것에 또 놀랐다. 그래도 2년은 매일같이 봤던 사람인데, 이렇게 기억 속에서 까마득하게 잊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설이라서 내려왔나?"

 "응. 니는 잘 지냈나? 지금 뭐하노?"

 "그냥 회사 다닌다. 니는?"

 "난 올해 졸업."

 "맞나."

그렇게 한참 의미없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서있던 이일이 형, 하고 이영의 옆구리를 친다. 이영에게 닿아있던 현진의 시선이 쌍둥이들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네 쌍둥이들인가?"

 "어, 많이 컸제."

 "와, 진짜 많이 컸네. 그때는 초등학생이었는데. 느그 내 기억하겠나."

 "어, 현진이 누나다이가."

 "옴마, 진짜?"

 "내가 쌍둥이들 데리고 많이 놀아줬었으니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

 "내가 뭘 또 많이 놀아줬다고."

쑥스러워하던 현진이 강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누꼬?"

 "대학친구."

 "같은 과가?"

 "비슷해."

보통 실내건축과 건축학과는 구분하지 못하니 대충 그렇게 설명했다.

 "그렇구나."

대화는 이영과 하면서도 현진의 시선은 강현에게 닿아있었다.

 "우리 그만 가봐야 돼서."

 "아, 진짜?"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참, 니 연착처 바뀌었나?"

 "아, 어."

 "어쩐지 전화가 안 되더라. 번호 쫌."

핸드폰을 꺼내 내미는 현진에 이영이 번호를 찍어 돌려준다. 찍어준 번호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이영의 바지주머니에서 음악소리가 났다.

 "내 곧 서울로 직장 옮길지도 모르거든. 올라 되면 연락할게. 아니라도 니 부산 내려올 떼 연락해서 함 보자. 정민이 결혼했는데. 아나?"

 "어? 그래?"

현진이와 단짝친구라 이영과도 친했었다. 현진과 헤어지면서 당연히 인연이 끊어졌지만.

 "그럼."

얘기를 하면서도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이영이 짧은 인사를 끝으로 뒤돌아섰다.

 "고등학교 동창?"

흘끔 현진에게 시선을 주었던 강현이 물었다.

 "형 여자친구요."

이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일이 홀랑 대답해버렸다. 강현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아니, 고등학교 때."

괜히 뜨끔한 이영이 변명했지만 미간의 주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자친구 있었다는 말 한적 없잖아?"

왠지 추궁하는 듯한 말투.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데 말하는 것도 우습잖아."

 "형 고등학겨 내내 진짜 우리 집에 거의 매일 왔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눈치없이 말해버리는 이일에 이영의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렇게 오래 사귀었어?"

 "3년 내내 아니고 2년."

놀라는 강현에 이영이 급히 변명했다. 강현의 표정을 보니 별 소용은 없는듯했다.

 "난 그래서 형이랑 저 누나랑 결혼할 줄 알았다."

 "나두."

이젠 아랑이까지 합세. 강현의 표정은 좀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미 헤어졌는데 뭐. 바이킹 타러 안가?"

난처해진 이영이 급하게 화제를 돌린다.

 "가야지, 왜 안가."

다행히 단순한 이일은 현진의 존재를 금방 잊고 바이킹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제 쪽으로 향하는 강현의 시선을 알면서도 이영은 애써 모르는 척 이일과 이랑의 옆으로 찰싹 붙었다.

 "형, 형 바이킹도 안 탈 거에요? 광안리 바이킹 엄청 유명한데. 바이킹이 바다 절벽 쪽에 있거든요. 그래서 바다 쪽 끝자리 않으면 꼭 바다로 떨어질 거 같아서 엄청 무서워요."

 "탈거야."

당연히 거절할거라고 생각했던 강현의 예상치못한 반응에 모두의 시선이. 심지어 물었던 이일의 시선까지 강현에게 모였다. 금방 단순한 움직임이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아지. 너희랑 놀려고 나온 거니까."

빙그레 웃은 강현이 갈음을 내딛었다. 앞서 가고있는 강현에게 쌍둥이들도 바싹 붙었다. 이일의 설명이 그렇게 괜찮았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영은 저만치 떨어진 세사람을 깨닫고 황급히 걸음을 내딛었다.

 "괜찮아?"

 "아니."

바이킹에서 내린 이영이 몇걸음 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무릎도 후들거리고 무엇보다 속이 울렁거려서. 그러고 있는 사이 먼저 내려서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들이 달려왔다.

줄이 딱 이영의 앞에서 끊어지는 바람에 쌍둥이들이 먼저 타고 이영과 강현은 다음턴에 타야했다. 오랜만에 탄 데다가 끝도없이 계속되는 운행에 지금 이모양 이꼴, 오늘 하루종일 이영의 수난시대다.

 "형 이제 늙었는갑다."

 "아니거든?"

 "괜찮아 오빠. 원래 나이들면 달팽이관이 약해져서 이런거 타고 그러면 좀 힘들대. 오빠만 그런거 아니야."

위로해주는 쌍둥이들을 향해 이영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놀리는 것이 아니라 더 기분 나빴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나?"

그런 이영의 외침에 강현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되묻는다. 저와 달리 너무 멀쩡한 강현의 얼굴을 보니 왠지 더 억울했다. 여러모로 비교대상이 너무 레벨이 높다.

 "그래! 너. 여기 너말고 누가 있냐."

제손을 쿡, 쿡, 찍어주며 강조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속이 울렁거려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입으로만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뭔 말하노."

 "너희보다 우리가 거의 배는 더 오래 탔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핀잔을 주는 이일에 이영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제야 이일이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이제야 알겠냐?

 "어쩐지. 좀 길다 싶더라니."

 "그럴리가. 운행시간은 똑같잖아."

이영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이일은 수긍했지만 강현은 말도 안된자는 반응.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다.

 "안 똑같거든요? 여기는 알바생 마음대로거든요?"

 "예쁜 여자애들 많이 타면 더 돌려주고 그래요."

 "그래?"

 "아마 형 때문에 더 돌려준 거 같은데. 아, 아쉽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기다렸다가 형이랑 탈걸."

형이야 죽든말든 아쉬워하는 이일에 이래서 동생 키워봐야 쓸모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이영이다.

 "그럼 한번 더 탈까?"

부러워하는 이일에게 강현이 물었다.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묻는 얼굴을 보니 진심이었다.

 "진짜? 진짜죠? 이게 오래타면 탈수록 더 높이 올라가거든요. 한번 더 타요."

신이 나서 다시 달려가려던 이일이 생각났다는 듯 이영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설마 나까지 타자는 건 아니지?"

 "설마."

불안한 표정으로 묻자 강현이 안심하라는 듯 툭툭 이영의 머리를 두드렸다.

 "형 말이 맞네. 강현이 형은 멀쩡한 거 보면 늙어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형 체력이 저질인거 였는갑다."

쏠랑 혀를 내밀고 달려가는 이일의 모습에 울컥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놀아주고 올게."

깅현이 꾹, 하고 한번 더 머리를 눌러준 뒤 걸음을 옮긴다. 이일은 벌써 줄까지 서서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뚝뚝한 녀석이 싫은 기색도 없이 쌍둥이들과 잘 놀아주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나쁜 기분일리는 없었다.

온기가 남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보고 있던 이영은 세 사람의 시선이 제 쪽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철 난간에 기대섰다. 은근 소심한 이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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