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Somebody to love (1/8)

목차

1권

1. Somebody to love

2. Tightrope

1. Somebody to love

* * *

78억 인류 중 절반이 남자, 그중 남자와 섹스할 수 있는 남자는 대략 5분의 1.

그럼, 남자와 연애할 수 있는 남자는 몇이나 될까?

나는 언제나 연애할 남자를 찾았다.

오랫동안 충실히, 성실하고 절실하게.

줄곧 노력했고, 노력은 잘못되지 않았으며, 언젠가 보답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 *

금요일 밤, 진우는 단골 바(bar)에 오랜만에 얼굴을 내밀었다. 단골 가게인데도 오랜만에 온 건 첫째, 삼 개월 전 이곳에서 거지 같은 놈과 이별했기 때문이고 둘째, 진행하고 있던 재판이 마무리돼서 이제야 한가해졌기 때문이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바 테이블에 앉은 진우는 맥켈란을 한 잔 주문한 뒤 내부를 둘러봤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라고는 테이블 석에만 몇 명 있을 뿐, 가게는 한가했다.

이 가게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는데 파트너를 찾는 사람은 바에 앉고, 그냥 놀러 온 사람은 테이블에 앉는다.

언뜻 보면 유치하지만 이 규칙은 파트너를 찾으러 오는 사람에게도, 그냥 술을 한 잔 마시러 오는 사람에게도 꽤 유용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잘 알고 있는 진우는 새로운 만남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채 한 마리 공작새라도 된 것처럼 바에 앉았다.

가게를 훑어본 진우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차피 주말 내내 한가할 예정이라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채 느긋하게 술잔을 비우고 새로 한 잔 더 주문했을 때, 문에 달린 풍경이 작게 딸랑거렸다.

진우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그 바람에 들어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 방금 가게에 들어온 남자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진우는 그 얼굴을 보고 속으로 욕을 했다.

“와, 양 변호사님을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요.”

남자가 반갑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건넸지만, 진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뉴페이스를 원한 건 맞지만 이런 식의 뉴페이스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 러게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우의 목에서 꺼끌꺼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지 않다는 기색이 보였을 것인데 남자는 옆에 앉았다. 그 거침없는 태도가 불편해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 순간 눈치 없는 바텐더가 술잔을 내밀었다.

“이거 양 변호사님이 시킨 거 아니에요? 어디 가게요?”

남자가 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물었다. 자리를 피하려 했다는 걸 모를 리 없으면서 일부러 물어오는 행동에 한숨이 나왔다.

진우는 반쯤 일으켰던 엉덩이를 의자 위에 내리고 위스키로 입술을 축였다. 일로 아는 상대를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것에 불만이 차올랐지만, 딱히 원망할 대상이 없었다.

진우의 속이 들쭉날쭉 널을 뛰는 동안에 남자는 조금 전 진우처럼 바를 둘러봤다.

진우는 남자를 곁눈질로 보며 술을 홀짝였다.

남자의 이름은 이사준. 나이는 서른 초반, 직업은 기잔데 알고 있으니 기자구나 하지, 사실 그의 외관만 봐서는 기자라는 직업을 유추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고 다니는 게 깔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풍기는 전체적인 아우라가 그랬다.

친구 태준에게 팀원이라고 소개받지 않았다면 진우는 그의 직업을 기자라고 절대 추측하지 못했을 거다.

직업상 기자를 많이 만나 본 진우는 기자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었다. 사명감과 신념에 빠진 멍청이와 클릭 수와 광고의 노예가 된 머저리.

전자는 친구인 태준이 속한 부류로 지금은 거의 멸종 단계였고 후자는 대부분의 기자였다. 근데 이사준은 어디에도 속하질 않았다.

일단 일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 일할 때 몇 번 만나 본 사준은 알 권리를 빙자한 이상한 사명감에 불타오르지도 않았고, 특종에 따라오는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선동질을 하지 않았고, 나쁘게 말하면 직업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 그래도 진우는 사준이 겉으론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여도 일에 대한 기준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태준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설명이 안 됐다.

장태준은 기자라는 직업에 반쯤 목숨 걸고 있는, 사명감과 신념에 빠진 멍청이 중에서도 상 멍청이였다. 남들이 뭐라 칭송하든 진우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이사준이 기자로 안 보이는 두 번째 이유, 어떤 면에서는 이게 더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의 외모는 기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숱 많은 속눈썹과 옆으로 긴 눈꼬리, 높은 코와 도톰한 입술이 모여 있는 얼굴은 기자치고는 너무 화려해서, 차라리 무명 모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법했다. 이래저래 쉽게 잊힐 인상은 아니었기에,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진우는 사준에 대한 첫인상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화면발 잘 받게 생겼네.

그게 진우가 가진 사준의 첫인상이었다. 물론, 얼굴이 괜찮다고 해서 여기서 만난 게 괜찮다는 건 절대 아니다.

“여기요, 같은 거로 하나 주세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진우와 다르게 사준은 바텐더에게 술까지 주문했다. 체격이 좋은 편이어서 팔을 조금 들어 올린 것만으로도 이목을 끌었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편안한 음색이었다. 만약 상대가 이사준이 아니었다면, 진우는 단숨에 호감을 표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사준의 외관은 진우의 취향이었다.

사준은 아까부터 저를 관찰하는 진우를 보고 싱긋 웃더니 진우의 잔 아래 깔린 코스터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술을 마시라는 의미가 다분한 손짓에 진우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사적인 친분이 깊은 건 아니지만 사준이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닌 걸 안다. 그런데도 그가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진우 옆에 앉아 술까지 주문한 건 그냥은 안 가겠다는 의미였다.

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뇌까렸다.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고 왔건만 이 정도면 망한 정도가 아니라 꽝이다, 꽝.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저도요.”

“여기, 어딘지는 알고 온 거죠?”

진우가 떡밥 주는 심정으로 말을 건네자 사준은 ‘모르고 왔겠어요?’ 하고 되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태연해서 진우는 사준이 사실 게이였나, 하고 짐작해 봤지만 아니라는 답은 금방 나왔다.

언젠가 태준이 그랬다. 이사준의 정보원 8할은 여자라고. 여기서 정보원 8할이 여자라는 의미는 여자랑 자는 남자라는 의미였다. 진우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태준이 그 말을 ‘일부러’ 한 건 진우가 헛다리 짚지 않도록 미리 방어선을 쳐 놓은 것이고, 진우는 그 의미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근데 양 변호사님이 이쪽일 줄은 몰랐네요.”

“그래요?”

“네, 진짜 게이예요?”

이어서 흘러나온 질문에 진우는 미간을 구겼다.

많은 헤테로들이 하는 가장 무례한 질문. 이성애자한테는 안 하는 질문을 왜 실례인 줄도 모르고 하는 건지, 그들의 심리를 진우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이 바에 남자 혼자 앉아 있으면 뻔하지, 묻긴 또 뭘 물어.’

“이런 데 혼자 있는 거 보면, 대답이 될 거 같은데요.”

진우는 속과 다른 얼굴로 온화하게 대꾸했다.

“흐응, 그렇구나.”

조금이라도 혐오 발언을 하면 두 번 다시 말도 못 붙이게 할 생각이었는데 돌아온 반응은 맥빠질 정도로 허무했다.

진우는 사준이 자신이 게이라는 걸 혹시 알고 있었던 건가 짐작해 봤지만, 이 역시 답은 아니다였다. 근데 또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너무 밍숭맹숭해서 진우는 저도 모르게 사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알고 지내던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보이는 반응은 경악, 그 뒤에는 약간의 혐오, 약간의 경멸, 그 외에는 조롱이나 비난 섞인 얼굴을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옆에 앉은 남자는 그저 몰랐던 사실을 하나 더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이 기자님은 취재?”

먼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준을 향해 진우가 물었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니고.”

그 말에 진우는 다른 팀원이 와 있나 싶어 가게 내부를 빙 둘러봤지만 아는 얼굴은 안 보였다. 혼자 온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사준이 진우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여기 드나드는 재벌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불법 거래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는 기자처럼 은밀하게 속삭이는 그 말투가 진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기삿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성적 취향을 까발리는 기사를 쓸 정도로 질 낮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진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당연하죠, 우리 팀장이 듣기도 전에 킬할걸요.”

“그걸 알면서 여길 일부러 왔어요?”

“그냥, 확인해 놓고 싶어서요, 기사는 안 돼도 소문은 될 거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소문을 무서워하니까요.”

사준은 ‘양 변호사님도 가진 게 많죠?’라는 의미가 담긴 눈으로 웃었다. 놀리는 게 분명한 그 얼굴에 진우는 남아있던 술을 비우고 바텐더에게 같은 걸 달라고 주문했다.

“다 마시면 갈 줄 알았는데요.”

진우의 앞에 새로운 술잔이 놓이자 사준이 말했다.

“왜요? 여긴 이 기자님보다 제가 먼저 왔어요.”

진우는 여유를 가장해서 한껏 미소를 지었다. 게이라는 사실을 약점으로 여기는 사람 앞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그런 모습을 한번 보이면 얕잡힌다는 걸, 진우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잘됐다, 그럼 저랑 좀 어울려줘요. 어색했는데.”

단단히 각오했건만 정작 사준은 진우의 그런 속내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 * *

“아, 흡, 후으….”

무의식적으로 거친 숨을 내쉬던 진우는 감겼던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가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활짝 벌어져서 솟아오른 무릎이 먼저 보였고 그다음에는 다리 사이에 있는 검은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끔벅, 끔벅. 눈꺼풀이 맥없이 가라앉았다가 올라오길 몇 번, 진우는 자신이 섹스 중이라는 걸 간신히 머리로 인지했다.

‘하, 씨발, 누구지.’

마른 입술을 벌렸지만 머리가 빙빙 돌아서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왔다.

진우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바에서 짜증 나게 이사준을 만났고, 그다음에는…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몇 번이나 더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골만 울릴 뿐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다.

‘아, 으으….’

아래에서 밀려온 이물감에 진우는 불편한 신음을 뱉었다. 그러자 다리 사이에 있던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깼어요?”

“어, 아, 이 기자님…?!”

진우는 허리를 일으켜 세우려다, 아래쪽에서 심하게 느껴진 위화감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안에 들어있어요, 갑자기 움직이면 안 될 건데.”

‘하아, 씹, 뭐지, 합의한 건가.’

어지간해서는 욕 같은 거 안 하고 싶은데 눈앞이 핑핑 돌아서 자꾸만 속에서 욕이 올라왔다.

“이 기자님이, 데려온 거예요?”

사준이 고개를 들어 진우와 눈을 마주쳤다.

“뭐야, 기억 안 나요? 좀 빨리 마시는 거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못 하면 곤란한데.

중얼거림에 가까운 속삭임에 진우는 안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억지로 기억을 끄집어냈다.

바에서 혼자 있기 어색하다며 같이 있어 달라고 한 이사준이랑 같잖은 얘기들을 했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대화가 잘 풀려서 꽤 많이 마신 것도. 근데 어쩌다가 호텔까지 온 건지는 기억이 희미했다.

“진짜 기억 안 나요?”

“하, 됐어요. 억지로 끌고 온 건 아닐 거잖아요.”

자포자기한 어조로 말하자 아래쪽에서 웃음이 들렸다.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정확한 의미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근데, 이 기자님 남자랑 해 본 적은, 읏!”

완벽한 헤테로인 줄 알았던 이사준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물음은 엉덩이 사이에 들어있던 손가락이 내벽을 확 긁어내는 바람에 끊어지고 말았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힐끔 봤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사준의 손가락이 벌써 세 개나 들어와 있었다.

‘미쳤구나, 양진우. 이렇게 될 때까지 뻗어 있었다니.’

“아까 말했어요. 해 보고 싶다고.”

진우의 머릿속에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이사준은 섹스는 할 기회만 있다면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괜찮은데.

양 변호사님도 그렇지 않아요? 게이면 남자들끼리라 더 할 거 같은데, 라더니 생각해 보니 짐승이 둘이네,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그렇게 계속 덧붙여진 말들에 발끈했다. 동성끼리는 섹스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냐는 의미가 내포된 그 말이 진우는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술을 빨리 마셨다.

그 결과가 이 꼴이라니, 할 말이 없다.

진우는 할 수만 있으면 한다는 이사준을 힐끔 내려다봤다.

“그래서, 할 수는 있겠, 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좋아한다니까요.”

좋아해? 뭘? 의문이 고개를 쳐든 순간 사준이 섹스, 라고 덧붙였다. 그에 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마터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로 착각할 뻔했다. 아무리 술을 마셨고 연애가 궁하다고 해도 그런 착각이라니, 정말 너무 갔다.

“충분히 풀어진 거 같은데.”

사준이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은근히 재촉하는 바람에 진우는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술 마시고 원나잇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상대가 친한 친구의 부하직원인 건 좀 걸리지만.

“무식하게 허리만, 흔든다고 좋은 게 아닌 건 알죠?”

이제는 약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술도 마셨고, 사준의 말대로라면 둘은 합의로 같은 방에 들어와 같은 침대에 누웠다는 건데 여기서 안 하겠다는 것도 웃겼다.

히윽, 사준이 안에 밀어 넣었던 손가락을 예고 없이 잡아 뽑는 바람에 진우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꼭 저렇게 여자랑 경험 있다는 티를 내야 하나?’

“별로 안 좋으면 당장 빼라고 할 거니까.”

진우는 차오른 불만을 누른 채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넣었는데 별로면 그냥 뺄 거예요.”

사준이 바로 대꾸했다.

‘한마디도 안 지지.’

진우는 다리를 좀 더 넓게 벌렸다. 대충 적당히 하고 빨리 끝내라는 의미였다. 당연히 당장이라도 달려들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탐색하는 시선이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꼼꼼하게 관찰하는 눈길에 엉덩이 근육이 움찔거렸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뻗어 있는 동안 얼마나 풀어 놓은 건지 아래가 끈적거려서 그조차 어려웠다.

‘남자랑 해 본 적 없는 거 아니었나? 젤을 어디서….’

호텔에는 젤이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진우의 눈에 활짝 열린 채 팽개쳐진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빛이 감도는 명품 브리프 케이스는 진우가 특별히 아끼는 가방으로 저걸 숍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진우는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운명까지 느꼈었다. 근데 그 아끼는 가방이 소파 위에서 내장이 털린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진우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사준이 미치지 않고서야 멋대로 남의 가방을 열어보지는 않았을 테니, 가방에 있는 일회용 젤을 꺼내준 건 높은 확률로 자신일 것이다. 아니, 최소한 가방에 젤이 있다고 말이라도 했겠지.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이사준은 대여섯 개는 족히 됐을 일회용 젤을 다 쏟아부은 것 같았다. 일회용 샴푸도 한 번 쓸 때 하나만 쓰면 되는 법인데, 뭘 얼마나 하려고 그걸 다 쏟아부은 건지.

진우가 엉덩이 사이를 적시고 있는 끈적한 액에 대해 추리하는 동안 움찔거리는 구멍 구경을 마친 사준은 침대에 던져 놓았던 콘돔을 뜯어 귀두에 걸었다.

얇은 고무 끝을 잡아 바람을 빼고 돌돌 말린 것을 끝까지 내린 사준은 진우의 허벅지를 잡고 귀두로 입구를 눌렀다. 큰 힘을 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젤에 정신 팔려있던 진우가 정신을 차리기엔 충분했다. 진우는 곧 들이닥칠 압박감을 예상하면서 숨을 들이켰다.

언뜻 스치듯 본 성기가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자 그 실체가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귀두가 파고든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흡…. 가능하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신음이 튀어 올랐다.

오랜만이라서 힘든 게 아니라 이사준이 컸다. 너무 커서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꾸우욱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진우의 허벅지가 단단해지면서 몸이 떨렸다.

“아픈가?”

사준이 감을 못 잡겠다는 듯 중얼거려서 진우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네 좆이 커서 그렇다는 말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성기가 크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았고, 그 칭찬은 고래를 춤추는 게 하는 게 아니라 남자들의 허세를 부풀렸다.

무식하게 때려 박을 줄 알았는데 움직임을 멈춘 사준이 고개를 숙여 진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촉,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주름이 질 정도로 세게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사준의 입술은 진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바쁘게 움직였다. 뺨에 닿았던 입술이 촉촉 소리를 내며 입꼬리에 닿았다가 입술 전체를 덮었고,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물리자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긴장으로 말라 있던 입안을 젖은 혀가 뭉근하게 자극했다. 입천장을 건드렸다가 점막을 핥다가 혀를 얽었다. 아, 으음, 목 안으로 넘어오는 타액이 이상할 정도로 달게 느껴졌다.

황홀해지는 키스로 진우의 넋을 빼놓은 사준은 느릿느릿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래가 더 벌어지자 진우는 허리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입술에 닿은 사준의 입꼬리가 휘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사냥감의 약점을 발견한 육식 동물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떨어트린 사준은 어느새 발기한 진우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이건 넣어서 선 거? 아니면 키스 때문?”

진우가 대답하지 않자 사준은 발기한 성기를 콱 움켜잡았다. 흐앗, 색기라곤 전혀 없는 소리가 튀어 진우는 입을 꽉 다물었다. 경험치라면 자신도 뒤지지 않을 건데 주도권을 완전히 뺏겨 버린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요?”

빌어먹을. 진우는 이 모든 걸 술 탓을 하기로 하고 그저 입만 꾹 다물었다. 뻣뻣하다고 불평한 주제에 좆이 안 죽는 이사준도 용했다. 남자는 해 본 적 없다더니, 적응력이 좋은 건가? 아니다, 이사준의 경우라면 응용력이 뛰어난 거라고 보는 게 맞겠다.

여자와의 경험을 남자한테도 응용하는 것. 어쩌면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글래머를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주 죽여 주겠네, 아래는 좁아터졌는데 가슴은 크면.’

사준은 손안에서 불끈거리는 진우의 성기를 쥐고 흔들면서 허리를 부드럽게 밀어붙였다. 흐윽, 진우는 사준의 완급조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대충하고 끝낼 줄 알았는데, 밀고 들어오는 속도로 보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찐득하게 달라붙는 내벽에 사준의 숨이 가빠졌다. 경험이 없는 건 아닌데, 뻑뻑하게 조이면서 움켜쥐는 점막에 호흡이 툭툭 끊어졌다. 하, 죽이네. 감탄 섞인 신음이 절로 나왔다.

살을 벌리고 꾸준히 파고들자 진우는 야릇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으, 흣, 작은 콧소리에 사준은 삽입을 멈추고 진우를 내려다봤다. 만날 때마다 각 잡힌 정장에 재미없는 얼굴을 하던 남자가 서서히 흐트러지자 요염한 분위기를 흘리는 게 꼴릿했다.

남자도 될 거라는 걸, 남자도 가능하다는 걸 스스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확인해 보니 기분이 묘했다.

사준이 남은 성기를 조금 더 느릿하게 밀어 넣자 진우의 붉은 입술이 느른하게 벌어졌다. 그 모습이 꼭 아래 구멍이 벌어지는 것과 비슷해 보여 사준은 부서지려는 이성을 억지로 움켜잡았다.

진우는 아랫배가 간질거려서 숨을 할딱였다. 차라리 한 번에 박아 넣으면 좋겠는데, 이사준은 너무 느려서 집요하게까지 느껴졌고 그 때문에 버티는 게 힘들었다.

진우는 이러다 제 입에서 조르는 말이 흘러나갈 것 같아 아랫입술을 질겅였다. 술 때문인지 아래 들어온 것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오늘 밤을 기점으로 연애할 새로운 대상을 만날 생각이었는데, 친구의 부하직원과 뒹굴다니.

두서없는 생각들이 진우의 뇌 속에 멋대로 뿌려졌다. 흐트러지는 생각들을 다시 모으지도 못하고 있는데 사준이 고개를 숙여 집중하라는 듯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여기까지 해 놓고 모른다는 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런데도 이사준은 모른다는 듯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도 기억 안 나요? 양 변호사님이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

거짓말. 진우는 여태까지 살면서 섹스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섹스는 두 사람이 교류하면서 본능적으로 깨닫는 거라 여겼다. 하물며 일로 만난 사이인 이사준에게 그걸 가르쳐 준다고 했을 리가.

진우는 거짓말인 게 분명한 도발에 속는 셈 치고 팔을 뻗어 사준의 목을 감아 당겼다.

“흔들, 어.”

“아직 다 넣지도 않았는데, 날 너무 과소평가 하시네.”

피식 웃음과 함께 들린 말에 진우는 숨을 참았다. 아래가 벌써 꽉 찬 것 같아서 사준의 말을 허세로 치부하고 싶은데, 빌어먹게도 진짜 뜨거운 살덩이가 좀 더 밀고 들어왔다.

깊은 곳을 열어 억지로 쑤셔 박는 열감에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으읍, 진우는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삼키며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드는 사준의 아래서 허우적댔다. 잇새로 숨기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일정하지 않은 박자로 밀려오는 쾌감에 몸과 정신이 따로 놀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노래졌다가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암흑이었다.

* * *

삐삐삐삑―.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진우는 벌떡 일어났다가 욕을 뱉었다.

여기가 어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라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우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경험상 이런 식으로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더 안 좋았다. 툭툭 끊어지는 기억 속에서 기분 좋죠? 엄청 질척거리네요, 진짜 남자랑도 되네, 물어뜯기는 거 같아, 따위의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이사준의 목소리는 선명했고 호텔에 오게 된 경위는 흐렸다.

“원래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요?”

사준은 모로 누운 채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진우에게 말을 건넸다.

“아뇨, 알람 바꾸는 걸 잊었어요.”

진우는 길게 한숨을 뱉더니 폭신한 이불 밖으로 몸을 뺐다.

“흐응, 난 원나잇 상대랑 오래 있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맞춰 놓은 건 줄 알았네.”

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나잇, 좋다. 아주 깔끔한 단어다. 사준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 역시 망설이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 안 나요? 어제 양 변호사님이 나 유혹했는데.”

“그럴 리가.”

진우는 자신을 믿었다. 양진우는 술 취했다는 이유로 아무한테나 집적거리지 않는다. 만약 술에 취해 누군가에게 손을 뻗었다면, 그건 취중 진담이다. 감춰뒀던 속내를 술김이라는 핑계로 드러내는 행동. 하지만 이사준한테 그런 감정은 없었다.

남들은 그럴 리 없다고 여기지만, 맹세컨대 진우는 그 바에서 단 한 번도 원나잇 상대를 찾은 적 없었다. 마음이 맞으면 섹스까지 할 생각은 있지만 그건 다음 만남을 전제로 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로 아는, 친구의 부하직원과 이미 결과가 정해진 원나잇 같은 건 바라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다.

단호한 진우의 반응에 사준은 멋쩍어하는 기색도 없이 안 속네, 하며 웃었다.

“유혹 안 한 건 맞는데 하자고 했을 때 거절도 안 했고, 하는 동안에는 계속 기분 좋다고도 했잖아요.”

진우의 머릿속에 간밤의 순간이 스치듯 떠올랐다.

‘기분 좋죠?’

‘으응, 좋아…… 하아, 거기, 흣.’

‘여기? 여기 좋아하나 보네, 찌를 때마다 줄줄 흘리는 게. 우리 궁합 좋은가 봐요.’

여기까지 떠올린 진우는 빠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개뿔, 궁합은 무슨. 이럴 땐 그냥 되도록 냉정하게 끝내는 게 상책이다.

“밥 먹으러 갈래요? 속 괜찮아요?”

사준의 태연한 지껄임을 무시한 채 진우는 눈에 보이는 대로 옷을 입었다. 팬티, 와이셔츠, 양말, 바지, 넥타이와 재킷. 바닥에 떨어진 걸 차례로 꿰입은 진우는 지갑을 열어 5만 원 두 장을 꺼내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준은 완벽하게 정돈된 얼굴의 진우를 바라봤다. 아침에 일어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외로 진우는 침착했다.

“없던 일로 하죠.”

“왜요?”

‘왜긴 뭘 왜야. 원나잇이 어쩌고 했으면서 어디서 오리발?’

진우는 사준이 저를 놀리는 거라 확신했다.

“이 기자님하고는 안 맞아요.”

섹스가 별로였다는 말은 거짓말이란 게 너무 티 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적당히 골라 말한 진우는 그대로 호텔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사준은 닫힌 문과 남은 5만 원 두 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돈도 잘 벌면서 호텔비를 반만 놓고 간 거 봐라.’

신세 질 마음도, 신세 지게 할 마음도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사준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진우를 떠올렸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갈 때까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은 게 마음에 안 든다.

밤새 그렇게 야해 빠진 얼굴을 했으면서 이제 와 그런 얼굴을 해 봤자지. 근데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게이라는 걸 들킨 점? 그건 이미 같이 떡 친 시점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나? 아니면 원나잇 상대가 친구의 부하직원이라는 게 걸리나? 원나잇 한두 번도 아닐 거면서, 애도 아니고 친구 남편이랑 잔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걸 신경 써?

사준은 아직 진우의 체온이 감도는 이불을 품에 끌어안았다. 혼자 누워 있으려니 몇 년 전, 팀의 자문 변호사라는 양진우를 팀장이 소개해 줬을 때가 떠올랐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 생긴 양진우는 되게 재수 없었다. 변호사 배지를 달고 있는 고급 슈트, 그 슈트만큼이나 비싸 보이는 구두, 소매 단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차고 있을 시계도 명품으로 짐작됐다. 거기다 도도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얇고 날카로운 턱선 같은 것들이 양진우의 인상을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깐깐하게 보이게 했다.

좋은 교육을 받고 반듯하게 자라면서 좋은 것을 잔뜩 걸치고 살아온 느낌이 폴폴 풍겼다. 팀장의 친구라는 이유로 소개받지 않았다면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그런 느낌이었다. 학교 다닐 때 싸움질 한번 안 해봤을 것 같은 느낌. 담배 피우는 애들을 보면 선생님께 이를 것 같은, 그런 어딘가 좀 얄미운 인상.

그렇다고 안경 낀 모범생 같은 얼굴은 또 아니고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로 누리면서, 남의 위에서 살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년을 알았지만 그냥 데면데면했다. 필요하면 연락하고 아니면 마는 사이. 언젠가 사준의 팀이 바뀌거나 진우가 자문을 그만두면 따로 연락할 일 없는 사이였고 그게 아쉽지도 않았다. 그런 양진우의 인상이 깨진 건 정말 우연이었다.

당시에 모 그룹 부회장이 게이 바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고 사준은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성 소수자라는 걸 뉴스로 만들 생각은 없지만 여차할 때는 써먹기 좋은 카드가 될 것이 분명해서,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하며 들른 바였다.

게이 바여서 입장이 까다롭지 않을까 싶었는데 남자라면 누구나 상관없던 것인지 의외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조용하고 깔끔했다. 사준은 테이블에 앉아 술을 한 잔 마셨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과 잡담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죽였는데 원하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첫날은 허탕이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 건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 그날 이후 사준은 시간이 되면 틈틈이 그 바에 들렀는데, 네 번째 방문했을 때 예상 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설마 했지만 사실 거의 확신했다. 가게 제일 안쪽 구석 테이블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뚫어지게 보는 건, 맨질맨질한 양진우였다.

유난히 조명이 어두운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남자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누가 보기에도 이별을 말하는 분위기였다.

아마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진우는 사준의 시선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진우는 주변의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앞에 앉은 남자만 보고 있었다.

사준은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을 등지고 앉아 작게 들리는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결혼하기로 했어.”

“…….”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너만 좋으면….”

“지랄하고 있네.”

그 순간 사준은 제 귀가 헛것을 들은 건지 의심했다. 진우가 게이라는 사실보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더 놀라웠다.

“너만 좋으면? 와이프 몰래 만나주기라도 한다는 거야?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네. 적선하세요? 누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만나고 싶대? 그거 이혼 사유야. 내가 네 와이프 변호사였으면 재산몰수는 기본이고 접근금지에, 혹시 애가 있으면 양육권까지 다 뺏어다 줄 거야. 병신 같은 게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해대고 있어.”

단정한 얼굴에서 하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역시 변호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살벌하게 혀를 휘두르는 진우를 보며 사준은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좋은 구경거리는 아니란 생각에 자리를 뜨려 했다. 그 순간 진우의 앞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줘서 말했더니. 너 섹스하는 거 좋아하잖아. 남자 옆에 없으면 잠도 못 자면서.”

추잡한 말이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지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지도 좋아서 했을 거면서 저렇게 걸레 취급하는 건 아니지, 매너 더럽게 없네.

사준은 말 한번 안 해 본 남자가 파렴치하게 느껴졌고, 진우의 반응이 궁금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생각?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꼴값도 적당히 떨어야지, 결혼한 놈을 내가 뭐가 아쉬워서 만날 거 같은데?”

혹시나 상처받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양진우는 끄떡없었다.

“섹스 좋아하는 내가 하는 말이니까 똑똑히 들어, 너 존나 별로였어, 할 때마다 느끼는 척하느라 개고생이었거든? 지 좆대로 하면서 뭘 얼마나 좋길 바라는 거야? 막말로 너보다 섹스 잘하는 남자가 널렸는데 내가 왜 결혼한 새끼를 만나? 좋게 말할 때 그냥 꺼지세요.”

줄줄이 쏟아내는 말에 남자가 걸레니 뭐니 했고, 진우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남자의 얼굴에 술을 끼얹었다.

“야!”

술로 안면 샤워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이목이 쏠렸는데, 진우는 그때도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쪽팔리게 굴지 말고 앉아.”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진우는 남자에게 명령했다. 분에 차서 씩씩거리던 남자가 당한 만큼 돌려주려는 듯 진우의 앞에 있는 잔을 움켜쥐었다.

“너 결혼한다고 내가 소리라도 칠까? 이미지 관리는 해야 할 거 아냐?”

진우는 남자의 손을 보면서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꺼지면 이 좁은 바닥에 네 사생활을 퍼트리지 않겠다는, 결혼해도 이 가게에 드나들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는 그런 의미가 담긴 은근한 협박이었고, 그에 굴복한 건 남자였다.

남자는 더러운 새끼가 어쩌고 하면서 그대로 자리를 떴고 진우는 혼자 남았다. 살벌했던 치정 싸움은 남자가 자리를 떠나는 걸로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사준은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그대로 가게를 나갔으면 치정 싸움 구경했네, 하고 한 달쯤 지난 뒤에는 기억도 못 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준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게에서 벗어나기 전에 진우를 돌아봤다.

진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남자의 자존심을 있는 대로 깎아 내렸으면서도 노기가 쉽게 가시지 않는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주먹 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였고, 그 떨림이 전신에 번져 있다는 건 조금 더 나중이었다.

저렇게 온몸을 떨 정도로 화가 나나? 결혼한다는 놈도 나쁜 놈이지만 그렇게 신랄하게 쏘아댔으면서, 얼마나 독한 거야?

혀를 내두르던 사준은 무심결에 진우의 얼굴을 본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울고 있었다.

진우는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닦지도 않았고, 훌쩍이지도 않았다. 그냥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꼭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그가 느끼는 감정이 서러움이라는 걸 보는 사람도 알 수 있었다. 양진우가 있는 곳만 공기의 색이 달라 보였다.

그동안 사준이 알고 있던 양진우에 대한 모든 관념이 깨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건 뭐랄까, 정말 다른 느낌이었다. 장미는 빨간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흰 장미도 있더라는 새로운 사실을 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개월 전 바에서 봤던 진우를 떠올리던 사준은 미간을 좁히고 얼굴을 구겼다. 그날의 진우를 생각하면 연상 작용처럼 유쾌하지 않은 과거도 같이 떠올랐다.

“한번 자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먹고 버리는 일회성 관계를 염두에 두고 진우를 안았고, 고맙게도 양진우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말했는데 탐탁지 않았다. 사준은 품에 안고 있던 이불을 뭉갰다. 답답함을 동반한 편두통이 일었다.

‘그래, 뭐. 한 번으로 안 되면 몇 번 더 해 보면 되지.’

사준은 들리지 않도록 속으로 읊조렸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간단하고도 이기적인 결론을 내려 버렸다. 말할 생각 없지만 어제 사준이 그 바에 간 건 처음부터 진우가 목적이었다.

그날 사준은 진우가 눈물을 갈무리할 때까지 계속 관찰했다. 그렇게 살벌하게, 속 시원하다는 듯이,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막말을 쏟아냈으면서 양진우는 순수하게 이별을 아파했다.

진짜 세상이 무너진 사람 같았는데, 그 모습을 보던 사준은 저런 상처 받은 얼굴을 언젠가도 봤었다는 걸 떠올렸다.

이미 인상도 희미해진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가 양진우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었다. 지금이라면 좀 더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그 동창 녀석은 실망과 서러움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응시했었다.

혼자 울고 있는 진우의 위에 잔상처럼 묻어뒀던 기억이 겹쳐졌다.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는 옆모습이 자꾸만 속에 있는 뭔가를 자극했다. 목구멍까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짜증과 답답함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돌아왔지만, 사준은 줄곧 진우와 만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라는 좁은 사회에 갇혀 있던 바람에 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상대가 과거의 그 녀석과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양진우라면 더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일은 일대로 바빴고, 가끔 바에 갔지만 그날 이후 진우는 그 바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바에 발길을 끊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일로 만났을 때 아는 척할 수도 없고. 그렇게 유야무야 석 달이 넘었고, 어제 바에 혼자 앉아 있는 진우를 발견했다.

애초에 사준은 진우가 있으면 어떻게 한번 비벼볼까 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있었다. 기회였다. 내내 끌어안고 있던 것을 해결할 기회.

사준은 우연인 척, 진우를 처음 본 것처럼 말을 걸었고 자존심을 살살 긁으면서 싸구려 도발을 감행했더니 술을 빠르게 마신 진우가 쉽게 넘어왔다.

호텔에 올 때까지만 해도 좆이 설까 싶었는데 옷을 벗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래가 반응했다.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여자랑 처음 할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마음이 조급했다.

마른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으려 하자 진우가 가방에 젤이 있다고 중얼거렸다. 문란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많이도 들어있었다.

있는 대로 다 짜서 미끌거리게 만든 다음 손가락을 밀어 넣고 여기저기 쑤셔봤다. 남자에 익숙한지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도 힘들어하던 구멍이 곧 느슨하게 벌어졌다.

빡빡한 곳이 차근차근 풀어지자 침이 고였다. 양진우가 눈물로 촉촉해진 눈을 움직여 올려다봤을 때는 불알까지 때려 박아 엉엉 우는 얼굴을 보고 싶은 이상한 욕구가 들끓었다.

멋대로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 건, 파렴치한과 헤어질 때 진우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좆대로 흔들면 좋아할 줄 알았냐는 그 말. 자존심이 있지 그래도 섹스인데, 혼자만 홍콩 갔다 소리 듣고 싶지는 않았다.

인내심을 득득 긁어서 있는 배려 없는 배려 다 했고, 결과적으론 둘 다 엄청나게 쌌다. 그랬는데, 그렇게 느꼈으면서 아침이 되자마자 없던 일로 하자면서 나가 버리는 건 또 뭔지. 튕길 거면 진작 튕겼어야지. 이미 한참 늦었다. 롤러코스터 타면서 실컷 비명 지르면서 즐겨 놓고, 내려왔을 때 아닌 척 새침 떨면 소리 지른 게 없던 일 되나?

사준은 천장을 멀뚱멀뚱 보며 고등학교 동창의 얼굴과 진우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렸다. 성 정체성을 확립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결혼할 것도 아니고, 잠깐 노는 정도야.

양진우라면 나중에 관계를 정리할 때도 귀찮게 굴지 않을 거다. 싫다는 사람한테 매달리지는 않는 걸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나. 어쩌면 그날 진우가 운 것도 이별이 슬퍼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금방 다른 남자 만나러 바에 왔겠지. 일단 지금 만나는 사람은 확실히 없는 거고. 아니, 뭐 있어도 상관없나?

사준은 제멋대로 흐르는 생각을 갈무리하지 않고 어쨌든 딱이네, 라며 결론을 내렸다.

사준의 입장에서 진우는 딱 그거였다.

한번 먹고 버리기도 좋고, 적당히 즐기다가 끝내기도 좋은 상대.

* * *

진우는 소파에 드러누워 손잡이에 걸쳐놓은 발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머릿속에 금요일에 했던 섹스와 그 대상이 절로 떠올랐다.

주말 내내 이사준을 몇 번을 떠올렸을까. 아무리 연애에 목매고, 조금만 잘해주면 홀랑 넘어가서 쉽게 반하는 양진우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진우는 자신의 문제점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양진우였다. 차라리 얼굴에 홀랑 넘어가면 얼굴값 하는 놈한테 당했구나, 하고 동정이라도 받을 텐데 진우는 멀쩡하게 생긴 놈이 조금만 잘해주면 홀랑 넘어가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다.

이사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낙엽도 다 떨어진 늦가을에 혼자 봄날 떨어지는 벚꽃처럼 마음이 흩날리는 이유가 섹스가 좋아서였다면 낫다. 그러면 가벼운 엉덩이가 홀랑 넘어갔다고 생각이라도 하겠는데, 진우가 꽂힌 포인트는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이었다.

섹스하고 사이좋게 앉아서 밥을 먹자니, 그건 좀 과한 망상을 부풀리면 데이트 신청처럼 들렸다. 그래서 순간 움찔했다. 방을 나와서도 다시 돌아가서 밥 먹자고 할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 안 한 건 이사준이 일로 얽혀 있는 사이라는 것,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그가 게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진우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게이가 아닌 남자와 만나기 시작하면 그 끝이 어떤지, 정말 질릴 정도로 경험했다. 사실 그쯤 경험했으면 연애에 학을 뗄 만도 한데, 서른 중반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진우는 연애에 대한 로망을 접지 못 했다.

보통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인정하고 나면 평범한 로맨스는 한 수 접어두는 편인데, 진우는 그러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체육 선생을 시작으로 남들 다 하는 평범한 연애가 하고 싶었다. 동성애자라고 연애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데렐라나 로미오와 줄리엣급의 그런 드라마틱한 전개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 아껴주고 한 사람만 좋아하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우가 고른 남자들은 어째서인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뿐이었다. 솔직히 진우가 연애 대상을 고르는 눈은 형편없는 정도가 아니라 친구인 태준의 말을 빌리자면 장님 수준이었고, 아니면 그냥 헤테로가 취향이라고 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태준이 차라리 게이 바에서 상대를 찾아보라고 조언까지 했다. 게이 바는 상대적으로 동류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추천한 거였는데, 그 게이 바에서조차 진우는 항상 이상한 놈을 골랐다.

양다리는 차라리 평범한 축이었다. 그 애인이 여자인 경우도 이미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고 개중에는 태준이 싫어하는 유부남 게이도 있었다. 유부남 게이라니, 표현부터 저질스럽다. 게이면 게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진우는 대놓고 혀를 찼다. 잠깐 떠올려 봐도 진짜 하나 같이 거지 같은 놈들뿐이었다. 집이 없다는 말에 같이 살게 해줬더니 여자를 데려오지 않나, 어머니가 아프다고 해서 돈을 빌려줬더니 도박장에 있지를 않나, 술에 절어서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던 놈도 있었고, 새벽에 전화해서 나갔더니 길바닥에서 섹스하려던 놈도 있었다. 그런 게 흥분된다나 뭐라나.

개중에서도 톱은 미팅차 방문했던 레스토랑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던 남자였다. 그는 가족과 외식 중이었는데, 그 가족 중 열 살짜리 딸의 얼굴을 본 건 정말 최악이었다.

진우는 머릿속에 둥둥 떠오른 남자들을 밀어내듯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니까 이사준은 안 된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부질없는 짓으로 세월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별의별 놈을 다 만나 봤다고 자부하지만 그건 상대가 게이인 척했기 때문에 속은 거지, 처음부터 헤테로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진우는 자신이 쉽게 반하는 체질임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이사준보다 괜찮은 남자가 조금만 잘해주면 이런 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을 거라며 손바닥으로 배꼽 언저리를 살살 문질렀다.

* * *

월요일, 진우는 책상 위의 서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당분간 방송국에는 발길을 좀 끊고 싶었는데, 태준의 소송 건이 서류 더미 중 제일 위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친구를 잘 둬도 너무 잘 뒀지, 뻑하면 명예 훼손이라니. 소송 거는 사람도 웃긴다. 결국에는 다 취하하고 말 거면서 왜 고소하는 걸까. 이런 소송에 겁먹을 인간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런 뉴스를 안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나?

진우는 상대를 바꿔 가며 욕을 하고 서류를 눈으로 읽었다. 목사가 신도를 성추행했다는 고발 방송 때문에 신도들이 장태준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 내용을 쭉 훑어본 진우는 사내 메신저를 켜서 어쏘(Associate Lawyer) 김유민에게 교회 목사 자료를 모아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 * *

오전에 두 건의 서류를 확인한 진우는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일 중독자의 모습이었다. 원래 일하는 걸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쭉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진우의 집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법조계 출신들이 즐비했다. 당장 아버지만 해도 대법원 판사 출신으로 현재는 대기업 사외이사, 어머니는 모 대학의 법대 교수, 누나와 형은 각각 현직 판검사였고, 그 사정은 할아버지 대로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온 집안이 줄줄이 법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 집에서 자랐으니 진우의 진로 역시 자연스럽게 법으로 정해졌는데, 그게 싫었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부모님은 진우가 변호사가 아니라 판검사가 되길 바랐지만, 진우는 성적 잘 받아 놓고 아버지 바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유치한 이유로 변호사를 선택했다. 아니, 사실은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관심을 받고 싶었다.

이십 대 초반, 진우는 가족을 상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일 커밍아웃을 했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에게만이라도 인정받고 싶어서 욕심을 부린 일이었는데 돌아온 건 냉담뿐이었다.

진우의 아버지는 당장 결혼하라며 상을 뒤집었고 어머니는 앓아누웠으며, 형은 혐오스러운 눈길을 보냈고 누나는 울었다. 엉엉 우는 누나를 붙잡고 진우는 자신이 아픈 게 아니라는 말을 밤새 해야 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로 집안이 그렇게 쑥대밭이 될 줄 몰랐다. 양진우는 어제와 똑같은데, 양진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제와 달랐다. 집안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견디지 못한 진우는 도망치듯 유학을 다녀왔고 사법 고시 합격 후 판검사가 아니라 변호사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못마땅해할 걸 알고 일부러 고른 거였다. 안다. 그렇게 눈 밖에 나고 싶으면 법을 때려치우면 되는데 진우는 그러지 못했다.

법에서까지 완전히 발을 빼면 정말로 버림받을 거 같아서 고작 반항한다고 고른 게 변호사였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기대와 바람도 있었는데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국내 최고라 불리는 로펌 L&B에 입사했을 때 딱 한 번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서 남자 좋아한다는, 그딴 얘기 절대 하고 다니지 말라 했고 진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몇 년 만에 연락해서 한다는 얘기가 그거라니, 더 기대할 게 없었다. 커밍아웃 이후 부모님과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15년쯤 안 보고 지냈다.

형이랑 누나는 법원에서 가끔 마주치지만 그저 얼굴만 아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래도 누나는 가끔 커피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진우가 거절했다. 누나가 또 그렇게 울어 버리면 회복 불가능일 것 같았다. 그렇게, 진우한테 가족은 게이 아들은 버릴 수 있는 사람들로 결론이 났다.

물론 세상 모든 가족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안다. 똑같이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태준은 지금도 가족들이랑 잘 지내니까. 그래서 진우는 그냥, 자신이 좀 운이 안 좋아서 그런 가족을 만난 것이라 여기고 살았다.

* * *

금요일, 교회 목사를 만나 합의를 본 진우는 태준에게 연락했다.

도장도 찍을 겸 점심 먹자고 했더니 태준은 방송 날이라 바쁘니까 회사로 오라고 했다. 이사준을 만날 가능성이 큰 곳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나 있는 친구라는 게 너무 도움이 안 됐다.

안 가고 싶었지만 태준의 도장까지 찍어야 서류가 마무리되는 건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진우는 적당히 좀 부려 먹으라며 속으로는 온갖 불평을 해대면서도 태준과 점심으로 먹을 초밥을 포장했다.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는 비가 왔다.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하필 이동할 때 비를 뿌려서 진우는 운전석에 앉아서 자동으로 움직이는 와이퍼를 봤다.

와이퍼가 차 유리에 흐르는 물기를 지우는 것처럼 사준과의 하룻밤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와이퍼가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빗물이 다시 흐르는 것처럼 이미 몸에 새겨진 기억을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지나야 흐릿해질 기억이었다.

* * *

방송국 지하 1층 사무실 앞에 선 진우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긴장했다. 일 때문에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몇 번이나 턱을 쓸어내리고, 문에 붙은 〈스쿠프〉라는 프로그램명을 눈으로 읽었다.

이사준은 취재를 나가서 사무실에 없을 확률이 높은데, 혹시 모를 상황들이 떠올라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이사준이랑 장태준이 같이 있으면 잘 못 할 것 같았다.

벌써 일주일이 다 돼가는 원나잇 상대에 대해 혼자만 알 수 없는 미련을 품고 있는 것이 짜증 났다. 갈팡질팡, 그렇게 5분쯤 지났을 때 사무실 앞을 서성이는 진우에게 처음 보는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제보 때문에 왔느냐는 질문에 진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전에 말쑥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프로그램 법률 자문을 맡고 있고 어쩌고 하면서 명함까지 내미는, 하도 많이 해서 익숙한 인사치레를 떨고 있는데 태준이 개인 사무실로 들어오라며 불렀다.

원래도 상냥한 성격은 아니지만 태준이 유난히 까칠했다. 진우는 혹시 태준이 자신과 이사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건가 싶어 시키지도 않은 눈치를 봤다.

진우는 포장해 온 초밥을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 테이블에 꺼내 놓으면서 태준을 힐끔거렸다. 진우가 그렇게 눈치를 보는 동안 태준은 유리창 너머를 뚫어져라 봤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는 남자, 조금 전 진우와 통성명했던 하건희 기자를 보고 있었다. 태준의 시선은 그냥 팀원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누구야? 귀엽게 생겼네.”

진우는 태준을 찔러 보는 심정으로, 하건희 기자가 마음에 든다는 뉘앙스로 말을 던졌다.

“신경 꺼, 네가 관심 둘 애 아냐.”

헤테로한테 잘 반하는 진우를 걱정하는 친구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 말투 뭐야? 너는 관심 둬도 되고?”

시비조로 말했음에도 태준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갖고 온 서류에 도장을 찍게 하고, 혹시 아까 반응이 잘못 본 건가 싶어 은근슬쩍 하 기자 얘기를 다시 꺼내자 태준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신경 쓸 애 아니라고 했다.”

“사내 연애도 아닌데 네가 간섭할 거 아니지 않아?”

진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하며 태준의 반응을 기다렸다.

“내가 할 거야.”

“뭐?”

“연애, 내가 할 거라고.”

가벼운 배신감, 약간의 흥미가 동시에 진우를 자극했다. 장태준을 10년 넘게 봤지만 연애한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네가 차일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왤까.”

진우가 건수를 잡은 것처럼 놀렸지만 태준의 반응은 한결같았고, 그 반응에서 읽힌 진심에 얘기를 길게 듣고 싶었다. 남의 연애, 그것도 장태준의 연애라면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재밌게 느껴졌다.

“소송 잘 정리됐으니까 술 사.”

“너 나 모르게 또 헤어졌어?”

술 사라는 말에 태준의 입에서 제일 먼저 흘러나온 말이었다. 진우가 헤어질 때마다 술 상대를 했던 태준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진우는 이사준이 떠올라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사준이 스스로 제 팀장한테 말했을 리 없으니, 아무리 장태준이어도 둘 사이 일을 알 리 없었다.

“만난 적이 있어야 헤어지지. 이따 저녁에 술이나 사라고.”

진우는 방송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사준을 만날 거 같아서, 밤에 보자는 말로 대화를 정리했다.

“방송 끝나고 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진우는 그걸로 만족했다.

* * *

남들은 불타는 금요일을 외치고 있는 이 밤, 진우는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된 경위는 이번에도 잘난 친구가 원인이었다.

퇴근 후 태준과 만나기 위해 방송국으로 가던 진우의 눈에 포장마차에 앉아 있던 하 기자가 보였고, 셋이 마시면 되겠다 싶어 말을 걸었는데 결론적으로는 혼자 남았다.

직장 상사와 술 마시기 싫다는 하 기자가 도망치자 그와 연애하겠다는 장태준이 그를 쫓아갔다. 아주 둘이 난리가 났다. 배경이 해변이었으면 나 잡아봐라, 했을 꼴이다.

진우는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둘이 무슨 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둘은 회사에서 알게 된 사이는 아니다. 하긴, 장태준이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의 뭘 보고 연애를 하네, 마네 하겠나.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던 사이겠지. 아니면 하 기자 입사 직전에 둘이 원나잇이라도 했나?

진우는 상상에 빠져서 혼자 키득거리다가 이내 드라마도 아닌데 입사 직전에 상사랑 원나잇이라니 그럴 리 없지, 하며 시뻘건 양념이 묻은 오돌뼈를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혼자서 이렇게 먹으면 너무 청승맞아 보이는 거 아닌가.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닌데.

혼자 술 마시면 이제 막 밀고 당기기에 불이 붙은 장태준이 부러워질 거고, 그러면 또 이사준이 생각날 거 같다. 아니, 이미 생각하고 있는 건가?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더 생각하는 게 사람이라더니 딱 그 짝이었다.

원나잇 후유증 한번 더럽게 오래간다. 그러고 보니, 삼 개월 전에 헤어진 놈이랑도 시작이 섹스부터였다. 그놈도 진짜 최악이었다. 일이 바빠서 못 만난다더니 여자랑 영화관에 온 걸 딱 마주치고 말았다.

‘바람을 피울 거면 좀 안 걸리면 안 되나? 아니지, 여자가 진짜고 내가 바람이었나?’

떠오른 허무함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거지 같은 새끼.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집에서 소개해 준 사람이라 한 번 만난 거라니. 안 걸렸으면 그 여자랑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나랑은 그냥 떡이나 치면서 즐기려고 했겠지.’

진우는 이미 과거가 돼버린 남자를 향해 험한 욕을 뱉다가 원나잇이 뭔지 곰곰이 따져봤다. 자신은 원나잇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원나잇은 말 그대로 하룻밤으로 끝나는 사인데, 진우는 이제까지 몸을 섞은 놈이랑 하룻밤으로 끝난 적이 없다. 진우는 그 관계가 다 몸에서 시작하는, 흔히 말하는 몸정부터 시작하는 그런 연애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사준이랑 한 건 진짜 원나잇이겠지. 와, 인생 첫 원나잇이네. 진우는 썩 즐겁지 않은 생각을 하며 소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다음 상대는 하 기자 같이 좀 작고 귀여운 상대로 만날까. 그러면 장태준처럼 진지하게 연애가 되려나.

사고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걸 잡지 않고 있는데 진우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양 변호사님? 여기서 뭐 해요?”

약 30분 전쯤 진우가 하 기자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이 들려 고개를 들자 이사준이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에 놀란 것도 잠시, 진우는 저를 혼자 남겨 둔 태준에게 욕을 퍼부었다.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정돈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준이 진우의 앞에 앉았다. 바에서 옆자리에 앉았을 때처럼, 사준은 아무런 허락도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

“누구랑 마시고 있었어요?”

테이블 위에 있는 하 기자의 흔적을 보며 사준이 물었다.

“앉으라는 말 안 했는데.”

“혼자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화장실 갔을 수도 있고.”

“가방도 옷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확신을 담은 말에 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진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우리 팀장이랑 마시던 중?”

“뭐, 대충.”

“그러다 팀장님은 일 생겨서 그냥 간 거?”

사준은 보지도 않았으면서 본 것처럼 말하더니 싱긋 웃었다. 눈꼬리가 반달처럼 살짝 접히는 근사한 미소였다. 진우는 저런 게 멋있어 보이면 안 된다 생각하며 입천장을 혓바닥으로 꾹 눌렀다.

“계속 마실 거예요?”

“이제 마시기 시작한 건데요.”

태준이랑 하 기자가 난리 블루스 추는 거 구경하느라 진우가 마신 술은 반 모금이 전부였다.

“같이 마셔 줄까요?”

“됐어요.”

같이 술 마셨다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진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준이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빼 진우와 거리를 좁혔다.

“그럼 기다릴까요?”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진우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사준이 테이블 아래 있는 진우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운동화의 앞코가 정장 바짓단을 건드리는 것에 몸이 단박에 긴장됐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요.”

“술이 필요하면 마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왜요?”

“양 변호사님이랑 호텔가고 싶어서요.”

야식 메뉴를 말하는 것 같은 가벼운 어조여서 순간 진우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 줄 알았다.

“아니면 우리 집도 괜찮은데.”

잘못 들을 수 없는 말이 사준의 입에서 연이어 흘러나와 마신 것도 없는데 술에 취한 기분이 들었다.

진우는 주책없이 발발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동요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가 근육을 움직여 웃어 보였다. 이런 식으로 웃는 건 언짢은 말이나 곤란한 말, 혹은 대꾸하기 어려운 말을 들었을 때 진우의 대처 방법이었다.

‘뭐지, 도대체, 왜?’

진우는 사준의 생각을 가늠해 보기 위해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이사준이 왜 또 이러는 걸까, 잠깐의 고민 끝에 결론이 나왔다. 섹스는 하고 싶은데 대상을 물색하기 귀찮았던 사준의 눈에 양진우가 띈 거다.

진우는 자신이 얼마나 쉬워 보였으면 이사준이 이럴까 싶었다. 처음이 그렇게 쉬웠으니까 두 번째도 쉬울 거라고, 무엇보다 게이니까 남자면 그냥 다 좋아할 줄 알고 이러는 것처럼 보였다.

사준은 혼자 숨 가쁘게 머리 굴리는 진우를 빤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어떤 말로 꼬드겨서라도 같이 갈 거니까.

“이 기자님 집에, 갈 이유 없는 거 같은데요.”

고심 끝에 진우가 느릿하게 말을 뱉자 사준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끝이 둥글게 정리된 손톱에 진우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진우는 이어지려는 망상을 고개를 흔들어 재빨리 털어냈다.

저 손이 제 아래를 만진 거나, 안에 들어온 걸 떠올리면 안 된다. 아, 젠장. 진우는 속으로 한탄했다. 안 된다고 생각한 시점에 이미 떠올려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한 번이 어려운 건데, 우린 그 어려운 걸 했고. 그러니까 두 번째는 좀 쉽게 가는 게 어때요? 내일 쉬잖아요.”

사준은 그만 튕기라는 듯 테이블 아래 있는 진우의 다리를 다시 툭 하고 건드렸다.

‘유혹할 거면 좀 정성스럽게 하든가.’

진우는 당장에 일어서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여기서 열을 내면 우스워질 거고, 의식하고 있었다는 티가 날 것 같아서 어른스럽게 굴고 싶었다.

“쉽게 갈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요.”

사준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양 변호사님은 어땠어요?”

“뭐가요.”

“나랑 한 거, 좋았어요?”

사준은 턱을 괴고 상냥한 시선을 보냈다. 남자다운 얼굴이 나른하게 기울어지고 앞머리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언의 압박이 담긴 시선에 진우는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좋았다고 대답하면 사준의 의도대로 될 것이라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죠? 난 섹스파트너를 만들 생각은 없는데.”

진우는 마음도 없는 섹스를 여러 번 반복할 생각 없다는 솔직한 진심을 털어놓았다. 게이로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섹스파트너를 만들고 싶었던 적 없었다. 만나는 상대들이 진심을 몰라줬을 뿐이지, 몸만 통하는 사이 같은 걸 바란 적 없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사귀었던 놈은 이런 마음이 무겁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했었다.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진우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세상에 개새끼가 정말 너무 많다.

가만히 얘기를 들은 사준이 몸을 뒤로 물렸다. 등받이가 없는 포장마차 의자에서 똑바른 자세를 취한 사준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처럼 턱을 매만졌다.

“나도 그런 거 만들 생각 없는데요. 남자 섹스파트너라니, 그거 진짜 생각도 못 해 본 거네요.”

사준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곱씹듯이 말했고, 진우의 눈썹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그냥 물러날 줄 알았는데 사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우의 속을 긁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건데? 말끝마다 남자, 남자. 진우는 지금만큼은 사준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럼 우리가 같이 호텔에 갈 이유는 없고, 이 기자님 집에 갈 이유는 더 없는 거 같네요.”

진우는 이제 이 이야기는 끝, 이라는 느낌으로 정리했다.

“궁금해서.”

깔끔하게 물러설 줄 알았는데, 사준은 여운이 남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한 번 더 해 보고 싶다는 이유는 안 돼요?”

이어서 흘러나온 말에 진우는 표정 관리고 뭐고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라는 얼굴로 사준을 사납게 노려봤다.

“나도 좋았거든요, 근데 그게 남자랑 한 게 처음이라 좋았던 건지, 아니면 남자랑 해도 좋은 건지 궁금해서 말이죠.”

뻔뻔한 능청에 진우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도?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도’를 붙여가며 말하는 걸까.

진우는 심각하게 이사준이 돌았거나 그게 아니면 자신이 엄청나게 만만히 보인 거라고 느꼈다.

“난 좋았다는 말 한 적 없는데요.”

“싫었다고도 안 했잖아요.”

그게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죠, 진우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소모전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두 번째 했는데 그때도 좋으면요?”

대신 막 생겨난 다른 궁금증을 툭 던졌다.

사준의 눈동자가 진우의 머리 위쪽 허공을 향했다. 허공에 그만 볼 수 있는 화면이라도 있는 것처럼 짧게 응시하더니 이내 진우와 눈을 마주쳤다.

“그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뭐야, 결국 그냥 한번 하고 싶었다는 거 아냐? 진우는 이사준이 돌은 건 아니고 자신이 만만히 보인 것이라고 확실히 결론 내렸다.

“두 번째도 좋으면 양 변호사님 말처럼 남자 파트너라도 찾아볼까요?”

말끝이 살짝 올라갔지만,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말을 사준이 중얼거렸다.

“그럼 두 번째는 다른 남자랑 해 보는 게 더 확실할 거 같은데요.”

“확실히, 비교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한 사람이랑 연속으로 하는 건 정확한 확인이 안 될 거 같기는 하네요.”

중대한 연구 결과에 대한 논의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꼴에 진우는 슬슬 짜증이 차올랐다. 이쯤 했으면 물러나도 될 건데 사준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정 그러면 양 변호사님이랑 내가 궁합이 좋았던 건지, 알고 싶다고 하면 되겠어요?”

와, 진짜….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대 패주고 싶은 싸구려 유혹이다. 마치 자기가 그냥 지고 양보해 주겠다는 말투.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유혹에 실패해 본 적이 없다고 은근히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더 얄미웠다.

“한 번 해서 궁합을 논하기는 좀 그러니까.”

“이 기자님.”

진우는 사준의 말을 뚝 자르더니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왜요, 양 변호사님.”

“차라리 그냥 섹스를 하고 싶다고 해요.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이유 갖다 붙이지 말고. 남자랑 해 봤더니 꽤 괜찮았고, 마침 금요일이라 오늘도 하고 싶은데 눈앞에 적당한 상대가 나타난 거라고.”

“그럼, 그걸로 할까요?”

또 저런 식이지,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쉽다고, 엄청 쉽다고 생각할 이사준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다.

“가죠, 계산은 이 기자님이 해요.”

“또 내가 해요?”

또, 라는 소리에 진우의 미간이 좁아졌다가 이내 호텔비는 줬지만 그날 마셨던 술값은 주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무전취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아마 그날 술값도 사준이 냈을 것이다. 진우는 잠깐 고민하다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럼 그냥 택시 타고 혼자 가시든가.”

여자 꼬실 때는 아낌없이 술이고 밥이고 사줬을 거면서, 고작 포장마차 술값을 아까워하는 게 약이 올랐다.

간혹 그런 새끼들이 있었다. 일부러 안 좋은 거, 싼 거 사주고 헐값에 따 먹었다고 좋아하는 머저리들. 캔 커피, 삼각김밥, 컵라면만 사줘도 다리를 벌린다는 그런 얘기를 자랑처럼 하는 씹새끼들. 떠올리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기억에 진우는 말없이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갈까요?”

계산을 마치고 따라 나온 사준이 물었지만, 진우는 대답 없이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 앞에 멈춘 택시에 진우와 사준이 나란히 몸을 실었다.

“샤보이 호텔이요.”

진우는 사준의 의견은 묻지 않고 택시 기사에게 멋대로 행선지를 말했다. 국회의사당 근처에 있는 고급 호텔 이름에 사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어깨를 떨어가며 웃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아주 재미있어한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준이 계산했다. 진우는 사준이 키를 받아 오는 동안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렸는데, 도착한 방이 스위트룸이라는 걸 안 순간 입을 꽉 다물었다. 자신이 엿 먹이려 한다는 걸 알아차린 이사준이 일부러 이런 큰 방을 골랐다는 걸 바로 알았다.

남자 둘이 호텔에 온 것도 모자라 스위트룸이라니, 욕을 안 할 수가 없네, 진짜.

진우는 넓은 방을 다 둘러볼 생각도 안 하고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어차피 목적이 확실했기 때문에 서로 얌전을 떨면서 무드를 조성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이쯤 되니 오기였다. 처음에는 술에 너무 취해서 사준이 쥐고 흔드는 대로 당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진우는 속으로 다짐했다. 게이 섹스가 뭔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줘서 아주 혼을 쏙 빼놓고, 여자랑 못 하게 될까 봐 무서워져서라도 다시는 껄떡대지 못하게 하겠다고.

보통 때라면 하지 않을 괴상한 논리를 머릿속으로 마구 펼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행위에 혹시 뒤가 더 있지 않을까 하며 기대하게 될 것 같아서 싫었다.

진우가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먼저 옷을 다 벗어 던진 사준이 진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커다란 침대 위에 엉덩이가 떨어졌고 사준은 무릎으로 침대 위를 기어와 진우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탄탄한 몸이 다리 사이에 들어온 바람에 진우는 무릎을 접어 세운 채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준은 진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고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옆구리를 더듬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너무 급하게 굴었다. 마치 충분히 약을 올렸으니 그 보상을 하라는 것 같은 태도였다.

피부에 닿는 손끝이 뜨거웠다. 왜 이렇게 급하게 구느냐고, 진우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등허리에 촉촉하게 땀이 배고 긴장으로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사준은 진우의 입술을 머금었다. 조심스럽게 닿았던 입술은 곧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촉촉 소리와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입술 모양을 따라 귀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다가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입천장을 길게 훑는 걸 시작으로 입속 점막을 혀끝으로 자극했다. 혀를 빨리는 감각이 꼭 전신을 빨리는 것 같았다.

처음 잤던 날, 사준이 키스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진우의 머릿속에 불현듯이 떠올랐다. 아플 정도로 혀를 세게 빨리는 것에 진우가 움찔움찔 떨며 사준의 혀에 매달리자 곧 호흡까지 빼앗겼다.

음란한 소리가 뇌 속을 휘저었다. 생각을 막는 쾌감이 스멀스멀 번졌고, 사준의 커다란 손이 갈비뼈를 지나 가슴팍으로 올라왔다. 진우는 금방이라도 유두에 닿을 것 같은 손을 피하고자 몸을 비틀었다.

사준의 어깨를 뒤로 밀었지만 단단한 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사준은 손등으로 진우의 성기를 꾹 눌렀다. 성기 끝에서 흘러나온 액으로 젖은 팬티가 음란함을 알리는 것 같아 민망했다.

“하아, 잠깐, 좀…!”

팔뚝을 세게 밀어내자 사준이 불만스러운 눈을 한 채 겨우 뒤로 밀려났다. 페이스가 너무 빨라서 정신이 없었다.

진우는 석 달 열흘 굶은 짐승을 보듯 사준을 봤다. 이러다간 영락없이 휩쓸려서 또 지난번처럼 될 것 같았다.

“기다려, 봐요.”

“뭐요?”

진우는 놓칠 것 같은 주도권을 돌려놓기 위해 스스로 손가락을 빨아서 적신 다음 엉덩이 뒤로 손을 옮겼다. 팬티를 내리고 가슴팍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는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에 찔러 넣었다.

“풀 때니까, 이 기자님도 준비해요.”

“나는, 이미 준비가 끝났는데요.”

사준은 다리를 살짝 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사준의 성기는 팬티 너머로도 뚜렷이 알 수 있을 만큼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짝 옆으로 휘어진 성기를 보며 진우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저 큰 게 들어올 거라 생각하자 알 수 없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전신에 쫙 퍼지면서 겁을 먹은 것처럼 엉덩이가 움찔움찔 떨렸다. 내벽이 잘게 경련하면서 손가락을 자극했다.

“그런 거 같네요, 원래부터 이쪽에 소질 있던 거 아니에요?”

남자랑 해 본 적 없다면서 잘만 세운다는 의미로 비꼰 거였는데, 사준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내가 말했잖아요, 섹스 좋아한다고.”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사준이 정확히 주어를 말해서. 아니었다면 혼자 몇 번을 곱씹으면서 착각했을 것이다.

사준의 시선이 아래를 푸는 진우에게 쏟아졌다. 집중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은 시선에 진우는 셔츠 끝을 끌어 올려 입에 물었다. 좀 천박하게 보여도 괜찮을 거다. 어차피 한 번 놀고 말 사람한테 순정까지 바라는 멍청한 놈은 아닐 거니까.

이로 셔츠를 단단하게 물고 진우가 손가락을 하나 더 넣으려는데 사준이 팔목을 잡아당겼다. 엉덩이 사이에 들어있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가면서 몸이 쏠렸다. 사준의 품에 안길 것 같아 진우는 사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가볍게 주물렀다. 커다란 손이 멋대로 주무르는 바람에 살짝 벌어졌던 내벽이 비벼졌다.

“기다리라고, 했는데요.”

진우는 말 더럽게 안 듣는다는 의미로 말했지만 사준은 진우의 등 뒤에서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뭘 하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자 사준이 콘돔 포장을 뜯고 있었다.

“잠깐, 지금 바로 안 돼요.”

진우는 몸을 뒤로 빼며 말리려 했지만 이내 사준에게 붙잡혔다.

“양 변호사님이 기다릴 차례예요.”

그 짧은 시간을 설마 기다린 거라고 치는 건가? 진우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눈으로 사준을 바라봤다.

사준은 어이없어하는 진우의 엉덩이를 한쪽으로 잡아 벌리고 검지와 중지 끝을 밀어 넣었다. 읏, 살과 살이 맞물리는 느낌이 아니라 미끌거리는 고무가 느껴져 진우는 고개를 돌려 아래를 봤다.

콘돔을 뜯기에 당연히 성기에 씌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윤활액이 잔뜩 묻은 콘돔에 싸인 손가락 두 개가 진우의 엉덩이 사이로 진입하고 있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굉장히 이기적인 섹스를 할 거 같은데 이사준은 제법 배려라는 걸 할 줄 알았고, 그 모습에 진우는 자꾸만 홀랑 넘어가려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좁은 내벽을 가르고 들어온 손가락이 점막을 꾹꾹 눌러서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정도도, 못 기다릴 정도로, 하고, 싶었, 읏.”

“원래, 예쁘게 생긴 사람이 야하게 굴면 구경하는 거 좋아하는데.”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어질 말에 따라서는 사준의 얼굴에 주먹을 꽂을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쉬운 걸 넘어서서 만만하게까지 볼 것 같았는데, 사준의 입에서는 진우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양 변호사님한테는 내가 하고 싶네요.”

진우는 뭐라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반쯤 입이 벌어졌다.

“울리고 싶은 얼굴이에요.”

사준은 진우의 귀에 비밀을 고백하듯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남잔데 울면 야해 보이는 게, 신기하단 말이죠. 이어진 주절거림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진우는 눈앞의 남자가 저를 놀리는 건가 고민해야 했는데, 어느새 엉덩이 사이에 자리 잡은 손가락이 사고를 방해했다.

진우가 아무 반응을 안 보이자 사준이 시선을 위로 떴다.

“왜요, 별로예요?”

“아니, 별로는 아니고….”

“그럼, 무슨 말 좀 하지 그래요? 그때는 어디가 좋다고 잘만 말하더니.”

그때는 정신이 없었으니 무효라고 하고 싶은데 사준은 진우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섹스는 둘이 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진우는 말은 잘한다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끈적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때문에 숨이 가빠졌다.

“뭐, 그래도 양 변호사님이 자위하는 거 보여준다고 하면 그건 좀 보고 싶네요. 만약 보여줄 거면 홀딱 벗고 하는 걸로 보여줘요.”

‘절대 안 보여줘, 누구 좋으라고.’

이미 보여주려고 했던 건 다 잊은 채 진우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근데 진짜 안 젖네요.”

안쪽을 세게 비벼대는 손가락이 알싸함을 만들었고 사준은 살짝 인상을 썼다. 여기서 더 오래 걸리면 진우는 그가 귀찮다고 여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손가락이 쑥 빠져나가서 말이 딱 멈췄다. 여기까진가 싶어 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짜 학습 능력 없다, 양진우. 이 머리로 고시는 어떻게 합격한 걸까. 헤테로인 남자가 보일 반응은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양 변호사님이랑 하려면 젤은 필수로 갖고 다녀야겠어요.”

사준은 콘돔 포장에 남은 윤활액을 쥐어짜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발랐다.

“아니면 다음엔 모텔 갈까요? 모텔에는 러브젤 있잖아.”

“다음은, 무스, 읏…!”

이어질 말은 듣지 않을 것처럼 손가락이 단숨에 안쪽을 침범했다. 쭉 뻗어진 손가락이 내벽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건드려서 진우는 사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빨리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하게 움직이던 진우의 손길과 다르게 사준은 꼼꼼하게 움직였다. 손끝으로 점막을 문지르고, 길을 내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남은 손으로는 진우의 성기 기둥을 살살 문질렀다.

끝이 젖어서 번들거리는 성기를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어 대서 몸 전체가 간질거렸다.

“아, 하으….”

“변호사님, 알고 그러는 거죠?”

무슨 소리냐는 눈을 하자 사준은 진우의 아랫입술을 쪽 빨아들였다. 장난스러운 키스에 달달함이 가득했다.

“아흐, 하면서 끝을 길게 끄는 그 소리, 엄청 흥분돼요.”

“아니거든, 요?”

예상치 못한 말에 목소리가 살짝 뒤집혔다. 이쯤 되니 이사준이 사람 당황하게 하는 법을 공부라도 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진우였다.

“거짓말, 경험 많으니까 어떻게 하면 흥분할지 다 알 거 같은데. 남자니까 남자 유혹이 더 쉬운 건가.”

말도 안 되는 헛논리를 듣는 사람은 기가 막힌데, 말하는 사람은 진지해 보였다. 사준은 진우의 신음을 다시 들으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내벽을 문지르며 안쪽을 자극했다. 신음 얘기한 것이 마음에 걸려 진우는 입을 꾹 다물고 사준의 목을 팔로 꽉 끌어안았다.

몸이 더 밀착하자 사준은 머리로 진우의 셔츠를 밀어 올리면서 드러난 피부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입술이 닿는 곳에 쪽쪽 소리가 울렸다. 안쪽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나며 슬슬 풀어지기 시작한 내벽에서 찌걱 소리가 났다.

사준의 손가락이 안쪽을 꾹꾹 누르면서 빙글 돌리자 허리에 힘이 풀렸다. 몸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흘러내려서 진우는 사준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읏, 참고 있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준의 손가락이 전립선을 위태롭게 스쳐서 애가 탔다. 더 깊게 닿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진우가 허리를 흔들자 사준은 손가락으로 내벽을 길게 긁어내렸다.

“아, 거기, 하읏….”

진우는 느끼는 부분을 정확히 건드리는 손가락을 꽉 조이며 사준의 머리칼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엉켜 드는 머리카락 감촉이 예상외로 좋았다.

사준은 진우의 반응이 마음에 든 것처럼 웃더니 진우의 성기를 더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안 돼, 자꾸, 흔들, 면, 읏.”

“흔드는 것만 안 돼요? 찌르는 건? 그건 돼요?”

말과 함께 새어 나오는 숨결에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뜨거운 바람이 몸 안에 흘러들어올 때마다 몸이 절정으로 내몰리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안 돼….”

“변호사님 까다롭네요.”

들어줄 것처럼 대꾸했으면서 사준은 야속하게도 더 빠르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뒤를 찌르는 손가락은 이제 노골적으로 피스톤 질을 했고, 앞을 문지르는 손길도 영락없이 사정을 유도하는 움직임이었다.

“아흣, 진짜, 읏….”

이대로 가면 먼저 사정할 거라는 걸 알아서, 진우는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칭얼거리는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몸을 부들부들 떨자 성기 끝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액이 뚝뚝 떨어졌다.

“엄청 진하네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안 했어요?”

변호사라는 직업은 섹스를 매일같이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러는 이 기자님은 몇 번이나 했냐는 말이 진우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사정의 잔여감 때문에 혀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은 사준이 다른 사람과 섹스했다는 걸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안쪽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강제로 빠져나가면서 젖은 소리가 길게 울렸다. 품 안 가득 끌어안고 있던 사준의 목을 놓아주고 진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정쩡하게 걸치고 있던 팬티를 벗자 사준도 팬티를 벗고 협탁 위에 꺼내 놓았던 콘돔을 뜯었다.

“그건, 매일 갖고 다녀요?”

“사이즈 맞는 게 별로 없어서.”

사실일 거라는 걸 아는데 어쩐지 그가 말하니까 자랑처럼 느껴져 진우는 커서 좋겠다며, 어련하시겠냐며 입술을 삐죽였다.

진우가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 자세를 취하자 사준은 골반을 붙잡았다.

“덜 풀린 거 같은데 괜찮아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콘돔을 찢어 먹을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사준은 성기를 쥐고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뜨거운 열기가 입구에 닿자 진우의 몸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곧 이어질 이물감과 쾌감이 절로 예상돼서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진우는 사준이 어느 타이밍에 들어올지 쉽게 예상되지 않았다. 애꿎은 베개를 꽉 붙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골반을 잡고 있던 손이 내려가더니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엄지 두 개가 입구 주름에 닿고 노골적으로 구멍을 옆으로 잡아 벌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읏, 뭐 하는….”

“너무 좁아 보여서.”

벌어진 구멍 틈으로 공기가 스며들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속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후배위가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준의 귀두가 파고들자 진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맨정신에 몸이 열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사준의 좆 모양 그대로 아래가 벌어지면서 몸 전체가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 걸 머리가 자각했다.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내벽이 꿈틀거리더니 환영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사준에게 달라붙었다.

“후으, 왜, 이렇게… 엉키는, 거야.”

철썩, 순간 진우는 제 귀에 들린 타격음의 정체를 바로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똑같은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엉덩이가 화끈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사준이 한 번 더 큰 손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바람에 진우의 입에서 히익, 하는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좋아해 주는 건 좋은데, 하아, 힘을 빼야 다 넣죠.”

저질스러운 농담에 진우는 숨을 할딱거리면서 몸에 힘을 빼려고 했지만 아래를 꽉 채우는 성기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좀처럼 힘이 빠지지 않았다.

“하아, 양진우 씨, 힘 좀 빼 봐요.”

사준은 어금니를 꽉꽉 깨물어 가며 말했다. 아무 요령 없이 조여대는 통에 죽을 맛이었다. 속궁합이라는 게 진짜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넣은 것만으로도 끝내주게 좋은데 흔들면 얼마나 더 좋을지, 상상만으로도 아래에 피가 쏠려 터질 거 같았다.

진우는 명령을 내리는 사준의 목소리에 드러난 다급함과 초조함에서 참을 수 없는 섹시함을 느꼈다. 지배당하는 감각이 전신에 퍼져서 진우는 베갯잇을 꽉 쥐고 힘을 빼기 위한 심호흡을 반복했다.

하아, 하아, 사준은 반쯤 밀어 넣은 성기를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한 번에 밀어 넣기를 포기한 듯 집요하게 움직였다. 귀두가 입구 근처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진우의 안쪽을 열고 들어왔다.

사준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진우의 상체가 절로 흔들리면서 셔츠 자락이 말려 올라갔다.

“옷 입고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하아… 괜찮은 거 같네요. 흔들릴 때마다 속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게, 되게 꼴려요.”

꼴린다는 말에 진우는 제가 더 꼴렸다. 호흡 사이로 떨어지는 말들에 세포 전체가 웅성거리면서 열을 내뿜었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가랑이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야한 물을 뚝뚝 흘렸다.

“아, 흐으, 앗….”

사준은 진우의 셔츠를 어깨까지 밀어 올리고 등골을 손가락으로 쑥 훑었다가 등허리에 키스했다.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입술 때문에 진우의 몸이 또 긴장됐다.

“흣, 아읏.”

“키스하고 싶어, 고개 좀 돌려 봐요.”

으, 하으, 진우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사준이 안쪽에 들어있던 성기를 뒤로 물렸다가 퍽 소리가 나도록 처박았다.

혼내는 것 같은 그 움직임이 너무 좋아서 눈앞이 핑 돌았다. 몇 번 움직이지 않았는데 또 사정할 것 같았다.

“양진우 씨.”

사준은 진우의 등에 제 몸을 겹치고 주문이라도 거는 것처럼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우는 베개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사준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아 당겼다. 그대로 입술을 내어주자 그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혀를 밀고 들어왔다. 입술을 겹친 채 사준은 진우의 상체를 팔로 감아 당겼다. 셔츠 안쪽으로 들어온 손은 어느새 목까지 올라와 목덜미를 더듬고 있었다.

진우는 사준에게 뒤를 꿰뚫린 채 무릎으로 섰고 상체를 안긴 채 키스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그가 다시 진우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으읍, 막힌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갔다.

사준은 허리를 움직이면서 진우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호흡이 가빠져 입술을 떨어트리자 사준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졌고, 아래쪽에서는 쿨쩍 소리가 났다.

사준이 허리를 들썩거릴 때마다 극점이 있는 대로 뭉개졌다. 사준의 것이 안을 꽉 채운 채 허리를 묵직하게 움직이자 머릿속까지 이사준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아, 흐읏, 읏….”

밀려온 절정감을 이기지 못하고 진우는 몸을 꽉 조였다.

“아윽, 또, 이렇게… 하아, 존나 조여.”

못 참겠다는 듯 욕설을 지껄이던 사준이 진우의 상체를 놓아주자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성기를 놓아주기 무섭게 진우가 정액을 토해내는데 사준은 사정 봐주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싸고 싶다는 본능을 좇는 허리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사준은 진우의 골반을 틀어쥐고 성기를 푹푹 처박았다. 사정하고 있는 와중에 뒤를 찔리자 진우는 온몸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아, 그만, 안 돼… 하응, 거기, 그만….”

호텔에 들어올 때의 결심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린 진우는 애원하듯 중얼거렸지만, 몸 위로 떨어지는 쾌감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온몸에 땀이 솟아나고 아래가 달라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야릇한 소리가 났다.

눈앞이 어질거렸다. 쾌감이 너무 크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준이 움직이는 게 너무 좋은데 또 너무 과해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비명 같은 신음을 뱉어내자 살이 부닥치던 요란한 소리가 뚝 멈췄다. 동시에 사준의 근육이 단박에 솟아올랐다가 일순간 탁 풀렸다.

하아, 하아….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진우의 목 언저리로 뚝뚝 떨어졌다. 허리 아래가 완전히 녹아 없어진 것 같았다.

“진짜, 미치겠네. 그, 쌀 때 조이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사준은 진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면 어쩔 거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자극해서 한 번 더 하겠다고 하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냥 자는 척하기로 했다.

양심이 있으면 자는 사람 끌어안고 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진우가 죽은 듯이 가만히 있자 사준의 성기가 안쪽에서 주르륵 빠져나갔다. 실눈을 뜨고 힐끔 보자 여전히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 끝에 정액이 꽉 찬 콘돔이 아래로 처져 대롱거렸다.

진우는 저런 무지막지한 걸 다 받은 자신을 칭찬했다. 물론 속으로만.

콘돔을 정리한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매만졌다.

“안 자죠?”

“…….”

“더 하자고 안 할 테니까 씻으러 가요.”

씻으러 가자는 말을 믿어도 되나? 아니, 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나중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이대로 눈을 뜰지 말지 고민하는 진우에게 사준은 계속 안 일어나면 내가 들어서 옮길 거예요, 라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했다. 결국 진우는 항복하듯 눈을 떴다.

“하아, 안 자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눈두덩이 움직이는 거 다 보였어요.”

사준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믿어도 되나 싶었지만, 소년 같은 웃음에는 시커먼 속내가 없어 보여 진우는 순순히 손을 붙잡고 말았다.

* * *

미지근한 온수를 맞으면서 진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준은 섹스를 잘한다. 좋아한다고 할 때부터 예상했지만 정말 잘했다.

그것도 그냥 단순히 잘하는 게 아니라 비어 버린 공간을 촘촘하게 메워주는 것처럼 달라붙어서, 섹스하는 동안에는 사랑받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사준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섹스를 잘했다.

“짜증 나….”

리벤지는 실패다. 게이 섹스에 눈이 돌게 하네, 어쩌네 하는 계획은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진우는 복잡해지려는 속을 달래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 * *

진우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사준은 침대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양 변호사님 체력이 많이 약하네요.”

“아니거든요?”

“근데 그렇게 힘들어해요?”

“이 기자님 크기를 생각해요.”

진우는 가운만 입고 있는 사준의 다리 사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불퉁하게 말했다.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사준이 ‘알죠?’라는 의미를 시선으로 전했다. 진우는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싼 거면 조루지, 라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괜히 조루니 어쩌니 해서 자극했다가 2차전에 들어가면 곤란했다.

진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준은 침대 위에 누워서 자리를 잡더니 제 옆에 빈 곳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올라오라는 신호에 진우가 살짝 머뭇거리자 그는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자고 가요.”

사준은 살짝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난 얼굴에 진우는 숨을 참았다. 콩깍지를 벗겨내도 모자랄 판인데, 그 짧은 사이에 콩깍지가 더 두꺼워졌다.

“굳이 그럴 필요 있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낫다. 헤테로는 안 된다고,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느냐고, 진우는 스스로 말했다. 아니, 그래, 많이 봐줘서 남자랑도 섹스할 수 있으니 이사준은 이제 찐 헤테로는 아닐 수 있지만, 그래 봤자 바이였다.

바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헤테로보다 더 나빴다. 동성과 연애하듯이 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을 택하니까. 동성만 연애 대상으로 볼 수 있는 진우 같은 사람한테는 바이만큼 나쁜 것도 없었다.

“기껏 잡은 스위트룸인데 안 쓰면 아깝잖아요.”

그런데도 사준은 천연덕스럽게 진우를 향해 손짓했다. 머리로는 이미 목적은 다 달성한 듯했으니 그만 가겠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푹신한 침대와 사준의 능청스러운 손길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이불 안쪽에는 정액 안 묻었으니까 빨리요. 근데 묻었어도 어차피 양 변호사님 거니까 상관없지 않나.”

진우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사준이 계속 말했다.

“나는 콘돔에 쌌으니까.”

꼭 저렇게 한마디를 더 해야 직성이 풀리지. 만약, 혹시라도 이사준이 나중에 팀장이 된다면 〈스쿠프〉는 지금 장태준이 이끌 때보다 더 많은 명예 훼손에 휘말리고 말 거다.

자고 갈지 말지, 이미 기울어진 마음을 어떻게든 눌러 보려고 시선을 돌리던 진우의 눈에 옷걸이에 슈트가 얌전하게 걸린 게 보였다.

방에 들어왔을 때는 대충 벗어 던져뒀기 때문에 사준이 정리해 둔 것이 확실했다. 딱히 이런 것에 마음 설렐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입속에서 사탕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정한다. 양진우는 이런 사소한 것에 마음이 흔들린다. 진우는 혀끝을 굴려보다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침에 일찍 갈 거예요.”

안 자고 가면 기껏 잡은 스위트룸이 아까우니까 그냥 잠만 자고 간다는 핑계를 자신에게 하고 진우는 불을 끈 뒤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이 폭 떨어지자 사준이 몸을 옆으로 돌려 진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시선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지, 왜 말도 없이 저렇게 보기만 하는 걸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진우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뭐가 궁금해요?”

사준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정한 척하는 건지, 진짜 다정한 건지 헷갈렸다.

“여자들이랑 할 때, 그거 끝까지 다 넣었어요?”

“어땠을 거 같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상상해 봐요.”

아마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미친놈 소리가 먼저 나갔을 것인데, 침대 위라는 장소 때문인지 아니면 벌써 사준의 화법에 익숙해진 것인지 욕은 안 나왔다.

진우는 그저 게이한테 이성과의 섹스를 상상해 보라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이 짓도 오늘까지다 하고 말았다.

“됐네요.”

“그럼 나도 됐어요.”

유치한 말장난을 더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진우가 입을 닫았다.

“근데.”

침묵이 내려앉은 찰나, 사준이 운을 뗐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진우는 가만히 기다렸다.

“변호사님이 제일 조여요.”

진우는 너무 어이가 없어 대꾸할 말을 완전히 잊고 말았다. 그냥, 얘는 미친놈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진우가 사준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리고 있는데, 이불이 스치고 사준의 손이 진우의 가운 자락을 파고들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단단한 팔이 덮쳐 온 것에 진우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속옷이라도 입었어야 했는데 가운만 걸치고 침대에 들어온 건 너무 멍청한 짓이었다. 긴장으로 아랫배가 쏙 들어갔다.

“무서워요?”

“내가 왜요?”

“만지니까 피하는 것처럼 배가 쏙 들어가서요.”

“보통은 배고프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이지?

“배는 안 고플 거 같은데.”

어쩐지 야한 농담처럼 들리는 말에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벅지에 비벼볼까 했는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뻔히 보이는 유혹인데 왜 제대로 반응을 못 하겠는지, 진우는 발가락을 안쪽으로 꽉 오므린 채 긴장감이 퍼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대로 또 넘어가면 허벅지로 안 끝날 거다. 분명 안에 들어올 거고, 아까보다 풀어졌을 거니까 이번엔 더 막무가내로 쑤실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또 며칠을 그 감각에 시달릴 거고….

진우는 자신이 지금 사준에게 넘어가면 안 되는 이유를 몇 가지나 떠올렸다. 여기서 넘어가면 진짜 속된 말로 좆 되는 거다. 이사준은 금방 잊고 일상을 살 건데 혼자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몸이 완전히 굳어 버리기 전에 등을 돌렸다.

“잘 거예요.”

더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자 사준이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잘 거라니까요.”

“나도 잘 거예요.”

“그럼 좀 떨어져요.”

“누가 옆에 있으면 붙어서 자고 싶지 않아요? 난 끌어안고 자는 거 좋던데.”

그거야 당신이 만난 사람들이 당신보다 작고 부드러웠을 테니까 그런 거고.

“남잔데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진우는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입에 뱉지 못하고 조금 완화 시켜 다른 말을 했다.

“양 변호사님은 왜 자꾸 그런 거 물어요?”

“네?”

“나는 사람 체온을 좋아하는 거예요.”

남자, 여자 그런 거 따질 게 아니라. 생략된 말 뒤로 사준은 목덜미에 콧등을 문지르면서 손바닥으로 진우의 아랫배를 가만가만 두드렸다.

암만 사람 체온이 좋은 거라고 해도 이성애자가 남자 끌어안고 좋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진짜 좀 어떻게 적당히 좀 하지.

“양 변호사님 피부가 좋기도 하고. 근데 가만 보면 양 변호사님이 나보다 남자, 여자 더 따지는 거 같네요. 나는 여자만 된다고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계속 듣고 있으면 바보 같은 말을 할 거 같아서, 이를테면 그럼 사귈래요? 같은 말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진우는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하면 안 되니 입을 다른 것으로라도 써야 했다.

진우는 눈을 감은 채 세뇌하듯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사준의 저 말에 의미를 두면 안 된다. 저건 다 섹스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자는 당연히 되고, 이젠 남자도 된다는 걸 알아서, 그걸 말하는 거다.

“양 변호사님.”

더 말하고 싶지 않은 진우의 속을 몰라주고 사준이 또 진우를 불렀다.

“잔다면서요.”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요. 아까 포장마차에서 우리 팀장이랑 있던 거 맞아요?”

“왜요?”

“맞으면 왜 먼저 갔나 해서요, 그렇게 바쁠 일 없을 건데. 술 마시다 혼자만 두고 가는 거 좀 너무하잖아. 아무리 친해도 말이죠.”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진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원래 장태준은, 나 혼자 안 둬요.”

아마 하 기자가 아니었다면 태준이 갈 일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런 건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주변에 있는 남자한테 쉽게 반해버리는 탓에 남은 친구라고는 태준밖에 없는데, 고작 그런 일로 서운해할 리가 없지 않나.

“그래요?”

뭔가 더 꼬치꼬치 물을 줄 알았는데 사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

“오늘은 진짜 어쩔 수 없는 일. 원래 태준이랑 둘이 마시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럼 누구랑 있었는데요?”

“말 안 해줄 건데요, 엄청나게 내 취향이었던 사람이라.”

진우는 자신이 사준의 반응을 떠보는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우리 팀원이었을 거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조금 더 궁금해해 줬으면 하는 진우의 바람과 다르게 사준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잘 자요.”

대신 달콤한 굿나잇 인사를 들려줬다.

* * *

진우는 높은 천장 무늬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못 잘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자서 정신은 맑았다. 그런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잠들 때는 그냥 허리를 끌어안는 정도였는데, 언제 팔베개를 한 건지 진우의 몸은 완전히 사준한테 쏙 안겨 있었다. 몸의 뒷면 전체가 사준한테 촘촘하게 달라 불어 있었고 어깨 언저리에는 고른 숨이 떨어졌다.

진우는 자신이 조금만 움직이면 사준이 깰 것 같아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언제쯤 움직이는 게 적당할까 고민하는데 뒤에 있던 사준이 꿈지럭거렸다.

고르게 뱉던 숨소리가 끊어지고 그가 몸을 뒤척이더니 정수리 부근에 이마를 문질렀다. 사준이 잠투정을 부리는 동안 진우는 미동도 안 했다.

잠시 후 사준이 짧은 한숨과 함께 느릿하게 움직였다. 사준은 진우의 목 아래 밀어 넣었던 팔을 조심스럽게 빼고 일어나 앉아서는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진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지르다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진우는 긴장됐던 어깨에 힘을 쭉 빼고 일어났다. 뭘 한 것도 없는데 얼굴에 열이 몰렸다.

사준이 사라진 방향을 한번 보고, 진우는 어젯밤 이용했던 욕실로 향했다. 문을 닫기 무섭게 정면에 있는 거울을 보자, 얼굴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십 대도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건 너무 웃기잖아.

칫솔에 치약을 쭉 짜내 입에 물면서 진우는 억지로 심란한 속을 정리했다.

이사준은 영역 밖 사람이다.

친구의 팀원, 일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연히 게이 바에서 만나 어쩌다 한 번 한 섹스가 두 번으로 이어지고 그 바람에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아무리 쉽게 반하는 성격이라 해도 너무 했다.

나이가 열일곱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나이도 아니지 않나. 이미 단물, 쓴 물, 구정물, 그중에도 쓴 물을 너무 많이 먹은 나이였다.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섹스하고 다니는, 게이도 아닌 남자를 만났다가는 마음이 걸레가 돼서 너덜너덜해질 게 분명하다.

진우는 최악으로 향할 제 미래를 그리면서 양치 거품을 세면대에 뱉었다.

원나잇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이상한 자존심을 부려서 두 번째가 된 게 좀 걸리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뭘 어쩌겠나. 여기까지, 진짜 딱 여기까지만 하자.

욕실에서 나오자 사준이 옷을 입고 있어서 진우도 말없이 옷을 입었다.

“밥 먹고 갈래요?”

“아뇨, 일찍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사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같은 일을 겪고 나니 사준은 진우를 좀 이해할 수 없었다. 섹스는 신나게 하고 밥은 안 먹는 건 무슨 기준인지. 게다가 거절은 본인이 했으면서 왜 실망한 표정을 짓는 건지. 진우의 심리는 알기 어려웠고,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또.”

호텔에서 나온 사준이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토요일 아침, 한적한 대로에서 진우는 멀어지는 사준을 바라봤다. 모퉁이를 돌 때까지 사준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고, 그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뭐랄까…. 가슴 한쪽이 휑한 기분이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뼈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진우는 모르는 사이에 혼자만 느끼는 허전함이 싫어서 머리칼을 헤집고 꽉 조여 맸던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나중에 또, 라니. 내가 무슨 취재원이냐.”

들리지도 않을 불만을 중얼거렸지만 이미 시려진 가슴은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 * *

딱히 할 일이 없는 주말이라 시큰둥한 시선으로 TV를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명함을 받아 간 사람이 연락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에 진우는 기본적으로 모르는 번호도 다 받았고, 그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았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어조는 더 조심스러웠다.

― 안녕하세요, 하건희입니다.

이름이 머릿속에 바로 들어오지 않아 잠깐 멍했다가 이내 어젯밤 태준이 진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하 기자님.”

아는 척을 하자 약간의 안도와 긴장 섞인 목소리로 만나자는 말이 흘러나왔다.

진우는 혼자 있어 봐야 괜히 싱숭생숭해지기만 할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는데, 약속 장소는 뜻밖에도 구치소 앞이었다.

알고 보니 며칠 전 검거된 연쇄 살인 사건 피의자를 만나는데 기자라고 하면 안 만나 줄 것 같아서, 변호사가 필요해서 불렀다는 게 하 기자의 설명이었다.

그에 진우는 혹시 태준이 팀원들한테 양진우 변호사는 마음대로 불러서 이용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구치소까지 왔는데 돌아가는 것도 웃겨서 진우는 하 기자와 함께 피의자를 만났다. 진우와 하 기자가 만난 피의자는 세 명의 살인사건과 연루된 사람으로, 현재는 그중 한 건의 범행만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도 미수에 그친 것만 인정하는 걸 봐서는 꽤나 영악한 범인이었다.

진우가 습관처럼 명함을 보여주자 피의자가 눈을 번득였다. 최근 화제가 되던 사건이라 피의자의 담당 변호사가 국선이라는 건 진우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피의자가 진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다.

‘암만, 국선보다야 L&B가 이백 배는 낫지.’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피의자를 만나고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을 때 하 기자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진우가 보기엔 의심할 것도 없이 세 건 모두 조금 전 만난 피의자가 저지른 범행인데, 하 기자는 뭐에 꽂힌 건지 피의자한테 완전히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취재할 때 이렇게 무턱대고 편드는 건 장태준 스타일이 아닌데. 막말로 편드는 건 변호사가 할 짓이지 기자가 할 건 아니지 않나?

태준과 진우는 각자의 직업을 두고 술안주 삼아 언쟁 아닌 언쟁을 자주 했는데, 그럴 때면 태준은 변호사를 ‘돈 있는 사람 쫓아다니는 속물’이라고 했고 진우는 기자를 ‘망상을 사실처럼 쓰는 족속’이라고 했다.

물론 진우가 말한 그 족속에 장태준은 예외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이렇게 물불 못 가리고 지나치게 기울어진 자세로 취재를 하는 하 기자가 도대체 어디가 좋아서 태준은 연애하겠다고 한 걸까.

진우가 아는 태준은 직업의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도 안 된 기자를 좋아한다고? 심지어 연애하고 싶을 정도로? 진짜 미스터리네.

* * *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도 죽인다는 이 말은 호기심은 좋을 게 없다는 거고, 옛말은 틀린 게 없다. 진우는 지금 순간 태준과 하 기자의 관계를 궁금해한 자신을 원망했다.

하 기자와 구치소를 나오는 길에 태준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서 진우는 어제 못 마신 술을 마실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고, 태준의 팀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술집에 하 기자를 데려왔다. 당연히 태준과 셋이 마실 줄 알았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하에 있는 술집에 들어섰을 때, 태준을 놀릴 생각으로 부풀었던 진우의 머리는 하얗게 리셋되고 말았다.

“어? 신입, 이랑 양 변호사님? 이건 또 의외의 조합이네요.”

아주 친한 척, 진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사준이었다. 이사준은 도대체 왜, 주말에 직장 상사랑 회사가 지척인 곳에서 밥을 먹고 있는 건데? 기자들은 원래 사생활이 없어? 주말 개념도 없어? 그런 건 장태준 하나 아니었어?

“이 기자님….”

파르르 떨리는 입가에 힘을 준 채 진우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이사준은 뭐가 재미있는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냥 두면 악수라도 청할 기세였다. 진우는 그냥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억지로 데려온 하 기자한테도 미안했고, 사준을 의식한다는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싫었다.

진우는 대충 눈에 보이는 메뉴를 주문해서 입에 쑤셔 넣었다. 진우가 열심히 음식을 입에 쑤셔 넣는 동안 네 사람이 앉은 테이블의 대화는 사준이 주도했다. 원래 말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말을 너무 잘했다. 하 기자가 발령받은 지 며칠 안 된 걸 감안하고 보면 정말 엄청난 친화력이었다.

대화에 끼지 않고 듣고만 있던 진우의 귀에 나이 얘기가 들렸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사준과 자신의 나이 차이를 계산했다.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였다.

이건 진짜 대박 아닌가. 아니지, 뭐가 또 대박이야. 네 살 차이 안 만나 본 것도 아니고.

몇 년 전 진우가 만났던 남자는 네 살 연상으로 맞춤 슈트를 제작하는 사람이었다.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는데, 알고 보니 진우 말고도 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둘이나 더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진우가 화를 내자 그는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좋은데 어쩌냐는 말을 아주 어른스럽게 말했었다.

그때 진우는 구정물에 빠진 기분을 느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그날 바로 헤어졌고 그동안 그 남자 가게에서 맞췄던 옷들을 몽땅 버렸다. 그냥 버리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아파트 옥상에서 옷을 태우다가 신고 들어가서 벌금 문 건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 * *

“간다, 나중에 봐.”

가게에서 나오기 무섭게 진우는 뒤도 안 돌아보고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사준은 태준에게 인사하더니 진우의 차로 다가왔다. 조수석 앞에 서서 도어 잠금 해제를 기다리는 모습에 진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는 방향 같으니까 태워줘요.”

사준은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태워주긴, 무슨….”

진우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준과 실랑이하는 모습을 눈치 빠른 태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차 문을 열자 사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수석에 올랐다.

차를 출발시키는 진우의 눈에 백미러로 태준이 하 기자를 차에 태우는 게 보였다. 확실히 둘이 무슨 사이인 건 맞는 거 같다. 팀원이라고 해도 일부러 집에 데려다주는 수고를 할 태준이 아니니까.

백미러에서 시선을 떼고 옆을 보자 사준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있었다.

“뭐예요?”

“변호사님 우리 집 모르잖아요.”

“그러게요, 나는 이 기자님 집을 모르는데 이 기자님은 어떻게 내 집이랑 같은 방향이라는 말을 했을까요.”

“집이 어딘데요?”

이렇게 뻔뻔하게 굴 수도 있는 걸까.

진우는 사준과 말하고 있으면 자신의 사고가 꽉 막힌 건지 아니면 사준이 그냥 4차원인지 헷갈렸다.

“그걸 왜요.”

“나는 양 변호사님 집으로 가도 상관없으니까요.”

“적당히 어디 내려 주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지하철역이 보이면 차를 세울 생각으로 움직이는데 사준이 턱을 매만졌다. 말을 고르는 것 같은 표정이라 진우는 저도 모르게 사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위트룸 비싼 거 알죠?”

“그래서요?”

진우는 얼굴을 구겼다. 돈을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이제까지 진우가 만났던 남자들이 돈을 원하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근데 그건 사귀는 사람이었으니까 준 거고. 호텔비는 원래 당연히 꼬신 사람이 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한 번밖에 못 했잖아요, 그러니까 집에 갔다가요.”

진우는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젤도 사 뒀어요.”

이어진 이사준의 말에는 코까지 막혔다. 이것도 유혹이라고 봐야 하나? 아니, 여기서 오케이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고 널을 뛰었다. 처음이야 원나잇이었다고 치지만 두 번, 세 번이 반복되면 그건… 섹스파트너는 절대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이미 섹스파트너 아닌가? 하, 진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섹스파트너는 싫다고 말했을 텐데요.”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달라붙는 시선이 뼛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진우는 정면에 보이는 신호에 집중했다.

“나도 그런 건 싫은데, 근데 변호사님이랑 섹스는 하고 싶거든요. 그럼 이걸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와, 저 개새끼. 진우의 입속에 욕이 고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지금은 몸뿐이지만 하다 보면 다른 것도 좋아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속에서 열이 끓었다. 가지고 노는 듯한 말에 기대하게 되는 자신도 싫었지만 저렇게 말하는 이사준이 뭘 알고 하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

진우는 차오르는 모호한 감정들을 꾹 눌렀다. 휩쓸리면 안 되는데, 이미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마음은 사준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왜, 몸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세상 사람들이 다 쓰는 말은 원래 진리인 법이고.

진우는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미 이런 식으로 변명하고 핑계를 만드는 거 자체가 게임 끝이다. 마음속 저울이 기우는 게 느껴졌다. 간신히 6 대 4 정도로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쏠린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남자랑 한 게 그렇게 좋았어요?”

“좋았어요, 좋았는데 좀, 중간에 끊긴 감이 좀 있죠.”

“남자끼리 하는 섹스는 원래 품이 많이 들거든요? 이 기자님이 여태까지 하던 섹스랑은 다르게.”

품도 많이 들고 뒤처리도 힘들고 몸에 무리도 간다. 하기 전에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받는 사람만 고생이다. 그러니까 어제 사준이 만족하지 못한 걸 알아도 더 하자고 보채지 않은 거다. 다음은 없을 거고, 없어야 했으니까.

“근데 그 품이 많이 드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사준은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오늘은 내가 처음부터 풀어줄게요.”

진우는 손바닥으로 클랙슨을 마구 두드리고 싶어졌다.

아, 젠장. 저 싸구려 유혹에 저울이 7 대 3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 * *

만약 연인이었다면 꽤 설레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귀는 사람의 집에 온다는 건 그만큼 허락받은 느낌이 드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게 아니다.

진우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기 위해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차라리 호텔을 가자고 할 걸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사준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반듯하게 주차했고, 엘리베이터에 얌전히 오른 상태였다.

“여기서 멀어요?”

엘리베이터 숫자판에서 8층을 누른 사준이 물었다.

“뭐가요?”

“변호사님 집이요.”

“별로 안 멀어요.”

“잘됐네요, 다음에는 변호사님 집도 한번 가요, 우리 집보다 좋을 거 같으니까.”

뭐, 안 좋지는 않겠지. 진우는 사준의 말을 어디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여태까지 집을 궁금해했던 남자들은 진우의 재력을 눈으로 확인할 목적을 갖고 방문했었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약간의 덤이었다. 이사준도 그런 걸까? 아니면 별 의미 없는 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 사준이 문을 열고 진우를 기다렸다.

“원래 이렇게 쉽게 집에 초대하고 그래요?”

사준은 뭐가 궁금하냐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잘 모르는 사람 집에 초대하는 거 좀 그렇잖아요.”

“난 변호사님 잘 아는데.”

“……?”

“볼 거 다 봤잖아요, 더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진우는 살짝 허무한 얼굴로 웃었다. 사준이 감정의 교류 같은 걸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왼쪽 가슴을 중심으로 퍼지는 눅진눅진한 감정을 떨치기 위해 진우는 이사준의 공간으로 성큼 들어섰다.

현관을 지나자 바로 보이는 거실은 좋은 말로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파 주변에는 옷이 떨어져 있었고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자료로 짐작되는 서류 더미들, 그리고 그 옆에는 에너지음료와 커피 캔들이 여러 개 있었다. 술병은 없었지만, 저것만으로도 충분히 식생활이 엉망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TV장 옆에 있는 책장에는 책이 빼곡했는데, 들쑥날쑥한 걸 보니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거실만 봐도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오는 혼자 사는 남자의 전형성이 보였다. 그나마 담배를 안 피워서 냄새는 안 나는 게 다행이다.

“침대는 깨끗해요.”

‘깨끗한 게 아니라 침대에서 자지를 않는 거겠지.’

늦게 들어와서 거실 소파에서 작업하다가 그대로 자고 일어나서 출근하는 생활이 보지 않았음에도 훤히 그려졌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안쪽에는 방, 맞은편에는 주방이었는데 딱 보기에도 사용하는 주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냉장고에도 보나 마나 저런 캔 음료만 잔뜩 있을 거다. 무슨, 홀아비냐고.

고개를 돌려 보자 안쪽에 문이 두 개 보였다. 하나는 침실일 거고, 하나는 옷방이려나.

“씻을 거죠?”

사준이 집에 온 목적을 실현하려는 듯 물어서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방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알려줄 거란 기대도 안 했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건네자 사준이 제 겉옷도 벗어서 소파에 툭툭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욕실로 진우를 잡아당겼다.

“같이 씻게요?”

“욕실에서 푸는 게 좋지 않아요?”

“됐어요, 알아서 풀고 올 테니까.”

“쑥스러워하는 거? 내가 해준다고 했잖아요.”

짧은 한숨과 함께 진우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한번 거절하려고 입을 움직인 순간 사준과 눈이 마주쳤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그 눈동자에 진우는 그냥 생각을 접었다.

* * *

진우가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욕조에 앉아 머리만 내놓은 채 드러누워 있자 거품이 잔뜩 묻은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피 마사지라도 하는 것처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에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어졌다. 진우의 정수리를 매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은 사준이 누군가의 머리를 감겨 주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욕실에 같이 들어오길래 다짜고짜 욕조로 밀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의외였다.

“근데 우리 신입이랑은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신입? 아, 하 기자요? 아뇨, 그럴 리가.”

“그럼 오늘은 갑자기 그렇게 같이 움직인 거?”

“연락이 와서.”

“연락처는 언제 또 주고받았대요?”

“그냥, 뭐 어쩌다 보니. 근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양 변호사님 우리 팀원들이랑 은근히 거리 두잖아요. 근데 신입이랑은 아닌 거 같아서.”

“별로, 거리 둔 적 없어요. 혁이 형이랑도 친하고.”

“그건 안 지 오래돼서 쌓인 친분이고.”

진우는 사준이 너무 정확하게 정곡을 잡고 비틀어 대서 할 말이 없었다.

태준의 팀원들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기자였고, 진우는 변호사였다. 필요할 때는 서로 돕지만 그 판세가 언제 바뀔지 모르는 사이란 말이다.

이를테면 태준의 팀에서 고발 보도하는 대상이 진우의 클라이언트라면 상황은 완전히 바뀔 거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티 안 내고 적당히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거리를 둔다는 걸 알고 있었다니.

문득 진우는 자신이 이사준의 취재 대상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 기자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다시 돌아온 질문에 진우는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차마 태준이 하 기자한테 관심이 넘치는 거 같아서, 궁금해서 그런 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건 태준의 사생활이니까. 그렇다고 제대로 대답 안 하면 사준이 계속 물을 것 같았다.

“하 기자님이 좀 제 취향이라.”

가볍게 말을 흘린 진우는 입술을 혀로 할짝댔다. 사준의 반응이 내심 궁금해서 기다리게 됐다.

“그런 거면 뭐, 이해가 가네요.”

하지만 돌아온 건 맥이 빠질 정도로 허무한 반응이었다.

“근데 양 변호사님, 야하네. 몸 따로 취향 따로라니.”

진우는 스스로가 아주 멍청하게 느껴졌다. 이사준에게 뭔가 기대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혼자 상처받는 꼴이 웃겼다.

“눈 감아요.”

샤워기를 쥔 사준은 진우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멍하니 보고 있던 천장이 가려지고 어둠이 내려왔다. 이사준이 지금 제 얼굴을 보지 않아서 무척 다행이었다.

“어떻게 할래요?”

머리를 감겨 주고, 거품이 가득 묻은 샤워 타월로 몸을 닦고 물로 헹궈 준 사준은 여기서 벽 잡고 설래요? 아니면 침대로 갈래요? 하고 물었다.

친절한 척했지만 입에서 나온 선택지의 폭이 넓지 않았다. 아니, 실상 어떤 걸 선택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침대로.”

그나마 나은 선택지를 진우가 고르자 사준은 싱긋 웃었다.

“씻고 나갈게요. 먼저 나가도 괜찮죠?”

“도망갈 걸 걱정하는 거예요?”

“설마요, 못 기다리고 혼자 자위라도 할 걸 걱정하는 거죠.”

능청스러운 대답에 진우가 고개를 젓자 사준은 세면대 장에서 꺼낸 커다란 타올을 진우의 어깨 위로 떨어트렸다.

* * *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면 침실은 어두웠다.

진우는 불을 켤까 하다가 어차피 끌 건데 그럴 필요 있나 싶어 말았다. 침대 끝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사준이 서 있었다.

“팬티 입었네요?”

문틀에 삐딱하게 기대선 사준이 진우의 몸을 쓱 훑어봤다. 품평이라도 하는 것 같은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그러는 이 기자님은 바지까지 입었네요.”

진우는 잘빠진 상체만 드러낸 채 사준이 입고 있는 회색 운동복 바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남의 집 침대에서 다 벗고 기다리는 취미는 없어서요.”

거짓말이다.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었다. 벌거벗고 침대에 앉아 있기는 그랬고, 이불에 들어가 있기는 더 그래서.

“좀 더 섹시하게 기다릴 줄 알았는데.”

“이 기자님은 바라는 게 많으시네요.”

“바라는 게 많은 게 아니라 이제 곧 섹스할 침대에 앉아서 업무 처리는 아니지 않나, 그 얘길 한 거예요.”

진정이 안 돼서 메일을 좀 보고 있었던 건데 그걸 또 어떻게 안 건지.

진우가 대꾸하지 않고 핸드폰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내려놓자 사준의 손이 진우를 밀었다.

어둠에 묻혀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에 진우는 엉덩이를 뒤로 움직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곧 발바닥에 이불이 닿았다.

사준의 몸이 가까워지면서 진우는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바디워시 향에 콧등을 찡그렸다. 한번 냄새를 의식하자 이 방 전체에 감돌고 있는 사준의 체취가 숨 막힐 듯이 몰려와 심장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응했다.

“특별히 싫어하는 거 있어요?”

잠깐 고민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을 본 사준은 피식 웃으면서 팬티 밴드에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살살 끌어내렸다. 마주친 눈동자가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럼 좋아하는 건?”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에 진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것저것 해 본 게 너무 많아서, 딱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거예요?”

놀리는 목소리가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다정했다.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리드 당하는 건 너무 낯설어서 진우는 재깍재깍 반응할 수가 없었다. 원래 섹스파트너한테도 이렇게 다정한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기대해도 되나?

“그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거죠?”

심장이 멋대로 발작했다. 가만두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혓바닥을 둥글게 마는데 사준이 눈을 마주했다.

“어차피 할 생각으로 온 거잖아요,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하면 또 진짜 아무 말도 안 할 것 같아서 진우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찡그렸다.

뭐가 좋은지 사준은 샐샐 웃으면서 진우의 뺨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가 손에 걸고 있던 팬티 밴드를 완전히 아래로 잡아당겼다.

별것 아닌 행동 하나하나에 긴장이 몰려왔다. 귓가에 닿는 숨결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사준이 귓바퀴를 혀로 할짝댔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고막을 지나 뇌를 자극했다. 흥분이 몸 안쪽에 차곡차곡 쌓이는 간질간질한 기분을 견디기 힘들어 진우가 발을 버둥거리자 부드러운 이불 위에서 발바닥이 미끄러졌다.

“나야 그렇다 치지만, 양 변호사님은 왜 긴장했어요?”

“이 기자님이, 긴장해서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진우는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긴장은 전염된다고 하더라고요.”

사준은 실없는 농담을 했고 그 바람에 진우의 입에서도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슬쩍 흘러나왔다.

“그거 이 기자님도 진짜 긴장했다는 말이에요?”

“긴장보다는 기대에 가깝죠. 한 번도 안 해 본 거니까.”

은근히 신경을 거스르는 말이었지만 진우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하나 반응하기엔 자신이 체력이 아까웠다.

사준은 팔을 쭉 뻗어서 침대 아래를 몇 번 건드리더니 튜브형 젤을 집어 들었다. 빨간색 뚜껑의 젤을 보며 진우는 정말 사 놨네, 했다.

사준은 젤을 손가락에 묻히고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있는 주름을 살살 문질렀다. 간지럼 태우는 것 같아서 몸에 바짝 힘을 주자 혓바닥이 다시 귓바퀴를 건드렸다. 귀를 자극당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갈라졌다.

“어색하게 구는 것도 순진해 보여서 좋지만, 계속 그렇게 힘주고 있으면 아플 거 같은데요.”

다정한 경고와 함께 젤이 발린 손가락이 구멍 안으로 진입했다. 읏, 젖은 손가락이 안에 들어오는 감각에 눈을 꾹 감자 피부 세포가 민감하게 곤두섰다.

진우가 작게 신음하자 사준은 진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라는 눈동자로 진우를 보면서 사준은 깊숙한 곳을 쓰다듬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기, 얼마나 늘리는 게 좋겠어요? 두 개?”

어림도 없다는 의미로 도리질 치자 사준은 진우의 이마에 입술을 누른 채 그럼, 세 개? 하고 물었다. 세 개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사준의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와 눈두덩에 닿았다.

“아닐 건데, 더 해야 할 건데.”

‘네 개를 넣으면 손가락만으로 아래가 찢어지는 거 아닐까.’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사준은 웃었고, 그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진우도 살짝 웃고 말았다. 그리고 틈을 노린 손가락이 하나 더 밀고 들어왔다.

“두 개도 이렇게 조이는데, 손가락 말고 다른 걸로 풀어 본 적은 없어요?”

별 의미 없는 질문인 걸 아는데 진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사준이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자신이 가진 딜도나 로터 같은 걸 알 리가 없지 않나. 방이 어두워서 정말, 무척 다행이었다. 만약 밝았다면 얼굴이 붉은색으로 변했다는 걸 사준은 바로 알아차렸을 거니까.

“읏, 그냥 좀 빨리….”

“어떻게 빨리해요? 이렇게 빡빡하게 조이는데.”

사준은 몸을 일으키더니 손가락을 물고 있는 구멍 틈으로 젤을 더 짜냈다. 끈적끈적한 젤이 아래로 줄줄 흘러내렸고 곧게 펴진 손가락이 안쪽을 꾹꾹 누르면서 내벽을 훑었다.

젤을 쏟아부은 만큼 구멍 틈으로 손가락이 무리 없이 빨려 들어왔다. 좁은 길을 뚫고 한 몸처럼 움직이는 손가락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에 진우는 다리에 단단히 힘을 줬다. 그러지 않으면 발을 버둥거려 이불을 다 걷어차 버릴 것 같았다.

헐떡이느라 벌어진 진우의 얇은 입술을 사준은 혀로 문질렀다가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거리는 혀가 입안 점막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손가락을 움직이자 잔뜩 젖은 아래가 녹아내렸다.

진우가 양팔을 들어 사준의 목에 팔을 두르자 입술이 더 깊게 결합했고 그에 비례해서 손가락이 더 깊은 곳을 꾹꾹 눌렀다. 아픔이나 이물감보다는 흥분이 더 강해졌다.

“아, 이, 사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며 진우가 작게 중얼거리자 사준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좋네요, 이름으로 불러 주니까.”

뺨에 닿은 채 움직이는 말랑한 입술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 행동에 맞춰 몸 안쪽에서 무언가 흘러넘쳤다. 찌걱, 사준은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다.

“변호사님은 부드럽게 해주는 거 더 좋아하는구나.”

당연히 그렇지, 세상에 어떤 사람이 험하게 다뤄지는 걸 좋아하겠나. 아니, 뭐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진우는 그쪽이 아니었다. 고정관념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섹스는 다정해야 한다는 게 진우의 지론이었다. 연인과 함께라면 더더욱. 뭐, 그렇다고 해서 이사준이 연인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뜨거운 숨결이 이제는 목덜미에 닿았다.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열기는 사준이 진우를 원하고 있다는 티를 명백하게 나타냈다.

엉덩이 안쪽에 들어온 손가락이 왕복운동을 하자 진우의 내벽이 움찔움찔 떨렸다.

“하나 더 들어가요.”

낮은 음색과 함께 구멍이 벌어지는 감각에 진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 흐으, 그냥, 진짜….”

“쉬, 쉬, 일단 손가락부터 잘, 먹어봐요.”

음란한 말을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에 허리 안쪽이 달콤하게 떨렸다. 세 개가 된 손가락이 하나처럼 움직였다. 사준의 손가락이 앞뒤로 빠르게 움직이자 질척질척 소리가 커졌다.

쌕쌕거리는 숨과 함께 신음이 나올 것 같이 진우가 입을 꾹 다물자 사준이 안쪽을 쿡 찔렀다. 이렇게 해도 소리를 내지 않을 거냐는 듯한 움직임에 발가락이 쫙 벌어졌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반응을 살피면서 풀어주는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몸이 더 흥분했다. 내벽을 훑듯이 문지르고 쓸어주길 반복하는 손길에 허리가 가볍게 떠올랐다. 그 순간 사준의 손가락이 안쪽을 꾸욱 찔렀다.

“아흣…!”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음이 진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참고 있던 것이 무색한 신음에, 감고 있는지도 몰랐던 눈을 뜨자 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당혹감에 진우가 시선을 피하려고 하자 사준은 아까와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꾹꾹 눌렀다.

아, 아응, 흣. 신음을 감추지 못하자 풀어진 구멍 입구를 드나드는 손가락 움직임이 빨라졌다.

사준의 말랑한 입술이 쇄골에 닿았다가 좀 더 아래로 향했다. 진우는 손가락에 정신이 팔려서 입술이 향하는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사준의 입술이 가진 목적지를 알아차리고 몸을 뒤틀었지만, 그 바람에 오히려 튀어나온 돌기가 사준의 혀끝에 닿았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부드러운 유방만 만지고 빨아봤을 사준에게 명백한 차이를 느끼게 할 부위여서 피하고 싶었는데, 사준은 봐주지 않았다.

그는 살짝 튀어나온 부분을 입술로 머금고 길게 빨다가 혀끝으로 갉작였다. 희롱하듯 위아래로 움직이는 혀 때문에 진우는 허리를 가만히 두기가 어려웠다.

“하지, 마, 싫어….”

“싫은 거 맞아요? 살짝 건드리니까 아래는 조이는데?”

사준이 유두를 이로 물고 말하는 통에 진우는 반응을 숨기지 못했다.

“여기도 혼자 만져요?”

진우가 고개를 흔들자 사준은 아, 다른 사람이 만져줬겠구나, 라며 멋대로 납득했다.

진우는 조금 억울했다. 거길 만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사준에게는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듯했다.

사준은 혓바닥을 쭉 내밀어 작은 돌기를 핥아 올리고 빨기를 반복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고 있던 유두가 성감대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기 시작했다.

진우가 허리를 비틀면서 발가락으로 시트를 움켜쥐자 가슴팍이 뜨거워졌다. 잠깐 멈췄던 손가락을 사준이 다시 움직이면서 돌기를 빨아들이자 딱딱해진 유두만큼 아래쪽 성기가 단단하게 일어섰다.

위와 아래를 동시에 공격당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신이 사준의 손과 입술에 풀리면서 뜨거워졌다. 지속적인 자극에 눈앞이 하얗게 물들면서 절정이 몰려왔다.

“아, 흐으, 하으읏…!”

진우는 목을 뒤로 젖히면서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초점까지 나가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어디를 좋아하는지, 모를 수가 없는 반응이네요.”

손가락으로 느껴 버린 것이 민망해 진우가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단단한 몸통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지금 느낀 거죠?”

진우는 알면서 왜 자꾸 물어보나 싶어 고개를 숙여 제 아래를 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성기는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는데 나온 게 없었다. 말간 쿠퍼액만 묻은 성기는 투명하게 번들거렸지, 흰 점액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 싸고 느낀 거, 맞죠?”

아무 말도 못 하는 진우를 두고 사준은 여자랑 다를 게 없네, 라고 멋대로 지껄이더니 엉덩이에 넣고 있던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제 세 개도 막 움직일 수 있어요.”

그만 빼라고 말하고 싶은데 진우는 혼이 반쯤 빠져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사준이 신기하다는 듯 진우의 성기를 가볍게 쓸어 올리자 끝에 고여 있던 흥분의 증거가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은 양이 너무 많았다.

민망해서 손바닥으로 가려 보려 했지만 사준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진우의 성기를 감싸 쥐고 귀두 끝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남자가, 이렇게까지 질질 흘릴 수도 있구나, 뒤에 쑤셔 주는 게 그렇게 좋아요?”

사준은 손가락 끝으로 전립선을 살살 문지르며 진우의 성기 반응을 살폈다.

“거기, 자꾸, 만지, 지마….”

“기분 좋아 보이는데 왜 만지지 말라고 해요.”

사준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손가락으로 내벽을 후비면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하으, 아응… 싫다, 니까….”

“여기 누르면 끝에서 줄줄 흘리는데? 암만 봐도 이건 싫은 게 아니잖아요.”

진우가 고개를 살짝 내려 아래쪽을 흘끔 보는데 사준의 손가락이 내벽을 푹푹 찔렸다.

“양 변호사님, 좆도 큰데 뒤로 이렇게 싸는 거 보니까 너무 야하다.”

“아, 흐윽, 안, 아니… 하응, 거기… 그, 아읏.”

과민한 장소를 자극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진우가 허리를 들썩이자 사준은 손가락을 주르륵 빼냈다. 엉덩이 사이로 젤이 뚝뚝 떨어지는 감각에 진우는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 네 개까지 넣어 보고 싶었는데.”

못 참겠네.

사준은 욕망을 숨기지 않고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어던졌다.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발기한 성기가 퉁 튀어나왔다. 핏줄까지 도드라진 것은 말 그대로 흉기였다. 얇은 고무가 씌워지는 것까지 보고 있으려니 진우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묻어났다.

무엇에 대한 공포인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으면서 진우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자 사준이 발목을 꽉 붙잡아 당겼다. 절정에 도달해서 늘어진 몸이 사준의 손아귀에 쉽게 끌려 내려갔다.

어디 가요, 평이한 어조였는데도 소름이 돋았다. 지금 순간, 진우는 잡아먹힌다는 말이 뭔지 실감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준의 허벅지 위에 진우의 엉덩이가 올라가면서 허리가 가볍게 떠오르고 다리가 벌어졌다. 딱딱하게 발기한 살덩이가 그 사이를 금방이라도 파고들어 올 것 같아 진우는 숨을 참았다.

눈을 감으면 더 무서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부러 눈을 감지 않은 채 보고 있자 사준은 내팽개쳤던 젤을 다시 들었다.

그는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발기한 성기 대신 튜브 끝을 밀어 넣었다. 뭘 하는 건가 싶은 순간 이사준이 튜브를 꾹 눌렀다.

“흐으읍…!”

끈적한 액이 흘러들어와 내벽을 역류했다. 견디기 어려운 감각에 몸을 비틀자 사준이 튜브를 빼내더니 툭 던졌다.

“많이 젖어 있는 게 좋을 거 아니에요.”

멋대로 젤을 쏟아부은 주제에 사준은 마치 진우를 위한 것처럼 굴었다. 무언가 말할 틈도 없이 딱딱한 귀두가 닿았는데, 입구에 닿은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넣을게요.”

“아, 하윽!”

사준은 양손으로 진우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면서 성기를 진입시켰다. 젤로 흠뻑 젖은 구멍이 빠끔 벌어지면서 살덩이가 안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거대한 이물감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오면서 심장을 꾸욱꾸욱 눌렀다.

“이래서, 다 먹을 수 있겠어요?”

아니, 무리야. 그건 안 될 거 같은데, 라는 부정의 말이 목구멍을 마구 두드렸지만 진우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오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으, 다행이네요. 안 된다고 했으면 억지로 할 뻔했잖아.”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얘기를 웃으면서 건넨 사준은 진우의 무릎을 팔목에 걸고 다리를 위로 밀었다. 엉덩이가 허공으로 치솟았고, 사준이 허리를 숙이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사준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먹음직스러운 식사를 앞둔 사람처럼 관능적으로 움직이는 혀를 보고 진우는 숨을 참았다.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는 상대를 어떻게 홀려야 하는지 아는 움직임에 그대로 홀리고 말았다.

달궈진 쇳덩이처럼 뜨거운 성기가 안쪽으로 밀고 왔다. 진우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자 눈꼬리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투명한 눈물이 베개에 얼룩을 만들자 사준은 진우의 입술을 허겁지겁 빨아 당기며 허리를 아래로 내렸다. 두꺼운 귀두가 전립선을 꾹 누르자 허리 전체를 울리는 둔통에 발등이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충분히 풀어준 것 같은데도 좁은 내벽을 진입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사준의 몸에서 땀이 흘렀다. 진우는 양팔을 목에 감은 채 사준의 머리칼 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굵은 성기가 배 아래쪽을 가볍게 두드렸다.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자 질척하게 입속을 휘젓던 혀가 느릿하게 멀어졌다.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고쳐 들고 허리를 툭 쳐올렸다. 안쪽을 자극하는 것에 날카로운 고통이 등줄기를 훑었다. 흐읏, 쾌감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감각에 숨을 꽉 참자 목이 경련했다.

사준은 한 번만 움직이고 진우의 반응을 꼼꼼하게 살피듯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예상치 못한 다정함과 배려에 진우는 이상한 허기를 느꼈다.

“이, 사준….”

아래를 꽉 채운 것 때문에 이미 힘들었지만, 진우는 사준이 움직여주길 바랐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갈망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성기를 뺄까 봐 재촉하듯 이름을 부르자 사준은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가 놓았다.

“움직일 거예요.”

숨결과 함께 속삭이는 말에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경련했다. 사준은 음란한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온몸이 진동했다. 등허리가 오싹거리면서 내벽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내벽이 풀어지고, 허리가 부드럽게 튀어 오르면서 진우는 사준이 움직이는 박자에 맞춰 몸이 변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하아, 진짜, 이렇게까지 풀어지는구나.”

이상한 감탄의 말을 쏟아낸 사준은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안쪽을 강하게 후볐다. 몇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온몸의 관절이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우의 몸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사준의 허리 움직임이 일정한 박자를 띠었다. 탁탁탁, 퍽퍽,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내벽 전체를 휩쓸었는데, 그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도 좋았다.

아, 하윽, 흡. 강하게 쳐올려지자 진우의 목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꾸만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해졌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은 쾌감은 파도가 출렁이는 깊은 바다에 던져진 것 같았다. 발을 디딜 수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진우는 허우적거리는 손길로 사준을 꽉 끌어안았다.

“아, 아으, 이사, 준, 흣.”

“좋아요?”

사준은 진우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휘감더니 위아래로 흔드는 행위를 반복했다. 사정하고 싶은 욕구가 진우의 가슴 속을 점령했다.

질척하게 젖은 내벽을 반복적으로 자극할 때마다 진우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쏟아내지 못한 정액을 대신하는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날아가고 쾌감만이 내 몸에 남았다.

“안, 돼, 거기, 같이… 만지지, 하읏.”

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싫어하는 걸 말해 달라고 했으면서 사준은 진우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진우의 귀두를 엄지로 눌러 막은 채 허리를 쳐올렸다. 손가락으로 만졌을 때 좋았던 지점을 뭉뚝한 귀두가 짓누르자 견딜 수가 없었다.

“흣, 싫은, 거, 말하라, 아읏.”

“그렇게 좋다는, 표정으로 말하면, 누가 믿어, 씹, 하아….”

“아니, 놔, 달라, 읏.”

“응, 그래요, 후으, 양진우 씨, 엄청 조여서, 읏, 진짜 미치겠네….”

안 된다고 진우가 몸부림을 쳤지만 사준은 멈추지 않았다. 살이 퍽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음란한 마찰음에 맞춰 잔뜩 부어 놓은 젤이 엉덩이 전체에 요란하게 튀었다.

홀린 것처럼 허리 짓 하는 사준은 짐승이 따로 없었다. 이러다 내장은 물론 영혼까지 탈탈 털릴 것 같았다.

“읏, 핫, 놔… 싫다, 고… 읏.”

“왜요, 안 싸고도 느끼잖아. 또 뒤로 가봐요.”

“하아, 싫어… 흣, 싫다고….”

몸이 흔들릴 때마다 입에서 짧은 교성이 흘러나왔다. 쾌락에 젖어 있다는 게 진우가 듣기에도 너무 티가 났다. 반복된 신음을 질러대자 사준의 움직임이 더 커졌다. 그가 남자 신음에도 흥분하는 것 같아서, 그게 진우를 더 흥분으로 부추겼다.

“진짜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죠?”

질문이었으나 사준은 진우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줄 기미 없는 성기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하읏!”

몸이 잔뜩 예민해져서 어디를 건드려도 너무 좋았다. 경험한 적 없는 깊이에 닿은 성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진우는 거의 울부짖으면서 자신의 성기를 쥐고 있는 사준의 손등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었다.

“아, 싫어… 읏, 그만, 들어, 와, 하읏!”

“하아, 그만 좀 조여 봐, 싸겠어, 요.”

“으읏, 싸, 싸면 되잖아, 하읏, 싸, 라고….”

싸라는 말을 마구 뱉자 사준이 마침내 성기를 놓아주며 진우를 꽉 끌어안았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사준의 체취가 몸속 가득 흘러들어왔다.

진우는 체취에 흥분한 것처럼 그대로 허리를 튕기며 정액을 방출했다. 해방감으로 몸 전체가 경련하며 움찔움찔 떨렸다.

아, 하으. 절정에 오른 몸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헐떡이자 사준은 진우의 목덜미 여기저기에 키스하더니 다시 허리를 일으켰다.

뭘 할지 예상돼서 도리질 쳤지만 사준은 아까처럼 진우를 봐주지 않았다.

“읏, 안 돼… 방금, 느껴서, 흣.”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뒤로 빠졌다가 안으로 쑤시듯이 파고들었다. 진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련하던 내벽이 멋대로 사준의 좆에 마구 달라붙었다.

“오물거리는 게 더 쑤셔 달라고 하는 거 같은데요?”

음탕한 말과 함께 안에 들어오는 게 너무 컸다. 내벽을 조이지 않아도 꽉 찼고, 그 꽉 채운 열기가 다시 진우의 몸을 들쑤셨다.

사준이 움직일 때마다 진우의 성기가 흔들리면서 정액을 질금질금 토해냈다. 고환에 있는 정액까지 다 짜낼 것처럼 찔러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흐읍, 그만… 흣.”

전신을 두드리는 쾌감이 과해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무서웠다.

“안 돼, 오늘은, 내가 지칠 때까지 해야죠.”

“그럼, 좀, 살살… 천천히, 할 수도 있잖아, 흣….”

진우가 울먹거리면서 엄살 부리자 사준이 입술을 꽉 깨물더니 갑자기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뭐지, 왜, 지금? 흣,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사정하는 사준을 보며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씹….”

사준은 낮게 욕을 뱉었다.

“그런 표정은, 좀, 반칙이지.”

진우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준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리를 뒤로 물린 사준이 사정의 흔적이 남아있는 콘돔을 빼 버렸다. 그가 새로운 콘돔을 갈아 끼우는 사이 진우는 빠르게 숨을 골랐다. 아직도 아랫배 안쪽이 뜨거웠다. 안에 사정한 것도 아닌데 배 속이 이상했다.

도망치고 싶은데 한껏 벌어졌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오므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미끈한 고무로 감싸인 성기가 다시 다리 사이로 향했다.

으, 흐. 입술을 달싹이자 사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진우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더니 허리를 붙잡았다. 돌아누우라는 신호에 엎드린 채 엉덩이만 들려고 하자 사준은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그냥 편하게 엎드려요, 원하는 대로 천천히 할 테니까.”

“막상 넣으면 안 그럴 거 같은데….”

솔직한 감상을 중얼거리자 사준은 작게 웃으면서 진우의 등 위로 올라와 목덜미를 이로 깨물었다.

“그럼 좀 적당히 조이든지.”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장담하는데 이사준 정도의 크기면 어지간한 구멍은 다 좁게 느낄 것이다. 잠깐 딴생각에 빠진 틈을 봐주지 않고 굵은 살덩이가 밀고 들어왔다.

사준의 몸 전체가 진우에게 달라붙었다. 진우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사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욕망에 젖은 시선을 교환하며 사준은 허리를 느긋하게 움직였다. 쑤걱쑤걱, 성기가 움직이자 아랫배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하아, 아으. 굵은 살덩이가 주르륵 빠져나갔다가 꾸욱 밀고 들어왔다. 심장까지 밀어 올릴 것 같은 감각에 진우가 몸을 파들거리자 사준은 진우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양진우 씨는, 섹스할 때 표정이 제일 다양하네요.”

생판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낯부끄러웠다. 진우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려는 듯 베개에 뺨을 비비자 사준이 지금도, 라고 속삭였다.

미치겠다, 진짜.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준이 허리를 들썩거리자 달아오른 내벽이 꾸물거렸다. 천천히 해 달라고 했지만 이건 또 너무 느렸다.

“아, 아흐, 읏, 너무, 왜 그렇게 느, 려….”

“아까는 천천히 해 달라고, 했으면서, 읏, 진짜 되게 조이네.”

“그게 불만이면, 헐렁한 거, 찾아서, 하읏…!”

“몰라서 물어요? 넣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나? 조이는 게, 좋은 거지.”

사준은 진우의 볼을 쪽 소리 나도록 빨았다.

“근데 진짜, 우리 신입이 취향이에요?”

한창 방아 찧어 대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박히는 걸 좋아하는데? 신입이 양진우 씨한테 박기에는 좀 작지 않나?”

“벌써, 흣, 목욕탕이라도 갔다 왔어요?”

그 말에 사준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진동이 성기까지 전해져 내벽이 덜덜 떨렸다. 사준은 진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댔다. 비밀이라도 말할 것 같은 긴장감에 진우는 저도 모르게 귀를 바짝 세웠다.

“좆 크기 말한 거 아니에요.”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단순히 하 기자가 진우보다 키가 작다는 걸 말한 거라는 걸 깨달아서 부끄러워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진우는 섹스하다 오늘처럼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많이 드는 건 또 처음이었다. 진짜, 여러 의미로 이사준이 양진우를 죽이고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 진짜 밝힌다니까.”

사준은 허리를 살살 움직였다.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진우는 애가 탔다. 사준이 움직일 때마다 쩍쩍 달라붙는 내벽이 그의 움직임을 은근하게 재촉했다.

진우의 바람을 알아차린 사준이 허리를 끊어치듯 움직이자 흥건하게 젖은 구멍에서 젤이 주르륵 흘렀다. 허리 짓이 점점 빨라졌다. 매트리스와 몸 사이에 끼인 성기를 비비면서 진우는 사준에게 몸을 맡겼다.

사준의 움직임에 맞춰 침대가 가라앉을 때마다 진우는 제 성기가 매트리스에 박히는 것 같았다.

아, 으응, 또다시 사정감이 밀려와 몸을 앞으로 움직이자 사준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진우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 움직임에 몸이 덜덜 떨렸다. 독점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너무 좋았다. 녹아내린 내벽에 단단한 것이 박힐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하, 그만, 아응, 흣….”

“하아, 양진우, 씨, 여기, 봐.”

사준은 베개에 처박힌 진우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더니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키스와 함께 솟아난 성감을 참지 못하고 사정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흐읍, 정액을 뱉어내는 와중에도 사준은 허리를 움직였다. 그 바람에 억눌린 신음이 막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입술이 떨어지자 사준의 낮은 신음과 빠른 호흡이 귓가에 떨어졌다.

진우는 등에 달라붙는 체온과 몸을 파헤치는 뜨거운 성기를 품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체중에 눌려 답답했지만 떨어지기 싫은, 오묘한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 * *

정수리 위로 햇살이 떨어져서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진우는 보통 자기 전에 암막 커튼을 치기 때문에 머리 위로 햇살이 떨어지는 게 영 낯설었다.

알람도 안 울렸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함께 몸을 웅크리는데 따끈한 체온이 닿았다.

“이리 와요.”

말과 함께 몸이 쑥 끌려가면서 커다란 몸이 진우를 덮듯이 안았다.

“으, 음….”

수마에 반쯤 잠긴 채 웅얼거리자 손바닥이 진우의 허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더 자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 같아 편한 자세를 취하자 이번엔 손바닥이 엉덩이를 감아쥐었다. 말랑거리는 엉덩이가 주물리자 안쪽에서부터 찌걱거렸다.

“어제 안 닦아서, 아침부터 소리가 요란하네요. 아직도 젤이 가득한 거 같아요.”

젖은 소리를 놀리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어젯밤에 잔 곳이 어딘지를 시작으로 모든 기억이 영화처럼 쫙 펼쳐졌다.

“이, 기자님?!”

“네, 양 변호사님, 좋은 아침.”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진우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사준은 뭐가 좋은지 입매가 휘어져 있었다.

“잠깐만요.”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이 그대로 안쪽을 파고들 것 같아서 진우는 사준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왜요, 어제 그렇게 오래 공들여서 풀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해도 될 거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한번 의식하자 아직도 엉덩이가 벌어진 것 같고 아랫배를 뭔가가 꽉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 먼저 잠든 건 알죠?”

알긴 알지. 술 마시고 블랙아웃된 적은 있어도 질질 싸다 화이트아웃된 건 처음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그럴 생각 없거든요.”

“왜요, 주말이잖아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처럼 하는 말에 진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양 변호사님도 어제 좋았죠? 난 너무 좋더라. 처음엔 베스트 정도였는데 이젠 1위예요.”

사준이 알 수 없는 순위까지 들먹여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지간해서는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손을 밀어내며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그렇게 남자랑 하는 섹스가 좋아서 어떻게 해요, 그러다 게이 되겠어요.”

“그거야, 이미 남자랑 한 시점에서 끝난 거 아니에요? 이제 난 이성애자는 아니죠.”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하는 말에 진우의 심장이 쿵쿵 떨렸다. 그러면 남자도 연애 대상에 포함된다는 말인가?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머릿속을 바쁘게 굴리는데 버튼을 누르는 기계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침실까지 정확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였다. 사준의 말처럼 일요일, 주말 아침부터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누가 온 건가 싶어 진우는 눈을 크게 떴다.

상황 파악 못 하는 진우와 다르게 사준은 태평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테이블에 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더 하는 건 무리겠네요.”

“이사준! 너 집에 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이사준을 찾는 목소리에 진우는 침대에서 튕겨 나갈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게 이사준을 부르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여자 목소리였다.

“집에 있어.”

진우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튀어 나갈 것 같았는데, 사준은 태연하게 대꾸하더니 침대에서 내려가 벗어 놓은 바지를 입었다.

“잠깐 여기 있어요, 보내고 올 테니까.”

진우는 침실을 나가는 사준을 멍하니 쳐다봤다.

보내고 와? 그럼 나는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라는 건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집에 오라고 한 것도 이사준이고 섹스하자고 한 것도 이사준이잖아.

진우는 손에 잡히는 이불을 마구 구겼다. 집에 함부로 드나드는, 정확히 말하자면 비밀번호까지 공유하고 있는 여자가 있으면서도 먼저 유혹하고 끌어들였으면서.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사준의 태도도 짜증 났지만 뭔가 다음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스스로가 제일 한심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반복할까.

“올 거면 미리 연락 좀 하면 안 돼?”

“언제는 취재 중인데 왜 계속 전화하냐고 화냈으면서.”

문 너머로 들린 친숙한 대화에 진우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혹시 하고 기대했던 내가 머저리지.’

입을 꾹 다물었는데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방으로 간 건지 두 사람의 대화가 멀어졌다.

진우는 허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방 안을 둘러봤다. 확실히 침실을 많이 이용하지 않는 모양인지 침대 바로 위에 있는 창문에는 커튼도 없었다.

진우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움직여 맞은편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진우의 옷은 거실에 있어서 일단 되는 대로 빌려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맨 위 서랍장에 있는 셔츠를 꺼내 입자 셔츠가 헐렁했다. 기본 골격 차이도 있는 데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속옷까지 빌려 입을 생각은 없어서 진우는 셔츠 옆에 있는 고무줄 바지를 꺼내 입었다. 허리가 커서 고무줄 바지에 달린 끈을 바짝 조여 묶은 다음 문 앞에 서서 짧게 심호흡을 했다.

“현관에 못 보던 신발 있던데 누구 있어? 친구?”

“어? 아니, 친구는 아니고.”

그 대답에 진우는 실소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친구가 아니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양진우 기준에 친구랑 섹스하는 건 없었으니까.

진우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방문을 벌컥 열었다. 소리에 반응한 사준이 몸을 돌려 진우를 바라봤고 그 옆에 있던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여자는 키가 큰 미인으로 일요일인데도 회사에 나가는 사람처럼 슬랙스에 셔츠 차림이었다. 딱 보기에도 이사준보다 연상으로 보였는데 짧은 커트 머리에 풍기는 분위기가 독특했다. 저런 스타일이 취향인가.

“안녕하세요?”

진우는 끓어오르는 속을 누르고 태연함을 가장해 인사했다. 사준은 왜 방에서 나왔냐는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당황하는 꼴을 보니 속이 조금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어 진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웃었다. 세수를 안 한 게 떠올라서 조금 가려 보려고 했는데 눈두덩이 부은 게 느껴졌다.

“아, 안녕하세요?”

여자가 진우를 빠르게 훑어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 보통 애인의 침실에서 나온 남자를 보고 한눈에 섹스했다는 사실을 알아보기는 힘드니까.

“이 기자님이랑 같이 일하는 사이예요.”

가볍게 말하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기자님?”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냥 취재할 때 좀 도와주는 사이예요. 이 기자님 여자 친구가 올 줄 알았으면 자는 건 아니었는데,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진우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적당히 당황한 이사준 얼굴을 봤으니 나머지는 여자가 돌아간 뒤에 처리할 문제다.

“네? 여자 친구요? 으하하, 너무 실례되는 말을 정색하면서 한다.”

호탕하게 웃는 여자 옆에서 사준 역시 뭐가 웃긴지 키득거렸다. 분위기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은 이쯤 되면 당황하면서 여자를 보내든 진우를 보내든 어떻게든 자리를 파하게 하려 했는데 사준은 웃었다.

“나 눈 높은데.”

사준의 당치도 않은 넉살에 진우는 자신이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 사준이 누나예요. 오늘은 반찬 가져다주러 온 거고. 혼자 있으면 맨날 외식만 하니까, 살아있는지 얼굴도 좀 볼 겸. 근데 어제 술 많이 마셨어? 너 술 별로 안 먹잖아.”

당황해서 굳어 버린 진우를 두고 자신을 누나라고 소개한 여자가 이사준에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누나시구나. 누나, 아, 누나. 씨발….’

진우는 누나라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정말로 욕을 안 하고 싶은데 사준과 있으면 각양각색의 상황이 욕을 불러일으켰다.

“저 때문에 깬 거죠? 술 많이 마셨으면 콩나물국 먹어. 싸 왔으니까. 엄마가 이럴 때는 촉이 좋다니까.”

“알았어,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가.”

“청소도 좀 하고. 혼자 사는 티를 얼마나 내야 하는 거야?”

“알았다니까.”

사준은 누나의 어깨를 잡아 현관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 밀어도 갈 거야,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알았으니까 이제 얼른 가.”

사준은 신발 신고 나가는 누나를 배웅했다.

“갈게, 그럼 쉬세요.”

“아, 네….”

얼떨떨한 얼굴로 진우는 간신히 대답했다. 여자의 얼굴은 이제 보니 이사준과 퍽 많이 닮아 있었다. 생김새는 아니고 그, 독특한 분위기가.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락까지 야무지게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자 집 안에 정적이 흘렀다. 문을 보고 서 있던 사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는데, 진우의 눈에는 그게 저승사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있어도 되는데, 왜 나온 거예요?”

“어, 아니, 그냥….”

“여자 친구가 온 줄 알았어요?”

이미 입으로 뱉은 말이 있어서 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내가 변호사님 숨겨 놓고 여자 친구 보내려고 하는 줄 알았고?”

사준은 진우의 속을 콕콕 짚어냈다. 그 바람에 진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쓰레기로 본 거예요?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섹스하자고 사람을 집으로 끌어들였겠어요?”

“아니, 뭐 딱히 이 기자님이 쓰레기라기보다는, 그런 사람을 좀 많이 봐서….”

진우는 민망함에 시선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거예요.”

개새끼들이었지, 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우는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건 정말 경험의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 진우가 만났던 남자들은 지금껏 이런 상황이 펼쳐졌을 때 백이면 백, 상대가 애인이었지 누나나 여동생이었던 적은 없으니까.

근데 원래 다 큰 남동생 집을 누나가 막 들락거리나? 진우 역시 누나가 한 명 있지만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근데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도 나온 거면,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건가?”

진우는 사준을 슬쩍 흘겼다.

그런 건 알아도 그냥 모르는 척해주면 안 되나? 꼭 저렇게 말로 물어봐야 하는 거야? 기자들은 원래 저렇게 하나하나 다 꼬투리 잡으면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여러 말이 떠올랐지만 당장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진우는 눈알만 빙빙 굴렸다.

“그건 좀 너무하다. 그래서 내 옷까지 일부러 입고 나온 거예요?”

진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준은 이번에야말로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였다. 제발, 거기까지만 하자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이만 갈게요.”

사준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라곤 이거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움직이려는데 사준은 진우를 잡아 소파 위로 툭 밀었다.

“뭐 하는 거예요?”

“내 옷 많이 크네요.”

“그거야 나보다 이 기자님 덩치가 크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슈트 입고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이거 봐요. 손이 그냥 쑥 들어가.”

사준은 일부러 보여주려는 것처럼 셔츠 자락으로 손을 밀어 쭉 밀어 넣고 진우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사준은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양 변호사님은 독한 데가 있어요.”

“아니거든요?”

“아니긴요, 진짜 여자 친구였으면 내가 당황해서 쩔쩔매는 거 보려고 일부러 이렇게 옷 입고 나온 거면서. 여차하면 침실도 보여줄 생각이었죠?”

아니다,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다. 진우가 고개를 흔들자 사준은 피식피식 웃었다.

“근데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예요?”

사준은 이마를 톡 부딪치더니 코끝으로 진우의 콧등을 건드렸다.

“질투?”

진우의 놀란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졌다. 섹스 몇 번 했다고 질투할 주제가 안 된다는 건 진우도 아는데, 저렇게 물어보니까 진짜 바닥으로 꺼지고 싶어졌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요?”

“이 기자님 여자 친구가 불쌍하잖아요. 본인은 자신이 유일하다고 생각할 건데 다른 사람하고도 몸 섞는 걸 알면….”

진우는 뭔가 주절주절 말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행동이 유치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아서 바보 같아졌다.

“하긴, 양 변호사님이 질투할 이유는 없죠. 서로 섹스하기로 합의했고, 동의했으니까.”

뾰족한 바늘이 심장을 찔렀다. 콕콕 찔릴 때마다 따끔거려서 진우는 손끝에 걸린 소파 쿠션을 꾹 눌렀다.

“내가 동의하고 합의한 이유는 이 기자님이 애인 없다고, 처음에 그렇게 말해서예요.”

그래도 이 말은 정확히 해야겠다 싶어 진우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사준은 대답 대신 진우의 입술을 살짝 빨았다가 놓아주더니 이내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눈이 많이 부었어요.”

“…….”

“하긴, 어제 많이 울긴 했죠.”

사준의 접힌 눈꼬리에 다정함이 걸렸다. 사람 착각에 빠트리기 딱 좋은 다정함이었다.

“붓기는 한 번에 빼는 게 좋으려나.”

지금도 울릴 거라는 의미가 담긴 말에 진우의 발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준의 손이 아래로 향하더니 진우의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진우는 아래를 만지는 사준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제 자신이 만든 붉은 선들이 가득한 손등은 꼭 고양이가 할퀸 것 같았다. 사준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붉은 선이 더 선명하게 진우의 눈에 들어왔다.

“내 애인이 왔다고 생각했으면서 팬티도 안 입고 나온 거예요?”

바지 위로 성기를 만지는 손의 움직임은 꼭 애완동물이라도 길들이는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예요?”

“아까 하려다 말았잖아요.”

“그건 이 기자님 혼자 그런 거였고요.”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사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어제는 이사준이라고 이름 잘만 부르던데. 침대에서랑 차이를 두고 싶은 거면 그건 또 그거대로 야해서 좋긴 하지만.”

“그건 이 기자님도 마찬가지 아닌가. 양 변호사라고 부르잖아요.”

“그럼 앞으로는 계속 양진우 씨라고 부를까요?”

대답하면 다른 열망을 담을 것 같아서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사준은 이번에도 두 번 묻지 않았다. 참, 미련이 없다.

사타구니 위를 더듬는 손이 노골적인 음탕함을 띠었고, 천 하나에 가려져 있는 성기가 움찔움찔 떨리면서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옷 벗을 거잖아요.”

사준의 옷을 입고 갈 수는 없으니 이 말은 사실이다. 뻔한 유혹인데 멍청하게 또 저울의 추가 기울어지려고 했다.

“벗겨 줄게요.”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바늘에 찔린 진우의 심장을 살살 건드렸다.

“…여기서는, 싫어요.”

어깨를 밀며 진우가 긍정의 신호를 보내자 사준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혹하는 거 보면, 진짜 선수야.”

‘누가 할 소릴.’

* * *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메일 전송을 마친 사준은 침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불과 몇 시간 전 저 방에서 있던 일을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좆이 불끈거렸다. 설마하니 양진우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어두운 곳에서 엎어놓고 박아대는 것도 좋았지만, 땀방울이 굴러가는 것까지 훤히 보이는 밝은 방에서 박는 것도 맛이 좋았다.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난 얼굴이 유독 야해 보여서 뺨을 입에 물고 빨기를 반복하다 갈라진 목소리를 낼 때쯤 놓아줬다.

양진우는 예상보다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왜 그렇게 넘겨 버린 건지 모를 정도로. 설마하니 누나를 여자 친구로 착각한 것도 모자라서 아닌 척 방에서 나와 새침을 떨 줄이야.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밝은 햇살 속에서 질펀한 섹스를 끝내고 침대에서 늘어진 진우한테 사준은 밥을 먹자고 했다.

사실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으니까. 여태까지 제안했을 때 수락한 적이 없었기에 오늘도 당연히 집에 가야 한다며 거절할 줄 알았는데 진우는 샌드위치, 라고 대답했다.

말라비틀어져서는 먹는 것도 그런 걸 고르네, 그런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물론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궁합이 맞는 섹스 상대는 귀하게 대해줄 필요가 있었다. 신체 특성상 풀어줘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체력이 좋아서 심하게 해도 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사준은 자신이 남자를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진우에게 샌드위치를 사다 주는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준이 아파트 단지 내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사 왔을 때 진우는 옷을 갈아입은 뒤였고, 그는 정말 얌전히 샌드위치만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무언가 더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점이 보면 볼수록 사준의 마음에 들었다.

하 기자가 취향이라는 거지 같은 거짓말에 속아 줄 수 있을 정도로.

* * *

진우는 팔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책상에 엎드려서 이마를 문질렀다.

나이가 열일곱, 아니 최소 스물일곱만 됐어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을 거다. 그런데 그 나이가 아니지 않나. 도대체 이걸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고 일어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결국, 일요일에는 이사준이 원하는 대로 또 하고 말았다.

침대로 장소를 바꾼 다음에 그의 아래서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신음인지 비명인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의 소리가 목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방이 너무 밝아서 몸에 흐르는 땀방울까지 선명하게 다 보였다.

벌어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이사준의 골반에 부딪혀서 엉덩이가 욱신거릴 정도로 해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후였다.

씻고 나온 사준은 진우에게 밥을 먹고 가라고 했다. 제 누나가 갖고 온 것들을 먹고 가라는 의미였겠지만 일부러 샌드위치를 찾았다.

일종의 실험이었는데 이사준은 사 왔다.

빌어먹을, 그냥 섹스만 하기로 했으면 진짜 그렇게 해야지. 무언가 더 하면 안 되는데, 왜 시키는 대로 사 와서는 사람 마음을 이렇게 들쑤시는지.

진우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거짓 심호흡을 몇 번 더하고 책상 한쪽에 미뤄 놓은 서류로 손을 뻗었다.

* * *

주말의 격렬한 섹스는 일주일이 거의 다 지나도록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다. 야한 짓을 너무 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니다, 사실 몸에서 감각이 안 지워지는 건 계속 생각해서 그런 거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어서 진우는 혼자서 몇 번이나 뒤를 만졌다.

반쯤 야한 생각에 잠겨 넋이 나간 것처럼 굴어서, 뭐 꼭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금요일 재판은 엉망이었다.

양육권 분쟁이었고, 남편에게 폭력 전과가 있어서 쉽게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남편이 여자의 외도 사실과 정신과 상담 이력을 공개하는 바람에 완전히 몰렸다. 외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건 의뢰인이 말하지 않았기에 진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말하지 않은 겁니까? 비밀이 있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잖아요.”

재판장을 나오기 무섭게 진우는 고객을 다그쳤다.

“그 상담은 결혼 전에 받았던 내용이에요!”

“결혼 전에 받았어도 근거는 충분해요.”

부인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온전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고 외도한 것이다. 때문에 자식을 돌보기에도 결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증거만 놓고 봤을 때 판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실상 자식을 키우는 것에 있어서 다른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진우가 판사였어도 그랬을 거다.

“그럼요? 이대로 끝이에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하는 여자를 향해 진우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항소는 할 겁니다. 다음 항소심까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남편이 외도하는 거 같다고 했죠? 그 증거를 확실하게 찾아야 해요. 판사 앞에 보여 줄 수 있는 형태가 있는 방식으로.”

여자는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진우는 답답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인사했다.

“월요일에 연락드릴게요.”

진우는 회사로 이동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제 와 부인이 외도 증거를 갖고 올 수 있을 리 없다. 있다면 첫 재판에서 바로 들이밀었겠지. 이혼 소송 같은 걸 누가 길게 끌고 싶어 하겠나.

이런 재판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이길 줄 알았기 때문에 더 짜증 났다. 진우는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건드리다가, 노란색으로 점멸한 신호를 보며 속도를 줄였다.

아이까지 낳았다면 서로 좋았던 시절도 분명 있었을 건데 이런 식으로 지저분하게 헤어지는 이유가 뭘까.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면 안 되나. 어차피 양육권을 갖고 가 봐야 자식한테 헌신하는 부모가 될 것도 아니면서.

돈 있는 사람들의 양육권 소송은 대부분 잠깐의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부모란 작자들이 자식을 갖고 싸우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의 부모가 차라리 깔끔한지도 모르겠다. 길바닥에 버리지도 않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줬다. 물론 집안 체면이라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만.

게이라는 사실을 말하지만 않았다면 또 달랐을지도 모른다. 형과 누나는 지금도 부모님이랑 나쁘지 않게 지내는 편이니까. 커밍아웃만 안 했으면 진우도 그 울타리 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듯이, 게이라는 성향도 진우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만성 편두통이 밀려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신호에 맞춰 차를 출발시키면서 진우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 남편이 양육권을 포기할까. 둘 다 돈은 많아서 재산으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어려운데….

* * *

“사업장 다 알아봤는데, 탈세도 없고 깔끔해요.”

노크와 함께 들어온 김유민이 진우에게 남편의 사업 자료를 내밀었다.

“바람피운 적 한 번도 없어요?”

“그쪽도 확인하고 있는데 사적인 여자관계가 한 명도 없어요.”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의 외도를 이렇게나 바라야 하나 싶으면서도 소송에서는 지기 싫으니 없는 외도 상대라도 만들어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 더 알아보라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죠.”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유민이 “식사는 하셨어요?” 하고 물었다.

“네, 오는 길에 간단하게.”

“거짓말, 안 드셨죠?”

“김 변은 속일 수가 없네.”

재판 결과 때문에 속이 뒤집어져서 밥 같은 건 먹고 싶지도 않았다.

“햄버거 드실래요? 주문할 건데.”

“부탁할게요.”

김유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고, 진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정보원이 남편의 외도 증거를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을 걸 생각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남편의 외도는 부인의 심증뿐이라 부인이 헛다리 짚은 거면 진다. 판사 앞에서 최종 변론할 때 모성애를 자극하는 발언이라도 하게 대본이라도 써둬야 하나.

김유민이 갖다 준 햄버거를 먹고, 진우는 오후 내내 최종 변론에 쓸 그럴듯한 대본을 썼다.

한참 집중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뭐 해요?]

뜬금없는 문자를 보고 발신자를 확인한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사준_스쿠프]

형식적으로 저장해 놓은 이름과 문자 내용을 보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분명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문자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진우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다가 뒤집어서 내려놓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써 놓은 걸 한 글자씩 복기하고 있는데 열 줄도 채 못 넘기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이대로 문자를 무시하면 사준은 또 두 번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젠장. 입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진우는 핸드폰 화면을 봤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2분 지나 있었다. 글자를 다시 보는 사이 1분이 더 지났다.

[일 때문에 바빠요]

진우는 키패드를 눌러 글자를 입력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바쁜 사람이 무슨 3분 만에 문자를 보내.

썼던 글자를 지우고 키패드를 다시 두드렸다.

[일하는 중이에요]

아니, 아니야. 이것도 너무 뻔해 보인다. 시간은 이제 4분이 지났다. 진우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다가 다시 입력했다.

[회사예요]

간결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전송 버튼을 눌렀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 있는 장소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문자 하나 가지고 이렇게 전전긍긍이라니. 애도 아니고.

[이사준_스쿠프: 오늘 우리 팀 회식인데 올래요?]

진우의 고민이 무색하게 사준의 대답은 바로 왔다. 고민이라고는 1초도 안 한 것이 분명하다.

문자를 본 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음소거 상태로 켜 놓은 TV에서는 〈스쿠프〉가 하고 있었다. 생방송이니까 아마 저 방송이 끝나고 하는 회식일 거다.

[내가 왜요?]

[이사준_스쿠프: 양 변호사님 취향인 우리 신입 환영회니까]

[이사준_스쿠프: 혹시 우리 팀장이 벌써 연락했어요?]

연달아 온 문자에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진우가 하 기자한테 관심이 있다는 게 사준한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는 것만 확실해졌다.

[오늘은 술 마실 기분 아니에요]

좋아, 이번엔 깔끔했다. 속으로 방금 막 전송한 문자의 내용에 만족하고 있는데 진우의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사준_스쿠프: 그래요? 왜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에요?]

관심도 없으면서 이런 거 물어보지 마. 대답 안 하면 물어본 것도 잊을 거면서.

들리지 않을 불만을 툴툴 뱉던 진우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고, 몇 번이나 핸드폰으로 돌아가려는 정신머리를 붙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사준에게서 두 번째 질문, 두 번째 권유는 없었다.

작성한 초안을 출력해서 읽어 보고 항소장을 작성하기 위해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를 재차 확인하려고 했는데, 정신 차렸을 때는 무의미하게 글자만 보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진우는 핸드폰을 힐끔 보고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스쿠프〉가 끝난 TV에서는 누가 볼까 싶은 예능 프로가 재방송하고 있었다. 심야 뉴스로 채널을 변경하려던 진우는 리모컨으로 TV를 끄고 보고 있던 서류를 되는대로 가방에 넣었다.

〈스쿠프〉팀의 회식 장소야 어디일지 뻔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차를 빠르게 몰아 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진우는 핸들을 꽉 쥐었다. 기세 좋게 오긴 왔는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고민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연락 왔을 때 튕기지 말고 가겠다고 대답할 걸 그랬다.

마른세수 몇 번, 헛기침 몇 번.

한참 만에 결심하고 차에서 내린 진우가 가게 입구로 향한 순간, 시끌벅적한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는 목소리들이 분명했고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 하 기자를 부축하고 나오는 태준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너 왜 여기 있냐.”

태준의 질문에 진우는 다리를 뒤로 물렸다.

“벌써 끝났어?”

진우는 태준의 옆에서 늘어진 채 눈도 못 뜨는 하 기자를 바라봤다.

“얼마나 마신 거야? 엄청 취한 모양이네.”

쓸데없는 눈치를 챌 것 같아 진우가 빨리 말을 돌리자 태준이 하 기자를 숨기듯이 제 품으로 당겼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와, 장태준. 진짜 둘이 사귀면 얼마나 팔불출 노릇을 하려고 저러는 거야.

“어? 진짜 왔어요?”

뭐라고 한마디 더 해주려는데 뒤이어 들린 사준의 목소리가 입을 막았다.

“뭐? 진짜 왔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 싶었는데 사준이 부축하고 있는 여자를 보자 말이 뾰족하게 나가고 말았다.

둘이 무슨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안다. 여자는 〈스쿠프〉의 작가였으니까. 그런데도 오란다고 진짜 왔냐는 듯이 묻는 사준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부른다고 멍청하게 쭐레쭐레 온 자신이 제일 마음에 안 들지만.

“근처에 일이 있어서 들러본 거야, 나도 한잔할까 했는데 끝난 거 같으니 먼저 간다.”

사준의 시선을 무시하고 진우는 태준에게 말을 던진 뒤에 차로 향했다.

“저도 갈게요. 같은 방향이잖아, 데려다줘요.”

진우가 막 운전석 문을 열었을 때, 사준은 부축하고 있던 작가를 다른 팀원에게 넘기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사준은 조수석에 있던 진우의 서류 가방을 끌어안고 앉아서 안전띠를 맸다.

“온다는 말이 없어서 안 오는 줄 알았는데.”

문자에 답을 안 보낸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진우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일 바쁜 거 아니었어요? 도대체 우리 신입이 얼마나 마음에 들어서 온 거예요.”

사준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진우는 그제야 그가 꽤 많은 술을 마셨고, 지금 사준의 정신 상태는 알딸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신입은 이미 술이 떡이 된 거 같던데요.”

“입봉까지 했으니까 떡이 될만하죠.”

〈스쿠프〉 배치받고 얼마 안 됐는데 입봉이라니, 이거 장태준이 편애하는 거 아닌가. 도로에 진입하면서 진우가 핸들을 만지작거리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아뇨, 어디 가는 건가 해서요. 우리 집 가는 길 벌써 외웠어요?”

그 말에 진우는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소 찍어요.”

“아깝다, 말 안 했으면 양진우 씨 집에 가는 건데.”

갑자기 사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름에 진우는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사람을 놀라게 했으면서 사준은 태연하게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 최근 기록을 찾아 누르는 손가락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취했어요?”

“술은 원래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거예요.”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취한 모양이다.

“술 많이 안 마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지난 일요일 사준의 누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진우가 물었다.

“많이 안 마시려고 하는 편이긴 하죠. 필요할 땐 마셔요. 변호사님은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사준은 몸을 완전히 옆으로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나요? 뭐?”

“술 많이 마셔요?”

“그냥, 필요하면 마셔요.”

그 필요할 때가 좀 자주 있을 뿐이지.

진우가 속으로 말을 덧붙이자, 사준은 필요하면 마시는구나, 라고 진우의 말을 의미도 없이 따라 했다.

“집에 들어왔다 갈 거죠?”

목적지가 가까워졌을 때 사준이 물었다.

“내가, 왜요?”

“기껏 왔는데 술도 못 마셨잖아요.”

“그래서, 이 기자님이 저랑 술이라도 마셔 주게요?”

심각한 말투가 아니었는데 사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불만이 드러난 얼굴을 보고 진우는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딱히 신경에 거슬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술은 아니고 다른 거 준비한 거 있는데.”

“다른 거요?”

진우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 준비해 뒀다는 말에 말끝이 살짝 떨리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준은 너무 쉽게 양진우를 들었다, 놨다 했다.

“궁금하죠?”

“아니 뭐, 나 때문에 준비한 게 있다고 하면 당연히 그런 거 아니겠어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어조로 대꾸하는 게 진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 들렀다 가요.”

진우는 사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사준은 섹스하자고 할 때는 두 번 이상 권유한다.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은데, 하면서도 지금 이런 걸 고민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졌다. 이미 저울은 7 대 3이다. 괜히 어설프게 고민해서 이사준에게 끌려가 8 대 2가 되는 것보다는 지금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진우는 대답 대신 지난번과 같은 위치에 차를 주차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준을 순순히 따라왔다.

도어락이 해제되고 문이 열리는 순서까지는 지난번과 같았는데, 사준이 갑자기 진우를 잡아당기면서 지난번과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벽에 등이 닿았고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보자, 언제 들고 내린 건지 진우의 가방이 바닥에 뒹굴었고 제대로 닫지 않은 탓에 서류뭉치가 흘러나왔다.

“읏, 가방.”

“내가 내일 정리해 줄게요.”

사준은 입술을 겹쳤다. 늘 여유 넘치던 키스와 다르게 혀가 흉포하게 밀고 들어왔다. 혀에 닿는 뜨거운 점막에서 사준이 마신 술이 느껴졌다.

서로의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바쁘게 울리더니 옷가지가 차례차례 떨어졌다. 옷을 벗는 동안에도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츄릅 소리와 함께 한참 만에 떨어졌을 때, 사준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준비했다는 게, 설마 이거예요?”

사준은 눈을 빙글 굴렸다. 변명할 거리를 찾는 모양새에 진우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취했어요.”

“준비해 놓은 게 없다고, 이실직고하는 거?”

이런 경우에는 사기죄를 성립시킬 수 있을까.

“그래도 양진우 씨를 위해 노력할 정도는 될 거 같네요. 뭔가 엄청난 걸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사준은 진우가 메고 있는 넥타이의 볼록 튀어나온 삼각형 부분을 꾹 눌렀다. 목 아랫부분인데 진우는 심장이 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엉킨 두 몸이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을 지나 사준의 침대 위로 떨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 말고는 아무 불빛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거실에서 들어오는 빛이라도 있었는데, 오늘은 한층 더 어두웠다.

사준은 진우의 넥타이를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준비해 놓은 건 없지만 생각났어요.”

뭐가, 라는 물음이 진우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 사준은 말했다.

“양진우 씨가 골라요, 어디가 좋아요? 눈? 손?”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 진우는 사준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지만,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에서는 답을 말해 줄 기미가 안 보였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사준은 입고 있던 옷을 머리 위로 올려 벗었다. 술을 마셨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 오늘도 사준의 몸은 건장했고 거대해 보였다.

“양쪽 다라는 선택지도 있어요. 양진우 씨는 욕심이 좀 많은 편이니까.”

“아니거든요? 손으로, 할게요.”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진우가 망설이다 대답했다.

“정말?”

“아니, 그냥 눈으로.”

사실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뭘 고르는 게 나은지 진우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것 역시 그냥 사준의 주정일지도 모르고.

“음, 좋네요.”

사준은 혀로 입술을 할짝대더니 진우의 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겨 풀었다. 스르륵 풀린 넥타이가 목깃을 스치면서 사준의 손이 이끄는 대로 흘러내렸다.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사준이 넥타이를 손에 꽉 쥐었을 때 진우는 뭘 하려는지 알았다.

“잠깐만요.”

몸을 뒤로 물리자 사준은 진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양진우 씨 눈치 진짜 빠르네요.”

사준은 진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당겼다.

“아니면 이미 해 봐서 아는 건가?”

아쉽다는 말투와 함께 진우의 예상대로 눈두덩에 넥타이가 올라왔다. 부드러운 실크가 눈가를 가볍게 눌렀고 관자놀이를 지났다.

“싫으면, 말해요.”

진우는 엷은 한숨과 함께 임기응변치고는 괜찮은 거 같으니까 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따라왔을 때부터 섹스할 건 알고 있었고 이 정도는 그냥 섹스의 여흥으로 넘어갈 수준이다.

진우가 순순히 머리를 맡기자 사준이 뒤통수에 단단하게 매듭을 묶었는데, 익숙해 보이는 손길은 아니었다.

“안 보여요?”

“잘 보인다고 할 수는 없네요.”

사준은 손가락으로 진우의 얼굴을 더듬었다. 눈이 안 보이는 건 진우인데 사준은 마치 자신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느릿하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마에서 시작해 턱선까지 손가락으로 주욱 훑어 내린 손길이 얼굴에서 멀어졌다.

사준이 침대에서 내려갔다는 걸 알아차린 진우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원래 깜깜한 방이었던데다 눈앞이 가려져서 보이는 게 없었다.

뭘 하는 중일까 싶어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천이 스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그 소리로 그가 바지를 벗고 있다는 걸 알았고 진우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사준이 몸이 떠올랐다. 상상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지난주에 자위하는 내내 진우는 사준의 몸을 상상했으니까.

두꺼운 흉통과 허리 부근에 자리 잡은 단단한 근육들, 각진 어깨와 두꺼운 허벅지를 떠올리자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쉬는 날이 일정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일하는 거 같은데 운동은 언제 하는 걸까. 문득 떠오른 의문은 섹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사준이 옷을 다 벗은 것인지 바스락 소리가 멈췄다. 당연히 침대 위로 올라올 줄 알았는데 사준의 발소리가 문을 향했다. 단순히 문을 닫으러 가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뭔가 가지러 가는 것인지 진우는 알 수가 없었다.

뭘 하려는 것인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는데 눈으로 빛이 쏟아졌다. 앞이 보이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두웠던 방에 쏟아진 인공적인 조명이 넥타이 천 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모를 수 없었다.

“갑자기 뭐예요?”

“이왕이면 보면서 하고 싶어서요.”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사준의 목소리에 웃음이 얹혔다.

침대 위로 올라온 사준은 진우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는 발목까지 단숨에 끌어 내린 바지와 팬티를 바닥에 던지고 양말을 벗겼다.

진우는 지금 자신이 몸에 걸친 게 셔츠와 눈을 가리고 있는 넥타이뿐이라는, 꽤 도착적인 차림새라는 것을 알고 민망함을 느꼈다. 그걸 사준이 놓치지 않고 다 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도 민망함에 한몫했다.

무릎을 세워 어설프게 다리를 오므리자 사준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살살 문질렀다. 둥근 무릎뼈가 그의 손안에서 구슬처럼 굴러다녔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말이죠. 좀 불공평한 거 같아요.”

“뭐가요?”

“난 양진우 씨가 다 처음이잖아요.”

“누가 들으면, 동정 떼인 줄 알겠어요.”

진우의 입에서 헛숨이 흘러나왔다. 여자와 잤던 경험을 들먹일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딴소리인지.

“내가 남자랑 하는 건 다 양진우 씨가 처음인데, 양진우 씨는 아니잖아요.”

분명 속으로 비아냥거렸는데 사준은 진우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난 게이고 당신은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고 말하려던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사준을 만나 이 얘기를 몇 번이나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기 때문에 말해봐야 별 의미가 없었다.

“앞으로 나랑 하는 것 중에 양진우 씨가 처음인 게 있을까요.”

사준의 숨결이 갈비뼈로 뚝 떨어졌다. 진우는 그의 얼굴이 안 보여서 다행이었고, 넥타이가 가리고 있어 자신의 표정도 온전히 안 보일 거라 다행이었다. 앞으로가 또 있다는 말에 가슴 한쪽이 기대로 부풀어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다.

“양진우 씨는 꽤 많이 논 것 같으니까 아마 없겠죠?”

아니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기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누가 들으면 이 기자님은 엄청 얌전했던 사람인 줄 알겠어요.”

진우는 안다. 사준도 분명 만날 만큼 만나 봤고, 할 만큼 해 봤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랑 섹스해 보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낸 거 아니겠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답이 돌아왔고 동시에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봐요. 엉덩이 들고.”

순순히 몸을 돌리려다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멈췄다. 설마 엎드렸을 때 다짜고짜 밀어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사준의 성기 크기를 알고 있기에 진우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요, 아직 안 풀어서.”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허둥거리자 사준이 쿡쿡거렸다. 원래도 웃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잘 웃었다. 취하면 원래 잘 웃나?

“알아요, 엎드리면 내가 풀어줄게요.”

사준은 진우의 허리를 부드럽게 당기며 자세를 잡게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진우는 사준이 굉장히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 * *

으, 으읏. 베개를 꽉 끌어안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진우는 신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바짝 들고 있는 엉덩이 사이에 젤이 잔뜩 묻은 손가락 두 개가 질척질척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젤을 타고 주르륵 밀려들어 온 손가락이 안쪽을 꾹꾹 건드렸다가 입구까지 빠져나가자 손가락이 머물렀던 흔적을 쫓는 것처럼 내벽이 꽈악 조여들었다.

“저번에는 손가락 두 개 넣는 것도 꽤 걸렸던 거 같은데, 혹시 혼자 했어요?”

뒤로 자위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진우는 베개를 깨물었다. 사준은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그러자 늘어난 손가락 개수에 놀란 것처럼 입구가 빠듯하게 조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아랫배를 향하면서 진우의 내벽을 살짝 긁어내리자 등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입구도 안쪽도 문질러져서 아랫배가 다 쑤셨다.

아직 한 손으로 다 꼽을 정도밖에 안 했는데 사준은 이미 진우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여기, 기분 좋죠?”

시야가 가려진 채 뒤쪽이 헤집어지자 흥분이 치솟았다. 손가락을 뒤로 살짝 빼내는 것에 맞춰 진우가 엉덩이를 더 높게 들자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신음만 하지 말고 대답해 봐요, 여기 맞아요?”

반응을 보고 충분히 알아차렸으면서 사준은 같은 지점을 확인하듯이 문질렀다. 꾹꾹 눌러대는 손놀림에 점막이 풀어지고 하체에 힘이 빠졌다.

“아, 응, 그만….”

“뭘 그만 해요?”

사준은 허리를 숙여 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진우는 사준이 묻는 말에 뭐든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안쪽이 얼마나 달라붙는지 알아요?”

손끝의 지문이 있는 부분이 안쪽 점막을 쑥쑥 문질렀다. 꼬리뼈가 간질간질했고 척추를 타고 올라온 흥분이 목덜미 아래 고여 들었다.

“하나 더 넣어도 돼요?”

“읏, 안 돼, 네 개 다 못, 해….”

“아닌데, 지금 두 개밖에 안 넣었으니까 하나 더 넣으면 세 갠데.”

거짓말, 분명 거짓말이다. 진우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자 사준이 목덜미를 이로 살살 긁었다. 열기가 고인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거짓말, 세 개, 잖아.”

“보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알아요?”

사준은 다시 귓속말했다. 미약 같이 느껴지는 음성에 아랫배가 절로 꽉 조여들었다.

“부족한 것처럼 조이잖아요, 하나 더 들어갈 거 같은데요.”

젤이 엉덩이골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것이 꼭 경고처럼 느껴졌다. 언제든 안쪽을 벌리고 들어올 것 같았고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터질 것처럼 뛰었다.

입구 주름을 더듬는 손가락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보다 훨씬 짧고 얇았다. 아무리 작은 손가락이어도 이미 세 개나 물고 있는 상태에서는 무리였다.

“안 돼, 아니야, 흐읏, 넣지, 마요.”

“괜찮아요. 질척질척하고 흐물거리고, 손가락 다 넣으면.”

사준은 진우의 관자놀이에 도장을 찍듯이 입술을 꾹 눌렀다. 닿은 입술이 촉촉했다.

“내 거 넣어줄게요.”

엄청난 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는 말에 숨이 막혀 진우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 흐읏. 아래쪽을 침범하고 들어오는 짧은 손가락에 술이 벌어졌다.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그 개수가 충격적이어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사준이 손목을 이용해 안쪽에 밀어 넣은 손가락들을 앞뒤로 움직였다. 점막이 꽉꽉 달라붙으면서 사준의 손을 따라 꿈틀거렸다.

“아, 하으, 움직이, 지마….”

사준이 손을 빙글 돌려 엄지로 입구를 건드리고 다시 안쪽을 자극했다.

“왜 자꾸 거짓말해요.”

“흣, 안 돼, 이상, 해….”

“하나 더 넣을까요?”

“싫어, 진짜, 하지 마….”

손가락을 다 넣으면 그건 이제 애무의 범주로 보기 어려웠다. 사준이 또 막무가내로 굴기 전에 눈을 가리고 있는 넥타이를 아래로 내리려고 진우가 손을 움직였다. 뒤통수에 묶인 매듭을 풀려고 하자 사준이 손을 잡았다.

“알았어요, 안 할게.”

사준이 달래주듯이 진우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가 엉덩이 사이에 있는 손가락을 살살 움직이면서 하나씩 빼냈다. 아, 하으, 젖은 내벽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맞춰 한껏 발기한 성기 끝에서 흰 점액질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사정에 진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눈이 가려져서 몸이 예민해진 걸까. 안을 쑤시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뿐인데 그 감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양진우 씨, 너무 야하다. 빼는 거로도 느끼고.”

딱 붙어서 말하던 사준의 몸이 살짝 멀어지더니 하나 남았던 손가락이 쏙 빠져나갔다. 아래가 허전해진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엉덩이를 흔들자 사준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다음 행동이 예상돼서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빨리해줬으면 좋겠다며, 구멍이 욕심을 부리며 발씬거렸다. 벌어졌다가 다물어질 때마다 구멍 사이에서 젤이 뚝뚝 흘러나왔다. 진우는 제 몸에서 무언가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상했다.

진우가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데 사준이 양손으로 엉덩이를 주물렀다. 좀처럼 넣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진우는 심장이 타들어 가는 갈증이 느껴졌다.

“빨리….”

참지 못하고 조르는 소리를 내자 굵은 살덩이가 밀고 들어왔다.

“한 번에, 다, 넣으, 하윽!”

진우의 허리가 푹 꺾이고 엉덩이가 뜨거워졌다. 꿰뚫는 살덩이 때문에 몸 전체가 위로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딘가로 추락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베개를 꽉 움켜쥐었다.

끝을 모르고 아래로 들어오는 것에 숨을 쉴 수가 없어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도망치듯이 엉덩이를 빼려고 하자 사준이 진우의 골반을 움켜잡더니 남은 성기를 콱 밀어 넣었다.

하윽, 비명이 성대를 죽 긁었다. 아랫배가 볼록해진 것 같으면서 동시에 입으로 성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가 버거운데, 버거울 정도로 안쪽을 들쑤시는 열기가 너무 좋았다.

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진우는 정액을 질질 흘렸다. 순식간에 두 번째 사정이었다. 사정하면서 안을 채운 것을 꽉꽉 조이자 사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어서 꼭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하는 것 같은 비도덕적인 느낌이 들었다.

베개를 쥔 손을 쥐었다가 펴면서 바르작거리고 있는데 채 벗지 못한 셔츠 속으로 사준의 손이 들어와 척추를 길게 훑어내렸다. 앞으로 쏟아질 고통과 쾌감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 손길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양진우 씨, 하아….”

흥분을 숨기지 못한 호흡이 이름과 섞여서 진우의 등허리로 뚝뚝 떨어졌다.

“움직이지, 마, 안 돼, 흣.”

“맨날 혼자서 싸고, 후으…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데, 윽, 그거, 너무 이기적이야. 박아주기만 해도, 싼 거 보면, 엄청 놀아난 구멍 같은데, 말이죠.”

탓하는 어투로 음탕한 말을 속살거린 사준이 안쪽 깊이 찔러 넣은 성기를 뒤로 확 잡아 뺐다. 내벽 전체를 쓸면서 빠져나간 성기가 입구 언저리를 간질이다가 다시 안쪽으로 푹 치고 들어왔다.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영혼이 쭉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 아으, 읏. 골반을 쥐고 흔드는 허리 움직임이 거칠어서 어딘가로 떨어질 것 같은 순간, 사준은 진우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등에 닿은 단단한 가슴팍이 그대로 기울어지더니 진우의 몸이 옆으로 떨어졌다. 진우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옆으로 누운 채 숨을 헐떡였다. 자세를 바꾼 와중에도 빠지지 않은 성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게 버거웠다.

낚싯바늘에 찔린 물고기처럼 진우가 숨을 할딱이는데 사준이 오른쪽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손목에 다리가 걸쳐지자 결합이 더 깊어졌다.

사준이 허리를 앞뒤로 흔들자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엉덩이 살이 사준의 치골에 부딪혔고 몸이 그에게 완전히 꽉 안겼다.

진우를 끌어안은 채 사준이 허리를 멋대로 흔들었다. 굵은 성기에 꿰뚫린 채 내벽을 자극당하자 신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하지, 하응, 아읏, 그만… 흐읍.”

언제부터 흘린 건지 알 수 없는 눈물 때문에 넥타이가 축축하게 젖어서 눈두덩에 딱 달라붙었다.

“이, 사준, 흣, 아응, 너무….”

“너무, 후으… 좋지?”

사준이 귓불을 깨물고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하아, 나도, 좋아, 서, 씨발, 싸겠, 어… 아, 하아, 양… 진우, 윽…!”

끊어지는 신음을 삼키면서 사준이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 진동이 고스란히 자극으로 느껴져 진우의 성기에서 정액이 주르륵 쏟아졌다. 연속된 사정으로 진우는 진이 빠졌다. 벌써 몇 번을 느낀 건지 모르겠다.

간신히 호흡을 고르자 사준이 안쪽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성기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점막까지 딸려 나가는 것 같았다.

사준이 진우의 다리를 원래대로 내려놓고 뒤에서 부스럭거렸다.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철퍽 소리와 함께 비닐 포장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몸을 버둥거리자 사준이 진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콘돔 씌우는 중인데 도망가는 게 어디 있어요.”

“더, 못 해….”

“할 수 있어요, 아래도 이제 완전히 헐렁하고.”

“헐렁, 이라니…!”

진우는 아까 많이 놀았네, 어쩌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쾌감이 강해서 지적하는 걸 잊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헐렁한 거 아니에요? 내 좆이 막 쑥쑥 들락거리는데? 아니면 늘어났다고 할까요? 눈이 안 보여서 그런지, 더 느끼는 거 같아.”

취하면 인격이 변하는 스타일인가? 진우는 심각하게 고민됐다. 취해서 인격이 변하는 스타일은 만나 봤자 좋을 게 없다. 지금 이러는 걸 보니 지난 몇 번의 섹스에서 신사처럼 얌전히 굴었던 게 다 거짓말 같다. 지금의 사준은 노골적이고 음탕했고, 변태 같았다.

콘돔을 다 씌운 사준이 진우의 몸을 돌려 제 위로 잡아당겼다. 진우는 말을 타는 것처럼 사준의 허리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됐다.

“이제, 양진우 씨가 넣어 봐요.”

“읏, 하지, 마요.”

사준의 성기가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우의 엉덩이골을 문질렀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몸에 번져서 진우는 넥타이로 손을 뻗었다. 앞이라도 보이면 나을 것 같았는데 사준이 진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넣으면, 풀어줄게.”

“당신, 진짜….”

“그것도, 좋네요.”

뭐가 좋다는 건지 알려주지 않은 사준이 허리를 툭툭 쳐올렸다. 성기를 받아들였던 구멍이 이미 쾌감을 알고 있다는 듯이 발름거렸다.

“얼른, 넣어요. 아니면 내가 넣을까요?”

갈라진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사준이 넣으면 또 제멋대로 흔들 것 같아 진우는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진우는 그때 못 했던 리벤지 할 기회라고, 억지로 생각했다.

어차피 사준이 움직이면 쾌락이 너무 심해서,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힘들었다.

진우가 허리를 살살 움직이자 두꺼운 귀두가 구멍 끝에 닿았다. 뭉뚝한 살 끝에서 피어나오는 열기를 잡아 삼키듯이 허리를 천천히 아래로 내리자 입구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사준의 성기가 안쪽을 채우는 감각이 선명했다. 무게를 실어 허리를 아래로 꾸욱 누르자 그가 움직일 때와는 다른 감각으로 내벽을 자극했다.

“윽, 먹히는 거 같아.”

감탄 아닌 감탄을 들으며 진우가 허리를 아래로 쭉 내린 채 숨을 고르자 사준이 진우의 머리를 감싸 쥐더니 넥타이를 아래로 내렸다. 매듭을 풀지 않고 아래로 쑥 잡아 내린 바람에 넥타이가 목에 걸렸다.

눈 앞을 가리는 게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눈꺼풀을 깜박이자 초점이 돌아오면서 사준의 얼굴이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준이 진우를 바라봤다. 잔뜩 흥분한 남자다운 얼굴에 아래가 바짝 조였다.

진우를 가만히 보고 있던 사준은 넥타이를 손에 걸어 아래로 잡아당겼다. 진우는 목줄에 감긴 개처럼 허리를 숙이며 사준에게 다가갔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잔뜩 젖은 입술이 겹쳐지자 아래서 나는 것과 비슷하게 질척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서로의 혀를 쫓아 얽어대다가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움직여봐.”

딱 붙은 입술 사이에서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요청이 흘러나왔다.

진우는 골반을 앞뒤로 움직여 좋아하는 부분을 느릿느릿 문질렀다. 숨이 가빠졌다. 몸을 가득 채울 쾌감을 기대하며 진우가 사준의 혀를 더 깊게 빨아 당겼다.

아, 흐읏, 흡, 속에서 아랫배를 두드리는 성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진우는 자신이 이제 평범한 크기의 성기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라 예감하며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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