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 요게금지 나만아는표시있음 @라무
호구조사 외전:후일담
목차
#01
#02
#03
01
연애는 순조로웠다.
이 년 반. 햇수로 벌써 사 년째지만 군대로 떨어져 있던 기간 때문인지 해영과 건우는 권태 그 비슷한 것도 없이 순조롭게 연애했다. 제대한 지 반년이 되어도 여전히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은 많았고, 함께 살면서 매일 얼굴을 마주해도 질리지 않았다. 비록 해영이 회사 일로 바쁘고, 복학한 건우가 과제에 치여도 이 정도면 각자의 생활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잘하고 있다고 느꼈다.
평일엔 별다른 일 없는 이상 아침과 저녁을 같이 먹으며 하루를 공유하는 거로 서로를 채웠다. 시간대가 맞으면 출퇴근과 등하교를 같이 했고, 건우의 수업이 늦게 시작하는 날에는 건우가 해영을 회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과제나 밀린 집안일을 하다가 등교를 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해영이 더 이른 경우가 많았는데, 건우가 팀플 등으로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잦다는 게 이유였다.
주말이 되면 못했던 것들을 몰아서 해치웠다. 요즘 벚꽃 개화 시기라고, 며칠 전에 해영의 회사 사람들이 벚꽃 명소에 가서 찍어 온 사진들을 죄다 해영에게 자랑했던 날이 있었다. 그날로 해영은 옆집 친구가 자랑한 장난감 따위를 보고 온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서, 집에 오자마자 건우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 이야기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이른 오후부터 나와 벚꽃이 만개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길거리 간식을 사 먹고, 사진도 찍었다.
벚꽃이 피는 계절에 만났어도 꽃놀이를 나온 건 처음이었다. 해영에게 봄은 더 이상 예전처럼 괴로운 계절이 아니었다. 분홍빛 꽃잎이 흐드러진 풍경을 보고도 이젠 우울보다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건우를 만난 계절, 건우와 함께한 계절. 봄은 제 속에서 그렇게 새로운 색으로 매년 덧칠해지고 있었다.
저녁은 건우가 예약해 둔 식당에서 먹었다. 아까 낮에 산책했던 공원의 야경이 잘 보이는 곳이라 해영은 식사하는 내내 감탄을 내뱉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찾았어?”
디저트 접시까지 깨끗이 비운 해영이 여전히 들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둘째 누나한테 물어봤어요. 괜찮았어요?”
“응, 엄청 맛있었어. 야경도 너무 예쁘고.”
분명 사회생활을 먼저 하고 있는 건 해영인데, 이런 부분에서는 건우가 저보다 훨씬 능숙했다. 역시 경험은 무시 못 하는 건가. 오기가 생겨 제가 계획을 짜 보겠다 호기롭게 이야기한 적도 종종 있었으나 재능이 없는 건지 대부분을 실패했다. 망한 식당도 망한 계획도. 건우는 모두 좋다고 따라주었지만, 해영에게도 눈이 있고 입이 있었다. 건우가 짰던 데이트에 비해 제가 계획한 날은 안타까울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 이후부터 해영은 각자 잘하는 걸 하자는 생각으로 건우에게 온전히 맡기게 되었다.
“다음에 또 먹으러 와요. 누나 말로는 철마다 메인 요리가 바뀐다고-.”
“해영 씨?”
해영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이 말을 끊긴 건우의 시선도 따라 돌아갔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어림잡아 삼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 눈이 돌아갈 만큼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으나, 누가 봐도 단정하고 준수한 호감 상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얇은 안경테 너머로 보이는 눈은 웃을 때마다 완만하게 휘어져 다정한 인상을 주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지만, 건우는 왠지 그 낯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베이지 계열의 캐주얼한 정장,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갈색 구두. 그는 외모만큼이나 옷차림도 깔끔했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영의 표정을 보니 아는 사람인 듯했다. 건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해영과 그 낯선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뭔데.
“어….”
해영은 당황한 나머지 인사도 잊고 벙찐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뵙네요.”
남자가 건우와 해영을 번갈아 바라보다 건우 쪽을 향해 눈인사했다. 건우는 언짢은 속을 숨기고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방해받은 건 달갑지 않았으나, 회사 사람인 듯하니 해영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 네.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네. 오늘이 저희 어머니 생신이라. 그럼 식사 마저 맛있게 하세요.”
짧게 인사를 마친 남자가 자리를 비켰다. 해영은 몸을 반쯤 일으켜 예의를 차리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난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구예요?”
건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응, 이번에 들어간 프로젝트가 외부 업체랑 협력으로 같이하는 건데, 거기 팀장님.”
아, 건우는 더 캐묻고 싶은 걸 참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의 표정에서 불편한 기색이 보여서였다. 바깥에서 회사 사람을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지금 모습은 누가 봐도 데이트처럼 보이기 충분했다. 둘러댈 수 있는 말이야 만들면 얼마든 있겠지만, 해영은 그런 거짓말에 능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해영 앞에서 질투하는 꼴 사나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기로 한 것 중에 아직 심야 영화가 남아 있었지만, 건우는 미련 없이 물었다.
“다 먹었으면 집에 갈까요?”
“응? 영화는?”
“집에 가서 봐요.”
바깥에서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꺼낸 제안이었는데, 해영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건지 뺨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우도 웃으며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
―아무래도 회의가 금방은 안 끝날 거 같아서요. 못 데리러 갈 거 같은데 어떡하죠.
“괜찮아. 혼자 가면 되지.”
―죄송해요. 될 거 같다고 말해놓고.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야. 나도 일 남은 거 하고 있었어. 신경 쓰지 말고 마저 잘하고 와. 집에 가 있을게.”
―네, 이따 봐요.
“응.”
해영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봄 날씨는 하루에도 기대와 실망을 번갈아 안겨다 주는 변덕쟁이 같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낮에 비해 저녁에는 여전히 제법 쌀쌀했다. 해영은 바깥 공기에 오래 노출되어 옅게 붉어진 뺨을 한 번 매만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답게 정류장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영은 그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 버스의 도착 시각이 띄워져 있는 전광판을 확인했다. 오 분. 해영은 정류장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도로와 가까운 곳에 섰다. 혹시나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진 않을까, 버스가 줄지어 올 때마다 고개를 내밀고 번호를 살폈다. 그때, 해영의 앞으로 난데없이 흰색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버스 기다려요?”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안쪽 운전석에서 말을 걸어온 건 안의준 팀장이었다. 해영은 조금 전 회사를 나서기 전까지 제가 속해 있는 팀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를 떠올렸다.
“아, 네!”
해영이 허리를 조금 굽혀 그와 눈을 맞추고 답했다.
“타세요. 데려다줄게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일 얘기할 것도 있어서 그래요. 얼른.”
의준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조수석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해영은 망설였다. 남의 차를, 그것도 남자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걸 건우가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정말 일적으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 권하는 거라면 타야 하는 게 맞는데. 해영은 가방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의준의 차 뒤로 커다란 버스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해영은 그제야 허겁지겁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문을 닫자 조용해진 차 내부에 의준의 실실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퍼졌다.
“해영 씨는 일 핑계 대야 받아주는구나.”
“…….”
핑계…. 해영이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의준은 ‘벨트요’ 하고 이르고선 차를 출발시켰다. 해영은 양 뺨에 불만을 주렁주렁 달고서 어쩔 수 없이 안전벨트를 끌어다 맸다. 거짓말을 하다니. 의심을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까처럼 위험하게 차를 세워두고 일 핑계까지 대며 권하는 것을 해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해영이 의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휴대폰을 꺼내 건우에게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팀장님이 태워다 주신대서 타고 갈게 ㅠㅠ]
[넵]
곧바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해영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오늘은 그 친구 바쁘대요?”
“네? 누구….”
“해영 씨 회사에 매일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친구요. 그 왜, 지난번에 식당에서도 봤던.”
“…….”
의준은 마치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 물어보는 것처럼 가벼운 어투로 질문했으나, 그걸 들은 해영의 속은 시한폭탄이라도 품은 것처럼 위태롭게 쿵쿵댔다.
“어려 보이던데.”
의준이 말을 덧붙였다. 해영은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친한 동생인데 학교 방향이 이쪽이라 가는 김에 태워다 주고 있어요.”
최대한 조심한다고 일부러 회사에서 떨어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타고 내렸다. 데려다줄 필요 없다는 해영과 회사 일만으로도 피곤할 텐데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시키기 싫다는 건우의 합의점이었다.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도 몇 번 같은 팀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조금 전과 같은 이유를 대면 다들 쉽게 납득하고 넘어갔는데, 왠지 의준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아, 친한 동생.”
“…….”
그리고 해영의 집 근처에 다다를 때까지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여기예요?”
의준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역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역에서 해영의 집까지는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왜인지 구체적인 주소까지 알려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곳을 목적지로 알려 주었다.
“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돼요.”
해영의 말에 의준이 적당한 위치에 차를 세웠다. 해영은 차가 완전히 정차하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었다.
“어, 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건우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렇고. 몸은 편했으나 심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배려라서일까. 서둘러 내리고 싶은 마음에 가방을 챙기고 몸을 돌리는 동작이 급했다. 해영이 조수석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문을 여는데, 탁, 하고 도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놀란 해영이 고개를 홱 돌려 당황한 표정으로 의준을 보았다.
“왜, 왜….”
해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표정을 본 의준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핸들을 붙잡은 손등에 이마까지 기대며 끅끅하고 웃어대는 의준을 해영이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왜 저래.
“아, 눈물 나. 해영 씨 놀리고 싶게 생겼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
“…네?”
건우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건 처음이었다.
“해영 씨한테 관심 있어요.”
의준이 제 쪽을 보고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약하게 걸려 있었다.
“매사에 열심히 하는 것도 보기 좋고, 일 외적으로는 흐물흐물하면서 일할 때만큼은 확신 갖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요.”
해영의 눈이 조금 전 탈출을 방해받았을 때보다 배는 더 크게 뜨였다. 놀리는 건가, 싶어 의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래 보이진 않았다. 추궁하는 시선을 느낀 의준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놀리고 싶게 생겼다 해놓고 바로 이런 얘기 하니까 이상하긴 하네요. 근데 이건 놀리는 거 아니고 진심.”
“…….”
“이미 만나는 친구 있는 것 같긴 한데.”
품에 가방을 꼭 붙든 해영의 손이 잘게 떨렸다. 아웃팅, 협박. 끔찍했던 과거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아, 걱정 마요. 이런 거 떠벌리고 다니지 않으니까. 나도 해영 씨한테 내 패 보여준 거잖아요.”
제 약점까지 쥐여 주며 안심하라 건넨 말에도 해영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없자, 의준은 어깨를 작게 으쓱해 보이고선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학생 맞죠? 사실 그 친구 보고 가능성 있겠다 생각해서 들이대 보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봐요.”
가능성. 해영이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그가 이야기하는 ‘가능성’이라는 게 무얼 이야기하는지 안다. 어리고, 자신보다 무능력해 보인다는 이유. 그러나 그는 틀렸다. 제 앞에 아무리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능력 있는 사람이 온다 해도 건우보다 좋게 보일 리 없다. 고작 그런 조건 따위로 건우를 판단하기에는 그가 제게 주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귀했으니까. 가방을 움켜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 건우가 받았을 취급을 생각하니 당장 박치기라도 해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가능성… 없어요.”
해영이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의준은 잘 안 들렸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해영은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가능성 하나도 없어요. 제대로 만나 본 적도 없으시면서 그,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 너무 불쾌하고 기분 나쁩니다. 하지….”
“…….”
“하지 말아 주세요….”
“아.”
뱉고 나니 후련하긴 했으나, 그래도 자주 봐야 하는 사람인데 더 둥글게 이야기를 해야 했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해영은 감았던 눈을 뜨고 의준의 얼굴을 흘긋 살폈다. 다행히 화가 나거나 언짢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황한 것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잠시간 말을 고르던 의준이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만나고 계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선 안 됐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막 나왔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도저히 괜찮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저 점수 제대로 까였네, 그쵸.”
“아, 아니에요.”
“응?”
“점수 원래 없었어서….”
“하하.”
의준이 웃긴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허리까지 접어가며 웃었다.
그는 찬 사람에게 들이대는 짓 안 하니 걱정 말라면서,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해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차에서 내렸다.
해영은 의준의 차가 시야에서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작아지는 흰색 뒤꽁무니와 빨간 불빛을 보면서, 건우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비밀로 두고 싶었으나, 건우 성격에 나중에 들키면 더 크게 화를 낼 게 뻔했다. 경험상 이런 경우 먼저 선수를 치는 게 그나마 가장 얌전하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해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연락이 온 게 없는지 확인했다. 아직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팀플 회의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영은 최근 중간고사 기간이라고 잠까지 줄여가며 공부하던 건우를 떠올렸다. 건우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졸업을 하고 싶어 했다. 저와 같은 높이에서 걷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싶어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제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해영에겐 지금도 그가 충분히 그랬으나, 건우는 늘 조급해했다. 예전처럼 불안을 느낄 만큼 압박받진 않았지만 종종 그 생각들이 건우 본인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해영은 그 초조감이 투영되어 나타났던 건우의 말과 몸짓을 떠올렸다.
시험 기간 끝나면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안 그래도 공부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사람한테 근심거리를 더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숨기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며칠의 유예 기간을 두는 것뿐이니까. 의준과도 이야기를 잘 끝냈으니 더 큰일 날 것도 없고, 혹시라도 그가 본인이 했던 말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상인 제가 이런 일에 휘둘려서 어린 애인을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다.
주먹을 꼭 말아 쥐고 다짐한 해영이 조금 전에 비해 가벼워진 표정으로 걸음을 떼어 집으로 향했다.
***
건우가 집에 도착한 건 열두 시가 다 되어서였다. 팀원 중에 유독 말이 더럽게 안 통하는 두 명이 껴 있었다. 그 둘이 싸우는데 왜 주변 사람들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팀워크란다. 그 빌어먹을 두 놈 때문에 해영에게 끝나는 시간을 몇 번이나 번복해야 했는지 모른다. 중간부터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미안해서 먼저 자고 있으라는 말로 끝을 냈다. 건우는 아침에 비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어둑한 거실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노란 불이 제 발 앞을 밝혔다. 형광등은 아닌 것 같고, 딱 스탠드 하나만 켰을 때의 밝기였다. 건우가 식탁 의자 위에 가방을 대충 올려놓고 소파로 향했다. 기다리다 잠이 든 건지, 해영이 그 위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지. 건우는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 귀여운 모양에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소파 앞에 앉아 해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이마에 입술을 꾹 눌러 입 맞추자 그 반동으로 해영의 작은 입술이 퐁 하고 벌어진다. 건우는 그 위로도 가볍게 뽀뽀하고 해영의 몸을 안아 올려 침대에 데려다 눕혔다.
지친 몸을 씻고 나왔다. 해영과 같이 살기 전에는 머리를 항상 덜 말리는 습관이 있었다. 짧아서 굳이 시간 들여 말리지 않아도 금세 마르기도 했고, 물이 뚝뚝 흐르지만 않는다면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으니까. 해영은 젖은 머리가 본인에게 닿는 것을 눈에 띄게 싫어했다. 말은 안 해도 표정이나 행동에서 보였다. 머리를 덜 말린 채로 그를 품에 안았을 때 젖은 부분이 뺨이나 이마에 닿을 때마다 해영은 찡그린 것도,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을 했다. 결정적으로, 보송하게 말리고 달라붙어 있을 때는 머리카락을 자주 쓰다듬어 줬는데, 조금이라도 젖은 상태에서는 해 주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후로 건우는 귀찮더라도 바싹 말리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도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헝클어뜨리며 침대에 다가갔다. 해영은 잠이 많았다. 헤어드라이어 소리에도 깨지 않고 아까 눕혔던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건우는 그의 옆자리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협탁 위에 놓고 충전시켰다. 그리고 스탠드를 끄고 자리에 누우려는 찰나, 제 것 옆에 있던 해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밝아진 액정에 띄워진 낯선 이름으로 무심코 시선이 향했다.
‘안의준 팀장님’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짧은 진동이 여러 번 울리고, 한 줄짜리 메시지가 연달아 쌓였다. 맨 윗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몇 시간 전에 온 메시지였다. 해영이 깨어 있었을 시간인데도 쌓인 채 둔 걸 보면 일부러 읽지 않은 듯했다. 그 한 통 외에는 모두 방금 도착한 메시지였다.
[잘 들어갔어요? ^^]
[아까 일은 사과드릴게요.]
[괜히 이야기해서 해영 씨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네요.]
[제가 했던 말은 잊고 내일 웃으면서 봅시다.]
건우는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해영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우는 그걸 도로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기다렸지만 휴대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나 팀장님이 태워다 주신대서 타고 갈게 ㅠㅠ]
오후에 해영이 제게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팀장이라기에, 결혼도 하고 애도 둘이나 있는 해영의 팀 여자 팀장인 줄 알았더니. 건우가 굳은 낯으로 곤히 잠든 해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속이 답답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해영을 깨워 따져 묻고 싶었으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참았다. 이 성질머리 때문에 해영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적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믿기로 약속했으니 성급하게 굴지 말아야 했다. 해영도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생기면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기로 했고, 또 오늘은 제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말할 기회도 없었으니까. 건우는 조금 전에 비해 차분해진 속을 다시금 누르며 해영의 옆에 몸을 뉘었다.
제 품에 딱 맞는 몸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그러자 해영이 제 팔 안에서 꼼질대며 작게 칭얼거렸다. 고개를 숙여 뺨에 입을 맞추니 잠결에도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건우는 그제야 안정을 찾고 잠자리에 들었다.
***
다음 날, 해영은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머리를 굴렸다. 언제 말하지.
의준이 건우와 제 사이를 눈치챈 건 출퇴근길에 함께 있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번에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그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주는 데 한몫했겠지만, 매일같이 건우의 차를 타고 출퇴근한 걸 본 게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해영은 어제 홀로 집에서 고민한 끝에, 건우에게 더 이상 데려다주거나 데리러 오지 말라는 말을 꺼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싫다고 할 텐데. 건우 성격상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 이유를 말할 수도 없었다. 회사 사람에게 들켰다고 말하면 건우가 분명 ‘누구에게’인지를 물어볼 것이고,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는 말로 얼버무리려니 여태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이러는 걸 의심부터 할 것이다. 결국 해영은 한 번 더 건우의 시험 기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시험이 끝나면 의준의 이야기도 꺼내야 하니, 그때 같이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다.
“건우야.”
건우가 제 부름에 이쪽을 보았다.
“어, 할 말이 있는데….”
“네.”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어도, 막상 거짓말을 하려니 긴장이 되었다. 해영은 제 앞에 놓인 숟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비친 건우의 자그마한 얼굴을 보고 겨우 이야기를 꺼냈다.
“그, 출퇴근 같이하는 거 있잖아. 나 데려다주는 거. 그거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
굴절로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표정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건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에 해영은 차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아 숟가락에 대고 말을 마저 이었다.
“너 시험 기간이고 하니까 바쁘잖아. 잠도 요즘 많이 못 자고…. 나까지 데려다주고 그러면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알았어요.”
“어?”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 몰랐던 해영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해영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건우의 얼굴을 살폈다. 제 제안이 마음에 안 들어 보이긴 했으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해영의 검질긴 시선을 느낀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으며 해영의 콧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아!’
“그만 보고 밥 먹어요, 얼른. 늦겠다.”
그의 말에 해영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헉, 정말 그 말대로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이었다. 해영이 식사하는 손에 속도를 더했다.
저를 배웅해 주는 건우의 모습은 차에서 현관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출근길이 낯설었다. 건우가 본가에 다녀올 일이 생기거나 밤새 과제를 한 날이면 종종 오늘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 빈도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람들 틈에 끼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있자니, 새삼 건우에게 고마워졌다.
운전이라도 배울까. 앞으로 쭉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하면 된다고, 굳이 배울 필요 없다고 말리기에 한 번 이야기 꺼낸 후로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제가 너무 건우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마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창밖으로 회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 중간에 끼어 있던 해영이 허겁지겁 틈을 비집고 움직였다. 잠시만요, 내릴게요. 그런 말을 반복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바깥 공기를 들이켜자 울렁거리고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퇴근하고 싶었다.
“해영 씨.”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해영이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저를 버스 타고 출근하게 한 원인이 제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버스 타고 왔어요?”
“네….”
“미안하게.”
그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여기 왜 계세요? 오늘 회의도 없는데….”
“응, 오늘 외근이라 가기 전에 김 팀장이랑 커피 한잔하기로 했거든요. 어제 하던 얘기가 아직 마무리가 안 돼서. 해영 씨도 같이 갈래요? 커피 사 줄게.”
“아니요.”
너무 바로 대답했나. 칼같이 거절한 해영이 입을 합 다물었다. 의준은 잠시 벙찐 얼굴을 하더니 이내 크게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회사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지나갔다. 해영은 모르는 사람인 척할까, 잠시 고민했다. 웃음을 멈춘 의준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그가 검지로 눈가를 쓱 닦고서 해영을 따라 회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싫은 티 너무 내는 거 아니에요? 상처받는데.”
의준이 해영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건드리며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해영이 난데없는 접촉에 그를 흘긋 노려보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이런 접촉 불편합니다. 하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요, 안 할게. 무서워 죽겠어.”
그는 무섭지도 않으면서 과장된 표정으로 양손을 들고 흔들며 말했다. 해영은 무시하고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제가 문을 잡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의준이 억 하고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무시했다. 얼른 퇴근해서 건우가 보고 싶었다.
***
“씨발….”
해영이 회사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건너편 도로에서 지켜보던 건우가 잇새로 욕설을 짓씹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이럴 때라고 해서 끊은 담배가 갑자기 생길 리 없었다. 건우는 빈손을 도로 꺼내 제 뒤통수를 짜증스럽게 헝클어뜨렸다.
해영과 함께 회사로 들어간 남자. 분명 어디서 본 낯이다 했더니, 일전에 해영과 함께 갔던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사람이었다. 그때도 분명 팀장이라고 했었지. 정황상 어제 해영을 집까지 데려다준 사람과 동일 인물인 듯했다. 저것 때문에 데려다주지 말라고 한 건가.
아침에 해영이 할 말이 있다고 말문을 텄을 때, 틀림없이 어제 저놈과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해영은 그 일에 대해서는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건우는 말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거짓말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해영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강박적으로 작은 일까지 빠짐없이 미주알고주알 제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해영이 제게 숨기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열이 오르는데, 그게 모르는 놈과 엮여 있다는 게 저를 더 돌게 했다. 해영에게 묻기 전에 확인부터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영이 원하는 대로 혼자 보내고 뒤를 따랐다. 제 딴에는 한 번 더 제동을 건 셈이었다. 밟은 게 브레이크가 아니라 액셀일 줄은 몰랐지.
조금 전 해영의 옆에서 있는 대로 치대던 놈을 떠올렸다. 해영은 뒤를 돌아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서 툭툭 건드리며 실없이 웃는 꼴이, 꼭 제가 과거에 해영에게 했던 모습을 연상시켜 기분이 더러웠다.
휴대폰을 들어 해영에게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응 방금 들어왔어]
[지각 안 했다 ㅠㅠ]
[아]
[택시 타고 편하게 왔어]
“택시는 무슨.”
데려다주지 않는 대신 택시 타고 가라는 말에 알겠다고 해 놓고선, 고민도 않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뒷모습을 봤을 땐 미행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편하게 회사까지 태워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영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 힘들어했다. 타인의 앞에서 큰 소리를 잘 내지 못해 불편함을 겪었던 적이 종종 있어서였다. 안 봐도 뻔하지. 분명 만원인 버스 안에서 앉지도 못하고 낑낑대다 겨우 빠져나왔을 것이다.
또 거짓말. 그래도 이번 거짓말은 어제 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건우는 오늘도 힘내라는 말로 적당히 답장을 했다. 엄지로 액정을 쓸어 지난 메시지를 훑다가, 창을 닫고 사진 앱을 열었다. 몇 없는 앨범 중에 하나를 클릭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해영의 메시지를 캡처해 분류해놓은 곳이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며 활자를 읽어내렸다. 군대 가기 전의 어느 날에 성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잘 나오지 않아 기분이 거지 같았던 자신에게 해영이 보내 준 장문의 위로, 입대 전날 보내 주었던 애정이 담긴 메시지, 그 안에 있을 때도 해영은 제가 불안해하는 기색이 보일 때마다 진심을 다해 저를 보듬었다. 한 장씩 넘기다, 가장 최근에 캡처한 이미지가 화면에 띄워졌다.
[너는 나한테 넘치는 사람이야]
얼른 졸업하고 싶다고 말했던 날이던가. 해영은 제가 지나가듯 뱉은 말 하나에도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알아채곤 했다.
그 짧은 메시지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 동안 속으로 외었다.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꽂아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
다행히 안의준은 점심시간 전에 돌아갔다. 팀원 중 유독 붙임성이 좋은 이 대리가 그에게 팀원들이랑 같이 점심 먹고 가시라고 권했을 땐, 해영은 먹지도 않은 점심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의준은 고민하다 이동 시간 때문에 안 될 것 같다면서 거절했다. 아마 이 자리에 그가 함께 앉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체했겠지.
해영은 편안한 얼굴로 앞에 놓인 순두부찌개를 한 숟가락 퍼 입에 넣었다. 맵다. 해영 씨는 매운 걸 잘 못 먹으니 백두부 찌개를 드시면 되겠다는 말에 오기가 생겨 매운 순두부찌개를 고른 게 화근이었다. 곧바로 물을 들이켰다. 얼얼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다시 숟가락을 가져다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미적대던 중, 옆자리 팀원 한 명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 대리님 반지….”
“아아, 며칠 전에 헤어졌어요.”
그녀의 반대편에 앉은 윤 대리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답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라 후련해서 괜찮아요. 바람피워서 헤어졌거든요.”
“네?”
듣고 있던 사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소리를 냈는지, 지레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그런 미친…. 언제부터요? 아니, 대리님 지난주에도 그분이랑 놀러 가시지 않았어요? 와….”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충분히 조심하려는 노력이 보였으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해영에게 들리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웃기죠? 저도 갑자기 뒤통수 맞은 거라 아직도 어이가 없다니까요. 완전 티도 안 나게 바람피웠어요. 머리가 그럴 때만 굴러가는지. 그러다 지가 먼저 고백하더라고요. 사실 다른 여자 있었다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개망신이라도 주고 왔어야 하는 건데. 아직도 후회 중이잖아요, 저.”
해영은 조용히 시선을 떨군 채 맨밥을 한 숟갈 퍼 입에 넣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면 엿듣고 있다는 게 표가 날 것 같아서였다. 사실 엿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는 거리이긴 했으나,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이제 와서 듣고 있는 티를 내기도 껄끄러웠다.
제 옆에 앉은 사원은 본인 일처럼 한참 화를 내며 기가 막혀 하다가 되물었다.
“근데 정말 아무런 낌새도 없었어요?”
“음, 지금 생각난 건데, 평소였으면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 했을 것들을 다 좋게좋게 넘어가긴 했어요. 제가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술 먹고 들어간다는 거나,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약속을 취소하거나 그런 것들이요. 신경 안 쓴다는 것처럼 별말 없이 넘어가더라고요. 이제 와서 보니까 그게 신호 같기도 하고.”
“진짜 못됐다. 그렇게 하면 누가 알아요? 오히려 배려해 주는구나, 하지. 바람피운 건 무슨 이유든 절대 용서 안 돼요. 잘 헤어지셨어요.”
헤어진 당사자는 되레 차분한데, 듣고 있던 사원이 더 씩씩대며 화를 냈다. 그러다 이야기의 말미에는 오늘 퇴근 후 같이 술 한잔해야겠다는 즉흥 약속까지 잡아 버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깔끔하게 매듭지어졌으나, 듣고 있던 해영은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아침, 데려다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별말 없이 수긍하던 건우가 떠오른 게 이유였다.
저 역시 그의 태도에 의문이 안 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화를 내 거나 기분 상해하는 것보단 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태평하게 생각했던 걸까. 왜 아무 말도 안 하느냐고 물어라도 봤어야 했나. 그러다 혹시라도, 조금 전 이야기 속 그 사람처럼 그런 이유로 넘어갔던 거라면.
결국 해영은 신경 쓰여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식사를 끝내고 팀원들과 다 같이 간 카페에서는 빨대의 포장을 벗기지도 않고 그대로 음료에 꽂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해영 씨, 어디 안 좋아요?”
“그러게. 오늘 컨디션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겉으로도 티가 났는지 주변에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해영은 잠이 모자라서 그런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괜찮다 답했다. 개인적인 일로 상관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퇴근 시간까지만 정신 차리자. 그렇게 있는 정신력, 없는 정신력 끌어모은 덕에 회사에서 실수하는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해영은 오늘따라 배는 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아직 건우가 돌아오지 않은 건지, 집이 조용했다. 해영이 힘없는 걸음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 두고 내내 손목에 채워져 있던 갈색 가죽 시계를 풀었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은 후 곧바로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씻을 힘도 없었다.
고요한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낮의 그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건우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의준과 있었던 일을 건우의 시험 기간만 끝나면 바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까 대화를 듣고 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 제게 마음이 식은 거라면 이럴 때 고백받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오히려 독이 아닐까.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잘됐다고, 그냥 그 사람한테 가버리라고 하면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속에서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하자. 해영은 옆으로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었다. 티비를 켜고 적당히 웃음소리가 들리는 프로그램이 나올 때까지 채널을 돌렸다. 버튼을 연신 눌러대던 해영의 엄지손가락이 뚝 멎었다. 마침 티비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해영이 예전에 즐겨 보던 연애 상담 프로그램이었다. 저게 아직도 하는구나.
연애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고민을 띄게 된다.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든 연애의 성질까지 다양하기는 쉽지 않다. 저 프로그램 역시 초반엔 이삼십 대 들에게 많은 공감을 자아내며 회가 거듭할수록 매번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지만, 그것도 일 년뿐이었다. 반복되는 비슷한 종류의 고민, 그리고 비슷비슷한 답변. 사람들은 흥미를 잃었다. 인기가 줄어듦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재방송 횟수도 줄어들었는지, 요즘 통 눈에 보이지 않기에 종영한 줄 알았는데.
해영은 리모컨을 내려놓고 쿠션을 품에 안았다. 화면 안에서 익숙한 남자 MC 한 명이 대본을 보며 말했다.
―20세부터 35세까지 커플들을 조사한 결과, 연애 감정의 유효 기간은 평균적으로 3년 내외라고 하는데요.
“사, 삼 년….”
해영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몇 달만 있으면 건우와 사귀게 된 지 딱 삼 년인데.
―그 기간쯤 되면 콩깍지가 벗겨지고,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죠. 물론 그보다 더 빠른 커플들도 많고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가 반대편에 앉은 여자 MC를 비췄다.
―맞아요. 제 주변에도 3년을 넘기냐, 못 넘기냐에 따라 장기적으로 사귀게 되는지 갈리는 것 같더라고요. 보통은 못 넘기고 헤어지는 커플이 많아요.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불안했다. 예전에는 사귀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단단하고 안정적일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대체로 그랬다. 그러나 건우가 좋아질수록, 이제는 그가 옆에 없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해질수록, 이 관계가 틀어졌을 때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약간의 균열만 보여도 지레 괴로웠다.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빛났다. 해영이 상체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액정 위에는 건우가 방금 보낸 메시지 두 건이 띄워져 있었다.
[오늘도 늦을 거 같아요]
[먼저 자요]
막연한 불안감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들을 증폭시켰다. 해영은 메시지를 읽지도, 답도 하지 않은 채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짧은 진동이 또 한 번 울렸다. 해영이 재차 휴대폰을 들었다.
[나 없다고 밥 거르지 말고]
그 뒤로 건우가 자주 쓰는, 갈색 곰돌이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게 엄한 표정으로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 있는 이모티콘이 도착했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안도한다. 어제 잠자리에서 저를 끌어안고 입 맞추던 것에도, 그리고 지금도. 코끝이 시큰거렸다. 왜 눈물이 날 거 같은 거야. 해영은 입꼬리를 아래로 쭉 끌어내려 울음을 참았다. 건우에게 답장을 보냈다.
[응 걱정 마]
불 꺼진 거실에서 혼자 꾹꾹 눌러쓴 짧은 답장이 꼭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
건우의 중간고사가 끝나는 금요일이 될 때까지, 둘은 제대로 된 대화는커녕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웠다. 아침에 잠깐, 그리고 저녁에는 해영이 늦게까지 깨어 있을 때 잠깐. 잘 때 빈틈없이 얽혀 자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겨우 채우곤 했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을 진작에 마무리하고 시계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해영이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해영이 이 정도로 칼같이 퇴근하는 걸 처음 본 팀원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해영은 가방을 제대로 메지도 못한 채 급하게 회사를 빠져나왔다. 드물게 버스가 아닌 택시를 잡아탔다. 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 금요일 퇴근길의 도로는 이미 만차였다. 상황을 보니 버스나 택시나 비슷하게 도착할 것 같았으나, 그래도 택시가 조금이라도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인 만큼 건우의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갈 계획이었다.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나. 자잘한 일로 다퉜던 다음 날 해영이 서프라이즈를 한답시고 반차를 낸 뒤 그의 학교 앞에서 몰래 기다린 적이 있었다. 마중을 나간 적은 종종 있었으나, 말도 없이 갔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침이랑 똑같이 무감한 얼굴로 학교를 빠져나오던 건우와 눈이 마주쳤을 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던 얼굴을 해영은 잊지 못한다.
오늘도 몰래 가서 놀라게 해 줘야지. 그리고 오랜만에 건우가 좋아하는 메뉴로 외식을 하면서 고생 많았다고, 수고했다고 이야기해 줄 것이다. 오늘만큼은 제 속에 여전히 풀리지 않고 묵혀 둔 의문이나 걱정거리는 조금 미뤄 두고, 좋은 말만 잔뜩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해영은 다짐했다.
그렇게 기대하며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다 보니, 택시는 어느새 학교 근처에 다다랐다. 어디에서 세워 주면 되느냐 묻는 택시 기사에게 해영은 학교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택시가 멈춰 서고 결제를 마친 해영이 문을 열고 내렸다. 해영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벌써 나간 건 아니겠지. 끝났냐고 연락이라도 해볼까. 해영은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기다리다가 안 나오면 그때 연락하자.
해영은 정문 옆,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건우를 놓칠까 봐 학교 안을 일 분에 한 번씩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멀리서 동기로 보이는 또래들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 나오는 건우가 보였다. 해영이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손을 반쯤 들다가 스르르 도로 내렸다.
건우가 그 무리 안에 속해 있는 모습이 질투가 날 만큼 어울렸다. 문득, 건우가 이야기했던 제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공감했다.
아무리 제가 과거에 걸어온 길이고, 건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해도, 그의 옆에서 그와 같은 고충을 느끼며 그와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이들보다 못하지 않을까. 그래서 건우도, 저와 있는 것보다 저 친구들과 있는 게 편하다고 느껴진 게 아닐까.
그때,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건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영은 하던 걱정을 접어놓고 그를 반기기 위해 손을 들었다. 웃어 주겠지. 왜 말도 안 하고 왔냐고 책하면서도 기뻐해 주겠지. 마침내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건우는 당황한 얼굴로 걸음까지 멈춰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먼 거리임에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해영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집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막연한 불안감이 서서히 실체를 갖춰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건우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정말 저와 헤어지고 싶기라도 한 걸까.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선을 떨구었다. 거의 뜀박질에 가까운 속도로 걷다가 뒤에서 저를 부르는 건우의 목소리에 다급하게 골목으로 방향을 꺾었다. 추스르지 못한 가방이 팔꿈치에서 덜렁거렸다. 해영은 무의식적으로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이기적이라 비난해도 놓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기 싫은데. 정말 싫은데….
“아!”
정신없이 바닥을 보고 걷던 해영은 옆에서 뛰어오던 사람과 부딪히며 몸이 돌아갔다. 가방을 치고 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해영의 팔이 뒤로 넘어갔다. 손에 꼭 쥐고 있던 반지가 함께 퉁겨졌다. 해영은 어깨의 통증도 잊고서 사색이 되어 몸을 숙였다.
“아, 안 돼….”
금속과 아스팔트가 부딪히는 소리를 따라 해영이 눈동자를 굴렸다. 주차되어 있는 차의 바퀴 사이로 반짝이는 것이 굴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해영은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바닥을 기었다. 더러운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는 시선 따위는 지금 해영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반지까지 잃어버린 걸 알면…. 해영이 차 아래를 손으로 더듬었다. 깊숙이 들어갔는지 잡히는 게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팔을 빼고 몸을 일으켜 차 뒤쪽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익숙한 손에 의해 왼팔이 붙들렸다.
“어디 가는데.”
건우가 잔뜩 굳은 얼굴로 낮게 물었다.
“잠깐만. 잠깐만….”
해영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뒤틀었다. 그러나 건우는 놓아주기는커녕 제 쪽으로 바짝 당기며 팔뚝을 잡고 있던 손을 훑어내려 해영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굵은 손가락이 빈틈없이 깍지를 껴온다. 안 돼. 해영이 아차 싶은 마음에 그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아….”
건우가 망연한 표정으로 내쳐진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해영이 뒤늦게 제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약지를 가렸으나, 이미 건우의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해 있었다.
지잉, 그때 해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짧게 멈추는 소리가 아니었다. 끈질기게 끊기지도 않고 계속되는 방해음에 해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안의준 팀장님.
액정에 뜬 이름을 본 해영이 죄지은 사람처럼 몸을 움찔 떨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건우를 살피다, 받지 않은 채 도로 집어넣었다.
“왜 안 받아요. 누군데.”
“그냥….”
해영이 얼버무리며 아랫입술을 가득 감쳐물고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와 제 사이의 공기가 따끔하게 제 피부 위를 찔러댄다.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하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다 행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두려움이 목구멍을 끝까지 틀어막았다. 변명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입을 다물고서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게 우스웠지만, 해영은 그런 마음이었다. 한참의 적막 끝에 건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해영의 안일한 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있는 힘껏 흔들었다.
“나랑 헤어지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건우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감정을 쏟아낼 것처럼 위태롭게 떨렸다. 잠깐의 침묵도 견디지 못한 건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헤어지고 싶냐고.”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것이었다.
“내가 너랑 왜 헤어지고 싶어 해…. 너야말로-.”
해영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나 그 미완성된 말로도 건우는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챘다. 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저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네가 나한테 질린 줄 알고….”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진짜.”
건우는 여전히 씩씩대면서도 해영의 팔에 매달려 있던 가방을 습관적으로 빼 들었다. 그리고 놓쳤던 손을 도로 잡아 해영을 품에 안았다. 해영이 아무 말 없이 그 안에 고개를 묻었다. 가지지 않아도 됐을 불안 때문인지, 건우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해영이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리고 그 위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건우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해영의 목덜미에 코끝을 비비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전 형이 저한테 뭐 숨길 때마다 불안해서 머리가 터질 거 같다고요.”
“…….”
“갑자기 회사 혼자 가겠다고 하더니 거기서 이상한 새끼랑 시시덕대고 있지를 않나, 반지도 안 끼고 있고. 그러니까 나쁜 생각밖에 안 들잖아요. 방금 전화 온 것도 그 사람이죠. 집 데려다줬다던 팀장인가 하는 새끼.”
“어, 어떻게 알았어…?”
해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건우가 그의 뺨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
“숨기지 말라니까.”
“…근데 왜 데려다주지 말라고 했을 때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난 그래서 네가 이제 나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고 무서워서….”
“믿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한 건데.”
건우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더니 멋쩍은 얼굴로 이마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사실 그날 못 참고 따라갔어요. 죄송해요.”
“회사에?”
“네.”
아까 말한 시시덕거렸다는 게 뭔가 했더니, 회사 앞에서 안 팀장과 투닥거렸던 걸 말한 거였구나. 사실 전혀 시시덕거리진 않았지만.
마침내 긴장이 풀린 해영이 빙긋 웃었다. 제 뒤를 몰래 따라왔다는 말에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였다.
“아…. 다행이다.”
해영이 낮게 중얼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반지는 왜 뺐어요?”
“아! 그건 떨어트려서…. 잠깐만. 여기 밑으로 들어갔는데.”
해영이 차 아래를 가리키며 몸을 숙이려는데, 건우가 그 어깨를 붙잡아 저지했다. 건우는 그제야 거뭇거뭇하게 더러워진 해영의 바지와 손바닥을 발견했다. 누군가 속을 쥐어짜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어, 내가 할게.”
“됐어요.”
망설임 없이 몸을 낮추는 건우를 해영이 다급하게 말렸으나, 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건우가 차 아래를 더듬었다. 몇 번 뒤지지도 않았는데 금방 반지를 찾아 손에 쥐고 일어났다. 그는 반지를 본인의 티셔츠 아랫자락으로 꼼꼼히 닦아 낸 뒤 해영의 왼손에 끼워 주었다. 해영의 시선이 돌아온 반지에 한 번, 건우의 옷으로 한 번 향했다.
“너 옷 더러워졌잖아.”
“괜찮아요.”
반지가 온전히 끼워지고도 건우는 제 손을 놓지 않았다. 더러운 손이 뭐가 좋다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건우의 눈이 이제야 안심된다는 듯 희미하게 휘어진다. 그 웃음을 보자 해영의 속이 쿵쿵 뛰었다. 해영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집에 가자.”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주변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둘만 남은 것 같은 감각만이 남았다. 건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내려다본다. 그 집요한 시선에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해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더 이상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해영이 몸을 돌렸다. 건우의 손을 당기며 급한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등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애써 무시했다.
***
현관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틀렸다.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던 차에, 뒤에서 단단한 팔이 해영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건우가 머리통에 쪽, 쪽, 연달아 입을 맞추며 저 대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곧바로 몸을 들인 건우가 조급하게 해영의 몸을 돌려세웠다. 입술이 맞물렸다. 해영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자 건우가 익숙하게 몸을 낮춰 온다. 쿵쿵 닮은 속도로 빠르게 뛰는 두 가슴팍이 빈틈없이 닿았다. 현관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신호 삼아 갈급하게 서로를 채웠다. 말캉한 입술을 가로지르고 들어온 젖은 살덩이가 여린 입안을 헤집었다. 허리를 안고 있던 건우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다. 해영이 몸을 잘게 떨었다. 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맨 살갗을 여유 없이 더듬으며 해영의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위로 지그시 누르자, 벌써부터 단단하게 크기를 키운 것이 마주 비벼졌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자극에 해영이 발끝을 들었다.
“으응….”
맞닿은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닌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갈 곳 없는 몸이 건우와 벽 사이에 짓눌렸다. 아래가 저릿했다. 잔뜩 열 오른 혀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질끈 감은 해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입을 맞췄지만, 할 때마다 버거웠다. 특히 오늘은 더 그랬다. 옷 하나 벗지 않았는데도 삽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건우가 한 손으로 제 뺨을 감싸 쥐고 움푹 들어간 곳을 은근하게 눌렀다. 입을 더 벌려 달라는 뜻이었다.
해영이 턱을 바들대며 벌렸다. 양껏 크게 벌려도 원체 입이 작아, 건우의 욕구를 모조리 받아내기엔 무리였다. 건우는 미간을 구기며 그 좁아터진 공간 안에서 진득하게 혀를 얽었다. 비비면 비빌수록 갈증이 났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끙끙거리는 소리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건우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해영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쉰다. 천천히 키스할 땐 코로도 곧잘 숨을 쉬더니, 조금만 욕심을 부려도 따라오지 못하고 버거워했다. 그 모습에 죄책감이나 미안함보다 음습한 욕구가 먼저 치미는데, 이게 병이 아니면 뭘까.
건우는 잔뜩 긴장해 움찔대는 해영의 목울대 위에 입을 맞추며 코끝을 비볐다. 훅 들어오는 살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렇게 진한 스킨십은 거의 일주일 만이었다. 이게 필요했다. 해영이 제 옆에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제 품에 안고, 물고, 빠짐없이 입을 맞추는 이 행위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해영을 제 안에 가두고, 그를 옥죄고자 하는 마음이 결코 그에게 도움되지 않는 욕망이라는 걸 알아도. 그가 제게 아주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고 멀어지려고 할 때마다 그런 욕심이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올랐다. 해영에게는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보여달라 해놓고서 정작 자신은 가장 주된 욕구를 숨기고 있었다. 이걸 모조리 내보이면 해영은 어떤 표정을 할까. 도망가고 싶어 하려나.
그러고 싶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었다.
해영의 곧은 빗장뼈 위를 혀를 내어 핥았다. 머리 위에서 달뜬 숨이 흩어진다. 건우가 해영의 다리 한쪽을 잡아 들고 몸을 더 붙였다. 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해영의 둔부를 움켜쥐었다.
“흐으…. 잠, 잠깐만….”
해영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다급하게 제지하더니 건우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고 꽉 껴안았다. 건우가 동작을 멈추었다. 해영은 속도를 맞추기 힘들 때나 지나치게 정신이 없을 때 이렇게 무작정 안겼다. 그러면 건우는 묘한 배덕 감이 들어 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해영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거 하려고 집에 가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건우의 말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해영의 다리를 도로 내려놓고 제 어깨에 이마를 꾹 누르고 버티는 머리통에 대고 쪽, 쪽 짧게 입을 맞췄다.
“그건 맞는데.”
“응.”
“나 지금 너무 더러워서….”
“상관없는데.”
“안 돼, 싫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해영은 원망스러울 만큼 단호했다.
“그럼 같이 씻을까요?”
습관처럼 뱉은 말이었다. 해영은 관계 후 몸에 힘이 다 빠졌을 때가 아니고선 같이 씻는 것을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한 번만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기회를 엿보며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럴 때마다 해영은 기겁을 하고 눈에 띄게 싫은 티를 내었다. 해영의 성격상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이어지니 건우 역시 입으로는 같이 씻자 물어도 속으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해영의 얼굴에 전에 없이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내비쳤다. 그러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건우는 반응하는 것도 잊고서 멍하니 해영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해영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싫으면 말아.”
참다못한 해영이 뚱한 얼굴로 말을 내뱉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토라진 뒤통수를 바라보던 건우가 제 티셔츠 아랫단을 잡아 올려 단번에 벗어 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가 해영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제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아!”
놀란 해영이 결박하듯 허리에 둘러진 팔을 붙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건우가 해영의 몸을 돌려세웠다. 이마에, 입술에, 뺨에. 보이는 곳곳에 입을 맞추면서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마침내 하얀 몸이 드러났다. 밝은 조명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난 살갗에 해영이 무의식적으로 양팔을 엇갈려 몸을 가렸다. 서로의 몸이라면 이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거리낌 없는 사이가 되었어도 해영은 여전히 부끄러웠다.
건우가 그 손목을 잡아 제 어깨 너머로 가져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귓바퀴를 이로 잘근 깨물자, 해영이 작게 웃었다. 건우는 제 품에 안겨 오는 해영의 몸을 살짝 들어 제 발등 위에 올렸다. 아침잠이 많은 해영이 일어나기 힘들어할 때마다 해 주던 짓이었다. 그대로 욕실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떨어질세라 맨 가슴팍을 바짝 마주 댄 해영이 재밌는지 실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 숨결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해영이 말캉한 입술을 살짝 벌려 건우의 어깨 위에 느른하게 지분댔다. 그사이 욕실에 다다른 건우가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같이 씻자는 말이 그저 구실일 뿐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물을 끼얹고 거품을 바르는 건우의 손길에 본래의 목적 따위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 과정 또한 전희의 하나였다. 거품을 낸 샤워볼이 유난히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 손길에 해영이 신음하며 몸을 비틀자, 건우는 되레 씻겨 주는 거에도 흥분하는 거냐며 놀려댔다.
그리고 이어진 키스와 애무는 그보다 훨씬 정신을 쏙 빼놓게 했는데, 해영이 꼭 눌러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이미 거울을 마주 본 채였다.
해영은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제 뒤에 선 건우가 구멍 안쪽을 넓히던 손가락으로 느끼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해영이 세면대를 붙들고 고개를 내저었다. 굵은 손가락 한 개로 좁은 입구를 비집던 건우가 이내 한 개를 더 밀어 넣었다. 겨우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다리가 부들부들 위태롭게 떨렸다.
“하, 으….”
좁은 욕실 내부에 찔꺽거리는 습한 소리가 가득 울렸다. 축축한 공기가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마치 작은 바늘로 살 표면을 자잘하게 찔러대는 것처럼 따끔하기도, 날카롭기도 한 감각이었다.
“흐읏! 아, 건우야, 그, 그만….”
어느새 세 개가 된 손가락이 여린 내벽을 찔러온다. 건우가 해영의 가슴팍을 매만지던 손을 올려 해영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해영이 젖은 눈으로 거울 너머 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도 저 못지않게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건우가 거울을 통해 해영과 눈을 맞추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예쁘다.”
해영은 그제야 용기 내어 제 모습을 눈에 담았다. 발갛게 열이 오른 뺨도, 짓무르고 부은 눈가도, 흥분으로 꼿꼿하게 고개를 든 아래도. 어느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게 없었다. 해영이 못 참고 다시 눈을 내리감은 채 도리질했다.
아쉽다는 듯 코끝으로 웃은 건우가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고 해영의 몸을 마주 보도록 돌렸다.
“이제 됐어요?”
해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선 그에게 다시 달은 몸을 붙였다. 건우는 그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곧바로 입술을 붙였다. 살짝 부은 해영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다정하게 키스하며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조금 전의 행위로 열이 바짝 오른 맨 살갗이 빈틈없이 맞붙는다. 해영이 물을 줄줄 흘릴 만큼 흥분한 제 성기를 저도 모르게 건우의 허벅지에 대고 비볐다. 겹쳐진 입술 사이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건우가 해영의 양팔을 제 목 뒤로 넘기고 해영을 번쩍 들어 안았다. 이전에 몇 번 해 본 자세라고 해영이 익숙하게 건우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떼어지는 법이 없었다. 건우는 해영의 둔부를 움켜쥐고 양쪽으로 한껏 벌리며 그 사이에 제 것을 문질렀다. 해영의 몸이 기대감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부르르 떨렸다. 건우가 해영의 허리를 천천히 잡아 내렸다.
“흐….”
단단한 귀두가 몇 번을 쑤셔도 여전히 비좁은 구멍을 꾹 눌렀다. 해영이 입술을 떼고 건우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버텼다. 건우는 해영의 양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고 성기를 느리게 밀어 올렸다. 내벽의 주름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오랜만의 관계였다.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음경을 쥐어짜는 느낌에 건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해영의 귓바퀴에 입을 맞추며 성기를 끝까지 치받았다.
“하윽…!”
해영이 입술을 벌리고 숨을 토해냈다. 건우는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해영의 작은 등이 보였다. 곧은 척추가 툭 불거져 오르내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가학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건우는 그 등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제 것을 반쯤 빼냈다.
“으응….”
연한 속살이 바깥으로 밀려 나가는 느낌에 해영이 다급하게 안겨들었다. 건우가 그를 단단히 붙들어 안고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 때마다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절정을 부추겼다. 순간, 치밀어 오른 사정감에 해영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건우는 그 몸을 놓치지 않았다.
“잠, 잠깐만…. 흐윽, 아!”
해영이 다급하게 애원했다. 이미 삽입 전부터 오랜 전희로 한계까지 흥분이 차올라 있던 상태였다. 허릿짓에 맞춰 빈틈없이 짓눌리고 비벼지던 성기 끝에서 말릴 새도 없이 백탁액이 건우의 상체에 여러 차례 쏘아졌다. 물기와 정액이 뒤섞여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해영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몸이 사정의 여운으로 잘게 떨렸다. 건우는 그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그 위에 입술을 지분대다 그대로 욕실을 나섰다.
아래는 여전히 삽입된 채였다. 걸을 때마다 들썩이며 깊숙이 파고드는 성기에 해영의 입에서 신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건우가 푹신한 침대 위에 해영을 천천히 눕혔다. 제 것은 아직 사정하지 못해 단단하게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여린 속살을 들쑤시고, 깊숙이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건우는 해영과 눈을 맞추고, 매달려 있느라 잔뜩 경직된 허벅지를 쓰다듬고 주무르는 걸 택했다.
오늘 제가 느꼈던 조급함보다, 해영이 제 앞에 있고, 제 품에 있고, 이렇게. 버거워하면서도 꿋꿋하게 저를 받아주고 웃어주는 다정함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을 내려 해영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 해영이 붉어진 눈매를 잔잔히 휘어 웃으며 제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진짜 형 없으면 안 돼요. 알죠.”
“응….”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 안아 주세요.”
건우의 말 한마디에 해영이 곧바로 팔을 뻗었다. 끌어안기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등을 겨우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가슴팍이 맞붙고,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건우가 무게를 실어 안겨들었다. 해영은 그 답답함이 싫지 않았다. 저를 원하고 있다는 감각이. 단단한 팔 안에 갇혀 그에게 속해 있다는 정신적인 쾌감이 제 안에서 넘실댔다. 제 목덜미에 건우가 코끝을 비볐다. 해영도 똑같이 따라 하자, 그가 작게 웃는 게 어깨 위로 느껴졌다.
“아….”
해영의 허벅지를 문지르던 건우가 그의 다리를 양옆으로 넓게 벌리고 성기를 재차 밀어 넣었다. 한 번의 사정으로 말랑하게 풀어진 속살이 서서히 벌어지는 느낌에 해영이 허리를 떨었다.
건우가 보이는 살갗 곳곳에 진득하게 입을 맞추며 천천히 왕복했다. 해영은 그 속도감이라곤 없는 느릿한 동작이 되레 괴롭게 느껴질 정도로 애가 타서, 이게 저를 배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짓궂게 굴기 위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피부 위에 내려앉는 가벼운 입맞춤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느껴졌다.
“흐으….”
커다란 성기가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배 속이 저릿했다. 해영의 몸이 열감기를 앓는 사람처럼 잔떨림으로 벌벌 떨렸다. 건우가 그런 해영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제 것을 꾹 밀어 올렸다.
“으응, 아….”
해영의 작은 입술이 신음과 함께 힘없이 벌어진다. 건우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 사이로 보였던 젖은 살덩이를 춥, 소리 나게 빨아 넘기며 허릿짓에 속도를 더했다.
“흑, 흐…. 빨리, 빨리….”
해영이 다급하게 요구했다. 갈증이 났다. 말로 모자라 건우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얽어 제 쪽으로 꾹 눌렀다. 흥분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통증인지, 아니면 쾌감인지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
건우가 무게를 실어 찍어 내렸다. 퍽, 퍽, 폭력적인 소리와 구멍 안쪽으로 찰박거리는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해영이 눈을 질끈 감고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욕실에서의 제 흔적 때문에 미끈거리는 복근 위에 예민한 성기 끝이 비벼졌다. 해영의 것이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움찔거렸다. 해영이 고개를 들어 건우의 입가에 제 입술을 문질렀다. 건우가 입을 벌려 깊게 키스했다.
“응, 읏! 흐, 아아….”
얼마 못 버티고 해영이 사정했다. 내벽 안쪽이 성기에 빈틈없이 달라붙어 쥐어짜듯 조여왔다. 마치 놓기 싫다는 것처럼. 건우가 잇새로 욕을 짓씹으며 허리를 거세게 쳐올렸다. 엉덩이와 골반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해영의 성기에서는 여전히 희고 묽은 액체가 픽, 픽 힘없이 쏘아지고 있었다. 절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몰아붙이는 것에 해영이 멈춰 달라 울며 애원했으나, 건우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품에 안고 그 안쪽에 제 것을 새겨 넣듯 추삽질을 이어 갈 뿐이었다.
“그, 그만…. 흐윽, 흐, 아….”
조금 전에 분명 사정을 마쳤음에도 계속해서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요의와 닮은 이 느낌을 해영은 모르지 않았다. 건우는 멈춰 줄 생각이 없는지 되레 아래로 손을 내려 해영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면서 해영의 안을 강하게 두드렸다. 해영이 고개를 저으며 몸부림을 쳐도 커다란 몸에 짓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몸이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아아, 아…!”
“윽, 하….”
콱, 성기를 한계까지 밀어 올린 건우가 해영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체향을 있는 대로 들이켜며 여린 살에 이를 박았다. 안쪽을 가득 채운 기둥이 박동했다. 곧이어 내벽 안쪽으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해영의 성기 끝에서도 투명하고 맑은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건우는 벌벌 떠는 해영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안고 소유욕 가득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우는 해영의 낯을 눈에 담았다. 안쪽에 제 모양대로 새기기라도 할 기세로 여전히 흉흉한 제 것을 꾹 짓눌렀다. 건우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해영의 성기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흐으….”
긴 사정 끝에 녹초가 된 해영이 몸을 축 늘어트렸다. 건우는 저만 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좋아서,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뺨을 혀를 내어 핥았다. 몸을 겹친 채로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고새 부은 눈가에도, 땀으로 젖은 이마에도, 붉어진 귓바퀴에도 쪽, 쪽, 정신없이 입술을 비볐다.
“가, 간지러워….”
해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건우의 얼굴을 밀어내는 손에 힘이 없었다. 건우는 그 손을 잡아 돌려 손바닥 위에도 입을 맞췄다.
“엄청 쌌네.”
건우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해영의 젖은 가슴팍을 느른하게 문지르며 실실 웃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는데, 맨날…. 나 씻을래. 비켜 줘.”
해영이 원망하는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어깨를 꾹꾹 밀어도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따가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
어차피 말을 들어줄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해영은 단념하고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건우의 후희는 날이 갈수록 점점 길고, 집요해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처음엔 입맞춤을 조금 오래 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사정한 뒤에도 한동안 성기를 빼지 않고 입이 닿는 곳이라면 모조리 물고 빨아댔다. 그렇게 전희인지 후희인지 모를 것들을 하다 보면 다시 불이 붙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
어김없이 제 등 아래로 손을 넣어 지분거리며 가슴팍에 입을 맞추고 있는 건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짧은 머리카락을 습관처럼 쓰다듬었다. 배 위로 그가 웃는 게 느껴졌다.
건우는 한참을 애무하고 나서야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에서 제 것을 천천히 빼냈다. 해영의 골반이 부르르 떨렸다. 안을 채우던 희뿌연 액체도 울컥하고 함께 흘러나왔다.
해영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아 욕실로 향했다. 조금 전에 사용한 덕에 기분 좋을 정도의 열기가 돌았다. 건우가 조심스럽게 해영을 욕조 틀에 앉혔다. 물을 틀어 알맞은 온도를 맞추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어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진짜 씻기만 해야 해…. 힘들어.”
“알겠어요.”
두 사람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겹쳐 앉았다. 건우는 눈앞의 젖은 목덜미를 보았다. 제 품에 기대앉은 몸에 팔을 감아 안고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앞에서 거품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작은 손이 보였다.
“그 팀장이라는 사람이랑 같이 하는 건 언제 끝나요?”
건우가 한 손으로 거품을 모아 해영의 손 위에 얹어 올리며 물었다.
“어…. 다음 달 초?”
아씨, 한참 남았네. 건우는 해영의 말에 얼굴을 한껏 구겼다.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때려치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가 참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눈치 없는 해영이 그를 피할 수 있도록 언질이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동요하지 않는 척 말을 꺼냈다.
“그 사람 분명 형한테 관심 있어요. 그러니까 딱 일 얘기만 하고, 어? 저번처럼 데려다준다고 수작 부려도 무시하고 관심 주지 마요.”
“…….”
해영은 답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관심 있는 거 아니라면서 부정부터 했을 텐데. 건우는 싸한 기분에 해영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뭔데.”
해영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눈도 맞추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더니 한참 뒤 열린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겨우 잠잠해졌던 건우의 속에 다시 불을 질렀다. 애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백한 그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혔다.
“근데 진짜 바로 거절했어. 네가 걱정하는 그런 거 없어.”
건우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본 해영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데려다주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해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예전의 일이 겹쳐졌다. 그의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피해를 볼까 봐 죽어라 피해 다녔던 일이.
“그 사람 말고는 모르죠?”
“응….”
“그럼 다시 데려다주게 해 줘요.”
해영은 마지못해 알겠다 답했다. 건우가 저런 눈을 할 때 말려 봤자 시간문제일 뿐, 결국엔 그의 고집대로 하게 된다는 걸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올 때도요. 불안해서 밖에 내놓을 수가 없어.”
“…알았어.”
“반지도 또 빼지 말고.”
“그건 진짜 실수로 그런 거라니까.”
가만히 대답하던 해영이 마지막 말에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제 할 말을 마저 이었다.
“반지 빼면 내가-.”
“아, 안 해.”
뒤에 올 말을 예측한 해영이 양손을 올려 귀를 막았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지긋지긋하게 들은 말이었다.
“엉덩이에 이름 쓴다고 했는데.”
“안 해, 안 해.”
해영이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건우의 얼굴 앞에다 엉덩이를 내어 주는 꼴이 되었다. 건우가 욕조 밖으로 나가려는 해영을 붙들고 엉덩이에 냅다 입을 맞췄다. 해영이 기겁하며 몸부림쳤다. 욕조 물이 출렁이며 바깥으로 넘쳐 흘렀다. 건우는 말랑한 살갗 위에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잇자국으로 건우의 이름이 온전히 새겨지고 나서야 해영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