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선호조사 (3) (7/21)

호구조사 3권

목차

선호조사 (3)

출구조사 (1)

출구조사 (2)

외전. 12월 24일

외전. 12월 31일

외전. 2월 3일

외전. 8월 9일

외전. 2월 17일

외전. 3월 2일

선호조사 (3)

딸랑, 경쾌한 종소리에 해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주변의 대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놓칠 리가 없었다. 십 분이 넘게 이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반가운 마음에 화색을 띤 해영이 손을 작게 흔들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던 건우가 그를 발견하고 휘적휘적 걸어왔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기다렸겠네. 건우가 해영의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으며 말했다. 그냥. 해영이 작게 대답하곤 손에 쥔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들뜬 마음에 이리저리 뒤척인 결과였다. 계획 세울 때부터 이러면 여행 당일은 어쩌려고 이러지. 나이가 나이인 만큼 태연하자고 속으로 수십 번을 되뇌었으나,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야밤에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를 펼쳤다. 지역이나 가고 싶은 장소, 먹고 싶은 것만 대략적으로 적어가고, 자세한 계획은 만나서 함께 정하기로 했지만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동이 틀 때까지 블로그를 뒤적이며 계획을 세웠다. 노트를 덮을 당시엔 만족스러웠으나, 막상 보여 줄 때가 되니 조금 부끄러웠다. 혼자 신이 나서는. 얼른 보여 주고 싶어서 일찍 와버렸다는 말만큼은 하지 말아야지.

해영이 미리 주문해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건우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 빨대를 물었다.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던 해영이 노트의 모서리를 살살 구겼다. 언제 보여 주지. 너무 유난 떤 건 아닐까. 난생처음 가는 여행이었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그가 보기에 서툴게 보이진 않을지, 주책 맞게 너무 신이 나 보이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노트를 붙들고 머뭇대는 얼굴을 본 건우가 먼저 선수를 쳤다.

“가고 싶은 곳 정했어요?”

해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노트를 펼쳐 보였다.

“강릉….”

의외의 장소에 건우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강릉. 제 생일날 해영을 많이 속상하게 만들었던 곳이다. 일부러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강릉은 제게도, 그리고 아마 해영에게도 좋지 않은 기억일 텐데.

“왜 강릉이에요?”

“어…. 바다 보고 싶어서.”

“바다는 다른 데도 많은데.”

여행을 소원으로 내민 이유는 해영의 처음을 함께하고 싶고, 또 그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듬뿍 채워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처음 가는 여행에서 해영이 그날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다면.

건우는 영 못마땅한 얼굴로 빨대를 짓씹었다. 해영이 원한다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득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 표정을 읽어낸 해영이 입을 열었다.

“네가 봤던 거 같이 보고 싶어….”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에, 건우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해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영이 말을 보탰다.

“너랑 가면,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고 하면, 그 곳이 좀 좋아질 거 같아서…. 별론가.”

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이 제가 가고 싶은 곳이었다.

“좋아요.”

긍정의 답을 받아내자, 해영의 얼굴에서 비로소 긴장이 덜어졌다. 마음이 가벼워진 해영이 펼쳐진 노트를 반대로 돌려 건우의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적어 온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더 들떠 있었다.

“내, 내가 가고 싶은 데를 조금 찾아왔는데….”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건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지, 이 지옥 같은 계획표는.

노트에는 아침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 30분 단위로 쪼개져 세로로 길게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그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얼핏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못 한다. 불가능한 계획이다. 이동 시간이나 체류 시간, 조금씩 지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포함하지 않은 계획표였다. 건우는 멍한 얼굴로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여, 여기는 빵이 맛있고, 여기는 아이스크림이 맛있대. 초코맛을 꼭 먹어야 한대…. 그리고 여기는 케이크가 맛있다고 해서 넣었고, 여기는 바다 보면서 대게 먹을 수 있는 곳. 블로그 보니까 펴, 평이 되게 좋더라고. 다 알바는 아니겠지? 아, 네가 저번에 사 왔던 타르트는 어디서 산 거야? 거기도 가고 싶은데….”

건우가 휴대폰으로 타르트 가게를 검색해 해영에게 내밀었다. 해영은 눈을 반짝이며 이미지란에 있는 타르트 사진을 휙휙 넘겨 몇 장 구경하더니,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어디에 끼워 넣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의욕 넘치는 것도 좋고, 기대하는 모습도 귀엽긴 한데. 건우가 픽 웃더니 해영의 옆에 놓인 펜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여기서 제일 가고 싶은 데가 어디예요?”

“제일 가고 싶은 데?”

“네. 시간 부족하면 다 못 갈 수도 있으니까, 꼭 가고 싶은 곳부터 순서대로 정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음….”

해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도 푸는 사람처럼 신중한 얼굴로 적힌 장소들을 살폈다. 펜 끝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참을 고민하다, 해수욕장 옆에 숫자 1을 쓰고 동그라미를 쳤다. 펜촉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내려다보던 건우가, 포크로 케이크를 퍼서 해영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해영은 익숙하게 입을 벌려 받아먹으면서도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였다.

“차건우, 뭐냐.”

처음 듣는 목소리가 건우의 이름을 불렀다. 해영이 파드득 고개를 들었다. 카페 입구 쪽에서 건우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그 짧은 거리를 걸어오면서도 휴대폰 액정을 두 번이나 확인했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 듯했으나, 초조한 기색은 없었다. 그는 놀고 있는 반대쪽 손으로 동그란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더니, 의아한 얼굴로 건우와 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약속 있다더니.”

“이게 약속.”

건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방해라도 받은 사람처럼 언짢은 얼굴이었다. 건우는 잠시 낯선 남자에게 돌아갔던 고개를 도로 해영의 쪽으로 돌렸다. 스스럼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친구인 것 같은데. 혹시 방금 전에 먹여 주던 모습도 봤을까. 다 큰 남자 둘이 케이크를 먹여 주고 자연스럽게 받아먹는 모습은 충분히 의심을 살 만했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

“학교 선배. 아, 씨바. 왜 앉아.”

낯선 남자가 옆 테이블의 빈 의자를 끌고 와 꾸역꾸역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건우가 살벌하게 인상을 구기며 욕을 했다. 기분이 심히 안 좋아 보이는 건우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남자. 그 사이에 낀 해영이 눈을 도로록 굴리다, 낯선 남자의 호기심 담긴 시선에 떠밀리듯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저 얘 친구 안경태요.”

건우는 물고 있던 빨대를 잘근잘근 괴롭히며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지만, 경태는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여자 친구 기다리는 중인데 심심해서요. 조금 앉아 있어도 되죠?”

“응, 그럼.”

해영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먹여 주던 모습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안심한 해영이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내가 사 줄게.”

“헐, 정말요?”

“응. 이런 건 원래 제일 혀, 형이 사 주는 거잖아.”

지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해영의 팔을 답싹 붙잡은 건우가, 안경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로 경태의 의자를 발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야, 네 돈으로 사 먹어.”

해영이 잡힌 팔을 비틀어 떼어냈다. 건우의 친구라고 하니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괜찮아. 내,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

“저 그럼 아바라요.”

아바라가 뭐지.

“아이스 바닐라 라테요.”

멀뚱히 서 있는 해영에게 경태가 말했다.

“아…. 케이크는 필요 없어? 여기 케이크 맛있는데….”

“괜찮아요. 여친 금방 올 거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형.”

유유상종이라더니. 경태는 건우처럼 예의가 바른 친구였다. 해영이 신이 난 걸음으로 카운터로 향했다. 해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안경태가 노트를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여행 가냐?”

“어.”

“저 형이랑 둘이?”

“어.”

“왜?”

귀찮은 얼굴로 대충 대답하던 건우가, 끈질기게 파고드는 것에 눈을 홉떴다.

“과제.”

“아, 그 무슨 데이트하라고 시키는 수업 있다더니 그런 건가?”

경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

“비슷해.”

“와, 무슨 과제를 방학 때까지 시키냐. 고생하네.”

그때 해영이 아이스 바닐라 라테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경태 앞에 내려놓자,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감사하다고 한 번 더 인사했다. 그는 꽂혀진 빨대를 무시하고 컵에 입을 댄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졌다. 건우도 음료를 빨리 먹는 편인데, 이 친구는 더 심하구나. 해영이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은 경태가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해영에게 말했다.

“형, 근데 얘랑 여행 가면 좀 힘드실걸요.”

“응? 왜?”

“이 새끼 지가 하고 싶은 거 꼭 해야 되는 놈이거든요.”

그 말에 해영이 건우를 힐끔 보았다. 건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옆에 있던 냅킨을 가져와 종이학을 접고 있을 뿐이었다. 안경태가 무슨 말을 하든,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것과 해영의 앞에서 제가 하는 행동은 완전히 다르니까.

“작년에 애들이랑 같이 제주도 갔었거든요. 근데 이 새끼가 한라산 꼭대기? 그걸 죽어도 봐야겠다는 거예요. 애들은 중간에서 다 지쳐가지고 내려가자고 하는데, 그거 버리고 기어이 지 혼자 올라갔다 오더라고요.”

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우는 짧은 거리를 걸을 때조차 걸음 속도가 느린 저를 배려해 천천히 걸어 주는 사람이었다.

“건우 그런 애 아닌데….”

속상했다. 작지만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한 번 더 반박했다.

“배려 많이 해 주는데….”

“배려요?”

안경태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해영에게 재차 되물었다. 해영은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보탰다.

“이, 이것도 다 내가 가고 싶은 데 생각해 보라고 해서 적어 온 거야….”

“헐, 얘 고등학교 때 여친 사귈 때도 안 그러던 놈인데. 학교 선배라서 그런가.”

“야.”

잠자코 듣고 있던 건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하듯 불렀다.

“왜. 맞잖아. 이 새끼 맨날 지 맘대로 하다가 여친이 화내면 그제야 건성건성 사과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또 고칠 생각은 안 해서 매번 차였어요. 완전 쌤통이죠.”

“아, 씹. 성주희 왜 이렇게 안 오는데. 가라고, 좀.”

건우는 경태가 앉아 있는 의자를 다시 한번 툭툭 차며 짜증을 부렸다. 해영이 벙찐 얼굴로 둘이 투닥대는 걸 바라보다가 노트를 조용히 덮었다.

여자 친구….

분명 건우라면, 건우처럼 좋은 애라면 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전해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어, 왔다. 나 간다! 형, 이거 감사합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 친구를 발견한 경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해영을 향해 음료를 잘잘 흔들며 멀어졌다. 그가 가고 남은 자리에는 한참 동안 어색한 적막만 맴돌았다.

“선배, 아까 그거는요.”

건우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운을 뗐다. 그와 동시에 해영이 허겁지겁 종이학 두 마리와 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이제 갈까?”

“가자고요?”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살폈다. 해영은 제가 하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입을 열자마자 거부하듯 말을 끊어냈다. 화가 났나 싶어서 표정을 살폈으나,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건우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해영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쥐고 확인차 말했다.

“저한테 화난 거 있으면 제 앞에서 화내기로 약속했어요.”

해영이 손가락을 슬쩍 빼냈다.

“화날 게 뭐가 있어…. 지나간 일인데. 그냥 조금 피, 피곤해서 그래.”

사실이었다. 건우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우가 아닌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해영은 이런 문제로 속상한 마음이 드는 제가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 그가 다른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면 저를 처음 본 날보다 더 이전이니 신경 쓸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건우가 그 과거의 누군가에게 잘해 줬다거나 하는, 질투가 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누군가와 사귀었다는 사실 하나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내보이면 분명 건우는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겠지. 그가 해명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절절매는 모습을 본다면, 제가 지금 속상한 게 정당하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이건 내가 이상한 거야. 건우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렇게 계속 되뇌다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화가 난 것도 아니니 약속을 어기는 게 아니다. 그저 혼자 진정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니까.

건우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고 해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했던 것까지 운운한 상황에서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기분이 상할 만한 상황이었고 그렇게 보이기도 했으나, 해영의 말처럼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전에 누구를 만났건, 해영보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적도 없고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한 적도 없었다. 떳떳했지만 해영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이걸 꺼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해영은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방긋방긋 웃기도 하고, 아까 먹은 케이크가 맛있었다느니, 네 친구는 안경을 썼는데 이름도 안경태라 신기하다느니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라앉은 공기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으나, 정작 건우는 해영의 표정을 살피느라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말이 없었다.

“근데 네 친구…. 너를 잘 모르는 것 같아….”

해영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나는 너처럼 배려심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자꾸 그럴 리 없다고 말하니까.”

건우의 친구라 그의 앞에서 더 심하게 말은 못하지만, 솔직히 조금 화가 났다. 아니, 많이 났다. 건우가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라는 근거는 이 자리에서 몇십 개라도 댈 수 있었다.

눈꼬리를 축 내린 채 본인이 욕이라도 들은 것마냥 속상해하는 얼굴에, 건우가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웃었다.

“선배한테만 그런 거예요. 걔네들 배려를 왜 해요, 제가.”

그 말에 해영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나, 나를 좋아해서?”

해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건우가 다정하게 웃으며 검지로 해영의 뺨을 약하게 건드렸다.

“네. 좋아해서요.”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부터 열꽃이 피는 것처럼 발갛게 물이 들었다. 좋아해서, 나를 좋아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제게 하는 행동이 다른 이유를. 그리고 그가 전에 사귀었던 사람들과 저에게 하는 게 다른 이유도.

해영은 그 답을 듣고 나서야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

“이거하고, 이것도…. 아, 이건 없어도 되나….”

붙박이장을 활짝 열어 놓고 바닥에 앉아 짐을 챙겼다. 벌써 내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쑤셔 넣은 가방은 벌써 두둑했다. 아직 못 넣은 게 많은데. 해영은 난감한 얼굴로 가방 안에 넣었던 것들을 도로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중요한 것부터 넣자.

3학년인 해영의 방학은 학기 중보다 더 바빴다. 건우도 해영도 느긋한 여행을 바랐지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원래 이박 삼일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일박 이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기간이 짧아서 챙겨 갈 게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추려지지가 않는 거지. 해영은 텅 빈 가방 맨 아래쪽에 잘 개킨 체크무늬 잠옷부터 넣었다. 해영이 가장 좋아하는 잠옷이었다. 그 위에 다음 날 입을 옷과 양말. 아, 양말은 바닷물에 젖을 수도 있으니까 두 개…. 그럼 운동화도 하나 더 챙겨야 하나. 안 챙겨도 되겠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마저 짐을 챙겼다.

꼭 필요한 것들로 두 번, 세 번 고민하고 넣었더니 확실히 아까보다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퍼를 꼭 닫고 널브러진 옷 따위를 천천히 정리했다. 붙박이장 안에 잘 개켜 놓은 옷들을 차곡차곡 쌓아 넣던 중,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해영의 발치에 떨어졌다.

“어, 이거….”

해영이 상자를 주워 들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사용감 없는 캐주얼한 가죽 시계가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생일날,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해영에게 선물을 전해 주는 건 언제나처럼 실장 아저씨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직접 고르신 거라며 건네받긴 했지만, 해영은 믿지 않았다. 이런 걸 직접 고르실 분이 아니니까. 분명 아저씨에게 부탁해 적당한 것을 사다 주라고 하신 거겠지. 해영은 받은 당일에도, 그 후에도 단 한 번도 그 시계를 착용하지 않았다. 도무지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본가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옷을 챙겨 넣을 때 딸려 들어온 모양이었다. 해영은 시계 상자를 다시 옷장 선반 위 깊숙이 밀어 놓고 문을 닫았다.

***

해영은 켜진 불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일 층 문을 열고 나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건우가 손을 흔들었다. 해영이 활짝 웃으며 가방끈을 꼭 쥐고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건우가 손을 들어 해영의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숙여 옆통수에 짧게 뽀뽀했다.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렸다. 골목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해영이 조금 망설이다가 발꿈치를 들어 올려 건우의 뺨에 그대로 쪽, 돌려주었다.

“가, 가자….”

멍하니 서 있는 건우를 뒤로 하고, 해영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다. 건우가 뺨을 감싸 쥐고 씩 웃으며 해영의 뒤를 쫓았다.

여유 있게 출발을 했더니 기차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역에 도착했다. 해영이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건우는 가방을 놓고 바로 옆에 있는 작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를 살 목적으로 들어왔지만, 해영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과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두 개, 그리고 간식 몇 개를 함께 구매했다. 편의점을 나오자 해영의 동그란 뒤통수가 바로 보였다. 벤치 아래로 해영의 다리가 붕붕 휘적이고 있었다. 귀여워. 휴대폰을 들어 그 발짓을 몇 초짜리 짧은 동영상으로 찍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건우가 벤치로 다가갔다.

“뭐를 많이 샀네?”

내용물이 궁금한지, 해영이 건우가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에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건우는 해영의 옆자리에 앉아 봉투 안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꺼내 해영에게 내밀었다.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든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하나를 해영의 손에 쥐여 주고, 다른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고등학교 때 매점에서 이거 엄청 먹었거든요. 오랜만에 보여서 사 왔어요.”

해영도 그를 따라 끝부분을 한 입 머금었다. 초콜릿 맛이 진하진 않아도 부드러워 맛있었다. 초콜릿보다는 초코 우유 맛과 비슷했다.

“저 학교 다녔을 때 어땠을 거 같아요?”

“말 안 들었을 거 같아….”

준비해 둔 것처럼 여과 없이 뱉는 답에, 건우가 코끝으로 웃었다.

“모범생은 아니었어도 사고 치고 다니진 않았어요. 다 귀찮아하긴 했지만.”

그는 해영의 입가를 보더니 편의점 봉투 안에서 냅킨 한 장을 꺼내 슥슥 닦아 주었다. 해영이 황급히 그가 문지른 부근을 더듬었지만, 이미 한 번 훑고 지나간 곳은 손에 걸리는 게 없었다. 건우는 어느새 다 먹은 아이스크림 뚜껑을 닫아 빈 봉투 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는 엄청 조용했을 거 같아요. 말 잘 듣고, 지각도 안 하고.”

“어, 어떻게 알았어?”

“뻔하죠. 딱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우등생.”

“너랑 같은 반이었으면 친해질 일도 없었겠다.”

“아닐걸요.”

건우가 해영을 향해 씩 웃었다.

“내가 공부 가르쳐 달라고 맨날 수작 부렸을걸.”

해영은 그를 멍하니 마주 보며 아이스크림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와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교실에 앉아,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어쩌면 그 소문도 나지 않은 채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건우라면 그런 소문을 들어도 별 신경 안 쓸 것 같기도 하고.

기차에 올라탄 해영은 금방 잠이 들었다. 처음엔 신이 난 얼굴로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입까지 헤벌리고 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우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색색 규칙적으로 작은 숨을 내쉬는 해영을 건우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제 제대로 못 잤나. 허벅지 옆을 간질이는 해영의 손을 잡아다 깍지를 끼고 제 다리 위에 올려 두었다. 건우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다.

해영은 몸이 살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뜨자마자 보이는 창밖의 풍경이 생소했다. 멈춰 선 기차, 그리고 어수선한 사람들.

“다 왔어요.”

건우가 해영의 다리 밑에서 그의 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강릉이었다.

“숙소는 어디야?”

“거의 다 왔는데. 아, 저기예요.”

해영의 물음에 건우가 택시 차창 밖을 가리켰다.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그 호텔을 확인한 해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별로예요? 다른 데 알아볼까요?”

해영의 좋지 않은 표정을 본 건우가 물었다.

“아니야.”

잽싸게 고개를 저은 해영이 눈을 접어 웃었다.

건우가 리셉션에서 체크인을 하는 동안, 해영은 로비 소파에 멍하니 앉아 호텔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에 큼직하게 걸린 SJ 로고. 해영은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으로 바지를 구겨 쥐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처음으로 학교에 희망 대학과 학과를 제출한 날이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잘 드시지도 않던 약주를 하시며 해영을 불렀다.

‘경영을 배우고 싶다고?’

‘네…. 서정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왜.’

못마땅하다는 듯 굳어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다시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내 아들이라고 해서 꼭 거기서 일할 필요는 없다.’

그 말에 울컥하던 감정도.

‘제가 많이 모, 모자라서 성에 차지 않으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해영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무서웠다. 계속해서 쓸모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또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배, 가요.”

“어, 어….”

어느새 카드키를 받아 온 건우가 해영을 불렀다. 해영은 고개를 작게 털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방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보이는 풍경에 해영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그는 눈을 반짝이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우와….”

커다란 창문으로 호텔 앞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하얀 침대 옆의 그 풍경이 마치 액자 같았다. 해영은 들뜬 얼굴로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홀린 듯 창문 가까이 붙었다. 벽 하나가 통 유리로 되어 있어 당장이라도 발밑이 꺼질 것처럼 위태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다가서지 않고 못 배길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해영이 정신없이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건우는 욕실이며 침구 등을 살폈다. 룸 컨디션을 꼼꼼하게 확인한 건우가 그제야 가방을 놓고 해영에게 다가갔다. 멍하니 창문 너머를 보는 뒤통수가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는 여행이고 뭐고, 일박 이일 동안 여기 틀어박혀서 물고 빨고 싶은데. 등 뒤에 바짝 붙어 해영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자, 그가 몸을 돌려 올려다본다.

“배 안 고파요?”

“고픈데… 바다 먼저 보고 싶어. 그래도 돼?”

네, 건우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해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러 비비고 나서야 품에서 놓아주었다.

고대하던 해변에 도착했으나, 해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여름의 해수욕장은 물보다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래사장 전체가 인파로 빼곡했다. 바다를 코앞에 두고서 큰 시련에 직면한 해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빼 들며 바다를 보기 위해 애썼지만,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해영이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뗐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해영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하며 인파를 헤쳤다.

한참을 정신없이 앞으로 가고 있을 때, 해영의 앞으로 커다란 튜브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순간 허리에 팔이 감겨 뒤로 당겨졌다. 덕분에 우스꽝스럽게 튜브에 치이는 꼴은 면했으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해영이 왔던 길로 몸을 돌리며 제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건우에게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해영은 건우가 발라 주는 대게를 실컷 받아먹고, 아이스크림까지 해치우고 나서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에그 타르트 가게에 들러 포장을 하고 택시를 탔다. 호텔로 돌아가던 도중, 건우가 차창 밖을 보다가 갑작스레 요청했다.

“기사님. 죄송한데 여기서 세워 주시겠어요?”

건물 하나 없는 텅 빈 도로 위였다. 호텔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긴 했지만,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왜 그러지. 택시 기사는 별말 않고 차를 세워 주었고, 내릴 때까지도 해영은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따랐다.

“왜 내렸어?”

“이리 와요.”

건우는 씩 웃으면서 해영의 손을 꼭 잡고 도로 중간에 나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투박한 돌계단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은 티가 여실 났다. 이끼가 듬성듬성 끼어 있고, 양쪽으로는 잡초가 무성했다. 해영은 발 아래를 살피며 건우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앞에서 훅 불어오는 바다 내음에 고개를 들었다.

“아….”

눈앞에는 해영이 그리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멍한 얼굴로 모래 위를 사박사박 걸었다. 좌우가 시커먼 바위로 가로막힌 작은 모래밭은, 아까 해영이 봤던 해수욕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러나 이곳에는 건우와 저뿐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모래 위에 처음으로 흔적을 남긴 사람이 되어, 어떠한 방해도 없이 눈앞의 지평선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여기면 사람 없어서 보기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해영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실망한 게 티가 났나. 혼자 온 여행도 아닌데 마음 쓰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뭐, 감으로.”

건우가 웃으며 답했다. 해영은 다시 그가 제게 준 선물을 마음껏 음미했다. 때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다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누, 누가 봐….”

“아무도 없잖아요. 괜찮아요.”

아, 해영은 그제야 안심하고 제 손을 건우의 손등 위로 덮어 꼭 잡았다. 해영의 어깨에 입술을 비비던 건우가 그의 옆통수에 느른하게 뺨을 기댔다.

“너무 예뻐, 건우야….”

해영이 저물어가는 해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그 말에 건우가 해영을 내려다보았다. 노을을 담은 눈이 어여뻤다.

“그니까요. 너무 예쁘다.”

건우는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속에서 말을 골랐다.

안경태를 만난 날 이후, 해영은 그가 했던 말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말로는 지나간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면서도 사귀는 사람이랑 여행을 와 봤는지 묻기도 했고, 뭐 하나를 할 때마다 처음 해보는 거냐고 확인하듯 질문을 퍼부어 댔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화낼 거리가 아니라서 택한 해소법이겠지만, 건우는 차라리 화를 내 주었으면 했다. 그가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게 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속에 있는 것을 온전히 다 보여 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이해는 갔다. 그의 말처럼 지나간 일이니까 말을 꺼내기 어려웠겠지.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 가지고 마음 쓰게 두고 싶지 않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나누기에도 부족하니까. 건우가 해영을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누구한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거 선배가 처음이에요.”

“저, 정말…?”

빈틈없이 꽉 안긴 해영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건우는 그 뺨에 쪽쪽 연달아 입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좋다고 따라다닌 것도, 이만큼 누구를 좋아한 것도 처음이고.”

느리게, 하나하나 뱉어내는 고백을 잠자코 듣던 해영이, 그렇게 감탄하며 보던 노을도 등지고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발갛게 익은 얼굴로, 눈에는 노을 대신 애정을 그렁그렁 달고서.

“선배가 질투해 주는 건 좋은데, 그걸로 너무 속상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해. 지나간 일인데도 싫어서….”

그렇게 말하는 해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가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이는 것을 주저할 때마다, 건우는 속이 쓰렸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매번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제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화를 내고 서운하다고 울고 소리를 질러도 실망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잘했다고, 말해 줘서 고맙다고 칭찬을 했으면 했지.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말보다 행동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오늘처럼 용기 내서 속을 보여 줄 때마다, 멀어지기는커녕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것이다. 안을 모조리 뒤집어 까도 안심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적어도 제 앞에서만큼은 참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너를 생각보다 더 좋아하나 봐. 자꾸 요, 욕심이 나네.”

그 말에 건우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더 마음껏 욕심내도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뭐라고 답해 줄까.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까 너무 좋다.”

해영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노을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자, 잠깐만….”

건우는 호텔 방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해영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입술을 맞물렸다. 채 벗지도 못한 신발은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손을 올려 양 뺨을 붙들고 촉, 촉 연달아 입을 맞추자, 꼭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응….”

다시 깊게 입을 맞추며 침대가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밀어붙였다. 뒤가 보이지 않는 상태로 뒷걸음질 치던 해영이 막연한 두려움에 손을 올려 건우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곧이어 해영의 무릎 뒤쪽으로 침대 가장자리가 툭 닿았다.

“아!”

놀란 해영이 다급하게 안은 팔에 힘을 주었지만, 건우는 오히려 그를 밀어 폭신한 침대 위로 눕혔다. 건우가 허리를 숙여 다시 입을 맞췄다. 바다 앞에서 조금 빨았다고 그새 부어오른 입술 위를 혀를 내어 핥았다.

“흐으….”

폭풍처럼 쏟아지는 입맞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진득하게 따라붙는 입술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옮겨진다. 코를 박고 크게 들이마시다가 입술을 벌려 예민한 목덜미를 춥, 약하게 빨아 올렸다.

“잠깐만…. 아….”

“하아….”

건우가 버둥대는 해영의 양 발목을 붙들고 침대 위로 밀어 올렸다. 발끝까지 모두 침대 위에 올라간 해영이 무릎을 세웠다. 건우는 해영의 동그란 양쪽 무릎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그 사이를 파고들어 몸을 가까이 붙였다.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신이 없었다. 건우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쪽 팔로 제 몸을 결박하듯 안은 채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며 어깨와, 허리,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섬세함과 거리가 먼 우악스러운 손길에도 금세 몸이 달아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태가 된 걸까. 성적인 행위를 좋아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듯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허벅지를 지분대던 손이 허리춤에 닿았다. 잘그락, 바지 버클에 손톱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씨, 씻고…!”

해영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건우의 움직임이 뚝 멎더니, 당황한 얼굴을 한 해영의 뺨에 입술을 꾸욱 누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른 씻고 올게요.”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서 해영의 발목을 들어 쪽 입을 맞추더니 욕실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만 들어 욕실 쪽을 힐끔 살핀 해영이 풀썩 뒤통수를 떨구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 그대로, 가슴팍 위에 양손을 모아 잡고 숨을 헐떡였다.

“후우…. 하아….”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덜컥, 욕실 문이 열렸다. 따끈한 공기가 밖으로 훅 끼쳤다. 물소리가 멎었을 때부터 문 옆을 지키고 있던 해영이 재빨리 건우와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욕실 문을 기대고 서서 쿵쿵대는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너무 떨리는데. 하다가 쓰러지는 거 아닌가. 숨을 깊게 내쉬고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가지고 온 옷가지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손을 씻었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이 울긋불긋 엉망이었다. 찬물에 대고 있던 손으로 뺨을 식히고 샤워 부스로 몸을 들였다.

입고 있던 옷을 천천히 벗어 개켜 두고, 문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건우가 사용하던 부스 안은 따뜻한 수증기로 가득했다. 포근한 온도가 맨살을 감쌌다. 마치 그가 안아 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적당한 온도로 물을 조정하고 그 아래로 발을 들였다. 어렸을 때부터 해영에게 씻는 행위란, 그날 있었던 안 좋은 기억들을 씻어 내는 의식과도 같았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뒹굴던 몸을 밤마다 깨끗하게 씻어 냈고, 어머니와 살 땐 그녀의 손에 의해 ‘더럽고 못난 자식’이 벅벅 씻겨졌다. 아버지 집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 집에 조금이라도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강박적으로 청결한 상태를 유지했다.

건우를 만난 뒤로 그런 생각이 줄었다. 씻어 내고 싶은 일이 손에 꼽았고, 오히려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은 기억으로 가득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처음 와보는 낯선 여행지에서, 그는 어김없이 꿈같은 장면들을 잔뜩 선물해 주었다.

해영이 물줄기 아래로 몸을 완전히 넣었다. 머리에서부터 목을 지나 온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의 느낌이 선연하다. 씻는다고 안 좋은 기억들이 지워지는 게 아니듯, 씻는다고 오늘의 좋은 추억들이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걸 안다.

거품을 씻어 내고 레버를 잠갔다.

바디 타올로 물기를 닦은 뒤 부스 문을 열었다. 한기에 몸이 잘게 떨렸다. 잠옷이 있는 선반으로 손을 뻗던 중, 해영이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해영이 손을 거두고 거울 앞에 서서 멍한 얼굴로 제 몸을 보았다. 깨끗하고 화려한 거울에 비친, 그와 대비되는 볼품없는 몸.

여기저기 손톱으로 긁은 자국 그대로 나 있는 흉터들이 흉했다. 손을 올려 하나하나 더듬었다. 어깨 위로 난 상처부터, 가슴 한가운데에 그어진 것도, 옆구리를 덮은 것도. 어느 하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없었다.

실망하면 어쩌지. 아니, 이걸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해영은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건우가 머뭇거리는 얼굴로 제게 손을 대기를 주저하거나 거북한 기색을 내보이는 상상을 하자, 속에서 울컥 자기혐오가 치솟았다. 습기를 머금은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서.

좋은 여행지에, 좋은 호텔에 오면서 기대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까도 봐. 건우는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애정을 퍼부었다. 그걸 제가 다 망치게 생긴 거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얘기하자. 요즘은 좋은 연고도 많으니까 열심히 바르면 지금보다 옅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없어지지 않으면 피부과라도….

해영이 옷을 집어 입고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천천히 잡아 돌렸다. 울지 말고 얘기하자. 걱정하니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던 건우가 고개를 빼들었다.

“나 모, 못 하겠어….”

해영은 차마 건우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욕실 발매트 위에 서서 말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건우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해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해.”

거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퐁퐁 솟았다. 한번 터진 울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해영이 양 손바닥으로 바지런히 눈물을 닦아 내는 사이, 건우가 해영을 향해 양팔을 넓게 벌렸다.

“안 해도 돼요. 이리 와요.”

해영은 엉엉 소리 내 울면서 터벅터벅 다가가 그 팔 안으로 풀썩 안겼다.

“흐, 미안….”

건우가 해영의 허리와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제 허벅지 위로 들어 앉혔다. 무서운 건가. 아이를 달래듯 다리와 등을 감싸 안고 어깨를 천천히 다독였다. 그럼에도 쉽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으나, 해영은 건우의 목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어 꼭꼭 숨기기 바빴다. 하는 수 없이 옆통수에 입을 맞추고 안은 몸을 좌우로 둥실둥실 천천히 흔들었다.

샤워의 여운으로 발갛게 익어 있던 살이 제 색을 찾을 때까지 바짝 긴장한 몸을 쓸어 주니, 점차 훌쩍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건우가 해영의 어깨를 쥐어 몸에서 떼어냈다. 아까처럼 숨기진 않았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해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버텼다. 건우는 그 뺨을 양손으로 붙들고 들어 올려 눈가에 남은 물기를 엄지로 슥슥 닦아 주었다. 그렇게 울고도 더 울 게 남아 있었는지, 힘을 준 입술이 쭈글쭈글하게 구겨진다. 건우가 픽 웃으며 그의 뺨을 한손으로 모아 잡았다. 몰캉한 입술이 붕어처럼 오므라든다. 벌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했으나, 이내 힘을 이기지 못한 입술이 퐁 하고 벌어졌다.

“하, 하지 마….”

입모양에 의해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경고하듯 엄한 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건우가 고개를 숙여 모아진 입술 위로 뽀뽀를 퍼부었다. 그러다 실컷 울어 붉어진 코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 장난치자 그제야 해영의 입에서 푸, 웃음이 샜다.

건우가 해영의 몸을 반 바퀴 돌려 제 다리 사이에 마주 보도록 앉혔다. 해영의 발가락이 건우의 뒤에서 꼼지락거렸다.

“시, 실망시켜서 미안….”

“선배.”

해영의 거듭되는 사과에 건우가 얕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제 시선을 피하는 해영을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 혼자 좋자고 하는 거 아니에요. 선배랑 저, 둘이 하는 거예요. 둘 중 한 명이라도 싫으면 안 해야 하는 거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영이 몸을 화들짝 튀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은 거 아니야….”

“그럼 무서워요?”

해영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건우가 저에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섭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해영이 입술을 벙긋거리다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긴 했지만, 제 치부를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목소리를 낼 때까지 건우는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냥, 내가 너무…. 흐…. 너무 볼품이 없어서….”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건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네가 내 휴, 흉터 보고…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선배.”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에 해영이 움찔 떨었다.

“조,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안 될까…. 요즘은 치료도 좋은 거 많대. 열심히 받아 볼게. 정말 조금이면 될 것 같은데….”

해영이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건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기 연애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미리 말했어야 했다. 듣고 나서 저를 더 이상 안 좋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걸로 속여서는 안 됐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가졌던 걸 도로 빼앗기는 느낌일 것이다. 그래도, 만약 혹시라도 건우가 기다려 주겠다 말을 한다면,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제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건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뒤 그가 안고 있던 해영의 몸을 들어 옆에 앉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입고 있던 티셔츠 아래쪽을 잡고 단번에 끌어 올렸다. 갑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 반나신에 해영이 몸을 움츠렸다.

그대로 해영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건우가 해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검지를 펼쳐 쥔 채 제 쇄골 아래쪽으로 가져갔다. 해영의 손가락 끝에 오돌토돌 작은 요철이 느껴졌다.

“여기는 어렸을 때 뛰어다니다가 나뭇가지에 찔려서 생긴 거예요.”

이번엔 그 손을 왼쪽 어깨로 가져갔다.

“여기는 중학교 때 계단에서 굴러서 꿰맨 자국이고.”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해영의 손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오른쪽 팔로 이끌었다. 거기엔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화상 흉터가 있었다.

“이건 초등학교 때 누나 라면 끓여 주다가 데인 거.”

건우가 해영의 손에 깍지 껴 단단히 잡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흉해요?”

해영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도 흉하지 않았다. 분명 저번에도 웃옷을 벗고 있었는데, 그가 가리킨 흉터 하나하나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보기 싫거나 그래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건우가 해영의 동그란 양쪽 무릎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선배가 무섭다거나, 하고 싶지 않다거나, 그런 거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근데요. 제가 실망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면, 그건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해영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제게는 이게 그중 하나였다.

단순히 흉터의 정도나, 모양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흠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했다.

여전히 두려웠다. 그를 좋아하는 만큼,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함께 자라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새로이 고개를 내밀었다.

만약 보고도 실망하지 않으면. 전과 같은 눈으로 저를 봐준다면.

뜀박질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해영은 떨리는 손으로 제 티셔츠 아랫자락을 꼭 쥐었다.

어머니의 집에서 쫓겨난 후로 누군가에게 제 몸을 실오라기 하나 없이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었다. 해영은 눈을 감거나 피하는 대신, 건우와 시선을 맞추고 천천히 옷을 들어 올렸다. 맨 살갗에 외부 공기가 닿아 얕게 소름이 돋았다. 해영이 티셔츠를 머리까지 완전히 빼냈다.

건우는 저와 맞추고 있던 눈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목에서 어깨로, 가슴팍을 지나 곳곳을 느릿하게 훑었다. 해영은 이를 악물었다. 숨고 싶다. 손에 쥔 티셔츠를 세게 구겨 쥐고 버텼다. 괜찮아. 그냥, 그냥 보는 거니까.

음욕에 젖은 눈으로 해영의 몸을 시선으로 핥아 내리던 건우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해영이 말했던, 그 흉터들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저에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어서 끙끙 앓고 고민한 그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기뻤다. 눈물을 보일 정도로 혼자서 걱정했을 마음이 안쓰럽고 예쁘다. 그리고 아마도, 처음으로 내었을 그 용기가 고마웠다.

“하…. 너무 예쁘다.”

건우가 멍한 얼굴로 해영의 몸을 쓰다듬으며 줄곧 하고 싶던 말을 토해냈다.

손끝에 닿는 몸이 움찔한다. 건우는 그제야 제가 뱉은 말을 되뇌고, 당황한 얼굴로 설명했다.

“아, 흉터가 예쁘다는 게 아니고, 아니 이것도 예쁜 건 맞는데요…. 그냥 선배가 너무 예뻐서-.”

혹여나 해영의 아픈 곳을 저도 모르게 건드린 건 아닐지, 가볍게 여긴다고 오해하진 않을지. 걱정되는 마음에 횡설수설하는 건우를 바라보던 해영이 작게 웃었다. 숨소리처럼 작은 웃음에 건우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해영의 손이 건우의 손등 위에 얹어졌다.

건우가 좋다.

소중한 사람에게 또다시 버려질까 두려운 마음보다, 지금을 함께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커서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발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해도 모를 것이다. 아니, 안다고 해도 앞으로 가는 걸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제게 선물해 주는 순간들은 모두 그만큼 간절하고 좋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너무 좋다.

“좋아해….”

그 말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기쁘게 웃어 주는 얼굴이 좋다.

“저도요. 저도 많이 좋아해요.”

해영이 그의 목에 팔을 감자, 건우가 몸을 일으켜 해영의 위를 덮었다.

건우의 손이 해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발갛게 달뜬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축 처진 눈에는 여전히 미약한 망설임이 남아 있었지만, 싫거나 도망가고 싶은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전과 달리 호기심과 궁금함이 더해진 눈이었다. 건우는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내려 해영의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입술을 포갰다.

해영이 눈을 질끈 감는다. 말랑한 입술 안쪽으로 긴장한 듯 침을 꿀떡 삼키는 움직임이 전해졌다. 건우가 웃으며 닫힌 입술 위로 쪽쪽거리며 쪼듯이 입을 맞췄다. 해영이 허리를 비틀었다. 닿아 있는 맨 가슴팍이 서로 비벼졌다. 조급해진 건우가 해영의 허리를 더듬었다. 겉으론 한껏 여유 있는 척 굴고 있었으나, 속사정은 달랐다. 살갗 위를 급하게 지분대는 손길에 해영이 긴장으로 몸을 굳히며 입술을 더 굳게 다물었다.

“입, 열어 주세요.”

해영이 감았던 눈을 뜨고 눈치를 살피다 입술을 작게 벌렸다.

“혀도 내밀고.”

“응…?”

“얼른. 그래야 빨아 주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작고 발간 살덩이를 천천히 내민다. 저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짓궂은 요구에 원망이라도 하고 있을까. 아무런 반응 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해영이 눈을 도로록 굴리며 혀를 조금 더 내밀었다. 점점 더 놀리고 싶어져서 큰일이네.

해영의 턱을 쥐고 아래로 꾹 눌렀다. 입이 더 크게 벌어진다. 고개를 기울여 살덩이를 입술로 머금어 쪽쪽 빨았다. 방 안 가득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와,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간지럽게 퍼졌다.

“으응….”

해영이 건우의 목에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해영은 먼저 스킨십을 해오는 일이 적었지만 접촉을 좋아했다. 몸이 떨어져 있을 땐 이런 것에 영 관심 없는 척 굴다가도, 안아 주거나 입을 맞추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어리광을 부린다. 본인은 의식하지 않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래에 피가 몰려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건우는 이것을 그에게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다.

한 팔로 해영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 올리고 입술을 빈틈없이 겹쳤다. 혀를 맞대어 비비며 허리를 더듬던 손을 움직였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갈비뼈를 지나, 부드러운 가슴팍 위로 손을 가져갔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작은 돌기를 엄지로 짓뭉갰다. 해영의 허리가 다시 한번 비틀린다. 건우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단단히 붙들었다.

“흐읏, 아아….”

살짝씩 벌어지는 입술 틈새로 뱉어지는 신음이 달았다. 헐떡이는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몸을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에 입술을 비벼대다, 쇄골을 지나 가슴까지 닿았다. 해영이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꼭 쥐고 버텼다. 건우가 입술을 벌려 유두를 머금었을 땐, 무릎을 세우고 발끝으로 이불을 밀어내며 다급하게 말했다.

“건우야. 자, 잠깐만….”

“하아….”

건우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 위로 혀를 세웠다. 어깨를 붙잡고 있는 해영의 손을 잡아 제 뒤통수에 갖다 대고 눈을 위로 치켜떴다. 해영이 움찔 떨었다. 제 젖꼭지를 빨면서 흥분한 눈을 마주하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해영이 손을 움직여 건우의 머리칼을 천천히 헤집었다. 건우가 하체를 밀착했다.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욕구에 숨이 막혔다. 건우는 쪽, 쪽 소리 나게 돌기를 빨아 올리면서,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내려 바지 위로 해영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으, 아….”

해영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건우의 눈이 그 반응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당장이라도 이 천 쪼가리를 벗겨 그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건우가 해영의 바지 위 밴드로 손을 가져갔다. 원하는 걸 조르는 사람처럼 해영의 입술에 여러 번 짧게 입을 맞추며 밴드를 만지작댔다.

“하고 싶어요.”

건우가 흥분으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해영의 얇은 반바지 위로 단단해진 성기끼리 마주 비비면서 말을 이었다.

“저번처럼 이렇게, 비비는 거 말고.”

양손으로 해영의 볼기를 힘껏 잡아 벌렸다. 해영의 몸이 얕게 튀었다.

“아흑…!”

“여기에.”

건우가 붉어진 해영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물었다.

“하아…. 해도, 돼요?”

솔직히 한계였다. 실낱같이 남은 이성으로 허락을 구했다. 박동이 크게 울리는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 위를 빨고 흡입하며 건우는 속으로 바랐다. 된다고 말해요. 같은 말을 수없이 되뇌던 끝에, 해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건우가 곧바로 해영의 바지와 브리프를 한 번에 끌어 내렸다. 발기한 성기에 바지 밴드가 걸렸다 퉁 튕겨졌다. 커다란 손으로 해영의 성기 윗단을 감싸 쥐고 위아래로 문질렀다.

“으흣, 흐…. 으응….”

해영이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바르작거렸다. 아까부터 차곡차곡 쌓인 흥분 때문에 잠깐의 접촉에도 당장 쏟아낼 것처럼 아래가 욱신거렸다. 그만 만졌으면 하는 마음과, 조금 더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건우가 해영의 무릎 아래에 걸려 있던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겨냈다. 양쪽으로 벌어진 다리 사이로 움찔거리는 성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흥분의 증거로 줄줄 흘러내린 투명한 선액이 건우의 손바닥을 적셨다. 그것을 해영의 것에 펴 바르며 흔들었다. 찌꺽찌걱, 젖은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흑! 건, 건우야…. 하읏, 잠, 아!”

“물 엄청 나오네.”

해영이 헐떡이며 신음했다. 치미는 사정감에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순간이었다. 건우가 손을 떼어 냈다. 자극으로 붉어진 성기 끝이 아쉬운 듯 움찔움찔 떨렸다. 해영이 팔을 떼고 원망 어린 시선으로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조금만 더 하면 갈 것 같았는데. 당장이라도 제 손을 가져가 만지고 싶은 것을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건우가 그의 어깨를 잡아 몸을 뒤집었다. 발딱 선 성기가 시트에 비벼지는 느낌이 묘했다. 해영이 눈을 꼭 감고 앓자, 건우가 베개를 들어 해영의 머리 아래에 넣어 주었다.

“엎드려야 더 편하다고 해서요.”

건우는 그렇게 말하고선 돌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는 바지도 안 벗고. 바깥으로 훤히 드러난 맨 엉덩이가 부끄러웠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건우는 소파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뒤적였다. 그사이 해영은 엉덩이를 가릴 이불을 찾았다. 이불은 한창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침대 가장자리에 엉망으로 뭉쳐져 있었다. 팔이 안 닿는데. 결국 포기하고 베개에 얼굴을 콱 묻었다. 건우가 다시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리자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아, 귀여워.”

건우는 제 마음도 모르고 실실 웃더니 허리를 숙여 해영의 엉덩이에 쪽, 입을 맞췄다.

“하, 하지 마….”

“어떻게 여기만 살이 올랐지.”

해영이 손을 내려 가렸지만, 건우는 반대쪽 엉덩이까지 입을 맞추고 나서야 떨어졌다. 침대 위로 다시 올라온 그는 일자로 쭉 뻗은 해영의 다리를 모아 제 무릎 사이에 가두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살이 올라붙은 엉덩이가 은밀한 곳을 꼭꼭 숨기고 있었다. 건우는 젤 튜브를 양손바닥 안에서 살살 굴리며 온도를 식혔다. 해영이 씻는 동안 찾은 팁 중 하나였다. 너무 차갑지 않게. 미지근해진 젤 뚜껑을 열고 손바닥 위에 적당히 짜냈다. 너무 많은가. 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재빨리 반대쪽 손바닥에 반 정도를 덜었다.

“아.”

건우가 허망한 얼굴로 해영의 꾹 닫힌 엉덩이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해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왜 그래….”

“손으로 좀 벌려 주세요.”

“어?”

또 놀리는 건가. 해영이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허나 이번에는 결단코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건우는 당당했다.

“저 손이 모자라서 그래요.”

“흐으….”

해영이 흐느끼며 마지못해 제 엉덩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벌벌 떠는 손으로 약하게 잡아 벌리자, 보이지 않던 구멍이 드러났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미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건우가 뽀얀 엉덩이 사이로 젖은 손을 가져갔다. 중지와 약지를 모아 구멍 위를 살살 문질렀다.

젤의 낯선 느낌이 예민한 곳에 닿자, 해영이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엉덩이를 쥔 손을 놓지 않는다. 건우가 몸을 숙여 해영의 목 뒤에 쪽쪽, 입을 맞추며 중지 하나를 충분히 적신 입구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놀란 해영이 건우의 팔목을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자, 잠깐만….”

“아파요?”

해영이 고개를 저었다.

“느낌이 이, 이상해서….”

건우가 널브러진 수건에 반대쪽 손을 닦아낸 뒤 해영의 몸 아래로 팔을 넣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입을 맞추며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저릿할 정도로 빠듯하게 감싸는 내벽의 느낌이 자극적이었다. 해영은 이물감에 덜덜 떨면서도 저를 안은 팔을 붙들고 참아냈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 아직은 버틸 만했으나,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한 느낌에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으로 발기해 있던 해영의 성기가 어느새 힘을 잃었다.

건우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너무 좁은데. 계속 해도 되는 건가. 처음으로 낯선 침입을 마주한 구멍은 잔뜩 긴장해 손가락 두 개를 꽉 물고 조여서 조금만 움직여도 다칠 것같이 불안했다. 손가락 사이의 젤을 안에 펴 바르듯 밀어 넣고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자, 내벽 안쪽이 크게 움찔한다.

“흐윽….”

건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해영의 입에서 나온 신음은 흥분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통증을 참아내는 소리였다. 속이 욱신거렸다. 좋다고 날뛰는 놈 받아 주느라 힘든 걸 참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안 좋았다. 아프게 하느니 안 하는 게 백 번 낫지. 건우가 미안한 마음에 하던 것을 멈추고 안에 치덕치덕 발라 놓은 젤을 긁어내려 손가락을 구부린 순간이었다.

“하읏!”

해영의 몸이 위로 튀었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건우가 눈을 번뜩이며 방금 전에 누른 곳을 한 번 더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아아…. 자, 잠깐, 흐….”

해영이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건우가 그의 턱을 잡아 옆으로 돌렸다. 촉촉하게 젖은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 뺨에 입술을 묻었다.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어 그 부근을 집중적으로 짓뭉개자 해영이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찔꺽찔꺽, 젤로 축축하게 젖은 입구에 손바닥 윗부분이 빠르게 부딪혔다. 해영이 허리를 살살 움직여 시트 위에 성기를 비볐다.

“흐으…. 읏, 아흐, 흑, 아아!”

사정 직전까지 갔던 성기는 빠르게 절정에 이르렀다. 엉덩이가 부르르 떨리고, 배 아래가 희뿌연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을 뱉던 해영이 숨을 헐떡였다.

“씹….”

손가락을 물고 있는 몸 안쪽이 경련했다. 당장이라도 제 것을 끝까지 쑤셔 박고 싶었다. 건우는 여전히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는 해영의 입술에, 뺨에, 어깨에 차례로 키스했다.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자 그것조차 자극이었는지 해영의 허벅지가 한 차례 더 크게 움찔했다.

“하으….”

구멍이 뻐끔 벌어졌다 다물린다. 상체를 세워 그 광경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건우가 한손으로 지퍼를 내렸다. 동작에 여유가 없었다. 드로즈 위로 아플 만큼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바지와 드로즈를 한 번에 잡아 내렸다. 해영의 엉덩이 위로 딱딱한 것이 툭 닿았다. 그 생경한 느낌에 해영이 고개를 돌리고 다급하게 저지했다.

“흐, 잠깐만…. 조금 쉬었다가 하면….”

건우는 대답 대신 콘돔을 뜯었다.

“천천히 할게요.”

건우가 콘돔을 씌운 성기 위에 젤을 치덕치덕 바르며 해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해영이 베개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보고 싶은데.

해영이 씻는 동안 인터넷을 뒤져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엎드린 자세가 가장 몸에 부담이 덜 가고 느끼기 쉽다고 했다. 해영도 저도 처음이니 쉬운 것부터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택한 자세긴 한데. 해영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건우가 아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지 어떤지 알기도 어렵겠네. 해영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숨을 내쉬고 손을 뻗어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제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그가 버거워하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바짝 긴장한 허리를 쓸어내리고 엉덩이를 쥐어 벌렸다. 그 사이에 성기를 대고 살살 문지르니, 해영이 몸을 떨었다.

건우가 허리를 숙여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베개 아래로 손을 넣어 해영의 손을 하나 꺼냈다. 손등 위로 깍지를 껴 침대 위에 결박하듯 눌러 잡았다. 그러자 해영이 손을 오므려 마주 잡아온다. 건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상체를 세우고 허리를 더 진득하게 쳐올렸다. 금방이라도 쑤셔질 것처럼 구멍 위로 아슬아슬하게 비벼지는 느낌에 해영이 이를 악물었다. 건우가 기둥을 잡고 움찔대는 입구에 맞춰 허리를 꾹 눌렀다.

“아….”

젖은 귀두가 빠듯하게 조이는 곳을 벌리고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범벅이 되도록 젤을 발랐는데도 쉽지 않았다. 꽉 조여 무는 압박감에 건우가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트렸다. 아래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흐으, 윽….”

해영이 맞잡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베개를 이로 물었다. 건우가 보이지 않으니 더 긴장이 되어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건우가 밀어 넣는 것을 멈추고 해영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랬다. 다 넣어서 멈춘 건가. 손가락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해영이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다, 다 넣었어…?”

뒤에서 난감한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이요.”

“어, 얼마나 넣었어…?”

건우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숙여 해영의 날개뼈에 입술을 비볐다.

“얼마나 넣었냐구….”

대답을 피하려는 듯한 행동에 해영은 더 초조해졌다. 건우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전부터 사정하지 못해 저릿한 통증이 느껴질 만큼 단단해진 성기는, 끄트머리만 겨우 들어간 채로 괴로운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끝에만….”

“아, 아닌 거 같은데….”

해영이 희게 질린 얼굴로 애써 부정했다. 더 넣어야 한다니. 반도 안 들어온 게 이 정도라는 걸 깨달은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그만, 흐…. 그만 넣으면 안 돼…?”

해영이 얕게 흐느끼며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그만할까요?”

건우가 허리를 숙여 해영의 동그란 머리통에 입을 맞추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해영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아, 안 보여서….”

“아….”

그 말에 건우는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봤자, 그 안에 해영은 없었다. 해영이 필요로 하는 것에 더 집중했어야 했는데. 건우가 곧바로 허리를 물렸다. 그리고 해영의 어깨를 잡아 천천히 돌려 눕혔다. 베갯잇에 눈물 자국이 찍혀 있었다. 뺨을 양손으로 감싸 잡고 축축하게 젖은 눈가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해영이 팔을 뻗어 눈앞의 목을 끌어안았다. 건우가 그 귓가에 입을 맞췄다. 진득하게 핥아 올리다 말랑한 귓불에 이를 세워 약하게 깨물자 해영이 신음하며 몸을 움츠린다. 동시에 건우가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려 다시 하체를 맞붙였다.

“흐….”

달라진 자세에, 해영의 성기가 건우의 단단한 복부 위로 비벼진다. 힘을 잃어 말랑해졌던 것이 다시 경도를 더했다. 귀에서는 혀로 질척이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움찔거리는 구멍 위로 문질러지는 콘돔의 미끌미끌한 감촉까지. 정신을 붙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건우가 제 기둥을 붙잡고 다시 삽입했다.

“아아….”

확실히 조금 전보다 긴장이 풀린 건지 힘이 덜 들어가 진입이 수월했다. 허나 그것도 끝부분뿐이었다. 귀두를 삼킨 구멍이 재차 바짝 오므라들어 기둥을 조였다. 건우가 이를 꽉 물었다. 그 역시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녹녹하게 젖은 내벽이 빈틈없이 달라붙어 집어삼키듯 조여드는 느낌은 황홀했으나, 완전히 들어가지도, 빼지도 못한 모양으로 버티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인내심을 요구했다.

목에 매달려오는 몸을 팔로 끌어안았다. 허벅지 한쪽을 안아 벌리며 조금씩, 조금씩 구멍 안으로 저를 밀어 넣었다. 비좁은 내부에 처음으로 길을 낸다. 혹여나 다치진 않을까 중간중간 입구 근처를 더듬으며 천천히 허리를 눌렀다.

“흐으, 흑….”

내벽을 가르고 안을 가득 채우는 생소한 느낌에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반쯤 넣었을 땐, 부피감이 너무 심해 건우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저었다.

“너, 너무, 아…. 건우야, 하으….”

건우는 속으로 욕을 씹으며 해영의 뒤통수를 받쳐 안고 조금 더 욱여넣었다. 해영이 다리를 오므려 건우의 몸을 조였다. 더 이상은 힘들 것 같다는 표현이었으나, 겨우 참아가며 느리게 움직이던 건우에겐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 해영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양옆으로 잡아 벌리고 허리를 훅 쳐올렸다.

“하윽!”

마침내 뿌리 끝까지 삼킨 입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주름이 제 것을 콱 물고 버텼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안쪽 점막이 오물거리며 성기를 씹어댄다. 죽겠네. 해영의 온몸을 느른하게 쓰다듬었다. 그가 적응을 할 때까지 계속해서 뺨에도, 입술에도, 눈에 보이는 곳곳에 입을 맞추고 등과 허벅지를 지분대며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해영이 숨을 깊게 내쉬자, 안쪽까지 벌려진 내부가 움찔움찔 떨렸다. 저릿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건우가 허리를 슬쩍 뒤로 뺐다.

“잠깐, 아…. 흐윽, 움직이지, 마….”

해영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애원했다. 건우는 바로 움직임을 멈추고 그 얼굴 위로 다시금 뽀뽀를 퍼부었다. 해영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위에서 흥분에 절은 눈을 마주했다.

아팠다. 충분히 풀어 둔 탓에 당장 그만두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으나, 아릿한 통증이 아래서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하고 싶다고 말을 하면 건우는 지금이라도 하던 것을 멈추고 저를 꼭 안아 줄 것이다. 익숙한 입맞춤이나 몇 번 하다가 편하게 잠들겠지.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건우의 얼굴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얼굴이, 숨기지 않고 온전히 드러낸 욕구가, 필요를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몸짓이, 그를 좋아하는 마음 위를 충만하게 덮는다.

“처, 천천히….”

“너무 힘들면 꼭 말해요.”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가 그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르고 재차 허리를 물렸다. 연한 내벽이 쓸려 나가는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반쯤 빠져나온 성기를 다시 꾹 밀어 넣자,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윽, 아….”

“하….”

느릿하게 안을 드나들 때마다 배 안쪽이 간질거렸다. 찌꺽이며 성기가 드나드는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렸다. 더운 열기가 몸을 감싼다. 건우가 손을 뻗어 해영의 젖은 앞머리를 넘겨 주며 허리를 둥글게 짓눌렀다.

“으응, 아아!”

그 순간, 해영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비틀었다. 내벽이 강하게 수축하며 성기를 더 안쪽으로 빨아들였다. 성기를 쥐어짜는 자극에 건우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손을 내려 해영의 귀두 끝을 더듬자, 끝에서 투명한 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건우는 해영의 것을 주무르며 방금 전 반응했던 곳을 집중적으로 문질렀다.

“여기, 좋아요?”

“흐으, 으응…. 흑, 조, 좋아…. 아-.”

몇 번 문질러진 전립선은 이제 스치는 것만으로도 통증에 가까운 쾌감이 일었다. 내벽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성기는 닿지 않는 곳이 없어 조금만 움직여도 자극점에 비벼졌다. 건우가 허리를 탁, 탁, 얕고 빠르게 쳐올렸다. 쾌감에 절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몸을 끌어안고 속도를 더했다.

“으읏, 아, 아…. 응, 흐윽!”

“후우….”

길게 빼낸 성기를 퍽, 무게를 실어 찍어 올렸다. 해영이 도리질하며 건우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스스로도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건우의 등을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잘 짜인 근육들이 움찔거리는 것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좀 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몸 안까지 연결되어 있어도 여전히 부족했다. 빈틈없이 닿고 싶었다. 건우가 좋았다. 해영이 아래에서 쉴 새 없이 치고 오르는 쾌감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입을 벌려 눈앞의 어깨를 깨물었다.

“윽, 하아….”

건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해영이 온몸으로 내보이는 소유욕에 머리가 어질했다. 한계까지 부푼 성기를 걸치듯 빼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해영이 갑작스레 멀어지는 온기를 좇아 팔을 뻗었지만, 건우는 끌어안는 대신 해영의 양팔을 단단하게 붙들고 허리를 콱 쳐올렸다.

“아, 흑!”

해영이 건우의 팔을 교차하여 마주 잡고 무게를 실어 버텼다. 건우의 허벅지 위에 올려진 다리가 한껏 벌어져 안쪽이 부들거렸다. 건우는 제 아래에서 온몸을 비틀며 신음하는 몸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퍽, 퍽 빠르게 찍어 올렸다.

“거, 건우야…. 아아…. 흑, 아!”

“하, 진짜….”

해영은 다시 한번 밀려오는 사정감에 정신없이 헐떡였다. 아랫배가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해 줬으면. 급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지, 건우의 움직임 또한 여유가 없었다. 온갖 액체로 범벅이 된 아래에서는 찔꺽거리며 외설적인 소리가 난무했고, 더 이상 통증이 아닌 열감과 쾌감만이 남았다.

건우의 허벅지와 제 엉덩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폭력적이었다. 안을 들쑤시던 성기가 더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해영의 곧게 솟은 음경이 배 위에서 꺼떡인다. 더 이상 그 위로 비벼지는 것이 없는데도, 여전히 단단하게 올라붙어 투명한 선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발간 귀두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계였다.

“흐으, 읏, 아아…!”

건우가 몸을 숙여 해영을 가득 끌어안고 허리를 콱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배 위로 사정액이 울컥 쏘아지는 느낌이 났다. 해영은 그를 마주 안을 정신도 없이 절정감에 온몸을 덜덜 떨었다.

내벽이 성기를 쥐어짜듯 오물거린다. 해영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안쪽을 엉망으로 짓이기고 싶은 위태로운 욕구가 넘쳐흘렀다. 여전히 정신없이 헐떡이는 해영을 두고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해영의 양쪽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어 허리를 빠르게 쳐올렸다.

“잠깐, 만, 하윽! 응, 으읏…, 아-.”

가고 있는 와중에도 봐주지 않고 밀어붙이자 해영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몸을 뒤집었다. 시트를 쥐고 앞으로 기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허리가 붙들렸다. 말릴 새도 없이, 빠졌던 성기가 깊은 곳까지 푹 밀려 들어온다.

“흐윽!”

“하아…. 죄송해요. 조금만.”

자세가 바뀌자 더 깊게 들어왔다. 배를 뚫고 나올 것 같다는 현실성 없는 걱정까지 들 만큼. 게다가 묘하게 찌르는 부분이 달라져 느낌 또한 차이가 났다. 건우의 골반에 엉덩이가 거세게 부딪혔다. 건우가 퍽, 고환까지 밀어 넣을 기세로 아래를 박아 넣었다. 해영의 상체가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엉덩이만 들어 올린 모양이 우스울 거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해영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멍한 정신으로 시트에 뺨을 댄 채, 그가 움직이는 대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건우가 동그란 엉덩이를 쥐어짜듯 움켜쥐고 허리를 쉴 새 없이 들이박았다. 굵은 성기가 빠듯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모양이나, 헐떡거리며 오르내리는 하얀 등, 계속되는 마찰로 예쁘게 물든 엉덩이에 욕을 뇌까렸다.

해영은 눈을 내리감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로 시트가 축축하게 젖었다. 흔들리는 시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청각과 촉감만이 남은 곳에서는, 찰박거리는 습한 소리와 안을 넓히는 감각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그, 흑, 흐읏, 아!”

“선배 지금 안이, 하….”

콱 물고 놓아주지 않는 녹진한 점막 위를 귀두 끝으로 휘저었다. 차오르는 사정감에 건우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끝이 겨우 걸칠 정도까지 빼냈다가 뿌리까지 처박길 반복한다. 위험하리만치 빠른 추삽질에 장기가 밖으로 딸려 나갈 것 같았다. 해영은 그만해 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이윽고 더 들어올 곳 없다고 생각했던 성기가 끝을 넘어 한계까지 치고 들어온다. 단단한 귀두가 그 끝에 비벼졌다. 그리고 마침내 해영의 등 위로 몸을 겹친 건우가 그를 세게 끌어안으며 사정했다.

“윽!”

여러 번에 걸친 사출이 끝날 때까지, 건우는 허리를 안쪽으로 꾹꾹 눌렀다. 그때마다 해영의 엉덩이가 움찔움찔 튀었다. 제 팔을 붙든 손에서도 부르르 잘게 떨림이 느껴졌다. 사정을 한 건가 싶어 해영의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성기를 쥐었으나, 그 끝에서 만져진 것은 투명한 액체뿐이었다. 건조한 손길도 날카롭게 느껴진 해영이 손을 뒤로 해 건우의 골반을 밀었다. 건우가 고집부리지 않고 허리를 물렸다. 오래도록 커다란 것을 물고 있던 구멍이 허전한 듯 뻐끔거렸다.

“흐으….”

건우가 해영의 몸을 천천히 돌려 눕혔다.

“괜찮아요?”

건우가 젖은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주며 물었다. 해영이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뺨을 매만지는 손에 얼굴을 기댔다. 방금은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두려운 쾌감이 온몸을 스쳤다. 그래서 의아했다. 건우가 확인했던 것처럼 저 역시 틀림없이 사정을 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그는 이제 막 한 번밖에 하지 못했는데, 저 혼자서 세 번씩이나 해버렸다면 너무 창피했을 것이다.

건우가 그제야 씨익 웃고 이마에, 뺨에,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다 쓴 콘돔을 뜯어내듯 벗겨낸 후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 해영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제 허벅지 위에 마주 보도록 앉히고서 품에 기대게끔 끌어안았다. 해영은 그의 어깨에 뺨을 대고 축 늘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엉덩이가 쓰라리고 안쪽이 불편했지만, 그에게 안겨 있는 느낌이 좋아 불만을 내지 않았다. 건우가 해영의 등을 느른하게 쓸어내리면서 토닥였다.

드러난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해영이 어깨에 얼굴을 숨겼다. 혹시 별로였던 걸까. 그래 보이진 않았는데. 아니면 너무 몰아붙였나. 건우가 해영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물었다.

“저 보기 싫어요?”

“아니….”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해영은 재빠르게 부정했다. 그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엉망이라.”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제야 제 꼴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울기도 너무 많이 울었고, 땀도 나서 얼굴이 엉망일 게 분명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에 순순히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어디.”

건우가 떨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는 해영의 어깨를 기어이 떼어냈다. 얼굴을 가린 양손을 한손으로 겹쳐 잡아 내린 뒤, 불만과 수치심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쥐어 올렸다. 뺨이 눌려 입술이 붕어처럼 모아졌다. 해영이 잡힌 손을 비틀며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예쁜데.”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아진 입술 위에 제 입을 꾹 눌러 좌우로 뭉개듯 비볐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품으로 바짝 당겨 안았다. 가슴팍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어쩔 수 없이 훤히 드러난 아래도 마주 문질러졌다. 건우의 성기는 여전히 단단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무 계속 서 있는 거 아닌가.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해영이 엉덩이를 꾸물꾸물 움직여 닿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워낙 꽉 안고 있어 소용이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옆에서 이불을 끌어다 사이에 끼워 넣으려 하자 건우가 귀신같이 알고 빼앗아 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해영은 하는 수 없이 모른 척하고 가만히 안겨 있었다.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어진 것은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계속 아래로 향했기 때문이다.

“하, 하지 마….”

해영이 손을 뒤로 휘적이며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을 툭툭 쳐냈다. 네, 고분고분 대답한 건우가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또 슬금슬금 내려와 엉덩이를 반죽마냥 주물러대던 손이 볼기를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방금까지 혹사당하던 곳이 자극되자, 해영의 입에서 하릴없이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건우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해영의 귓불에 내려앉는 입맞춤이 조금 전과 달리 질척질척했다. 급기야 입술을 벌려 춥춥 빨기까지 한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도 음욕이 가득했다. 건우의 손이 해영의 골반을 쥐어 위로 들어 올렸다. 해영이 침대에 무릎을 대고 몸을 세웠다. 건우가 눈앞의 가슴팍에 입을 댔다. 바짝 일어선 유두 위로 혀의 돌기가 예민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당황한 해영이 건우의 어깨를 잡고 몸을 뒤로 물렸으나, 건우가 한 팔로 엉덩이 아래쪽 허벅지를, 다른 팔로 허리를 단단하게 안아 고정하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 해영의 성기가 건우의 가슴팍 위에 비벼졌다.

“흐….”

또 설 것 같아…. 해영이 곤란한 얼굴로 건우의 머리통을 잡아 떼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아플까 봐 세게 잡지도 못하면서, 끙끙대며 밀어내는 모습이 오히려 집착을 불렀다.

“한 번만 더 하면 안 돼요?”

건우가 번들거리는 젖꼭지 위에 입술을 대고 눈을 위로 치켜뜨면서 물었다.

그 눈을 마주친 해영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넘어갈 뻔했으나, 여기서 더 했다간 정말로 기절할지도 몰랐다. 건우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해영의 몸을 아래로 천천히 내리 눌렀다. 구멍 위를 바짝 선 성기 끝이 쿡쿡 찔렀다.

“하으, 아, 안 되는데….”

미끌미끌한 귀두가 연한 살 위에 문질러졌다.

“한 번만.”

고집스러운 눈. 건우는 애처럼 고집을 부릴 때 항상 이런 얼굴을 했다. 확신에 차서 이 순간만큼은 이걸 얻는 게 평생의 소원인 사람마냥. 이 눈을 보고 나면 해영은 그게 뭐든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 부탁도 아니고, 건우니까.

마지못해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건우는 아직 한 번밖에 하지 못했으니 공평해지려면 더 하게 해 주는 게 옳았다. 힘들긴 해도 처음만큼 아프지도 않았고, 또 느낌도….

기어이 허락을 받아 낸 건우가 눈이 휘도록 웃었다. 그 순간 해영은 고민하던 문제들이 뿌옇게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건우가 해영의 몸 여기저기 입을 맞추며 옆으로 손을 뻗어 새 콘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닐 뜯는 소리와 고무가 당겨지는 소리에 해영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건우는 해영의 허리를 천천히 잡아 내리면서 눈앞의 살갗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가슴팍에서 쇄골로, 목덜미로, 뺨까지 다다랐을 때, 성기가 다시금 배 안을 가득 채웠다.

“흐으, 아, 흑….”

자세 때문인지 아까보다 더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해영은 건우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 부들대며 버텼다.

“이번에는 선배가 움직여 볼래요?”

“응? 어, 어떻게….”

움직이라니. 가만히 있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요.”

건우가 해영의 엉덩이를 쥐고 낮게 들었다 내렸다. 찰싹, 살갗이 부딪혔다.

“흐읏!”

이어서 골반을 꾹 내리누르며 둥글게 돌리자, 해영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으….”

해영의 옆 머리통에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짧게 두드렸다. 성기를 가득 품고 있는 안쪽은 가벼운 울림에도 차곡차곡 열이 쌓였다.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해영이 건우의 목을 꼭 끌어안고 엉덩이를 조금씩 움직였다. 덜덜 떨면서도 애쓰는 게 당장 쑤셔박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해영은 조금 전 둥글게 눌리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허리를 앞뒤로 어설프게 움직였다. 전립선이 눌릴 때마다 벌게진 눈가가 움찔거렸다.

농담으로도 잘 한다고 하기 어려운 행위였으나, 건우는 그가 스스로 움직이고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건우는 이미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해영의 몸짓에 따라 복부 위로 그의 성기가 비벼졌다. 건우는 홀린 듯 아래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기둥을 감싸 쥐었다.

“으응, 흑, 아!”

기둥 윗부분과 귀두를 한 손에 쥐고 슥슥 문지르자 해영이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몸을 앞으로 둥글게 말았다.

건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해영의 허리와 허벅지를 붙잡아 뒤로 풀썩 눕혔다. 해영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 잠깐…!”

입술을 겹친 채로 무게를 실어 찍어 눌렀다. 참았던 만큼 봐주지 않고 밀어붙이자 해영이 다급하게 그의 등을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읍, 흑, 으응….”

미처 내뱉어지지 못한 신음이 입안으로 먹혀 들었다.

***

한 번만 더 한다고 했으면서.

해영은 불퉁한 얼굴로 건우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코를 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색색 내쉬는 숨에 살갗이 간지러웠다. 몸을 비틀자, 건우가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얼굴을 비볐다. 다 안겨질 리가 없는데도 꾸역꾸역 품을 파고든 폼이 어이가 없었다. 지난밤을 떠올리니 더더욱 그랬다.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네 번째 사정을 한 뒤로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더 이상 못 하겠다고 애원을 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어 눈을 뜨니 지금이었다. 머릿속에 밤새 안겼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뺨에 확 열이 몰렸다. 힘들긴 했지만 기분도 좋았고, 뽀뽀도 엄청 많이 해 준 데다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계속 안아 주었다.

해영이 작게 웃으며 건우의 정수리에 뺨을 기대자, 그가 몸을 뒤척였다.

“아, 미안…. 깼어?”

네, 여전히 잠이 묻은 목소리로 답한 건우가 해영의 가슴팍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지러워. 어깨를 쥐어 살짝 밀어내자, 청개구리처럼 더 들러붙었다. 허리를 안은 채로 반 바퀴 빙글 돌아 해영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을 바라보다가 입술에, 뺨에, 목덜미에 정신없이 뽀뽀를 해댔다. 귀찮을 정도로 이어지는 뽀뽀세례에 해영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 봤으나, 그는 고집스럽게 아래 깔린 몸을 다리로 단단히 옭아매고 성에 찰 때까지 입을 맞췄다.

“그, 그만….”

그는 마무리로 입술 위에 꾹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누르고 나서야 떨어졌다. 얼얼한 입술에서 옅은 민트향이 돌았다. 건우가 씩 웃으며 해영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고 물었다.

“아픈 데는 없어요?”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뒤가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일부러 말해서 걱정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해영의 목 부근을 빤히 보았다. 손을 뻗어 조심히 매만지더니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국 남았네…. 죄송해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여름이라 옷도 얇고, 해영은 건우와 달리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는 성격이니만큼 보이는 곳에 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런데도 피부가 워낙 얇고 예민해서인지, 아니면 제가 정신을 놓고 빨아댄 건지 해영의 목덜미엔 언제 남긴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괜찮아.”

해영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목덜미를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아씨, 멍도 들었어.”

이맛살을 잔뜩 구긴 건우가 해영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의 말처럼 허리며, 허벅지며, 손자국 모양으로 흐리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모두 그가 움켜 쥔 곳이었다.

“내, 내가 멍이 잘 드는 체질이라 그래. 하나도 안 아팠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신이 없어서 빠짐없이 기억나지는 않았으나, 멍이 들겠다 싶을 정도로 세게 쥐여진 기억이 없었다. 또 해영은 어렸을 때부터 곧잘 저도 모르는 멍을 달고 살았으니,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파란색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건우는 손대는 것도 주저하며 죄책감 어린 얼굴로 그 푸른 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진짜 괜찮은데….”

“가면 약 발라 줄게요.”

“응, 응.”

그제야 시선을 떼고, 해영의 입술에 쪽 가볍게 입을 맞춘 건우가 몸을 일으켰다.

“어제 못 간 빵집 중에 일찍 여는 데가 있어서 갔다 왔어요.”

아까 맡았던 민트향이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저번에도 그렇고 먼저 잠이 든 건 해영인데, 건우는 매번 미리 일어나서 아침까지 준비해 주다니. 창피했다. 잠이 많은 게 큰 흠이라고 여겨 본 적은 없었다. 알람을 잔뜩 맞춰 놓으면 지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니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었다.

“오늘은 진짜 내가 먼저 일어난 줄 알았는데….”

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건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선배 옆에서 자니까 떨려서 잘 못 자겠던데. 아직 제가 더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럴 리가. 좋아하는 걸로 치면 저도 건우 못지않았다. 이건 순전히 제 체력이 그보다 모자란 것과, 잠이 많은 탓이었다.

“아니야…. 내가 잠이 많아서 그래.”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기절했구나.”

그가 놀리는 어투로 말했다. 해영이 씩씩대며 그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건우는 아야, 앓는 소리와 함께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건우가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해영은 홀린 듯이 호텔 바로 앞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 모래 위를 밟았다. 솨아, 시원한 파도 소리와 함께 바다 내음이 코를 찔렀다. 해영은 한참 동안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기 전에 최대한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일박 이일은 너무 짧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더 길게 올걸. 후회가 됐다. 못 간 곳도 너무 많았다. 난생처음 온 여행이 평생에 한 번 있는 기회처럼,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 누르고,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 위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였다.

“다음에는 조금 더 길게 오면 좋겠다. 그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건우가 뒤에서 해영의 거리를 감아 안으며 말했다. 다음에….

“여기 다시 와도 좋고, 다른 데 가도 좋고. 가고 싶은 데 하나씩 다 가요.”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건우의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댔다. 바다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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