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조사 (1)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안에 있는 것을 하나씩 차곡차곡 꺼내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웃음이 났다. 헤실헤실 바람 빠진 풍선마냥 실없이 웃으며 여행의 흔적들을 정리했다.
가방에 강릉을 넣어 온 것도 아닌데, 첫 여행의 여운으로 가슴이 충만했다. 어제 모래사장에서 건우 몰래 주운 작은 조개껍데기도 깨지지 않고 무사히 잘 들어 있었다. 해영이 손바닥 위에 조개껍데기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폈다. 주울 때는 예뻐 보였는데, 지금 보니 바지락 같았다. 해영은 몸을 일으켜 욕실에서 조개를 가볍게 헹구고 협탁 위 사탕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소중한 것이 늘어간다. 소중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이 뒤따를 때도 있지만, 대체로 행복했다. 특히 건우와 연인 사이가 되고 나서는 더 그랬다. 매일 매일이 꿈만 같았다. 그는 해영이 불안할 틈을 주지 않았고, 그 넘치는 애정 속에서 해영은 마음 놓고 헤엄쳤다. 건우와 하는 것들은 다 좋은 것들뿐이었다. 평생을 타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겨우겨우 버텨내던 제가, 넓고 과분한 품 안에서 안정을 찾은 것이다.
“좋다….”
좋아한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얘기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결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고, 이 애정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싶어서 가득 담아 하나씩 겨우 내밀었다.
해영이 침대 위로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피실피실 웃으며 베개를 품에 끌어안았다.
똑똑.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고 숨죽여 기다리는데, 다시 한번 똑같은 소리가 울렸다. 분명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해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 그렇게 헤어지기 싫어하더니.
해영의 뺨에 웃음이 번졌다. 속으로 좋아한다고, 보고 싶다고 계속 그를 생각했더니 그 마음이 닿은 모양이다. 현관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왜 다시 왔-.”
문 앞의 인물을 확인한 해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는 엄마 보고 인사도 안 하니?”
그녀는 문고리를 쥔 상태로 굳어 있는 해영을 향해 비아냥댔다. 현관문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이 조금도 예상 못 한, 피하고 싶은 상황에 닥치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기 마련이다. 수년간 밤마다 저를 괴롭힌 목소리를 눈앞에서 들으면서도 꿈이길 바랐다. 또 한 번의 악몽이기를. 그러나 바랄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해영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신고 있던 구두를 벗지도 않은 채였다. 해영은 한 뼘가량 열려 있는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나가고 싶어. 도망가고 싶어. 발바닥 아래가 금방이라도 떼어질 듯 움찔거렸다. 도망가면? 도돌이표다. 평생을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두려워하며 살겠지. 그러고 싶진 않아. 해영이 쥐고 있던 문고리를 안으로 당겼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해영이 집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집 안을 빙글 둘러보았다. 매캐한 연기가 금세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속이 메스꺼웠다. 탐탁치 않은 얼굴로 이곳저곳 살피던 어머니가 이내 소파 위로 풀썩 앉았다.
꿈속에서 보던 모습에 비해 그녀는 지난 세월을 감안하고도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옷차림과 화장으로 덮기 위해 애를 쓴 듯 보였으나, 그간 치른 죗값과 생활고가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났다. 해영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전히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였지만, 해영으로선 도망가지 않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까 그 애랑 연애질이라도 해?”
해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본 거지. 안아 주는 거? 이마에 입을 맞췄던 거? 해영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제 행동이 곧 대답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처럼 뻔뻔하게 굴 수가 없었다. 떨림이 손에서부터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긴장으로 구토감이 거세게 일었다.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벙긋대는 해영을 빤히 보던 어머니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진짠가 보네.”
혀를 차던 어머니는 거실 테이블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건우와 함께 공부하던, 그 테이블이었다.
“하다하다 호모 새끼를 낳았을 줄이야.”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입 안쪽이 하도 깨물려 점막이 벗겨지고 종내에는 피맛까지 돌았다.
“뭐 때문에 찾아오신 거예요, 이제 와서.”
그녀는 해영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등받이에 몸을 기대 휴대폰을 만졌다. 톡톡톡, 뾰족하고 기다랗게 기른 손톱이 액정에 부딪힌다. 휴대폰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 파삭 구겨졌다. 그리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제 앞까지 걸어 오는 걸음에서 아까와 같은 여유가 아닌 초조함이 내비쳤다. 그녀는 당장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어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받았어?”
“뭐를….”
“그 노친네 죽고 받은 돈 있을 거 아냐. 얼마나 남겨 줬냐고. 미적거리지 말고 빨리 말해. 시간 없어.”
유산을 말하는 건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실장 아저씨한테 제 몫에 관해 들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허나 장례를 치른 직후라 정신도 없었거니와,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만지기는커녕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안다고 해도 어머니한테 만큼은 말하기 싫었고.
“바, 받은 거 없어요….”
짝, 날카로운 마찰음이 귀를 찔렀다. 청각적인 충격 뒤로 뒤늦게 얼얼한 감각이 뺨을 타고 찌르르 퍼졌다. 그녀는 비슷한 세기로 세 번을 더 내리쳤다.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엄마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해영이 눈에 힘을 주고 돌아간 고개를 바로 했다. 또 날아올 손찌검에 대비해 턱을 세게 물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어머니는 붉어진 손을 허공에 털며 거두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새로 꺼냈다. 불을 붙이는 손길이 눈에 띄게 떨렸다. 뺨을 때려서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어머니는 여러 모금을 빠르게 들이마시더니 그제야 나른한 표정이 되어 웃었다. 해영이 코를 막았다. 이런 담배 냄새는 처음이었다.
“야, 나 아니었으면 너 그 돈, 아니지. 그 집에 발도 못 들였어. 알아?”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존재조차 몰랐을 테니, 그 집에서 좋은 것을 누리며 산 건 그녀가 저를 그 집 앞까지 데려간 덕이었다. 허나 아버지의 유산은 제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니었다. 길바닥에서 얼어 죽었을지도 모를 저를 주워다 거두고 길러 준 빚을 갚아도 모자랄 판에,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저에게는 없었다.
“내 돈 내가 챙긴다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꼽니?”
뿌연 연기가 얼굴 위로 흩뿌려진다. 인상을 찌푸리는 저를 보고 웃는 얼굴이 어린이 영화 속 마녀처럼 괴이했다. 낳은 책임은 지지도 않았으면서 이득만 챙기겠다고 십 년도 넘게 외면한 아들을 찾아온 사람이 제 어머니라는 게. 해영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두 번이나 버, 버리셨잖아요….”
버린 사람 앞에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입에 올리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인간이라면,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감정이 요동쳐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어떻게 저토록 당당한 얼굴로 몫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았다.
“해영아.”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다정한 목소리에 해영의 어깨가 잘게 튀어 올랐다.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
티비 속에, 이야기 속에, 자기 자신보다 자식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해영에게 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사람답게 살려면 네가 없어야 했는데, 뭐 별수 있니.”
어떻게 대신 죽을 수가 있어?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도 그렇지, 결국엔 다른 인격체잖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게 말이 되나. 그게 당연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네가 당장 죽고 못 사는 걔. 걔라고 다를 거 같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다. 건우를 만나기 전까지 사람 사이를 잇는 힘은 ‘필요’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눈에 특수한 렌즈라도 낀 것처럼 모든 현상이 그렇게 보였다. 연애나 결혼은 외로움을 덜어내기 위해 하는 행위로 보였고, 자식을 가진 부모들이 자식을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보내려는 것 또한 그간의 고생과 투자를 돌려받기 위한 마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좋은 의도로 하는 봉사마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사람들의 수단으로 느껴졌다.
“걔가 너 제정신 아닌 건 아니?”
허나 이제는 아니다. 대가 없이 주는 애정의 존재와 가치를 알고 있다. 제 못난 부분까지 세상 어떤 것보다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봐주는 사람이 있다.
“알아요.”
“그 엄마가 제정신이 아닌 건?”
제 대답에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기다렸다는 듯 다른 질문을 꺼낸다. 그녀가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두어 장 넘기며 말을 이었다.
“차건우, 같은 학과네. 사진 많이도 찍혔다. 학교에서 같은 거 달린 놈이랑 이 짓 하면 안 창피하니? 더러운 새끼.”
더러운 새끼.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수 없이 들었던 말이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희미해질 만하면 다시 덧칠해지고, 잊을 만하면 꿈에 나오던 말이었다. 온몸에 벌레 수십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너무 예쁘다.’
그 순간 건우가 해주었던 말이 저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저는 살면서 선배만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확신을 갖고 말하던 표정과 말들이 지금의 저를 지탱해 주는 바탕이다. 건우가 저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해영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향해 팔을 냅다 뻗었다. 짝, 뺨으로 또다시 손이 날아왔다.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는지, 이번에는 고개뿐 아니라 몸까지 휘청였다.
“보름.”
그녀가 휴대폰으로 해영의 머리를 툭툭 때렸다.
“보름 뒤에 올 테니까 괜히 멍청한 머리 굴리지 말고 얌전히 준비해 놔.”
어머니는 물고 있던 꽁초를 틴케이스 안쪽에 비벼 끄고 그대로 넣은 뒤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이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
해영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계속이라고 해도 꾸준히 무언가를 집어 먹는 게 아닌, 뒤적이는 형태에 불과해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이 주가 지났지만 겨우 세 번째 보는 날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보던 날에도 그렇고, 사이사이 전화를 할 때도 그렇고, 해영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개강을 하고 나서는 더 심해졌는데, 건우는 단순히 학업에서 오는 초조함과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짚어 넘겼다. 만나는 날을 미루고 줄일 때도 비슷한 이유를 댔으니까.
“살이 쏙 빠졌네.”
“…어?”
반도 넘게 남은 돈가스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해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어디 아파요?”
“아, 아닌데….”
“그럼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되게-.”
“그런 거 없어….”
해영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나 봐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어도,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는 눈이 고집스러웠다. 건우가 손을 뻗어 해영의 손목 위를 감싸 쥐었다. 아, 안 돼. 또 사진 찍히면…. 해영이 화들짝 놀라 기겁하며 그 손을 뿌리쳤다.
“아….”
허공에 내쳐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우가 해영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해놓고도 놀랐는지 미안한 얼굴이었다. 해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달리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꾹 눌려 하얗게 번졌다.
해영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앞으로도 무슨 일있으면 저한테 오세요. 그럼 다 괜찮아질 거예요.’
언젠가 그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럴까. 혹여나 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 버거워 도망가진 않을까. 나를 혼자 두고,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선배.”
건우가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불렀다. 해영이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아래로 입술이 작게 벙긋거렸다.
건우가 해영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캐모마일 차를 내밀었다. 그가 고맙다며 받아 들었다. 마주 닿은 손끝이 차가웠다. 본인 집 소파에 앉아 있는데도 뭐가 그리 불안한 건지. 해영은 연신 초조한 얼굴로 현관문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바람에 현관문이 흔들리기라도 할 때면 사색이 되어 몸을 말았다. 건우는 그가 진정하기를 바라면서 해영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식은땀까지 나네.
해영은 한참 뒤에야 겨우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몇 번이나 멈추며 말을 골랐다. 건우는 재촉하지 않았다. 해영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취급을 받으며 자라왔는지와 이제 와서 자신의 아들을 찾아온 이유와 저와의 관계를 가지고 협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내일이 그녀가 통보한 날이라는 사실을 모두 들을 때까지. 그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간중간 피가 거꾸로 솟고 열이 치밀었다. 해영이 옆에서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당장 이 곳을 뛰쳐나가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부모라는 것들이 어린아이에게 저지른 짓거리도 말이 안 되는데, 무슨 낯짝으로 앞에 나타나. 해영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홀로 견뎠을 걸 생각하니 심장이 아프게 조여왔다. 철없이,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가 호구짓을 하는 걸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제 과거가 부끄럽고 미안했다. 반듯하게 자란 게 기적이지. 그런 환경에서도 잘 버텨 제 앞에 나타나 준 게 고맙고 대견하면서도, 겪지 말아야 할 것을 겪으며 깎여나간 부분들에 속이 상했다.
말을 마친 해영이 아무 말 없이 감정을 삭이는 건우를 바라보았다. 덜컥 겁이 났다. 제 옆에 있는 게 꺼려지는 건 아닐까. 후회하는 건 아닐까. 겹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미, 미안해…. 내가 너 피해 안 가게 어떻게든….”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해도 떨리는 걸 숨기긴 어려웠다. 그때 건우가 가늘게 떠는 손 위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었다.
또 혼자서 해결하려고. 건우는 제 양 손바닥 안에서 꼼질거리는 손을 빈틈없이 잡았다. 이번에는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집에 혼자 두는 건 위험하다. 그의 말마따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면, 해영이 또 한 번 거절했을 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저희 집에 가 있을래요?”
건우가 물었다.
“해결될 때까지만요. 선배 여기다가 혼자 못 둬요. 아니면 제가 여기로 들어오든지.”
“아, 안 돼….”
해영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또 찾아올 수도 있는데 이곳에 건우가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건우네 집에 가기에는….
“나 때문에 가족분들이 불편해하시면….”
“오히려 좋아하실걸요. 저번에 카페에서 만났던 친구 있죠, 안경 쓴 놈. 걔 부모님한테 쫓겨나서 일주일인가 있다 갔는데 나갈 때 돼지 돼서 갔어요. 오 키로 쪘댔나. 예전부터 친구 데려오고 이런 거 좋아하셔서 괜찮아요. 방도 둘째 누나 쓰던 방 비어 있으니까 제가 거기서 자고, 선배는 제 방에서 자면 되고.”
그는 어떻게든 데려가려는 듯 가족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거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해영이 혹한 건 마지막 말이었다. 건우 방…. 건우네 집에 간 적은 있어도 그의 방까지 들어가진 못했는데.
해영의 얼굴에서 망설임을 읽은 건우가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더했다.
“어른들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의 사적인 공간을 보고 싶다는 궁금증 위에 설득력 있는 말까지 더해져 마음이 점점 기울었다. 민폐일 텐데. 거절해야 하는데.
“피해도 계속 찾아오면 어떡하지…. 그래서 너한테까지-.”
“그건.”
건우가 해영의 말을 끊었다.
“그때 가서 생각해도 돼요.”
그의 눈에서 이유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해영이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웃은 건우가 해영의 손을 그네처럼 살살 흔들며 답을 보챘다. 끈질긴 공세에 해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건우가 해영의 허리를 당겨 안고 머리에 입을 맞췄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마법의 주문 같다. 그가 괜찮아질 거라 말해 주면 정말 별거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말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 불안을 다 짊어진 기분이었는데. 해영이 고개를 재차 끄덕이며 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건우는 해영의 어깨에 턱을 얹고 더 이상 떨지 않는 등을 느른하게 쓸어주었다.
해영을 안은 건우의 두 눈에 화기가 차올랐다.
***
짐은 생각보다 적었다. 거의 일주일 치 옷을 챙겼는데, 여름옷이라 가볍고 얇아서 백팩 하나로 충분했다. 그 외의 물건들은 대부분 건우네 집에서 얻어 쓸 수 있는 것들이라 챙기지 않았다. 건우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서 실실 웃었다. 그에 반해 해영은 잔뜩 긴장해 머리며 옷매무새를 쉬지 않고 만졌다.
“예쁘다니까.”
“네 눈에만 그렇지….”
해영은 비스듬히 서서 엘리베이터 옆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더워도 티셔츠 같은 거 말고 조금 더 단정한 옷으로 입고 올걸. 집에서 바로 오느라 그 흔한 과일 주스 하나 못 사 온 게 마음에 걸렸다. 건우는 계속 그런 거 필요 없다면서 편의점 앞을 서성이는 저를 돌려세웠다. 그건 그가 이 집 아들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손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도 며칠 신세를 져야 하는 입장에서는 몰염치하기 짝이 없었다. 몰래라도 다녀왔어야 하는 건데. 엘리베이터 앞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 뒤로 아까부터 계속 싱글거리는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해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왜 자꾸 웃어….”
“선배랑 같이 우리 집 가니까 좋아서요. 꼭 결혼 허락이라도 맡으러-.”
“에, 엘리베이터 왔다!”
타이밍 좋게 열린 문 사이로 해영이 재빨리 몸을 집어넣었다. 무슨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할 수 있지. 건우는 더 말하지 않고 웃음을 참으며 얌전히 해영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고 층수를 누르는데 해영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건우에게 일렀다.
“알지? 안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손도 잡으면 안 돼.”
“네.”
“바, 반찬 같은 거 올려 주지도 말고.”
“알겠어요.”
“나 보면서 웃지도 말고.”
“웃는 것도 안 돼요?”
“너 친구들한테는 안 그러잖아….”
“보면 웃음이 나오는데.”
“…좀 참아 봐.”
건우는 해영의 제재가 영 못마땅한지 입을 비죽거렸다. 그러나 해영도 물러 줄 생각은 없었다. 신세를 지는 것도 죄송스러운데, 근심거리를 더 얹어 드릴 순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건우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해영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등 뒤에 서서 허벅지를 손끝으로 톡톡 초조하게 두드렸다. 마침내 현관문이 열렸다.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쳤다. 이 집에 온 게 벌써 네 번째였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따뜻했다. 전에 왔을 때는 거의 바닥만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왔나 보다. 주방이 있는 방향에서 차윤서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편한 차림을 한 그녀가 현관으로 다가왔다. 같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무서운 선배로만 보였는데, 옷 때문인지 아니면 건우의 누나라는 사실을 알고 봐서인지 예전만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영은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신발을 조심스럽게 벗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얼른 들어와. 저녁 시간 딱 맞춰서 왔네.”
그녀가 중문 옆에서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 해영의 발 앞에 놓아주었다. 슬리퍼에는 귀여운 모양의 눈코입과 작은 귀가 달려 있었다. 귀가 많이 짧긴 하지만 토끼인 듯했다. 차윤서도 그녀가 내민 것과 색만 다른 똑같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해영이 발을 끼워 넣었다. 옆에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건우가 차윤서를 보고 물었다.
“우리 집이 언제부터 이런 걸 챙겨 신었어? 내 건.”
“없어.”
그녀가 단호하게 답하고 돌아섰다. 그 뒤통수를 한껏 노려보는 건우에게 해영이 작게 속삭였다.
“이거 너 할래…? 나는 안 신어도 돼.”
“괜찮아요.”
건우가 금세 표정을 풀고 씩 웃으며 말했다. 많이 삐친 건 아닌가 보다. 해영은 안도하며 그를 따라 안으로 몸을 들였다.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우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차윤서에게 인사하고 건우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의 방은 예상했던 대로 깔끔했다. 넓진 않아도 침대와 책상, 그리고 책장까지 갖춘 전형적인 대학생의 방이었다. 벽지와 침구 모두 무채색을 띠고 있어 건우답다고 생각했다. 흰색 침대 위에 자잘한 체크무늬가 섞인 연한 회색 침구, 같은 원단의 베개 하나와 조금 더 진한 쥐색의 바디 필로우가 침대 위에 대충 던져져 있었다. 안고 자는 용도인가. 그러고 보니 같이 잘 때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저를 끌어안고 있었지. 제가 저 바디 필로우 대신이었나 보다. 방 안을 눈으로 천천히 훑던 해영이 별안간 스쳐 지나가는 기억 하나에 중얼거리듯 의문을 토했다.
“너 근데 바닥 체질이라며….”
“아, 맞다.”
“어, 어쩐지…. 그다음부턴 침대에서도 잘만 자더라니….”
해영이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건우를 흘겨보았다. 그는 겸연쩍은 내색 하나 없이 뻔뻔하게 웃었다.
“방 구경해도 돼?”
“네.”
별로 볼 것도 없는데. 해영은 대단한 허락이라도 받은 아이마냥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곧바로 책장 앞으로 다가섰다. 익숙한 전공 책과 일반 도서 몇 권, 즐겨 보는 만화책 따위를 탐구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했다. 그 동그란 뒤통수를 빤히 보다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해영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다. 그대로 해영의 뒤에 바짝 붙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가 몸을 버둥거리며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건우야….”
제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그것도 제 공간 안에 이렇게 해영을 들여놓으니 이대로 영영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두고 사랑만 듬뿍 주며 살면 안 되는 걸까. 엄마라는 사람이나 바깥의 복잡한 일들 모두 제쳐 두고서,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두려워할 만한 것도 없이. 그를 괴롭히는 인간들이랑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해영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얼굴을 비볐다.
“이, 이런 거 안 하기로 약속했잖아….”
“문 닫았잖아요. 조금만.”
더 타일러도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해영은 결국 포기하고, 그를 등 뒤에 달고서 방 구경을 이어 갔다. 책상 위에는 필기구와 프린트물 몇 장, 그리고 정체 모를 상자가 하나 있었다. 해영이 상자 모서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이건 뭐야? 열어 봐도 돼?”
“안 돼요. 제 보물 상자예요.”
“보물….”
건우의 보물 상자라니. 더 궁금했다.
“이따가 저 없어도 절대 열어 보면 안 돼요.”
“…응.”
솔직히 조금 서운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건 있을 테니까.
“제가 막 들어오진 않을 거지만 그래도 열어 보면 안 돼요.”
“알겠다니까….”
“궁금해도 절대로 열어 보면-.”
“아, 알았다고!”
대체 얼마나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보물이기에 이토록 끈질기게 주의를 주는 건지. 고분고분 답하던 해영이 결국 폭발해 허리에 감겨 있는 그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풀어냈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옷 갈아입고 씻고 와요. 밥 먹게. 욕실은 나가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거 쓰면 돼요.”
해영이 여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코끝으로 웃더니 작은 뒤통수에 손을 얹어 가볍게 헝클이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해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미련이 담긴 눈으로 상자를 힐끔 바라본 해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궁금해도 참아야지.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풀썩 몸을 뉘었다. 건우 냄새나. 이불을 움켜쥐고 한참을 킁킁대며 맡았다.
가볍게 씻고 깔끔한 반팔 티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나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식탁이 먹음직스러운 요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갈비찜에, 생선 조림에, 보쌈까지. 하나만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메인 요리가 세 개나 됐고, 그 외에도 입맛을 돋우는 밑반찬이 주변을 빈틈없이 메웠다. 처음 보는 것들도 많았다. 해영이 멍한 얼굴로 입을 반쯤 벌리고 의자에 앉았다.
“와….”
“잔치 났네.”
건우가 해영의 옆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바람 빠지듯 웃었다.
“이건 뭔데.”
그리고 작은 빵 위에 새우와 매쉬드 포테이토가 올라간 까나페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 차윤서가 앞에서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답했다.
“까나페, 이 무식한 새끼야.”
“아니, 이게 저녁상에 왜 있냐고.”
둘이 거친 언어로 투닥거려도, 건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상이라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얼른 먹어요. 배고프겠다.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자, 잘 먹겠습니다….”
해영이 먹기 좋게 잘라진 갈비찜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양념이 속까지 가득 배어 부드럽고 맛있었다. 건우가 요리를 잘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생각했다.
“너무, 너무 맛있어요….”
이런 밥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애정이 담긴 집밥 말이다. 한때는 건우가 자라온 환경에 질투가 난 적도 있었다. 저와는 너무 달랐으니까. 지금은 그가 제게 주는 애정의 원천을 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건우가 속한 곳에 들어와 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따뜻함을 온몸으로 받고 있으니 부러움이 아니라 정말 좋은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만 남았다. 떠올려 보면 그 겨울날, 이 집에 찾아왔던 날도 그랬다. 밤늦게 무작정 들이닥친 외부인을 내쫓거나 책을 잡기는커녕, 포근한 담요와 따뜻한 차로 맞이해 주셨다. 속에서 울컥하고 감정이 넘쳐흘렀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누르는 해영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가족들이, 이내 해영의 앞으로 이것저것 밀어 주기 시작했다.
“이것도 좀 먹어 봐요.”
아버지가 보쌈을 해영에게 가까이 내밀었다.
“아니야. 이걸 더 좋아할 거 같아. 이거 먹어 봐.”
차윤서는 소시지 야채 볶음을, 어머니는 속이 편한 걸 먼저 먹여야 한다며 게살 죽을 덜어 주었다.
해영은 훌쩍거리면서도 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먹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우물우물 부지런히도 씹어 넘겼다. 건우는 옆에서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족들이 딴 곳을 볼 때마다 잘 발라진 흰살 생선을 해영의 밥 위에 계속해서 얹어 주었다.
해영은 침대에 누워 스탠드를 켰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건우 냄새를 맡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분명 낮까지만 해도 불안이 한계까지 치솟은 날이었는데, 건우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부터 따뜻하고 좋은 일들만 있었다. 말하기 전까지 고민하던 게 우습게 느껴질 만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으로 빙글 돌아 누웠다. 부드러운 베개 위에 뺨을 비볐다. 그러다 문득 눈을 뜨고 책상 위를 응시했다. 시선 끝에 그 상자가 눈에 걸렸다. 해영이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슬금슬금 책상 가까이 다가가 건우의 보물 상자를 손끝으로 살살 만져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작게 털어내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참아야지.
그러나 해소되지 못한 호기심은 불이 옮겨붙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단순히 소중해서, 라고 하기엔 과하게 방어적이었다. 안에 제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들어 있는 걸까. 설마 전 여자 친구와의 추억이라든지. 그게 보물이라고 칭할 만큼 소중한 건가.
해영이 결국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궁금해하지 말자. 자꾸 나쁜 생각만 들잖아. 눈을 감고 양을 세기 시작했다. 오십 마리쯤 세고 나서야 해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궁금해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을 짜증스럽게 박차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살짝만 보고 다시 놓자.
해영이 상자를 조심조심 열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작게 열린 틈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어….”
틈새로 보이는 물건들에 해영이 놀란 눈을 하고 상자를 완전히 열어젖혔다. 안에 있는 건 온통 자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언제 줬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제 글씨가 적힌 쪽지, 생일 때 가져갔던 고깔과 앞치마, 처음으로 같이 봤던 영화의 포스터. 아, 이건 저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해 건네준 디퓨저와 텅 빈 캐모마일 차 봉투, 그리고 시험 기간에 챙겨 주었던 초콜릿 몇 개. 그밖에 자잘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해영은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뚜껑을 도로 덮고, 소중히 안아 침대로 돌아갔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상자를 가만가만 매만지며 잠에 들었다.
새벽에 방문이 열렸다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침대 매트리스가 푹 꺼졌다.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손길이 익숙했다. 건우구나. 깊게 잠이 들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내 꼭 쥐고 있던 상자를 빼가는 느낌이 들었다. 제 손을 쥐고 꼼질꼼질 장난을 치던 건우가 어딘가 평평한 곳에 제 손가락을 꾹 눌렀다. 그러더니 이불을 들추고 그 안으로 꾸역꾸역 커다란 몸을 들이밀었다. 잠결에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발로 꾹 밀어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정강이를 차이면서도 비집고 들어와 해영을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문 잠갔으니까 괜찮겠지. 그 품이 너무 포근하고 좋아서 해영은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해영의 품 안에는 건우 대신 기다란 바디 필로우가 안겨 있었다. 눈을 비비고 상체를 세운 해영은 멍하니 앉아 새벽을 떠올렸다. 꿈이었나 생각하던 중 방문이 열렸다.
“어, 일어났다.”
방금 씻고 나온 건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낸 건우가 씩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얼굴에 잠을 달고 있는 해영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그가 허리를 덥석 당겨 안았다. 뺨에 입술을 들이미는 것에 해영이 기겁을 하고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하지 마….”
“다 출근하고 없어요.”
“그, 그래도 갑자기 오실 수도 있잖아…. 싫어.”
건우는 아쉬운 얼굴로 순순히 물러나는가 싶더니, 해영이 안심한 틈을 타 재빠르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해영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뺨을 감싸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선배도 약속 안 지켰잖아요. 내 상자 훔쳐보고.”
그의 말이 맞았다. 먼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저였다. 해영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사과했다.
“미안….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였어?”
“네. 창피하단 말이에요.”
“뭐, 뭐가 창피해…. 하나도 안 창피해해도 되는데. 나도 영화 포스터랑 여행가서 주워 온 조개도 보관해 놨어.”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꼭꼭 숨겨 두었던 일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건우는 그런 해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해영은 또 저를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장난이에요. 선배는 다 봐도 돼요. 근데 조개는 또 언제 주웠대.”
해영이 무어라 불만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건우가 차려 준 아침밥을 먹고 함께 등교했다. 건우의 수업은 해영보다 한 시간 늦게 시작했지만, 혼자 집에 있어 봐야 뭐 하냐며 함께 가 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니란 걸 해영은 알고 있었다.
“수업 잘 듣고. 끝나면 전화해요.”
“응.”
건우는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해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기록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통화한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담배가 반도 채 타들어가기 전이었다.
“여보세요.”
기다리던 전화임에도 불구하고 건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어디서 뵈면 될까요. 알겠습니다. 도착하면 전화 드릴게요.”
짧은 통화를 마친 건우가 담배를 미련 없이 비벼 끄고 학교 밖으로 몸을 돌렸다.
***
건우는 오피스텔 복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직 내려가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도로 잡아탔다. 집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건물 앞에서 진을 치고 있을 생각이었다. 만약 해영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해영을 제 집에 데려다주고 핑계를 만들어 다시 나와야지. 오늘 안 오면 내일도, 모레도. 해영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놨더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건우는 새벽에 해영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머니라는 여자의 번호를 찾기 위함이었다. 전화해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무작정 찾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저장되어 있는 번호 중 그 여자의 걸로 추정되는 번호는 없었다. 통화 목록에 등록되지 않은 번호들이 몇 개 있었으나, 확실하지도 않은 상태로 죄다 전화해서 해영의 생물학적 어머니 번호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건진 것 없이 휴대폰을 도로 내려놓으려던 찰나, 꽤 오래된 통화 기록에서 언젠가 들은 적 있었던 직함이 보였다. 해영이 어머니에 관해 물었다던 날, 제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던 날 만난 실장이라는 사람의 번호였다. 아쉬운 대로 그 번호를 옮겨 적었다.
그러나 그와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직접적으로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가 그 여자를 먼저 찾아가 무식하게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였다면 그 피해가 저와 해영에게 고스란히 왔을 거라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제가 얼마나 앞뒤 없이 달려들려고 했는지 반성했다.
건우는 골목 입구에 서서 실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도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당장 손쓸 수 있는 건 없어 보입니다. 도련님께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거나 실제로 갈취를 한 것도 없어서…. 하다못해 협박을 했다는 증거라도 있었다면 트집이라도 잡아 보겠는데, 그걸 얻자고 그 여자를 도련님과 다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의하는 바였다.
‘저와는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제가 직접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망설였다. 건우가 재촉하고 나서야 뒷말을 이어 갔다.
‘건우 군 사진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걸 보니, 건우 군은 자신이 만만하게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엇을 해 달라, 콕 집어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실장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 위험한 일을 도맡게 하는 게 마음에 걸린 듯 보였으나, 건우는 제가 해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뒤따라오는 결과를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서너 시간쯤 기다렸을까. 곧 해영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간격이 빨라졌다. 자동차나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낯선 차 한 대가 거칠게 멈춰 서더니, 운전석에서 한 여자가 오피스텔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혹여나 모르고 지나칠까, 실장에게 받은 사진을 몇 번씩 들여다보았는데 기우였다. 모를 수가 없네, 너무 닮아서.
그녀는 제 쪽은 보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단순히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묘하게 달랐다. 걷는 모양새나 짓는 표정이 소름 돋기까지 할 정도로 기괴했다. 마약으로 여러 번 형을 살았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약 했나.
얼마 뒤, 집에 해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여자가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골목 안쪽에 서 있던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비릿하게 웃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너. 나 기다렸니?”
여자의 발음은 정확했으나 시선이 이리저리 튀었다.
“네. 그냥 들어가셔서 서운할 뻔.”
“지랄 말고. 얘 어디다 숨겼어?”
해영과 닮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반감을 불렀다. 불쾌했다. 말을 섞어 봐야 통할 것 같지도 않고. 필요한 만큼의 말만 끄집어내고 나면 상종도 하기 싫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건우는 대답 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야!”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극도로 예민해진 여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짝 크게 다가와 건우의 팔을 거세게 내리쳤다.
“아, 씨발.”
콘크리트 벽에 내던져진 휴대폰은 액정과 버튼에 금이 갔다. 건우가 허리를 숙여 주웠다. 곧바로 전원 버튼을 눌렀으나 켜지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곤 쓸모없어진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해영은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툭 불거진 마디로 입술 사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벌써 열 번째 안내 멘트였다.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이유 모를 불안감에 냅다 강의실을 찾아갔다. 그 앞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규진에게 건우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분명 학교 안까지 같이 들어왔으니까. 이따 보자며 손을 흔드는 모양이나 수업 잘 들으라는 말도, 주머니에 한쪽 손을 푹 찔러 넣고 서 있는 모습까지 어느 하나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잊고 온 게 있었거나, 가지러 간 김에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 제게 말을 하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까 말을 안 했겠지. 휴대폰은 충전하는 걸 깜빡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온갖 이유를 대며 계속 전화를 거는데, 그가 어제 제게 했던 말 한마디가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심장 소리가 귀에 울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아닐 거야. 해영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뛰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빨간불인 횡단보도를 건너다 클랙슨에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건우가 보았다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을 텐데. 해영이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초록불이 바뀌자마자 다시 뛰었다. 가방끈이 내려가든, 셔츠가 바지에서 빠져나오든 신경 쓰고 추스를 겨를이 없었다. 확인해야 했다.
해영은 단숨에 오피스텔 앞에 다다랐다.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까지 올라가 봤지만 복도에도, 비상계단에도 건우는 없었다.
해영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건우의 집에 가 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공동 현관문이 열리고, 대로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가방이 붙들려 당겨졌다.
“아!”
예상치 못한 힘에 의해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손바닥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짚었다. 요철에 손바닥이 짓눌려 아릿했다. 해영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어딜 가려고.”
어머니였다. 해영이 몸을 일으켰다. 떠는 티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모래알이 붙은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나랑 약속한 날이잖아.”
해영은 그녀가 있는 쪽은 보지도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걸 보았는지, 앞에서 비웃는 음성이 들렸다. 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들리는 건 연결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뿐이었다.
“얘 찾니?”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액정이 부서진 휴대폰을 꺼내 제 앞으로 내밀었다. 건우의 것이었다.
“이, 이게 왜….”
부서진 휴대폰.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는 건우. 다 괜찮아질 거라며 저를 안심시키던 건우. 그리고 다시 부서진 휴대폰.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것들이 내놓은 결론은 음습하고 어둡기만 하다.
해영이 손을 뻗었다. 그녀가 보란 듯이 팔을 거둬 그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게. 왜 나한테 있을까? 잘 생각해 봐. 너 머리 좋다며.”
어머니는 그렇게 말을 하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발자국 앞에 세워 둔 검은색 세단에 올라탔다. 타라거나 따라오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마치 해영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꺼내 피우며 해영이 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해영은 다른 선택지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 건우가 무사한지 알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민은 짧았다. 해영이 그녀의 뒤를 따라 조수석에 올라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차가 지체 없이 출발했다. 등받이에 기댄 해영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졌다.
오 분 정도 온 것 같은데. 사실 모르겠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얼마나 왔는지, 제대로 인지하기 어려웠다.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가 서너 개 붙어 있는 공터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한 건 해영이 처음 보는 곳이라는 거다.
휑한 자갈밭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놓은 어머니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다. 해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자는 해영이 바로 뒤따라 나오지 않자, 조수석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해영은 서둘러 휴대폰을 도로 넣고 밖으로 나섰다. 어머니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지고 구두 앞코로 가볍게 짓이겼다. 그리고 가까운 컨테이너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오래되어 녹이 슨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저 안에 건우가 있는 걸까. 다쳤을까.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를 오래 안 한 건지, 몸을 들이자마자 매캐한 먼지가 눈과 코를 찔렀다. 얕게 기침한 해영이 내부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택배 상자와 바닥에 나뒹구는 빈 소주병 몇 개, 무언가의 부품처럼 보이는 공구와 파이프.
그리고 그 안에 건우는 없었다.
“어디 있어요…?”
“약속한 게 먼저지. 그러게 누가 쥐새끼처럼 가서 이르래?”
해영이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가져왔다.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꼭 쥐었다. 안에는 어머니가 언제 찾아올지 몰라 며칠 전부터 인출해 둔 현금이 들어 있었다. 삼백만 원. 용돈이 남을 때마다 모아 둔 것이었다. 제게는 꽤나 큰 금액일지 몰라도 어머니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게 제가 그녀와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으니까.
지익, 지퍼를 내리던 손이 돌연 멈추었다.
“다치게 했어요?”
“글쎄.”
그 말에 해영이 희게 질린 얼굴로 지퍼에서 손을 완전히 떼어 냈다.
“어, 얼굴 보여 주세요…. 건우 있는 곳에 가서 이야기-.”
“야.”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아들은 예전처럼 여자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흐물흐물 생각 없는 종잇장 인형 같던 것이, 대가리만 커서 협상까지 시도하려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여자가 해영의 앞으로 단숨에 다가가 그토록 소중하게 안고 있는 가방을 잡아당겼다. 해영이 뺏기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너랑 그 노친네 때문이야. 너랑 그 노친네 때문에!”
귀를 찢을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컨테이너 안을 울렸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본인 인생이 망가진 게 저와 아버지 탓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책임을 지라고, 그게 도리라고 말했다.
“염치없는 새끼. 이런 것도 자식이라고, 살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의 눈에 비친 해영은 틀림없는 악역이었다.
“화장실 바닥에서 얼어 뒤지든 말든 내버려 뒀어야 했다고. 손 안 놔?”
“시, 싫어….”
어머니라는 사람이 폭력적으로 쏟아내는 역겨운 말들 속에서도 해영은 그저 가방을 뺏기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것마저 없으면 정말 건우를 구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무서워. 건우가 보고 싶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웃고 안았던 게 모두 허상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게 제 현실이고 처지이며, 이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그녀의 눈이 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귀도 막아버리고 싶어. 가방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갈 즈음, 먼저 포기한 건 어머니였다. 그녀는 가방을 던지듯 놓고 거칠게 숨을 골랐다. 해영이 반동으로 뒤로 넘어졌다. 머리와 어깨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독한 새끼.”
해영은 발길질이라도 날아올까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또각또각, 날선 구두굽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날아온 건 발이 아닌 손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해영의 손을 수차례 내리치다 머리칼을 사납게 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흐으, 윽….”
해영의 몸이 하릴없이 흔들렸다. 어지러웠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지옥 같던 단칸방인지, 컨테이너인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프니? 나도 손 아파. 그러니까 왜 손까지 대게 만들어, 왜. 내 말이 어려워서 그래? 약속 지키면 그 건우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데려다준다는 말이 어렵니? 내가 뭐 날로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거래하자는 거 아냐. 내가 네 그 더러운 호모짓 입 닫고 있어 주는 대신 아니냐고. 내 말이 틀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해영의 뺨을 내리쳤다. 맞은 곳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대답.”
“건우 먼저 보여 주세요….”
짝, 고개가 다시 한번 돌아갔다.
“건우 먼저-.”
짝, 또 한 번 더.
“흐…. 건, 우 먼저….”
꼴사납게 한쪽만 부어오른 얼굴로 고집스럽게 버틴다. 어머니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잇새로 나온 진심에 해영이 몸을 떨었다. 그러다 재차 정신을 부여잡고 주먹을 쥐었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던 예전과는 다르다. 해영이 바닥을 더듬어 발치에 놓인 깨진 소주병 주둥이를 잡았다.
“그걸로 뭘 하려고.”
바들바들 떠는 꼴이 그녀의 눈에는 그저 어린애가 발버둥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 말 몇 마디에 눈에 띄게 동요하는, 여전히 하찮고 나약한 아이 말이다. 그런 것이 덤벼 봤자지. 그렇게 생각하며 해영이 하는 꼴을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해영이 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건 돈이다. 저를 망가트리는 일이나 건우의 안위 따위가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어머니에게 저와 건우는 그저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버릴 것들에 불과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게 가장 두렵겠지. 저 역시 그랬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받아 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걸로 받아쳐야 했다.
해영은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소주병의 날카로운 부분을 제 손목으로 가져갔다.
예상 밖의 행동에 여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가 미쳤구나? 사내새끼 하나 때문에.”
해영이 소주병을 얇은 피부 위에 지그시 눌렀다. 날선 유리가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살갗을 가르고 자국을 내었다.
“너!”
“저, 저 죽으면 돈이고 뭐고 못 받아요…. 아저씨가 그쪽한테 돈이 가게 놔둘 리가 없어.”
“그쪽? 너 엄마한테 말하는 게!”
“누가 엄만데!”
울분 섞인 고함에, 컨테이너 내부가 크게 울렸다. 소주병 주둥이를 겨우 붙잡고 있는 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힘 조절이 어려웠다. 유리날에 피부가 긁혔다. 서서히 맺힌 피가 종내에는 점성을 띠고 바닥으로 뚝뚝 흐를 만큼 깊게 파였다. 그러나 해영은 손목에서 어떠한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더 큰 고통을 마주한 사람에게 자잘한 통증 따위는 별 게 아니었다.
“두 번이나 버린 사람이 엄마야? 그래 놓고 돈 달라고 찾아오는 게 엄마야? 나 엄마 없어. 엄마라고 부를 만한 사람 없다고. 살면서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 수백 번도 더 했어. 알아? 그러니까 살려 준 도리니 뭐니 말 같지도 않은 이유 갖다 대지 말고 그냥 돈이 필요하다고 해요. 건우만 데려다 놓으면 다 필요 없으니까!”
제 문제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것도, 또래 아이들로부터 배척당한 것도, 끝까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도. 제가 겪어야 하는 모든 일들이 부족하고 모자란 저의 탓이라고, 못나고 쓸모없는 탓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저는 살면서 선배만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 너무 싫어하지 말아요.’
당연한 애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애정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제게는 없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는 게 괴로웠다. 그래서 저의 탓으로 돌렸다. 당연한 것을 갖지 못한 게 아니라, 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우습게도, 그 말도 안 되는 책임 전가에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제게는 더 가볍게 느껴졌으니까.
“당신이나 아버지나 날 자식 취급 안 한 건 똑같은데 이 돈이라고 소중할까 봐.”
제가 뱉은 말이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어차피 아버지가 남긴 돈 같은 거, 제 돈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 양반이 그러디?”
“말은 안 하셨어도 다 알아요. 짐처럼 생각하셨던 거. 그 집에 붙어 있으려고 그렇게 죽어라 노력했는데 아버지는 눈길 한번 준 적 없으니까. 아들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랬을 리-.”
여자가 비웃으며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말을 멈춘 해영이 뒤로 몸을 물리며 경고하듯 손목을 앞으로 내어 보였다.
“그 노친네는 알았을까. 친아들도 아닌 걸 기껏 주워다 키워 놨더니 이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고.”
해영은 멍한 얼굴로 그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언어처럼 글자들이 머릿속에 따로따로 틀어박혔다.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영의 표정을 본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뒤질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했나 보네. 독한 양반이야.”
“무슨….”
손에 힘이 풀렸다.
“읏…!”
날선 유리가 상처를 벌리고 들어온다. 해영이 놀라 병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다시 주우려 손을 뻗은 순간, 여자가 구두코로 병을 차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치웠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덜덜 떨고 있는 해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해영은 바닥을 더듬어 손에 집히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내던졌다.
“흐윽…. 오, 오지 마…!”
종이 쪼가리와 노끈 따위가 힘없이 어머니의 발치에 떨어졌다. 여자가 다시 손을 뻗는다. 또 맞을 거야. 콩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그때였다. 해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해영이 먼지 더미 위로 몸을 굴려 손찌검을 피하고,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진동이 어머니에게까지 들리진 않았는지, 해영의 휴대폰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동요했다. 소리를 지르며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여자의 눈에서 두려움이 내비쳤다.
“너 이리 안 와?”
이 전화를 받는 걸 왜 두려워하는 걸까. 해영은 넘어지고 구르면서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냈다. 그리고 허겁지겁 컨테이너 문을 열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선배, 어디에요? 학교에도 없고,
“건우-.”
자갈밭을 가로질러 무작정 뛰었다. 숨이 가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건우의 목소리에 안심한 것도 잠시, 뒤에서 날카롭게 저를 부르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 만났어요? 어디예요.
“모, 모르겠어….”
―보이는 거 말해요.
“컨테이너, 고가도로랑 아, 앞에 타이어 매장 있고, 터널, 윽!”
벅찬 숨으로 말을 이어가던 중, 뒤에서 가방끈이 붙들렸다. 억센 손길에 의해 가방이 벗겨지고 해영의 몸은 반동으로 뒤로 넘어갔다. 파들거리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구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휴대폰마저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여자가 지퍼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는 것을 보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해영이 몸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비웃음이 들렸다. 해영은 한 발짝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팔을 붙들려 벽으로 밀쳐졌다. 해영과 어머니의 차이는 두려움의 유무에서 나왔다.
그녀는 해영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쥔 채로, 반대쪽 손으로 가방 안에서 꺼내 든 얇은 오 만원짜리 뭉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해영의 뺨 위에 툭 던졌다. 지폐들이 바닥으로 흩날렸다. 제가 그토록 절박하게 쥐고 있던 그것이 어머니에겐 종이 쪼가리나 다름없었다.
“장난 같니? 내가 너 하나 못 죽일 거 같아?”
“못 하시잖아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주제에 도발이나 반항 따위가 먹혀들 리 없었으나, 해영은 제가 뱉은 말에 확신이 있었다. 두 번이나 저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린 것도 그렇고, 아까 그 곳에서도 그렇고. 제 어머니는 사람을 죽일 만한 깜냥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거든.”
어머니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 뜬 해영을 보며 잇새로 말했다.
“이딴 장난질 해선 안 됐어, 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걸 확인한 해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칼이었다.
“금방 사, 사람 올 거예요. 그러면-.”
“상관없어. 너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니까.”
그녀의 눈에서 보인 것은 살의가 아닌 체념이었다. 정말 죽일 거다.
“놔, 놔!”
어머니는 손바닥만 한 길이의 칼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해영은 두려움에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목 언저리를 향해 달려들던 칼날이 빗나가 뺨을 스쳤다. 그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제 멱살을 움켜 쥔 여자의 손을 세게 깨물었다.
“아! 이 새끼가.”
옷깃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는 찰나, 해영이 여자의 어깨를 힘껏 밀치고 달렸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른 채 발이 닿는 대로 뛰었다.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발 아래 엉망으로 널브러진 가방조차 보지 못했다. 해영은 그대로 가방 끈에 발이 걸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무릎이 깨질 듯이 아팠다. 심장이 온몸에 옮겨진 것처럼 쿵쿵 뛰었다. 끝이다. 넘어진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뒤에서 어깨가 돌려졌다. 바짝 붙어 저를 쫓던 어머니가 흙투성이가 된 제 위로 올라탔다.
흐릿해진 눈앞에 보이는 건 저를 낳아 준 사람이 칼을 쥐고 내리 찍으려는 모습이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태어난 순간부터 눈에 담았을 경멸과 후회였다.
해영이 체념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이명이 들렸다. 그렇게 다른 소리 하나 없이 날카로움만 띤 공간 속이었다.
제 바람은 늘 힘이 없었으나, 지금 순간 딱 한 가지만을 바랐다.
건우가 오지 않기를. 그래서 엉망이 된 저를 보는 일도, 이 여자와 마주치는 일도, 혹여나 다칠 일 따위도 없기를. 저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기를.
오지 마라.
보지 마.
제발 오지 마라.
하염없이 되뇌던 그때였다. 그토록 들리지 않기를 바랐던 목소리가 고함이 되어 이명을 뚫고 들어왔다. 해영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건우가 칼을 쥔 여자의 손목을 움켜쥔 채, 제게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귀에 닿는 말이 뚝뚝 끊어졌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해영이 겨우 상황을 인지한 순간, 여자가 손에서 칼을 놓았다. 위협적인 칼끝이 저를 향해 낙하한다.
건우가 욕을 뇌까리며 재빨리 다리를 휘둘렀다. 발에 맞은 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벽까지 날아갔다. 흉기를 닿지 않는 곳까지 보낸 후에야 그는 여자의 팔을 세게 당겨 해영에게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건우의 등 뒤로 뒤따라오던 경찰 두 명이 어머니의 양 팔을 붙들고 땅에 엎드리도록 제압했다.
해영의 흉곽이 크게 들썩였다. 바닥을 짚은 팔이 형편없이 떨린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건우가 제 옆으로 다가왔다. 해영이 건우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을 떨리는 눈으로 하나하나 살폈다. 그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 때문에 건우가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었을까 봐 두려웠다.
“나는, 나는 너 다친 줄 알고….”
깨진 휴대폰을 보았을 때부터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해영이 느꼈던 공포는 그런 것이었다.
“다, 다행이다….”
그 숨소리처럼 작은 안도에 건우가 이를 악물었다. 조심스럽게 해영의 등을 받쳐 품에 끌어안았다. 엉망이 되어서도 제 걱정부터 하는 모습에 속이 저렸다. 퉁퉁 부어오른 뺨과 온몸 곳곳에 남은 상처들, 검붉은 피로 물든 손목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해영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굴려 애썼으나,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요. 잘했어요.”
그의 말에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괜찮다고 하는 제게 화를 내며 기어이 응급실로 데려갔다. 마음 같아선 당장 집에 가서 몸을 뉘고 싶었지만, 경찰서에도 들러야 한다는 말에 해영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가벼운 응급 처치만 받고 끝났다.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지, 건우는 거듭 정말 괜찮은 거냐고, 피가 그렇게 났는데 꿰매야 하는 거 아니냐고,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따지듯 물었고, 제가 말리고 나서야 목소리를 죽였다.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작성하는 중에도 건우와 아저씨가 옆을 지켜 주었다. 제가 적은 것을 살펴보던 경찰관이 혹 협박에 대한 증거물이 있는지 물었다. 대번에 고개를 저은 건우와 달리, 해영은 주머니에서 꼼질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내보였다.
“이, 이거….”
녹음 파일이 띄워진 휴대폰이었다.
***
실장 아저씨께 뒤를 맡기고 차윤서가 가져다준 짐을 받아 오피스텔로 향했다. 건우와 함께였다. 집에 가야 하지 않냐고 물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허리에 팔이 감겼다. 그가 제 어깨 위로 턱을 얹었다. 등을 가득 뒤덮은 가슴팍에선 심장 소리가 선연했다. 해영이 그의 손등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하루 되게 기네, 그죠.”
건우가 별거 아니라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끝에는 웃음기가 걸려 있었지만, 해영은 마주 답할 수 없었다. 저를 안았을 때부터 가늘게 떨리는 손을 느낀 탓이다.
답 없이 멀뚱히 서 있는 해영의 머리통에 가볍게 입을 맞춘 건우가 몸을 떼어냈다. 현관 앞에 내려 둔 짐을 들어 침실로 옮겼다. 해영은 고개를 숙여 붕대가 감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지 않았다. 건우는 저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 협박이니, 마약 중독자니, 경찰이니, 그런 평범한 일상과 동떨어진 것들 말이다.
“배고프세요?”
건우가 한 손에 해영의 잠옷을 들고 와 물었다. 안 고파, 하고 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씻는 거 먼저 해야겠다.”
“아….”
먼지투성이인 창고 안에서 넘어지고 굴렀으니 안 봐도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욕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건우가 가깝게 따라붙었다. 힐끔힐끔 뒤를 살피며 욕실 문을 열었다.
“왜 따라와….”
“손목 물 닿으면 안 되잖아요. 도와드리려고요.”
“호, 혼자 할 수 있어….”
“그러다 덧나면 어떡해요. 큰일 나.”
말은 큰일 난다고 하면서 입꼬리는 그와 반대로 슬슬 올라갔다. 여기서 더 실랑이해도 듣지 않을 걸 알기에 해영은 포기하고 건우와 함께 욕실로 들어섰다.
건우는 그가 말한 대로 꼬질꼬질한 저를 씻기는 데 집중했다. 예전처럼 장난을 치거나 여기저기 만질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정말 정직하게 씻기기만 했다. 무릎과 뺨에 물이 닿았을 땐 따끔했으나 해영은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물기를 닦고 잠옷을 입히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해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눈만 끔뻑이는 인형처럼 손 하나 꿈쩍 않고 침대 위로 눕혀졌다. 건우는 정말 뭐 안 먹어도 되겠냐고 한 번 더 물었으나, 해영의 대답은 같았다. 도저히 뭘 넘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영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준 건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멀어지려는 것을 해영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디 가…?”
“정리만 하고 올게요.”
조금 더 세게 구겨 쥐었다.
“가지 마….”
그 손을 내려다보던 건우가 나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팔을 뻗어 침실 문을 닫았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거실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게 더뎠다. 해영은 손에 쥔 옷자락이 팽팽해질 정도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곧 이불이 들춰지는 느낌과 함께 옆자리가 채워졌다. 목 아래로 팔이 들어온다. 반대쪽 어깨를 감싼 손이 제 몸을 품으로 가득 끌어안았다. 다리가 빈틈없이 얽히고 코끝이 건우의 가슴팍에 닿았다. 정수리 위로 낮은 숨소리가 흩어진다. 해영은 그제야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 그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불안했다. 이러고 있는 게 모두 꿈이고, 깨어나면 건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 여자의 손에 다치고 붙잡혀 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돌아오더라도 질린다는 눈으로 다시는 저에게 좋아한다고, 예쁘다고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해영은 잡히지 않는 것을 쥐려는 사람처럼, 건우의 등허리를 손끝으로 끌고, 또 끌었다. 그 불안한 몸짓을 가만히 보고 있던 건우가 그의 양 뺨을 붙들고 들어 올려 입술을 마주 댔다. 고요했다. 어떠한 행위도 이어지지 않고 그저 여기 앞에 있다고 알려 주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건우는 해영이 안심하길 바라며 얼굴 곳곳에 그렇게 입을 맞췄다. 그러나 한번 생긴 불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하지 않은 접촉이 돌멩이가 되어서 파동을 넓게 퍼뜨리듯, 손끝에서 온몸으로 떨림이 옮겨붙었다.
건우가 재차 입술 위에 입을 맞췄을 때, 해영이 덜덜 떨리는 입을 벌려 건우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그 서툰 행위 사이로 두려운 감정이 넘어왔다. 건우가 곧바로 입술을 떼어내고 해영을 살폈다.
“선배.”
건우가 제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지 않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건우의 목깃을 구겨 쥔 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해 줘….”
해영이 고개를 들어 올려 건우의 입에 제 입술을 뭉개듯 비볐다. 건우가 해영의 뒷덜미를 느른하게 그러쥐었다. 못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천천히 헤집으며 해영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평소보다 입 안쪽이 뜨거웠다. 목구멍 안쪽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이 모자라 해영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릴 때마다 건우는 중간중간 입술을 떼어 주었다. 제 목을 끌어안아 오는 팔에 몸이 빈틈없이 붙였다. 건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몸까지 붙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아래에서 반응이 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죽고 싶다.
해영이 허벅지에 닿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건우가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선배 불편하시면 제가 소파에서….”
“해도 되는데….”
그 말에 건우의 표정이 구겨졌다.
“안 돼요. 오늘 너무 힘들었잖아요. 다치기까지 하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영이 재차 몸을 붙여온다. 그러더니 건우의 허벅지 위에 제 것을 살살 문지른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몸짓이다. 그럼에도 건우는 머리 안쪽까지 욕구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해영이 적극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걸 관계로 안심시켜 주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끝나고 나서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으면 오히려 안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 아닐까.
여전히 망설이는 건우의 표정에 해영은 애가 탔다. 제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최대치였다. 이래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끌어안아도, 입을 맞춰도 불안한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피하고 머뭇거리는 그를 보니 더욱 그랬다. 제가 걱정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왜. 해영이 기어이 울음을 왈칵 쏟아냈다.
“제발….”
건우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해영의 머리를 답싹 품에 안았다. 가슴팍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음이 지끈 조여왔다. 작은 머리통에 비 내리듯 입을 맞춘 건우가 해영의 등을 도닥였다.
“알았으니까 울지 마요.”
원하는 답을 얻어낸 해영은 그제야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건우가 그의 어깨를 잡아 바로 눕혔다. 그 위를 몸으로 덮으며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내자 눈 아래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해영이 팔을 들어 건우의 목을 당겨 안았다. 그의 요구대로 순순히 몸을 낮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목선을 타고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입술 사이로 물고, 소리 내어 빨아 올리자, 해영이 발끝을 세운다. 옷 위로 가슴을 달래듯 쓰다듬었다. 목까지 단단히 잠긴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톡, 톡. 감질나게 조금씩 드러나는 하얀 살갗 위에 입술을 비볐다. 해영의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면서도 절대 밀어내지 않는다.
부드러운 복부에 키스하며 마지막 단추를 풀어냈다. 웃옷을 완전히 벗겨낸 뒤, 속옷과 바지를 함께 잡고 끌어내렸다. 몸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린 건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영의 것은 발기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선배. 그냥-.”
“해 줘, 건우야….”
그만두자고 할까 봐, 해영이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건우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물기가 남아 있는 눈에서 분명하고 또렷한 욕구가 읽혔다. 성욕과는 달랐으나, 지금 그에게 이 행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건우가 해영의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겨내고 협탁 서랍을 열어 젤과 콘돔을 꺼내 침대 위에 던져두었다. 젤을 손에 덜어 굳게 닫힌 구멍 위를 더듬었다. 손가락 하나도 힘들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변을 둥글게 문지르며 젤을 꼼꼼히 펴 발랐다.
“다리 좀 벌려 볼래요?”
평소였으면 싫은 티를 냈을 텐데, 오늘 해영은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곧바로 무릎을 벌렸다.
건우가 상체를 숙여 가슴 위 작은 돌기를 핥으며 해영의 한쪽 허벅지를 잡아 더 넓게 벌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흐으….”
예상대로 잔뜩 긴장한 해영의 몸은 좀처럼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쪽이 지나치게 좁았다.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길 바라면서 해영의 몸 이곳저곳을 오가며 입을 맞추었다.
“힘은 풀고. 다치겠어요.”
응, 해영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른 날보다 손으로 하는 시간이 유달리 길었다. 하나였던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가 되어 안을 짓뭉갰다. 찌꺽찌꺽, 시간을 들여 녹진하게 풀어진 안쪽에서 습한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해영이 몸을 쉴 새 없이 바르작거렸다. 느끼는 곳만 집요하게 문지르니 힘을 받은 성기가 배에 올라붙어 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흐, 아흑…. 이제 그, 그만….”
“그만해요?”
“그만, 하고…. 다, 다른 거….”
건우가 상체를 세우고 해영의 두 다리를 모아 한쪽 어깨 위에 올렸다. 발버둥 치다 다치기라도 할까,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붙들고 손가락을 모아 내벽을 빠르게 쑤셨다.
“흐읏, 응, 아아!”
“뭘 원하는지, 말해 주세요. 다 해 줄 테니까.”
해영이 턱을 바짝 들고 시트를 구겨 쥐었다. 꺼떡이는 귀두 끝이 파르르 떨렸다. 건우가 바로 손가락을 빼냈다. 사출하기 직전에 저지당한 몸은 불만을 토해내듯 가늘게 경련했다.
건우는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해영을 내려다보면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그리고 해영의 다리를 넓게 벌려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얼른.”
건우가 젤로 인해 미끄러워진 구멍 위로 성기 끄트머리를 문지르며 재촉했다.
“…어 줘.”
“제대로.”
“너, 넣어, 흐윽!”
예고 없이 반쯤 처박힌 성기에 해영이 도리질하며 시트 위를 팡팡 두드렸다. 내벽이 성기를 빈틈없이 조이며 압박했다. 건우가 자극에 눈가를 찌푸렸다. 허리를 숙여 해영의 뒤통수를 감싸 제 어깨로 붙여 안았다. 그러자 해영도 건우의 어깨 너머로 팔을 올려 등을 마주 안았다. 건우가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며 기어이 끝까지 제 것을 밀어 넣자 해영이 그에게 매달려 숨을 토해냈다.
배를 가득 채운 관통감에, 그제야 건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양팔 안에 넘치게 찬 몸이 손에 잡히는 느낌도 선명했다. 손끝을 세워 등을 계속 끌어다 안았다.
“건우, 건우야…. 흐으….”
“응, 여기 있어요.”
움직임을 멈춘 채 해영의 떨리는 어깨 위에 입을 맞추고, 등을 차분히 매만졌다. 보이는 곳곳에 키스하고, 여기 있다고, 다 괜찮다고 귓가에 속삭였다.
끌어안은 걸로도 모자란지, 해영이 건우의 등 뒤로 두 다리를 얽어 제 쪽으로 당겼다. 그 바람에 성기가 더 깊은 안쪽까지 내리꽂혔다.
“하읏, 아아, 으…!”
“윽, 하….”
한참 동안 괴롭혀진 몸은 깊은 곳을 찔리는 것만으로도 바로 절정에 다다랐다. 해영의 성기에서 희뿌연 정액이 쿨쩍 배 위로 쏘아졌다. 풀어진 다리가 침대위로 툭 힘없이 떨어진다. 건우가 해영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뺨 위에 입을 맞췄다.
“그만할까요?”
제 것은 여전히 사정을 하지 못해 그의 안에서 터질 듯 꿈틀대고 있었으나, 그가 이걸로 충분하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하던 것을 중간에 멈춘 이유도 여러 번 사정하면 해영의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싸긴 했지만. 건우는 사정의 여운에 헐떡이느라 답이 없는 해영을 가만히 기다렸다. 해영의 허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코끝을 맞대어 비볐다.
“흐, 조, 조금만 더….”
건우가 씩 웃고서 해영의 손을 잡아 붕대 위에 입술을 대고 간질였다. 그 손을 그대로 제 어깨 위에 올려놓고, 해영의 몸을 단단히 옭아맸다. 허리를 느리게 움직이자, 방금 전의 사정으로 예민하게 곤두선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하으, 응….”
“하아…. 선배.”
건우가 해영의 등이 침대에서 띄워질 만큼 제 쪽으로 세게 당겨 안았다. 눈을 감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대로 살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익숙한 체향에 안심부터 드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게 필요했던 건 해영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 간절했던 쪽은 저일지도 모른다고.
건우가 성기를 겨우 걸칠 정도로 길게 뺐다가 끝까지 쿵 쑤셔 박았다. 해영의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후…. 이름, 불러 주세요.”
“흑, 거, 건우야, 흐으….”
“더.”
“건우야. 아흑, 좋아… 해….”
건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떼어 눈을 맞췄다.
“그, 그러니까 너도 나….”
“사랑해요.”
해영이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같은 일이 있어도 전처럼 똑같이 좋아해 달라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염치없는 요구를 들이밀었으나, 돌아온 것은 난생처음 듣는 마음이었다. 건우는 항상 그랬다. 제 빈약한 경험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초라한 것들에 비해, 훨씬 더 소중하고 값진 순간들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가 제게 주는 것들이, 제가 내어 줄 수 있는 것들에 비해 너무 귀한 것뿐이라서 무엇으로 어떻게 갚아야 우리 사이의 저울이 평형이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무서웠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저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그가 지쳐 떨어져 나갈까 봐. 준 만큼 돌려받지 못한다는 건, 크든 작든 관계에 금을 내기 마련이니까.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와의 관계에서 제가 하나를 겨우 얹으면 열 개가 되어 돌아오고, 열 개를 얹으면 백 개가 되어 돌아왔다.
어째서 너 같은 사람이 나에게 왔을까.
“내일 눈 엄청 붓겠네.”
건우가 코끝으로 웃더니 엄지로 해영의 눈가를 눌러 닦아 주었다. 양쪽 눈꺼풀에 차례로 쪽쪽, 뽀뽀하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해영의 목 안쪽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작게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통통하게 부어오른 살덩이를 빨아 올리자, 여전히 성기를 물고 있는 내벽이 움찔 떨린다. 밤새 이어진 긴 추삽질의 시작이었다.
건우는 해영이 심하게 울면 쉬었다가, 힘들어 보이면 멈추었다. 엉망인 섹스였지만 그래도 해영은 좋았다.
건우가 눈을 뜬 건 빛 한 점 없는 시커먼 새벽이었다. 품에 안은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스탠드를 켜고 해영을 살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달뜬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손바닥을 타고 뜨끈한 열기가 속 깊이 저며든다. 건우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해영에게 약을 먹이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계속해서 이불을 발로 걷어내려 하는 것을 몇 번이고 달래가며 꽁꽁 싸맸다.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손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해영이 약기운을 빌어 다시 깊게 잠이 들었고, 그제야 건우도 안심하고 그의 옆에서 숙면을 취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일어났을 때,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선배.”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킨 건우가 집 안 곳곳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해영이 없었다. 어딜 간 거야.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아.”
건우가 허리를 숙여, 협탁 위에 놓인 메모를 집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