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월 3일 (12/21)

외전. 2월 3일

이 주 전쯤, 밥을 먹다 말고 건우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저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아요.’

해영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건우는 해영의 집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일주일에 삼사 일은 외박을 했고, 그 외에도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 밤늦게 등 떠밀리듯 귀가하곤 했다. 아무리 해영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잦은 외박이 달가우실 리 없었다. 잠은 집에서 자게 했어야 했는데. 해영이 자책하는 사이, 건우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셋째 누나 이번에 집 구했다고 했잖아요. 그것만 기다리셨나 봐요. 시골로 내려가신대요.’

‘어, 언제?’

‘다다음 준가.’

누나들이 모두 독립을 하고 하나 남은 아들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 오래 전부터 꿈꾸셨던 귀농을 결정하는 데에 건우는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어 군대도 가야 하고. 그 전까지 차윤서네 집에서 지내라 하는 것을 건우가 기겁을 하고 거절했다.

‘그럼 어떡해?’

해영이 장거리 연애부터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걱정에 빠진 사이, 건우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해영을 쳐다보고 말했다.

‘선배가 데리고 살면 되죠.’

언젠가 꼭 같이 살자고, 건우가 입버릇처럼 말해 와서 막연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뤄질 줄은 몰랐다. 동거를 하게 되더라도 제가 졸업을 하거나, 건우가 졸업한 이후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후….”

해영이 대형 가구점 입구 앞에 서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얼떨결에 결정된 동거이긴 했으나, 전부터 해 주고 싶었던 것을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때,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다. 건우였다. 들키면 안 되는데…. 받긴 받아야겠지. 안 받는 것도 이상하니까. 해영이 긴장한 얼굴로 초록색 아이콘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어디에요? 바깥 소리 들리는데.

“그냥, 자, 잠깐 볼일 보러.”

―무슨 볼일이요. 말도 없이.

“넌 모르는 그런 거 있어….”

―수상한데.

해영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뭐가 수상해. 하나도 안 수상한데…. 그냥, 그냥 나도 나름대로 할 일이 많아.”

겨울임에도 휴대폰을 쥔 손바닥이 축축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 끝에, 건우가 입을 열었다.

―다른 놈 만나는 거 아니죠?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진짜로.”

―알겠어요. 나중에 꼭 말해 줘요, 뭔지.

“응, 응.”

―이따가 끝나면 전화 주세요.

“응.”

통화가 완전히 종료된 액정을 확인한 해영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험하긴 했지만 다행히 잘 넘긴 것 같았다. 건우는 날카롭다가도 가끔 허술한 면이 있었다. 이벤트를 해 주는 입장에서는 편했으나, 애인으로선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속고 살면 안 될 텐데….”

해영이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가구점 안으로 들어갔다.

탄력 있는 매트리스 위에 앉아 몸을 들썩거렸다. 많이 딱딱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푹신한 게 마음에 들었다. 거의 이십 분이 넘게 앉아 있었지만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잠을 자는 용도니까 조금 더 앉아 있어 봐야지. 해영은 침대 위를 손으로 꾹꾹 누르다 다시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구점 안에는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이나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사이에 홀로 덩그러니 침대 하나를 차지한 어리숙한 해영은 노련한 직원에게 쉬운 타겟으로 보였다. 어느 틈에 곁으로 다가온 직원이 해영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요청하지도 않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은 올해 나온 제품으로, 디자인이 심플하고 내구성이 좋아서 혼자 사는 남성분들께 인기가 많습니다. 두 분이 쓰시기에는 조금 좁구요.”

아직 조금 더 앉아 있어 보고 싶은데. 해영은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괜히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직접 사용하실 침대를 찾고 계신 건가요? 이 제품도 괜찮고, 아니면 체구가 많이 크지 않으시니 2층 침대도 추천드립니다. 침대 아래에 책상을 놓을 수 있어 공간 절약에 효과적인 제품입니다.”

건우의 몸집으로 그런 침대를 썼다가는 일주일도 못 가 무너져버릴 것이다.

“이거 무거운 사람도 괜찮을까요? 조금 많이 무거운데….”

해영이 앉아 있는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 옆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저희 제품들은 모두 엄격한 테스트를 거치기 때문에 무거운 무게나 격한 동작에도 변형 없이 견고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쪽에 테스트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으니, 한번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영은 직원이 건넨 팸플릿을 펼쳐 내용을 살펴보았다. 사실 봐도 비교 대상이 없으니 얼마나 엄격한 테스트인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직원이 이 정도로 확고하게 이야기하는 걸로 보아 자신 있는 부분인 게 분명했다. 해영이 팸플릿을 도로 접어 손에 꼭 쥐고 말했다.

“이, 이걸로 할게요.”

***

해영은 서재로 쓰던 방 한가운데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필요 없는 책들을 정리하고, 서재를 꽉 채우던 책장 두 개 중 하나를 치웠다. 여유로워진 공간에 지난번에 주문한 침대와 새 책상을 넣으니 그럴듯하게 구색을 갖춘 대학생의 방이 되었다. 쓰던 책상을 침실로 옮기는 바람에 침실이 조금 비좁아지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건우의 방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에,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기뻤으니까.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해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 위에 풀썩 앉았다.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근 일주일간 온갖 핑계를 대며 집에 오지 못하게 하느라 진을 뺐다. 중간에 한 번 싸우기도 했지. 집에 누구 숨겨 놨냐고 화를 내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오해를 풀어 주느라 꽤 고생을 했는데, 조금 있으면 제가 그동안 왜 그랬는지 알게 될 거라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칫솔이나 속옷 등 자주 쓰는 물건들은 그동안 드나들면서 대부분 옮겨져 있었다. 오늘 가져오는 짐도 옷과 책 몇 권이 전부라고 했다. 해영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온다고 했던 시간이 지났는데. 역시 고집을 부려서라도 도우러 갔어야 했나.

그때, 문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들렸다. 해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곧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고, 문이 열렸다. 캐리어 손잡이를 번쩍 들고 안으로 들이던 건우가 마중 나온 해영을 보고 씩 웃었다. 해영이 팔을 뻗으며 다가가자, 익숙한 듯 품에 안았다. 그 상기된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건우가 신발을 벗었다.

“혼자서 안 무거웠어?”

“아빠가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셨어요.”

“아아.”

해영은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러다 건우가 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을 때, 해영이 그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의아한 눈을 하고 내려다보는 건우에게 해영이 말했다.

“눈 감아 봐. 보여 줄 거 있어.”

말을 하면서도 긴장이 되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동안 기념일에 서프라이즈를 한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여전히 떨리는 일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건우는 픽 웃더니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또 뭐지.”

올라가는 입꼬리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를 위해 어설프게 준비한 이벤트를 받을 때마다, 선물 자체보다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제 반응을 기다리는 해영을 보는 게 더 즐거웠다. 그리고 제가 기쁘게 받았을 때 짓는 안도하는 모습도. 요 근래 거리를 두는 걸 보고 예상하긴 했으나, 같이 살게 된 기념으로 무언가를 준비해 준 모양이다. 귀엽게.

해영은 건우의 감긴 눈꺼풀 앞에 손을 펼쳐 흔들었다.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아직 뜨면 안 돼.”

“네.”

닫힌 방문 앞에 서서 건우를 한 번 더 확인한 해영이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해영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눈 떠도 돼.”

건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기대감을 잔뜩 품은 해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광경을 확인한 건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전에 없던 침대와 새 책상. 그리고 제 반응을 기다리는 해영. 건우는 고장 난 기계처럼 한참을 멍하니 제 앞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제 방이에요?”

“응.”

“제 침대고?”

“응. 어, 어때?”

어떠냐고?

무릇 연인과의 동거란 신혼 생활의 체험판 같은 것이 아닌가. 같은 집에 살면서 한 침대에서 찰싹 붙어 자고 일어나 하루를 함께 시작하는 그런 거 말이다.

그런데 각방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서프라이즈에, 건우는 해 주려던 반응도 잊고 굳어버렸다. 해영이 그의 얼굴을 살피고는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마음에 안 들어…?”

잔뜩 풀 죽은 목소리에 건우가 얼른 해영의 손을 다시 답싹 붙잡았다. 그리고 촉촉해진 눈으로 허망하게 읊조렸다.

“너무 좋아요….”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좋다고 해 주는 걸까. 그의 표정을 보니 그동안 해 주었던 이벤트 중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해영의 집이라고 해도 제 방조차 없는 곳으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온다는 게 내심 속상했을 것이다. 해영은 그에게 얹혀사는 기분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함께 사는 집이라고, 우리 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건우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말보다 효과적일 것 같아 선택했는데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해영은 그제야 안심하고서 웃었다. 며칠을 발품 팔며 고생했던 시간들이 깨끗이 잊혀졌다.

이 맛에 이벤트 하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백 일 기념으로 맞췄던 커플 잠옷을 입고 같이 양치질을 했다. 그제야 정말 동거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거울을 마주 보고 이를 닦으며 피실피실 웃었다. 건우도 따라 웃더니 엉덩이로 해영의 몸을 툭 건드렸다. 해영이 비틀거렸다. 눈을 옆으로 흘기면서 몸을 옆으로 튕겨 똑같이 복수했으나,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 자.”

해영이 건우의 방과 자신의 방 사이에서 그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제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뒤에서 건우가 팔을 잡아 돌렸다. 해영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선배. 오늘부터 우리 같이 살잖아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해영을 건우가 끌어당겨 품 안에 넣었다.

“특별한 날이다, 그죠.”

“응? 응…. 그렇지.”

건우가 해영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허리 부근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슬금슬금 해영의 방 쪽을 향해 걸었다.

“잘 기념해야겠네.”

해영의 등 뒤로 팔을 뻗은 건우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가 말하는 의도를 뒤늦게 파악한 해영이 건우의 어깨를 밀어 보았으나, 그는 단호했다. 당황하는 머리통에 쪽쪽 입을 맞추며 기어이 침대까지 밀어붙였다.

“잠깐, 잠깐만…!”

잠깐을 외치는 입술 위에도 짧게 키스하고, 해영의 뒤통수를 감싸 안은 채 침대 위로 풀썩 눕혔다. 그 위로 곧바로 몸을 겹쳤다. 해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양 무릎으로 결박하듯 고정한 건우가 빠르게 제 웃옷을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해영이 낑낑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건우는 한번 열이 붙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밀어붙였는데, 그럴 때마다 해영은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금도 그랬다. 도대체 뭐에 버튼이 눌린 건지, 인식을 하기도 전에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침대 위였다.

어느새 바지까지 벗어 던진 건우가 드로즈 차림으로 해영의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가르고 파고들었다.

“거, 건우야, 너무….”

“너무 빨라요?”

건우가 몸을 낮춰 붉어진 귓바퀴에 진득하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응, 응. 아….”

해영이 고개를 냅다 끄덕이며 눈앞의 어깨를 손으로 꼭 쥐었다.

“어떡하지. 천천히 못 하는데, 오늘은.”

원래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고집스럽게 나오던 건우였으나, 그래도 말은 항상 알겠다고 했었는데. 오늘은 그런 보여 주기식 말조차도 해 주지 않았다.

“아까 너무 감동해서, 조절이 잘, 안 돼요.”

건우는 말을 하는 도중 부지런히 해영의 옷을 벗겼다. 잠옷 바지와 브리프를 한 번에 잡아 내리고 몸을 아래로 내렸다. 해영의 등 밑으로 손을 넣어 움푹 들어간 허리를 매만지고, 그 아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물고 빨기 시작했을 때에는, 해영의 성기가 이미 배에 올라붙어 프리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해영이 양쪽으로 벌려진 다리를 벌벌 떨면서 제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건우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흐으, 아, 아윽…. 흐-.”

눈을 위로 치켜뜨고 해영의 반응을 살피던 건우가 돌연 상체를 세우고 그의 몸을 뒤집었다. 골반을 쥐어 위로 끌어 올리고 허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자, 다가올 행위를 예감한 해영이 기겁을 하고 바르작거린다.

“이, 이거 싫어. 건우야….”

“조금만 참아 봐요.”

해영의 양쪽 엉덩이를 쥐어 벌린 뒤 볼기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흐읏…! 으응….”

건우는 오늘따라 더 봐주는 것 없이 밀어붙였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틈만 나면 이 짓을 할 기회를 노렸지만, 해영이 하도 기겁을 하는 바람에 실제 행위까지 이어진 건 한 손에 꼽았다. 대체로 해영이 밀어내지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있을 때나, 자던 걸 깨워서 할 때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싫다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했음에도, 참으라는 말이나 하고.

건우가 꽉 다문 구멍 위를 혀를 내어 핥았다. 해영의 허리가 부들거렸다. 발작하듯 튀는 몸을 한 팔로 단단히 붙들고서 다른 손을 허리 아래로 넣어 조금 전부터 쉴 새 없이 움찔거리는 성기를 감싸 쥐었다.

“흐으, 아!”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그가 만지고 스치는 곳마다 날카롭고 따끔한 쾌감이 일었다. 아마 건우가 꽉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무의식적으로 몸부림을 치다 그의 얼굴에 멍이라도 냈을 것이다.

건우는 손에 쥔 해영의 성기를 위아래로 문지르고, 춥춥 소리를 내며 엉덩이 사이를 물고 빨았다. 그리고 좁은 구멍 틈새로 혀를 세워 밀어 넣었을 때, 해영의 허리가 크게 들썩였다.

“아흑!”

곧이어 꿈틀대던 성기가 건우의 손바닥 위로 희뿌연 정액을 쏟아냈다. 그제야 입술을 떼어 낸 건우가 말했다.

“이거 봐.”

대꾸할 기운도 없이 축 늘어져 헐떡이는 해영을 내려다보던 건우가 상체를 숙여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해영의 정액이 묻은 손으로 단단히 발기한 제 것을 꺼내 두어 번 슥슥 문질렀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콘돔과 젤이 있었지만, 왠지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축축하게 적셔 놓은 구멍 위로 귀두를 갖다 댔다. 타액과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더 적실 필요는 없어 보였으나, 손가락 삽입 없이 몇 번 핥은 정도로는 역시나 제대로 풀렸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약 일주일 만에 갖는 관계였고.

건우가 허리를 조금 물리고 검지와 중지를 모아 주름 위를 더듬다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흐으…. 오늘 왜, 왜 그래…. 아!”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에, 참다못한 해영이 흐느끼며 원망하듯 힐난했다. 건우는 대답 없이 손가락을 구부려 전립선 위를 짓뭉갰다.

각방이라니. 동거, 동거 노래를 부르던 제게 어떻게 각방을 줄 수가 있는 걸까. 그것도 뭐라고 하지도 못하게 칭찬을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서.

건우가 틈 사이로 약지를 하나 더 밀어 넣었다. 해영의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서운하고 화가 난 마음을 침대 위에서 푸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러지. 제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에,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이유를 찾았다. 저는 하루 종일 딱 달라붙어 있어도 갈증이 나는데, 그는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자신이 곧 입대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이 초조함에 한몫했다. 게다가,

‘저, 날짜 나왔어요….’

입대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을 때 해영의 반응이 어땠는가.

‘아, 정말?’

입에는 쭈쭈바를 물고, 속상한 기색 하나 없이 ‘가기 전에 맛있는 거 많이 먹어 둬야겠네.’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옆집 개가 이사를 간대도 그것보단 서운해하겠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

‘…아니에요.’

겁쟁이마냥 거기서 더 묻지도 못했지. 그렇다고 할까 봐.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멀리 있어도, 닿지 않아도, 제가 옆에 없어도.

건우가 손가락 세 개를 한 번에 뽑아냈다. 그리고 구멍이 채 닫히기도 전에 제 성기를 맞춰 꾹 밀어 넣었다.

“하아….”

“아으, 흑, 흐으….”

해영이 베개에 고개를 묻고 도리질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건우가 상체를 낮춰 해영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그 순간, 해영이 거부하듯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건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여태껏 섹스 중에 버거워서, 혹은 힘들어서 밀어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싫은 티를 내보인 적은 없었는데. 건우가 재빨리 몸을 물려 제 성기를 빼냈다. 끄트머리만 겨우 들어가 있던 것이 충분히 풀지 못한 쾌감에 불만이라도 내듯 꺼떡였다. 그와 동시에 제 아래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건우의 이맛살이 흠칫 구겨졌다. 가슴이 아프게 조였다.

“선배….”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고 어깨를 약하게 쥐어 돌리려 했으나, 해영이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옆에 붙어 누워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죄인은 말이 없었다. 해영을 부를 때 외에는 모두 반성의 순간이었다. 선배, 저 좀 봐주세요, 형.

그는 그 간절한 부름에도 한참을 더 대치하고 나서야 해영은 몸을 반 바퀴 굴려 건우의 품 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건우는 또 멀어질세라 뒷머리와 허리를 감싸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해영이 건우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불만을 토로했다.

“왜 무섭게 해….”

“무서웠어요?”

응,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맨 살갗에 닿는 따뜻한 숨이 차게 식은 가슴을 뭉근하게 데웠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까 뒤, 뒤에 그거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하고, 하기 전에 키스도 안 해 주고…. 원래 맨날 해 줬잖아. 그래서 화가 났나 했는데, 화낼 만한 것도 없고. 네가 화난다고 이, 이렇게 하는 애도 아니고…. 왜 그래.”

해영은 저를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봐주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의 앞에서는 착한 척, 선한 사람인 척 굴기 위해 애썼으나, 속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었다.

원래는 관계가 끝난 후나, 내일쯤 넌지시 각방에 대해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었지만 물 건너간 듯했다. 해영이 이렇게까지 말을 한 마당에, 제가 각방 이야기를 꺼낸다면 지금 몰아붙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해영을 실망시키는 것 보다야 제 방을 따로 갖는 게 낫지.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

그 말을 들은 해영이 건우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너무 좋아서. 저도 가끔 그럴 때가 있으니 이해한다. 그의 애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때 그랬다. 너무 좋아서 그의 말이나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건우도 그런 이유로 몰아붙인 거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해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건우의 눈에서 짙은 죄책감이 읽혔다. 해영이 그의 허리에 감았던 손을 올려 건우의 뺨을 살살 매만졌다.

“잘못했어요….”

건우가 그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한 번 더 사과했다. 해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건우의 입술 위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걸 신호 삼아 건우가 입술을 맞물렸다. 이번에는 바로 떼어지는 입맞춤이 아니었다. 윗입술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다가 젖은 살덩이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다. 해영이 두 팔을 들어 건우의 목에 감았다. 그가 작은 입 안을 느릿하게 헤집으며, 한 팔로 허리를 안은 채로 몸을 굴려 해영의 위를 차지했다.

몸 전체가 녹아버릴 것처럼 다디단 키스가 한참을 이어졌다. 조금 전 소홀했던 것까지 배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싫지 않았다. 해영이 목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안은 손을 풀지 않는다. 오히려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당겼다. 건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올려 해영의 맨 가슴팍 위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해영의 허리가 얕게 튀었다.

“천천히 할게요. 이번에도 너무 빠르거나 그만하고 싶으면, 기억하죠? 뭐라고 해야 하는지.”

“응….”

“아까는 왜 안 썼어요?”

“좀 그러다가 말 줄 알았어.”

건우가 겸연쩍게 웃으며 해영의 동그란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뺨에도, 목덜미에도. 드러난 피부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 해영의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씹어 먹고 싶다는 둥 무시무시한 말을 하면서 집착적으로 입을 맞추곤 했는데,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었다. 방금 전의 작은 다툼에 스위치가 눌린 건지, 해영의 몸에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하려는 사람처럼 구석구석 입술을 비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위로 입맞춤이 비처럼 쏟아졌다.

“가, 간지러워….”

한껏 예민해져 있던 몸은 금세 다시 열이 올랐다. 해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끝으로 시트를 꾹꾹 밀어냈다. 건우가 그 양 발목을 부드럽게 쥐어 올렸다. 발바닥 가운데의 연한 살에 춥춥 입을 맞추자, 해영의 몸부림이 거세졌다.

“하으….”

계속해서 중첩되는 쾌감에 허리를 비틀고, 팔을 머리 뒤로 넘겨 시트를 구겨 잡으면서도, 혹여나 실수로 얼굴을 차진 않을까 바들바들 버틴다. 건우는 그런 해영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슬금슬금 올려 허벅지 안쪽을 움켜쥐었다. 뽀얀 살 위에 손 모양으로 붉은 자국이 남는다. 건우는 이 흔적이 좋았다.

섹스를 하고 나면 해영의 몸은 이리저리 부딪힌 사람처럼 곳곳에 멍이 남는다. 멍이 잘 드는 체질이라 관계 중에 몸을 잡은 걸로도 쉽게 물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서 조심하기도 했었는데, 해영이 아프게 느끼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부러 살들을 더 쥐어 잡았다.

이제는 멍 자국이 옅어질수록 초조한 마음까지 드는데, 세간에서 말하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해영의 무릎을 잡아 벌렸다. 충분히 풀어 둔 구멍 위에 미끌미끌한 귀두 끝을 문지르며 몸을 낮춰 해영의 입에 입술을 겹쳤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입을 벌린 해영이 팔을 들어 건우의 목을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아래를 푹 파고들었다.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부피감에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읍, 흐….”

뱉어지지 못한 신음이 입 안으로 먹힌다. 건우가 해영의 볼기를 쥐어 벌리며 끝까지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안쪽 오돌토돌한 내벽이 오물거리며 핏줄이 도드라진 성기를 씹어 문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잠시간 숨을 골랐다. 마주 닿은 가슴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숨이 모자란 해영이 고개를 살짝 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건우는 다시 입을 맞추는 대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좁아요. 씹어 먹히는 거 같아.”

“말, 흐…. 말하지 마….”

침대 위에서 약간의 노골적인 말도 못 견뎌 하는 해영이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은 좋다고 벌벌 떨리는데. 아…. 너무 힘 주진 마요.”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속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매번 말하지 말라고 질겁을 하는 것과 반대로, 그의 안쪽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예민해져 조금만 움직여도 잘게 경련한다.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요.”

건우가 허리를 길게 뺐다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흐윽, 아!”

“하루 종일, 이렇게.”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도록.

가진 것도, 이뤄낸 것도 없는 제가 그의 앞에서 자신 있게 내밀 수 있는 것은 그를 향한 애정뿐인데. 그조차 색이 바래 본래의 색깔을 잃어 가고 있었다. 짧은 을의 연애를 하고, 연애 한 기간보다 더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온다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를 초라하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건 제가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이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음란했다. 건우는 허리를 쳐올리며, 해영의 배 언저리를 더듬었다. 제 성기가 들어차 있는 곳 위를. 최근에 생긴 습관이었다. 안에서 드나드는 움직임이 손바닥에서 느껴질 때면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출 만큼 이성이 흐려진다.

“흐으, 응, 아….”

뱃가죽을 약하게 누르면서 허리를 돌려 전립선 위를 짓누르자 해영의 성기 끝이 바르르 떨렸다. 처음에는 이 정도도 아프다고 할 정도로 힘들어했는데, 완전히 길이 들어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턱을 들고 신음한다. 제게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뒤통수가 저릿할 만큼 좋았다. 건우가 해영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무게를 실어 빠르게 찍어 올렸다. 양쪽으로 넓게 벌려진 해영의 다리가 건우의 움직임에 맞춰 힘없이 흔들린다.

“하윽! 아, 아!”

“아파요?”

“아니, 아, 좋아, 좋…. 으응….”

해영이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씹….”

이를 악문 건우가 치미는 사정감에 한계까지 단단해진 성기를 강하게 쳐올렸다. 퍽퍽, 좁은 안쪽을 빠르게 왕복하는 음경을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이 물고 늘어진다. 그 압박감에 건우가 미간을 구겼다.

“아흑!”

해영의 몸이 얕게 튀며, 그의 맨 가슴팍 위로 하얀 정액이 울컥 쏘아졌다. 건우 역시 머리가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안쪽 깊은 곳까지 저를 밀어 넣고 사정했다.

“윽, 하….”

건우는 해영의 등 아래에 팔을 넣어 제 쪽으로 가득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땀에 절은 눅눅한 공기와 섹스의 냄새가 섞여 몸속을 가득 채웠다. 눈앞의 보이는 살갗에 입을 맞추고, 아래로 허리를 느릿하게 놀리며 후희를 이었다. 여전히 단단한 성기가 연한 내벽 위를 문지르며 안에 파정한 흔적과 더불어 그 속을 채운다.

그렇게 속에 있던 정액이 거품을 만들고 바깥으로 밀려 나올 때쯤이 되어서야, 건우는 제 것을 뽑아냈다. 뻐끔거리는 구멍 사이로 희뿌연 액체가 주륵 흘렀다. 건우가 협탁 위에서 티슈를 여러 장 뽑아 엉덩이 밑에 깔고, 검지 하나를 넣어 안쪽을 살살 긁어냈다.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진 해영이 손을 치워 달라 부탁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일 배 아파요.”

“읏, 안에다 안 하면 됐잖아….”

건우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해영의 뺨 위에 쪽쪽, 입을 맞추며 남은 정액을 모조리 빼내고 나서야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건우가 해영의 목 아래로 팔을 넣어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해영은 시야 가득 채운 단단한 가슴팍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으로 그를 살짝 밀었다.

“여기서 자게?”

“…….”

그의 방이 따로 없을 때야 어쩔 수 없이 좁은 침대 위에 부대끼며 잤다고 해도, 이제는 이렇게 불편하게 잘 필요가 없었다. 순수하게 의문을 담아 꿈뻑이는 눈을 내려다보던 건우가 해영의 다리 사이에 제 무릎을 슬쩍 끼워 넣었다.

“한 번 더 해도 돼요?”

“어, 어?”

답을 듣기도 전에 해영을 제 몸 위로 올린 건우가 허벅지 사이에 제 것을 비볐다. 뒤통수를 제 쪽으로 감싸 안고 허리를 얕게 쳐올리자, 해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렇게 세 번을 연달아 하고 난 이후였다.

“하윽! 흐으…. 이제 그, 그만하고 네 방에, 아!”

“한 번만, 더요.”

“아, 안 돼…. 아읏!”

기겁하고 고개를 젓는 해영을 붙잡고 그렇게 두 번을 더 했다. 마지막에 해영은 더 나올 것도 없어 뒤로만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진 해영을 내려다보던 건우가 땀에 젖은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곧 이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색색 숨을 내쉬는 해영의 옆에 누워 그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저녁, 해영은 건우의 방문에 멀거니 서서 사용감 없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어제만 날도 아니고.

침대 옆에 앉아 주름 하나 없는 이불 위를 손바닥으로 다림질하듯 쭉쭉 펼쳤다.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원단 위에 코를 박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새 이불 냄새가 훅 끼쳤다. 냄새가 별론가. 몸을 일으켜 분무 형태의 섬유 유연제를 가져와 이불 위에 뿌렸다. 다시 냄새를 맡았다. 보송하고 포근한 향기가 배어 당장이라도 눕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해영은 뿌듯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안에서 뭐 했어요?”

건우가 물 한 잔과 해영이 즐겨 마시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그냥.”

해영은 대충 얼버무리며 그에게로 다가가 건우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건우가 맥주 캔을 해영의 앞으로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받아 든다.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 하나가 감긴다. 해영이 몸을 뒤로 기댔다.

건우가 다른 손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배급사 로고가 커다랗게 나오는 장면에서 정지해두었던 영화가 다시 재생했다.

영화는 히어로 물이었다. 잔잔한 로맨스나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 건우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장르를 좋아하는 해영이 공통적으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와 히어로 영화였다. 영화 취향까지 정반대인 건 놀랍지도 않았다. 한 번은 서로가 좋아하는 영화를 하나씩 시도해 본 적도 있는데, 해영이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땐 건우가 영화 러닝 타임 중 반 이상을 눈을 감고 있었고, 건우가 좋아하는 영화를 봤을 때 해영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 그 뒤부터는 무난하게 둘 다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을 보기로 합의했다.

“건우야, 너 쟤가 좋다고 했지?”

해영이 화면 속 캐릭터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멋있어요.”

“너는 꼭 일찍 죽는 애들만 좋아하더라. 쟤도 여기 마지막에 죽는대.”

헤실거리는 얼굴로 대왕 스포일러를 날린 해영이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건우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

영화는 다음 시리즈를 유추할 만한 장면을 끝으로 끝이 났다. 해영의 스포일러 덕분인지, 건우는 좋아하는 캐릭터의 죽음도 덤덤하게 견뎌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해영의 허리에 감은 팔을 훅 당겨 바짝 붙어 안았다. 졸음이 묻은 옆얼굴에 입을 맞추자 아니나 다를까, 작게 하품한 해영이 몸을 완전히 뒤로 맡겼다.

“졸려요?”

“응…. 재밌어서 졸린 거 참고 봤어.”

해영의 상의를 살짝 들춘 건우가 그 안쪽으로 손을 넣어 말랑한 배를 쓰다듬었다. 그 나른한 손길에 해영이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소파에서 잘까요?”

건우의 말에 축 늘어져 있던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아니.”

정신이 번쩍 든 해영이 몸을 일으키려 바둥거렸다. 건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기를 쓰고 따로 자려고 하네. 오기 생기게. 해영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버티자, 끝내 일어나지 못한 해영이 건우를 돌아보았다. 축 내려간 눈꼬리 끝에 의문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해영의 귓바퀴에 쪽쪽, 입을 맞추다 배를 주무르던 손을 돌연 위로 올렸다. 예민한 가슴께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다른 한 손을 바지 안으로 쑥 넣었다. 말랑한 성기가 손에 잡힌다. 해영의 허리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

건우가 그대로 해영을 안아 들어 소파 위에 풀썩 눕히곤 곧바로 입술을 겹쳤다.

“오늘은 안 할래.”

뽀송하게 씻고 나온 해영을 붙잡고 뽀뽀를 퍼붓던 중, 해영이 꽤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오히려 너무 좋았던 게 문제지. 오늘 아침에도 건우의 침대를 붙잡고 얼마나 한참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맨날 하니까 조금 힘들어서….”

오늘만큼은 기필코 제 쓰임을 다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멈추기 어려우니,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건우는 한동안 대답을 안 하고 버티다가, 마지못해 침울한 얼굴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자.”

해영이 활짝 웃으며 건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가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굳게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건우가 제 방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해영이 직접 골라 준 침구와 침대. 해영이 직접 골라 준 거. 그가 저를 위해 준비해 주었다는 사실만 거듭 되뇌며 좋게 보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건우는 낯선 침대에 풀썩 누워 눈을 감았다.

“후….”

잠이 오지 않았다.

한집에 살면서 왜 따로 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제까지 품에 넣고 자던 온기가 없으니 허전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침대는 또 왜 이렇게 작은 건지. 침대 밖으로 삐져나간 발이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옆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 장장 두 시간을 잠 한 숨 못 잔 채 이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건우는 가슴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해영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애인은 방치해 두고서 혼자 잘만 자네. 문을 천천히 닫은 건우가 침대로 다가갔다. 해영은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배를 덮고 있는 이불을 들어 그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붙여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해영이 무의식적으로 침입자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잠결이라 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으응, 왜….”

건우는 그의 손을 잡아 제 등 뒤로 넘기곤 더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저 방에 벌레 있는 거 같아요.”

해영이 다리를 움직여 건우의 종아리를 발로 꾹꾹 밀어냈으나, 건우는 고집스럽게 붙어 있었다.

“가…. 너 벌레 안 무서워하잖아….”

“벌레랑 같이 자긴 싫단 말이에요.”

그렇지. 무서워하는 거랑 싫어하는 건 별개지. 해영이 고민하는 걸 눈치챈 건우가 해영을 안은 상태로 몸을 돌려 그를 제 위에 올려 눕혔다. 그만 생각하고 얼른 자라는 듯, 등을 도닥였다. 익숙한 자세에 금세 얌전해진 해영이 건우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오늘도 침대는 주인 없이 홀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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