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조사
해영은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물밀듯 밀려 나가는 인파 사이에 끼어 밖으로 나왔다.
“선배님.”
문밖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해영을 불렀다. 이제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겠다고 거듭 이야기했으나, 건우는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따라와 강의실 앞에서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가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지금처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수업 중에도 종종 메시지를 보냈다. 읽지 않으면 조용한데, 읽고 답장을 안 할 경우가 문제였다. 메시지를 기본 서너 개씩 추가로 보내왔다. 그리고 해영은 메시지 내용이 궁금해 새 알람 표시를 가만 놔두지 못했다. 악순환이었다.
문득 티비에 자주 나오는 강아지 행동 교정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했더니 거기에 나오는 몇몇 강아지의 증상과 비슷했다.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사생활이란 게 없었다. 해영이 그동안 열심히 피해 다닌 게 원인이니 그를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단지 누군가와 가까운 관계를 가져 본 경험이 없는 해영은 어떻게 해야 건우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지 몰라 답답했다.
그래도 하나 알아낸 건 있었다. 예전에 건우가 제안하던 것들을 먼저 물었을 때 눈에 띄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뭐 먹고 싶어?”
차건우가 눈을 살짝 키우다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었다. 역시 좋아하네.
“선배 먹고 싶은 거요.”
그는 어제와 똑같이 답했다. 여기서 ‘나도 네가 먹고 싶은 거 먹고 싶어.’라고 했다가는 영원히 점심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논쟁을 벌이며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해영은 아침에 정문에서 받았던 오픈 기념 전단지를 떠올렸다.
“그럼 음…. 저기 아래에 피자집 새로 생겼던데. 피자 괜찮아?”
“네. 좋아요.”
매번 학식으로 때우던 해영에게는 메뉴를 정하는 간단한 일도 꽤나 어려워서, 나눠 주는 전단지나 SNS에 뜨는 대학가 맛집 정보 등을 부지런히 수집해야 했다. 점심 메뉴가 다양해진 것은 좋았지만 그만큼 수고스러웠다.
새로 생긴 피자집은 화덕 피자 전문점이었다. 내부는 짙은 원목 가구들과 노란 조명, 빈티지한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개방된 주방 안의 적벽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화덕이 시선을 끌었다. 실패 확률이 적은 메뉴와 보기 좋은 인테리어에도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해영은 후회했다. 가게 안의 테이블이 대학생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꼭 데이트하는 것 같아요.”
건우가 쿠션감이 좋은 의자에 앉자마자 들뜬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커플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게 쑥스러웠는데, 굳이 입 밖으로 꺼내다니. 해영이 눈을 잘게 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건우는 해영이 정방향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돌려놓으며 물었다.
“뭐 드실 거예요?”
메뉴판은 사진도, 설명도 없이 메뉴 이름만 나열되어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대충 ‘베스트’라고 적혀 있는 메뉴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이거.”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뉴판을 한 장 넘겼다.
“고기랑 해산물 중에 뭐가 더 좋아요?”
“해산물.”
그는 해영이 고른 마르게리타 피자와 함께 오일 파스타와 데리야끼 필라프, 해산물 토마토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초코바를 벽돌처럼 뜯어 먹고 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건지, 건우는 얼굴색과 먹성을 빠르게 회복했다.
필라프와 파스타 두 개가 먼저 나오고, 곧이어 얇고 커다란 씬피자가 테이블 가운데에 놓였다. 건우는 피자를 한 조각 들어 올려 해영의 빈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아, 선배. 축제 참여하시죠?”
“어? 응…. 어떻게 알았어?”
3학년 중에서 혼자 등 떠밀리듯 참여하게 된 축제였다. 바보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저도 하기로 했거든요.”
건우가 눈을 내리깔고 뺨을 붉히며 답했다.
“어, 언제? 이름 못 봤는데….”
“며칠 전에요. 거기 명단에 선배 이름 쓰여 있는 거 봤어요.”
그러고 보니 축제 참여 인원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 추가 인원을 모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본 것도 같았다. 그 자리에 건우가 지원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터라 스치듯 넘긴 대화였다.
“혹시 저랑 같이 하는 거 싫으세요?”
“싫을 게 뭐가 있어…. 그냥, 지금 처음 안 거라 놀라서.”
싫다기보다는 지원한 이유가 궁금했다. 축제 때도 꼭 붙어서 감시하려고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저 하나 감시한다고 고된 일을 사서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웃으며 넘겼겠지만, 요 며칠 하는 행동들을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결정적으로 해영이 봐온 건우는 축제를 즐길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이 추측에 힘을 실었다. 그가 꼬물거리면서 축제 준비를 하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는 좋아요.”
“응?”
“선배님이랑 같이 하는 거요. 좋아요.”
의심은 확신이 되었지만 생각만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해영이 가방에 팔을 끼워 넣는 사이, 건우가 몸을 일으켰다. 해영이 한쪽 팔만 넣은 상태로 그의 소매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내, 내가 낼래.”
차건우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도 사 주셨잖아요.”
“안 좋은 말 해서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내가 내게 해 줘.”
건우는 그제야 굳게 힘주고 있던 얼굴에 힘을 풀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줄곧 고집을 부려왔던 일을 접어주는 게, 그때의 말들이 정말 상처가 되어서인지 자신의 불편함을 덜어 주기 위한 배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날것으로 화를 내 본 적도 없었고, 자신을 내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해영은 카운터에 서서 카드를 내밀었다. 아직도 많은 덩어리가 속에 남아 있었지만, 아주 조금은 덜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선배 오후 수업 있으시죠. 몇 시 시작이에요?”
“음, 3시 시작이니까 두 시간 정도 남았네.”
“저는 이제 수업 없어서 시간 많아요.”
건우가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해영을 빤히 보았다.
“부럽다….”
이게 아닌가. 건우의 얼굴이 웃음을 참느라 옅게 일그러졌다. 그가 원하는 말. 그가 항상 먼저 제안하던 것들.
“카, 카페 갈래?”
그제야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환하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용기 내 권한 말에 이토록 기분 좋게 웃어 주니 해영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건우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트북 지금 가지고 있지? 같이 과제 하자.”
건우는 카페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어떤 과제인지부터 물어 왔다. 무서운 얼굴을 한 걸 보니 또 다른 사람의 과제를 대신 해 주거나, 조별 과제를 떠맡아서 하진 않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해영의 개인 과제였다. 그 대답을 들은 후에야 그는 안심한 얼굴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건우는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다리를 달달 떨다가 진동벨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음료를 가지고 왔다. 얼음이 가득 담긴 아메리카노 한 잔과 라테 한 잔. 그는 아메리카노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휘휘 젓고 단 세 모금 만에 음료를 비웠다.
그러고는 다시 키보드를 조금 두드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과제를 이어 가던 건우는 한계에 다다랐는지 음료와 함께 가져온 냅킨 한 장을 가져가 노트북 뒤에서 조물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학교 선배라고 해도 공부를 강요할 수는 없으니 뭐라고 하진 못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저걸로 뭘 하는 거지. 해영은 노트북 덮개 양옆으로 감질나게 보이는 냅킨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 내밀어진 것은 다름 아닌 종이학이었다. 냅킨이라 흐물흐물하긴 해도 한두 번 접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저 종이학 잘 접죠.”
“응…. 그러네.”
“선물이에요. 가지세요.”
그는 흐물대는 학을 제 노트북 키보드 위에 올려 주었다. 별로 갖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열심히 접어 준 걸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고마워….”
제 말에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났을까.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담,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건우는 초조한 얼굴로 카페 바깥으로 나갔다. 화장실은 카페 안에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온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화장실을 간다고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과제 자료를 찾고 있는데, 건우의 얼음 컵 아래 물이 가득 고인 게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노트북이 있는 쪽으로 흐를 것 같았다. 안 되는데. 닦을 만한 것을 찾았으나, 음료와 함께 받아온 냅킨은 이미 종이학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해영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셀프 바에서 새 냅킨 몇 장을 가져와 컵 아래에 깔았다.
“됐다. 어…?”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는 건우가 화면에 띄워 둔 과제가 보였다. 함부로 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믿을 수가 없는 화면에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계속 그곳으로 향했다.
“제대로 쓴 게 이, 이름밖에 없어….”
마우스로 손이 뻗어 나가는 것을 겨우 참으며 화면에 띄워진 부분만 눈으로 훑었다. 전공 수업의 리포트 중 하나라 해영도 흐릿하게나마 제출했던 기억이 있는 과제였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해영이 입을 반쯤 벌리고 처참한 과제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중, 카페 입구 쪽에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건우가 개운한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해영은 그가 보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건우는 오는 길에 카운터에서 먹음직스러운 초코케이크를 사서 여유롭게 들고 왔다.
담배를 피우고 온 건우는 더 이상 다리를 떨지 않았다. 해영에게 쓸데없이 말을 걸지도 않았다. 집중하는 얼굴로 화면을 뚫어져라 보며 부지런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저 얼굴로 그런… 걸 쓰고 있다는 거지.
차라리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같은 학과 선배가 앞에 있으니 막히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도 되는데.
“과제 어려운 거 없어…?”
“네. 거의 다 했어요. 선배랑 같이하니까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해영의 속만 더 타들어 갔다.
“정말로 없어…?”
다시 한번 되묻자 건우의 얼굴이 굳었다. 노트북 액정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해영과 눈을 맞췄다. 무슨 의도로 물은 건지 가늠하는 듯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언짢은 표정으로 답했다.
“선배. 저 선배한테 이런 도움 받으려고 붙어 있는 거 아니에요. 혼자서도 잘하고 있으니까 케이크나 드세요.”
이어지는 키보드 소리는 해영의 속도 모르고 경쾌하기만 했다.
***
해영은 노트북을 켜고 책상 서랍 구석에 있던 오래된 외장하드와 USB를 꺼내 연결했다. 오늘은 수업을 마치고 건우와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중간고사가 가까워질수록 해영의 마음도 날로 초조해졌다. 카페에서 봤던 건우의 과제가 자꾸 생각나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하자, 건우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랑 이거랑. 어, 또….”
1학년 1학기 폴더를 열어 중간고사 대비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USB에 옮겨 담았다. 이런 거라도 도와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해영은 안전하게 분리한 검은색 USB를 보물처럼 손에 꼭 쥐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자 복도 끝에서 건우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인지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도 금세 앞까지 다다랐다.
“선배.”
그의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도서관 음료 반입 금지인데….”
“아, 깜빡했다. 다 마시고 들어가요.”
말은 깜빡했다고 하면서 입은 헤벌쭉 신이 났다. 절대 깜빡한 얼굴이 아니었다. 밉지 않은 꾀에 해영은 눈을 홉떴다. 둘은 일 층으로 내려가 학술정보관 건물 옆 대리석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건우는 라테를 해영에게 건네주고, 같이 사 온 스트룹 와플을 종이팩에서 꺼내 껍질을 깐 후 해영에게 내밀었다. 해영은 라테를 한 모금 머금고 계피 향 가득한 스트룹 와플을 쫀득하게 베어 물었다.
“아, 맞다. 이거.”
해영이 라테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건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나 일 학년 일 학기 중간고사 때 정리했던 거….”
말을 하던 도중, 급격하게 가라앉은 주변 공기에 의아함을 느낀 해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건우의 표정을 확인하자마자 말끝을 흐렸다. 그는 USB를 두 동강이라도 낼 기세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안 받을래요.”
“내, 내가 너 주고 싶어서 주는 건데도?”
그 말을 들은 건우가 주먹을 꼭 쥐었다. 틈을 발견한 해영이 눈을 번뜩이더니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담아 온 건데….”
차건우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마지못해 해영의 손에 있던 것을 집어 갔다. 해영의 뺨에 웃음이 번졌다. 후배 앞에서 이런 거로 기뻐하는 걸 들키기 싫어서 바로 아랫입술을 꾹 물어 참았다. 건우는 USB를 주머니 깊숙이 넣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이런 거 주지 마세요.”
“왜?”
“아깝잖아요.”
자신에게는 이제 필요도 없는 건데 뭐가 아깝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 더 물었다가는 또 무섭게 노려볼 것 같아서 관두었다.
건우는 커피를 다 마신 후에도 한참을 미적거렸다. 텅 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빨대를 잘근잘근 물어 대다가, 스트룹 와플 포장지로 편지 모양을 접어 해영의 주머니에 쏙 넣었다. 쓰레기를 주다니. 해영도 똑같이 포장지를 접어 그의 주머니에 꽂아 넣자 건우는 뭐가 재밌는지 실실거렸다.
“공부하기 싫어?”
그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선배는 공부하는 게 좋아요?”
“음, 그런 거 같은데….”
“왜요?”
처음에는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이었다. 아버지에게 쓸모 있는 자식이 되려고, 혹은 빚을 갚으려고. 이유는 뭐가 됐건 상관없었다.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다 깨달았다.
“노력하는 만큼 돌려주니까….”
세상에는 주는 만큼 되돌아오는 게 생각보다 별로 없었고, 공부는 그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건우와 눈이 마주치자, 해영이 어색하게 소리 내 웃었다. 줄곧 생각해오던 건데도 입 밖으로 뱉는 건 또 달라서 부끄러웠다. 건우는 따라 웃지 않았다. 해영이 가자고 손짓을 한 후에야 그는 시선을 거두고 따라 일어났다.
해영은 노트북 너머로 집중하는 눈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건우는 화면과 노트를 번갈아 보면서 부지런히 필기하고 있었다. 제가 건네준 자료를 받아 적는 것 같았다. 집중하느라 인상이 있는 대로 구겨져서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저게 일부러 짓는 표정이 아니라는 걸 안다. 집중하거나 가끔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얼굴이다. 후자일 땐 아직도 조금 무섭지만,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진 않으니 전처럼 도망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해영은 노란색 메모지 한 장을 뜯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돼’라고 적은 뒤 그에게 슥 내밀었다. 한창 집중하던 건우가 메모를 힐끔대다 입 모양으로 네, 하고서 메모지를 가져가 자기 노트 맨 뒤에 펼쳐 꽂아 두었다.
답장 안 해 주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아이들이 수업 중 몰래 필담을 나누고 하던 게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이제라도 비슷하게나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해영은 아쉬운 마음에 입을 비죽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건우가 필기하던 노트를 내밀며 해영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물었다.
“선배. SBU요. 이 정도로 정리하면 돼요?”
드디어 첫 질문이다. 해영은 조금 들뜬 얼굴로 그가 내민 노트를 살펴보았다. 글씨 엄청 예쁘네.
“응, 잘 썼는데 하나만 더 쓰면 되겠다…. 잠깐만.”
마주 보고 앉아 필기해 주려니 영 불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자리에 소리를 죽이고 앉았다. 그가 펼쳐 놓은 전공 책을 들여다보며 노트에 적으려다가 멈칫했다. 남의 노트에 함부로 적어도 되나. 심지어 제 글씨는 건우의 것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해영은 노트를 건우의 쪽으로 도로 밀어 주고서 말했다.
“독자적이고 종합적인 전략 계획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거까지.”
건우는 작은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굳어 있었다. 대답을 하지도, 펜을 들지도 않았다. 해영이 그의 팔을 검지로 콕콕 찌르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건우야. 내가 적어도 돼?”
“아, 네.”
그가 공책에 필기한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펜을 해영에게 내밀었다. 해영은 노트를 망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글자를 적었다. 예쁘게 써 보겠다고 긴장을 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울퉁불퉁 이상한 글씨가 나왔다.
거의 다 적었을 때, 책상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건우의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페에서도 다리를 떨더니. 건우는 안 좋은 습관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의 반이 가려지도록 턱을 괴고 해영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게 불편했나. 해영은 남은 글자를 노트에 꾹꾹 눌러 적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아래에서 무언가가 걸렸다.
건우가 해영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반대쪽을 돌아본 채였다.
“놔줘….”
도서관이라 크게 말할 수도 없어서 작게 타일렀다. 분명 들은 것 같은데도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당기니 그제야 툭 하고 옷이 빠졌다. 장난친 건가.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을 때 싫어하는 티를 내기에 걱정했으나, 건우는 도서관 마감 시간까지 열심히 따라와 주었다. 어둑해진 길을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해영의 오피스텔 앞이었다.
“선배, 오늘 이것저것 봐주셔서 감사해요.”
“응? 아, 아니야. 나도 어차피 해야 했어서.”
고마운 건 오히려 해영이었다. 누구와 같이 공부를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시험 기간에도 항상 혼자였던 해영은, 주변에 친구들과 같이 모여 공부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티는 안 냈지만 늘 궁금했다. 같이 하면 공부가 더 재밌을까? 아니면 떠드느라 집중이 잘 안 될까?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건우와 같이 하는 공부는 좋았다. 누가 앞에 있으니 딴짓도 덜 하게 되고, 중간에 같이 밥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또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건우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일도 같이 해요.”
얼굴에 티가 나기라도 한 걸까. 지체 없이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
[저 조금 늦게 끝날 것 같아요.]
[비오니까 나오지 말고 안에 계세요.]
해영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강의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꽤 굵은 빗줄기가 창문 위로 요란하게 쏟아졌다. 아침에 분명 강수 확률이 이십 퍼센트라고 했는데.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비가 오는 횟수가 잦아지고, 늘 그랬듯 일기 예보는 자주 틀렸다. 사물함에 작은 우산이라도 하나 놓든지 해야겠다. 해영은 책상 위로 늘어진 짐을 마저 가방에 넣으며 생각했다.
건우의 강의실은 반대편 건물이었다. 해영은 일 층으로 내려가 통유리 창문을 통해 반대쪽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뛰어가면 어느 정도 걸릴지 가늠해 보았다. 뛰어서 몇 초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같이 귀한 날에 그럴 수는 없었다. 건우보다 수업이 빨리 끝난 날이라니. 먼저 가서 기다려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할 게 없어서, 심심해서 해영을 기다리는 거라고 말했지만, 해영의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하게 부채감이 쌓여 가던 차였다. 비가 억세게 내리고 있어서 젖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영은 백팩을 앞으로 매고 손바닥을 펼쳐 작은 우산을 만든 뒤, 문을 열고 달음질했다.
해영은 강의실 앞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건우를 찾았다. 운 좋게도 딱 세 번째로 들여다본 강의실에서 그가 보였다.
“찾았다.”
건우는 바깥으로 접은 왼쪽 팔에 뺨을 대고서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반쯤 엎드린 자세였다. 눈썹을 구긴 채로 한참을 필기하다가 팔이 저린 건지 상체를 세우고 왼쪽 팔을 바닥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양옆으로 느리게 기울이다가 앞문 유리창에 붙어 있는 해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헛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키운 채 입술을 반쯤 벌리고 멍한 얼굴을 했다. 해영이 손을 잘잘 흔들자 커다란 손을 들어 제 눈을 턱 가렸다.
건우는 그 뒤로 집중을 하지 못했다. 아까도 열심히 듣는 모양은 아니었지만, 괜히 알은척을 했나 후회될 만큼 눈이 마주친 후에는 더 그랬다. 교수 눈치를 보면서 책이며 노트며 하나둘 가방에 넣고 다리를 문 쪽을 향해 쭉 빼고 앉았다.
고등학교 점심시간 직전에 자주 보이던 자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이 끝나고 건우가 해영의 쪽으로 급하게 걸어 나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미간을 팍 구기더니 제 소매를 끌어 올려 해영의 어깨와 가방 위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내듯 닦아 주었다.
“비 많이 맞았어요? 안에 있으라니까.”
“벼, 별로 안 맞았는데…. 바로 앞이잖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요, 하고 걸음을 뗐다.
건너올 때 비해 눈에 띄게 약해진 빗줄기가 바닥을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건우는 들고 있는 우산을 펼쳐 해영에게 눈짓했다. 성인 남자 둘이서 쓰고 가기에 넉넉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안 쓰는 것보단 나으니 별수 없이 우산 아래로 몸을 욱여넣었다.
걸을 때마다 제 어깨가 건우의 팔뚝에 자꾸만 비벼졌다. 우산을 얻어 쓰고 가면서 우산 주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 몸을 슬쩍 떨어트리면, 곧바로 전보다 더 바짝 붙어왔다. 떨어졌다 붙었다 조용한 신경전을 반복하던 두 사람은 학술정보관 앞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었다. 문이 잠겨 있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는 누수로 인해 휴관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건우는 옆에서 짜증 섞인 얼굴로, 무슨 건물이 하루 비 오는 것도 못 버티는 게 말이 되냐며, 등록금을 다 어디에 쓰는 거냐고 투덜댔지만, 해영은 조금 들뜬 상태였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동기 중 과제가 많이 쌓여 있거나 시험 기간일 때, 자취방에 친구들과 모여서 공부를 하는 애들이 더러 있었다. 같이 공부를 하다가 맛있는 것도 시켜 먹고, 시간이 늦으면 자고 가기도 하는 것 같았다. 해영은 딱 한 번 늦잠을 잔 조원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적은 있었지만, 단순히 친목을 목적으로 놀러 가거나 제집에 누구를 들인 적은 없었다.
이건 기회야.
해영은 여전히 궁시렁대는 건우 쪽으로 몸을 돌리고 기대를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 우리 집 가서 할래?”
불만을 뱉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드니, 건우가 충격적인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힌 채 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지.
건우는 눈앞에서 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 해영의 작은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라고. 그러나 잔뜩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자기 집에서 하면 커피도 먹으면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고, 또 배고플 때 맛있는 것도 시켜 먹을 수 있다고 열심히 설득하던 얼굴에 대고 집에 가 보겠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드, 들어와.”
문을 활짝 연 해영이 건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서 있다가,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 저 방 바쁘게 살피는 걸 보니 치울 게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를 가만히 눈으로 좇던 건우는 숨을 깊게 내쉬고 느릿하게 해영의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에게서 나던 내음이 훅 끼쳤다. 섬유 유연제 섞인 체향.
어떻게 쌓은 신뢰인데. 또 망칠 수는 없었다. 공부를 하러 온 거라고 머릿속으로 외고 또 외었다. 고정 장치를 펴지 않은 묵직한 현관문은 집 안으로 완전히 몸을 들이자 달칵이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건우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돌겠네.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는 긴장감은 도서관 옆자리에 붙어 귓등이 간지럽도록 속삭여대던 것의 열 배, 백 배는 더 곤란했다.
건우는 급하게 들어가느라 뒤집어진 해영의 운동화를 반듯하게 모아 놓고 그 옆에 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었다. 그사이 빠르게 점검을 마친 해영이 들어와도 돼, 하고 손짓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거실에는 짙은 색 원목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혼자 사는 집답게 큰 가구보다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 작고 꼭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영의 몸집이라면 몸을 접어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은 크기의 2인용 패브릭 소파. 그 옆에 놓인 낮은 원목 매거진랙 안에는 책 세 권이 꽂아져 있었다. 따뜻한 베이지색 러그와 기다란 소파 테이블. 벽 쪽에 붙은 스탠딩 티비는 크기가 작았지만 소파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적당하게 보였다.
현관에서 보이는 문은 세 개였다. 모두 반쯤 열려 있었고, 틈새로 보이는 것들로 유추해 보니 하나는 서재, 하나는 침실인 것 같았다. 저기는 욕실인가.
해영의 집은 그와 닮아 있었다. 포근하고 따뜻하지만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거울이 많다는 것 정도. 작은 거울도 아니고 전신 거울이 보이는 것만 세 개였다. 거실에 하나, 현관에 하나, 그리고 침실 틈새로 하나. 혼자 사는 집 치고 유별나긴 했지만 평소에 단정하고 깔끔하게 다니는 해영이라 겉모습에 그만큼 신경을 쓰나 보다, 생각했다.
해영은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산만하게 돌아다녔다. 공부를 어디에서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서재는 제대로 안 보여서 잘 모르겠고, 원형 식탁은 확실히 노트북 두 개를 올려놓기 빠듯해 보였다. 건우는 거실로 곧장 걸어가 소파 테이블을 앞으로 빼서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티비를 등지고 러그 위에 털썩 주저앉으니 해영이 쭈뼛거리며 물을 들고 다가와 건우의 반대편, 소파와 테이블 사이에 자리 잡았다.
“허, 허리 아프면 말해. 자리 바꿔 줄게.”
해영이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일렀다. 건우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뿐이었다. 허리가 두 동강이 나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공부를 하러 오긴 무슨.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바르작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테이블은 길고 폭이 좁아서 노트북 두 개를 엇갈려 놓아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로의 얼굴이 가려지는 것 없이 드러났다. 한 번 두 번 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가 울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시선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옆으로 돌아갔다. 그에 반해 해영은 제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몰두해 있었다.
딱히 뭘 기대하고 온 건 아니지만, 해영과 자신의 마음이 다르다는 게 여실히 와닿았다.
건우가 답답함에 짧게 내려온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그제야 관심을 보인 해영이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잘 안 돼?”
“아니에요.”
해영은 비죽거리는 건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무릎을 바닥에 대고 몸을 세웠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뒤 허리를 쑥 내밀었다. 미처 가릴 틈도 주지 않고 건우의 노트북 화면을 훔쳐본 해영이 헉, 소리를 내며 도로 자리에 풀썩 앉았다. 건우가 뒤늦게 노트북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아, 좀.”
“아닌 게 아, 아닌데…. 왜 그러지. 배가 고픈가.”
앉은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해영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자기 집 안을 걸어 다니는데도 걸음걸이가 영 어색했다. 해영은 낮은 수납장을 열어 후라이팬 하나를 집더니 작은 아일랜드 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냉장고를 연 후 뭔가를 꺼내 바스락거렸다. 인덕션 전원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는 방금 전까지 속상했던 것도 잊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해영의 집에서 해영이 해 주는 요리라니. 현관문 앞에서 그대로 돌아갔다면 이런 기회는 오지 않았겠지. 곤란함을 무릅쓰고 참고 버틴 스스로가 대견했다. 건우는 노트북을 아예 옆으로 치워 두었다. 테이블 위에 팔을 괴고 몸을 반쯤 돌려 앉아 해영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자신을 위해 열심히 툭탁거리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가 해 주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꽤 오래 후라이팬을 들여다보던 해영이 빈 비닐 포장지를 손에 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빤히 구경하고 있던 차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여, 여기 보지 말고 집중해….”
“구경하면 안 돼요?”
“응…. 좀 그래.”
건우는 아쉬운 얼굴로 알았어요, 답하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해영의 말을 듣지 않기로 한 건 그렇게 십 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탄내가 거실까지 다다르고,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주방이 뿌연 연기로 자욱했다. 해영의 뒷모습은 미동도 없이 아까 그대로였다. 불이라도 난 건가 싶어 차건우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배, 괜찮아요?”
“보, 보지 마….”
해영이 그를 힐끔대며 온몸으로 막아섰지만, 키 차이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바들거리는 어깨 너머로 시커먼 덩어리를 본 건우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뱉었다.
“이게 뭐야.”
후라이팬 위에는 식빵 모양의 숯, 아니 숯 같은 식빵 두 개가 열심히 타고 있었다. 건우의 눈치를 보던 해영이 조용히 인덕션 전원을 껐다.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그 검은 덩어리를 침울하게 바라보던 해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조, 조금 오래 있다가 뒤집었더니 약간 탔네. 거, 겉에 자르면 돼…. 잠깐만.”
식가위를 집으려 손을 뻗는 것을 저지한 건우가 해영을 옆으로 비켜 세우고 후라이팬 손잡이를 들어 올려 옆으로 치웠다.
“못 먹어요, 이거.”
해영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허망한 얼굴로 숯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저건 버리지 않는 게 더 충격적인 거라고. 한입만 먹어도 없던 병이 생길 것 같은 완전한 검은색이었다. 어떻게 구우면 저렇게 되는 거지. 저야 숯을 주든 돌을 주든 입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해영의 입으로 저런 게 들어가는 꼴은 못 본다. 차건우가 양 소매를 차례로 접어 올리고 냉장고 앞에 서서 물었다.
“안에 봐도 돼요?”
“응? 내, 내가 먼저 보고….”
그는 불안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더니 냉장고를 한 뼘 정도 열고 그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안타깝게도 이번 역시 해영의 머리 위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냉장고 안의 상태는 예상했던 대로 심각했다. 텅텅 빈 것도 그렇지만, 몇 개 없는 식품 상태가 몇 달 주인 없이 방치된 집이라고 해야 납득이 될 정도로 안 좋았다.
밀폐 용기 안에 옮겨 담은 것들은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곰팡이가 피어 있거나 색이 변해 있었고, 야채는 말라비틀어지고 과일은 썩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것은 장류인데, 솔직히 겉으로 안 보여서 그렇지 속이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뚜껑을 열기가 두려웠다.
건우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해영의 어깨를 잡아 냉장고 앞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버려야 하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 바 위에 올려 두니 종국에는 음료수밖에 남지 않았다. 해영은 꺼내진 것들을 아까운 듯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세요.”
건우가 매서운 눈으로 경고했다. 해영이 흠칫 놀라 손을 거두었다. 저것들은 이미 음식이나 그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병균 그 자체였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해영이 먹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건우가 애써 놀란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냉장고에 넣어 놓더라도 이 정도로 상하게 두면 식중독균 생긴다고요.”
해영은 혼나는 학생처럼 눈꼬리가 축 처져 고개만 끄덕거렸다. 건우는 차마 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시무룩해 있는 해영을 보자마자 뱉은 말을 후회했다.
아니, 사람이 좀 저렇게 살 수도 있지. 선배 바쁜데 저런 거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겠냐고.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아요.”
건우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지만 한번 내려간 눈꼬리는 쉽게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속이 상한 눈치였다.
배달이라도 시켜 먹으면 당장 편하기야 하겠지만, 제가 돌아간 뒤에도 해영의 냉장고는 텅 빈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그렇다고 뭘 해 줄 만한 재료도 없고. 건우는 소매를 도로 내렸다. 그리고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 들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응? 어, 어디?”
혼내던 사람이 갑자기 자리를 뜬다고 하니 해영이 불안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장 보러 간다고 하면 어떻게든 따라 오려고 하겠지.
“음, 바람 쐬러요.”
“아아, 그거.”
뭐로 이해를 한 건지, 해영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신발에 대충 발을 끼워 넣고 우산을 챙기는 동안, 해영은 현관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배웅을 해 주려는 것 같았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역시나 손을 흔들어 준다.
“갔다 와.”
건우는 문을 반쯤 연 채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고개를 세차게 털어 냈다.
“갔다 올게요.”
오피스텔에서 나온 건우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뭐를 해 줘야 하지. 해영과 먹었던 것들은 다 바깥 음식들이라 어떤 게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어 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여보세요.
“선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뭐 사러 가는 거야? 같이 가지….
나란히 장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본인도 시험 공부 때문에 바쁠 텐데 제 것까지 봐주는 사람 시간을 더 뺏을 수는 없었다. 아까 비 맞은 것도 신경 쓰이고. 대꾸하지 않고 버티자 해영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바람 쐬러 간다더니….
“바람도 쐬고, 장도 보고.”
휴대폰 너머로 숨소리와 닮은 웃음이 귀를 간질였다. 해영은 음, 하고 고민하다 답했다.
―떡볶이 먹고 싶어. 매운 거.
매운 거 잘 먹지도 못하면서 되게 좋아해.
“금방 다녀올게요.”
―응, 알겠어.
건우는 전화를 마치고 근처 대형마트 위치를 검색했다.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하나 있었다.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꽂아 넣고 발을 떼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오피스텔 옆 골목 안쪽으로 검은 형태가 몸을 감췄다. 건우가 곧바로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안쪽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해영이었다.
[많이 매운 거 말고.]
차건우는 뺨에 웃음을 머금고 다시 마트로 걸음을 돌렸다.
난이도 높은 장보기였다.
예전에 내기에서 져서 누나 세 명의 심부름을 몰아서 했을 때에도 이 정도로 어렵진 않았다. 누나들 건강은 어찌되든 관심이 없으니 적혀 있는 대로 대충 쓸어 담기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건우는 손에 든 레토르트 식품의 성분표를 꼼꼼히 확인했다. 아까 보니 해영은 냉장고 안을 정리할 시간도 없어 보였고, 요리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건강한 것만 먹이고 싶은데 맛있고 신선한 것들로 채워 넣었다가는 아까보다 더 험한 꼴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밖에서 먹는 일이 잦으니 급할 때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오래 두어도 괜찮은 레토르트 식품 위주로 담았다. 간편 식품에서 건강을 찾는 게 우습지만, 조금이라도 덜 나쁜 것을 찾기 위해 눈이 벌게질 정도로 성분표를 읽었다.
간편 식품 대여섯 종류와 해영이 좋아할 만한 간식 몇 개, 떡볶이 재료를 카트 안에 차곡차곡 담았다. 비가 오니까 몸이 따뜻해질 수 있게 어묵탕을 같이 먹어도 좋을 것 같았다. 무와 통통한 어묵도 추가했다.
계산대로 가는 도중 아주머니 한 분이 이쑤시개에 딸기를 꽂아 내밀었다. 제철이라 맛이 좋다고 시식해 보라는 말에 순순히 받아 먹었다. 단맛보다 상큼한 맛이 더 강했지만 신선도가 좋은 것 같아서 한 팩 달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웃는 얼굴로 제일 빠듯하게 담긴 팩을 골라 주셨다.
해영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해영이 좋아할 만한 조각 케이크까지 포장했다. 우산을 똑바로 쓸 수가 없어 어깨가 젖었지만 괜찮았다. 봉투를 든 손을 올려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깐만, 하고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건지 해영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맞아 주었다.
같이 사는 것 같아.
집에 초대받았을 때부터 하루 종일 몰랑하게 부풀었던 마음이 터무니없는 상상을 만들어냈다. 장을 보고, 해영이 문을 열어 주고, 요리를 해 주는 그런 생활. 솜털이 머릿속을 헤집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이, 이리 줘.”
건우는 봉투로 손을 뻗어오는 해영을 지나쳐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식탁 위에 장 본 것들을 올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나오자 해영이 케이크 박스를 열고 있었다.
“밥 먹고 드세요.”
건우가 도로 닫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케이크를 눈앞에서 뺏긴 해영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 같아. 불퉁하게 혼잣말을 덧붙였다. 아줌마? 보통 엄마 같다고 하지 않나.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해영이 과제를 마무리하는 동안 건우는 장본 것들을 정리했다. 냄비를 올리고 육수를 우려내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해영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포장 비닐 따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도와줄 거 없어?”
“네. 금방 해요. 쉬고 계세요.”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거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식탁 의자에 자리 잡았다. 고개를 반쯤 돌려 힐끗 바라보자,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묻지도 않은 것을 줄줄 뱉었다.
“어…. 갑자기 도와줄 게 생길 수도 있고, 또 도, 도구 같은 거 어디 있는지 알려 줘야 할 수도 있으니까. 방해돼?”
아니에요. 건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부담을 이야기할 정도로 불편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저에게 관심을 주는 것 자체는 기꺼웠다. 또 해영은 조용한 편이라 요리하는 데 집중을 하다 보면 금세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우와….”
해영은 뭐를 하나 할 때마다 마술이라도 본 사람처럼 연신 감탄을 했다. 덕분에 떡볶이에 넣을 양배추를 어묵탕에 넣었다 빼는 실수를 했지만 눈치채지 못한 건지 해영은 그때도 와, 하고 탄성을 뱉었다.
적당히 움푹 패인 접시에 떡볶이를 담고, 반숙으로 삶은 계란을 반으로 잘라 가지런히 올렸다. 따끈한 어묵탕과 함께 식탁 위에 내어 주니 해영이 눈을 크게 뜨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와…. 삼십 분도 안 걸렸어. 계란을 어떻게 이렇게 삶지. 간장에 쪽파도 넣었네. 언제 넣었지?”
별것도 아닌 것에 과할 정도로 감탄을 하기에 놀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완성된 것을 앞에 둔 해영은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멋쩍은 기분에 뒷목을 슬쩍 매만졌다.
“얼른 드세요.”
건우는 해영이 맛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됐다. 해영이 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음음, 입이 다물리자 목으로 소리를 내며 우물우물 씹어 삼킨 그가 이번에는 숟가락을 들어 어묵탕 국물을 떠 마셨다. 식탁 아래로 뽀얀 발이 앞뒤로 하느작거렸다.
“맨날 네가 해 준 거 먹고 싶다. 엄청 맛있어.”
혼자 하는 마음은 항상 목이 말라서, 별 뜻 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도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바로잡는 건 온전히 제 몫이었다. 양 뺨에 뭉근하게 열기가 돌았다. 건우는 식탁에 고개를 처박고 앞에 놓인 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야. 대단해.”
해영의 말은 단단했다. 글자에 진심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하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릇을 다 비운 후에도 해영은 잘 먹었다, 고맙다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그는 양치 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건우가 싱크대 앞에 힘으로 버티고 서서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한참 뒤에야 포기하고 돌아갔다. 뒷정리를 마친 뒤 거실로 향한 건우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코끝으로 웃었다. 해영이 아까 그 자리에 앉아 소파에 고개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옆에 소리 죽여 앉았다. 그리고 그 무방비한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옆으로 뺨을 기대 누워 부드러운 천을 꾹 누르고 있는 볼살이 입술을 지그시 밀어내고 있었다. 입술이 못 이기고 뻐끔 벌어졌다. 안쪽에서 붉은 덩어리가 느른하게 움직였다. 건우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해영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욕심만 점점 커져갔다.
몇 달 전 해영을 보면서 가졌던 바람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의 옆에 기생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딱 거기까지라도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한 번만 자신에게도 웃는 얼굴을 보여 줬으면. 좀 더 자주 웃었으면. 그가 자신을 좋게 봐주고 가까이 두었으면. 자신이 그에게 갖는 감정들 중 일부라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는 욕망을 모른 척 방관했다.
차건우는 본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나들에 치여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몇 개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내 것’에 대한 욕심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사람을 대상으로 부려 본 적이 없어서 간과했다.
처음 주는 마음치고 보기 좋은 색은 아니었다. 거리를 두고 서서 그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그런 착한 색이 아니었다. 해영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 올 준비가 되어 있는 더럽고 추잡한 색이다. 해영에게 하나도 득 될 것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단계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그가 그어 둔 선은 어디일까.
해영의 헤벌어진 입술 틈으로 뱉어지는 민트향 섞인 말간 숨이 공기를 천천히 데웠다. 간간이 작게 앓는 소리가 피부를 두드렸다. 은근하게 퍼지는 그를 닮은 살냄새에 온몸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어디까지 욕심내도 되는 걸까.
“선배, 들어가서 주무세요.”
건우가 나직이 불렀다. 잠깐 사이에 깊게 잠이 든 건지, 부르는 것만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배. 목소리를 조금 키워 한 번 더 부르자, 해영이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응….”
건우는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겨우 들어 올려진 해영의 고개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흔들렸다. 그 어깨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니, 그제야 눈이 반쯤 무겁게 뜨였다. 원망 어린 눈이었다. 해영은 뺨의 면적만큼 푹 꺼진 소파 시트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잘래….”
“안 돼요. 목 아파요.”
내 목인데. 해영이 불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작게 투덜거렸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잔뜩 뭉개진 발음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잠들지 않으려 소파에 팔을 대고 버티고서 짐을 챙기는 건우를 드문드문 바라보았다.
“벌써 가려고?”
해영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이제 여덟 시를 막 넘겼으니, 확실히 집에 가긴 이른 시간이었다. 아쉬운 건 건우도 마찬가지였다. 해영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그럴 것이다. 그치만.
“나 잠 다 깼는데….”
건우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이를 악물었다. 잠에 취해 잔뜩 풀어진 채로 제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해영을 앞에 두고 있으면, 뭐라도 저지르게 될까 두려웠다. 아슬아슬하게 쌓아 놓은 것들이 단번에 무너질까 봐. 해영이 소파를 짚고 일어나다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잠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해 몽롱한 얼굴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멘 건우가 해영의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곧 하얀 손이 단단한 손목을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저 갈 테니까 편하게 쉬세요.”
해영은 졸린 눈을 하고 건우를 배웅했다. 운동화에 발을 차례로 끼워 넣은 건우가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며 고개를 까딱이자, 해영이 양손을 흔들어 마주 인사했다. 철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의 경쾌한 디지털 음이 동시에 겹쳐 울리고, 해영은 혼자가 되었다.
해영은 우두커니 서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요란하게 놀지 않았는데도, 머물던 사람이 가고 나니 어딘가 크게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쓸쓸하고 허전했다. 당연했던 적막이 지금처럼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아, 케이크.”
해영은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그가 두고 간 흔적을 찾아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안쪽을 본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케이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잘 씻은 딸기 한 접시와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들로 냉장고 안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딸기 위에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씻은 거라 금방 물러지니까 내일까지 드세요.’ 그의 노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예쁜 글씨였다.
냉장고 문을 꼭 잡고 케이크와 딸기 중에서 고민하다 딸기를 꺼내 들었다. 새콤한 건 잘 못 먹지만 그냥 딸기가 더 먹고 싶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건우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가지고 와서 카메라를 켠 뒤 메모와 딸기가 잘 보이도록 서너 장 연속으로 찍었다.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글씨를 알아볼 수 있게 찍혔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비닐랩을 벗기고 포크를 들어 올리던 중,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전화였다. 두고 간 게 있나. 바로 액정을 확인했지만 화면에는 건우가 아닌 다른 이의 연락처가 띄워져 있었다.
[아주머니]
무슨 일이시지. 명절이나 아버지 기일 외에는 연락을 주신 적이 없던 분이다. 기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절도 한참 멀었는데. 뒷목이 서늘했다. 진동이 두어 번 더 울리고 나서야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여보세요?”
―어, 해영아. 아줌마야.
“네, 아줌마. 무슨 일 있으세요?”
말이 예민하게 튀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잘 지내나 해서. 별일 없지?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한 연락을 받은 기억이 있는지 더듬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해영은 찝찝한 기분으로 네, 하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여자한테 연락이 왔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예고도 없이 듣게 된 어머니 이야기에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온몸에 피가 돌았다. 잊고 살던 걸 다시금 깨우치고 나서야 잘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속알맹이 없이, 무게 없이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앞이 컴컴해질 정도로 패닉에 빠져 있던 해영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다잡았다.
―해영아?
“어, 없었는데…. 연락 같은 거.”
아주머니는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듯 음, 하고 목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래. 별일 없으면 됐어.
찝찝했다. 불안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어머니 이야기는 왜 꺼내신 건지 목구멍까지 물음이 올라 왔지만, 도저히 뱉을 수 없었다.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두려웠다. 또다시 송두리째 흔들릴까 봐 애써 무시하고 겁쟁이처럼 피해버리고 만다.
그 여자 앞에서 저는 여전히 나약하다.
―밥 잘 챙겨 먹고.
“네, 아줌마도요.”
―그래. 여기도 좀 오고 그래. 공부한다고 바쁘겠지만.
“그럴게요.”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해영은 검게 꺼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거실에 세워 둔 거울 속 자신을 마주 보았다. 어깨로 살짝 흘러 내려간 옷. 그 안쪽으로 흐릿하게 이어지는 손톱자국. 해영은 미간을 팍 구기고 옷을 추켜올렸다.
주제도 모르고 붕 치솟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해영은 딸기 위에 비닐랩을 다시 씌우고, 메모지만 떼어낸 후 냉장고에 도로 넣었다. 도저히 뭘 먹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 먹고 싶지도 않았고. 해영은 곧장 침실로 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들어가서 편하게 쉬라고 했던 건우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잠을 한숨 자면 좀 나아지려나. 옅은 기대를 안고 눈을 감았다.
해영의 바람은 늘 힘이 없었다.
비를 맞은 것 때문인지, 신경 쓰이는 전화를 받아서인지 해영은 밤새 앓았다. 아마 전화 때문일 것이다. 해영은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보살펴 줄 사람도 없는 주제에 마음 쓸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몸부터 고장 났다. 펄펄 끓는 열에 잠들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악몽 섞인 긴 밤이 이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무거웠다. 속에서부터 찬기가 퍼져 손발이 덜덜 떨렸다.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라, 이른 시간에 알람이 울렸다. 매일 듣는 소리였지만 몸이 좋지 않으니 소음도 이런 소음이 없었다. 고막을 날카롭게 찔러대는 소리에 해영은 눈도 뜨지 못한 채로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알람을 껐다. 학교를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자체 휴강을 할 요량으로 끙끙대며 도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반나절을 더 자고 나서야 해영은 눈을 떴다. 자의가 아니었다. 웅웅 울리는 소리에 어스름 속에서 옆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건우였다. 열띤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서 나왔다.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전화 너머에서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제가 제대로 받은 게 맞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액정을 확인했지만, 건우의 이름이 초록색 화면 안에 멀쩡하게 띄워져 있었다.
“건우야?”
건우는 물속에서 겨우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숨을 푹 몰아쉬다가 입을 열었다.
―학교, 안 오신 것 같아서요. 어디 아프세요?
문자라도 보내 놓을걸. 건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후회했다.
“아,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 쉬었어….”
―많이 아프세요?
“엄청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어.”
거짓말이다. 여전히 상체를 일으키는 것도 힘이 들 만큼 몸이 무겁고 어지러웠다. 안 그래도 손이 많이 가는데, 허약한 선배로까지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창피했다.
―문 잠깐만 열어 주시면 안 돼요?
“무, 문?”
문 앞이라고?
해영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현관으로 곧장 향하려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침실 거울로 비춰지는 모습이 너무 엉망이었다. 밤새 끙끙대며 뒤척인 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얼굴도 열 때문에 벌겠다.
“지금은 좀….”
나가지 않을 작정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도로 털썩 앉은 해영이 곤란한 투로 답했다. 바로 앞까지 찾아온 사람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이 꼴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푹 쉬세요.
더 고집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건우는 순순히 포기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버릇처럼 액정을 확인한 해영은 화면에 떠 있는 알림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게 뭐야.”
[부재중 전화 46통]
[새 메시지 11개]
모두 차건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선배 어디세요?]
[학교 같이 가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가벼운 내용으로 시작된 메시지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급한 말들로 채워졌다.
[오늘 1교시 아니에요?]
[강의실에 선배만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전화 좀 받아요.]
[선배님.]
그 뒤로도 비슷한 메시지가 이어졌고, 오전 10시 이후로는 전화만 쌓여 있었다. 해영은 멍한 얼굴로 통화 기록을 살펴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기립에 시야가 핑 돌 만큼 어지러웠다.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다잡고 이불을 끌어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당연하게 반복했던 일이 어그러졌을 때 상대방에게 미리 연락을 했어야 한다는 그 당연한 일조차 해영은 생각을 못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라는 핑계로 넘어가기에는 잔뜩 쌓인 알림들이 꽤 무겁게 다가왔다.
급한 대로 이불을 모아 손에 쥐고 현관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차건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화를 끊고도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이다. 그도 문이 이렇게 열릴 줄은 몰랐는지 놀란 눈을 하고 이불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해영은 그가 들고 있는 것들로 시선을 옮겼다. 약국 로고가 박혀 있는 두둑한 흰색 봉투를 왼쪽 손목에 걸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타이핑을 하고 있던 것처럼 엄지가 액정 위에 붕 떠 있었다.
야구 방망이는 왜….
화면이 가득 찰 정도로 걱정을 해 준 사람을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문을 열긴 했는데, 야구 배트를 보자 하려던 말도 잊고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 시선을 알아챈 건우가 아, 하고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이거. 혹시나 해서요. 강도라던가, 뭐.”
황당했지만 양손에 전혀 다른 것들을 쥐고 찾아온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 때문에 연락이 안 되는지도 모르면서, 온갖 가능성을 다 생각하고 온 걸까.
건우는 상태를 살피려는 듯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붙여왔다.
“많이 안 좋아요?”
“아니, 나 괜찮으니까….”
그가 다가올수록 해영이 이불 속으로 더 숨어 들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는 해영에게 건우가 손을 내밀었다.
“시, 싫어….”
건우의 손에 이불자락이 붙잡히자 해영은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분명 이불 위로도 보일 만큼 크게 표현을 했는데도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속에서 울컥 위기감이 솟았다. 금방이라도 건우가 이불을 들춰낼 것만 같았다.
“싫다고!”
해영이 소리를 지르며 안쪽에서 그가 쥐고 있는 부분을 팩 잡아 뺐다. 예상 외로 건우는 잡고 있던 것을 순순히 놓았다. 잔잔했던 오피스텔 복도가 크게 울리다가, 정적이 흘렀다. 숨이 막혔다.
“그러고 계세요, 그럼.”
건우는 뒤로 밀리지 않도록 이불 위로 해영의 뒷목 부근을 받쳐 잡았다. 단호하지만 강제성이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손이었다. 그리고 다른 손을 이불 틈새로 쑥 넣어 해영의 이마를 짚었다. 맞닿은 살갗에서 놀랄 만큼 열감이 느껴지자 건우가 인상을 팍 구겼다.
“너무 뜨거운데.”
해영은 손을 뻗어 건우의 팔뚝을 붙잡아 떼어 내려 했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몸을 옆으로 홱 돌리자, 순간 전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해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그대로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데, 건우가 그의 양어깨를 붙잡아 지지했다.
“아….”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상태라 그런지 열을 좀 냈다고 금세 안 좋아졌다. 흐느적거리는 이불 덩어리를 침대까지 부축해 눕힌 건우가 치울게요, 하며 미약한 힘으로 쥐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걷어 냈다. 아파서 무어라 반항을 할 정신도 없었다. 베개에 뒤통수를 푹 파묻고 쌕쌕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건우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일렁였다. 제 앞에서 몽글몽글 땀에 젖어 뜨거운 숨을 겨우 내쉬는 해영을 보니 손끝이 차게 식었다.
“병원 가야 될 거 같은데….”
건우가 조금 떨리는 손으로 해영의 뺨의 열을 재다가 젖은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건지, 어떻게 가야 하지. 업고 가야 하나. 못 걸을 거 같은데. 같은 말들을 덧붙였다.
“…자면, 괜찮아.”
해영이 그런 그를 달래듯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감기라는 게 원래 푹 자고 잘 먹어야 빨리 낫는 병이라 마지못해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한지, 자고 일어나도 아프면 꼭 병원에 가야 된다는 말을 더했다.
건우는 들고 왔던 약봉지를 뒤졌다. 봉투 안에는 온갖 약들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해열제를 찾아 상자 뒷면을 읽어 내리던 건우가 해영에게 물었다.
“입맛 없죠?”
해영이 고개를 작게 두 번 끄덕거렸다. 건우는 약을 내려놓고 방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에서 삼십 분 정도를 툭탁거리며 무언가를 만들었다. 중간중간 해영의 상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트레이 위에 고운 미음을 올려 해영에게 가져왔다.
“식후에 먹으라고 되어 있어서요. 조금만 넘기세요.”
입 앞까지 대어 주는 것을 꿀떡꿀떡 받아먹고, 약까지 삼킨 해영이 자리에 다시 누웠다. 건우는 말로는 더 자라고 하면서 열심히 해영을 방해했다. 초조한 기색으로 계속해서 이마의 열을 재고, 이부자리를 고쳐 주고, 안절부절못하며 집 안을 간간이 돌아다녔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몸이 좋지 않으니 신경이 곤두섰다.
“건우야…. 어지러워.”
“어지러워요? 병원 갈래요?”
“아, 아니…. 네가 너무, 왔다 갔다 해서…. 하, 어지러워.”
건우는 그제야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침대 옆에 얌전히 붙어 앉았다. 해영은 눈을 감았다. 습관처럼 빈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그 순간,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 손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게 더 익숙한 작은 손을 마주 잡고 해영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이 손을 간절히 바라던 때가 있었는데.
***
12월 31일. 크리스마스의 여운과 다가오는 새해의 설렘에 싸여 대체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런 날에, 해영은 버려졌다.
눈이 왔다고 했다. 수녀님은 더없이 예쁜 날에 네가 온 거라 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베이비 박스 안에서 차게 식었을 날이라는 걸 해영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에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해영은 다른 아이들 손에 흔하게 쥐어지는 이름 적힌 종이 쪼가리 한 장도 없이, 핏자국조차 채 닦이지 않은 상태로 옷가지에 대충 싸여 버려진 아이일 뿐이었다.
해영은 열 살 때까지 문해영으로 살았다. 보육원 원장 수녀님의 성이었다. 해영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본인의 성씨를 나누어 준 원장 수녀님은 좋은 분이셨지만,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머릿수를 넘어가면서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원장 수녀님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서는 아이들 간의 기 싸움이나 괴롭힘이 생겨났고, 생일이 늦어 또래보다 몸집이 작고 어딘가 어수룩한 해영은 항상 그들의 표적이었다.
어린 나이에 좋은 가정으로 입양되는 티비 속 뻔한 이야기는 해영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주눅 들어 말도 또박또박 하지 못하는 해영은 항상 입양 대상자에서 가장 먼저 제외되었다.
그렇게 열 살이 되던 해 겨울방학 끝자락에, 또래 중에 입양을 간 아이들 숫자가 더 많아지고 포기가 익숙해질 무렵, 수녀님이 답지 않게 급한 걸음걸이로 해영을 찾았다.
“해영아. 해영이 어디 있니?”
아이들에게 또 뺏길까 봐 침대 뒤에서 몰래 숨어 쿠키를 먹고 있던 해영이 수녀님의 부름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저 여기 있어요.”
수녀님은 해영을 보자마자 곧장 다가와서는 몸을 굽히고 해영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해영의 입가를 투박한 손길로 문질렀다.
“아이고, 옷에도 다 묻었네.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원장실로 와.”
느낌이 이상했다.
해영은 개인용 작은 옷장을 열어 가장 좋아하는 베이지색 니트와 흰 와이셔츠를 두고 고민했다. 흰 와이셔츠는 해영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깨끗한 옷이었다. 장시간 입고 있기엔 불편한 옷이라 행사 때만 꾸역꾸역 입어서 더러워질 틈이 없었다. 반면 베이지색 니트는 부들부들한 촉감이 좋아 꾀죄죄해질 정도로 자주 입은 것이었다. 고민 끝에 수녀님의 말대로 깨끗한 와이셔츠를 집어 입었다.
원장실 문 앞에서 셔츠 소매를 매만졌다. 문 너머로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영의 작은 목울대가 울렁였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나무 문을 힘주어 밀었다. 안쪽에서 젊어 보이는 여자가 울먹이며 해영에게 다가왔다. 지난 번 자선 행사 때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무릎을 굽혀 앉으며 떨리는 손으로 해영을 꼭 끌어안았다. 영문 모르고 안긴 해영이 여자 뒤로 서 있는 수녀님을 향해 눈을 꿈뻑였다. 수녀님은 왜인지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아가. 이제 엄마랑 같이 살자.”
그렇게 수일 뒤, 해영은 처음 느껴 보는 온기에 기대감을 안고 보육원 문을 나섰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집은 귀여웠다. 밝은 파란색 철문과 낮은 담, 작은 계단 사이사이에 놓인 붉은 화분들. 보육원은 단층 건물이라, 해영은 외부 행사나 학교에서 계단이 있는 곳만 가면 오르고 싶어 했다. 위에는 무언가 예쁘고 신기한 게 있을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계단을 향하던 작은 걸음을 어머니가 멈춰 세웠다.
“거기 아니야. 모르면 물어보든지, 알려 줄 때까지 기다려.”
그날 원장실에서 들었던 것과 사뭇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해영은 축 처진 어깨가 둥글게 말린 채로 어머니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문을 지나고도 계단을 대여섯 개 더 내려갔다. 안이 흐릿하게 비춰 보이는 유리 창문이 달린 동색 문. 여자가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삐걱이며 문이 열렸다. 완전히 젖혀진 문은 수평이 맞지 않았다. 어머니는 들어오라거나 여기라거나 하는 말도 없이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해영은 들어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활짝 열린 문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어머니가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서 있냐고 짜증을 낸 후에야 허겁지겁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녀는 해영의 옷을 남김없이 벗기고서 욕실로 끌고 들어갔다. 검은 얼룩 가득한 욕조 안에 던져 놓고, 못마땅한 얼굴로 해영의 머리끝부터 발까지 쭉 훑었다.
“애가 왜 이렇게 꾀죄죄해. 미용실도 가야겠어.”
어머니는 투박한 손길로 때를 밀고 거품질했다. 해영의 약한 피부는 금세 발갛게 부어올랐고, 실핏줄이 터져 점처럼 올라왔다. 그걸 본 어머니는 뭘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붓냐고. 병이 있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아, 아니에요. 병 아니에요. 병 없어요….”
해영이 다급하게 손사래까지 치며 여러 번 부정을 하고 나서야 다시 씻기는 걸 이어 나갔다.
물에 홀딱 젖은 꼴로 욕실 문을 열고 나온 해영에게 어머니는 낡은 면 티와 바지를 던져 주었다.
“작아서 식비는 별로 안 들겠네.”
그날 해영이 먹은 거라곤 천 원짜리 김밥 한 줄뿐이었다.
다음 날 어머니는 백화점 쇼핑백 안에서 비싸 보이는 옷을 꺼내 해영에게 입혔다. 신발은 사이즈가 맞지 않아 뒤꿈치가 많이 남았다. 그리고 해영의 손목을 쥐어 멀지 않은 동네 미용실로 데려갔다. 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용실 주인은 요란스럽게 알은체를 해왔다.
“아이고, 영선이. 오늘 가려고?”
“네. 애가 이래서 잘 될지 모르겠네.”
미용실 주인은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며 타박을 하고, 해영을 의자로 안내했다. 모서리가 벗겨진 검은 의자에 풀썩 앉았다. 본래 색이 흰색인지 누런색인지 모를 가운이 몸 위로 둘러지고, 펌프질에 따라 의자가 위로 솟았다. 미용실 주인은 해영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며 뒤를 돌아 어머니를 바라보고 물었다.
“깔끔하게 해 주면 돼?”
어머니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적갈색 소파에 앉아 잡지를 펼쳤다. 주인은 거울로 시선을 돌리고 해영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름이 뭐야?”
“문해영이요….”
“엄마 닮아서 예쁘네.”
뒷목에 닿는 차가운 쇠가위의 느낌이 싫었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해영은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거기에 제 의사는 없었다.
해영은 어색하게 짧아진 머리를 매만졌다. 낯설었다. 어머니는 주인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고 미용실을 나섰다. 골목을 돌아 조금 더 걸으니 바로 대로변이 나왔다. 어머니는 가느다란 팔을 쭉 뻗어 흔들며 택시를 잡았다.
“성북동이요.”
어머니는 엄지손톱 옆 살을 톡톡 건드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목적지를 말했다. 해영은 덩달아 긴장이 되어 어디에 가는 거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어머니는 초조해했다. 낭떠러지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흡사 간절함까지 보였다. 아주 중요한 곳에 가는가 보다, 해영은 생각했다.
택시에서 내려 완만한 언덕길을 오 분 정도 걸어 올랐다. 보기만 해도 위축되는 거대한 대문 앞에 멈춰 선 어머니는 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쪽에서는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 회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누구신데 여기까지…. 따로 들은 것 없으니 돌아가세요. 나 참. 대낮부터 무슨 술집 여자가, 쯧….
술집 여자가. 어머니는 그 말에 눈이 돌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넓고 조용한 골목이 순식간에 그녀의 울분 섞인 고함으로 뒤덮였다. 그녀는 회장님과 자신이 무슨 사이인 줄 아냐고,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문을 열라며 억지를 부렸다.
인터폰이 끊기고 다시 벨을 눌러 연결하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던 어머니는, 뒤에서 굳은 채 떨고 있는 해영의 손목을 우악스레 잡아 끌었다. 그리고 뒤통수를 움켜잡고 인터폰에 붙은 작은 카메라에 해영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얘가 이 집 아들이라고!”
해영은 두려움에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머니의 신경을 거스르거나 방해가 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입 안으로 가득 머금고 입꼬리를 쭉 끌어내려 울음을 참았다.
필사적으로 버틴 게 무색하게 아무 대꾸도 없이 인터폰 연결이 종료되는 소리가 들렸다.
“쓸모없는 새끼.”
그녀는 쥐고 있던 해영의 머리카락을 던지듯 놓았다. 해영은 중심을 잃고 단단한 대리석 기둥에 어깨를 부딪혔다.
작은 손으로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고 몸을 바로 세우는 사이,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구두굽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해영은 어머니를 놓칠세라 큰 운동화를 질질 끌며 급하게 쫓아갔다. 뒤꿈치가 들썩거리는 신발 때문에 넘어지고 무릎이 쓸려도 허겁지겁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아까 택시에서 내렸던 그 도로 앞에 멈춰 섰다. 빈 택시가 바로 잡혔다.
“흐, 엄마….”
처음이었다. 해영이 목구멍에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말을 갓난아이 울음처럼 뱉어냈다. 입에 붙지 않는 소리는 보잘것없이 작고 하찮았다. 그제야 그녀는 열린 택시 문을 붙잡고 멈춰 서서 구르듯 달려오는 해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잘 따라오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다친 무릎을 꼭 붙든 해영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 엄마라고 부르지 마. 기분 나빠.”
그 뒤로 어머니는 세 번 더 그 집 앞에 찾아갔고, 결과는 항상 동일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저를 찾은 이유는 그 집의 사모가 사고로 갑작스레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애처가로 유명한 서 회장이 무엇 때문에 어머니 같은 여자에게 책을 잡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확신에 차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집에 찾아간 날에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해영은 그날 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자식 구실 좀 하라고 데려왔더니.”
해영은 얼얼한 뺨을 붙들고 바닥에 붙어 납작 엎드렸다.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떠는 사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어머니는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앞집 순이 아줌마네에 가서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창문으로 순이 아줌마와 어머니가 대화하는 소리가 흐릿하게 넘어왔다. 자신을 대할 때와 다른 목소리였다.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소리. 해영은 그 목소리가 다른 집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앞집에 가면 늦어도 하루였다. 항상 그쯤이면 돌아오셨다. 뱃속이 텅 비어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들고 나는 게 느껴질 정도로 허기가 질 때, 딱 죽겠다고 생각이 들 때쯤 문이 열리고 비틀거리는 어머니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날은 자정이 넘어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냉장고 안에는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문은 밖에서 단단하게 잠겨 있었고, 창문은 해영에게 너무 높았다. 운 좋게 나간다고 하더라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좁아 터진 집 안을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 삼 일째에는 열이 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해영은 이부자리 밖으로 손을 뻗었다. 기력이 없으니 뻗었다기보다는 미끄러진 것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몇 년 전, 그러니까 아직 보육원에 아이들이 많지 않을 때만 해도 수녀님은 아이들이 아플 때 한 명 한 명 옆에 붙어 간호를 해 주셨다. 해영이 스트레스로 종종 앓아 누울 때에도 옆에서 손을 잡아 주셨다.
‘해영이를 낳아 주신 분은 분명 좋은 분이실 거야. 미워하지 말자, 아가.’
이름도, 정확한 생일도 없이 쓰레기 처리하듯 버려진 해영은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부정했다. 그럴 때마다 수녀님은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좋은 분이실 거라고 해영을 달랬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데리러 온 날에 눈으로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니, 하면서.
아니잖아요. 틀렸잖아요.
해영은 바들거리는 손으로 주먹을 힘겹게 쥐었다.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현관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그토록 바라던 소리에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바닥에 붙어 누워 있는 해영의 뺨에는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김없이 아픈 해영을 일으켜 욕조에 던져 넣었다.
이 집에 온 지도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이른 새벽에 퇴근해 낮에 잠을 자는 어머니는 바깥 소리가 들어오는 게 싫다며 해영이 창문을 연 걸 볼 때마다 고함을 질렀다. 해영은 참기 힘들 정도로 답답하면 그녀 몰래 창문을 반쯤 열고 바깥 공기를 듬뿍 들이마시는 걸 좋아했다. 손바닥만큼 열린 작은 창으로 벚꽃잎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완연한 봄이었다.
발꿈치를 들고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새 누군가 길을 쓸어 놓은 건지, 창 바로 앞까지 벚꽃잎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해영에게 이 해의 봄은 작은 창문만 한 계절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봄 냄새를 마음껏 들이켰다. 그 순간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먼지바람이 훅 불어왔다. 콜록거리면서 곧바로 창문을 닫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벚꽃잎 더미가 방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해영은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어머니가 본다면 뺨을 얻어맞을 만한 사고였다. 얼른 몸을 숙여 조막만 한 손으로 꽃잎을 쓸어 모았다.
바스락. 어머니가 몸을 뒤척였다.
안 되는데. 들키면 안 되는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한곳에 모은 꽃잎은 양 손을 바구니처럼 모아도 모두 담을 수 없었다. 해영은 울먹이는 얼굴로 최대한 꽃잎을 모아 들고 화장실 변기에 쏟아 부었다. 자는 동안에는 물 내리는 소리에도 성질을 낸 적이 많아서 레버는 가장 마지막에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발꿈치를 들고 다시 꽃잎 더미 쪽으로 숨죽여 걸어가고 있는데, 현관문이 큰 소리를 내며 덜컹였다. 고개를 홱 돌렸다. 낡은 철문이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처럼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씨발년이. 문 안 열어?”
급기야 발로 차는 소리까지 들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어머니가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애매한 곳에 애매한 자세로 서 있는 해영에게 한심하다는 눈길을 던지고 여전히 시끄러운 현관으로 향했다.
그녀는 굽이 없는 검은색 샌들을 대충 구겨 신고 문을 열었다. 크고 시커먼 남자가 한 뼘쯤 열린 문 틈새로 손을 넣어 완전히 열어젖혔다. 어머니의 얼굴은 제게 욕을 할 때만큼이나 구겨져 있었지만, 입에서는 욕은커녕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굴복하는 자세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고 침입자를 마주했다. 남자들은 그녀의 행동이 객쩍은 듯 비웃기 바빴다.
“이 씨발년 눈에 힘주는 것 좀 봐라. 아줌마, 돈 좀 갚으세요. 일은 좆나게 하던데 그 돈 다 어디로 갔을까.”
남자가 위협적으로 현관 옆 벽을 주먹으로 쿵쿵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빌려준 사람 줄 돈은 없고 약 할 돈은 있지. 어?”
어머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비슷한 말로 언성을 높이면서 문과 현관, 신발장을 위협적으로 쿵쿵 내려쳤다. 커다란 손바닥을 머리 위로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해도 어머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제야 전화 제때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서 자리를 떴다. 폭력이라도 휘두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뒤에서 가슴 졸이며 고민하던 해영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힘이 빠져 벽에 몸을 기댔다. 남자들은 어머니에게 손끝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들이 때리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문이 닫혔다. 어머니는 현관 앞에 침을 뱉고서 참았던 것들을 토해냈다.
“씨발, 지들이 좆대로 불려 놓고서 나보러 갚으래. 그 큰돈을 당장 무슨 수로 구하냐고. 양아치 새끼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해영은 꽃잎을 쏟아부은 변기물을 내리지 못한 게 떠올랐다. 다급하게 욕실 쪽으로 움직였지만, 어머니가 변기 뚜껑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이건 또 뭐야.”
욕실까지 걸어가는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좀 전의 일의 여파도 남아 있는 건지, 평소보다 더 두려웠다. 어머니는 변기 앞에 움직임도 없이 서서 그 안을 내려다보다가, 눈치 보며 다가오는 해영을 매섭게 노려봤다. 해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해영을 지나쳐 창문가로 향한 어머니는 이불 위에 쌓인 흙먼지와 지저분한 꽃잎들을 발견했다.
“너 또 창문 열었니?”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었을 때 빠릿하게 대답을 하지 않거나 어물거리는 것은 어머니가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하고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어머니는 해영의 이부자리를 돌돌 말아 들고 곧장 화장실로 가 욕조 안에 집어 던졌다. 해영의 잠자리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창문 좀 열지 말라니까 말도 안 듣고. 하, 거기선 애를 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이 모양이야. 저거 네가 알아서 빨아 놔.”
“네….”
어머니는 자주 입는 검은색 값싼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방 안이 금세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해영은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머니가 해영을 보며 냉장고 쪽으로 손짓했다.
“물 좀 가져와.”
물심부름은 그녀가 가장 많이 시키는 일이었다. 해영은 잔뜩 긴장한 와중에도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냈다. 평소와 같이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르는데 손이 위태롭게 떨렸다. 험악한 사채업자의 방문이나, 어머니의 고성이 주는 압박감은 열 살 남짓 어린아이에게 실제보다 크게 다가왔다. 물통에 툭 건드려진 컵이 물을 가득 담은 채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깨지지 않는 컵은 소리가 길다. 튀기고 구르고 물이 바닥을 흠뻑 적셨다. 어머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물도 하나 제대로 못 가져와?”
어머니는 손가락 사이에 여전히 타고 있는 담배를 끼운 채로 빠르게 다가와 해영의 가느다란 손목을 억세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현관까지 질질 끌고 갔다. 그 기세에 해영은 발목이 접질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있던 담배를 입으로 옮겨 문 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힘을 이기지 못해 벽에 부딪힌 철제문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해영은 신발도 신지 못해 맨발인 채였다. 발바닥에 모래 알갱이가 달라붙었다. 어머니는 허름한 대문 밖으로 해영을 내던졌다.
“너처럼 쓸모없는 새끼는 본 적이 없어.”
지저분한 돌바닥을 딛고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봤지만 대문은 이미 닫힌 후였다. 해영은 낡은 티 한 장과 허름한 잠옷 바지 한 장만을 걸친 채로 신발도 없이 길바닥에 던져졌다.
두 번째로 버려진 날이었다.
그렇게 어둑해진 골목을 벽을 따라 걸었다. 봄이라도 해가 지니 서늘했다. 붉어진 손날을 엄지로 살살 매만졌다. 몇 시간 동안 문을 두드린 손이었다. 눈가가 짓무르고 목구멍이 얼얼했다.
그날 깨끗한 셔츠가 아니라 베이지색 니트를 집어 들었다면 어머니는 저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녀의 손에 붙들려 보육원을 나오던 날에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을 기억한다. 그 아이들이 그토록 바라고 궁금해하던 친모의 존재는 적어도 해영에게 만큼은 행운도 기적도 아니었다.
열리지 않던 문 앞에서 맛본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해영의 집을 포함해 작고 오래된 주택들이 숨 쉴 틈 없이 붙어 있는 단지 건너편에는, 조금 더 큰 주택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었다. 크다는 건 해영의 집이 기준이라, 어머니와 보았던 성북동 집에 비할 바는 못 됐다. 해영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길을 건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걷다가 하루가 끝날 때까지 목적지를 찾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아무 경찰서라도 들어가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 곳에 가면 어디로 보내질지는 뻔했다. 원장실에 불려간 날, 짐을 덜어낸 사람처럼 시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수녀님의 얼굴. 그 얼굴이 실망과 허무로 덮이는 걸 보는 게 두려웠다. 두 번 버림받은 놈이라고 놀릴 게 뻔한 보육원 아이들도, 그리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보육원 밖의 기회도.
해영은 낯선 붉은 벽돌집 사이사이를 미로처럼 헤집었다. 모험심 같은 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멈춰 서 있으면 버림받았다는 현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떠올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다. 골목을 우뚝 지키는 가로등이 두어 번 깜빡이다 완전히 켜졌다. 그 노란 빛을 좌표 삼아 걸었다. 밝은 거리도,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도 해영이 느끼는 두려움을 덜어 주진 못했다. 혼자였다. 당장 구석 어디에서 골골대며 쓰러져도 찾아 줄 사람이 없었다. 홀로 차게 식어갈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때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끅끅대는 소리라,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 늦은 밤 아이들 눈을 피해 몰래 울고 싶을 때 냈던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서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가로등 뒤 빛이 들지 않는 비좁은 골목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해영은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거리를 좁히니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작은 아이가 있었다.
무릎을 가슴으로 모아 꼭 끌어안고 얼굴을 박고 있는 아이. 해영은 골목 입구에 멀거니 서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느낀 아이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끅, 뭐야….”
아이는 처음 보는 사람에 몸을 움츠리며 노려보았다. 해영이 눈높이를 맞춰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누구를 챙길 처지가 아니었지만, 저보다 작은 아이를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쓰였다.
“왜, 왜 울고 있어?”
아이는 어른처럼 크지도 않고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는 해영을 보며 서서히 경계를 풀었다. 모으고 있던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무릎을 치우자 드러난 얼굴에는 고집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양껏 오른 젖살은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진한 눈썹을 잔뜩 구기며 입을 열었다.
“누나가, 누나랑 나왔는데, 고양이 따라가다가 나만 느려서…. 기다려 주지도 않고.”
아이는 말을 하다 분을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해영은 난감했다. 보육원에서 어린 동생들을 달래 본 경험을 더듬어 아이의 어깨를 살살 토닥였다.
훌쩍대며 그 손길을 받던 아이가 해영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해영은 오리걸음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아이를 꼭 끌어안아 등을 쓸어주었다. 어깨에 가만히 뺨을 부비던 아이가 해영의 맨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형 왜 맨발이야?”
쫓겨나서. 버림받아서. 사실대로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어…. 더, 더워서.”
솔직히 믿을 줄은 몰랐는데, 어려서인지 아이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 하고 수긍했다.
아이와 살을 맞댄 곳이 따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경찰서에 데려가야겠지. 제 꼴을 보면 저까지 어른들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경찰서 앞까지만 데려다줘야겠다. 해영이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고 손을 맞잡았다.
“가자. 데려다줄게.”
“어디? 우리 집 알아?”
“음, 경찰서 가면 경찰 아저씨들이 집 찾아 줄 거야.”
“싫어!”
아이는 잡고 있던 손을 홱 놓고 소리를 질렀다. 내쳐진 손에서 저릿하게 열감이 올라왔다. 해영은 텅 빈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자신이 뿌리쳐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른 해영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쪽팔린다고….”
해영은 가만히 다음에 올 말을 기다려 주었다. 아이는 잡고 있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고 말을 덧붙였다.
“누나들이 놀릴 거야…. 집도 못 찾아온다고.”
해영은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놀림받기 싫어서 숨기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골목 밖으로 아이를 이끌었다. 아이는 의심쩍은 눈으로 해영을 올려다보면서도 아까처럼 손을 놓지는 않았다.
“집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줄 수 있어?”
그제야 아이는 화색이 되어 손을 공중에 휘적이며 열심히 설명했다. 검은색 대문에 문 옆으로 할머니가 키우는 화분들이 줄 서 있는 집. 문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마당에 하나 있고, 그 나무 옆 벽에 생일마다 키를 재서 칠해 놓는데, 작년에 표시한 것보다 지금 엄청 컸다고 자랑했다.
해영은 아이와 나란히 주택가를 걸었다. 검은색 문을 가진 집은 흔했다. 비슷한 문이 보일 때마다 아이는 뛰어가 확인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아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해영에게 뛰어 왔다. 찾았나 보다. 아이는 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자그마한 손으로 집 하나를 가리켰다. 담 너머로 보이는 나무는 아이가 호들갑을 떨었던 것에 비해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고마워, 형.”
아이는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리고 들어가다 말고 다시 뛰어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해영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아이의 눈에도 제 차림이 멀쩡해 보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잘 가!”
아이는 폭신한 점퍼를 꼭 끌어안은 해영을 보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집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아이의 들뜬 목소리가 담을 타고 넘어왔다.
“아빠! 어떤 형아가….”
해영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따뜻한 집이 있고 가족이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서 밤늦게까지 이러고 돌아다닌 건지. 품에 안은 점퍼를 있는 힘껏 구겨 쥐었다. 이제 제가 갈 곳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로변으로 나가 두리번거리며 빈 택시를 찾았다. 어머니가 했던 것을 떠올리며 손을 쭉 뻗어 흔들었다. 빈 택시 하나가 해영의 앞에 멈춰 섰다. 묵직한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타자 운전석에서 나이 많은 남성이 룸미러로 해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못 미더운 눈이었다.
“서, 성북동이요….”
***
“야, 이 새끼야. 거기 안 서!”
해영은 택시가 정차하자마자 문을 열고 언덕길을 내달렸다. 택시비는 당연히 갖고 있지 않았다. 언덕으로 돌아 들어올 타이밍을 놓친 택시 기사는, 뒷차의 클랙슨 소리에 창문을 열고 해영이 뛰어간 방향 바닥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뒤따르던 길을 혼자 올랐다. 어두울 때 온 건 처음이라 초행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발바닥에 까슬하게 닿는 콘크리트 바닥의 요철을 느끼며 걷다 보니 금세 그 집 앞에 다다랐다.
수차례 어머니가 문전박대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좌절한 모습을 보았고, 그 옆에는 제가 있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있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해영은 떨리는 손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그리고 발끝으로 서서 카메라에 얼굴을 맞추었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버튼을 꾹 누르고 다시 얼굴을 맞추었다. 탁 무언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고, 잠이 묻은 목소리가 기계를 타고 넘어왔다.
―어휴, 또 왔네. 안 보시겠다니까 그냥 가세요.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고. 불퉁하게 덧붙여진 말에 해영은 어깨를 축 늘였다. 연결은 금방 끊겼다. 해영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더 누르고 싶은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민폐 덩어리. 이것만큼 자신을 잘 표현한 단어가 또 있을까. 부모도 원하지 않고, 십 년을 키워 준 수녀님조차 기다렸다는 듯이 보낼 정도로 쓸모없는 존재.
해영은 커다란 대문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기대 작은 외투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아이고, 세상에…!”
문 앞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듯 잠이 든 해영은, 다음 날 아침 장을 보러 나가던 입주 도우미 아주머니에 의해 집 안으로 들여졌다. 한참 만에 눈을 뜨자 시야에는 폭신하고 고급스러운 이불이 가득했다. 방 안 가득 꽃 냄새가 났다. 생화가 아닌 방향제에서 나는 냄새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설프게 흉내만 낸 인공적인 것에서 느껴지는 그런 불쾌함은 없었다. 좋은 냄새. 방문이 열리고, 물수건을 들고 들어오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깼나 보네. 몸은 좀 어때요?”
아주머니는 해영의 이마를 가볍게 짚어 보고 침대 아래쪽에 앉아 이불 밖으로 해영의 발을 하나씩 꺼냈다. 더러운 맨발을 보이는 게 창피했다. 이불 속으로 다시 발을 넣으려다, 하얀 침구가 더러워지는 게 걱정되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아주머니가 가져온 물수건으로 해영의 맨발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열은 많이 내렸는데, 아픈 데 있으면 말해요. 배고프죠? 죽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쌀 불리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네에….”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소금으로 간이 된 흰쌀죽과 젓갈을 곁들여 허기를 채웠다. 회장님이 오시려면 좀 더 있어야 한다고, 더 자라고 했지만 누워 있는 게 더 마음이 불편해 고개를 저었다. 거실 소파 구석에 몸을 움츠리고 앉았다. 회장님이라는 사람이 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해영은 영원 같은 시간을 기다렸다.
벽에 붙은 시계가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남자는 거실 구석에서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해영을 한 번 슥 보더니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해영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머니는 따뜻한 꽃차를 남자와 해영의 앞에 각각 놓고 자리를 피했다. 해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남자를 보았다.
위압적이다. 해영이 그를 보고 느낀 첫 느낌이었다. 키가 유달리 큰 것도 아닌데 풍채가 거대하고 단단했다. 쉬이 다가가기 어려운 무게감이 호랑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거기에는 뭐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매도 한몫했다.
남자가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실 때 나는 흔한 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한 모금 머금은 그가 다시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겉모습과 닮은 묵직한 목소리였다.
“무, 문해영입니다….”
똑부러지게 말해도 받아 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말까지 더듬어 버렸다. 해영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한심하다. 남자는 해영에게서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지 찾는 것처럼 집요하게 훑었다. 불행히도 해영은 남자를 전혀 닮지 않았다. 아들일 리 없다고 내쫓기면 어쩌지. 어디로 가야 하지. 해영을 한참 바라보던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방 하나 비워 주세요. 그 전까지는 손님방을 써야겠네.”
어린 해영의 눈에도 그저 그런 부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만큼 큰 집이었다. 뜬금없이 아들이라고 찾아온 사람을 들이는 과정이 이렇게 만만할 리 없었다.
“저…. 검사 같은 거 아, 안 해보셔도….”
자리를 뜨려던 남자가 해영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덜덜 떨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 끝에 걸린 것은 해영의 상처 난 발이었다. 해영은 재빨리 발을 엇갈려 최대한 가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남자의 눈은 그때쯤 거둬졌다. 그리고선.
“그런 건,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주머니가 안내해 준 방은 아까 해영이 누워 있던 그 방이었다. 침대에 몸을 뉘여 눈을 감았다. 남자의 마지막 얼굴이 아른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하루아침에 더럽고 꾀죄죄한 아이가 아들이라고 찾아온 게 반가울 리는 없겠지. 아들이라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이번에는 잘 해야지. 또 버림받지 않게.
태어나 처음으로 방이 생기고, 성이 바뀌었다. 다시 가게 된 학교에서 아이들이 수군대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 원래라면 평생 쳐다도 보지 못할 곳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만 신세를 지는 거라고, 그때가 되면 다 갚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완전히 아들이 된 날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모르긴 해도 입양 절차가 마무리 됐다면, 어머니 쪽에도 무언가 조치가 취해졌을 것이다. 알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다 생각하고 살아.”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했다. 그 어떠한 소식도 전해 주지 않았다.
해영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그날 대문 밖에서 얼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생이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이뤄낸 아버지의 눈에 미숙한 해영의 발버둥 따위는 마음에 차지 않는 건지, 좋은 성적표를 가져다 드려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옆으로 치워 두곤 하셨다. 그 일이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 뒤늦게 찾아 온 반항심에 대충 본 적도 있었다.
“저, 저 이번 시험 망쳤어요….”
반에서 20등을 한 성적표였다. 담임 선생님도 놀라 해영을 따로 불러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아프진 않은지 물어보실 정도로 엉망인 성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쌓여 있는 서류만 들출 뿐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서걱서걱. 아버지의 만년필 소리가 싫었다. 무관심의 증거 같았다. 반항은 짧았다. 제 주제에 관심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라는 걸 해영은 빠르게 깨우쳤다.
***
서걱서걱.
귓바퀴를 간질이는 소리에 잠에서 깬 해영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샜다. 옆에서 무언가를 적어 내리던 손이 뚝 멎었다. 여전히 눈두덩이에 열감이 뜨끈하게 몰려 눈을 뜰 힘이 없었다. 건우가 손등을 올려 해영의 뺨에 대고 열을 쟀다. 자는 줄 아는 건가. 곧이어 한숨을 폭 내쉬고 다시 서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쩐지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공기였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은 후에도 한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어날 타이밍을 놓치고 눈을 감고 있었더니 금세 또 졸음이 몰려왔다. 간간이 들리는 걱정을 담은 숨소리를 잠벗 삼아 다시 잠들었다. 얼마 후 희미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해영은 완전히 깨어날 수 있었다. 몸이 약해지니 한동안 안 꾸던 어렸을 때 꿈까지 꾸었다. 아직 미열은 남아 있었지만 아까에 비하면 훨씬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침대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베개 바로 옆에 해영의 휴대폰과 일어나면 전화 달라는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바로 연결이 되도록 화면 가득 건우의 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해영은 메모지에서 시킨 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이어지는 몇 초가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침대 옆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두웠다. 아, 몇 시지. 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는 것과 동시에 탁 하고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건우의 것이 아니었다. 여자 목소리였다.
“어…. 죄, 죄송합니다.”
해영이 놀라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액정에 뜬 시각은 저녁 열한 시 삼십 분이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같이 있던 걸 보면 여자 친구겠지?
어제 저녁, 건우에게 걸었던 전화를 끊은 뒤로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 창밖이 푸른색으로 밝아지는 걸 보고 나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 준비하던 시간보다 두 시간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집에 있어 봐야 쓸데없는 잡념만 들 게 뻔하니 도서관이라도 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영은 현관 앞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며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원래도 볼품없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못나 보이지. 아프고 난 후라 그런가. 해영은 손을 들어 푸석해 보이는 뺨과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만져 봐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운동화에 발을 짜증스럽게 구겨 넣었다. 땅이 꺼질 듯 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잿빛으로 흐리고 축축하던 날씨가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추위를 많이 타는 해영은 니트를 집었지만, 밖에 나와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얇은 긴팔 혹은 반팔에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해영은 혹시 몰라 챙긴 단우산을 가방 안에 깊숙이 넣었다.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왜 연락이 없을까. 휴대폰을 꺼내 아무것도 오지 않은 빈 잠금 화면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일어났냐는 문자가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역시 어제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던 게 그를 곤란하게 한 걸까. 해영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밤을 새우게 했던 걱정들이 울리지 않는 알람으로 실체화되는 느낌이었다. 그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그랬다. 해영은 휴대폰 잠금을 풀고 그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뭐라고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다투는 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오피스텔 1층의 주차장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멀리서 얼핏 들어도 분위기가 살벌했다. 해영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열어 두었던 메시지 함을 닫고 전화 아이콘을 눌러 112를 띄워 두었다. 여차하면 바로 신고할 수 있도록.
자동차 뒤에 숨어 거리를 좁히자 대화 내용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니까 남의 전화는 대체 왜 받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우였다. 그는 한쪽 옆구리에 뭉툭한 유리병을 끌어안고 누군가에게 화를 퍼붓고 있었다. 몸을 세워 알은체를 하려던 해영이 그의 옆에 있는 여자를 보고 도로 몸을 숨겼다. 스스로도 왜 숨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휴대폰은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 미안하다고. 내가 직접 얘기해 주면 될 거 아냐. 잠깐 나오라고 해.”
“따라오지 마.”
건우는 해영에게 보여 준 적 없는 서늘한 얼굴로 단호하게 일렀다. 여자는 건우의 그런 태도가 익숙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둘은 투닥투닥 실랑이를 하며 오피스텔 입구로 걸어왔다. 해영이 숨어 있는 쪽이었다. 여자가 해영과 눈이 마주쳤다. 어, 반사적으로 소리를 낸 곳을 따라 건우도 고개를 돌렸다. 남의 차 뒤에 어정쩡한 자세로 숨어 있는 해영을 보고 놀란 얼굴로 단숨에 걸어왔다. 그가 들고 있던 유리병은 레몬청이었다.
“왜 숨어 있어요.”
“여, 엿들어서 미안….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 여자 친구분이랑 같이 있는 줄은 몰랐어…. 죄, 죄송합니다.”
해영이 고개를 건우 옆으로 내밀어 이쪽으로 오고 있는 여성분에게도 사과했다. 그러고 다시 마주한 건우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미쳤어요? 제가 저런 거랑 사귀게.”
“응? 왜?”
사람한테 저런 거라니. 해영이 의문을 갖는 사이, 여자가 금세 앞까지 다가왔다. 건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그녀를 더 이상 밀치거나 막지는 않았다. 해영은 실례인 것도 잊고 여자를 빤히 보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건우와 무척 닮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나, 흑색 머리카락, 그리고 해영과 엇비슷할 정도로 큰 신장.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습관이나 행동에 국한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외형까지 비슷했다. 남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해영의 끈덕진 시선을 본 건우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지만, 해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접어 웃으며 해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상반된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건우 둘째 누나예요. 해영 씨 맞죠? 어제 쟤 잠깐 나간 사이에 전화 울리길래 받았는데,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 누나구나. 해영이 아니에요, 하고 살풋 웃으며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려고 뻗던 중 그녀의 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건우가 해영의 앞을 막아서서 잇새로 말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가라.”
“왜, 귀여운데. 비켜 봐. 인사하고 있잖아.”
“출근 안 하냐?”
그 말에 여자는 혀를 차며 건우를 흘기다가 해영에게 웃으면서 길고 가느다란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네에.”
해영이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했다. 그의 누나는 검은색 SUV에 올라타 반대쪽 골목으로 사라졌다. 차 뒤꽁무니가 사라지는 걸 빤히 보고 있던 해영이 몸을 돌렸을 때, 무시무시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저거 결혼했어요.”
“응?”
“누나 결혼했다고요.”
뜬금없이 알게 된 남의 기혼 사실에 할 말을 찾지 못한 해영이 적당히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구나.”
“왜요? 아쉬워요?”
“응?”
해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자 건우는 씩씩대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유는 몰라도 골이 난 것 같았다.
그는 학교 방향이 아닌 오피스텔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을 따라가려니 발이 바빴다. 해영이 숨을 작게 헐떡대자 그가 속도를 늦춰 주었다. 해영이 유리문을 열고 자신이 들어가길 기다리는 건우에게 물었다.
“우리 집 가는 거야?”
“네.”
“왜?”
건우가 손에 든 레몬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었다.
“이거 주려고 온 거예요.”
레몬청을 주는데 집까지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뭐지. 해영이 들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것도 아니었고, 지금 자신은 손이 모자라지도 않았다. 멍하니 그 자리에서 서 있자 건우가 말을 덧붙였다.
“무거워요. 빨리 가요.”
안 무거워 보이는데….
결국 같이 올라가 건우가 타주는 레몬차를 두 컵이나 받아 마시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너무 셔서 주먹을 쥐고 마셔야 했으나, 애써 챙겨 준 사람 앞에서 투덜댈 수는 없었다. 오늘까지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학교까지 가는 길에도 계속해서 물었지만 해영은 단호했다. 열도 거의 내렸고, 통증도 없었다. 입맛이 조금 없는 걸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아마 건우가 가져다주었던 약을 먹고 넉넉하게 잤던 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레몬차까지 마시니 몸에 옅게 기운이 돌았다.
“그래도 금방 나아서 다행이에요.”
“응. 네가 약도 주고 이런 것도 챙겨 줘서 그런가 봐.”
건우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뒷목을 매만졌다.
“고마워, 건우야.”
챙김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해영은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낯선 외국어를 말하는 것처럼 서툴었다. 그나마도 최근 들어 늘은 표현 중 하나였다. 생각이 날 때마다 말을 하려고 노력했더니 조금 나아진 것 같긴 했지만 그가 해 준 것들에 비하면 아직도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건너편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 건우와 헤어지고, 해영은 강의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 오늘 시험이랬지.”
저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마음이 안 좋았다. 해영은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시험 잘 봐.]
얼마 지나지 않아 곰이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은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건우 닮았다. 해영이 픽 바람 빠지듯 웃으며 메시지 창을 닫으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생일인 친구 목록에 건우의 이름이 있었다. 5월 5일. 일주일 뒤였다.
***
잠이 모자랐다.
일주일 동안 낮에는 과제를 하고 밤에는 건우의 생일 선물을 찾았다. 요즘 애들은 뭐를 갖고 싶어 하는지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고르기가 힘들었다. 확신이 서지 않아 대여섯 번을 바꿨다. 해영은 옆으로 돌아누워 책상 위에 올려진 상자를 바라보았다. 흰색 포장지에 조금 어설프게 매어진 빨간 리본. 어제 두 시간 동안 동영상을 보면서 씨름한 결과였다. 해영은 가슴 부근에 손을 올려 옷자락을 구겨 쥐었다. 커피를 많이 먹은 것처럼 심장이 둥둥 뛰었다. 건우의 생일을 챙겨 줘야지 생각한 시점부터였다. 좋아해 줄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실망하진 않을까. 속이 걱정과 기대로 범벅이었다.
해영은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는 아직 뜯지 않은 택배 상자 세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책상 서랍에서 커터칼을 꺼내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택배 상자를 하나씩 끌어와 개봉했다. 안에는 밝고 요란한 색의 파티 용품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선물만 주려고 했는데 일이 커져버렸다. 생일하면 케이크인데, 하고 생각하다 자신이 우울할 때마다 찾는 케이크 가게가 떠올랐다. 그곳의 딸기 케이크는 최고였다. 빵도 폭신하고 크림도 담백했다. 무엇보다 설탕에 절인 딸기를 사용했다. 과일의 단맛보다 초콜릿 같은 꾸덕한 단맛을 더 좋아하는 해영도 이곳만큼은 딸기 케이크를 고집했다. 기분이 왜 안 좋았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행복한 맛이다. 건우에게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예약을 했다. 딸기 케이크를 든 건우를 떠올리고 고깔까지 씌우고 싶어진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파티 용품 쇼핑몰을 검색하고 들어갔다. 해영은 거기서 눈이 돌아 폭죽이며 테이블 장식, 가랜드 등 온갖 장식들을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생일을 안 다음 날 바로 주문했더니 주말을 끼고도 늦지 않게 도착했다. 빨리 시켜서 다행이다. 다 제 손으로 시킨 것들이지만 실물로 마주하니 아까보다 박동이 더 거세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은 걸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급하게 준비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모르고 지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일 당일이 되었다.
“초, 초도 주세요.”
이 가게에서 케이크를 여러 번 구매했지만, 초를 요구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케이크라도 혼자 불을 붙이고 끄는 건 너무 궁상맞은 일이니까. 점원은 초가 든 봉투를 케이크 옆에 붙여 주고 카드를 받았다. 계산을 하는 동안 해영은 눈앞에 놓인 하얀 케이크 상자 모서리를 손끝으로 조심히 매만졌다. 안으로 보이는 빨간색 딸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네?”
“오실 때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가져가시길래 안 좋은 일 있을 때 사 가시는 줄 알았거든요.”
“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가져가는 사람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해영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여기 케이크를 정말 좋아하는데 기분이 안 좋을 때 먹으면 다시 좋아져서….”
가게 사장님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받으실 분도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네요.”
집에 돌아온 해영은 사장님의 당부대로 케이크를 곧바로 냉장고에 넣어 놓고 바쁘게 움직였다. 택배 상자를 거실로 가지고 나와 안에 있는 것들을 바닥에 펼쳐 놓았다. 가장 먼저 가랜드를 달았다. 높게 다는 게 예쁠 것 같아서 커튼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달았는데, 내려와서 보니 삐뚤어져 있어서 두 번이나 고쳐 달았다. 그다음에는 식탁을 거실로 옮기고 선물과 고깔을 그 위에 각 맞춰 올려 두었다. 풍선을 불던 중에는 공기 주입기를 사지 않은 걸 후회했다. 이십 개 쯤이야 금방 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중간에 세 번이나 쉬었다가 다시 불어야 했다. 해영은 핼쑥해진 얼굴로 바닥에 풍선들을 흩뿌려 놓았다. 거실이 알록달록한 풍선들로 환해졌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해영은 동그랗고 예쁘게 불어진 풍선 하나를 품에 안고 침대에 몸을 누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너무 빨리 했나. 이제 한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슬슬 전화해 봐야지. 해영은 최근 통화 목록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우의 이름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
신호음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받은 건우가 답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 그냥. 뭐 하나 하고….”
싱거운 대답에도 건우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별 이유 없이 먼저 전화한 게 처음인 거 아냐며,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제가 통화에 그렇게 박했나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정말 건우의 말대로였다. 용건이 있을 때 몇 번 빼고는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없었다.
“밖이야?”
―안 그래도 방금 톡 하려고 했는데. 저 지금 가족이랑 강릉 왔어요. 눈 뜨자마자 붙잡혀 와가지고. 아마 내일 갈 것 같아요.
해영이 대답도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강릉. 왜 당연히 약속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건우한테는 티격태격해도 챙겨주는 가족도 있고, 학교에서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저에겐 없는 것들이라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여기 밤바다 엄청 예뻐요. 이따 사진 보내드릴게요.
“응, 알겠어.”
해영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멀리서 건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건우는 전화가 끊길 때까지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
아직 생일을 챙겨 줄 사이가 아닌 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해영은 이 정도로 가까운 인간관계가 처음이었다. 건우는 해영에게 온갖 처음을 알려 주는 사람이었고, 그 경험은 좋은 것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이번 역시 그럴 거라 확신했다.
다른 사람 생일을 이렇게 챙겨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다. 바보처럼 약속도 잡지 않고 혼자 들떠 있던 거다.
서운했다. 속이 상했다. 그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생일인 걸 미리 직접 들었더라면 오늘 무얼 하는지 물었을 것이다. 물었다면, 지금 이 난리를 피우진 않았겠지.
해영은 침대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허무해. 어질러 놓은 것들을 치울 힘이 없었다. 베개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바보 같아.
머리 옆에서 울리는 끈질긴 진동음에 해영은 손을 뻗었다. 눈이 잔뜩 부어서 떠지지가 않았다. 어림잡아 통화 버튼이 있는 곳을 꾹꾹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무셨어요?
뻑뻑한 눈을 겨우 떠서 액정을 확인했다. 오후 8시였다. 응, 잠이 덜 깨 웅얼거리듯 목울림으로 대답했다.
―저 뭐 드릴 거 있는데 잠깐 올라가도 돼요?
“어? 어, 어딘데?”
해영이 눈을 번쩍 떴다.
―오피스텔 앞이에요. 여쭤 보고 오려고 했는데 연락이 계속 안 돼서. 벌써 주무실 줄 몰랐어요. 다음에 올까요?
마음에도 없는 다음을 묻는 목소리에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분명 다음 날 온다고 했는데. 하루를 넘게 잔 건가?
“오늘이, 벌써 내일인가…?”
전화 너머로 낮게 웃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오늘은 오늘 맞아요. 심심해서 빨리 왔어요.
사실 건우는 낮에 해영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보다 못한 첫째 누나가 뭐 두고 온 게 있느냐고 물었고, 그 길로 기차를 예매해 타고 올라왔다. 손에는 누나들이 온갖 욕을 하면서 맛있다고 감탄을 한 에그 타르트 한 박스를 든 채였다.
공휴일인 건우의 생일날만 되면 나머지 가족들끼리 계획을 세워 ‘건우 탄생 기념 여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여기저기 훌쩍 떠났다. 차건우를 끌고 가도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명분이 필요했던 것뿐이라, 가족들은 건우 없이도 잘만 놀았다. 두고 오면서도 크게 걱정이 없었다.
해영에게는 생일을 굳이 알려 주지 않았다. 알게 된다면 놀란 얼굴로 축하해 주겠지만, 오늘은 그런 얼굴보다는 그냥 맛있게 먹고 마음 편히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으니까.
“잠깐만.”
심심해서 빨리 왔다니. 건우의 말을 곱씹던 해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올라오라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해영의 얼굴이 당황으로 잔뜩 굳어졌다. 아까 그 난리를 쳐 놓고는 치우지도 않고 잠들었다는 게 떠올라서였다.
“시, 십 분만!”
십 분을 기다려 달라는 건지 십 분 동안 있다 가도 된다는 건지, 뒷말도 잊은 채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제가 초대해서 오는 거면 몰라도 혼자 김칫국 마시고 기다렸다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스프링이 튀어 나가듯 거실로 나간 해영이 풍선부터 터트리기 시작했다. 가장 부피가 크고 많고 눈에 띄는 것이었다. 펑펑 터지는 소리가 무서웠지만 시간이 없었다. 움찔 움찔 떨면서 열심히 터트렸다. 가랜드를 뜯어내던 중에는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10분이 되자마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풍선 잔여물과 고깔, 선물을 대충 소파 위에 널브러진 담요 밑으로 숨겨 넣었다. 봉긋 솟은 곳을 꾹 누르고 현관으로 뛰었다.
문을 열자 건우가 넓고 높이가 낮은 디저트 박스를 들고 서 있었다. 해영의 부은 얼굴을 보고 멈칫한 건우는 금방 표정을 풀면서 디저트 박스를 살짝 들어 보였다.
“유명하다고 해서 사왔어요. 에그 타르트.”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지만 건우는 박스를 건네주지 않았다.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빨리 먹고만 가는 거면 안 들키겠지? 일부러 먹을 걸 사다 준 사람을 그냥 보내는 것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해영은 벽 쪽으로 붙어 섰다.
“들어와….”
정답이었는지 건우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으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가 식탁 위에 박스를 올려놓고 손을 씻고 오는 사이 해영은 포크를 꺼내 왔다.
에그 타르트는 정말 맛있었다. 먹기 전부터 누나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먹었다느니, 각자 두 박스씩 사 갔다느니 하기에 기대치가 올라간 상태로 맛을 봤는데도 맛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강릉에서 여기까지 꽤 걸렸을 텐데 타르트지가 눅눅하지도 않고 바삭했다. 필링도 쫀득하고 달달해서 해영이 좋아하는 맛이었다.
순식간에 세 개를 해치운 해영이 네 번째 타르트를 포크로 푹 찍었다. 앞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타르트를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멈춘 해영이 눈만 위로 치켜떴다. 건우는 타르트에 손도 대지 않고 해영이 먹는 모양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신경이 쓰이는 와중에도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자 건우의 입에서 또 한 번 웃음소리가 샜다. 왜 저래. 해영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콜록거렸다. 눈치를 보면서 먹으려니 옅게 사레가 들렸다. 건우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마실 거 있어요? 물 드릴까요?”
“냉장고에 우유-.”
해영의 말에 건우가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때, 낮에 넣어 둔 케이크가 떠올랐다. 해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켜 그를 막아섰다.
“내가! 내가 가져올게.”
건우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해영은 냉장고 안쪽이 안 보이도록 최소한으로 열고 우유를 재빠르게 꺼냈다. 찬장에서 유리컵 두 개를 꺼내 우유를 따라 식탁으로 가져가는데 건우의 표정이 이상했다. 미간에 홈이 잔뜩 패여 심각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선배, 설마.”
해영의 뒤통수가 서늘했다. 설마 케이크가 보였나.
“설마 벌써 안에 엉망 됐어요?”
며칠이나 됐다고…. 건우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아, 아니야….”
“그럼 뭐 맛있는 거라도 숨겨 놨나.”
건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
“농담이에요.”
해영의 속이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들킬까 봐 두려웠다가 안도했다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기분이 바닥까지 푹 꺼졌다가 솟아오르는 것을 반복했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 화, 화장실 좀….”
해영은 건우를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예상대로 엉망이었다. 울다가 잠들어서 퉁퉁 부은 얼굴에, 혼자 속앓이를 하느라 잔뜩 굳은 표정. 해영은 세면대 물을 틀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래도 생일은 생일이니까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싶었다. 차게 젖은 손으로 양 뺨을 톡톡 두드렸다. 거울을 보고 입꼬리를 과장되게 쭉 끌어 올리고 나서 욕실 문을 열었다.
“건우야, 저녁….”
겨우 풀어 둔 표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건우는 식탁이 아닌 소파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등을 돌린 건우의 손에는 구겨진 고깔이 들려 있었다.
“선배.”
건우는 고깔과 들쳐진 담요 속 물건들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해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소파와 그의 사이를 비집고 서서 담요를 도로 덮었다.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앞에서 본 건우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해영이 고깔로 손을 뻗었지만, 그는 내어주지 않았다.
“이거 아,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아닌데요.”
거짓말을 하려니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해영은 떨리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면서 물었다.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될까?”
건우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해영을 내려다보다가 돌연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게 냉장고라는 걸 눈치챈 해영이 그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움켜쥐었지만, 건우의 발걸음은 단호했다. 그는 해영을 뒤로하고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안쪽을 확인한 건우가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거실로 걸어와 담요 밑에서 장식들을 하나둘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중 구깃구깃 주름으로 엉망이 된 가랜드를 집어 든 그가 숨을 한 번 고르고 해영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해 주세요.”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피부 위로 따끔하게 내려앉는다. 바람이 빠진 풍선, 찌그러진 고깔, 해영이 제 손으로 맨 리본이 달린 엉성한 선물. 모두 다시 한다고 해서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집을 부렸다. 기대하고 준비한 해영을 위한 말이라고 해도 이미 엉망이 된 일이었다.
“아니야. 나, 나 괜찮아. 별로 준비한 것도 없고….”
“제발, 다시 해 주세요.”
왜인지 건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해영은 창피한 것도, 수치스러운 것도 까맣게 잊었다. 이유는 몰라도 저런 얼굴을 하고서 부탁하는 건우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해영은 가랜드를 도로 다는 와중에 건우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는 열을 식히려는 사람처럼 숨을 훅훅 내뱉고 있었다. 그러더니 선물을 들고 식탁 의자에 앉아 제 손으로 고깔을 잡아 썼다.
가랜드를 다 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해영이 케이크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위에 올려놓았다. 초를 꺼내고 불을 붙이는 동안, 건우는 그 과정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동영상 찍어도 돼요?”
“어? 그건 안 돼…. 자다 일어나서 엉망이고, 또….”
“어차피 지금 보고 있는 거 그대로 찍는 건데요. 저만 볼게요.”
“좀 그런데….”
“저 생일 아직 안 끝났어요.”
건우는 제가 뭐에 약한지 꿰뚫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활짝 웃으며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했다.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그는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 들고 있으면서도 눈은 액정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한쪽도 놓치기 싫은 사람처럼 굴었다.
“노래 불러 주세요.”
“아, 안 해….”
“그럼 축하한다고 해 주세요.”
끈질기게 떼를 쓰는 것에 해영이 눈을 홉떴다. 생일이니까 봐준다.
“생일 축하해, 건우야.”
20대 초반 대학생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것들은 블로그마다 브랜드나 가격대의 차이만 있을 뿐 품목은 거의 동일했다. 향수, 시계, 지갑. 무난한 게 좋을까 싶어서 그중에 고르려고 했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받는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타르트나 책 한 권을 받는 게 훨씬 기분이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하는 것,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역시 건우가 좋아하는 것과 연관된 물건을 주는 게 좋겠다고 해영은 생각했다.
그는 유독 밥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케이크를 줄 때도 밥을 먹고 먹어라, 과제가 많을 때도 밥은 먹고 해라. 집에 처음 초대했을 때도 그렇고 요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관련된 걸 주고 싶었는데 요리에 관심이 없으니 떠오르는 게 죄다 선물로 주기 힘든 커다란 가전제품뿐이어서 백화점에 가 보기로 했다. 주방 용품 코너를 돌아다니던 중, 아들내미 같다고 붙들려 갈색 남성용 앞치마를 영업당했다. 아주머니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긴 했지만,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건우가 입으면 어울릴 것 같아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손에 들려진 천 쪼가리를 보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상자도 따로 없어서 어설프게 직접 싼 포장지에 삐뚤어진 리본. 그마저도 아까 급하게 숨기느라 다 구겨진 상태였다. 그렇게 엉망인 것을 푸는 커다란 손은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그, 그거 쉐프들이 쓰는 브랜드인데, 방수도 잘 된대…. 잘 구겨지지도 않고. 너 요리 좋아하니까….”
아주머니에게 들었던 것들을 덧붙여 봤지만, 초라한 건 여전했다.
“이런 게 취향이에요?”
그는 쭉 펼친 앞치마를 해영의 쪽으로 반 바퀴 돌렸다. 건우가 보여 준 앞면을 마주한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치마 아래쪽 주머니에는 동그란 곰돌이 얼굴이 자수로 박혀 있었다.
분명히 살 땐 저런 거 못 봤는데. 백화점에서 진열되어 있던 모양을 떠올렸다. 반으로 접혀 주머니 윗부분만 보이도록 개어져 있던 모양. 아주머니의 말솜씨에 홀려 펼쳐 보지도 않고 그대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저 앞치마의 포인트는 곰돌인데, 곰돌이가 안 보이게 놓으면 어떡해요. 해영은 아주머니를 원망했다.
“잘못 샀어…. 이리 줘. 환불할래.”
“싫어요. 제 거예요.”
앞으로 쭉 내민 해영의 손을 피해 앞치마를 사수한 건우가 다시 잘 개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언젠간 뺏고 말 거라고, 해영은 다짐했다.
***
중간고사가 끝나고 축제가 시작됐다.
한국대 축제는 즐길 거리가 없기로 유명했다. 원체 학교 분위기가 놀 거리나 도움 안 되는 행사 등에 시간과 비용을 쏟기보다는 취업에 도움이 되는 활동 위주로 지원하는 분위기라, 축제 예산 자체가 다른 주변 대학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해도 대학생은 대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와서 숨이 트이길 기대했던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어 가기로 손을 모았다.
외부에서 가수 라인업을 보고 오는 사람들은 손에 꼽았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부스나 프로그램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학생들은 과별로 주어지는 하나의 부스에 온 정성을 쏟았다.
건우는 과대가 알려준 부스에 아침 일찍 도착했다. 전날부터 바쁜 것 같더니. 모양새는 얼추 다 갖춰 놓은 상태였다. 바쁘게 테이블과 의자를 옮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영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형!”
뒤에서 과대 이규진이 건우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해영 선배는 어딨어?”
“네? 누구요?”
“3학년 선배.”
“아, 재료 가지러 가셨어요. 주차장에 계실 거예요.”
건우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과대가 알려 준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축제를 돕기로 한 건 온전히 서해영 때문이었다. 또 바보처럼 가장 선배면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거 아닌가. 걸음이 급해졌다.
건물을 돌자 주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트럭에서 이것저것 옮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낑낑대는 해영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택배 상자를 들고 위태롭게 걸어오는 서해영.
차건우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그가 들고 있는 상자를 뺏어 들었다. 해영이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제가 들게요.”
“어? 아냐, 내가….”
해영은 제가 할 일이라며 손을 뻗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앞서 걸었다. 그 뒤로도 세 번 더 상자를 옮기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해영도 함께 옮기겠다며 건우와 같은 크기의 상자를 들어 올렸다가 말도 안 되는 무게에 기겁하고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마터면 발이 찧일 수도 있는 위치였다. 건우는 조심하라고 화를 낼 뻔했으나 꾹 참았다.
결국 해영은 큰 상자를 옮기는 걸 포기하고 곁에 있던 비닐봉지나 쇼핑백을 같이 날랐다. 해영이 일을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짐을 나르는 동안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아이스크림 드세요!”
마지막 상자를 부스 안에 내려놓았을 때 과대가 편의점 로고가 박혀 있는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다들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던 터라 아이스크림 따위를 고를 여유가 없었다. 과대는 돌아다니면서 랜덤으로 집어 하나씩 건네주었다.
해영의 앞에는 배 맛 아이스크림이, 제 앞에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 놓였다. 해영은 건우의 앞에 놓인 초코 아이스크림을 힐긋거리며 한숨을 폭 쉬었다.
건우는 작게 웃고 자신의 것을 해영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리고 해영의 배 맛 아이스크림을 가져가 까서 입에 물었다. 해영은 별거 아닌 일에도 고맙다는 말을 수시로 입에 올렸다. 그 간지러운 느낌이 좋았다.
“고마워, 건우야.”
해영이 기대감 섞인 얼굴로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까서 작은 입에 물었다. 춥춥 소리를 내며 앞뒤로 녹여 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치도 없이 아래에 열이 올랐다. 해영이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아 넘겼다. 미쳤나.
“형. 형은 도와주러 오신 거니까 입구 쪽에서 손님 왔을 때 안내만 해 주세요. 다른 건 다 저희가 할게요.”
아이스크림을 모두 나눠 준 규진이 다가와 입구 쪽에 배치된 플라스틱 의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건우는 대답 않고 해영의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선배는 어떤 거 해요?”
“나? 굽는 거.”
해영이 뜨거운 불 앞에서 고생하는데, 자신만 편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건우는 다시 과대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그거.”
“네? 형. 그냥 편하게 계세요. 굽는 거 힘들어요.”
“괜찮아.”
“그거 그냥 지원자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다고.”
어려운 말도 아닌데 여러 번 반복하게 하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과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굳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규진은 조리 담당이었던 다른 학생을 찾아가 바뀐 역할을 전달했다. 얼결에 쉬운 일을 맡게 된 학생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너 이제 힘들어서 운다.”
해영이 반도 넘게 남은 아이스크림을 빨며 건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건우가 풀어진 얼굴로 해영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속삭이며 답했다. 대놓고 흉내 내는 모습에 해영이 코끝으로 웃었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음식을 파는 부스가 모여 있는 곳에 사람이 넘쳐났다. 낮부터 캠퍼스 내를 돌아다니며 방탈출이다, 게임이다 바쁘게 하고 다닌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찾아왔다. 거의 모든 부스가 만석이었고, 경영학과 부스 사정도 다를 바 없었다. 안쪽은 물론이고 바깥 테이블까지 가득 찼다. 대기 인원까지 생겨 입구 바깥으로 길게 줄이 서 있었다.
건우는 양손에 목장갑을 끼고 쉴 새 없이 닭꼬치를 구워댔다. 걸치고 있던 외투는 진작에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뻐근한 목을 풀고, 검은색 반팔 티 위로 팔뚝을 가볍게 주물렀다. 욕이 목까지 차올랐다.
탕 종류는 테이블당 한두 번 조리하고 나면 추가로 주문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에 반해 닭꼬치는 어쩜 그렇게 빨리도 처먹는 건지, 들고 다닐 수 있는 음식이라 테이크 아웃도 적지 않았다.
내가 하길 다행이지, 시팔.
건우는 닭꼬치가 타지 않게 부지런히 뒤집으면서도 간간이 옆을 살폈다. 해영은 건우가 불에 손도 못 대게 한 탓에 안절부절못하며 상자에서 새 닭꼬치만 열심히 꺼내 건네주었다.
“나도 목장갑 주면 안 돼…?”
그가 닭꼬치 세 개를 내밀며 물었다. 해영이 불에 손을 대는 건 여러 의미로 곤란했다. 건우는 못 들은 척 받아 들고 그릴 위에 줄 맞춰 올려 두었다. 다시 할 일이 없어진 해영은 옆에 있는 상자의 각을 맞추거나 다 쓴 비닐을 한 곳에 모아 두는 둥 최대한 놀지 않도록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보조적인 일들은 억지로 꼼지락거릴수록 되레 게으름 피우는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더 이상 할 일이 보이지 않자 해영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입을 비죽거렸다. 건우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잡아 내리고 말했다.
“선배. 저 앞치마 풀어진 것 같아요.”
“어? 어디.”
건우는 해영의 쪽으로 등을 돌렸다. 허리 아래로 매여진 검정색 앞치마의 뒷매듭은 오픈 전에 해영이 손수 묶어 준 것이었다. 귀찮아서 대충 치렁치렁 걸치고 다녔더니 보다 못한 해영이 뒤로 돌아 보라고 했다. 정말 손이 많이 간다고 투덜대며 묶은 매듭은 엉망이었지만, 걸치고 다녔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모양이라 해영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작은 손으로 허리를 간질이던 감각이 좋았다. 한 번 더 매 주었으면 했는데 나름대로 신경 쓴 매듭은 풀어지기는커녕 심하게 안정적이었다.
“안 풀어졌는데?”
“이상하다. 좀 불편한 것 같은데. 다시 매 주세요.”
“음, 나는 이렇게 밖에 못 묶을 것 같아…. 미, 민지야. 잠깐만.”
“아니, 됐어요.”
“응?”
“괜찮은 것 같아요. 빨리 닭꼬치나 더 주세요. 네 개.”
건우는 손가락을 네 개 펼쳐 보이며 말했다. 해영은 자신의 부름에 이쪽으로 걸어오던 김민지에게 미안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건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에 안 들었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지만 최근 들어 해영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주변에 종종 눈에 띄어 건우는 굉장히 예민해진 상태였다. 음울한 얼굴로 축 처져 다니던 학기 초와 다르게 웃는 모습이 잦아졌다. 제가 옆에서 버티고 있어서인지 만만하게 보는 이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해영은 웃으면 눈이 아래로 축 처져서 말랑말랑한 얼굴이 되었는데, 그걸 다른 놈들도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손에 제대로 쥐기도 전에 홀라당 뺏기면 어쩌나, 신경이 곤두섰다. 해영이 누군가와 말을 섞는 것만 봐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거슬렸다.
“건우야.”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닭꼬치를 굽는 데 집중을 하고 있던 건우를 해영이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하며 나직하게 불렀다. 건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숙여 주었다. 얼굴이 가까웠다. 키를 맞춰 준 건우의 얼굴을 빤히 보던 해영이 하얀 손을 뻗어 온다. 그리고 건우의 뺨을 엄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검은 거 묻어서. 이거.”
해영은 거뭇한 흔적이 묻은 엄지 안쪽을 건우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부스 바깥의 음악 소리인지, 몸 안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를 쿵쿵대는 진동음이 귓가를 열띠게 울려댔다.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 닭꼬치 탄다.”
해영이 검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는 그릴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건우는 닭꼬치를 빠르게 뒤집고서 속 편하게 쉬고 있는 탕 담당을 향해 손짓했다.
“여기 좀 잠깐 맡아 줘.”
얼떨결에 지목당한 탕 담당은 입꼬리를 축 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건우는 아무 말 않고 한 번 더 손짓했다. 그리고 터덜터덜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목장갑을 빠르게 벗어 준 뒤 의자 위에 걸쳐 놓은 겉옷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들었다.
“아, 아니야. 내가 하고 있을게.”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그릴 쪽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을 몸으로 막은 건우가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 의자에 앉혔다.
“선배 일 많이 했으니까 시키지 마.”
건우는 탕 담당을 향해 으르고 나서야 부스 밖으로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데리고 나오고 싶었지만 지금 눈앞에 세워 두었다가는 선을 넘어 버리거나, 아니면 참다가 머리가 어떻게 되거나 할 것 같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계절의 미지근한 밤공기는 열 오른 몸을 식히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건우는 주차장 옆 구석진 곳, 학교에 있을 때 자주 담배를 태우는 곳으로 향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술 사이에 물고 불을 붙여 크게 한 모금 빨아들이니, 그제야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손을 올려 아까 해영의 손끝이 닿았던 뺨을 매만졌다.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축제라고 들뜨기라도 했던 건가.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해영의 옆에 붙어 있었더니 뭉근한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온몸을 부지런히 데웠다.
사춘기도 아니고.
해영이 별 의미 없이 툭툭 던지는 것들에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그 기분이 싫은 건 아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발밑이 낭떠러지인 상태로는 불안했다. 디딜 곳이 필요했다. 확신. 그것만 주어진다면 그의 손에 얼마든지 끌려다녀도 좋다.
말을 해볼까. 당장 뭐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제가 어떤 마음인지 알아주었으면 했다. 건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티셔츠에 코를 박았다. 숯불향과 담배 냄새가 섞여 엉망이었다. 미간이 깊게 팰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고 담배를 비벼 껐다.
오늘은 아니네.
***
건우는 축제 마지막 날만 벼르고 있었다.
이날 오후 타임부터 과에서 운영하는 모든 부스 운영을 중단시켰다. 축제 공연의 라인업이 가장 화려한 날이라 저녁에는 부스에 몰리는 인원 자체가 적기도 하고, 또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빌어먹을 닭꼬치와도 두 시부터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가 뽀송뽀송한 티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해영과 축제 동안 함께 고생했던 한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공연도 보고.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타이밍을 잡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이규진 놈이 해영이 듣는 옆에서 뒤풀이 뒤풀이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다 망해버렸다. 뒤풀이도 있냐며, 기대 섞인 눈으로 물어보는 해영에게 차마 그런 데 가지 말자고 잘라 말할 수가 없었다.
“형. 근데 뒤풀이 진짜 가세요?”
술자리라면 기함을 하고 피해 다니던 전적이 있으니 이해는 하겠는데, 과대 놈은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왜. 가지 말까?”
“아니요! 이런 거 잘 안 오시니까 혹시나 하고요. 자꾸 물어봐서 죄송해요.”
규진은 자기가 뭘 망쳤는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웃었다. 건우는 낮게 혀를 차고 해영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뒤풀이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내내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가.
“뒤풀이 가서 좋아요?”
“응…. 좋아. 다 같이 술 먹고 그럴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너, 너는 싫어?”
해영이 불안한 낯으로 물었다.
“저도 좋아요.”
단둘이 마시는 게 더 좋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취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오히려 약간의 술기운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 취하지만 말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온갖 노동을 신입생과 해영에게 떠맡긴 2학년들까지 뒤풀이에 함께였다. 학교 근처에 이 정도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술집이 손에 꼽아서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공간이 넓은 곳은 이미 다른 과가 예약을 한 상태였고, 어쩔 수 없이 학년을 나눠서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가게를 쓰기로 했다. 2학년이 있는 곳과 신입생 사이에서 갈팡질팡 고민하던 해영을 건우가 제 쪽으로 이끌었다.
고작 축제 며칠 같이 했다고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건지, 버릇없이 해영에게 술을 부어대는 놈들을 쳐내느라 진이 다 빠졌다. 끈질기게 소맥을 내미는 놈의 입에 먹태를 한 움큼 넣어 주고 나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건우가 만족한 얼굴로 해영에게 안주를 끌어다 주는데, 그가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왜 술 못 마시게 해?”
술을 못 마시게 하다니. 말도 안 되는 비율로 타다 주는 소맥만 돌려보냈을 뿐, 맥주는 제가 옆에서 쉬지 않고 따라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영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직접 소주병을 들어 반쯤 남아 있던 맥주잔에 들이 부었다.
“선배, 이거 너무….”
뭐라 말릴 틈도 없이 한 번에 들이킨 해영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한번 비슷한 비율로 타다 마셨다. 그러더니 급기야 건우에게도 같은 것을 내미는 게 아닌가.
“엄청 맛있는 비율을 차, 찾았어.”
건우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주는 잔을 받았다. 해영이 옆에서 기대하는 눈으로 제가 마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취하지 말자.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는 정신력으로 버텨야 한다고 거듭 다짐한 건우가 눈을 질끈 감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건우야….”
해영이 곤란한 얼굴로 제 어깨에 기대어 잠든 건우를 툭툭 건드렸다. 고작 소맥 두 잔으로 사람이 이렇게 취할 수 있다니. 그가 주량을 미리 알려 줬더라면 그렇게 권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2차를 가거나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건우의 집을 모르는 사람들은 평소 같이 다닌다는 이유로 해영에게 그를 떠맡겼다. 건우의 집을 모르는 건 해영도 마찬가지였지만, 차마 길바닥에 두고 갈 수는 없어 적당히 눈에 보이는 벤치까지 부축해 앉았다. 여기까지는 어찌저찌 왔는데 도저히 제 집이나 다른 어디로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차건우는 아주 많이 무거웠다. 제발 깼으면 좋겠다고 해영은 간절히 바랐다.
“저, 정신 좀 차려 봐….”
그러나 건우는 대답 없이 낮게 칭얼대며 해영의 어깨에 이마를 비벼댈 뿐이었다.
혹시 취한 척하는 게 아닐까.
해영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 생각했다. 같은 자세로 거의 두 시간째 앉아 있었더니 눌린 곳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건우는 종종 자신을 놀리는 걸 즐겼다.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사람이 그 정도 알코올에 취할 수 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잠들어 있는 건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꾹 문 채 어깨를 홱 잡아 뺐다.
멋쩍은 듯 바로 앉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건우는 그대로 벤치에 옆머리를 처박았다. 해영은 입을 크게 벌렸다. 어떡해.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씨….”
건우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히 손바닥 아래로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대로 손을 내려 마른세수를 몇 번 해대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검은색 외투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어 주머니를 뒤졌다. 양쪽, 그리고 안주머니까지 확인하고 나서 왜 없어, 하며 중얼거리고선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 도로 눈을 감았다.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담배 찾아?”
해영이 묻자 그가 고개를 옆으로 툭 돌리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옆에 누가 있다는 걸 지금 알아차린 사람처럼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술집에 있을 때만 해도 담뱃갑이 그의 앞에 놓여 있던 걸 보았다. 취한 그를 챙기느라 가게에 놓고 나왔거나, 아니면 오는 중에 흘렸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건우는 옆에서 등받이에 팔을 올려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해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해영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그가 했던 것처럼 외투를 다시 한번 뒤졌다. 확실히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편의점 갔다 올 테니까, 어,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알겠지?”
건우는 대답이 없었다. 해영은 그의 팔을 잡아 살살 흔들며 한 번 더 또박또박 일렀다.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같이 가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너 어, 엄청 무겁다고. 빨리 갔다 올게.”
“걸을 수 있어요.”
건우는 고집을 부렸다. 취한 사람을 붙들고 이야기해 봤자 답답한 건 멀쩡한 사람뿐이었다. 무시하고 다녀올 생각으로 몸을 돌리던 중, 건우가 팔을 움직여 해영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보드라운 손을 천천히 매만지다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빈틈없이 옭아맸다.
“안 버린다며.”
건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꼭 맞닿은 손바닥에서 박동이 쿵쿵 요란하게 울려댔다. 줄곧 담아 두고 있던 건지, 마음 쓰이던 이야기를 도로 꺼내 해영을 멈춰 세웠다. 해영이 대답 않고 있자, 그는 눈썹을 팍 구기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해영을 향해 당당한 얼굴을 해 보였다. 우뚝 선 모양과 달리, 붙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해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손 놓고 서 봐.”
“싫어요.”
어린애도 아니고. 해영은 한숨을 내쉬며 취객과 함께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문을 열자 작고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다 큰 성인 남자 두 명이 손을 맞잡고 들어오는 걸 본 알바생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해영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손을 털어냈다. 의외로 건우는 쉽게 놓아주었다. 그리고 휘청이는 걸음으로 편의점 안쪽으로 걸어갔다. 과자라도 사려는 건가. 해영은 카운터에 서서 온갖 담배로 가득한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를 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건우를 찾았다. 어디 갔어.
걸음을 조금 내어 과자 진열대 사이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모습에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 뭐 해…?”
건우는 아이스크림 박스를 뒤지고 있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꺼내 품 안에 가득 안았다. 저러다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꺼내고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을 하고 아이스크림 박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해영이 있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잔뜩 들고 오는 아이스크림은 축제 첫날 제게 양보해 줬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벙찐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영을 지나친 건우가 카운터 위로 아이스크림을 우수수 쏟아냈다. 어림잡아 봐도 이삼십 개는 되어 보였다. 당황한 건 해영뿐만이 아니었다. 알바생 역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걸 다 사는 게 맞냐고 재차 확인했다. 건우는 카운터 위 냅킨을 챙기며 카드를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담배를 사러 갔다가 아이스크림만 한 트럭 사 가지고 나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까 한참을 앉아 있던 벤치에는 그새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조금 더 걸어 사람이 없는 돌계단을 찾아 앉았다.
“더 사 주고 싶었는데 이거밖에 없었어요.”
건우는 들고 있던 묵직한 봉투를 해영에게 내밀었다. 그가 산더미처럼 들고 온 아이스크림을 봤을 땐 그날 건우도 속으로는 이걸 먹고 싶었나, 못 먹어서 그렇게 아쉬웠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저에게 주려고 산 거였나 보다.
“고마워.”
해영은 봉투를 받아 들고 펼쳐서 안을 확인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야 하지. 막막하긴 했지만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라 기분 나쁜 막막함은 아니었다. 해영이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서 입에 물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빤히 보던 건우가 코끝으로 웃더니 아예 몸을 돌려 앉아 먹는 것을 대놓고 구경했다. 보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 안 받겠다고도 안 하고, 부탁이 뭔지 물어보지도 않네.”
건우가 말했다. 놀리는 건가, 싶어 표정을 확인했지만 그래 보이진 않았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을 했건, 해영은 그가 정말 무서운 앤 줄 알고 도망 다녔던 과거가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그런 지 좀 됐는데….”
해영이 조용하게 대꾸했다. 그걸 들은 건우가 웃음이 가득 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포근한 밤공기에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았다. 주륵. 막대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급히 바깥쪽으로 기울였다. 건우는 해영의 소매를 돌돌 접어 주고, 주머니에서 아까 챙긴 냅킨을 꺼내 아이스크림 막대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는 혼잣말과 닮아 있었다. 해영은 그가 말아준 냅킨 위로 막대를 쥐고 다시 입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입을 크게 벌리고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뱉어 냈다.
“호, 혹시 이거 부탁 들어달라고 주는 거야?”
어쩐지 많이 준다 했어. 해영은 허망한 얼굴로 봉투 안 아이스크림들을 내려다보았다. 제 속도 모르고 건우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이미 먹었네. 큰일 났다.”
해영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건우는 다 들어줘야겠네, 하면서 계속 겁을 줬다. 분명 봉투 안에 수북이 쌓인 아이스크림들도 거의 녹아 버렸을 것이다. 환불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해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건우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부탁이기에 그러냐고, 그만 놀리고 말을 하라고 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저절로 상체를 뒤로 물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건우는 아랑곳 않고 몸을 더 가까이 붙여왔다.
해영은 숨을 참았다. 앞에선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눈이 저를 마주 보았다.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그의 시선이 눈에서 발개진 뺨으로,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로, 열이 오른 목덜미로 옮겨진다. 그 시선 끝에 꼬챙이라도 달린 것처럼 닿은 곳이 따끔했다. 무서워.
툭. 건우가 해영의 어깨로 고개를 떨궜다. 바람 빠지듯 웃다가 아까 벤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마를 두어 번 비비더니 몸을 완전히 떼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도 같이 가져갔다.
아이스크림은 처음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녹아 있었다. 해영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끈적거렸다. 손에 묻은 줄도 몰랐다니. 건우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껍질 안에 넣고, 일회용 물티슈를 꺼내 해영의 손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저것도 편의점에서 가져온 건가.
“저랑 영화 봐요.”
“응?”
“주말에 둘이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요.”
부탁이에요. 건우는 기대하는 눈으로 대답을 바랐다. 딱히 부탁까지 하지 않아도 원한다면 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커다란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 우기는 것을 겨우 달래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는 택시 문이 닫히고 출발하자마자 메시지를 보냈다.
[집ㅂ 도착하면말해여]
술 냄새를 잔뜩 풍기는 오타에 웃음이 나왔다. 해영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꼭 쥔 채였다. 냉동실에 바로 넣으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걸음을 서둘렀다. 오피스텔 주차장을 지나쳐 가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영아.”
뒷목이 차가웠다. 뒤를 도는 게 무서웠다. 박성재.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가 팔을 뻗어 해영이 들고 있던 편의점 봉지를 억세게 낚아챘다. 뺏기지 않으려 버틴 힘은 미약했다. 박성재는 그 안을 살피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런 걸 먹으면 어떡해.”
해영은 몸을 돌려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박성재는 덜덜 떠는 해영을 뒤로하고 쓰레기통으로 거침없이 걸어가 편의점 봉투를 그대로 던져 처넣었다. 그가 다시 제 앞으로 올 때까지도 해영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잘 지냈어?”
비웃기라도 하듯, 또다시 시작된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