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물 (18/21)

#스물

하얀 입김이 목도리 위로 흩어진다. 2월에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해영이 몸을 더 움츠렸다. 시릴 만큼 차가웠던 벤치가 제 체온에 의해 데워진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코트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불안함이 실체가 있다면 분명 지금 제 주변을 정신없이 맴돌고 있을 터였다.

떨어졌나.

해영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이런 생각 하지 말자. 부정 타.

고등학교 삼 학년, 해영은 원하던 한국대에 수시로 합격했다. 건우는 죽어도 저와 같은 학교에 가겠다면서, 작년부터 뒤늦게 공부에 열을 올렸다. 최저 등급만 맞추면 되는 해영과 달리 정시로 지원한 건우는 수능이 끝난 후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건우는 만약 떨어지더라도 재수를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걱정된 해영이 다른 학교도 넣어 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권해 보았으나, 건우는 강경했다. 애초에 대학 진학에는 관심도 없던 그였다. 오로지 해영과 같은 캠퍼스에서 추억을 쌓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영의 옆에서 함께 걷고 싶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결정한 진로였다. 그런 건우 눈에 다른 학교가 들어올 리 없었다.

그래서 해영은 더 간절했다. 어쩌면 건우보다 그의 합격을 제가 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저로 인해 건우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선택은 하지 않길 바랐으니까.

해영은 딱 붙인 무릎을 달달 떨며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먼저 물어볼까. 해영이 사진도 메시지도 무엇도 오지 않는 대화창을 초조하게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뭐라고 보내지. 어떻게 됐…. 아니야. 뭐 해? 도 좀 이상하고. 한참을 썼다 지우길 반복하던 해영이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대화창을 내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건우였다. 해영이 틈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어디야?

기다리던 연락에 기분이 붕 떴던 것도 잠시, 해영의 어깨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건우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어…. 나 놀이터.”

―금방 갈게, 기다려.

“…응.”

울지 말자. 해영이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다짐했다. 그동안 건우가 해왔던 노력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을 만큼 속이 상했으나, 오늘만큼은 울어선 안 됐다. 그를 달래 주어야 했다. 건우가 정말 재수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그의 옆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도울 것이다. 건우에게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해영은 휴학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건우가 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만큼, 해영 역시 그랬으니까. 그와 대학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상상했다. 고등학교를 벗어나서도 같이 있는 미래를 그렸다. 그걸 위해 건우가 노력하는 날들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장갑에서 손을 빼 뺨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울지 마.

얼마 지나지 않아 놀이터 입구에서 힘없이 걸어오는 건우가 보였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건우의 표정에 해영은 속에서 무언가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건우야….”

가까이서 본 얼굴은 더 엉망이었다. 해영이 재빨리 발꿈치를 들어 건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건우도 해영의 허리를 빈틈없이 마주 안았다. 건우의 푹신한 패딩에 해영의 몸이 푹 처박힐 정도로. 해영이 손을 올려 건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괘, 괜찮아….”

어설프게 달래는 목소리에 작게 웃은 건우가 해영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안겨 있는 건 해영인데도, 그 작은 팔 안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으려는 듯 계속해서 몸을 비볐다.

“붙었다.”

“어?”

잘못 들은 건가. 해영이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건우는 그럴수록 더 단단히 해영의 몸을 옭아맸다.

“붙었다고, 나.”

“…아.”

일순간 몸에서 힘이 빠졌다.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앞다투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 놀랐잖아…. 왜, 왜 그런 얼굴로 와. 왜.”

해영이 주먹을 말아 쥐고 건우의 가슴팍을 힘주어 때렸다. 건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픈 시늉을 해 보이다가 이내 씩 웃고는 해영의 축축해진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그 위에 달래듯 입을 맞췄다.

“안 믿겨서.”

해영은 벅찬 얼굴을 하고 저를 내려다보는 건우를 응시했다. 고개를 들어 그 입술 위에 제 것을 살포시 포개었다. 차디찬 겨울 공기 속에서 따끈한 체온이 맞붙었다. 건우가 해영의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해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본 건우가 해영의 입술 사이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살덩이가 얽히고 비벼지는 느낌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응….”

분명 뽀뽀도, 키스도 제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은근슬쩍 옷 속으로 들어오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너무 능숙해서일까. 해영은 거절할 생각도 못 한 채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러자 건우는 더 과감해졌다. 안고 있던 몸을 기울여 해영을 뒤로 밀어붙였다. 해영의 무릎 뒤에 벤치 가장자리가 툭 걸렸다. 건우는 그를 서서히 앉혔다. 이상하게도 해영은 벤치에 눕듯이 앉게 되었다. 등받이가 없었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순간 스쳤지만, 곧바로 제 티셔츠를 말아 올리는 건우 때문에 작게 피어올랐던 의문이 공기 중으로 증발되었다.

“여기 바, 밖인데….”

바깥에서 맨살을 보이다니. 공연 음란죄로 잡혀갈 거리였다. 그러나 건우는 제 말에도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드러난 복부 위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 감각이 간지러워 피부가 예민하게 곤두섰다. 춥, 건우가 움찔대는 해영의 배를 물고 빨기 시작했다. 해영이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비틀었다. 신기했다. 스킨십의 열감 때문인지, 상체를 훤히 내보이고 있는데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건우야.”

이 신기한 사실을 건우에게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해영이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고요한 가운데 춥, 춥 하는 젖은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해영의 눈꺼풀이 서서히 뜨였다. 끔뻑. 두어 번 감았다 뜨자, 시야에 보이는 건 겨울 한가운데의 놀이터가 아닌, 익숙한 집이었다. 해영이 고개를 슬쩍 내렸다. 거기에는 종종 그랬던 것처럼 건우가 잠들어 있던 제 배 위에 입술을 비비고 있었다.

“흐, 간지러워….”

해영이 잠긴 목소리로 웃었다. 행위에 몰두해 있던 건우가 잠이 깬 해영을 올려다보다가 배 위에 입술을 진하게 누르며 고개를 떼어냈다. 말아 올렸던 티셔츠를 도로 내려주고, 위로 올라가 해영을 품에 안았다.

“저 나오는 꿈 꿨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계속 부르던데.”

아, 잠꼬대했구나. 어쩐지 창피해진 해영이 건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건우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한 꿈 꿨나.”

“아니거든.”

해영이 작게 툴툴대며 부정했다. 내가 무슨 자긴 줄 알아.

“너랑 내가 고등학생이고, 같은 반이었는데.”

건우가 웃으며 해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응.”

“네가 나한테 공부 가르쳐달라고 떼쓰고, 떡볶이도 같이 먹고, 본가에서 공부도 하고…. 아, 말을 더 안 들었어. 어려서 그런가.”

차근차근 꿈 내용을 읊던 해영의 머릿속에 언젠가 건우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쳤다.

―너랑 같은 반이었으면 친해질 일도 없었겠다.

―아닐걸요.

곧바로 부정하던 목소리와 그 뒤에 이어진 말도.

―내가 공부 가르쳐 달라고 맨날 수작 부렸을걸.

무의식중에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정말 그대로인 꿈을 꾸었다.

“그래서 걔가 좋아요, 제가 좋아요.”

“응?”

“어린애랑 노니까 좋았어요?”

둘 다 본인이면서 무슨 이상한 질문을 하는 거지. 해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건우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묻어 나왔다. 장난이구나. 해영은 그제야 살포시 웃으며 맞받아쳤다.

“응, 귀엽던데….”

“귀엽던데?”

건우가 입꼬리를 비틀며 되묻더니 곧바로 해영의 위를 덮쳤다.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몸을 단단하게 옭아매고 눈에 보이는 곳곳에 뽀뽀를 퍼부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공기 중으로 번져나갔다.

그때 네가 옆에 있어 줬더라면.

고작 잠깐의 단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을 후회한다.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그랬다면 많은 게 바뀌었겠지.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바뀐 건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해영은 다른 가정을 상상한다. 이번에는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앞으로도 네가 옆에 있어 준다면.

호구조사 외전: 고등학교 AU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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