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사
한 인간의 가치와 쓸모는 타인의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필요와 이익을 좇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그 모습은 추할 만큼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불필요한 존재들이 도태되는 것도 당연한 순리이다.
영원할 것 같은 관계에서조차 이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된다. 매일같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관계에서도, 심지어 무조건적이라는 부모 자식 간에서도 이해관계가 균형 있게 유지되지 않으면 건강한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손쓸 새도 없이 금방 무너져 내리니까.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타인의 기준점 안에 들지 못했다고 해서 억울하거나 서운해할 건 없다.
버려지지 않도록 필요한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남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서해영은 이러한 계산적인 인간관계가 익숙했다. 그리고 편했다. 사람들은 해영을 도구처럼 이용하길 원하고, 해영은 애정을 갈구하니 이 둘을 교환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그 애정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약간의 소속감만 줄 수 있다면 충분했다.
‘해영아. 가는 길에 이것 좀 조교한테 갖다 주라.’
‘해영 오빠. 이번 주 팀플 리서치 좀 대신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요.’
대학에 들어오면서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생활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냄새를 잘 맡았다. 가성비. 그러니까 대충 던진 말 몇 마디로도 누릴 수 있는 해영의 편리함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어릴 때만큼 폭력적이고 노골적인 괴롭힘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너처럼 꼼꼼하게 해 주는 애가 없어.’
‘고마워. 너밖에 없다.’
경영대 호구. 해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에 해영은 금세 안도한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게 우스웠다.
몇몇 부탁들은 말 몇 마디에 밥이나 음료 따위가 얹어져 오기도 했다. 대체로 해영조차도 고민을 해야 할 만큼 힘들거나 난감한 부탁들이 그러했다.
‘대리 출석 좀 부탁해도 될까.’
편의점에서 파는 병 커피나,
‘교수님한테 말 좀 잘 해주라. 그 교수님 너 좋아하시잖아.’
학생 식당 식권 같은 것들.
물질적인 대가가 아닌 정서적 안정을 바라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무언가를 주지 않았어도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영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건네줌으로써 자신들의 부채감을 덜어내는 듯했다. 그렇게 이해한 후로는 앞에 놓여지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그들을 위한 일이었기에.
평생을 이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온 서해영은 요즘 의도를 알 수 없는 불편한 호의를 받고 있었다.
“10분 쉬었다가 이어서 합시다.”
교수의 말에 해영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간 연속으로 이어진 수업에 지친 교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겨진 학생들은 기지개를 켜거나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뤄 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여럿이 모여 어딘가로 향하는 무리도 보였다. 그리고 전화를 걸 곳도, 어울릴 사람도 없는 서해영은 맨 뒤 구석진 곳에 앉아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켰다.
혼자인 건 익숙했으나,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은 힘들었다. 누군가가 저를 의식하기라도 한다면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했으니까. 엎드려서 쪽잠을 자든, 당장 할 필요 없는 과제를 미리 하든,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잠은 안 오니까 과제를 하자.
그렇게 노트북을 펼친 순간, 강의실 앞문이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소리에 흠칫 놀란 해영이 고개를 쳐들었다. 요즘 들어 자주 보이는 그 후배였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문이 닫히지 않게 붙잡고 서서 강의실 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이쪽 구석진 곳을 향했을 때, 해영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그가 자신을 보는 눈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잡아먹을 듯한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 커다란 보폭으로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오면서도 그 깊고 검은 눈동자는 일절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든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넓고 단단한 어깨와 족히 190센티는 되어 보이는 키는 멀리서도 위압감을 주었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단번에 시선을 모을 정도로 눈에 띄는 체격이었다. 갈색빛이 전혀 돌지 않는, 숯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짧게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단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겉치레에 신경 쓰기 싫다는 티가 여실히 났다.
대충 커다랗고 무섭게 생긴 사람.
그가 해영에게 처음 다가온 날 해영이 느꼈던 첫인상이었다. 머리도 대충 짧고, 옷도 대강 입고, 체격은 크고 위협적이었다.
모든 게 해영과 반대였다. 인간의 유형을 일렬로 나열한다면 그와 해영은 서로 보이지도 않는 양 극점에 서 있을 게 분명했다.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턱 막힌 것처럼 답답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의 곧고 흔들림 없는 시선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노라면 해영도 덩달아 주변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이 넓은 강의실 안에 그와 자신만 존재하기라도 하듯이.
“선배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해영을 마주했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휘핑크림이 잔뜩 얹어진 차가운 카페 라테. 만들어진 지 좀 지났는지 크림과 라테가 부드럽게 섞여 있었고, 종이 홀더는 축축하게 젖어 쭈글쭈글했다. 쉬는 시간 없이 꽤 오래 이어졌던 수업이 떠올랐다.
계속 기다린 건가.
찬 음료를 한참 동안 들고 있던 커다란 손이 붉었다. 몇 번을 봐도 담담해지지 않는 위협적인 손이었다. 남자는 물기로 범벅이 된 손바닥을 허벅지에 대충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이거 드세요.”
이 후배가 음료를 가져다준 것이 오늘로 세 번째였다.
처음 음료를 받은 건 강의를 마치고 집에 가던 길 한복판에서였다. 커다란 후배가 다짜고짜 다가와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고 뜬금없이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아메리카노를 제 앞으로 내밀었다.
보통은 음료를 건네는 것과 동시에 부탁할 거리를 말하는 게 일반적이라, 해영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보면 할 말이 있긴 한 모양인데 한참을 기다려도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눈을 쳐다봤더니 그대로 뒤돌아 사라졌다. 귀가 시뻘게진 채로.
두 번째는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던 중이었다. 해영은 인적이 드물어 집중이 잘 되는 구석진 자리를 가장 좋아했다. 축축하고 습한 데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워서 인기가 없는 자리였다.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는 채워지는 법이 없던 옆자리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끌렸다. 놀라 옆을 돌아보았더니 그 후배가 품속에서 밝은 색 카페 라테 한 잔을 조용히 꺼내 내밀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해영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몰래 드세요.’
교내 도서관은 음료 반입 금지였다.
이번에야말로 원하는 것을 말하려나 싶어 빤히 바라보았더니 ‘으, 추워.’ 하고 고개를 작게 털어 내며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져 잠을 잤다. 해영은 품 안에 라테를 숨기고 종종 빨대를 물어 마시며 의문을 품은 채 과제를 이어 갔다.
그렇게 후배가 한 잔 두 잔 음료를 건네줄 때마다 불안이 쌓여갔다. 얼마나 말하기 힘든 부탁이기에 한 잔도 아니고 여러 잔을 주면서 말을 꺼내는 것을 주저하는 건지. 오늘은 꼭 듣고 싶은데. 이런 바람을 알 리 없는 후배는 오늘도 별다른 말 없이 음료를 놓은 채 뒤돌아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형! 차건우랑 아는 사이예요?”
그가 사라지자마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애가 뒤돌아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응?”
“방금 쟤요.”
“딱히 아는 사이는 아닌데….”
그 후배의 이름이 차건우라는 것도 방금 알았으니까.
“쟤 소문 엄청 안 좋아요. 조심하세요.”
“무, 무슨 소문?”
라테를 쥔 해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휴, 형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거니까 어디 가서 얘기하진 마세요. 쟤 생긴 게 좀, 그렇잖아요. 밖에서 주먹질하다 온 애라고 하던데요. 쟤 재수했거든요? 부모님이 존나 부자라서 뒷돈 주고 학교 들어온 거래요. 그 왜, 재벌 아빠 둔 자식들이 고등학교 때 양아치처럼 살다가 돈으로 번듯한 학력 하나 만들어서 회사 이어받고 그런 거요.”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건 옳지 않지만, 그 후배의 체격이나 인상을 봐서는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도서관에서도 빈손으로 와서 잠만 자고 간 걸 보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해영의 동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에이…. 드, 드라마도 아니고….”
“때로는 현실이 더 드라마 같은 법이죠.”
그는 해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것도 모른 채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남은 강의 시간 동안 해영은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제 앞에 놓인 달달한 라테를 마시면서도 아까 그 커다랗고 무서운 후배가 후에 자신에게 해올 부탁에 대한 걱정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도착해서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는데, 신경이 쓰여 도저히 과제나 집안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밥맛도 없어 저녁까지 걸렀다. 무기력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모아 세운 무릎에 이마를 대고 있던 해영이, 돌연 고개를 들고 리모컨을 집었다.
다른 생각 하자, 다른 생각.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티비를 틀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멈춘 곳에서는 몇 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재벌들이 뒷골목에서 약이나 파티를 즐기다 예기치 못한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의 영화였다. 그들은 곧 그 살인의 목격자를 드럼통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바다에 빠트렸다.
해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황급히 채널을 돌렸다. 바뀐 채널에서는 도박판에서 손을 잘못 놀려 돈 대신 장기를 빼앗기는 내용의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해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을 들어 티비 전원을 껐다.
아, 아닐 거야….
살인을 목격한 적도 없고 도박을 한 적도 없지만, 저와 닮은 누군가와 착각을 했으면 어쩌지. 아니면 이유도 없이 재미 삼아. 아니면 돈이 필요해서 장기를.
해영은 주말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커다란 무언가에 쫓기는 꿈인 건 확실했다. 덜덜 떨면서 깨고 다시 힘겹게 잠드는 걸 반복하다 영원히 오지 않길 바랐던 월요일이 되었다.
해영은 현관문을 앞에 두고 운동화 앞 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현관 앞에 걸려 있는 거울을 확인했다. 주말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눈 밑이 푹 꺼져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피곤해 보였다. 양손을 올려 검지로 눈 밑 다크서클을 살살 문질러 봤지만 지워질 리가 없었다.
오늘만 빠질까. 오전 내내 고민하던 해영은 그 후배가 내일부터 학교에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퇴할 수도 없고. 해영이 바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제발 마주치지 않게 해 주세요. 해영은 주문을 외우듯 작게 웅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지만 해영의 바람은 강의실 의자에 앉는 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밖이라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는데, 곧 수업이 시작하는 강의실 안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후배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눈까지 접어 웃으며 인사를 해온다. 너무 무서웠다.
그가 주는 걸 더 받았다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부탁을 받게 될 것이다. 드럼통까지는 아니어도 장기를 털어 가는 것은 이 후배에게 득이 되는 일이니까. 게다가 자신은 아주 신체 건강한 사내였다. 장기가 목적이라면 이용 가치는 충분했다.
“이거 드세요.”
오늘은 휘핑크림 위에 초콜릿 시럽까지 추가된 먹음직스러운 카페 라테였다. 해영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거절해야 해. 커다란 후배 앞에서 용기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상 아래로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후배처럼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던 것도 아닌데 손바닥이 축축했다.
해영은 삐걱이는 몸짓으로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서 봐도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신장이라, 앉아서 눈을 맞추는 건 꽤 불편했다. 뒷목이 뻐근했지만 꾹 참았다.
“오, 오늘은 이미 마셨어.”
똑 부러지게 말을 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하려던 이야기는 정확히 전달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 후배는 말의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것처럼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잠식당하는 기분에 등줄기를 타고 잘게 소름이 돋았다. 해영은 연기에 능숙하지 않았다. 더 말을 했다간 거짓말이라는 걸 들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마셨어요?”
“…응.”
해영을 관찰하던 그는 짙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로,
“그럼 버리세요.”
하고는 뒤돌아 미련 없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해영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버릴 줄 알고.
***
먹을 거 함부로 버리면 벌을 받는다고 했다.
수업 내내 차건우가 두고 간 음료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보이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그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벌을 받기 싫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음료를 들고 돌아섰다.
그래. 버렸다고 치자.
자신이 정말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 그가 학교 안에 있는 쓰레기통을 전부 찾아보고 다니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오후 수업이 없는 해영은 곧바로 경영관 건물을 나섰다. 손에 꼭 쥔 라테를 가만 내려다보다 빨대를 입술로 물었다. 약하게 힘을 주어 빨아올리자 달달하고 고소한 라테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해영의 뺨에 웃음이 번졌다.
이번에는 빨대를 잡고 살살 휘저은 후 휘핑크림과 초콜릿 시럽을 라테와 잘 섞어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환상적이었다. 차건우는 아무래도 맛에 관해서는 뭘 좀 아는 녀석인 듯했다.
그렇게 정문을 지날 즈음에는 음료가 반밖에 남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잘잘 흔들고 있는데 정문 옆 난간에 익숙한 인영이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 후배였다.
차건우의 손에는 새것과 다름없어 보이는 라테가 들려 있었다. 해영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카페의 것이었다.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건지 플라스틱 컵이 구겨져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위태로웠다. 차건우의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설마 내가 버린 건 줄 아는 건가.
해영은 정문 입구에 세워진 정체불명의 조형물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어 차건우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무언가를 견뎌내고 있는 사람처럼 당장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화를 꾹 참아내는 것 같다가도 금세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정문에서 도로로 나가는 길은 하나뿐이라 이대로 나가면 마주칠 게 분명했다. 후배가 비웃으면서 버리라고까지 말했는데 채신머리없이 신나게 반이나 먹고 있는 선배라니. 너무 창피했다. 절대 들키면 안 돼.
조금 걷더라도 다른 쪽으로 나가야겠다.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 시간을 때우며 음료를 다 마신 후 눈에 보이는 쓰레기통 아무 데나 버리면 마주치지도 않고 먹은 걸 들키지도 않을 것이다. 완벽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학교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던 찰나, 차건우가 움직였다. 그는 들고 있던 남의 라테를 쥔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면으로 본 그의 표정은 옆모습보다 몇 배는 더 험악했다.
“흡….”
짧게 숨을 들이켠 해영이 조형물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해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걸 보면 여기 숨어 있는 걸 알아채고 오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 걸어온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행히 차건우는 조형물이 있는 곳까지 오지 않았고, 몇 걸음 앞에 있는 야외 쓰레기통에 남의 라테를 집어 던지듯이 처박았다. 그리고 그 안을 내려다보며 잠시간 씩씩대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 사라졌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해영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제 안 주겠지?”
비록 오해이긴 하지만 자기가 건넨 음료가 길거리에 떡하니 버려진 것까지 봤는데, 자존심이 있다면 또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해영은 조금밖에 남지 않은 라테를 씁쓸하게 내려다보았다. 가끔, 아니. 꽤 자주 생각날 것 같은 맛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카페에 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주문을 할까 싶었는데, 이미 다 녹아버린 음료는 본래의 형태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사진은 빈말로도 잘 찍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지만, 매일 이걸 보는 사람들이니 어떤 메뉴인지 알아줄 것 같았다.
해영은 사진을 ‘중요한 사진’ 폴더에 옮겨 넣었다.
***
유난히도 안 좋은 일이 반복되는 날이 있다.
―정말 미안! PPT는 어제 과대한테 보내놨으니까 발표만 대신 부탁할게.
익숙한 알람 소리 대신 잠을 깨운 전화벨 소리는, 오늘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던 팀원의 것이었다.
그는 이번 과제가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라서 발표 대본을 직접 손보고 싶다며 열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해영은 그의 말에 고마움마저 느꼈다. 그랬는데 발표 당일에 도로 떠맡게 되다니.
자료 조사부터 정리까지 해영 혼자 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당일에 발표를 대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조원이 없었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런 이유였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해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알람을 맞춰 둔 시간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발표 준비를 해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아침을 정신없이 보내고 집을 나섰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제 먹었던 그 달달한 라테가 먹고 싶어졌다. 찍어 둔 라테 사진을 손에 꼭 쥐고 학교 앞 카페를 찾았다. 점원에게 용기 내 휴대폰을 내밀어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묘한 표정으로 액정을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흙탕물 사진을 왜….”
거기에다 대고 어떻게 여기서 파는 음료 사진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결국 해영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도망치듯 카페에서 나와 버렸다.
불행하게도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물함을 사용하던 중에는 옆 사람이 연 사물함 문에 뒤통수를 부딪혔고, 멀쩡하던 자료실 프린터가 하필 해영의 발표 자료를 출력하던 중 고장이 나 잘못 만진 게 있는지 추궁받아야 했다. 그러고 나서 과 사무실 프린터를 겨우 빌려 쓰고 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어제 그 후배를 화나게 해서 벌을 받는 중인 걸까.
해영은 매번 앉는 강의실 맨 뒷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수업 전 발표 자료를 몇 번 더 훑어보기 위해 여유 있게 집을 나섰더니 자료실에서 붙잡히고 엘리베이터를 놓쳤어도 늦지 않게 무사히 도착했다.
아무리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자료라고 해도 실수하지 않으려면 순서를 정확하게 외워 둘 필요가 있었다. 해영은 휴대폰을 꺼내 저장해 둔 발표 자료를 슥슥 넘기면서 머릿속으로 내용을 곱씹었다.
다른 조들이 거의 다 모여 회의를 나눌 때도 해영은 혼자였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같은 조 조원들이 하나둘 도착해 해영의 주변에 자리 잡았다. 발표자가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를 단톡방에 전달했음에도 확인을 안 한 건지 발표 준비를 하고 있는 해영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헐. 오빠가 발표까지 다 하시는 거예요?”
“응. 저, 정태가 사정이 있어서 못 온다고 미안하다고 그랬어….”
“걔 맨날 그러잖아. 버스 타는 게 습관이지, 아주.”
옆에서 듣고 있던 복학생이 한마디 거들었다.
남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듣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해영은 조용히 휴대폰에 코를 박고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들어왔다. 한 조 한 조 발표를 이어 갔고, 금방 해영이 있는 4조의 차례가 되었다.
해영은 단상 앞에 서서 공용 노트북 안에 ‘4조’라고 저장된 파일을 클릭했다.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운 PPT 표지를 보는 순간, 해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되었다.
“발표하세요.”
뜸을 들이는 것에 교수가 재촉했지만, 해영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화면은 해영이 준비한 자료가 아니었다.
표지에는 조원들의 이름이 아닌 김정태 한 명의 이름이, 모퉁이에는 다른 수업 이름과 저번 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해영은 발표 자료를 제 이메일에 저장해 놓았던 게 떠올랐다. 저장한 후로 한두 번 더 수정을 거치긴 했지만 거의 최종본이었고, 지금은 이 이상의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영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파일이 바뀐 것 같아서요. 이, 이메일로 열어도 될까요?”
해영은 교수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절차적인 문제에 빡빡하기로 유명한 교수였다.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을 때, 예상대로 교수의 표정은 언짢은 듯 한껏 구겨져 있었다.
자료 표지가 어떻게 생겨 먹은지도 몰랐던 조원들은 그제야 상황을 눈치채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과대가 잘못 저장했다는 건가요?”
“아, 아니요. 파일을 잘못 보낸 것 같습니다….”
해영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수업 파일 제출 시간 전날 자정까지인 거 모릅니까? 1학년도 안 하는 실수를 지금까지 하면 어떡해. 원칙대로 미제출 처리합니다. 들어가세요.”
“교, 교수님.”
교수는 더 대꾸할 필요도 못 느낀다는 것처럼 해영의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나아질 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가면서도 해영은 조원들이 앉은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다음 조의 발표 내용이나 교수의 피드백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남은 시간이 지옥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원들은 해영이 앉아 있는 자리 주변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둘러싸인 해영은 거대한 벽 안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아, 이거 에프 뜨면 좆 되는데. 형.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형이 제출하기로 했잖아요.”
“아까 첫 장 보니까 정태 이름 쓰여 있던데, 설마 제출까지 걔한테 맡긴 거야? 아니지?”
“그 오빠 저번 조별 과제 때도 욕 엄청 먹었는데. 제대로 한 게 없어서.”
조원들은 눈짓으로 해영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원래대로라면 김정태는 발표만 하고 자료 제출은 마지막 정리를 한 해영이 하는 게 맞다. 그저께, 그러니까 아직 김정태가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이 발표하기 편하도록 목차 순서를 바꿔도 되는지 물었고, 해영은 순서만 조금 바꾸는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고 정태는 번거롭게 파일을 주고받을 것 없이 제가 직접 과대에게 파일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발표를 떠맡게 되었을 때는 적잖이 당혹스러웠지만, 과제도 늦지 않게 제출했다고 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하니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을 보며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쉽고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조원들의 말처럼 그는 전에도 이런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동기들 사이에서 여러 번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해영은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보며 그 소문이 잘못된 것이구나 생각했다.
수업 전에 발표 준비를 할 게 아니라 파일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어야 했다. 처음 파일을 제출하기로 했던 사람이 자신인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제 잘못이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미, 미안해. 내가 교수님한테 말씀드려 볼게….”
해영의 말에 앞에서 가만히 방관하던 민현지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빠. 박 교수님 이런 일에 얄짤 없는 거 몰라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해영에게 다가갔다. 몸집이나 키가 자신보다 훨씬 작은 데도 불구하고 해영은 거대한 압박감에 몸을 한껏 움츠렸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강의실 내의 시선이 모두 이곳으로 몰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오빠가 가서 빌면 뭐라고 하실 거 같은데요? 조별 과제가 개인 과제냐. 팀워크는 어디다가 쳐 버리고 너 혼자 온 거냐. 우리가 다 같이 가면요. 실수를 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 너희들 봐주면 제시간에 제대로 제출한 다른 학생들은 뭐가 되냐.”
대답할 틈도 없이 빠르게 할 말을 뱉어낸 현지는 자신의 의자에 걸어 놓은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낚아 올렸다.
“선배 때문에 학점 다 말아먹게 생겼네요. 감사해요.”
그리고는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기가 힘들었다. 무책임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짐을 겨우 챙긴 해영이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적막한 강의실 내에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도 맞추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미안해, 미안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해영을 조원들과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쓸모가 없을까. 해영은 책상 사이를 가로질러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내내 끊임없이 자책했다. 이제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탁-.
피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움직이던 발걸음이 누군가의 억센 손길에 의해 멈춰졌다. 팔이 뒤에서 붙잡힌 것이다. 가방을 꼭 쥐고 있던 양손이 풀어지고 반동으로 몸이 돌려졌다.
“울어요?”
차건우였다.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눈빛이 매서웠다. 그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뺨 위를 타고 간지럽게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붙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소매로 벅벅 닦아 냈다.
“이, 이거 놔 줘.”
그의 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고장이 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요.”
끈질기게 라테를 사 오던 후배답게 한 번에 놓아주지 않았다. 잡고 있는 커다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팔이 아팠다. 내일이면 퍼렇게 멍이 들 것 같았다.
“지, 집에 가고 싶어. 제발 놔 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느꼈는지 차건우는 그제야 붙잡고 있던 팔뚝을 놓아 주었다. 얼핏 보인 반대쪽 손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휘핑크림이 가득 올라간 라테가 들려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새것이었다. 하지만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해영은 다시 가방끈을 꼭 붙들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차건우는 해영이 벽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축 처진 뒷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몇 분 전 해영의 강의실로 향하던 중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화 통화를 하며 해영의 욕을 하던 사람을 마주쳤다.
해영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 그 피해로 자신이 어떤 처지에 몰렸는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그 통화 내용 어디에도 자신이 팀플 과제에 얼마큼 기여했는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씨발.
거절을 할 줄 모르는 서해영. 경영대 호구. 이런 상황에서도 모난 소리 한마디 못하고 피해버리는 서해영. 서해영. 서해영….
입안에서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짓이기듯 부르다가 보기만 해도 이가 썩을 것 같은 커피로 시선을 옮겼다.
웃는 얼굴 한번 보겠다고 이 지랄을 했는데 어제는 밖에 대놓고 버려진 라테를 보질 않나, 오늘은 애먼 사람이 울린 얼굴이나 보고.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었다.
해영이 빠져나온 강의실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 나왔다.
“아오. 그걸 그 새끼한테 맡기냐. 서해영은 애가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 아!”
툭-.
강의실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차건우의 어깨에 부딪힌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건우는 한 손에 라테를 쥔 채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서. 그러다 천천히 남자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가늘게 뜬 눈이 섬뜩했다.
“무, 문 앞에 서 있고 지랄이야….”
신경질적으로 눈을 홉뜨던 남자가 웅얼거렸다. 차건우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단체로 어디에다가 좀 치워버리고 싶네.
사과를 받고 싶은 건지 자리를 뜨지 않고 버티는 남자에게 건우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해영을 부를 때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흠칫 몸을 떨면서도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으스댔다.
“뭐.”
“시간 있으세요?”
***
조별 과제를 제 손으로 망쳐버린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이제 해영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당연한 현상인가 싶다가도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였다면 해영이 거의 도맡아 했을 팀플 과제를 기겁하며 자신들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렇고. 단순히 부탁하지 않는 걸 떠나서 해영이 개인적으로 해야 할 분량까지 자신들이 하겠다고 말했다. 그나마 자신 있는 것이 과제를 하는 능력이었는데, 이제 그것조차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게 된 걸까.
저번이랑 다른 과목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팀플 회의 시간. 동그란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영은 홀로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저번에 내가 해온 거 별로였어…?”
해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너무 좋았는데 또 부탁드리기 죄송해서. 저희가 할게요. 진짜 저희가 해야 해요.”
그 말에 팀원 한 명이 펄쩍 뛰더니 테이블 위에 널려진 출력물들을 자기 쪽으로 모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해야 할 분량인데….”
“저희가 할게요. 이번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자신이 했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이 학교, 이 사람들 안에 속해 있을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이것마저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쳐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불안했다.
‘쓸모없는 새끼.’
버림을 받고 받지 않고는 해영이 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굴었다. 추하게 보일지언정, 안쓰럽게 보일지언정, 해영은 그렇게 살아남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한심한 놈.’
실체가 없는 끈도 구명줄이라고 붙들고서 수면 아래로 쉴 새 없이 다리를 휘적인다. 끌어당겨 주는 이가 없으니 뭍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저 가라앉지만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냥 놓을까 싶은 순간도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파도의 포말이 입안으로 쓸려 들어오고, 발아래로 시커먼 바다가 집어삼킬 것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 아래로, 깊은 바닥으로 스르르 내려앉아 영원한 안락을 마음껏 취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 위험하다.
“나 화, 화장실 좀.”
해영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바닥이 뒤집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벽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겨우 화장실에 도착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세면대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 양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 위로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공중으로, 세면대 위로 무질서하게 흩뿌려진다. 주먹을 쥔다.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가진 것도, 붙잡을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다.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히 어리고 나약하고 한심했다.
젖은 손으로 두 뺨을 쓸어내렸다. 찬 기운에 정신이 드는 것 같다가도 손을 떼는 순간 다시 불안감이 차근차근 숨을 조여 온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분명 불이 켜져 있는데도 캄캄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귓등을 간질였다. 도움 안 되는 애. 재수 없는 놈의 자식. 단단한 타일 바닥에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데도 발밑이 붕 떠 있는 것처럼 아찔했다.
“선배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순간 사방이 고요해지고 시야가 밝아졌다.
거울 속에는 차건우가 당혹스러운 눈을 하고 제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해영은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겨우 마주하고 있는데, 차건우는 현실의 자신만을 곧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화장실에 가셨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너무 안 오셔서. 어디 아프세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해영은 아무 대답 없이 세면대를 힘겹게 붙들고 서 있었다. 건우가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왔다. 벽 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라테. 세면대 위에 빌어먹을 라테를 내려놓고 제 한쪽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돌린다. 돌아서 보라는 의사를 표현하는 정도의 힘이었다. 해영이 조금만 힘을 주어 버티면 고집부리지 않고 물러설 것 같은. 하지만 해영은 순순히 돌아서 주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건 도대체 뭘까. 며칠째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고 원하지 않을 때도 그는 꾸준히 저 라테를 가져다주면서 자신을 불러 주었다. 바람을 이야기하지도, 딱히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로.
여태 해영에게 호의라는 건 불안과 의심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가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고, 이것저것 가져다줄수록, 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의가 쌓여갈수록 앞으로도 계속 불안할 것이다. 의도를 말할 때까지 끊임없이 의문이 들 거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그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차건우마저 없다면 정말로 혼자 남겨질 것 같았으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도 저를 찾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아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존재로 남을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병원 가요.”
차건우가 손을 뻗어 온다.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자신을 부축했다. 커다랗고 뜨끈한 손 안으로 비쩍 마른 양어깨가 감겨들었다.
정말 이 손이 자신을 해치려 들까.
“이제 괜찮아….”
겨우 뗀 입에서 나온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차건우는 잠자코 해영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한쪽 어깨에서 손을 떼어 해영의 뒷목을 그러쥐었다.
“열 있는데.”
갑작스럽게 맨 살갗끼리 마주 닿는 느낌에 해영이 흠칫 몸을 떨며 그의 팔을 잡아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갈래…. 애들이 기다리겠다.”
“다 집에 갔어요.”
“어?”
아까 조원들과 대화를 했을 때가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데. 화장실에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던 건지. 그러고 보니 차건우의 왼쪽 어깨에 자신의 백팩이 매달려 있었다.
“가요. 데려다 드릴게요.”
“무슨…. 됐어.”
“선배 지금 쓰러질 것 같아요. 고집 좀 그만 부려요. 들쳐 메고 가고 싶네, 진짜.”
그가 짧게 내려온 앞머리를 손으로 짜증스럽게 헝클였다. 해영을 내려다보는 눈이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무서워….
계속 버티고 서 있으면 정말 그의 말처럼 강제로 끌려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화장실을 나섰다. 선배가 후배 어깨에 들쳐 업혀진 모습은 너무 꼴사나울 테니까. 그래서 말을 들어주는 거라고 해영은 속으로 합리화했다. 건우가 메고 있는 제 가방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어 주지 않았다.
안에 딱히 가져갈 것도 없는데 왜 안 주는 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영은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신축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본가가 있지만 그곳에서 지내는 게 힘들어 따로 얻은 집이었다.
“여기 살아요?”
건우가 회색 건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응.’ 하고 덧붙였다.
대답을 듣고 나서도 차건우는 돌아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그 사이로 한숨을 내쉬더니 손바닥이 보이게 펼쳐 해영 앞으로 내밀었다.
“휴대폰 좀.”
빌리려는 건가. 해영은 곧바로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풀고 그의 손바닥 위로 올려놓았다. 망설임도 없이 내어 주는 것에 차건우는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잠시간 눈을 가늘게 뜨고 해영을 바라보다 금세 고개를 가로젓더니 숨소리처럼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에 연락처를 찍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해영에게 건넸다.
“또 아까처럼 아프거나 힘들면 전화하세요.”
해영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낯선 열한 자리 숫자를 내려다보았다. 아프거나 힘들면. 기분이 이상했다.
“제 이름 아세요?”
새 연락처로 저장하고 있는데 앞에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해왔다.
“알아….”
“뭔데요?”
무시하는 건가. 선배를 대체 뭐로 보고. 해영은 고개를 들어 눈을 살짝 흘기다가 이름을 적는 부분에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적어 당당하게 내밀었다.
[차건우]
액정을 본 건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이름을 틀렸나?
“이, 이거 아니야?”
“맞아요, 그거. 알고 계실 줄 몰라서….”
건우의 볼이 발갰다. 추운가 보다. 아직 겨울 티를 다 벗지 못한 봄의 초입은 시리고 차가웠다. 해영은 얼른 번호를 마저 저장하고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연락하세요. 아니, 없어도 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안 할 거였지만 빨리 헤어지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홱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잘게 떨자 그가 턱짓으로 오피스텔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세요, 선배. 내일 봬요.”
내일도 보는 건가.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잘 가.”
인사를 했는데도 멀뚱히 서 있기에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그의 뺨 가에 웃음이 은근하게 번졌다. 웃기만 하고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먼저 등을 돌렸다. 시간을 내어 데려다준 사람이 가는 것도 보지 않고 저 혼자 따뜻한 곳으로 몸을 들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해영도 추워서 어쩔 수 없었다.
집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현관에 들어서면서도, 씻으면서도 내내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자신의 건강까지 챙겨 주는 걸 보면 정말 장기가 목적인가 싶다가도 발그레하게 웃던 모습을 떠올리니 도저히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를 만한 애로 보이지 않았다.
해영은 휴대폰 메신저에 새로 추가된 이름을 힘껏 쏘아보았다.
크게 아프게 하진 않겠지? 돈이 필요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당장 그를 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는 유일하게 해영을 불러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머리 아프다….”
이렇게 불안해하고 걱정만 하다가는 스트레스 때문에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계속 말해 주지 않으면 먼저 물어봐야지. 해영은 침대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거듭 다짐했다.
***
[선배. 일어나셨어요?]
[밖이 예뻐요. 이따 봬요.]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어 새 메시지를 확인했다. 며칠 반복했다고 금세 습관이 되었다. 안 좋은 말들로 가득하던 메시지 함이 며칠 사이에 차건우의 영양가 없는 문자들로 넘쳐났다. 해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어 번 비벼 남은 잠을 덜어낸 후 침대 옆에 난 창으로 바깥 풍경을 살폈다.
며칠 전부터 벚꽃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빗자루질을 해야 할 만큼 쌓여 버렸다. 벚나무 가지에 만개한 꽃들과 훌훌 낙화하는 꽃비. 사람들은 이때가 가장 예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해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해영은 봄을 싫어했다.
적당히 시원한 기운이 두 뺨을 쓰다듬고,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는 딱 이맘때 즈음에, 그 여자에게서 버림받았다.
외풍도 심하고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처럼 삐걱거리던 철문의 잠금장치는 어울리지 않게 멀쩡했다. 아니, 사실은 멀쩡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문을 마주했을 때 해영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필사적으로 흔들고 두들겨도 꿈쩍하지 않는 그 문이 어린 해영에게는 어느 단단한 성벽과도 같아 보였다.
낡은 티 한 장과 허름한 잠옷 바지 한 장만을 걸친 채로 신발도 없이 길바닥에 던져졌다.
원망. 분노. 억울함. 서러움. 복수심.
그 맹렬한 감정들을 단숨에 짓누르고 우위에 선 본능은 ‘살고 싶다’였다.
영원히 저를 들여보내지 않을 그 문 앞에서 한참을 좌절하다 벚꽃잎이 흐드러진 거리로 지저분한 맨발을 내디뎠다.
그때 그 봄이 아니더라도 이 계절은 매번 해영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던져 주고 홀연히 떠나갔다. 매년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새 학기도 봄이고, 고등학교 때 그 일이 있었던 것도 늦은 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봄.
“봄에 죽은 귀신이 붙은 게 틀림없어.”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봄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없다뿐이지 찝찝하고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차건우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던 그날 이후로 매일 한두 번씩 꼬박꼬박 해영에게 연락을 해왔다. 딱 번호를 준 게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만 보냈다. 크게 귀찮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혼자라는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을 종종 잊게 해 주었다.
연락을 할 수 있게 되니 예전처럼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는 일도 줄었다. 어디냐고 물어오고, 수업 중이거나 팀플 회의 중일 때에는 열심히 하라거나 쉬엄쉬엄하라는 답을 보내왔다. 공강이거나 도서관에 있을 때, 점심시간 등 딱히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답장 없이 음료나 조각 케이크, 작고 예쁜 디저트 따위를 들고 해영이 있는 곳으로 곧장 찾아왔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것들을 받고서 오늘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줄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매번 입술만 벙긋거리다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해영은 목까지 차오르는 물음을 꾹 참아냈다. 무엇을 듣게 될지가 두려워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비겁하게 스스로 유예 기간을 늘려갔다. 매일 밤 되풀이하는 수많은 다짐도 그의 앞에선 의미를 잃는다. 겁 많은 조개처럼 연한 속을 숨기기 바쁘다.
해영의 근심은 쌓여만 가는데 차건우는 속도 모르고 들떠 보였다.
“이거는 숟가락으로 깨서 먹는 거래요.”
알고 있었다. 크림 브륄레는 해영이 좋아하는 디저트로, 본가에 있을 때 아주머니께서 자주 사다 주시던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후배가 제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 주는데, 초를 치는 건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적당히 ‘응, 그렇구나.’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은 일회용 숟가락을 꺼내 설탕 코팅을 톡톡 두드려 조각내고 커스터드 크림과 함께 퍼 올렸다. 그리고 손잡이를 해영의 쪽으로 돌려 내밀었다.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크림 브륄레 한 숟가락을 건네받은 해영이 입으로 가져가자, 앞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감상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맛있어….”
차건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떼어냈다. 설명도 해 주고, 퍼 주기까지 했으면서 정작 자기는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사 온 것도 아닌 디저트를 혼자 먹고 있자니 해영은 마음이 불편했다.
“너, 너도 먹어.”
“전 괜찮아요. 선배 많이 드세요.”
네 개를 혼자 다 먹으라는 건가. 아무리 좋아하는 거라도 한 번에 네 개는 무리였다. 해영은 크림 브륄레 하나를 뜯지 않은 일회용 숟가락과 함께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차건우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숟가락 포장을 뜯은 후 설탕 코팅을 퍽퍽 깨서 단 두 숟갈 만에 비워버렸다.
“맛있지?”
“…네.”
긍정을 말하는 건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혹시 단 거 안 좋아해?”
“아니에요. 맛있어요.”
다시 물어본 질문에 또 맛있다고 대답한다. 어쩌면 저 사약이라도 먹은 것 같은 표정이 이 애 나름의 맛있다는 표정일지도 모른다고 해영은 생각했다. 맛있을 때 욕을 하거나 무언가를 부수고 싶다고 말하는 별난 사람도 많으니까.
“그럼 하나 더 먹어. 한 사람당 두, 두 개씩.”
크림 브륄레 하나를 더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건우가 사 온 것을 그에게 도로 나누어 주는 모양새라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말끝이 조금 떨렸다. 그가 순식간에 비워버린 용기 옆에 새것을 가지런히 놓고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먹고 싶었는데 말을 못 했던 거다. 감동을 받은 거야. 해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너도 이 나이 되어 보면 알겠지만, 먹을 거로 욕심 부리면 안 되거든.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차건우는 제 앞에 놓인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네…. 감사해요.”
감사하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다니. 해영은 남은 하나를 손에 꼭 쥐었다.
“이거도 줄까?”
“아니요.”
그는 허겁지겁 입에 넣고 꽤 오래 음미했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진지하게 맛을 보는 얼굴에 해영은 역시 나눠 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속이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다.
건우는 디저트만 사다 주는 게 아니었다.
[선배. 어디 계세요?]
[학생 식당 가는 중]
[거기 가만히 계세요.]
학생 식당으로 향하던 해영을 붙잡아 학교 근처 맛집으로 소문난 덮밥집에 데려간 날부터, 그는 매일같이 점심시간에 맞춰 해영을 불러냈다. 그리고 밥을 사 주었다.
“선배님.”
학년이 다르다고 해도 수업이 시작하는 시간과 끝나는 시간은 비슷할 텐데, 그는 항상 먼저 강의실 앞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아무거나 상관없어….”
제법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고, 말을 더듬는 횟수도 약간 줄었다. 그렇다고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돈가스 드실래요?”
돈가스는 해영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입이 짧은 편이라서 좋아는 하지만 매일 먹는 건 좀 힘들다고 말했더니, 이틀에 한 번씩은 돈가스를 사 주었다. 어제 초밥을 먹었으니까 오늘은 돈가스를 먹을 수 있겠다. 고개를 끄덕이니 입꼬리를 올려 시원하게 웃는다. 무표정을 하고 있으면 무서운 얼굴이지만 이렇게 웃을 땐 제 나이대처럼 장난기가 묻어났다.
둘이 자주 가는 ‘엄마 손 돈가스’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었다. 가는 길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아이들의 웃는 소리,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명한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손님이 많은 가게도 아니었지만 해영은 이곳을 좋아했다.
나무로 된 수저통을 무심하게 뒤졌을 때 짝이 다른 젓가락이 나오는 횟수가 더 많은 것도, 자리마다 테이블보 색깔이 다른 것도, 모서리가 구겨진 오래된 메뉴판도 좋았다.
“나는 매콤 돈가스.”
자주 오는 곳이라 신메뉴까지 외워 버려서 굳이 메뉴판을 볼 필요는 없었지만, 해영은 형식적으로 훑어본 뒤 건우에게 내밀었다.
“또 혀 아파서 반 남기시려고요?”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매콤 돈가스를 시킬 때마다 있는 일이었기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그게 먹고 싶어.”
건우가 따라 준 물을 연신 홀짝이며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손을 살짝 들어 메뉴를 주문했다. 차건우는 맵지 않은 옛날 돈가스를 냉모밀과 함께 시켰다.
가게 안에 손님은 건우와 해영뿐이었다. 차건우는 빠르게 나온 돈가스 두 개를 모두 제 앞에 놓고 썰기 시작했다.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썰린 매콤 돈가스가 해영의 앞에 내밀어졌다. 습관이 무서운 거라고, 문득 이런 배려 하나하나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그 부탁을 들어주고 나면 이 관계도 끝이겠지.
아침마다 잘 잤는지 문자를 해 주는 사람도, 돈가스를 썰어주는 사람도, 오늘은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봐 주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 자신만 괴로워질 뿐이라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그냥 잠깐 머물다 지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마음을 주지 말자고, 속으로 곱씹었다.
해영은 앞에 놓인 빨간 돈가스를 한 조각 두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후우…. 씁, 하….”
슬금슬금 올라오는 알싸한 매운맛에 혀를 반쯤 내어놓고 손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많이 매워요?”
“아이….”
해영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얼얼한 혀 때문에 발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건지 계속 픽픽 대며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웃었다.
입을 꾹 다물고 참아 봤지만 저릿한 혀가 입안 곳곳에 눌려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였다. 눈 밑이 벌게질 정도로 통증이 올라올 때마다 건우는 자신의 돈가스를 한 조각씩 해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정신없이 헥헥대는 와중에 눈앞으로 돈가스가 내밀어지면, 선배의 체면이고 뭐고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녹진한 소스가 골고루 스며든 돈가스는 물이나 음료보다 효과가 좋았다. 입안 가득 물고 천천히 씹어 넘기면 매운맛이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와 먹는 밥은 모두 건우가 계산했다. 부탁의 정도에 맞춰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는 거겠지. 계산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원하는 게 뭔지 듣지도 못한 상황에서 계속 얻어먹으려니 빚이 쌓여가는 기분이었다. 그저께 밥을 먹고 나서 지나가듯이 필요한 거, 혹은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지만 건우는 딱 잘라 없다고 답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물질적인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전부는 아니라도 두 번 사 줄 때 한 번 정도라도 계산을 할 수 있다면 덜 불안할 것 같은데.
해영은 먹는 속도가 느렸다. 처음 끌려갔던 덮밥집에서 그런 저를 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 답답한 마음에 뛰쳐나가는 건가 싶었는데, 계산하고 자리로 돌아와 해영이 마저 먹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해영이 아예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가서 계산을 하려고 밥을 빠르게 먹어 보았지만, 건우가 먹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얹히기만 했다. 밥을 먹는 중간에 나갔다 오는 것은 불결한 행동 같아서 하고 싶지 않았다. 계산하려고 일어나는 그를 붙잡아 보려고도 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짐을 정리하는 해영을 두고, 건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지갑을 잡아 일어났다. 오늘도 빚이 쌓이는구나.
그렇게 포기하고 그를 보내려던 순간, 전에 들었던 소문이 생각났다. 재벌이라 뒷돈을 주고 입학했다는 소문. 돈이 많아서 이러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해영이 느끼는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해영은 작지만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처럼 재벌은 아니지만 나도 돈 있어….”
그는 질린다는 얼굴로 그 헛소문은 도대체 왜 퍼졌는지 모르겠다며, 가볍게 혀를 찼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시고 어머니는 교직에 계세요. 평범해요, 그냥.”
해영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주워듣고 당사자 앞에서 그 소문이 사실인 양 이야기를 꺼낸 게 부끄러웠다. 그 표정 변화를 가만히 살피던 건우가 물었다.
“혹시 돈 많은 사람 좋아하세요?”
“어? 아, 아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앞으로도 하지 마세요.”
이상한 요구였으나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기에 해영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보고 나서야 건우의 표정이 환하게 풀어졌다.
오후 수업이 남아 있는 해영은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밥을 먹으면서 물었을 때 건우는 분명 남은 수업이 없다고 말했는데,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 해영의 뒤를 쫓아왔다. 무슨 볼일이라도 남은 건가. 우연히 방향이 같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제 앞도, 옆도 아닌 뒤에서 따라 오는 모양새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고민하던 해영이 참다못해 뒤를 돌아 물었다.
“수업 없다고 하지 않았어?”
“잊은 게 있어서요.”
해영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영관 건물 앞까지 도착했을 때, 뒤에서 건우가 불러왔다.
“선배.”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는 목소리와 사뭇 다른,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한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차건우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뒷목을 매만지며 머뭇거리더니 노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주먹 안에 다 가려지는 걸 보면 작은 물건인데. 무엇이 들어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해영이 경계하는 눈을 하고서 주먹과 그를 번갈아 주시했다. 이게 뭐야, 물어도 손만 더 가까이 들이밀 뿐이었다.
“팔 떨어지겠어요.”
머리 위에서 차건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제야 해영은 양 손바닥을 펼쳐 그의 주먹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차건우가 주먹을 펴자 바스락거리는 무언가가 해영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날카롭고 낯선 감촉에 놀란 해영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으아….”
벌레인가. 떨어트릴까 손바닥을 위로 받치듯 쳐든 것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내용물을 확인했다. 식당 카운터에 놓여 있던 체리 맛 막대 사탕. 해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었다. 창피해.
건우는 허리까지 접어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해영이 무릎을 붙잡고 몸을 완전히 일으킬 때까지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좀 웃었으면 좋겠는데. 해영은 아랫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갈게요, 선배. 내일 봬요.”
내일. 이렇게 내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해영은 손바닥을 간질이는 사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어 숨겼다.
누군가에게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상적인 것들이 해영에게는 낯설고 무겁기만 했다. 별 의미 없이 주고받는 말들이나 행동들. 지금도 그랬다.
그는 인사를 하고 나서도 먼저 돌아서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목구멍에 걸려 있던 것이 톡 터져 나오려 한다. 끊임없이 들었던 의문이, 불안이.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적은 양의 기대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압박감에 입술을 피가 맺힐 정도로 짓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해영은 여전히 바닥을 향한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계속 이것저것 주기만 하고 부탁할 게 뭔지 말도 안 하고…. 하,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계속 참고. 왜 주는 건지를 모르니까 마음이 너무 부, 불편해.”
거기까지 말을 마친 해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했을 때, 해영의 몸이 본능적으로 작게 튀어 올랐다. 계속 저런 얼굴로 보고 있던 건가. 건우는 묘한 눈을 하고 있었다.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또 우스운 것 같기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제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말이다.
“말해 주라. 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줄게….”
그 시선을 못 이긴 해영이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도, 건우의 표정은 풀어지기는커녕 더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저는 제가.”
그리고 숨 막히는 침묵 끝에 귀에 겨우 닿은 목소리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몸속까지 울리는 낮은음이 귓바퀴를 간질이고 스며들었다. 감정을 싹 거둬낸, 어딘가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참아내는 사람처럼, 말속에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으며 덧붙였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셨죠.”
불과 몇 분 전에 멋쩍은 듯 웃으며 사탕을 내밀던 이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차건우는 조소하며 해영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벽과 제 몸 사이에 가둬 두려는 것처럼 위압적인 얼굴로 바짝 붙어 섰다. 이마 위로 진득하게 떨어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해영은 숨을 참았다.
“말해도 선배는 못 들어줘요.”
원하는 게 있긴 있다는 말이었다.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제가 뭐를 말할 줄 알고요.”
건우는 화가 난 사람처럼 힐난했다. 해영은 그동안 건우가 자신에게 주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조금 무리한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일단 걱정하지 말고 말해 봐.”
해영이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차건우의 굵은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가 답지 않게 미적대는 사이, 대답을 종용하기라도 하듯 날 선 봄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벚꽃잎을 태운 바람이었다. 해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곧 잔잔해진 공기에 슬며시 눈을 뜨자 시야에 단단한 손이 가득했다. 건우가 제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오고 있었다.
“아!”
해영이 떴던 눈을 도로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차건우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더니 조금 더 팔을 뻗어 해영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졌다. 그리곤 벚꽃잎 한 장을 떼어내 해영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이거 때문에요.”
“아….”
낯선 표정과 말투에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던 걸까. 순간 자신에게 손찌검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러면서 무슨.”
건우는 떼어 낸 꽃잎을 털어내듯 바닥에 던져두고 정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얘기 안 해 주려는 건가. 자신이 겁이 많은 것과 원하는 것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어서. 해영의 머릿속에 불안한 가정이 스쳤다.
몸을 돌리는 차건우의 소맷자락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마, 말 안 해 주려고?”
그는 붙잡힌 곳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말하면 선배 도망갈지도 몰라요. 다음에, 다음에요.”
해영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소매를 스르르 놓았다. 건우가 수업 잘 들으라는 말을 남겨 두고 등을 돌려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정말 그건가 봐.
강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해영은 가방에서 용도가 불분명한 줄 공책 하나를 꺼내 펼쳤다. 자주 써서 손에 익은 검은색 펜을 들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숫자를 차례차례 적어 내려갔다.
1, 2, 3, 4….
먹을 걸 그만큼 사 줄 정도로 간절하고 어려운 부탁. 들으면 도망갈 만큼 무서운 부탁. 차건우에게 이득이 되는 부탁.
숫자 1 옆에 ‘장기매매’ 네 글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숫자 2 옆에 ‘샌드백’이라고 적고 동그라미를 쳤다. 고등학교 때 종종 때리고 싶게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장기매매보다는 훨씬 무난해 보이는 부탁이지만 이 정도면 듣고서 도망갈 거라는 조건에도 해당했다.
그 아래 숫자 3 옆에 펜을 콕콕 두드리던 해영의 머릿속에 하나의 추측이 더 떠올랐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성적 욕구 해ㅅ’까지 적고서 줄을 벅벅 그어 시커멓게 지워버렸다. 너무 갔다, 이건.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악감이 들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은 건 아니지.
살아남은 두 개의 가정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상상력이 이거밖에 안 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이 두 개 중의 하나가 정답인 건지. 나란히 놓고 보니 ‘샌드백’ 쪽이 몇 배는 더 나아 보였다. 그렇지만.
아픈 건 정말 싫은데.
해영은 아랫입술을 꾹 물고 다시 펜을 들어 4번 옆에 마지막 선택지를 힘없이 적었다.
‘4. 혼자 되기’
그래도 샌드백이 이거보단 낫지 않을까.
“해영아.”
그때, 같은 과 동기 남희수가 강의실 앞쪽에서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해영은 서둘러 노트를 덮었다.
“응?”
“저번에 네가 발표했던 소비자 행동 분석 과제 있잖아. 그거 좀 메일로 보내 줄 수 있어?”
“어… 응. 근데 그건 왜?”
남희수는 해영의 앞 좌석에 거꾸로 자리를 잡고 앉아 의자 등받이에 양팔을 올려놓았다.
“김 교수님 거 과제 하는데 조사해야 하는 부분이 겹치더라고. 저번에 보니까 네가 제일 정리 잘했더라.”
그는 코를 찡그리며 웃더니 해영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 진짜?”
조금 전까지 바닥을 치던 기분이 나아졌다. 잘했다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받게 된 부탁도. 아, 노트북에 그 파일이 없는데. 헤실거리던 해영의 웃음이 뚝 멎었다.
“나, 나 그런데 그거 외장하드에 있어서… 집에 가서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남희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아. 6시 전까지만 보내 주면 돼.”
5시에 수업이 끝나니, 집에 바로 가면 충분히 시간 안에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아, 알겠어.”
“고맙다!”
그는 해영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남희수와 이야기를 할 때 멀리서 계속 힐끔거리던 동기 한 명이 그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멀어서 들리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해영에게 별말이 없는 걸 보면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해영은 덮어 둔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선택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영은 생각했다.
“어, 어디 있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외장하드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해영은 당황한 얼굴로 서랍 내용물을 전부 꺼내 뒤지기 시작했다. 있을 만한 곳을 다 살펴보다 결국 약속했던 6시를 넘기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남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듬더듬 사정을 이야기하자 곤란하다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하지. 급한데.
초조했다. 얼마 만에 받는 부탁인데. 그렇게 당당하게 알겠다고 해놓고서 무책임한 꼴이라니.
“지, 지금 얼른 해볼게.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그걸 지금 만들겠다고? 삼십 페이지 아니었어?
정확히는 36페이지 분량이었다.
“해볼게….”
―어….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한데. 그냥 문서에다 정리해서 보내 주라. 내용 참고만 하는 거라 피피티까지 만들 필요는 없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해영인데 되레 미안하다면서 걱정까지 해 주다니. 얼른 해서 보내 주고 싶었다.
“응, 알겠어. 하자마자 보내 줄게.”
―그래. 고마워.
결국 해영은 밤을 새웠다. 필요한 부분만 요약하고 정리한 게 36페이지였으니, 조사부터 정리까지 하루 이틀 만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아침까지 하고도 끝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반 정도의 분량을 메일로 보내고, 나머지도 되는 대로 보내 주겠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알겠다는 답장은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하루만 밤을 새워도 티가 나는 편이라 시험 기간에도 웬만해서는 새우지 않도록 노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선 해영은 절망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 그늘진 얼굴, 더 쳐져 보이는 눈매. 푸석한 피부. 바짝 마른 입술.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세수를 다섯 번 하고, 샤워를 두 번 하고, 옷을 네 번 갈아입느라 1교시를 통으로 날렸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이상 늦으면 성적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반쯤 포기하고 집을 나섰다. 새벽에 비가 오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더니.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해영은 얇게 입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아, 맞다.”
아침까지 자료를 정리하느라 메시지 확인하는 걸 깜빡 잊었다. 곧바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상단 바에 뜬 새 알람 표시를 본 해영의 얼굴이 옅게 상기됐다. 어제 좋지 않은 얼굴로 헤어져서 오늘은 안 보내지 않았을까 했는데. 해영이 그의 메시지를 엄지로 꾹 눌렀다. 오늘 날씨가 쌀쌀하니 따뜻하게 입고 나가라는 내용이었다. 나오기 전에 볼걸. 해영이 충분하지 않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수업 중간에 틈틈이 요약을 했음에도 다 끝내지 못했다. 얼른 집에 가서 마저 해야겠다. 해영은 강의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건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그는 평소처럼 씨익 웃으며 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제 나눈 대화가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혼자만 신경 쓰고 눈치 보는 상황은 익숙한 일인데도 해영은 이번에 유독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디 아프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해영은 손바닥을 차양막처럼 펼쳐 이마에 대고 얼굴을 가렸다.
“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아, 얼른 가서 주무시는 게 낫겠다. 가요.”
또 집까지 따라올 생각인건지, 경영관 밖으로 나와서도 그는 옆에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냥 걸음을 재촉했다. 힐끔거리는 것만 좀 멈춰 줬으면 좋겠는데. 아침에 거울로 봤던 형편없는 몰골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남희수였다.
“여, 여보세요?”
―어, 해영아. 난데.
“응, 응.”
―혹시 남은 거 언제까지 보내 줄 수 있어?
“아…. 지금 집 앞이라 들어가서 바로 해서 보내 줄게. 미안.”
알겠다는 답을 받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건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누구예요?”
그가 턱짓으로 휴대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 동기.”
“설마 뭐 부탁받은 거 있어요?”
해영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건우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앞에서 이야기하려니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응…. 과제로 냈던 자료 너무 좋다고 보여 달라고 그래서. 아, 근데 파일을 못 찾아서 어제 새로 만든 거라 괜찮을지 모르겠네.”
들뜬 목소리로 답을 하고, 그를 힐끔 바라본 해영의 몸이 움찔 튀었다. 얼굴이, 무서워…. 건우의 표정은 좀 전보다 훨씬 더 험악하게 굳어 있었다.
“그걸 선배가 왜 들어주는데요.”
차건우는 답답한 사람처럼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며 말을 이어서 쏟아 냈다.
“선배, 이런 건 안 들어줘도 돼요. 만약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지, 선배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 일 아니에요.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죄다 들어주면 당연하게 생각한다고요, 그 새끼들은. 뭐라도 맡겨 놓은 것처럼. 그러다 어쩌다 한번 안 해 주면 선배 탓 하겠죠. 그게 정상이에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해영을 쿡쿡 찔러 온다. 가시덤불 안에 꼼짝없이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해.”
“지금도 봐요. 잠도 잘 자고 저랑 맛있는 것도 먹고 기분 좋게 집에 가면 되는 거였는데 그딴 버러지 같은 새끼 부탁 들어준다고. 얼굴도 다 상했네, 씨발.”
건우의 말에 화가 나는 이유는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옳기 때문이겠지. 안 보이는 척 산다고 해서 없는 게 되지 않았다.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까지 외면하고 고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고친다. 가능하긴 한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취급하는지 알고 있었다. 동아줄이 튼튼한지 썩었는지 알 게 뭐야. 해영은 눈앞에 내려온 단 하나의 선택지를 필사적으로 붙들었을 뿐이다.
‘지금 말하면 선배 도망갈지도 몰라요. 다음에, 다음에요.’
차건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지금 누구보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머리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어지러웠다.
“…네가 뭘 알아.”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도 내가 필요 없어지면 지금처럼 대하지 않을 거잖아.
“너도 똑같잖아.”
***
차건우는 현관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곧장 제 방 침대 위로 엎어졌다. 섬유 유연제 냄새가 흐릿하게 남아 있는 베갯잇에 코를 박고 숨이 버거워질 때까지 꾹 눌렀다.
미친 새끼. 거기서 화를 왜 내. 뒈져라, 그냥.
저를 올려다보던 물기 어린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몸을 뒤집어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건우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렀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재벌이라는 헛소문을 듣고 와서 제 앞에서 아부를 떠는 것도, 뒤에서 별것 아닌 이유로 욕을 하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살아가는 데 크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만 잘하면 되지. 건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남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당연히 관심이 없었다.
순해서, 나쁘고 독한 것들에 면역이 없어 당하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보여 준 경계 어린 눈은 잘 가꿔진 정원에서 자란 귀한 꽃과 같은 눈이 아니었다. 연약한 들짐승 같은 눈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어 주변에 의지해 살아가는 예민하고 작은 짐승. 다가가는 방법부터가 틀려먹은 거다.
막막했다. 못 볼 꼴까지 보였으니 바라던 관계로 발전시키기는 힘들지 않을까. 포기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하얗고 축 처진 눈매를 떠올리면 단전에서부터 더운 기운이 훅 올라와 몸을 데운다.
지켜 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주제넘은 생각이라면, 그래. 최소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재작년 겨울, 그를 처음 본 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아….’
피투성이가 된 해영이 차건우의 집 앞에 홀로 서 있던 그날, 그는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가쁜 숨이 겨우 이었다. 자신이 똑바로 말을 하지 못해서 열린 문이 닫혀 버릴까 초조한지, 그는 제 앞에 보이는 건우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흰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작은 진동이 건우의 온몸에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떨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건우는 그날 해영이 붙잡았던 팔 언저리 위에 손을 얹어 옷자락을 세게 구겼다.
“어떻게든 되겠지.”
포기할 생각은 없고.
***
다음 날 해영은 적막한 메시지 함을 재차 확인했다. 매일같이 보내오던 잘 잤냐는 메시지가 오지 않는다. 예상했던 일이다. 본인 일처럼 화를 내 주는 사람에게 모난 말을 뱉고 그대로 돌아섰으니.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도 별반 다를 것 없으면서.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새벽부터 눈을 떠서 틈만 나면 메시지 함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그 말을 들은 차건우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서다.
그는 동요했다.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가, 겨우 뱉어낸 호흡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잔뜩 구겨진 미간도, 흔들리는 시선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벙긋거리는 입매도. 차건우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말이 심했나.
[선배. 잘 잤어요?]
[오늘 날씨 쌀쌀해요.]
[따뜻하게 입고 나오세요.]
어제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신없이 자료를 정리한다고 답장도 해 주지 못했다. 해영은 왠지 모를 초조한 기분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해를 바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해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처지가 늘 기꺼웠고 과분했기에 힘든 티를 내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심했다. 마음껏 이용해 먹는 사람들 사이에 덩그러니 홀몸으로 놓인 아이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든, 비정상적인 관계에 익숙해져서 표면이 맨들하게 무뎌지든 신경 쓰지 않았다. 방관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해영은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무도 해영에게 틀렸다고, 그렇게 사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차건우가 처음이었다.
휴대폰 키패드 위에서 방황하던 손이 뚝 멎었다. 사과하고 싶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미안해. 세 글자 뒤에 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하기엔 너무 진심인 말들이었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에는 자신이 없었다.
결국 해영은 메시지를 썼다 지우는 것만 반복하다,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현관을 나섰다.
오전을 내내 엉망으로 보냈는데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멍한 얼굴로 노트북 패드를 손끝으로 두드려 대다가 제지를 받았다. 책상 밑으로는 휴대폰을 꼭 쥔 채 미끄러운 액정을 엄지로 매만졌다. 수업을 마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지만, 해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제 형편없는 말주변에도 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줄 것 같았다. 찾아가 봐야지, 결심해도 그가 이 시간에 어디에 있을지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해영은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물은 적이 없었다. 찾을 이유도 없었고, 또 찾기 전에 늘 먼저 다가와 주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모진 말까지 쏟아부었으니, 더는 자신과는 엮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해영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묵직한 가방을 고쳐 메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쪽으로 향했다. 1학년 전공 수업은 대부분 바로 아래층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그곳에서 수업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지만 무작정 가서 찾아볼 생각이었다. 길이 엇갈리면 어쩌지.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복도는 한산했다. 해영은 눈에 보이는 강의실부터 하나하나 들여다보았지만 건우를 찾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받지 않았다.
결국 해영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학과 사물함은 복도에서 움푹 들어간 공간에 위치해 있었다. 철제 사물함과 좁은 면적 때문에 거기선 작게 이야기를 해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울렸다. 복도에 사람이 없으면 더 잘 들렸는데, 해영이 그 옆을 지나가려던 지금이 딱 그러했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안 좋은 행동이지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오가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렸으니까.
“언제까지 서해영 비워 맞춰야 하는 건데, 빡치게.”
아는 목소리였다. 같은 과 동기 중 한 명이다.
“그 후배요. 아직도 옆에 붙어 다니더라고요. 저번에 지나가면서 살벌하게 쳐다보는데, 솔직히 존나 억울해요. 저희가 뭐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그 형이 좋아서 한 거잖아요.”
이어진 불만 섞인 목소리는 두 학번 아래 동생의 것이었다. 해영과는 팀플을 두어 번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내 말이. 우리를 무슨 빌붙어 먹는 놈들 보듯이. 그 새끼는 뭐 하는 새낀데 작년, 재작년 일까지 들먹이냐. 일 학년 아니야?”
말에 날을 세우며 언성을 높이던 동기는 사물함 문을 요란스럽게 닫았다.
“해영이 형이 알려 준 거 아닐까요.”
“미친, 소름 돋아.”
곧이어 남은 사물함 하나도 마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그들과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뭘 들은 거지. 해영이 파리한 얼굴로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제 옆에 붙어 다니는 후배는 분명 차건우를 지칭하는 말일 터였다. 호흡이 널을 뛴다. 가쁘게 들이 마시면서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다. 화장실 타일 벽에 등을 기대 스르르 내려앉는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셨죠.’
차건우가 자신을 사람들에게서 고립시켰다.
‘말해도 선배는 못 들어줘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가 건네는 호의를 받을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다.
‘지금 말하면 선배 도망갈지도 몰라요. 다음에, 다음에요.’
언젠가 듣게 될 무시무시한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게 만든 행동이 무척이나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길래.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진동은 끊어지지 않고 연달아 이어졌다. 전화였다. 액정에는 ‘차건우’ 세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제야 아까 그를 찾기 위해 부재중 전화를 남겼던 게 떠올랐다. 받고 싶지 않은데.
진동은 끊겼다 다시 시작되길 세 번 정도 반복했다. 마지막 짧은 진동을 몇 번 남기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휴대폰 액정에는 짧은 메시지가 세 개 떠올라 있었다.
[죄송해요. 씻고 있어서 못 받았어요.]
[선배. 무슨 일 있으세요?]
[이거 보면 꼭 전화 주세요.]
그렇게 온전히 혼자가 되고 나서야 해영은 뒷머리를 벽에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서 책상 위에 가방을 내던졌다. 그리고 가방 안을 허겁지겁 뒤져 줄 공책을 꺼내 펼쳤다. 해영은 맨 아래쪽에 적힌 글자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4. 혼자 되기’
***
건우는 딱딱한 강의실 의자를 한껏 젖힌 채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앞에서는 교수가 열심히 무언가를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한 글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수업 듣는 걸 포기하고, 휴대폰을 꺼내 혼잣말로 잔뜩 채워진 메시지 창 위로 엄지를 올려 천천히 훑었다.
[선배. 무슨 일 있으세요?]
[이거 보면 꼭 전화 주세요.]
[바빠요?]
[선배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어디세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영은 명백하게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그저께 나잇값 못하고 만취한 엄마 셋째 딸한테 호출을 받고, 새벽부터 끌고 들어오느라 늦잠을 자버렸다. 당연히 수업도 놓쳤다. 오후에 눈을 뜨니 해영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수업 째고 늦잠이나 처자는 한심한 놈으로 보이기 싫어서 씻느라 못 받았다는 핑계를 둘러대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무려 해영이 처음으로 먼저 건 전화였으니까.
연락은커녕 자신을 꼴도 보기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목적이야 어찌 됐건 먼저 찾았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첫 전화. 첫 연락. 액정에 뜬 알람부터 전화를 건 시간과 초가 나와 있는 화면까지 빠짐없이 캡처를 해두었다. 웹 드라이브에도 바로 저장했다.
들떠 있던 것도 잠시,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는 연락이 없었다.
저번처럼 몸이 안 좋아 혼자서 정신없이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수업은 진작에 끝났을 시간이라 해영의 오피스텔 쪽으로 걸어가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걸음 남겨 놓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는 해영의 뒷모습을 마주했다. 해영은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고서 걸음을 멈추더니 그대로 주머니에 꽂아 넣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 쫓아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해영의 앞에서 필터 없이 줄줄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리니 차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또 덜덜 떨면서 두려워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볼 것 같았다.
하루를 더 기다렸다. 해영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메시지만 조금 보내고 얌전히 연락을 기다렸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건우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욕을 속으로 삼키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뭐가 이렇게 어려워?
차건우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풋내 나는 연애를 떠올렸다.
연애를 특별히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기념일을 챙겨야 할 정도로 길게 해본 적도 없었지만, 남들만큼은 했다고 생각한다. 재능은 없어도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간의 연애가 모두 차건우가 아닌 상대방의 제안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이다.
자신을 연애 상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공을 들인다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이 노력들을 단숨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최악의 가정 하나가 뇌리에 간간이 맴돌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뭘 시작도 안 한 상태에서도 이렇게나 뜨겁고 열렬한데, 상대방은 영영 자신을 비슷한 눈으로도 볼 수 없을 거라는 가정만은 사실이 아니어야 했다.
“수업 시작할 때 말했던 거 잊지 마시고. 다음 주에 봅시다.”
교수가 강의를 끝마치는 멘트를 신호 삼아 건우는 재빨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마 있지 않은 짐을 대충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해영이 같은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손이 다급했다. 해영을 만나야 했다. 그 하얗고 순한 얼굴을 앞에 세워 놓고 물어야 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두려웠지만 이대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긴 싫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는 또 왜 이렇게 느린 건지. 건우는 다리까지 달달 떨면서 겨우 해영의 수업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튀어 나갔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몸을 부딪쳤지만 사과할 정신이 없었다. 급한 걸음으로 지난주 해영을 기다리던 강의실 앞에 도달했다.
강의실이 텅 비어 있다.
여기가 맞는데. 강의실 팻말을 확인하고 요일을 확인하고 지난주 같은 요일에 해영에게 보냈던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수업이 일찍 끝난 건가.
입안 살을 가득 물었다. 온갖 곳에서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해영 찾아?”
그때 뒤에서 한 남자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넸다. 원치 않는 접촉과 그 입에서 나온 이름에 건우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버러지들 중 하나인가.
“어디 있어요?”
남자는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존대하는 걸 보면 자신이 선배인 건 아는 모양인데,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도 없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 것에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기분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건우는 한 번 더 똑같이 물으며 대답을 종용했다.
“선배 어딨어요.”
남자가 픽 웃더니 반대쪽 복도 끝을 턱으로 가리켰다.
건우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자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곳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굴릴 것도 없이 단번에 해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해영에게 다가갈수록 불안과 초조함, 반가움으로 뒤섞여 심장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쿵쿵대며 요란하게 울렸다. 그와 낯선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들릴 정도의 거리까지 다다르자 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걸음을 늦추었다.
대화 내용이 이상했다.
“…내가 잘할게. 개, 개인 과제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줘.”
해영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걔 때문에 안 된다니까요. 차건운가 뭔가. 이것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형이 계속 이러시니까 제가 곤란해서 말해드리는 거예요. 형한테 뭐 하나라도 부탁하면 매장할 기세였다고요.”
상대방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까지 털며 답했다.
“걔, 걔 이제 나랑 안 다니는데….”
“아무튼 저는 엮이기 싫어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해영에게서 등을 돌렸다. 해영은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트리다가 옆을 지나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뛰어갔다. 그리곤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짐으로 손을 뻗었다.
“내, 내가 들어 줄게.”
그 사람 역시도 해영의 손길을 받지 않았다. 해영은 금세 혼자가 되었다. 복도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무언가를 견뎌내는 사람처럼 두 주먹을 꼭 쥐고 버텼다.
그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이 유의미한 삶이고 살아가는 목적인 사람처럼 굴었다.
건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영이 좀 더 편하게 생활하기를 원해서 저지른 것들이 결국엔 더 고통스럽게 만든 건가. 그렇다고 해도 무를 생각은 없었다.
해영이 원하고 갈망하는 삶은 저런 삶이어서는 안 됐다.
“선배.”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혼자 남겨질 일 없다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과 욕망을 삼키다 저도 모르는 새에 그의 옆으로 다가서 있었다. 해영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뗐다. 건우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다가 그 뒤를 저벅저벅 쫓았다.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에 해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몇 층 안 되는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가고, 경영관을 나서고, 횡단보도 앞까지 도달했을 때.
빠앙-!
“정신 안 차려?”
건우가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해영의 팔뚝을 세게 잡아당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를 붙들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해영도 적지 않게 놀란 듯 토끼 눈을 하고 횡단보도와 잡힌 팔뚝을 번갈아 보았다.
“아….”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해영은 혼란스러운 사람처럼 불안정한 눈동자로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이 와중에도 며칠 못 본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부터 눈에 들어오다니. 중증이다.
건우는 팔뚝을 붙든 손을 스르르 내려 해영의 손을 마주 잡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해영은 아무 말 않고 따라 걸었다. 멀지 않은 벤치에 해영을 앉히고 그 옆자리에 나란히 앉고 나서도 건우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되레 슬금슬금 빠져나가려는 작은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아직도 가슴이 쿵쿵 요란하게 울려댄다. 건우는 놀고 있는 손을 올려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저기, 손 좀….”
“참아요.”
어디라도 붙들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종일 연락을 무시하고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도망을 가고. 얼마나 저를 보기 싫었으면 달려오는 차도 못 볼 정도로 도망가다 사고까지 날 뻔한 건지. 이 손을 놓으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맞잡은 손에서 안정보다 온기를 더 느껴갈 즈음, 해영이 먼저 물었다.
“그…. 왜 그랬어?”
“뭐를요.”
해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한테….”
건우가 제 주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몰라서 뒷말을 고르다 입을 닫았다.
그거 때문이었구나. 건우의 미간이 얕게 패었다. 언젠가 알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걸 이렇게 피하고 도망칠 정도로 싫어할 거라곤 맹세코 예상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거짓말이다.
“사람들이 선배 막 대하는 게 너무 싫어서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도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멋대로 굴어서 죄송해요.”
해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고작 이 정도 사과에도 흔들리는 사람이라니. 그 사실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다행이다 싶었다.
“죄송해요, 선배.”
한 번 더 사과하자 해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하, 하나만 말해 줘.”
빈틈없이 마주 잡은 손이 해영의 힘에 의해 움찔 떨린다.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건우는 성급하게 되묻는 대신 뒤에 올 말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네가 원한다는 그거…. 내, 내 배를 가르는 뭐 그런 거야?”
건우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곱씹었다. 설마 섹스를 저렇게 표현하는 건 아니겠지.
“배를 가르는 그런 게 뭔데요?”
“장기 매매라던가…. 가, 간이나 신장 그런 거.”
“미쳤어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버렸다. 해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하다가 또 기가 막힌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럼 때린다거나….”
“씨발.”
정말 저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물어보는 거겠지. 피가 빠르게 돌았다.
“그래서 피했어요? 제가 선배 다치게 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버티는 걸 보니 정말 그것 때문이었나 보다. 아무리 제가 확실하게 얘기를 안 했기로서니 저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위협적인 행동을 취한 적도 없어 퍽 억울했다.
“아프게 안 해요. 하라고 해도 못 해요. 그때 말했던 부탁은…. 당장은 말 못 하지만 그것도 선배가 죽어도 싫다고 하면 기다려 드릴게요.”
그만둔다거나 포기하겠다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애타게 원한 적도, 혼자 끙끙 앓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의 속도에 맞춰 줄 수는 있지만 놓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죽어도 연애 같은 거 못하겠다고 밀어내는 서해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
해영과 오며 가며 거닐던 경영관 옆 산책로에는, 여름을 목전에 두고 낮은 나무들이 푸른 잎을 하나둘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적당했다. 해영과 함께 걸으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 그와 다퉜다는 게 떠올라 잠시나마 설렜던 마음이 우울감으로 뒤덮였다.
그때 반대편에서 해영이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화가 풀린 건가.
벙긋거리는 입 모양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정체 모를 점액이 제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게 뭐야.
몸을 비틀고 손으로 끈적한 것들을 떼어내 봐도 소용이 없었다.
해영이 손을 내리고 저에게로 다가왔다. 아니, 제 쪽으로 다가왔다.
‘해영아.’
등 뒤에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버러지 한 명이 해영을 부르고 있었다. 해영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게 누구인지 확실히 구분됐다. 그는 제 등 뒤에 있는 버러지에게로 가고 있었다.
“선배 지금 저 새끼한테 가는 거예요?”
옆을 그대로 지나치려는 해영에게 다급하게 소리치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가지 마요.”
그 새끼들이 선배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제가 보지 못한 곳에서 얼마나 휘둘러 댔을지 생각하면 눈이 뒤집히고 피가 솟는다. 저를 두고 지금 그런 새끼한테 가겠다고.
‘네가 뭘 알아.’
해영은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을 되풀이했다. 눈가가 시큰했다. 그때 그 말을 하고 뒤돌아 멀어지던 해영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직접 겪어 보지도 못한 것들을 너무 쉽게 뱉었다는 후회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슴께를 쿡 찌르는 말 한마디를 던져 놓고 해영이 그대로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는 곧 손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멀어졌다.
자신에게 보여 준 적 없는 가장 환하고 예쁜 웃음을 달고서 뽈뽈거리며 뛰어간다. 그리고 망할 놈 품 안에 폭 안겨 이쪽을 보며 말했다.
‘너 같은 건 다신 보고 싶지 않아.’
차건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 돼….”
꿈이구나. 어떻게 이렇게 좆같은 꿈을 꿀 수가 있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등이 서늘한 게 식은땀까지 흘린 모양이었다.
“너무 끔찍해….”
건우는 악몽의 후유증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협탁 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새벽 4시.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눈 지 며칠이 지나도록 해영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시간을 줘….’
그날 해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시간을 더 달라는 거야.
‘싫어요.’
‘떼, 떼쓰지 마….’
‘싫다고요.’
필사적으로 붙잡는 저를 해영은 기어이 버리고 갔다. 성인이라면 응당 참을성과 인내심을 갖춰야 하는 법이라고 타이르고서 말이다. 따라오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던지고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잠이 들고 악몽을 꿨다. 그러다 잠시 본가에 들른 둘째 누나 발에 차여 식탁에 억지로 앉아 탄수화물을 씹어 넘기니 그제야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화로 변모했다.
해영에게 화가 난다기보단 상황에 그랬다.
일 년 만에 다시 마주한 해영은 여전히 이놈 저놈한테 질질 끌려다니고 있지, 웃는 얼굴 한번 보겠다고 예쁜 카페 맛있는 식당 찾아다니면서 사다 먹였더니 장기 매매꾼으로 오해나 받고. 주변에 얼쩡대는 놈들 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또 어디서 기어 나온 건지. 겨우 밥 같이 먹는 사이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좀 와라, 이제.
지금의 위치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쏟아내고도 유예 처분을 받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락을 얌전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차건우는 힘없는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도저히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의자에 몸을 축 늘어트리니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물음이 쏟아졌다.
“형 어디 아프세요?”
“어, 진짜. 상태 너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새벽에 그렇게 깨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들라 치면, 또 비슷한 꿈을 꿀 것 같은 두려움에 수면 욕구가 확 달아났다.
“제대로 못 자서 그래.”
같은 과 동생 한 명이 의아하다는 듯 말을 보탰다.
“저번에 밤새워서 과제 하셨을 때도 멀쩡하셨는데.”
“맞아. 오티 때도 혼자 쌩쌩하셨는데.”
밤만 새운 거라면 그랬겠지. 꿈속에서 해영이 자신을 보던 눈빛과 말투가 새벽 내내 잔상처럼 남아 괴롭혀댔다.
도저히 대답할 기운도 나지 않아 손을 휘적이며 신경 쓰지 말라는 의사를 내보였다.
수업 중에 몰래 잠이라도 잘 생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찾아온 건데 과대 이규진이 다가와 찰싹 붙어 앉았다. 이 녀석이 옆에 있으면 잠을 자긴 글렀다고 보면 된다.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도 큰 놈이었다.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규진이 뜬금없이 다 지난 이야기를 꺼내 물었다.
“형 축제 참여 안 하신다고 하셨죠?”
“어. 귀찮아.”
이번 축제에서 경영학과는 간단하게 안주 종류를 판매하는 부스를 운영할 예정이었다. 과마다 부스를 하나씩만 준비하기 때문에 지원자만 참여해도 일손이 모자라지 않았다. 참여를 원하지 않는 사람까지 억지로 끌려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건우는 행사나 축제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라 진작부터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또 물어보는 이유가 뭐지.
“축제 날 바쁘시겠죠?”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이었다. 말을 똑바로 하라고 사납게 따라오는 시선에 과대가 답지 않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날 부스 맡아 주기로 했던 애 하나가 갑자기 휴학했거든요. 그래서 한 사람이 모자란데 선배들이 형 데려오라고…. 안 하실 거죠…?”
이규진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건우의 눈치를 살피며 축제 참여 명단이 적힌 종이 끄트머리를 구겨댔다. 해영이 눈치 보는 건 귀엽고 안쓰러운데 딴 놈은 영.
“안 해.”
“네에….”
단호한 대답에 규진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규진은 다행스럽게도 이 자리에서 수업까지 들을 생각은 아니었던 건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때 그가 들고 있던 종이에 적힌 이름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종이로 손을 뻗었다. 규진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넘겨주었다.
[3학년 서해영]
“3, 4학년은 참여 안 한다며.”
건우가 손가락으로 유일한 3학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3, 4학년은 수업과 취업 준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축제 준비는 1, 2학년끼리 하게 될 거라고 들었다.
“아. 작년 축제가 엄청 엉망으로 끝나서 2학년이 주도하는 거 못 믿겠다고 3, 4학년 중에서도 시간 있는 사람 가서 도와주라고 했나 봐요. 2학년 선배들도 부스에는 안 오세요. 현장은 저희랑 여기 3학년 선배 한 분이 맡을 것 같은데 한 분밖에 지원을 안 하신 것 보니까, 음. 등 떠밀리신 건가.”
알 만하네. 차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제 욕심 같아서는 당장 이름을 적고 축제 당일 해영이 아무것도 못 하도록 의자에 꽁꽁 묶어 놓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앉혀 놓지 않으면 그 호구 같은 성격상 누구보다 열심히, 힘들게 일을 해댈 게 뻔하다.
그렇지만 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제가 참여를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제가 옆에 있는 걸 더 버거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새벽의 불안이 다시 덮쳐오는 것 같았다.
잠시간 고민하던 건우는 규진 앞에 놓인 검은색 펜을 가져다 명단 맨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아무리 그래도 후배들 사이에서 낑낑대는 꼴은 못 보지.
“와, 형! 진짜 도와주시는 거예요?”
“무를까.”
“아니요!”
힘차게 대답한 그는 자신이 2학년 선배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와, 또 한 소리 들을 뻔한 걸 형이 살려 주셨다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4교시 내리 이어진 수업을 겨우 버텼다. 중간에 화장실에서 마주한 제 몰골은 오전에 애들이 했던 말처럼 심각했다.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눈동자에 총기가 없고 낯빛이 어두웠다. 입맛도 없어서 점심시간이 됐음에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학과 동생들이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터덜터덜 경영관을 나섰다.
“형,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니.”
아무리 맛있는 걸 앞에 가져다 놓아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밥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해영이 필요했다. 양옆에서 끈질기게 팔을 붙들고 귀찮게 구는 탓에 억지로 끌려 나왔을 뿐이다.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꽤 오래 의논하더니 자주 가는 식당 중 하나를 골라 건우에게 의사를 물었다. 어딜 가든 상관없었기에 건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 형! 그 소문 진짜예요?”
학생 식당 옆을 지나던 도중 앞서가던 동생 한 놈이 펄쩍 뛰며 물었다.
“무슨 소문.”
“형이 선배들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뭐랬더라. 협박했다고? 막 분위기도 엄청 험악했다는 소문 돌아요.”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애가 질문한 놈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며 말했다.
“야, 진짜겠냐?”
“맞아. 건우 형 말도 안 되는 소문 도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그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건우는 웃지 않았다. 자신과 직접 관련된 소문임에도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질문을 꺼냈던 놈이 말했다.
“형 맨날 그렇게 인상 쓰고 무섭게 다니니까 그런 소문 생기는 거잖아요. 좀 웃으면서 다니세요.”
그의 장난기 섞인 충고에도 차건우는 듣는 둥 마는 둥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돌연 걸음을 멈추고 학생 식당 입구 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내 어디 하나 고장 난 사람처럼 있던 그가 시선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씨익 웃었다.
“미안. 너네끼리 먹어라.”
“네?”
건우는 등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것도 뒤로한 채, 거침없이 학생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영은 무인 식권 발매기에서 한식 하나를 결제했다. 학생 식당에서 혼자 먹는 밥은 지독히도 맛이 없었다. 예전에는 이게 일상이었는데. 예보에 없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 온 것처럼, 갑작스럽게 다가온 낯선 온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질척거렸다.
영원히 옆에 두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맛보지 않는 게 낫다. 차건우 없이 지내보려고, 시간을 달라고 한 지 며칠이 지났다. 예상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상실감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괴로운 감정이었다.
먹긴 해야겠지. 식도 입구에 턱 걸려 넘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밥 알갱이를 겨우 퍼먹고 있는데 멀리서 끈덕지게 시선 하나가 따라붙었다. 요즘 같은 때에도 혼자 먹는 사람을 별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무시하고 싶었지만 신경이 쓰였다. 물을 먹는 척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차건우였다.
“아, 놀라라….”
건우는 꽤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혼자 앉아 삼각 김밥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 역시 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먹는다기보다는 억지로 쑤셔 넣고 있었다. 돌이라도 씹는 표정이었다.
민망하지도 않은가. 분명히 눈을 마주쳤는데도 꿋꿋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얼굴에 뭐 묻었나. 휴대폰을 들어 검은 화면에 비치는 얼굴을 꼼꼼히 확인했지만, 평소와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너무 빤히 보니 밥을 먹기가 힘들었다. 해영은 왼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결국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반도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생 식당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다음 날도 차건우는 같은 자리에서 울상인 얼굴을 하고 초코바를 뜯어 먹고 있었고, 며칠 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좀 핼쑥해진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야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떴지만, 그것도 하루뿐이었다. 그 뒤로는 끝까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 마주하는 낯선 것들뿐이었으나,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익숙해졌다.
이번 역시 그랬다.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중간중간 시선이 맞닿으니 같이 앉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도 밥을 깨끗이 비운 해영이 식판을 들고 몸을 일으켜 식당을 벗어났다.
***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곳에 정신을 쏟는 게 얼마나 예의 없는 행동인지 해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옆얼굴에 뚫어져라 따라붙는 시선에도 눈앞의 교수에게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너 성적은 좋은데 영어는 좀 더 올려야겠다. 해영이 네가 서정기업 관심 있다니까 해 주는 얘긴데, 내가 또 서정 최종까지 갔었잖아. 교수 안 했으면 지금 거기에서 뭐라도 달고 있었을 거다.”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의 젊은 교수는 해영의 질문 하나에 대학 시절 약력까지 읊을 기세로 열정을 보였다. 제 질문으로 시작된 조언이니 귀담아듣는 게 당연한데도 해영은 도무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경 쓰여. 차건우가 계단 앞에서 도끼눈을 한 채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영은 가는 곳마다 건우를 마주쳤다. 학생 식당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복도에서 뜬금없이 보이거나, 등하굣길에도 종종 나타나고, 학교 근처 편의점이나 카페를 갈 때에도 보였다. 딱히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쌍한 표정을 지어서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걸음걸이에도 힘이 없었고 심한 날에는 아파 보이기까지 해서 눈길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 전까진 비 오는 날 밖에서 쓸쓸하게 떠도는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눈이었다면, 지금의 쇠꼬챙이를 불에 달궈 꽂아버릴 것 같은 매서운 눈이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또 물어보고. 어깨 좀 펴고. 어? 할 수 있어, 인마.”
“네….”
교수는 격려한답시고 해영의 팔뚝을 두어 대 친 후 사라졌다. 얼얼했다. 해영이 손을 올려 맞은 곳을 살살 문질렀다.
2층이라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빠른데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여전히 그 앞을 버티고 서 있는 건우를 보고 생각하다, 작게 반발심이 일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피해.
해영이 어금니를 꼭 물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자리를 뜨길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바닥에 본드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서서 제가 걸어가는 대로 끈질기게 노려볼 뿐이었다.
제 쪽만 보고 있어서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그의 옆에 서 있던 두 명도 일행인 듯 보였다. 그들은 대꾸 없는 차건우에게 가벼운 장난을 치고 있었다. 밥은 혼자 먹어도 어울리는 친구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친구들의 실없는 말들이 똑똑히 들릴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해영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아까 그 새끼 교수 앞에서 빌빌대는 거 봤냐.”
“어. 존나 재수 없어. 똥꼬 빨아서 학점 잘 받으면 좋나. 남한테 잘 보이려고 애 쓰는 새끼들 존나 안쓰럽다. 왜 그러고 사냐.”
가슴에서 커다란 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야.”
“네?”
“입 좀 다물어.”
차건우가 낮게 일렀다.
‘서해영. 이번엔 또 누구 뒤 빨아 주고 다니냐?’
고등학생 때, 언젠가 들었던 말이 겹쳐진다. 지금 저들이 하는 이야기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다. 분명 알고 있는데. 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른 지나가자.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던 중 어깨가 뒤에서 거칠게 붙잡혔다. 놀라 눈을 뜨자 앞으로 내민 발 하나가 공중에서 위태롭게 멈춰 있었다.
“계단이요.”
“아….”
“바닥 좀, 잘 보고.”
차건우가 잇새로 짓이기듯 말을 내뱉더니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곤 곧 날선 것들을 거둬내고 익숙한 얼굴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다니세요.”
“응….”
그의 앞에서 자신은 늘 한심했다. 챙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 손이 많이 가는 사람. 대답을 듣고도 어깨를 놓아주지 않은 차건우가 해영이 걸어 온 방향으로 턱짓하며 물었다.
“아까 그 새, 사람 누구예요?”
“교, 교수님인데….”
“아.”
그의 시선이 아까 교수가 두드렸던 팔뚝으로 옮겨졌다.
“선배.”
빨리 가고 싶은데 왜 또 부르지. 몸을 살살 앞으로 당겨 봐도 어깨는 여전히 그의 손아귀 안이었다.
“아직도 생각 중인 거죠.”
해영이 입을 꾹 다물고 버티자,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우가 말을 덧붙였다.
“저 성격 급해요.”
그가 손을 내려 아까의 저릿한 열기가 뭉근하게 남은 팔뚝까지 스치듯 쓸어 내더니 완전히 떼어냈다.
“참는 거 잘 못한다고요.”
조금 전의 매서웠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더니 조심히 들어가라며 인사했다. 해영이 그대로 뒤를 돌아 계단을 세 개쯤 내려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건우야, 하고 불렀다. 차건우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너, 그…. 밥 왜 혼자 먹어?”
“선배 아니면 누가 저 같은 거랑 밥을 먹어요.”
“…….”
집에 돌아온 해영은 한 시간째 휴대폰을 들고 같은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였다. 익명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여기에 글을 보내면 올려 준다는 얘기를 지나가다 들은 적이 있었다. 오지랖일까 한참을 망설였지만 역시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해영은 페이지에 올려진 글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쓰는 거구나.
건우에 관한 헛소문을 처음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저 역시 그의 겉모습이나 검증되지 않은 소문 몇 마디로 멋대로 판단했다. 지금은 그 소문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걸 안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와 대화를 나눠 본다면, 보기와는 달리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해영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경영 1학년 ㅊㄱㅇ 무섭게 생겼지만 착한 친구입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익명으로 부탁드립니다!]
***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셋째 누나, 차윤서였다. 건우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야.”
나이를 먹어도 무례한 건 고쳐지질 않나 보다. 저런 사람이 밖에서는 수재며 엘리트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게 기가 찼다.
“뭐.”
“이거 네 얘기 아니냐? 밖에서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침대 위로 던져진 휴대폰에 학교 대나무숲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누가 봐도 자신의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다. 한 자 한 자 눈으로 읽어 가던 건우는 참지 못하고 액정 위로 이마를 꾹 눌렀다. 아, 돌겠다.
이런 걸 올릴 사람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입술 새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미친 거냐?”
여기 좀 봐 달라고 졸졸 쫓아다녔더니, 그게 못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아직 그의 눈 밖에 나진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걱정시키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질척거릴 수밖에. 그저 그런 스쳐 지나가는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조교 하는 애 내 친군 거 알지. 너 수업 시간에 기어 나와서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던데. 뭘 하고 다니든 알 바 아니지만 공부 똑바로 해. 행실 그따위로 하고 성적까지 거지같이 나오면 죽여 버릴라니까.”
옆에서 뭐라고 짖든, 차건우는 해영이 고심해서 적었을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훑기 바빴다.
“아빠가 쉬엄쉬엄하랬거든.”
“이 새끼가.”
차윤서가 손을 들어 건우의 팔뚝이며 다리며 이곳저곳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차건우는 한 팔로 그 요란스러운 손찌검을 막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쥐고 실실거렸다.
“…정신 나간 놈 패 봤자 내 손만 아프지. 내놔.”
손바닥에서 휴대폰이 쏙 빠지고 곧바로 문이 닫혔다. 건우는 침대에 머리를 꾹 눌렀다.
아. 보고 싶네.
***
분명히 글은 잘 올라갔는데. 해영은 며칠째 시간이 날 때마다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제보한 글이 문제없이 올라갔음에도 건우가 여전히 혼자 밥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보한 사람에게만 글이 보이는 건지 지식아웃에 물어봤지만 그런 기능이 어디 있냐며 바보 취급을 하는 답변밖에 받지 못했다.
내용이 이상한가 싶어 틈틈이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글은 흠 잡을 데 없었다. 짧고 간결하게 핵심만 짚은 데다, 그 안에 교훈까지 들어가 있는 완벽한 글이었다.
해영은 심란한 얼굴로 식당 건물 옆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유리창 너머로 식당 안에 또 혼자 앉아 있는 건우가 보였다. 가던 길도 잊고 뭐에 홀린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옆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진한 눈썹과 올곧은 콧대. 그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 말아 쥔 손에는 파란 이온 음료 병이 엉망으로 찌그러진 채 쥐여져 있었다. 그는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모습조차 영화 같았다. 느와르물 같은 거. 험악할 뿐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척 잘생긴 외모였다. 그에 비해 어두운 창문에 비춰진 제 모습은 햇살 가득한 바깥에 서 있는데도 볼품이 없었다.
그렇게 관음하듯 후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훔쳐보고 있는데,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차건우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스프링이 튕겨져 나가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식당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해영이 있는 바깥으로 돌아 나왔다.
“어…. 왜 이, 이쪽으로 오지.”
지금 그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 것이다. 도망가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뭇대는 사이 빠르게 다가온 그가 제 앞을 막아섰다.
“선배님.”
며칠 만에 들은 목소리는 낮게 갈라지고 힘이 없었다. 제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속이 상했다.
“어?”
“얘기 좀 들어주세요.”
축 처진 커다란 어깨는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한숨을 쉬어 대는 것처럼 크게 들썩였다. 계단에서 잠깐 마주 보았을 땐 실내라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확실히 수척해져서 눈 밑도 칙칙하게 물들어 있었다. 밥을 제대로 못 먹었으니 얼굴이 멀쩡할 리가 없지.
“부탁드려요.”
“아, 알았으니까 여기서는 우, 울지 마….”
얼굴을 관찰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더니 건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해영은 놀라 건우의 팔을 붙들고 사람이 없는 건물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할 이야기가 뭐, 뭔데?”
건물 그림자 안까지 들어가 건우를 벽 쪽에 세우고 나서야 팔을 놓은 해영이 물었다. 차건우는 돌연 허리를 푹 숙여 해영의 얼굴 바로 앞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눈을 맞추다가,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물리고 몸을 도로 세웠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왔다 간 얼굴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 해영이 눈동자를 굴리며 타박했다.
“노, 놀랐잖아.”
“선배 살찌셨어요.”
“어?”
“볼이 더 통통해졌어요.”
저는 밥도 잘 안 넘어가던데. 차건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목소리로 꿍얼댔다. 자기가 살이 찐 것도 아니면서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보기 흉하다는 걸까. 해영은 체중이 크게 왔다 갔다 하는 체질은 아니라서 살이 찌고 빠지는 데 크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단정하지 않거나, 옷차림이 깔끔하지 못한 것에 신경을 썼으면 썼지.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밥을 세 끼씩 꼬박 챙겨 먹기는 했다. 특히 학교에서 먹는 점심을 많이 챙겼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대놓고 앞에서 살이 쪘다는 말을 들으니까 얼굴을 내보이기가 불편했다. 해영은 한 손을 올려 뺨을 매만지는 척 가리고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이, 이상한 말 그만하고.”
이마 위로 진득하게 떨어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건우는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감정을 환기하는 것처럼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러고 나서도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입술을 벙긋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도 선배가 다른 사람 부탁 다 들어주고 다닌 거 이해 못 해요.”
그의 말끝이 거칠었다. 가슴 위로 작고 날카로운 바늘이 툭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는 바늘도 있고, 톡 치고 떨어지는 바늘도 있고. 언제 찔릴지 몰라 계속 마음 졸여야 하는 서늘하고 불안한 기분.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일부러 찾아 나오기까지 한 건가.
“알고 있어….”
“근데요.”
건우의 눈 사이가 힘이 들어간 듯 얕게 찌푸려지고, 흉곽이 크게 솟았다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는 말뿐 아니라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몸짓도, 숨도, 어느 하나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들고 모두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왜 그랬는지는 알고 싶어요. 그거로는 부족해요?”
이해할 수 없지만 알고 싶다고.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제 옆에 있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난생처음 갖는 의문들이 입 안에서 앞다투어 입술 안쪽을 두드려댔다.
“부족해요?”
해영은 생각이 말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성질이 급한 건우는 해영이 말을 고르는 시간을 얌전히 기다리지 못했다.
“선배 없으니까 밥도 제대로 못 먹겠어요. 아무도 저랑 밥 안 먹어 줘요.”
차건우는 소중한 것이라도 뺏긴 아이처럼, 초조함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잇고, 또 이었다.
“저 버리지 마세요.”
해영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 들였던 하잘것없는 취급을 자처하는 그는, 불편하다고 밀어 내고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워 도망쳐도 끊임없이 밀려 들어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 앞에서 내쳐질까 눈치를 보며 서 있는 이 사람이, 아무도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제 공간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무엇을 목적으로 이러는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겁쟁이인 자신은 무수한 낯섦과 새로운 감각에 등을 돌리고 초라한 익숙함을 택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쫓아와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구걸했다.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응.”
이제 아무래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