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구조사 외전: 고등학교 AU-#열일곱 (16/21)

호구조사 외전: 고등학교 AU

목차

#열일곱

#열여덟

#스물

#열일곱

2층 교실 창문 너머로 앙상한 나무들이 힘없이 한들거렸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정신없이 휘청인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키가 작은 나무는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까지 들 정도로. 그 불규칙한 움직임 사이로 약한 겨울 햇빛이 간간이 새어 들어와 교실을 비추었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을 떨구고 옷을 벗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무 아래로 갈색 낙엽이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죽은 것과 닮아 있는 나뭇가지는 겨울맞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넘기기엔 지나치게 쓸쓸해 보였다.

해영이 잘게 몸을 떨었다. 그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창문이 닫혀 있음에도 마치 제가 겨울바람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상 서랍 안으로 손을 넣었다. 깊숙이 손을 넣어 더듬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건 교과서 몇 권이 전부였다. 잡혀야 할 게 잡히지 않았다. 해영은 수업 중인 것도 잊고 고개를 기울여 책상 안을 살펴보았다. 없어.

이번에는 책상 옆에 걸어 놓은 책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도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목도리가 없다.

“해영이, 무슨 문제 있니?”

한창 수업 중이던 교사가 물었다. 그 물음에 교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제게로 향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해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수업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재개되었지만, 해영은 교사의 말이 단 한 줄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지손톱 옆 거스러미를 툭툭 건드렸다.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낄낄대며 웃는 소리. 저를 향한 게 아니라고 속으로 아무리 되뇌어도 그 소리들은 빠르게 증폭되어 제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왜곡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을 만큼 뭉개진 소리 위에 제 이름을 덧대어 받아들이고 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학기에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그랬다. 스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저조차도 막 깨달았을 무렵, 그건 이미 저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었다. 빌려준 공책에 생각 없이 끄적여 놓은 귀퉁이 작은 낙서는 순식간에 전교생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 학년 칠 반에 서해영인가. 그 새끼 게이래.

―우욱, 진짜?

―더러워, 씨발.

―아, 걔 교환 수업 때 내 자리 앉는다고. 개 빡치네.

―야, 니한테 게이 묻었다.

―돌았냐, 개새끼야.

교실에서,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화장실에서. 제가 지나가는 길마다 수군대던 목소리가 아직도 또렷하다. 여러 계절을 지나 겨울이 되어 아이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후에도 해영은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조용하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니까. 아이들은 잊어버린 게 아니라 흥미가 식은 것뿐이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들 아까 얘기한 거 빼먹지 말고 해오고.”

“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해영의 시야가 서서히 맑아졌다. 책상 위를 정리하는 것도 제쳐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전에 이동 수업을 연달아서 했던 것이 떠올랐다. 추위를 많이 타는 저는 학교 내에서도 목도리를 옆에 끼고 다녔다. 목도리를 잃어버린 게 맞다면 분명 그때일 거다.

수업이 있었던 교실을 하나씩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목도리는 찾을 수 없었다. 금세 다시 수업 시간이 되었다. 수업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해영은 무거운 걸음으로 도로 교실로 향했다. 집중 안 되는 수업을 멍하니 듣다가, 쉬는 시간 짬을 내어 찾아다니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칠 때까지 끝내 찾지 못한 목도리를 해영은 결국 포기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로 돌아가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엔 미련이 가득했다. 종종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보고 걸었다. 혹시나 구석 어딘가에 떨어져 있진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하염없이 내려가는데 시선 끝에 낯선 발이 걸렸다. 비켜 가길 기다렸으나, 그 발은 몇 걸음 앞에 우뚝 서서 앞길을 막고 있었다.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쟤는 분명. 지나가다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절로 눈길이 갈 만큼 커다란 키와 체구, 무섭고 잘생긴 얼굴이 눈에 띄어 기억에 남았다.

그런 그가 제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제 것이 분명한 베이지색 목도리가 들려 있었다. 그 애는 곱게 개어진 목도리를 제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이거 네 거 맞지.”

“어, 어떻게 알았어?”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했는데. 해영은 의문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그러나 질문을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궁금했으니까. 그도 그럴 게, 해영은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하고 다니는 거 봤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서 해영도 애써 별일 아닌 척 답했다.

“아…. 그렇구나.”

“여기.”

제 손등에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내밀어진 목도리를 보고도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제 품에, 그가 목도리를 안겨 주었다. 해영은 그제야 돌아온 목도리를 손에 꼭 쥐었다. 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이내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가 자리를 떠난 후 해영은 들은 말을 곱씹었다. 하고 다니는 거 봤어. 특이한 색의 목도리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 이런 비슷한 목도리를 매고 다니는 학생을 추리면 거짓말 안 보태고 한 반은 나올 것이다. 하고 다니는 거 봤어. 해영은 다시 한번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리고 제게 쏟아지던 시선들을 떠올렸다. 외모도, 차림새도 눈에 띄지 않는 제가 이 학교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게이 새끼.

그도 그런 눈으로 저를 봤을까. 목도리를 무사히 되찾은 게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해영은 손에 감기는 부드러운 목도리를 연신 주물렀다. 그가 무슨 이유로 저를 알아보았든, 목도리를 찾아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당황하는 바람에 감사 인사 한마디 전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고 말해야지. 해영은 또 잃어버릴세라 목도리를 꼭 움켜쥐고 다짐했다.

그러나 제 소문은 그렇게도 빠르게 퍼지던 작은 학교 안에서, 겨울 방학이 될 때까지 그 애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새 학년, 새 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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