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조사 2권
목차
선호조사 (1)
선호조사 (2)
선호조사 (1)
건우는 마치 뱉은 말을 후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입술을 깨물다가 작게 숨을 뱉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눈을 제대로 맞추질 않았다. 마주 잡은 손에서 긴장한 듯 잘게 떨림이 느껴졌다. 둘은 집 안까지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현관 언저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손을 더 꼭 붙들었다. 이미 내보인 것을 무를 생각은 없는 건지 건우는 한 번 더 힘을 주어 같은 말을 내뱉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난생처음 듣는 그 말 앞에서 해영은 우습게도 어릴 적 보육원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탄생과 동시에 누군가의 불행이었던 저는 내쳐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삶을 살았다.
처음으로 욕심이 났다.
박성재가 뱉는 말들을 듣고도 저를 피하기는커녕, 제 편에서 화를 내주고 손을 잡아 준 사람이. 그가 저 때문에 다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나쁜 욕심이 솟았다. 그 욕심을 입 밖으로 내보이면서도 스스로의 몰염치함에 치를 떨었는데. 그랬는데 그가 돌려준 말이라는 게.
해영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말아 쥐었다.
건우를 좋아하냐 싫어하냐 질문해 온다면 당연히 좋아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부끄럽고 간질거리고 어색했다. 그래도 먼저 말해 줬으니까 답해야겠지.
“나, 나도 너 좋아.”
“거짓말.”
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억울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 건우가 좋았다. 착하고, 좋은 애라고 생각했다.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부정당하다니. 아무리 저 때문에 험한 난리를 치른 직후라고 해도 조금 화가 나려고 했다.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해영이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선배, 저랑 입술 비빌 수 있어요?”
“응?”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 만지고 싶어요?”
“…어?”
이건 더더욱.
놀라 벙찐 해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건우가 제 눈가를 손으로 턱 가렸다.
“망했어, 씨발….”
해영은 그제야 그가 말한 ‘좋아한다’의 의미가 제가 말한 것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누군가에게 성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간간이 연애 이야기가 들리거나, 로맨틱한 드라마를 봐도 남의 일처럼 느껴졌고, 저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기대가 없으니 관심이나 부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끄적였던 작은 낙서 또한, 지금 떠올려 보면 저에게 잘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나 호기심 정도에서 피어난 설익은 마음이었다.
건우는 저보다 어리고, 충분히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가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웃어넘기기엔, 건우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놀리거나 장난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짓을 할 애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그에 맞는 답을 쉽게 내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에 해영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건우는 그 한숨 소리에 더 내려갈 곳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이 이상 징징댈 수는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해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 당장 대답해야 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시간을 조금만 주면, 좋겠어.”
건우는 어깨를 축 내려트렸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도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단번에 거절하거나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알겠어요.”
건우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했다. 해영은 그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다가 잡힌 손을 이끌었다. 여전히 울적한 얼굴을 한 건우를 소파에 앉혀 놓고 서재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건우의 손을 잡아 손등이 보이도록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눈에 띄게 굳는 게 느껴졌다. 괜히 덩달아 긴장되는 것 같아 해영은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깨끗한 면봉에 연고를 묻혀 긁히고 까진 곳에 살살 펴 발랐다.
“저 피하면 안 돼요.”
묵묵히 치료를 받던 건우가 대뜸 말했다.
“응. 안 피해….”
“선배도 저랑 같은 마음 들면 숨기지 말고 바로 말해 줘야 해요.”
“알겠어.”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진짜 좋아해요.”
“알았다니까.”
해영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좋아한다, 피하면 안 된다는 말을 건우에게서 반복해 들어야 했다.
***
잠이 오지 않았다.
해영은 어둑한 거실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멍한 얼굴로 티비를 응시했다. 화면 속에서는 철 지난 청춘 히어로 영화가 재방영되고 있었다.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은 사실 초능력자로,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 앞에서 악당을 물리치는 뻔한 이야기. 사람들은 이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언젠가 빛을 보게 되어 있다고. 우스웠다. 권선징악적인 것들은 해영에게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스스로를 더 무능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손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건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성재에게 문자를 받았다. 그동안 잘못했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장문의 문자. 가는 길에 더 때려 주기라도 한 걸까. 굳이 답장은 하지 않았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무너졌을 때의 허탈함은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다.
박성재와의 몇 년은 그중에서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중 하나였고, 그가 질려서 떨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걸 단 며칠 사이에 해결해 주는 건우를 보고, 고마운 것과 동시에 제 속에서 무언가가 한 번 더 무너져 내렸다.
제가 건우처럼 단단했다면 박성재 같은 사람한테 당하지 않았을까. 그럼 수군대는 사람도 없었겠지. 대학 생활 내내 남의 일을 도맡아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런 걸 필사적으로 바라지도 않았을 거다.
몇 년 동안 뭘 해왔던 걸까.
“흐으….”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비집고 나왔다. 꾹 깨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위로 올렸다. 한심해. 짧은 손톱을 세워 어깨를 꾹 눌렀다. 살갗을 아릿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저 자신이 못나 견딜 수 없을 만큼 속이 상할 때, 어머니의 말처럼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질 때마다 습관처럼 죽죽 그어대던 행동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
손톱으로 긁는 대신 주먹을 쥐고 답답한 부분을 쿵쿵 두들겼다. 끅끅 넘어갈 듯한 울음과 함께 뱉어지는 숨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천천히 스스로를 달랬다.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지금이라도 벗어났으니 된 거라고.
정말 이걸로 된 건가?
건우는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데. 스치듯 지나가는 호기심은 아닐지 알고 싶었다.
해영은 옆자리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길게 고민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잠이 묻어 있는 낮은 목소리. 해영은 울음이 새어 나갈까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건우가 재차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제가 갈까요?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단잠을 깨워 놓았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것도 모르면서 올 생각부터 하고 있다.
“건우야….”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물기가 말끝을 맴돌았다.
―네.
“내가, 흐…. 내가 왜 좋아?”
아무도 원한 적 없는 저 같은 게 뭐가 좋다고 잘해 주고, 화도 대신 내 주고, 또 그런 애타는 얼굴로 봐주는 건지 궁금했다.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부정하지 않을 거라면 확인을 해야 했다.
―음….
건우는 대답 없이 한참을 고민했다. 해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정도로 좋아하진 않는 건가. 괜히 물어봤다. 아니라고, 잘못 말했다고 수습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건우가 입을 열었다.
―다 말하려면 밤새워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던 건지, 그 말을 듣자마자 얕게 흐느꼈다. 휴대폰 너머에서 그가 코끝으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해요?
“응….”
―그럼 저번에 못 봤던 영화 보러 가요. 내일.
별로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안 그래도 그때 기약 없이 미뤘던 게 마음에 걸렸던 차였다.
“알겠어. 이제 말해 줘.”
―내일 데려다줄 때 말할래요. 또 바람맞을 수도 있잖아요.
“이제 안 그래….”
―하루만 참아 봐요.
“어, 없는 거 아니야? 하루 동안 만들어 내려고….”
―못 믿네. 진짜 밤새울까요? 학교 가지 말까.
결석은 곤란했다. 건우 성적에는 더더욱.
“아니야. 참아 볼게….”
―데이트해 줄 때마다 하나씩 말해 줄게요.
“얼마나 해 줘야 다 들을 수 있는데?”
―엄청 많이요. 못 세요.
해영은 그제야 샐쭉 웃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둥실 떠올랐다. 물기가 남아 있는 눈가를 손바닥 아래쪽으로 꾹 눌러 닦아 냈다. 심각한 일도, 우울한 기분도 그와 얘기를 하다 보면 별거 아닌 일이 되어 있었다. 마치 제가 이고 있던 짐을 덜어가 준 것처럼 가벼워진다.
그래서 점점 기대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해영에겐 버려질 수도 있다는 것과 같았다. 그게 두려워 피했다. 박성재가 수없이 협박했던 것처럼 그와 제가 싸잡아서 소문이 나든, 건우가 제 약점을 듣고 저를 멀리하든 어느 쪽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전자는 건우에게 저 때문에 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 후자는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걸 듣고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지금 같은 경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매번 좁은 세상에 살던 제가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더 좋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과분한 사람이다.
―잠 안 와요? 티비 소리 들리는데. 빨리 주무세요. 늦었어요.
아. 해영은 허겁지겁 리모컨을 찾아 티비 전원을 껐다. 조금 창피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건우가 다시 물었다.
―누웠어요?
“아직.”
―얼른.
해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 반듯하게 펼쳐 둔 이불 속으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들어가 몸을 뉘었다.
“누웠어.”
―내일 봐요.
“응, 잘 자.”
인사를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 결국 해영이 먼저 종료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협탁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옆으로 돌아눕는 얼굴엔 붉게 열이 올라 있었다.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던 거….
***
해영은 벤치 아래로 발을 동동 굴렀다. 끝났다고 했는데 왜 안 나오지.
“아오, 저리 좀 가라고.”
멀리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건우와 함께 낯이 익은 일 학년 몇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건우는 동기들에겐 저에게 하는 것만큼 살갑게 대하진 않았지만, 매정하게 굴지도 않았다. 툴툴대면서도 다 받아주는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몰렸다.
그중 한 명인 규진이 해영을 발견하고 온몸으로 반가운 티를 내며 뛰어왔다.
“선배, 안녕하세요!”
“응, 안녕….”
해영이 손을 들어 잘잘 흔들었다. 규진이 고개를 돌려 건우를 보고 투덜댔다.
“아니, 형. 약속이 있으면 있다고 말씀을 하시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네가 안 들은 거잖아.”
“근데 어디 가세요? 두 분이서 노는 거예요? 같이 끼면 안 돼요?”
규진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건우가 곧바로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그를 노려봤다. 앞에서 규진이 하도 정신없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해영이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그, 그럴까?”
“안 돼.”
건우는 규진과 해영 사이를 비집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규진이 뒤에서 뭐라 투덜대거나 말거나, 해영의 등에 손을 얹고 밀며 자리를 피했다.
영화관에 도착할 때까지 건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뭐 때문에 삐친 건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과장이 아니라 누구 하나 걸리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영의 목울대가 작게 울렁였다. 여전히 살벌한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고서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화났어…?”
“아니요.”
건우는 제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화났네.
건우는 음료를 사고,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삐친 티를 풀풀 풍겼다. 저도 할 말은 있었다. 바로 면전에 대고 같이 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 사람한테 어떻게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건우는 그렇게 했지만, 저에게는 아직 어려운 일이었다.
해영은 옆을 힐끔 바라보았다. 건우는 애꿎은 콜라 빨대만 잘근잘근 씹어대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 저 사람은 왜 가다가 흘리냐, 안 줍네, 영화 텀이 왜 이렇게 기냐. 해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기대하고 있었을 게 분명한 사람이 저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는 연장자인 제가 넓은 마음으로 굽혀 줘야겠지. 해영은 검지로 건우의 손등을 쿡쿡 찔렀다. 그제야 그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차분하게 뱉은 사과에, 줄곧 비죽거리던 건우가 움찔한다.
“미안해, 건우야.”
한 번 더 사과하자,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어려서 그런가. 별거 아닌 일로 삐치고 금방 풀어졌다. 버겁거나 귀찮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면도 있구나, 싶어서 신선한 느낌에 가까웠다. 건우는 부정적인 감정을 뱉어내듯 숨을 푹 내쉬고는 제 쪽으로 몸을 돌려 고쳐 앉았다.
“저만 기대한 것 같아요.”
“아니야. 나도 기대했어.”
“저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나, 나도 그랬어.”
거짓말이었지만 이런 거짓말은 괜찮겠지. 최선을 다해 기분을 풀어 주려는 해영의 노력에 건우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다른 사람 끼는 거 싫어요.”
“응, 끼지 말자. 둘이서만 놀자.”
둘이서만. 그 말에 건우가 언제 삐쳤냐는 듯 샐쭉 웃었다. 해영도 그제야 마주 보고 눈을 접었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툴툴대며 귀한 시간을 낭비한 게 아까웠다. 조금만 더 빨리 사과할걸. 후회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후회는 짧게 끝냈다. 어긋나고 다시 끼워 맞추는 건 익숙하지 않아 어려웠지만, 싫거나 피하고 싶은 느낌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배워가고 싶었다.
“근데 뭐 예매했어?”
“아, 이거요. 둘째 누나가 엄청 재밌다고 꼭 보라고 한 건데, 추리물 같아요. 혹시 이런 장르 잘 못 보세요?”
“아니. 재밌을 것 같은데?”
해영은 건우가 내민 휴대폰 액정 속 트레일러 영상에 집중했다. 증거도 없고 용의자도 찾지 못하는 완전 범죄. 산골 마을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연쇄 살인에 관련된 영화였다. 재밌겠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과 함께 반 단체로 온 이후 처음이었다.
“원래 좀 밝은 거 보고 싶었는데, 이 시간에 볼 수 있는 게 이거랑 눈 달린 버스 나오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건우는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트레일러 영상이 끝나자 해영은 휴대폰을 도로 돌려주었다. 눈 달린 버스는 조금 그렇긴 하지. 해영은 의자 아래로 발을 앞뒤로 하느작거렸다. 빨리 보고 싶다.
“이제 줘.”
건우는 좌석에 앉고 나서야 해영의 밀크셰이크를 돌려주었다. 가방을 대신 들어 주겠다 하는 걸 거절했더니 음료를 뺏어갔다. 멀쩡히 잘 들고 있는데 왜 들어 주겠다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영은 저에게로 돌아온 반가운 밀크셰이크를 빨대로 쭉 빨아올리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예매한 자리는 가장 오른쪽 두 자리씩 떨어져 있는 좌석의 맨 뒷자리였다. 영화관을 자주 오지 않는 해영은 좌석 취향이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 앉든 상관없었지만, 똑 떨어진 곳에 앉는 이유가 궁금했다. 영화를 기다리던 중에 물어봤더니, 자기는 양옆에 사람이 없는 게 집에서 보는 느낌이라 편해서 좋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영화관다운 걸 기대해서인지 의아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래도 스크린이 커서 충분히 기분이 났다. 해영은 그걸로 만족했다.
광고가 나오는 동안 건우는 말이 많아졌다. 스키장 광고가 나올 땐 “다음에 저기도 같이 가요.”. 패밀리 레스토랑 광고가 나올 땐 “저거 같이 먹으러 가요.”. 개봉 예정인 영화 광고가 나올 땐, “저것도 같이 봐요.”.
열심히 그러자고 답을 해 주다 보니 지루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은 몇 년 전 그 마을에서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추리물인 줄 알았는데 공포 영화구나. 해영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내용일수록 흥미로웠다. 커다란 화면에 귀신과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번갈아 나오고, 점점 더 섬뜩한 분위기가 고조됐다. 배경 음악도 스토리도 클라이맥스에 가까워졌지만 해영은 통 집중이 어려웠다. 귀신이 나올 때마다 건우가 움찔거리는 바람에 팔뚝이 서로 부딪혔다. 무서운가.
또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침한 배경 음악이 들리자, 해영은 아예 고개를 건우 쪽으로 돌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곧 앞에서 비명이 들리고, 건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팔걸이에 올려져 있던 그의 손이 어느새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사람처럼 그것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조금 의외긴 했지만 어른 중에서도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많으니 놀릴 생각은 없었다. 무서워하면서 이건 왜 예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해영은 몸을 옆으로 살짝 기울여 속삭이듯 물었다.
“무서우면 손잡아 줄까?”
“아니요.”
건우는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그때, 스크린에서 피 칠갑을 한 귀신이 씨익 웃었다. 건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꼼질댔다. 해영은 그 손이 펴졌을 때를 틈타 그 아래로 손을 넣어 꼭 맞잡았다. 아니라고 말은 잘하더니, 막상 잡아 주니까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저보다 더 힘을 주어 잡았다. 확실히 효과가 있는지 움찔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뿌듯했다. 옆을 보니 그는 귀가 붉게 물든 채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게 어지간히 창피했나 보다. 해영은 멋대로 생각했다.
“재밌었다, 그치.”
“네….”
건우는 두 시간 만에 핼쑥해져 있었다. 둘은 지나가다가 눈에 띈 수제버거 전문점에서 적당히 배를 채우고, 그 옆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건우는 레몬 샤베트 아이스크림을, 해영은 꾸덕꾸덕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입에 뭐가 들어가니, 건우는 금방 원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그는 손 크기에 비해 많이 작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푹 뜨더니 입에 넣고 음, 목 울림으로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감탄했다. 저렇게 맛있나.
“선배, 이거 먹어 보세요. 엄청 맛있어요.”
“나, 나는 신 거는 조금….”
“안 시고 진짜 맛있는데.”
“레몬인데?”
“그러게요. 레몬이 별로 안 들어갔나.”
건우는 다시 한 입 먹고 눈을 크게 떴다. 저러니까 궁금해지잖아. 해영이 기대 어린 눈으로 숟가락을 내밀자, 그가 제 아이스크림을 해영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해영은 그 새하얀 레몬 샤베트 아이스크림을 크게 퍼서 입에 넣었다.
“으….”
그리고 곧바로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구겼다. 이게 뭐가 안 시다는 거지. 해영은 그 아이스크림을 재빨리 쭉 밀어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뺨 아래가 저릿하게 아플 정도로 신맛이었다.
건우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일부러다, 일부러. 해영은 뾰족하게 뜬 눈으로 그를 흘겼다. 전부터 느꼈지만 건우는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제 반응이 우스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이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할 때마다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선배로서의 체면이 죽죽 깎이는 기분이랄까.
그 장난기는 오락실에서도 이어졌다.
영화관 옆에 있던 화려하고 요란한 오락실은 해영의 호기심을 불렀다. 저 혼자서 갈 일이 없는 곳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어디 갈지 고민하는 건우에게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오락실에 가 보고 싶다고 얘기했고, 그는 그러자고 답하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락실에서도 이렇게 놀림당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아, 또야.
해영이 힘껏 던진 농구공이 건우가 던진 농구공에 맞아 옆으로 퉁 튕겨 나갔다. 억울한 점은 분명 같이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은 끄떡도 하지 않고 그물망 안으로 쏙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네 공이 자꾸 내 공을 밀잖아.”
“타이밍을 잘 잡아 보세요.”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신중하게 공을 던졌다. 그리고 또다시 부딪혀 오는 건우의 공. 시끄러운 오락실 소리에도 분명하게 들린 웃음소리.
해영은 멀거니 서서 통통통 튕겨져 내려오는 제 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 이거 그만할래.”
아직 주어진 게임 시간이 반도 더 남아 있었지만, 해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자꾸 놀림당하니까 속상하고 재미도 없었다. 거기엔 제 하찮은 게임 실력도 한몫했다.
건우는 그제야 당황한 얼굴을 하고 해영의 뒤를 쫓았다.
“선배, 그럼 저거 할까요?”
그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어 하키였다. 저것 역시 농구처럼 몸으로 하는 거라 자신이 없었다. 해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저거는요? 격투 게임이요.”
이번에 제안한 것은 해영도 해본 적이 있는 게임이었다. 초등학교 때 문방구 앞에서 동전을 탑처럼 쌓아 놓고 하는 애들을 점심시간마다 나와 구경했다. 그러다 방과 후, 텅 빈 문방구 앞에서 몇 번인가 해본 기억이 있었다. 이건 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손만 움직이면 되는 거라 잘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해영은 건우를 돌아보며 제법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이번에는 놀리지 마.”
“네.”
해영이 기계 앞 동그랗고 작은 의자에 앉았다. 건우가 가까이 다가와 해영의 자리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러 주었다. 스틱을 움직이며 캐릭터 목록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건우가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얼굴이 안 보이니 놀리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겠네. 해영은 가장 세 보이는 캐릭터를 골랐다. 키도 크고 근육질에 인상도 아주 무서웠다.
컴퓨터를 상대로 동그란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며 앉았다 일어났다 열심히 움직여 보고 있는데, 금세 매치가 되었다는 문구가 떴다. 똑같은 캐릭터를 빠르게 고르고 기다렸다.
건우의 캐릭터는 작고 귀여웠다. 때리기 조금 미안했지만, 이것마저 질 수는 없었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열심히 때렸다. 작고 귀여운 애는 움직임이 어설펐다. 꼭 맞으려고 가까이 오는 애처럼 움직였다.
건우는 스포츠에는 재능이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게임에는 영 재능이 없는 것 같았다. 세 번을 연속으로 이긴 해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건우는 분한 건지 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조금 봐줄 걸 그랬나. 해영은 가까이 다가서서 그를 달랬다.
“이런 거 잘 못해도 괜찮아.”
건우는 환기하듯 마른세수를 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왜 이렇게 잘해요? 못 이기겠어요.”
“별거 아, 아닌데….”
칭찬을 들으니 쑥스러웠다. 뺨을 한 손으로 매만지는 해영을 가만 내려다보던 건우가 웃었다.
학교 옆에는 유난히 인적이 드문 공원이 하나 있다. 영화관이 있는 번화가에서 해영의 오피스텔까지 가려면 학교 옆을 지나가야 하는데, 대로변을 따라 쭉 걷거나 이 공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공원 산책로는 한참 돌아가는 길이라 평소였다면 고르지 않았을 선택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영이라도 오늘만큼은 일찍 도착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별말 없이 그가 가는 방향으로 따랐다.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볼가를 스쳤다. 공원에는 켜져 있는 가로등이 몇 개 없었다. 그래서인지 달빛이 유달리 더 밝게 느껴졌다. 나뭇잎끼리 비벼지는 소리, 풀벌레가 우는 소리. 건우는 오락실에서만 해도 조잘조잘 말이 많더니, 공원 초입부터 지퍼라도 채운 듯 입을 꾹 닫았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참다못한 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날씨 조, 좋다.”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예요.”
해영은 멋쩍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술을 꾹 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웠다. 나란히 걸어서인지 자꾸만 손등이 스쳤다. 너무 가까운가 싶어 옆으로 조금 떨어져 걸어 봤지만, 슬금슬금 도로 가까이 붙은 건우가 또다시 손등을 간질였다. 그가 제 쪽을 보며 물었다.
“아까처럼 손잡아 주시면 안 돼요?”
“사, 사람들 보는데….”
“어두워서 안 보여요.”
그는 고민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해영의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정도는 그동안 자주 잡았으니까 괜찮겠지. 해영이 마주 스치던 손을 들어 커다란 손바닥 위에 포개 놓았다. 건우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단단히 깍지를 껴 잡았다. 심장이 손바닥으로 옮겨 간 것처럼 맞닿은 곳이 둥둥 울렸다.
분명 아까도 잡았고 어제도 잡았던 손인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야외라서 그런가.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긴장 때문에 괜히 손가락 위치, 쥐는 힘 하나하나가 다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쉼 없이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가만 내려다보던 건우가 제 엄지를 해영의 엄지 위로 올려 지그시 눌렀다.
해영이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눈을 맞춘 건우가 장난기 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또야. 해영이 눈에 힘을 주고 연결된 두 손을 노려보며 제 엄지를 그의 것 위로 올려 꾹 눌렀다.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 하고 나니 긴장은 감쪽같이 잊고 이기는 데만 몰두했다. 예상은 했지만, 힘으로는 도저히 건우를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해영은 건우의 엄지 아래 깔린 채 눈꼬리를 축 내리면서 말했다.
“져 줘….”
그 풀이 죽은 목소리를 들은 건우가 고개를 홱 반대쪽으로 돌려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그 틈을 타 엄지를 위로 올린 해영이 눈을 접어 웃었다.
“반칙이에요.”
건우가 퍽 억울한 목소리를 냈지만, 해영은 그저 신이 난 얼굴로 손을 꼭 붙잡을 뿐이었다.
한층 가벼워진 분위기로 텅 빈 공원을 가로지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날에 학교나 공부 이야기는 최대한 피하자고 마음을 먹고 나왔는데, 공통된 부분이라 그런지 얘기가 자꾸만 그쪽으로 튀었다. 대신 진지하고 울적한 이야기가 아닌, 안 교수님 머리카락이 가발이라든가, 학식 업체가 바뀌어서 맛이 더 없어졌다거나 하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더니, 계절에 맞춰 입은 얇은 긴 팔이 스르르 흘러내려 깍지 낀 손을 덮었다. 걸리적거리고 신경이 쓰였다. 소매를 접어 올리기 위해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 차에, 건우가 오히려 더 세게 잡아 왔다. 그리고는 반대쪽 손을 가져와 해영의 소매를 천천히 접어 올렸다. 건우의 단단한 손이 손목 안쪽 얇은 피부를 간질였다. 볼품없이 가는 손목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연결된 채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선배는 저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소매를 깔끔하게 접어 올린 그가 손을 거두고 물었다. 건우한테 궁금한 거, 궁금한 거.
“아. 너는 누나가 몇 명이야?”
“셋이요. 지긋지긋해요.”
“치, 친해 보이던데…. 나는 혼자라서 그런 게 부러웠거든. 막 만화에 나올 것 같은 가족 있잖아.”
“지금은 다들 컸으니까 점잖아진 거고, 어렸을 때는 엄청 맞고 자랐어요. 아마 그때 맞은 것만 아니었어도 키가 이 정도는 더 컸을걸요.”
건우는 손을 펼쳐 머리 위로 휘휘 저었다. 박성재 앞에서 다소 폭력적인 모습을 본 후라 그런지, 건우가 맞고 자랐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건우는 증명이라도 하듯 구체적인 사건들을 나열하며 말을 보탰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나. 셋째 누나가 아끼는 빨간 니트가 있었는데, 제가 그 위에 딸기잼을 흘렸어요. 둘 다 빨개서 안 들킬 줄 알고 여느 날처럼 하루 종일 신나게 약 올렸는데, 끈적거리는 걸 귀신같이 발견하더라고요. 입에 식빵 물고 맞았어요.”
그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지만, 해영은 고개를 숙이고 웃어 버렸다. 입에 식빵을 물고 있는 어린 건우의 모습을 상상해버린 게 그 이유였다. 나중에 어렸을 때 사진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해야지. 해영이 웃음 뒤로 생각했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더럽게 안 해서 첫째 누나한테 벽 짚고 엉덩이 걷어차이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셋째 누나한테 대들었다고 세 명한테 팔다리 붙들려서 맞았어요.”
건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털었다.
“우, 울기도 했어?”
“식빵 물었을 때는 좀 울었는데, 교복 입고부터는 오기로 버텼죠. 울면 더 때렸거든요.”
비록 건우가 들려준 이야기의 내용은 무시무시했지만, 우애 좋은 남매일 게 분명했다. 동생 생일 때마다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그렇고, 저번에 집 앞에서 봤던 투닥거리는 모습이라든가, 데이트에 볼 영화를 추천받아 온 것도. 모두 해영이 동경하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또 궁금한 거 있어요?”
“너무 나만 물어보는 것 같은데….”
“다 물어보세요. 저 점수 따야 돼요.”
건우가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빈틈없이 꽉 붙든 손도, 계속해서 비벼지는 팔뚝도, 잘 보이려고 애쓰는 강아지처럼 열심히 치대고 있었다. 간들간들 그와 제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그의 포근한 체향이 훅 끼쳤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고 있음에도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해영은 노는 손으로 뭉근하게 열이 오른 뺨을 매만졌다.
“어, 또 뭐가 있지….”
“설마 누나들 얘기가 끝이에요?”
“아, 아니야. 아! 학교 어떻게 오게 됐어?”
“음, 그건 나중에 말해드릴게요.”
“뭐야…. 다 물어보랬으면서.”
비죽거리는 해영을 보고 픽 웃은 건우가 재차 답했다.
“나중에 진짜 말할게요. 다른 거.”
“어, 그러면…. 좋아하는 거랑 싫어하는 거.”
“범위가 너무 넓은데.”
“그냥 생각나는 거 아무 거나….”
저번에 생일 선물 고를 때 느낀 거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음식은, 음. 딱히 가리는 거 없어요. 한식이 제일 좋고, 일식도 좋아하고. 덮밥이나 초밥 같은 거요. 아, 느끼한 거랑 단 거는 조금 힘들….”
건우가 술술 뱉던 말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해영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주워 담기엔 늦은 듯했다. 건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너, 너 내가 나눠 준 과자도 맛있게 먹고, 생일 케이크도 잘 먹었는데…. 거짓말했어?”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런 걸 거짓말할 수 있어? 싫어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다, 다 먹어 줬을 텐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너 잘 먹는다고 좋아했잖아.”
입꼬리를 축 내려트린 해영이 불만어린 투로 웅얼거렸다. 건우는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앞쪽으로 기울여 그 속상해하는 얼굴을 살폈다. 해영이 얼굴을 반대쪽으로 완전히 돌리며 시선을 피했지만, 몸까지 떨어트리진 않았다. 건우가 살살 눈치를 보며 해명했다.
“죄송해요. 선배가 준 거라 그랬어요.”
미워할 수도 없는 말에 해영이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이제 그런 거짓말 하지 마…. 싫어하는 거 억지로 먹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네, 이제 안 그럴게요.”
건우가 씩 웃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아, 엉덩이 오래 붙이고 앉아 있는 거 잘 못해요. 어떤 날은 누워서 가만히 있고 싶은데 반나절이면 좀이 쑤셔서 나가서 뛰고 와야 좀 살 것 같고. 그래서 재수할 때 뒈지…. 너무 힘들었어요. 선배는 운동 별로 안 좋아하죠?”
“응…. 안 좋아해.”
운동하면 재미가 있다거나, 시원하다거나 하는 감상을 해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도 운동회나 체육 대회, 체육 시간을 가장 싫어했다. 잘하지 못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가장 힘든 건 열심히 뛴 다음 날인데, 아침에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 근육통이 길게는 나흘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럴 거 같았어요. 말랑말랑해가지고.”
건우가 반대쪽 손을 가져와 해영의 팔뚝을 두어 번 주물렀다. 해영이 기겁을 하고 하지 말라고 몸을 빼자, 그가 실실 웃었다. 해영이 눈을 흘기며 그의 팔뚝을 살짝 꼬집으니, 별로 세게 꼬집지도 않았는데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건우는 꼬집힌 부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을 더했다.
“여행도 좋아해요. 낯선 곳에 가면 새로운 게 많아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기분이라. 누나들이랑 가는 거만 아니면 다 좋아요.”
“누나들은 왜?”
“너무 시끄러워요.”
해영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선배는 여행 좋아하세요?”
“어, 모르겠어…. 가 본 적이 없어서.”
수학여행도 온갖 핑계를 끌어모아 불참하고, 남들 방학 때 한 번씩 다 가는 배낭여행은 겁이 나서 시도도 하지 못했다. 낯선 곳, 낯선 사람은 해영에겐 두려움의 대상일 뿐, 새롭고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건우가 저렇게 상기된 얼굴로 여행을 좋아한다 이야기하니 저답지 않게 그가 겪었던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은 모험심이 속에서 퐁퐁 피어났다.
“나중에 저랑 같이 가요.”
“여, 여행을…? 너랑?”
“싫어요?”
“그건 아닌데….”
“그럼 됐지.”
친한 친구끼리 여행을 갔다 온 애들은 학교 내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누구랑 어디를 가서 사 온 초콜릿이라든가, 거기 가서 뭐를 봤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건우와 제가 친한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 친구인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같이 가면 방을 같이 써야 하나. 그럼 잠도 같이….
‘저 만지고 싶어요?’
문득, 어제 그가 했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미쳤나 봐. 제 두 뺨 가득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보나 마나 얼굴이 엉망이 됐을 게 분명했다. 가리고 싶은데. 해영은 잡고 있던 손을 풀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오피스텔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해영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서둘렀다.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얼른 헤어지는 방법뿐이었다.
“나, 나 이제 가 볼게.”
“이유 안 들어요?”
“무슨 이유…?”
“좋아하는 이유요. 집 갈 때 말해드린다고 했잖아요.”
어제부터 그렇게 바랐던 거고 지금도 여전히 알고 싶었지만, 여기서 좋아하는 이유까지 듣게 된다면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해영은 괜찮다고 손을 휘저으며 오피스텔 문 쪽으로 슬금슬금 몸을 뺐다.
“아, 안 들어도 될 것 같아…. 나 그냥 들어가고 싶-.”
명백히 피하는 모양새에 눈을 가늘게 뜨던 건우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그리고 또 도망갈세라 반대쪽 손까지 깍지를 껴 단단히 붙들었다.
“들어야죠. 도망가지 말고.”
놀람. 난감함. 혼란스러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로 뒤덮인 얼굴을 내려다보던 건우는 가장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꺼내 들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해영은 빨리 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잊고 멍한 얼굴을 했다. 단언컨대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보육원에 있을 때도 봉사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보고 으레 뭉뚱그려서 해주는 예쁘다, 귀엽다 하는 칭찬들만 기억에 있을 뿐, 콕 집어 웃는 모습을 이야기해 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잘 웃지 않는 아이, 우울해 보이는 아이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으면 들었지.
“다 예쁜데, 웃을 때가 말도 안 되게 예쁘거든요. 근데 잘 안 웃더라고요. 웃을 일이 별로 없나, 싶어서 내가 웃게 해 줘야지 생각했어요. 근데 망했지. 엄청 무서워하던데요.”
무거운 진심 끝에 장난스러운 말을 달았다. 그랬었지. 해영은 건우가 처음 이것저것 사다 주며 말을 걸어오던 때가 기억나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던 터라 부정할 수 없었다.
“근데 지, 진짜로 무서웠어….”
“지금은요?”
“이제 안 무섭지.”
그 말에 건우가 환하게 웃었다.
씻고 나온 해영은 곧장 가방을 열어 안을 뒤졌다. 노트북과 등판 사이에 잘 펼쳐 넣어 둔 영화 포스터를 꺼내 책장 맨 왼쪽에 구겨지지 않게 꽂아 놓았다. 보관할 곳을 만들어야 하나. 몇 장 더 늘어나면 앨범이라도 사서 넣어 놔야겠다고 다짐하다, 오늘 같은 날을 그만큼 더 보낼 생각을 하니 손바닥 가운데가 저릿해졌다. 해영은 휴대폰을 들어 씻는 내내 보내고 싶었던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침대 옆에 놓인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이, 이상한 거 같은데….”
이번에는 이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보았지만, 역시나 예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해영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휴대폰을 쥔 채 침대에 몸을 뉘었다. 거의 1분 간격으로 들여다보고 있는데, 읽었다는 표시도 뜨지 않았다. 조금 전에 집에 도착했다고 했으니까 씻고 있을 거야. 스탠드 조명을 끄고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그리고 또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러다 계속 답장이 없으면 밤새 못 자는 거 아닐까, 걱정이 되던 차에, 손바닥에서 진동이 여러 번 연달아 울렸다. 해영은 눈을 반짝이며 지체 없이 메시지 창을 열었다.
[저도요.]
[또 같이 놀아주세요.]
건우는 토끼 두 마리가 손을 잡고 나란히 뛰는 이모티콘까지 보냈다. 샐샐 웃으며 그러자는 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눈을 감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얼른 남은 이유도 다 듣고 싶다.
***
차건우는 경영관 건물을 등지고 서서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기분이 거지 같았다.
오전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에, 김 교수님 연구실로 들어가는 박성재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멍이 채 가시지 않아 엉망이었다. 그리고 몇 분 뒤, 건우가 먼저 와 있던 화장실에 박성재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몸이 우스울 정도로 크게 튀었다. 쯧, 건우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손을 씻고 그의 등 뒤에 있는 티슈로 손을 뻗었다. 힐끔힐끔 눈알만 굴리던 박성재는 제게로 손이 다가오자 소스라치게 놀라 듣기 싫은 비명을 질러댔다.
‘으, 으아악!’
아, 귀 아파. 건우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그를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마저 손을 뻗어 티슈를 뽑아 그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니까 꼭 제가 선배님한테 뭔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요.’
해영의 앞에서는 뭐라도 되는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협박하고 제멋대로 주무르더니, 약점 하나 잡혔다고 빌빌대는 꼴이. 건우는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기며 담배를 빨았다.
해영은 못내 걱정되는지, 박성재가 해코지를 하거나 신고 같은 걸 하면 말을 하라며, 돕겠다고 눈에 힘을 주고 거듭 당부했다. 건우는 그 새끼가 신고를 하든, 염병을 하든, 해영을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겨우 벗어난 사람을 또다시 진흙탕에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수확이라면 있었다. 저만 믿으라고, 듬직한 얼굴로 저를 걱정해 주던 해영의 표정이 떠올랐다. 귀여워. 건우의 뺨에 웃음이 번졌다.
“건우야.”
멀리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리자, 건우는 반도 넘게 남은 담배를 미련 없이 밟아 껐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저도 방금 끝났어요.”
오늘은 오후에 팀플 회의가 있어서 해영과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그의 하굣길이라도 함께하기로 했다.
“혼자 갈 수 있는데…. 나 데려다주면 너 다시 학교로 와야 하잖아.”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죠.”
“아….”
건우는 해영의 저 표정이 좋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것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짓는 표정. 시선을 옆으로 피하면서 입술을 깨무는 얼굴. 심하게 부끄러워할 때는 뺨도 분홍색으로 번지는데,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이, 이건 데이트 아니지?”
공원 산책로를 가로지르던 중, 해영이 물었다.
“네. 이건 그냥 데려다주는 거.”
“그렇구나….”
제 말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해영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응….”
건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바라는 눈치이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긍정의 답을 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해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혼자 들떴던 마음이 훅 사그라들었다.
“그래야 얼른 다 들을 수 있는데….”
그럼 그렇지.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이런 건 데이트로 못 치죠. 맛있는 것도 먹고, 얘기도 많이 하고, 시간도 같이 보내고 그래야 데이트지.”
“그럼 언제 또 데이트할 수 있는데?”
분명 아쉬운 쪽은 저일 텐데, 해영이 조르는 모양새가 된 게 퍽 기분이 좋았다. 이유야 어찌 됐건, 저와의 데이트를 바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청신호인 거니까.
건우는 부러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그러자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이러니까 자꾸 놀리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음, 해영의 반응을 살피며 좀 더 시간을 끌던 찰나,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놀리고 말 생각이었는데, 정말 데이트를 할 시간이 없었다. 건우는 조금 전과 다르게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는 알바해야 해서 안 될 것 같아요.”
“무, 무슨 알바?”
“아는 형 카페 일 도와주러 가요. 원래는 바쁠 때만 가끔 하는 건데, 이번에 새로 온 알바생이 잠수 탔다고 해서요. 진짜 하기 싫었는데.”
건우는 매우 귀찮다는 표정으로 투덜댔다. 잠결에 전화로 부탁을 받고 길게 들어 볼 것도 없이 거절했으나, 한 번만 살려 달라 애원을 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대신에 저 대신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바로 연락을 달라 했지만, 여태껏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건우는 뒷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역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거절할 걸 그랬지. 해영의 축 처진 어깨를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심심하면 놀러 오셔도 돼요.”
“정말?”
“거기 근처 대학생도 많이 오는 데라 과제 하시기에도 괜찮으실 거예요.”
심심하면 놀러 와도 된다니. 실은 제가 옆에 끼고 보고 싶은 거면서. 그가 아쉬워하는 마음을 구실삼아 제안했다. 약은 새끼.
해영은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그, 그럼 그건 데이트야?”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럼 데이트로 쳐 줄게요.”
“응, 그럴래.”
해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알바가, 그 어느 때보다 기대되었다.
***
건우가 보내 준 위치를 찾아 도착하니, 그가 카페 앞에 나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건우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저 혼자 찾아오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출근할 때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으나, 오픈 준비부터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아 거절했다.
“여기 찾기 힘들었죠. 구석에 있어서.”
“아니야, 별로 안 힘들었어.”
초행길을 혼자서 버스 타고 골목 안쪽까지 찾아오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가 알기 쉽게 설명해 준 덕에 오래 헤매진 않았다. 건우는 씩 웃고 카페 문을 열어주었다.
해영은 카운터 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남자와 눈으로 인사하고, 건우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내해 준 자리에는 예약된 자리라는 팻말이 올려져 있었다.
“과제 하러 오는 애들이 엄청 노리는 자리예요. 바로 옆에 콘센트도 있고 해서.”
그가 팻말을 거둬 가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확실히 집중이 잘 될 것 같은 자리였다. 벽에 붙어 있고, 기둥으로 살짝 가려져서 얼핏 독립된 공간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냥 아무 데나 앉아도 되는데….”
분명 탐나는 자리였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도 원하는 자리라니 망설여졌다.
“여기 말고 다 만석이에요.”
“어?”
고개를 빼고 둘러보자, 그의 말처럼 모든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어쩔 수 없네. 해영은 빠르게 단념하고 벽 쪽 소파에 앉았다.
“나 이렇게 많이 안 시켰는데….”
해영은 난감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가장 손이 안 가는 게 뭘까 고민하다, 냉장고에서 꺼내 주기만 하면 되는 사과 주스 한 병을 주문했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건우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려진 라테부터, 아이스크림과 과일로 예쁘게 장식된 팬케이크에 감자 수프까지 가져왔다.
“천천히 드세요.”
건우는 유리병에 담긴 시판 사과 주스를 마지막으로 올려놓고 떠났다.
일하는 건우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서빙이나 계산, 음료 같은 것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맡아 했고, 건우는 브런치나 파스타처럼 조리가 필요한 메뉴를 담당했다. 쉴 새 없이 프라이팬을 휘두르고, 칼질을 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는 힘줄이 솟았다. 그러다가 가끔 팬에 무서울 정도로 불이 붙었다. 보는 해영은 간이 쪼그라들 정도로 걱정이 됐지만, 건우는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저 뜨끈한 열기에 인상을 쓸 뿐이었다.
카운터에 줄이 밀려 있을 땐 커피를 연달아 내리고 있는 남자를 대신해 건우가 계산을 받기도 했는데, 그걸 보고 나서야 왜 요리만 시켰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건우는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는 내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딴에는 웃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원체 밝은 인상과 거리가 먼 터라 티도 나지 않았다.
손님들이 딱히 불편해하진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서비스직이니만큼 조금 더 밝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건우는 무표정일 때와 웃을 때의 인상이 아주 달랐다.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면 다정해 보였고, 코끝을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웃을 때는 나이에 맞게 천진한 얼굴을 했다. 그런 모습들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고 그를 좋게 봐줬으면 싶다가도, 또 저만 보고 싶은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욕심쟁이야. 해영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펼쳐 둔 노트북을 옆으로 치웠다.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팬케이크 먼저 먹을 생각이었다. 팬케이크가 올려진 커다란 접시를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포크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 후,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썰어 아이스크림과 함께 입에 넣었다. 폭신하고 시원하면서 달달한 게 너무 맛있었다.
해영은 눈을 반짝이며 발끝을 땅에 툭툭 구르고 라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유리컵 표면에 맺힌 물기에 손끝이 미끄러졌다. 잡기 위해 다급하게 손을 내밀어 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유리잔은 그대로 바닥으로 낙하했다.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이유 모를 불길함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어, 어떡해….”
해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과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의자에서 내려와 쭈그려 앉아서 유리 조각을 하나둘 줍고 있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있어요.”
건우가 마른걸레와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다가왔다. 단단히 화가 난 듯 냉담하고 경직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울컥해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해영은 사과하는 대신 치우던 것을 마저 이었다. 그리고 건우는 조금 전보다 더 낮은 어조로 일렀다.
“피 나잖아요.”
그는 가지고 온 것들을 내려놓고 해영이 쥐고 있던 조각들을 조심히 가져갔다. 그리고 곧바로 해영의 손을 살폈다. 건우의 말처럼 손가락 끝에 빨갛게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베인 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놀랐다.
“미, 미안해…. 내가 치울게.”
“제가 너무 많이 올려놨죠. 죄송해요. 노트북까지 올려놔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깨트린 건 저인데. 되레 사과를 한 건우가 해영의 팔을 잡고 일으켜 의자에 도로 앉혔다. 마음 같아선 치우는 걸 돕고 싶었지만, 아까보다 더 무서운 얼굴을 할 것 같아서 참았다. 해영은 눈꼬리를 축 내려트리고 제 무릎 위에 올려 둔 엉망이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도 채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은 다 녹은 지 오래였다. 괜히 놀러 온다고 해서.
“이것만 버리고 연고 금방 가져올게요. 따가워도 조금만 참아요.”
어느새 바닥을 모두 닦은 건우가 말했다. 안 발라도 되는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건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함께 일하던 남자가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많이 다쳤어요?”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컵….”
“괜찮아요. 정말 신경 쓰지 마세요. 저게 예쁘기만 하고 잘 깨지는 잔이거든요. 진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깨져서 계속 바꾼다 바꾼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주문하는 걸 맨날 까먹네.”
남자는 미간을 흐릿하게 찡그리며 웃었다. 그는 해영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게 이유이지 않을까, 하고 해영은 생각했다.
“건우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형이에요. 여기 사장이고. 손이 그래서 악수도 못 하고 어쩌나. 사실 아까부터 계속 인사하고 싶었는데 저 새끼가 하도 막아서요. 뭐랬더라. 낯가린다, 과제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이러면서. 난 또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줄 알았네.”
해영은 괜히 제가 다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남자는 둘 다 참 알기 쉽다고 생각하며 말을 보탰다.
“햇수로만 오 년째 알고 지내고 있는데, 쟤 이러는 거 처음 봐요.”
“어, 어떤 거요?”
“지 누나들 왔을 때도 내가 그냥 주라고 했는데 꼬박꼬박 돈 받아내던 놈이라. 아까 보니까 해영 씨한테는 카페 메뉴 다 털어 줄 기세던데요.”
“어, 죄송해요…. 이거.”
해영이 화들짝 놀라 지갑 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사장은 소리 내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돈 달라고 한 말 아니에요. 그거 건우가 다 자기 돈으로 계산한 거라 편하게 드셔도 돼요. 그냥 신기해서요. 앞으로 자주 봐요.”
“네….”
앞으로. 자주. 예전에 오피스텔 앞에서 마주친, 다음에 또 보자고 말하던 건우의 누나와 같이 어울리면 안 되냐고 조르던 규진이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발라 주면 지랄할 것 같으니까 이따 건우 오면 해 달라고 하세요.”
남자가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연고와 반창고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해영이 시선을 내리깔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맑은 종소리와 함께 건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쪽을 보자마자 도끼눈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 무서운 애 왔다. 도망가야지.”
사장은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도망가는 그를 밉지 않게 흘기며 다가온 건우가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아 연고 뚜껑을 돌리며 뾰족하게 물었다.
“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별 얘기 안 했는데….”
건우는 해영의 손을 붙잡고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반창고까지 다 붙이고서 눈을 가늘게 뜨고 해영을 쳐다보았다. 뒷말을 더 바라는 눈이었다.
“지, 진짜야…. 그냥 인사만 했어.”
“무슨 인사를 그렇게 웃으면서 사이좋게 해요?”
말하기 싫은데. 그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도로 뱉기엔 많이 쑥스러웠다. 붙잡혔던 손을 빼낸 해영이 포크로 팬케이크 옆 딸기 하나를 찍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 얼른 가서 일이나 해.”
건우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사람처럼, 딸기를 우물거리며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진짜 마감 혼자서 돼?”
“어. 한두 번도 아니고. 기다리시잖아. 얼른 가 봐.”
“고마워.”
“갑자기 부탁한 건데 도와줘서 내가 고맙지. 내일 보자.”
남자는 건우의 팔뚝을 툭툭 두드리다, 몇 걸음 앞에서 멀뚱히 보고 있던 해영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해영이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배고파요?”
“아니…. 아직 배부른데.”
건우는 그 후에도 온갖 디저트와 함께, 신메뉴라는 쉬림프 오일 파스타와 아보카도 오픈 샌드위치까지 가져다주었고, 주는 대로 받아먹고 나니 해영은 해가 진 지금까지도 배가 부른 채였다. 알바가 끝나면 무언가 먹으러 가자던 어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초조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은 건우는 다른 걸 제안을 했다.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한강이거든요. 가서 산책이나 할래요? 이따 배고파지면 간식 같은 거 사 먹고.”
“응, 좋아.”
한강 데이트라니.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 중 하나였다. 해영은 작게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분명히 ‘조금만 걸으면’ 된다고 했는데, 삼십 분을 넘게 걷고, 바람을 가르며 마포 대교까지 건너고 나서야 한강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우의 기준은 저와 다르니 앞으로는 믿지 말아야겠다고, 해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짐했다.
“운동 부족이야, 운동 부족.”
그 말에 해영이 건우를 쏘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헤실거리던 그는 한강이 잘 보이는 돌계단 사이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들고 있던 해영의 가방을 내려놓고 손짓했다. 휴식이 간절했던 해영은 노려보던 것도 금세 잊고 쪼르르 걸어가 그가 가리킨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 아파. 울상을 지으며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자, 건우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물 좀 사 올게요. 쉬고 계세요.”
“응….”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는 길이 험난하긴 했지만, 한강 변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적당히 부는 바람이나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조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버스킹 노랫소리도 모두 영화 속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해영은 휴대폰을 들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사진으로 남겼다.
“흔들렸네….”
아쉬운 결과물에, 다시 한번 앵글을 맞추고 있던 찰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모르는 남자가 어깨까지 두드리며 말을 건 탓에, 해영은 하마터면 놀라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해영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네…?”
“혹시 역까지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아, 저기 위로 올라가시면 바로 있어요. 펴, 편의점 옆에요….”
“제가 길치라 그런데, 혹시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해영은 남자를 빤히 보았다. 여의나루역 출구 표지판은 여기에서도 일어서면 보일 정도로 가까웠고, 제 말대로 올라가기만 하면 곧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쉬운 길이었다. 엄청난 길치인가 보다. 마음 같아선 얼마 안 되는 거리이니 동행을 해주고 싶었지만, 건우를 기다리는 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누구 기다리고 있어서요…. 진짜 저기로 올라가기만 하면 보이는데.”
“애인 기다려요?”
“네? 아, 아닌데….”
“아하. 애인 없어요?”
남자가 피실피실 웃으면서 물었다.
“네….”
해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없다고 놀리는 걸까. 애인도 없는 사람은 한강에 혼자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호의로 길을 가르쳐 주다가 괜히 기분만 상해 버렸다. 이 사람이 말 걸기 전까진 기분이 엄청 좋았는데. 속상했다. 그는 본인이 망친 해영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계속 싱글거리다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번호 좀 주세요.”
“왜, 왜요?”
해영은 양손을 등 뒤로 숨기며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방어적인 태도에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각진 턱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길 잃어버리면 전화해서 여쭤 보려고요. 같이 못 가 주신다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죠?”
아, 그런 이유라면.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휴대폰을 받아 들고 제 휴대폰을 반대 손에 쥐었다. 그리고 제 휴대폰 액정을 몇 번 두드리다 남자의 키패드에 받아 적으니,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번호를 못 외우셨나 봐요?”
“네? 네….”
이걸 누가 외우고 있지. 해영은 마저 받아 적고 휴대폰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남자는 액정에 찍힌 번호를 가만히 보다가 눈썹을 꿈틀하며 물었다.
“공이…. 이게 무슨 번호예요? 집 전환가?”
“여기 그, 한강 안내센터 번호예요…. 길 모르시면 거기다 전화하시면 될 거예요.”
해영은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같이 가 주지 못하는 죄책감도 덜면서 저보다 더 도움이 되는 번호를 내어 주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었다.
“…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네?”
“아니에요. 재밌게 노세요.”
남자는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괴이한 얼굴로 주절거리고 자리를 떴다. 왜 갑자기 화가 난 거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멀어지는 그 뒤통수를 멍하니 보다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못생긴 게 취향이에요?”
“아, 깜짝이야….”
여기서도 화가 난 건우가 저를 보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뛰어온 건가. 숨이 거칠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편의점 봉투를 해영의 옆자리에 툭 내려놓았다. 벌어진 봉투 안에는 물과 함께 군것질거리가 들어 있었다.
“번호 줬어요?”
“어?”
“아까 그 새끼한테 번호 줬냐고요.”
“응…. 줬는데.”
허, 건우는 기가 찬 얼굴을 하고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해영은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다. 이유는 몰라도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얘기만 하고 올게요. 말로만.”
“왜…?”
“선배 번호 줬다면서요. 나 기다리면서 다른 놈한테 번호, 씨발. 진짜 대화만 하고 온다니까요. 잠깐 놔 봐요.”
해영은 그의 말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옷자락을 더 단단히 쥐었다.
“내, 내 번호 안 줬어…. 길 잘 모른다고 해서 여기 아, 안내센터 번호 찾아 준 건데….”
분명 아까까진 자랑스러웠던 것이 그의 앞에서 변명처럼 말하려니 부끄러웠다. 건우는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더니 해영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어느새 표정도 풀려 있었다.
“잘했어요. 다음엔 누가 선배 번호 달라고 해도 주면 안 돼요.”
“안 줘…. 모르는 사람한테 번호를 왜 줘.”
마치 어린아이에게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다. 해영은 입을 비죽거렸다. 건우는 가지고 온 봉투를 뒤져 병에 든 차 음료를 꺼내 뚜껑을 열고 해영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하고 받아 든 해영이 한 모금 들이켰다.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힘들어하는 저를 위해 신경 써서 사다 준 건 고마운 일이니까.
어린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또래로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 잔디밭 위에서 잡기 놀이를 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해영이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귓바퀴에 딱딱한 것과 함께 손끝이 닿았다.
“아….”
서늘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귀를 손으로 붙들며 홱 고개를 돌렸다. 건우가 한 손에 무선 이어폰 한쪽을 들고 허리를 굽히면서 웃고 있었다.
“소, 손에다가 주면 되지…. 놀랐잖아.”
분위기 때문인지, 낯선 곳에 와 있어서인지.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다가왔다. 정전기가 훑고 지나간 것처럼 저릿한 느낌이 남아 있는 귀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비비며 반대쪽 손을 내밀자, 그는 순순히 무선 이어폰을 그 위에 올려 주었다. 만져지고 비벼져 붉게 물든 귀로 이어폰을 가져갔다. 건우가 휴대폰을 두드리자 곧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무슨 노래였더라. 고민하고 있을 때, 건우가 입을 열었다.
“이 영화에서 남자가 직장에서 잘려서 우울해하는데, 여자가 그 얘기 듣고 바로 바다에 데려가요. 그리고 나란히 앉아 바다를 보면서 남자한테 농담 같은 시시한 이야기를 엄청 해 줘요. 위로라든가, 격려라든가, 해결책이라든가. 그런 것 하나 없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만요. 남자는 현실적으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힘들 때 언제든 같이 떠나 줄 사람이 있고, 옆을 지켜 주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웃게 하기 위해 노력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아요.”
가사가 없는 노래라 바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의 부연 설명을 듣고 나니 생각났다. 해영도 본 기억이 있는,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의 수록곡이었다.
“그거 보면서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해영은 줄곧 앞을 향해 있던 고개를 건우에게 돌렸다. 그는 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뺨을 매만졌다.
“거기는 바다고 여기는 한강이지만, 선배랑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생각나서요. 재수할 때라 엄청 힘들었는데 그거 보고 다시 힘냈거든요. 좋아하는 영화예요.”
해영이 다시 잔잔하게 출렁이는 한강 위로 시선을 던졌다. 물에 비친 다리 위 조명이 흔들렸다. 속에 작은 화산이라도 품은 것처럼, 그 흔들리는 상에 맞춰 울컥울컥하고 뜨끈한 것이 흘러넘쳤다. 해영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 속 두 사람에 저와 건우를 대입하여 상상했다. 로맨스 영화 속에 말이다.
근사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상상하고 싶을 만큼, 이상적이고 근사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해영이 줄곧 바라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 다음에 같이 보자….”
모아 쥔 주먹이 잘게 떨렸다. 멋대로 끼워 넣어 상상한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하는 말에, 아직 저조차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감정이 묻어날까 두려웠다.
“네. 꼭 같이 봐요.”
건우가 씨익 웃으며 답하고, 손을 뻗어 해영의 주먹 위로 덮었다. 그리고 옆으로 돌리더니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단단히 옭아맸다.
해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건우는 제 쪽을 봐달라는 듯 맞잡은 손을 잘잘 흔들어 댔지만, 해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건우가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눈을 맞췄을 땐, 해영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 잠깐 화장실 좀….”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엉망일 게 분명한 두 뺨을 양손으로 문지르면서.
분위기 때문이다. 처음 와 본 곳이고, 또 주변에 커플들도 많고, 날씨도 좋아서 그런 거다. 들떠서, 들떠서 그런 거야.
아, 빼지도 않고 왔네. 해영은 귀를 간질이는 이어폰을 뽑아 바지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화장실로 들어가 괜히 멀쩡한 손을 물에 적셨다. 찬 기운이 닿으면 진정이 될까 싶어 온 건데, 별 효과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예상대로 얼굴이 울긋불긋 엉망이었다. 건우와 같이 있으면 너무 자주 이랬다. 몸이 안 좋아진 건 아니겠지. 해영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발간 뺨에 차가워진 손등을 갖다 대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화장실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적당히 열만 식히고 밖으로 나왔다. 제 고집으로 알바 끝나고 피곤한 몸으로 어울려 주고 있는 걸 텐데, 혼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인파를 헤치고 나온 순간이었다.
“어….”
눈앞에 보이는 인물에 해영은 그 자리 그대로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했다. 눈이 크게 뜨이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두려움이 온몸을 빠르게 휘감았다.
어머니.
이곳에 왜. 갑자기. 십 년이 더 된 기억이고,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짧은 기간이다. 어머니인지,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똑 닮은 옆모습은 그 지옥 같은 기억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무게감을 잃은 몸뚱이가 휘청인다.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사람에게 그대로 몸을 부딪쳤다.
“아! 조심 좀 해요!”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빠진 숨을 목구멍 안으로 정신없이 밀어 넣었다. 바들거리는 몸으로 겨우 고개를 숙이는데, 날카로운 소란에 여자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가야 한다.
같은 서울 바닥 안에 살면서 그녀와의 재회를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숨 좀 쉬려고 하는데. 제 처지를 잊지 말라는 것처럼 보란 듯이 현실을 부수고 만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어떤 게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이미 자각한 뒤였다. 전과 같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배는 더 숨이 막히고, 곱절은 더 화가 났다.
해영은 뒤돌아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건우를 보자마자, 안도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선배. 너무 안 와서-.”
그대로 무너지듯 그의 품 안으로 몸을 던져 손에 잡히는 것을 구겨 쥐었다. 손끝이 형편없이 떨렸다.
“지, 집에 가자…. 집에 갈래, 건우야.”
빨리 가자, 집에 가고 싶어. 흐느끼는 목소리 사이로 같은 말을 쉴 새 없이 뱉어냈다. 건우는 덜덜 떨리는 해영의 양어깨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오한이라도 든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떨고 있었다. 건우가 손에 힘을 주어 조금 떨어트리니,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보였다. 하얗게 질려 초점이 반쯤 나간 눈동자.
아, 또 이 얼굴.
“집에…. 집에 가고 싶어….”
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맺혀 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건우는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받치고, 파들대는 어깨를 한쪽 팔로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팔뚝을 달래듯 살살 문지르며 토닥이자, 해영도 진정하려는 듯 품 안에서 훅훅 숨을 몰아쉰다.
“네, 가요.”
건우는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해영은 건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해영의 트라우마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듯했다. 다 됐겠지, 하면 또 시작되고, 끝났겠지, 하니 다시 도졌다. 저에게 화를 내거나 피하지 않고 달려와 도움을 요청한 게 큰 변화라면 변화였다. 화장실에서 무얼 본 걸까. 대체 뭘 봤기에 그런 얼굴을 하고서.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이 탄 택시는 보통의 서울 택시처럼 뻥 뚫린 도로를 마주하자마자 속도를 높였다. 방지턱을 넘은 차체가 크게 덜컹거렸다. 해영이 얕게 신음했다.
“기사님, 조금만 천천히 가 주세요.”
이십 분 정도 달리니 해영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터기를 끄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깰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 기사가 담배를 핑계로 자리를 피한 지 십 분이 넘었지만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다 왔어요, 선배.”
오는 내내 미동도 없기에 깨우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해영은 낮은 부름 한 마디에 바로 눈을 떴다.
“응…. 아, 미, 미안해…. 불편했겠다.”
해영은 고개를 다급히 바로 하고, 제가 기대고 있던 건우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살살 둥글렸다. 괜찮아요. 건우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택시를 돌려보내고 현관문 앞까지 도착했지만, 해영은 들어가길 망설였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혼자 있으면 또 그 악몽을 꿀 것 같아 두려웠다. 열이 펄펄 끓던 저를 간호해 주던 커다란 손을 떠올렸다. 그러나 금세 고개를 가로저으며 털어냈다. 데이트도 저 때문에 망쳤고, 안 좋은 모습도 보였다. 여기서 더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건우가 없을 땐 혼자 버티는 게 당연했는데. 고작 그 한 번에 약해지고 만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건우야. 조심해서 가….”
해영은 누가 봐도 들어가기 싫은 사람처럼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그 자리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가지 말까요?”
해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속마음이 보이기라도 한 걸까. 분명 오늘 알바도 하고 저 때문에 데이트도 망쳤으니 피곤할 것이다. 그를 위하려면 아니라고, 괜찮다고 돌려보내야 하는데. 그게 맞는 건데.
같이 있고 싶어. 혼자 있기 싫어. 해영이 입술 안쪽을 꾹 물며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여분 이불을 꺼내 침대 옆에 가지런히 펼쳤다. 반쯤 열린 침실 문 사이로 거실을 서성이며 통화하고 있는 건우가 보였다. 메시지 몇 통으로 해결될 것처럼 말하던 외박 허락은 예상보다 까다로웠다. 거실 테이블 위에 해영의 노트북과 온갖 전공 책에 프린트물을 올려놓고 찍어 보낸 것도 모자라, 해영과 건우가 함께 나온 사진까지 보내야 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외박 같은 것도 자주 하지 않을까, 하고 멋대로 생각했는데. 답답한지 뒷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허락을 구하는 모습에서 제법 막내 티가 났다.
“어, 늦게도 못 들어가. 친구네서 과제 한다니까. 무슨 술이야. 안 마셔. 어.”
한참을 통화하고 나서야 긍정의 답을 받아낸 건우는 전화를 끊고 해영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다 멋쩍은 듯 목덜미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누나들이 좀 유난이에요. 사진은 바로 지우라고 했어요. 걱정 마세요.”
“네 폰에 있는 것도….”
찍을 준비가 된 상태에서 찍혀도 지우라고 할까 말까인데, 퉁퉁 부은 얼굴 같은 건 절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 이건 안 지울 건데.”
“왜? 이상하게 나왔잖아. 지워 줘….”
“선배랑 처음 같이 찍은 거잖아요. 그런 눈으로 보셔도 절대 못 지워요.”
건우는 눈에 힘을 주고 제 휴대폰을 머리 위로 높게 올렸다. 발꿈치를 들고 팔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해영은 몇 번 휘적대다가 포기했다. 언젠간 꼭 지우고 말 거라고 다짐했다.
새 칫솔과 함께 제가 가진 가장 넉넉한 티와 바지, 그리고 뜯지 않은 속옷을 그에게 쥐여 주었다. 속옷을 내밀 때는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건우가 그걸 굳이 뜯어서 제 고간에 대고 확인시켜 주지만 않았다면 조금만 부끄럽고 말았을 것이다.
“너무 작은데.”
그 말에 해영의 얼굴이 화르르 타들어 갔다. 얼른 씻기나 하라며 욕실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건우는 실실 웃으면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물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침실로 돌아와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불을 꼼꼼히 덮고 가슴 위로 양손을 얹었다. 시끄럽게 펌프질을 하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했다. 혼자였다면 이렇게 금방 괜찮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저를 데리고 택시에 올라탄 순간부터, 아니. 그를 제 손으로 붙잡았을 때부터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고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아까 있었던 일들이 낮잠을 자다 꾸게 된 잠깐의 악몽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달칵. 목에 수건을 두른 건우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와 반쯤 열려 있던 침실 문을 활짝 젖혔다. 저에겐 우스울 정도로 커다란 옷이 건우에겐 빠듯하게 보였다. 그래도 불편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는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 목까지 이불을 덮고 있는 해영을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쭈그려 앉아 엉덩이를 뗀 채로 양 무릎 위에 팔을 올려놓고 빤히 눈을 맞췄다. 왜 그러지. 건우가 침대를 향해 턱짓했다.
“올라가서 주무세요.”
“아니야. 네가 침대에서 자.”
“저 바닥 체질이에요.”
“그, 그런 체질도 있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렸을 때 침대에서 자주 떨어져서 바닥이 더 편해요. 얼른.”
“아, 알았어.”
해영은 마지못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건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영이 누워 있던 자리 그대로 드러눕고, 이불을 얼굴로 가져가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선배 옷 입고 여기 누우니까 선배 냄새 엄청 나요.”
“미안…. 탈취제라도 뿌려 줄까?”
“좋다는 건데.”
같이 누워 있는 것 같아서. 그는 다리와 몸통을 훤히 내놓은 채로 하관에만 이불을 얹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저러다 감기 들려고. 해영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이불은 그의 키보다 한참 작았다. 얼굴에서 이불을 놓지 않는 바람에 발목이 훤히 드러났지만 아까보다는 포근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해영은 도로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제 고집으로 무리하게 외박까지 하고,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작은 이불을 겨우겨우 덮고 있는 건우를 보니 미안한 감정이 퐁퐁 솟았다. 해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베개에 옆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미안해….”
“뭐가요.”
“그냥. 나 때문에 데이트도 엉망 됐잖아…. 오, 오늘은 이유 들을 자격 없어, 나.”
건우는 돌연 침대 쪽으로 몸을 반 바퀴 돌렸다. 팔꿈치를 세워 얼굴을 받쳐 들고서 해영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되게 좋았는데.”
“어?”
“솔직히 즐거웠던 날이라고는 못해요. 생각했던 거랑 달랐던 것도 맞고. 그래도 선배가 저한테 와 줬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건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달려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정을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혼자 끙끙댄 것도 아니고, 도망친 것도 아니고, 제가 뭔가를 할 수 있게 해 주셨잖아요.”
뭐 때문인지 이유도 모르면서.
“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오세요. 그럼 다 괜찮아질 거예요.”
건우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해영은 이불 속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죄책감에 숨이 막힌다.
“나, 나는….”
십 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건우가 저를 억지로 끌어내기 전까지 그런 생활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피가 말랐다. 오늘도 그랬다. 건우 없이 저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나는 내가 싫어.”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 앞에서 말했다. 어디 싫은 것뿐인가. 한심하고, 못나고, 멍청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괜찮아진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전처럼 무언가를 비정상적으로 갈구하지도 않고, 제게 호의를 갖는 사람이 있고, 진심을 다해 걱정해 주고 웃어 주는 사람이 있다. 박성재와의 일도 해결이 됐으니, 이 정도면 괜찮아졌다고 마음대로 단정 지었다.
주제도 모르고 들떠 있었다. 얼굴 한번 봤다고 엉망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여자 앞에서 저는 여전히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해요.”
어느새 몸을 일으켜 바로 앉은 건우가 똑바로 눈을 맞췄다. 화난 얼굴. 이런 이야기를 그가 듣기 힘들어 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했을까. 알아 달라고? 아니면 이런 사람인데도 좋아해 줄 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고?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건우가 짧게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해영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겨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나른해질 법도 한데, 어째 만져지면 만져질수록 정신이 또렷해졌다. 건우는 해영의 밝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하고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안 건데, 선배는 머리카락이 엄청 부드러워요.”
해영은 제 머리카락을 싫어했다. 포슬포슬 힘도 없고 색도 옅어 흐릿한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피부도 하예서 옷 아무거나 입어도 다 예쁘고.”
아픈 사람처럼 보이는 흰 피부를, 해영은 싫어했다.
“손 크기도 귀여워서 잡고 있기 딱 좋아요.”
건우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 위에 올려놓았던 해영의 손을 끌어다 잡으며 말했다. 손이 작은 건 어렸을 때부터 콤플렉스였다.
“미친, 손톱도 귀엽냐….”
해영의 손을 조물딱거리며 앞뒤로 살피던 건우가 손톱을 매만지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하는 것도 멋있어요. 예전에 공부가 왜 좋냐고 물었을 때 노력한 만큼 돌려줘서 좋다고 했잖아요. 그 말도 너무 멋있었고.”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리고 너무 착해요. 제가 조금만 징징거려도 다 들어주잖아요.”
“마음이 불편하니까….”
건우가 거 보라며 웃었다. 제 성격이 착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바보 같아서 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칭찬도 잘 해줘요. 별것도 아닌 거에 맨날 대단하다, 잘했다 해주고.”
정말 대단해 보여서 대단하다고 한 것뿐이다.
“고맙다, 미안하다. 솔직하게 표현해 주는 것도 좋아해요.”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모두 그를 보고 배운 것들이다.
“목소리도 귀엽고, 말 예쁘게 하는 것도 좋고, 코끝도 동그래서 예쁘고.”
그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해영은 열 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불을 코까지 끌어다 덮었다. 유일하게 밖으로 내놓은 눈이 느리게 끔벅였다.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부터 궁금한 것들이긴 했지만 막상 듣고 있으려니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기하다는 감상이 함께 들었다. 죄다 제가 싫어하는 저의 단점들인데 건우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부분들이 정말 어여쁘고 멋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될 것만 같았다.
건우와 있으면 제가 꼭 귀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말뿐이었다면 이렇게 물 흐르듯 받아들여지지도, 고맙게 느껴지지도 않았겠지.
“저, 정말 내가 그렇게 보여?”
“저는 살면서 선배만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해영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계속 듣고 있다간 세뇌되어 나르시시즘에 빠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건우는 해영의 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씩 웃으며 장난기를 담아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고마워….”
그 말에 건우가 해영의 손등을 엄지로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고맙다는 말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지.
“많이 피곤하실 텐데 얼른 주무세요.”
잡고 있던 해영의 손을 다시 이불 안으로 넣어주고 구겨진 부분이 없도록 이불을 만져 주었다. 건우는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몸을 뉘었다.
해영은 기껏 정돈해 준 이불이 들썩일 정도로 속에서 손을 소리 나지 않게 꼼질거렸다.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건우가 말해 준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처음으로 나타난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제가 싫어지는 일이 없도록, 그가 말한 것처럼 멋있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과거에 무슨 사연이 있어 보일지언정, 세세한 것까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건우에게만큼은 불쌍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
“선배.”
해영은 귓바퀴를 간질이는 낮은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제 앞에 쭈그리고 앉은 건우를 빤히 보았다. 그는 어제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집에, 갔다 왔어…?”
“네. 저 이제 알바 가야 해요.”
“으응….”
해영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음식 냄새가 섞여 있었다.
“먹을 거 조금 해놨는데 피곤하시면 좀 더 주무시고 이따가 드세요. 냉장고도 채워 놨어요.”
“어, 언제…?”
그가 집에 다녀오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동안 계속 잤다는 건가. 조금 부끄러웠다. 어제 그렇게 징징대 놓고 세상모르고 자다니. 건우가 웃으며 몸을 세웠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별거 못 했어요.”
건우는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정말 가 봐야겠다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영도 잠이 덜 깬 몸을 겨우 일으켜 그를 따랐다. 건우는 그냥 누워 있으라 했지만 무시했다.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배웅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비몽사몽인 얼굴로 비틀대며 걷는 해영을 건우도 더 말리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현관을 나서기 직전, 건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해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리다 작게 숨을 뱉고 고개를 떨궜다. 해영은 일부러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로 재차 답했다.
“이제 진짜 괜찮아. 고마워, 건우야.”
“힘들면 꼭 전화해요. 아무 때나 상관없으니까.”
“응, 알겠어.”
건우는 그제야 마지못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고서도 해영을 혼자 두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안쪽을 힐긋거리다 겨우 걸음을 뗐다. 해영은 천천히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손을 흔들었다.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혼자 남은 해영이 닫힌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은 깬 지 오래였다.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영은 주방으로 향했다. 건우가 해 두고 간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인덕션 위 냄비 안에는 배추 된장국이, 그 옆의 움푹한 팬 안에는 바짝 졸인 제육볶음이 들어 있었다. 별거 안 해놨다더니. 식탁 위에는 잘 씻은 상추와 깻잎도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몸을 돌려 냉장고를 열었다. 해영이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썰어 놓은 사과와 마카롱 박스도 새로 채워져 있었다.
사과 위에는 ‘꼭 밥 먹고 먹기’. 마카롱 박스 위에는 ‘꼭 밥 먹고 사과 먹고 먹기’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입꼬리가 씰룩였다.
해영은 아직 식지 않은 국을 국그릇에 덜어 담고, 제육볶음과 밥을 퍼서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식당 해도 되겠다….”
배추 된장국과 제육볶음을 함께 먹으니 시골 백반집에 와 있는 것처럼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해영은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건우는 요리를 정말 잘했다. 해영은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마치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위에는 제 칫솔과 함께, 어제 건우에게 건넸던 새 칫솔이 사이좋게 꽂혀 있었다. 해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제 인생에 이 정도로 스며들고 관여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매일 습관처럼 확인하던 침실의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마주했다. 어리숙한 시선이 머리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온다. 건우가 해주었던 말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살폈다.
웃는 게 예쁘고, 머리카락이 부드럽고, 피부가 하얗고, 코끝이 동그랗고, 손과 손톱이 귀엽고.
일부러 어제 건우의 얼굴을 같이 떠올리려 애썼다. 보잘것없는 저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처럼 봐주던 그 눈을. 해영은 손을 올려 제 뺨을 살살 매만졌다. 전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못나 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 예쁘다거나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거울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부끄럽고. 해영은 마지막으로 입꼬리를 쭉 올렸다 내리며 몸을 돌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혹시, 그 여자한테 연락이 왔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아주머니가 뜬금없이 전화했던 날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알려 주지 않은 것들, 알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들. 그땐 이유가 있겠지 하고 캐묻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없는 지금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집에 얹혀살면서 제 의사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는데.
해영은 주소록을 열어 번호 하나를 찾아 눌렀다. 연결음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아, 아저씨, 저 해영이에요….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
“건우야. 우유 좀 꺼내 주라.”
“어, 여기.”
분명 건네주었음에도 손에서 무게감이 사라지지 않자, 건우가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아.”
“뭔데, 이거. 버터를 왜 줘.”
“미안. 여기.”
건우는 들고 있던 버터를 도로 넣어 놓고, 흰 우유갑을 꺼내 내밀었다. 기용현은 넋이 나간 얼굴을 한 건우를 빤히 바라보며 우유갑을 받아 들었다. 생전 실수 같은 거 안 하던 놈이 정신을 빼놓고 온 사람처럼 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영업 중인지라, 당장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실수를 하지 않게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든가.”
“아니야. 정신 차릴게.”
해영의 앞에서 그렇게 여유 있는 척 굴더니. 건우는 제 꼴이 우스워 픽 바람 빠지듯 웃었다. 무의미한 걱정과 고민으로 잠을 설쳤다. 힘들어하는 이유를 모르니 방향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닥에서 자는 바람에 등도 배겼다. 건우는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새우를 하나하나 뒤집었다.
아직 말을 안 해 준다는 건 그만큼 신뢰가 부족하다는 건가. 묻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의 일들로 미루어 봤을 때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사람을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로 후벼파고 싶지 않았다. 여태 계속 잘 참아 온 이유도 그거였고. 그렇지만 그가 저를 그 정도로 믿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조마조마했다.
어려워.
건우는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쉬고, 샐러드가 올려진 빵 조각 위에 새우를 가지런히 얹었다. 위에 소스를 얇게 뿌리고 가장자리를 닦아 낸 후, 용현이 있는 쪽으로 밀어 두었다.
박성재보다 더한 놈이면?
네모난 플레이트 위에 야채를 세팅한 뒤 드레싱을 골고루 뿌렸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잠시간 기다린 뒤 미리 재워 놓은 채끝살을 꺼내 올렸다. 눈물범벅으로 저에게 뛰어오던 얼굴이 떠올랐다.
다 죽이고 싶다, 진짜.
이를 갈며 적당히 익은 채끝살 옆에 버터를 놓았다. 겉이 바싹하게 익은 고기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사선으로 썰었다. 칼을 눕혀 아래쪽에 밀어 넣고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플레이트 위로 옮겼다. 미리 만들어 놓은 매쉬드 포테이토를 한 스쿱 떠서 옆에 곁들인 뒤, 그대로 용현에게 밀어 놓았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씩씩대면서도 기계처럼 일하더니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의자에 널브러진 건우를 보며 용현이 대뜸 물었다.
“저번에 말했던 좋아한다던 사람, 해영 씨 맞지? 그 사람 일이야?”
건우는 고개만 겨우 들어 그를 흘겨보았다. 오래 알고 지낸 형이니, 제가 유별나게 구는 것에서 금방 눈치를 챌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 보이시던데.”
“어. 엄청. 내 거야.”
“쌍방?”
건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네 거야.”
노려보거나 성질을 부릴 거라는 용현의 예상과 달리, 건우는 아까보다 더 힘없이 축 늘어진 채로 투덜댔다.
“힘든 일이 있는데 말을 안 해 줘. 내가 별로 의지가 안 되나.”
입 밖으로 뱉고 나니 더 착잡해졌다.
“말하기 무서운 거 아냐? 겁도 많은 것 같던데.”
“아니야. 은근 강단 있어.”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앉은 건우가 흥분한 어조로 말을 더했다.
“저번에 수업 끝나는 거 기다리다가 우연히 PT 하는 거 봤는데 안 떨고 잘하더라. 공부도 엄청 잘해. 장학금도 맨날 받나 봐. 교수들도 좋아하고. 아마 취업도 잘할 거야. 중간고사 때 시험공부 같이 했는데, 나 집중 흐트러질 때마다 잡아 줬어. 선배 아니었으면 내 성적 개판 났을걸. 평소에는 되게 쭈글하고 귀여운데,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거 할 땐 눈이 막 이렇게 빛나.”
건우가 양손을 제 눈 옆에 대고 눈을 반짝이듯 접었다 폈다 반복하며 말했다.
“너 엄청 좋아하는구나.”
“…어.”
건우는 의자 등받이 뒤로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았다.
“그래서 무서워. 또 엇갈릴까 봐.”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저번처럼 힘들어하고 혼자 앓을까 봐. 그렇게 지쳐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버릴까 봐.
“연애도 타이밍이더라.”
용현이 막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우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건 뭐 내 이야기라 그냥 듣고 넘겨.”
건우가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입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야기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나 작년에 만났던 사람 있잖아, 동갑. 그 사람이 그때 하는 일도 잘 안 풀리고, 가족이랑 문제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어했는데 내가 별로 도움이 못 됐어.”
거기까지 말한 용현은 본인이 한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피했던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뭣도 없는 사회 초년생이니까 들어도 뭘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거든. 그렇게 미적대다가 결국 헤어졌지. 얼마 전, 아니다. 벌써 몇 달 됐구나. 올해 초에 안부 인사 겸 연락이 왔었는데, 그 일들만 아니었어도 나랑 계속 만났을 거 같다더라. 이제 와서 뭘 하자는 건 아니었고. 나나 걔나 지금 만나는 사람 있으니까.”
용현은 턱을 아래로 당겨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뭘 잘못해서 헤어지자고 한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대.”
공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진 그 작은 웃음소리 안에, 약간의 미련과 허탈함이 묻어났다.
“당시에는 현실이 힘드니까 연애가 우선순위에서 밀린 거고,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지만 뭐. 이미 늦었지.”
용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바에 기대 있던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건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치 너는 어쩔 거냐고 묻는 것처럼.
타이밍. 참 사람 허무하게 만드는 개 같은 단어다. 타이밍이 안 맞으면? 제가 얌전히 기다리고 혼자 고민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리고 저보다 더 도움 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 나타나 선배가 저보다 그 사람한테 기대고 싶어지면 그렇게 끝이라는 것 아닌가.
상상도 하기 싫은 전개지만, 얼마 전 한강에서 이상한 놈에게 번호를 따일 뻔했던 걸 떠올려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역시 다들 눈이 삔 게 아닌 이상 제 눈에만 예쁘게 보일 리 없지.
겁이 많은 건 나였네.
***
찾았다. 해영은 책장 사이를 헤맨 끝에 찾던 책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해영은 발꿈치를 들고 맨 위 칸에 꽂혀 있는 책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제야 등 뒤에서 걸리적거리던 느낌의 정체를 알아챘다. 해영은 책도 꺼내지 못한 채 다시 발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일렀다.
“옷 좀 놔 줘….”
건우는 시선을 피했다.
“방해 안 하기로 약속했잖아.”
도서관까지 기어이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허락해 주었다. 건우랑 같이 있으면 계속 놀고 싶어져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혼자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가 말했던 것처럼 멋있는 사람으로 남으려면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런 제 속도 모르고 울상까지 지으며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하는 통에 마음이 약해지고 만 것이다. 크게 도움도 받은 후라 거절하기가 더 어려웠다. 건우는 제가 가는 길을 졸졸 따라다녔다. 거기까지는 늘 있는 일이라 괜찮은데, 방금처럼 옷이나 어딘가를 자꾸 붙잡고 있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죄송해요.”
건우가 옷자락을 놓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영은 그 눈빛에 또 흔들리기 전에, 다시 몸을 돌려 빠르게 책을 뽑고 자리로 돌아왔다.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따라온 건우는 반대편 자리가 아닌, 제 옆에 붙어 앉았다.
또 이렇게 앉네.
건우는 아까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이 방향으로 앉아 해영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마주 보고 앉았을 텐데, 비좁은 해영의 옆자리에 꾸역꾸역 자리를 잡은 것이다. 푹신한 데 앉고 싶은 건가 싶어 제가 바깥쪽에 앉겠다고, 나가게 비켜 달라 말했더니 무시했다. 결국 그가 물을 가지러 다녀온 사이에 얼른 반대편 의자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물을 떠서 돌아온 건우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시무룩하게 혼자 소파에 앉았다. 2인용 자리라 바깥쪽 의자는 한 개뿐이어서 다행이었다.
아까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도서관에서도 반복되는 걸 보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건우는 읽을 책도 없으면서 한 자리 크게 차지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얕게 신음하며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또 두통이 왔나 보네. 종일 머리가 아프다고 힘들어하기에 두통약을 사서 쥐여 줬는데, 들지 않은 모양이다.
해영은 보던 책을 덮고 건우의 귀에 속삭였다.
“잠깐 나가자.”
건우는 몰래 해영의 등 뒤로 잡고 있던 옷자락을 툭 놓았다. 해영은 그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와 라운지 소파에 함께 앉았다.
“건우야. 무슨 일 있어?”
해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알바 하는 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크게 실수라도 했나.
건우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답했다.
“아무 일 없어요.”
“아, 아닌 거 같은데….”
해영은 그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바닥이 위로 보이게 펼쳐 하나하나 접으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너 아침에 버스도 이상한 거 타서 빙빙 돌아서 왔잖아. 양말도 짝짝이로 신고 오고, 엘리베이터 층수도 안 누르고 있고. 아까 멈춰 있던 거 문 열렸는데 안에 너 있어서 얼마나 노, 놀란 줄 알아?”
“…….”
“엉뚱한 강의실 가서 나 어디 갔냐고 선배들한테 무서운 얼굴로 물어보고, 밥 먹을 때도 이상하게 앉고, 내가 따로 앉으니까 혼자 장식 풀 같은 거 먹고 있고. 너 계산할 때 내가 물어봤는데 그, 그거 먹는 거 아니래…”
해영이 마지막 손가락까지 접힌 주먹을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건우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
건우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말하기 싫은 건가. 해영은 손을 거두고 궁금했던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 옷은 또 왜 그렇게 계속 잡는 거야?”
“그냥 잡고 있고 싶어요. 선배랑 계속 붙어 있고 싶다고요.”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 죽겠는데. 건우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침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도, 어제 용현과 나누었던 대화가 계속 떠오른 게 그 이유였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불안 앞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해영은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는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황당하긴 했지만 붙어 있고 싶어 그랬다는 말이 싫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선배니까 들뜨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차분하게 일러둬야 했다.
“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야. 참을 줄도 알아야지. 여기는 학교니까 남들이 볼 수도 있잖아.”
“상관없는데.”
입을 삐죽거리며 불퉁하게 뱉는 말에 해영이 눈에 힘을 주었다. 건우가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등 잡는 것도 안 돼요?”
“뒤에서 보면 다 보이잖아.”
“어깨는요? 이건 티 안 나요. 남들도 다 해요.”
“너 무거워서 어깨가 아파….”
그 말에 건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축 가라앉았다. 해영은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아래로 건우의 다리가 초조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
집으로 돌아온 해영은 저녁을 먹고 씻은 뒤 책상 앞에 앉았다. 전공 책 하나를 펼쳐 필기한 부분을 훑었다. 놀랍게도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영은 뺨을 톡톡 두드리며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펜 끝으로 읽는 부분을 죽죽 그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강의 내용이 아닌, 집에 데려다주고 헤어질 때 건우의 얼굴이었다. 그는 종일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을 하더니, 헤어지는 발걸음마저 쉽게 떼지 못했다.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해영은 펜을 던지듯 놓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집 앞에서 헤어진 지 딱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원래도 저음이긴 했지만, 친구들에게 툴툴댈 때라든가 누나랑 통화할 때처럼 무심하게 낮은 소리가 아니었다.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어, 얼핏 들었을 때 울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물기에 절은 목소리였다. 훌쩍이거나 떨지 않는 걸 보면 울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무, 무슨 일이야?”
묻던 중에 휴대폰 너머로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해영의 창문에서도 같은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지금 우리 집 앞이야?”
건우는 한참을 망설이다, 네, 하고 답했다.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거기서 기, 기다려!”
전화를 끊은 해영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뒤 문을 여는 동작이 급했다. 평소처럼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린 지 고작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몇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왜, 왜 이렇게 안 와….”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캐묻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안 좋은 상태가 지속되니 걱정과 궁금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바닥에 발을 동동 굴렀다. 겨우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반도 열리기 전에 몸을 욱여넣고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1층 공동 현관문이 열리고,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건우는 학교에 같이 가는 날마다 저를 기다리던, 회색 벽돌의 골목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건우야.”
제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건우의 앞까지 가는 걸음에 걱정되는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속도가 붙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예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미간이 팰 정도로 인상을 쓰고, 새카만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눈가가 짓무른 것처럼 붉었다. 트레이닝 재킷을 코 아래까지 끌어 올리고 있어 하관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축 내려간 입꼬리가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무,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어디 아파?”
해영이 발꿈치를 들고 손을 그의 이마에 올렸다. 열은 없는데.
“바쁘신데 찾아와서 죄송해요. 그냥-.”
건우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기도 하고, 당장 급하게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깜빡 잠든 사이에 해영이 저를 또다시 피하는 꿈을 꾸었다고,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건우는 아까부터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해영이 그 아래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애썼다. 건우는 그 보잘것없는 몸짓 하나에 자기혐오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이런 얼굴로 맞아 줄 걸 알고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 나와 걱정해 줄 걸 알고서 전화를 한 거다. 그가 제게 의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친구랑 싸웠어? 집에 무슨 일 생겼어? 어제 알바에서 무슨 시, 실수라도 한 거야? 그래서 그 형한테 혼났어?”
건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건우야…. 왜 그래. 나 너무 걱정돼.”
해영이 건우의 팔 위에 손을 얹어 살살 흔들며 물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은, 그래. 예전에 그를 무서운 사람으로 오해하고 피했을 때, 버리지 말라고 매달리던 얼굴과 흡사했다. 건우야, 건우야. 두어 번 더 부른 후에야 그가 눈을 맞춰 주었다.
“저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 돼요?”
건우는 울상인 눈으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해 주고 싶다 생각했지만, 해영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응…?”
“아직 그런 건 안 돼요?”
이번에는 해영이 시선을 피했다. 저보다 큰 사람을 안아 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옆에서 보면 분명 우스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고민은 짧았다. 처음 안는 것도 아니니까.
해영이 양팔을 뻗고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두 팔이 그의 어깨를 지나 목을 빠듯하게 끌어안았다. 건우는 본인이 요구한 주제에 정말 들어줄 줄은 몰랐는지, 잠시 굳어 있다가 곧 어깨를 구부려 키를 맞추며 해영의 허리에 단단히 팔을 감았다. 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갈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해영의 몸이 움찔 튀었다. 건우는 그 작은 몸과 어떻게든 더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빈틈없이 붙어 있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쇄골에 얼굴을 비비며 허리를 당겨 안았다.
해영이 목을 안고 있던 손을 조금 더 뻗어 뒤통수를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는 툭 불거진 날개뼈 부근을 천천히 토닥였다.
“괜찮을 거야.”
건우는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이 엉망이었다. 해영은 쭈그려 앉아 급하게 나가느라 뒤집어지고 비뚤어진 신발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아무리 반듯하게 정돈해도 여전히 마음이 어지러웠다. 머릿속을 메우는 건 불안하게 흔들리는 건우의 표정뿐이었다. 해영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나가기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옆으로 치워 두고 노트북을 펼쳤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창에 커서를 올렸다. 뭐라고 검색해야 하지.
‘불안’ 두 글자를 치자 ‘불안 장애’, ‘불안 장애 치료’ 같은 것들이 자동 완성에 떴다. 단어가 조금 강하긴 했지만 이게 가장 위에 떠 있으니 눌러 보았다. 온갖 광고 사이트를 지나 블로그 글 상단에 떠 있는 게시글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불안 장애 자가 진단법. 그래, 맞는지 확인을 하는 게 먼저지. 해영은 해당 글을 클릭했다.
글이 게시된 블로그는 어느 심리 상담 센터에서 운영하는 듯했다. 상단 배너나 카테고리 모두 심리에 관련된 것들로 가득했다. 해영은 게시글에 적혀 있는 불안 장애 증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렇게 아래로 읽어 내려갈수록 해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1. 안절부절못한다.
2. 집중이 되지 않는다.
3. 두통이 있다.
.
.
.
8.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
모두 건우가 떠오르는 증상들이었다. 스크롤을 더 내려 보니 맨 아래에는 ‘이러한 증상들이 지속될 경우,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병원이면 정신과를 말하는 거겠지. 키보드 위에 올려 둔 손끝이 차게 식었다.
“아, 아직 하루만 그런 거니까….”
병원은 증상이 심해지거나 오래 지속되면 그때 권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 자체가 스트레스로 오기도 하니까. 해영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글자를 모두 지우고 ‘심신 안정’으로 고쳐 검색했다.
단어가 부드러워지니, 확실히 해영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보였다. 심신 안정에 도움을 주는 차, 불면증에 좋은 향, 명상법, 인센스 스틱. 해영은 후기까지 꼼꼼하게 살피면서 캐모마일 티백 세트와 인센스 스틱, 인센스 홀더를 주문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이런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해영은 노트북 뚜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길게 진동음이 울렸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건우는 평소에 저를 데려다주고 집에 혼자 걸어가는 길에 무료하다는 이유로 전화를 걸곤 했다. 오늘은 데려다준 건 아니더라도 집에 혼자 가는 중일 테니 비슷한 이유로 걸은 게 아닐까. 해영이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어….”
화면에는 예상했던 이름이 아닌, ‘홍 실장님’ 네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해영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작게 울렁였다. 조금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
“여, 여보세요.”
―도련님, 홍 실장입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아저씨. 말씀하세요.”
아닌 척 굴어도 목소리 끝이 떨렸다. 해영은 목을 가다듬고 상대에게 들리지 않게 심호흡했다. 부탁을 한 지 고작 하루하고 반나절이다.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게 당연했다.
―말씀하신 것들 알아봤는데,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혹시 내일 시간 되시면 제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해영은 표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만나서 어머니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아저씨라면.
“네…. 내일 괜찮아요. 어, 제가 다섯 시쯤 수업이 끝나거든요. 그때 다시 전화 드리면 될까요?”
―네. 편하실 때 전화 주세요.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아저씨의 낮게 웃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오랜만에 듣는 웃음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달라 말씀드렸잖아요.
그는 아버지의 고용인이니 제게 호의를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조차 예의상 하는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저씨의 진심을 제멋대로 오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해요, 아저씨.”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짧게 약속을 잡고 전화가 끊겼다. 잠깐이었지만 긴장을 많이 해서인지 손바닥이 축축했다. 뭘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써 이러면 내일은 어쩌려고. 해영이 숨을 폭 내쉬었다.
손에 꼭 말아 쥔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이번에는 진짜로 건우였다. 해영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랑 전화했어요?
받자마자 따져 묻는 목소리에 해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전화가 겹쳤구나.
“그냥 너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 누구요. 이 밤중에.
“말해도 모, 모른다니까…. 집 잘 갔어?”
해영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건우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티 나게 한숨을 내쉬고 불만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툴툴댔을 뿐이다.
―네. 집 앞이에요. 오면서 선배 목소리 좀 들으려고 했더니 전화도 안 되고.
해영이 코끝으로 웃었다.
“미안해…. 다음에는 꼭 받을게.”
건우는 그제야 얌전히 네, 하고 답했다. 그리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갑자기 죄송해요. 놀라셨죠.
“아, 아니야. 나는 그냥 너 무슨 일 있나 걱정이 돼서 놀란 거지….”
―선배가 안아 주셔서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 말에 해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애써 걱정하는 마음으로 덮어 두고 있었는데. 빈틈없이 꼭 끌어안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건우와 닿았던 몸 여기저기가 간질거렸다. 해영은 손을 올려 그의 숨이 닿았던 목덜미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럼 다행인데…. 얼른 들어가. 늦었다….”
―네. 내일 오전 수업 있으시죠? 저 조금 빨리 갈 테니까 점심 같이 먹어요.
“응, 알겠어.”
―끊을게요. 내일 봬요.
해영은 연이은 통화로 뜨끈뜨끈해진 휴대폰을 양 손바닥 사이에 넣어 식혔다. 뺨에 뭉근하게 열이 돌았다. 휴대폰에서 옮은 건가.
***
해영은 곤란함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건우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중간발표를 마친 조별 과제의 피드백 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아 급한 대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의하기로 조원들과 이야기를 마친 것이다. 학교가 끝난 후에는 아저씨를 만나기로 했으니, 집에 같이 가는 것도 어려웠다. 뭐라고 해야 하지. 해영은 휴대폰 액정을 꾹꾹 눌러 글자를 적어 보냈다.
[점심시간에 팀플 회의 해야 해서 밥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미안해.]
답장은 금방 왔다.
[밥도 못 먹고 하는 거예요? 뭐라도 사다 드릴까요?]
[아니야. 간단한 거 먹기로 했어. 괜찮아.]
[제일 든든한 거로 챙겨 드세요. 학교 끝나고 봬요.]
아, 그때도 못 본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건우에게 거절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해영은 불편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 끝나고 같이 못 갈 것 같아.]
[왜요?]
해영은 엄지손톱 옆 여린 살을 툭툭 건드렸다.
[그때도 회의가 있어.]
살을 건드리는 손짓이 빨라졌다. 답장이, 느리네. 건우는 눈치가 빠르다. 거짓말을 알아챘을까 봐 초조했다.
[알겠어요.]
[집 가서 톡 주세요.]
짧은 문자 두 개가 연달아 도착했다. 다행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은 모양이다.
[응. 점심 맛있게 먹어.]
마음은 불편했지만, 아저씨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았다. 누구인지 설명하다 보면 제 과거 이야기가 나오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고, 해영은 건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건우에게 자신은 그가 말한 것처럼 멋있는 사람이어야 했으니까.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무언가 크게 바뀔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알고 싶었다. 제가 정말 예전에 비해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과거에서 벗어날 작은 가능성이라도 발견하지 않을까.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마지막 수업 내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교수가 강의를 마치자, 해영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답지 않게 몸짓이 요란해서 주변에서 고개를 돌려 쳐다볼 정도였다. 평소라면 창피할 법한 상황이지만, 해영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걸음을 서둘렀다. 학교를 나서면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정문 앞에 세워진 익숙한 세단이 눈에 띄었다. 차 옆에는 아저씨가 기대 서 있었다.
학교까지 미리 와 주셨구나.
그가 해영을 발견하곤 고개를 까딱 숙였다. 몸에 밴, 습관과도 같은 인사였다. 해영은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걸어가는 중에도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아저씨와 있는 걸 건우가 보면 곤란하니까.
“지금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옛날 생각도 나고 좋던데요.”
홍 실장은 씩 웃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이런 거 안 하셔도 되는데. 해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차 안으로 몸을 들였다.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아저씨가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입학식 때도, 개강 날도 제가 태워다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가 핸들을 잡아 돌리며 말했다.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아저씨가 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네, 하고 대답을 덧붙였다.
차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인적이 드문 골목에 멈춰 섰다. 아저씨는 안전벨트를 푸르고 해영이 앉은 쪽으로 손을 뻗어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안에서 A4 크기 종이 몇 장을 꺼내 도로 닫은 후, 그것을 해영에게 내밀었다. 해영은 받은 종이 뭉치를 한 장씩 넘기며 살폈다. 어머니의 신분증이 앞뒤로 복사된 종이와 아저씨가 조사한 것처럼 보이는 서류들. 모두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티가 날 정도로 덜덜 떨렸다.
“도련님이 집에 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재판이 있었던 거 혹시 기억하시나요?”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버려지지만 말아야지 하는 심정으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 정확히 기억나는 건 없지만, 작은 몸으로 느꼈던 재판장의 무겁고 압도되는 분위기 따위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여자가 어떤 혐의로 기소됐는지는요?”
“그거까지는 잘….”
아저씨는 해영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들 가운데 한 장을 골라 맨 위로 올려 주며 말을 이었다.
“마약류 투약 및 유통, 그리고 아동 학대입니다.”
아동 학대. 해영이 쥐고 있던 종이가 악력에 의해 엉망으로 구겨졌다.
“당시에 도합 4년을 선고받고, 출소 후 누범 기간 중 다시 마약에 손을 대는 바람에 재범으로 2년, 이후에도 3범으로 3년 6개월을 더 들어가 있었습니다. 올해 2월에 출소했고요. 마약이 원래 재범률이 높긴 합니다만, 회장님께서 계속 주시하고 계셨으니 바로바로 잡힌 거라고 생각합니다. 손을 많이 쓰셨어요.”
이제 그렇게 힘을 써 줄 사람은 없다.
“집이 본인 명의가 아닌 건지 정확한 주소지는 알아내지 못했는데, 서울에 거주하는 건 확실합니다.”
그날 본 사람이 어머니일 가능성이 더해졌다. 숨이 막힌다.
“흐으….”
억울하다. 사 년. 그것도 다른 죄와 합쳐서 사 년이라고 했다. 당한 사람은 십사 년, 아니. 어쩌면 앞으로 이것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그 흔적 안에서 괴로워하며 살 텐데, 그런 끔찍한 기억을 안겨 준 사람은 진작에 죗값을 치르고 나왔다고 한다.
충분하지 않은 숨을 짧고 빠르게 들이마시다, 통증이 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꽉 틀어막힌 목구멍에서 억분 섞인 울음을 토해냈다. 해영은 구겨진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기껏 열심히 찾아 주신 자료들이 눈물로 얼룩이 졌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잔뜩 웅크린 등 위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이 올려졌다. 달래듯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짓에 맞춰 숨을 규칙적으로 뱉어 본다. 울음이 잦아들자,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최고의 복수는 잘 사는 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완전히 털어낼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좋은 것만 보시고 많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피하면 그만이라고. 살면서 어머니와 엮일 일이 더 있을까 싶었다.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없었다 생각하고 살면 될 줄 알았는데.
한강에서 본 사람이 정말 어머니이고, 또다시 마주칠 수도 있는 거라면. 그리고 그때 건우가 옆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한 번의 경험으로 현실성이 생긴 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해영이 대답을 않자, 그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해영은 몸을 바로 세우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혼자 갈 수 있다는 해영의 말을 무시하고, 아저씨는 기어이 오피스텔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해영은 내리기 전 받았던 서류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집까지 가져가고 싶진 않았다.
홍 실장은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할 때까지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해영이 애써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아저씨는 얕게 한숨을 내쉬더니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하나를 꺼내 해영에게 건네주었다.
“정윤이가 도련님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쥐여 주더라고요.”
“아….”
해영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사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윤이는 홍 실장의 둘째 아들이다. 해영은 그 아이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종종 만나 놀아 주곤 했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어른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길었기에 일 년이나 보지 못한 저를 아직도 기억해 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올해 유치원을 졸업했으려나. 해영은 사탕을 소중히 쥐었다. 홍 실장은 그런 해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발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허리까지 오던 게 언제 이렇게 자라서.
해영은 어렸을 때부터 안 좋은 것은 죄다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버릇이 있었다. 말하지 않겠다 다짐한 것은 몇 번을 되물어도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런 쪽으로는 고집이 대단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날에도, 그리고 이번까지. 그 고집이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이어지니 배는 더 버거워 보였다. 작은 몸으로 혼자 버텨내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영이 이번처럼 스스로 도움을 요청할 때만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주는 것뿐이었다. 홍 실장은 해영의 어깨를 떼어 내며 말했다.
“다음에는 집에 한번 오세요.”
예의상 하는 흔한 인사치레겠지만, 작은 아이가 보고 싶어진 해영은 염치 불고하고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에는 여전히 사탕을 쥔 채였다.
혼자가 되자, 차 안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정신없이 헤집는다. 예전 같았으면 어머니에 대해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건우가 해 준 말들이 등을 떠밀었다. 제 발목을 붙잡는 것들을 털어내고 그의 앞에 좀 더 당당하게 서고 싶었다. 어머니가 죗값을 받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얘기였지만, 직접 듣는 건 느낌이 달랐다. 분하고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저씨가 해 주었던 말처럼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척, 괜찮은 척하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잘 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건우가 옆에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건우한테 잘 들어갔냐고 문자라도 보내야지. 거짓말로 불편해진 마음을 덜어내고 싶었다. 내일 점심은 그가 좋아하는 거로 사 줄 생각이었다. 뭐가 좋을까. 건우가 좋아했던 메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집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해영이 몸을 돌리는 것보다, 뒤에서 거칠게 어깨가 당겨진 게 먼저였다.
“아!”
억센 반동에 의해 팔이 흔들려 쥐고 있던 사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떡해. 해영은 허겁지겁 몸을 숙여 반으로 갈라진 사탕을 주웠다. 시야 가득 익숙한 운동화가 들어찼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건우가 굳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건우는 주차장 옆 그늘에 서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해영과 나눈 메시지를 쭉 훑었다.
[점심시간에 팀플 회의 해야 해서 밥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미안해.]
[학교 끝나고 같이 못 갈 것 같아.]
[그때도 회의가 있어.]
3학년이라 바쁜 거겠지. 해영의 메시지 아래로 애써 괜찮은 척 보낸 제 답장에 코웃음이 나왔다. 뭐가 알겠다는 건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휴대폰을 찔러 넣었다.
노는 손을 들어 어깨 너머로 제 날개뼈를 매만졌다. 해영이 괜찮을 거라며 두드려 주었던 곳이다. 안아 달라 어리광을 부렸더니 어떻게든 해 주려고 발을 들면서까지 낑낑대던 몸을 떠올렸다. 건우는 턱을 당겨 웃었다. 조급하게 굴지 말아야지. 건우는 반도 남지 않은 꽁초를 비벼 끄고 걸음을 뗐다.
다시 강의실로 향하던 때였다. 멀리서 해영이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건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오늘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방향을 바꿔 해영의 쪽으로 향했다. 되게 빨리 걷네. 어디를 저렇게 바쁘게 가는 거지.
그렇게 해영의 걸음을 따라간 시선 끝에는, 처음 보는 검은색 차와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건우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뭐야, 저게. 해영은 남자와 인사하고 그가 열어 주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차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회의가 있다고 했는데.
멀리서 본 거긴 했지만, 분명 해영이 차에 타는 과정에서 어떠한 강제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닌 해영의 일이다. 물리적인 힘을 쓰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내몰렸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곧장 휴대폰을 꺼내 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연결되지 않았다.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였다.
“받아라, 좀.”
결국 음성사서함 안내 멘트까지 듣고 나서야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길로 다급히 강의실에 돌아가 짐을 챙겨 나왔다. 무슨 일이냐 묻는 말들에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해영의 집 앞으로 향했다. 달리 생각나는 곳이 없기도 했고, 어쨌거나 집에는 들어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영의 집까지 올라가 문을 두드리고,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오피스텔 앞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골목에 서서 해영을 기다렸다. 매일같이 그를 기다리던 골목인데도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건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가 놓친 게 있지는 않은지 생각했다. 해영이 꼭꼭 숨겨 놓은 것들 안에 저런 게 있는 건가. 중년 남성과 그의 조합은 수많은 불안 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라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같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조금 더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차에 타기 직전,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경계하던 해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씨발. 생각하면 할수록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가정으로 기울었다. 아까부터 전화를 수십 통째 하고 있지만 해영은 받지 않았다. 아는 것도 없고, 여기서 멀뚱히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제 무능함에 화가 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마지막 남은 담배를 태우고서 가까운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좀 전까지 없던 차가 오피스텔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아까 정문에서 봤던 그 차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남자와 해영이 서 있었다. 건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희미하게 들리는 대화 소리가 멎고 남자가 해영을 품에 안았다. 어제 제가 안고 있던 그 몸이다. 미쳤나. 꽉 쥔 주먹 위로 힘줄이 솟았다. 남자는 말 몇 마디를 더 남기고 차에 올라탔다. 차는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성큼성큼 걸어가 해영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아!”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해영이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해영의 눈은, 누가 봐도 실컷 울다 온 사람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그럴 수 있게 만들어 주든가.
건우는 해영의 가느다란 손목을 틀어쥐었다. 몸을 돌려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당혹스러워하는 저 얼굴에 대고 당장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꾹 눌렀다. 대낮의 골목 한가운데서 구경거리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해영은 얼얼한 통증에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 세게 조여올 뿐 벗어날 수가 없었다.
“거, 건우야…. 아파….”
그는 답을 하지도, 손목을 놓아 주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그는 해영을 집 앞까지 이끌었다. 해영이 파들대는 손끝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건우는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동시에 해영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문을 열어젖혔다. 현관 안으로 몸을 들이고 문을 닫는 동작이 급했다. 해영은 신발도 벗지 못한 채로 그에 의해 벽으로 몰렸다.
여태껏 화가 나도 이 정도로 무섭게 군 적은 없었는데. 해영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까 그거 뭔데요.”
그가 낮게 물었다. 해영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초조한 마음에 해영의 양어깨를 쥐고 작게 흔들었다.
“아버지? 삼촌? 뭐 가족 관계 같은 거예요?”
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냐고!”
건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놀란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건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우가 쥐고 있던 해영의 어깨를 던지듯 놓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도로 해영을 마주 보고 말을 이었다.
“제발…. 아무 말이나 좀 해 주세요. 다 믿을 테니까.”
이 일방적인 관계에서 을은 건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설령 해영이 자신을 마음먹고 속이려 들더라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라는 이야기다. 건우는 그의 손에 쥐여진 목줄을 한 번 더 상기시켰다. 해영은 그것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주도권을 온전히 떠넘겨 애원해도 해영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제가 다 포기하고 떠나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속이 갈기갈기 짓이겨지는 기분이다.
“저 선배 좋아해요. 잊으신 거 같아서 다시 말씀드리는 거예요.”
잊을 리가 없었다. 해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처음 보는 차에서 울면서 나와요. 모르는 남자랑 같이. 둘이 끌어안고 다음엔 집에서 보자는데 선배는 알았다고 하고, 씨발…. 그 새끼가 누군지, 안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대답도 안 해 주는데 제가 어떻게 생각해야 해요? 말해 봐요.”
“그, 그런 거 아니야…. 아저씨랑 오해하는 그런 일 없-.”
“아저씨?”
고조되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차게 식었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이 뒤집혔다.
“그 아저씨랑 차에서 조별 과제라도 했어요?”
건우가 입꼬리를 비틀며 빈정댔다. 말이 날카롭게 튀었다. 죽이지 못한 성질이 날것 그대로 표출됐다. 착한 척, 참을성 많은 척 오래도 버텼지. 해영의 앞에서 이기적이고 급한 성정을 죽이고 여태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은, 언젠가 해영도 저를 같은 눈으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마저도 확신이 없어지니 안 그래도 불안하게 서 있던 몸뚱이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요동치는 감정을 그대로 내보였다. 숨기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해영은 양손을 꼭 말아 쥐고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그냥, 그냥 믿어 주면 안 될까….”
“뭘 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건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선배는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 내내 불안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해영은 아직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쯤 되니 그게 아직인지, 아니면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을 쫓고 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서서히 열을 올리던 것이 기어코 터졌다.
“선배한테 저는 그냥 선배 좋다고 따라다니는 놈일 뿐이에요? 불쌍해서,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어울려 주고 있는 거고?”
“왜, 왜 그렇게 말을 해….”
해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
“저는요.”
건우가 현관문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유고 뭐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아까 같은 걸 또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해영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밀고 올라오는 뒷말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켰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원래 이런 건가. 마음의 크기만큼 실망도, 서운함도 크게 다가왔다.
“저 오늘은 가 볼게요. 여기 있으면 선배한테 계속 안 좋은 말만 할 것 같아요.”
“건우야.”
해영이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건우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떼어냈다.
“얘기할 마음 생기면 연락 주세요.”
건우는 몸을 돌려 현관문을 나섰다. 해영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몇 번을 더 불렀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저를 올려다보고 믿어 주면 안 되냐, 넘어가면 안 되냐, 재차 물어본다면 속에 걸리는 것들을 모두 제쳐놓고 그의 말대로 해 주고 싶을 게 분명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와 제 사이를 가르는 묵직한 소리에, 건우는 그제야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그의 옆에서 같은 감정으로 마주 보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욕심을 내서 벌을 받는 중인 건가.
오피스텔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약국으로 향했다. 전에도 한 번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멍 빼는 연고 주세요.”
약사는 작은 봉투에 연고를 담아 주며 간단하게 사용법을 일러 주었다. 건우는 그 봉투를 해영의 집 문고리에 걸어 놓고 나왔다.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결국 맨 처음 썼던 내용으로 적어 전송했다.
[집 앞에 약 걸어 놨어요. 손목 멍 들면 바르세요. 죄송해요.]
***
굳게 닫힌 문 너머로 건우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당장 달려가 붙잡고 싶은 마음을 그가 제 앞에서 지은 표정이, 뱉은 말들이 멈춰 세운다.
불쌍해서 어울려 주고 있는 거냐니. 그가 제 본모습을 알게 된다면 절대 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건우는 과분한 사람이다. 그가 제게 내미는 애정에 시도 때도 없이 의심이 들 정도니까. 그가 제 그늘진 부분을 몰랐으면 하는 이기심에 고집을 부려 듣게 된 말이었으나, 착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이 느리고 서툰 게 원망스러웠다. 건우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또 골랐지만, 그가 화를 내고 문을 박차고 나갈 때까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앞에서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 상황을 적당히 넘길 수 있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건우가 있는 힘껏 속을 내보이는 동안 제가 한 말이라고는, 그냥 믿어 주면 안 되냐는 바보 같은 말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믿어 주겠어. 입장 바꿔 생각해도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알고 있다. 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더라도 당장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건우는 힘든 사람을 두고 모질게 갈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점점 지치겠지.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옆에 두는 것은, 본인의 정신까지 좀먹힐 수 있을 만큼 힘들고 피로한 일이니까. 버티고 버티다 그 손을 놓치게 됐을 때, 제가 얼마나 엉망이 될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소란으로 어질러진 신발장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제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정리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곧장 침대 위로 엎어졌다. 운동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몸에 힘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벌이라도 주는 양 베개에 코를 박고 버티다가, 위기감이 느껴질 만큼 숨이 막히고 나서야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참았던 숨을 들이켰다. 해영은 여태 손에 쥐고 있던 깨진 사탕을 눈앞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배우기라도 했다면. 소중한 사람과 화해하는 방법이라든가, 실망시키지 않는 법이라든가. 스스로 부딪혀 얻어야 하는 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며 불평한다. 한심해….
건우는 아저씨와 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지 못해 화가 난 것이다. 아까처럼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거나, 무작정 믿어 달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말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건우를 속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그가 마음을 풀고 제 과거를 숨기는 방법은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해영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메모장 앱을 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한참을 첫 문장만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그 아저씨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아저씨고, 오랜만에 안부 인사 겸 만난 거고. 아, 이러면 운 게 설명이 안 되는데. 회의가 있다며 거짓말을 한 것도. 어떻게 해야 하지. 해영은 막막함에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엄지로 휴대폰 액정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진동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왔다. 조용한 곳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라, 짧은 진동에도 놀라 휴대폰을 침대 위로 떨구었다. 다시 주워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용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튀어 나가듯 현관으로 뛰었다.
벌컥 문을 열고 복도와 엘리베이터 앞, 계단까지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건우는 없었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일부러 메시지를 늦게 보낸 듯했다. 정말 그 정도로 제가 보기 싫어진 걸까.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을 만큼? 해영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건우가 말한 현관문 손잡이를 확인했다. 약국 로고가 박힌 흰색 봉투가 걸려 있었다. 해영은 그 작은 봉투를 빼 들고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안에 든 건 연고였다. 그렇게 화가 나서 저를 보는 것도 힘들어하는 주제에, 손목 좀 잡은 게 뭐라고 이런 것까지 챙겨 주고 간 걸까.
연고 뒤편에 적힌 주의사항 따위를 읽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도로 침대로 향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휴대폰을 들었다. 잠금을 푸니 조금 전까지 쓰다 만 메모장이 켜져 있었다. 해영의 턱이 잘게 떨렸다. 고심해서 적은 글자들을 모조리 지웠다.
거짓말 못 하겠어….
***
해영은 건우의 수업이 있는 층을 서성였다. 괜히 자판기를 관찰하다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다, 어딘가로 향하는 척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활보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의실을 기웃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건우는 얘기할 마음이 들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여러 번 고쳐 써도 메시지로는 그가 원하는 만큼 똑 부러진 답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어설퍼도 표정이나 몸짓이 보이니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 만나서 이야기해도 되냐고 물었지만, 건우는 읽기만 하고 답장이 없었다. 우연인 척 만나는 건 괜찮겠지.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우를 마주칠 수 없었다. 벌써 건우의 수업 시간이 끝난 지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길이 엇갈렸나. 결국 포기하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어, 해영 선배다.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규진이 해영을 보고 인사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해영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접어 웃으며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어디 가세요?”
“어, 집중이 안 돼서 그냥 사, 산책하고 있었어….”
“아아.”
규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했다. 해영은 그 옆에 서서 양손을 마주 잡고 초조하게 꼼질댔다. 규진의 옆얼굴을 힐끔대며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 혹시 건우는 먼저 갔어?”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을 겨우 뱉은 해영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울렁였다.
“형 오늘 학교 안 오셨는데.”
“어? 왜?”
해영은 놀라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모르겠어요, 연락이 안 돼서. 선배님도 모르시는구나. 진짜 무슨 일 생기셨나.”
주머니 안으로 초조한 손이 휴대폰을 꼭 쥐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규진과 헤어지자마자 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받지 않았다. 보면 전화 달라는 메시지를 남겨 두었지만,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박성재 때문에 화를 냈을 때도 수업을 빠지거나 연락을 피하진 않았는데.
매일 건우와 함께 걷던 산책로를 혼자서 걸었다. 습관처럼 대로변이 아닌 이쪽으로 걸어 온 건데, 그의 부재가 느껴져 괴로웠다. 오늘따라 유독 커플들이 눈에 띄었다. 팔짱을 끼고 빈틈없이 붙어 걷는 사람들. 그 사이에 덩그러니 홀로 걷고 있는 제가 더더욱 초라해 보였다. 해영은 가방끈을 양손으로 꼭 쥐고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걸음을 서둘렀다.
현관문 앞에 택배 박스가 두 개 쌓여 있었다. 수업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니,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해영은 문을 열고 상자와 함께 몸을 들였다.
칼로 테이프를 조심히 긋고 상자를 열었다. 건우를 위해 주문한 캐모마일 티백과 인센스 스틱, 홀더였다. 해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닫아 침실 구석에 놓아두었다.
잘 화해해서 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요즘 가뜩이나 제가 모르는 어떠한 연유로 불안해하던 사람이다. 제가 더 힘들게 만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건우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벌써 전화를 몇 통을 하고 메시지를 열 개 넘게 보냈지만, 읽었다는 표시만 뜰 뿐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해영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규진을 찾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친구들과 모여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규, 규진아. 잠깐 시간 돼?”
“어, 네! 잠깐만.”
규진은 함께 있던 일행에 양해를 구하고 해영의 쪽으로 걸어왔다. 해영은 그를 찾아다니는 동안 정리했던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내가 사실 화요일에 건우랑 조금 다, 다퉜는데 그 뒤로 학교도 안 오고 연락도 안 돼…. 전화도 열두 번이나 하고, 메시지도 엄청 많이 보냈거든. 너무 걱정돼서…. 호, 혹시 건우 집 어딘지 알아?”
건우는 제집을 매일같이 데려다주고 하는데, 저는 그의 집이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토록 무심한데 그가 저에게 화를 낸 건 꼭 아저씨의 일이 아니더라도 예견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아, 싸우셨구나. 잠시만요. 근데 이거 제가 알려드렸다고 하면 안 돼요. 건우 형 무서워요.”
“알겠어. 꼭 비밀로 할게.”
규진은 휴대폰을 몇 번 두드려 톡방에서 주소 하나를 찾아 해영에게 내밀었다. 해영은 그대로 보고 받아 적었다.
“진짜 고마워….”
“아니에요. 가서 꼭 화해하시고 형 학교도 오라고 해 주세요.”
“응, 그럴게. 고마워.”
해영은 손에 휴대폰을 소중히 쥐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급하게 택시를 잡아타 주소를 불렀다. 아파트 이름이 익숙한 걸 보니 근방인 것 같은데. 예상대로 택시는 기본요금에서 크게 차이 나지 않은 금액을 찍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내리는 동작이 급했다.
학교를 빠져나오면서도, 택시 안에서도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제는 읽었다는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해영은 주소에 적힌 동이 잘 보이는 단지 내 벤치에 앉아, 집 앞이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한참을 기다렸다. 밝았던 하늘에 어스름이 질 때까지. 두 시간은 넘게 기다린 것 같은데 메시지는 여전히 읽지 않은 상태였고, 건우와 닮은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회했다. 그날 어설픈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멀어지고 싶지 않은데. 초조한 마음에 속에서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정말, 정말 제가 싫어진 거면 그때는 어떡하지. 또 혼자가 되는 건가.
휴대폰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가족이 모두 있는 집에 약속도 없이 찾아가는 게 무례한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도 안 오고 연락도 안 받으니, 마냥 가만히 기다리기엔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해영이 끝내 몸을 일으켰다. 아직 시간이 많이 늦지 않았으니까, 실례가 안 되도록 문 앞에서 건우 안부만 물어보고 오자.
공동 현관문 옆 인터폰 앞에서 망설이던 중, 밖으로 나오는 사람에 의해 문이 열렸다. 해영은 쭈뼛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묘한 기시감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해영은 휴대폰에 띄워 놓은 주소를 거듭 확인했다. 여기가 맞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적혀진 호수 앞까지 도착하자, 그제야 흐릿하게 스쳐 가는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이 문이 열렸을 때 저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제게 겉옷을 덮어 주던 커다란 손이, 1층에서 마주쳤던, 이제는 익숙해진 담배 냄새가.
해영은 멍한 얼굴로 인터폰을 누르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어지럼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우연히 같은 주소에, 비슷한 사람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부정하고 싶었다. 제 바닥까지 본 그 사람이 건우일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과부하가 걸려 정리가 되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한 거지?
나한텐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으면서.
해영은 미련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말을 고쳤는지 모른다. 다 보여 주지 않더라도 얼굴을 보고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알아줄 거라고, 평소처럼 다시 다정한 얼굴로 저를 대해 줄 거라고. 그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거짓말한 것을 사과하고 싶었다. 그렇게 애써 고민한 시간이 무의미해지더라도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말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건 화일까, 수치심일까.
1층까지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얼굴에,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그 안에는 차윤서가 놀란 얼굴로 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해영은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입술까지 깨물면서 감내했다. 식탁 아래로 손과 발을 꼼질대며 가만두지 못하면서도, 위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대느라 기운이 빠졌다.
“건우 친구라고?”
건우의 첫째 누나라고 소개받은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벌써 세 번째 듣는 질문이었다. 가족들 앞에서 차마, 이제 친구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꾸준히 맞다고 답을 하고 있는데도 왜인지 쉽게 믿어 주지 않았다.
“네….”
해영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한 번 더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때 차윤서가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 해영의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해영이 고개를 까딱이며 음료를 받았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혼자 멋대로 그녀에게 의지했다. 차윤서는 해영의 옆자리에 앉으며 반대편에 주르륵 앉은 가족들을 향해 일렀다.
“이상한 눈으로 좀 그만 봐. 불편해하는 거 안 보여?”
“아니, 맨날 시커먼 놈들만 데려왔으니까.”
“걔 안 그런 척해도 귀여운 거 좋아하잖아. 강아지 같은 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만지작대던 해영이 눈을 질끈 감고 한 모금 들이켰다. 새콤한 맛에 뺨이 당겼다. 너무 셔. 해영은 컵을 조금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건우가 많이 애 같고 철이 없죠? 막내라서.”
건우의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해영에게 물었다. 해영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편하게 말해도 돼요.”
“정말 아니에요…. 건우 엄청 어, 어른스럽고 배려도 많이 해 줘서 제가 배울 점이 많아요….”
해영이 쩔쩔매는 얼굴로 말을 끝마치자마자, 옆에서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웃으시지. 정말인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고 가요.”
어머니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해영에게 권했다. 해영은 손까지 펼쳐 흔들어 보이며 거절했다.
“괘, 괜찮아요…. 그냥 건우 보러 온 거라….”
“친구라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얘 금방 올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먹어요.”
따뜻하다. 친절함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받아들이는 제 상태가 문제인 거겠지. 건우에게 화가 난 상태로, 그의 친구라는 이름을 달고 친절을 받고 있으려니 모두를 속이는 것 같아 눈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해영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계속 거절만 하는 것도 실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이 기분으로 건우와 마주 앉아 있을 수도, 그의 가족들과 웃으며 밥을 먹을 수도 없을 것 같은데. 해영이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는 사이, 현관문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왔나 보다. 저녁 먹기 전에 온다더니.”
차윤서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그녀의 타이르는 말과 함께,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벽을 사이에 두고 들어서 그런지, 건우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충전하는 거 깜빡했어. 왜.”
“너 친구 왔어.”
“친구 누구. 안경태?”
“아니, 해영 씨.”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해영이 숨을 멈추었다. 그는 놀란 듯 언성을 높였다.
“뭐?”
건우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해영이 초조하게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사이, 그가 벽을 돌아 당혹스러운 얼굴로 해영을 마주 보았다. 친구 사이의 흔한 인사도 없었다.
“선배.”
그 부름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해영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건우의 옆을 스쳤다. 코끝에 닿는 담배 냄새가 평소보다 배는 더 진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현관으로 빠르게 걸었다. 가족들이 이상하게 볼 게 뻔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건우가 황급히 제 뒤를 따라 몸을 돌렸다. 해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신발을 구겨 신고, 이곳을 벗어나는 데에만 몰두했다. 엘리베이터 연달아 버튼을 눌렀다. 기다리는 시간이 억겁 같았다. 건우가 쫓아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이를 악물고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내려갔다. 종아리가 땅길 정도로 급하게 내려가다 다리를 접지를 뻔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오고 나니 더 확실시되었다.
이런 따뜻한 집 안에서 자란 사람이 제 과거를 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1층에 도착한 해영이 공동 현관문으로 뛰었다. 아까부터 꾸준히 따라오던 걸음 소리도 덩달아 빨라졌다.
“선배, 잠깐만요. 얘기 좀 들어주세요.”
건우와 해영의 걸음 속도는 평소에도 꽤 차이가 났다. 항상 제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걸어 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 걸음으로 순식간에 따라잡아 해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해영이 옆길로 비켜 지나가려 했지만, 건우는 해영의 움직임에 맞춰 계속 가는 길을 방해했다. 그 커다란 키가 저를 지켜 주는 울타리가 아닌, 넘어갈 수 없는 벽처럼 아득하고 막막하게 느껴졌다.
해영은 아랫입술을 피가 고일 정도로 세게 물었다. 흉곽이 크게 올랐다 내려간다. 심장 부근이 얕게 쥐가 난 것처럼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저릿저릿 통증이 일었다. 해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왜 말 안 했어…?”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느라 턱이 형편없이 떨렸다. 해영은 주먹을 들어 제 앞을 가로막은 단단한 가슴팍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큼은 커다란 바위라도 받아 낸 사람처럼 괴롭게 일그러졌다.
“내가 불쌍했어? 그래서 잘해 준 거야?”
건우는 고개를 힘없이 저으며 부정했다. 해영이 이를 악물고 재차 물었다.
“불쌍해서 어울려 준 거…. 그거 내가 아니라 너 아니냐고.”
“그런 거 아니에요.”
해영이 주먹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눈을 꾹 눌러 감아 비집고 나오려는 물기를 속눈썹 사이에 숨겼다. 훅 숨을 크게 고르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건우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제 이야기를 그에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참고 고집을 부려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안전핀이 제대로 꼽히지 않은 말들은, 예상치 못한 외부의 충격에 막을 새도 없이 흘러넘쳤다.
“나, 나는 너처럼 저런 집에서 사랑받고 자라지도 못했고,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한번 뚫린 입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에 있는 말들을 우르르 쏟아 낸다.
“여전히 나는 너에 비해 많이 모자라고 어머니 잠깐 마주친 거로 형편없이 망가지는 사람이지만, 네가 나를 멋있고 좋은 사람으로 봐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해영은 가득 고인 눈물이 뺨까지 흐르기 전에 손바닥으로 급히 닦아 냈다. 목소리가 보잘것없이 떨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허무, 허탈, 포기. 그와 닮은 감정들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고 싶다는 마음만 찌꺼기처럼 남았다.
“네가 봤던 그 아저씨, 어머니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린 거야. 그만 벗어나고 싶어서. 네가 옆에 있어 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 대해 들으려는 용기는 건우가 그날 밤 보여 준 애정에서 나온 소산이었다. 건우가 없었다면 알아보기는커녕, 피하고 숨기 급급했겠지. 그간 그가 저에게 선물해 준 수없이 많은 기적 같은 순간까지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한테만큼은 불쌍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게 받고 싶은 건 동정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이미 내 바닥까지 봤다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지….”
저를 좋아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도 아니니 겉으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화가 나고 미운 마음이 드는 건지 생각했다.
수치스러웠다. 노력해서 멋있고 좋은 사람이 되면, 어쩌면 건우가 저에게 가진 마음이랑 비슷한 마음을 갖고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렇게, 또 새로운 무언가를 그와 함께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제 과거를 숨긴 채로, 아프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흉내 내면서 말이다.
“내가 그날 어떤 심정으로 너네 집까지 찾아가서 무릎을 꿇었는지, 아마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너도 이런 얘기 속 시원하게 못 하는 내가 답답하잖아. 힘들잖아.”
“선배, 제발….”
그는 본인이 뱉었던 말들을 부정하듯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커다란 몸뚱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도, 나도 그래, 건우야….”
건우가 무의식적으로 해영의 축축한 눈가에 손을 뻗었다. 해영은 그 손을 탁 쳐냈다.
“마, 만지지 마…. 싫어….”
얼얼한 제 손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뒤로하고, 해영은 그의 옆을 지나쳐 걸음을 서둘렀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눈에 보이는 아무 택시나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리를 굽히고 끅끅 숨을 들이켜는 게 전부였다.
새삼 그와 제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한 날이었다.
***
[전화 좀 받아주세요.]
해영은 휴대폰을 엎어 놓았다. 그날부터 주기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나 메시지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만나 달라, 용서해 달라, 얘기 좀 들어 달라. 건우는 귀를 뒤로 한껏 젖히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개처럼, 자존심 따위 없는 양 굴었다.
속을 꽉꽉 채우는 불편함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가 말을 안 해 준 건 여전히 원망스러웠지만, 그건 건우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확신을 갖고 행동해왔던 것에 대한 창피함 때문이었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걸지도 모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건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처럼 지낼 수 있긴 한 건가.
해영은 옆으로 돌아누워 방구석에 쌓인 택배 상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를 걱정했던 마음조차 우습게 느껴진다. 저걸 건네주었다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고 속으로 비웃지 않았을까. 건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못난 마음이 예고 없이 쑤시고 들어온다.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 안에서 주말에 건우가 사다 놓은 사과 한 알을 꺼내 들었다. 둥글고 납작한 접시와 과도를 챙겨 식탁에 앉았다. 건우가 깎아 놓았던 모양을 떠올리며 둥글게 천천히 껍질을 깎았다. 형편없었다. 그가 했던 것처럼 깔끔하게 되지 않았다. 과육이 지나치게 많이 썰려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가 껍질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부들대며 깎아내리느라 오래 걸린 탓에 갈변이 되고, 그나마 먹을 만한 과육 부분은 눌리고 뭉개져서 마치 발에 한 번 채인 것처럼 엉망이었다. 마지막 껍질 조각을 썰어낼 때는 살짝 베이기까지 했다.
건우가 없었을 땐 어떻게 했더라. 사과를 먹었던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속상함 때문인지, 손때가 잔뜩 묻어서인지, 맛이 없었다. 해영은 그대로 랩을 씌워 냉장고 안에 넣어 놓았다.
지잉,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잘못했어요.]
해영은 핏방울이 맺힌 검지를 꾹 눌러 잡았다. 아파….
점심을 혼자 먹으려니 영 입맛이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사라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매번 해영의 옆에 건우가 붙어 있으니, 그들 역시 해영을 배척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혼자 남은 해영은 학교 매점에서 작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이런 와중에도 배는 착실하게 고파 오는 게 신기했다.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진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해영은 자리에 가방을 놓고 음료라도 빼 오려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때 멀리서 지나가는 커다란 인형이 눈에 띄었다. 건우였다. 왜 여기 있지. 여기서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거리가 거리인 만큼 제 쪽을 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해영은 다급하게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헉….”
스스로 숨은 이유도 모른 채로 세면대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제 앞에서 사과하고 해명을 한다면, 당장 생각해야 하는 것들을 모두 제쳐두고 받아 주고 싶을 게 뻔하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에 거리를 둔 건데, 그의 일방적인 연락을 받을 때마다 건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시간이 태반이었다. 아직,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몇 분을 버텼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화장실 구석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제 모습은 제가 봐도 이상해 보였다. 다행히도 그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쯤이면 갔겠지. 거울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덜컹. 해영이 문을 여는 것보다 바깥에서 열리는 게 더 빨랐다.
건우였다.
“아….”
해영은 나가려던 것도 잊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했다. 안에 해영이 있는 줄 몰랐는지, 그도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배.”
“나, 나 나갈래….”
뒤로 가도 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해영이 그의 옆을 노렸지만, 건우는 비켜서지 않았다. 문을 가득 채우는 그의 체격이 지금만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비켜 주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갇혔다는 느낌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비켜 줘, 제발….”
건우는 해영의 말을 듣는 대신 몸을 완전히 안으로 들이고 화장실 문을 닫았다. 두꺼운 철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가 해영의 귓가를 울렸다. 건우가 한 발짝 해영에게 다가갔다.
피하고 싶었다. 비겁하다고, 겁쟁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해영은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뒤로 물리다, 열려 있던 화장실 칸 문에 등을 부딪쳤다. 건우가 놀란 얼굴로 손을 뻗어 해영의 팔을 붙잡았다. 해영은 그의 손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뿌리쳤다.
“아…!”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영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딱딱한 타일 바닥에 엉덩이와 팔꿈치가 차례로 부딪혔다. 뼈가 울릴 만큼 아팠지만, 그 와중에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괜찮으세요?”
건우는 해영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만지지 말라고, 싫다고 제 손을 쳐냈던 해영이 떠올라서였다. 그가 머뭇대는 사이, 해영은 제 무릎을 붙잡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진짜 꼴불견이다.
“…나 가,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해영은 화장실 문 쪽으로 걸음을 뗐다. 넘어진 곳이 욱신거렸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건우의 옆을 지나쳤다. 그 순간 어깨가 뒤에서 붙들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잡은 당사자조차도 놀라 순식간에 손을 떼어 냈다. 해영이 도끼눈을 한 채 잡혔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홱 돌렸다.
“죄송해요….”
그는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왜, 왜 자꾸 잡는 거야. 만지지 말라니까. 내가 싫다고 했잖아….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 문도 막고 있고, 비, 비켜 달라니까 더 들어오고….”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저 안 봐주실 거잖아요.”
해영은 입을 다물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얘기 좀 들어주세요, 제발.”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낮게 내씹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데 대한 불평이나 불만 따위가 뾰족하게 섞여들었다. 건우가 저런 표정을 하고 제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해영은 다 없던 일로 해버리고 싶을 만큼 동요했다. 해영이 마음을 굳게 먹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나는 네가 하는 사과나 설명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야…. 내 문제니까, 내, 내가 앞으로 너를 전처럼 대할 수 있을지 혼자 고민해야 하는 문제야. 네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저를 안 보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에요?”
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그건….”
해영이 가장 생각하기 싫었던 선택지 중 하나였다. 건우는 그걸 여과 없이 내리꽂는다. 해영이 그의 말을 듣기 싫었던 이유가 이거다. 건우는 제가 생각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려 주지 않는다. 혼자 몇 걸음 앞까지 생각하고 그걸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말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워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 나, 나는 너처럼 빨리 답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야.”
“듣고 나서 생각해도 되잖아요. 피하는 거만 제발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지금은 네 말 듣기 싫다고 했잖아.”
평소 해영답지 않게 단호한 어투에, 건우가 희게 질린 얼굴로 숨을 짧고 빠르게 몰아쉬었다. 만지는 것도 싫고, 얼굴도 보기 싫고, 이야기도 듣기 싫으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숨이 모자랐다. 가슴께를 잔뜩 구겨 쥐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건우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해영은 날이 선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네가 그렇게 몰아붙일 때마다 너무 힘들어, 난….”
해영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 작은 등이 멀어진다. 그 순간, 건우의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럼증이 확 몰려왔다.
“아….”
비틀거리는 몸을 벽을 짚고 버텼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에 해영이 뒤를 돌았다. 건우가 창백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었다.
“괘, 괜찮아?”
해영이 놀라 부축하려 뻗은 손이 닿기도 전에,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해영은 제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건우를 받쳐 안은 채 한 손으로 구급차를 불렀다. 건우는 오 분도 되지 않아 정신을 차렸지만, 해영은 그가 일어나게 두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며 화를 냈다.
건우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차가웠다. 평소와 다른 손의 온도에 해영이 이를 악물었다.
“왜 이렇게 떨어. 저 괜찮아요.”
“아, 아니야…. 너 안 괜찮아. 구급차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구급차까진 안 불러도 되는데. 건우는 나오려는 말을 꾹 삼켰다.
예전처럼 그가 저를 걱정해 주는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떨고 있는 것도 마음이 안 좋고, 우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꼴사납게 구급차에 실려 가 온갖 검사를 다 받게 되더라도, 해영을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내할 것이라고, 건우는 생각했다.
해영은 구급차에 올라타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안절부절못했다. 검사를 하는 중엔 그의 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제 양손을 꼭 붙들고 버텼다.
왜 그런 말을 해서.
맞잡은 손에 이마를 꾹 눌렀다. 후회된다. 모진 말을 한 것도, 건우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던 것도. 아까 마주쳤을 때, 무작정 피하는 게 아니라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똑바로 쳐다봤더라면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쓰러지기 직전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검사를 마친 건우는 응급실 침대 하나를 차지했다.
“최근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셨나요? 잠을 제대로 못 잤다든가.”
의사의 질문을 들은 해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표정에서 자책이 고스란히 읽혔다.
“아니요, 딱히.”
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해영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음, 영양 부족과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절대 가볍게 보시면 안 돼요. 실신까지 하셨다는 건 스트레스 정도가 꽤 심했다는 건데….”
의사가 차트를 재차 살피며 말했다. 의사는 대답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건우를 보았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건우는 제 몸 상태고 뭐고, 죄책감에 어쩔 줄 모르는 해영에게로 온 신경이 쏠려 있을 뿐이었다. 그놈의 스트레스 이야기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의사의 입에서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해영의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
“수액 처방해드릴 테니까, 맞고 가세요.”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의사가 말했다.
여기서 수액까지 달게 되면 해영의 걱정이 더 커질 것이다. 지금도 툭 치면 울 것 같은데.
“아니, 괜찮-.”
“건우야….”
건우의 손등 위로 해영의 작은 손이 얹어졌다.
“…알겠어요.”
건우가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해영은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는 건우의 옆에 앉아 손을 꼭 붙잡았다. 스트레스 때문이지,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긴장이 풀려 내내 참았던 울음이 비집고 나왔다.
“미, 미안해…. 내가….”
쓰게 웃은 건우가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해영의 뺨을 감싸 엄지로 눈물을 닦아 냈다.
“선배가 사과를 왜 해요.”
“내가 자꾸 못된 말 해서….”
“저 때문이에요. 제가 잘못해서 선배가 그런 거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건우는 듣고 있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바로 앉은 뒤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리 말 못 해서 죄송해요.”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서웠어요. 그날 선배를 봤다고 하면 선배가 저를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요.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불쌍하다거나 그런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냥…. 그냥 저 사람 옆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켜 주고 싶고 힘이 되어 주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해영이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의 발현이지 결코 연민이 아니었다.
“종종 생각났어요. 요즘은 어떻게 살까, 지금은 괜찮을까 궁금한 정도였는데, 작년 봄에 학교 앞에서 선배를 다시 만난 거예요. 기억 못 하시겠지만.”
당시를 떠올린 건우가 턱을 당기고 웃었다.
“그때 저한테 책 주워 줘서 고맙다고 웃어 주셨거든요. 그게 너무 예뻤어요.”
해영은 멍한 얼굴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작년 봄이면, 건우가 학교에 입학하기 한참 전이었다.
“다 털어놓고 싶었는데, 그 잠깐 웃어 준 거로 쫓아다녔다고 하면 겁내실까 봐 수백 번도 더 고민했어요. 언젠가 말해야지 생각했어도 수액 맞으면서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천천히 고개를 든 건우가 해영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제가 한 말이 그를 더 도망가고 싶게 만든 것은 아닐까. 아직 조금 일렀나.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해영은 두 뺨 가득 붉은 기를 머금고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안 무서워….”
해영은 맞잡은 손을 조물락거리며 답했다. 그의 말처럼 겁날 법한 일인데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이유를 몰랐을 때가 더 겁이 났던 것 같다. 건우가 제게 위협적으로 굴거나 무언가를 강요했다면 몰라도, 그저 옆을 지켜 주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준 게 다였으니까.
건우는 무서웠다고 말했다. 해영이 그러했듯이 말을 하면 떠나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 아직도 내가 좋아?”
바보처럼 보이더라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건우의 집 앞에서 줄줄이 내뱉은 그 과거를 듣고도 여전히 좋으냐고. 건우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지금의 선배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해영의 이야기를 듣고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힘들었던 만큼 지금보다 더 많이 좋아해 줘야지, 하는 것 정도였다.
건우는 망설이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해영의 몸이 저항 없이 딸려 온다. 가까워진 거리에, 저를 거부하지 않는 몸짓에,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 건우는 고개를 숙여 해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비볐다.
“용서해 주세요. 저 반성 많이 했어요.”
해영은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미안한 건 제 쪽인데도 그는 또 한 번 숙이고 들어온다. 해영이 손을 올려 그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강아지 같아.
“밥 잘 먹으면….”
낮은 웃음이 어깨를 간질였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 오랜만이다, 그죠.”
건우가 메뉴판을 내밀며 말했다. 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기 초에 둘이서 자주 오던 돈가스집은, 안 온 사이 메뉴가 늘어 있었다. 해영은 오랜만에 보는 메뉴판을 정독했다.
새로 추가된 메뉴는 ‘떡볶이 돈가스’였다.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떡볶이와 돈가스가 합쳐졌다니. 이건 먹어야 해. 해영은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비장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거.”
건우의 시선이 해영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해영이 가리킨 메뉴는 분명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색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해영이 자주 먹었던 매콤 돈가스 사진과 비교했을 때도 훨씬 더 어두운 빨간색이었다. 많이 매워 보이는데. 말려 봤자 듣지 않을 걸 알기에, 건우는 잠자코 규동 하나와 가라아게, 그리고 해영에게 줄 미니 냉모밀을 같이 주문했다.
주문을 마친 건우가 물통을 집어 해영의 컵을 채워 주는 동안, 해영은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우의 앞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내밀어진 가느다란 손목에는 염려했던 대로 푸르게 멍이 들었다. 물통을 내려놓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수저를 놓고 빼려는 팔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손목 안쪽이 위를 향하도록 돌렸다. 건우가 미간을 팍 구겼다. 괜히 눈치가 보인 해영은 손목을 살살 비틀어 당기며 설명했다.
“내, 내가 원래 멍이 잘 드는 체질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많이 든 것도 아니고….”
건우는 고집부리지 않고 팔을 놓아주었지만,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멍이 심하게 든 게 아니더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이렇게 만든 거다. 다치지 않게 둘둘 싸매 놓아도 모자랄 판에, 제 손으로 상처를 냈다. 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었어도 그렇지.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에 입 안 살을 가득 물었다.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이거 봐. 눌러도 하나도 아, 안 아픈데….”
해영은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제 손목을 다른 손으로 붙잡아 꾹꾹 눌렀다. 아릿한 통증이 퍼졌지만 꾹 참았다. 건우가 저렇게 죄지은 얼굴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연고는 발랐어요?”
“응. 자기 전에 바르고 있어….”
“다 쓰면 말해 주세요.”
해영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쓰기 아까워서 케이스도 뜯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맑은 종소리와 함께 식당 문이 열렸다. 한 가족이 안으로 들어왔다. 초등학생 남자아이와 젊은 부모. 세 사람은 해영이 앉은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부모가 주문하는 사이,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불만 따위를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해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이 식당에서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 게 이유였다.
해영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로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예전에….”
한참 만에 해영이 입을 뗐다. 그러자 창밖을 향해 있던 건우의 시선이 바로 돌아온다.
“이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졸업식 때 아버지가 와 주신 거야…. 그때는 그게 너무 신이 났어. 졸업식에 부모님이 오시는 일은 나한텐 평생 없을 줄 알았거든….”
밥 먹는데 너무 우울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닐까. 해영이 고개를 살짝 들어 건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딱하게 보거나 안쓰러워하는 표정도 아니었고, 그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내용에 두서가 없고 엉망이었다. 왜 아버지만 오신 건지, 부모님이 왜 오시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파고들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만큼 빈 곳도 많았지만, 건우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해영은 마음 놓고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바쁘신 분이셔서 시계 보는 게 습관이셨는데, 그날따라 그게 엄청 신경 쓰이는 거야. 내가 아버지 시간을 뺏은 건 아닌가 하고…. 예약한 곳이 있다고 거기로 가자고 하셨는데, 내가 눈에 보이는 식당 아무거나 가리키면서 저기면 된다고 그랬어. 그땐 아버지 위한답시고 한 말이었는데, 좀 더 크고 생각해 보니까 그게 더 곤란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아버지는 매스컴에 얼굴이 공개되는 걸 꺼리셨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당시 알음알음으로 같은 학교 학생 중에 서정 그룹 회장의 아들이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는데, 뜬소문이라고 웃어넘기던 이들조차 호기심을 못 이기고 졸업식을 구경 왔었다. 그 덕에 개교 이래 가장 붐비는 졸업식이 되었다. 다른 부모들의 시선이나 수군거림은 어린 해영의 눈에도 아버지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식당이라고 잦아들 리 없었다. 게다가 아무렇게나 가리킨 식당 이름이 ‘엄마 손 돈가스’라니.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와 어머니와 외도를 한 남자가 함께 들어간 곳치곤 이름이 꽤 짓궂었다.
“그게 여기예요?”
건우의 물음에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네.”
건우가 씩 웃으며 해영과 눈을 맞췄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는 해영의 얼굴은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일전의 일들로 인해 노력해 주고 있는 거겠지. 대학 근처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도, 아버지 이야기도, 이 돈가스집에 관련된 기억도 모두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여전히 궁금한 게 많지만, 지금처럼 하나하나 천천히 듣다 보면 퍼즐처럼 빈틈없이 채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가 노력하고 있는 만큼, 저 역시 조금 더 차분하게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건우는 해영이 바라보았던 가족이 앉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어린 해영의 모습을 상상했다.
“사진은 찍었어요? 졸업식 때.”
“응…. 급하게 찍느라 표정이 엄청 이상하게 나왔더라.”
“다음에 저 보여 주세요.”
“이, 이상하게 나왔다니까….”
“안 이상해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해영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비죽거렸다.
주문한 메뉴가 차례로 나왔다. 건우는 규동과 가라아게를 제 앞에 두고, 떡볶이 돈가스와 미니 냉모밀을 해영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해영은 제가 시키지도 않은 냉모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떡볶이 돈가스랑 같이 먹으면 둘 중 하나는 남길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해영은 떡을 가장 먼저 집어 입에 넣었다. 알싸한 매운맛과 단맛이 적당히 어우러져 무척 맛있었다. 떡 두세 개를 연달아 먹으니 매운맛이 확 올라왔다. 다급하게 물을 마셨다. 가라앉는 건 순간뿐이었고, 금세 다시 얼얼한 통증이 올라왔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는 수 없이 건우가 같이 주문해 준 냉모밀로 젓가락을 뻗었다. 시원한 면을 후루룩 입에 넣고 살얼음이 동동 뜬 국물을 머금으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앞에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
“귀여워서요.”
대체 밥을 먹는 게 뭐가 귀엽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건우는 응급실에 다녀온 이후, 약속대로 밥을 잘 먹어 주었다. 잘이라고 해봤자 전처럼 먹는 게 다였지만, 워낙 먹는 양이 많았던지라 컨디션이 빠르게 회복됐다. 말을 잘 들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맞다, 건우야. 혹시 너 알바 했던 카페에서 충전기 하나 못 봤어? 하얀 거….”
“잃어버리셨어요?”
“응…. 계속 찾아봤는데 안 보여서.”
시간 날 때마다 찾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급한 대로 여분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날 카페에 두고 온 듯했다. 건우에게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와 온갖 난리를 피우느라 물어볼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형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응, 고마워.”
점심시간이 끝나고, 어김없이 강의실 앞까지 데려다준 건우가 강의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해영에게 물었다.
“오늘은 끝나고 뭐 없어요? 이따 같이 가고 싶은데.”
“너 빨리 끝나는 날 아니야?”
“기다리면 되죠.”
건우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해영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매번 건우만 기다리게 하는 게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통 제가 먼저 기다릴 기회가 오지 않았다. 건우는 3학년인 해영에 비해 수업도 적은 데다 아침에도 해영보다 훨씬 부지런했다. 건우가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를 바랐다. 요 며칠 사이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었으니 조금 더 욕심 내 보기로 했다.
“그, 그럼 기다리는 동안 과제라도 하고 있어. 시험공부라든가….”
건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래도 싫다는 말은 안 하네. 해영이 눈에 힘을 주고 재차 물었다.
“알았지?”
“네….”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 이제 가 볼게요. 끝나면 연락 주세요.”
“응, 수업 열심히 들어야 해. 졸지 말고.”
“아, 진짜. 알겠어요.”
건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해영은 멀어지는 건우에게 손을 잘잘 흔들다 강의실로 몸을 들였다.
항상 앉는 맨 뒤 구석진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아직 수업 시작까지 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다른 과목 과제를 조금 해둘 생각으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순간이었다. 강의실 앞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애들 중 한 명이 해영의 쪽으로 다가왔다.
왜 이쪽으로 오지….
해영은 곁눈질로 그녀를 주시했다. 옆자리라든가, 아니면 앞자리라든가. 분명 제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걸 거야. 해영이 바람을 갖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하게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영 오빠.”
“어?”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해영을 불렀다. 당황스러웠다. 해영은 단연코 그녀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하지 않았다.
“오빠 차건우랑 친하죠? 아까 그 일 학년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해영이 움찔했다. 왜 물어보는 거지. 친하면 안 되는 건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해영이 대답을 망설이자, 그녀가 네? 하고 대답을 부추겼다. 이 정도면 친하다고 해도 되는 거겠지.
“응….”
해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걔 여자 친구 있어요?”
“어? 어, 없는 거 같은데….”
“미친, 저 그럼 다리 좀 놔 주시면 안 돼요?”
그녀가 화색을 띠며 들뜬 어조로 말했다.
해영은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리를 놓아 달라니. 머릿속에서 그녀와 건우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저와 해오던 것처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손을 잡고. 해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싫은데….
“그건 건우한테도 물어보고….”
“아, 오빠. 그게 무슨 다리 놓는 거예요. 우연인 척 자리 만들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부탁드려요. 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졸랐다. 예전 같았으면 부탁이라는 말에 곧바로 알았다고 답을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해영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안 돼….”
“네? 왜요? 여자 친구 없다면서요.”
“조,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아, 그렇구나. 아쉽다…. 그럼 그 사람이랑 잘 안 된 것 같으면 꼭! 저 소개해 주세요. 꼭이요.”
그녀는 뒤돌아 가면서도 계속해서 꼭이요, 잊으시면 안 돼요. 하며 검지로 자신을 거듭 가리켰다.
해영은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뚜껑을 덮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오히려 건우를 좋게 보고 꺼낸 말이니 고마운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전공 책 모서리를 돌돌 구겼다. 왜 미운 마음이 드는 거지. 그녀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우까지 미웠다.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건우였다. 그는 제 속도 모르고 머리에 띠를 두른 채 화이팅을 외치는 이모티콘이나 보내고 있었다. 해영은 멍한 얼굴로 그 멍청해 보이는 캐릭터를 바라보다가, 화가 난 햄스터 이모티콘을 보냈다. 창을 닫지 않고 기다린 건지,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
해영은 이를 악물고 글자를 꾹꾹 눌러 전송했다.
[잘못 눌렀어.]
***
사귀는 사람도 있었겠지?
건우는 주변에 사람도 많고 성격도 좋으니, 분명 인기도 많을 것이다. 사귀는 사람이 없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는 자잘한 스킨십이나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에도 능숙했다. 마치 많이 해본 사람처럼.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어느 쪽이든 건우와 손을 잡고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괴로웠다. 더 생각하다간 심술이 날 것 같았다. 해영은 고개를 가로로 털어냈다.
메시지를 안 읽네. 해영은 표시가 사라지지 않은 메시지 창을 내려다보다, 결국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나섰다. 건우의 수업이 한 시간 더 빨리 끝나는 날인데도 집에 같이 가겠다 우기더니, 끝났다는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전화도 걸어 봤지만 그 역시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수업이 있는 건물을 찾았다. 그리고 찾아간 곳에는, 빈 강의실 가운데에 혼자 팔을 베고 자고 있는 건우가 있었다.
해영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강의실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갔다. 기절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해영은 옆자리에 숨을 죽이고 앉아 그를 마주 보고 같은 자세로 책상 위에 누웠다. 그리고 눈앞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평소에는 이렇게 가까이, 마음껏 보기 힘드니까.
짧게 친 머리 아래로 훤히 드러난 눈썹은 짙고 모양이 예뻤다. 눈매가 조금 사납기는 해도 길고 잘생긴 눈이었다. 콧대도 곧고, 입술도.
‘저랑 입술 비빌 수 있어요?’
해영은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꾹 말아 물었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거지. 다른 곳, 다른 곳을 보자…. 해영이 애써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힘줄이 두드러진 커다란 손은 조금 거칠었지만 제 것과 다르게 믿음직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손을 마주 잡을 땐 잰 것처럼 딱 들어맞았는데, 마치 거푸집에 채워진 쇳물 같았다. 그는 어깨도 넓고 딴딴해서 품이 넓은 트레이닝 복을 입어도 어깨만큼은 빠듯하게 보였다. 집 앞에서 건우를 안았던 날을 떠올렸다. 어깨를 타고 목을 손으로 쓸었을 때의 단단한 느낌이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하나 부족한 곳이 없었다. 이런 애가 사귀었던 사람이 없을 리가 없다.
해영은 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라든가, 사람을 사귀는 것에 한해서 자신은 건우보다 훨씬 서툴고 무지했다. 새삼 연장자로서의 위신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건우가 낮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건가. 어, 얕게 찌푸린 눈 아래로 뺨 위에 떨어진 작은 속눈썹 하나가 눈에 띄었다. 끝이 조금 떠 있어서 그를 깨우지 않고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속눈썹의 끝을 손끝으로 잡는 순간이었다.
“아!”
탁 손을 붙잡혔다. 해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뭐야….”
낮게 깔린 목소리로 칭얼댄 건우가 해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잠이 덜 깬 듯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숨 막힐 듯 가라앉은 공기에 해영의 목울대가 작게 울렁였다.
그는 마치 확인을 하는 것처럼 쥐고 있던 손목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멍이 들지 않은 팔이었다. 하얀 손목 안쪽 살을 엄지로 쓸었다. 간지러워. 놔 달라 말하려는 찰나, 건우가 붙잡고 있던 손목을 입술로 가져갔다. 연하고 예민한 살갗에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건우야, 잠깐만…!”
해영은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떼어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러자 건우가 멍한 얼굴로 아,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선 곧바로 해영의 손목을 놓고 반대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였다.
“죄송해요. 꿈인 줄 알고.”
해영이 쿵쿵대는 가슴께를 손으로 부여잡고 힐문했다.
“아, 아, 아무리 꿈이라고 생각했어도 그렇지….”
숨을 빠르게 몰아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해영을 가만 내려다보던 건우가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끌어 올리고 말했다.
“더한 것도 많이 하는데, 꿈에서.”
물고 빨고. 건우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뱉은 말만으로도 이미 해영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축 처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괜히 메고 있는 가방끈을 정돈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파, 팔팔하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넘기려고 노력하는 게 귀여웠다. 그만 놀려야지. 건우는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어 뻐근해진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고 몸을 일으켰다.
“가요.”
***
“벌써 다섯 바퀴째야.”
건우는 헤어지기 싫은 티를 풀풀 풍겼다. ‘조금만 더’를 다섯 번이나 외치며 해영의 오피스텔 주변을 빙빙 돌았다.
“아, 진짜 가기 싫다.”
“오랜만에 다 모이는 거라며…. 가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
해영이 그를 살살 달랬다. 오늘은 오랜만에 둘째 누나와 매형까지 와서 건우의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라고 했다. 매형이야 말 그대로 오랜만에 보는 거라고 쳐도, 둘째 누나는 허구한 날 집에 놀러 오는데 굳이 날까지 잡아가며 밥을 먹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건우는 툴툴댔다.
그와 겨우 화해한 직후이니만큼,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은 해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저 때문에 건우가 가족 모임을 거르는 짓은 절대, 절대로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해영이 꾸준히 달래고 나서야 건우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맞다. 형한테 물어봤는데 선배 충전기 카페에 있대요. 다음에 만날 때 갖다 달라고 했는데, 혹시 급하세요?”
“아니야. 여분 있어서 괜찮아. 내가 가지러 가도 되는데…. 고마워.”
건우가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다시 마주 웃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영은 생각했다.
“아, 건우야. 이, 이거….”
해영이 가방끈 한쪽을 팔에서 빼내고 등에 있는 가방을 앞쪽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지퍼를 열어 그 안에서 쇼핑백 하나를 꺼내 건우에게 건넸다.
“어…. 티백이랑 향 피우는 그런 건데, 부, 불안하고 그럴 때 쓰면 좋대…. 차분해진대.”
말을 마친 해영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쇼핑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건우가 손을 뻗어 제가 건넨 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살핀 뒤 한쪽 팔로 안아 들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해영은 숨을 내뱉고 가방을 도로 잠갔다.
“감사해요.”
건우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해영이 어떤 마음으로 준비해 준 건지 알 것 같았다. 불안해했던 게 자기 때문인 줄은 생각도 못 하고 계속해서 이유를 물어 대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거 없어도 제 옆에 꼭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요.”
“응?”
해영이 가방을 등 뒤로 돌리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건우는 그 의문 섞인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팔을 뻗어 해영의 손을 꼭 잡았다.
“저는 이거면 돼요.”
그가 씨익 웃으며 맞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해영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건우가 소리 내 웃다가 손을 놓고 해영의 가방을 바로 해 주었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뺨을 검지 끝으로 톡 건드리며 말했다.
“저 진짜 갈게요.”
“아, 응….”
건우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쇼핑백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해영은 노트북 키보드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데스크 스탠드의 밝기를 1단으로 줄였다. 다시 과제를 이어 간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밝기를 3단으로 올렸다. 흰색은 빈칸이고 검은색은 글자요. 몇 글자 더 두드리던 해영이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지…. 큰일이네.”
허전했다. 건우가 제 앞에서 숨기지 않고 아쉬운 티를 팍팍 낸 후라 그런가. 보고 싶었다.
휴대폰이 짧게 두 번 진동했다. 해영이 그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건우였다. 속으로 혼자 생각하던 게 들킨 기분이었다. 손을 뻗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는 첫째 누나의 잔소리가 시작됐다는 말과 함께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해영은 작게 소리 내 웃고, 열심히 새겨들으라는 답장을 보냈다.
휴대폰을 도로 뒤집어 놓은 해영이 무의식적으로 손목 안쪽을 매만졌다. 건우가 잠결에 입술을 묻었던 바로 그 위치였다. 씻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책상에 앉아서도 쉴 새 없이 문질러 댔더니 피부가 발갛게 올라왔다.
꿈에서 더한 거를 했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요즘 애들이란. 건우 앞에서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더한 거라면 역시 이, 입술이라든가, 그런 거겠지? 해영은 손목을 매만지던 손을 무의식중에 제 입술 위로 가져갔다. 멍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반으로 접어 구기며 괴롭혔다. 과제를 해야 하는데 자꾸 머릿속에 불순한 생각이 끼어들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귀면 그런 것들을 하게 되는 건가?
손을 잡거나, 데이트를 하고, 연락을 자주 하는 건 지금도 하고 있었다. 사귄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진다고 한다면, 아마 그가 말했던 ‘더한 것들’이 되겠지.
책상 가장자리에 닿은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뛰었다. 손을 올려 옷 위로 툭툭 두드려도 보고,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도 봤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건우랑 그런 것들을 해도 괜찮은 건가? 그와 같이 있는 건 즐겁고 편했다. 놀리거나 짓궂은 장난을 칠 때는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아까 제 손목에 입술을 지분댔던 것도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과제를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해영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노트북 뚜껑을 덮고 스탠드를 껐다. 내일 아침에 하자….
***
“오늘도 안 읽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수업이 같은 시간에 끝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건우는 십 분이 넘도록 답장을 주지도,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수업이 늦게 끝나거나 그런 거겠지. 해영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눌렀다.
건우의 강의실에 가까워질수록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온몸을 예민하게 돌았다.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수업은 이미 끝난 지 오래처럼 보였고, 건우도 보이지 않았다. 길이 엇갈렸나. 곧바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이틀 연속으로 약속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는 건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막막하고 불안했다. 고작 이틀일 뿐인데. 매번 먼저 와서 기다려 주는 사람이라 그 변화가 더 크게 느껴졌다.
건우는 이런 것을 매일 하고 있었다.
기약 없이 기다리고, 미리 손을 내미는 행위들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해 주고 있던 것이다.
“어, 선배! 건우 형 찾으세요?”
건우가 없는 강의실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던 중,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규진이었다.
“안녕…. 응, 건우 어디 있어?”
“형 누구 전화 받고 튀어 나갔는데. 조금 됐어요. 십 분?”
십 분이면 제가 메시지를 보냈을 즈음이다.
“여자 친구 같던데.”
규진의 옆에 있던 남자가 피실피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규진이 기다렸다는 듯 손뼉까지 치며 말을 더했다.
“그치! 나도 그 생각함. 나갈 때 엄청 웃으면서 나가셨잖아. 형 그렇게 해맑게 웃으시는 거 처음 봤어. 백 퍼 여친일걸.”
“나 오면서 봤어. 여기 밑에서 형이랑 둘이 얘기하고 있는 거. 엄청 예쁘시던데.”
“대박…. 소개팅 다 거절하신 이유가, 와….”
휴대폰을 쥐고 있는 해영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누, 누나 아니야? 건우 누나 있는데….”
“에이, 아닐걸요? 그 여자분이 형한테 존댓말 하시는 거 들었는데.”
“미친, 연한가 봐.”
두 명은 해영의 굳은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흥분한 어조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 선배. 저기 앉아 계세요. 형 가방 안 들고 나간 거 보니까 금방 오실 거 같아요.”
강의실 문 앞에 서 있던 해영이 뒷걸음질했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고 싶지도,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피하는 거만 제발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건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힘겹게 말을 하던 얼굴도. 해영이 주먹을 꼭 쥐었다.
“나, 나 갈게…. 말해 줘서 고마워.”
해영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잡아타 1층을 눌렀다. 가방끈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무서웠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그에게 물어보는 것도. 그래도, 건우의 그런 얼굴은 다신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해영이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경영관 문과 가까운 곳에, 기둥에 살짝 가려져 있는 건우가 보였다. 꽤 멀리서도 단번에 그임을 알 수 있었다. 해영은 입술을 꾹 물고 가까이 다가갔다. 심장이 어제와는 다른 이유로 빠르게 뛰었다. 기둥 뒤가 드러날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곳에는 아까 애들이 말했던 것처럼 한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건우가 웃고 있었다.
“아….”
작게 낸 소리에 건우가 홱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물어보기는커녕, 다가가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발이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더는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해영이 몸을 돌렸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겁쟁이.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던 걸음이 다급한 마음에 뜀박질로 바뀌었다.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내달렸다. 건우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분명 내가 좋다고 말했는데.
눈에 보이는 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현재는 잘 쓰지 않는 작은 세미나실이었다. 서둘러 문을 잠그고 등을 기대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롯이 혼자였다.
세미나실은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불도 꺼져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정말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릎을 세워 가슴으로 끌어안아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필사적으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으….”
건우가 다른 사람에게 잘해 주고, 저와 했던 것처럼 손을 잡고, 안는 상상을 하니 속에서 뜨끈한 것이 자꾸만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턱이 쭈글쭈글해질 정도로 참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건우는 제가 좋다고 했다. 눈을 마주 보고 좋아한다고 말해 주던 모습을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를 따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 그럼 건우를 반만 갖게 되는 건가. 싫은데. 너무 싫은데…. 만약 그를 누군가와 반씩 나눠 가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거절할 수도 없이 그렇게 하게 될 것 같아서 더 속상했다.
해영은 손바닥 아래쪽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계속 닦아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곧 있으면 건우가 찾으러 올 것이다. 눈앞에서 대놓고 도망을 갔으니 화도 많이 났겠지. 그만 울어야 하는데. 축축해진 손바닥 대신 소매를 끌어 올려 양쪽 눈 위에 얹었다.
그때, 등을 기대고 있던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놀란 해영이 몸을 떼고 문손잡이를 올려다보았다. 단단히 잠긴 문고리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문 열어요.”
건우는 평소보다 배는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더니, 급기야 주먹으로 문을 쿵쿵 두드렸다.
“얼굴 보고 얘기해요.”
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는 어투였다. 해영이 주먹을 말아 쥐고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아, 안 보고 싶어….”
해영은 제가 뱉은 말에 되레 자신이 상처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되자마자 후회했지만, 이미 문밖에서 그 말을 들은 건우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였다.
“열쇠 가져오기 전에 문 열어요.”
화가 난 목소리에 해영의 몸이 얕게 움찔했다. 몸을 일으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달칵, 소리가 나자마자 위협적으로 문이 열렸다. 건우는 세미나실 안으로 몸을 들인 후 팔을 뒤로해 문을 잠갔다. 무서워. 겨우 멎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렀다. 건우가 문 옆으로 손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밝아진 시야에 서로의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건우의 얼굴은 예상대로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흐윽….”
그 매서운 눈을 마주하니,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화를 내야 하는 건 분명 저인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미운데 미워하고 싶지 않아 답답했다. 해영은 팔을 들어 눈물로 젖은 얼굴을 가리고 몸을 뒤로 물렸다.
건우가 손을 뻗어 해영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잡아 내렸다.
“하, 하지 마….”
건우는 조금 더 가까이 붙어 해영의 양 뺨을 움켜쥐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표정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손길에 해영이 바르작대던 것을 멈추었다. 건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영의 뒤를 쫓던 중, 때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규진을 마주쳤다. 그는 저를 보자마자 여자 친구니 뭐니 하는 소리를 지껄였고, 그제야 해영이 저를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도망친 이유를 알았다.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동안 제가 해영에게 내보였던 것들은? 그런 오해가 생겼다고 해도 제 앞에서 따져 묻는 게 아니라 또 피하고 도망갔다.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사이에 두고서 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에 속이 지끈거렸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열이 솟구치던 마음이,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보자마자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저 좀 그만 버리고 가요.”
건우가 괴롭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해영은 허벅지 옆으로 떨어트린 손을 꼭 쥐었다. 다신 보고 싶지 않았던, 그 표정이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고, 서운한 거 있어도 물어보고, 화나는 게 있어도 물어봐요. 소리 지르고 울고 화내도 되니까 뭐든 제 앞에서 하세요.”
해영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건우는 그 시간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을 속에서 말을 고르던 해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좋다고 했는데….”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엉망이었으나, 건우는 웃지 않았다.
“왜 여자 친구가 있어…? 내가 많이 좋다고 했는데….”
말하다 보니 또 속이 상했다. 그런 제 속도 모르고, 건우는 제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해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비틀고 팔을 뒤로 당겼다.
“너랑 소, 손잡기 싫어….”
건우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 자기 멋대로다. 저를 흔들어 놓은 것도, 다정하게 굴어서 매일 보고 싶게 만든 것도,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의지하게 만든 것도, 그래놓고 다른 소중한 사람을 만든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자기 마음대로였다.
“싫다고, 놔!”
그는 더 단단하게 붙잡았다. 해영은 끝내 얼굴도 가리지 못한 채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여자 친구 아니에요.”
건우가 잡고 있던 손을 올려 해영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몸부림치던 해영이 그대로 굳어 놀란 눈을 끔벅였다.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주륵 흘렀다. 건우는 문 옆에 내려 두었던 쇼핑백을 가져와 해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선배 충전기요. 카페 알바생 중에 여기 다니는 사람 있다고 해서 부탁했어요. 선배가 맛있다고 했던 것도 같이 몇 개 챙겨 달라고 했고. 이거 받으러 간 거예요.”
해영이 쇼핑백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안에는 제가 잃어버린 충전기와 그날 먹었던 조각 케이크 두 개, 다쿠아즈까지 들어 있었다. 입술을 꾹 말아 물다가 아까에 비해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 웃기도 했는데…. 그 사람 앞에서.”
“이거 줄 생각에 좋아서 웃은 거고.”
“…….”
해영은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창피해.
“울보야, 진짜.”
건우는 픽 웃으면서 해영의 뒷목을 붙잡고 소매로 뺨을 벅벅 문질러 닦아 주었다.
“제가 선배한테만 잘해 줬으면 좋겠어요?”
해영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손잡고 그러면 싫어요?”
건우가 해영의 손을 잡고 물었다. 해영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왜요?”
“…어?”
“나는 선배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 말에 해영은 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건우에게 다른 사람과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 말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었다. 초조해진 해영이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답을 내주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본 채 해영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해영이 한 발짝 더 다가오기를. 휩쓸려서가 아닌 자신의 입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아마, 해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기다림일 것이다.
해영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내내 혼자서 가늠하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였다.
“조, 좋아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처음 뱉는 고백은 멋있지도, 근사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평생 놀림거리로 삼을 만큼 엉망이었지만 무르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잡히지 않은 손을 올려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을 보탰다.
“흐, 그러니까 나랑만 해….”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제 속을 실체 없이 몽글몽글 간질이던 것이 모양을 갖추고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건우가 좋았다.
차건우라는 사람이 좋고 호감인 것을 넘어, 독차지하고 싶은 못된 마음마저 들 정도로 좋아한다. 누군가와 건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건우는 용기를 내 준 그 작은 어깨를 당겨 품에 안았다.
“저도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선배도 저랑만 해야 해요.”
“하, 할 사람도 없어….”
“그래도.”
“알겠어….”
남들은 좋아한다, 사귀자, 정해진 순서처럼 순탄하게 이어 갈지 몰라도, 해영에게 그 말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안다. 그러기에 더더욱 고맙고 애틋했다. 해영은 건우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꼈다. 그의 옷이 눈물로 젖을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주 좋아한다는 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울컥하는 걸까. 건우는 등을 토닥여 주다 해영의 뒤통수를 큼지막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엄청 우네. 나랑 사귀는 게 울 정도로 싫은가.”
건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해영이 놀라 몸을 크게 튀며 고개를 떼어냈다.
“아, 아니야. 좋아….”
무르자고 할까 봐 힘껏 부정했다. 말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 꼭 모아 두었던 손까지 펼쳐 흔들었다.
건우의 손이 뺨에 닿았다. 실컷 운 뒤라 뜨끈하게 열이 오른 볼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해영이 몸을 움츠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음기 하나 없는 눈을 마주쳤을 때, 해영은 다가올 일을 직감했다. 긴장으로 목울대가 작게 울렁였다. 건우의 손바닥에도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을 하고서.
해영이 용기 내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의 옷자락을 말아 쥔 채로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말캉한 것 위로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접촉이었다.
“아….”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해영이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푹 떨구었을 때, 곧바로 뺨이 붙들렸다.
건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먼저 닿았다. 살살 비비자 간지러운 느낌에 해영이 작게 웃었다. 그 호선을 그린 입술 위로 쪽, 입을 맞췄다. 해영이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입맞춤이었다. 쪽, 쪽, 연달아 입을 맞춘 건우는 해영의 아랫입술을 입술 사이에 머금었다. 약하게 빨아올리니, 벌벌 떨면서도 용케 피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버티는 얼굴이 보였다. 속눈썹이 파르르 잘게 떨린다. 건우는 해영의 눈물점을 엄지로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예쁘다. 품 안 가득 안고 입을 맞추는 와중에도 불안할 정도로 예뻤다. 먼저 입술을 부딪친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행위 자체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서툴렀지만, 그가 먼저 용기 내 줬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건우는 다시 입술을 겹치면서 소유욕이 덕지덕지 묻은 손길로 그의 뺨과 목덜미, 어깨 따위를 애무하듯 쓰다듬었다.
건우가 몸을 기울였다. 그 무게감에 해영이 휘청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해영의 등 뒤에 놓인 책상의 위치를 가늠한 건우가 거침없이 그를 밀어붙였다. 당황한 해영이 손을 올려 건우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해영의 엉덩이에 툭 하고 뭔가 걸리는 것과 동시에, 건우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책상 위로 들어 앉혔다. 그리고 해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아 다시 입술을 마주 댔다. 눈높이가 맞춰지자 해영은 더 이상 힘겹게 고개를 젖힐 필요가 없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먹히는 와중에도, 해영은 턱에 힘을 주고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 역시 귀엽긴 했으나, 그가 먼저 불을 붙인 이상 이 정도로 끝내 줄 생각은 없었다.
쪽쪽, 쪼듯이 입을 맞추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를 혀를 내어 핥아 올리니, 해영이 눈에 띄게 움찔한다. 건우가 손을 올려 해영의 아랫입술 밑 움푹 팬 곳에 엄지를 올려놓고 아래로 약하게 내리눌렀다. 그러자 작은 입술이 저항 없이 뻐끔 벌어진다. 건우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연하디연한 입술 안쪽을 베어 물면서, 느릿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흐….”
낯선 이물감에, 해영이 다급히 건우의 가슴팍 위로 손을 얹고 밀어냈다. 그 떨리는 손을 가만 내려다보던 건우는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몸을 가까이 겹쳤다.
동그란 뒤통수를 단단히 받쳐 잡고 그 작고 뜨거운 입 안을 천천히 헤집었다. 입천장을 살살 비벼 달래다, 이리저리 도망가는 혀와 한데 얽혔다. 심하게 울고 난 뒤라 예민해진 점막을 문질렀다. 해영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며 응, 하고 앓는 소리가 샜다. 건우는 달큰한 숨과 신음을 모두 제 안으로 집어삼켰다. 자극을 견디다 못해 비집고 나온 눈물이 발그레한 뺨을 타고 흘렀다. 밀어내던 손은 어느새 옷자락을 부여잡고 떨고 있었다. 건우가 입술을 살짝 떼어 내 다시 처음처럼 촉촉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을 내려 떨고 있는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해영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제야 자신이 아는, 익숙한 범주 내의 접촉이었다.
건우가 한 번 더 뽀뽀하고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괜찮아요?”
해영은 달뜬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럼 조금만 더 할게요.”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해영이 무어라 답할 틈도 주지 않고, 헤벌어진 입술 사이를 다시 파고들었다. 손이 붙잡혀 있으니 밀어낼 수가 없고, 등 뒤가 비어 있어 몸을 물릴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그의 침입을 받아내던 해영이 눈을 도로 감았다.
건우는 아까보다 갈급한 몸짓으로 열 오른 덩어리를 해영의 굳어 있는 혀 위로 겹쳐 비볐다. 치열을 훑고 혀 아래쪽을 쑤셨다. 여전히 망설임, 혹은 혼란이 남아 있는 혀와 입술을 번갈아 빨았다. 해영이 다리를 오므려 건우의 몸을 조였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매달렸다. 공중에 붕 뜬 발가락이 신발 안에서 잔뜩 오므라들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오직 그의 움직임에 맞춰 겨우 혀를 굴리고 받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고요한 세미나실 안에 질척이는 소리만이 적나라하게 울렸다.
“하아, 응….”
해영이 부르르 떨며 벌어지는 입술 새로 얕은 신음을 흘렸다. 숨소리가 급해지고, 열이 올랐다. 건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목구멍까지 찔러 넣을 기세로 밀어 넣었을 때, 참다못한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입술이 떼어졌다.
“수, 숨이….”
건우는 해영의 양 뺨을 한손에 쥐고 정면으로 돌린 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작은 입술에 쪽쪽 연달아 입을 맞췄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던 것이 아쉬운 사람처럼 굴었다. 해영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애원했다.
“거, 건우야….”
숨이 막히니 그만하고 싶다는 의미였으나, 정작 이름이 불린 사람은 눈이 돌아 전달자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건우가 잇새로 욕을 뇌까렸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