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해영은 긴장된 얼굴로 교실 뒷문을 열었다. 일순간 조용해진 공기와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에 숨이 턱 막혔다. 해영은 미세하게 떨리는 턱을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적막했던 교실 내부가 서서히 아이들의 목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일 학년 때처럼 앞에서 대놓고 욕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새로운 환경과 처음 보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또 달라질지도 모르지.
지금도 욕만 안 했다 뿐, 불쾌한 티를 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증거로, 조회 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도 해영의 뒷자리는 비어 있는 채였다.
해영이 책상 아래로 모아 잡은 손을 꼼질거렸다. 아무 데나 앉으려던 게 하필이면 가운뎃줄의 맨 앞자리를 차지해 버려서. 가만히 있어도 눈총받는 삶을 살아온 해영은 제 존재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 두려웠다. 지금이라도 다른 자리에 앉을까. 구석진 곳이나….
그때, 등 뒤로 누군가 의자를 빼고 앉는 소리가 들렸다. 철퍼덕,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무언가 엎어지는 소리. 해영은 궁금증을 못 이기고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
그 애였다.
같은 반이라니. 해영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베이지색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그가 찾아 준 것이었다. 이걸 주워다 준 것도, 지금 제 뒷자리에 앉은 것도. 모두 의미 없는 행동이겠지만, 해영은 어쩐지 손톱 옆에 난 거스러미처럼 신경이 쓰였다. 목도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 담임은 교내에서 학생들과 친근하게 지내기로 유명한 젊은 남자 교사였다. 그는 새 학년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적응이 필요하지 않겠냐면서, 자리 배치를 한동안 이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좋아했다. 대부분이 친한 사이끼리 붙어 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영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 뒤에 있는 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건우, 왜 이렇게 앞에 앉았냐.”
“그냥.”
“이제 자리도 못 바꾸는데. 좆 됐다, 니.”
쉬는 시간이 되자 그의 친구들이 다가와 의문을 표했다. 그들은 한참을 낄낄대다 다 같이 교실 밖으로 몰려나갔다. 건우라는 애도 함께.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급격히 고요가 찾아왔다. 해영은 그 조용한 교실 안에 덩그러니 앉아 생각했다.
그러게 왜 그 자리에 앉아서.
***
얼떨결에 앉게 된 앞자리이긴 했지만, 공부에 집중하기엔 이만한 자리가 없었다. 해영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수업이나 열심히 듣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해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뒤에 앉은 건우 때문에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앉아 있는 것뿐인데 집중이 안 될 것까지 있는가, 물으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뒷덜미가 간지러웠다. 해영이 오른손을 올려 뒷목을 매만졌다. 불편하다는 제 나름의 표현이었는데도 시선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았다.
건우는 수업 시간 내내 저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바로 앞자리니까, 선생님을 보고 있는 걸 제가 착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문득 뒤를 돌아볼 때마다 마주치는 시선을 보고서야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든 의문은 ‘왜 보는지’였다. 건우가 저를 쳐다볼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손거울을 몰래 꺼내 제 용모를 살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일주일 정도 지내본 결과, 해영은 건우에 관한 또 다른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사교육을 열성껏 받는 건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학교 수업 시간에 성실히 임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뒤에서 종종 들리는 하품 소리에 해영은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품은 옮는다고. 해영은 또다시 들려온 하품 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곧 저항 없이 입술이 벌어졌다.
“하암….”
해영이 제 입에서 나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해영이 졸리니.”
선생이 하던 수업도 멈추고 해영에게 물었다. 해영은 뺨부터 귓바퀴까지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졸리면 뒤에 서 있다 와도 되고.”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교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던 수업을 마저 이었다. 등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꼭 쥐었다. 같이 하품을 해도 항상 앞자리에 앉은 저만 지적을 받았다. 억울했지만, 건우가 제게 하품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니 그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해영은 울컥하던 것을 속으로 삭였다. 그리고 제 허벅지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하품 따라 하지 말자. 따라 하지 말자.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도,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하품에도 겨우 적응하게 되었을 무렵, 그는 새로운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툭툭, 뒤에서 건우가 해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보나 마나 또 그거겠지. 해영은 애써 무시하고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교과서에 눈을 고정했다. 툭툭, 그가 다시 한번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툭, 이번에는 연달아 세 번을 두드렸다. 결국 참지 못한 해영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뺨에 건우의 검지가 푹 박혔다.
“…하, 하지 마.”
유치해. 해영은 그를 흘깃 노려보고선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숨소리와 닮은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건우는 보기와 다르게 장난기가 많았다.
툭툭. 또 다. 해영은 이번에야말로 절대 당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꿋꿋하게 문제집을 풀어나갔다. 그러나 좀처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툭툭. 건우가 포기도 않고 끈질기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저 끈기로 공부를 했다면 전교 일 등은 그냥 했을 텐데. 해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지 말라는 의미로 어깨를 뒤로 툭 튕겼다.
그 몸짓에 드디어 멈추나 했더니, 금세 다시 건드리는 게 아닌가. 해영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무리 제가 괴롭히기 좋은 인상이라도 그렇지. 해영은 서러운 마음에 울컥 속에서 감정이 치밀었다. 그걸 겨우 삼켜내고 있는데, 뒤에서 건우가 저를 불렀다.
“야.”
그리고 또다시 툭툭.
“이번엔 진짜로. 물어볼 거 있어.”
그는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진짠가. 해영이 잡고 있던 펜을 살짝 내려놓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뺨을 찔러오는 손가락.
“어떻게 계속 속냐.”
손을 거둔 건우가 책상에 쓰러지듯 엎어져 웃으며 말했다. 해영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속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떨림이 온몸으로 옮겨질 때까지 해영은 들썩거리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화가 났다. 해영이 입술 안쪽을 잘근 물었다. 입안에서 옅게 피 맛이 돌았다. 통증으로 덮어 보아도 좀처럼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해영이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몸뚱이가 붕 뜬 것처럼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야, 화났어? 진짜 안 할게. 미안.”
“됐어….”
해영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건우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화낼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다른 애들 같았으면 웃고 지나갈 사소한 장난이다. 제가 예민하게 구는 것도 맞고, 별거 아닌 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를 무시한 게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다. 이름도 며칠 전에 겨우 알았을 만큼. 그런 그가 하지 말라는 제 말을 무시하고 장난을 거는 것이 저를 만만하게 봐서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좋은 앤 줄 알았는데. 목도리도 찾아 주고 제 뒷자리에도 거리낌 없이 앉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어쩌면 제게도 평범한 반 친구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고.
기대만큼 실망이 따라온다. 시야가 흐릿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았으나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이 상황에서 우는 것만큼 꼴사나운 건 없으니까. 선명하게 새겨진 호두 턱에 힘을 주고 펜을 다시 쥐었다.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 위에 습관처럼 밑줄을 그었다. 왜 이렇게 안 읽히는 거야. 그때, 목 뒤를 간질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안 한다며…!”
결국 참지 못한 해영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몸을 홱 돌렸다.
“아.”
건우는 당황한 얼굴로 제 손에 있는 것을 해영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때문에.”
앞으로 내밀어진 것은 베이지색의 작은 실밥이었다.
“말로 해 줄걸. 미안.”
그가 사과했다.
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교실의 몇 안 되는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쪽을 바라본다. 해영은 뺨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것을 소매로 닦아내며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화장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해영은 곧장 세면대 앞으로 가서 물을 틀었다. 손바닥을 오목하게 모아 쏟아지는 물을 받았다. 엉망이 되었을 얼굴 위로 그것을 뿌렸다. 혼자가 되어 찬 기운으로 열을 한 차례 식히고 나니, 화로 두근거리던 속이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 해영은 그제야 그가 했던 말을 입에서 굴렸다. 낯설었다. 이전에 사과를 받았던 적이 있었나, 떠올려 보았으나 딱히 기억나는 일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제 몫이었으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건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작은 초콜릿 하나가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화도 못 내게.
해영은 그걸 조용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먹는 밥은 익숙했다. 해영은 식판을 들고 급식실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아까 그렇게 교실을 박차고 나간 뒤로, 건우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초콜릿도 먹지 않았다. 해영은 제 주머니 속 초콜릿을 매만졌다. 녹은 건지 처음에 비해 말랑했다. 난데없이 책상 위에 나타난 이 작은 것을 집어 들었을 때, 교실 뒤쪽에서 힐끔대는 시선을 느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사과의 표시인 듯했다. 일부러 먹지 않은 게 아니라 점심시간 전이라 남겨 둔 건데. 쉬는 시간에 쓰레기통 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건우를 보고, 혹시 제가 초콜릿을 먹지 않은 이유를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만 안 걸었다뿐이지, 제게 따라붙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해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숟가락을 들었다.
“체하겠다, 체하겠어….”
멀리서 끈질기게 바라보는 건우 때문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해영은 고슬고슬 먹음직스러운 밥이 올라간 숟가락을 입으로 넣었다. 그리고 돌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꾸역꾸역 넘겼다. 그렇게 억지로 식판을 비워 나가던 해영은 결국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 해영이 앉아 있는 책상 위에 빵 하나가 툭 올려졌다. 해영이 놀란 얼굴로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들었다. 빵을 준 당사자는 이미 가고 없었다. 해영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건우는 뒤통수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초코 크림 빵…. 해영이 제 앞에 놓인 빵을 손에 쥐었다. 막 데운 건지 따뜻하고 폭신했다. 해영은 비닐 위로 그것을 한참 주물러대다가 다 식은 후에야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날 이후로 건우는 제게 더 이상 전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많이 했다. 이를테면.
‘숙제 이거 맞아?’
‘다음 수업 이동이야?’
‘오늘 점심 뭐래.’
같은 질문들. 대체로 응, 아니, 혹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 제 대답에서 대화가 더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해영은 그 가벼운 질문들이 이어질수록 익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싱거운 것들, 평범한 것들에.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해영은 평소처럼 필기한 내용을 훑으며 조금 전 들었던 수업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의자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해영이 상체를 반쯤 돌렸다.
“…왜?”
“너 이번에 모의고사 일 등 했다며.”
“응….”
“나 공부 가르쳐 줘.”
필기를 보여 달라는 것도, 문제집을 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가르쳐 달라니. 이런 부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해영의 시선이 건우에게 한 번,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텅 빈 그의 책상 위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다 물었다.
“왜…?”
“왜냐니.”
“너 공부 아, 안 하잖아….”
제 말에 건우의 미간이 살벌하게 구겨졌다. 해영의 어깨가 잘게 튀었다. 괜히 말했나 봐.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건우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담임이 아까 우리 반 성적 개판 됐다고 하는 거 못 들었어?”
“…들었어.”
“그러니까 가르쳐 줘.”
“…….”
“아, 좀.”
그는 답답하다는 듯 짧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렸다.
“그냥 가르쳐 주면 안 되냐.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래?”
“그게 아니라….”
해영이 망설이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해영은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평소 같았으면 기다림을 못 참고 재촉했을 건우가 왜인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해영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양손을 꼭 모아 잡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나랑 있으면 너 이, 이상한 소문 나….”
스스로 치부를 들추려니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솟았다. 부끄러웠다. 소문의 내용도, 소문에 휘둘릴 만큼 겁약한 것도. 그리고 그걸 이유로 가까워지지 마라 이야기하는 지금 제 모습도. 전교생이 알고 있는 소문을 건우가 모를 리 없다.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보기가 무서웠다.
“난 또 뭐라고.”
건우가 코끝으로 웃으며 말했다. 전혀 예상 못 했던 반응에 놀란 해영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언제 할까, 공부.”
“어…. 어? 방금 내가 말한 거….”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는 정말 별생각 없다는 투로 답했다. 해영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였다. 여기서 단호하게 끊어내는 게 그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지금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직접 겪어 보면 다를지 모른다. 아니, 분명 후회할 거다. 그러니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그래야 맞는데. 해영이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그래서 언제 가르쳐 줄 거냐고.”
건우가 해영의 팔뚝을 검지로 찌르며 답을 재촉했다.
“그냥, 아, 아무 때나.”
“오늘? 내일? 주말?”
“…주말.”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번호 줘. 연락하게.”
“…휴대폰 안 냈어?”
“까먹었어.”
“…….”
거짓말. 해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그 위에 제 번호를 꾹꾹 눌러 찍고 다시 돌려주었다.
건우는 좋은 거라도 받아낸 사람처럼 싱글거리는 얼굴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표정을 보자 해영은 왠지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재빨리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귀에 열이 올랐다. 해영이 손을 들어 귓바퀴를 살살 매만졌다.
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다. 건우에게 하등 도움 안 되는 못난 이기심이었다.
***
약속 당일, 해영은 잠을 설쳤다. 악몽 때문이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갔는데 건우가 오지 않아 하루 종일 기다리는 꿈을 꾸었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서 있다가 열 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고, 건우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했다.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나갔다. 건우의 자리에는 가방만 올려져 있었다. 해영은 수업 전에 화장실에 갔다 오기 위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해영 걔 계속 나 기다리더라. 그걸 믿네.
―씨발, 이 새끼 존나 악질이라니까.
―재밌잖아.
꿈속에서 건우는 친구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해영은 침대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축축해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꿈이라는 건 무의식중에 현실의 스트레스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단지 꿈일 뿐이라고 흘려 넘기기엔 제가 건우와의 관계에서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래도 나가야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이 무거웠다. 해영은 겨우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씻고 어제 골라 둔 옷으로 갈아입은 뒤 교과서와 문제집, 그리고 노트와 필기구를 챙겼다. 필기구는 혹시 몰라 건우의 것까지 넉넉하게 넣었다.
방을 나서기 전, 문 옆에 걸려 있는 베이지색 목도리를 보았다. 날이 많이 풀렸으니까 안 가져가도 되겠지. 해영은 그것을 뒤로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도련님, 어디 나가세요?”
“어어….”
주말인데도 드물게 홍 실장이 집에 있었다.
“그…. 약속이 있어서요.”
그는 부연 설명을 원하는 눈치였다. 해영은 주말에 약속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홍 실장은 해영의 학교생활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듣는 사람이었고, 혹여나 괴롭힘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해영은 알고 있다. 지금도 저를 보는 얼굴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해영은 하는 수 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학교 치, 친구랑 같이 공부하기로 해서….”
“아.”
홍 실장이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기분 좋게 웃었다.
“모셔다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걸어가면 돼요.”
“집에서 같이 하셔도 좋을 텐데요.”
집에서…. 생각도 못 한 선택지였다. 해영은 잠시 상상하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친하지도 않은데 집은 좀.
“다음에, 이야기해 볼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너무 늦을 거 같으면 연락 주시고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해영이 허리를 숙이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거실로 다가갔다. 그 가운데에는 서류를 읽고 있는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 저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제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늦을까 봐 걱정되어 미리 나왔더니 너무 일찍 나와 버리고 말았다. 해영은 약속 장소에 멀뚱히 서서 휴대폰으로 틈틈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두 시가 거의 다 되어서도 건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꾸는 바람에. 해영은 시간이 갈수록 초조했다. 혹시 장소를 착각한 게 아닐까. 기다리다 못한 해영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둘러보기 시작했다. 으슥한 골목 안쪽까지 확인한 해영이 제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건우가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도로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참다못한 해영이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숫자 ‘1’이 곧바로 사라졌다. 해영은 대화창을 끄지 않은 채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메시지가 없었다.
“어….”
악몽이 아니라 예지몽이었던 걸까. 속이 불안하게 쿵쿵거렸다. 해영이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도착했는데]
이번에도 건우는 보내자마자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답장이 없었다. 해영이 불안한 얼굴로 건우의 프로필을 눌렀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엄지로 누른 후 곧바로 귀에 가져다 댔다. 해영이 같은 자리를 짧게 왔다 갔다 반복했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해영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때, 머리 위로 큼직한 무언가가 툭 얹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해영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자, 제 머리 위에 손바닥을 얹고 있는 건우가 있었다. 그가 잔뜩 쭈그러든 저를 보고 씩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 아니….”
해영이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낯선 느낌이 남아 있는 제 머리 위를 슬쩍 매만졌다. 예지몽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원래도 건우의 몸집이 크다고 느끼긴 했지만, 학교 밖에서 보니 더 그랬다. 사복이라 느낌이 다른 걸까. 누가 봐도 신경 쓴 티가 나는 저와 달리, 건우는 위아래 모두 검은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태가 났다. 키가 커서 그런가. 해영은 시선을 내려 제 옷을 훑었다. 아이보리색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니트 조끼, 그리고 잘 다려진 면바지까지. 또래와 시내에서 만나는 이런 약속이 처음이라, 어제 자기 전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옷장 속 거의 모든 옷을 꺼내 보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대보고 입어 본 끝에 고른 게 이거였다. 아버지와 외식을 하거나 대체로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입는 옷. 촌스러워. 건우의 모습을 보고 나니 제 차림이 한층 더 촌스럽게 느껴졌다.
“예쁘다.”
“응?”
건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해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야.”
그는 트레이닝 재킷의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큰 보폭으로 금세 멀어진 뒷모습을 해영이 다급하게 쫓았다.
“가, 같이 가.”
건우의 걸음이 그 소리에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해영은 얼른 그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손바닥 가운데가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두 사람은 도서관과 카페 중에서 고민하다, 카페로 향했다. 공부를 가르쳐 주려면 불가피하게 목소리를 내야 하니 지나치게 조용한 곳보다는 카페가 낫겠다 싶어서였다.
일반적인 카페는 같은 학교 아이들을 만날 위험이 있었다. 해영은 검색을 통해 좌석마다 커튼으로 공간이 분리된 룸카페를 찾았다. 그곳을 보여주자 건우는 의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부끄러운 것 같기도, 좋은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뭐 먹을래?”
해영이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너는?”
“나는…. 이거.”
글자가 빼곡한 메뉴판 위에서 방황하던 해영의 손가락이 아이스 초코 라테 위에 멈췄다. 건우는 벨을 누르고 직원에게 아이스 초코 라테 한 잔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가토 오 쇼콜라 케이크도 함께 주문했다. 십 분도 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건우는 음료 두 개를 각각 해영과 본인 앞에 두고, 케이크는 해영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어, 이거 내 거야?”
“응. 공부 가르쳐 주는 값.”
“아…. 고마워.”
아이스 초코 라테에 진한 초콜릿 케이크라니. 좋아하는 걸 앞에 둔 해영의 뺨에 저항 없이 웃음이 번졌다.
“너 근데 가방 어딨어?”
교과서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던 해영이 멀뚱히 앉아 있는 건우에게 물었다.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건우는 가방을 가져오지 않았다. 저 재킷 안에 책을 넣어 왔을 리도 없고. 해영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건우의 등 뒤를 살폈다. 없어.
“아, 까먹었다.”
“뭐? 고, 공부 가르쳐 달라며. 가방을 안 가져오면 어떡해….”
“그거 같이 보면 되지.”
건우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해영의 교과서를 턱으로 가리켰다.
해영은 숨을 푹 내쉬고서 교과서를 옆으로 돌렸다. 그에 맞춰 제 허리도 같이 돌아갔다. 너무 불편한데. 해영은 조금이라도 편하게 필기를 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많이 불편해?”
“응….”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해영이 그를 흘긋 노려보았다.
“가방 줘 봐.”
건우가 제 옆자리에 세워 놓은 가방으로 손을 내밀었다. 해영은 별 의심 없이 그의 요구대로 가방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건우는 그걸 자기 옆자리에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켜 해영의 빈 옆자리에 털썩 자리 잡았다.
“이제 안 불편하지.”
그리고 교과서를 도로 반듯하게 돌려놓으며 웃었다.
해영은 바짝 달라붙은 팔뚝을 슬쩍 떼어냈다. 좁은 소파가 아닌데도, 원체 커다란 그와 같이 앉으려니 어쩔 수 없이 몸이 닿았다. 이제는 자세가 아니라 다른 게 불편한데. 해영은 뱉고 싶은 말을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집어넣고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에서 눈꽃은 첫사랑이라는 뜻이야.”
해영이 교과서 위를 펜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비유적인 표현이 들어간 거고, 나뭇가지에 눈이 내리는 모습은 눈꽃을 피우기 위한, 그러니까 첫사랑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헌신으로 보면 되는데….”
한참 설명을 하던 중, 이상함을 감지한 해영이 건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듣고 있어?”
건우는 재빨리 시선을 내려 해영이 가리키고 있는 활자 위를 보았다.
“응.”
“…….”
“그리고?”
해영이 미심쩍은 얼굴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에 이 부분은 첫사랑의 아픔을 겪고 성숙해진 모습을 이야기하는 거고….”
“헤어진 거야?”
“어? 음…. 그랬겠지?”
“내용이 별론데.”
건우는 싫어하는 반찬을 앞에 둔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해야지. 자….”
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에 펜을 쥐여 주었다.
***
“배고파 죽겠다.”
두 과목을 끝내고 교과서를 덮자마자 건우가 테이블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그는 눈을 감고 배를 부여잡았다.
“많이 고파…?”
아직 하나 남았는데. 해영은 꺼내지도 못한 수학 교과서가 들어 있는 가방을 미련 남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이거 봐.”
건우는 뺨을 테이블에 붙인 채 제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배 위에 가져다 댔다. 그의 말처럼 손바닥에서 작게 꼬륵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해영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건우는 쉽게 놓아주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는 이런 사소한 접촉 하나하나에 거침이 없었다. 해영은 양손을 모아 잡았다. 아직도 손바닥에 단단한 복부의 감촉과 미약하게 울리던 소리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나 너랑 맛있는 거 먹으려고 아침도 안 먹고 왔단 말이야.”
건우가 말했다.
“진짜?”
“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차마 조금만 더 하고 가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해영은 가방을 무릎 위에 가져와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것들을 하나둘 넣으며 물었다.
“맛있는 거 뭐,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거.”
그가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맛있는 거 잘 모르는데….”
“그냥 땡기는 거 먹자. 아무거나.”
땡기는 거…. 해영이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하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떡볶이….”
“떡볶이?”
“...별로지?”
해영의 어깨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아무리 떡볶이가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라고 하더라도, 그가 기대하던 ‘맛있는 거’에 속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보통 간식으로 많이 먹는 메뉴니까. 해영은 집에서 아주머니가 해 주신 떡볶이는 많이 먹었어도, 프랜차이즈 떡볶이를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여러 명이 먹는 그런 커다란 떡볶이. 그게 문득 떠올랐는데, 건우에게는 평범한 메뉴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다.
“그냥 너 먹고 싶은 거로 먹으면-.”
“가자, 떡볶이 먹으러.”
건우가 말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해영의 가방을 집어 들어 어깨에 걸쳐 멨다.
“어, 나 줘….”
“공부 가르쳐 준 값. 얼른 좀 가자. 나 배고파 죽어.”
“…….”
공부를 가르쳐줬다고 하기에는…. 해영은 지나간 몇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엔 저를 따라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중간부터는 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해를 한 것도 아니었다.
‘너 할 거 해. 난 옆에서 구경할게.’
본인 말로는 공부 잘하는 사람 기운을 받는 거라나 뭐라나. 해영은 당연히 집중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건우는 해영의 옆얼굴에 시선을 박아 넣다가도 금세 휴대폰을 만지거나, 앞에 있는 냅킨으로 종이학을 접으며 놀았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해영도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져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공부를 가르쳐 준 게 아니라, 공부하는 제 옆에 있어 준 느낌인데. 이러니 공부 가르쳐 준 값이라며 건우가 이것저것 내미는 것을 받고 있기가 꽤 민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해영도 휴대폰을 챙겨 그를 따라 룸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카운터가 보였다. 그 앞에서 카드를 내밀고 있는 건우를 본 해영이 놀란 얼굴로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해영이 그에게 다다랐을 때는 이미 결제가 끝난 뒤였다.
“왜, 왜 네가 다 내….”
“공부 가르쳐 준 값이라니까.”
“…공부 안 했잖아, 너.”
“했어.”
“안 했어.”
해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서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건우 역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그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럼 떡볶이 네가 사.”
“응.”
결국 짧은 신경전 끝에 먼저 물러난 건 건우였다. 해영은 그제야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 동그란 정수리를 밉지 않게 흘긴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시내를 거닐다 해영이 가리킨 곳은 요즘 SNS에서 입소문이 난 떡볶이 프랜차이즈였다. 맵기로 유명해진 거라, 사람들은 ‘완떡 인증’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깨끗이 비운 그릇을 자랑하곤 했다. 건우는 그 자학에 가까운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해영이 가고 싶다고 하니 별수 없이 뒤를 따랐다.
“매운맛.”
해영은 겁도 없이 매운맛을 골랐다. 건우는 이곳의 매운맛이 다른 떡볶이의 매운맛과 차원이 다르다는 걸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매운 걸 엄청 잘 먹나. 건우가 어딘가 신나 보이는 해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괜찮겠어? 여기 엄청 맵다는데.”
“응, 나 매운 거 좋아해.”
해영이 들뜬 얼굴로 답했다.
“내 친구 여기서 매운맛 먹고 새벽에 응급실 실려 갔어. 배 아파서.”
건우는 플라스틱 컵 두 개에 각각 물을 따르며 말을 보탰다. 그 말을 들은 해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진짜?”
“응.”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평소에도 매운 걸 잘 못 먹는 녀석이 여자 친구 앞이라고 자존심 세우다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그럼 보통 맛….”
해영은 고민 끝에 한 단계 아래를 골랐다. 최종적으로 보통 맛 하나에 치즈 추가, 그리고 주먹밥과 복숭아 맛 음료까지 같이 주문했다.
설득하길 잘했지. 해영은 보통 맛이라고 나온 것도 매워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떡과 복숭아 음료를 번갈아 먹으며 힘들어했다.
“매워서 어떡해.”
건우가 해영의 빈 컵을 가져가 음료를 다시 채워 주며 말했다. 그리고 동그랗게 잘 뭉쳐 놓은 주먹밥을 해영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해영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는 걸 곧잘 입에 넣었다.
실컷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가와 뺨이 발개져서는 볼에 주먹밥을 넣고 오물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가 마치 자그만 햄스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주먹밥으로 한 차례 통증을 가라앉히고, 건우가 채워 준 복숭아 음료를 들이켠 해영이 진정이 됐는지 다시 떡볶이로 포크를 가져갔다. 건우는 조용히 손을 들어 음료를 하나 추가로 주문했다.
떡볶이를 먹고 나오니 해가 진 후였다. 남은 공부를 마저 하고 갈지, 아니면 이쯤에서 헤어질지 고민하다 낮에 갔던 카페로 향했다. 거기서 만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둘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일도 같이 하면 안 돼?”
카페에서부터 아쉬운 티를 숨기지 않던 건우가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물었다.
“내일도…?”
“싫어?”
딱히 싫고 좋고 할 건 없었지만, 공부를 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굳이 옆에 있겠다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내일은 공부할게. 진짜로.”
해영의 침묵을 기다리다 못한 건우가 말을 보태며 졸랐다.
오늘 공부를 거의 하지 못한 게 후회돼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해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건우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일도 아까 거기서?”
건우의 물음에 해영은 낮에 홍 실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에서 같이 하셔도 좋을 텐데요.’
그리고 건우와 나란히 시내를 활보하던 내내 혹여나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마음 졸이던 것도. 건우가 여태 메고 있던 가방을 해영에게 돌려주며 ‘응?’ 하고 대답을 종용했다. 해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다른 애들도 집에서 같이 공부하고 하니까. 그렇게 되뇌어도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목구멍에 커다란 게 막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발 안쪽으로 발가락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해영은 받아 든 가방을 힘껏 구겨 쥐고 겨우 말을 뱉었다.
“내일은 우, 우리 집에서 할래…?”
말했다….
해영이 눈동자를 도르륵 위로 굴렸다. 건우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그 입술 사이에서 뱉어진 말은 용기 내 제안한 해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싫은가 봐. 별로 안 친한 사이에서는 집에 초대하면 안 되는 걸까. 해영은 창피해서 괜히 죄 없는 홍 실장의 탓까지 하고 싶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해영이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자, 잘못 말했어. 나 그럼 먼저 갈게….”
“야.”
도로로 발을 뻗던 해영의 팔뚝을 건우가 뒤에서 재빨리 낚아챘다. 해영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신호등이 아직 빨간불이었다.
“아….”
“위험하잖아.”
건우가 화가 난 듯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까딱하다간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해영 자신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어쩐지 건우의 표정을 보자 제 감정보다 건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미안….”
해영이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사과했다. 건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저었다.
“안 다쳤으면 됐어. 그리고….”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해영의 시야에 새빨갛게 붉어진 건우의 귓바퀴가 들어왔다. 그는 손을 올려 그것을 매만지며 말을 더했다.
“…갈래. 너네 집.”
“…….”
그냥 간다고 대답을 한 것뿐인데. 해영은 속을 누가 깃털로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해영이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한 채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록 불 됐다.”
건우가 해영의 등 뒤를 보며 말했다.
“연락할게.”
“어? 어….”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초록 불이 된 횡단보도 앞에는 해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해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도로를 가로질렀다. 같은 방향인 줄 알았는데. 해영이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찌르르 울리는 그 가운데를 반대쪽 손으로 살살 긁었다.
기다려 준 건가.
***
[(사진)]
[여기]
[오늘은 책 꼭 가져와]
어디로 가면 되냐는 건우의 메시지에 해영이 집 위치가 표시된 지도 이미지와 함께 답장을 보냈다.
[어ㅋㅋㅋㅋㅋ]
건우는 웃음이 많았다. 그를 잘 몰랐을 땐 항상 무표정을 하고 있어서 무서운 앤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장난도 잘 치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도 때도 없이 웃어 댔다. 그가 보낸 메시지에서도 그랬다. 해영은 엄지로 화면을 쓸어 올려 이전에 주고받은 메시지를 쭉 훑었다. 그래 봤자 몇 개 없지만, 그 안에서도 건우는 곧잘 웃었다.
별로 웃긴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해영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와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를 눈으로 찾았다. 이 시간에 거실에 안 계신 걸 보면 서재에 계신 모양이었다.
어제 건우를 충동적으로 초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걱정이 들었다. 아버지가 싫어하시면 어쩌지, 마음대로 손님을 불러도 되는 건가, 하고.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내일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집에서 공부해도 되는지 물었고, 다행히 아버지는 조금 놀란 기색만 보였을 뿐, 별말 없이 허락해 주셨다. 해영은 건우에게 약속을 번복하지 않을 수 있어서 안도했다.
방문을 닫고 들어온 해영이 두리번거리며 좌식 책상을 찾았다. 옷장 옆 빈 공간에 접어놓은 것을 발견하고 가져와 러그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책과 필기구를 가지런히 올려놓은 뒤 휴대폰을 확인했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건우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해영은 거울로 제 차림을 한 번 확인하고 방을 나섰다. 거실과 현관 사이에 멀뚱히 서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해영은 출발 신호를 들은 달리기 선수처럼 잽싸게 인터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그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현관문을 반쯤 열고 기다렸다.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건우가 보였다. 오늘은 트레이닝 복이 아닌, 검은색 큼직한 후드와 어두운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잊지 않고 가방도 챙겨 왔다. 그가 저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가왔다.
“야, 너네 집 존나 부자구나.”
“…….”
건우가 집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모든 게 아버지 소유이긴 하지만 괜히 민망해진 해영이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건우는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감탄을 계속했다. 해영이 그만하라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나서야 그는 실실 웃으면서 멈추었다.
주방이 어디인지 물은 건우가 그쪽으로 가더니 들고 온 상자 두 개를 아주머니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아주머니 드시라고 건넸고, 다른 하나는 간식으로 들고 왔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으셨다.
해영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아버지와 마주쳤다. 해영은 바짝 굳은 채로 아버지에게 건우를 소개했다. 건우는 이런 데 익숙한 건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했다. 해영은 그 모습이 신기했다. 아버지 역시 해영의 우려와 달리 별말 없이 잘 있다 가라는 말로 맞아 주었다. 해영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저거 부모님 드리라고 가져온 건데, 아주머니까지 계신지는 몰랐다. 어떡하지.”
“안 사 와도 돼, 저런 거….”
“야, 남의 집 오는 데 예의가 아니지. 다음에는 더 여러 개 사 올게.”
다음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을 이야기했다.
해영은 문득 무서워졌다. 그가 한 말에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그와 함께 어울리는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도. 해영은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구겨 쥐고 그를 따라 제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방도 너랑 똑같냐.”
건우가 방안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욕인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았다. 해영이 그의 등을 좌식 책상 쪽으로 살짝 밀었다.
“저, 저기 앉아….”
“응.”
그가 가방을 내려놓고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해영은 그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건우는 앉은 뒤에도 계속해서 방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 집요한 시선에 해영은 혹시라도 까먹고 안 치운 곳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바쁘게 생각해야 했다.
“그만 봐….”
“방에서 네 냄새 엄청 난다.”
“어?”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냄새가 난다니. 해영이 다급하게 소매를 코끝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희미한 섬유 유연제 향 외에는 딱히 맡아지는 게 없었다. 본인 냄새는 본인이 못 맡는다고 했던가. 해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셔츠 깃까지 끌어 올려 킁킁댔다. 그 모습을 본 건우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 이상한 냄새 아니고 좋은 냄새.”
해영이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건우는 쑥스러운 듯 콧등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설명했다.
“약간 포근하고, 아무튼 그런 냄새 있어. 좋은 냄새.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
“믿어라, 좀.”
“…알겠어.”
딱히 믿음이 가는 건 아니었으나, 해영은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다음에 또 그와 약속이 생긴다면 두 번 씻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아주머니가 사과 주스 두 잔과 함께 건우가 사 온 디저트를 가져다주었다. 종류가 다양했다. 마카롱과 다쿠아즈, 그리고 스콘이랑 타르트까지. 단 걸 좋아하는 해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 잘 먹을게.”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를 앞에 두고도 해영은 망설였다. 건우가 사 온 것이니 그가 먼저 고르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영이 그를 힐끔 살폈다. 건우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 접시로 손을 뻗었다. 해영은 긴장한 얼굴로 그가 고르는 걸 보았다. 건우의 손이 초콜릿 맛으로 보이는 갈색 마카롱으로 향했다. 아, 안 돼. 해영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앞에서 코끝으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건우는 마카롱 옆에 있는 플레인 스콘을 가져갔다.
다행이다. 해영의 낯이 다시 밝아졌다. 해영은 그제야 먹고 싶었던 초콜릿 맛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어제와 다르게 건우는 공부에 집중했다. 휴대폰도 멀찌감치 둔 채로 딴짓을 하지도 않았고, 하기 싫은 티를 내지도 않았다. 열심히 교과서를 훑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다가 물어볼 게 생기면 해영에게 질문했다.
이상했다. 그의 태도만 보자면 어제보다 지금이 더 집중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해영이 집중을 하지 못했다. 신경이 자꾸만 분산됐다. 그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책상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한번 집중력을 잃기 시작하니 사소한 것까지 예민하게 다가왔다. 숨 막히게 조용한 공기라든가, 가까운 거리로 인해 피부에 닿는 건우의 숨결 같은 것들. 어쩐지 모두 간질거리는 것뿐이었다. 해영이 그 감각을 참지 못하고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러다 툭 하고 발끝이 건우의 다리에 닿았다.
“미안….”
해영이 곧바로 발을 안쪽으로 당겼다. 창피해. 딴생각한 걸 들킨 것도 아닌데 지레 찔려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건우는 작게 웃더니 일부러 무릎을 내밀어 제 무릎에 부딪혔다. 미안하다고 했는데. 해영은 입술을 꽉 물고 발로 그의 정강이를 건드렸다. 그렇게 책상 아래에서 한참을 투닥거리던 끝에 건우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아, 서해영 때문에 공부 못 하겠다.”
“…….”
억울해진 해영이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실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조금만 쉬자.”
“…딱 십 분 만이야.”
“응. 십 분만.”
건우는 허락을 받자마자 책상 위에 팔 한쪽을 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그대로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호흡으로 오르내리는 등만 아니었다면 정말 죽은 건 아닌지 걱정했을 정도였다. 자는 건가. 해영이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건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해영은 그 옆모습을 마음 놓고 천천히 훑어보았다. 색소가 옅어 흐릿한 갈색을 띤 제 머리칼과 달리 완전한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고집스러운 그와 꽤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짙은 눈썹도. 그 아래로 살짝 찡그린 눈매와 곧고 날카로운 콧대를 보았다. 코가 예쁘네. 해영이 무의식적으로 그 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아주 작은 간격을 두고 허공에다 콧대를 덧그렸다. 그 순간, 자는 줄 알았던 건우가 제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해영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홱 빼냈다. 그리고 요란하게 울려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노, 놀랐잖아….”
“누가 자는 사람 몰래 만지래.”
“…….”
건우의 말만 들으면 제가 마치 입에 담지도 못할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았다.
“만지지는 않았는데….”
“너 손 되게 작다.”
억울한 제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건지, 건우는 해영의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살면서 손 크기에 신경을 써 본 적도, 누군가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해영은 손을 펼쳐서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런가.
“봐 봐.”
건우가 엎드린 채로 공중에 자신의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해영은 홀린 듯이 그 위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이 간지럽게 마주 닿았다. 건우가 손가락을 구부려 해영의 손에 깍지를 꼈다. 이러면 크기를 잴 수가 없는데. 당황한 해영이 팔을 뒤로 빼 보았으나, 건우는 놓아주지 않았다.
“…뭐 해. 놔.”
“잡아 달라고 댄 거 아니었어?”
그가 놀리는 투로 물었다.
“아니거든. 그냥 크기 대 보려고…. 놔줘.”
“이러고 공부하자.”
“뭐? 시, 싫어.”
“이렇게 있으니까 왠지 공부 잘하는 기운이 들어오는 거 같아. 막 머리가 맑아져.”
건우가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며 억지를 부렸다.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그가 움직이는 대로 휘청였다. 건우는 유사과학 신봉자 같은 말을 하면서 장난기 어린 낯을 하고 있었으나, 해영은 하나도 유쾌하지 않았다. 해영은 이 가라앉은 기분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했다. 되짚어 보면 요 며칠 계속 그랬다. 막무가내로 제 공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휘둘리길 반복했다. 그는 거침이 없었고, 해영은 그런 것에 면역이 없었다. 건우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조금이라도 고민한다든가, 망설이는 낌새를 보이면 더 바짝 밀고 들어왔다. 그러면 저는 하릴없이 건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밀려갔다.
해영은 그가 제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제가 살아온 삶에서, 제 상식으로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알았어, 놓을게.”
해영의 표정이 굳은 걸 눈치챈 건우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온기가 낯설었다.
“나 놀리는 거지….”
해영이 속에 있던 말을 토해내듯 뱉었다. 용기 내 고개를 들자, 건우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나 게, 게이라고 놀리는 거잖아….”
“뭐? 아니야.”
“너 집에 가….”
해영이 턱이 쭈글쭈글해질 정도로 입술을 꾹 물고 건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가방 안에 책상 위에 널브러진 건우의 물건을 쑤셔 넣고 그의 품에 던지듯 안겨 주었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 건우의 등을 온몸으로 밀어냈다.
“잠깐만, 아니…. 야.”
“흐….”
그 미약한 힘에 버텨 보려던 건우는 해영의 울먹이는 얼굴을 보고, 제가 억울한 것도 잊고서 멍하니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해영은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텅 빈, 그러나 지금만큼은 망연하게 공허한 제 방을 보았다. 시선을 내려 여전히 뜨겁고 간지러운 손바닥을 쥐었다 펼쳤다. 그 온기 또한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에겐 이게 어울렸다.
***
다음 날 아침, 등교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던 해영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맞은편에 건우가 서 있었다. 해영은 제 앞에 세워진 검은 세단과 건우를 난감한 얼굴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망설임을 읽은 건우가 입꼬리를 최대한 아래로 끌어 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해영이 입술을 깨물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홍 실장님. 죄송한데 저 오늘 버, 버스 타고 가도 될까요?”
홍 실장이 해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건우를 발견했다. 집에 놀러 왔다던 친구가 저 친구인가. 어제 오전, 미세하게 들뜬 투로 해영의 친구가 집에 오기로 했다고 이야기하던 회장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홍 실장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해영에게 알겠다 답했다.
차가 사라지자마자 건우가 생글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웃지 마. 나 아직 화 풀린 거 아니거든….”
“알아.”
놔두고 가면 마음이 내내 안 좋을 것 같아서 건우를 선택하긴 했지만, 해영은 아직 그와 마주할 기분이 아니었다. 앞선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였다. 등 뒤에서 건우가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빨리 걷는다고 걸은 건데도 건우는 금세 제 옆까지 다다라 나란히 붙어 섰다.
“먹을래?”
건우가 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상자를 제게 내밀었다. 해영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마카롱이었다. 내가 앤 줄 아나. 생각은 그렇게 해도 저도 모르게 계속 눈길이 옆으로 향했다. 해영은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니.”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무슨 맛인데?”
“초코.”
“…….”
차마 초코 맛을 싫어한다는 말은 못 하겠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랬더니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방 좀 열게.”
“어?”
건우는 제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등 뒤로 가서 가방 지퍼를 한 뼘쯤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마카롱 상자를 쏙 집어넣었다.
“아, 손이 미끄러져서 넣어 버렸다.”
뻔뻔스럽게 이야기하는 건 덤이었다. 해영은 그 고저 없는 연극 톤의 목소리에 푸흐, 하고 저항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뭐야.”
해영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웃었다. 건우는 그 둥글게 휘어진 눈매를 빤히 보았다. 웃느라 발갛게 익은 뺨에도, 숨을 약하게 들썩일 때마다 교복 깃 안쪽으로 감질나게 보이는 곧고 하얀 쇄골에도 눈을 두었다.
“놀린 거 아니야.”
건우가 말했다. 그 말의 의도를 깨달은 해영의 웃음이 서서히 멎었다.
“진짜야. 그냥.”
건우는 그답지 않게 입안에서 말을 굴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한다. 해영의 시야에 빨갛게 물든 그의 귓바퀴가 들어왔다.
“그냥 너랑 손잡고 싶었어.”
“…….”
그 열이 제게도 옮아 붙은 것처럼, 해영의 얼굴이 일순간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무리 이런 경험이 전무한 해영이라도 저런 표정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안다고 해서 대처 방법까지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 학교 늦어….”
그래서 전혀 상관없는 핑계를 대고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같이 가.”
건우의 목소리에 어딘가 즐거운 웃음이 섞여 있었다. 해영은 걸음을 멈추고 그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이었다.
그날 이후, 어색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건우와의 사이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하, 하지 마….”
“아, 왜. 아무도 없잖아.”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안 들어와.”
교실에 둘만 남자, 건우가 의자를 끌고 제 오른쪽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놀고 있는 해영의 왼손을 덥석 쥐어 제 허벅지 위로 가져갔다. 당황한 해영이 손을 이리저리 비틀며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써 봐도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아.”
그의 말대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도 건우의 몸에 가려져 안 보일 위치이긴 했다. 그래도. 해영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겼다. 건우는 태연하게 노는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며 놀고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제가 건우의 의도를 어렴풋이 파악한 후로 그는 학교에서도 종종 이렇게 과감하게 굴었다. 원래도 거침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에 비하면 그건 신중한 편이었다.
지금처럼 아이들 눈을 피해 슬쩍 손을 잡거나, 어깨에 머리를 기대거나, 옆을 지나가던 제 허리를 장난스럽게 낚아채는 둥,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짓들을 틈만 나면 저질러 해영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히 해영이 거듭 주의를 준 덕에 사람들이 있을 땐 건우도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점심 같이 먹으면 안 돼?”
“안 돼….”
건우는 아쉬움이 잔뜩 묻은 얼굴로 알겠다 말했다. 매번 거절당하다 보니 이제는 금세 포기했다. 마음이 안 좋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까지 친한 티를 내긴 싫었다. 그들 보기에 건우와 저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보여야 했다.
저와 같이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건우에게까지 제가 겪었던 일들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됐다.
***
그러나 해영의 바람은 이번에도 힘이 없었다. 제가 보잘것없다고 해서 간절함까지 보잘것없는 게 아닌데도 매번 그랬다. 해영이 필사적으로 바라는 일은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야, 나 어제 대박인 거 봄.”
화장실로 향하던 해영의 걸음이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뭔데.”
“어제 체육 시간에 교실에 뭐 놓고 온 거 있어서 다시 갔거든?”
느낌이 안 좋았다. 누구지. 목소리와 말투를 곱씹으며 생각해 보았으나,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였다.
“근데 씨발, 거기서 서해영이랑 누가 같이 있었는 줄 아냐?”
“서해영? 그… 걔?”
“어, 게이 새끼 하나 있잖아. 걔랑 차건우랑 둘이 있더라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고 머리가 아득했다.
“뭐야, 둘이 친했어?”
“아니지, 새끼야. 대가리를 써 봐. 빈 교실에서 뭐 했겠냐.”
“에이, 그냥 우연히 같이 있던 걸 수도 있지.”
“둘이 존나 간지럽게 쳐다보고 있었다니까. 차건우가 그 게이 새끼 볼을 이렇게, 건드리고. 어? 씨팔. 더러워서 교실 못 들어갔잖아.”
“아, 개새끼야. 하지 마라.”
재연이라도 하는 건지 안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더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디 가.”
복도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던 건우를 마주쳤다. 하필이면 지금. 그의 눈에도 제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는지, 평소 같았으면 모른 척 스쳐 지나갈 거를 제 어깨를 잡아 돌렸다. 해영이 발작적으로 그 손을 세게 쳐냈다.
“…만지지 마.”
건우가 멍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상처받은 것처럼. 해영은 이를 악물고 그를 지나쳐 갔다.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막지 못했다. 호의로 다가와 준 건우에게 좋은 걸 돌려주기는커녕 혐오와 차별을 쥐여 준 것이다. 건우는 절대 그런 시선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오해라고 바로잡아야 했을까. 아니, 그랬더라면 그들의 놀잇거리에 확증을 얹어 주는 셈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욕심내지 말았어야 했다. 더 단호하게 끊어냈어야 했다. 그가 선물해 주는 일상이 너무 꿈 같아서, 평생을 바라던 것이라 차마 놓지 못했다.
주제도 모르고 평범함을 탐낸 벌이었다.
그날로 해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를 찾았다. 전학을 가고 싶다 말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건우의 옆에서 사라지는 것이 그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는 이유를 물었고, 해영은 대답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소 심란한 낯으로 조금 더 고민해 보라 이야기했다. 거기에 해영은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고집을 부렸다.
“부, 부탁드려요…. 제발….”
손바닥을 모아 비볐다. 절박했다.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게이 새끼.
―야, 서해영 자리 앉을 사람.
―니나 앉아, 개새끼야.
해영이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제게 쏟아졌던 멸시와 가시 돋친 말들이 건우에게도 향할 거라 생각하니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저 때문에. 단지 제게 잘 대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들을 감당하라 하기엔 건우는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뱉은 후에야 몸을 돌렸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던 찰나 아버지가 저를 다시 불러 세웠다.
“해영아.”
“…네.”
“학교 가는 게 힘든 거면 며칠 쉬어도 된다.”
“감사합니다….”
“들어가 쉬어.”
“네.”
아버지는 아마도 제 침묵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추측하신 모양이었다. 오히려 저만의 일이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건 익숙했다.
방으로 돌아온 해영이 침대 위로 엎어졌다. 베개에 얼굴을 힘껏 짓눌렀다. 억울함을 그 위에 토해냈다. 저는 이 정도도 바라면 안 되는 건가. 고요한 방 안에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아 내는 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방문 틈새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해영은 더 세게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막혔다.
***
다음 날 해영은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절절 끓었다. 새벽부터 그랬다. 종종 과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악몽과 함께 몸살이 찾아오곤 했다. 어제는 딱히 아버지의 권유대로 할 생각은 없었으나, 이런 몸 상태로 학교에 가는 건 무리였다. 해영은 하는 수 없이 결석하기로 했다.
어제 그런 소문을 듣고서 아무렇지 않게 건우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출근 전 해영의 방에 들른 아버지는 담임에게 몸이 안 좋아서 쉰다는 말과 함께 전학 의사를 전했다고 했다. 해영은 열 기운에 몽롱한 정신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결에 이마에 대어진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을 느낀 것도 같았다.
하루 종일 자다 깨는 걸 반복하다 해가 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직 어지럼증이 있었고 열이 완전히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아침보다는 나았다. 해영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세 통의 부재중 전화와 열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모두 건우가 보낸 것이었다. 해영은 읽었다는 표시를 남기지 않기 위해 액정에 뜬 미리 보기로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지각생]
[왜 안 와]
[많이 아파?]
[일어나면 답장 줘]
보낸 시간을 보니 뒤에 두 건은 담임에게 제가 결석한 사정에 대해 들은 이후인 듯했다. 바로 다음에 사진 하나가 보내져 있었는데, 클릭할 수가 없어서 어떤 사진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해영은 새끼손톱만 하게 보이는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그 뒤에 같이 온 메시지 내용과 함께 유추해 보건대, 비어 있는 제 의자 사진인 듯했다.
[(사진)]
[가려줄 사람 없으니까 나한테 질문하잖아]
[나 하나도 모르는데]
건우의 툴툴대는 말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해영이 힘없이 웃었다.
[이따 맛있는 거 사다 줄까?]
[불편하면 집 앞에 두고만 갈게]
발송 시간을 보니 점심 먹고 보낸 건가. 두 번째 부재중 전화가 온 것도 이즈음이었다.
[해영아]
7교시가 끝났을 시간에 보낸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끝으로 건우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해영아. 건우의 마지막 메시지를 곱씹었다. 그 세 글자가 마치 저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저를 찾는 것에 멋대로 위로를 느끼고 만다.
해영은 또다시 스스로가 싫어졌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해영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첫날에 드문드문 오던 건우의 부재중 전화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삼 일째 되는 오늘에는 무려 30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그와 반대로 메시지의 빈도는 점점 줄었다.
종일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해 놓고 있는데도 틈만 나면 울리는 전화 때문에 충전이 눈에 띄게 더뎠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고 있다가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누를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걸 노리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보고 있던 인터넷 강의가 끝났다. 해영이 이어폰을 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해영은 간식거리라도 챙겨 오기 위해 방을 나섰다.
아픈 게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해영은 평소보다 두 배로 공부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건우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제가 내린 결정을 후회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후회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일어나 공부했다. 그런다고 건우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니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해영은 믿고 싶었다.
주방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다가 쿠키 한 통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고 한 접시 덜어다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창문 밖으로 아스라이 주황색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졌다. 해영은 창문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때, 또다시 주황색 불빛이 밖을 밝혔다.
“어….”
해영은 바닥에 쿠키가 든 접시를 내려놓고 다급하게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맨발을 운동화에 대충 구겨 넣은 뒤 문을 열었다. 무슨 정신으로 계단을 내려갔는지 모른다. 마당을 가로질러 달음질을 하면서 제대로 신지 못한 신발 때문에 발목을 접질릴 뻔했으나 해영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대문에 다다랐다. 불이 또 꺼졌다. 손잡이를 잡고 묵직한 문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의해 주황색 센서 등이 다시 아래를 밝혔다.
해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마주했다.
“…건우야.”
교복 차림의 건우가 막 밖으로 나온 해영을 무감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해영은 그 눈을 마주치고서야 후회했다. 나오지 말걸. 켜졌다 꺼지는 센서 등의 불빛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건우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당장 그를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작정 뛰어나왔다. 그러나 해영은 지금 그에게 죄인이었다.
돌연 건우가 해영의 손을 덥석 쥐고 앞서 걸었다.
“자, 잠깐만…. 어디….”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해영에게 버거울 정도의 속도로 걷기만 했다. 건우가 멈춘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한 골목이었다. 그 안쪽으로 해영을 밀어 넣은 건우가 그제야 세게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해영은 얼얼해진 손을 감싸 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몸집에 가려져 닿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두운 골목이 더 음산하게 느껴졌다. 건우가 성큼 다가왔다. 제 앞을 막고 있는 커다란 존재에서 해영은 위압감을 느꼈다. 해영이 뒷걸음질했다.
“소문 때문이야?”
“…….”
“전학 가는 거. 소문 때문이냐고.”
건우가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들었구나. 해영이 시선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저릿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내가 상관없다고.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
“…어떻게 상관이 없어.”
해영이 말했다. 허벅지 옆으로 붙인 주먹이 잘게 떨렸다. 고개를 쳐들고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건우를 똑같이 노려보았다.
“신경을 안 쓴다고? 겪어나 보고 이, 이야기하는 거야? 나는…. 나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힘들었다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말들을 토해내듯 뱉었다. 목이 메었다.
“그게 너무 지옥 같아서, 네가 나 때문에 그, 그런 걸 겪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흐….”
속에 썩혀 두었던 말들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거듭 닦아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해영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건우가 허리를 숙였다. 커다란 손으로 해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해영이 미처 닦지 못한 눈물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 닦아 주며 말을 보탰다.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게 게이지, 아니야?”
해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지만 그걸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라, 해영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반응하는 것도 잊고서 멀뚱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건우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해영의 손 하나를 가져가 잡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손등 위를 엄지로 찬찬히 쓰다듬으며 고백했다.
“작년에 너 처음 봤을 때, 그냥 계속 눈이 가더라. 뭐가 그렇게 맨날 바쁜지, 조그만 게 빨빨거리면서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났다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냥 내가 어디서든 널 찾고 있던 거였더라고.”
건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시선은 여전히 맞잡은 손 위에 둔 채였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애들이 네 이야기 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
해영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려 비트는데, 건우가 더 단단하게 잡아 왔다. 놓치지 않도록.
“다 너처럼 예쁜가 싶어서 동영상 같은 것도 찾아보고 그랬거든.”
야한 거. 그가 장난기 묻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애꿎은 해영의 얼굴만 화륵 달아올랐다.
“아니더라고. 너만 예쁘더라.”
건우의 말이 적당한 무게를 싣고 제 위에 얹어진다. 그 존재가 주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저밖에 없던 세상에 누군가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는 느낌이, 제 안에서 그의 존재가 점점 커진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기꺼웠다.
“목도리 찾아 준 날 기억 나?”
“응….”
“사실 그때 더 일찍 찾았는데 떨려서 말을 못 걸겠더라. 말도 이상하게 했을걸. 그날 집 가면서 엄청 후회했어. 번호라도 달라고 해야 했는데, 이러고.”
저 역시 그랬다. 그 이후로 마주칠 기회가 없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으니까.
“방학 내내 후회하다가 이 학년 교실 들어갔는데 네가 있는 거야.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 나.”
건우가 노는 손으로 본인의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해영이 눈이 휘도록 웃었다. 건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잡은 손을 펼쳐 슬며시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빈틈없이 얽히는 느낌에, 해영은 전에 없이 긴장했다.
“너랑 계속 이렇게 손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어. 그것보다 더한 것도 다 너랑 하고 싶어.”
“…….”
“이런데 네가 피하니까 피 말라 죽을 거 같다고.”
“…네가 시,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소문이.”
“알 바냐.”
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해영의 말을 끊어냈다.
“나는 씨발, 무슨 생각까지 한 줄 알아? 아, 소문 더 났으면 좋겠다. 나 같은 새끼 또 안 들러붙게.”
“…아무도 안 그러거든. 네가 이, 이상한 거거든….”
시선을 피하는 해영의 앞으로 건우가 한 발짝 다가왔다.
“전학 가지 마.”
그리고 고개를 숙여 해영의 어깨 위에 툭 이마를 얹고 투정 부리듯 비볐다.
“나 두고 전학 가지 말라고.”
해영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등 위에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다짜고짜 전학을 보내 달라 해놓고서 며칠 만에 번복한 해영에게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알겠다 답했다. 해영의 표정이 전보다 확연히 밝아진 걸 본 게 이유였다. 다행히 담임은 해영과 면담을 하기 위해 결재를 미뤄 둔 상태였고, 해영의 전학 통보는 그렇게 소소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문은 아니었다. 해영의 우려대로 둘이 그런 사이라더라, 하는 뒷말이 삽시간에 전교로 퍼졌다. 친구는 끼리끼리라고 했던가. 건우의 친구들도 건우처럼 그런 데 관심이 없는 건지, 다행히도 건우와 거리를 두거나 하지 않았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몇몇은 제가 겪었던 것처럼 건우의 면전에 대고 심한 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피하는 게 해영의 눈에도 보였다. 해영은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건우는 그가 했던 말처럼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더 보란 듯이 제 옆에 찰싹 붙어 다녔다.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보통의 고등학생들이 그렇듯, 학업과 연애 둘 다 만족스럽게 병행하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해영과 건우는 따로 시간을 내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주로 남는 시간을 함께했다. 수업 쉬는 시간이라든가, 과외 중간마다 애매하게 빈 시간처럼.
특히 건우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해영과 등하교를 함께했다. 아침에 해영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가고, 끝난 뒤에는 데려다주는 식이었다. 해영은 매번 저 편한 대로 해 주는 게 마음에 걸려서 어느 날은 건우의 집으로 제가 바래다주겠다 제안한 적도 있었으나, 그날 건우가 도로 저를 집까지 배웅해 주는 바람에 시간만 두 배로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해영은 데려다주는 것 외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다, 홍 실장과 아버지에게 등하교 시간이 변경되었다고 속였다. 등교 시간은 삼십 분 더 이르게, 하교 시간은 삼십 분 더 늦게. 다행히 이건 건우의 마음에 든 듯했다.
해영이 얻어 낸 시간에 둘은 주로 학교와 해영의 집 사이에 위치한 오래된 놀이터에서 보냈다. 가까운 곳에 아파트 단지가 새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놀던 아이들이 모두 그곳의 알록달록한 새 놀이터에 푹 빠져 이쪽으로는 거의 오지 않았다. 덕분에 이곳은 해영과 건우의 밀회 장소가 되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해영이 건우와 저 사이에 이어진 두 손을 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온기가 꼼질대는 제 손을 힘주어 쥐었다. 해영이 그 모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요 며칠 내내 해영을 괴롭히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사귀는 건가?
고백은 받았지만 사귀자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근데 또 손은 이렇게 맨날 잡고.
“근데 있잖아….”
해영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우리 사, 사귀는 거야?”
“뭐라고?”
제 물음에 고개를 등받이 뒤로 젖히고 있던 건우가 발작적으로 몸을 바로 했다.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굳은 얼굴로 해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귀는 거 아니야?”
“장난해?”
건우는 저를 있는 힘껏 노려보다가 마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해영의 손등을 깨물었다.
“아!”
“너 사귀지도 않는 놈이랑 손잡고 그러는 애였어?”
“아, 아니. 그냥 확인차….”
아오, 놀라라. 그가 다시 등을 뒤로 기대며 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를 생각 하지 마. 안 돼.”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해영의 말에도 건우는 왜인지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이제 와서 사귀기 싫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나 저 혼자 좋아하는 건 아닌가. 해영은 별로 사귀고 싶지 않은데 거절하지 못해서 만나 주고 있는 건가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이다.
“야.”
“응?”
나지막이 부르자 해영이 곧바로 제 쪽을 바라본다. 건우가 잡고 있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휘청이며 기울어지는 해영의 몸을 품에 안았다.
“잠깐, 만….”
당황한 해영이 건우의 팔 안에서 꼼질댔다. 건우는 그럴수록 더 빈틈없이 안았다. 맞춰진 듯 딱 맞는 몸이 서서히 움직임을 줄였다. 건우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제 가슴팍에 폭 파묻고 있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쿵쿵대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왔다. 건우가 낮게 웃으며 해영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더 바짝 품에 안았다.
아니구나.
***
중간고사가 끝나고 담임이 자리를 바꿨다. 친한 아이들끼리 뭉쳐 놓았더니 수업 분위기가 점점 개판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선생님들에게 전해 들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 결과 건우와 해영은 떨어져 앉게 되었다. 건우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 해영은 같은 줄의 맨 뒷자리였다.
건우는 무척 아쉬워했다. 그냥 아쉬워한 정도가 아니라 원인 제공자인 아이들의 욕도 많이 했다. 속상한 건 해영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붙어 있던 건우와 떨어져 있으니 이상하게도 수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저를 종종 간질이고 쿡쿡 찌르며 관심을 요구하긴 했어도,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했던 게 있었나 보다. 해영은 새삼 그의 존재가 제 안에서 꽤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실감했다.
며칠 지나자 건우는 그 나름대로 즐길 방법 하나를 찾아냈다. 유인물이었다. 같은 줄에 앉아 있기 때문에 건우의 손을 거친 유인물을 해영이 받게 된다. 건우는 그걸 깨닫고 나서부터 마지막 장 갱지 위에 낙서를 적어 보냈다. 어울리지 않게 정갈한 글자체로 적힌 문구들을 볼 때마다 해영의 입술 사이로 간지러운 웃음이 샜다.
‘서해영 바보’
어느 날에는 어디에도 낙서가 없어서 까먹은 건가, 했는데 알고 봤더니 제 두 자리 앞에 있던 아이가 맨 뒤 장을 가져갔던 일이 있었다. 건우는 그 사실을 알고 다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순서대로 가져가라고, 순서대로. 위에서부터 하나씩.
라고 이르면서 해영이 받은 것과 그 아이가 가져갔던 것을 바꿔왔다. 그 뒤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여느 때처럼 건우가 제 앞자리 의자를 끌고 와 제 쪽을 보고 거꾸로 앉았다. 해영의 앞에 앉은 아이는 엉덩이가 가벼웠다. 쉬는 시간이며, 점심시간이며.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해영으로선 다행이었다.
건우가 해영의 책상 아래로 다리를 넣어 해영의 것과 서로 얽었다. 그는 손을 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종종 이렇게 다른 곳을 맞대어 왔다. 어디 한 군데는 꼭 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익숙해진 해영이 그 상태로 조금 전 수업 때 적었던 필기를 훑었다. 건우는 얌전히 휴대폰을 두드리며 기다렸다.
“너 어릴 때야?”
노트를 덮은 해영이 건우의 휴대폰 속 작은 프로필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가족 대화방에서 저녁 메뉴를 읊고 계신 건우 어머니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어. 볼래?”
“봐도 돼?”
건우가 대답 없이 곧바로 사진을 클릭해 화면 가득 띄운 뒤 해영에게 내밀었다.
“귀여워….”
해영은 휴대폰을 받자마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사진 속 건우는 어림잡아 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지금이랑 똑같은 모습에 볼만 터질 듯이 빵빵했다. 말 진짜 안 듣게 생겼다. 해영이 그 고집스러운 눈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날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던 건지, 아기 건우는 손에 노란색 자동차 장난감을 꼭 쥐고서 씩씩대는 얼굴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 이거 보, 보내 주면 안 돼?”
해영이 눈을 반짝이며 건우에게 물었다. 건우는 드물게 소유욕을 내비치는 해영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우리 집에 더 많은데.”
“진짜?”
“응. 내 사진만 앨범으로 다섯 권 있어.”
다섯 권….
“주말에 올래?”
이때다 싶어 건우가 권했다. 해영은 휴대폰 속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런 사진이 다섯 권이나 있다니. 그걸 다 볼 수 있다니.
“갈래….”
유혹에 못 이긴 해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건우가 현관문이 닫히지 않게 잡고 길을 비켜서자 해영이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타르트 박스를 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니까.”
“그래도.”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건우가 작게 웃으며 박스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박스에 난 투명한 부분을 통해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청포도 타르트, 호두 타르트, 딸기 타르트 등 맛이 다른 여섯 조각의 타르트가 한 판을 이루고 있었다.
“맛있는 거 사 왔네. 이따 먹자.”
“아, 안 돼. 그거 가족들 드시라고 사 온 거야….”
“우리가 다 먹자.”
그는 그렇게 말하며 타르트 상자를 냉장고에 넣어 버렸다. 가족이 여섯 명이나 된다고 해서 일부러 개수를 딱 맞춰 사 온 건데. 좀 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려면 말할 수 있었지만, 해영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들여다본 타르트가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건우가 같이 먹자고 한 말이 내심 기뻤다.
주방을 뒤지던 건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해영이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귀여워. 건우는 하던 것을 멈추고 엉거주춤 서 있는 해영을 제 방으로 데려가 안쪽으로 밀어 주었다.
“앉아 있어. 마실 거 가져올게.”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주방으로 멀어지는 건우를 바라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건우 냄새. 그의 공간에 들어서자 건우에게서 맡았던 냄새가 제 주변을 감쌌다. 그가 일전에 제 방에 왔을 때, 제 냄새가 났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거였구나. 뒤늦게 공감한 해영이 작게 웃으며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딱 건우를 닮은 방이었다. 불필요한 것 하나 없이 필요한 것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회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인테리어는 자칫 딱딱하거나 어두운 느낌이 들 수 있었으나, 건우의 방은 아니었다. 흰색 벽지 덕분인지 어두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채색 톤이 정돈된 분위기를 살렸다.
해영이 책장으로 다가섰다. 좁은 책장에는 꽂혀 있는 책이 얼마 없었다. 그것조차 그다웠다. 너무도 익숙한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만화에 문외한인 저조차도 제목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만화책 몇 권이 꽂혀 있었다. 재밌나. 만화를 즐겨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건우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뭐 봐.”
그 순간, 해영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둘러졌다.
“아, 깜짝이야…. 노, 놀랐잖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해영이 뒤를 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떨어지기는커녕 더 바짝 붙어오는 건우 때문에 그대로 몸이 굳었다. 너무 가까운데. 해영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였다. 아무도 안 계신다는 말에 긴장을 풀 게 아니었다. 건우가 틈만 나면 달라붙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팔 좀… 풀어 주라.”
해영이 제 배를 끌어안고 있는 건우의 팔뚝 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응?”
꿈쩍도 하지 않는 건우에게 해영이 한 번 더 애원했다.
“알았어.”
그제야 건우는 웃으며 몸을 물려 주었다. 해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뒤를 돌았다. 건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침대에 등을 기댔다. 좌식 책상 위에는 그가 가져다 놓은 아이스 티 두 잔이 놓여 있었고, 그의 왼쪽 바닥에는 미리 꺼내 둔 건지 두툼한 앨범 다섯 권이 쌓여 있었다.
해영이 재빨리 건우의 오른쪽 빈자리로 다가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옆에 개어 놓고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앨범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앨범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문득 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해영이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건우가 제 맨 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보지. 그 눈길에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피부 위가 간지러웠다. 해영이 괜히 팔을 매만졌다. 그러자 건우는 언제 쳐다봤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부터 볼래? 유치원 들어가기 전 거도 있고, 유치원 때 한 권, 초등학교 때 두 권, 중학교 한 권.”
“어….”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갓난아기 때 사진도, 유치원생 건우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 모습도 모두 보고 싶어서 고르기가 어려웠다.
“순서대로 봐도 돼?”
“그래.”
건우가 맨 아래 있던 앨범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주었다. 해영은 들뜬 얼굴로 두툼한 앨범 커버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건우로 추정되는 초음파 사진부터, 발 도장, 그리고 막 태어난 신생아 때 사진이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이게 너야?”
“응.”
이렇게 작은 애가 저만큼 커다래지다니. 해영은 새삼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며 구경을 이어 갔다.
유치원 때 앨범은 더 다채로웠다. 공룡 모형을 가지고 뛰어다니고 있거나, 하늘색과 노란색이 섞인 유치원 원복을 입고 밭에서 고구마를 들고 찍은 사진, 네 발 자전거를 타는 사진 등 어느 하나 그냥 넘길 수 있는 게 없었다. 해영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인 것처럼, 사진 한 장 한 장을 오래도록 관찰하며 느릿하게 장을 넘겼다.
그러다 한 사진이 눈에 띄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어린 건우가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는 사진이었다. 입술에는 립스틱까지 칠해진 채로 누나들에게 붙잡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아, 씨.”
벌거벗은 사진이 나왔을 때도 아무렇지 않아 하던 건우가 다급하게 사진을 손으로 가렸다. 해영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뜯어내기 위해 애를 썼으나, 건우는 치워 주지 않았다.
“야, 안 되겠다. 그만 봐.”
“조, 조금만 더….”
급기야 앨범을 뺏어 가려는 건우를 해영이 몸으로 낑낑대며 밀어냈다. 어떻게든 더 보려는 해영과 건우가 작게 투닥거리며 실랑이를 했다. 그러다 건우가 해영의 허리를 냅다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투정 부리듯 비볐다.
“아, 보지 말자.”
해영은 귀까지 빨개져 있는 건우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매번 놀림을 당하는 입장에 있다가, 건우가 이렇게까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가 왜 저를 놀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알겠어, 그만 보자.”
결국 포기한 건 해영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과거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팔을 옆으로 뻗어 앨범을 덮었다. 해영의 대답에도 건우는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짝 붙어 코끝을 보드라운 목덜미에 박고 숨을 들이켰다. 당황한 해영이 그의 어깨를 잡아 밀었으나,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건우야….”
해영의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건우가 손을 올려 저를 꾹꾹 밀어내는 해영의 양손에 깍지를 껴 잡아 내렸다.
“응.”
건우는 제가 그를 부르려는 목적이 아니었던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서 시선이 얽혔다. 건우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제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에 시선이 꽂혔다. 해영은 숨을 참았다.
“싫으면 발로 차.”
그렇게 말한 건우가 제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커다란 체구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해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싫은가. 낯섦과 긴장에서 오는 불편감은 있어도 싫거나 두려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를 발로 찰 수 있을 리도 없고.
가만히 있으니 건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호흡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해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앞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또 놀린 건가. 해영은 창피하고 억울한 기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쪽,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놀란 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건우가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말캉한 것이 꾹 눌렀다 떼어진다. 해영이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긴장한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었다.
“나 첫 뽀뽀야.”
건우가 말했다.
“…나도.”
따라 대답한 것뿐인데, 건우는 큰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건우가 해영의 등허리에 손을 얹어 제 다리 사이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바로 쪽쪽, 도장 찍듯 입술을 부딪쳤다. 뺨에도, 이마에도, 코끝에도. 해영은 눈을 꾹 감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뽀뽀 세례를 겨우 받아 냈다.
건우가 제 허리춤을 움켜쥔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목을 감싸 쥐고 지분거리다 언젠가, 훔쳐보았던 가느다란 팔을 쓸어 올렸다. 해영의 몸이 움찔 떨린다. 그러면서도 피하지 않는 모양에 건우는 아래가 빠듯했다.
작년 여름, 하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해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발자국 뒤에 서서 바라본 해영은 부주의하기 짝이 없었다. 몸에 비해 커다란 하복 셔츠가 선풍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팔랑거렸다. 손부채질이라도 하고 있을 때면 사이로 하얀 속살이 내비치곤 했다.
위험한데.
“야, 나가자.”
저도 모르게 해영의 소매 안으로 손을 넣던 건우가 곤란한 기색으로 몸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응…? 어디?”
“어디든. 집은 위험해.”
해영에게 카디건을 도로 꼼꼼히 입히고,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메는 동작이 급했다. 해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떠밀리다시피 현관으로 밀려났다.
“너 하복 제일 늦게 입으면 안 돼?”
옆에서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던 건우가 대뜸 물었다.
“왜?”
“그냥.”
“…….”
해영은 더위를 많이 타지 않아 하복을 늦게 입는 것 자체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저 혼자 춘추복을 입고 시선을 받는 건 싫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건우의 눈을 보니, 어쩐지 제 의사와 관계없이 그렇게 하게 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