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Tightrope (2/8)

2. Tightrope

* * *

사준과의 섹스는 좋은 만큼 그 여파가 오래갔다. 섹스 궁합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건지 넣기만 해도 힘들 정도로 좋았다.

눈을 떴을 때는 허리가 욱신거렸고 엉덩이 사이가 아직도 벌어진 것 같았다. 일어나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어서 진우는 눈동자만 움직였다.

진우의 눈앞에는 베개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였고 등 뒤에서 체온도 안 느껴졌다. 몇 가지 감각으로 진우는 사준이 침대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우는 팔로 매트리스를 꾹 누르며 일어났다가 허리에 힘이 빠져 풀썩 떨어졌다. 마지막에 올라탔던 게 화근인 게 분명하다. 내려가려고 했지만 사준이 아래서 허리를 튕기는 바람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천국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술 마신 이사준과 섹스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어쩌면 이전 애인들과도 이런 문제로 헤어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멋대로 박아 놓고 어딜 간 거야?’

진우가 머릿속으로 괘씸죄를 추가하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들어보자 팬티만 입은 사준이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들어왔다.

사준은 진우를 약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준을 향해 진우는 ‘무슨, 짐승 새끼도 아니고.’라며 핀잔했다. 그 말에 사준은 욕을 들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네요, 새끼라서.”

진우가 미간을 찌푸리자 사준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사준의 손가락이 진우의 앞머리를 사락 쓸어 넘겼다. 너무 부드러운 손길이라 사과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밥 먼저 먹을래요? 아니면 씻고 먹을래요?”

“됐어요, 갈 거예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진우는 괜한 억지를 부렸다.

“움직일 힘도 없으면서.”

“잘 아네요, 밥 먹을 힘도 없어요.”

“먹여줄게요.”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처럼 너무 쉽게 하는 말에 진우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뭐가 좋아요? 빵? 밥? 아니면 죽?”

“완전히….”

“네?”

“병 주고 약 주고. 어제랑은 딴 사람 같네요.”

“어제는, 내 생각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요.”

사준은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일부러 말을 느릿하게 했다.

“술 마시면 원래 그래요?”

“뭐, 좋은 술버릇은 아니죠, 필터링을 전혀 안 하니까. 어느 정도는 괜찮은데 너무 많이 마시면….”

사준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쳤다.

“기억은 다 나요?”

“차라리 안 났으면 좋을 만큼요.”

기억도 다 나면서 술 때문이라니, 핑계가 구차했다.

“그거참, 편한 핑계네요.”

진우가 혀를 차자 사준이 근데, 라며 입을 벌렸다.

“뭐요?”

“좋아했잖아요.”

“내가, 언….”

“내가 언제 그랬냐는 말 같은 건 하지 말고요. 난 내 위에서 허리를 그렇게 흔드는 사람 처음 봤으니까.”

진우는 이번엔 정말 말문이 막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어떤 모습으로 허리를 흔들었는지, 그 아래서 사준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순식간에 떠올라버렸다.

“그래서, 뭐 먹을 거예요? 대답 안 하면 내 마음대로 갖고 올 거예요.”

“전복죽.”

“취향 확고하네요.”

“그 전에 먼저 씻고 싶어요.”

그 말에 사준이 진우의 겨드랑이에 양팔을 밀어 넣더니 쑥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밤새 허리를 그렇게 흔들었으면서, 기운도 좋았다.

* * *

부축을 받아 진우가 씻고 나왔더니, 사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하는 건가 싶어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진우는 소파 발치에 놓인 가방과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진우는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사준이 보고 있던 서류를 낚아챘다.

“뭐 하는 거예요?”

사준이 보고 있던 서류는 이번 소송 항소장이었다.

“어제 떨어진 서류 정리하다가 보여서요.”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읽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거 도난에 해당해요. 일종의 정보 도용이고 문서….”

“알았어요, 알았어. 그냥 글자가 보여서 읽은 것뿐이에요.”

“그걸 그렇게 태연하게….”

혈압이 올라 진우가 목소리를 높이는데 사준이 팔을 당겨 진우를 소파에 앉혔다.

“알겠으니까 진정 좀 해요, 누구한테 말 안 해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기자들이 사정 봐주면서 기사 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옆에 앉은 진우가 빠르게 말을 뱉자 사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걸 기사로 쓸 거라고요? 그런 불륜 치정이 뉴스가 된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 팀장이었어도 그렇게 말했을 건지 궁금하네.”

“장태준이었다면 서류를 보질 않았겠죠.”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진우가 단숨에 대답하자 사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본 거 아니었어요.”

결백을 주장하는 사준의 얼굴을 본 진우는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갑자기 열 올리면서 화를 내는 바람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양진우의 만성 질환 중 하나인 편두통이 또 시작됐다.

고작 항소장 정도로 사준이 기사를 쓰지 않을 거라는 건 진우도 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지만 그래도 남의 서류를 몰래 본 건 잘못한 거다.

“근데 그 사건 말이죠.”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사준이 또 입을 열었다.

“남의 거 몰래 봤으면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남편은 부인이 정신과 치료받은 거 알고 결혼한 거래요?”

사준은 궁금한 걸 못 참겠다는 듯이 물었다.

머리를 빠르게 굴린 진우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란 의미였다. 다행히 아직 항소장에 의뢰인 이름은 적지 않았으니까 변호사 비밀 엄수 규정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왜요?”

“잘은 모르지만, 의사는 원래 환자 얘기 안 해주잖아요. 근데도 억지로 확인한 거면 남편이 의처증 아닌가? 아니면 남편이 그런 상담을 받으러 다녔을지도 모르고.”

“가능성이 없는 얘긴 아니지만 그런 건 증거 찾기도 힘들고, 신빙성도 약해요.”

“그런 상황이면 남편 외도 증거가 나오는 게 제일 좋겠네요.”

“그걸 누가 모르겠어요.”

“이미 찾고 있다는 말?”

“부인은 확신하는데 의외로 흔적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 오히려 여자관계는 깔끔해요.”

너무 깔끔해서 외도가 더 의심스러운 거다. 같이 살았던 부인도 분명 누군가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사준이 눈썹을 위로 밀어 올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외도 상대가 꼭 여자일 필요 있어요?”

태평하고 느긋한 어조에 진우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남자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말에 섹스로 날아갔던 생각이 돌아오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왜 외도 상대가 무조건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진우는 그동안 자신을 스쳤던 수많은 병신이 늘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혼한 다음에도 계속 만나, 상대가 남자라고는 생각도 못 할걸.’

고정관념에 박힌 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거지 같은 이유와 당당함.

“이 기자님, 당신 천재였네요.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갑작스러운 칭찬에 사준이 당황했다가 진우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이제 밥 먹어요.”

사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더니 쟁반을 들고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열이 받아서 몰랐던 맛있는 냄새가 진우의 후각을 자극했다.

사준은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진우에게 숟가락을 건넸다.

대접에 있는 죽, 작은 반찬 그릇에 있는 장조림, 김치, 오징어젓갈을 본 순간 진우는 이 죽의 출처를 바로 알았다.

“배달?”

“집에 전복은 없으니까요.”

“있어도 할 줄 모를 거 같은데요.”

사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숟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먹여줘요?”

“됐어요,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자 같으니까.”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을 떠서 입에 담자 입안 가득 고소한 맛이 가득 퍼졌다. 섹스 한 번에 이런 병수발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진우는 만약 이 사실을 태준이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싶었다.

“이 기자님, 운동했어요?”

사준을 향해 진우가 물었다. 먹는 소리만 가득한 침묵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그냥 꺼낸 말이었다.

“대학 때까지 유도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유지가 된다고요?”

“그건 아니고, 시간 되면 지금도 웨이트는 좀 하죠. 왜요? 몸이 마음에 들어요?”

사준이 제 다리 사이를 눈짓으로 슬쩍 가리키며 능청을 떨었다.

‘밥 먹는데 그런 농담을 하고 싶은가.’

“나한테 잘 보이려고 만든 몸 아니잖아요.”

“앞으로 유지는 양진우 씨 때문에 할 수도 있는 거죠.”

의미 없는 빈말일 것인데 왼쪽 가슴 근육이 움찔거렸다. 이런 말에 반응하고 싶지 않은데, 하면서도 자꾸만 반응하고 말았다. 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이 기자님은 밥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술 마시고 난 다음 날은 배가 많이 고파져서.”

“혼자 해장까지 다 했다는 거네요, 부지런도 하셔라.”

“학교 다닐 때 국어 잘 못 했죠?”

“뭐요?”

이제까지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멍청한 물음이었다. ‘잘했죠’가 아니라 ‘못했죠’라니.

“화자의 의도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거 보니까, 국어 못했을 거 같아서요.”

“아쉽게도 굉장히 잘했네요, 국어뿐만 아니고 대부분 다.”

“그래요? 그래도 싫어하는 과목은 있었을 거 같은데.”

“그런 걸 왜 물어봐요?”

“이렇게 서로 알아가는 거죠.”

그럴 필요가 있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양진우 씨에 대해 알고 싶고, 지금보다 더 잘 지내고 싶으니까.”

설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준 때문에 진우는 입안에 들어온 죽이 뜨거운지 아닌지도 알기 어려웠다.

“…역사. 세계사도 국사도 별로 안 좋아했어요.”

입을 열면 다른 말을 할 것 같아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자 사준은 난 좋아했는데, 하더니 실실 웃었다. 진우는 입속에서 혀를 굴렀다. 지금 나누는 대화가 정말 실없는 이야기라고,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싫지 않아서 곤란했다.

“근데 의외네요.”

“뭐가요?”

“내 경험상 역사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 과거도 싫어하더라고요.”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처럼 들려 진우는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 * *

진우가 돌아간 뒤 의원실에서 나온 보도자료를 체크하는데 사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박정운]

사준은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고등학교 동창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전화 한번 살벌하게 받네.

“내가 어머머, 웬일이야, 너무 보고 싶었어, 이러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 너 나중에 혹시라도 인질극에 휘말리면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인질 백 명이 있어도 네가 1번으로 죽을 거 같으니까.

“박정운, 용건만 말해. 그런 소리 하려고 전화했어?”

― 아니, 나 청첩장 나와서 애들이랑 한번 볼까 하는데,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날 방송인데.”

― 끝나고 얼굴 비출 수도 있잖아, 네 형수 될 사람 얼굴도 보고.

“형수? 제수씨겠지.”

― 어떻게 니들은 하나 같이 다 그 반응이냐.

“근데 진짜 금요일은 안 돼, 방송 끝난 이후에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 그럼 따로 봐야겠네.

사준은 달력을 보며 만날 날짜를 따져보다 이내 정운이 L&B에서 사무관으로 일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평일에 내가 니네 회사에 갈 테니까, 점심 같이 해.”

― 이사준, 네가 온다고?

“어, 갈게.”

가는 김에 우연히 양진우를 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 그럼 올 때 연락해.

용건을 마친 정운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사준이 불렀다.

“야, 근데 금요일에 애들 다 모인대?”

― 어, 일단 시간 되는 애들은 다 오라고 했지.

사준은 입매를 손끝으로 쓸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다 온다고 해도 진짜 궁금한 사람은 오지 않을 터였다.

“그래, 알겠다.”

* * *

예정에 없던 하루를 보내고 자신의 집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우는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꼭꼭 눌렀다. 의도치 않게 이사준에게 너무 휘둘려 버렸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연관되지 않으면 되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집 앞에 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싶어서 손으로 집어 들자 안에 든 내용물을 쉽게 짐작할 수 없게 가벼웠다. 송장도 안 붙어 있는 상자였지만 진우는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이유는 상자 겉에 쓰여 있는 양진우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세상에 동명이인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집에 사는 양진우는 한 명뿐이었다.

집 안에 들어온 진우는 상자를 아일랜드 식탁 위에 던져 놓고 샤워했다. 상자 내용물은 대충 짐작이 갔다. 경험상 저렇게 이름만 덜렁 적힌 서류 봉투나 상자 속 내용물은 둘 중 하나였다.

재판에 유리한 정보거나 아주 불리한 정보.

불리한 정보를 미리 보내는 건 변호사를 압박해서 항소하지 못하게 하려는 경우고 유리한 정보는 내부 고발 정도?

씻고 옷을 갈아입은 진우는 식탁 의자에 앉아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쭉 뜯었다. 가벼운 걸 보니 USB라도 들었나 했는데, 뚜껑이 열린 상자 속 내용물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검은색 레이스 팬티로 여성용이었다.

진우는 집게손가락으로 끄트머리를 살짝 집어 올려 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작은 천 쪼가리를 보고 있으려니 그제야 제보나 자료였으면 집이 아니라 회사로 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걸 도대체 누가 보낸 걸까, 와 왜 보낸 걸까가 차례로 떠올랐다.

‘헤어진 누군가가 신종으로 또라이짓을 하는 건가?’

워낙 이상한 놈팡이들만 골라 만났으니 이런 짓 하는 놈도 있을 법했다. 입어 달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결혼한 제 와이프가 입던 걸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하아…. 그저 추측일 뿐인데도 변태라는 단어가 떠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이사준의 변태 짓은 귀여운 축이었다. 진우는 더 생각하기도 싫고 꼴도 보고 싶지 않아 식탁 아래 있던 쓰레기통에 속옷을 쑤셔 박았다.

어떤 놈인지 진짜 할 짓도 더럽게 없네.

* * *

패소 위기에 놓였던 이혼 소송의 항소장은 제출하지 않았다.

남편 측에서 먼저 협의 이혼으로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와 양육권을 조정하기로 했다. 외도 사실을 인정하는 부인도 그에 동의했다. 남편의 변호사와 서로 원하는 요구 사항을 주고받은 뒤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좀 허무했다. 이렇게 쉽게 끝날 걸 쓸데없이 오래 끌었다.

이사준 말처럼 남편에게는 오래된 남자 연인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친구로 행동하는 그들의 관계를 정보원이 전해준 사진 몇 장으로 진우는 금방 간파했다. 알고 나니 이렇게 티를 내고 다녔는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였다.

사진으로 상황을 확인한 진우는 남편에게 전화해서 말했다. 소수자의 사생활로 협박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와이프한테는 말하지 않겠다고. 그 말만 했을 뿐인데 소송이 아니라 협의로 넘어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까지 알았는지 같은 말을 하지 않은 거 보면 남편이 바보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진우 역시 재판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재판으로 가면 어쩔 수 없이 남편을 아우팅시켜야 했고, 그건 진우로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동료 의식 같은 거 정말 싫고 피곤한데, 이 사회에서 아우팅이라는 게 어떤 건지 진우는 너무 잘 알았다. 피를 나눈 가족도 등을 돌리는데 이제 남남이 될 사이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진우의 기준에서는 이혼 한 번으로 얻기에 너무 쓴 경험으로 느껴졌다.

남편은 진우가 그렇게나 혐오스러워하는 유부남 게이지만 결혼하고 바람피우는 사람이 한둘인가? 막말로 바람을 피운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건 아니지 않나. 상대가 동성이라는 이유로만 더 가혹한 처벌을 받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협의로 유도한 건데 다행히도 남편이 잘 따라줬다.

이사준 때문에 힌트를 얻은 거니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나?

진우는 끝난 사건 파일을 책장에 꽂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연관되지 않겠다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건수가 생기기 무섭게 연락하려는 자신이 우스웠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진우가 네, 하자 문이 열리고 김유민이 얼굴을 내밀었다.

“변호사님, 식사 같이하실래요?”

“그래요.”

진우는 겉옷을 챙겨 입고 메뉴 얘기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준비 많이 했는데 싱겁게 끝났네요.”

“그래도 패소는 아니니까요.”

충분히 만족할만한 결과라는 얘기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데 로비에 이사준이 보였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나 때문에 온 건가? 약속도 없이? 아니면 취재 때문에 다른 변호사 만나기로 했나?’

이 건물에 있는 변호사만 몇십 명이니 이사준이 여기 온 게 꼭 자신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진우는 모르는 척하는 것도 웃기다 싶어 김유민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 말한 뒤 이사준에게 다가갔다.

톡톡, 손가락으로 어깨를 두드리자 이사준이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어? 양 변호사님?”

“네.”

“여기서 뭐 해요?”

사준이 웃으며 물었다.

“그건 제가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요.”

로펌에 있는 이유를 기자가 변호사한테 물을 건 아니지.

“아, 누구 좀 만나러 왔어요.”

진우는 더 묻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아는 사람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양 변호사님은 식사?”

“네.”

사준은 진우와 자신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를 흘끔 쳐다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웨이브 머리에 회색 정장을 입은 여자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어쩐지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건가?

뚜렷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보던 사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취재원으로 봤으면 기억 못 할 리가 없고, 원나잇으로 만났다면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거 같은데, 가보세요.”

사준이 김유민을 슬쩍 가리키자 진우가 볼일 보고 들어가라며 몸을 돌렸다.

* * *

김유민이 쌀국수를 먹고 싶다고 해서 진우는 회사 근처 쌀국수집에 앉았다.

“아까 그분은 누구세요?”

“아, 김 변 본 적 없나? 〈스쿠프〉 기자예요.”

진우가 젓가락을 챙겨 주며 대꾸했다.

“기자구나.”

“기자로 안 보이죠?”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괜찮아요, 기자처럼 안 보이는 건 본인도 알걸요.”

때마침 나온 쌀국수를 본 진우는 사준에게 같이 먹으러 오자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거절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말은 해 볼 걸 싶었다. 어쨌거나 이번 이혼 재판은 그의 말 한마디가 열쇠가 된 건 사실이니까.

진우는 신세 지고 입 싹 닦은 기분이 들어 쌀국수를 먹는 내내 이사준을 생각했다. 김유민이 새로 맡을 사건에 대해 뭔가 이것저것 말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 내내 고민하던 진우는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핸드폰을 앞에 두고 씨름했다. 단순히 인사 문자를 보내면 되는데 괜히 이것저것 신경이 쓰여서 손가락이 선뜻 안 움직였다. 원래도 진우와 사준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섞은 이후에는 괜히 먼저 연락하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그런 의도가 없는데, 그럴 의도로 읽힐까 봐.

이사준은 뻔뻔하게 대놓고 그런 사인을 보냈지만 진우는 여전히 몸만 깊어지는 관계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머리로는 얽히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연락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진우는 몇 번을 더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톡톡 건드렸다. 머릿속으로는 고맙다고 말하는 건 당연한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 * *

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있던 사준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양 변]이라고 저장해 놓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로비에서 봤을 때도 당황하는 것처럼 보여서 좀 웃겼는데, 문자는 또 뭐라고 보냈으려나.

“뭐야, 너 연애하냐?”

작은 테이블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정운이 물었다.

“연애는 무슨.”

“연애도 아닌데 핸드폰 보면서 히죽거려? 총 맞았어?”

“됐고, 너 나한테 줄 거 있잖아.”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정운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이거, 네 거.”

사준은 봉투에 쓰여 있는 제 이름을 힐긋 봤다.

“식장이 어디라고?”

“여의도.”

이번에 결혼하게 된 정운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이 귀에 걸려서 싱글벙글했다.

“그날 일 없으면 갈게.”

“이사준, 너 어차피 맨날 여의도에 있으면서.”

“결혼식 주말일 거 아냐.”

“어? 그야 당연하지, 아무래도 평일에 결혼식은 좀.”

“주말에는 바빠.”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최근 이 주 동안은 꽤 바빴다.

“뭐야, 이사준 너 진짜 누구 만나?”

“…만나는 사람은 있지.”

사준은 진우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며 정운에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양 변: 지난번에 의견 고마웠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사무적일 수가 있을까. 차라리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낫겠네.

사준은 이 문자를 보낼 때 고민했을 진우의 표정을 상상했다. 섹스파트너는 싫다고 했는데 섹스파트너 같은 짓을 몇 번이나 했으니, 틈을 보이지 않을 만한 문구를 떠올리느라 고민했을 것이 글자 하나하나에 다 느껴졌다.

그러면 그냥 입 닦고 아무 말도 안 하면 될 건데, 쓸데없이 성실하긴.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문자에 뭐라고 답을 해줄까 고민하는데 정운이 사준에게 물었다.

“결혼은 무슨.”

“왜?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냐?”

“깊은 사이가 될 사람이 아니야.”

“뭐야, 유부녀야?”

“헛소리도 그 정도면 병이다.”

“그럼 뭔데? 이사준 너 남자라도 만나냐?”

“왜? 남자 만난다고 하면 소개라도 받게?”

“무슨, 그런 말을 하냐.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정운이 남자는 절대 사양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 갑자기 그거 생각나네, 고등학교 때 너 좋아하던 애 있었잖아.”

“어, 음, 있었지….”

사준은 불현듯 떠오른 얼굴에 느릿느릿 대답하며 진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 덕에 이겼어요?]

“이름이, 그, 여름 방학 끝나고 전학 가버려서 좀 헷갈리네. 성이 이재민? 김재민?”

“임재민.”

사준은 진우에게 답이 오길 기다리며 또렷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넌 기억력도 좋다, 걔 우리랑 한 학기밖에 같이 안 있었잖아.”

사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잊고 있었는데, 혼자 우는 양진우를 봤던 날 기억에서 선명해졌다.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에 만난 임재민이 이사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수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임재민의 눈빛이 열렬했으니 당사자인 이사준이 모를 수가 없었다.

“임재민 다시 만난 적 있어?”

“없어.”

사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뭐 하고 살까?”

“좋은 추억 거리는 없지 않아?”

사준의 말에 정운이 “뭐, 그건 그렇지.”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준이 만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불태웠다.

“그래서 지금 만나는 사람은 뭔데? 누구야?”

[양 변: 조정으로 넘어가서 잘 끝날 거 같아요]

사준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연애 얘기가 궁금해 죽겠어 하는 정운을 바라봤다.

“그냥 놀기 좋은 사람.”

“야, 씨, 이사준 넌 무슨 스물에나 할 소리를 하냐?”

“진짜야, 내가 어디까지 가능할지 알게 해준다고나 할까.”

사준은 남은 커피를 빨대로 빨아 쭉 마시고는 핸드폰 액정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더 놀고 싶고 알고 싶으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했다.

* * *

[이사준_스쿠프: 고마우면 취재하는 거 도와줘요]

진우는 사준에게 온 문자를 가만히 봤다. 이제까지 양진우가 스쿠프 일을 도와준 적은 많았다. 바로 얼마 전에만 해도 하 기자 때문에 구치소에 끌려가 주지 않았나. 그런데 이런 말을 사준에게 들으니 괜히 의심부터 먼저 들었다.

‘정말 단순히 취재인가?’

진우는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사준은 별 고민도 없이 잘만 연락하는데 자신은 사준의 문자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 상황이 짜증 나는데,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문 필요해요?]

[이사준_스쿠프: 아뇨, 취재할 때 같이 좀 가줘요]

고민이 무색하게 이번에도 사준의 문자는 바로 왔다.

[어디 가는데요?]

[이사준_스쿠프: 가 보면 알아요]

애도 아니고 설마 어딘지도 안 알려주는데 따라갈까 보냐고 문자를 쓰는데 사준에게 문자가 하나 더 왔다.

[이사준_스쿠프: 신입이랑은 같이 갔잖아요]

진우는 쓰고 있던 글자를 지우고 알겠다고 답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한번 도와주고 말지 싶었다.

* * *

토요일, 진우는 감색 셔츠와 베이지색 슬랙스에 겉옷을 걸치고 홍대 공용 주차장 나무 아래 서 있었다.

[이사준_스쿠프: 토요일 1시 홍대]

그날 사준에게 온 마지막 문자에 진우는 주차장에서 보자고 답했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진우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여기서 뭘 하는 건가 했다. 평일에 하 기자한테서 구치소에 한 번 더 같이 가달라는 연락이 왔지만 사준과 선약이 있어서 거절했다. 혹시 이사준을 만난다고 하면 꼬치꼬치 묻거나 태준에게 말할 거 같아서 아직 일정도 안 잡힌 재판 핑계까지 대면서. 근데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일찍 왔네요?”

진우가 자신의 행동을 짚어 보고 있는데 사준이 다가와 아는 척했다.

사준은 검은색 가죽 재킷에 노란색과 검은색이 섞인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언뜻 보면 언밸런스한데 묘하게 잘 어울렸다. 뭣보다 남방의 단추를 세 개 정도 풀고 있어서 속에 입은 흰 셔츠가 보였는데, 그게 이상하게 섹시해 보였다.

“이 기자님은 시간 딱 맞춰 왔네요.”

진우는 소매를 살짝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요, 기자는 약속 시간에 늦으면 안 되거든요.”

“네, 네. 그래서 어딜 가려고요?”

“일단 밥이라도 먹죠. 점심 아직이죠?”

진우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준을 따라 움직였다.

사준이 진우를 데려온 곳은 좁은 라면집으로, 테이블은 없고 바 테이블만 있는 좁은 가게였다. 필연적으로 둘은 오픈된 주방을 보고 나란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맛있어요.”

라면이 맛이 있어봤자 그게 그거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다. 맛있는 라면이 아니라 엄청나게 매운 라면이었다. 그 때문에 진우는 라면으로 배를 채우는 건지 물로 배를 채우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물을 많이 마셔야 했다.

“매운 거 못 먹어요? 몰랐네.”

“맵다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죠.”

미리 말해줬다면 못 먹으니 다른 걸 먹자고 했을 거다.

“이 정도로 못 먹을 줄은 몰랐죠.”

“…….”

“그래도 이제 알았으니까 다음에는 먹자고 안 할게요.”

그놈의 다음 타령. 진우는 얼얼한 입술을 연신 빨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 거 마시러 가죠.”

진우는 이번에도 사준에게 끌려 카페에 앉았고, 크림이 듬뿍 올려진 아이스 카페모카를 마셨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준이 멋대로 주문해 온 것이었고, 불이 난 입을 달래기 위해서는 마실 수밖에 없었다.

카페모카 위에 있던 크림을 숟가락으로 거의 다 떠먹었을 때 사준이 진우의 앞에 핸드폰을 내밀었다.

“뭐예요?”

“골라 봐요, 양 변호사님한테 하나 사줄게요.”

너무 매워서 먹은 것 같지도 않지만 이미 라면도 샀고, 카페에서 디저트까지 샀는데 또 뭘 사준다는 건가 싶어 진우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가 그대로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액정에 떠오른 사진들은 길쭉하고 도톰한 오이나 가지가 연상 되는 물건들이었고 진우는 그 물건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밝은 청춘들이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대낮의 카페에서 이게 할 짓인가? 보여줄 만한 사진이라고 생각해서 이걸 보여준 건가? 아무래도 이사준은 미친 게 분명하다. 뭔가 사준다고 해서 살짝 기뻤는데 그게 딜도라니, 아주 돌아버리겠다.

이사준 머릿속에는 온통 섹스뿐인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양진우=섹스’라는 공식이라도 세운 걸까.

“뭐가 마음에 들어요?”

“장난은 그만하고, 그래서 어딜 가려고 하는 건데요?”

진우는 퍽 진지하게 말했다.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하고 오늘 만난 목적이나 실행하고 빨리 헤어집시다, 하는 의미를 담아서.

“저기요.”

사준이 카페 바로 맞은 편에 있는 흰색 간판을 가리켰고, 진우의 눈이 자연스럽게 간판에 있는 글자를 읽었다.

[ONLY ADULT♥]

새빨간 색으로 쓰여 있는 글자는 착각할 수도, 잘못 읽을 수도 없게 뒤에는 빨간 하트까지 붙어 있었다.

진우는 사준의 얼굴을 한번 보고 다시 간판을 쳐다봤다. 다른 가게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사준의 손끝은 여전히 당당하게도 흰 바탕에 빨간 글씨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길… 왜요?”

“안전성 테스트 안 하고 들여온 물건들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요.”

그래, 사람 몸에 직접 닿는 건데 안전해야 하고, 깨끗해야지. 정말 백번 양보해서 방송할 게 너무 없어서 이딴 거지 같은 아이템을 장태준이 오케이 했다고 칠 수는 있지만 근데 그걸 취재하러, 왜 자신과 함께 가자고 하는 건지는 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을 양보해도 알 수 없었다.

무슨 꿍꿍이일지 짐작하는 진우를 향해 사준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했다.

“저런 데 혼자 가면 뻘쭘하잖아요.”

“이 기자님, 취재할 때 그런 생각 안 하잖아요.”

“아닌데요, 하는데요.”

“사명감 갖고 몸 바쳐 쓰는 줄 알았는데요?”

진우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건 팀장님 생각이고요, 난 달라요. 어떻게 기자가 매번 고발만 해. 따뜻한 소식도 전해야지.”

성인용품 소식이 퍽도 따뜻하겠다고 한마디 하려는데 사준이 더 빨랐다.

“아, 이건 뜨거운 소식인가.”

사준은 진우의 말문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진우는 손바닥으로 앞이마를 눌렀다.

“솔직히 말해요, 진짜 무슨 목적?”

“진짜 취재 목적.”

“하…?”

“혼자 가면 좀 수상하게 볼 수도 있으니까 커플인 척하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이제 한술 더 떠 커플인 척하자는 소리까지 하는 사준을 보고 진우는 기가 막혔다. 이 기자님의 많은 여자 정보원들은 어디에다 두고 날 데려왔느냐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여자를 데려오면 성희롱처럼 느낄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러자 이사준이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여전히 성인용품을 취재한다는 게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진우는 나름 합리적으로 도출해냈다.

“남자라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말이죠, 착각이에요.”

진우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각 잡고 말을 뱉었다.

“성희롱은 당사자가 불쾌하다고 느끼면 남녀 상관없이 다 적용되거든요.”

“그 말은, 내가 지금 양 변호사님을 성희롱하고 있다는 말?”

“내가 그렇게 느끼네요.”

“와, 너무하다. 성희롱이라니.”

“그럼 벌건 대낮에 그런 사진 보여주는 게 성희롱이 아니에요?”

“취재하는 거 도와준다고 한 건 양 변호사님이잖아요.”

진우는 제가 더 억울한 것처럼 구는 사준과 이미 불이 꺼져 어두워진 핸드폰 액정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 걸 사준다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좋아할 줄 알았죠.”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손가락으로 늘리는 거보다 도구 쓰면 더 편할 거 같기도 하고, 자위도….”

“아, 됐어요. 가요, 가.”

진우는 사준이 쓸데없는 말을 더 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냥 두면 이사준은 성인용품이 왜 양진우한테 필요한지에 대해 줄줄 읊을 것 같았는데,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주말 오후의 밝은 햇살이 들이치는 카페는 너무 건전했다.

사준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진우의 어깨를 손으로 툭 두드리더니 ‘그럼, 갈까요?’ 했다.

사람 속을 긁는 재주도 정말 다양했다.

* * *

카페 맞은편에 있는 성인용품 가게는 너무나 가까웠다. 차라리 멀기라도 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그런 걸 할 겨를이 없었다.

성인용품을 사 본 적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진우도 딜도나 로터, 콘돔과 젤을 사 봤다. 다만 온라인으로 구입하지, 이렇게 오프라인 숍에서는 사 본 적이 없다.

“와 본 적 없어요?”

진우의 속도 모르고 사준이 물었다.

“올 일이 없었네요.”

“그럼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사준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혹시 이런 데 자주 와 본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다.

진우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선반 앞을 서성이는 사준에게 다가갔다.

“이 기자님은….”

“이거 어때요?”

진우가 뭔가 말하기 전에 사준이 작은 상자를 들어 진우 앞에 내밀었다. 또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진우가 필요 없다고 짜증을 부리려는데 사준이 고개를 살짝 숙여 진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기자라고 부르면 안 되죠, 이것도 나름 잠입 취잰데.”

진우는 냉수라도 마신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별로예요? 그럼 다른 거 마음에 드는 거 있어요?”

사준은 진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행동만 보면 게이 커플이라고 광고를 하는 모양새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주인도 쉽게 말 못 거는 거 같으니까, 이편이 더 나을 거 같은데요.”

진우는 이젠 될 대로 되란 심정이었다.

“그래서 뭘 찾으면 되는데요?”

“음….”

“안전한지 아닌지 눈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잖아요.”

진우가 말하자 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럼 몇 개 사 볼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사준을 향해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하나 전력을 다해 반응하면 몸이 축날 것 같았다.

* * *

성인용품 숍 탐방은 정말 환상적으로 끝났다.

이사준은 비교군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진우를 끌고 세 군데나 더 돌아다녔다. 숍에 들어갈 때마다 사준은 기형적으로 큰 딜도만 가리키며 ‘이거 어때요?’라고 물었고, 진우는 그때마다 사준을 때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물론 끝까지 참은 건 아니다. 마지막 가게에서도 같은 질문을 하는 사준에게 진우는 ‘당신 게 더 커요.’라고 말했고, 그에 사준은 박장대소했다.

“이 기자님은 원래 와 봤었어요?”

“어디를요?”

“이런 가게요.”

진우가 조금 전 나온 가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예전에 강남에 있는 거, 한 번.”

어쩐지…. 진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누구랑 같이 갔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아도 쉽게 짐작됐다. 아마 사준과 사귀던 여자였을 거다. 발랑 까져서는.

“스물 딱 되자마자, 친구들이 가보자고 해서 간 거예요.”

사준은 진우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막았다. 양진우 성격이면 사준이 여자와 성인용품을 사서 야한 짓을 했을 거라고, 이미 팔만대장경쯤되는 분량의 상상을 마쳤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준의 얘기를 들은 진우가 ‘아, 친구랑….’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친구들이 가보자고 하길래 가봤죠.”

“뭐 샀어요?”

“아뇨, 그땐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고…. 괜히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기세 좋게 갔다가 그냥 나왔죠.”

“오늘은 잘만 보던데요.”

사기도 잘 사고.

진우는 사준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은색 쇼핑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양 변호사님도 옆에 있었고.”

진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라면으로 얼얼했던 입술이 아직도 부어 있는 것 같다.

“저녁 먹고 들어갈래요?”

사준의 물음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같은 라면은 싫어요.”

진우는 발품을 팔았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품만 팔았나? 솔직히 얼굴까지 팔렸다. 성인용품점 사장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팔린 건 팔린 거다.

“어? 양 변호사님.”

머릿속으로 몇 가지 메뉴 선택지를 늘어놓고 고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가 고개를 돌려 보자 김유민이 서 있었다.

“김 변…. 여기서 뭐 해요?”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 알아봤을까, 설마 성인용품점에서 나오는 걸 본 건 아니겠지?

일을 도와줬다고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괜히 긴장됐다.

“친구 만나러 나왔는데, 갑자기 못 온다고 연락이 왔지 뭐예요.”

다행히 김유민은 진우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 평소와 다름없이 말했다.

“저는 이 기자님 일 좀 도와주느라.”

“아, 기자라고 하셨죠.”

김유민이 진우의 옆에 서 있는 사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전에 잠깐 얼굴 뵀죠? 이사준이라고 합니다.”

사준이 악수를 청하자 김유민이 손을 잡았다.

“김유민입니다.”

사준은 저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김유민을 보고 싱긋 웃었고, 그 둘을 보며 진우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사준이 김유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김유민은 사준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이사준은 김유민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이상적인 키 차이 같아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진우와 사준이 나란히 서 있을 때도 사준이 진우보다는 크지만, 저 정도로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매일 같이 보는 직장 동료인데 이사준이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 김유민이 달라 보였다.

“일은 다 끝나신 거예요?”

형식적인 인사를 마친 김유민이 진우에게 물었다.

“네, 밥 먹으러 갈까 했죠.”

“김유민 씨도 같이 가실래요?”

사준의 질문에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김유민이 역시 놀란 듯 되물었다.

“친구한테 바람맞으셨으면, 시간 괜찮으신 거 아니에요? 괜찮으면 밥 같이 해요.”

* * *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과 함께 이사준이 안내한 가게는 오픈 키친이 있는 일식집이었다. 천장에는 벚꽃과 양산이 매달려 있었고, 주황색 조명이 은은하게 퍼진 가게였다. 자잘한 인테리어 소품에도 신경 쓴 티가 나는 이곳은 연인들 사이에서 데이트 코스로 자주 애용될 것 같았다.

점심에는 라면집을 데려가더니, 여자 하나 늘었다고 가게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는 건가? 남녀차별 장난 아니네.

진우는 가게 내부를 빙 둘러보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꽤 널찍한 테이블에 앉았을 때 김유민과 진우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자 이사준은 김유민 옆자리에 앉았다.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사준이 꼭 자신의 옆에 앉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 옆자리에 앉는 건, 아니지 않나?

“어떤 거 좋아해요?”

테이블 가운데 놓인 메뉴판을 보며 사준이 김유민에게 물었다.

“다 잘 먹어요.”

“그럼 야키토리랑 연어 사시미랑… 육회 드세요? 날 거 안 좋아하시면 다른 거 시키고요.”

진우가 앞에 앉아 있는데 사준은 철저하게 김유민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 내숭에 속이 끓었지만, 진우는 내색할 수 없었다.

“나베도 하나 먹어요.”

진우는 그저 자신이 먹고 싶은 안주만 추가했다.

“여기 하이볼도 괜찮은데, 한잔할래요?”

“추천해주시면요.”

여자는 어떤 남자 옆에 있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까? 아까도 느꼈지만 이런 조명 아래 나란히 앉아 있는 둘을 보니 김유민이 회사에 있을 때랑은 달라 보였다.

“양 변호사님은?”

“라임으로 할게요.”

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을 불러 주문했다.

잠시 후 컬러풀한 하이볼이 먼저 나왔고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음식은 거짓말로라도 맛없다고 할 수 없게 맛있었다.

얇게 썬 닭고기는 입에 착 감기는 쫀득한 식감이었고, 아보카도와 함께 나온 육회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연어 사시미도 도톰한 게 입에 넣기 무섭게 사르륵 녹아내리는 게 꽤 좋은 횟감을 사용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베에는 각종 꼬치와 홍합이 들어있었는데, 국물이 시원해서 계속 당기는 맛이었다.

맛있는 음식, 이른 저녁 시간, 은은한 조명에는 필연적으로 술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한 잔만 마시려던 계획은 당연한 듯 틀어져서 여러 잔으로 이어졌다.

하이볼을 두 잔 마신 김유민의 뺨에는 홍조가 올라와서 조명과 더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이사준이 무슨 말만 해도 즐거운 것처럼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진우는 대화에 참여하면서도 속으로는 열이 올랐다. 섹스하고 싶다며 거지 같은 말로 치근댈 때는 언제고, 여자가 있다고 이렇게 태도를 바꾸는 이사준을 보니 약이 올랐다.

여자는 충분히 즐긴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 그런 말을 노골적으로 한 적은 없나? 하,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그죠? 양 변호사님?”

진우가 술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김유민이 물었다.

“…뭐, 그렇죠.”

“지금 얘기 안 듣고 있었죠?”

진우는 사실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준이 얄밉다고 생각하느라 대화에 하나도 집중을 못 하고 있던 게 사실이다.

“양 변호사님 인기 많다는 얘기하고 있었어요.”

사준의 설명에 진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닌데.”

“아니긴요, 여자 고객분들 장난 아니잖아요. 지난번 소속사랑 소송 있었던 김현이도 그렇고.”

“김현이면, 그 연예인이요?”

“네, 맞아요.”

김유민의 대답에 진우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막말로 게이가 여자한테 인기가 있어봤자다. 여자들의 관심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물론 비즈니스로 엮일 때는 그런 티를 안 내지만 이런 자리에서 화제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진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렇구나. 양 변호사님이 인기 많으시구나.”

사준은 가벼운 콧소리와 함께 처음에 진우가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 얄미운 얼굴에 진우는 술잔을 들었다. 뻔히 다 알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놀리는 것밖에 안 된다.

* * *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진우는 자신이 눈치껏 먼저 빠져줘야 할지 고민했다. 이사준과 김유민의 분위기가 좋았기에 둘이 따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것 같았다.

“택시 불렀어요.”

진우가 말하기 전에 사준이 김유민에게 말했다.

“아, 네….”

김유민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봤지만 사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도착한 택시 뒷문을 열어 김유민을 태웠다.

“변호사님, 월요일에 봬요.”

“네, 조심히 들어가요.”

진우는 김유민에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인사를 건넸다.

“연락처 따로 받았어요?”

떠나는 택시를 보던 진우가 사준에게 물었다.

김유민과 이사준이 따로 만나기로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자신은 일로 얽혀 있으니 둘이 썸 타는 사이가 됐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자신이 딴생각에 빠진 사이에 둘이 연락처라도 교환했을지도 모르니까.

“네?”

사준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김 변 연락처요, 따로 받았냐고요.”

“내가요? 왜요?”

사준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태도를 보였다.

“둘이 분위기 좋기에 2차라도 갈 줄 알았죠.”

“설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건 아닐 거 같은데. 마침 성인용품에서 산 것도 있겠다, 딱 좋은 거 아니었나?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저녁 먹는 내내 딴 데 정신 팔려있는 것처럼 보이더니, 김유민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김유민은 대화는 사준과 했지만 시선은 계속 진우를 향했고, 대화의 주제도 온통 양진우 얘기뿐이었다. 양 변호사님이 어쩌고, 양 변호사님이 저쩌고, 그 덕에 몇 가지 알게 된 사실도 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김유민 씨는 내가 아니라 변호사님한테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무슨,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진우는 차를 세워 놓은 공용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대리운전 앱을 켰다.

“남자만 좋아해서 여자 마음을 모르나.”

“보통은 그 반대일 거 같은데요? 남자를 좋아하니까,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마음을 더 잘 알죠.”

게이가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이유가 이 포인트였다. 여성성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에서 오는 공감대 형성.

“아닌 거 같은데.”

진우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김유민이 양진우를 칭찬했다고 해서 관심 있는 걸로 보는 건 이성애자식 논리였다. 진우가 느끼기에 그건 그냥 화제일 뿐이었다. 오늘 만난 두 사람의 공통 주제가 양진우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거.

진우는 홍대 공영주차장으로 대리 기사를 호출한 뒤 사준을 쳐다봤다.

“왜 계속 따라와요?”

“양 변호사님은 어디 가는데요?”

“대리 불러서 집에 가야죠.”

“같이 가요.”

데려다 달라는 건가 싶어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택시 타고 가도 되잖아요.”

진우는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쌀쌀한 밤바람이 뺨을 건드렸고, 유흥에 빠진 사람들이 진우의 옆을 스쳐 갔다. 뒤에서 사준이 따라온다는 걸 알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고 싶었다. 여자랑 시시덕거린 남자를 집에 곱게 데려다줄 정도로 자신은 마음 넓은 게이가 아니었다.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대리 기사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진우는 운전석 문에 기대서서 대리 기사가 오는지 살폈다.

“양 변호사님.”

어느새 따라온 사준이 조수석 근처에 서서 진우를 불렀다.

“안 데려다줄 거예요.”

“아뇨, 그게 아니고. 혹시 싫었어요?”

“뭐가요?”

진우가 고개를 돌려 사준을 바라봤다. 적당히 마신 술 때문인지 밤바람에 실려 오는 사준의 목소리가 유독 부드럽게 느껴졌다.

“내가 김 변호사님이랑 말한 거요.”

진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저건 또 무슨 논리일까? 그런데 막상 싫었냐 물어보니 머릿속에 솔직한 답이 떠올랐다. 싫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싫었다고 하면 왜인지를 설명해야 할 거고, 설명하려면 아직은 덮어 놓을 수 있는 수준인 감정을 헤집어야 할 것이었다.

“양 변호사님이랑 같이 일하는 사람 앞이라 조심해야 할 거 같아서 그런 건데.”

마치 자신을 배려한 것 같은 그 말에 진우는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싫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그래요? 아니면 말고요.”

역시나 사준은 이번에도 쉽게 말했다.

“어차피 이 기자님은, 섹스가 목적이잖아요.”

김유민에게 보인 관심도 몸을 노린 게 아니냐는 의미를 담아 비아냥거렸다. 그 순간 사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웃을만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웃는 걸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 섹스하고 싶어 하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

아, 네, 그래요, 그런 사람인 걸 잊었네요.

진우가 입속으로 불만을 씰룩이는데 사준이 한마디 더 했다.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누가 그걸 따지는 거냐고 하는 순간, 야구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다가와 질문을 했다.

“3564 맞으세요?”

진우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바로 반응을 보였다.

“네, 맞아요. 부탁드릴게요.”

진우가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오르자 사준이 기다렸다는 듯 반대쪽 문을 열었다.

“이 기자님.”

“기껏 주말에 만났는데 그냥 가라고요? 오늘 고생했으니까 봉사할게요.”

사준이 들고 있던 검은색 쇼핑백을 흔들어 보였다. 의미하는 바가 노골적이었다.

낮에 성인용품점에서 산 걸 쓰겠다는 의미.

봉사는 무슨 놈의 봉사냐는 말은 운전석에 대리 기사가 타는 바람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양 변호사님 집도 궁금해요.”

이어진 사준의 말 때문에도 할 수 없었다. 진우는 입술을 앙다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사준이 또 양진우를 들었다 놨다.

* * *

대리 기사가 돌아가고 난 뒤 사준은 진우를 따라 움직였다. 가라고 해도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진우도 더 씨름하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우는 현관문 앞에 있는 상자를 보고 작게 인상을 썼다. 설마 또야?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역시나 송장도 안 붙은 상자에는 양진우라는 이름만 쓰여 있었는데, 지난번보다는 상자 크기가 좀 더 컸다.

“뭐예요?”

바로 옆에 다가온 사준이 상자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택배 한두 개 오는 건 문제 될 게 없지만 상자는 딱 보기에도 수상해 보였다. 아무것도 안 붙어 있는 상자에 이름만 덜렁 쓰여 있으니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별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우는 상자를 한 손에 쥐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사준은 상자가 뭔지 궁금했지만 지난번에 서류를 봤을 때 진우가 화냈던 게 떠올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준이 보기에 진우는 사적인 영역의 허락은 쉽게 하지 않았고, 그것이 일과 연관된 것이면 더 확실하게 선을 긋는 듯했다.

진우는 상자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올려두고는 씻고 올게요, 라고 말했다. 상자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섹스로라도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몸만 섞는 관계 싫다고 말했으면서 행동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게 우스운데, 이미 집까지 데려온 마당에 뭘 어쩌겠나.

“냉장고에 있는 거 아무거나 마셔도 돼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향하던 진우가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 사준에게 말했다.

진우가 욕실로 들어간 뒤 사준은 집 안을 휭 둘러봤다. 예상대로 큰 집이었다. 변호사 수입이 정확히 얼만지는 모르지만, 양진우가 돈을 잘 번다는 건 그가 갖고 다니는 몇 가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네 개.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욕실도 두 개일 거다. 이 큰 집 청소를 어떻게 하는 건지 집 안은 양진우의 성격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처럼 깨끗했다. 서재처럼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도 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도 컴퓨터 말고는 없었다. 널찍한 소파와 그에 맞춰서 큰 TV까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집이었다.

사준은 진우가 말한 대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혼자 사는데 냉장고가 두 개인 것도 놀라운데 냉장고 하나에는 온통 마실 것뿐이었다. 꼭 편의점 냉장고를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줄 맞춰 정리된 음료는 탄산, 이온, 커피를 비롯해 숙취해소제와 에너지 드링크까지 있었다. 그리고 아래 칸에는 맥주, 소주가 가득했다. 옆에 있는 와인셀러와 위스키 장식장에도 술이 가득해서 사준은 혀를 내둘렀다.

필요할 때만 마신다더니, 이쯤 되면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사준은 냉장고를 쭉 훑어보다가 숙취해소제를 집어 들었다. 취한 건 아닌데 술을 보니 취할 것 같아서 먹어두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숙취해소제 한 병을 단번에 비우고 쓰레기통에 음료병을 넣으려던 사준은 안에 들어있는 걸 보고 눈을 끔벅였다. 구깃구깃 접혀 있지만 검은색 레이스 천 조각에서 연상되는 건 하나뿐이었다. 사준은 남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하면서도 내용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확실한 건 펼쳐 봐야 알겠지만 크기가 여자 것 같았다. 꽉 끼는 레이스 속옷을 입는 게 양진우 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작아 보였다. 몇 가지 가능성을 소거하고 남은 건 결국 이 집에 여자가 속옷을 벗어두고 갔고 그걸 버린 거라는 것뿐이었다.

여자가 팬티를 벗었다? 이건 바꿔 말하면 양진우가 남자만 되는 게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거기서 뭐 해요?”

쓰레기통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준을 향해 씻고 나온 진우가 물었다.

“음.”

사준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짧게 고민했다.

“양 변호사님, 집에 여자도 들여요?”

“뭐요?”

무슨 또 신선한 개소린가 하던 진우는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던 검은색 레이스 팬티를 떠올리고 얼굴을 확 붉혔다.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진 그 얼굴을 보고 사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만 되는 게 아니군요.”

“아니, 그게….”

스토커 얘기는 어지간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였으니까. 가뜩이나 지금도 이사준은 진우의 영역을 멋대로 헤집고 들어오는데 스토커 얘기까지 알면 어떻게 나올지 감도 안 왔다.

“나한테는 여자가 어쩌고 그렇게 말하더니, 팬티 벗어 놓고 갈 정도면 끝난 거 아닌가?”

사준의 어이없다는 기색에 진우는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사준이 기분 상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오해받은 채 있을 수는 없었다.

“여자한테 인기 많다는 말 진짠가 보네요? 관심 없는 척하더니.”

“아니라니까요. 스토커예요, 스토커.”

가만두면 사준이 끝도 없이 오해할 거 같아 급하게 말을 뱉었다.

진우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게이임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었다. 늘 숨기기 급급했는데. 정말이지 이사준하고 얽히면 일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예상이 안 된다.

“스토커…?”

사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우를 봤다가 쓰레기통에 있는 팬티로 시선을 보냈다.

“스토커가 집으로 팬티를 보냈다고요?”

“아마도요.”

“왜요?”

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상식적인 사람인 사준이나 진우로서는 스토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속옷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좋아한다면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 숨어서 지켜보지 않는다. 왜 찜찜하게 몰래 숨어서 본단 말인가.

“진짜예요?”

사준이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을 하자 진우는 식탁 위에 던져 놓았던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것도?”

“그럴 거예요, 처음에 온 것도 저거랑 비슷하게 이름만 쓰여 있었으니까.”

“열어봐도 돼요?”

사준은 두 가지 호기심을 한 번에 해결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나는 양진우가 진성 게이인지에 대한 의문, 하나는 정체 모를 소포의 내용물.

“왜 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네.”

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준이 상자 테이프를 뜯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허.”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쓰레기통을 굴러다니는 팬티와 세트로 짐작되는 브래지어였다. 화려한 레이스에 꽤 큰 사이즈의 검은색 브래지어는 섹시한 이미지가 강렬했다.

“이거 새 건가 본데요?”

사준이 비닐에 싸여 있는 브래지어를 꺼내 들어 태그가 붙어 있는 걸 확인했다.

“새 거면 뭐 해요?”

“누가 보낸 건지 알아요?”

“그걸 알겠어요?”

진우는 정말로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왜 보낸 건지 따지는 것도, 범인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도 별로였다. 솔직히 범인을 잡기 위해 용의자를 추리려 들수록 자신이 한심한 놈들만 만나고 다닌 게 너무 역력해져서 싫었다.

어차피 저런 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사그라지고 말 것이었다.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피하려고 하면 의식한다고 생각해서 스토커는 더 난리 칠 게 분명했다.

“경찰에 신고는?”

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현행법상 스토커는 직접적인 피해가 있기 전까지는 아무 조치도 할 수 없어요.”

“직접적인 피해가 왜 없어요? 공포감을 조성하잖아요.”

스릴러 영화도 아니고.

이사준은 뒷말은 잇새로 뱉어내며 식탁 위에 있는 브래지어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신고는 할 수 있겠지만….”

진우는 어쩐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 사준을 달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말을 맺기는 어려웠다. 신고는 할 수 있지만 스토커 범죄에 대한 결과는 언제나 피해자가 원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나오지 않는다. 진우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내도 왜 하필 여자 속옷이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사준은 포장도 뜯지 않은 브래지어를 노려봤다. 어떤 정신병자가 이런 걸 보낸 걸까. 어떤 의미로 보낸 걸까. 예로부터 남자가 속옷을 선물한다는 의미는 딱 하나였다. 벗기고 싶다. 그럼 양진우가 이거 입은 걸 벗기고 싶다는 건가? 미친, 변태 새끼네.

“누군지 안 궁금해요? 나라면 궁금해서 잠도 안 올 거 같은데.”

“그런 거 일일이 생각하면 스트레스받아요.”

진우는 정말로 이 일에 대해 더 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민지 모르겠네, 진짜.”

“그렇게 의미까지 따지면 스트레스로 죽어버릴걸요.”

굳이 저런 화려한 여성 속옷을 보낸 의미는 누가 보낸 것인가보다 더 알고 싶지 않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단순히 입혀보고 싶다 정도일 수도 있지만….”

“있지만?”

“지 와이프 가슴이 이만하다고 자랑하는 걸 수도 있고.”

“허…?”

“주재를 알아라, 걸레야 의미일 수도 있고.”

이어지는 말에 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날 바에서 헤어진 남자를 봤을 때나 간혹 양진우가 스치듯 흘리는 말을 들었을 때 여태 제대로 된 놈들을 만나고 다닌 게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우가 생각하는 의미는 사준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럽고 다양했다.

진우는 봉긋하게 솟아올라온 브래지어 캡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진짜, 웃기는 새끼들이야. 붙어먹을 땐 서로 좋아했으면서 시간 지나면 벌린 쪽만 걸레 되는 거 너무 이상한 거 아닌가?”

“누가 양진우 씨한테 걸레래요?”

“아뇨, 뭐….”

속으로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낸 것이 민망해져 진우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투정 부린 것 같아 기분이 멋쩍었다.

“이 기자님, 씻어요.”

속옷 얘기도 스토커 얘기도 그만하자는 의미로 진우가 몸을 돌렸다.

“욕실은 저기.”

“아까 봤어요.”

사준이 진우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을 흘끔 보더니 몸을 움직였다.

그래, 어차피 섹스하러 온 건데 이 이상은 오지랖이지.

* * *

진우는 맥주 캔을 따 몇 모금 마신 뒤 식탁에 앉았다. 사준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했고,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두 번이나 이런 걸 받고 나니 신경 쓰였다.

전에 만났던 놈 중에 면도칼이 잔뜩 들어있는 편지를 보낸 또라이가 하나 있었다. 지가 바람피운 건 생각도 안 하고.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종이 사이에 들어있던 면도칼 때문에 진우는 손가락을 베였고, 그 꼴을 보고 태준이 언젠가는 칼로 베이는 거에서 안 끝나고 찔릴 거라고, 아무나 만나지 좀 말라고 타박했다.

물론 그때 진우는 찔러도 내가 찌르겠지, 했다.

진우는 검은색 브래지어와 눈싸움을 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가져가라고 현관에 걸어 놓으면 좀 당황할까?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아파트에 변태가 산다는 소문만 쫙 퍼지겠지. 난감하다. 경비가 항상 상주하고 있는데도 올라올 수 있다는 건 이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안다는 말이다. 그래, 요즘에는 배달이 워낙 많이 다니니까 그것까지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곤 치더라도 찜찜했다.

이 집에 왔던 놈 중 하나일 거 같긴 한데, 그냥 두면 아무것도 안 하겠지 싶었는데…. 계속 이러면 CCTV라도 확인해 봐야 하나? 복도에는 없어도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있고 그것만 확인해도 누가 이 층에서 내렸는지는 알 수 있다. 그러면 범인을 특정 지을 수는 있는데, 문제는 CCTV를 보려면 경찰에 신고해야 했고, 신고하면….

이어지는 생각에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러다 말겠지.’

괜히 반응하는 걸 보여서 스토커를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

“왜 거기 있어요?”

진우가 꺼내 놓은 가운만 입고 나온 사준이 물었다.

“그냥…. 결국엔 이 기자님이랑 또 하는구나 싶어서요.”

사준의 고개가 기울어지더니 진우의 코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싫어요?”

“됐어요.”

집에 들인 순간 이미 게임 끝이다. 지금 와서 싫고 좋고를 논하는 건 쓸모없는 기력싸움이다.

“됐긴 뭐가 됐어요? 본인 일인데 왜 이렇게 무심해요? 스토커도 그렇고.”

사준은 진우의 뺨을 가볍게 쥐고 입술을 꾹 눌렀다.

“여기서 할래요?”

위로라도 해주는 줄 알았는데, 마주 닿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결국 제 욕구 해소가 담긴 욕망이었다.

“그런 취향이에요?”

“취향? 해 보면 알겠죠.”

사준이 서글서글 웃으면서 진우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고 중심을 꾹 눌렀다.

* * *

아, 흐으, 읍, 진우의 입속에서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맥주로 입술을 축였는데 자꾸만 입이 벌어져서 입안이 말라버렸다.

분위기에 휩쓸렸고 이사준 얼굴에 휩쓸렸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눈빛만 음란하게 빛내면 기대를 안 할 수 없지 않나. 그리고 침대에서 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계산이었다. 괜히 침대에서 뒹굴었다가 흔적이라도 남으면 나중에 혼자 청승 떨 것 같아서.

진우는 파들거리는 손으로 식탁 끝을 꽉 붙잡았다. 젤과 함께 밀고 들어온 손가락 때문에 바짝 일어선 척추가 덜덜 떨렸다. 이사준 손가락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바짝 긴장됐다. 쓱쓱, 젤의 도움으로 매끄럽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엉덩이가 절로 흔들렸다. 사준이 진우의 등 뒤에 몸을 바싹 붙이더니 목덜미를 깨물었다.

“후으, 진짜. 머저리들이야.”

“읏, 지금, 뭐라고.”

진우가 사준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안쪽에 있던 손가락이 빙글 돌았다.

“이렇게 조이는 걸레가 어디 있대요?”

“하…?”

진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굳이 아래를 손가락으로 쑤시면서 걸레니, 뭐니 해야 하나? 그놈의 걸레 소리 좀 그만하라고 하려는데 안쪽을 멋대로 헤집던 손가락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빠끔 벌어진 구멍 틈으로 흘러나온 윤활액이 다리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사준은 진우의 몸을 휙 돌려세우더니 어깨를 밀었다. 엉덩이에 식탁이 닿아서 진우가 버텨 보려 했지만 사준이 허벅지를 위로 들어 올린 바람에 상체가 넘어갔다.

“읏, 뭐 하는 거예요.”

차가운 식탁의 감촉이 등에 닿자 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워서 하는 게 편할 거 같아서요.”

핑계가 좋다. 그냥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거면서.

“서서 하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다음에.”

오늘은 그냥 막 하고 싶어.

속삭이는 뒷말에 진우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일부러 노리고 하는 말이라면 취미가 고약했다. 얼굴을 보면서 하는 섹스는 이래서 내키지 않았다. 이사준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걸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까.

이사준이 굵게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당장이라도 밀어 넣을 줄 알았는데 사준의 성기는 구멍 근처를 배회할 뿐 쉽게 들어오지 않고 애를 태웠다. 진우의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원한다는 말을 들으려는 이사준의 수작인 걸 아는데 몸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등에 닿았던 식탁도 어느새 체온 때문에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사준이 귀두로 진우의 구멍 입구를 꾹 눌렀다.

“양진우 씨는 말이죠. 걸레가 아니라 명기예요, 명기.”

벌어진 구멍이 귀두를 빠듯하게 조여 물자 이사준이 중얼중얼 말했다.

“진짜 좁아터졌어. 결혼하면서도 만나자고 하는 건, 지들도 못 잊어서 그런 거예요.”

“…몸을, 말이죠?”

입구에 끄트머리만 살짝 걸친 것에 진우가 할딱였다.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장난치는 건지 사준이 계속 뜸을 들였다.

“몸이면 왜 안 돼요?”

사준이 진우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꽉 움켜쥐었다.

“몸도 양진우 씨잖아.”

진우는 입을 딱 다물었다. 장담하는데 분명 이사준의 뇌는 기형일 것이다. 해부해 보고 싶을 정도다. 언뜻 들으면 틀린 게 없는 논리다. 몸도 양진우. 맞다, 양진우 몸이니까 몸도 양진우다. 하지만 진우는 상대의 몸만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몸도 주고 마음도 준 만큼 상대도 그러길 바랐는데 항상 갈취당한 건 몸뿐이었다.

“섹스만, 흣, 하고 싶어 하는, 읏… 사람들이 할만한 말이네요.”

“누가 그래요? 섹스만 하고 싶다고?”

“보면 알죠, 섹스가 목적이잖아요, 읏, 할 수만 있으면, 하아… 다른 사람이랑도 할 거면서, 흣…!”

사준이 입술을 꾹 다문 채 밀어 넣었던 귀두를 빼냈다. 벌어진 구멍과 기대로 달아오른 내벽이 발씬 거리며 허전함을 호소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안을 채우고 싶어서 눈앞이 반짝반짝했다.

탁, 뭔가 쓰러지는 소리에 진우가 고개를 들자 사준이 들고 왔던 쇼핑백이 쓰러지며 안에서 내용물이 쏟아졌다.

사준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진우의 눈앞에 흔들었다. 0.01이라는 숫자가 크게 쓰여 있는 콘돔을 보자 사준이 왜 삽입을 안 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무척이나 다정한 남자여서 콘돔 없이 안 하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그게 아닐 거다. 진짜 다정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식탁에서 하자 소리도 안 하겠지.

“그럼 오늘 산 콘돔 다 쓸 때까지는 양 변호사님이랑만 할까요?”

진우는 눈동자를 굴려 식탁 위를 뒹구는 콘돔 상자를 봤다. 여섯 개씩 들어있는 게 세 상자.

“…돌기형은 싫어요.”

진우가 사준이 들고 있는 형광 패키지를 손가락으로 쭉 밀어냈다.

“그럼 저 두 상자 다 쓸 때까지는 양 변호사님이랑만 할게요.”

이사준이 무척 심플하게 대답했다.

‘결국 섹스파트너를 허락하고 마는구나.’

진우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포일 뜯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사준의 골반이 진우의 허벅지 안쪽을 건드렸다. 아까보다 다리가 넓게 벌어지고 사준의 성기가 안쪽으로 진입했다.

어, 아으, 흐, 구멍이 벌어지면서 입도 함께 벌어졌다. 긴장한 것처럼 허벅지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사준이 한 번 더 꾹 밀어붙이자 단순히 뜨겁다, 크다가 아닌 다른 게 느껴졌다.

“어, 아, 흣.”

“느껴져요?”

놀란 눈을 한 진우와 눈이 마주치자 사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흐, 지금….”

“응, 돌기형. 오돌토돌 한 게 긁죠?”

“싫다고 했는, 하윽…!”

사준이 아래를 확 밀어붙인 바람에 진우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미안, 뭐라고요? 나 너무 오래 참아서.”

들을 생각도 없었으면서, 미안은 무슨.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사준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해서 입을 열어도 말이 제대로 안 나올 것이었다.

진우의 엉덩이를 움켜쥔 사준이 허리를 깊게 밀어붙였다. 회음부에 고환이 닿을 정도로 삽입이 깊어졌고, 익숙해질 틈도 없이 성기가 앞뒤로 움직였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래가 빠르게 달아올랐다.

콘돔에 닭살보다 조금 크게 달라붙어 있는 돌기가 진우의 내벽을 무자비하게 긁어냈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쾌감의 파도가 정신없이 몰아쳤다.

“후으, 좋죠? 엄청 조이네요. 미치겠다, 금방 쌀 거 같아….”

금방 쌀 거 같으면 허리를 그만 흔들면 되는데 사준은 멈추지 않았다. 퍽퍽 밀어붙이는 허리 짓에 진우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히윽, 아, 하읏, 사준의 귀두가 전립선을 누르고 뒤로 빠지면서 내벽을 죽죽 긁고 자극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발기한 성기가 배꼽 아래를 툭툭 건드렸다. 사정의 욕구를 견디지 못한 진우가 스스로 성기를 쥐고 귀두를 문질렀다.

“와, 씹, 뭐 하는 거예요? 진짜, 존나, 하아….”

사준은 달아올라 벌게진 눈으로 진우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퍽퍽퍽 움직였다. 몸을 섞은 뒤로 야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런 것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자위하는 양진우한테 박아대는 기분은 멍청할 정도로 신선했다. 진우가 손끝으로 귀두를 문지를 때마다 내벽이 환희하듯 사준의 성기를 조여 물었다. 강하게 몰아붙여지는 자극에 이사준이 입술을 짓씹었다.

“하, 씨발, 싸요, 나, 못 참겠어….”

사준이 욕설과 함께 중얼거렸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성기를 흔들던 손을 탁 놓자 정액이 튀어 올랐다. 진우의 가슴, 사준의 복부 여기저기에 흰 액이 묻었고 사정과 동시에 조여든 내벽에 사준 역시 더 버티지 못하고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사준의 몸이 진우의 위로 툭 떨어지자 땀이 나서 끈적하게 젖은 몸뚱이가 달라붙었다.

“오늘은 노카운트예요. 저 콘돔 하나도 안 썼으니까.”

사준이 식탁 끄트머리로 밀려난 콘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진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싫다고 했던 돌기 콘돔을 썼으니 무효라니, 순 제멋대로다. 사준은 몸을 일으켜 진우의 안에서 빠져나갔고 진우는 숨을 몰아쉬기 바빴다. 전신에 닥친 쾌감 때문에 아직도 손가락이 저릿했다.

사준은 콘돔을 묶어 버리고 새로운 콘돔을 갈아 끼우면서 진우의 늘어진 몸을 바라봤다. 쌩쌩하고, 깐깐해 보이는 얼굴이랑은 완전히 다르게 야하게 풀어진 얼굴에 성기는 언제 사정했냐는 듯 다시 일어섰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에 귀두를 갖다 댔다.

“아, 좀, 쉬었다가….”

“응, 누워서 쉬고 있어요.”

“다리 사이에 그걸 넣고 어떻게 쉬어.”

“안 움직이면 쉬는 거죠.”

사준이 슬금슬금 문지르던 성기를 밀어 넣다가 식탁 끝으로 팔을 쭉 뻗었다.

“이거 입어봐요.”

“미쳤어….”

아래쪽에 들어온 성기를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던 진우가 눈을 뜨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새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사준은 브래지어가 담긴 봉투를 뜯어 버리고 진우의 팔을 들었다.

“아니, 새 거고 헌 거고를 떠나서.”

“응응, 괜찮아요.”

진우가 팔을 뒤로 뺐지만 사준이 허리를 잘게 흔들며 손목을 꽉 잡아당기는 바람에 힘이 쭉 빠졌다. 사준은 무기력하게 끌려온 진우의 팔에 브래지어를 걸었다.

“잠깐 입어 보고 씻겨 줄 테니까.”

그게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하려고 했으나 사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끝에 달린 훅은 채우지도 않고 브래지어를 대충 어깨에 걸쳐놓은 뒤 감상하듯 바라봤다.

“헐렁한 게, 꽤 야하네요.”

사준이 브래지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가슴을 모아 쥐었다가 유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꼭 가슴 없는 여자가 뽕브라 한 거 같아요.”

“미친, 헛소리 좀 그만해, 흣.”

진우는 아까부터 말이 짧아졌는데, 길게 말할 정신이 없었다.

“헛소리 아닌데.”

사준은 진우의 유두를 문지르며 다시 허리 짓을 재개했다. 퍽퍽 강하게 박아댈 때마다 꽉 찬 내벽이 움찔움찔 떨렸다. 식탁 아래서 진우의 다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하, 씨발, 그 스토커 무슨 생각으로 보냈는지 모르지만, 상상도 못 했겠죠.”

“윽, 하아, 으응….”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쳐놓았다. 자연스럽게 몸이 접히면서 삽입이 깊어지자 사준이 입술을 짓씹었다.

“지가 보낸 거 입고 이렇게 딴 놈한테 박힐 줄은, 진짜 몰랐을 거야.”

사준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성가시다는 듯 쓸어올리고 다시 진우의 안쪽에 세게 박아댔다. 퍽퍽, 수직으로 내리찍듯 강하게 밀어붙일 때마다 어깨에 걸쳐진 진우의 다리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몸속에서 불꽃놀이가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팡팡 튀어 올랐다.

“아, 흐읏… 너무, 흣, 세….”

“하아, 못 참겠어요, 너무, 조이니까, 너무 좋아서, 허리가, 하아….”

사준은 허리를 못 멈추겠다는 말을 하더니 돌기형 콘돔을 다 쓸 기세로 몇 번이나 식탁에서 박아댔다.

* * *

“힘들어요?”

샴푸 거품이 잔뜩 묻은 진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사준이 물었다. 욕조에 가만히 늘어져 있던 진우는 사준을 흘끔 바라봤다. 사준의 집보다 욕조가 훨씬 넓은데 같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같이 씻을 생각은 없는 건지, 아니면 씻다가 또 불이 붙을 걸 걱정하는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궁금하면 바꿔서 해 볼래?”

진우는 눈을 감고 욕조 테두리에 목을 기댄 채 입술만 움직였다. 기운이 없어서 말이 길게 나오지 않기도 했고, 살을 붙이고 있는 동안 내내 반말을 뱉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반말이 흘러나왔다.

“어쩌죠, 양진우 씨? 난 그쪽에는 흥미 없는데.”

사준이 거품을 헹구기 위해 샤워기를 쥔 채 대답했고, 그에 진우는 사준이 흥미로 섹스한다는 티를 내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고 느꼈다.

“그럼 힘드냐고는 왜 물어봐? 안 힘들다고 할 줄 알았어?”

“기절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확실히 체력이 좋아.”

진우는 거품을 헹구는 물줄기를 가만히 느꼈다. 누구랑 비교해서 체력이 좋은 거냐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사준이 샤워기를 잠그자 쏟아지던 물소리가 사라지고 욕실이 조용해졌다.

“양 변호사님이 잘 조이니까, 앞으로도 그냥 이대로 하죠.”

됐다는 말이 목구멍으로 차올랐지만 진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힘드냐고 배려해 줄 것처럼 묻다가 조임 타령하는 이사준과, 헤어질 때 걸레니 어쩌고 했던 남자 중 어느 쪽이 더 개자식일까.

진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일생을 살면서 남들은 하나도 못 만나는 개새끼를 이렇게 많이 만나는 것도 재주였다.

“눈에 들어갔어요?”

사준이 진우의 좁아진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거품이 들어간 걸까 봐 신경 쓰는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병 주고 약 주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참 잘한다.

사준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진우를 보다 몸을 일으켜 욕실 선반을 봤다. 선반에는 목욕용품이 냉장고 속 음료수만큼이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보통은 자주 쓰는 것 하나만 꺼내 놓는데 진우의 욕실에는 샴푸는 여섯 종류, 바디워시는 네 종류, 트리트먼트 종류는 열 개가 넘었다. 기분에 따라 목욕용품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과했다.

“이거 다 변호사님 거예요?”

진우가 눈을 반짝 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어서 사준이 거꾸로 보였다. 그는 욕실 선반에 있는 목욕용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니.”

진우는 잠깐 고민하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을 안다고 해도 사준이 딱히 기분 나빠 할 것 같지는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그냥 뭐,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들 거.”

만나는 사람의 취향에 맞는, 혹은 좋아한다고 했던 물건들을 사 놓곤 했는데 헤어진 다음에도 버리질 못했다. 어쩌면, 혹시, 하는 마음 때문에. 다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물건이 없으면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정말이지 왜 그런 걱정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다시 돌아와서 샴푸나 바디워시를 다시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마음이 넓지 않아서 바람을 피운 사람을 다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근데 또 저런 물건들을 버리지도 못했다.

“이런 건 왜 갖고 있는 거예요?”

양진우 과거의 남자 흔적이라는 걸 알아차린 사준이 물었다.

“다시 왔을 때 없으면 서운할까 봐.”

처음엔 정말 이 목적으로 버리질 못했다. 지금은, 그냥, 모르겠다. 어떨 때는 컬렉션처럼 느껴졌고, 어떨 때는 몸에 새겨진 흉터의 개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이유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사준은 목욕용품을 죽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 그리워하는 것까지 남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다지만….

“미련이 많은 거야, 아니면 그냥 미련한 거야.”

“뭐?”

작게 중얼거린 말을 제대로 못 들어 진우가 반문했지만 사준은 ‘아뇨, 아니에요.’ 할 뿐이었다. 그는 피넛 아몬드라고 쓰여 있는 바디워시를 타월에 짜서 거품을 낸 다음 진우의 몸에 문질렀다.

“스토커가 집에 들어온 적은 없어요?”

“그런 적이 있을 리가….”

“조만간 들어올지도.”

사준이 진우의 팔을 위로 잡아당겨 겨드랑이를 타올로 문질렀다.

“무슨 근거로?”

“양 변호사님이랑 만났던 사람 중에 범인이 있으면 이 집 비밀번호도 알 거 아니에요. 이런 것도 못 버리는데 비밀번호를 어떻게 바꿔.”

정곡을 찔린 진우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준의 말이 맞았다. 진우는 이 집에 이사 온 뒤 한 번도 비밀번호를 바꾼 적 없었다.

“집에 침입한 것도 아니고 나도 남잔데, 굳이….”

“변호사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려고 하네? 일이 터진 다음에 하는 게 이상한 거죠, 신고 안 할 거면 비밀번호라도 바꿔요. 경계가 너무 없는 것도 안 좋으니까.”

“…….”

진우가 대꾸를 안 하자 사준도 잔소리를 멈췄다.

습기가 가득 찬 욕실에서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 * *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현관문이 돌아가는 소리에 눈을 뜬 진우는 이사준이 나간 건가? 하다가 다시 같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서 미간을 찌푸렸다. 나간 것도 아니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소리만 반복되고 있었다. 설마, 정말 이사준 말처럼 스토커가 집까지 침입한 건가 싶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진우는 침대 아래로 팔을 뻗어 대충 벗어서 던져 놓은 셔츠에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손에 단단히 힘을 주고 손잡이를 돌려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방문을 열었다.

띠리리릭―.

잠김 해제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또 들려 진우는 바짝 긴장했다. 현관 쪽에서 들리는 소리의 원인을 쉽게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살금살금 걷다 보니 현관까지 가는 길도 멀게 느껴졌다. 만약 현관에 달라붙어 있는 게 스토커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소리를 지르고 주먹질을 해야 하나? 아니면 신고를 먼저 하는 게 좋을까? 여러 개새끼를 만나 봤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현관에 도착했지만 사람은 안 보이고 반쯤 열려 있는 문과 멋대로 돌아가는 도어락 손잡이만 있었다. 아직 문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어서 빤히 보고만 있는데, 반쯤 열렸던 문이 확 열렸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던 진우는 사준의 등장에 맥이 탁 풀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진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당함을 담아 물었다.

“아, 비밀번호 재설정이요.”

“뭐?”

도어락 뒷면 뚜껑이 열린 게 이제야 진우의 눈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 뚜껑은 이사준이 들고 있었다.

“스토커 위험하잖아요.”

사준은 뚜껑 안쪽에 적힌 비밀번호 재설정 방법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다. 진우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왜, 지금 갑자기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비밀번호 뭐로 할래요?”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사준이 물었고, 그 기세에 진우는 머릿속으로 여러 숫자를 떠올렸지만 당장 떠오르는 숫자 조합이 없었다.

“양 변호사님이랑은 관계없는 숫자로 해야 할 거 같은데….”

사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중지와 검지를 엇갈려 딱 소리를 냈다.

“아, 021300해요.”

“그게 뭔데?”

“생일.”

진우는 입에서 헐 소리가 나올 뻔했다.

“설마 이 기자님 생일을 말하는 거?”

“응, 맞아요.”

진우는 좀 어이가 없었다. 여태 사귀던 남자의 생일로도 안 해 본 비밀번호였다.

“이 기자님 생일을 비밀번호로 하는 건 좀….”

“왜요? 싫어요?”

사준이 참 당연한 걸 되물어서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불쑥 침입해 버리니,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섹스파트너는 이런 걸 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냥 섹스만 하면 되는 사인데 왜 남의 집 비밀번호를 함부로 바꾸냐고 따져야 할지, 아니면 신경 쓰지 말라고 선을 쭉 그어야 할지 고민하는데 사준이 말했다.

“그럼 양 변호사님 생일은 언젠데요?”

“4월 8일.”

“흐응.”

“근데 스토커면 내 생일은 금방 알 거 같은데.”

“응, 그러니까 두 개를 합치면 되죠.”

사준은 핸드폰을 꺼내더니 액정을 꾹꾹 눌렀다.

“869040이 걸로.”

완전히 낯선 숫자 조합에 진우가 눈을 깜박였다. 86년 9월 6일? 이건가?

“양 변호사님 생일이랑 내 생일 곱한 거.”

사준이 큰일을 해낸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213 곱하기 408이라는 건데. 보통 곱하기를 하나? 아니, 그보다 왜 두 사람 생일 조합인데? 여기 또 오려고? 섹스파트너를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매번 집에서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머리 좋으니까 잊지 않을 거 같긴 하지만. 혹시 기억 안 나면 나한테 연락해요.”

혼란스러운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사준이 도어락에 숫자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말릴 틈이 없었던 거다. 말리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이미 새로운 숫자를 입력해서 바꿨는데 다시 바꾸는 것도 귀찮아서 진우는 그냥 두기로 했다. 이사준 말대로 그런 숫자라면 스토커도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거 같았으니까.

* * *

비밀번호를 바꾼 뒤 사준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더니 먼저 가야겠다며 가버렸다. 언뜻 들린 통화 내용으로 봤을 때는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기자가 주말이라고 해서 매번 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우는 사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사준은 진우의 집에서 나가면서 식탁 위에 있던 콘돔 상자를 하나 챙겨 들었다.

‘하나는 양 변호사님이 갖고 있어요.’

사준이 가고 섹스파트너 계약의 흔적처럼 남아있는 콘돔 상자를, 진우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일주일, 진우는 사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섹스파트너는 말 그대로 섹스만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성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태 사귀었던 남자들보다 그랬다. 이쯤 되니 그동안 섹스파트너보다 못한 남자들이랑 만나면서 연애했다고 생각한 게 우스울 지경이다.

어쨌거나 사준은 사소한 연락을 자주 했다. 장태준이 저기압이라는 안 궁금한 사실부터 밥을 먹었는지 묻는, 약간은 설레는 물음까지. 자질구레한 연락을 했는데 그중 제일 황당한 건 하 기자에 대한 얘기였다.

[이사준_스쿠프: 오늘 또 아이템 회의에서 까였네요]

처음에 이런 문자를 봤을 때는 그래서 어쩌라고? 싶었다. 주어가 불명확해서 이사준이 까였다는 건가 했는데 곧 알았다. 진우가 취향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서 사준은 하 기자에 대해 알려주려 하는 거다. 덕분에 진우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던 하건희의 기자 라이프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장태준이 알면 진짜 죽일지도 모르겠다.

[이사준_스쿠프: 팀장실에서 또 한 소리 듣는 듯]

처음에 거짓말을 한 건 진우고, 그 때문에 사소한 오해에 불이 붙은 것도 안다. 그런데도 썩 반갑지 않았다. 사준이 보내주는 하 기자에 관한 소식은 몸과 마음이 따로라는 걸 인정하는 말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사준은 진우가 누굴 좋아하든, 누구한테 호감이 있든 섹스만 즐기면 된다는 걸 이런 식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럴 때면 마음이 차게 식다가도 밥을 먹었냐고 묻거나 만나고 싶은데 일이 바빠서 시간이 안 난다는 투정을 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 보지 않았는데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사준 때문이었다.

* * *

[양 변: 잘해줘요]

국회의사당 벤치에 앉아 있던 사준은 진우의 문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잘해주긴, 개뿔. 하 기자가 혼나는지 아닌지 관심도 없으면서.’

진우가 하 기자한테 관심이 없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양진우한테 관심이나 호감의 저울이 있다면 기울어진 방향은 하 기자가 아니라 이 기자 쪽이겠지. 그런데도 사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 기자 소식을 일부러 알렸다. 진우의 마음은 전혀 모르는 것으로 해 두는 게 나중에 끝낼 때 좋을 것이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 시험해 보는 게 나쁘지만 걸리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겠나. 이용당했다든지, 시험당했다든지 하는 사실 자체를 모르면 기분이 나쁠 일도 없으니 나쁜 짓을 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벤치에 앉아 있던 사준은 진우에게 답을 보내면서 들고 있던 커피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짧게 한숨을 뱉자 부쩍 추워진 날씨 탓에 입김이 절로 나왔다.

[이사준_스쿠프: 오늘 볼래요?]

사준의 문자에 바로 답을 보내려던 진우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자는 건 결국 섹스하자는 말인데, 여파가 많이 남는 섹스를 하기에는 이번에 맡은 일이 복잡했다.

전에 하 기자를 따라서 간 구치소에서 만난 연쇄살인범이 로펌을 통해 정식으로 변호를 요청했다. 검찰에서 이미 피의자가 범인이라 확정할 만한 증거를 완벽하게 찾은 다음이라 변호를 해도 실형은 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수임료는 일반 사건의 두 배, 돈을 떠나서 감형만 받아도 커리어에 남을 큰 사건이었기에 진우는 사건을 맡기로 했다. 이미 언론에 공개된 사건이기 때문에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번 주는 일이 좀 많아서, 금요일은 괜]

진우는 금요일에 괜찮다고 쓰려던 글자를 지워버렸다. 괜히 못 만나서 아쉽다는 티가 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돼요.]

진우는 거절의 의미가 담긴 말을 명료하게 써서 보냈다. 그리고 사준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사준은 왜인지, 무슨 일인지 따위를 묻지 않았다. 읽기는 바로 읽었는데 사준에게 5분이 넘도록 답이 없었다.

“용건이 명확한 건 쉬워서 좋네.”

핸드폰 화면을 보며 중얼거리는데 노크와 함께 문을 연 김유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변호사님, 준비 다 됐는데 시작할까요?”

“그래요.”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이동했다.

사무실 옆에 있는 작은 회의실 원형 테이블 위에는 A4 박스 두 상자가 있었다.

“이게 다?”

“네, 증거가 확실한데 감형받은 판례가 생각보다 많아서요.”

“좋아요, 이 중에 우리한테 도움 될 게 있으면 좋겠네.”

진우는 자리에 앉아 김유민과 피의자 감형을 위한 판례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범행이 명백한 상황이어서 불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형 판결을 받게 할 생각은 없었다. 사형도 없는 나라에서 사형 판결은 무기징역이나 다름없었고 진우는 그걸 불공평하다 여겼다.

“아, 맞다. 〈스쿠프〉에서 이 사람 밀착 취재했잖아요.”

한참 서류를 보고 있던 김유민이 말을 꺼내 진우가 시선을 들었다.

“밀착은 아니지만 사건을 다루긴 했죠.”

“그쪽에서 얻을만한 정보 있을까요?”

“글쎄요.”

장태준네 팀이 취재하고 방송한 거니까 여타 기레기들이랑 다르게 자료는 많이 모았을 것 같지만…. 이걸 왜 물어보는 걸까.

진우는 김유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스쿠프〉 팀장 태준이 진우의 친구라는 걸 김유민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건하고 연관 지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방송에 썼던 자료 넘겨줄 수 있는지 제가 한번 물어볼까요?”

물어봐? 누구한테? 연이은 물음표에 대한 답은 금방 떠올랐다.

김유민은 이사준에게 일을 핑계로 연락해 보려는 게 분명하다.

연락처는 안 주고받았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이 기자님 연락처 주시면 제가 물어볼게요.”

김유민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준의 연락처를 요구했다. 일 때문에 양 변호사님한테 연락처를 받았다고 하면 이사준도 기분 나쁜 내색을 할 수 없으리라. 아니다, 애초에 이사준이라면 여자한테 오는 연락 자체를 기분 나빠할 것 같지 않았다. 미리 말을 해준다면 화내지도 않을 것이고.

“…그쪽 자료는 쉽게 안 주려고 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팀장한테 직접 물어볼게요.”

“아…. 그럼 그러실래요? 변호사님이 받아주시면 제가 검토해 볼게요. 쓸만한 게 있을지 모르니까요.”

만약 김유민이 한 번 더 이사준 연락처를 요구했다면 어쩔 수 없이 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유민은 더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우는 양심에 찔렸다. 연락을 못 하게 하는 건 좀 이기적인가? 아니면 유치한 건가? 이렇게 막는 게 얼마나 통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둘이 만나는 걸 원치 않았다. 만날 거라면 차라리 그 콘돔을 다 쓴 이후이길 바랐다.

* * *

“이거랑, 이거랑, 이거.”

박스에 있던 서류를 다 본 진우가 뒷목을 주무르며 김유민에게 내밀었다.

“이거 세 개 중심으로 갈게요. 특히 대법원 판례는 잘만 쓰면 우리한테 유용할 거 같으니까.”

“네, 정리해서 드릴게요. 식사하러 가실래요?”

“음, 밥 생각은 별로 없는데. 그냥 커피나….”

“안 돼요, 맨날 적당히 드시잖아요. 정리할 부분 확인했으니까 밥 먹고 준비해요.”

진우는 테이블 한쪽에 올려뒀던 핸드폰을 들었다가 문자 알림을 보고 손가락을 눌렀다.

“아, 역시 난 됐어요. 나중에 먹을게요.”

“네? 점심 아니면 같이 먹을 일도 없는데….”

뒤에서 김유민이 아쉬운 듯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진우는 반응을 보일 틈이 없었다.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와 조금 전 본 문자를 다시 한번 눈으로 읽었다.

[이사준_스쿠프: 아쉽네요]

1시간 전에 사준에게 온 문자였다. 이걸 봤는데 김유민과 태연한 얼굴로 밥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젠장. 진우는 입천장을 혀끝으로 꾹꾹 눌렀다. 아쉽다는 게 진심이라면 공감합니다, 동의합니다 같은, 아니 사실은 그냥 솔직하게 나도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사준은 국회 기자실 맨 끝자리에 앉아 노트북으로 엔터를 탁탁탁 두드렸다.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니까 바쁘면 거절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아는 것과 당하는 건 기분이 달랐다.

정신없이 흘러가던 법무부 장관 청문회가 끝나고 환경 단체의 기부금 횡령 조사가 마무리돼서 연락했더니 이번엔 양진우가 바쁘다고 한다. 진짜, 타이밍 한번 안 맞는다. 이렇게 오래 못 볼 줄 알았으면 그날 침대에서도 한두 번은 더 하는 거였는데. 벌써 이 주 가까이 못 본 바람에 괜히 다리 사이가 묵직한 기분이다.

‘그날 진짜 야했지.’

사준은 섹스에 익숙한 남자가 여자보다 야하다는 걸 양진우를 보고 알았다. 레이스 브래지어를 반쯤 억지로 입혔을 때 사준은 저한테 이런 성벽이 있었나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결이 고운 피부와 검은색 레이스는 묘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런 걸 보낸 거 보면 확실히 스토커가 양진우를 완전히 모르는 놈은 아닐 거다. 도대체 어떤 놈이 보낸 걸까. 제 일인데도 남일 대하는 것 같은 양진우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 억지로 현관 비밀번호를 바꿨지만 그 정도는 아무 도움도 안 될 거다.

스토커라는 게 원래 그렇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대상의 원하는 정보를 쟁취한다. 전에 스토커 범죄에 대해서 특집으로 다뤘을 때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사준은 확실히 느꼈다. 그 범죄가 나쁜 이유는 가해자가 난 그냥 좋아한 것뿐이야 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피해자에게 피해를 준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자신의 마음이 타인에게는 짐이고 부담이고 스트레스일 거라고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 혹은 그를 지켜 주는 거다, 같은 이상한 잣대로 행동하고 피해자가 자신을 신고하면 오히려 배신했다며 상처받고 피해자인 척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가해자가 범죄 의식이 없다는 점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나 다를 게 없었다. 피해 본 사람한테는 심각한 범죄인데, 양진우는 피해자면서 아무런 방비를 안 하니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위태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양진우 말도 맞긴 하다. 스토커 범죄는 뚜렷한 피해가 입증되지 않는 한 법적 처벌을 받는 게 힘들다. 아마 그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거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누군지는 알아내서 신고는 안 해도 접근하지 말라는 으름장 정도는 놔야 하는 거 아닐까.

사준이 직접 눈으로 봤던 것, 양진우가 종종 흘리는 말과 지난번 집에 갔을 때 본 물건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변변치 않은 놈들만 줄기차게 만났던 건 확실하다. 그런 놈 중의 하나일 거라고 보고, 이러다 말겠지 하는 것도 알겠다.

근데 만약에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면? 남편의 불륜 상대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던 것처럼, 양진우의 스토커도 예상치 못한 여자라면? 그럼 이거 정말 심각한 거 아닐까. 집 앞에 속옷을 두고 가는 진짜 미친 인간인데, 언제 갑자기 어떻게 돌변할 줄 알고.

* * *

진우는 설렁탕 국물을 휘휘 저으면서 입속에 밥을 밀어 넣었다. 혼자 식당에서 밥 먹는 취미는 없는데 오늘도 잘난 친구가 먼저 가버렸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도 대지 않은 설렁탕을 힐끔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다 나왔다.

김유민 말대로 혹시 스쿠프에서 조사한 자료 중에 힌트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태준에게 자료를 넘겨 달라고 했고, 퇴근 시간에 맞춰서 만났다. 그리고 주문한 설렁탕이 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장태준은 하 기자랑 통화하더니 먼저 가버렸다.

원래도 취잿거리가 터지면 밥이고 뭐고 일단 움직이던 태준이지만 요즘에는 취재에다 하 기자 일도 추가된 듯싶다. 아니, 사실 태준이 하 기자랑 연애하고 말고는 이제 어느 정도 관심 밖이다. 장태준이 애도 아니고 제 앞가림은 알아서 잘할 거다.

문제는 하 기자한테 전화가 오기 전 태준이 했던 말이다. 하 기자랑 어떠냐는 말에 태준은 바로 이사준이랑 어떠냐고 반문했다. 아닌 척 발뺌했지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진우는 밥을 넘기면서 태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기자 얘기가 지금 왜 나와?’

‘내가 모를 줄 알아?’

‘뭔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

‘무슨 일 있었고, 무슨 사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만약 그 타이밍에 하 기자한테 전화가 안 왔으면 자료 하나 받으러 왔다 취조받을 뻔했다.

이사준이 뭔가 말했을 리는 없는데 태준은 어디서 눈치챈 걸까? 뭘 보고 알았을까. 딱히 티 낼 만한 행동을 한 거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장태준이 순순히 취재 자료를 준다고 하더라니. 이걸 물어보려고 했던 건가?

이사준과 섹스파트너를 하기로 했다고 하면 오만상을 찌푸릴 게 안 봐도 비디오다. 일 때문에 얼굴 계속 볼 사람이랑 그런 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하냐고. 열 살 애보다 못한 애 취급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어쩌면 연애한다는 로망은 버린 거냐며 빈정거릴지도 모른다.

진우는 파가 둥둥 떠다니는 설렁탕을 다시 의미 없이 휘휘 저었다.

직접 물어본 거 보면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적당히 모르는 척해주면 안 되나? 아니지, 장태준이 그럴 리 없지. 누구보다 확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 진실이라고 추측한 걸 말할 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거다.

이사준과 콘돔 두 상자 다 쓸 때까지만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 아주 기함하겠지. 진우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저는 이렇게 고민하는데 이사준은 오늘도 여유작작일 것 같아서 괜히 얄미워졌다. 아쉽네요 라는 문자에 답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별말 없는 것도 아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약이 올랐다.

‘아쉽긴 개뿔.’

진우가 핸드폰을 이사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울릴 줄 몰랐던 핸드폰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진우는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어, 음, 여보세요?”

― 뭐 해요?

사준은 길 건너 설렁탕집을 보면서 전화를 고쳐 쥐었다. 가게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내부가 훤히 보였는데 거기서 정장을 입고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딱 들어왔다.

방송국 근처에 왜 또 혼자 있는 걸까.

“밥 먹어요.”

― 혼자?

진우는 사준이 왜 이런 걸 물어볼까 싶었다. 뭐 먹냐가 아니라 혼자 먹느냐는 질문은 좀 이상했다.

“네.”

― 왜요?

왜가 어디 있을까. 어쩌다 보니 그냥 혼자 먹는 건데. 이사준도 취재하다 보면 혼자 밥 먹을 때 있지 않나?

진우는 건너편 자리에 놓인 설렁탕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요.”

“우리 팀장이 바람맞혔어요?”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들자 이사준이 서 있었다.

“어…?”

“퇴근하고 나오는데 보이길래요.”

진우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자료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태준이 부르는 장소로 왔고, 그러다 보니 장소가 방송국 근처였다. 전에도 태준과 가끔 만나던 설렁탕집이어서 아무 생각을 못 했다.

“아니면 아직 안 온 거예요?”

사준이 뚜껑을 열지도 않은 밥공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뇨, 볼일 보고 갔어요.”

“뭐가 그렇게 바빠서 밥도 안 먹고 갔대요.”

사준은 태준이 앉았던 자리에 앉더니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새로 꺼냈다.

“이거 먹어도 되죠.”

“먹어요, 손도 안 댄 거니까. 식었으면 데워 달라고 해도 되고.”

“됐어요, 많이 식지도 않았어요.”

사준은 진우에게도 먹으라 눈짓을 했다.

밥을 먹기 시작한 진우를 보며 사준은 진우 옆에 있는 서류 봉투를 힐긋 봤다. 뭔가 필요해서 받은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밥 먹으러 와서 혼자 두고 가는 건 뭔지…. 이제까지 팀장을 싫어한 적이 없었는데, 두 번 연속으로 양진우가 혼자 있는 걸 보니 처음으로 별로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기분이 상할 것 같은데 진우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더 불만스러웠다.

“양 변호사님은 대접받고 다닐 필요가 있어요.”

열심히 밥 먹다가 사준이 건넨 말에 진우가 눈을 깜박였다. 생뚱맞게 느껴지는 말이라 의도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장태준이 약속 안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닌데, 밥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사준은 진우가 태준의 편을 드는 걸 들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매번 생기는 건지.’

사준은 태준의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지만, 근래 비밀리에 뭔가 취재한다는 느낌은 없었기에 더 이해가 안 됐다.

아니면 혹시, 양진우가 팀장 좋아하나? 충동적으로 떠오른 질문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왔다. 좋아하는데 친구로 오래 지내서 고백은 못 하고, 그러다 보니 만나는 남자들이랑도 오래 못 가고 그런 건가?

사준은 멋대로 양진우의 저울이 제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착각한 것에 낯이 뜨거워졌다. 하 기자는 아니어도 장태준은 진짜인 것 같았고, 오래된 마음은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았다. 섹파 싫다고 그렇게 내숭을 떨더니 고백 못 하는 짝사랑 대신 나한테 몸만 위로받는 거였네.

“근데 양 변호사님.”

“네?”

“왜 다시 존대해요? 반말 잘하던데.”

“아… 그건.”

진우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때는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서 그런 거다.

“문자로도 꼬박꼬박 존댓말 하기에 그럴 줄은 알았지만. 몇 주 안 봤다고 다시 내외하는 거예요?”

“내외하는 게 아니라….”

“그럼 뭔데요?”

“그때는 진짜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거예요. 저 원래 말 잘 안 놔요.”

말을 놓는 순간 거리감 조절이 어렵다. 특히 이사준같이 끝이 예정된 관계는 거리를 잘 조절해야 한다.

“난 반말이 좋던데, 편해서.”

“…….”

편해지고 싶지 않다.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다시 공적인 사이로 돌아가면 그땐 어떡하려고.

사준은 고작 반말 하나 가지고 고민하는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쓸데없이 철벽을 너무 신중하게 치는 것 같다.

“됐어요. 다시 정신 못 차릴 상황이 되면 반말하겠죠.”

사준은 의지가 담긴 말을 툭 던져 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 * *

흣, 차가운 젤이 엉덩이 사이로 뚝뚝 떨어지자 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차가워요?”

사준이 진우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오일마사지라도 하듯 젤을 문지르며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는 또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가만히 되짚어봤다. 밥만 먹고 헤어지려고 했다. 애초에 안 된다고 하기도 했고 오늘 만난 건 우연이었으니까. 근데 설렁탕집에서 나와 헤어지려는순간 사준이 붙잡았다.

‘이렇게 그냥 가요?’

욕구를 숨기지 않는 남자는 솔직해서 매력적이었지만 거절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낮에 아쉽다는 문자에 꾹 참고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수포가 될 거니까. 이성을 챙기고 거절했다. 일이 바쁘다 했으나 사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같이 차에 탔고, 헤어지기 아쉽다고 했고, 절대 안 된다고 하는 진우에게 허벅지라도 빌려줘요, 라는 말로 꼬셨다. 이쯤 되니 섹스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건가 싶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딴 사람이라도 찾아보라고 했지만 그 콘돔 다 쓸 때까지는 양 변호사님하고만 하기로 했잖아요, 라는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진우의 집, 침대 위, 하의만 탈의한 채 엎드린 상태.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넓게 문지르자 진우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탄력적으로 올라붙었다.

“무슨 생각 해요?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그냥, 이 기자님이 생각보다 끈질기구나, 하는 중이에요.”

“아닌데.”

“아닌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해요?”

“무슨 말이요? 허벅지에 하게 해달라는 거?”

사준은 바지춤에서 성기를 꺼내 젤이 묻은 손으로 가볍게 주물렀다. 뜨끈한 살덩이가 앞일을 기대하는 것처럼 몇 번 주무르지도 않았는데 금세 딱딱해졌다.

“양 변호사님 위해서 그런 건데.”

“뭐요?”

“이 주나 안 했으니까 허전할까 봐.”

“하, 내가 왜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진우가 고개를 휙 돌려 사준을 바라봤다. 약이 올라 뱉은 의미 없는 말이었는데 사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인상을 찡그린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사준은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바로 아래 허벅지에 끼우며 진우의 등을 끌어안듯 덮쳤다. 젤을 발라 놓은 허벅지 사이로 성기가 미끄러졌고, 사준의 입술이 진우의 귓가에 닿았다.

“했다는 거예요?”

허벅지 사이로 들어온 귀두가 회음을 자극하고 고환을 툭 건드렸다.

“누구랑?”

사준의 음낭이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가 떨어지면서 뜨거운 살 기둥이 허벅지를 훑었다.

“약속은 나만 지킨 건가?”

흐…, 느릿하고 미끌미끌한 열감에 진우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준은 상체를 일으키더니 진우의 오른쪽 엉덩이를 꽉 움켜잡은 채 한쪽으로 잡아당겼다. 구멍을 벌리려는 듯한 손놀림에 진우의 어깨가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잠깐, 삽입은 안 한다고, 했잖….”

“응, 안 해요.”

안 한다면서 사준은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젤을 뿌리고 주름진 입구를 엄지로 덧그렸다.

“안 한다면서 거긴 왜 만지는데?”

급한 마음에 말이 또 짧아졌다.

“오, 반말.”

사준의 키득거림에 진우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검사만 할게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소유욕을 표현하는 것처럼 들려서 심장이 발작하듯이 뛰기 시작하고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런 착각은 하면 안 되는데, 했으나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사준이 엉덩이 사이로 엄지를 살짝 미끄러트리자 진우가 허리를 비틀었지만 아래 깔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벌어진 구멍 사이로 들어온 엄지가 입구를 교묘하게 자극했다. 다른 손가락보다 짧은 손가락이었기에 깊게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감질났다. 이성이 완전히 바스러지고 쾌락을 갈구하게 될 것 같아 숨이 턱턱 차올랐다.

“조이는 거 보니까, 어제는 안 했나 본데요?”

사준이 엄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정말 다른 사람이랑 했어요?”

취재하는 것도 아닌데 사준은 너무 집요했다.

“근데 왜 나랑은 안 한다고 해요? 나 별로예요?”

마지막 경고처럼 느껴졌다. 별로라고 하면 별로가 아닌 걸 증명하려고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하지 마. 안 했어, 안 했으니까, 진짜, 힘들다고….”

섹스하면 다음 날 힘들다는 건 진짜인데 어째서 이렇게 애원하듯 말해야 하는 걸까. 진우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사준을 바라봤다.

“나랑 하는 거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진짜 힘들다니까… 일이 너무 많아서.”

사준이 엄지를 쏙 빼내고 허벅지 사이로 성기를 미끄러트린 채 진우의 위에 엎어졌다. 옆으로 돌린 진우의 얼굴 코앞에 사준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거, 살인범 재판이죠? 바쁜 거 언제 끝나는데요?”

태준이 말한 건지, 아니면 언론에 퍼진 걸 본 건지 사준은 진우가 맡은 사건을 아는 눈치였다.

“다다음주?”

“너무 멀잖아요.”

사준이 허리를 가볍게 털어 허벅지에 성기를 문질렀다. 죽지도 않은 단단한 성기가 허벅지를 쓸자 몸이 떨렸다.

“너무 오래 걸려요.”

“아, 흐, 준비 기간에만 그런 거니까… 그다음에는, 해도, 흣….”

허벅지에 대고 하는 추삽질이 빨라져서 말이 끊겼다. 진우가 입을 벙긋거리자 사준이 손을 내려 진우의 성기를 감아쥐었다. 쿠퍼액으로 젖은 성기를 부드럽게 훑어주고 흔들기 시작하자 진우의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아, 하으, 흣, 달뜬 신음이 진우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사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엄청 노는 척했으면서 일 때문에 섹스를 자제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성실함일까.

사준은 베개를 꽉 붙잡고 있는 진우의 손등 위에 제 손등을 겹치고 깍지를 낀 채 허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유사 섹스하는 거 진짜 관심도 없고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아래 깔린 게 양진우여서인지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진우는 눈을 꾹 감은 채 쾌감에서 허덕였다. 허벅지에 비비는 건 둘째치고 손을 꽉 잡은 데다 앞을 훑어주고 등을 감싸는 체위 때문에 이사준이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 억지로 몰아붙일 것처럼 굴다가도 안 된다고 하니 물러서 주는 게 참을 수 없이 좋았다. 사준의 귀두가 고환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우, 하읏, 쌀 거 같아, 아으, 이사준, 흡….”

쌀 것 같다는 말에 사준이 진우의 귀두를 꽉 붙잡았다.

“안 돼요, 나 먼저 할 거야.”

절대 양보해 줄 수 없다는 듯 말한 사준이 허리를 빠르게 치댔다. 사준의 치골이 엉덩이에 부딪히며 차진 소리가 울렸다. 고조된 성감이 분출을 원하며 사준의 손안에서 쿠퍼액을 질질 흘렸다.

“아응, 놔, 흣, 놔 보라, 고….”

“아, 하아, 또, 해 봐요.”

“뭐르을….”

진우가 말끝을 길게 늘이자 사준이 진우의 입술을 살짝 빨아 당겼다.

“양 변호사님이 반말하는 거 섹시해요.”

눈꼬리가 휘며 야살스럽게 웃는 얼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발가락이 동그랗게 말리고 베개를 붙잡은 손끝이 희게 질렸다.

“못, 참겠어, 하으, 빨리….”

“조르는 거, 진짜, 씹.”

존나 잘하네요.

진우의 얼굴을 보고 있던 사준이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더니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허벅지 사이로 성기가 푹푹 처박혔다. 빨라진 박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데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해방감이 느껴졌다.

흐…, 진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고, 이내 허벅지를 괴롭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가더니 엉덩이에 끈적한 액이 떨어졌다. 떨어진 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킹 당한 기분이라 뭐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다음엔 콘돔 쓸 거예요.”

사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정액을 멋대로 뿌린 것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삽입을 예고하는 말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아쉬운 건 비단 이사준만이 아니었다.

* * *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자리에 앉아서 혼자 실실 웃고 있는 사준을 향해 백 작가가 물었다.

“아뇨, 좋은 일은 무슨.”

“아닌데, 이 기자님 그러는 거 보니까 뭐가 있는데. 특종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백 작가의 능청에 사준은 아니라고 손사래 쳤지만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어제는 장 팀장 대신인 것 같아 순간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몸만 즐기기에는 더 최고였다. 게다가 양진우와는 은근히 연애하는 기분까지 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게 없었다. 기분은 기분대로 내고 질리면 끝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섹스파트너가 어디 있을까.

소수자에 대해 차별하고 싶지는 않지만, 미래가 없는 건 사실이니까. 설사 이 나라가 갑자기 동성혼을 합법으로 만든다고 해도 이미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는 쉬이 바뀔 수가 없는 법이었다. 호기심도 채워주고 욕구도 채워주는 진우는 사준에게 적격이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굳이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 *

“변호사님?”

변론내용을 정리하면서 자료 보강할 부분을 체크하는데 김유민이 불렀다.

“네? 왜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은 거죠?”

“아,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진우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삽입만 안 했다 뿐이지 거의 한 거나 마찬가지인 짓을 사준과 늦게까지 하는 바람에 잠을 많이 못 잤다.

“밥 먹으러 가요.”

김유민이 보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고 안 되겠다는 듯 말했지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거 마저 볼게요. 김 변은 다녀와요.”

“또 안 드시게요?”

선뜻 자리를 못 뜨는 김유민을 향해 진우는 진짜 괜찮아요, 라며 웃었다.

“그래도 뭘 먹어야 힘을 내죠.”

“가만 보면 김 변은 진짜 내 밥 엄청 챙겨.”

안 그래도 된다는 의미를 담아 가볍게 말한 건데 김유민이 부끄러운 듯 살짝 웃어 보였다.

“점심 아니면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없잖아요.”

“내일은 그럼 같이 먹어요. 오늘은 별로 입맛이 없어요.”

“알겠어요, 그럼 올 때 샌드위치 사 올게요.”

“고마워요.”

김 변이 회의실에서 나간 뒤 진우는 태준에게 받은 자료를 쭉 훑어봤다. 언론사에 속한 사람들이 조사한 자료여서 이미 공개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딱히 쓸 만한 건 없어 보이네.’

“변호사님, 우편물 왔네요.”

조금 전 나갔던 김유민이 진우 앞으로 다가왔다.

“이거요.”

진우는 김유민이 내민 봉투 두 개를 빤히 봤다. 하나는 흰 봉투, 하나는 서류 봉투 색으로 둘 다 청첩장이 연상 되는 크기였다.

“이 비서 없어요? 우편물을 왜 김 변이 챙겨요.”

이런 일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말하자 김유민이 씩 웃었다.

“이 비서님이 우편물 정리하기에 달라고 했어요, 그 김에 진짜 식사 안 할 건지 한 번 더 물어보기도 하려고.”

“괜찮아요.”

진우가 다시 한번 거절하자 김유민은 “그러다 몸 상해요.”라는 잔소리를 툭 던져 놓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진우는 먼저 흰 봉투의 뒷면을 확인했다. 발송인이 김현이였다. 김현이는 현재 잘 나가는 인기 배우로, 대기업 회장의 스폰을 받아서 콧대가 높은 여자였다.

김현이를 진우가 알게 된 건 육 개월 전쯤이었다. 당시 김현이는 소속사랑 트러블이 있었고, 그 건을 담당한 게 진우였다. 그때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 싶었는데, 뭘 이런 걸 다 보냈을까.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안에는 VIP라고 적힌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생일 파티 초대장 맨 아래는 꼭 참석해 달라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붉은 입술이 찍혀 있었다.

참, 노골적이었다. 비싼 고객이니 관리해야 하는 건 맞는데 김현이는 마약을 한다는 얘기가 암암리에 많이 퍼져 있어서 파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선뜻 안 들었다.

진우는 초대장을 내려 두고 다른 봉투를 마저 뜯었다. 김현이가 보낸 것보다 좀 더 도톰한 봉투를 뜯은 순간 진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진우는 떨리는 손을 숨기지 못하고 봉투 속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 * *

사준은 진동하는 핸드폰 위에 떠 오른 이름을 보고 빙긋 웃었다. 문자도 아니고 전화라니, 무슨 일일까. 궁금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 바빠요?

여보세요도 하기 전에 날아온 목소리는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음, 왜요? 벌써 하고 싶어졌어요?”

―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내가 보고 싶어졌어요?”

― 심각하게 할 얘기가 있어요.

심각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준 티가 나서 사준은 턱을 쓰다듬었다. 언뜻 생각해 봤을 때 자신과 양진우 사이에 심각한 얘기를 할 게 없었다. 그런 일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데, 설마하니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섹스파트너 관계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심각한 얘기가 뭘까요? 양 변호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무섭네.”

진우는 사준의 능청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장난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하자 그제야 사준이 ‘심각한 얘기, 란 말이죠.’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네, 혹시 지방으로 취재 가거나 한 건 아니죠?”

― 아뇨, 국회에요. 별일 없으면 여기서 바로 퇴근할 거긴 한데….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진우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봉투를 가방에 쑤셔 넣으면서 말했다.

“알았어요.”

* * *

오후 내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운전을 어떻게 한 건지 기억이 안 났다. 반쯤 넋을 놓은 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사준이 걸어 나왔다.

“일은 다 끝난 거예요?”

“대충은요. 요즘 우리 팀장이 좋아할 만한 일이 별로 없어서.”

사준이 안전벨트를 매자 진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예요?”

“이 기자님, 집으로 가도 되죠?”

“오늘 진짜 별일이네, 양 변호사님이 우리 집 가자는 말을 먼저 다 하고.”

진우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보여서 농담을 건넨 건데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는 핀잔 정도는 돌아오고 남았는데, 진우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백미러로 후방을 확인하고 핸들을 꽉 쥐고 전방을 바라봤다. 초보 운전도 아닌데 뭐 저렇게 운전에 집중하는 건지. 사준은 진우를 멀뚱히 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각한 얘기를 한다던 진우의 분위기가 진짜 심각해 보여서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뒤를 봤다. 긴장한 탓에 허리와 목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핸들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신호가 바뀌고 차가 멈췄을 때 진우는 낮에 받은 우편물을 떠올렸다. 김현이 초대장과 함께 온 건 발신인이 없었다. 어쩐지 쌔한 기분이 들었는데, 봉투를 뜯자마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봉투에 들어있던 건 세 장의 사진이었다. 진우만 찍혀 있었다면 스토커의 악질 행위라고 넘길 텐데, 사진은 모두 이사준과 함께였다. 설렁탕집, 홍대, 그리고 진우의 집에서 나가는 이사준. 마치 이사준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그러는 것은 괜찮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미친놈인지 모를 사람하고 엮이게 되면 이사준이 너무 불쌍하지 않나. 어쩌다 알게 된 인연이 섹스파트너로 변해버린 것뿐이고, 그마저도 횟수가 한정돼 있는데 스토커가 접근해서 난동이라도 부리면 있던 정도 떨어질 것 같다.

신호가 바뀐 순간 액셀을 꾹 밟으면서 진우는 더는 이사준과 얽히면 안 된다고 결심했다.

* * *

“뭐 마실래요?”

현관에 들어서며 사준이 물었지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얘기 먼저 해요.”

“알았어요.”

사준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냐는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정말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섹스파트너를 끝내자고 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

“얘기하자면서요.”

사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진우를 서서 바라봤다.

“네, 그러니까 말이죠.”

입을 열긴 했지만 고민됐다. 뭐부터 말해야 할까.

“아무래도 이 기자님이랑 만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설마 했던 말이 진우의 입에서 나오자 사준의 눈썹이 산 모양으로 솟아올랐다.

“이유를,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한데요.”

사준이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는 구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유도 모르고 이렇게 뻥 차이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 있어요. 나랑 만나면 이 기자님이 귀찮아질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우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사준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기자님한테 피해가 갈 거 같아요.”

사준은 진우가 내민 봉투를 열어보고 헛숨을 터트렸다. 카메라가 좋아서 줌을 한 건지 아니면 원래 가까이에서 찍은 것인지, 몰래 찍은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쓸데없이 선명도가 좋았다.

‘연예부 기자들이 쓰는 카메라를 쓴 건가.’

사준은 엉뚱한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곧 말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왔다.

“화질 되게 좋네요.”

“네?”

진우는 사준이 지금 사진을 제대로 보고 보인 반응인가 싶었다. 처음 바에서 자신이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도 별로 안 놀라더니 스토커가 찍은 사진을 보고도 고작 이런 반응이라니.

“왜 그렇게 태평해요? 이 사진을 누가 찍은 건지 감 못 잡았어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양진우 씨 스토커겠지.”

“아는데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와요?”

“스토커가 노리는 건 내가 아니잖아요.”

진우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뱉었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어차피 이 스토커의 최종 목표는 양진우지, 이사준이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부러 이렇게 둘이 있는 사진만 보낸 건….”

“같이 있지 말아라, 이런 의미겠죠?”

참 잘했어요, 라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저렇게 잘 알고 있는데 왜 이리 태연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 기자님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요.”

진우는 사진을 봉투에 챙겨 넣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여기서 이사준한테 휩쓸려 버리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가 버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준은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니까 자신이 싫어졌다거나 장태준 팀장 때문이 아니라 스토커가 이사준한테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되니까 따로 만나는 건 하지 말자, 지금 이 말을 저렇게 비장한 얼굴로 하는 건가?

사준은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기 걱정하기도 바빠 죽겠을 처지인데 무슨 남 걱정을 다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만나는 건….”

“양 변호사님.”

“네?”

“이 사진 보면 볼수록 잘 나왔네요.”

사준이 홍대에서 찍힌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카페에 앉아서 얘기하는 사진인데 발신인을 제외하면 퍽 평화로운 분위기의 사진이었다. 아니다, 저 당시 대화가 딜도를 사주네, 마네였으니 사진만 평화로운 거다. 누가 그랬지, 사진은 거짓 예술이라고. 찰나의 분위기만 남긴다고.

“이 기자님,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에요.”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준이 소파에 앉자 그의 무게 때문에 소파 쿠션이 푹 꺼졌다.

“나를 스토커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거잖아요.”

진우가 잘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양 변호사님은요?”

이건 또 무슨 소리? 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경찰에 신고 안 할 거죠? 사진을 보낸 것만으로 범인을 찾을 수가 없을 거다, 뭐 이런 이유로.”

진우는 부정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사진은 회사로 왔다. 그럼 이미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게 분명하다. 지문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건 무리다. 사진 자체에는 지문이 안 묻었을 거고, 봉투에는 여러 사람 지문이 묻었을 테니까.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지게 하려면 칼이라도 맞거나 혹은 집에 도둑이라도 들어야 가능할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스토커가 노리는 건 양 변호사님이잖아요.”

그야, 뭐, 그렇긴 하지.

진우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사준은 말이 없어졌다. 잠깐 뭔가 고민하던 사준이 진우의 눈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죠.”

이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걸 저렇게 진지하게 말할 건가?

“뭘요?”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어요.”

진우의 턱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입이 벌어졌다. 머릿속이 댕댕거리면서 어지러워졌다. 분명 서로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듣는 것처럼 한 번에 이해가 안 됐다.

“스토커 잠잠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와 있으라고요.”

그런 진우를 향해 이사준이 다시 한번 딱 부러지게 말했다. 명확한 사실을 보도하는, TV 뉴스에 나오는 기자 같아서 뒷골이 당겼다.

“이 기자님한테 그런 신세를 질 마음은 없는데요.”

진우는 벌어진 입을 갈무리하며 간신히 말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이사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말이 안 됐다. 스토커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인 마당에 피하기는커녕 같이 지내자고?

“당분간이라고 했잖아요.”

진우의 어지러운 속과 다르게 사준은 심플하게 말했다.

“바빠서 콘돔도 잘 못 쓰는데, 차라리 잘 됐어요.”

사준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테이블 위에 있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걱정도 되고.”

진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학을 떼며 도망가도 시원찮을 판 아닌가? 까딱하면 어떤 정신병자가 갑자기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이 스토커가 어떤 성향인지 모르지만 사진을 보내온 걸 보면 이사준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건 확실한데, 집에 오라고? 걱정된다고?

여태 제집에 뭉개고 들어온 놈들은 여럿 봤지만 걱정된다는 이유로 자신을 초대하는 남자는 처음 봤다. 본가에 가라거나, 다른 친구 집에 가 있으라는 게 아니라 집에 와 있으라니…. 이러는데 어떻게 안 설레고 버텨.

진우는 아까부터 주책없이 뛰기 시작한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옅은 심호흡을 했다.

“이 기자님.”

“왜요?”

사준은 거절을 막을 여러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나 남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걸 모르겠어요?”

양진우가 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뭘 또 강조까지 하는 건지.

진우는 사준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쉽게 반하는 성격인 건 모르지 않나.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렇게 잘해줬다가 내가 이 기자님 좋아하면 어쩌려고요?”

“그건 양 변호사님 마음이잖아요.”

당분간 집에 와 있으라고 말했을 때처럼 돌아온 대답 역시 심플했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 아무래도 이사준의 인생 모토가 아닐까. 아니, 다 필요 없고 지금 사준의 대답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도가 명확했다.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으나 나한테 같은 감정을 바라지 말라는 것.

빠르게 박동하던 진우의 심장이 느릿느릿 제 박자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변호사님 섹스 몇 번에 그럴 사람 아니지 않아요?”

뚝, 일순 심장이 멈췄다. 진우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사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사준은 잘생긴 얼굴로 개 같은 말을 좆같이도 했다. 정말 이런 사람한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걸까. 가벼운 회의감이 밀려와 진우는 엷은 한숨을 뱉었다.

어느새 심장이 원래 박자로 뛰고 있었다.

“아무튼 집에 와서 지내요, 스토커 처리될 때까지 혼자 있는 건 아닌 거 같으니까요.”

진우의 속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준이 말했다.

“후회할 일 생길지도 몰라요.”

“그럼 그때 가서 지금의 나를 원망해야죠. 양 변호사님 원망 안 해요.”

진우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해서 기회를 발로 차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머리를 보며 사준은 싱긋 웃었다. 경계하면서 거절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정도면 의외로 금방 결론을 내려 준 거다. 사준은 길에서 몇 번 마주치던 고양이가 자신을 따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챙길 거 많아요?”

사준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진우를 향해 물었다. 같이 지내기로 하자마자 필요한 걸 챙기러 가자고 사준이 말했다. 진우는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으나 사준은 혹시 모르니 같이 가자고 했고, 결국 둘은 같이 차에 올랐다.

진우는 혹시 지금도 스토커가 쫓아다니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과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많아요?”

사준이 대답을 재촉해서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당분간’이라고는 했지만 남의 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건 진우에게 너무 생소했다. 이미 철이 들 무렵부터 가족과 같이 지내질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뭐, 그럼 여행 간다고 생각하고 챙겨 보죠.”

“여행이요?”

“그럼 출장이라고 할까요?”

짐을 싼다는 목적에서는 둘 다 비슷하겠지만 확실히 여행보다는 출장이 나을 것 같았다.

“그걸로 하죠.”

“이 주일 정도 간다고 생각하고 챙겨 봐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오면 되니까.”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김 변?”

― 네, 변호사님. 저 시영구 피의자 건 정리해서 메일 보냈어요.

“아, 고마워요.”

사진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서 김 변한테 말도 없이 퇴근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어디세요?

“집에 가는 중이요. 미안해요, 일을 혼자 다 했네.”

― 아뇨, 어차피 변호사님이 중요한 부분은 다 표시해 두셔서 정리만 한 건데요, 뭐.

“그래도요, 나머지 확인은 제가 할 테니까 퇴근하세요.”

― 네, 알겠습니다. 근데 변호사님.

전화를 막 끊으려는데 김유민이 진우를 불렀다.

“무슨 일 있어요?”

― 아뇨, 그건 아니고요. 지금 집이라고 하셨죠?

“네, 좀 일이 있어서 일찍 들어왔어요.”

―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네, 괜찮아요. 내일 봐요.”

전화를 끊고 나자 사준이 오묘한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왜요?”

“뭐가요?”

“그냥, 왜 그런 얼굴로 봐요?”

“김유민 변호사예요?”

전화기 너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사준이 물었다.

“네.”

“많이 친해요?”

“또 그 얘기 할 거면 말아요. 김 변은 저한테 관심 없으니까. 오히려….”

“오히려?”

이 기자, 당신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는 말은 하고 싶지가 않아서 진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 *

다용도실에서 진우가 캐리어를 꺼내는 걸 보고 사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용도실 안에는 보드가 두 종류나 있었다. 서프보드와 스노보드.

“양 변호사님 보드 타요?”

“탈 줄은 알아요.”

“둘 다?”

“네, 일단은 배웠으니까.”

그냥 배운 것도 아니고 일단 배운 거라는 말이 신경을 건드렸다.

“누구한테요?”

“전에 알던 사람한테요.”

사준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 보드들은 양진우가 만나던 사람한테 맞춰서 배운 것이리라. 그러니 저렇게 본인의 취미는 아닌 것처럼 시큰둥하게 말하지. 문득 사준은 진우의 진짜 취미가 뭘까 추측해 보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알 이유가 없었다. 같이 할 것도 아닌데.

“양 변호사님.”

“네?”

“아뇨, 아니에요. 할 줄 아는 게 많아서 좋겠다고.”

진우는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는 눈으로 사준을 보더니 캐리어를 끌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짐을 챙기는 진우의 뒤를 사준은 졸졸 따라다녔다. 남의 집 물건을 뒤지는 취미는 없었지만 가만히 있기도 심심했다. 사준은 진우가 캐리어에 옷을 차곡차곡 담고 정장은 슈트케이스에 따로 챙기는 걸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옷 진짜 많네요.”

순간 진우는 자신이 짐을 너무 많이 챙긴 건가 싶어졌다.

“아니,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은….”

궁색한 변명을 중얼거린 진우는 드레스룸을 나와 침실로 향했다. 사실 침실에는 챙길 게 없었다. 그저 아까부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준을 피해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사준이 또 따라왔고 그 때문에 진우는 뭔가를 찾는 시늉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마지막 서랍을 열었을 때, 진우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서 탁 소리가 나도록 서랍을 닫았다.

“왜요?”

“어, 아뇨, 여긴 없네요.”

진우의 어색한 얼굴과 서랍을 번갈아 본 사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집주인도 진우였고, 물건을 챙기는 것도 진우였기에 자신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진우는 드레스룸으로 다시 들어가 넥타이를 몇 개 챙겼다. 그 사이 사준은 진우가 조금 전 여닫았던 서랍과 대치했다. 이성은 열어보면 안 된다고 하는데 본능은 궁금증이 치솟았다.

판도라도 이런 기분 때문에 상자를 열었던 게 아닐까. 사준은 침실 문가로 가 고개만 빼내 밖을 살폈다. 그렇게 진우가 드레스룸에 있는 걸 확인하고 서랍장 앞으로 다가갔다. 진우가 숨기려 한 게 뭔지 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이 집에는 다른 남자가 드나들었던 흔적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이 서랍에 있는 것만 숨기려고 했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준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서랍장을 당겼다. 그리고 서랍 속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헛숨을 터트렸다.

* * *

“밥은 어떻게 하는 편이에요?”

사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우가 물었다.

“그냥, 있는 걸로 먹어요.”

진우는 사준의 누나가 반찬을 챙겨 왔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안 바쁠 때는 제가 만들게요.”

“에? 양진우 씨 요리할 줄 알아요?”

“조금요. 오늘은 고기라도 먹을까요?”

사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진우가 마트로 차를 몰았다.

간단하게 장을 보고 집에 온 진우는 정말로 요리를 했다. 고기를 먹자기에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자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우는 스테이크를 구웠다. 주방에서 움직이는 진우의 움직임은 정말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도구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어볼 때를 빼고는 막힘이 없었다.

잠시 후 버섯과 토마토,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스테이크, 새우와 마늘을 잔뜩 볶아 넣은 감바스가 금방 차려졌다. 완성된 식탁을 본 사준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조금 할 줄 안다고 했던 건 겸손 아니, 오만이었다. 진우의 요리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누가 들으면 과장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플레이팅까지 완벽한 걸 보니 이건 배운 게 분명했다.

“요리가 취미?”

“잠깐은요.”

취미가 잠깐일 수도 있는 걸까. 진우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눈알을 굴리던 사준은 곧 이해하고 말았다. 헤어진 남자가 좋아한다던 샴푸도 못 버렸다. 그것만 봐도 양진우가 연애할 때 얼마나 헌신적인지 알 만했다.

‘그러니 이상한 것들이 자꾸 미련을 갖고 꼬이지.’

아마 이 요리도 전에 사귀던 누군가가 요리 잘하는 사람이 좋다고 했거나, 집에서 밥을 먹고 싶다는 식으로 말했을 거고, 그 사람 취향에 맞춰서 배웠을 거다. 가만 보면 양진우는 자신과 만났던 남자에 대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연애 못 하는 이유를 알겠네.’

사준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저녁은 맛있었고 평화로웠다.

적당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준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태준에 대한 건 입에 담지 않고 있다는 걸 몰랐다.

저녁을 다 먹고 사준이 뒷정리하는 동안 진우는 먼저 씻겠다고 욕실에 들어갔다.

“아…!”

진우가 내뱉은 모호한 감탄사에 사준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벌레라도 나온 건가 싶어 눈을 깜박이자 진우가 욕실에서 나왔다.

“깜박하고 칫솔을 안 챙겼는데, 혹시 있어요?”

“아뇨, 그런 거 없는데.”

집에 누군가 방문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여분의 칫솔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 사 올게요.”

“같이 가요.”

사준이 물이 묻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나왔다.

“아뇨, 혼자 가도 돼요. 오는 길에 편의점 어디 있는지 봤으니까.”

“배가 너무 불러서 좀 걷고 싶어서 그래요.”

사실은 괜히 집 밖에 혼자 나갔다가 여기까지 따라온 스토커가 해코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진우에게 이상한 선물과 사진만 보내는 걸 보면 직접 앞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애초에 스토킹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양진우는 전에 저가 사귀었던 남자 중 하나가 범인이라고 확신해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분명하다. 이러다 질리면 말겠지, 하고. 하지만 정말 그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일까? 악질적인 일회성 장난이라면 그러다 말겠지만, 사진까지 찍어 보낸 거 보면 완벽한 스토컨데…. 스토킹 대상을 스토커가 쉽게 포기할까? 자꾸만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자면서요?”

진우는 딴생각에 빠진 사준을 불렀다.

“아, 네, 가요.”

편의점에서 진우가 칫솔을 집는 동안 사준은 맥주 몇 캔을 골랐다.

“뭐 마실래요?”

“오랜만에 흑맥주 마셔야겠다.”

사준은 편의점 냉장고 같았던 진우의 냉장고를 떠올렸다. 아마 술도 가리는 게 없을 거다. 여태까지 만나왔던 사람들이 마시자는 대로 마시지 않았을까.

“소주 마시지 않을래요?”

맥주로 손을 뻗던 진우가 사준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됐어요, 간단하게 맥주나 마셔요.”

뻔히 예상했던 행동인데 확인해 보니 기분이 별로였다. 싫으면 거절해도 되는데…. 사준은 진우가 말한 흑맥주 네 캔을 집어 들었다.

“이 기자님도 그거 마시게요?”

“왜요?”

“아뇨, 그냥….”

“양 변호사님이 마시니까 나도 한번 마셔보게요.”

별것도 아닌 말에 진우가 뭐가 좋은지 샐쭉하게 웃었다.

편의점에서 나온 진우는 옆에서 걷는 사준을 힐끔거렸다. 멍청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서 아까부터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이제까지 연애 관계에서는 진우가 돈을 내는 게 당연했다. 진우가 얼굴을 본다면 상대는 진우의 재력을 봤다. 대형 로펌에 다니면서 억대의 수임료를 받는 변호사, 그 타이틀에 맞게 자신에게 돈을 써 주길 바랐다. 그래서 아까 편의점에서 사준이 계산했을 때 기분이 좋았다.

맥주는 같이 마실 거고, 진우건 3천 원도 안 하는 칫솔 하나뿐이지만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그리고 그 좋은 기분은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졌다.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요?”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요.”

“아닌데, 아까 나한테 사진 보여줬을 때랑 지금이랑 딴 사람처럼 다른데.”

그 말에 진우는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술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잠, 어디서 자요?”

진우의 질문에 사준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침대에서 자야죠.”

“하게, 요?”

“안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

할 생각이 가득하다, 처음부터 하고 싶어서 집에 불러들인 거라는 의미를 사준은 숨기지 않았다. 진우 입장에서도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뺨을 비비던 진우가 팔을 뻗어 사준의 얼굴을 감싸 당겨 부드럽게 입술을 꾹 눌렀다.

“양치하고 해요.”

진우가 일어서서 움직이려는 찰나 사준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몸이 기우뚱하며 앞으로 쏠렸고 다시 입술이 부딪쳤다.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가 놓아준 사준이 씩 웃었다.

“출근해야 하니까.”

“……?”

“오늘도 끝까지 못 해요?”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이 얌전을 떨고 있지만 사준의 눈빛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번만 하는 거면.”

“아쉽다.”

“뭐가요?”

“오늘도 안 된다고 했으면 입으로 빨아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사준은 진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니, 입으로는 안 한다니까.’

진우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읽은 것인지 사준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양치질하러 욕실에 가는 진우를 사준이 따라 움직였고 두 사람은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칫솔을 물었다. 그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서 진우는 눈을 빙빙 굴렸다. 동거 비슷한 건 전에도 한 적 있지만 이런 식으로 온몸으로 우리 같이 살아요, 분위기를 풍겨 본 건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기자님.”

진우가 입에 물었던 양치 거품을 뱉으며 사준을 불렀다.

“왜요?”

사준이 칫솔을 문 채 웅얼웅얼 물었다.

“전에도 동거해 본 적 있어요?”

사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랑? 동거?

“아뇨, 없는데요.”

“그렇구나….”

“왜요?”

“아니, 같이 사는 거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어 보여서.”

사준은 입을 헹구고 거울 속 진우를 보더니 씩 웃었다.

“양 변호사님이라 그래요.”

진우는 사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준의 말 한마디에 일일이 반응하는 제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반응을 안 해, 했다. 얼마나 같이 지내게 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동거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벌써부터 심히 걱정됐다.

* * *

침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사준이 윗옷을 벗어 버렸다.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우에게도 옷을 벗으라는 신호에 진우는 바지를 쓱 벗어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다.

“불 끄죠?”

문가에 서 있는 사준을 향해 진우가 말했다. 안 된다, 보면서 하는 게 좋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살짝 걱정했는데 사준은 벽에 붙은 스위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탁, 소리와 함께 찾아온 어둠. 그 속에서 옷감이 스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사준이 바지는 물론 팬티까지 벗어 버렸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제 윗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팬티를 벗기 위해 밴드에 손가락을 건 순간, 사준의 손에 발목이 붙잡혔다.

“좀 있으면 익숙해져서 보이겠지만.”

사준의 손이 진우가 있는 위치를 가늠하듯 종아리를 타고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허벅지 안쪽을 손바닥으로 꽉 눌러보더니 사준이 진우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아직 팬티도 안 벗었는데 뭘 하려는 건가 싶은 순간 사타구니에 훈김이 닿았다.

“뭐 하는, 거…!”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이미 허벅지를 완전히 눌린 상태였기에 별 소용이 없었다.

“양 변호사님이 너무 싫어하니까.”

“읏.”

말을 할 때마다 입속에서 새어 나온 입김이 몸의 중심을 간지럽혔다.

“내가 한번 해 보게요.”

“됐어요, 안 해도 된다, 흣….”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팬티 위로 사준의 입술이 느껴졌다. 입에 직접 넣은 것도 아닌데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괜찮을 거 같은데.”

작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진우는 도리질 쳤다. 머리카락이 베개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준은 진우의 성기를 입술로 더듬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안쪽에 있는 것이 살짝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진우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사준은 진우가 펠라 정도는 당연히 해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이 섹스란 성욕이 강한 남자 둘이 붙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입술을 움직이고 일부러 숨을 불어 넣자 진우가 몸 전체를 흠칫 떨었다.

‘이러다 진짜 빨면 자지러지는 거 아냐?’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준이 팬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툭 튀어나오며 사준의 뺨을 건드렸다. 사준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샤워해서 깨끗한 냄새가 나는 사타구니에 코를 박고 있자 음탕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남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묘한데 그것이 남자의 다리 사이라는 것에서 기이한 이질감이 느껴졌고, 그 이질감은 흥분으로 이어졌다. 사준은 혀를 내밀어 감각에 의존한 채 진우의 성기를 살짝 핥았다.

“하읏.”

정말 살짝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진우가 허리를 비틀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준은 몸을 벌떡 일으켜 협탁 위에 있는 스탠드 불을 켰다. 노란색 조명이 쏟아지자 진우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사준은 눈부신 빛 때문에 당황한 것처럼 눈을 깜박이는 진우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살짝 깨물고 있는 입술, 움켜쥐고 있는 시트, 모든 행동이 진우가 지금 상황을 낯설어한다는 걸 알려왔다.

사준은 몸을 아래로 움직여 진우의 성기 뿌리를 가볍게 쥐고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아 올렸다. 아, 하으으으, 진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길게 뻗어 나왔다.

“혹시, 빨리는 건 처음?”

진우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제 입에서 흘러나간 소리가 유난히 부끄러웠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빨리는 것 자체는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오래전이었다. 진우와 섹스했던 놈들은 다들 하나같이 매너가 똥이어서 진우의 성기에 신경 써 주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뒤만으로도 느낄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 않냐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앞이 빨리자 견디기 힘든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입김이 닿은 것만으로도 단단하게 발기했고, 혀끝이 닿는 순간에 정말 터질 것 같았다.

사준은 눈동자만 위로 굴려 진우를 바라보며 귀두를 혓바닥으로 문질렀다. 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데도 진우의 입에서는 억눌린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 좋아요?”

혓바닥의 편편한 부분이 귀두 뒤쪽 옴폭 팬 곳을 자극하자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미세한 반응에 사준이 좀 더 용기를 냈다. 입을 동그랗게 벌려 귀두를 한입 물고 쪽쪽 빨았다. 쮸쮸바를 먹는 것처럼 끝을 빨아 당기는 압박감에 진우의 입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진우는 사준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밀어 넣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감자 앞이 깜깜해졌고, 그 바람에 사준의 입술이 주는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사준이 입을 좀 더 벌려 진우의 성기를 깊게 물어 당겼다. 처음보다 커진 성기가 입안을 채우면서 안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입천장을 건드리는 성기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고환을 부드럽게 쥐어보자 진우가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허리를 튕겨 올렸다. 반응이 너무 솔직해서 신선했다. 사준은 진우의 성기를 뱉어내고는 진우를 바라봤다.

“말해 봐요, 이거 진짜 처음?”

“그럴, 리가, 없잖, 읏…!”

사준이 진우의 뿌리를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근데 이런 반응을 보여요? 질질 흘리는데?”

검지로 귀두를 톡톡 건드리자 끈적한 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명백한 흥분의 증거에 진우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 받은 적 없고 해 준 적만 있구나?”

사준이 멋대로 결론을 내리더니 싱긋 웃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귀엽기는 누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반박하려고 했으나 사준이 다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흣.”

결국 진우는 헛숨을 삼켜야 했다. 목이 뒤로 넘어가면서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한번 빨아 본 것에 용기라도 얻은 것처럼 사준이 거침없이 입을 놀리자 뇌가 두부라도 된 것처럼 말랑거렸다.

진우가 몸을 비틀어대자 사준은 저만 아는 모습이 기쁜 것처럼 웃었다. 기둥을 쭉 빨아 물었다가 귀두를 혀끝으로 툭툭 건드릴 때마다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금방이라도 쌀 거 같아서 진우는 발가락으로 시트를 꽉 붙잡았다. 사정감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강한 자극을 원하는 반응이었고, 사준도 분명 알아차렸을 건데 그는 야속하게도 성기를 입 밖으로 뱉었다.

“흣….”

아쉬움에 눈꼬리를 타고 눈물까지 주룩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허리를 가만히 못 둬요?”

궁색한 변명밖에 떠오르지 않아 진우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자 사준이 진우의 엉덩이를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혹시 엉덩이가 근질근질해요?”

허리를 흔들었는데 왜 엉덩이랑 연결 짓는 걸까.

고개를 들자 진우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사준과 눈이 마주쳤다. 사준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잠깐만요, 양 변호사님이 아까 짐 챙기는데 깜박한 거 같아서 내가 챙겨 온 게 있어요.”

뭘 챙겨? 진우가 눈을 끔벅이는 사이 사준이 침대 아래로 팔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탁, 사준은 손끝에 걸린 플라스틱을 자랑스럽게 들어 진우에게 보여줬다.

“이, 이게 왜?”

진우는 자신의 침대 옆 맨 마지막 서랍에 있어야 할 분홍색 딜도를 보고 할 말이 없었다. 사준이 아까 집에 왔을 때 자신이 침실에서 당황했던 게 떠올랐고, 그 이후에 챙겼을 거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캐리어 사이에 몰래 넣어뒀다가 꺼냈을 거라는 것도.

“내가 앞에 빨아 줄 테니까 뒤는 이걸로 하고 있을래요?”

질문이었으나 진우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사준은 서랍을 열어 콘돔을 하나 꺼냈다. 진우와 쓰기로 했던 콘돔과 다른 콘돔이었다. 사준은 콘돔 포일을 뜯어 딜도에 씌운 다음 그 위에 젤까지 듬뿍 짜냈다. 번들거리는 딜도가 꼭 흉기 같았다.

“진짜, 뭐 하는 거, 예요…!”

“뭐긴요, 이거 제 거보다 좀 작은 게 구멍 풀기에 딱 좋을 거 같으니까.”

진우는 그래서 지금 나 혼자 자위하는 걸 보이라는 거냐는 얼굴을 했다.

“어차피 양진우 씨 이걸로 많이 해 보지 않았어요?”

“…….”

“얼른 풀고, 얼른 박고, 그리고 자죠.”

무척이나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듯 구는 태도에 진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엎드려 봐요.”

사준이 매트리스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직접 넣어주겠다는 말에 말싸움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어떤 면에서는 재워주는 값을 하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진우는 처음 사준과 잤던 날처럼 반쯤은 포기하고 엎드렸다.

양팔과 무릎으로 바닥을 지탱하고 네발 달린 짐승처럼 엎드리자 사준이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젤을 짜냈다. 주르륵 떨어지는 끈적한 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하는 섹스여서 그런지 벌써 아래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나중에 지금 양진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몇 발은 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남자와 하는 섹스에 이 정도로까지 흥분할 수 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라며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잡아당겨 딜도를 문질렀다. 빠듯하게 벌어지는 구멍 틈으로 젤로 젖은 딜도를 밀어 넣었다.

“아, 흐읍….”

팔에서 힘이 빠질 것 같아 진우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좁은데, 이거, 평소에는 어떻게 썼어요?”

당연히 손가락으로 먼저 풀어준 다음에 넣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딜도부터 밀어 넣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젤이 듬뿍 발려 있어서 아래가 찢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움직임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사준은 땀이 배어 나온 진우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주무르면서 딜도를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깊게, 좀 더 깊게 꾹꾹 누르면서 밀어 넣자 진우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힘들어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 증거로 진우의 성기는 여전히 다리 사이에서 발기한 채 꺼덕이고 있었다. 딜도를 3분의 2 정도 밀어 넣은 사준은 진우의 오른손을 뒤로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게 했다.

“뭐 하는, 거….”

“쑤시는 건 변호사님이 해요.”

정성스럽게 손잡이를 쥐여 준 사준은 침대에 눕더니 진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밀어 넣었다. 사준의 높은 코가 귀두에 스치자 진우가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 기자님…!”

놀란 진우가 허둥거리자 사준은 진우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왜요, 빨아 준다니까.”

진우는 당황해서 사준의 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이런 식의 낯 뜨거운 자세를 사준의 앞에서 취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빨아 주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런 자세를 취하면 사준의 입속에 진우가 성기를 들이미는 꼴 아닌가.

“미친… 놔요, 진짜….”

“음, 변호사님이 욕하니까 신선하네요.”

사준이 진우의 성기를 혀끝으로 톡 건드렸다.

“흣, 하지 말라니까요, 진짜, 읏, 이 기자님, 사디스트예요?”

“아뇨, 그냥 실험정신이 투철하다고 하죠. 그러니까 겁먹지 말아요. 피 보거나 때리거나, 그런 거 나도 싫으니까.”

허벅지를 붙잡고 있던 사준의 양손이 진우의 엉덩이를 붙잡더니 아래로 눌렀다. 자연스럽게 진우의 성기가 사준의 입속으로 깊게 박혔고 뜨거운 점막에 감싸인 성기가 요동을 쳤다. 엉덩이 사이를 꽉 채우고 있는 딜도의 감촉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빨리, 뒤에 풀어요, 나도 박고 싶으니까.”

진우는 고개를 숙여 제 다리 사이에 있는 사준의 얼굴을 흘겨봤다. 정말로 철저하게 즐기자 주의가 분명했다. 이런 걸 여자랑은 할 수 없을 테니까. 아마도 싫증 나면 쉽게 끝낼 관계니까 이렇게 막무가내인 자세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찰싹, 사준이 진우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리더니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딜도 손잡이를 잡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뒤로 쭈욱 빼냈다가 안쪽으로 쓱 밀어 넣자 허리에 힘이 빠지면서 사준의 입속에 성기를 더 깊게 밀어 넣는 꼴이 됐다. 허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안이 가득 차자 사준이 기다렸다는 듯 성기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몰랐는데, 정말 몰랐고 이런 식으로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사준은 입이 컸다. 사준이 성기를 쭉쭉 물어 당기자 머릿속에 불꽃이 펑펑 튀었다. 강렬한 쾌감에 못 이긴 진우가 앞을 자극당하는 것에 맞춰 딜도로 엉덩이를 쑤셨다.

“아, 하읏, 으응, 흣….”

갈무리하지 못한 타액이 신음과 함께 흘러나오고 앞뒤를 자극당하는 것에 진우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왼팔이 푹 꺾이면서 진우의 얼굴이 베개 위로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사준이 성기를 빨고 핥아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찰싹, 사준이 움직이라는 듯 다시 엉덩이를 때리자 진우가 울먹이며 딜도를 앞뒤로 움직였다. 질퍽하게 젖은 딜도가 점막과 마찰하면서 야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부위를 찾아 딜도를 움직였다. 전립선을 쿡쿡 찌를 때마다 허리가 절로 흔들렸고 사준이 성기를 뽑아 먹을 듯이 빨아대서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박으면서 박히는 것 같았다. 몰아치는 쾌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등골을 훑어 올리는 저릿한 감각에 자꾸만 훌쩍거리게 됐다.

“아, 흣, 쌀, 거… 같아, 흣….”

진우가 중얼거린 순간 성기에 가해진 압박이 더 세졌다. 입속에 싸고 싶지 않아 진우가 허리를 들썩이며 성기를 빼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사준의 입에 대고 좆질을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흑, 하지, 아읏….”

진우가 훌쩍이면서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베개를 움켜쥐고 엉금엉금 기면서 허리를 위로 움직였다. 사준의 턱이 부자연스럽게 들렸고 진우가 성기를 뒤로 빼냈다. 그 바람에 부드러운 입술이 기둥을 쭉 빨면서 자극했고, 진우는 사준의 얼굴에 정액을 뿌리고 말았다.

“아, 흐으….”

진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딜도가 박혀 있는 엉덩이 안쪽이 움찔움찔 떨렸다. 아래로 처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자 정액이 묻어있는 얼굴 보였다. 그 순간 진우는 울상이 됐다.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데, 잔뜩 흥분한 성기에서는 눈치도 없이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와, 이거, 기분 되게, 이상하네요.”

진우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온 사준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는 제 손에 묻은 진우의 정액을 뚫어지게 봤다. 설마하니 얼굴에다 대고 쌀 줄은 몰랐다.

“양 변호사님 나한테 사디스트 어쩌고 하더니, 더 장난 아니네요. 나 얼굴로 이런 거 받아 보는 거 처음이에요.”

그거야 당연하겠지, 진우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자신도 남의 얼굴에 싼 적은 없다. 그건 너무 비매너니까.

“그러니까, 놔 달라고… 쌀 거 같다고… 했잖아요.”

진우가 웅얼웅얼 변명하자 사준은 피식 웃었다.

“그래요, 뭐, 내가 그 말을 무시하긴 했죠.”

사준은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는 진우를 보면서 콘돔을 성기에 씌웠다. 진우와 사용하기로 한 콘돔의 첫 개시였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박혀 있는 딜도를 빼내 침대 아래로 던져 버리고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아, 나, 지금 막 싸서, 바로는, 좀….”

“이기적으로 굴지 말아요, 나도 터질 거 같은데.”

사준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다는 말을 곱지 않게 하고 양쪽으로 잡아 벌린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쑤욱 밀어 넣었다. 하윽, 진우의 입에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딜도와는 전혀 달랐다. 딜도로 넓혀 뒀으니 좀 수월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아래를 꽉 채우면서 들어오는 뜨거운 성기에 정말로 숨이 턱턱 막혔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두꺼운 성기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좆이 박히는 건 아랫구멍인데 입까지 벌어졌다.

진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잔뜩 움츠렸지만 사준은 끈질기게 밀어붙여 성기를 쑤셔 박았다. 고환이 엉덩이 사이에 닿을 정도로 밀어 넣은 사준이 천장을 향해 탄성을 뱉었다. 후, 하아, 길게 숨을 뱉어내자 몸이 다 저릿했다. 중심을 꽉 물고 있는 쫀득한 점막 때문에 기대감이 치솟았다.

“하, 진짜, 이거지….”

이대로 넣고만 있어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딜도로 풀어진 점막을 확인하듯이 사준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허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진우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사준은 진우의 골반을 틀어쥐고 뒤로 뺐던 성기를 거세게 때려 박았다. 흐앗, 윽, 예고 없이 격렬해진 움직임에 진우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마구 튀어 올랐다. 퍽퍽퍽, 사준이 허리 짓을 더 세게 하자 엉덩이와 치골이 부닥치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아무 데나 막 찧어 대는 것 같은데 사준의 성기가 워낙 커서 스치고 짓누르는 곳이 다 좋았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노래지기를 반복했다. 온몸의 세포가 사준이 주는 자극에 잔뜩 흥분해서 희열했다.

“아, 으응… 너무, 빨, 라… 하읏.”

“빨리하고 자야죠, 응?”

안 그래요? 내 말이 맞죠? 하는 것처럼 사준이 진우의 등허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런 주제에 허리 움직임은 전혀 부드럽지가 않아서 진우는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다리 사이에 흔들리는 성기는 언제 다시 발기했는지 끈적이는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얼마 못 가 또 사정할 것 같았다. 빨려서 싸고, 박혀서 싸고. 게이는 자신인데 어쩐지 사준의 손에 너무 놀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 왜 이렇게 조여요, 응? 하아….”

“빨리, 흣, 싸, 으응….”

진우가 엉덩이에 힘을 줘 내벽을 있는 대로 조이자 사준의 미간도 같이 좁아 들었다. 일부러 금방 싸게 하려는 것 같은 움직임에 입안에 침이 마구 고였다. 싸고 싶은 욕구가 턱밑까지 차올라 사준은 이를 악물었다.

딱 보니 앞으로도 평일에는 일 때문에 안 된다고 할 거 같은데 그럼 또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섹스였다. 그걸 이렇게 허무하게 한 번 싸고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준은 진우의 허리를 잡아 몸을 돌렸다. 하읏, 몸이 돌아가면서 성기가 내벽 전체를 자극했다. 진우의 성기가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벌벌 떨렸다. 푹신한 이불이 등에 닿자 사준의 얼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다리 잡아요.”

“……?”

사준은 진우의 무릎을 위로 밀어 올려 진우가 잡도록 했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고 비부를 훤히 드러낸 자세는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온몸으로 박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수치스러웠다. 진우가 싫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사준이 다시 재촉했다.

“양 변호사님이 빨리 끝내고 싶어 하니까, 빨리 끝낼게요.”

사준은 진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굴었다. 마지못해 진우가 제 무릎 뒤를 손바닥으로 감아쥐자 사준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때리지 좀, 마…!”

진우가 발끈했다. 가만 보면 이사준은 여자와 할 수 없는 섹스 로망을 저한테 푸는 것 같은 경향이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괜찮다는 게 누구 기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체력적으로 강한 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번번이 엉덩이를 맞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리고 양 변호사님, 싫어하는 척하지만 엉덩이 맞으면 아래가 꽉 조인단 말이에요.”

“무슨…!”

“볼래요?”

부정해 봤지만 사준은 오히려 확인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진우의 엉덩이를 더 세게 내리쳤다. 짝, 차지게 울린 소리와 동시에 진우의 내벽이 긴장으로 꽉 조여들었다.

“아, 지금도, 진짜, 끊어 먹을 것처럼 조이잖아요, 미치겠다.”

사준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허리를 움직였다. 퍽퍽, 사준의 골반이 진우의 엉덩이를 요란하게 두드려댔다. 성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손바닥으로 때리는 건 애교였던 것처럼 사준이 박아 넣을 때마다 엉덩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굵고 긴 성기가 안쪽을 짓이길 때마다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팔에 자꾸만 힘이 빠지려고 해서 진우는 필사적으로 힘을 줬다. 다리를 놓치면 사준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싸고 싶었다. 지금 성기를 한 번만 만져주면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우는 만질 수가 없었고, 사준은 만져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흐읍, 흑, 아읏…!”

입에서 새된 신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사준이 찔러 줄 때마다 진우의 내벽이 꾸물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깊게 밀어 넣을 때는 부드럽게 풀어져서 좀 더 깊은 곳까지 들어오라는 것처럼 유혹했고, 뒤로 뺄 때는 나가지 말라는 것처럼 딱 조여대서 성기를 주물렀다. 안쪽은 뜨겁게 조이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눈가와 입가가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하아, 양진우 씨, 진짜… 존나, 읏, 너무 야해.”

사준이 중얼거리더니 허리를 숙여 진우의 입술을 물어 당겼다. 입속으로 밀고 들어온 혀끝에서는 비릿한 맛이 낫다. 진우는 그가 키스하기 전까지 물고 있던 것이 제 성기였다는 걸 떠올리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준의 복근에 짓눌린 성기 끝에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턱까지 덜덜 떨며 요란하게 사정하면서 진우가 몸을 바싹 수축시키자 사준도 더 참지 못했다. 거세게 움직이던 몸이 딱 멈추더니 일순간 온몸의 근육이 다 솟아올랐다가 탁, 풀어졌다. 으, 하으, 사준이 탄성과 함께 진우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칭찬하는 것 같은 혀 놀림이었다. 사준은 진우의 입속을 샅샅이 핥아 주고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가 떨어졌다.

한 번, 이게 한 번이 분명한데 너무 길었다.

진우는 사준을 향해 눈을 깜박이다 그대로 몸을 늘어트렸다. 몸이 끈적거리니까 씻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안 들었다. 늘어진 진우의 몸에서 빠져나온 사준은 콘돔을 버리고는 엉덩이 사이를 물끄러미 봤다. 채 다물리지 않은 구멍이 움찔움찔거리는 게 뭔가를 더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벌어졌던 구멍이 손가락 하나를 게걸스럽게 물어 당기자 입꼬리가 비죽 솟아올랐다. 안쪽이 아직도 뜨끈뜨끈했고 부들부들했다. 여기에 그냥 생 좆을 밀어 넣으면 어떤 기분일까?

평소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하는데 괜한 호기심과 함께 궁금증이 들었다. 그냥 밀어 넣고 싸버리기까지 하면 진우가 어떤 표정을 할지 잘 상상이 안 됐다. 풀어져서 좋아할지, 아니면 빼라고 정색할지.

‘콘돔 없이 해 본 적 있겠지? 어떤 놈팡이랑 했을까.’

사준은 괜한 심술이 일어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내벽을 죽 긁어내렸다.

“아읏…!”

힘들어서 축 늘어진 진우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사준은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으로 뒤를 쑤시는 걸 멈추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사정해서 늘어졌던 진우의 성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입술을 한번 할짝인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쑤시면서 제 성기를 주물렀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발기한 성기를 손바닥으로 쥐고 천천히 문지르다 빠르게 흔들었다.

“아응, 흣, 흡….”

진우가 견디기 힘든 것처럼 허리를 마구 위로 튕겼다. 도망가려는 것처럼도 보였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사준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진우를 끈적하게 훑었다. 탁탁, 규칙적으로 성기를 흔들자 사정감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사준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열감이 성기에 닿았을 때를 상상하면서, 한 번 더 사정할 때까지 진우의 엉덩이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지 않았다. 진짜, 양진우 엉덩이는 끝내줬다. 아쉬워서 이렇게라도 해야 할 만큼.

* * *

“일어나요.”

알람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에 진우의 정신이 비몽사몽 했다.

“아까 알람 울린 거 내가 껐어요.”

음? 알람을 꺼? 여기 어디, 까지 생각하다 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어제 사준의 집으로 짐을 옮겨오고, 잠들기 전에 거칠다 못해 짐승같이 붙어먹었던 게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오르고 괜히 허리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어, 일어났네.”

출근 준비를 다 마친 것으로 보이는 사준이 싱긋 웃었다.

“몇 시…?”

목이 바짝 말라서 갈라지는 소리가 나오자 사준이 물을 건넸다.

“지금 7시.”

진우는 7시면 되게 이른 시간인데 왜 벌써 나갈 준비를 다 했느냐는 눈으로 사준을 바라봤다.

“만나기로 한 취재원이 아침 일찍 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요, 지금 나가야 하거든요. 늦지 말라고 깨워주는 거.”

“아….”

“빵 사놨으니까 잼이라도 발라 먹어요.”

진우는 멍한 눈으로 옷을 입고 나서는 사준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사준이 방에서 나가기 전에 진우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 상냥하죠?”

상냥하긴 개뿔. 진짜 상냥하면 어젯밤에 그렇게 허리를 놀리지는 않았겠지. 진우는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비웃어 주고 싶은데 속이 간지러워서 그게 잘 안 됐다.

“그렇게 있다가 지각해도 나 원망하지 말아요.”

“잠 다 깼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이따 밤에 봐요.”

사준이 나가는 소리에 진우는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닫힌 문을 바라봤다.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 * *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매일같이 하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아침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비서가 어떻게 안 것인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냥, 오늘 날씨가 좋아서.”

“오늘 춥지 않아요?”

진우는 이 비서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신나게 해댔는데도 컨디션이 좋은 거 보면 확실히 성욕을 푸는 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책상 위에 정리된 서류를 눈으로 훑으면서 처리할 일을 계산했다.

이 건은 이제 마무리 단계고, 다음에 처리할 일이….

똑똑.

일을 시작하려는데 들린 노크 소리에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김유민이 고개를 내밀고 인사해서 진우는 아까처럼 좋은 아침, 하고 인사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어제 급하게 가셨기에 괜찮은가 해서요.”

“네, 별일 없는데요?”

“집에서 쉬셨어요?”

“그렇죠, 좀 쉬었더니 괜찮아졌어요.”

진우는 쓸데없는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하며 웃어 보였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김유민을 빤히 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장태준]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진우는 짧게 혀를 찼다. 이 아침부터 전화한 거 보면 일 관련 얘기일 거고, 태준과 얽힌 일은 진우한테는 곧 귀찮은 일일 가능성이 컸다.

‘또 명예 훼손은 아니겠지?’

진우는 머릿속으로 최근 태준이 진행한 뉴스의 내용을 떠올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며 아직 문가에 서 있는 김유민을 보자 그녀가 가볍게 묵례하며 나갔다.

‘왜 왔던 거지?’

닫히는 문을 보며 진우는 살짝 의문을 품었다.

<1권 끝. 다음 권에 계속>

호의주의보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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