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태조사
약속했던 주말이 다가올수록 붕 치솟던 기분이 문자 한 통에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미안, 내일 과제 때문에 못 나갈 것 같아.]
건우는 일요일 날짜로 예매해 둔 영화를 취소하고 베개에 뒷머리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날 있었던 일들을 더듬었다. 실수한 게 있는지,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좋아한다고 말할 생각에 종일 들떠 있었다. 술기운에 평소보다 좀 더 밀어붙이긴 했지만 그 정도면 정말 많이 참았다고 생각한다. 한 거라고는 손잡은 것뿐인데, 해영이 딱히 싫은 티를 내지도 않았으니까.
그 작은 입에서 아이스크림을 도로 꺼내 부탁 들어달라고 준 거냐 물었을 땐, 하마터면 원하는 것을 덜어내지도 않고 뱉을 뻔했다. 가까이 마주한 해영의 눈이 불안하게 떨리는 걸 보고 나서야 옅게 정신이 들었다.
술 먹고, 홧김에, 취해서. 제 진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끔 새로 날을 잡았다. 적당히 간질간질하고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예매를 하고, 근처에 조용하고 요란하지 않은 작은 개인 레스토랑도 알아 두었다. 결혼 후에도 주말마다 데이트를 쉬지 않는 둘째 누나 추천이니 실패할 확률은 낮았다.
그런데 해영은 그곳에 데려갈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을 해버릴걸. 속에서부터 후회가 치밀었다.
하루가 통째로 비었다. 건우는 잠시간 고민하다 휴대폰을 들어 영양가 없는 말들이 몇백 개씩 쌓여 있는 단톡방을 눌렀다. 몸이라도 움직여야 우울한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부글대는 속도 모르고 날씨만 좋았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 야외 농구장도 선선한 봄 날씨에 운동하러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만날 때 자주 모이는 곳이다. 군대에 간 녀석들도 있고, 삼수하는 놈, 대학을 해외로 간 놈도 있어서 전보다 만남이 뜸했다. 그래도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만나 공을 튕기거나 게임을 하곤 했다. 이번에는 날짜가 겹쳐서 못 나온다고 말해 두었던 건데. 동창 중 한 명인 안경태가 대놓고 물었다.
“오늘 약속 있어서 안 된다며.”
“몰라.”
건우가 더 묻지 말라는 듯 검은색 트레이닝 재킷을 목까지 올려 잠그고 불퉁하게 답했다.
“까였네.”
안경태는 농구공을 볼 백에서 꺼내면서 히죽거렸다.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 투에도 반응할 여력이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공원에 묵직하게 공 튀는 소리가 울렸다. 건우는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입술을 짓이기고 농구장으로 걸음을 돌렸다.
건우는 게임에 집중하지 못했다. 안 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했다. 공 한 번 튕기고 휴대폰 한 번 보고, 골 한 번 넣고 휴대폰 한 번 보고. 참다못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새끼는 폰만 볼 거면 왜 나왔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휴대폰을 확인하던 건우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금세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날도 안 될 것 같아.]
이가 갈렸다. 일요일도, 평일도, 금요일까지 별의별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해온다. 오기가 생겼다.
[다음 주 주말은요.]
건우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두드려 메시지를 보내고 뒷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가 사람을 대상으로 마음 쓰는 모습을 처음 본 친구들은 제대로 까였나 보다, 어림잡아 짐작할 뿐이었다.
20대 남자애들끼리 만나서 하는 거라곤 뻔했다. 운동, 게임, 마무리는 거의 술이었다. 차건우의 주량을 아는 친구들은 당연하게 그의 앞으로 물을 내밀었지만, 건우는 소주병을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술이 유달리 당기는 날이라고 해서 주량이 갑자기 늘지는 않는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마시고 더 빠르게 취한 건우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두 명이 겨우 부축해 날랐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방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것을 셋째 누나 차윤서가 잡아 앉혔다. 술을 먹지도 못하는 놈이 요즘따라 절여져서 들어오는 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따져 묻기 위함이었는데, 축 처진 어깨와 표정을 보니 이유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차였냐.”
그렇게 티가 나나. 온종일 까였네, 차였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거라 반박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더 분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나간 건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 술을, 왜 먹었지.”
“그 애 앞에서 술을 먹었어? 끝났네.”
차윤서는 혀를 차고 물을 내밀었다. 건우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중얼거렸다.
“손밖에 안 잡았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손도 못 잡으면 어떡해. 고자 새끼도 아니고.”
해영의 손과 맞물렸던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쥐었다 폈다. 손바닥 가운데서 그날의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빈틈없이 마주 잡았던 손. 눈을 동그랗게 뜨고도 내치지 않았던 해영. 아마 제 취기 때문에 눈감아 준 것 같기도 했다.
“만나야 사과를 하지…. 만나 주지도 않아.”
그때,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진동했다. 허겁지겁 액정을 확인한 건우가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메시지를 읽었다.
“집안일이 밀려서, 집안일….”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건우가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안일, 중요하지….”
***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오늘 해영과 같은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고민 않고 자체 휴강을 했을 텐데.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학교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숙취 음료 한 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계산을 기다리던 중 편의점 유리창 밖으로 익숙한 인형이 지나갔다. 해영이었다. 결제됐다는 말과 거의 동시에 카드를 리더기에서 뽑아 들고 걸음을 서둘렀다. 음료는 보이지 않게 주머니 깊숙이 넣어 두었다. 술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걸지도 모르는데, 약속이 깨진 날까지 술을 마셨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해영과 자신은 평소에도 걷는 속도가 차이 났다.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가 한 걸음 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그를 불러 세웠다.
“선배.”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해영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난처함이 가득했다.
확인 사살이었다.
“어, 어…. 안녕.”
“어제 과제는 잘하셨어요?”
비꼬는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니면서, 거듭해서 거절당한 심보가 이상하게 튀었다.
“아, 응…. 갑자기 안 된다고 해서 미, 미안해.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뭐.”
날 선 물음도 꼬아 듣지 않고 그대로 마주한다. 누군가는 답답하고 눈치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건우는 해영의 이런 점이 좋았다. 그래서 그 곧은 사과를 받은 순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은 후회해도 담을 수 없었다. 따지고 들고 싶었던 마음이 말랑한 사과 몇 마디에 기세가 꺾였다.
“나, 나 수업 늦어서 먼저 가야겠어.”
건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가 이상했다. 자만일지 모르지만, 요즘의 그답지 않았다. 마치, 그래. 가까워지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경계하는 대상이 따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불러 세웠을 때부터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리면서 눈치를 보는 게,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뜬금없는 물음에도 되묻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부정한다. 그 모습이 의심을 더 증폭시켰다. 해영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건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음료병을 돌돌 굴렸다. 뭐냐고, 대체.
평소보다 배는 더 길게 느껴졌던 수업 시간이 끝나고, 옆자리에 놓아둔 마카롱 박스를 집어 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해영에게 점심 약속도 거절당했다. 마카롱은 동기들과 점심을 대충 때우고 남은 시간에 사온 것이었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영의 수업이 막 끝났을 시간이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예요?]
전화는 받지도 않으면서 메시지 답장은 빨랐다.
[오늘 수업 일찍 끝났어. 학교 아니야.]
[그럼 제가 선배 계신 곳으로 갈게요. 잠깐이면 돼요.]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미안.]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마카롱 박스 손잡이가 콰직 구겨졌다. 경영관 밖으로 나서면서 액정 위를 빠르게 두드렸다. 잠깐의 시간도 내줄 수 없다면 톡으로라도 말하는 수밖에. 무슨 내용을 적을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제와 오늘 내내 계속 다듬고 생각한 말이니까.
혹시 제가 그날 실수한 게 있으면 말해 달라고,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를 하고 싶다고. 몰아붙이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둥글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갈무리하지 못한 울분이 글자 곳곳에 섞여들었다. 굳이 고치려고 하진 않았다. 이걸로 해영의 발목을 붙들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초라해져도 괜찮았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적고 전송을 누르기 전 한 번 더 읽던 중이었다.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지나가는 자전거 한 대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곳에는, 해영이 있었다.
“뭐야….”
거짓말. 그가 제게 거짓말을 했다.
해영은 학교 안에 있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그가 서 있는 도서관 앞까지는 길을 건너야 닿을 만큼 떨어져 있는 거리였다. 해영은 아직 저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틀 내내 고심했던 메시지 내용을 지우는 손가락이 떨렸다. 텅 비어버린 곳에 새로 네 글자를 적어 전송했다.
[집이에요?]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해영이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두드린다. 아닐 거야. 이유가 있겠지. 잠깐 나갔다 왔다든지. 가능한 것들을 모아 그를 변호했다. 손바닥이 아릴 정도로 힘껏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응, 미안해. 다음에 보자.]
발밑이 무너졌다. 위태롭게 쌓은 탑 위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서 있던 몸뚱이가 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한다. 해영의 손아귀라면 쥐어져 흔들려도 기껍다 했지만 단연코 이런 걸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때, 해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건너편에서 봐도 티가 날 정도로 바짝 굳어서 놀란 얼굴을 했지만, 지금만큼은 그를 달래고 싶은 마음도, 뻗대며 괜찮은 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미움으로 변질되어 울컥 치밀었다. 붙들고 묻고 싶었다.
그에게 가기 위해 걸음을 떼던 중, 해영과 함께 있던 남자가 해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해영이 다급하게 그 남자의 팔뚝을 잡아 저지하고, 그 앞에서 웃어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지금 가서 따져 봤자 해영은 가시를 세울 게 뻔했다. 좋을 게 없었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들고 등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유가 있을 거다. 예전처럼 말도 없이 피하는 것도 아니고, 답장도 꼬박 해 주고 마주쳐도 도망가지 않으니까. 진정된 상태에서 말을 하면 들어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온몸이 쿵쿵대며 요란하게 울렸다. 그 근원 위로 손을 올려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도 모르게 악물고 있던 턱이 아팠다. 진정하고 내일, 아니. 오늘 저녁에라도. 진정, 씨발.
도로 몸을 돌렸다. 해영이 웃으면서 팔을 붙들었던 빌어먹을 놈은 자리를 뜨고 있었다. 시선은 그 뒤통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걸음은 해영에게 향했다. 꼭 이렇게 흥분했을 때 입을 열면 후회하게 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서 본 해영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겨우 그의 앞이었다.
“여기가 집이에요?”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해영은 말이 없었다. 마카롱 박스 손잡이의 날이 손바닥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 아무리 흐물대는 종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베이고 날을 세우는 법이다.
“누군데요, 방금 그거.”
건우가 턱짓으로 낯선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해영은 입술을 씹으며 버텼다. 금방이라도 피가 고일 정도로 세게.
“말 안 해요? 제가 가서 물어요?”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졌다. 해영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뜩 위축되어 덜덜 떨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건우는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였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해영은 평소 잘만 하던 미안하다는 말조차 해 주지 않았다. 침묵은 온갖 가능성을 담고 있기에 사과보다 아팠다. 더 깊은 곳까지 사정없이 들쑤셨다.
“그럼 이거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방금 그 새끼 때문에 나랑 한 약속도 깨고 거짓말로 피해 다닌 거 맞아요?”
열릴 줄 모르던 입술이 맞아, 하고 벙긋 움직였다. 더는 여기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줄곧 손에 쥐고 있던 박스가 달각 소리를 내었다.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건우는 다시 돌아가 해영의 오른쪽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 손바닥 위에 마카롱 박스를 건네주었다. 손이 티가 날 정도로 떨렸다. 다시 등을 보였다. 바보 같다.
어지럽고 메슥거렸다. 화가 나고 열이 올라 속이 뒤집어지기라도 한 건가. 유난이다. 허탈함과 실망감이 그대로 몸 상태에 드러나는 게 우스웠다. 이런 거였지. 그가 의도한 건 아니더라도 해영은 원래 기대와 좌절을 반복해서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곁을 내준 후로 쉽게 생각한 것도 있다. 거의 다 왔겠지, 하고. 근데 그걸 이렇게 돌려받았다.
지금 가장 화가 나는 건, 해영이 왜 거짓말을 하고 피했는지 그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영에게 그 정도로 의지가 안 된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해영의 일이니 분명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걸 테다. 자신이 믿음을 주지 못한 걸까. 어려서? 아직 그 정도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서러웠다.
거기서 뭐라고 해야 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야 했을까. 아니면 더 밀어붙여야 했을까.
컴컴한 곳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막막했다. 떠오르는 것 중 어느 하나 나아 보이는 선택지가 없었다. 남들도 다 이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건가. 이걸 견디면서 얻어내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그 끝에 쟁취한 사람들을 향해 기꺼이 고개를 숙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따져 묻는 내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작은 체구를 떠올렸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눈만 벌게진 것도, 통통한 입술이 새빨갛게 핏기가 돌 정도로 꾹 물고 있던 것도 모두 마음에 턱턱 걸렸다.
차건우는 축축해진 눈가를 소매로 거칠게 벅벅 문질렀다. 주먹을 쥐었다. 든 게 없는 빈손에는 제 손톱자국만 아릿하게 번졌다.
***
“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뻗는 걸음이 멈칫했다. 텅 빈 엘리베이터 구석에 해영이 있었다. 그도 놀랐는지 잔뜩 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우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대놓고 피하는 것 같아서 관두었다. 느릿하게 해영의 반대쪽 모서리로 걸어가 기대어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침묵은 무겁고 불편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타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밤새 쏟아 낸 감정의 폭이 넓어,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도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오늘 아침까지 씩씩대며 열을 내던 것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해영이 서 있는 쪽에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다. 건우는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줄곧 이쪽을 보고 있던 건지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해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로 했다. 그 모습을 미동도 없이 응시했다. 분명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해영은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처럼 꿋꿋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 부었네. 퉁퉁 부은 눈두덩이 주변이 붉게 짓물러 있었다. 해영도 저처럼 밤새 걱정하고 고민했을까. 마음이 안 좋았다. 그와 별개로 잔뜩 부푼 얼굴이 귀여워서 붙잡아 놓고 맘껏 찔러 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붕어 같아.”
혼잣말처럼 작게 뱉은 말이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꽤 크게 울렸다. 해영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너, 너도거든….”
확실히 제 모습도 그닥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건우는 목까지 잠근 트레이닝 재킷의 지퍼 고리를 붙잡고 코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 안쪽으로 옅게 웃음이 샜다. 어제 그렇게 뒤돌아서 생각했던 수많은 재회 중 이런 건 없었다. 뭐 하나 풀린 건 없지만 그건 장애물을 만난 것뿐이지 게임 오버가 아니었다. 해영은 여전했고, 저 또한 그의 앞에서 한없이 느슨해졌다.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늦췄다. 해영의 손이 허벅지 위를 툭툭 초조하게 건드리다 꾹 구겨 쥐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해영은 두어 번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붙잡고 물으면 말을 해 줄 것이다. 확신이 들었다.
건우는 그를 뒤따라 내렸다. 해영은 답지 않게 걸음을 서둘렀다.
“선배, 잠깐만요.”
“해영아.”
그를 멈춰 세우기 위해 부른 것과 거의 동시에, 앞에서 누군가 해영을 불렀다. 어제 그놈이었다. 그리고 해영은 또다시 그쪽을 택했다. 차건우는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입 안쪽 살을 가득 물고 참았다.
왜 애인 있는 사람한테 질척대는 놈이 된 것 같지. 빡치게. 해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쫄래쫄래 그에게 다가갔다. 강아지냐고. 부르면 가게. 이름도 모를 놈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던 중에, 그놈 뒤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규진이 보였다. 규진은 건우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그 새끼를 발견하더니 알은체를 했다. 실실 바보같이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다 멍청한 얼굴로 걸어왔다.
“형, 형. 톡방에 공지 보셨어요? 진짜 개어이없-.”
“규진아.”
“네?”
차건우는 이규진의 어깨를 붙들어 돌려세웠다.
“저 새끼 누구야.”
규진은 건우의 악의 가득한 물음에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머뭇거리는 걸 눈치챈 건우가 어깨를 툭툭 두어 번 두드려 종용했다. 규진의 입장에선 오며 가며 인사하는 정도에 불과한 사이보다, 수업을 자주 같이 듣고 당장 제 어깨를 쥐고 있는 사람이 더 두려웠다.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박성재 선배요. 저도 진짜 잘 몰라요. 술자리에 몇 번 오셔서 인사한 게 다예요.”
박성재. 박성재. 건우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입에서 그 이름을 굴렸다.
“3학년?”
“휴학하셨다고 했는데.”
“근데 학교에는 왜 붙어 있대. 할 일이 없대?”
대놓고 삐딱하게 물어오는 것에 규진이 한 번 더, 진짜 몰라요, 하고 답을 회피했다. 건우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교, 교수님 뭐 프로젝트 도와드린다고 했는데 진짜 몰라요. 취업 때문에 하시는 거 아닐까요. 이거 말고는 진짜 몰라요.”
“뭘 몰라, 계속. 잘 아네.”
이규진은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녀석이었다. 이름 정도만 물을 계획이었으나, 딱 봐도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모양새에 좀 더 밀어붙였더니 예상대로 술술 말해 주었다. 건우는 원하는 만큼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규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서 놓아주었다. 규진은 팔을 엑스자로 접어 제 어깨를 주무르며 작게 엄살을 부렸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또 붙잡힐세라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홀로 남은 곳에서 박성재와 해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들었던 이름을 곱씹었다. 분명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누구지.
차건우는 오후 수업 중에도, 집에 가는 길에도, 오랜만에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는 중에도 계속해서 머리를 쥐어짰다. 밥상 앞에서 깨작거리는 걸 질색하는 첫째 누나 차현서가 언짢은 얼굴로 한마디 했다.
“차건우. 억지로 먹을 거면 들어가.”
첫째 누나와 차건우는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났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보호자 노릇을 한 게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건우는 마지못해 한 술 크게 퍼 입에 넣었다. 부풀어 오른 뺨을 빤히 보던 셋째 누나 차윤서가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얘 왜 이렇게 부음?”
“신경 꺼.”
차윤서는 앞에서 건우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젓가락으로 차건우를 가리키며 놀리기 바빴다. 눈이 곧 사라질 것 같다, 보이기는 하냐, 진짜 못생겼다. 너무 유치해서 대꾸할 마음도 안 들었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하는 짓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박성재는 해영에게 반말을 했다. 그리고 휴학 중이고, 취업을 앞두고 있는 거면. 시기상 셋째 누나와 알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나. 박성재 알아? 이름 들어 본 거 같은데 왜 모르겠냐.”
탁. 신나게 놀려대던 목소리가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로 뚝 멎었다. 싸늘해진 공기에 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너 기억 안 나?”
차윤서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
“서, 해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남들이 다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해영조차도, 대학 생활을 시작할 때만큼은 미약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는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곳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삶.
“서해영?”
팔자에도 없는 평범함을 탐내서일까. 주제넘은 기대는 신입생 환영회 날부터 보란 듯이 박살 나 버렸다.
“아는 애야?”
“어, 고등학교 후배. 여기서 보니까 엄청 반갑네.”
박성재는 실실 웃으며 해영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의 말처럼 반가움의 표현이겠지만 해영은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한 학년 선배였다. 저와 정반대되는 무리에 있던 사람이라 말을 나눈 기억은 없지만 분명 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의미로 학교에서 유명했다.
고등학교 1학년 젊은 담임 선생님은 정의롭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좋은 분이셨다. 문제는 의도가 아닌 미숙한 경험에 비해 앞선 의욕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담임을 맡게 된 반에서 겉도는 해영을 가만둘 수 없었던 담임은, 반장을 타일러 등을 떠밀었다. 타인이 보기에 둘은 완벽한 단짝이었다. 늘 붙어 다녔고, 해영은 많이 웃었다. 만들어진 호의를 진심으로 착각했다. 그렇게 혼자 품은 마음을 내보일 생각은 결코 없었다.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아 끄적인 노트 속 작은 낙서만 아니었어도 졸업할 때까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반장에게 빌려줬던 노트를 돌려받은 날, 해영은 전교생에게 ‘동성애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달콤했던 봄은 맛을 감각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반장이 교무실로 불려가 꽤 긴 시간 면담하고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해영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좋아했던 아이에게 모진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별거 아니라고 눌러 담았다.
친화력이 좋아 소위 말하는 ‘노는 애들’ 무리에 속해 있던 박성재가 그런 재미있는 소문을 모를 리 없었다.
바보처럼 고등학교만 벗어나면 모든 게 새로워질 줄 알았다. 제 과거를 아는 사람은 대학에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언제든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박성재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성급한 기대는 우울의 바닥까지 해영을 끌어 내렸다. 평생 도돌이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벗어날 수도 없이.
시작은 잔심부름 정도였다. 그는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말 앞에 미안한데, 를 붙였다. 박성재는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다섯 번 정도 챙겨 주는 척을 하고 한두 번 수고로운 일을 시키는 그는, 남들 눈에 같은 학교 후배의 적응을 도와주는 착한 선배로 보일 뿐이었다.
“해영아. 저기 지나가는 남자 잘생기지 않았어? 게이 눈으로 보면 어때?”
그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두려웠다. 품 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박성재는 틈만 나면 자신이 쥐고 있는 스위치를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잊지 말라고.
사람들 앞에서는 사이좋은 선후배로, 뒤에서는 약점을 쥔 사람과 손안에서 놀아나는 사람으로 갇혀 살았다. 해영이 그를 피하기 위해 도피성 휴학을 하고, 박성재가 군대를 갔다 와도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했다.
2학년 2학기 종강을 얼마 남기지 않은 겨울에, 그 일만 아니었어도 해영은 졸업할 때까지 입 다물고 시키는 거나 하는 호구 같은 생활을 이어 갔을 것이다.
“해영 씨.”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해영이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영대 회장이었다. 해영은 노트북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반쯤 내려 화면을 가렸다. 박성재 이름으로 제출할 과제를 하던 중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네….”
“작년에 우리 과제 하나 같이 한 거 있었는데, 그 뒤로 거의 못 본 것 같네. 기억하죠?”
“아, 네….”
그녀는 해영이 노트북을 가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의 옆자리 의자를 빼 앉았다. 해영은 노트북의 방향까지 반대쪽으로 완전히 틀어버렸다.
“돌려 말하는 거 잘 못해서 미안해요. 혹시 박성재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네?”
“아니면 약점이라도 잡혔어요?”
해영은 양손을 꼭 맞잡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음….”
연기에는 재능이 없으니 잡아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누가 봐도 아닌 게 아닌 모습이라, 그녀는 성급하게 되묻는 대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어떤 말을 해야 빠르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해영 씨가 걔 과제 해주고 있는 거만 지금 세 번째 보는 거거든요. 들은 건 더 많고.”
금방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일인지 말을 안 하면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녀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처럼 해영과 눈을 맞추고 천천히 말했다. 여기서 또 모른 척 침묵하거나 바보같이 대답하면 이 부정행위가 교수에게, 혹은 과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긴장으로 입이 바싹 말랐다. 침묵 끝에 해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세요…. 대학 와서 이것저것 도움받은 게 많아서 저도 조금 도와드리는 것뿐이에요. 많이도 아니고 그냥 조금 봐 드리는 정돈데, 그러니까…. 한 번만 누, 눈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해영이 말을 하는 동안 빤히 보고만 있던 회장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스치듯 본 게 다인 그녀의 눈에도 정상적인 관계로 보이지 않는데, 해영은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녀는 답답함에 몸을 일으켰다.
“음, 미안해요. 본 게 있는데 그냥 넘어가긴 좀 그래서.”
“서, 선배님….”
“해영 씨 이름은 얘기 안 해요. 걱정 마요.”
해영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학점이나 불이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부정행위가 알려진다면 박성재는 가장 먼저 해영을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해영은 양손을 꼭 말아 쥐고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끄집어냈다. 오한이라도 든 사람처럼 온몸이 후들거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떼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유도 말하지 않으면서 넘어가 달라고 빌고만 있으니, 대체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한참을 서 있던 그녀가 의자에 도로 앉아 해영과 거리를 좁혔다. 해영의 필통에서 펜 하나를 꺼내더니 노트 맨 뒷장에 휴대폰 번호 하나를 적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해영의 부들대는 주먹 위를 가볍게 감쌌다.
“일주일. 오래는 못 기다려 줘요.”
해영은 줄곧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말할 마음 생기면 여기로 연락해요. 해영 씨가 하고 있는 게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 주는 일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못 본 척할 수는 없다는 거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알고 있었다. 이미 배려할 만큼 해 준 것도. 당장 교수부터 찾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와준 거라든가, 시간을 주고 기다려 준다거나 하는 행동들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나한테 말을 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같이 욕해 줄 사람 하나는 생길 거예요.”
그녀의 말끝에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약속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약속했던 일주일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해영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가 해 주었던 마지막 말에 흔들리다가도, 고등학교 3년을 그 소문 하나로 괴로워했던 시간이 발목을 붙잡았다. 선배도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선배한테 말을 해도 해결되는 것 하나 없이 소문만 나게 되면.
“…랑, 이건데. 해영아?”
“네?”
“딴생각했어?”
“아, 죄, 죄송해요….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박성재는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서 선심 쓰듯 해영이 할 일을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수업도 당연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밤 침대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고민했다. 그날 받은 연락처를 화면 가득 띄워 놓은 채로. 약속한 기한을 하루 남긴 날 밤, 뚫어지게 쳐다보던 휴대폰이 울렸다.
박성재였다.
―너 이 씨발 새끼, 당장 내려와.
해영은 겉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허겁지겁 오피스텔 1층으로 내려갔다. 박성재는 해영을 보자마자 멱살을 틀어쥐고 골목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해영을 밀어 넣은 뒤 곧바로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너야?”
“뭐, 뭐를….”
“교수한테 네가 꼰질렀냐고. 씨발, 왜 모르는 척이야. 역겹게.”
“아, 아, 아, 아니에요….”
해영이 얼얼한 뺨을 움켜쥐고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네가 말 안 했으면 어떻게 아는데. 똑바로 대답 안 해?”
그의 발이 해영의 옆구리에 꽂혔다. 해영의 몸뚱이가 담배꽁초 수북한 아스팔트 바닥 위를 굴렀다. 머리를 감싸 안고 잔뜩 몸을 웅크렸다. 머리로, 팔로, 등으로, 사정없이 발길질이 이어졌다. 해영은 그 무자비한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저, 정말 말 안 했어요…. 저 아, 아니에요….”
한참을 발로 짓이기던 박성재가 손으로 흐트러진 제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노는 손으로 해영의 팔뚝을 억세게 잡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벽에 몸을 기대고 버텼다. 박성재는 팔을 접어 해영의 목 위에 대고 힘껏 짓눌렀다. 숨이 턱 막혔다.
“아니면 어디 가서 입을 털었거나, 병신같이 굴다가 들켰거나 했겠지. 아니야?”
해영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기다려 주겠다고 했는데. 일주일이면 내일까지인데. 흐려지는 머릿속에서 제 편이 되어 주겠다며 웃던 얼굴이 스쳐 갔다. 어쩌다 교수의 귀에까지 들리게 된 건지는 몰라도, 박성재에게 그녀의 이름을 말할 순 없었다. 도와주려고 손을 뻗어 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다려 준 거다.
박성재는 눈치가 빨랐다. 해영이 머리가 굴러가는 걸 눈치채고 팔을 떼어냈다.
“허억, 흐으….”
해영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모자랐던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목구멍에서 비릿하게 피 맛이 돌았다.
“네가 알아서 해결해.”
박성재가 반도 더 남은 꽁초를 해영의 옆에 던지고 발로 짓이겼다.
“이거 수습 못 하면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박성재는 홀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해영은 이리저리 긁히고 까진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연결음이 얼마 가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서, 선배님….”
쉬고 갈라진 목소리에도 그녀는 단박에 누군지 알아주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해영 씨, 목소리가 왜…. 결정한 거예요?
아. 그녀가 아니다. 잘은 몰라도 모르는 척 상대를 농락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약속했던 일주일을 꽉 채워 기다려 주고 있던 것이다.
해영은 아픈 목을 부여잡고 상황을 설명했다. 박성재, 찾아와서, 교수님이 알았대요. 해결 못 하면, 안 돼요.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늘어놓느라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 정신없는 단어들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제발 도, 도와주세요….”
염치없는 놈. 의심한 주제에.
―하…. 일단 제가 얘기한 건 아니에요. 그때도 말했지만 저만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지 알 것 같긴 한데, 그 사람이 제보하는 것까지 제가 통제할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그 위에 덧칠해지는 끔찍한 기억들.
제가 걸어간 길, 앉은 자리도 더럽다고 침을 뱉고 피하던 아이들. 자리를 바꿀 때마다 온갖 이유를 대며 다른 자리로 바꿔 달라고 불만을 내던 옆자리 아이들. 2인으로 묶이는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홀로 남아 선생님이 짝이 되어 주셨던 날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아버지에게 오지 말라 말했던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졸업식.
박성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때도 참아냈던 울음이, 여기저기 터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흐느끼는 소리에 당황한 회장, 차윤서가 거듭해서 해영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입술을 물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죄송, 죄송해요…. 흐, 정말 한 번만…. 도와주시면-.”
휴대폰 너머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몇 마디 달래 주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검은 화면을 가만 바라보던 해영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절박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 작년 딱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그녀의 집을 떠올렸다. 조별 회의 날, 과음으로 늦잠을 잔 차윤서의 집으로 회의 장소를 급하게 변경한 적이 있었다. 자세한 주소까진 생각나지 않아 지금은 모두 나가 있는 텅 빈 단톡방을 뒤졌다.
해영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굳게 닫힌 현관문 앞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온 거지. 얼굴 보고 빌면 뭐가 달라지나. 이런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한심했다. 해영은 엉망이 된 손을 들어 인터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디지털 음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차윤서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이 밤중에 다짜고짜 찾아온 낯선 이가 달가울 리 없을 터였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아….”
아까 맞을 때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숨이 가빴다. 선배를 불러 달라 말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금방이라도 문이 닫힐 것 같았다. 초조했다. 다급함에 바로 앞에 보이는 옷깃을 부들대는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그의 깨끗한 옷자락에 흙먼지가 묻었다.
***
인터폰이 울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낯선 사람의 늦은 방문에 가족 모두 날이 서 있었다.
“지금이 몇 신데…. 누구야?”
아버지가 차건우에게 눈짓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건우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밖에 오래 서 있던 건지, 복도의 센서 등이 꺼져 화면으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자, 그 앞에 서 있던 건 퉁퉁 붓고 피투성이가 된 한 남자였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아….”
색이 옅어 가만 보아도 처연해 보이는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축 처진 눈을 하고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건우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하얀 얼굴이 엉망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축축하고 발간 살덩이가 일렁였다.
건우는 잘게 진동하는 제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막내아들과 낯선 객을,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나와 맞이했다. 어머니는 그의 상태를 보자마자 놀라 담요를 들고 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거듭 고개를 숙이던 남자는 어머니가 덮어 준 담요에 둘러싸여 집 안으로 들여졌다.
그는 셋째 누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의 어깨를 감싸 도닥여 주는 동안 아버지는 따뜻한 차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셋째 누나, 차윤서가 방에서 나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가족들은 모두 자리를 피해 주었지만 건우는 궁금했다. 주먹질과 전혀 연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이유도, 이 밤중에 그가 차윤서와 나눌 이야기도.
차건우는 방에 들어가 완전히 닫지 않은 문 옆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틈새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띄엄띄엄 들리는 것들로 유추해 보자니, 남자는 누나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제발, 부탁, 도와 달라, 등의 말들이 반복됐다.
차윤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그가 돌연 바닥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쾅-.
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차건우.”
차윤서가 낮게 으르듯 이름을 불렀다.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차건우는 다분히 충동적인 인간이었다. 저 꼴을 안 보든가 해야지.
겉옷을 대충 집어 들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앞에 잠시 멈춰 서 있다 거실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차윤서가 아까보다 더 강한 어조로 한 번 더 이름을 불러 제재하려 들었지만 듣지 않았다.
“무릎 상해요.”
그를 일으키는 대신 들고 있던 패딩 점퍼를 무릎 위에 덮어 주었다. 지금 손이라도 댔다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희멀건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옆에 사람이 다가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차건우는 마른 어깨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돌려 집을 나섰다.
***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에도 해영은 반응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 혼자 갇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을 보고 죄송하다고 거듭 중얼거릴 뿐이었다. 차윤서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정말 안 도와줄 거예요.”
해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무릎 위를 덮은 포근한 패딩 점퍼로 시선을 옮겼다. 바닥에서 구르다 온 몸에 대고 있기엔 너무 깨끗한 옷이었다. 더러워질 게 뻔한데도 치우기가 싫었다. 고개를 돌려 이미 아무도 없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누가 덮어 줬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나간 것들이 뒤늦게 인식되는 기분이었다. 패딩 아래에 놓인 손을 움직여 안감을 꼭 쥐었다.
해영 씨. 차윤서가 소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해영은 몸을 일으켜 도로 소파 위에 앉았다. 고민하다 패딩은 옆자리로 치워 두었다. 무릎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듣게 될 말이 두려웠다. 여기까지 온 것은 해영에게 마지막 동아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저 박성재 싫어해요.”
차윤서가 대뜸 고백했다.
“본인은 열심히 포장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역겨운 냄새는 쉽게 가려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혹여나 제가 해영 씨 말을 듣고 안 믿을 걱정이라든가, 박성재 편을 든다거나, 그걸로 박성재처럼 해영 씨를 겁박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그를 싫어한다고 해서 제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영은 선택해야 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소문날 위험이 있는 거라면, 그래도 가 보지 않은 쪽을 고르는 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영은 고민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답답할 만큼 느리게, 하나하나 말하는 것을 차윤서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녀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해영은 저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흠칫 몸을 떨었으나, 곧 그게 박성재를 향한 욕이라는 걸 알고 안도했다.
차윤서는 흘러 내려온 옆머리를 손으로 올려 넘기며 몸을 바로 앉았다. 질이 나쁜 새끼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제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작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빌었는지, 그리고 이유를 끝까지 말하지 않고 버텼는지 이해가 갔다.
“하는 데까진 해볼게요.”
없던 일로 만들어 주겠다거나 해결을 해 주겠다거나 하는 달콤한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제가 그에게 약속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보한 사람은 차윤서가 처음 목격했을 때 같이 있던 친구였다. 당시에도 당장 교수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날뛰던 것을 며칠만 기다려 달라 말린 건데, 딴에는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한 건지 제보를 한 것이다. 물론 그의 약점을 말하지 않고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에게 말한 것처럼 하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신에 해영 씨도 하나만 약속해 줘요. 웬만하면 이런저런 이유 만들어서 거절해요. 그게 쉽지 않으니까 계속 받아 준 거겠지만, 그런 애들은 점점 더 곤란한 걸 부탁할 거예요. 이번 일로 조금 조용해졌으면 좋겠는데 이것도 희망 사항일 뿐이라서. 혹시 핑계 댈 때 필요하면 내 이름 써먹어도 돼요.”
“네,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차윤서는 말을 하면 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해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이거면 될까.
“제가 뭘 해 주길 바라요? 아니면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좋아요?”
해영은 입술 안쪽 살을 아프게 물었다. 바보같이 보일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해 주셨으면 조, 좋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해영 씨는 부정행위를 도운 사람으로밖에 안 보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네. 괜찮아요….”
차윤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알겠어요.”
그 답을 들은 후에야 긴장이 풀린 해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 울었다.
아파트 1층의 자동 현관문이 느리게 열렸다. 동시에 찬 겨울바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훅 끼얹어졌다. 해영은 작게 기침하며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몸을 돌린 곳에는 문을 열어 주었던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신경 쓸 정신이 없던 터라 생김새나 그런 것들이 자세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체격이나 느낌으로 보아 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 해영은 곧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서워. 긴장이 풀리니 주변이 보였다. 해결된 것도 없고 여전히 박성재는 두려웠지만,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약점을 듣고도 똑같이 대해 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다른 곳의 감각이 선명해졌다. 몸도 욱신거리고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해영은 그대로 그의 앞을 지나가다가 번뜩 생각나는 것에 몸을 돌렸다. 고개는 여전히 바닥 어딘가를 향한 채였다. 해영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옷 더럽혀서 죄송합니다….”
시선을 살짝 올리자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무섭게 생겼다. 해영은 몸을 돌려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무어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무서워….
***
차건우는 급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차윤서의 방으로 향했다.
“저번에 말했던 그 새끼 일이지.”
“문 닫아.”
건우가 재빨리 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앉아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이었다. 차윤서는 한숨을 쉬며 의자를 반 바퀴 돌려 마주 앉았다.
“눈치는 존나 빨라서. 공부를 그렇게 해 봐라.”
“와. 진짜 그거 넘어가 달라고 온 거야? 계속 그렇게 살겠대? 당하면서?”
“남의 인생 함부로 얘기하지 마.”
차윤서는 박성재가 얼마나 영악한 놈인지, 그리고 서해영이 말한 약점이라는 게 앞으로 그가 살아가는 데에 적잖게 치명적이라는 점도 말해 주었다.
“약점이 뭐길래.”
“그걸 내가 너한테 말하겠냐?”
맞는 말이다. 궁금한 것과는 별개로 얼마나 알려지는 게 두려운 약점이었으면 그 꼴을 하고 오밤중에 남의 집까지 와서 무릎을 꿇을까.
“근데 넌 왜 이렇게 열을 내는데?”
본인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에는 혈육이라 할지라도 별 관심도 없던 놈이 답지 않게 성을 내니 차윤서가 의문을 띄웠다.
그러게. 굳이 짚어 주지 않아도 아까부터 누구보다 당황한 건 건우 자신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희게 질린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낯선 감각 덩어리가 온몸을 정신없이 맴돌았다. 누나들은 남들한테 관심받는 걸 즐기는 변태들이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생회장을 맡아 왔다. 해영처럼 누군가에게 당한 사람이 제집에 찾아와 상담하거나 위로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진 않았다는 말이다.
처음이었다. 벌겋게 부은 얼굴로 제 앞을 지나가는 그를 보고, 저렇게 만든 사람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할 정도로 들끓었다.
“아니,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이 시간에 찾아와서 무릎 꿇고 비는데 안 놀라?”
“놀란 거 아니잖아, 너.”
대답했으면 됐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어. 건우는 비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차윤서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 건지 의자를 다시 돌려 앉았다.
“그리고 담배 좀 그만 피워. 냄새 토 나와.”
건우는 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후드 모자를 앞으로 끌어와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팔을 뒤로해 뒷덜미를 잡고 티를 끌어 올렸다. 그가 제 앞에서 지나갔던 거리까지 팔을 뻗어 옷을 잘잘 흔들어 보았다. 담배 냄새가 옅게 코를 찔렀다. 끊을까.
그날 밤 건우는 침대에 누워 한국대 정시 모집 일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내신 관리도 수능 공부도 설렁설렁 한 놈이 갑자기 합격하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재수하는 것보다 취업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해영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 또한 멀어지는 겨울만큼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봄이 되었을 땐, 평생 한 번 앓는 열병처럼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지나가는 듯했다.
[5시 반. 정문 앞에서 기다려.]
차건우는 차윤서가 말한 정문 앞에 서서 학교 간판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저녁 약속을 불합격한 학교 앞에서 보자는 건 또 뭐야. 오전부터 할 말이 있다고, 저녁에 시간 비워 두라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더니 불러낸 장소가 학교 앞이었다. 보나 마나 재수 이야기를 하려는 거겠지. 그 이야기라면 집에서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있는데.
원서를 냈을 때도 대학 진학에 특별한 열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띨빵해 보이는 누나들이 다 가는 학교라 쉬워 보여서 고른 거였다. 기회를 얻지 못한 여느 또래들처럼,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돈은 있으면 언제든 도움이 되니까 벌고 싶은 거였고 무엇으로 돈을 벌지조차 생각하지 않은, 어른들이 보기에 조금 한심해 보일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스물이었다.
“한심한가.”
딱 봐도 신입생 태가 나는 또래들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합격했다면 저 사이에 끼어 있었겠지. 건우는 씁쓸해진 기분에 괜히 뒷머리를 쓸어내린 후 목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이런 기분 들라고 여기로 부른 것 같은데, 악질이 따로 없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늦어.]
같은 부모님 아래서 태어났다는 게 창피하다. 건우는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불자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졌다. 코끝을 간질이는 꽃잎을 고개를 저어 털어내는데, 정문 건너편에서 짐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시선에 걸렸다.
자기 몸만 한 책더미를 들고 위태롭게 걸어오는 사람. 얼굴도 반쯤 가려져서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축 처진 눈으로 바닥을 살피며 다가오는데, 낯이 익었다. 그리고 그가 두어 걸음 앞까지 걸어왔을 때, 건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사람이다.
“어!”
“악!”
제가 지르는 소리에 놀라 휘청이는 남자를 건우가 반사적으로 잡아 주었다. 맨 위에 얹어져 있던 책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감해하는 그를 세워 두고 건우가 허리를 숙여 책을 주워 주자,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까이서 내려다보니 짐 더미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잊고 있던 감정의 수면 위로 작은 돌덩이가 던져졌다. 고요하던 곳에 파동을 흩뿌린다. 점점 넓게 퍼지는 출렁임이 제 존재를 알렸다. 잔잔하다고 해서 없던 것이 아니었음을.
분홍빛 노을이 그의 뺨에 스며들었다. 저 불그스름한 자국을 멋대로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그날은 피투성이에, 잔뜩 부은 얼굴이라 이런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책을 건네는 손가락 끝이 심장에 닿아 있는 것처럼 쿵쿵 뛰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 숙이고서 몸을 돌렸다. 초조했다. 건우는 그 작은 뒷모습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그는 낑낑대면서도 기꺼이 고개를 돌려주었다. 돌아보는 눈이 예뻤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런 것에 능숙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번호라도 달라고 하려고? 그를 둘러싼 배경이 비웃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건우는 입 안쪽 살을 세게 씹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넣어 두고 적당한 말을 골랐다.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기겁을 하고 거절한 그는 아까보다 빨라진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쳤다.
얼마 가지 않아 멀리서 다가온 사람들이 그에게 알은체를 하며 짐을 받아 들었다. 저 많은 짐을 혼자 들게 해놓고 자기들은 세 명이 인상까지 쓰며 나눠 드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말 몇 마디를 건네고 바로 뒤돌아 사라졌다. 그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등을 보이고 있어 알 수는 없지만, 처진 어깨와 망부석처럼 서 있는 모습이 좋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지는 같았다.
제 일도 아닌 것에 건우는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도 무엇도 아닌 제가 오지랖 부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저를 기억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는 겨우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에 가만히 시선을 눌러 담은 차건우가 아까 노려보았던 학교 간판을 재차 바라보았다.
미쳤냐. 이딴 걸로 결정하게.
낯선 이 감각의 이유를 그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호구처럼 당하고 사는 사람, 성하지 않은 몸뚱어리로 제가 덮어 준 옷을 더럽혀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사람, 버거워하는 주제에 도움을 거절하는 사람, 예쁘게 웃는 사람. 건우는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그래, 좀 미칠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항상 제정신이겠어.
때마침 학교 안에서 차윤서가 사람들 틈에 끼어 나왔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차건우를 발견하곤 같이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차윤서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도 건우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던 윤서가 손바닥으로 건우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
“뭐 하냐.”
“나 재수하려고.”
그 말에 차윤서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자신의 전략이 먹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또 떨어져서 개망신당하지나 마.”
“안 떨어져.”
***
그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재수하는 동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패버리고 싶다.’ 정도로 그쳤던 분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해영을 가까이서 보고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그리고 그 괴로움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얼마나 깊은지 본 후였다. 해영이 괴로워했던 것을 몇 배로 돌려주고 싶었다. 주먹질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아니었다.
박성재 앞에서 해영이 보인 행동을 보면, 해영의 약점은 여전히 유효했다.
단순히 분풀이용 폭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약점을 잡아야 했다. 해영이 두려워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큰 약점을. 그거면 해영을 그 더러운 손에서 좀 더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참은 욕구는 꿈까지 이어졌다. 매일 밤 열심히 그 새끼를 두들겨 팼다. 이름만 듣던 것을 실제로 마주하니 얼굴도 선명하게 나와서 아주 좋았다. 그 낯짝이 피떡이 되도록 열심히 때렸다.
그리고 깨는 장면은 항상 같았다. 그런 저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는 해영.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동시에 경기를 일으키듯 잠에서 깨어났다.
건우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서늘한 감각을 털어냈다. 제가 그의 앞에서 주먹질이라도 한다면 정말 할 법한 얼굴이라 더 무서웠다.
해영과 둘이 이야기를 나눈 지 벌써 수일이 지났다. 박성재가 어떤 놈인지 기억이 난 후로 여러 차례 해영에게 말을 걸기 위해 따라다녔지만, 그는 둘이 남는 걸 못 견디는 사람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방금도 학교 계단에서 한바탕 술래잡기를 하고 온 길이었다. 숨이 목까지 찰 정도로 뒤쫓아 계단 문을 열고 나왔을 땐, 이미 어디로 도망갔는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건우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비볐다. 뭐가 그렇게 빨라.
의자에 털썩 앉아 쓰러지듯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직 수업 시작까진 오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멀뚱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이규진과 애들이 모여 나누고 있는 대화가 귀에 박혔다.
“저번에 거긴 어때.”
“포차? 거기는 다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선배들도 오는 거 아니야?”
“그럴걸? 또 훈이네 가야 되나. 거기 안주 개 맛없는데.”
선배들도 가는 술자리. 건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규진을 불렀다.
“이규진.”
“네?”
그가 바보 같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거기 박성잰가 뭔가 하는 선배도 와?”
“네. 어제 먼저 말 꺼내셨거든요. 내년에 다시 복학하니까 과 사람들이랑 면 트고 싶다고 자리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요.”
가지가지 한다. 새 인생이라도 살아 보려고 하는 건가. 차윤서가 말하기를 그때 그 일이 조용히 마무리됐다고는 하나, 알 사람은 다 안 채로 끝났다고 했다. 올해 휴학을 한 사유도 자기 딴에는 취업 준비다 스펙 쌓기다 그럴듯한 핑계를 댄 모양이지만, 작년 학과 사람들의 눈칫밥과 수군거림에 등 떠밀리듯 휴학을 했다는 게 누나의 추측이었다. 그들은 이미 졸업을 했거나 아니면 4학년이라 바쁘거나 둘 중 하나이니, 눈치 보다 슬그머니 기어 나온 듯했다. 조용히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저였으면 쪽팔려서 자퇴를 했을 것이다.
“형도 오시게요?”
규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박성재를 취하게 만들면 약점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먼저 취하지만 않는다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건우는 고민 끝에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안 먹고 버티는 건 매번 해온 일이라 자신 있었다.
“술은 안 마셔.”
“알죠, 알죠. 제가 다 막아드릴게요. 몸만 오세요.”
이규진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건지, 실실 웃으면서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두드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규진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겉으로까지 싫은 티를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살살 꼬드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엔 박성재가 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예상이 비껴갔다. 그는 뭐라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묘하게 기분 나쁜 눈으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선배, 이쪽은 건우 형이요. 처음 보시죠? 이 형이 술자리를 별로 안 좋아하셔서.”
“응, 그러게. 지나가면서는 몇 번 봤는데. 자주 보자.”
박성재가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건우는 그 손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목을 까딱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네.”
그는 멋쩍은 기색도 없이 손을 그대로 올려 건우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마음에 안 들었다.
차건우는 부러 박성재와 같은 테이블에 자리했다. 저 얼굴을 마주 보고 안주를 집어 먹으려니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빈 잔으로 안주만 축내는 차건우를 보던 박성재가 입꼬리를 올리고 비아냥댔다.
“술 약한가 보네.”
그 말에 건우가 옆에 있던 소주병을 집어 제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그리고 곧바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기 싸움을 하러 온 게 아니라고, 마시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는 비상 깜빡이가 계속해서 울리는데도 손으로는 다시 잔을 채우고 있었다. 저 역겨운 면상이 비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오기로 버틴다. 차건우가 다시 한번 목구멍으로 소주를 들이부었다. 박성재는 그 모습을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바라보았다.
“선배. 근데 김 교수님 프로젝트 어떻게 들어가신 거예요? 그거 했던 선배들 취업 원하는 데 바로 뚫었다던데.”
규진이 박성재의 잔에 소주를 채우며 물었다.
“그냥, 뭐. 교수님이 연락 주셔서 한다고 했지. 심심하기도 했고.”
“와, 대박.”
물꼬를 튼 규진이 줄곧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건우는 그런 것 따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뭐라도 알아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신경을 대화에 쏟았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썩은 놈한테는 술도 소용이 없는 건가. 차건우는 벌써 주량을 한참 넘기고 속이 뒤집히기 직전인데 박성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규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형, 괜찮으세요?”
“어, 씨발. 존나 멀쩡해.”
박성재가 광대를 들썩이며 말했다.
“힘들면 그만 마시지.”
“멀쩡하다고요.”
귓구녕이 막혔나. 일부러 흘리듯 뱉은 말에 박성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본 건우는 씩 웃었다. 사나워진 분위기를 눈치챈 규진이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만 남자 박성재는 다시 여유 있는 척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 진짜 못생겼다. 건우는 속으로 수도 없이 떠올린 생각을 다시금 반복하며 제 잔에 술을 따랐다.
“해영이랑 친한 것 같던데.”
소주를 졸졸 채워 넣던 손이 뚝 멎었다. 그리고 소주병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유리가 나무와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깨지지 않은 게 신기했다.
“내가 걔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박성재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실실 쪼개며 물었다.
“아니요.”
“해영이가 숨기는 게 뭔지는 알고서 붙어 있는 거야?”
“안 궁금합니다.”
“아,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관심이 없는 건가? 해영이가 서운해하겠는데.”
말마다 해영이, 해영이. 턱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해영 본인이 이야기를 직접 이야기해 주는 거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그것도 그걸 가지고 해영을 쥐고 흔드는 놈 입에서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
“뭘 숨기고 있든 상관 안 하니까 필요 없다는 겁니다.”
“아닐 텐데. 상관있을 텐데.”
진짜 존나게 건드네.
차건우는 옆에 있던 반쯤 남은 소주병을 들고 그에게 따라줄 것처럼 비스듬히 내밀었다. 박성재는 의심스러운 눈을 하면서도 잔을 아래에 대었다. 멍청한 새끼. 건우는 잔이 아닌 그의 손 위에 소주를 콸콸 부었다. 소주는 손에서 테이블로, 그리고 그 아래까지 흘러내려 흠뻑 적셨다. 박성재가 놀라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야, 뭐 하는…!”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져서.”
건우가 옆에 있던 티슈를 대충 뽑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닦아 주려는 척 손을 뻗으며 그 앞에 있던 물잔을 툭 건드렸다. 안에 가득 차 있던 물이 그의 바지에서 신발까지 떨어졌다.
“씹, 미쳤나, 이게!”
“와, 진짜 죄송해요.”
박성재는 씩씩대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크게 소리를 지른 탓에 술집 내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해 있었다. 박성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애써 웃었다. 그리고 스스로 제 옷을 티슈로 벅벅 닦아냈다.
“됐어.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마셔라.”
허겁지겁 가면을 뒤집어쓰는 모양이 우스웠다. 건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걸 본 박성재의 표정이 흉하게 굳었다. 때마침 맑은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규진이었다. 그는 손에 편의점 봉투를 들고 건우와 박성재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요상한 분위기에 눈치가 보이면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뭐, 무슨 일 있어요? 헐. 선배 옷….”
“아니야, 아무것도. 옷이 이래서 가 봐야겠는데.”
“아, 벌써 한 시네. 건우 형. 저희도 이만 가요. 가기 전에 이거 좀 드시고요.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시셨지.”
규진은 편의점 봉투 안에서 숙취 해소 음료 하나를 꺼내 건우에게 건넸다. 얌전히 받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취기에 시야가 핑핑 돌았다.
결국 건우는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술집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입에 문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아야 했다. 죽겠네. 애초에 이 술자리에 온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제 성질을 못 이겨 술만 진탕 마셔 버린 꼴이 한심했다. 밖으로 나온 박성재가 그런 저를 흘긋 내려다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못생긴 얼굴을 보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두드렸다. 사진이라도 찍을 셈인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인지 금세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찔러 넣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해영이 이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급하게 나왔는지 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차림으로.
아까의 복수라도 하려는 거 같은데, 차라리 사진을 찍어라. 괜히 저 때문에 이 새벽에 불려 나온 해영에게 미안했다. 해영은 박성재와 제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건우는 제 앞을 서둘러 지나치려는 해영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선배.”
해영이 우뚝 서서 붙잡힌 옷자락을 한 번, 그리고 제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은 당황으로 덮여 있었다.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저 또 취했어요.”
해영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린다. 그리고 발간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힘을 주어 제 옷을 쥐어 당겼다. 건우는 고집부리지 않고 놓아주었다. 이 이상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해서 들어가….”
해영은 박성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건우는 그제야 네,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거면 되었다.
점점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 너머로 실실 웃고 있는 박성재의 면상을 보면서 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
“괜찮으세요?”
“아니.”
규진이 죽을상을 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건우를 보며 물었다. 차건우는 있는 그대로 답하곤 고개를 벽에 콩 기댔다. 죽을 것 같아. 어제는 모든 게 최악이었다. 술에서 깨자마자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살살 긁어대는 걸 참지 못하고 술을 진탕 마신 것도, 조용히 약점 잡겠다고 간 곳에서 불을 지피고 온 것도, 해영에게 그 꼴을 보인 것도 모두 후회투성이였다. 한심하다.
숙취에서 발현된 얕은 두통이 퍼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함께 수업을 듣는 애들과 같이 강의실 쪽으로 걸어가던 건우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 끝에서 서성거리는 박성재를 본 게 그 이유였다.
“어디 가세요?”
“나 담배 좀.”
건우는 규진을 향해 먼저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젓고, 비상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저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두리번거리다 비상구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건우는 소리를 죽인 채 빠른 걸음으로 뒤쫓았다. 그리고 서서히 닫히던 문 사이로 발을 끼워 넣고 조용히 비집고 들어갔다.
박성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아래쪽 계단에서 웅웅대는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건우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보낸 거 맞아? 아니, 좀 이상해서.”
건우는 아래에서 이쪽으로 고개를 내민다고 해도 바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안쪽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주머니 속 담뱃갑을 손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주변을 예민하게 맴돌았다.
“문자는 왜 이렇게 확인을 안 해. 아니, 교수 하는 게 엄마가 한 말이랑 다르다니까. 돈 제대로 보낸 거 맞아?”
건우는 어제 술자리에서 규진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게 돈으로 얻어낸 거였나.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머저리가 따로 없었다.
“아, 몰라. 엄마가 다시 알아봐. 끊어.”
전화를 마친 박성재가 계단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는 피하지 않았다. 이제 그럴 이유도 없었고. 씩씩대며 계단을 오르던 박성재가 시야에 잡히는 인형에 홱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황하여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상황 파악을 하곤 눈썹을 팍 구기며 욕을 뱉었다.
“쥐새끼 같은 놈.”
“본인이 조심성 없는 걸 탓하세요.”
“이딴 거 엿들어서 뭐, 씨발. 뜯어내기라도 하려고?”
쓰레기 눈에는 모든 사람이 쓰레기로 보이는 모양이지.
“제가요? 설마요. 그런 역겨운 짓을 왜 해요. 그냥-.”
건우는 박성재가 서 있는 계단 중간층까지 내려가 그를 벽 쪽으로 슬슬 몰아붙였다. 건우가 손을 들자, 그가 눈을 질끈 감는다. 우스웠다. 이런 새끼한테 몇 년씩이나. 이를 악물었다. 차건우는 성급하게 분풀이를 하는 대신, 손등으로 그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해영 선배 그만 괴롭히시라고요. 근처에서 이 얼굴도 좀 치우고.”
“이 씹새끼가…. 뭐 좀 하나 잡았다고 신났지, 아주. 후회할 짓 하지 마, 이 새끼야. 서해영 걔 약점이 얼마나-.”
“부정 청탁보다 더 센가?”
노골적인 단어에 박성재의 몸이 크게 튀었다. 건우는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아니구나.”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럴 정신조차 없는 건지, 겉으로 불안함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가 위아래로 톡톡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건우는 손을 내려 박성재의 멱살을 틀어쥐고 벽에 쿵 짓눌렀다.
“빨리 대답하세요. 그래야 제가 저 문을 나가서 어디로 갈지 정하죠. 저 곧 수업 시작한단 말이에요.”
“아, 알았다고.”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건우가 손을 놓고 그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똑바로 만져 주었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피해자 행세를 해대면 곤란하니까.
“아, 그리고 프로젝트는 알아서 그만두세요. 자기 발로 나가는 게 그림이 좋잖아요.”
“뭐? 그거까진…!”
박성재는 제 할 말만 마치고 몸을 돌리는 건우의 팔뚝을 황급히 잡았다. 더러운 손에 잡힌 부위가 썩어가는 것 같았다. 몸을 거칠게 비틀어 그 손을 털어내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본인 힘으로 못 얻는 건 건드리지를 마세요. 추해요.”
박성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둘 다인가. 그 부들대는 얼굴을 본 후에야 건우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비로소 숙취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건우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해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예요?]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인데. 나 공강.]
[조금 이따가 집 앞으로 갈게요.]
[나 몸이 안 좋아.]
[아닌 거 다 알아요.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자판기에 카드를 찍고 콜라를 눌렀다. 묵직한 캔이 퉁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허리를 숙여 투출구 안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네. 캔을 따서 입에 대던 중 손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액정을 본 건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너 고집이 너무 세.]
[이따 봐요.]
수업이 평소보다 늦게 끝났다. 교수가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끊임없이 갈아탈 때마다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급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거듭 되뇌며 충동을 눌렀다. 그렇게 마침내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건우는 그보다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저 끝났어요. 십 분 안에 갈게요.]
해영을 만나면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오늘 수업에서 있었던 우스운 이야기나, 예전처럼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먼저 꺼낼 것이다. 맛있는 거로 같이 저녁을 먹고, 실컷 웃게 한 다음 천천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가뜩이나 어제 일로 놀란 상태일 테니까.
“왜 안 읽지. 잠들었나.”
횡단보도의 초록 불을 기다리는 몇 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얼른 보고 싶은데. 신호가 바뀌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퇴근 시간 직전의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그의 오피스텔에 거의 다 도착했지만, 여전히 해영은 메시지를 읽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를 한번 해보고 그것도 안 받으면 근처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해영의 프로필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때, 고요한 거리를 메우는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얼핏 싸우는 것 같은 험악한 어투였다. 그 소리를 따라 골목으로 향하던 건우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며칠 새에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휴대폰 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씨발!”
건우가 재빨리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안쪽에는 위협적으로 손을 치켜든 박성재와 그 앞에서 쭈그려 앉아 팔로 얼굴을 가리고 떨고 있는 해영이 있었다. 박성재는 당한 것을 저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푸는 전형적인 쓰레기였다. 차건우는 성큼성큼 걸어가 박성재의 손목을 세게 비틀어 쥐었다.
“아악!”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비 꼬았다. 해영이 팔을 내리고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건우는 그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맞았어요?”
해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본 후에야 건우는 붙잡고 있던 놈을 밀치듯 놓아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움츠리고 있는 작은 몸 앞으로 다가섰다. 건우는 그의 얼굴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읽었다. 일으키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해영은 잡지 않았다. 스스로 무릎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냥 가. 해영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건우를 밀었다.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걸 보고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씹. 더러워 죽겠네.”
등 뒤에서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차건우는 고개를 돌렸다. 박성재는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눈에 생기가 없었다. 이전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재고 따지거나 계획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짓밟힐 대로 짓밟힌 벌레 따위가 마지막 힘을 다해 꿈틀대듯, 악을 쓰는 몸부림이었다.
“호모 새끼들한테 잘못 걸려서 끼리끼리, 씨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저를 꾹꾹 밀어내던 미약한 힘이 뚝 멈추었다.
“그렇게 아니라더니 저 새끼 하는 짓을 봐. 저게 호모가 아니면 뭔데. 집도 존나 드나들던데, 뒤라도 대준 거 아니냐? 아, 씨발. 더러워.”
박성재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얼굴을 구겼다. 아웃팅. 해영이 두려워하던 게 이거였나.
“아….”
해영은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벌벌 떠는 게 전부였다.
하얗게 질린 뺨 위로 한참을 참아냈을 눈물이 뚝뚝 방울져 떨어졌다. 건우는 그 얼굴을 보고 후회했다. 아까 그쯤에서 알아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좋게 좋게 생각했지. 사람 말로는 해결이 안 되는 새끼였던 거다.
뒤를 돌아 실성한 듯 웃고 있는 박성재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꽂았다. 형편없는 몸뚱이가 골목 밖까지 나뒹굴었다.
“미, 미친 새끼가….”
건우는 비릿하게 웃고서 그의 발목을 잡아 골목 안쪽으로 주욱 끌어당겼다. 시작이 어렵지, 그 뒤는 쉬웠다. 무자비한 표출뿐이었다. 발길질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박성재는 자신이 침을 뱉었던 아스팔트 바닥 위를 정신없이 굴렀다.
“으아악!”
그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것을 건우가 뒤통수를 세게 움켜쥐고 벽에 무게를 실어 눌렀다. 쿵,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가 신음했다. 손을 다시 뒤로 빼자 머리가 힘없이 따라 올라온다. 그대로 벽에 내려찧을 것처럼 팔을 내리다가 바로 코앞에서 멈추었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말로 하면, 알아들어야지. 원숭이 새끼도 아니고.”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하면 그대로 벽에 얼굴이 갈릴 만큼 가깝게 들이밀었다. 잔뜩 터지고 부은 얼굴이 본능과 같은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입꼬리를 살살 올리며 도발하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차건우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박성재는 벽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 엉망이 된 낯짝을 보는 순간,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데자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건우가 넋을 놓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해영은 많이 놀란 듯 눈이 크게 뜨인 채로 그 자리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 위에 꿈속에서 저를 보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건우는 입안 살을 세게 씹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내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게 이거였는데, 눈이 돌아 해영이 뒤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건우는 해영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는 흠칫 몸을 떨면서도 피하진 않았다. 동요하는 눈동자가 제 손을 향해 있었다. 손을 뻗어 해영의 손을 꼭 붙잡고 약하게 잡아끌었다. 그는 뿌리치지 않았다.
“가요.”
해영은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 순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서웠을까. 건우는 자신이 한 행동을 복기해 보았지만 제대로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제가 어떤 얼굴로 얼마큼 때렸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걸 보는 해영의 얼굴 또한 생각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을걸. 적어도 해영을 들여보내고 나서 손을 댔어야 했다. 그새를 못 참고. 건우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제 불같은 성질머리를 원망했다.
“선배. 아까 그거는-.”
“미, 미안해….”
그의 입에서 제가 하려던 말이 앞서 나왔다. 속마음이라도 읽힌 것처럼. 해영의 사과는 언제나 불필요한 것들뿐이었지만 이번에는 의도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뭐가요.”
“나 때문에 손도 다치고, 형이 혹시나 화, 화나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내면….”
이상한 소문이라면 그 약점을 말하는 건가. 제 소문이야 어찌 나든 상관 안 했다. 오히려 그 소문으로 인해 저와 해영 둘만 고립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건우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해영은 맞잡은 손 위에 다른 한 손을 가져와 건우의 벌게진 손등을 가만가만 살폈다. 바닥이나 벽에 살짝씩 긁힌 자국은 있었지만, 같이 뒹군 놈의 꼴을 떠올려 보면 이보다 멀쩡할 수는 없었다.
“그….”
해영이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말을 골랐다.
“나랑 같이 있으면 아까처럼 안 좋은 소문이 날지도 몰라…. 게, 게이라든가, 그런 거.”
건우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에는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팠다.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찰나, 해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그런 소문 안 나게 내가, 내가 많이 조심할 테니까.”
그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 없이 지내보려고 했는데,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외, 외로워서….”
한껏 위축된 채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만 겨우겨우 뱉어낸다.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
축 처진 어깨로 눈치 보는 해영을 보며, 건우는 턱을 단단히 물었다. 보여 주면 도망갈까 꾹 참았던 마음이다. 지금은 낱낱이, 숨기는 것 없이 까뒤집고 내보이고 싶었다. 그럼 소문 몇 마디에 제가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 하지 않을 텐데.
건우의 대답을 기다리던 해영이 오래 이어진 침묵에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내, 내가 공부도 더 도와주고, 과제 같은 것도…. 네가 원하면 해 줄 수 있는데….”
건우는 잡혀 있던 손을 스륵 빼냈다. 해영은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다급하게 그 손을 쫓았다. 그가 불안해하기 전에 다시 단단히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제가 그 하얀 손을 꼭 붙든 모양새였다. 보드라운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쓸어내자, 간지러운지 꼼지락거린다.
“좋아해요.”
그 위로 오래도록 참았던 마음이 울컥 쏟아졌다.
“많이, 좋아해요.”
이렇게 엉망인 고백이 어디 있어. 멋있는 곳에 데려가 예쁜 말들로 가득 채워 줘도 모자란 사람이다. 말이라도 제대로 하든지. 하고 싶은 말이 분명 많았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밖에 못 하는 놈처럼 그를 앞에 세워 두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몇 번을 말해도 속에 있는 것의 반의반도 전해지지 않았다. 꼴사나워. 눈가가 시큰거렸다.
자기 생각만 해서 미안하다고?
그를 수년 동안 괴롭힌 약점을 듣고도 기뻐한 제가 제일 이기적인 놈이었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