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좆같은 회사.
건우는 삼십 분째 제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는 늙은 팀장의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저번보다 더 준 것 같기도 하고. 머리털 빠지도록 구르고 있는 사람은 저인데, 겉보기엔 팀장 혼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헤쳐나간 얼굴이었다.
“건우 씨는 생각 없이 일을 하나?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하고 있었어?”
니가 하라고 했잖아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지난번에 비슷한 말을 했다가 한 시간으로 끝날 걸 하루 종일 시달린 적이 있었다.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이것까지 일일이 다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냔 말이야. 이 정도는 건우 씨가 알아서 판단하고 해야 할 거 아니야. 시키는 대로만 할 거면 사람을 왜 쓰나? 기계를 쓰지. 그래, 안 그래.”
시키는 대로 해서 결과가 좋으면 지 덕분이고, 안 좋으면 그 정도도 스스로 결정 못 하느냐고 까이고. 그렇다고 중간에 의견 내는 걸 곱게 듣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연차를 들먹이며 지금 본인을 가르치려 드냐고 괄괄 화를 냈다.
“쯧, 요즘 젊은 애들은 능동적이지가 않아. 나 때는 이런 식으로 하면 바로 잘렸어.”
새삼 회사 일로 힘든 내색 한번 한 적 없는 해영이 떠올랐다. 여기와는 다른 회사이고 이 정도로 미친 상사가 아주 흔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해영은 그걸 다 참으면서 몇 년째 버티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고작 몇 개월 가지고 때려치우고 싶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일 나와서 수습하세요.”
“팀장님, 내일은-.”
“왜. 시정하겠다면서 주말에 나오는 건 또 싫어? 일 저질러놓고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면 건우 씨가 싼 똥은 누가 치웁니까, 누가.”
건우는 팀장 앞에 놓인 대추차를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닙니다. 출근하겠습니다.”
팀장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 보라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고개를 까딱 숙인 건우가 등을 돌려 파티션 밖으로 나갔다.
좆같은 회사.
어김없이 야근을 하고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중간중간에 문 안쪽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섞여 들렸다. 건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현관문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제 품으로 해영이 뛰어들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리웠던 냄새가 제 속을 채웠다. 건우는 그제야 꽉 막혀 있던 숨구멍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해영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살 내음을 들이켜며 뒤뚱뒤뚱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힘들었지.”
그런 건우의 등을 해영이 달래듯 도닥였다. 그 손길에 종일 더러웠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투정 부리고 싶었던 마음도 함께.
“아니에요.”
해영이 지금처럼 본인이 고생하는 것보다 제가 힘든 걸 우선으로 여겨 줄 때마다, 건우의 속에선 고마움과 미안함이 공존했다. 절대로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버스 탔어요?”
“어? 어….”
“택시 타라니까. 피곤하게.”
“아니야, 별로 안 피곤했어. 오늘은 앉아서 왔어.”
꼬박꼬박 정시에 보내주는 해영의 회사와 달리, 건우가 다니는 곳은 야근이 잦았다. 시간이 맞지 않아 오늘처럼 해영의 퇴근길에 데리러 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일이 몇 달 반복되고 나니 이제 본인이 데리러 갈 차례라고 생각한 해영이 건우 몰래 운전 학원을 끊었고, 어찌어찌 면허는 취득했으나 며칠 못 가 장롱 면허가 되고 말았다. 해영은 겁이 많았다. 몇 번 작은 사고가 날 뻔한 후로 운전대 잡는 걸 포기했다. 건우도 그가 운전할 때마다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기꺼운 결정이었다.
“얼굴 살이 쏙 빠졌어….”
해영이 손을 뻗어 건우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거기는 애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영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제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기라도 했다면. 함께 살다 보니 숨기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게 있었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라도, 건우가 회사에서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정도는 해영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건우 성격상 회사 생활이 어느 정도 안 맞을 거라는 건 예상하긴 했지만, 직접 그 모습을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그니까.”
“속상해 죽겠어.”
건우가 자기 일처럼 화를 내 주는 해영의 뺨에 웃으며 입을 맞췄다. 이거면 충분했다.
“근데 무슨 냄새예요?”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몸을 놓아주고 집 안으로 들어가던 중, 아까부터 묘하게 코끝을 찌르던 탄 냄새에 건우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응, 너 저녁 못 먹었다고 해서 내가 김치찌개 만들었어.”
“…….”
해영이 뿌듯한 얼굴로 주방을 향해 뛰어갔다. 그 뒤통수를 건우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보진 않았지만 확실한 건 온전한 김치찌개 냄새는 아니었다.
“배고프겠다. 얼른 씻고 나와.”
“네….”
건우는 차마 주방 쪽은 보지도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꾸역꾸역 애정으로 밥을 넘겼다. 식사 후 둘째 누나와 짧게 통화를 마친 건우가 침실로 들어왔다. 먼저 누워 있던 해영이 이불을 들추고 매트리스 위를 툭툭 두드렸다. 건우가 웃으며 스탠드를 끄고 옆자리에 누워 해영의 목 아래로 팔을 밀어 넣었다. 해영이 몸을 꿈틀대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건우는 그 머리통 위에 습관처럼 입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내일 아침에 잠깐 회사 나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어? 주, 주말인데?”
“잠깐 가는 거라 괜찮아요.”
주말에 출근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예상대로 해영의 얼굴에 겨우 가라앉았던 근심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가족이랑 밥 먹는 거는? 내일 아니었어?”
“응, 회사 끝나고 밥 먹고 오면 한 서너 시쯤 될 거 같아요.”
하필이면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이번에 결혼한 첫째 누나는 예전부터 불필요한 과정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누나가 결혼식을 생략하고 혼인신고만 하겠다 이야기를 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식을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가족끼리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고, 그날이 내일이었다.
“그런데 첫째 누나 결혼 안 하신다고 하지 않았어?”
“안 했다기보다는 그동안 누나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어떤 기준?”
해영이 본 건우의 첫째 누나는 무서우리만치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인생에서 커리어를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고 이야기할 만큼, 성과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런 멋있는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결혼 상대를 고르는지, 해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분명 엄청 까다롭겠지?
건우는 해영에게 팔베개를 하고 있는 팔을 안으로 접어 해영의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조건들을 나열했다.
“친구 없고, 직업 없고, 집안일 잘하고, 착하고, 외모 준수한.”
순식간에 모두 접힌 손을 해영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어요.”
“그럼 그분은 치, 친구 없고…. 그런 분인 거야?”
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아직 안 만나 봐서 모르겠는데, 누나들 말로는 어디서 만들어 오기라도 한 것처럼 딱 그런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어쩌다가 누나랑….”
건우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해영은 머릿속으로 제가 아는 건우의 첫째 누나와 그가 말해 준 정보를 토대로 창조한 남편분을 함께 세워 보았다. 어떤 방향으로 상상해도 그다지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해영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그렸던 것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다음 날, 해영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느릿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말이라고 어찌나 오래 잤는지, 시계를 안 보고 몸 상태만으로도 지금 시간을 어림잡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열 시간 넘게 잔 것 같은데. 해영이 협탁 위에 둔 휴대폰을 가져와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 액정 속 숫자가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탁 위에는 건우가 해 놓은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계란 두 개가 올려진 떡볶이. 주말마다 종종 해 주던 것이었다. 해영은 의자를 빼 앉으며 가라앉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같은 날은 좀 그냥 가지….
둘 다 출근하는 날도 아니고 혼자 주말에 출근까지 하면서 집에서 빈둥거릴 제 아침까지 챙겨 놓고 나간 건우가 미웠다. 잠결에 어렴풋이 다녀오겠다고 속삭이던 게 기억이 났다. 인사라도 해 줄걸. 잠에 취해 대답조차 못 해 줬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속을 아프게 찔러댔다.
포크를 들고 떡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만든 지 꽤 지났는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잘 참고 있던 것이 울컥 치밀었다. 씹어도 씹어도 떡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해영은 결국 포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건우를 위해 제가 무엇을 해 주고 있는지 생각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건우가 제게 쏟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요즘만큼 부담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저를 한없이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집의 층수를 누르려던 손을 잠시 멈칫하고 일 층을 눌렀다. 일 층까지 올라가는 짧은 시간에 건우는 재킷 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손에 쥐었다.
어떻게 끊은 건데. 삼 년 넘게 입에도 대지 않았던 것을 회사에 나간 지 한 달 만에 도로 입에 물었다. 해영이 보는 앞에서 피운 적은 없으나, 분명 냄새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서 셋째 누나, 윤서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회사는 어때.’
그 말에 건우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뭔데, 이거. 시비야?’
제가 들어갔다는 회사 이름을 듣자마자 기함을 하던 사람이 윤서였다. 알고 보니 그녀의 전 남자친구가 다녔던 직장이라고 했다. 귀에 피가 날 정도로 회사 욕을 하다가 결국 퇴사를 했다고.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떠냐고 물어오니, 듣는 입장에서는 약이라도 올리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니, 안 옮기냐고. 욕을 그렇게 하고서도 계속 다니고 있길래 물어본 거다.’
저라고 퇴사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주변 친구들이나 누나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회사만큼 정신 나간 곳은 많지 않다고 했으니 여기보다 좋은 조건에, 덜 힘든 곳을 찾기는 아마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건우가 그 선택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쪽팔리잖아.’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형은 몇 년 동안 쉬지도 않고 다니면서 나한테 힘들다는 말 한번 한 적 없거든.’
티를 안 냈다고 해서 정말 힘든 일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해영은 혼자서 견디고 해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와 제 사이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에는 전보다 많이 익숙해진 듯 보였으나, 여전히 밖에서의 불만이나 안 좋았던 일들을 털어놓는 건 어려워했다. 억지로 몰아붙여서까지 말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기다리면 언젠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제가 그 정도로 미덥진 않은 건지, 아니면 혼자 감정을 삭이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해영은 언제나 제게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려 애를 썼다.
그런 그의 앞에서 일 년도 못 버티고 그만두는 모습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갔을 때, 멀리서 집에 있어야 할 해영이 낑낑대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직 저를 보지는 못한 모양인지, 해영은 양손으로 장바구니 손잡이를 쥐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쏟으며 위태롭게 걸어왔다.
“…안 돼.”
건우가 나직이 탄식하며 담배를 재빨리 비벼 껐다. 그리고 다급하게 뛰어가 장바구니를 뺏어 들었다. 도둑이라도 맞은 줄 알고 놀란 해영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 눈이 건우를 보자마자 둥글게 휘었다.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근데 이건 뭐예요?”
건우가 손잡이를 벌려 불안한 얼굴로 장바구니 안을 살폈다.
“응, 예전에 나 갈비찜 실패한 적 있잖아. 근데 아까 티비에 갈비찜 만드는 게 나왔거든? 그거 보니까 내가 왜 실패했는지를 알았어. 너 오늘 해 주려고. 이번에는 진짜 실패 안 해.”
해영의 말에 겨우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재작년 제 생일이었나. 해영이 깜짝 생일상을 준비한다고 둘째 누나에게 부탁해 저를 반나절 동안 밖으로 빼돌려 놓은 적이 있었다. 누나가 하도 이상하게 굴기에 끈질기게 캐물었더니 곤란한 얼굴로 자백을 했다. 건우는 그 길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얼굴로 쏟아지던 잿빛 연기가 다시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했다.
“어제 김치찌개도 괜찮았지? 너 두 그릇이나 먹었잖아.”
그건 해영이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의 몫까지 해치우느라 그런 거였고.
“같이 해요, 그럼.”
건우의 제안에 해영이 눈을 세모나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싫어.”
“…….”
“너 같이 하자고 하고 맨날 혼자서 다 하잖아….”
“이번엔 진짜 안 그럴게요.”
그 말에도 해영은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건우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드라마에서 같이 요리하는 거 보고 재밌어 보인다고 형이 그랬잖아요. 그거 해요.”
“...진짜지?”
“응.”
해영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수긍했다.
“내가 쉐, 쉐프고 너는 보조만 하는 거야.”
“네.”
그러면서도 의심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는지, 집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중에도 끊임없이 확인을 해댔다.
***
건우는 꾹 다물린 해영의 입술 앞으로 먹음직스러운 갈비찜 한 점을 가져다 댔다. 해영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 부드럽고 짭조름한 갈비찜을 씹으면서도 해영의 표정은 당최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건우는 그 뚱한 얼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해영의 앞접시를 가져와 큼지막한 고기 다섯 점을 올려 그의 앞에 건네주었다.
“표정이 왜 그러지. 맛이 없나.”
그 말에 해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갈비찜은 맛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또 네가 다 했어.”
같이 하자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됐다. 주말까지 출근해 피곤할 건우를 위해서 맛있는 걸 해 주고 싶었는데. 어제 제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어 주는 그를 보고, 제가 건우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찾았다고 생각했다. 요리에도 막 재미를 붙이려던 참이었고. 건우에 비하면 아직은 많이 어설프고 느릴지 몰라도 하다 보면 늘겠지 생각했다. 같이 하자고 해 놓고선. 해영은 분한 얼굴로 갈비찜을 한 점 더 입에 쑤셔 넣었다.
“형도 많이 했잖아요.”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장도 형이 봤고, 야채도 형이 씻었잖아요. 재료 씻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데요. 그리고 마지막에 갈비찜 타는지 안 타는지 확인하는 것도 형이 했죠. 그게 진짜로 중요한 역할이거든요. 거기서 망하면 먹지도 못해요.”
건우가 저를 달래기 위해 이것저것 덧붙인 말에도 해영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해 봤자, 제가 한 일은 야채를 씻는 것과 냄비 속을 들여다본 게 전부였다.
해영이 물이 담긴 유리잔을 들어 입을 댔다. 그리고 이 답답한 마음이 함께 씻겨 내려가길 바라면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 화내 봤자 뭐 해. 시원한 것으로 속을 환기하고 나니 한 차례 진정이 되었다. 어차피 건우를 위해 해 주려던 것이다. 여기서 그와 다투기라도 한다면 본래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 버린다. 분명 내일이 되면 후회도 하겠지.
“다음에는 내가 해 줄 거야.”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해영이 말했다. 작게 웃은 건우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큰누나가 다음 달에 집들이한다고 형도 같이 오래요.”
“나?”
“응. 그때 부모님 여행 보내드릴 예정이라 가족들만 모이는 거 아니에요. 차윤서 친구도 오기로 했고. 불편하면 안 가도 괜찮아요.”
해영이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연애를 하다 보니 건우의 가족들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나들까지도 저를 가족의 일원처럼 대해 주셨다. 처음엔 건우와 사귀는 것이 그분들께 죄책감이 들어 마주하기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누나들이 건우와 제 관계를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은 뒤로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걸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해 주셨던 과거가 해영에게 용기가 되었다.
“갈래. 결혼하신 거 축하도 드리고 싶고….”
“가서 같이 맛있는 거나 많이 먹고 와요.”
“응.”
건우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
손님맞이를 위해 반쯤 열려 있는 현관문 안쪽에서는 벌써 시끌시끌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건우가 해영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해영이 앞장서서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이쪽을 발견한 건 둘째 누나, 차민서였다.
“해영아!”
그녀가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로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잘 지내셨어요?”
“응, 잘 지냈지.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 아니야? 얼굴 까먹을 뻔했어.”
민서의 요란한 환영에 히죽 웃던 해영이 손에 든 기다란 쇼핑백 네 개를 내밀었다.
“아, 이거….”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또 사 왔어. 와인이야?”
민서가 쇼핑백을 받아 들고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샴페인 한 병과 와인 세 병이 들어 있었다.
“언니, 언니. 해영이 센스 있는 것 좀 봐. 우리 와인 모자란 건 또 어떻게 알고 사 왔어?”
“아, 제가 고른 게 아니고 건우가….”
해영이 다급하게 정정했으나, 민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해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들고 오느라 무거웠겠다. 얼른 들어와.”
“나는 안 보여?”
그제야 민서의 시선이 해영의 등 뒤로 향했다.
“왔니.”
“어.”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친해 보이는 모습에 해영이 웃었다.
첫째 누나 차현서와도 인사를 하고 짧게 집 구경을 했다. 신혼부부가 살기에는 조금 넓은 크기였으나, 어두운 원목 가구와 곳곳에 식물까지 더해지니 비어 보이진 않았다. 왠지 차현서의 취향 같지 않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편의 취향에 맞췄다고 했다.
구경을 마친 뒤 주방으로 향하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식탁 위를 본 해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사거나 시키지 않고 남편분 혼자서 소소하게 준비하신다고 들었는데. ‘소소하다’는 단어의 정의가 제가 모르는 사이에 바뀌기라도 한 건지, 식탁에는 호텔 뷔페라도 털어 온 것처럼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빈틈없이 올려져 있었다.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었다. 하나씩 맛을 보면 볼수록 해영의 눈 크기가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해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하시던 일이 요리 관련된….”
“네? 하하. 아니에요.”
남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차현서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말했다.
“요리는 그냥 좋아해서 하다 보니까 이것저것 할 수 있게 됐어요. 어떻게, 입에 맞아요?”
“네! 너무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이건 좋아해서 하다 보니까 늘은 수준이 아니라는 말까지 하고 싶었지만, 너무 주접스러운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식사를 마치고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주인공인 신혼부부에게 사적인 질문들이 던져졌다. 이를테면 어떻게 만났냐거나,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같은 질문들이었다. 현서는 질린다는 얼굴로 답을 피하고 남자에게 넘겼다. 그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것까지 연애사를 줄줄 읊었다.
사내 연애를 무려 이 년이나 했다고 했다. 먼저 좋아한 것도, 고백을 한 것도 그였으나 정작 청혼은 차현서가 선수를 쳤다고 말했다.
“그때 제가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 고민할 정도로 힘든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며칠 쉬면서 생각해 보자, 하고 삼 일 정도 휴가를 냈는데 그때 팀장님이, 그러니까 누나가 집에 찾아온 거예요.”
와인을 한 모금 넘긴 남자가 마저 이야기를 이었다.
“저는 저 설득하러 온 줄 알았거든요. 남자 친구이기 전에 상사니까. 근데 갑자기 배고프다고 자기 저녁 좀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전 또 거기서 짜증도 못 내고 좋아하는 거 해다 주고 있고. 누나가 그거 먹더니 대뜸 회사 그만두고 자기 집에서 자기 밥이나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프러포즈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날을 회상하던 그가 피실피실 웃었다.
“아, 와인 떨어졌다. 더 가져올게요.”
남자가 빈 와인병을 두어 번 흔들더니 그걸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안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윤서가 현서에게 말했다.
“딱 언니 이상형 만났네.”
“이상형?”
“예전부터 말했잖아. 살림 잘하고, 직업 없고, 착하고. 또 뭐더라?”
“친구 없고, 외모 준수.”
건우가 차윤서의 말에 덧붙였다.
“맞아, 그거.”
윤서가 손뼉을 치며 건우의 대답에 반응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차현서가 바람 빠지듯 웃으며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보다는 그냥, 저 사람 힘들어하는 거 보기가 싫더라고.”
현서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 벙찐 얼굴을 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 전의 말이 의외라는 데에 공감할 것이다. 해영 역시 그랬다. 차현서는 이상보다 현실을, 공감보다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연애에 한해서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건우가 일전에 다섯 가지 조건에 관해 이야기를 했을 때도, 그런 기준을 처음 들어서 놀라긴 했어도 차현서답다고 생각을 했다.
“와인이 다 떨어져서 소주 가져왔는데.”
그사이 냉장고에서 소주 두 병을 꺼내 온 남자가 이것도 괜찮냐는 듯 공중에서 초록 병을 잘잘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술기운이 오른 건지, 남자의 뺨에 옅게 홍조가 번져 있었다. 해영은 그런 그를 바라보는 차현서의 애정 가득한 눈을 보았다. 어쩐지 보면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들어서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집들이는 열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파했다. 건우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대리 기사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해영과 건우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형, 다 왔어요.”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우가 해영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창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던 해영이 안전벨트를 풀며 상체를 떼어냈다.
“응.”
“안 잤어요? 조용해서 자는 줄 알았네.”
“아, 그냥.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이요?”
건우의 물음에 해영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한번 물꼬를 트면 틀림없이 다투게 될 주제였다.
“아니다. 말하지 마요.”
해영이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건우가 가로막았다. 그는 해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한 표정이었다.
“건우야.”
적막한 공기 속에서 해영은 말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건우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해영이 이어진 손을 내려다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도 네가 안 힘들었으면 좋겠어….”
머리 위에서 낮게 한숨이 흩어진다.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우리 그런 얘기 꺼내긴 아직 많이 이른 거 같아요. 아직 일 년도 안 됐잖아. 그리고 그 정도로 힘들지도 않고.”
건우가 손을 뒤집어 해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놀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다들 참고 다녀요.”
해영이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의 말대로 직장에 다니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나 압박감은 모두 어느 정도 감수하고 다닐 터였다. 그러나 건우는 거기에 더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해놓고 집안일까지 모두 혼자서 하려고 한다는 게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대학생일 때부터 그랬다. 밤새 과제를 한 날에도 꼬박꼬박 해영의 아침밥을 챙겨 주었다. 그때도 마음이 안 좋았는데, 안 해도 된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건우는 해영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를 대며 고집을 부렸다. 그 이유라면 지금은 혼자 독박을 쓸 필요가 없는데도, 건우는 여전히 제게 집안일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했다.
회사 하나 그만둔다고 해서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닌데 건우는 마치 제게 큰 민폐를 끼치는 것처럼 생각하니 해영은 답답하고 속이 상했다.
“…그러면 나도 집안일 같이 하게 해 줘.”
“그거는-.”
“하게 해 줘.”
해영이 눈에 힘을 주고 거듭 요구했다.
“알았어요. 뭐 하게 해 줄까.”
마음이 약해진 건우가 해영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해영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침마다 얼굴에 잠을 주렁주렁 달고 출근하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회사고 뭐고 그냥 더 재우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해영이 집안일까지 하겠다며 완고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당장 알겠다고 하지 않으면 최소 일주일은 삐쳐 있을 얼굴이었다.
“빨래 개는 거 형이 할래요?”
요리는 절대 안 되고, 청소는 허리가 아플 거고, 저 손에 쓰레기나 물이 묻게 하긴 싫으니까 분리수거와 설거지도 제쳐 두었다. 빨래 개는 것 정도는 티비 보면서 할 수도 있고, 금방 하는 거라 말하긴 했는데. 해영이 듣기에 애들 장난처럼 들린 모양인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너무 쉬운 거잖아.”
“조금씩 늘리면 되죠. 처음부터 갑자기 많이 하면 힘드니까.”
사실 일을 더 시킬 생각 따위 없었다. 달래기 위해 꾸며낸 말에 불과했다. 해영은 영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스스로 고생을 하겠다 자처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 맞지만, 그 모든 게 제가 힘든 걸 보기 싫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속이 벅차올랐다. 함께 한 지 몇 년이 지나도, 해영이 제게 애정을 보여줄 때마다 거르지도 않고 매번 새롭고 설레었다.
건우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해영의 머리통을 끌어다 옆머리에 쪽,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해영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마주 웃었다.
***
해영의 회사 앞에 차를 댄 건우가 룸미러를 살짝 내려 얼굴을 살폈다. 뺨에 선명하게 그어진 붉은 줄. 그 위를 검지로 매만지다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잘 보이는데.
룸미러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고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다. 낮에 회사에서의 일을 곱씹었다.
‘저, 건우 씨. 팀장님이 부르시는데….’
팀장이 제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오늘은 뭐를 잘못 처먹기라도 했는지 유독 더 지랄 맞았다. 파티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얼굴 위로 종이 뭉치가 날아왔다. 뺨의 상처는 거기에 베여서 생긴 것이었다.
‘괜찮아요? 진짜 노망났나 봐, 왜 저래.’
매일 보는 장면이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팀원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만큼 시달리고 나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팀원들은 전부터 저랬다면서, 일정이 크게 틀어지거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신입만 달달 볶으며 스트레스를 풀더라고,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건네왔다.
저렇게 무능력하고 팀 분위기를 좆같이 만드는 인간이 어떻게 월급을 받아먹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그가 여기 사장의 사촌이라더라 하는 소문을 듣게 된 후로 궁금증은 풀렸으나, 기분은 한층 더 나빠졌다. 거지 같네.
피를 보게 한 게 내심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던 건지, 팀장은 오랜만에 야근 없이 정시에 퇴근을 시켜 주었다. 덕분에 해영을 데리러 올 수 있었다. 온종일 칙칙했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다. 그것도 잠시뿐, 제 뺨에 선명하게 남은 상처를 본 해영이 속상해할 걸 생각하자 벌써부터 마음이 좋지 않았다.
멀리서 해영이 보였다. 이쪽을 보고 활짝 웃더니 열심히 발을 구르며 뛰어왔다. 천천히 오지. 건우는 혹시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해영이 문 앞까지 다다라서야 잠금장치를 풀었다.
“오늘 일찍 끝났네?”
해영이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들뜬 얼굴이었다. 오늘처럼 정시에 끝나는 날이 얼마 없다 보니 예전보다 데리러 오는 빈도가 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에는 웬만하면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해영이라, 그가 눈에 띄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저 역시 덩달아 매일 같이 데리러 오던 때가 떠올랐다.
회사 건물을 나오면서부터 두리번거리며 저를 찾던 해영이라든가, 저를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는 얼굴이나, 자주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도 했고, 금요일에는 영화를 보거나 주말을 끼고 짧게 여행을 가기도 했다. 분명 얼마 되지 않은 일임에도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요즘은 통 그러지 못했으니까.
“밖에서 저녁 먹고 들어갈래요?”
“응, 좋아. 뭐 먹지?”
“형 먹고 싶은 거로.”
건우가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해영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집어 뒷좌석에 두었다. 해영의 시선이 훅 가까워진 건우의 뺨에 꽂혔다. 내내 싱글거리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너 얼굴….”
놀란 해영이 얇게 그어진 상처 위로 손을 뻗었다. 아, 건우가 난감한 낯으로 애써 웃었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종이 넘기다가 살짝 베였어요.”
“…아팠겠다. 안 따가워? 약은 발랐어?”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안 발라도 돼요, 이 정도는.”
“안 돼. 이따 집 가서 발라 줄게. 얼굴에 이게 뭐야….”
예상했던 대로 해영은 크게 속상해했다. 다른 곳도 아닌 얼굴이라 더 그런 듯했다. 건우가 얌전히 알겠다고 답하고 나서야 해영은 굳은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저녁은 일전에 자주 다니던 초밥집에서 먹기로 했다. 작은 가게라 예전에도 갈 때마다 알아봐 주시곤 했는데, 꽤 오랜만에 갔는데도 잊지 않고 알은체를 해 주셨다. 짧게 안부를 나누고 늘 시키던 초밥 세트를 주문했다. 계절이 변하면서 생선 종류가 조금 달라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좋은 맛이었다.
기분 좋게 배를 채운 후, 근처 강변을 산책했다.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문 채였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 해영이 인적이 드문 걸 확인하고 건우의 손을 슬쩍 잡았다. 건우도 씩 웃으며 그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았다.
“이렇게 산책하는 것도 엄청 오랜만이다, 그치.”
해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야근하고 집에 오면 쓰러지기 바빠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새가 없었다. 문득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지만, 건우는 애써 무시했다.
“그러게요. 자주 나오자.”
“응.”
두 사람 모두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그에 관해 말을 얹지 않았다. 지금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해영이 차 문을 닫았다. 안전벨트를 매기 위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건우가 그 팔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해영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입술이 닿았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말캉한 것이 여러 차례 내려앉았다. 그 사이사이를 기분 좋은 숨소리가 채웠다. 건우가 해영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해영이 눈을 감았다. 건우가 상체를 조수석 쪽으로 기울였다. 안달 난 몸짓으로 해영에게 몸을 붙이며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응….”
춥, 젖은 소리가 좁은 공간에 울렸다. 해영의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건우가 해영의 뒷목을 감싸 제 쪽으로 당기며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열 오른 살덩이가 한데 얽혀 숨을 나눴다. 목 안쪽에서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건우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입술이 떨어졌다. 해영이 가쁘게 숨을 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건우가 조급하게 해영의 허리를 안아 올려 제 위로 앉혔다.
“잠깐….”
너무 적나라한 자세였다. 건우가 그 버둥거리는 몸을 제 쪽으로 바짝 당겨 안고, 양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문질렀다.
“조금만요.”
그리고 재차 입술을 겹쳤다. 몸이 더 가까워지니 입맞춤 또한 한층 더 깊어졌다. 평소보다 뜨거운 입안을 헤집었다. 건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해영의 허벅지를 지분대던 손을 옮겨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해영의 몸이 움찔했다. 이미 지나치게 밀착된 자세 때문에 단단해진 아래가 맞닿아 있는 상태였다.
“흐으….”
건우는 급기야 와이셔츠를 들추고 손을 넣어 맨 살갗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해영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비틀었다.
밖에선 싫은데. 아무리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고, 바깥에서 안쪽이 안 보인다고 해도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할 기세로 몰아붙이는 건우의 모습에 해영은 조마조마했다.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 치면,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붙여 왔다.
건우의 손이 빈틈없이 붙은 몸 사이로 들어와 해영의 버클을 거침없이 풀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지, 집에 가서….”
놀란 해영이 건우의 팔을 붙잡았다. 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옷 위로 잔뜩 부풀어 오른 해영의 성기를 손으로 쥐었다. 이런 상황이 불편하고 긴장되는 것과 별개로, 해영의 몸은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변태가 된 건가. 해영은 자괴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고 집까지 참는다고? 다 젖었는데?”
건우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 나왔다. 그가 엄지로 축축하게 젖은 귀두 끝을 문질렀다. 해영이 신음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읏….”
마음 같아선 정신을 놓고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쾌감이라 더 괴로웠다. 해영의 얼굴에 고민이 비치자, 건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기를 위아래로 매만지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해영이 마지막 남은 정신으로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난데없이 차 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해영이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건우의 어깨를 팍 밀쳤다.
“아.”
벨 소리의 근원을 확인한 건우의 표정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차량 거치대에 꽂아 둔 휴대폰이 눈치도 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이승준 대리]
“받, 받아야겠다. 그치.”
해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조수석으로 옮겨 갔다. 잔뜩 풀어 헤쳐진 아래와 와이셔츠 단추를 보았다. 이걸 언제 이렇게…. 해영은 아랫입술을 꾹 감쳐물고 옷을 추슬렀다.
“하….”
낮게 한숨 쉰 건우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안전벨트를 맸다. 못한 건 집에 가서 배로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 대리님.”
―어, 건우 씨. 집이에요?
차 내부에 낯선 목소리가 퍼졌다. 건우가 핸들을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이어서 승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잔뜩 곤두서 있던 건우의 성질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전에 점심시간에 같이 갔던 카페 이름이 뭐였지? 그 왜. 노랗고, 커피 맛있었던. 내가 지금 회사 근처라 생각나서 가려고 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씨발.
지금 저딴 걸 물어보겠다고. 건우는 치미는 화를 겨우 삭이고 카페 이름을 답해 주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게 생각이 안 나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고마워.
“아닙니다. 그럼 맛있게 드시고 들어가세요.”
―아, 참. 건우 씨, 그거 들었어요?
좀 끊어라. 해영과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도 화가 나는데, 평일 저녁 늦은 시간까지 회사 사람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떤.”
―아까 팀장이 건우 씨한테 서류 던지고 난리 친 거 있잖아요.
아. 건우가 아차 싶은 마음에 스피커 폰을 종료하려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평소에도 말이 빠른 승준은 이럴 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거 사장이 지나가다 봤나 봐. 아니면 들었나? 아무튼. 그래서 따로 한 소리 들었대요. 그거 때문에 오늘 일찍 보내 준 거라고 하던데? 이제 좀-.
“대리님, 제가 지금 운전 중이라.”
―아, 미안해요. 아무튼, 오늘 피곤할 텐데 쉬어요.
“네, 들어가세요.”
전화가 끊기고, 불편한 침묵이 오래 이어졌다.
그 적막을 깬 건 다름아닌 해영의 훌쩍거리는 소리였다. 건우가 놀라 고개를 힐끗 돌렸다. 해영의 얼굴은 진작에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애써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세게 깨물고 울음을 틀어막은 모습에 속이 아프게 저렸다. 해영이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부지런히 닦아 냈다.
건우는 아무 말 없이 티슈를 건넸다.
건우가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이유도, 해영이 저토록 서럽게 울고 있는 마음도,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지독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해영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건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건우도 건우 나름대로 짜증이 난 상태였다. 해영이 그런 것까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모르고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걸 입 가벼운 놈 하나 때문에 망쳐버린 것도, 오랜만에 좋았던 데이트를 방해받은 것도 전부 화가 났다.
굳게 닫힌 욕실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거실로 걸음을 돌렸다. 이따 나오면 생각하자.
해영이 씻는 동안 밀린 집안일을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땐 손을 움직여 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어느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별 소용은 없었으나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집안일은 며칠만 게으름을 부려도 구석구석 신경을 안 쓴 티가 났다.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닦았다. 아침에 돌리고 나간 건조기 안에서 보송해진 빨랫감을 꺼내 차곡차곡 개어 옷장 안에 넣었다. 그즈음 욕실에서 물소리가 멎었다.
해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눈은 부어 있었지만, 울음은 그친 듯했다. 그는 차에서 보다 차분해진 얼굴로 익숙한 바디 워시 냄새를 풍기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 하고 있었어?”
“…….”
아, 건우는 그제야 습관처럼 해치운 빨래를 떠올렸다. 건우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해영이 다급하게 건조기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텅 빈 건조기 안을 확인한 뒤 다시 건우의 앞으로 다가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빨래 이거 왜 했어? 내가 하겠다고 했잖아….”
해영이 허벅지 옆에 붙인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내가 한다니까. 왜 아무것도 못 하게 해?”
그리고 아무런 답이 없는 건우를 몰아세우듯 질문을 퍼부었다.
“응? 처, 처음부터 맡길 생각 없었던 거지? 나 그냥 화 풀게 하려고 거짓말한 거지?”
건우는 답답한 기분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해영의 말대로 그를 달래기 위해 했던 말에 불과했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물론 제 잘못이었으나, 해영이 이 문제로 이렇게까지 화내는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까 전의 통화 내용도 분명 해영이 이렇게 속상해하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 팀장과 그런 행동을 방치한 거지 같은 회사의 문제이지, 해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 일하고 와서 이런 거까지 어떻게 시켜요.”
“너도 일하잖아.”
“내가 하면 십 분이면 끝날 거를 형이 하면 삼십 분, 한 시간씩 걸리잖아요.”
“…….”
짧게 숨을 흡, 들이켠 해영의 눈꼬리가 점점 아래로 침울하게 쳐졌다. 한 차례 쏟아냈던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또다시 건드려졌다. 해영의 눈에 축축한 것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망했다. 해영이 하는 것보다 제가 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고집을 부리는 해영이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와 버렸다.
“…나, 나도 하다 보면 빨리할 수 있어. 네가 못 하게 하니까 안 느는 건데….”
“아, 형. 울지 말고.”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겨우 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뭐 때문에 싸우고 있었는지도 잊을 만큼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었다. 건우가 해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팔을 잡아끌어 다른 손으로 해영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해영은 그 손길을 피하진 않았으나, 달가운 얼굴도 아니었다. 뿌리치고 싶은데도 참아내는 얼굴이었다.
“네가, 나 힘든 거 보기 싫은 것처럼 나도 그런 건데….”
“…….”
해영의 가슴팍이 평소보다 짧고 빠르게 오르내렸다. 건우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저항 없이 반쯤 안겨 있던 해영이 그제야 건우의 어깨를 약하게 밀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 아침 안 먹을래.”
안 돼. 건우의 입술이 벌어졌다. 해영이 아침을 안 먹겠다 선언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건우가 대학생 때, 가족 여행을 가지 않겠다 떼를 썼을 때였다. 이삼 일 정도였다면 참고 갔을 텐데, 무려 해외여행이었다. 그것도 일주일. 해영에게 상의할 것도 없었다. 누나들한테 기간을 듣자마자 안 가겠다 통보를 해 두었는데, 차윤서가 몰래 해영에게 대신 설득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해영이 알게 된 것이다.
해영은 항상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들을 건우만큼은 놓치지 않고 경험하길 바랐다. 그런데 그걸 건우가 해영 본인 때문에 안 가겠다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해영이 아니었다. 아마 차윤서가 따로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해영이라면 그걸 듣자마자 저를 설득해왔을 것이다.
며칠을 가라, 안 간다 실랑이하다가, 결정적으로 해영의 아침 단식 투쟁이 먹혀들었다. 날로 얼굴이 홀쭉해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건우는 그걸 도저히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돼요.”
그리고 해영은 이번에도 그 방법을 쓸 생각인 것 같았다. 끔찍했다.
“너도 네 마음대로 하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형 아침 안 먹으면 금방 살 빠지잖아. 안 된다고.”
“안 먹어. 그러니까 아침밥 하지 마.”
단호하게 말한 해영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들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건우에게 아프게 닿았다.
***
해영이 아침을 먹지 않은 지 사 일째였다. 건우가 예상했던 대로 해영의 얼굴은 날로 수척해졌다. 스무디라도 먹어 달라고 애원해도 해영은 들어주지 않았다. 꼬박꼬박 챙겨 먹던 아침을 거르니 출근하는 걸음에도 힘이 없었다. 저녁을 듬뿍 먹여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토요일에는 보통 늦잠을 자니까 일어나서 먹어 주지 않을까, 기대도 했으나 해영은 강경했다. 본인이 정한 점심 시간대가 될 때까지 밥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배를 곯는 것을 고스란히 봐야 한다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이 다툼에서 누가 먼저 포기하고 손을 들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해영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런데도 건우는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옳은 결정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건우가 소파에 길게 엎어져 누워 있는 해영을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삐쩍 말랐어. 오늘도 아침을 거른 해영은 오전 시간 내내 저렇게 시위라도 하듯 힘없이 누워 있었다. 건우는 초조한 마음에 휴대폰 액정을 건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 해영에게 얼른 점심을 먹이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해영의 머리맡에 놓인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해영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건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휴대폰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해영이 헤실거리며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누구예요?”
“으응, 민서 누나. 반찬 갖다주신다고….”
제 누나라는 말에 건우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저에게 물으면 됐다고 말할 게 뻔하니 언제부턴가 항상 해영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해영은 금방 오신다고 했다면서, 그 전에 씻고 나오겠다며 욕실로 향했다. 건우는 제 옆을 지나가는 해영의 허리를 예고 없이 끌어안았다. 홀쭉해진 배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꾸르륵, 그 안에서 작게 소리가 울렸다. 이거 봐. 해영은 시뻘게진 얼굴로 몸을 비틀었다.
“놔, 놔줘….”
“언제까지 이럴 건데요.”
고집스러운 입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건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지 않고 버티는 해영을 놓아주었다. 곧장 욕실로 사라지는 뒤통수를 밉지 않게 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차민서의 연락을 받고 건우가 내려갔다. 그녀는 엄마를 닮아 손이 컸다.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서 가끔 이렇게 감당 안 될 정도로 만든 뒤에 이곳저곳에 나눠 주는 걸 즐겼다. 건우는 반찬통 여러 개가 들어 있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대신 들고 집까지 올라가는 내내 적당히 좀 하라고 타박했다.
“해영이 그새 살 좀 찐 거 같다. 얼굴 좋아졌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맞이하는 해영을 보자마자 말했다. 눈이 삐었나. 어딜 봐서 살이 올랐다는 건가.
“아냐. 살 빠졌어.”
건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민서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살은 네가 빠졌는데?”
“뭔 소리야.”
“야, 거울을 봐. 얼굴 장난 아니야. 며칠 굶은 사람 같아, 너.”
민서가 툭 던진 말에 해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역시 제 눈에만 그런 게 아니었어. 건우가 고생하는 게 얼굴에 죄다 드러난다고 느꼈는데, 그게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끼는 걸 보니, 건우의 상황이 이전보다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해영의 낯을 본 건우가 민서에게 일렀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왔으면 밥이나 먹고 가.”
형 밥 좀 먹이게.
“됐어. 약속 가는 길에 들른 거야. 큰 통에 열무김치는 엄마 거. 모자라면 또 말하래.”
“감사합니다.”
해영이 고개를 까딱 숙이며 바닥에 놓인 장바구니 손잡이를 잡았다. 보기보다 무게가 나갔다. 해영이 이를 꽉 물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옆에서 보던 건우가 인상을 쓰며 뺏어 들었다.
“놔둬요.”
“아니야, 내가….”
“무겁잖아.”
“하나도 안 무거워.”
건우와 해영이 별것도 아닌 거로 한참을 투닥거리는 걸 보고 민서가 작게 혀를 찼다.
“나 간다. 싸웠으면 좀 풀고.”
그렇게 말한 민서는 금세 인사를 받고 자리를 떴다.
둘만 남은 곳에 어색한 적막이 맴돌았다. 건우는 해영이 또 장바구니를 들겠다 고집을 피우기 전에 먼저 집어 들어 주방으로 날랐다.
***
건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해영이 보였다. 익숙하게 그 옆자리에 이불을 들추고 몸을 뉘었다. 그러곤 해영의 등에 바짝 붙어 허리에 손을 감았다. 잠들지 않았는지 해영이 조용히 몸을 돌려 제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주일 내내 신경전을 하느라 섹스는커녕 입술도 제대로 비비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잘 땐 어김없이 이렇게 몸을 마주 댔다. 건우가 해영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자 제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제가 회사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해영이 차마 꺼내기 주저했던 말을, 건우가 먼저 물었다. 해영은 조금도 고민 않고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우가 어떤 마음으로 대학을 서둘러 졸업하고 싶어 했고, 어떤 마음으로 쉬지도 않고 취업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가 저를 위해서 그 모든 과정을 참고 견디고 있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자격 정도는 제게 있지 않을까.
해영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건우의 가슴팍 위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머리 위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 역시 해영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빈틈없이 몸을 맞붙였다.
회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저인데, 어째 해영이 더 간절하게 그만두길 바라는 모습을 보니 눈치도 없이 속이 벅찼다. 힘들다는 말 한번 한 적 없는데도 알아준 것도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를 걱정시킬 정도로 스스로가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화도 났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제가 해영을 생각하는 마음 못지않게 그가 저를 걱정하는 마음 또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여전히 옳은 결정인지 의구심이 들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 아닌가. 오기로, 억지로 맞지도 않는 곳에 몸을 끼워 맞추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일로 그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안정적인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나 평생 먹여 살리려고?”
결국 이번에도 해영을 이기지 못한 건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해영은 조금 전보다 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작게 웃으며 몸을 살짝 떼어내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해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소매를 끌어 올려 축축해진 얼굴을 닦아 주었다. 해영의 일이니, 평생 먹여 살리겠다는 말이 그냥 저를 설득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약속을 지키려 하겠지. 착해 빠져서. 그 마음을 인질 삼아 평생을 옆에서 붙잡아 놓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해영은 지금 어떤 새끼한테 그런 약속을 한 건지 알고나 있을까.
“든든하네.”
건우가 해영의 머리통에 입술을 비볐다. 그걸 긍정으로 알아들은 해영의 뺨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올해까지만 해볼게요.”
해영의 말을 가로막은 건우가 제안했다. 해영은 다시 낯을 굳히고 머릿속으로 남은 날을 셌다. 사 개월이나 남았는데.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해영이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 이상 양보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알겠어.”
해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른 올해가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