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월 17일
커다란 바디 타올로 몸을 둘둘 싸맨 해영이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욕실에서 나왔다. 빨리, 빨리. 거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겨울 공기에 추운 것도 잊고,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찰박찰박, 젖은 발걸음 소리가 티비 앞에서 멈추었다. 허리를 숙여 거실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8시 반. 시간을 확인한 해영이 곧바로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요즘 즐겨 보는 연애 솔루션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이었다.
아직 광고 중이네. 다행이다. 열기가 남아 있는 뺨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몸을 대충 닦은 뒤 새 옷을 주워 입었다. 그 길로 곧바로 주방으로 향해 맥주컵을 집어 들고 냉장고를 열었다. 방실거리며 문을 연 해영의 얼굴에 근심이 비쳤다. 건우의 손을 타지 않은 냉장고 안이 난장판이었다. 해영 나름대로 청소를 하고는 있었으나, 재능이 없는 건지, 노하우가 없는 건지, 건우처럼 말끔하게 되지 않았다. 휴가 나오기 전까지만 치우면 되지, 뭐. 고개를 작게 끄덕인 해영이 냉장고 문에 엉망으로 진열된 소주 한 병을 꺼내 들고 소파로 향했다.
차가운 액체가 담기자, 맥주잔 표면에 금세 송골송골 물기가 맺힌다. 해영이 그 시원한 소주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아닌 바탕화면에 띄워 둔 디데이 어플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건우 휴가/졸업식 D-5]
본다고 날짜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습관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확인했다. 시간 진짜 안 간다. 시무룩해진 해영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나온 게스트는 연예계에서 유명한 장거리 커플이었다. 이어지는 시청자 사연 또한 장거리 연애에 관련된 고민이었다. 어떻게 하면 장거리 연애를 잘할 수 있느냐는 흔하지만 사랑스러운 고민. 사연이 사연인 만큼, 해영도 다른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장거리 연애 하다가 결혼한 커플로 유명하시잖아요. 조언 좀 해 주세요.
―어쩌다 보니 그걸 8년이나 했더라고요.
MC의 질문에 입을 연 여성 게스트가 살풋 웃었다.
“8년…. 대단하다.”
해영이 멍한 얼굴로 감탄하다 소주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군대 기다린 게 시작이었죠.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전역하고 나서 해외 활동을 이어 가는 바람에 계속 장거리를 하게 됐어요. 연애 초반처럼 애틋함이 지속되는 건 좋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때도 많았어요. 특히 군대에 있을 때는 사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간 거라 더 심했죠. 얘가 맨날 확인받고 싶어 했어요. 불안해서.
여자가 옆에 앉은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해영은 입대 전에 건우와 다투었던 일이 떠올랐다.
‘저는 선배 아니면 안 되는데, 선배는.’
불안한 마음을 토해내다, 괴로운 얼굴로 뱉던 말. 결국 뒷말은 듣지 못했으나,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제가 뭐라고 했더라.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화만 잔뜩 내고, 정작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떼쓰는 애처럼, 왜 몰라주느냐고 했었지.
―8년씩이나, 대단하시네요. 사연 주신 커플께 비결 좀 알려 주세요.
―믿음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믿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많이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맞아요, 표현 중요한 것 같아요.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그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결국엔 남이니까.
―맞아요.
탁구처럼 끊이지 않고 빠르게 이어지는 대화에,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 그리고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는데.
여자가 머뭇거리며 말을 골랐다. 주변 패널들이 재촉하자, 용기 낸 여자가 입을 열었다.
―만날 때마다 서로 옷을 줬어요.
―옷이요?
―네. 후각이 주는 안정감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왜, 사진보다 냄새가 추억을 떠올리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하잖아요. 그걸 듣고 시도해 본 건데, 정말 옆에 있는 것 같고 좋았어요.
옷…. 해영의 고개가 침실로 돌아갔다. 뭐에 홀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해영이 침실로 가 옷장을 열었다. 그 안에서 건우가 자주 입었던 티셔츠 한 장을 꺼냈다. 너무 변태 같은가.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도 부끄러웠다. 해영이 머뭇거리다 붉어진 얼굴을 하고 움켜쥔 티셔츠에 조심스럽게 코를 박았다.
“어, 진짜 좋다….”
건우 냄새. 얼굴에 티셔츠를 꾹 누른 채로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위로는 건우의 체취를 듬뿍 들이키며,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표현을 많이….
대화창을 띄워 놓고 머뭇거리던 해영이 결심한 듯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너무 뜬금없나. 다 적고 나서도 엄지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한참을 배회했다. 모르겠다. 그러다 눈을 딱 감고 눌렀다. 좀 어색하고 쑥스럽긴 해도, 보내고 나니 숙제 하나를 해치운 듯 후련한 기분이었다. 계속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해영이 헤실거리며 다시 건우의 티셔츠 위로 숨을 들이켰다.
그때,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전화였다.
“여보세요?”
―뭐예요?
“응…?”
―무슨 일 있어요?
낮은 목소리에 날선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이 돌아오다니. 그동안 얼마나 표현을 안 했으면. 반성했다.
“아무 일 없어. 그, 그냥 말하고 싶어서 했는데….”
―아, 진짜. 놀랐잖아요.
“…….”
그 정돈가.
―저도요. 좋아해요.
응, 그 말에 해영이 히죽 웃으며 티셔츠에 코끝을 비볐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해영은 해당 프로그램의 다시보기를 찾아 이전 회차를 클릭했다. 유익한 프로그램….
우웅-.
거실 테이블이 가늘게 진동했다. 그 소리에 가장 먼저 귀가 열렸다. 희미한 티비 소리와 휴대폰 진동음이 섞여 들렸다. 해영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옆으로 팔을 뻗어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손끝에 걸린 휴대폰을 곧바로 귀에 가져갔다.
“응….”
―목소리 봐. 조금 이따 다시 전화할까요?
주말에 해영이 늦잠을 자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건우는 이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참았다가 늦게 전화를 걸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 시간쯤이면 깨어 있는데, 오늘은 많이 졸렸던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
해영이 소파 커버에 뺨을 비비며 잠을 덜었다.
―어제 많이 늦게 잤어요?
“조금…. 세 신가.”
정확히는 몇 시에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옛날 회차까지 다시보기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한 게 세 시라 세 시라고 답하긴 했지만 그 뒤로 두 편 정도 더 본 기억이 나니, 아마 다섯 시가 넘어서 잠들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었다.
“괜찮아. 전화 다 하고 잘래.”
하지만 피로를 다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아침에 건우 목소리를 듣는 건 귀했다. 특히 오늘처럼 눈 뜨자마자 목소리를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지난주에는 제설 작업을 한다고 주말에 통화를 못 했는데, 그렇게 가끔씩 통화를 못 하는 날이 생길 때마다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과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밉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것에 건우가 작게 웃었다. 응, 그래요.
“아침은 먹었어? 맛있는 거 나왔어?”
―그냥. 주말마다 나오는 빵, 그거요.
맛있는 것 좀 주지. 해영의 입이 불만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주말마다 나오는 빵이란, 건우가 한창 불평을 토로했던 말라비틀어진 빵이었다. 웬만하면 투정 없이 잘 먹는 건우였기에 해영은 대체 얼마나 맛이 없는 건지 궁금해했고, 건우는 진저리를 치며 그런 거 궁금해하는 거 아니라고 단호하게 잘라냈다.
“휴가 때 맛있는 거 많이 먹자.”
그러니 휴가를 나올 때마다 해영이 가장 신경 쓰는 건 단연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먹지 못하는 것들, 건우가 좋아하는 걸 잔뜩 먹여야지. 빵도 딱딱한 거 말고 갓 구운 폭신하고 따끈한 빵을 먹여야지.
―아….
그러나 잔뜩 들뜬 해영과는 달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건우는 대답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게…. 휴가 취소됐어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해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어…. 저, 저번에 된다고….”
―응, 그랬는데 오늘 갑자기 안 된대요. 어떡하지.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해영은 손에 건우의 티셔츠를 움켜쥔 채 입을 벙긋거렸다.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마음처럼 되는 일도 아니니까. 그래야 하는데.
이번 휴가는 해영의 졸업식 날짜에 맞춰 잡은 휴가였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웃어넘기기엔, 기대하고 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죄송해요….
오래 이어진 정적 끝에 건우가 사과했다. 해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보다 가장 아쉽고 속상한 건 건우일 텐데, 애처럼 티를 내 버린 게 후회됐다.
“아, 아니야. 네가 뭐가 죄송해. 괜찮아. 그럼 나도 그냥 집에서 쉬어야겠다!”
―졸업식 안 가고요?
“응, 응.”
―선배는 가면 안 돼요?
해영이 티셔츠 끝을 종이접기 하듯 접고 또 접었다.
“…혼자는 싫은데.”
―학사모 쓴 거 보고 싶어요.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 주시면 안 돼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축 처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 정도로 보고 싶어 하는데 못해 줄 것도 없지.
“…알겠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막상 졸업식 당일이 되니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아….”
거울 위로 한숨이 흩어졌다. 해영은 앞에 비친 제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지지난 휴가 때 면접에 입을 정장을 함께 고르러 갔다가 건우가 너무 어울린다며 같이 사 준 잔체크무늬가 있는 갈색 수트. 면접에 입을 만한 색이 아니라서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처음 꺼내 입는 것이었다. 그 안으로는 아이보리색 셔츠와 재킷보다 한층 더 밝은 갈색의 니트 조끼. 어제 그와 통화하다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하나하나 골라 주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었음에도, 해영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또 혼자인 졸업식이라니.
해영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손에 든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하아….”
중요한 날이라고 해서 갑자기 목도리가 잘 매질 리 없지. 목도리라기보다는 그냥 풀어지지 않게 묶어 놓은 모양에 가까웠다. 그냥 가자. 다시 매 봤자 별 차이 없다는 걸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해영이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
“이상한데….”
졸업장을 옆구리에 낀 해영이 엄지와 검지로 휴대폰 화면 속 제 모습을 확대했다. 사이즈를 잘못 받은 건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가운을 입고 있는 것도, 학사모가 삐뚤어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표정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해영이 손가락을 한 번 더 움직여 얼굴 부분을 키웠다. 기분 엄청 안 좋아 보이네. 건우에게 보여 줄 사진이니만큼 웃기 위해 노력했으나, 우울한 기분에 카메라 앞의 어색함까지 더해져 결과적으로 처음 보는 괴상한 표정이 되었다.
이것도 지나가던 사람에게 겨우 부탁해서 찍은 거라, 도저히 한 번 더 찍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햇빛이 너무 세서 표정이 이상하게 나왔어.’라는 변명과 함께 건우에게 전송했다.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학사모를 쓴 동기끼리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족, 연인과 축하를 나누는 사람들, 홀가분한 얼굴로 학사모를 던지는 사람들. 흔하디흔한 졸업식 풍경 속에, 어우러지지 못하는 건 해영뿐이었다.
졸업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 지나가다 툭 건드리면 그걸 핑계로 울어버리고 싶을 만큼 눈가가 시큰했다. 속상해하지 말자고, 아침에 그렇게 거듭 다짐을 하고 나왔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학사복 대여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계속 입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냥 빨리 반납하고 집에 가야지. 그렇게 고개를 바닥으로 툭 떨구고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덩어리에 이마가 부딪혔다. 반동으로 휘청이는 제 몸을 잡아 주는 손이 익숙하다.
“어….”
해영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홱 쳐들었다. 제 앞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영은 커진 눈을 꿈뻑이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가 코끝을 찡그리며 시원하게 웃고서 꽃다발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라니. 놀란 저는 안중에도 없는지, 뻔뻔한 얼굴로 과거의 어느 날을 흉내 낸다.
“너 뭐, 뭐야. 왜….”
“오늘은 커피 말고 꽃 줘야지.”
건우가 여전히 멍한 해영의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포장지가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 소리를 낸다. 해영은 그제야 그가 저를 놀래켰다는 걸 깨달았다. 화사한 형형색색의 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해영의 턱이 금세 쭈글쭈글 호두턱이 되었다.
너무해. 너무하다. 해영은 아침부터, 아니. 그가 오지 못한다고 말한 날부터 조금 전까지 차곡차곡 쌓인 감정을 떠올렸다. 극한까지 그를 보고 싶게 만들 작정이었다면 성공이었다. 미운 마음과 안도감이 속에서 뒤섞였다. 저조차도 지금 앞에 있는 그가 보기 싫은 건지,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해영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건우의 가슴팍에 이마를 툭 기대고 흐느꼈다.
“흐으…. 너무해….”
건우가 겸연쩍게 웃으며 해영의 등을 도닥였다. 많이 놀랐나 보네. 평소 같았으면 밖에서 손을 잡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면서, 다짜고짜 품으로 파고드는 걸 보니 그랬다.
“진짜 안 올 줄 알았어요?”
그 말에 해영이 고개를 떼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축 처진 눈에 물기가 넘칠 듯이 일렁인다.
“네가 못, 온다고, 했으니까….”
울음이 섞여 문장 사이가 뚝뚝 끊겼다.
“누구 졸업식인데요. 탈영해서라도 와야지.”
“그게 무슨, 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훌쩍이던 해영이 졸업장을 쥔 손으로 건우의 복부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야, 그가 통하지도 않는 엄살을 부리며 싱글거렸다.
“어디.”
그러더니 해영의 양 어깨를 잡아 몸에서 멀찌감치 떼어 내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쭉 훑었다.
“예쁘다.”
건우가 사랑스럽다는 눈을 하고 입꼬리를 쭉 끌어올려 웃었다. 그가 다정하게 굴수록 해영의 입꼬리는 끝도 없이 내려가는 중이었다. 위태롭던 눈물이 기어이 볼가를 타고 흐르자, 건우가 손을 뻗어 엄지로 빠르게 닦아 주었다.
“웃는 거 보여 줘요. 아까부터 계속 힘없이 걸어 다니더만.”
“어, 언제부터 봤어…?”
“저기서 나올 때부터요. 계속 따라왔는데 끝까지 모르더라.”
해영이 그를 밉지 않게 흘겼다.
“빨리. 웃어 줘요.”
놀라게 한 건 여전히 밉지만, 그래도…. 해영이 힘겹게 광대를 끌어 올려 웃었다. 울음이 그치지 않아 안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엄청 이상한 표정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건우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처럼, 그걸 본 해영의 얼굴 위에 꾸밈없는 미소가 번졌다. 바스락, 해영이 쥐고 있던 꽃다발을 고쳐 안았다.
“고마워….”
건우는 벅찬 듯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웃는 해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놀라게 하려던 것도 맞고, 울 것도 예상했지만 역시 가장 예쁜 건 이 얼굴이었다. 이마 위로 떨어지는 진득한 시선을 느낀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건우가 손을 올려 검지로 해영의 뺨을 톡 건드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씩 웃었다.
“졸업 축하해요.”
둘은 같이 학교를 다닐 때 함께 거닐던 곳을 구석구석 누볐다. 수 없이 지나다니던 곳이라 딱히 어디 가 보자, 할 것 없이 그냥 걸음이 향하는 대로 걸으면 되었다. 경영관 옆 산책로를 지나, 서로를 훔쳐보던 학생 식당, 시험 기간에 제집처럼 드나들던 도서관. 지정석처럼 사용하던 구석진 벤치에 다다랐을 땐 인적이 드문 틈을 타 짧게 입을 맞췄다. 건우가 박박 우겨서 간 세미나실은 문이 잠겨 있었는데, 그는 대놓고 아쉬운 티를 내었다.
그렇게 탐방이라도 하듯 돌아다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북적이던 인파가 어느새 반으로 줄어 있었다.
“아, 누나도 동기 졸업한다고 같이 왔는데. 잠시만요.”
건우는 그렇게 말하고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어깨로 받쳐 고정하고, 해영 대신 들고 다니던 학사모를 다시 주인에게 반듯하게 씌워 주었다.
“어디야. 와서 사진 좀 찍어 줘. 경영관 앞에. 어.”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차윤서가 다가왔다. 그녀는 건우와 닮은 입매로 활짝 웃더니 들고 온 꽃다발을 해영에게 건네주었다.
“자, 졸업 축하해.”
“가, 감사합니다.”
꽃다발이 두 개…. 해영이 품 안에 넘치게 찬 꽃다발을 헤실거리며 내려다보았다.
“취업도 축하하고.”
“네? 어떻게….”
“쟤가 자랑을 하루 이틀 해야지. 누가 보면 지가 취업한 줄 알겠어.”
그녀의 말에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옆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합격 소식을 들려주자마자 제 일처럼 기뻐하긴 했어도 주변에 자랑까지 했을 줄은 몰랐는데…. 왠지 모르게 눈 뒤쪽이 뜨거워졌다.
“근데 여기서 찍는다고? 다른 예쁜 곳들 놔두고?”
그사이 건우에게 휴대폰을 받아 든 차윤서가 칙칙한 경영관 건물을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로 질문했다. 건우가 해영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견을 물었다.
“다른 데서 찍을까요?”
“아니, 여기가 좋아.”
“괜찮대.”
차윤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휴대폰을 들어 앵글을 맞췄다.
“맘대로 해, 그럼. 찍는다. 하나, 둘.”
셔터음이 연달아 두 번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해영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가 모른 체하며 손을 내렸다.
“나 간다!”
임무를 완수한 차윤서가 휴대폰을 넘기고 사라졌다. 앨범에는 놀라 눈을 크게 뜬 제 모습 한 장과, 건우의 쪽을 홱 돌아본 모습 한 장이 남아 있었다.
학사복 대여 시간을 꽉 채운 후 반납하고 온 해영이 아침의 그 차림으로 건우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목도리를 든 채였다. 자연스럽게 목도리를 받아 든 건우가 해영의 목에 단정히 매 주었다. 반듯하게 매듭이 지어지는 동안, 해영은 찍었던 사진을 들여다보며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되게 멋있게 나왔는데 나는 이상해….”
건우는 반박 없이 웃기만 했다. 그렇겠지. 이건 아무리 애인이라도 잘 나왔다고 입에 발린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으니까. 아까 울어서 얼굴도 부어 있고, 놀라서 표정도 이상했다. 제 모습은 형편없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건진 건 있었다.
“진짜 멋있다….”
엄지와 검지로 화면 가득 건우만 보이도록 사진을 확대한 해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장도 잘 어울리고 웃고 있어서 더 잘생겨 보였다. 구석구석 분석이라도 하듯 검지로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건우의 얼굴 곳곳을 살폈다. 그 동그란 뒤통수를, 건우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녁은 건우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졸업식 시즌이라 사람이 붐비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요리는 더할 나위 없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격식 있거나 고급스럽지도 않았고, 적당히 친근하고 아기자기한 점도 좋았다. 둘이 고른 요리에 맞춰 직원이 추천해 준 와인은, 와인을 잘 모르는 건우의 입에도 잘 어울린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 잔을 겨우 비운 건우 덕분에 해영은 와인 한 병을 통째로 차지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와인이 맛있다고 노래를 불렀다. 결국엔 계산하기 전, 따로 구매해 집까지 들고 왔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해영이 같은 옷을 입은 건우의 왼쪽 허벅지 위에 앉아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히죽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그렇게 혼자 보낼 줄 알았는데. 이제는 미웠던 서프라이즈마저도 이 기분 좋음의 시작점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결론적으로는 먹힌 모양이었다.
“맞아, 대리님 다른 지역으로 가셨대.”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해영이 번뜩 떠오른 소식을 말했다.
“그래요?”
덤덤하게 되묻는 얼굴을, 해영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아?”
“티 나요?”
“응, 엄청.”
건우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마치 처음부터 숨길 생각 따위 없었다는 것처럼. 그러더니 해영이 들고 있던 와인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가올 일을 직감한 해영이 재빨리 건우의 무릎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건우가 허리를 끌어안는 게 더 빨랐다. 올가미마냥 양팔로 단단하게 붙들어 안고서 보이는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아!”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뒤통수, 귓불, 뺨에 쉴 새 없이 키스하던 건우가 해영을 소파 위로 던지듯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마주 보이는 얼굴 위에 뽀뽀를 퍼부었다. 해영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이리저리 털어내며 피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온몸이 단단히 붙잡혀 있어 소용이 없었다. 도망가려던 것에 벌이라도 주듯, 건우가 입술을 벌려 뺨을 깨물었다.
“아! 아파….”
희미하게 잇자국이 남은 뺨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몸부림을 치느라 훤히 드러난 둥근 이마에도.
“여기다 확 내 거라고 써 놓을까 봐. 도망이나 가고, 안 되겠어.”
그 말에 해영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도망 안 가….”
“이마에 이름 쓰는 거 싫어요?”
“어!”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이마가 드러날 때마다 ‘차건우 거’ 같은 글자가 보인다고 생각하면. 창피해서 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여기는?”
그가 이마를 가리고 있던 해영의 왼손을 잡아 올려 주무르다, 손목 안쪽에 입술을 묻으며 물었다.
“거기도 싫어….”
“그럼 여긴.”
그러더니 이번엔 손끝을 모아 잡고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어?”
해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건, 분명 반지였다. 그것도 처음 보는. 해영이 손가락을 넓게 펼쳐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마치 마법이라도 본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었다.
“취업 선물.”
“어, 언제 끼웠지….”
반지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맞았다. 은색의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디자인 위에, 세로로 얇게 파인 홈이 하나 있었다. 여기가 위로 가야 하나 보다. 해영은 조금 삐뚤어진 반지를 파인 곳이 가운데가 되도록 살살 돌렸다.
“고마워…. 예뻐, 건우야.”
“잘 끼고 다녀요. 빼고 다니면 엉덩이에 이름 쓸 거야.”
왜 이마에서 엉덩이로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훤히 보이는 곳보다는 차라리 엉덩이가 나았다.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기뻐하던 얼굴 위에 점점 그늘이 졌다. 저와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큼직한 손을 바라보았다. 해영의 눈이 아래로 축 처졌다. 건우는 이런 것도 곧잘 해 주는데. 저는 지금까지 사귀면서 커플링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이가 많다고 연애를 잘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조차도 그가 해 줄 때까지 멀뚱히 있었다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저번에 티비에서 봤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면 표현을 많이 해야 한대.”
“그래서 그때 갑자기 좋아한다고 했어요?”
건우가 씩 웃고는 해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받던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근데 그만큼이 아니야, 나는.”
대리님의 발령에 기뻐하는 것도, 이름을 쓰겠다거나 반지를 선물로 준 것도. 그는 시종일관 장난처럼 이야기했지만, 해영은 마냥 밝게만 볼 수가 없었다. 건우가 종종 내보이는 불안의 발로를 마주할 때마다 어김없이 그날, 그 말이 떠올랐으니까.
‘저는 선배 아니면 안 되는데, 선배는.’
아닌데. 나도 그런데.
“건우야, 나는…. 나는 네가 너무 좋아.”
제가 말을 조금만 더 잘할 수 있었더라면.
“너무 좋아….”
얼마나 좋아하는지 똑바로 표현할 수만 있었더라도. 그랬다면 건우가 혼자 불안해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게 아니야. 제 마음은 결코 이 정도가 아니다.
“이게 아닌데….”
해영이 손등을 올려 시큰해지는 눈가를 재빨리 가렸다.
“왜요, 왜.”
건우가 당황한 얼굴로 해영의 뺨을 쓰다듬다가, 가늘게 떨리는 입술 위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익숙하지 않아서, 라는 핑계가 통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연습이라도 해둘걸. 그가 해 주는 것처럼 멋있는 이벤트나 이런 걸 준비할 생각은 못 하더라도, 말이라도 잘했으면. 그랬더라면 입대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우가 불안해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제가 조금만 더 능숙했어도. 그래서 더 확신을 줄 수 있었다면.
“다 알아요.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넌 몰라.”
뱉어 놓고 아차 싶었는지, 해영이 입술을 꾹 물었다.
“내가 마, 말을 잘 못해서 다 표현이 안 돼…. 네가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을 잘 못하겠다는 말조차 똑바로 뱉지 못한 저를, 그는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제 손을 잡아 일으켰다. 허리를 살짝 들어 단단한 허벅지 위에 마주 보게 앉힌다. 익숙한 자세에 해영이 건우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자, 머리 위에서 힘없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이 전에 없이 조심스럽다. 그는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건우가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에요. 제가 잘 해줘서 좋다고 했잖아요.”
“응….”
누군가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비교 대상이 없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비교 대상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든 새로 나타날 수 있는 거였고.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나면요?”
알을 깨고 바깥으로 나온 해영은, 애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봐도 객관적으로 사랑스럽다.
“없어….”
“나타나면.”
거듭 단호하게 물어오자 해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린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건우처럼 저를 아껴 주는 사람이 또 나타난다면, 그땐 그 사람도 건우처럼 좋아할 수 있느냐고?
“저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건우가 해영의 어깨를 잡아 떼어 내고, 그 뺨을 엄지로 천천히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선배는 너무 예쁘고, 앞으로 제가 모르는 세상에서 더 멋있는 사람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벌레 같은 놈들이 꼬이는 건 예견된 순서일 거고, 그중에는 번지르르한 놈들도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진심으로 해영을 생각하고 소중히 하겠다는 놈들도 있을 수 있겠지.
“이런 말 하기 진짜 쪽팔린데.”
건우가 입술 안쪽을 피가 맺힐 정도로 물었다.
“선배 주변에는 이제 저보다 번듯하고, 멋있고, 잘난 놈들 수두룩할 거라고요. 근데 저는.”
해영과 학교를 같이 다닐 때 까지는 느껴진 적 없던 차이가 실감나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반년이 지나 제대를 해도 저는 여전히 졸업도 못한 대학생이고, 해영은.
“…너보다 멋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적당히 간지러운 말로 달래 주려는 건가 싶었으나, 해영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을 보니 그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 나도 불안해. 너 제대하고 복학하면 나보다 더 어리고 예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낼 텐데. 하루 종일 같이 과제하다가 수, 술도 먹고 할 텐데…. 너 술도 잘 못하는데….”
그 말에 건우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거야말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다. 자기보다 예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지금.
해영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거리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다 결심한 얼굴로 무릎 위에서 내려가 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제 티셔츠였다.
“이거 봐.”
도로 제 앞까지 온 해영이 티셔츠를 내밀며 말했다.
“어제 내가 아, 안고 잔 거야. 요즘 맨날 그래.”
해영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해영이 티셔츠를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이거 이렇게, 네 냄새 맡으면서 잤어.”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크게 뜨인 건우의 눈이 금세 다정하게 풀어져 제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연상인 애인의 미덕이 인내와 어른스러움이라고 믿는 해영은, 애정 표현은 물론이고, 아쉽고 속상한 마음 또한 내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보고 싶다는 말에 ‘나도’, 좋아한다고 말해도 ‘나도’. 입대 날마저 반나절 소풍 보내는 학부모처럼 잘 다녀오라며 손 흔들고 웃었으니 말 다 했지. 그런 해영이니, 이런 말을 하기까지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제 옷을 끌어안고 잤다는 그 자체도 좋았지만, 저를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용기를 내 준 것에 가슴이 벅찼다.
건우가 해영의 팔을 잡고 제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쿵쿵 빠르게 뛰는 박동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곧 이어 작은 손이 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건우는 그 손길에 어리광을 부리듯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몰랐지?”
“네.”
해영이 말을 고르다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나는 다른 사람 백 명, 아니 마, 만 명을 줘도 너 하나가 더 좋아.”
가슴 위로 웃음소리가 들렸으나, 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좋은 일 있을 때마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갔으면 좋겠고, 회사에서 속상한 일 생긴 날에도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실수해서 잘리더라도 너만 있으면 괜찮을 거 같고…. 다시 또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게 뭐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퍽 단단하다.
“너는 이걸 필요라고 했고, 나는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나한테는 그 두 개가 다르지 않아.”
건우는 필요에 의해 만든 관계와, 애정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해영을 이해하는 것과, 해영이 살아온 과정까지 이해하는 건 다른 차원이었다. 제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그에게는 아니었고,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뭉쳐 놓은 것들이, 저에게는 선을 그어 구분해야 하는 것투성이였다.
필요와 애정의 정의가 그중 하나였다. 인간관계는 조건이 붙을수록 눈이 멀기 마련이다. 해영은 바깥으로 꺼내 줄 존재가 필요했고, 그때 마침 손을 잡은 게 저였다. 허나 저는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해영의 존재가 이만큼 크게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 제게는 ‘필요 없어지면’이라는 가정이 붙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안하면, 음….”
해영은 그 두 가지가 본인에게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으니까.
“평생 필요하다고 할래, 그럼.”
해영의 허리를 지분대던 건우의 손이 뚝 멈췄다. 설마.
“이거 프러포즈예요?”
“아니야. 그건…”
해영이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건 나중에 더 멋있게 할 거야….”
엄청난 말을 하네.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래. 필요든 애정이든, 뭐가 중요한가.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 유효 기간이 평생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랑해요.”
“…….”
해영이 들고 있던 티셔츠를 소파 위로 내려놓고 건우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았다.
“나, 나도 사랑해.”
그 말에 작게 웃은 건우가 턱을 들어 눈을 맞췄다.
“그 말 처음 해 준 거 알아요?”
“그런가….”
“네.”
“속으로는 엄청 많이 했는데….”
“겉으로도 해 주세요.”
응, 해영이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그리고서 잠시 망설이더니 또 한 번.
“사랑해.”
온전하게 속삭이고 먼저 입을 맞춰온다. 연인들의 흔한 말 한 마디에, 건우는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다시 입술을 맞대었다. 건우의 뺨을 감싼 손에 반지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