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호조사 (2) (6/21)

선호조사 (2)

어둑해진 산책로를 손을 잡고 걸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맞춰 건우가 이어진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발걸음도 다른 날보다 가벼워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해영이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었다. 입술이 양옆으로 당겨지니 아까까지 물고 빨았던 곳에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노는 손을 올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옆에서 시선이 따라붙었다. 해영이 서둘러 손을 내렸다.

“입술 부었다.”

건우가 해영의 통통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픽 웃었다. 해영이 힐긋 흘기고 황급히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건우의 시선이 떨어진 후였다.

“너 때문이잖아….”

“네, 저 때문이에요.”

건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탓하는 말에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곧바로 수긍하며 실실거리던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해영의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 내렸다. 불긋하게 물든 뺨이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다시 거리를 벌리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엉겁결에 기습을 당한 해영이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말아 입안으로 꼭꼭 숨겼다. 건우는 상관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인중과 턱 위에 뽀뽀를 퍼부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피하던 해영이 참다못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그만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즘 어린애들은 당최 부끄러운 걸 모르는 건지. 해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는 하지 마….”

“안에서는 해도 돼요?”

참을 수는 없는 걸까. 해영은 어렸을 때부터 배움이 늦었다. 말도, 공부도, 새로운 것을 익히는 것도. 누군가와 입술을 맞대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익숙해질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들이대는 통에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차근차근 해도 될 텐데, 건우는 적립해 둔 사람처럼 해댔다.

“조금만 참아 봐.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먼저 해 놓고.”

해영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잡고 있던 손을 털어 내듯 놓고 앞서 걸었다. 분명 제가 먼저 입을 맞춘 건 맞지만, 그냥 살짝 대려고 했던 거다. 그렇게 잡아먹을 정도로는….

“같이 가요.”

건우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쫓으며 말했다. 애원하는 어투였으나,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큰 보폭으로 해영을 금세 따라잡은 건우가 뒤에서 슬쩍 손을 잡았다. 해영은 움찔하면서도 놓지 않았다.

“놀리지 마.”

해영이 불퉁한 얼굴로 읊조렸다. 건우는 답을 하는 대신 코끝으로 웃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편의점에 들러 딱히 먹고 싶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사고, 궁금하지 않은 꽃을 구경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알지도 못하는 별자리 따위를 추측하기도 했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더디게 걸었지만 야속하게도 오피스텔 앞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짧았다. 조금 더 먼 곳에 집을 구할 걸 그랬나. 해영은 학교와 가깝게 구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 어….”

오피스텔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맞잡은 손을 문지르며 시간을 끌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특별한 날에도 멋있는 말 한마디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속이 상했다. 해영의 어깨가 축 아래로 늘어졌다.

“조심해서 가….”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몸을 돌리는데, 건우가 팔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널찍한 품 안에 폭 안겼다. 해영은 눈동자를 굴리며 골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팔을 뻗어 등을 마주 안았다.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빈틈없이 꼭 들어맞았다. 쿵, 쿵, 거세게 뛰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등을 차분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이어진다.

“용기 내 줘서 고마워요.”

해영이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고마움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 오히려 제 쪽이었다. 제가 한 거라곤 줄곧 내밀어져 있던 손을 잡은 것뿐이니까.

목구멍이 턱 막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품 안에 코를 박고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모자란 표현에도 건우는 다 안다는 것처럼 샐쭉 웃으며 작은 머리통에 비 내리듯 입을 맞추었다. 상체를 살짝 떼어 내 해영의 양 뺨을 붙잡고 입술에도 한 번 더 가볍게 뽀뽀하고 나서야 몸을 완전히 놓아주었다.

“갈게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라며 그 자리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해영이 공동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발바닥에 껌이라도 붙은 것처럼 잘 떼어지지 않았다. 헤어지기 싫다. 문을 한 뼘쯤 열었을 때, 해영이 돌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자, 잠깐 들어왔다 갈래…?”

해영의 목울대가 너울거렸다. 건우는 의도를 파악하려는 사람처럼 해영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그냥 갈게요.”

“어?”

“조금 힘들어서.”

아, 해영이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마음이 내내 붕 떠서 잊고 있었다. 그에게 오늘 하루는 꽤 피곤한 날이었을 것이다. 화를 내고, 오해한 저를 달래 주고. 힘든 게 당연한데 건우에게 거절당할 줄은 생각도 못 해서인지 당황스러웠다.

해영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건우가, 되레 놀라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올려 해영의 턱을 감싸 쥐고 엄지로 입술 위를 슥 문질렀다. 닿은 곳이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참기 힘들다고요.”

“아….”

욕구가 담긴 손짓 하나에, 얼굴에서 서운한 빛이 물러났다.

“전화할게요.”

“응….”

해영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해영은 전화를 이렇게나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긴 시간 동안 할 말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도 신기했다. 대부분이 하루 이틀 지나면 생각나지 않을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지만,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건우라서인지 조금도 그 시간이 아깝거나 쓸모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전화를 끊게 두지 않았다. 조금만 더요, 십 분만 더요. 거절할 수도 없게 붙잡아 놓고 새 이야기를 꺼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해영이 옆으로 누워 귀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지금 몇 시야…?”

잠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시 반이요. 졸려요?

“으응, 자야 하는데….”

자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나 정신이 몽롱했다. 건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세요.

“응….”

해영이 웅얼거리듯 답했다. 눈은 이미 감은 지 오래였다. 끊어야 하는데. 양손이 이불 속에 포근하게 자리 잡아 흐트러트리기가 싫었다. 건우가 끊어 주겠지.

―아, 맞다. 내일 아침에요.

“…….”

―선배.

“…….”

―형.

건우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 해영은 답이 없었다. 건우는 그렇게 한참 동안 해영의 고른 숨소리를 듣다 그대로 잠들었다. 아침에 먼저 눈을 뜬 건 건우였다. 통화 시간이 10시간으로 찍혀 있는 휴대폰을 보고 실실거리며 웃다가, 해영이 일어나 기겁을 하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

추위보다 더위가 당연해진 계절에, 관계의 이름이 바뀌었다. 흔히 말하는 세상이 분홍색으로 보인다거나, 전에 없이 아름다워 보인다거나 하는 영화 같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접촉의 형태가 조금 더 다양해지고, 빈도가 높아졌을 뿐이다.

해영은 경영관 앞에 서서 문을 주시했다. 나올 때가 됐는데. 한 번씩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때마다 해영은 눈을 바삐 굴리며 건우를 찾았다. 그때, 머리 위로 딱딱한 것이 얹어졌다.

“아….”

해영이 놀라 목을 자라처럼 수그렸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다가온 건우가 해영의 정수리에 턱을 얹고 실실 웃고 있었다. 해영이 홱 몸을 돌리자, 그제야 턱을 떼어 냈다. 키 크다고 유세는. 해영이 눈을 홉뜨며 입을 비죽거렸다.

“왜 뒤에서 와? 너 설마 때, 땡땡이쳤어?”

해영이 매서운 얼굴로 물었다.

“아, 진짜. 아니에요. 이거 사러 갔다 왔어요. 교수님이 자기 오늘 어디 갈 데 있다고 일찍 끝내 줬어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건우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전에도 종종 사다 준 적 있는 카페의 디저트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해영의 눈이 반짝였다. 건우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씩 웃다가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해영은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혼을 내놓고 단 걸 받자마자 좋아하다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해영은 멋쩍은 기분에 괜히 종이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이거 먹을 시간은 되죠?”

“응, 같이 먹자.”

둘은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건물 뒤편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해영은 기대감 섞인 얼굴로 무릎 위에 올려 둔 디저트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안에는 색이 다른 마카롱 다섯 개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새콤한 거 빼고 골고루 달라고 했어요.”

해영은 그중 갈색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초콜릿 맛이겠지? 바로 입에 넣어 버리고 싶을 만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꾹 참고 건우에게 비닐을 까서 내밀었다. 그가 고개를 젓는 걸 보고 나서야 피실피실 웃으며 마카롱을 입으로 가져가 베어 물었다. 초콜릿 향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맛있어.

“오늘 발표한다던 건 잘했어요?”

건우가 손을 뻗어 해영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주며 물었다. 황급히 손을 올려 제 입가를 점검하듯 더듬은 해영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답했다.

“응…. 시간 없어서 많이 못 본 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잘했네.”

마치 연장자가 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 귀는 사이라서 그런가. 해영은 반쯤 남은 마카롱을 입안으로 욱여넣고 생각을 거두었다. 정의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계속 떠올리다 보면 의식하게 될 것 같았다.

건우는 두 뺨 가득 마카롱을 물고 우물대는 해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아예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제가 이렇게 인내심이 바닥인 인간이었나. 당장이라도 품에 넣고 입술을 비비고 싶었다. 땅에 붙은 발뒤꿈치가 들썩였다.

먹을 만큼 먹은 건지 마카롱 박스를 도로 닫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가 다시 해영의 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눈이 마주쳤다. 해영이 심각한 얼굴로 손을 올려 건우의 귀로 가져갔다.

“너 귀가 터질 거 같아….”

“아, 진짜.”

건우가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허공에 붕 뜬 손을 멍하니 보던 해영이 엉덩이를 움직여 벤치 맨 끝까지 밀려난 건우의 옆으로 찰싹 붙었다.

“어디 아파?”

열이 나나 싶어 이번에는 이마를 짚으려던 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우에 의해 내쳐졌다. 두 번이나 거부당한 해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래….”

피하려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는데. 건우가 짧게 후회했다.

“뽀뽀, 하고 싶다고요. 자꾸 만지면.”

“뽀뽀….”

“밖에서는 하지 말라면서요.”

“아….”

해영이 그제야 손을 거두고 제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부탁한 것을 지키려 노력해 주는 건우가 고맙다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에 부끄러워졌다. 해영이 다시 벤치 반대편으로 몸을 옮겼다.

건우는 그가 비워 준 자리에 털썩 앉아 다리를 달달 떨었다. 공기가 어색하게 돌았다. 이런 건 딱 질색인데. 해영이 전과 다르게 저를 의식하는 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그건 이쪽 상태가 멀쩡할 때의 이야기였다. 둘 다 의식하고 있으니 숨이 막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만지지도 못하고. 건우가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주말에요.”

해영이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집에서 영화 볼래요?”

“영화?”

“네. 밖은 덥잖아요. 제가 맛있는 것도 해드리고 편하게 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응?”

흑심을 숨기려 이것저것 덮은 것들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왜 계속 되묻지. 별로인가. 아니면 영화가 목적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톡톡, 초조하게 허벅지를 두드렸다.

“무슨 소리야….”

해영이 미간을 좁히며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험공부 해야지.”

그 말에 건우는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사귀자마자 시험 기간이라니.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영화 대신 공부라도 하자고 할까 생각하다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공부가 목적도 아니면서 해영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은 그를 귀찮게 할 뿐이었다. 도움이 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방해하는 애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럼… 주말에는 각자 공부해요.”

건우는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했다. 해영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그 표정을 빤히 살폈다. 영화를 보고, 놀자고 말하던 조금 전의 얼굴과는 확연히 달랐다. 해영은 말을 좀 더 부드럽게 할걸, 하고 후회했다.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할 일이 많은 것도 맞고, 대책 없이 놀 생각부터 하는 건우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조금 더 나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학교 선후배 관계가 아닌 애인 사이니까. 해영은 스스로 벌을 주듯 엄지손톱으로 검지 옆 살갗을 꾹꾹 눌렀다. 한참 동안 손가락을 괴롭히다가, 여전히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건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이 할래…?”

홱 고개를 쳐든 건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해영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여, 영화는 다음에 시험 끝나고 보고, 우리 집에서 같이 공부하는 건 괜찮을 거 같은데….”

건우는 해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거절해야 한다. 방해하는 애인은 죽어도….

“싫어…?”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눈을 맞추며 재차 물었다.

“…좋아요.”

***

평소 공부와 척을 지고 사는 차건우가 공부 루틴이나 패턴이 있을 리 없었다. 건우는 해영이 평소 하는 대로 두 시간에 10분씩 쉬는 것을 따랐다. 어른스럽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고 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영화 한 편 보면 금세 사라지는 두 시간이 오늘따라 영겁처럼 느껴졌다. 10분은 또 얼마나 짧은지, 숨 한 번 고르고 나면 순식간에 증발했다.

해영은 공부할 때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제 쪽은 보지도 않고 집중하는 그 무심한 얼굴에,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훅 열이 올랐다. 아랫배가 뻐근했다. 저를 봐도 꼴리고, 안 봐도 꼴리고. 이런 게 정상적인 욕구일 리 없지. 건우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무릎이 덜덜 떨렸다.

노트북이 고장 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책으로 공부하겠지. 시험이 미뤄졌으면 좋겠다. 공부할 시간 늘어났다고 좋아할지도 몰라. 학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건우는 온갖 이뤄질 리 없는 바람들을 주문이라도 외듯 속으로 되뇌며 건우가 해영의 노트북 덮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해영은 그 눈빛에 흠칫 놀라 고개를 쭉 내밀어 제 노트북 덮개를 살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뭐 묻었어? 왜 자꾸 봐….”

“아니에요.”

건우는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집중하던 해영이 노트북 화면 상단을 확인하더니,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몸을 뒤로 쭉 뺐다. 두 시간이 지난 것이다. 건우는 그것을 신호 삼아 책상 위로 엎어졌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두 시간을 내리 하고 나면 해영이 주는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배 안 고파? 뭐 먹을래?”

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건우는 아무 말 없이 상체를 일으키고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해영의 새끼손가락 끝을 지긋이 잡자, 그가 우뚝 멈춰 선다. 손가락을 살살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뺨을 내밀었다. 해영이 의도를 알아채고 쭈뼛대며 가까이 다가온다. 옆에 천천히 무릎을 대고 앉아 내밀어진 뺨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그대로 다시 일어나려는 것을, 이번에는 허리에 팔을 감아 붙잡았다.

“저 힘들어요.”

약간의 어리광과 함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한 번 더 훅 당겼다. 해영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군말 없이 안겨 온다.

“고생했어….”

어리숙하게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이 좋았다. 응석을 부리면 부리는 대로 죄다 받아 주니, 버릇이 나빠지는 게 아닌가. 약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제가 이러는 것은 모두 그가 사랑스럽기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책임을 떠넘긴다. 허리를 고쳐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살갗 아래로 둥둥 울리는 박동이 입술로 전해진다.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입술을 비볐다.

“가, 간지러워….”

단단한 팔 안에 꼼짝없이 갇힌 해영이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대며 몸을 비틀었다. 역효과였다. 그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건우는 더 조급하고 안달이 났다.

해영은 지금의 속도도 버거워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건우는 날이 갈수록 기갈에 허덕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손에 쥐고 품에 안아도 모자라다. 건우가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딱 아파하지 않을 정도로만. 목에 입술을 지분대며 천천히 올랐다. 길이라도 트는 것처럼 빈 곳 없이 입을 맞췄다. 혀를 내어 약하게 빨아올리니 몸이 전에 없이 크게 튀었다.

“잠깐, 만….”

건우가 해영의 턱에 입을 맞추며 시선을 마주했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망울이 촉촉하다. 조금 더 올라가 아까 해영이 해 주었던 것처럼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입을 벌려 입술 사이에 뺨을 가득 물었다. 장난스럽게 갉작대며 보드라운 살을 간질이자, 해영이 눈을 둥글게 휜 채 숨소리처럼 웃었다.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눈은 접어 웃을 때 더 도드라졌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울리고 싶은 눈이었다.

숨소리부터 웃음소리까지 죄다 씹어 삼키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품 안에서 꼼질대는 몸도, 제 어깻죽지를 부여잡은 손도, 웃을 때마다 들썩이는 빗장뼈도. 그에게 이로울 리 없는 시커먼 소유욕이 머리 위로 들이부어진다. 호선을 그린 입술 위로 연달아 입을 맞추다, 턱을 벌려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갑작스레 바뀐 공기에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 해 봤다고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진다. 애태우듯 애꿎은 주변에 입을 맞추니, 의아한지 눈이 느릿하게 뜨인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 닿았을 때, 치아 끝을 건드리며 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조금 아까 먹은 사과 주스 맛이 났다.

“응….”

해영은 입이 작았다. 조금만 깊게 입을 맞춰도 입안이 빠듯하게 들어찼다. 움찔대는 작은 혀와 한데 엉켜 비볐다. 젖은 소리에 방 안이 눅눅했다. 어깨를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조금만 더. 허리를 당기니 반동에 의해 해영의 어깨가 뒤로 무너진다.

건우가 손을 올려 해영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감싸 안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툭, 바닥에 등을 댄 해영의 위로 몸을 겹쳤다. 당황으로 굳어버린 혀를 사탕이라도 되는 양 쪽쪽 빨다가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허리를 더듬었다.

“흐으….”

해영이 다급하게 건우의 손을 붙들었다. 건우는 고집부리지 않고 손을 거둬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재차 입을 맞추자, 경계하듯 아래를 힐끔힐끔 살핀다. 아직 거기까진 싫은 건가.

억지로 밀어붙여서 무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해영이 준비된 곳까지, 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곳까지 열심히 맛볼 뿐이었다.

“하…. 시, 십 분 지난 거 같은-.”

건우는 해영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입술을 다시 부딪쳤다. 벗어나길 포기한 해영이 건우의 등으로 손을 뻗어 날개뼈 부근을 꼭 부여잡았다. 떨어질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코알라 같았다. 저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붙들고 있는 몸짓에 아래에 열이 올랐다.

“으응, 아….”

끙끙 앓는 소리가 건우의 입안으로 삼켜진다. 제 아래에서 헐떡이는 몸을 발라 먹을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제 것과 마찬가지로 경도를 더해가는 것에 무릎이 툭 닿자, 등을 붙든 손이 티가 나게 벌벌 떨렸다. 아, 일순간 정신이 든 사람처럼 모든 움직임을 멈춘 건우가 몸을 물렸다.

“흐….”

해영이 몸을 잘게 떨었다. 목소리 끝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괜찮아요?”

아까처럼 거부하지 않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해영의 등 밑으로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뻗어 건우의 목을 가득 끌어안았다. 건우는 여전히 잔떨림이 남아 있는 등을 달래듯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죄송해요….”

“아, 아니야….”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다. 싫은 게 아닌데 오해하게 만든 것 같아 얼른 목을 끌어안았다. 제 신체 변화가 낯설었다. 건우가 알아채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보거나 놀릴 게 분명했다. 입술 몇 번 문댔다고 이렇게 되다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해영은 건우의 어깨에 이마를 꾹 눌렀다. 창피해.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이니 떨림은 금세 잦아들었다. 건우는 옆 머리통에 입을 맞추다 해영의 어깨를 감싸 잡고 살짝 떼어 냈다. 얼굴을 살피기 위함이었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양 뺨을 감싸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살살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하는 모양이 화가 난 것보다는 혼란스러운 모습과 닮아 있었다. 다행이다. 건우는 이마에 입술을 꾹 찍으며 재차 사과했다.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

싫지 않았으니 사과할 일이 아닌데. 해영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건우는 그제야 씩 웃더니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가져다주었다. 목이 마른 건 어떻게 알았지. 해영은 컵을 손으로 붙들고 입술을 축였다. 건우의 노트북 화면으로 눈이 향했다. 약속했던 쉬는 시간보다 이십 분이나 더 지나 있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짧게 뽀뽀를 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키스는 곤란했다. 다 끝난 지금까지도 온몸이 바닥에서 붕 떠 있는 것처럼 정신이 없고 두근거렸다. 하는 시간이 뽀뽀보다 길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나, 행위를 할 때만 이러는 게 아니라 그 이후까지 증상이 이어지니 공부할 때 집중하지 못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한숨을 폭 내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키… 스는 안 하고 싶어….”

건우가 충격받은 얼굴로 해영을 응시했다. 고장 난 사람처럼 굳어 있다가 겨우 뱉은 말은 끝이 조금 떨렸다.

“그 정도로 싫었어요…?”

“아, 아니….”

해영이 손바닥을 펼쳐 휘적이며 부정했다.

“키… 스하면 너무 좋아서 집중이 안 될 것 같아서…. 시험 끝날 때까지만 안 하고 싶어. 아, 뽀뽀는 괜찮아.”

건우는 혹시라도 제가 오해할까, 열심히 설명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저와 키스하는 게 너무 좋다니 안도하면서도, 시험 끝날 때까지 하지 말자는 말에 기분이 도로 내려앉았다. 그래도 딱 잘라 하고 싶지 않다는 걸 제 욕심 채우자고 고집부릴 수는 없으니까.

“…알았어요. 참아 볼게요.”

“응, 고마워.”

해영이 눈을 접어 웃었다. 건우가 아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곳엔 실컷 물고 빨아 놓은 입술이 축축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

“뽀뽀도 안 했으면 좋겠어….”

“뽀뽀도요?”

“응….”

건우는 쥐고 있던 포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선배는 무슨 그런 말을 돈가스 먹는 중에 해요?”

“계속 생각해 봤는데, 너는 뽀뽀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키스를 금지했더니, 건우는 뽀뽀를 키스하는 시간만큼 해댔다. 처음에는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가 싶어 엄한 얼굴로 경고도 줘 봤지만, 자제하는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입을 맞추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니, 아예 원천을 봉쇄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말을 꺼낸 장소가 조금 적합하지 않기는 하지만, 학교는 듣는 귀가 많았고 지금 이 가게에 손님은 건우와 해영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말을 하지 않으면 이따가 또 뽀뽀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

“나, 나도 하고 싶은데 참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건우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많이 섭섭한 눈치였지만, 그건 해영도 마찬가지였다. 건우가 웃으면서 입을 맞춰 주는 게 좋았다. 제가 더없이 소중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입 맞추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얼굴로 쉴 새 없이 퍼부어 대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당장의 쾌락을 위해 나중까지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기말고사 기간까지 일주일을 남겨 두고 있었다. 시험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약 이 주. 이 주만 참고 그 뒤에 실컷 하면 된다. 조금 참는다고 해서 입술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끝나고 많이 하자. 알았지?”

건우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일수를 헤아렸다. 뽀뽀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이 주를 뽀뽀 한번 못하고 참는다는 게 가능하긴 한가. 사실 저랑 입술을 비비는 게 좋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고, 그냥 뽀뽀가 싫어서 시험을 핑계로 둘러대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는 하루만 빼먹어도 갈증이 나 죽을 것 같은데 이 주 동안 하지 말자는 말을 저렇게 쉽게 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주나 참아야 하는데요.”

건우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댔다.

“응…. 힘들까?”

해영은 마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라고 써 놓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얼굴에 대고 어떻게 못 하겠다고 말을 하냐. 건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잘 참고 시험도 잘 보면, 어…. 소, 소원 하나 들어줄게.”

소원. 그 말에 건우가 고개를 단숨에 쳐들었다. 해영은 아이 앞에 장난감이라도 흔드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건우의 머릿속엔 온갖 난잡한 소원들이 가득했다.

“소원이요?”

“응. 먹고 싶은 거라든가, 갖고 싶은 거라든가.”

갖고 싶은 거고 나발이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잘 본 기준이 뭔데요?”

전에 없이 의욕을 보이는 모습에 해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건우처럼 앞만 보고 가는 성격은 목표를 만들어 주는 게 답인 모양이라고, 해영은 생각했다. 건우의 입장에서 잘 본 성적이 어느 정도일지 고민했다.

“음…. B+?”

“하아….”

“그, 그럼 그냥 B.”

“알겠어요. 약속한 거예요, 소원.”

건우가 거듭 확인했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대체 무슨 소원이기에 그러지.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소원 뭐 하게?”

“비밀이에요.”

건우의 시커먼 눈동자가 일순간 반짝였다. 어쩐지 조금 무서워진 해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좋아했으면 됐지, 뭐.

***

따로 공부하기로 한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해영이 눈앞에 있으면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혹여나 실수로 입을 댈까 다른 스킨십도 최대한 자제하려다 보니 신경이 온통 애먼 곳에 쏠렸다. 보다 못한 해영이 각자 공부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건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서운한 티를 낼 것도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예상은 했지만 전처럼 자주 보지 못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시간이 맞으면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었고, 그마저도 어려울 땐 커피를 핑계 삼아 스치듯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

“형, 오늘도 도서관 가세요?”

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엉.”

“벼락치기 스타일이시구나. 시험 직전에 빡 집중하는 그런. 전 벼락치기 진짜 못 하겠어요. 체력이 바닥이라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간절해져 봐.”

제 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규진의 옆을 미련 없이 스쳐 지나갔다.

차건우는 탐나는 게 생기면 어떻게든 이루고야 마는 다분히 목표지향적인 인간이다. 주변은 물론이고, 몸 상태까지 제쳐두고 몰두하곤 했다. 재수할 때도 코피를 몇 번이나 쏟곤 했으니까.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기간이 짧아 몸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잠을 줄이고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시험 기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하지 않은 값을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비집고 나오는 하품을 찍 하며 강의실 문을 나선 순간이었다.

“…우야.”

건우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환청인가.

“건우야….”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했다. 작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며 근원을 찾았다. 강의실 옆 코너에서 해영이 고개를 내밀고 속삭이듯 저를 부르고 있었다. 애처로운 눈으로 이쪽을 초조하게 보던 그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옆으로 슥 사라졌다.

온다는 말도 없이.

뜻밖의 선물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뒤 이어 나오던 규진과 애들에게 대충 인사하고, 해영이 몸을 숨긴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서리를 돌자 손에 무언가를 꼭 쥔 채 흠칫 놀란 해영이 고개를 쳐들었다. 건우인 걸 확인하자 안도하듯 숨을 폭 내쉬었다.

“왜 숨어 있어요?”

건우가 해영을 마주 보고 서서 벽에 어깨와 고개를 툭 기대며 물었다. 그 덕에 건우의 등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해영의 몸이 완전히 가려질 수 있었다.

“마주치기 좀 그렇단 말이야.”

“애들이요?”

해영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곤 말을 이었다.

“이제 조, 조심해야 하는 사이니까…. 사람들 눈 같은 거.”

말해 놓고도 쑥스러운 듯 시선을 옆으로 던지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본 건우가 씩 웃었다. 마음 같아선, 조심해야 하는 사이가 대체 어떤 사이냐고 짓궂게 캐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잠깐의 시간조차 소중해서 삐치거나 화난 얼굴을 보는 걸로 낭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발갛게 익은 얼굴이나 열심히 눈에 담았다.

그때, 뒤로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해영이 황급히 몸을 돌려 벽을 보고 섰다. 얼굴을 가리려는 것 같은데, 이게 더 수상해 보인다는 걸 알까. 건우가 픽 웃으며 손을 올려 해영의 뒷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비비 꼬았다. 해영이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툭 쳐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고집스럽게 만졌다. 밥 같이 못 먹는다기에 못 볼 줄 알았는데.

뒤로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 갔어요.”

해영이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쥐여진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건우가 아래에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툭 떨어진 건 반으로 구겨진 홍삼 스틱이었다.

“저 그 정도로 피곤해 보여요?”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요즘 잠을 너무 못 자잖아.”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부는 서로 시간이 날 때마다, 혹은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톡을 남겨 두는 걸로 대신했다. 특히 자고 일어났을 때나 자기 전에는 꼭 보고하듯 잘 잤냐, 잘 자라와 같은 내용을 주고받았는데, 메시지를 받은 시간으로 보건대 건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해영보다 훨씬 늦게 자고 더 빨리 일어나는 것 같았다. 줄어든 수면 시간에 건강이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쭙쭙, 건우는 지체 없이 스틱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 끝부분부터 손으로 밀어 남김없이 빨아 넘겼다.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틱이 납작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먹기 싫다고 할까 봐 열심히 외워온 효능을 설명해 줄 틈도 주지 않았다. 저거 엄청 쓰던데 잘 먹네. 해영은 서둘러 주머니에서 가지고 온 초콜릿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서 내밀었다. 초콜릿까지 야무지게 입에 문 건우가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하듯 기울였다.

“아, 힘 난다.”

홍삼의 효과는 모르겠고, 해영이 챙겨 줬다는 사실에 힘이 났다. 해영이 뿌듯한 얼굴로 웃더니 등에 맨 가방을 앞으로 가져와 지퍼를 열었다.

“그러면 이것도 먹어.”

그 안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눈 영양제와 종합 비타민이었다. 건우는 그것을 한 손에 받아 들고 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해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역시 애인밖에 없다.”

***

빼곡한 활자와 가지런한 필기를 읽어내리던 건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도서관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둑했다.

이틀째 해영을 보지 못했다. 어제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저녁에 잠깐 통화를 한 게 전부였다. 공부가 좆같은 건 둘째 치고, 이러다 보고 싶어서 포기하는 거 아닌가. 휴대폰을 꺼내 남은 날짜를 세었다. 내일부터 시험이니까 일주일만 더 버티면 된다. 테이블 위로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음으로 해 둔 휴대폰 상단에 메시지 알림이 반짝였다. 해영이었다. 집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건우는 이모티콘 창에서 힘없이 축 늘어진 캐릭터를 눌러 전송했다. 화면을 켜 놓고 있던 건지, 곧바로 표시가 사라졌다.

[힘들지]

[홍삼 갖다줄까?]

홍삼 되게 좋아하네. 건우가 스러지듯 책상 위로 엎어지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한 손으로 툭툭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홍삼 말고 선배가 모자라요 ㅠㅠ]

이번 역시 바로 표시가 사라졌다. 그러나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일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록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새 메시지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징징댔나. 겨우 이 정도 힘든 걸로 우는 소리를 한 게 한심해 보였나. 변명이라도 덧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나올 수 있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디로요?]

[도서관 앞에]

건우가 다급하게 일어나 도서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동문이 열리자 미약한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초여름의 시원한 밤공기가 훅 끼쳤다. 그리고 건물 앞 기둥에 서서 저를 기다리는 해영이 있었다.

“선배.”

건우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그러나 왜인지, 해영은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더니 건우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이, 이리 와 봐. 빨리.”

제 말에 달려와 준 거라고 하기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덜컥 걱정이 들었다. 덩달아 표정을 굳힌 건우가 해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는 건물 뒤쪽에 움푹 들어간 구석까지 데려가고 나서야 건우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외진 곳이라 낮이 아니면 건물 그림자에 가려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 건우를 밀어 넣은 해영이 한 번 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답싹 끌어안았다.

“아….”

어찌나 세게 안겨 들었는지, 그 힘에 의해 건우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가슴팍에 파묻힌 동그란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건우가 이내 한 팔로 어깨를 마주 안았다. 그러자 해영이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일, 이, 삼. 숨소리만큼이나 작게 숫자를 세던 해영이 열까지 세고서 몸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단단한 팔에 의해 벗어나지 못하고 더 빈틈없이 밀착했다.

“조금만 더요.”

허리를 숙여 양팔로 해영의 어깨와 허리를 꼭 끌어안은 건우가 그 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보송한 살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해영은 허리춤을 부여잡은 손을 꼼질대면서도 밀어내지 않는다.

“밥도 같이 못 먹고, 미안해….”

건우의 티셔츠 위로 내내 마음 쓰고 있었을 말이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걱정해 주고 챙겨 주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 만큼 바쁘면서도 제 말 한 마디에 달려와 주었다. 그 마음이 받은 걸 돌려줘야겠다거나 부담스럽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게 아닌, 걱정과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더 벅차고 기뻤다. 종일 같이 붙어 있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이렇게 드문드문 보는 것도 안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구나, 생각했다.

***

반쯤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털고 방문을 닫았다. 책상 위에 꺼내 둔 초콜릿을 보자 웃음부터 나왔다. 아까 안고 있던 몸을 떼어낸 후 해영의 주머니에서 홍삼 스틱 하나와 함께 건네받은 것이었다. 홍삼은 해영이 보는 앞에서 먹어 치웠고, 초콜릿은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급하게 나오는 와중에도 주섬주섬 챙겨 왔을 걸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흔한 초콜릿 하나가 소중한 부적이라도 되는 양, 잘 보이는 곳에 반듯하게 올려 두었다.

시험 끝나면 맛있는 걸 잔뜩 먹여야지.

전에 해영의 집에서 맛있게 먹어 주었던 떡볶이를 또 해 줘도 좋겠다. 새로운 걸 만들어 줘도 좋고. 아니면 비싸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 데려갈까. 좋아하려나. 그러다 오랜만에 같이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면서 밀린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없는 곳을 지날 땐 손도 잡고, 집에 데려다주면서 밀린 뽀뽀도 왕창 하고, 또….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설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품에 안을 때면 어김없이 제 목을 가득 끌어안아오는 팔이나, 키스할 때마다 그렁그렁해지는 눈, 그리고 체향 같은 것들. 건우는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뻐근하게 당겨오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에도 뺐는데, 또 빼는 건 너무 변태 같지 않냐.

아니지, 건강한 거지. 스스로를 설득한 건우가 의자에서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욕구가 해소되기는커녕, 보고 싶은 마음만 더해졌다. 한숨을 푹 내쉬며 욕실 문을 열었다. 거실의 시계가 알려 주는 시간을 보자마자 후회했다. 책이나 몇 장 더 볼걸.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방문을 열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순간이었다. 협탁 위에 충전해 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발신인을 확인했다. 해영이었다. 나쁜 짓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몸이 움찔 튀었다. 걸리적거리는 충전기를 뽑아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방 안을 어수선하게 활보했다. 그리고 숨을 크게 고른 뒤 겨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운동하고 있었어?

“네?”

건우가 어색하게 되물었다.

―왜 이렇게 숨이 찬 것 같지….

“아…. 네, 뭐 비슷한 거.”

―아아, 대단하다….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시커먼 속을 쿡쿡 찌르는 말에, 건우가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영은 바쁜 사람 시간 뺏으면 안 된다며 곧바로 용건을 뱉었다.

―초콜릿이 다 떨어져서 지금 사려고 하는데, 어떤 게 더 좋았나 물어보려고…. 저번에 준 건 밀크 초콜릿이고 아까 준 건 다크 초콜릿. 뭐가 더 맛있었어?

“오늘 거요.”

먹진 않았지만.

―아, 그렇구나…. 고마워. 운동 열심히 해.

해영은 정말로 대답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기본 화면으로 돌아간 휴대폰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저 줄 걸 사는 거면서 고맙다는 말은 또 뭔데, 진짜. 통화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짜증스럽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

[시험 잘 봐.]

선배도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며, 한 손으로 해영의 메시지에 짧게 답장을 적어 보냈다. 드디어 시험 마지막 날이다. 해영은 그 뒤로도 틈이 날 때마다 홍삼과 초콜릿을 쥐여 주고 떠났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정작 가장 필요한 걸 얻지 못한 건우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만 갔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살벌하네. 이따 보고 도망가는 거 아닌가. 머리를 손끝으로 대충 빗어 넘기다 픽 웃고 욕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몇 시간 뒤면 이 짓도 끝이다.

어제 저녁에 해영과 통화를 하던 중, 오늘 시험 끝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저는 둘이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으니, 그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해영은 망설이다가 술이 먹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확인차 되물었으나, 해영은 단호했다. 축제 뒤풀이 이후로 먹을 기회가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때처럼 소맥으로 먹고 싶다는 걸 맥주로 겨우 타협했더니, 불만이 뚝뚝 묻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겠어. 네가 잘 못 먹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악의 없는 도발에 건우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넘어가지는 않았다. 다수의 경험상 술에 관해서 괜한 오기를 부렸다가 좋게 끝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슬쩍 찔러 본 말에도 건우가 넘어올 생각을 않자, 해영이 치, 하고 잇새로 아쉬운 티를 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얼른 보고 싶네.

***

“그걸 다 마시려고요?”

건우가 해영의 품 안에 가득 담긴 맥주캔을 보며 물었다.

“응…. 맥주밖에 못 먹게 하니까.”

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캔도 있어 불안했다. 가까이 다가간 건우가 그가 들고 있던 것을 몇 개 빼들었다. 해영이 들었을 땐 한 손에 하나씩 겨우 감기는 오백 미리짜리 큰 캔을, 건우는 한 손에 두 개씩 거뜬히 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해영이 다시 뒤돌아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건우가 가져간 만큼 다시 차곡차곡 채웠다.

들고 있던 것을 계산대 위에 내려놓은 건우가 그런 해영을 보고 기함했다. 계산대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열 개는 거뜬히 넘었다. 이걸 다 마시다간 취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배가 터져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차라리 소주가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가져올 건데….”

가까이 다가온 해영이 들고 온 것들을 조심히 내려놓고 다시 냉장고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건우가 다급히 그 팔을 붙잡았다.

“마시다가 모자라면 더 사러 오는 게 어때요?”

계산대 위를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던 해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가 맥주캔을 따서 해영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따지 않은 새 캔을 들고 해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캔을 살짝 기울여 해영의 것에 톡 부딪혔다.

“고생했어요.”

“응, 너도….”

따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해영은 시험 끝나는 날까지 열심히 해준 건우가 무척 대견하고 고마웠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건 해영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해 점수를 정해 놓긴 했지만, 더 낮게 나오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다. 약속도 잘 지키고, 열심히 해 준 데 대한 상으로 말이다.

시험 기간 내내 틈 날 때마다 어떤 소원을 빌 건지 물어봤으나, 항상 다음을 이야기하며 말해주지 않았다. 시험도 끝났으니 오늘은 말해 주지 않을까.

“근데 소원이 대체 뭐야?”

해영이 맥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물었다.

“성적 아직 안 나왔잖아요. 나오면 말해드릴게요.”

“그냥 지금 말해 주면 안 돼…? 조금 무서워.”

불안함에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 보던 건우가 허리를 접어 웃었다.

“아, 진짜 별거 아닌데.”

“뭔데….”

건우는 말을 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뺨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해영와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방학 때 같이 여행 가고 싶어서요. 저번에 같이 가자고 했던 거요.”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작해야 가고 싶은 데이트 장소를 말하거나, 뽀뽀 몇 번 같은 소원을 생각했는데 여행이라니. 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일다가도, 하나하나 따져 보면 걸리는 게 많았다. 당일치기일까. 당일치기가 아니라면 하루 넘게 같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지난번에도 같은 공간에서 자긴 했지만, 그때는 상황도 특수했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해영은 쥐고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거 아닌 게 아닌데….”

뽀얀 뺨이 붉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던 건우가 씩 웃더니 해영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제 쪽으로 확 당겨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 발간 뺨에 입술을 꾹 눌러 문댔다. 맥주캔을 쥐고 있는 해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 왜 이렇게 빨갛지. 이상한 생각 했나 보다.”

실실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뱉은 말에, 해영이 황급히 손을 올려 뺨을 가렸다.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술 먹어서 빨개졌나….”

해영은 괜히 손부채질을 하다가 맥주를 재차 들이켰다.

분명 평화롭게 너 한 모금 나 한 모금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진실 게임을 하고 있었다. 처음은 오기였다. 건우는 해영에게 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 물었다. 솔직히 해보지 않은 티가 풀풀 풍겼기 때문에, 순전히 확인차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평소처럼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저을 줄 알았는데, 웬걸. 해영은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다시 한번 되물었을 땐 앞에 있는 맥주를 입에 들이부으며 대놓고 답하기 싫은 티를 풍기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해영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술을 마셨고, 본인만 질문을 받는 게 억울하다면서 번갈아 묻다 보니 술을 먹는 게 꼭 벌주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말술인 해영이 맥주로는 눈도 꿈쩍 하지 않아 결국 나가서 소주까지 사 와야 했다.

건우는 유리컵에 소주를 삼분의 이가량 채우고 비어 있는 공간만큼 맥주를 부었다. 맥주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건우의 벌주와 상당히 비교되는 색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정신 나간 비율로 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소주를 많이 넣어도 해영이 얼굴 색 하나 안 변하고 술술 마셔대니 점점 소주 비율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색이 거의 투명할 정도였지만, 해영은 헤실거리며 잘만 마셨다. 저러니까 벌칙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 건우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비죽거렸다.

“얼른 질문해.”

해영이 재촉했다. 건우는 고민하다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를 꺼냈다.

“제가 왜 좋아요?”

독한 벌주와 갖은 질문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던 해영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길게 고민도 않고 벌주로 손을 뻗었다. 건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해영보다 먼저 잔을 뺏어 들었다.

“말해 주세요.”

회피할 방법도 없어진 해영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건우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그냥 좋은데….”

이유를 나열하려니 너무 부끄러웠다. 건우는 어떻게 이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 걸까. 취기가 오른 건우는 평소보다 더 고집쟁이가 되어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잔을 해영과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놓고 해영의 팔을 당겨 몸을 붙였다. 너무 가까워. 해영이 엉덩이를 뒤로 슬금슬금 빼자, 건우가 한 번 더 당겨 단단히 붙들었다. 쪽, 입술에 입 맞추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그냥 어디가요?”

“그냥…. 나한테 잘해 주기도 하고-.”

커다란 손이 해영의 뺨을 붙들고 양쪽 눈 위에 차례로 뽀뽀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쪽, 쪽. 이마에도, 콧잔등에도.

“내가 그렇게까지 모, 못난 사람은 아닌 것같이 느껴져서….”

쪽. 뺨 위에도 연이어 입을 맞췄다.

“마, 말하고 있는데 왜 계속….”

건우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물렸다. 이번에는 금방 떼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말하던 도중이라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특히나 건우는 술기운이 꽤 오른 상태였다. 점잖았던 입맞춤이 급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 응….”

제 품에서 끙끙 앓는 소리에 건우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이 주 만이다. 내내 눌러 두었던 욕구가 울컥 치밀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부피감에 해영이 턱을 잔뜩 벌렸다. 눈을 질끈 감고 버거워하면서도 받아내려 애쓰는 게 사랑스러웠다. 건우는 더 깊게 혀를 비볐다.

“하아, 으….”

오랜만의 농도 짙은 스킨십에 해영이 몸을 떨었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술을 먹어서 예민해진 건가. 해영은 온몸이 저릿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건우는 한 손을 올려 해영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달래듯 살살 쓰다듬었다. 머뭇거리는 작은 혀 아래쪽을 쑤시며 점막을 문질렀다. 해영의 몸이 움찔하고 튀었다. 바들대는 손으로 건우의 허리춤을 꼭 부여잡았다.

건우는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머리가 어질했다. 아래서 훅 열이 올랐다. 돌겠네. 해영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움직여 옷 위로 움푹 팬 척추선을 따라 더듬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한참을 물고 빨던 입술을 떼어 내고 뺨 위에, 목덜미에, 차례로 키스했다.

툭 불거진 쇄골 위에 입을 맞추다 숨을 한껏 들이켰다. 술 냄새가 약하게 섞인 체향이 자극적이었다. 입술을 벌려 그 부근을 노골적으로 빨아 올리자, 당황한 해영이 옷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건우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미약한 몸짓이었다.

“읏, 잠깐만….”

밀어내는 손을 붙잡고 그대로 제 목으로 가져갔다. 해영은 망설이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천천히 목을 끌어안았다. 쿵쿵대는 가슴이 서로 맞닿았다. 몸이 닿으면 닿을수록 조급하고 안달이 났다. 건우는 이를 세워 해영의 뽀얀 목덜미를 갉작거리다, 가는 허리를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로 앉혔다. 놀라서 눈이 커진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예쁘다.

“위에서 보니까 어때요.”

건우가 씩 웃으며 물었다. 한참 정신없이 입을 맞추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가벼운 웃음이었다. 해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와중에도, 그의 물음에 따라 제 아래 있는 얼굴을 살폈다. 건우의 뺨에 손을 가져가 찬찬히 더듬었다. 엄지로 쓸어내다가 손등으로 문지르기도 하고, 한참 비벼대던 입술을 검지로 꾹 눌러 보기도 했다. 붉어진 귓바퀴가 신기해 손을 댔을 땐 간지러운지 픽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피하는 게 귀여웠다.

“좋아….”

그가 쏟아내는 것처럼 능숙하게 표현하진 못해도, 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내 것, 내 사람. 해영이 건우의 양 뺨을 감싸 잡고 고개를 숙여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것보다 더한 것은 실컷 해놓고, 그는 처음 입맞춤을 한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을 했다. 뒤늦게 부끄러워진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건우가 해영의 뒤통수를 감싸 잡고 제 쪽으로 돌린 후 급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건우는 그 안을 천천히 유영하며 해영의 허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어 안고 몸을 일으켰다. 놀란 해영이 입술을 떼고 매달렸다. 목에는 팔을, 허리에는 다리를 감았다. 건우는 눈앞의 어깨에 쪽쪽 입을 맞추며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그가 가는 방향을 눈치챈 해영이 당황하며 몸을 비틀었다.

“자, 잠깐만…. 아!”

안 그래도 키가 큰 건우에게 안겨 있는 터라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는 높이였는데, 이리저리 버둥대다 침실 문틀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래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큼직한 손바닥이 뒤통수를 감싸 어깨로 당겨 안고 부딪힌 곳을 쓰다듬어 주었다.

건우가 침대 위에 천천히 해영을 눕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가 싫어하는 짓을 할 리가 없는데도. 해영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건우가 상체를 숙여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싫어하는 건 안 해요.”

침실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반쯤 열어 둔 문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거실의 빛만으로 겨우 시야가 유지되었다. 안 그래도 어둑한 공간에서 빛까지 가로막히니, 잠깐뿐이지만 꽉 막힌 공간에 내몰린 것 같은 막막함이 일었다. 그 두려움은 건우가 다정하게 눈을 맞춰오고 나서야 사라졌다.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건우가 해영의 손을 잡아 올려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여린 살에 혀를 내어 살살 간질이니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웃는 얼굴이 되었다. 이 얼굴을 그 무엇보다 원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욕심만 많아져서 더한 걸 바라고 있었다.

남김없이 저로 새기고 싶었다. 해영의 몸에 제가 보지 못한 곳이 없었으면 좋겠고,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 중 제가 듣지 못한 소리가 없었으면 좋겠고, 맡지 않은 냄새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의 모든 걸 알고 맛보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건우가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다시 맞물렸다.

침대 위에서의 키스는 조금 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조급하고 거칠었다. 해영은 그의 아래에서 끙끙 앓는 게 전부였다. 건우는 그의 입안을 잡아먹을 것처럼 헤집었다. 애가 닳았다. 이불 위로 바스락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가르고 몸을 붙였다.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닿았어.

“흐…. 하아….”

살짝씩 떼어지는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술을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두 번째라 그런가. 저번만큼 무섭지 않았다. 해영은 밀어내는 대신, 건우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등을 끌어안았다.

그 몸짓에 건우가 입술을 떼어 냈다. 번들거리는 두 입술 사이로 얇은 실선이 주욱 이어진다.

“조금만 만져도 돼요?”

건우가 해영의 허리를 옷 위로 살살 더듬으며 물었다.

“어, 어디를…?”

“그냥, 여기저기.”

여기저기….

“싫어요?”

해영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싫진 않았다. 다만, 해본 적이 없어 막연하게 두려울 뿐이었다.

“그럼 천천히 할 테니까 그만하고 싶으면 말해 주세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건우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숙여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 안쪽의 연한 살로 귓불을 물고 춥춥 소리 내며 간질였다. 혀를 내어 움푹 팬 곳을 따라 핥아 올리니, 해영의 턱이 위로 들렸다. 뜨거운 숨과 젖은 소리가 귓속을 적나라하게 파고들었다. 해영이 무릎을 세웠다. 발끝으로 시트를 밀어냈다.

“흐으….”

건우가 그대로 목덜미를 따라 키스하며, 허리를 지분대던 손을 티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복부를 단단한 손으로 더듬어 올라갔다. 거친 손끝이 뾰족하게 선 유두를 건드리자, 해영이 신음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으응, 흣….”

“얼굴, 보여 주세요.”

건우가 해영의 턱을 약하게 쥐고 정면으로 돌렸다. 마주한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 위로 입 맞추고 가슴 전체를 천천히 매만졌다. 작은 돌기가 손가락에 툭툭 걸릴 때마다 해영의 허리가 비틀렸다. 팔에 걸리는 옷자락이 거슬렸다. 티셔츠 아랫부분을 붙잡고 벗겨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헉, 크게 숨을 들이켠 해영이 다급하게 제 옷자락을 잡아 내렸다.

“위, 위에는 안 벗고 싶어….”

티셔츠를 구겨 잡은 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왜 옷을 벗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 못 했을까. 몸 곳곳에 난 자잘한 흉터들이 떠올랐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보면 더 이상 만지고 싶지도 않을 거야. 거북할 거야. 꾹 다문 입 안으로 어금니가 잘게 부딪혔다. 그때, 해영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건우가 그대로 깍지를 끼며 잡아 올려 보드라운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알았어요.”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안심한 해영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에 답하듯 건우가 등 아래로 팔을 넣어 품 안에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해영이 그의 어깨 위로 이마를 눌러 비볐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가 제게 해 주었던 것처럼 목덜미에 쪽 입을 맞췄다.

“하아….”

건우의 입에서 열띤 숨소리가 곧바로 새어 나왔다.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걸까. 조금 더 용기 내어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어 핥았다.

그 순간, 욕설을 짓씹은 건우가 상체를 벌떡 세웠다. 그리고 해영의 두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붙들고 확 끌어당겼다. 하체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바지 위로 단단해진 것이 느껴졌다. 건우가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여 그 위에 마주 비볐다.

“흐읏, 아…!”

건우가 해영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맨살끼리 닿고 싶었다. 옷 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위에는’ 벗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아래는 괜찮은 건가. 건우는 움찔대는 다리 안쪽을 조급하게 매만지며 물었다.

“바지는, 괜찮아요?”

해영은 대답 없이 헐떡이며 몸을 떨었다. 정신이 없나. 한 번 더 물어봐야 하는데. 손은 이미 해영의 바지 버클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싫으면 아까처럼 또 말해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속옷 위로 반쯤 일어선 성기 끝이 젖어 있었다. 그 얼룩 위에 검지를 대고 지그시 눌렀다 떼어내자, 끈끈하고 투명한 점액이 얇게 딸려 올라온다. 귀두 끝을 엄지로 둥글게 문질렀다. 해영의 몸이 크게 튀었다.

“아흑! 거, 건우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생경한 자극에 눈가가 금세 붉게 짓물렀다. 건우가 상체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서늘했던 앞이 커다란 몸으로 뒤덮이자, 해영이 다급하게 매달렸다. 건우는 깊게 키스하며 해영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해영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엉덩이를 들어 도왔다. 어떻게든 해 줬으면.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건우가 만져 주는 대로 느끼고 울었다.

속옷을 내려 단단해진 성기를 밖으로 완전히 끄집어냈다. 큼지막한 손바닥에 보드라운 것을 감싸 쥐고 빠르게 움직였다. 예민해진 기둥을 따라 주욱 쓸어 올리자, 해영이 고개를 틀어 입술을 떼어 내며 흥분으로 열이 오른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건우가 곧추선 그의 성기를 슥슥 훑어 올렸다. 해영의 골반이 부르르 떨렸다.

“흐으, 읏…. 아!”

끝도 없이 치솟는 고양감에, 몸이 의지를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해영은 벗어나기 위해 허리를 뒤틀었다. 그러자 건우가 상체를 세우고 반대 손으로 해영의 가슴팍을 지그시 눌러 움직임을 저지했다. 눈이 마주쳤다. 건우는 사정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영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미약한 통제에 뱃속이 간질거렸다. 건우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얼굴이 아닌 그가 누르고 있는 가슴으로 입술이 향했다. 티셔츠 위 도드라진 유두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숨을 몰아쉴 때마다 솟아오르는 복부에도 입술을 비볐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가자, 움찔 떨리는 성기가 건우의 시야에 들어찼다.

“보, 보지 마….”

해영이 다급하게 다리를 모아 가리려는 것을 허벅지를 쥐어 잡아 벌렸다. 훤히 드러난 아래에 해영이 작게 흐느꼈다. 적당한 크기의 성기는 주인을 닮아 곧고 반듯했다. 피부가 워낙 하예 자극을 받은 성기의 곳곳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요도에서 투명한 프리컴이 주륵 방울져 흘렀다.

귀여워,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혼잣말처럼 내뱉은 건우가 해영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선단을 입에 물었다.

“자, 잠깐, 흐윽! 응….”

성적인 것에는 담백하다 못해 거의 무지에 가까울 정도로 접점이 없던 해영은, 자위행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호기심에 한두 번 만져 본 게 전부였다. 그런 해영에게 예고 없는 구음은 울고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축축한 입안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 성기가 점막에 비벼졌다. 건우가 입술을 조여 삼키며 압박했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죽죽 빨아 올리니, 해영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 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건우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입을 놀리는 대로 시시각각 변하는 해영의 표정을 빠짐없이 담았다. 해영이 입술을 세게 깨물고 신음을 참을 때마다 윽, 으윽, 목으로 삼켜지는 소리가 아까웠다. 목소리 듣고 싶은데.

건우가 손을 올려 검지와 중지를 모아 해영의 입술 사이에 밀어 넣었다. 차마 그 손가락을 깨물 수 없었던 해영이 이 세우는 걸 멈추었다. 말캉한 혀 위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자, 벌어진 틈새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응, 으…. 흐읏….”

건우는 들썩이는 골반을 꽉 붙들었다. 혀를 내리고 성기를 입술로 빠듯하게 조였다. 해영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파드득 허리를 쳐올렸다. 목구멍까지 성기가 박혔다. 건우는 구역질을 참고서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해영의 입안을 헤집던 손가락을 빼내고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기둥 아래쪽을 잡아 흔들었다. 혀를 세워 사출구를 후벼 파자, 해영이 다급하게 손을 내려 건우의 머리를 붙들었다.

“떼, 떼 줘, 흐윽, 나…. 흑, 아….”

머리칼을 헤집는 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가늘게 떨렸다. 치미는 사정감에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성기 끝이 입안에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건우가 고개를 더 깊이 숙여 뿌리 끝까지 머금었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흡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목구멍 안쪽으로 비릿한 것이 쏘아진다.

“아흑, 아아!”

해영의 하체가 경련했다. 건우는 그의 사정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입을 떼지 않고 남김없이 빨아 올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해영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어, 어떡해…. 흐….”

마침내 입술을 떼어 냈을 때, 건우가 가볍게 기침했다. 해영이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손바닥을 오목하게 모아 건우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여기다 배, 뱉어….”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미 거의 대부분을 삼킨 상태였지만, 건우는 일부러 한 번 더 삼키는 시늉을 했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는 것을 본 해영이 허망하게 손을 올려 그대로 제 얼굴을 가렸다.

“내, 내가 떼라고…. 떼라고 했는데, 흐, 그걸 왜 먹어….”

건우가 해영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드러난 얼굴은 방금 전의 사정으로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건우가 그 열 오른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제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빨아 주면 빨아 주는 대로 느끼고 절정에 다다르는 해영의 얼굴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다.”

건우가 씩 웃고는 멍한 얼굴로 벙긋대는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해영은 당황했다. 키스를 하는 것까진 좋았으나, 제 것을 물고 빨고 먹기까지 한 후라 어쩔 수 없이 비릿한 향이 넘어왔다. 맛이… 없는데. 그래도 삼키기까지 한 사람 앞에서 불평할 건 아닌 것 같아 꾹 참았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건우는 그 삐걱대는 움직임에 의아한 얼굴로 입을 떼고 해영의 표정을 살폈다. 미간부터 눈가까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다시금 입을 맞추니 이번에는 입술을 열지 않고 버틴다.

아. 건우가 소리 내서 웃었다.

“맛없어요?”

“…응.”

시무룩한 얼굴에, 건우가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떼며 말했다.

“그럼 키스 말고 다른 거 해요.”

“다른 거…?”

“네, 다른 거.”

아직 안 끝난 건가. 키스만 아니면 뭐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해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뺨에 쪽 입 맞춘 건우가 손을 내려 제 바지 버클로 가져갔다. 한참 전부터 딱딱하게 일어선 상태로 바지 안에 갇혀 있는 성기가 욱신거렸다. 지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해영이 바보 같은 소리를 내었다.

“아….”

저만 난리가 나고, 정작 건우는 바지를 벗지도 않은 상태였던 거다. 해영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건우는 드로즈까지 빠르게 벗고 배에 바짝 올라붙을 만큼 흉흉하게 서 있는 제 성기를 손으로 슥슥 쓸어 올렸다. 그 손동작에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던진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남의 중요 부위를 뚫어져라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지만, 크기도, 굵기도 놀랄 정도라 자꾸만 눈이 갔다. 호기심을 못 이긴 해영이 건우의 아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보면 부끄러운데.”

그가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낮게 웃는 소리와 동시에 양 뺨이 붙들렸다.

욕구를 여과 없이 드러낸 시선으로 제 얼굴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피던 그가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촉, 촉, 말캉한 입술이 연달아 부딪혔다.

그는 당장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나, 몸짓만은 작은 참새라도 쥐고 있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솜을 닮은 꽃씨가 내려앉은 것처럼 가슴속이 간지러웠다. 목 안쪽으로 끙끙대자, 금세 입맞춤이 짙어졌다.

“으응….”

키스를 하기 싫다 했더니, 입술을 열심히 괴롭혔다. 윗입술 아랫입술 번갈아 빨아대며 축축하게 적셨다. 혀만 안 넣으면 되는 건가. 맛은 그대로 나는데. 불만이 잔뜩 쓰여 있는 해영의 얼굴 위로 건우가 쪽쪽대며 뽀뽀했다.

해영의 등허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던 건우는 이내 손을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말랑한 엉덩이를 살살 주무르며 제 쪽으로 확 끌어당기니, 해영의 상체가 반동을 받아 뒤로 풀썩 쓰러졌다. 건우가 몸을 세우고 해영을 내려다보며 제 티셔츠 아래쪽을 잡고 위로 단번에 벗어냈다. 시야 가득 살색이 들어차자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도 만져 주세요.”

건우가 비스듬히 몸을 숙여 거리를 좁히며 요구했다.

“어, 어디를…?”

“손 좀.”

당황한 얼굴로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작은 손을 보다가, 한 손을 잡아 올렸다. 그 보드라운 손바닥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 제 머리카락으로 가져갔다. 짧은 머리카락이 해영의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손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눈을 굴리던 해영이 건우의 머리카락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어 살살 매만졌다. 이번에는 건우가 그 손을 뺨으로 가져갔다. 손바닥에 뺨을 대고 비비자, 해영이 작게 웃었다.

“다 만져도 돼요.”

손을 천천히 내려 단단한 목과 어깨를 스치고, 쿵쿵대는 가슴팍 위에 얹었다.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빠르고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건우도 떨리는 걸까. 모든 걸 능숙하게 잘 하기에 긴장한 건 저뿐인 줄 알았는데. 해영은 손을 조금 더 뻗어 둥둥 울리는 그 가슴팍 위를 더듬었다. 건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 아래로. 잘 짜여진 복근을 지나, 손끝이 성기에 닿았다.

“후….”

억누른 신음 소리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에서 간절함과, 무언가를 더 원하는 욕망이 내비쳤다. 그는 싫으면 언제든 떼도 된다는 것처럼, 제 손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어떠한 강압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택은 제 몫이었다.

해영의 목울대가 작게 울렁였다. 오롯이 제 의지로 손을 뻗어 큼직한 귀두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윗부분만으로도 손바닥이 빠듯하게 들어찼다. 손 안에서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해영은 그가 해 주었던 행위를 떠올렸다. 어설프게 손을 놀려 위아래로 천천히 문지르자, 건우의 몸이 무너지듯 제 쪽으로 기울었다.

“하아, 선배….”

건우가 흰 목덜미에 코를 박고 살냄새를 폐부 가득 들이마셨다. 그리고 해영의 손등 위로 겹쳐진 손을 움직여 조금 더 빠르게, 그 부드러운 손바닥 위에 제 것을 문질렀다. 귀두 아랫부분이 툭툭 걸렸다. 마치 손에 대고 삽입이라도 하는 것처럼 쳐올리기 시작했다. 해영의 손바닥이 금세 끈적하고 투명한 액체로 범벅이 되었다.

해영은 목덜미로 뜨거운 숨을 받아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찌꺽이는 소리도, 손에 닿는 느낌도, 건우의 급한 몸짓도, 죄다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또 섰다.”

건우의 말에 해영이 화들짝 놀라 아래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말랑해졌던 제 성기가 다시 경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건우가 해영의 골반을 양손으로 붙들고 강하게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그리고 몸을 붙여, 해영의 것 위에 제 성기를 마찰했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맞비벼지는 느낌은 손이나 입안과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흐읏, 아!”

“아….”

건우가 고개를 들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쾌감에 절어 바르작거리는 해영을 몸으로 옭아매 붙들었다.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올려 치자 해영이 건우의 어깨를 꼭 잡는다. 단단해진 음경을 엇갈려 문질렀다. 도드라진 힘줄과 핏대가 성감을 자극했다. 참다못한 해영이 손톱을 세워 어깨에 박는다. 어이없게도, 건우는 그 통증에 더 흥분했다. 손을 내려 둔부를 세게 움켜쥐고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아읏, 으응….”

의도가 다분한 손짓에 해영이 도리질했다. 건우는 그 뺨에 입술을 묻으며 콱, 콱, 아래를 쳐올렸다. 해영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쉴 새 없이 허리짓했다. 연달은 자극에 해영의 눈꼬리 옆으로 주륵 흐르는 눈물을 핥아 올렸다. 그러자 몸을 잘게 떨던 해영이 팔을 뻗어 목에 매달려 온다.

“건우, 야…. 흐으, 아….”

이 순간에도, 침대 밖으로 나가서도. 제가 해영이 의지하고 매달리는 유일한 사람이어야 했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목소리로 이름을 불리는 유일한 사람. 가느다란 어깻죽지에 소유욕을 가득 담아 입술을 묻었다. 혀를 내어 질척하게 빨아 올리며 퍽, 퍽 거세게 아래를 치댔다. 머리까지 열이 올라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건우는 한 팔로는 해영을 꼭 안고, 다른 손으로 두 성기를 같이 잡아 빠르게 훑어 올렸다.

“나, 나 또…. 아, 으….”

“하아, 싸도 돼요.”

예민한 부분끼리 맞닿은 곳에 피가 몰렸다. 척척 소리가 날 정도로 손으로 훑어 올리자 해영이 발작적으로 허리를 튕겼다. 건우는 그것을 몸으로 받아냈다.

“흐윽, 으, 아아!”

해영이 턱을 바짝 들고 뒷머리를 베개에 짓누르며 신음했다. 한계치에 다다른 해영의 몸이 바짝 굳었다. 허벅지 안쪽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건우의 커다란 손이 해영의 뿌연 정액으로 젖어 들었다. 쥐고 있는 성기가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뱉어낼 때까지 여러 차례 움찔거렸다. 건우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무릎을 벌려 해영의 다리를 한껏 양옆으로 열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헐떡이는 얼굴, 희뿌연 얼룩으로 엉망이 된 티셔츠, 젖은 성기와 그 아래로 움찔대는 엉덩이. 건우가 잔여운으로 벌벌 떨고 있는 해영의 몸 곳곳을 시커먼 눈으로 훑고서 손바닥을 펼쳐 사정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윤활제라도 되는 양 여전히 꺼떡이는 제 것 위로 치덕치덕 펴 발랐다.

“하아….”

아래에서 들리는 질척이는 소리에, 모자란 숨을 몰아쉬던 해영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건우가 괴로운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는 힘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감싸 잡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자위하는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건우가 속도를 높였다. 그 역시 사정에 가까워진 듯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 올랐다.

해영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받아내기가 버거웠다. 그 고개는 곧바로 건우의 억센 손길에 의해 앞으로 돌려졌다. 턱을 쥔 손이 전에 없이 우악스러웠다.

“나 봐줘요.”

해영은 제 턱을 붙든 팔을 꼭 잡고서 그의 요구대로 눈을 마주했다. 무서워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참아 주는 모습에, 건우가 욕설을 낮게 읊조렸다. 엄지손가락을 해영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혀 위를 지그시 눌렀다. 해영은 사탕이라도 입에 넣은 양 혀를 둥글게 굴려 츄릅, 손가락을 빨았다. 비릿하게 웃은 건우가 성기를 쥔 손을 빠르게 놀려 기둥을 척척 쓸어 올렸다. 해영의 정액과 제 선액이 뒤섞여 음란하게 젖은 소리를 냈다. 그 찌꺽이는 소리와 달뜬 숨소리만이 귓전에 닿았다.

“윽!”

건우가 얼굴을 구기고 턱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성기 끝이 꿈틀대더니 끝에서 진한 사정액이 여러 번에 걸쳐 쏘아져 나왔다. 탁한 액체가 해영의 다리 사이와 티셔츠 위를 더럽혔다.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낮게 울리는 신음을 속으로 삼키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위로 죽죽 쓸어 올렸다.

“하아….”

해영의 입에서 젖은 손가락을 빼내고 허리를 숙여 해영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등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얀 목덜미에 느른하게 입술을 비볐다.

몸이 빈틈없이 얽혔다. 사정의 잔여물로 축축해진 아래 또한 몸을 비틀 때마다 맞닿았으나, 해영은 애써 무시했다. 분명 바로 전에 잔뜩 쏟아 냈음에도 여전히 단단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씻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요?”

해영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석을 부리듯 건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건우는 다정하게 웃고서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술 위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꾹 눌러 좌우로 뭉개 비볐다. 응, 해영이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밀어냈지만 건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집스럽게 쪽쪽대며 쉬지 않고 입을 맞췄다. 그는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진 사람 같았다. 실실 웃으며 해영의 뺨이나 머리카락 등을 연신 만지작댔다.

“예쁘다.”

규칙적으로 다독이는 커다란 손에 정신이 흐릿하게 멀어졌다. 건우는 계속해서 저를 매만지고,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귓가에 예쁘다고, 좋아한다고 수도 없이 속삭였다.

그날 해영은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에 깔리는 악몽을 꾸었다. 도와 달라, 살려 달라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낑낑대며 겨우 벗어날라치면 데굴데굴 굴러와 다시 온몸을 짓뭉갰다.

“흐….”

괴로운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해영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앞에 커다랗고 두툼한 몸이 해영을 빈틈없이 누르고 있었다.

“숨 막혀….”

건우의 고개가 해영의 목덜미에 박혀 있어 색색 내뱉는 숨이 간지러웠다. 그의 어깨 위로 목을 쳐들고 숨을 내쉬며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어찌나 세게 안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꼼지락거려요.”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자고 일어난 직후라 졸음이 묻은, 평소보다 훨씬 저음의 목소리였다.

“무거워서….”

그는 저를 놓아주기는커녕 더 세게 끌어안고 머리통에 쪽, 쪽 입을 맞췄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그제야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무게를 덜어 주었다. 팔과 다리는 여전히 해영의 몸에 둘러진 채였다.

“나 악몽도 꿨어…. 커다란 바위에 깔리는 꿈.”

“그랬어요?”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건지, 건우는 피실피실 웃으면서 해영의 머리카락을 괴롭혔다. 해영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 너무 좋다.”

“더워, 저리 가….”

“싫은데.”

청개구리처럼 계속해서 들러붙는 건우를 피해 해영이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건우가 팔을 뻗어 제 허리를 끌어당겨 몸을 바짝 붙였다. 헉, 엉덩이에 닿는 딱딱한 느낌에 해영이 질겁하며 뒤돌아 그를 보았다.

“왜, 왜 또 서 있어…?”

“아침이잖아요.”

건우가 뭐가 이상하냐는 얼굴로 답했다.

“아침에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발가벗고 있으면 서는 게 당연하다고요. 선배는…. 어디 봐요.”

그가 허리에 있던 손 하나를 쑥 내려 해영의 앞을 움켜쥐었다.

“아!”

“선배는 나를 이 정도만 좋아하는구나….”

건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서운한 목소리를 냈지만,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해영이 몸부림치며 겨우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또 놀렸어.

“엉덩이 귀여워.”

해영은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얼른 주워 입었다. 그러고 보니 아래에 찝찝한 느낌이 없었다. 티셔츠에는 얼룩이 그대로인 걸 보면 제가 잠든 사이에 보이는 곳만 닦아 준 모양이었다.

“씻고 오세요. 아침 먹게.”

건우가 허전한 품에 해영 대신 베개를 끌어다 안으며 말했다. 아침? 해영이 침실 문을 열자, 고소한 밥 냄새가 훅 풍겼다. 식탁 위에는 맑은 콩나물국과 반듯한 계란말이, 그리고 소시지 볶음이 밥과 함께 놓여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의 술병도 모두 치워져 있었다.

“어, 언제 이런 거 해놨어? 나 깨우지….”

먼저 일어난 줄 알았는데. 건우가 저보다 훨씬 부지런한 성격인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먼저 일어나고 싶었다. 드라마를 보면 연상인 애인이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멀끔한 얼굴로 깨워 주고, 아침도 해 주고 하니까. 그에 비해 제 모습은 어떤가. 아래는 벌거벗고, 위에는 더러운 티셔츠 차림에, 눈곱도 떼지 못한 채로 그의 아래에 깔려 낑낑대며 볼품없는 모습으로 일어났다. 그래도 기상은 먼저 한 줄 알았더니만. 해영이 속상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지만 대충 걸쳐 입은 건우가 하품을 찍 하며 걸어 나왔다. 미안함과 약간의 배신감이 뒤섞인 얼굴을 한 해영을 바라보다 픽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아 욕실 쪽으로 밀었다. 얌전히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어깨가 어쩐지 축 처져 보였다.

일주일 뒤, 성적표 사진과 함께 짧은 메시지 한 개가 도착했다.

[사진]

[여행 가요.]

3권에 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