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가보겠습니다."
신발을 신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관 앞에 총출동해 있는 가족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래. 잘 가고 또 놀러온나."
"형. 다음에 오면 사직구장 가요. 야구보러,"
"안녕히 가세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돌아오는 인사에 강현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오께."
겉옷을 챙겨나온 이영이 신발을 꿰어 신었다.
"그럼."
"그래. 운전 조심하고 우리 이영이랑 계속 사이좋게 지내라이."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창피하게 뭔소리고."
"야가. 초등학생만 사이좋게 지내라는 법 있나? 창피할 것도 쎄고쎘다."
기겁해서 말하는 이영에도 어머니는 태연하다.
"사이좋게 지낼게요."
게다가 강현까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거보라는 듯 이영에게 눈을 흘긴다. 더 있다가는 뭔 소리가 나올지 모르겠다 싶어서 이영이 얼른 문을 열었다.
"가보겠습니다."
벌써 저말을 몇번쨰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깍듯하게 인사를 한번 더 한 강현이 열린 문을 나왔다. 형 또와요, 잘가라, 안녕히 가세요. 하는 삼중창을 뒤로 하고 이영이 문을 닫았다.
피식, 피식. 조용해진 복도에서 서로 얼굴만 보던 두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만하면 가족들한테 좋은인상 남긴건가?"
"너무 좋아서 문제다. 어째 나보다 더 너를 좋아하는 거 같다. 이일이녀석은 틀림없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이영이 투덜거린다. 지하 2층을 누르고 서있는데 강현이 이영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냥 뒤로 오라고 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이젠 아예 손깍지를 낀다.
"뭐하는거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어머니 하시는 말 못 들었어?"
".....뭐."
"사이좋게 지내라시잖아."
픽, 이영이 웃었다.
그리고나서 생각해보니 섹스까지 한 사이인데도 이렇게 손잡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뭐 보는 사람 없으니 괜찮으려나. 이영이 손을 빼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언제 올라올건데?"
"삼일 더 있다가."
오랜만에 온 것이고 이제 일을 하게 되면 자주 오기 힘들 거 같아서 이번엔 일주일 정도 있다 가기로 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알람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거셍 이영이 손을 빼려고 했으나 강현은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야."
"사람 없잖아."
강현의 말대로 엘리베이터 옆에 사람도 업고 주차장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었다. 반박하지 못하는 이영을 본 강현이 그대로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나갔다. 그리고 차로 향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누가 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적극적으로 손을 빼지는 않는다. 심지어 강현의 차를 봤을 땐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도착하면 전화해."
아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운전석 쪽으로 향하는 강현에게 이영이 전화기모양의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막 문을 열던 강현이 멈칫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야, 정말 주차장까지만 데려다주는 거였어?"
"그럼?"
뭐 서울까지 데려다주리? 멀뚱하게 보는 이영에게 강현이 다시 물었다.
"우리 할 얘기 있지않아?"
".....무슨 얘기?"
"여기서 하긴 좀 그런데."
"....."
"일단 타."
"무슨 얘기길래 여기서 하긴 그렇대? 왠지 불길한 예감에 눈치만 보고있는 사이 강현은 벌써 차에 탔다. 머뭇거리던 이영도 결국 차문을 열고 옆 좌석에 탔다.
"무슨 얘긴데?"
이영이 타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겁이 나긴 해도 조마조마한 것보다는 나았다. 막 차 시동을 걸어 장소를 옮기려던 강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너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내가 언제?!"
이영이 펄쩍 뛰었다. 비굴하긴 해도 거짓말은 안하고 사는게 인생의 모토인 이영이다.
"너 여자친구 사귀었다는 말 안했잖아."
"그거야. 물어본 적 없으니까-"
"물어봤잖아."
"언제?"
"너 호모냐고 물어봤었잖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나?"
"........."
"기억안나?"
안날리가. 사실 그 상황에서 너한테만이라고 하는 것도 너무 구차해보여서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뿐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왜 거짓말 했는데?"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 이영의 얼굴에 난감한 시색이 번졌다. 강현의 담담한 눈동자는 화를 내는 것보다 이영을 더 불안하게했다.
"송이영."
"너한테만이라고 하면 안 믿을 것 같아서 그랬다, 왜!"
딱딱하게 이름을 부르는 강현에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던 이영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고백도 황당할 판에 호모도 아니라고 하면, 착각하는 거니 뭐니 할까봐 그랬지."
"......"
"일부러 거짓말 한 건 아니다, 뭐."
"......"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라. 처음에는 호기롭게 외쳤던 이영이지만 말없이 빤히 보고만 있는 강현에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풀이 죽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저렇게 보고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더 초조했다. 혹시 질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장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뭐야, 그런 걸 왜 이제 말해."
툭, 하고 강현이 입을 열었다. 어이없다는 듯한 강현의 표정에도 금방까지 무표정하던 얼굴에 잔뜩 쫄아있던 이영으로서는 그렇게 안심이될 수가 없었다.
"너한테만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싫어하는 남자가 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안심이 되자 그제야 이영도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어리광도 받아주는 사람에게나 가능한거다.
"평생 그런 소리 들어본 적도 없고 내가 아는 건 내가 너하네 그런 것뿐인데, 남자한테 들어봐야 별로 좋을 것 없겠다 싶었지."
"여자친구도 사귀었다면서 그런소리 안 들었어?"
강현의 물음에 이영이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여자애가 좋고 예쁘고 그럴 때 너도 나 좋아? 나도 너 좋은데, 뭐 이렇게 애들처럼 만났던 거지. 너한테처럼 그런 미칠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어."
더듬더듬 생각나는 대로 변명을 하다보니 어느새 열렬한 사랑고백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당황한 이영은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이영을 빤히 보고 있던 강현이 간단하게 정리를 했다.
"그렇게 내가 좋았다는거지?"
.....!
강현의 정리에 뒤늦게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이영을 향해 강현이 씽긋하고 웃었다. 마주한 이영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당황한 이영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강현의 손에 붙잡혔다.
이영의 팔을 당기며 강현도 상체를 내밀었다. 입술이 맞닿았다. 바둥거리는 두 팔을 꽉 붙잡고 입술을 꾹 눌렀다. 닫히려는 입술 사이로 솜씨 좋게 혀를 밀어 넣었다.
한번 혀가 들어온 뒤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혀를 빨고, 잇몸을 긁고, 치아를 빠각빠각 소리나게 긁었다. 몇 번이고 혀가 얽히고, 벌릴 때마다 입에서 질척질척, 야한 소리가 났다. 처음 키스하는 사람처럼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말 그대로 정신을 쏙 빼놓는 키스.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깨달은 강현이 천천히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턱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른 각도로 다시 키스했다. 손을 놓아준 것도 모르고 굳어 있던 이영이 더듬더듬 손을 내려 강현의 허리를 끌어안은 것은 입술을 세번째쯤 다시 겹쳤을 때였다.
"선희야, 뛰지 마. 넘어져."
....!
몇 번이고 각도를 달리하며 입술을 겹치던 강현이 가슴을 미는 이영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조용하던 주차장에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에 이어 타닥타닥 바닥을 치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꽤 가까운 거리라 이영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남자 둘이 차에 타고 있다고 해서 그런쪽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찔리는 구석이 있는 입장에서는 걱정되는것이 당연했다.
"갔어?"
고개는 강현에게 향한 그대로 차마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던 이영이 물었다. 그것도 조용해진 것을 거듭 확인한 뒤에야 물은것이었다.
"어."
하아, 강현의 대답에 이영이 살았다는 듯 크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갔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강현이 이영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영으로서는 잔뜩 쫄아서 머리속이 새하얘졌던 일이 강현에게는 그저 잠깐 쉬는 타임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번엔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자동차 시트까지 뒤로 젖혔다. 하지만.
"잠깐! 스톱!"
뒤늦게 강현의 움직임을 깨달은 이영이 급히 강현의 움직임을 막는다. 두사람간의 거리유지를 위해 손도 내뻗었다. 강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또."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겉보기에는 단정해보여도 사실 강현은 누구보다도 본능적인 남자다. 이미 스위치에 불이 들어왔는데 반항을 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쫓아가서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고 싶어지는 것이 육식동물으 본능. 먹잇감을 앞발로 누르고 가지고 노는 것은 배가 부를 때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처럼 잔뜩 굶주린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괜히 잘못했다가 머리부터 통째로 삼켜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영은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과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밀어내기는 커녕 오히려 제발 해달라고 매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송이영처럼 자신을 밀어내거나 안달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이라 강현도 난감하기 짝이없었다.
"여기선 싫어."
그런 것을 알리없는 이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정신이 나가긴 했지만 여긴 고향집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영이 옷매무새를 고친다.
헉, 빠르기도 하지. 어느새 바지 버클까지 풀러져 있었다. 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손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게 다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들에게도 써먹었을 기술이라고 생각하니 이미 지난일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안 돼?"
"여기 우리집 주차장이야."
바지버클까지 다시 잠그는 이영에 강현이 미간을 찌푸르며 물었지만 이미 이성이 돌아온 이영은 단호했다.
"그럼 다른 데로 가면 괜찮은 거지? 근처 제일 가까운 호텔 대봐."
백번 양보한 강현이 물었으나 이영은 오히려 더 펄쩍 뛰었다.
"부끄럽게 남자 줄이 어떻게 호텔을 들어가냐!!"
강현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펠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저런 건 부끄럽다니. 알 수 없는 기준이었다.
"그리고 너랑 있으면 헤어지고 싶지 않을 텐데. 너 주차장까지만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뭐라고 해."
정말 이상한 기준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휘두르는 사람은 없었는데 참 난감했다.
"그럼 키스만 할게. 그건 안 위험하잖아."
강현의 제안에 이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강현이 바로 입술을 눌렀다.
쑥, 하고 침입한 살덩이는 단번에 원하는 것을 찾아 부비고 섞었다. 이영의 혀를 뽑아버릴 듯이 세게 빨았다. 강현이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이영의 뒷머리를 꽉 붙잡고 빨고,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강현의 어깨에 매달린 이영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혀뿌리가 얼얼했다.
춥춥,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입술에서 야한 마찰음이 흘러나왔다. 호흡이 엉킨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머리가 멍하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술을 부비고 엉키고 빨고 문지르는 행동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동물 수준의 본능에 가까웠다.
춥.
그렇게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키스는 갑자기 끝이 났다. 쪽, 하고 아랫입술을 한번 더 빨았다 놓은 뒤에야 강현이 고개를 물렸다.
"더해도 난 상관없는데."
멀쩡하게 강현만 보고 있는 이영에 강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땐 키스로는 안끝난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이영이 거의 차에서 튀어나오듯 내렸다. 문을 닫자 강현이 창문을 내렸다.
"송이."
"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고 또 위기의식없이 냉큼 창문에 달라붙는다.
"전화기 줘봐."
"왜."
물으면서도 일단 주머니에서 핸드폰은 꺼낸다. 강현은 건네받은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돌려주었다.
"전화하려던거 아니야?"
"내거 놔두고 왜."
"그럼 내 핸드폰으로 뭐했는데?"
"너 옛날애인 전화번호 지웠는데?"
엑?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이내 샐쭉해진 얼굴로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뭐야, 질투해?"
"어."
"....."
이렇게 솔직한 대답이 돌아올 줄 몰랐던 터라 오히려 당황한 쪽은 이영이다.
"어차피 번호 있어도 연락 안 해."
헤어질 때도 막 애틋하게 헤어진 사이도 아니고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만 헤어지자는 쪽으로 결론을 낸 거였다. 그때도 서로 연락은 하고 지내자고 했지만 연락 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네 말대로 어차피 연락 안할 거면 연락처는 왜 교환해?"
"그거야, 그냥 예의상이지."
"그러면 나도 예의상 전화번호 교환해도 된다는 건가?"
"안 돼!"
예기치 못한 물음에 이영이 펄쩍 뛰었다.
"넌 되고 난 왜 안되는데?"
"안 할게, 안 해. 예의상으로라도 교환 안 해. 됐지?"
마구 고개까지 휘저으며 대답하는 이영에 강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정말 딴 뜻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아까 만났을 때 진짜 좀 놀랐거든."
강현의 눈이 조금 기름해지는 것을 눈치 챈 이영이 급히 뒷말을 이었다.
"누군지 몰라봐서. 생긴게 변했다는 게 아니라 진짜 누구였지? 이랬어. 그래도 좋아하고 2년을 만났는데 고작 몇 년 지났다고 그렇게 잊을 수 있는지 나도 놀랐어."
"........"
"현진이는 엄청 반갑게 인사하는데 나는 그냥 그렇더라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전화번호 교환한거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 있었으면 네 앞에서 전화번호 교환 못했을 거야."
그런 녀석이란 건 강현도 알고 있었다. 비굴한 것 같아도 올곧은 녀석이니까.
"그걸 또 왜 이제 말해."
난처한 듯 얼굴을 찌푸리는 강현에 뭔가를 깨달은 이영이 혹시,하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기분 안 좋았던게 거짓말 때문만이 아니라 여자친구때문이야?"
"그러니까 그런건 미리미리 말하라고."
투덜거리는 강현에 이영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번졌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눈을 막 이렇게 무섭게 뜨고 있는데 그런 걸 어떻게 말하냐."
"그럼 기분이 좋겠냐? 갑자기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심지어 잠깐도 아니고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가족들도 다 아는 여자친구를?"
따지듯이 말하는 강현을 보니 갑자기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나야 한명이지만 너야말로 애인이 끊이질 않았으면서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냐? 그 전날 여자랑 잤다고 광고하듯이 여자 끼고 아침에 출근해놓고선."
"그런 내색 한번도 안했잖아."
"하면 안되니까 못했지!"
"그럼 해. 앞으로는."
"말 안해도 할거네요."
강현의 페이스에 밀려 말해놓고도 이내 눈치를 본다. 막 남자 귀찮게 하는 여자처럼 보이는 거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곧바로 강현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래. 해. 넌 안하는데 나만 하는 건 쪽팔리니까."
"...."
이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제가 하면 그렇게 꼴사나운 말이 강현이 하면 전혀 꼴사납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마음을 들었다놨다 한다.
"간다. 더 있다가는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냥 납치해서 데려가 버릴 것 같다."
멍하게 있던 이영이 차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창문이 닫히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에 강현이 한번 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영이 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소리도 없이 차가 출발했다.
이영도 몸을 돌려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벨을 누르고 한걸음 물러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이영이 갑자기 슥슥, 목덜미를 쓸었다.
「더 있다가는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냥 납치해서 데려가 버릴 것 같다.」
으으으.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할 수 있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영의 귓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띵. 하고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생각했다.
뭔데 뭐, 싫은지, 안 싫은지는 물어봐야 아는 거 아닌가. 흥칫핏.
참 혼자서도 잘 노는 이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