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권
3. someone like you
4. Never enough(1)
3. someone like you
* * *
“고소당했다는 말만 하지 마.”
전화를 받기 무섭게 진우가 말을 건네자 태준이 피식 웃었다.
― 고소는 무슨.
“그럼 무슨 일?”
진우가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
― 너 김현이랑 좀 친한가?
“이렇게 냄새 풍기면서 다가오기 있어?”
진우는 서랍을 열어 어제 받았던 김현이의 초대장을 눈으로 확인했다.
― 김현이 마약 한다는 얘기 있더라.
“처음 도는 얘기도 아니잖아.”
― 이번엔 좀 확실한 거 같아서. 규모도 크고.
“그래서?”
― 너 김현이 사건 하나 맡은 적 있잖아, 파티 초대 안 받았어?
진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태준이 정보에 밝은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진우가 초대받은 것까지는 확신 못 하지만 김현이가 파티한다는 것까지는 알고 묻는 것이다.
“초대 안 받았으면?”
― 어쩔 수 없고. 혁이 형 말로는 김현이가 너 엄청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하니까 혹시 했지.
임혁, 태준의 팀원 중 한 명으로 베테랑 기자였다. 발이 얼마나 넓은지 아래부터 위까지 아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했다. 그야말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 되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김현이 사건을 수임하게 된 것도 임혁이 소개해 준 덕이었다. 그리고 소개의 대가로 혹시나 이런 일을 기대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그물 쳐 놓고 하나 걸리기만 기다리는 건 임혁이 가장 잘하는 거니까.
“…받았어.”
― 그래?
“어, 초대장 보냈더라.”
진우는 솔직하게 대답하면서 자신은 이번에도 스쿠프에 이용당할 걸 짐작했다.
“한 명 정도는 같이 데리고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근데 난 모르는 일이야, 거기서 취재하는 거 도울 생각은 없어.”
― 양진우 너한테 그런 거 안 시켜.
하긴, 장태준이 그런 걸 시킬 리 없다. 태준은 취재는 언제나 기자의 영역이라고 믿었다. 도움은 받을지언정 진우에게 취재를 시킨 적은 없었다.
― 우리 팀에서 한 명 데리고 가. 정확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그래.”
전화를 끊은 진우는 김현이한테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답을 보내기 위해 연락처를 찾았다.
근데 장태준이 보낸다는 팀원이 혹시 이사준이면 어쩌지? 조금 전까지는 귀찮은 일에 말려든 기분이었는데, 사준과 같이 잠입이라고 생각하니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진우의 입가가 헤실헤실 풀어지고 말았다.
* * *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온 사준은 거실 불을 켜려다가 소파 팔걸이에 걸쳐진 물체를 보고 멈칫했다. 이것저것 늘어놓고 사는 편이지만 소파 팔걸이에까지 저렇게 큰 물건을 둔 기억은 없었다. 처음엔 옷인가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니었다.
사준은 소파 위에 있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소파에는 이불에 돌돌 말린 진우가 누워 있었다. 왜 여기서 자는 건가 싶어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진우는 자세가 불편한지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웅크렸다.
꼭 고양이 같았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마음 편하게 있을 곳이 하나도 없어서 어떻게든 몸의 크기를 줄이려고 하는 길고양이.
“양 변호사님.”
사준은 진우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으음, 네…?”
잠에서 덜 깬 진우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서 자요?”
질문은 던졌지만 사준은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는 진우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밀어 넣은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편하게 있어요, 침대 마음대로 써도 되니까.”
“그래도….”
거절의 말을 찾기 위해 진우가 우물거리는데 사준이 좀 더 빨랐다.
“내가 데리고 온 거잖아요.”
“…….”
“그리고 저 당분간 늦을 거라 양 변호사님이 거실에 있으면 불편해요.”
어떤 점이 불편한지에 대해 말하지는 않은 채 사준은 진우를 그대로 침실로 밀어 넣었다. 진우는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자요.”
“이 기자님은요?”
“나도 씻고 잘 거예요, 날도 추운데 밖에서 떨었더니 피곤해 죽겠어요.”
사준은 과장된 하품을 해 보이더니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진우는 넓은 침대에서 몸을 양옆으로 굴리며 피식 웃었다. 억지로 잠에서 깼는데 기분이 안 나빴다. 흔쾌히 자신의 침대 한쪽을 내어주는 남자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몸이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 * *
며칠 후, 팀원을 보내겠다던 태준은 누굴 보내는지 말은 안 해 주고 약속 장소와 시간만 정해서 문자를 보내왔다. 007작전도 아니고. 이러니 괜히 더 궁금해졌지만 이사준이 오는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사준과 양진우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낌새를 눈치챈 태준에게 일부러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대신 진우는 사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일 때문에 늦어요]
문자를 보내면서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예의라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요 며칠 사준과 진우는 같이 산다는 사실이 무색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사준은 밤늦게 와서 새벽같이 나갔다. 그 때문에 이사준의 넓은 침대는 온전히 진우의 차지였다.
그날 새벽에 사준이 말한 뒤로 진우는 더 이상 소파에서 자지 않았다. 같이 자면 매일 섹스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사준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없으니 그럴 일도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으니 들어와 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어렴풋이 사준이 취재하는 내용이 김현이 마약과 관련된 건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보도 전의 취재 내용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사준_스쿠프: 저도요]
오래 걸리지 않아 사준에게 심플한 답이 왔다. 진우는 사준의 문자를 보면서 짧은 한숨을 터트렸다. 잠입을 같이하는 게 아니더라도 오늘 김현이 생일 파티 현장에는 〈스쿠프〉 팀원들이 다 모일 것이다. 그러면 이사준도 올 것이 분명한데 그는 진우가 거기에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쯤 되니 혼자만 궁금해하는 게 괜히 억울해졌다. 진우는 무심한 척 핸드폰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보고 있던 서류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 * *
일을 마친 진우는 태준과 약속한 시각에 파티 장소인 클럽으로 향했다. 김현이가 초대한 시간은 이미 훨씬 지나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를 같이할 생각은 없었기에 늦을 거라고 말을 해 둔 상태였다.
술을 마실 것이 확실했기에 일부러 택시를 타고 왔더니 클럽 입구에 하 기자가 어색한 얼굴로 서성이는 게 보였다. 이사준이 오는 게 아닐까 기대했었기 때문에 살짝 맥이 빠졌지만, 진우는 차라리 잘된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 기자님.”
가까이 다가가 부르자 하건희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는 평소에 쓰지 않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약간은 촌스러운 뿔테안경 때문인지 원래도 동안인데 더 어려 보였다. 사실 안경에는 초소형 카메라가 장착돼 있을 것 같았지만 진우는 묻지 않았다. 진우의 역할은 하 기자를 파티 장소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취재하는지까지는 알 필요도, 아는척할 필요도 없었다.
“양 변호사님?”
태준에게 얘기를 다 들었을 줄 알았는데. 진우가 올 줄 몰랐다는 듯 하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을 본 진우의 입에서 실소가 빠져나왔다. 혹시나 하 기자가 취재 전에 자신에게 따로 연락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해줬을 태준의 속내가 훤히 잡혀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연애 대상한테는 이렇게 집착하는구나.’
태준을 오래 알고 지냈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잘만 하면 심하게 놀려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진우는 약간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하 기자와 클럽으로 들어갔다.
VIP룸으로 향하는 통로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주자 무뚝뚝한 얼굴의 직원이 누군가에게 무전을 했고, 잠깐 기다리자 웨이터가 2층에서 내려왔다.
“어서 오세요.”
서글한 말투로 웃는 웨이터는 이사준이었다. 진우는 턱에 단단히 힘을 줬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왜 거기서 나오냐는 말을 할 것 같았다. 스쿠프 팀원들이 마약 현장을 잡기 위해 경찰과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안에까지 잠입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웨이터라니? 아니, 이렇게 만날 거면 미리 말해줘도 됐던 거 아닌가? 불만이 살짝 차올랐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웨이터 복장을 한 사준이 진우와 하 기자를 정말 처음 보는 사람처럼 공손하게 룸으로 안내해서 말을 걸 틈도 없었다. 진우는 이따 보자는 의미를 담아 사준을 흘겨봤다.
“여깁니다.”
진우는 사준이 열어준 문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변호사님!”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김현이가 진우를 향해 팔을 흔들어 보였다. 진우는 김현이에게 다가가며 방안을 훑어봤다.
1층의 어두운 홀과 다르게 룸은 밝았다. 그리고 널찍한 룸 안에는 연예인 생일 파티답게 알려진 얼굴들이 많았다. 만약 태준의 짐작대로 여기서 마약 파티가 벌어진다면 곤란할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치른 것인지 테이블 위를 뒹구는 술병만 해도 벌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이제 오셨어요? 같이 오신 분은 누구? 변호사예요?”
김현이가 하 기자에 관해 묻자 진우는 친한 동생인데 궁금하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는 핑계를 댔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처음 보는 사람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식으로 나오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솔직히 마약 파티를 하는 자리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끼면 싫을 것이니까. 그렇게 허탕을 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이미 태준과는 얘기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김현이의 태도는 우려와 달랐다. 그녀는 진우를 잡아당겨 제 옆에 앉으라고 하더니 술을 따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과한 호감을 보인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작정한 모양이었다.
진우는 김현이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면서 하 기자를 살폈다. 괜히 꼬투리 잡히면 자신의 평판도 떨어지게 될 것이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김현이가 주는 술을 마시랴, 관심도 없는 화제에 적당히 맞장구치랴, 하 기자 주시하랴, 진우는 정신이 없었다.
한참 술을 마시는 사이 웨이터 복장을 한 사준이 룸에 들어왔다. 사준은 일부러 진우의 코앞에 안주를 놓으며 몸을 살짝 숙였다. 좁혀진 거리에 사준의 턱이 진우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냥 마시는 척만 해요.”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인 그 말에 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몸을 뒤로 물려 진우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취재 망치지 말라는 의미일지도 모르는데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아 심장이 간질거렸다. 누군가 깃털로 심장을 긁어대는 것 같았다.
또다시 진우는 자신이 이런 자잘한 걱정에 넘어갈 나이인가 싶었다. 그리고 너무 쉽게 휩쓸린다고도 생각했지만, 생각뿐이었다.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자신과 술을 함께 마셨던 사람들은 대부분 양진우가 취하길 바랐다. 일로 엮인 사람들은 취해서 약점을 드러내길 바랐고, 만나는 남자들은 어떻게 한번 쉽게 쓰러트려 볼 목적으로 빨리 취하길 바랐다. 그런 사람들을 만났던 탓일까. 진우는 술을 꽤 잘 마시는 축이었다. 전에 이사준과 처음 바에서 만났을 때처럼 심리적으로 휘둘리는 게 아니라면 알아서 잘 조절했다.
이사준이 나간 뒤 방에 있는 사람들의 술 마시는 페이스가 더 빨라졌다. 하 기자도 분위기에 섞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꽤 많이 마시더니 화장실을 가겠다며 룸에서 나갔다.
‘술에 취해 저대로 안 오는 건 아닐까?’
계속 하 기자를 주시하고 있던 진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진우는 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으나 쉽지 않았다. 김현이는 진우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술을 따라줬다. 넉살 좋게 거절하는 것도 초반에는 통했으나 술이 들어갈수록 김현이는 막무가내였다.
한편, 밖에 있던 사준은 복도 끝에서 진우와 하 기자가 들어간 룸을 주시했다. 혹시 안에서 일이 터지면 바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하 기자가 나왔다. 사준은 술 취한 손님을 부축하는 웨이터처럼 하 기자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이 기자님, 안에 술 너무 많이 마셔요.”
하 기자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면서 말했다.
“그래?”
“양 변호사님도 술 엄청 드시는 거 같던데….”
사준은 이대로 계속 진행해도 문제없는 건지, 진우가 걱정됐지만 오래 준비한 일을 혼자만의 판단으로 망칠 수도 없었다.
* * *
화장실에 갔던 하 기자가 돌아왔을 때, 진우는 안심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하 기자가 돌아왔다는 건 취재가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었고, 그건 이 자리를 계속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몇 잔의 술이 비워지고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을 무렵.
“야, 그거 갖고 와봐.”
김현이가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우습게도 그 말 한마디에 술에 절어가던 뇌가 단번에 반응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가만히 있는데 김현이 옆에 있던 남자가 ‘변호사라며.’ 우려 섞인 말을 했다. 그러자 김현이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괜찮아, 우리 변호사님은 나에 대해 다 안다고. 그죠? 그랬잖아요, 의뢰인의 비밀 엄수 어쩌고….”
“…그랬죠.”
돈 있는 사람이 사고 치면 수습하는 게 변호사고 이제까지 그런 일을 계속했지만, 어째선지 지금 순간 가벼운 회의감이 들었다. 이런 일을 하려고 그 어렵다는 시험을 본 게 아니었을 건데…. 진우가 쓰게 웃는 사이 김현이 고집을 못 꺾은 남자가 테이블 아래서 가방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흰색 가루가 들어 있는 투명 봉투를 꺼내 휙 던졌다.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혹시나 저한테 권할까 봐 그런 거 관심 없다고 미리 선수를 쳤다.
“뭐야, 변호사님 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이거 그런 거 아니에요. 마약 아니고 미약.”
마약이든 미약이든 일단 의약품에 들어가는 거면 관련법 위반이다. 진우는 하 기자의 초소형 카메라가 이걸 찍고 있을 걸 알아서 머리가 다 아팠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주 볼만한 일이 생길 것이다.
미약이어도 관심 없다고 진우가 말하는데, 문이 열리고 못 보던 얼굴의 여자가 들어와서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최근 잘 나가기 시작한 연예인인지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김현이가 새로 들어온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에게 약을 권했지만 여자는 거절했다. 그러자 김현이는 김빠진다는 얼굴로 짜증을 부렸다. 그때 김현이 옆에서 비위를 맞추던 남자 하나가 주사를 꺼냈다. 본격적으로 시작할 기세에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사까지 나왔으면 볼 것도 없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속이 답답했다.
“이런 거 걸려도 변호사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죠?”
발가락 사이에 주사를 맞으며 김현이가 완전히 풀어진 얼굴을 했다. 진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당장 내일부터는 마약 사범 변호를 준비해야 할 판이다. 그것도 〈스쿠프〉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사건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가 욱신거렸다. 같은 집에 있는데 한 사람은 사건을 어떻게든 축소 시키려 하고 한쪽은 어떻게든 사건을 확대해서 보도하려 할 거니, 안 봐도 난장이었다. 골이 다 지끈거려 진우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룸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주사를 맞고 코로 가루를 빨아들이거나 가루를 탄 술을 마셨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노는 게 아주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마약 파티 현장이다. 술을 주고받으면서 잔이 뒤섞였다. 진우는 술을 거절하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하 기자도 꼼짝없이 붙잡혀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필요한 장면은 카메라로 다 찍었을 테니 일단 하 기자를 먼저 내보내고 나가야겠다. 진우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는데 연예인들한테 둘러싸여 있던 하 기자가 시뻘게진 얼굴을 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리가 있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당황한 건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하 기자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하 기….”
진우는 하 기자를 부르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기자라고 불렀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다행히 떨어진 핸드폰을 아직 눈치챈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 기자는 토가 치밀어 오른 것처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숙인 채 도망치듯 룸에서 빠져나갔다. 진우는 상황을 보다가 하 기자 핸드폰을 챙겨서 나갈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김현이가 놔 주지 않았다.
“변호사님, 그러니까, 이런 것도, 다 아셨으니까, 혹시라도 일 생기면 아시죠?”
김현이는 일부러 이런 걸 보여줘서 공범 심리를 갖게 하려는 것 같았다.
“네, 근데 오늘은 제가 너무 취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시작이죠.”
김현이가 진우의 손등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혼자 빠져나갈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하 기자가 나간 걸 보면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같은 자리에 있던 것만으로도 현행범으로 의심받을 거다. 검사를 받으면 마약은 안 했다는 게 증명은 되겠지만 그 과정이 복잡하고 귀찮았다.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눈으로 문을 보자 이사준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너, 이 새끼. 양진우 맞지?”
사준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다짜고짜 테이블을 위로 올라와 진우의 멱살을 콱 잡았다. 상체가 완전히 들릴 정도였다.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갑자기 몸이 크게 움직이자 머리가 징징 울렸다.
“네, 네…?”
험악한 기세에 눌린 진우가 눈을 끔벅였다. 뾰족하게 솟아 올라간 눈초리가 매서웠다. 상황 파악이 바로 안 됐다. 입만 뻐끔거리던 진우는 사준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에야 지금 상황이 연출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씨팔, 네가 돈 떼먹고 가서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거든?”
“아니, 무슨 말을….”
“참내, 더 쪽팔리기 싫으면 따라와, 새끼야.”
이사준은 진짜 사채업을 하는 양아치 같았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가씨가 대신 갚아 줄 거 아니면, 찌그러져 있어.”
김현이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사준이 건들거리면서 대꾸했다. 그는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진우를 테이블 사이에서 끄집어내듯 잡아당겼다. 김현이가 말릴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의 거리가 바짝 가까워졌다.
“하 기자 핸드폰….”
진우는 사준에게 작게 속삭이더니 끌려가다 발을 헛디딘 사람처럼 엎어졌다. 그리고는 얼른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수 쓰지 말고, 빨리 와!”
사준은 정말 빚쟁이처럼 진우를 잡아당겼다.
“아니, 잠깐 이것 좀 놓고…!”
진우는 사준의 강한 악력에 의해 뒤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 나왔다.
* * *
둘은 클럽 뒷문으로 빠져나와 좁은 골목에 몸을 숨겼다. 진우를 벽에 기대 세운 사준은 목에 매고 있던 보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양 변호사님, 괜찮아요?”
사준이 세팅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헝클이며 물었다.
“…안 괜찮아요, 술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 울리니까 좀 조용히 해요.”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요?”
“…마시고 싶어서, 마신 거 아니거든요?”
“김현이가 주니까 좋아서 실실하던데요? 여자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봐.”
사준이 놀리듯 말했음에도 진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진짜 많이 안 좋아요? 술 깨는 약 사다 줄까요?”
“아뇨오….”
어눌하게 말하는 진우를 바라보며 사준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뭐 하는 현장인지 알았잖아요, 그냥 오지 말지 그랬어요.”
“장태준이 초대장 받은 거 뻔히 알고 연락했던데요.”
진우는 태준이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했을 거라는 의미로 말했으나 사준은 다르게 들었다. 고생할 걸 알면서도 장태준이 부탁하니까 거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태 진우가 취재를 도운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새삼 그렇게 들렸다. 짜증 섞인 한숨을 뱉은 사준은 진우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얼굴을 든 진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진우는 내내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이성을 풀어 버린 채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가볍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크게 번졌다.
“근데, 그거 뭐였어요? 연기?”
“아….”
마주친 눈동자가 생각보다 또렷해 보이는 것에 사준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취해서 정신 놓은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턱밑까지 차올랐던 걱정이 다 허무해지고 말았다.
“내가 언제 외상값을 떼먹었다고.”
“그러는 양 변호사님도 놀라는 척하는 거 엄청 어색하던데요?”
“아닌데, 나 처음에는 진짜 어이없어서 놀랐는데.”
부스럭.
순간 골목 끝에서 들린 소리에 둘 다 말을 멈추고 바짝 긴장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숨소리까지 죽인 둘은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빠르게 눈을 굴렸다.
“니야아옹―”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검은색 고양이가 두 사람을 흘긋 보더니 도도한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하…?”
“풉.”
고양이 때문에 바짝 긴장하다 못해 쫄았던 게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는 듯 진우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술이 이성을 느슨하게 만든 것인지 진우는 평소보다 웃음이 많았다. 사준은 웃는 진우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사준이 가볍게 타박하자 진우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는 이 기자님은 왜 웃어요?”
웃음은 전염된다고 하더니 진짜 그런 것처럼 풀어진 사준의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둘 다 크게 웃고 말았다.
한참 어깨를 떨며 웃어대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아, 하하, 하아….”
진우는 웃다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사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 안도감이 확 밀려왔다. 사준의 얼굴이 거리낌 없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진우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차가운 공기와 다르게 서로의 입술은 몹시 뜨거웠다.
빈틈없이 입술이 맞물리자 코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가벼운 바람이 인중을 건드리는 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사준이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속을 침범한 혀가 진우의 입안을 샅샅이 핥아 올렸다. 술이 배어있는 입안 전체를 검사라도 하는 것처럼 사준이 혀를 꼼꼼하게 움직였다.
“아, 하아….”
진우가 단단한 어깨를 붙잡자 사준이 허리를 팔로 감았다. 몸이 밀착한 만큼 키스가 깊어졌다.
“일단 집에 가요.”
입술을 다 떼지 않은 채 사준이 속삭이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집으로 간다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 맞다, 이거 이 기자님이 챙겨요.”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움직이는데 진우가 사준에게 하 기자 핸드폰을 내밀었다. 사준은 핸드폰을 받아들며 인상을 썼다. 이대로 진우와 함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오늘 여기 온 건 일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하 기자 핸드폰을 보니 확연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사준은 진우를 힐끔 보더니 제 핸드폰을 꺼내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사준은 긴 신호음만 울리는 전화를 꽉 쥔 채 한숨을 쉬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 너머의 상대에게 투덜거린 사준은 이번엔 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
태준과 다르게 바로 전화를 받는 것이 마음에 들어 사준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는 진우를 힐끗 보더니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양 변호사님이 너무 취했어, 일단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연락 줘. 아, 그리고 하 기자 핸드폰 챙겼으니까 팀장님한테 연락 오면 말해주고. 응, 알겠어.”
진우는 전화 통화하는 사준을 보며 대충 내용을 짐작했다.
“나 혼자 갈 수 있는데요.”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사준은 또렷한 눈길로 진우를 응시했다. 어떤 목적을 담은 눈빛이었다.
“그리고 양 변호사님 엄청 취했잖아요.”
“아닌데….”
말끝을 늘이며 놀리듯 말하는 것에 사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 취했으면 하 기자 핸드폰을 나한테 줘요? 관심 있다면서요, 그럼 이건 따로 만날 기회 아닌가?”
사준은 약점을 잡은 사람처럼 진우의 눈앞에 하 기자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아니, 꼭 그게 아니어도….”
하 기자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하려고 하는데 사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사준은 진우의 손목을 붙잡고 골목을 빠져나와 가까이 서 있는 택시에 올랐다. 택시 문을 닫은 순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클럽에 진입하는 게 보였다. 이제 클럽 안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걸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내가 도와준 거죠?”
진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사준을 번갈아 봤다.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진짜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낼 뻔했다.
“타이밍은 좋았다고 해두죠.”
진우가 반만 인정했다.
“근데 애초에 오늘 여기 온 건 장태준 때문이니까, 이 기자님이 날 돕는 건 당연한 거죠.”
“흐음…?”
“엄밀히 따지면 내가 여기 온 거 자체가 취재 때문인데.”
“그럼 원래는 안 올 생각이었어요?”
“굳이?”
흑심이 있는 게 뻔한 김현이의 초대에 응할 생각은 없다는 의미였으나 이사준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내일부터 바빠질 거 같으니까.”
진우는 사준의 다음 말을 조심스럽게 짐작하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김현이 옆에 있을 때와는 다른 팽팽한 긴장감이 몸에 감돌았다. 사준은 다리를 살짝 벌려 진우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오랜만인 거 같네요, 우리.”
* * *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진우가 먼저 사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억지로 눌러놓았던 술기운이 떠오르면서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후으,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기 있어요?”
사준은 낮은 목소리로 진우의 귓바퀴를 핥듯이 물었다.
“싫어요?”
“취했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면 곤란한데.”
진우는 사준을 가만히 보다가 입술을 할짝댔다. 안 취했다고 입씨름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사실 알코올에 잠식된 이성 대신 이젠 본능이 꿈틀거렸고, 욕망과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다. 진우는 사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나 취했어요.”
아까는 아니라고 했으면서.
사준은 떠오른 말을 억지로 삼킨 채 진우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진우는 사준에게 몸을 바짝 밀어붙인 채 까치발을 들어 귓가에 입술을 댔다.
“그래서… 취기에 빨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준은 험한 욕이 튀어 나갈 뻔한 입을 가까스로 막았다. 노골적이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천박해 보일 만한 유혹인데 양진우가 해서 그런지 하나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빨아 줄래요?”
사준은 사타구니를 밀어붙이며 자신의 하반신 상태를 드러냈다. 싫어하는 걸 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한다면 한번쯤 물려 보고 싶었다. 법정에서 똑똑한 말만 해대는 그 얇은 입술이 성기를 물면 얼마나 음탕할지 상상만으로 꼴렸다.
진우는 사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만 움직여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손을 움직여 버클을 풀고 지퍼를 아래로 내리면서 진우는 몸도 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사준의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묘한 열기가 감도는 눈길에 사준은 지금 서 있는 곳이 현관이라는, 심지어 아직 신발도 벗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지퍼 틈새로 성기를 빼낸 진우가 동그랗게 입술을 벌리자 사준의 몸이 움찔했다. 기대감이 온몸에 빠르게 번져 손끝까지 다 저릿거렸다. 진우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혀가 귀두를 할짝댔다. 고양이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몇 번 간을 보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혀가 어느 순간 길게 빠져나와 사준의 귀두 전체를 덮었다.
“읏.”
그저 핥아 주는 것만으로도 성기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는데 진우는 멈추지 않고 입속으로 성기를 빨아들였다. 좁고 축축한 점막이 귀두를 지나 기둥에 닿자 사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성기가 먹히는 것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슬로우로 펼쳐졌다. 술을 마신 탓인지 진우의 입속은 상상보다 훨씬 더 뜨거웠고 부드러웠다.
“아, 후….”
특별히 무언갈 하지 않았음에도 그대로 입에 싸버릴 것 같았다. 한껏 크기를 키운 사준의 성기를 진우는 고개를 움직이며 요령 좋게 빨아댔다. 처음에 어색한 것처럼 굴었던 게 무색하게 양 볼이 옴폭 패도록 기둥을 압박하고 츕츕 소리를 내며 빨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살 기둥에 타액이 발렸고, 그 위를 진우의 입술이 지나갈 때마다 음란한 소리가 만들어졌다. 요도에 고인 쿠퍼액이 주르륵 떨어져 진우의 입속으로 떨어지자 그것도 망설임 없이 삼켰다.
사준은 능숙하게 제 것을 빨아대는 진우를 보며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남자를 만난 것도, 남자와 사귀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또 한 번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끈거렸다.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것 같아 사준은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놓길 반복하다 진우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크, 씨발 진짜…!”
사준은 더 못 참겠다는 듯 진우의 뒤통수를 확 잡아당겼다. 입속에서 쑥 빠져나와 허공에서 꺼덕이는 성기를 보던 진우가 눈동자만 들어 올려 사준을 바라봤다.
“별로인 건 아닌 거 같은데, 혹시 벌써 싸고 싶어요?”
진우의 질문에 답지 않게 사준의 귀가 확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몇 번 몸을 섞었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신선했고, 동시에 처음으로 자신이 주도권을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 쌀래요?”
진우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야살스러운 목소리로 묻더니 동그랗게 입술을 벌렸다.
“여기?”
빠끔 벌어졌던 입술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아니면 다른 구멍?”
사준은 제 심장이 어딘가로 튀어 나가거나 이상한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움켜잡아야 할 것 같았다.
“미친, 양진우 씨 어디 가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사준은 마른 목소리로 말을 뱉더니 스스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타액이 잔뜩 묻은 좆이 손안에서 찌걱찌걱 소리를 냈다. 진우는 제 코앞에서 흔들리는 성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할 줄 알았더니 스스로 자위라니. 굵직한 기둥을 감싼 커다란 손안으로 귀두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습이 미치도록 선정적이었다. 진우의 타액으로 젖은 성기는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팽팽하게 일어서더니, 이내 정액이 쭉 튀어나와 진우의 얼굴에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파팟 튀어 오른 정액 때문에 얼굴 전체가 끈적해졌다.
“구멍 말고 얼굴에 싸고 싶어서.”
사준은 달아오른 숨을 고르며 씩 웃어 보였다.
진우는 얼굴에 묻은 끈적한 점액질을 손으로 닦아냈다. 사준의 자위 쇼를 코앞에서 본 덕에 아래가 불끈거리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그럼, 만족?”
“그래 보여요?”
사준의 성기가 대답하는 것처럼 꺼떡거렸다. 방금 사정했는데 또 금방 섰다.
반응이 너무 직설적이잖아.
진우는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실로 들어서며 뱀 허물처럼 옷을 하나씩 벗어서 떨어트렸다. 침실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사준이 붙잡아서 허물의 흔적은 소파 근처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소파에 진우를 밀어 눕힌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벌리고 소파 테이블 아래서 젤을 꺼냈다. 언제, 왜 거기다 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따질 마음도 안 들었다.
엉덩이 사이에 젤을 치덕치덕 바른 사준은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진우의 내벽은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개나 들어온 손가락을 사정없이 조여댔다. 끊어먹을 듯한 조임에 사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젤을 더 들이부었고 미끌거리는 액을 내벽에 발라댔다. 찌걱, 찌걱, 젤에 젖은 점막이 야한 마찰음을 내자 진우가 허벅지를 잘게 떨었다.
“아, 하아, 이제 됐으니까….”
달아오른 몸을 가라앉히고 싶은 건 사준만이 아니었다. 진우의 가벼운 조름에 사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를 벗어 던졌다. 급하게 콘돔을 씌운 사준은 흉흉하게 불거진 귀두 끝을 젤로 젖은 입구에 댔다. 후끈거리는 열기에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허리를 내리며 성기를 안쪽으로 밀어 넣자 숨이 가빠졌다. 성기가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술 때문에 뜨거워진 건 진우의 입만이 아니었다. 말랑하게 풀어진 점막이 탐욕스럽게도 달라 불었다.
뜨겁게 조여 오는 것에 사준은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허리를 흔들어서 정액을 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준은 진우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뒤로 쭉 빼 귀두를 입구에 걸쳤다가 단번에 안쪽으로 처박았다.
“아, 하으, 지금, 좋아….”
진우가 목을 뒤로 젖히며 비음을 흘렸다. 부추기는 신음에 사준은 허리를 더 거칠게 움직였다. 쿠퍼액이 잔뜩 흘러나온 성기가 안쪽을 들쑤시자, 질퍽하게 젖은 소리가 아래서 난잡하게 울렸다. 숨이 차오르고 관자놀이에 맺힌 땀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지만 시작한 추삽질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진우가 사준의 허리를 다리로 끌어안고는 발뒤꿈치로 엉덩이를 꾹꾹 눌렀다. 더 깊게 들어와 달라고 하는 것 같은 움직임에 사준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깊게 내리눌렀다.
철퍽 철퍽, 고환이 회음부를 치대며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난잡해지자 진우의 성기가 투명한 액을 주룩 흘렸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아 진우는 사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더, 지금, 하읏…!”
사준은 홀린 것처럼 진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겹쳐진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신음까지 몽땅 다 먹어 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여러 번 했고, 할 때마다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양진우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 * *
새벽 기운이 막 가신 이른 아침, 진우가 뒤척이자 사준이 바로 반응했다.
“일어날 수 있어요?”
사준은 잠을 잤음에도 지쳐 보이는 진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우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신음을 너무 질러댄 탓에 성대가 제구실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마른 성대가 거슬려 고개를 젓자 몸을 반쯤 일으킨 사준이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생수를 내밀었다.
진우는 사준이 내민 생수병을 받아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에 반이나 마셨다. 사준은 물을 마시느라 움직이는 진우의 목울대를 가만히 보다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양 변호사님.”
“하아, 왜요?”
조금 살 것 같아 시원한 한숨을 터트린 진우가 침대에 드러누우며 사준을 바라봤다.
“첫 경험 누구였어요?”
“…뭐예요? 그런 걸 왜 물어봐?”
너무 생뚱맞은 질문이라 이사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사준은 진우가 손에 쥐고 있던 생수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냥, 남자는 첫 상대 못 잊는다잖아요.”
그 대꾸에 진우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문득 이사준에게도 못 잊을 여자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 기자님은요?”
“난 양진우 씨가 처음이라고 말했잖아요.”
뻔뻔하기도 해라,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진우는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일부러 크게 코웃음 쳤다.
“진짠데. 나는 아마 앞으로도 양 변호사님은 절대 못 잊을걸요.”
네네, 그러시겠죠. 진우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진우를 보던 사준이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진짜라고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인데 내가 못 잊을 게 당연하잖아.”
바짝 가까워진 얼굴에 진우는 심장이 철렁했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미친, 그럼 못 잊을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공평해서 좋겠네.
진우의 속을 읽으려는 것처럼 얼굴을 들여다보던 사준이 고개를 숙여 진우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 물었다.
“하게요?”
입술이 살짝 떨어진 틈에 진우가 물었다.
“안 돼요?”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데, 따지고 보면 오히려 조르는 것에 가까운 말투인데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에 번졌다.
“안 된다기보다는….”
“오늘 쉬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제 충분히 많이 한 것 같은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같이 사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니, 무슨 막 결혼한 신혼부부도 아니고 눈만 맞으면 배를 맞추려고 해.
진우는 일부러 실없는 생각을 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콘돔 줄어드는 게 아까우면 다른 콘돔 쓸게요.”
진우를 배려해 주겠다는 듯 사준은 같이 쓰기로 한 콘돔이 아니라 다른 콘돔을 서랍에서 꺼냈다.
어제 소파에서 했을 때도 다른 콘돔으로 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진우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잠깐….”
“천천히 할게요.”
진우가 말리려 했지만 사준은 듣지 않았다. 그는 콘돔 포일을 뜯어 언제 발기한 건지 알 수 없는 좆 끝에 걸었다. 돌돌 말린 것을 풀어 내리자 미끌거리는 고무가 그의 성기를 감쌌다. 준비를 마친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넓게 벌리더니 망설임 없이 밤새 괴롭힌 곳을 서서히 침입했다.
“피곤하면 자도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렇게 감각을 다 깨우면서 어떻게 자란 말인가.
“깨어 있는 쪽이 반응이 있으니까 더 좋긴 하지만, 양진우 씨 은근히 체력 약하니까.”
내가 체력이 약한 게 아니라 그쪽이 너무 정도를 모른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성기에 진우는 입만 뻐끔거렸다. 제대로 된 저항이나 반박도 못 한 채 진우는 안쪽에 박혀 드는 성기를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딱딱한 것이 밀고 들어오면서 몸에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체온이 점차 상승하고 호흡이 가빠지자 사준이 진우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렸다.
성기를 꾸욱 밀어 넣자 진우의 점막이 꿀럭이며 사준의 모양에 맞춰 변했다. 부드럽게 풀린 점막이 성기에 완전히 달라붙자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하아, 진짜 빼기 싫다.”
부드럽게 풀어진 내벽이 따끈하게 성기를 감싸는 감각을 음미하며 사준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 리….”
“양진우 씨가 이 느낌을 모른다는 게 아쉽네요.”
사준은 키득거리면서 느긋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점막을 쓰윽쓰윽 훑어줄 때마다 성기가 점점 더 커지는 것만 같았다.
“하, 그만, 커져….”
“그럼, 그만 좀 조여봐요.”
사준은 안쪽에 성기를 밀어 넣은 채 허리를 둥글게 돌렸다. 느긋하게 움직이는데도 온몸에서 땀이 나면서 젖은 피부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나면서 온몸이 다 저릿했다.
“아, 흐으, 흣….”
사준이 집게손가락으로 젖어서 번들거리는 유두를 비틀자 진우가 허리를 가볍게 튕겼다.
“젖꼭지만 만져도 쌀 것처럼 구네요.”
“그럴 리가 없잖, 아… 흣!”
“좆처럼 바짝 일어선 게 그럴 거 같은데.”
진우가 도리질 치자 유두를 지분거리는 사준의 손이 더 집요해졌다.
“한번 볼까요? 천천히 하기로 했으니까.”
사준은 허리를 간헐적으로 흔들며 진우의 가슴에 집중했다. 손가락으로 흔들고 입술로 빨고 이로 살짝살짝 깨무는 것에 진우의 성기에서 사정 전 분비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아, 그만… 흣, 그냥 흔들, 어….”
진우는 반쯤 울먹이면서 허리를 뒤틀었지만 사준은 좀처럼 원하는 자극을 주지 않았다. 천천히 한다던 사준은 유두를 한참이나 희롱하다가 정말로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진우의 안쪽을 탐했다.
결국 완전히 흐물흐물해진 내벽은 사준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환희했고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는 사준이 박아줄 때마다 야한 물을 직직 흘렸다.
“아, 제발… 그만, 흑, 흐으윽….”
오줌도 정액도 아닌 것이 상체를 비롯해 얼굴까지 튀어 오르자 진우는 수치심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괜찮아요, 양진우 씨 이렇게까지 질질 싸면서 느끼는 거 보니까, 하아… 엄청 꼴려.”
사준은 탁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감상을 중얼거렸다. 귀를 핥아 올리는 것 같은 그 목소리마저 진우에겐 너무 자극적이었다. 쾌감이 너무 강렬해서 머리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흣, 제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는 소리가 마구 나왔지만 사준은 자비가 없었다. 격렬하게 성기를 안쪽까지 쑤셔 박는가 하면 감질나게 입구를 깔짝였다.
“아, 이사준… 흣….”
진우는 사준의 어깨에 손톱을 깊게 박아 넣은 채 무아지경으로 흔들렸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이었다. 진우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눈이 탱탱 부어서 잘 안 떠졌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바뀐 시트가 제일 먼저 보였고, 몸이 끈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는 얼굴에 열이 몰렸다.
게다가 이사준이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서 아직도 안쪽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식의 섹스는 경험해 본 적 없었다. 언제나 일방적인 섹스였다. 거기서 쾌감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가끔은 대 준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근데 새벽에는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느끼고 말았다.
‘혹시 어제 마신 술에 약이라도 들어있었나?’
진우는 제 옆을 한번 보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문밖에서 들리는 작은 생활 소음 때문에, 비어 있는 자리를 봤음에도 야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이사준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문만 열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 늘어진 몸이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꼬르륵, 그 와중에도 배는 고픈지 위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서 진우는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민망함을 느꼈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이제는 진짜 일어나자 싶어 몸을 일으킨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사준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어났네요?”
“계속 누워 있을 수도 없으니까….”
“기절한 것처럼 자길래 계속 늘어져 있을 줄 알았죠.”
진우는 사준의 실없는 소리에 대꾸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밥부터 먹을래요?”
“씻고 먹을래요.”
욕실에 들어온 진우는 샤워기 물 온도를 조절하면서 조금 전 이사준과 나눴던 대화를 곱씹었다. 너무 평범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여서 간지러웠다. 몸에 민달팽이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진우가 씻고 나오자 사준이 욕실 앞으로 다가왔다.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움직임에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왜요?”
할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사준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뭐 먹을래요?”
사준은 진우의 입에서 나오는 음식을 바로 주문할 모양새였다.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 사준은 동거인에게 참 이것저것 맞춰줬다. 전에 같이 지냈던 놈들은 진우의 의견 같은 건 묻지 않았다. 아니, 사실 물어도 진우가 어지간한 일에는 예스라고 답해서 으레 뭘 해도 괜찮은 줄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진우는 연인과는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았다. 취향이란 건 맞춰가다 보면 맞춰지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바람피우는 것만 아니라면 어지간한 건 다 괜찮았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같이 바람을 피웠다.
바람을 피웠다고 말하면 가볍게 들리지만, 그 행위 자체는 엄연히 배신이었다.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정상적인 방법이 있는데, 왜 사람을 기만하는 짓을 하는 걸까.
“양 변호사님?”
사준의 부름에 진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냥 만들어 먹어요. 가뜩이나 밖에서 자주 먹는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뒤 주방으로 향하는 진우를 사준은 끈덕지게 바라봤다. 뭔지 모르겠는데 진우의 행동이 거슬렸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달라 보였다.
‘어제 무리해서 그런가?’
사준은 어젯밤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할짝였다. 성기를 쭉쭉 빨아들이던 점막과 깊게 쑤셔 넣을 때마다 허리를 튕기면서 야하게 풀어지던 진우의 얼굴이 떠올라 사타구니가 묵직해졌다. 어제 그렇게 쌌는데 또 불알 가득 정액이 차오른 것만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진우는 집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 간단한 볶음밥과 콩나물국을 만들었고 둘은 마주 앉아 먹었다.
“한동안 바빠질 거예요.”
사준이 먼저 말을 꺼내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요.”
“김현이 때문에요?”
어조에 변화는 없었지만 질문은 날카로웠다. 진우는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연락은 없지만 내가 변호하게 될 거예요.”
“무섭네… 우리 보도 축소시키는 건 아니죠?”
“필요하면 할 수도 있죠.”
“그건 변호사 능력이 아니지 않아요?”
“변호사 능력은 아니고 변호사 클라이언트 능력이죠.”
진우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끌어모으면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 기자님, 다 알면서 왜 물어봐요? 내가 김현이 변호를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아닌데, 궁금한데. 그 어마어마한 약쟁이를 어떤 수로 빼낼지.”
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약 사건은 생각할수록 골치였다.
“증거 없는 추측은 법정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어요.”
숟가락이 접시를 긁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참고로 불법 촬영은 정당한 증거가 아니라는 것도 말해둘게요.”
은근한 경고가 깔린 말에 사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누군가의 카메라가 켜졌고, 거기 찍힌 영상을 공익차원에서 제보받을 수는 있죠.”
사준이 능청을 부리자 진우는 남은 밥을 입에 밀어 넣고 꼭꼭 씹었다. 일 얘기를 더 해봐야 서로 날을 세울 게 분명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밥 먹고 뭐 할 거예요?”
다행히 사준도 일 얘기를 더 할 생각은 없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글쎄요.”
김현이한테 연락 올 걸 대비해서 대충 사건의 흐름이라도 정리해야 할까 싶었지만, 그렇게 안 해도 곧 일에 파묻힐 건데 미리부터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럼 오늘은 쉬어요.”
“이 기자님 안 바빠요?”
“우린 계속 바빴잖아요.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는데, 모르죠. 우리 팀장 성격이면 일요일부터 부를지도.”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종을 제대로 잡았는데 태준이 여유를 부릴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아직 연락 없어요?”
“네, 어제 하 기자 취해서 같이 갔다고 하더니 연락 없네요.”
사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진우의 얼굴을 살폈다.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진우는 덤덤했다.
“뭐 하고 쉴 거예요? 쇼핑? 영화?”
“밖에 나가는 건 별로 안 하고 싶고….”
사준은 먹은 그릇들을 정리해 싱크대로 향하면서 말했다.
“집에서 늘어져 있고 싶은데, 어때요?”
순간 진우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사준이 집에서 쉬고 싶으니 나가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여기는 이사준의 집이고 줄곧 혼자 살았을 것이니 쉴 때 정도는 혼자 있고 싶을 수 있겠다고, 진우는 단번에 납득했다.
“그럼 난 나가 있을게요.”
진우는 집에 가서 우편물이 온 게 없는지 확인해 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올 계획을 세우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사준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양 변호사님,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요?”
“내가 그런 소리 듣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요?”
진우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나한테만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뭐가요?”
“집에 같이 있자고 말한 건데 나가겠다고 하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사준은 진우에게 등을 돌린 채 설거지를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위로 밀어 올리자 시원하게 물이 쏟아졌는데, 그 물소리가 꼭 말 걸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사준의 등이 삐쳤다고 말하는 것 같아 진우는 손끝으로 턱을 매만졌다.
“이 기자님.”
분명 들렸을 것인데도 사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우는 머쓱함을 떨치려고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너무 평범한 연인 같아서 자꾸만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
이사준은 자신에게 사귀자는 말은커녕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다. 그저 남성과의 섹스에 흥미가 있었고, 진우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쳐서 집에 들어와 한시적 동거를 하게 된 것뿐이다. 섹스도 콘돔을 다 쓸 때까지만이라고 나름 횟수도 정했다. 문제는 자꾸 그 콘돔을 안 쓰고 다른 콘돔을 쓴다는 점이지만…. 진우는 귀 끝에 열이 몰리는 감각을 모르는 척하며 목을 다듬었다.
“큼, 이사준.”
사준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수도를 잠그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요.”
“같이 쉬자는 의민지 몰랐어요, 내가 눈치 없었던 거로 해요.”
“눈치 없는 거로 하는 게 아니라 눈치가 없는 거예요.”
사준은 수건에 손에 남은 물기를 닦고 진우 앞에 섰다.
“나가서 뭐 하려고 했어요?”
진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사준은 입속에서 혀를 깨물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둘 다 많이 바빠질 거고, 아마도 이번 일은 서로 대립할 가능성이 크니 같이 느긋하게 휴일을 보내자는 의미였다. 그걸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진우가 볼일이 있다고 하면 그냥 그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당신은 집에서 편히 쉬어요, 라는 말을 들으니 속이 쓰렸다. 혼자 편하게 쉬겠다는 이유로 동거인을 쫓아낼 정도로 자신은 모진 사람이 아니다. 양진우도 그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타인한테 맞춰 주는 것에 이골이 난 양진우는 이런 면에서도 심할 정도로 배려했다. 눈치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우편물 온 게 있나 확인도 해 보고.”
“우편물 올 게 있어요?”
“딱히 기다리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스토커가 또 왔다 갔을지도 모르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준이 신경 쓸지도 모른다 싶어 입에 담고 싶지 않았지만, 스토커가 집 앞에 뭔가 흔적을 남기고 갔을지 모르니 확인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요?”
“네?”
“스토커가 언제 올지 모르는 집에 계속 있을 생각이었어요?”
“아뇨, 커피나 한잔 마시고 올까 했죠.”
이사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
“집에서 쉰다면서요.”
“산책 겸 양 변호사님 집에 갔다가 커피 마시고 저녁에는 집에서 영화 보는 거로.”
사준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일정을 한 번에 정해 버렸다. 진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꾸만 움찔움찔 튀어 오르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별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이라고, 이사준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스스로 말했지만 울렁거리면서도 설레는 마음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역시 같이 살기로 한 건 잘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 * *
진우의 집에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둘은 긴장했다. 문 앞에 또 정체불명의 상자가 있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집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준은 현관 앞으로 성큼 다가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자신이 바꿔 준 비밀번호를 그대로 쓰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비밀번호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죠?”
“말할 틈이 있었겠어요?”
사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달라진 거 있나 한번 봐요.”
사준은 정말로 스토커가 집 안에 침입했을 것을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다행히도 사준의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챙겼던 흔적을 빼고는 집 안은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딱히 누가 들어왔던 거 같지는 않아요.”
“그거 다행이네요.”
집에 누군가 침입한 것도 아니고 발신 불명의 택배가 또 온 것도 아니니 슬슬 집에 들어와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진우는 사준을 힐긋 보며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고 말해서 사준이 순순히 집에서 나가요, 하면 섭섭할 것 같았다.
불과 1시간 전까지 같이 살기로 한 게 잘한 게 아닌 것 같다고 느꼈으면서 이제는 나가라고 할까 봐 걱정이라니, 갈대도 이거보다는 더 줏대가 있을 것 같다.
말을 아낀 진우는 셔츠와 넥타이를 몇 개 더 챙겨서 사준과 집을 나왔다. 그리고 1층에서 우편함을 확인했다. 우편함에도 관리비 고지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토커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거 알까요?”
사준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어쩌면 그냥 단순한 장난이었던 건지도 모르죠.”
“단순한 장난은 무슨, 아무리 장난이었어도 그 정도면 악질이죠.”
사준은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진우의 손목을 잡았다.
“가죠, 여기 계속 더 있다가 스토커라도 오면 피곤할 거 같으니까.”
진우는 입술을 지그시 눌러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커의 위협 때문이라고 해도 아직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는 것이 기뻤다.
* * *
집에 돌아온 둘은 VOD로 뭘 볼지에 대해 말씨름을 했다. 진우는 코미디를 원했고 사준은 스릴러를 원해서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 작품을 두고 씨름하던 둘은 결국 히어로가 등장해서 다 때려 부수는 영화를 골랐다.
영화는 복잡할 것 하나도 없는 루트를 따라갔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미국의 대도시를 때려 부수는 외계 생명체 앞에 등장한 히어로는 빌런이 망가트린 것보다 더 심하게 도시를 망가트렸다.
“저렇게 다 부수는데도 책임은 안 지겠죠?”
진우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을 흘렸다.
“히어로가 다 그렇죠.”
사준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도대체 누굴 위한 히어론지 모르겠네.”
“도움받은 사람은 히어로라고 생각할 거고, 집이 망가진 사람은 빌런이라고 생각하겠죠.”
사준은 거대한 구조물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는 거 아니겠나.
“흐음, 모두를 위한 히어로는 없다 그거예요?”
진우는 사준이 일을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살짝 궁금해졌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이런 영화 보면서 너무 철학적인 거 아니에요?”
“무슨, 철학씩이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진우가 고개를 돌린 순간 가볍게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시선의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는 느긋한 키스가 시작됐다. 부드러운 입술이 말랑하게 겹쳐지자 마음도 말랑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토요일이 저물었다.
* * *
커다란 손이 섬세하게 머리칼을 건드리는 감각에 얼굴이 간지러워 진우는 기신기신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일 있어서 나가봐야 해요.”
눈이 마주치자 사준은 살풋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요일이지만 오늘부터 사준이 바쁠 것이라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곧 바빠질 것이다.
어젯밤, 예상대로 진우는 김현이 스폰서에게 연락을 받았고 김현이를 변호하게 됐다. 태준은 처음부터 자신이 이 사건을 담당할 걸 알았을 거니, 당분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을 것이다.
총칼만 없지, 이번엔 전쟁이다. 진우는 클라이언트 김현이를 최대한 보호해야 했고 태준과 그의 팀원들은 김현이의 위법행위를 하나라도 더 알리려 할 것이다. 그리고 태준의 팀원 중에는 사준도 속해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일이니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길 텐데 이사준과 같이 산다는 것 때문인지 묘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면, 최대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거고….
* * *
월요일 아침, 출근을 위해 주차장에 내려온 진우는 인상을 썼다.
누가 진우의 차 앞에 이중 주차를 해둔 탓에 차를 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차에는 연락처도 남겨두지 않아서 전화할 수도 없었다.
‘확 신고해 버릴까?’
짜증 섞인 얼굴로 차를 노려보던 진우는 가볍게 숨을 고르고는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사준의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오늘 하루는 차를 두고 가기로 했다.
출근해서 급한 서류를 처리한 진우는 김유민을 불러 회의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김 변은 당분간 김현이 건을 최우선으로 서포트 해 줘야 할 거 같아요.”
“네? 김현이요? 그럼,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건요?”
“그건 제가 할게요.”
“변호사님, 혹시… 파티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진우가 김현이 파티에 참석했던 걸 알고 있는 김유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었죠, 그것도 아주 크게.”
김유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마약이죠?”
진우는 엷은 한숨을 뱉었다. 이미 이렇게 약쟁이인 게 퍼져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건지.
“네, 근데 이거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거 같거든요.”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진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떻게요?”
“그날 파티 현장 촬영해 갔어요.”
“네에?!”
김유민이 놀라서 쥐고 있던 펜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일단 〈스쿠프〉 보도를 적정선에서 막아야 할 거 같거든요.”
“〈스쿠프〉에서 취재했다는 거예요?”
“네, 현장까지 찍었으니까 보도는 확실히 할 거예요.”
김유민은 인상을 찡그렸다. 〈스쿠프〉는 신뢰도가 높은 방송이라 골치가 아프다는 의미였다.
“그거 방송 언제 할까요?”
“아마 이번 주 금요일? 오래 끌고 있을 사람들 아니니까.”
“그럼… 저희 쪽에서 더 빨리하는 거 어때요?”
김유민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진우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무슨 좋은 생각 있어요?”
“김현이 씨가 경찰 조사받은 건 금방 알려질 거니까 그냥 먼저 인정하는 거죠. 실수다, 한 번이었다, 몰랐다.”
김유민의 말에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보도될 것이라면 먼저 치고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시의성을 놓친 뉴스만큼 가치가 없는 것도 없으니까. 사실 김현이는 유명한 약쟁이지만, 그건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고 그녀의 팬들은 대부분 그녀가 마약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었다. 김현이가 다른 건 몰라도 이미지 관리는 잘했다. 진우의 긍정적인 반응에 김유민이 자신을 얻은 듯 말을 이었다.
“김현이가 그렇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 보이면 길어야 2년 아니겠어요? 아니다, 잘하면 1년이면 복귀할 수 있을지도. 스폰도 빵빵하니까요.”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날 클럽에서 찍은 영상은 보도는 할 수 있지만,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되기는 어렵다. 기자들이나 말이 좋아 알 권리로 포장하지, 사실 그건 그냥 불법 촬영이었다. 그리고 법정에서는 그런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판사 개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법은 아니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죠.”
“네.”
연예인 마약 파티 보도를 축소하기 위해 진우는 온갖 자료를 다 모았다. 관련 법령을 찾기 위해 한참 서류를 들여다보며 정리했고 김현이 측에 보도자료 초고를 요청했다. 사실 다른 것보다 보도자료를 제일 먼저 끝내고 싶었는데 김현이 소속사에서 보도자료를 늦게 보냈다. 진우는 흠 잡힐 부분이 없는지 보도자료 내용을 확인했고 그걸 수정했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으, 끝났다….”
진우와 같이 있던 김유민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피곤하죠? 이제 퇴근합시다.”
김유민과 진우는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보도자료 바로 뿌리라고 하실 거죠?”
“네, 이렇게 된 이상 하루라도 먼저 선수 치는 게 나을 거니까요. 기획사에 메일 보내뒀어요. 그쪽에서 확인하고 수정본 보내주면 최종 확인하고 뿌려야죠.”
“또 체크하세요?”
“〈스쿠프〉 상대하는 거니까 실수하면 안 되죠.”
“…보도자료 나가면 이 기자님이 당황하시겠어요.”
김유민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진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당황만 할까,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사준을 떠올린 진우는 옆에 서 있는 김유민을 힐긋 봤다. 〈스쿠프〉에서 보도할 거라고 했는데 콕 집어서 이 기자가 난감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사준이 정말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김유민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만남을 원하면 이사준은 응하지 않을까? 하반신이 깃털처럼 가벼운 데다가 기회는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다. 둘이 만나는 모습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오르려는 순간 띵동,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어? 근데 변호사님 왜 1층에서 내리세요?”
김유민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원래 진우는 자차로 출퇴근하기 때문에 1층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으로 가곤 했다.
“차 안 갖고 왔어요.”
“네? 차 없으면 집에 가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누가 이중 주차를 해 놓는 바람에 아침에 차를 못 뺐거든요.”
“그럼, 택시 타고 가세요?”
진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걸어가도 될 거 같아요.”
“…설마, 집까지요?”
진우가 사는 동네를 알고 있는 김유민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뇨, 그건 아니고 당분간 친구 집에서 지내기로 해서… 여기서 가까운 편이거든요.”
김유민에게 사준의 집에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진우는 친구라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 전에 사준이 자기 누나에게 자신을 친구라고 말했을 땐 기막혀했으면서, 막상 자신도 이런 상황에 부닥치고 보니 친구라는 표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친구 집이요?”
“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시죠?”
김유민이 호기심과 염려를 담아 물었다. 진우는 스토커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잠깐 고민했다. 다 큰 성인이 친구네 집에서 같이 지낸다는 건 핑계나 이유가 필요했다.
“서재 공사 좀 하느라고요. 당분간만 친구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안 불편하세요? 호텔에서 지내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김유민은 당장이라도 호텔을 예약할 기세로 물었다. 비서가 이렇게 챙겨줘도 부담스러운데 같은 변호사가 이렇게 나오니 살짝 부담스러웠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거리가 가까워서 괜찮더라고요.”
“그러시구나….”
김유민은 그다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지만 진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스토커가 붙어서 섹스파트너의 집에 신세 지기로 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 * *
진우는 최종 검수가 끝난 보도자료를 첨부한 뒤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보내기]를 누르면 끝나는 일인데 어쩐지 배신을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찜찜했다.
처음부터 한배에 오른 적이 없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눈 딱 감고 장태준한테 김현이가 보도자료를 뿌릴 거라고 말해줄까? 아니다, 그 사실을 알면 태준은 그에 맞춰서 방송 준비를 할 거다.
진우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모니터를 쏘아봤다. 변호하기로 한 이상 담당 클라이언트한테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변호사라는 게 겉으로는 으리으리해 보이지만 실상은 서비스직이나 마찬가지였다. 평판이 나빠지면 일이 줄고, 그럼 커리어에 영향을 미칠 게 당연했다.
진우는 자신을 망설이게 하는 이사준을 떠올렸다가 이어서 김현이와 그녀의 스폰서를 생각했다. 그 스폰서는 한 기업의 오너로, 변호사한테 무척 좋은 고객이었다. 그건 바꿔 말하면 죄가 많은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섹스파트너이자 한시적 동거 상대 때문에 놓치기에는 아까운 고객.
진우는 턱을 매만지다가 마우스로 [보내기]를 꾹 눌렀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어 김현이 연락처를 찾았다.
통화 표시를 누르고 귀에 대자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됐다.
“양진우입니다.”
― 네, 변호사님.
김현이는 파티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맥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회사에서 얘기 들으셨죠?”
― 네.
“보도 자체는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래도 일단 김현이 씨 입장을 말할 수 있는 자리는 한번 마련해 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 저보고 인터뷰라도 하라는 건가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어쨌든 〈스쿠프〉는 일반 가십지가 아니라 뉴스니까요.”
짧은 침묵이 지난 뒤 김현이가 알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럼 편한 장소 정해서 연락 주세요. 오늘이면 좋겠는데, 될까요? 보도자료 뿌려지면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만날 거면 빨리 만나는 게 좋을 겁니다.”
진우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자 김현이는 장소를 문자로 보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김현이 변호는 변호대로 하면서 〈스쿠프〉 뒤통수를 안 때릴만한 방법은 많지 않았다.
진우가 고민 끝에 고른 방법은 이이제이. 마약 사건 대신 다른 더 큰 건에 대해 슬쩍 흘리면 태준이 알아서 눈치챌 것이다. 김현이 스폰서는 기자들이 달려들기 좋은 먹이라 태준이 놓칠 리 없었다. 어차피 이번 사건에서 진우가 변호할 사람은 김현이지, 그녀의 스폰서는 아니니까.
* * *
방송국 앞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린 진우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이 짙어져 썰렁해 보이는 거리를 무감하게 보는데 때마침 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진우는 그 말밖에 못 했다. 이미 보도자료를 확인해서 잔뜩 열이 받은 태준은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화를 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래서 직접 방송국에 가는 것이기도 했고.
‘가면 욕부터 바가지로 먹게 생겼네.’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에 진우는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가능하면 이사준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방송국 주차장에 도착한 진우는 룸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태준에게 전화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조금 전까지 통화를 했는데 지금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건 일부러 피한다는 의미였다. 더 전화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진우는 한숨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스쿠프〉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 진우는 혹시 이사준을 만나더라도 당황하거나, 어색해하거나, 조금이라도 미안한 기색을 비치지 않기 위해 담담한 얼굴을 연출했다. 그렇게 뻔뻔한 얼굴로 무장하고 〈스쿠프〉 사무실이 있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만난 건 하 기자였다. 태준에게 전화를 다 씹혔기 때문에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철판을 깔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자 하 기자는 언짢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지금 여길 와요?”
그 뾰족한 말투에서 진우는 이미 장태준 팀원들이 보도자료에 대해 안다고 확신했다. 다시 말해 이사준도 그걸 알 거라는 말이었다. 누가 기자들 아니랄까 봐 빠르기도 하다. 진우는 한숨을 삼키고 싱긋 웃었다.
“왜요? 나 원래 자주 왔어요.”
“지금 저 안에 양 변호사님 환영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하 기자가 사무실을 가리키며 아주 당연한 말을 했다. 진우는 사무실에 들어가는 대신 하 기자를 미끼로 태준을 불러낼 계획을 세웠다. 장태준이 전화도 안 받는 데다가 사무실 들어가 봐야 다들 도끼눈을 뜨고 볼 게 뻔했다. 욕먹는 걸 즐기는 취미는 없으니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해야 했다.
“피차 바쁘니까 오랜 시간 뺏지는 않을게요, 지금부터 10분.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잠깐만 얘기 좀 해요.”
능청을 떨자 하 기자가 딱딱한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제가 양 변호사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바쁘거든요. 누구 때문에 방송 엎고 새로 가야 할 판이라.”
바쁘다고 튕기는 하 기자를 진우는 다시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진짜 10분만 얘기해요, 나는 전에 하 기자님이 부탁해서 구치소까지 같이 갔는데 10분을 못 내줘요? 그러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치사한 협박에 하 기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지 그는 싫은 얼굴을 한 채로 진우를 따라나섰다.
하 기자와 카페에 마주 앉은 진우는 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1층 카페, 하 기자랑 있음, 빨리 와]
문자를 보낸 뒤 뾰족하게 날이 선 하 기자를 붙잡고 궤변을 늘어놓길 또 몇 분, 태준이 엄청나게 화가 난 얼굴로 나타났다. 친구만 아니었으면 진짜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하건희, 민철이가 너 찾아, 당장 내려가.”
태준은 하 기자한테 말하고는 진우를 쏘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우는 모르는 척하며 하 기자한테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넸다.
“적당히 해.”
하 기자가 떠난 뒤 둘만 남게 되자 태준이 짜증을 섞어 말했다.
“뭘 적당히 해? 어차피 내가 사무실 갔어도 안 만나줬을 거잖아.”
“단순히 김현이 때문에 양진우 네가 여길 왔다고?”
“나야 고객만족도가 중요하니까.”
“그런 실없는 소리 할 거면 전화로도 충분했어.”
전화는 받지도 않은 주제에 말은 잘하지.
진우는 태준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어설프게 숨기는 게 통할 사람이 아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정공법이 낫다.
“합의하자.”
“무슨 합의?”
“이번에 꼭 연예인까지 싸잡아서 보도할 필요 없잖아.”
“…너 진짜 김현이 변호 때문에 이러는 거야?”
“김현이 변호 때문이기도 하지, 워낙 마당발이셔서 얽혀 있는 데가 많네.”
슬쩍 말을 흘리자 태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사준한테 뭘 들은 거겠지.”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기습 공격을 당한 것 같았다. 여기서 이사준 얘기를 왜 해? 설마 이사준이 뭐라고 해서 여길 온 거라고 여기는 건가? 진우는 딴청을 부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합의할 거야? 말 거야?”
억지로 말을 돌리자 태준이 얼굴을 확 구겼다.
“합의는 무슨 합의? 보도 내용 가지고 합의하자는 게 지금 말이 돼? 네가 나한테 수억 줄 것도 아니면서?”
“수억 주면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말꼬리 잡지 마. 너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피곤해. 혈압까지 올라.”
“잘됐네, 너 저혈압 좀 있었잖아.”
시답잖은 말싸움을 하던 진우가 그만 결론을 내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왜.”
“우리 고객님이 좀 보고 싶어 해서.”
태준의 얼굴이 짜증으로 구겨졌다.
“너 크로스 체크하는 거 좋아하잖아.”
진우가 명료하게 말하자 결국 태준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재 기회를 준다면 거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 * *
진우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태준을 힐끔 쳐다봤다. 호텔에서 김현이를 만나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뒤, 태준은 내내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딴생각에 빠진 것처럼 한마디도 안 하던 태준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진우에게 말을 던졌다.
“뭘.”
“너 이사준이랑 진짜 뭐야?”
“뭐가 뭐야?”
진우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지만 태준의 눈을 완전히 속일 자신은 없었다.
“너는 도대체 왜 전부터 내가 이 기자님이랑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냥 태연하게 넘겼어야 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을 증명하듯 진우가 발끈하고 말았다. 태준은 정말 그걸 모르냐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이사준 집 정반대잖아.”
가볍게 흘러나온 말에 진우는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방향이 같으니 차에 태워 달라는 게 말이 돼?”
진우는 하 기자와 넷이 처음 만났던 날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거라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오리발을 내밀 수 없는 확실한 증거에 진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진우의 분위기를 읽은 태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데 진짜 적당히 해.”
태준은 경고와 조언 그 중간쯤 되는 말을 담담하게 뱉었다. 아까 적당히 하라고 했던 말은 하 기자한테 쉰 소리 하지 말라는 것뿐아니라, 이사준과 거리를 지키라는 것도 포함됐던 모양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진우는 최선을 다해 오리발을 내밀었다.
“양진우.”
“다 왔어, 내려. 너 바쁘잖아.”
태준이 뭔가 더 말하기 전에 진우가 잽싸게 말했다. 태준은 눈앞에 있는 방송국 건물을 보고는 안전띠를 풀었다.
“맞다, 자꾸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데, 넌 하 기자랑 연애 잘 돼가?”
차에서 내리는 태준의 뒤통수에 대고 진우가 물었다.
“그걸 내가 왜 말해?”
“내가 아까 짜증 나서 몇 마디 했거든.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하 기자랑 알아서 잘 풀어.”
“양진우.”
“그러니까 내 일 걱정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라고.”
진우는 태준이 더 말하기 전에 일부러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지 않으면 온갖 얘기를 다 해 버릴 것 같았다.
* * *
금요일 밤, 사무실에서 〈스쿠프〉의 특집 방송을 보던 진우는 혀를 내둘렀다. 장태준이야 워낙 일에 진심이니 이번 일도 그냥 가볍게 넘기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방송 내용을 보아하니 다음 주까지 이어질 것 같았고, 그러면 이사준은 계속 바쁠 것이다.
김현이는 이번 마약 사건으로 이미지에 치명적인 스크래치를 입었다. 그래도 감옥에는 안 갈 것이다. 초범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집행유예에 사회봉사나 받겠지. 보석으로 나오는 방법도 있고. 그래도 이미지에는 타격이 커서 한동안 매스컴 타기는 힘들 것이다.
진우는 김현이가 받을 사회봉사 시간을 짐작하면서 이사준을 떠올렸다. 사준은 여전히 새벽에 들어와서 소파에서 자고 나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객이 침대를 쓰고 주인이 소파를 쓴다니, 완전히 주객전도다.
아마 오늘도 늦게 올 거다. 그러고 보면 언제까지 스토커 핑계로 이사준 집에 눌러있을 수도 없을 건데…. 진우는 입천장을 혀끝으로 갉작였다. 어쩌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기 전에 끝내라는 계시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신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더 가까워지면 곤란해지는 건 양진우지, 이사준이 아닐 테니까.
* * *
어두운 편집실에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던 사준은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바빠서 연락을 못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깔끔하게 연락이 없으니 야속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러고 보면 양진우가 먼저 연락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일이나 스토커같이 명확한 이유가 있을 때뿐이었다.
만약 스토커라는 거지 같은 이유가 없었다면 이 기회를 틈타 서로 바쁜 거 같으니 섹스파트너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양진우라면 그랬을 거다. 사준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의자에 등을 푹 기댄 채 진우의 번호를 눌렀다.
― 여, 보세요…?
짧은 신호 뒤에 넘어온 목소리는 피곤한 듯했고, 졸린 것 같기도 했다.
“어디예요?”
― 집이요….
“내가 자는 거 깨운 거예요?”
사준은 머릿속으로 진우가 혼자 침대에 누워 있을 모습을 떠올리고는 혀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 깊게 잠든 거 아니었어요.
“안 깨웠다는 말은 아니네요?”
― …근데 왜요?
“그냥요.”
― 오늘도 늦어요?
사준은 당장 머릿속에서 할 일을 떠올렸다. 편집도 마무리해야 했고 내일 오전에는 국회에 들르고 오후에는 태준이 별도로 지시한 건도 확인해야 했다. 얼추 따져봐도 집에서 느긋하게 잘 시간이 없다. 옷만 갈아입으러 겨우 들어갈 게 뻔했다. 최소한 이번 주 방송까지는 그렇게 빡빡할 것이었다.
“늦는 정도가 아니라, 외박이죠.”
― 그렇겠네요.
진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에 사준은 고개를 숙여 다리 사이를 쳐다봤다. 한 것도 없는데,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다리 사이에 피가 몰렸다. 피로가 쌓인 와중에 들린 양진우의 웃음은 자극이었다.
“이게 다 양 변호사님이 보도자료 돌려서 그런 거잖아요.”
사준은 진우를 은근히 탓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진우는 할 말을 잃고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아무 말도 안 하기에 김현이 보도자료를 작성한 게 자신인지 이사준은 모르는 걸까 했는데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말을 안 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도 은근히 일 얘기는 피하던데, 사적인 시간에는 일 얘기를 안 하고 싶다는 걸까.
진우는 빈 옆자리에 팔을 뻗어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자신을 소파에서 재우거나 이불을 깔고 따로 자게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사준은 처음부터 침대에 같이 눕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도 그랬고, 자신이 이사준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음에도 남 일처럼 굴었다. 아마 그 모든 것들은 남자를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이사준의 자신감 아닐까?
“양 변호사님?”
갑자기 말이 없어진 진우를 사준이 불렀다.
― 아, 듣고 있어요.
“끊은 줄 알았어요.”
― 아뇨, 근데 왜 전화한 거예요? 설마 다 지난 보도자료 건을 이제 와서 탓하려는 건 아닐 거고.
사준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왜 전화했을까…. 자신도 뚜렷한 이유를 모르겠다. 핸드폰을 보다가 ‘어떻게 먼저 연락 한 통이 없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누른 통화 버튼이었다. 아무런 기록이 없는 핸드폰을 본 순간 양진우의 무심함을 느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섹스파트너에서 잘릴까 봐? 그래서… 서운했나? 아니면 스트레스 해소를 빙자한 욕구 해소를 원한 걸까? 사준은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고는 또 한 번 헛웃음을 지었다. 문득 떠올라 전화를 걸었는데 이렇게 몸이 반응하는 건 또 뭔지….
“양 변호사님.”
― 네.
“지금 침대예요?”
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편집실 문을 잠갔다. 늦은 시간이라 어차피 아무도 올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창문으로 복도를 힐끔 내다보고는 블라인드까지 내리자 어두운 편집실이 한층 더 어두워지고, 좁은 편집실이 유독 좁게 느껴졌다.
― 자려고 했으니까 침대죠.
은근한 긴장감이 수화기에서 넘어와 진우는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폰섹할래요?”
아니나 다를까. 사준은 폭탄 같은 말을 툭 던져 놓았다. 오다 주웠다도 아니고 무슨 말을 이렇게 가볍게 하는지. 진우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네?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요?”
사준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다리를 벌렸다.
“양 변호사님 목소리 들으니까 섰어.”
― 이 기자님 변태예요?
“변태 아닌 남자가 어딨다고. 섹스할 때는 다 변태 같아지고 그런 거지. 양 변호사님도 그때 빠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게 변태 같았어요.”
늘 한마디도 안 지는 사준답게 이번에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 …이 기자님은 지금 어딘데요?
“할 마음은 있나 보네요?”
진우는 비어 있는 침대를 다시 한번 힐끔 봤다. 할 마음이 있다기보다는, 이렇게 나오면 없던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
― 아닌데요.
진우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으며 예의상 한번 튕겼다.
“왜요? 바빠서 한동안 못 했는데, 안 쌓였어요?”
핸드폰을 고쳐 쥔 진우는 엷은 한숨을 뱉었다. 쌓이긴 쌓였다. 성욕이 아니라 이사준이 없음에 대한 허전함이 쌓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사준은 성욕만 쌓였나 보다. 안 한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다른 사람이랑 하려나?
“혹시 다른 사람이랑 했어요?”
― 이 기자님만 바빴던 거 아니거든요?
진우는 같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삐딱하게 말했다.
“나도 아무하고도 안 했어요.”
곧이어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것 같은 말이 들려와 진우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럴 생각으로 전화한 건 아닌데, 양 변호사님 목소리 들으니까 섰네요?”
말끝에 붙은 너털웃음에 진우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모니터 불빛만 가득 찬 어두운 편집실에서 이사준이 어떤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반쯤 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에 사준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엷은 한숨을 뱉었다. 양진우가 이전에 사귀었던 남자들한테도 이런 식으로 순종적으로 굴었을 거라 생각하자 속이 답답해졌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지간한 요구는 다 들어줬을 거라는 게 신경을 갉작였다. 사준은 고여 드는 불쾌감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털었다.
― 이 기자님?
“…양 변호사님 거 만져봐요. 내가 만지던 거 떠올리면서.”
어렵지 않은 일을 지시하는 투였으나 진우에게는 충분히 어려웠다. 자위라는 은밀한 행위를 전화하면서 하게 될 줄이야….
“핸드폰 들고 있으면 힘드니까 스피커로 돌려요.”
* * *
진우는 사준의 말을 홀린 것처럼 따랐다.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전환해서 내려놓고 바지와 속옷을 벗은 채 무릎을 세워 다리를 벌렸다. 반쯤 일어선 살덩이를 부드럽게 붙잡은 채 위아래로 흔들자 손안에 들어온 성기가 불끈거렸다. 발기한 성기에서 쿠퍼액이 흘러내렸고 금방 손바닥이 젖어 들었다. 달아오른 성기가 마찰하는 손바닥에서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만들어졌다. 진우는 한 손으로 성기를 흔들면서 다른 손으로는 서랍을 열어 젤을 꺼냈다.
― 귀두 끝에 살살 문지르면서, 기둥까지 쭉쭉 쓸고 있죠? 야한 소리 엄청 크게 들려요.
이사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와 진우는 발가락을 꽉 오므려 시트를 붙잡았다. 보는 것도 아니면서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몸이 덜덜 떨렸다.
― 양진우 씨는 쿠퍼액 많이 흘리니까, 금방 젖은 소리가 나요.
“평균이거든요…?”
― 나보다 많이 흘리잖아요.
사준이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 구멍은 괜찮아요?
젤을 짜고 있던 진우는 순간적으로 정말 그가 어딘가에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흠칫했다.
“방에 카메라라도 달았어요?”
― 녹화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인터넷에라도 올릴까요? ‘엘리트 변호사의 자위 쇼’ 이런 제목으로?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긴장감과 함께 기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 걱정 마요, 안 할 거니까. 손가락이나 넣어 볼래요?
진우는 손가락에 젤을 묻혀 입구를 더듬었다.
― 양진우 씨.
“하아… 왜요.”
손가락을 찔러 넣으면서 잇새로 터져 나오는 숨을 진우는 참지 못했다.
― 소리 더 잘 듣고 싶어. 핸드폰 다리 사이에 놔요.
몹시도 변태 같은 요구였다. 핸드폰을 다리 사이에 두고 소리가 훤히 들리도록 움직이라니.
“당신, 진짜….”
적당히 하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사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빨리요, 아니면 영상 통화할래요?
지금도 충분히 수치스러운데 영상을 보면 더 민망할 것 같았다. 진우는 엷은 한숨과 함께 사준이 말한 것처럼 다리 사이로 핸드폰을 옮겼다.
찌걱, 질척. 구멍이 벌어지는 소리와 젤이 흐르는 소리가 고막을 타고 넘어오자 사준은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그저 소리만 들리는데, 아니 소리뿐이어서 그런지 진우의 음란한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준은 브리프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움켜쥔 성기를 거칠게 흔들며 진우의 안쪽 속살을 떠올렸다. 뜨겁게 조이면서 뿌리부터 기둥까지 꽉꽉 물어대는, 부드러운 점막…. 그 뜨거운 감각을 떠올리자 요도 끝에서 왈칵, 쿠퍼액이 쏟아졌다. 미끌거리는 성기를 쥐고 정신없이 흔들자 사정감이 차올랐다.
“아, 하아, 너무 좁아….”
사준은 진우의 안에 처음 진입할 때의 감각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턱에 단단히 힘을 줬다. 진우는 제 안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을 사준의 성기라고 상상하며 쉽게 느끼는 부분만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안쪽을 꾹꾹 누르면서 성기를 쥐고 흔들자 목덜미가 화끈거리고 귀까지 열이 올랐다.
― 하아, 으응, 좋아, 하읏… 거기, 좋아… 더 세게….
사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진짜로 몸을 섞을 때는 그런 말 안 하면서,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길래 이런 목소리를 내는 거야? 진우의 신음에 홀린 사준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성기를 더 빠르게 흔들었다. 100m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좁고 쫀득한 내벽 속에 성기를 콱 처박고 허리를 마구 흔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에 열이 뭉치면서 단단하게 땅겨왔다.
“후으, 하아….”
진우는 사준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이 핑핑 돌면서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싸, 겠어, 흣….”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나도, 양진우 씨가 너무 조여서, 하아, 미치겠, 윽.
“하으읏…!”
쾌감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한 짐승 같은 신음에 진우는 허리를 크게 휘며 사정하고 말았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을 정리하며 눈을 천천히 뜨자 텅 빈 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혼자 뭐한 건가 싶으면서 민망함이 몰려왔다. 한껏 쑤셔대던 손가락을 빼내자 젤이 주르륵 딸려 나왔다.
“어, 아… 이 기자님?”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준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 하, 씨발. 괜히 했어.
“뭐요?”
― 쌌는데도 좆이 죽질 않아요. 진짜로 쑤시고 싶어서.
진우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가슴도 빨고 싶고….
“됐거든요.”
― 빨아 주면 좋아하면서, 됐긴 뭐가 됐어요?
“아, 시끄러워요. 일이나 해요.”
진우는 홧홧해진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사준에게 뚱하게 말을 던졌다.
― …그럼, 나중에 봐요.
진우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뜨겁게 달아올라서 성기를 문지르던 순간보다 사준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더 설렜다.
그날 새벽 늦게 들어온 사준은 잠든 진우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잠결에 그 기척을 느낀 진우가 실눈을 떴는데, 그걸 못 본 사준은 진우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방에서 나갔다.
달칵, 방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진우는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발가락을 꽉 오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잘 자요.’
무척이나 다정한 키스였다.
* * *
[이사준_스쿠프: 양 변호사님도 올래요?]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글자를 본 진우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스쿠프〉는 지난 이 주 동안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시작해 연예인 마약 사건에 이르는 특종을 보도했다. 그리고 오늘은 거하게 회식하는 날이었다.
진우는 사준의 문자에 어떻게 답을 할지 고민했다.
평소 같이 자문을 했다면 망설임 없이 갔겠지만, 이번엔 김현이 건으로 서로 날을 세웠기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몇 번 두드리고 이마를 한 번 문질렀다가 콧잔등을 긁기를 몇 번.
망설이던 진우는 가겠다는 답을 보냈다.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니 다른 팀원들 얼굴도 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변명을 자신에게 중얼거리면서.
* * *
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다.
“오, 변호사님 왔네?”
코가 빨개진 임혁이 제일 먼저 아는척했다.
“왔어요?”
다음은 이사준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인사했고, 눈 밑이 퀭한 백 작가가 젓가락을 휘둘렀다.
“배신자다, 배신자.”
“배신자라뇨, 섭섭하게 말씀하시네.”
“그럼 양다리?”
“양다리는 또 뭐예요.”
“우리랑 김현이한테 다리 걸쳤으니까 양다리죠. 양 변호사님 연애도 혹시 막 몇 다리씩 걸치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웃으면서 대꾸하자 백 작가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로 왜 그걸 못 해요?”
“어휴, 작가님 또 이상한 연애론 펼친다.”
그만하라는 뉘앙스로 김 작가가 말렸다. 다른 얘기로 빠진 팀원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진우는 태준의 옆에 있는 하 기자한테 술을 한 잔 권했다. 귀찮게 군것에 대한 나름대로 사과의 의미였는데, 하 기자가 따라준 술을 마시더니 뚱한 얼굴로 술잔을 건넸다.
“양 변호사님도 드세요.”
그 뒤로 무슨 오기가 생긴 것인지 하 기자는 계속 진우에게 술을 권했다. 주는 술을 마시고 받은 만큼 돌려주길 몇 번, 진우보다 술이 약한 하 기자가 취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태준은 골칫덩어리를 보는 시선으로 하 기자를 한 번 보고 진우를 노려봤다.
“내가 줬냐? 왜 그렇게 날 째려봐?”
팀원들이 여전히 다른 얘기에 정신 팔려 있는 걸 보고 진우가 태준에게 작게 투덜거렸다.
“네가 계속 받아주니까 그런 거잖아.”
“잘됐지, 뭐. 데려가면 되잖아.”
“네가 그런 거까지 신경 안 써도 돼.”
진우는 얄밉게 말하는 태준을 흘겨보고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이다가 사준과 눈이 마주쳤다.
“한 잔 마셔요. 이번에 고생하셨는데.”
술잔을 비우자 사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묘하게 뼈가 느껴지는 말에 진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사준은 하 기자와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진우의 잔에 연신 술을 따랐다.
어쩐지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술을 마시다가, 화제가 김현이로 흘러 일 얘기를 잠깐 하다가, 끝으로 이 팀이 술 마시면 늘 하는 장태준 돌려 까기를 들으면서 진우는 한참을 웃었다.
* * *
사준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몇 번이나 헛손질하다가 간신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집어던지는 것처럼 신발을 벗더니 비척비척 걸어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진우는 거실에 서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욕실 문을 멍하니 쳐다봤다. 사준이 술에 취한 건 확실했다. 그건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중간에 누군가가 사다 준 숙취해소제를 마셨지만 아직도 속이 진정되질 않았다.
근데 이사준은 술에 취한 것 이상으로 기분도 안 좋아 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이제 와서 김현이 보도자료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는 것도 너무 웃긴 거 아닌가.
진우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소파에 앉았다. 목을 뒤로 젖히자 세상이 빙글 돌며 거꾸로 보였다. 남의 팀 회식에 끼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속이 가라앉을 리 없었다.
“씻어요.”
깜박 잠이 들었던 건지 사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몽롱한 정신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준이 진우를 스쳐 침실로 들어갔다.
씻었으면 술이 좀 깼을 텐데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사준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진우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술 취한 사람 붙잡고 이야기를 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고로 대화란 말이 통할 상대랑 하는 것이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으면서 진우는 사준의 기분이 언짢은 이유를 떠올려봤다. 회식 장소에 오라고 해서 갔고, 처음에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술을 연속으로 따라 줬을 때부터 기분이 상했던 거 같은데 도대체 언제, 어떤 포인트에서 기분이 상한 것인지 감이 안 왔다.
달칵, 침실 문을 연 진우는 쉽게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명백하다 싶을 정도로 이사준의 기분이 안 좋은 게 확실한 마당에 옆에 누워도 되나 싶어 망설여졌다. 이래서 남의집살이를 오래 하면 안 되는 건데….
이마에 팔을 얹고 누워 있던 사준은 상체를 반쯤 일으켜 진우를 바라봤다.
“거기서 뭐 해요?”
“술 많이 마셨으니까 각자 자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이에요.”
“그 상태로 소파에서 잤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됐으니까 이리 와요.”
사준은 침대 옆 빈 공간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불러들이는 것에 안심하며 진우가 침대 위로 몸을 올리자 사준이 자세를 바꿔 진우를 바라봤다. 그냥 잘 줄 알았는데 얼굴이 바투 가까워지자 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양 변호사님….”
“왜요?”
“나 많이 취했으니까.”
“네?”
“내일 되면 기억 못 할 거 같거든요.”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전에는 술 취해도 잘 기억한다고 했으면서 이건 또 무슨 거짓말인지…. 그리고 지금 이사준의 눈동자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술이 다 깬 것처럼 명료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갑작스러운 추궁에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마음속 저울이 기울고 있는 걸 말하는 건가? 딱히 티를 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진우는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했다.
“뭘 솔직히 말해요?”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주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꼼꼼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진우는 눈을 피했다. 그렇게 사준의 인중만 뚫어져라 보는데, 한참 미동 없던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리 팀장 좋아하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놀라 진우가 눈동자를 들어 올려 사준을 바라봤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 사준의 얼굴이 무척 진지했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지.
진우는 너무 황당해서 말을 못 했다. 남자라면 다 좋아하는 줄 아느냐는 불만도, 장태준은 그냥 친구라는 흔한 말도 안 나왔다.
대답 못 하는 진우를 본 사준은 피식 웃었다.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뭐, 상관없죠.”라고 혼잣말까지 했다.
“아니, 잠깐 이 기자님 지금 무슨 말을….”
“태준, 사준, 이름도 비슷하니까. 더 좋지 않아요?”
멋대로 진행 시키는 얘기에 진우는 이제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장태준 생각하면서 이 기자님한테 안기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무슨, 신파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봤기에 그런 청승을 부린다고 생각한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우의 날카로운 반응에 사준은 눈을 깜박였다. 느릿느릿, 눈꺼풀이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여러 번 반복하는 게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이 기자님…?”
사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졸음과 함께 밀려오는 술기운을 견디려는 것처럼 입술을 꾹 한 번 눌렀다가 떼고 입을 열었다.
“맞잖아요, 아니에요?”
“아닌데요.”
진우는 고민할 것도 없고 망설일 것도 없는 기세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뭘 보고 그렇게 오해했는지 모르겠네.”
“그냥, 보면, 그렇게 보이던데….”
뚱한 목소리에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 기자한테 관심 있다고 했을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처럼 굴더니,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가? 속으로는 양진우가 장태준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의문이 겹쳐지자 마음속에 합리적인 의심이 피어올랐다. 진우는 손바닥에 잡히는 시트를 되는대로 세게 움켜쥐었다. 어떤 방식이든 그게 누구를 향한 것이든 사준의 행동이 말해주는 감정은 하나였다.
질투.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 언저리가 간질간질해지면서 사준의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좀 귀여워 보였다.
“진짜 아니거든요.”
더불어 이런 식으로 변명해야 하는 상황이, 오해를 풀어주려고 하는 자신이 싫지 않았다.
진우는 사준의 양 뺨을 감싼 채 부드럽게 끌어당겨 입술에 키스했다.
“장태준 오래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 좋아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사준은 잠시 말없이 진우를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꿔 천장을 보며 드러누웠다.
“후우….”
사준의 입에서 묵은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진우가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어서 밑도 끝도 없이 밀어붙인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비단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아니더라도 같이 있으면서 지켜봤기에 안다. 양진우는 이런 일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할 위인이 못 된다.
사준은 팔을 이마에 올린 채 얼굴을 가리고 옅은 숨을 여러 번 뱉었다. 분명 양진우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다고,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잘 된 거라고 여겼었는데 장 팀장을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자 짜증이 치밀었다. 회식하는 중간중간 둘이서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속닥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다. 심술이 끓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권했다.
집에 왔을 때는 같이 자지 않을 마음으로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우습게도 침구에 배어 있는 양진우 체취에 가슴 한쪽이 술렁였다. 도대체 이걸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알았지만 모르고 싶었다.
사준은 눈동자를 굴려 진우를 힐긋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이 진득한 시선을 보내오는 것을 보니 무슨 말이든 해주길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많이, 취했어요….”
“그 말 아까도 했잖아요.”
비겁한 변명은 그대로 튕겨 나왔다. 머쓱했지만 사준은 뻔뻔하게 굴었다.
“응,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자요.”
사준은 진우를 확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어깨 부근에 닿은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 기자님?”
사준은 더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 진우를 한층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답답한 자세에 진우가 몸을 꼼지락거렸지만 그는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빠져나가길 포기한 진우가 몸에 힘을 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리 위로 고른 숨소리가 떨어졌다.
왜 그런 걸 물어본 건지 묻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진우는 피식 웃음과 한숨을 섞어 흘렸다. 그리고는 사준이 일 때문에 잠도 못 잤고 술도 많이 마셨으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아량을 베풀며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빠진 꿀잠이었다.
* * *
“아니, 오늘 쉴 건데. 하나 터트렸으니까.”
아침에 눈을 뜬 진우의 귀에 제일 먼저 들린 건 말소리였다. 침실 문을 열어 놓은 탓에 사준의 목소리가 방 안까지 막힘없이 들렸다. 말투로 봤을 때 통화 상대가 태준은 아닌 거 같았다. 잠에서 덜 깬 진우가 막연하게 통화 상대를 추측하고 있는 찰나, 사준이 다정한 말투로 대꾸했다.
“누나네 집?”
전에도 느꼈지만 사준은 정말 누나와 교류가 많은 듯했다. 진우는 느릿느릿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통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소리를 죽인 채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분명 큰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것인지 핸드폰을 쥐고 있던 사준이 눈으로 진우를 쫓았다.
“그래, 그럼 내가 가서 챙겨줄게, 가기 전에 창고에서 캠핑 장비 좀 꺼내줘.”
진우는 생수로 목을 축이면서 사준의 대화에 귀를 세웠다. 사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아는 단어였지만 좀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단어였다.
“어, 알겠어. 이따 갈게.”
사준이 전화를 끊었을 때 진우가 몸을 돌렸다.
“어디 가요?”
외출하는 게 확실했기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 변호사님은요?”
“저요?”
“네, 양 변호사님은 오늘 약속 있어요?”
“아뇨,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럼 나랑 가요.”
진우는 조금 전 사준의 통화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챙겨준다고 했고 캠핑이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어딜 같이 가자는 걸까.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아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사준이 씩 웃으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 전에 해장부터 할까요? 어제 너무 마셨어.”
제대로 말도 안 해주고 욕실로 들어가 버린 사준을 보며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일어나면 어젯밤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한번 해 볼까 싶었는데 그는 그럴 틈을 안 줬다.
“어디로 가는 건지 계속 말 안 해요?”
집 근처 해장국 집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난 뒤에 진우가 물었다.
“누나네요.”
조수석에 앉아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다 입력하며 사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걱정하지 말아요, 누나네 식구들은 내일까지 가족 여행 가서 밤이나 돼야 올 거니까.”
“근데 내가 거길 왜 가요?”
진우는 정말 말문이 턱턱 막혔다. 팔자에도 없는 더부살이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남의 가족 집에까지 가야 하는 상황을 머리가 쫓아갈 수가 없었다.
“누나네 집에 개가 있거든요.”
“아….”
통화할 때 챙겨준다는 게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여행 갈 때 데리고 갈 수 없으니까 저한테 좀 봐 달라고 한 거예요. 원래 평소에는 부모님이 봐주시는데 이번에는….”
사준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지만, 진우의 귀에는 하나도 안 들어왔다.
“근데 날 왜 데려가요?”
진우는 핸들을 꽉 붙잡은 채 같은 질문을 또 했다.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애도 아니고 혼자 집에 있다고 딱히 심심할 나이는 아니었다.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사준이 진우의 손을 톡 건드렸다.
“같이 가요.”
“운전할 사람 필요해서 그러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사준의 입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타인과 어떤 식으로 교류를 해 왔기에 늘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하는 걸까.
“운전은 나도 할 줄 알아요. 잘 안 쓰지만 차도 있고.”
“근데 왜….”
“그냥요, 주말이고 바쁜 건도 끝났고, 그래서 같이 놀고 싶어서요. 그 이유는 안 돼요?”
사준은 준비해 놓은 것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그 모습이 TV 뉴스에 나오는 기자같이 진지해 보였다.
“혹시 동물 털 알레르기 있어요?”
“아뇨.”
“그럼 같이 가요.”
다시 한번 사준이 말하자 진우는 잠자코 핸들을 움직였다. 사실 같이 놀자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혼자 집에 갈 마음이 안 들었다.
차가 시가지에 들어섰을 때, 이런 식으로 이사준의 꼬임에 넘어갔던 일이 이미 여러 번이라는 게 진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기자님.”
“왜요?”
“전에 취재했던 성인용품, 그거 기사 안 썼죠?”
“아, 그거 까였어요.”
사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며 살살 웃었다.
“까일 거 알고 있던 거 아니에요?”
“까일 수도 있겠다 했죠, 취재하고 방송 안 나가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요.”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취재한 모든 내용이 보도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라 거짓말하지 말라며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양 변호사님이 애써 주셨는데 아쉽네요.”
“제가 무슨 애를 썼다고 그래요?”
“애썼죠, 아니에요? 아니면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갈래요?”
“됐거든요.”
“그래요, 대신 오늘 재밌게 해드릴게요.”
누나네 집에 개를 돌보러 가는 건데 뭐로 재밌게 해 준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우는 신호에 걸렸을 때 창밖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본격적인 한파가 몰아치기 전에 주말을 즐기러 나온 것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코트를 입고 각자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던 진우는 사준을 힐끔 봤다.
느른하게 풀어진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차창으로 쏟아진 햇살에 진한 검은색이 반짝거렸다. 모처럼 찾아온 한가로운 주말을 같이 보내는 상대가 사준이라는 게 나쁘지 않았다. 진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무작정 들뜨는 기분을 누르기 위해 액셀을 꾹 밟았다.
* * *
이사준의 누나네 집은 서울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고,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고처럼 차에서 내리자 컹컹,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개 두 마리가 뛰어왔다. 하나는 햇빛에 반사되면 밝은 노란색 털을 가진 개, 하나는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개였다.
“조용.”
개들은 이사준을 알아보는 것인지 아니면 훈련이 잘된 것인지 사준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지더니, 진우의 다리 주변을 맴돌며 냄새를 맡았다.
“개 안 무서워한다고 했죠? 인사해요. 이쪽이 써니, 이쪽이 무니.”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개를 가리키며 무니라고 불러서 진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그 무늬 아니고 영어 문에서 무니에요.”
“그럼, 써니는 썬에서 따온 거예요?”
“정답, 써니는 진도고 무니는 풍산이에요.”
닮은 것처럼 보였는데 달랐다. 무니가 써니보다 좀 더 컸다. 진우는 몸을 낮춰 두 마리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마리 개는 털이 깨끗하고 코가 촉촉한 게, 관리를 잘 받은 티가 났다.
“순하네요.”
“순하게 굴어야 간식 주는 걸 아니까요.”
“매번 누나네 식구들이 집 비울 때마다 이렇게 봐줘요?”
“일 있으면 못 하죠. 그리고 보통은 밥만 챙겨주는데, 오늘은 자고 갈까 해서요.”
사준이 마당 한쪽을 힐긋 가리켜서 진우는 사준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마당 한쪽에 통화할 때 말했던 캠핑 장비들이 낮지 않은 높이로 쌓여있었다.
“설마, 텐트에서요?”
아무리 영상 기온이라지만 그래도 엄연히 겨울인데 괜찮을까 싶었다. 패딩도 아니고 코트인데.
“안 얼어 죽어요.”
진우가 걱정하는 걸 단박에 알아차린 사준이 말했다.
“그런 걱정 안 했어요.”
“거짓말.”
놀리는 것처럼 키득거리는 사준을 진우가 쏘아봤다.
“멀리 갈 시간 안 되니까, 기분이라도 내자는 거죠.”
“이 기자님이랑 내가 기분 낼 사이는 아니지 않나.”
작게 중얼거린 것인데 어떻게 들은 것인지 사준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양 변호사님은 가만 보면 사람 서운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
“아니거든요? 사실을 말한 거예요, 사실을.”
“네네, 그러시겠죠.”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 어조로 대꾸한 사준은 가방을 열어 텐트와 폴대를 차례로 꺼냈다.
“텐트 칠 줄 알아요?”
“군대에서 쳐 본 게 마지막이에요.”
“그럼 대충하겠네요.”
“이 기자님은 이런 거 많이 해 봤어요?”
“양 변호사님은 캠핑이 취미인 애인은 안 만나 봤어요?”
대답 대신 툭 날아온 물음에 진우는 폴대를 연결하던 손을 멈추고 사준을 바라봤다. 악의를 가진 물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진우 역시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고 짜증을 낼 수 없었다.
“…없었어요.”
캠핑은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텐트를 치고 걷는 일부터 음식을 직접 해 먹는 것까지 생각하면 의외로 성가신 일이었다. 그리고 만났던 남자들은 그런 성가심을 즐겁게 여기면서 진우와 함께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텐트를 치자고 하면 호텔을 예약하자고 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자고 하면 식당에서 사 먹자고 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좋다고 해서 요리를 배웠지만 실상 몇 번 해 준 적도 없었다.
“전 좋아해요, 취업하기 전까지는 자주 했는데, 이 일 시작하고 나서는 여름 휴가 때나 가끔 하죠.”
사준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장태준이 휴가를 보내주긴 해요?”
자신이 알기로 장태준은 기자가 된 뒤 제대로 휴가를 간 적이 없다. 휴가라고 하면서 툭하면 잠입 취재나 해댔지.
“안 보내주려고 난리죠, 진짜.”
“그 성격에 뉴스 터질까 봐 불안해서 어디 휴가를 가겠어요.”
“정답, 혼자 그러는 것도 아니고 팀원들까지 닦달해대니까요.”
사준이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걸 따라 주는 팀원들도 대단하다고 봐요.”
사준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칭찬을 듣는 것이 어색한 것 같은 얼굴이어서 진우는 피식 웃었다.
“근데 진짜 여기서 자요?”
“왜요?”
“아무리 봐도 추울 거 같아서요.”
“아까는 아니라더니.”
진우는 계절을 생각하라는 얼굴로 사준을 바라봤다. 햇빛은 들지만 아무래도 노상 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그것도 집이라는 좋은 실내가 코앞에 있는 곳에서.
“막상 자면 안 추워요. 아니면 우리 누나네서 하고 싶어요?”
“뭐요?!”
진우가 큰 소리를 내자 아까부터 주변을 맴돌던 써니와 무니가 덩달아 ‘컹’하고 큰 소리로 짖었다.
“그것도 뭔가 배덕한 게 나쁘지 않네요. 양 변호사님 은근히 그런 상황이나 설정 좋아하는 거 같은데.”
사준은 이제 멋대로 진우의 취향까지 정해 버리고 있었다.
“아니거든요?!”
억울함을 담아 다시 한번 소리를 치자 이번에도 개 두 마리가 따라 짖었다.
“아니면 말고요.”
사준은 정말 어디서 개가 짖는구나 하는 태도를 고수했는데, 실제로 개가 짖고 있었기에 진우는 더 말하는 걸 포기했다. 불만을 느끼고 소리를 높이면 개들이 짖어대니 말을 마는 수밖에.
“양 변호사님, 솔직히 그런 판타지 있죠?”
“무슨 판타지요?”
진우가 미간을 좁힌 채 뚱하게 물었다.
“야외에서 한다거나?”
“그거 혹시 이 기자님 버킷리스트 아니에요?”
“무슨 그런 걸 버킷리스트씩이나.”
사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맞지, 뭐가 아니야, 여자들이 안 해줘서 나한테 하자고 하는 거 솔직히 다 티 나요.”
진우가 가소롭다는 듯 말하자 사준이 내내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는 진우를 바라봤다.
“또 그런 식으로 비교하네요.”
“이 기자님 태도를 생각하면 그런 말 못 할 거 같은데, 사람이 참 뻔뻔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양 변호사님 생각이 삐뚤어진 거예요.”
차양을 세우던 진우가 순간 움찔했다. 자신이 삐뚤어졌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만나는 상대가 문제였지. 근데 사실은 나한테 문제가 있던 걸까?
진우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려는데 사준의 말이 가로막았다.
“그리고 나이도 있는데, 설마 야외 섹스 경험 한 번이 없었겠어요?”
진우는 어이없는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우울할 틈을 주지 않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야외 섹스해 봤다는 말에 기막혀해야 할지.
“대단한 경력이시네요.”
사준은 입술을 삐죽이는 진우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양진우의 저런 점이 좋았다. 불쑥 질투가 솟아올라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점. 아마 양진우는 이사준이 과거에 뭘 했건, 미래에 뭘 하든 신경은 쓰여도 그 내색은 죽어도 않을 것이다.
이사준이 본 양진우는 전형적으로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센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할 말을 못 해서 결국에는 손해 보고야 만다. 차라리 이전 애인들한테도 솔직하게 조르거나 아쉬운 소리를 했다면 그들도 양진우를 그렇게 막 대하진 못했을 것이다. 막 대해도 말이 없으니 그래도 되는 줄 알았겠지. 이상하게 사람들은 말이 없으면 참는 게 아니라 괜찮은 거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답잖은 말장난이 오가길 몇 번, 형체를 가늠할 수 없던 텐트가 마당 한쪽에 세워졌다. 텐트 앞에 의자, 테이블까지 펼쳐 세팅하자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진우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근데 이 텐트 둘이 자기에 너무 큰 거 아니에요?”
“누나네는 가족 단위로 다니니까 작은 게 없어요.”
사준은 진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의자에 앉혔다. 해먹 같은 의자는 보기와 달리 편했다.
“배고프죠? 애들 밥부터 주고 우리도 밥 먹어요.”
“뭐 먹을 건데요?”
오는 길에 아무것도 안 사 왔기 때문에 메뉴 짐작이 안 됐다.
“이왕 차린 거니까 고기 굽죠.”
“따로 사 온 거 없잖아요.”
“앞마당 캠핑이 왜 좋겠어요, 없으면 안에 들어가서 갖고 나오면 되니까 좋은 거죠.”
자랑스럽게 말한 사준은 안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갖고 나왔다.
“그릴도 있는데, 그건 치우기 번거로우니까 이걸로 해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시작으로 프라이팬과 집게, 접시와 나무젓가락 같은 것들이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 걸 보며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의자에 앉아 써니와 무니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한 번 더 집에 들어갔다 나온 사준은 이번엔 채소와 고기를 갖고 나왔다.
“그거 그렇게 다 먹어도 되는 거예요?”
“설마 동생이 먹을 것 좀 먹었다고 누나가 뭐라고 하겠어요?”
전에 봤던 이사준과 누나 사이라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긴 했다. 사준이 개들한테 사료를 주는 동안 진우는 고기를 구울 준비를 했다. 적당한 두께의 목살을 달궈진 팬에 올리자 치익― 하며 맛있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사준이 즉석밥을 뜯고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맥주까지 준비하자 풍족한 한 상이 차려졌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까지 더해지자 분명 집 마당인데 어디 멀리 놀러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술 많이 마시지 말자고요.”
사준이 말하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어제 과음해서?”
“그렇게 많이 마시는 날은 드문데 진짜.”
“근데 그 팀은 원래 회식도 많이 하잖아요.”
“많이 하니까 폭음은 안 하죠. 다들 적당히 마시는데 가끔 그렇게 한 번씩 돌아요. 어제 백 작가님 봤죠? 아마 집에 가는 길에도 더 마셔서 지금까지도 누워 있을걸요.”
사준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이 기자님 정도면 숙취 없는 거죠.”
“숙취 없는 건 양 변호사님도 마찬가지지 않나.”
진우는 맥주 캔 탭을 열어 몇 모금 마시고는 순순히 긍정했다. 술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긴 했다.
“아, 장태준 취한 거 본 적 있어요?”
진우가 묻자 사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팀장님은 취했어도 안 취한 척하잖아요.”
“정확히 아네요.”
진우가 키득거렸다. 어제는 태준도 꽤 많이 마셔서 취했을 건데 그보다 더 많이 취한 하 기자 수발드느라 내색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날씨가 괜찮네요.”
“그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집 앞에서 한겨울에 뭐 하는 짓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캠핑 경험 자체가 없다시피 한 진우한테는 색다른 낭만처럼 다가왔다.
“나도 누나 있어요.”
진우가 잔잔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말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아니, 그냥, 양 변호사님 보면 외동인 거 같은 느낌이라서요.”
사준은 상추에 고기를 올려 쌈을 싸며 대꾸했다.
“혼자 자란 거나 마찬가지죠. 왕래가 없거든요. 형이랑 누나랑.”
“삼 남매라니 진짜 의외네요. 근데 왜 왕래가 없어요? 사이 안 좋아요?”
“스무 살에 커밍아웃하고 반쯤 의절 상태?”
진우는 말을 뱉고 나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태준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이전에 사귀었던 놈들은 이런 얘기를 할 틈도 없었으니까.
사준은 남 얘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진우를 바라봤다. 본인 얘기인데 아무 상관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 듣고 있으려니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반쯤 의절이면 보긴 봐요?”
“법원에서 마주칠 일이 있는 사람들이라 보면 인사는 하죠.”
진우는 잘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었다.
“형이랑은 그냥 그랬지만 누나랑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는데, 커밍아웃하고 난 뒤로는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벌써 10년도 넘었어요.”
“왜요?”
“누나가 너무 울어서.”
사준은 맥주를 넘기면서 자신의 경우를 떠올려봤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언뜻 생각해 봐도 긍정적인 반응이 안 떠올랐다. 그건 양진우의 가족도 그랬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사실을 가족한테 말할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엉뚱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가끔 법원에서 보면 차 한잔하자고 하는데 그것도 맨날 거절해요. 어색해서.”
“뭐, 어색할 수는 있죠. 근데 그게 끝이에요?”
“네?”
“누나가 운 게 다냐고요.”
“…그럼 뭐가 더 있어요?”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진우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누나가 울었다고 해서 안 보는 거면 양 변호사님이 너무 하네, 울 수도 있죠.”
“네?”
“양 변호사님이야 오래 생각하고 결정해서 말을 꺼낸 거겠지만 누나는 안 그랬을 거니까. 사실 양 변호사님도 가족이니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던 거 아니에요?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니까 삐친 거고.”
진우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가족들이 자신에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음에도 늘 피했다.
다른 생명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 싫어서 얼굴을 보지 말아야지 했는데, 지금은? 지금도 그럴까? 헛된 기대나 희망일지 모르지만 누나 행동만 보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닐까?
“차 한잔하자고 말했으면 양 변호사님 누나도 할 말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누나였다면 차가 아니라 술을 짝으로 마시자고 했겠지만.”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풀기 위한 것처럼 사준은 농담을 건네며 맥주 캔을 들었다. 건배를 청하는 것에 진우는 들고 있던 캔을 톡 기대듯 부딪쳤다. 콕 짚어 말한 건 아닌데 사준이 누나를 만나도 되지 않겠냐 용기를 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써니와 무니를 산책시키면서 둘은 동네를 한 바퀴를 돌았다.
“이 기자님이랑 같이 사는 게 아닌데도 애들이 잘 따르네요.”
“얘들이 어렸을 때는 저도 같이 키웠어요. 써니는 누나가, 무니는 내가, 그렇게 맡아서 기르기로 했거든요.”
“이름은 누가 정했어요?”
“그건 그냥 자연스럽게? 원래 해달이라고 어렸을 때 키우던 진돗개가 있었거든요. 해달이가 무지개다리 건넌 뒤에 데려온 애들이라 이름을 하나씩 나눴죠.”
진우는 사준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준이 이런 반려견을 키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그와 썩 잘 어울리는 게 신기했다.
“나도 한 마리 키워 볼까….”
“혼자 사는 사람이 키우는 거 전 반대예요.”
“신경 못 써주니까?”
“네, 개는 산책이 필순데 안 되잖아요.”
무니와 써니가 전봇대에 흥미를 보여서 사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럼 고양이?”
“고양이도 외로움 타요.”
“그럼 나중에 같이 살 사람 생기면 키워봐야겠네.”
개들이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진우가 가볍게 말했다.
“동물을 자식 대신하듯이 키우는 것도 별로던데.”
“네?”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준을 바라봤지만, 그는 써니와 무니를 보느라 진우를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계속 움직였다.
“그런 거 있잖아요, 동성애 커플들이 자식 삼아서 개나 고양이 키우는 거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미련 두는 거 같아서 청승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진우는 사준을 뚫어져라 보다가 엷은 한숨을 뱉었다.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해요? 나한테 삐뚤게 생각한다더니 이 기자님은 더 하네, 그냥 마음이 맞아서 키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누구랑요? 같이 사는 사람이랑?”
사준이 고개를 들어 진우와 눈을 마주쳤다. 비꼼이 묻은 말에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사람이랑 마음을 맞출 게 아니라 키우고자 하는 동물이랑 마음이 맞아야 한다는 의미라는 건 알겠지만 저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게 삐딱하게 말하는 건 원래 기자들 특징인가.”
“기자여서가 아니고….”
“네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이 기자님한테 같이 키우자고 할 생각도 없고, 혼자 살면서 키울 생각도 없고, 자식 대신 키울 생각도 없으니까.”
진우가 건성인 듯하면서도 확고하게 말해서 사준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말을 더 해 봐야 시비 거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해지니까 좀 춥네요.”
어색한 침묵이 진해지기 전에 진우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 날씨면 골병들 정도는 아니에요.”
사준이 텐트에서 잘 수 있음을 강조하듯 말했다.
“누가 들으면 밖에서 되게 많이 자 본 사람인 줄 알겠어요.”
“계절 상관없이 뻗치기는 많이 해 봤죠.”
사준은 언제 올지 모르는 취재 대상을 무한정으로 기다리며 대기하던 일을 떠올렸다. 진우는 그런 사준을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기자님은 기자 일 하는 거 좋아요?”
“나쁘지 않아요.”
“진실을 사람들한테 알리는 게?”
“아뇨,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게요.”
“뭐야, 그게….”
진우가 맥빠진다는 듯 혀를 차자 사준이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 몰라요? 기자들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 말하면서 진실이 되길 바란다.”
“누가 한 말이에요?”
“몰라요, 까먹었어요.”
“이 기자님이 한 말은 아니죠?”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이 기자님이 그런 말 했으면 장태준이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사준은 턱을 주억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확실히 우리 팀장은 진실만 보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긴 하죠. 가끔 보면 혼자만 딴 세상 사는 사람 같아서 좀 또라이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아닌 척 은근히 까네요.”
“까는 게 아니라요, 진짜 가끔은 벽에다 대고 말하는 거 같다니까요. 근데 무슨 재준지 그게 또 나쁘지 않아 보이니까… 우리 팀장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 들어요. 그래, 기레기가 천 명이면 한 명 정도는 진짜도 있어야지.”
사준이 〈스쿠프〉에 발령받은 이후 부서 이전을 한 번도 신청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장태준이라는 상사는 어떨 때 보면 시대에 뒤처진 사람 같지만 그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의 한결같은 비타협적인 성격이 언제나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느낌?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천 명 중 하나는 무슨, 도촬이나 도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진우가 혀를 차며 태준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는 의미로 말했다.
“그런 것도 진실을 보도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할걸요.”
“이 기자님은요?”
“나는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 안 한다니까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준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었다. 이사준은 알고 있는 사실을 보도하는 기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자신이 아는 사실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기자였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람 관계에도 해당하는 성격이라면, 이사준은 지금 양진우에 대해 확인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짧지 않은 산책을 마친 둘은 차례대로 집 안 욕실에서 씻었다. 진우가 씻는 동안 사준은 텐트 바닥에 두꺼운 매트를 깔고 그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다시 위에 얇은 요를 덮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눌러 찬기가 올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뒤 전기난로 두 개를 켰다. 텐트 안에 훈기가 감돌 무렵 진우가 씻고 나왔다.
“와, 이거 장난 아니다.”
텐트에 들어선 진우는 예상외의 아늑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잘 준비를 하자 정말로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무니랑 써니는요?”
“걔들은 걔네 집에서 자죠, 왜요? 우리 하는 거 애들이 볼까 봐 신경 쓰여요?”
텐트를 칠 때부터 그런 뉘앙스를 풍기긴 했지만 설마 싶었는데, 진짜 여기서 하려는 건가? 진우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자 사준이 피식 웃었다.
“방금 대화 좀 그런 거 같았어요.”
“무슨…?”
“애들 일찍 재운 부부요.”
“뭐요?”
진우가 질겁하자 사준이 킥킥거렸다.
“애들 다 다 자니까, 얼른 와.”
매트리스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하는 말에 진우는 얼굴을 확 구겼다.
“진심으로 집에 가고 싶네요.”
정색하며 진우가 말하자 사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농담이에요, 설마 진짜 여기서 하겠어요?”
“아….”
진우는 저도 모르게 살짝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야, 기대했어요?”
“됐어요, 잠이나 자요.”
두꺼운 이불 속에 나란히 눕자 집 천장보다 훨씬 낮은 부실한 텐트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되게 이상하네요.”
“그죠?”
사준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거리를 좁혀 진우의 옆에 붙었다.
“양 변호사님.”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진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요?”
“내 다리 사이에도 텐트가 쳐진 거 같아요.”
“미쳤어…!”
진우는 귀를 씻고 싶어졌다. 살다 살다 이렇게 색기 없는 유혹은 처음이었다.
“헛소리할 거면 잠이나 자요.”
진우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 채 몸을 웅크렸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운 것처럼 경계하는 모습에 사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잘 자요.”
의외로 담백하게 인사한 사준은 진우에게 몸을 돌려 등을 졌다. 사위가 고요해지자 괜히 기온이 더 낮아진 것 같았다. 코끝은 시릴 정도로 차가운데 전기장판이 깔린 바닥은 뜨끈뜨끈해서 기분이 묘했다. 진우는 춥다는 핑계로 사준의 옆에 몸을 바싹 붙였다. 체온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진우는 몸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혹시 지금 옛날 애인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대로 잠들려고 하는 찰나 사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냥요, 애인이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걸 떠올리나 해서요.”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그래요?”
사준은 확인이라도 해 보겠다는 것처럼 몸을 돌려 진우에게 손을 뻗었다. 사타구니를 스치듯 건드리자 하복부에 열이 올랐다.
“그럼 이 반응은 나 때문인가?”
“아, 잠깐….”
“춥잖아요, 따뜻하게 해 줄게요.”
사준은 능청을 부리며 진우의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하반신이 밀착하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주변 공기가 단박에 상승한 것 같았다.
“원래 이럴 생각이었죠?”
“양진우 씨도 기대하고 있었죠?”
열기를 머금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어설픈 밀고 당기기를 끝내자는 눈빛을 주고받자 사준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준은 단번에 진우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고 기대감으로 일어선 성기를 입에 물었다. 축축한 점막에 성기가 감싸이자 진우가 허리를 움찔거렸다. 사준이 볼을 홀쭉하게 한 채 입속으로 성기를 빨기 시작하자 진우의 입에서 비음이 새어 나왔다.
사준은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입에 물고 쭉쭉 빨았다. 자극을 견디지 못한 성기에서 떨어진 쿠퍼액이 사준의 입속으로 흘러내렸다. 비릿한 액을 삼킬 때마다 사준의 목구멍이 좁아지면서 진우의 성기를 꽉꽉 조였다.
사준의 고갯짓이 거칠어질수록 이불이 들썩들썩했는데, 모습은 안 보이고 이불만 움직이는 게 유독 야해 보여 더 흥분됐다. 아, 흐읍, 삼키지 못한 신음이 텐트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아 진우는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들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야외라는 사실 때문에 민망했다.
한참 성기를 빨아대던 사준은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서 젤과 콘돔을 꺼냈다. 저런 용의주도함을 칭찬해줘야 할지 황당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다리에 젤이 뿌려졌고, 고무에 감싸인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진입했다. 아래가 벌어지는 감각에 진우가 허벅지를 파르르 떨자 사준이 발기한 채 흔들리는 살 기둥을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츕츕소리가 점점 커져서 꼭 잡아 먹히는 것만 같았다.
“아, 양쪽 다, 하지, 흣….”
앞뒤로 밀려오는 자극에 진우가 사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뒤통수를 멋대로 문질렀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아 엉덩이에 힘을 준 순간 사준이 손가락을 쑥 빼내고 이불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서 놓친 절정감에 허무한 얼굴로 진우가 사준을 바라봤다.
사준은 진우의 얼굴에 진득하게 시선을 맞춘 상태로 손가락에서 콘돔을 빼버리고 새로운 콘돔을 뜯어 빠르게 성기에 씌웠다. 뭐든 많이 해 본 놈이 잘한다고, 이사준은 콘돔 하나는 기깔나게 잘 썼다. 얇은 고무를 뒤집어쓴 채 번들거리는 성기를 딱딱하게 세운 사준은 진우의 옆에 누웠다. 부풀 대로 부풀어서 배꼽 아래를 툭툭 건드리는 성기가 흉기 같았다.
“내가 위에서 하면 양진우 씨 등이 아플 거니까.”
사준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대더니 야살스럽게 웃었다.
“위로 올라와요.”
명령과 부탁, 그 어디쯤 되는 어중간한 말에 진우는 팬티와 바지를 벗어버리고 사준의 허리에 걸터앉았다. 한기가 돌아 몸을 부르르 떨자 사준이 골반을 매만졌다.
“얼른요.”
진우는 팔을 뒤로 뻗어 꺼덕이는 사준의 성기를 쥐고 허리를 띄워 입구에 귀두를 맞췄다. 그리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옅은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엉덩이를 아래로 내렸다. 점막이 성기에 달라붙으면서 사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뜨겁고 조여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진우가 허리를 완전히 아래로 내리자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엉덩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사준은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 기승위가 처음도 아닌데 그대로 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 좋네요….”
진짜 양진우 씨 같은 사람 없을 거야.
사준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움직여 보라는 것처럼 허리를 가볍게 툭툭 쳐올리자 진우가 말을 타는 것처럼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자 안쪽에 콱 박힌 성기에도 자극이 전해졌다.
진우의 움직임에 맞춰 내벽이 꾸물거리면서 사준의 성기에 딱 달라붙었다. 정액을 쥐어 짜낼 것 같은 점막의 움직임에 사준은 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하읏, 흡…!”
스팟을 정확히 찌른 귀두 탓에 진우의 입에서 높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사준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진우의 엉덩이 사이를 고환이 찰싹찰싹 때려댔다.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가 좁은 텐트 안에 크게 울렸다.
“아, 흐읏….”
신음 참는 걸 잊은 진우가 흐느끼는 듯한 교성을 뱉은 순간이었다.
컹, 컹.
언제 온 건지 텐트 너머로 개 그림자가 보였다. 순찰하는 것처럼 빙빙 도는 그림자는 실제 개보다 컸고, 마치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어른거리는 게 꼭 사람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해서 진우가 살짝 몸을 굳히자 사준이 진우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아, 양진우 씨가 소리 내니까 걱정돼서 왔나 본데요?”
“아, 으응, 흣.”
진우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지만 사준은 허리를 치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진우는 물기가 젖은 눈으로 텐트 주변을 서성이는 그림자를 다시 한번 봤다. 텐트 안으로 난입할 리가 없는데 불안했다.
“왜요, 무서워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는 잘만 놀았으면서 뭐가 무서워요.”
사준이 놀리듯 말하자 진우가 눈을 흘겼다. 붉어진 눈꼬리가 길게 올라가서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럼 빨리할까요?”
언뜻 들으면 배려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놀리는 게 분명했다. 진우는 대답 대신 엉덩이를 사준의 사타구니에 비비적거렸다. 그 움직임에 화답하듯 사준의 허리 짓이 빨라지자 진우 역시 휩쓸려 같이 허리를 흔들었다.
철퍽, 철퍽. 분출의 욕구를 누르지 못하고 점차 거세지던 움직임이 동시에 순간적으로 멈추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 다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하아, 진우는 기다란 한숨을 뱉으며 사준의 위로 몸을 떨어트렸다. 사준은 진우의 등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 꼼꼼하게 덮어 주고는 관자놀이와 귓바퀴에 가벼운 키스를 내렸다. 땀이 식으면서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얼굴에 한기가 돌았다. 진우는 매달리는 것처럼 사준의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추우니까 안에 들어가요.”
사준이 진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언제 가버린 건지 써니와 무니의 그림자도 텐트 근처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이 정도 날씨는 괜찮다면서요?”
“원래 텐트에서 섹스하는 게 목적이었거든요.”
“뭐라고요?”
진우가 고개를 들어 사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자는 건 여름에 해도 되니까.”
여름에 또 이럴 기회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지만 진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분위기 깨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 맞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던 사준이 깜박한 게 있던 것처럼 말했다.
“왜요?”
“가슴 빨아 주는 거 깜박했다.”
“뭐요?”
진우가 어이없는 얼굴을 하자 사준이 키득거렸다.
“저번에 폰섹할 때 많이 빨아 준다고 했잖아요.”
“가슴은 무슨….”
“그럼 젖꼭지? 거기 빨면서 아래 쑤셔 주는 거 좋아하잖아요.”
“헛소리할 거면 안에 있는 거 빼기나 하죠?”
“땀 식기 전에 집으로 가요.”
사준은 진우의 말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더니 팔을 쭉 뻗어 멀티탭 전원을 차례로 껐다. 그리고 진우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어깨까지 꼼꼼히 덮어 주더니 그대로 진우를 들어 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뭐 하는 거예요!”
허공에 떠오른 진우가 사준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들어가게요.”
기어이 진우를 안은 채 텐트 밖으로 나온 사준이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안쪽을 채우고 있는 살덩이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아, 좀, 그냥 내가 걸어갈 테니까…!”
진우가 버둥거리자 사준이 엉덩이를 추어올렸다.
“양진우 씨 꽤 무거우니까 그만 움직여요, 지금도 힘든데.”
“그러니까 내가 걸어간다고요.”
“자꾸 움직이면 이불 떨어져서 무니랑 써니한테 다 보여주게 될 건데? 혹시 그걸 바라는 거예요?”
진우는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하더라도 딱히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사준은 옷을 다 입고 성기만 꺼내 놓은 상태였으니 그래도 나았지만 진우는 아래를 다 벗은 상태여서 민망하기도 했다.
사준은 마당과 통하는 테라스 문을 발로 열고 거실로 들어왔다. 훈기가 도는 실내공기에 순식간에 몸이 녹았다. 진우는 그제야 밖이 꽤 추웠다는 걸 깨달았다. 사준은 진우를 푹신한 러그에 눕히면서 허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흣.”
자극에 놀란 것처럼 신음을 흘리자 사준이 허리를 느릿느릿 치대면서 성기로 내벽을 문질렀다. 텐트에서 격렬하게 움직일 때와는 또 달랐다.
“하아, 콘돔 바꿔야 하는데 빼기 싫으니까.”
“아, 흐읏, 음….”
진우는 사준의 어깨에 매달린 채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지금 빼버리는 걸 진우도 원하지 않았다.
“살살 움직일게요, 안 찢어지면 괜찮겠지.”
그다지 신뢰감은 없었지만 진우는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 안쪽을 뭉근하게 문질러 줄 때마다 아랫배가 찌릿찌릿해서 너무 좋았다.
사준은 진우가 입고 있는 셔츠를 위로 밀어 올려 벗겨버리고는 가슴팍에 입술을 문질렀다. 부드럽게 키스하다가 살짝 빨기를 반복하자 가슴 안쪽까지 다 저릿했다. 타액으로 젖은 유두가 딱딱해지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사준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혀와 손가락으로 유두를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허리를 느릿느릿 움직였다.
좁은 점막을 뚫고 들어와 제일 안쪽을 찔렀다가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그 반복적인 움직임에 내벽은 이사준의 모양을 정확하게 기억하게 될 것만 같았다. 따뜻한 공기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사준의 움직임에 느슨한 쾌감이 전신을 감쌌다. 진우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사준의 움직임에 취해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눈꺼풀을 번쩍 밀어 올린 사준은 눈앞에 놓인 진우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텐트에서 거실로 들어온 뒤 한 번 사정하고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훈훈한 공기에 몸이 녹아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푸른 새벽이 밀려온 창밖을 힐끔 본 사준은 이불을 들춰 진우의 엉덩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미처 빼지 못한 콘돔이 엉덩이 사이에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사준은 고무를 잡아당겨 빼내고는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내벽이 아직도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아, 흐응, 음….”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보자 진우가 잠결에 야릇한 소리를 냈다.
“자면서도 느끼고, 하여튼 야하다니까.”
사준은 진우의 귓가에서 속살거리며 손가락을 빼내고, 이미 몇 번이나 맛을 본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성기에 새로운 콘돔을 씌웠다. 얇은 고무에 싸인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대고 문지르다 입구에 대고 힘을 주자 풀어진 내벽이 성기를 쭉 빨아 당겼다.
“하, 후으….”
성대를 긁으며 나른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잠에 빠진 몸이 늘어져 있는 상태여서 그런지, 아니면 직전까지 해서 그런지 유독 부드럽게 느껴졌다.
“으… 흣? 지금 무슨?”
눈을 뜨자마자 아래서 훅훅 치고 올라오는 감각에 진우가 놀란 눈을 한 채 고개를 뒤로 돌리자 사준이 싱긋 웃었다.
“양진우 씨가 너무 야한 표정으로 자기에.”
“그렇다고 자는 사람한테, 지금 뭐 하는, 아흣….”
“자고 있어도 엄청 잘 빨아들이던데, 지금도 놔 줄 생각은 없어 보이고.”
사준은 천연덕스럽게 진우의 점막 상태를 읊조렸다. 등 뒤에서 진우를 끌어안은 채 허리를 움직이던 사준은 몸을 일으키며 옆으로 누워 있는 진우의 다리 한 짝을 들어 올렸다. 가위가 벌어지는 것처럼 다리를 완전히 벌어지게 만든 사준은 성기를 푹푹 꽂아 넣었다.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성감에 진우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잠들어 있던 몸에 가해진 성감은 너무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미쳤, 이, 사준, 하읏…!”
진우가 허리를 비틀자 사준이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다 세게 빨아댔다. 살갗을 빨아 먹힌 것처럼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는데 그게 또 이상할 정도로 성감을 자극했다.
“아, 흣, 아파….”
“아프기만 한 거 아니잖아요.”
사준은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다 귓불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사준은 진우가 숨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유두를 짓눌렀다가 꼬집듯이 비틀었다. 가슴팍에 가해진 자극에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꽉 조이자 사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 진짜, 너무 좋아요, 좋은데, 그렇게 조이면 싸니까, 하아….”
한차례 사정을 참은 사준이 허리를 다시 거칠게 움직였다. 사준이 스팟을 찍어 누를 때마다 가벼운 절정에 달해 진우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부족한 것처럼 달라붙으니까, 진짜….”
미치겠어, 씨발.
감탄 섞인 순수한 감상에 진우의 눈앞이 핑핑 돌았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것만 같았다.
“아니, 잠깐, 흐으읏…!”
잠깐만 멈춰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자꾸만 신음이 흘러넘쳤다.
“어떻게 된 게, 할 때마다 더 깊게 들어가는 거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사준 성기가 할 때마다 크는 게 아니면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의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지니 이건 무슨 플라세보 효과인지.
“흐으윽….”
언제 고인 지도 모를 눈물이 진우의 눈꼬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 귓가에 고였다. 퍽퍽퍽, 이사준의 허리 짓에 잔뜩 젖은 아래가 푹푹 찍히자 시야가 하얗게 터져버렸다. 사준이 계속 드나들어서 아래는 녹아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고 뇌는 곤죽이 된 기분이었다. 진우는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 * *
햇살이 눈두덩을 찔러서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차가운 겨울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새벽에 밀어붙이는 사준을 막지 못하고 휩쓸려서 몇 번을 더 했다. 너무 느껴서 나중에는 그냥 정신이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진우는 눈부신 햇살로부터 벌거벗은 몸을 가리려는 것처럼 이불을 끌어 올렸다. 울어서 뻑뻑해진 눈가를 몇 번 문지르다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 몸을 돌린 진우는 사준을 바라봤다.
사준은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진우는 사준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없이 사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뭉클한 감정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이 감정의 정체가 뭔지 안다.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가 발바닥이 간질거리는 기분. 말 한마디에 서운해지기도 하고 하늘을 날것처럼 기쁘기도 한, 오락가락하는 이 감정.
사랑이다.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계속 아닌 척, 모르는 척해보려고 했는데…. 내내 부정했지만 결국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인정하게 된다.
금사빠 양진우는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진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짧은 한숨을 뱉었다. 갈팡질팡하던 마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 복잡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오히려 단순하게 느껴졌다. 흔한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감기와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눈치 빠른 이사준은 분명 진우의 감정쯤은 금방 알아차릴 거다. 그럴 거면 그냥 차라리 말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장태준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거 보면 눈치는 안 빠른가? 근데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사준 반응은?
진우는 멋대로 뻗어나가려는 마음을 눌렀다.
많은 사람이 고백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잠깐 잊었다. 고백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상대가 같은 마음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지금의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서 마음을 숨기고 고백하지 않는 거다.
그리고 그건 양진우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사준의 성격상 진지한 마음을 고백하면 분명 지금처럼 만나는 걸 멈추고 싶어 할 것이다. 어쩌면 피할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사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며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감정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사준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제일 안쪽으로 미뤄 둬야 할 감정이었다.
한참 동안 미동 없던 사준의 눈두덩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눈꺼풀이 말려 올라가며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그 순간이 경이롭게 느껴져 진우는 괜히 가슴이 찡했다.
사준은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추더니 진우를 향해 꽃내음이 날 것 같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요?”
낮고 다감한 목소리에 심장 한쪽이 찡하고 울렸다. 진우는 울컥 치밀어오른 감정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도록 맑은 겨울 아침이었다.
* * *
진우는 의자에 앉아 사용했던 침구를 옮기는 사준을 바라봤다. 어제 무리했으니 치우는 건 자신이 하겠다는 말에, 자신은 아까부터 텐트를 정리하는 사준을 보고만 있었다. 혼자 하는 것인데도 사준은 빠릿빠릿했다.
문득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와 캠핑하러 다녔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와 함께 갔다면 대부분 혼자 텐트를 정리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생각해?”
진우는 발치에 맴도는 써니와 무니에게 물었지만 입이 무거운 개들은 말간 눈으로 진우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뭘 어떻게 생각해요?”
대신 주인이 물었다.
“이 기자님, 눈치 빨라요?”
대답 대신 돌아온 엉뚱한 질문에 사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짐작해 보려는 듯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눈치 없다 소리 들은 적도 없고.”
“흐음, 아닌 거 같은데.”
진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다리를 까닥였다.
“나 눈치 없이 굴었어요?”
그러더니 사준은 그럴 리 없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어제도 양진우 씨가 좋아하는 부분만 잘 찔러 줬던 거 같은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진우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치자 기다렸다는 듯 개들이 짖었고, 사준은 키득거렸다.
“맞잖아요, 어제 찔러 줄 때마다 좋아서 부들부들 떨었으면서.”
“아, 됐어요. 정리 다 했으면 가요.”
본전도 못 찾았다고 생각한 진우가 씨근덕거리며 먼저 운전석에 올랐다. 딱히 이런 거로 일일이 부끄러워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밝은 대낮에 듣기에는 민망했다.
“내가 뭘 얼마나 좋아했다고.”
진우는 민망함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고 머리칼을 헤집다가 핸들에 이마를 부딪쳤다.
“얌전히 있으면 누나 올 거니까 집 잘 보고 있어.”
써니와 무니에게 인사를 건넨 사준이 진우의 차에 탔다.
“근데 여기까지 왔는데 누나 안 보고 가도 돼요?”
“굳이 안 봐도 되고, 누나 만나면 양 변호사님이 어색해할 거잖아요.”
“내가요?”
“하긴, 섹스한 다음 날 이미 한 번 봤으니 괜찮으려나.”
“됐어요, 출발할게요.”
더 말을 하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사준의 누나 집 거실에서 그런 짓 한 걸 집주인 앞에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 밥 먹고 들어갈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진우가 곁눈질로 사준을 힐끔 봤다.
“딱히 생각나는 게 있는 건 아닌데.”
“이 기자님, 카레 좋아해요?”
정면을 보던 진우가 고개를 돌려 사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양 변호사님이 만들어주려고요?”
“카레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좋네요.”
사준은 입술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주고 싶다는 걸 굳이 거절할 마음은 조금도 안 들었다.
마트에 들러 카레에 들어갈 재료와 맥주를 사서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는 반갑지 않은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사준과 진우는 봉투를 보고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어디서 온 것인지 감이 온다는 시선을 교환했다.
사준의 미간이 좁아졌고 진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지 않았음에도 내용물이 짐작돼서 짜증이 벌컥벌컥 솟아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알았나 보네요.”
사준이 허리를 숙여 서류 봉투를 집어 들자 진우가 손을 뻗었다. 사준이 들고 있는 걸 뺏으려는 거였는데 그는 팔을 높게 들고 몸을 뒤로 뺐다.
“나한테 온 거예요.”
“아닐걸요.”
“우리 집 앞에 있으니까 나한테 온 거죠.”
진우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사준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누가 제보한 건지도 모르잖아요.”
“요즘 세상에 누가 기자 집 앞에다가 이런 걸 두고 가요?”
“양 변호사님은 영화도 안 보나 봐.”
“그건 영화고요.”
“알았으니까 일단 안에 들어가죠.”
사준이 문을 열어 진우를 안으로 잡아당겼다.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진우는 일단 사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 장 본 것을 올려 둔 사준이 봉투를 뜯으려 했다.
“잠깐만요!”
“왜요?”
“뭐가 들었을지 모르잖아요. 면도칼 같은 게 있어서 손이라도 베면 어떻게 해요.”
진우는 그런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조심히 열게요.”
조심히 연다고 했으면서 사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윗부분을 미련 없이 찢어 버리고 봉투를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쏟아냈다. 사진 몇 장이 툭 쏟아졌고 마지막으로 A4용지가 펄럭펄럭 떨어졌다. 떨어지는 종이로 두 쌍의 눈이 닿았다.
[돌려놔]
딱 세 글자뿐이었는데 죽여버리겠다든지, 가만두지 않겠다든지 하는 말보다 괜히 더 섬뜩했다.
“허, 참.”
사준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식탁 위에 떨어진 사진을 봤다. 사진은 모두 최근 며칠 사이에 찍은 것들이었다. 특히 회식 후 같이 돌아오는 사진은 불과 엊그제 일이었다.
“소름이네.”
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면 정성이다. 날도 찬데 어디 숨어 있다가 이런 사진을 찍은 걸까. 진우는 사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여기까지 쫓아 오는 게 아닐까 짐작은 했었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이사준에게 그만 만나자는 말을 했던 거기도 하고. 그런데 막상 이렇게 일이 닥치자 눈앞이 깜깜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신고할까? 아니, 그랬다가 까딱 잘못해서 몸을 섞는 사이라는 게 알려지면? 게이 치정 사건이라는 게 알려지면 경찰이 얼마나 많은 색안경을 끼고 볼까.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 진우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난 집에 가는 게 좋겠어요.”
“왜요?”
“계속 있다가 이 기자님한테 해코지하면 그땐 진짜 답이 없을 거 같으니까요.”
“흠, 근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준은 진우의 말을 은근히 무시한 채 A4용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덜렁 세 글자만 타이핑되어 있는데 글자 폰트라도 키우지, 어떻게 된 게 소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0포인트 정도 되는 글자가 한가운데에 있었다.
“뭐가요?”
“스토커니까, 양진우 씨랑 사귄다는 망상에라도 빠져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데요?”
“그러면 ‘돌려줘’가 맞지 않아요? ‘돌려놔’는 이상하잖아.”
진우는 사준의 지적에 글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확실히 그의 지적은 예리하다면 예리했다. 돌려놓으라니 뭘 돌려놓으라는 말일까. 이렇게 둘이 같이 있는 사진까지 다 찍었으면서. 둘 사이를 알고 있다는 협박인 줄 알았는데 또 그게 전부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진우는 다시 한번 제가 사귀었던 남자들을 떠올려 봤다. 의심하려고 하니 모두 하나같이 다 수상했다. 워낙 병신 같은 놈들을 많이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밥을 먹고 생각하죠.”
“지금 밥이 넘어가요?”
“안 넘어가면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느냐는 의미에 진우는 맥이 빠지고 말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태평하게 밥을 먹을 기분도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만들까요?”
“됐어요.”
사준이 정말로 밥을 먹을 생각인듯해서 진우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자 까는 거 도와줄게요.”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싱크대에 나란히 선 둘은 사 온 채소를 손질하는 걸 시작으로 요리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심란했던 마음이 계속 손을 움직이는 것으로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스토커를 마냥 방치할 게 아니라면.”
카레 가루를 물에 풀고 끓기를 기다리는 시점에 사준이 입을 열었다.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왜요? 경찰이 무성의할까 봐요?”
“그것도 있고, 속옷은 이미 버렸으니 사진을 갖고 가야 하는데 사진은 또… 좀, 그렇잖아요?”
“뭐가 그래요? 우리가 떡 치는 사진도 아니고 그냥 친구 집에서 지내는데도 쫓아왔다고 하면 되죠.”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게 신경 쓰인다고 직접 말한 적도 없는데 사준은 잘도 알고 있었다.
“범인이 남자라는 게 밝혀져도 그건 양 변호사님 탓이 아니잖아요.”
진우는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카레를 가만히 보면서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문제를 떠나서 사진 몇 장으로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할까요? 그게 더 문제죠.”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여성이 신고해도 신변 보호를 받는 데까지 오래 걸리는 마당인데 사지 멀쩡한 남자가 스토커 피해 신고를 한다? 곱게 볼 경찰이 몇이나 될까. 안 그래도 늘 인력난에 허덕이는 게 경찰이라는 집단 아닌가.
대화가 끊어진 틈에 진우는 그릇에 밥을 푸고 카레를 덮듯이 올렸다.
“일단 저는 집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진우가 입을 열었다. 사준은 숟가락으로 카레를 비비면서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현관 앞에 있는 서류 봉투를 봤을 때부터 진우가 그 말을 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낼 마음은 안 들었다.
“이 기자님까지 성가신 일에 휘말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안 성가시다고 하면요?”
진우는 사준의 얼굴을 보면서 눈만 깜박였다. 성가시지 않다는 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솔직히 약간의 거리만 두면 저런 불쾌한 우편물을 사준이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저렇게 말을 하는 걸까.
‘사람 설레게.’
진우는 고개를 숙인 채 그릇에 얼굴을 박을 기세로 카레를 떠 입에 넣었다. 몇 숟가락 카레를 입에 넣고 씹던 진우는 결심한 듯 사준을 바라봤다.
“왜 안 성가신데요?”
진우는 발가락을 잔뜩 말아쥐며 물었다. 주먹을 쥐고 싶은데 티가 날 것 같아서 아쉬운 대로 발이라도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사준이 싱긋 웃었다. 그 언젠가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에 진우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데 뭐 있다. 그런 건 스스로 생각해야 할 문제 아닌가?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꼭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사준은 카레를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넘긴 다음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양진우 씨가 혼자 있으면 더 위험할 거고.”
“그렇다고 여기서 같이 지내는 게 해결 방안은 아니죠.”
사준은 턱을 매만졌다.
“그것도 그렇네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없었다. 사준의 집에 이런 식으로 머무는 건 처음부터 그냥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지금 사는 집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하면.”
진우는 뒷말을 듣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편이 낫겠네요. 지금보다 경비가 확실한 곳으로 가면 좀 낫겠죠.”
사준은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스토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우리가 같이 지내는 걸 알았으니 지금 진짜 열 받았을 거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사진 보내서 한심한 협박 하는 거 보면?”
“그렇겠죠…?”
진우 역시 스토커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도 모습은 안 나타내는 거 보면, 이 스토커 무력을 행할 거 같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나요?”
“변태처럼 속옷을 보낼지언정 칼로 찌르러 올 거 같지는 않다는 거죠.”
“무슨 근거?”
“그냥 감이에요. 양진우 씨를 납치하거나 그럴 생각이었으면 진즉 하지 않았을까요?”
“그거야말로 모르겠네요.”
“전에 사귀던 사람 중에 범인이 있을 거 같다고 했죠?”
“네.”
“그거 지금도 변함없어요?”
진우는 식탁 한쪽에 미뤄 놓은 사진을 힐끔 보고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집착할 사람이 있을까? 그랬다면 사귀는 동안에는 왜 다들 그런 식으로 굴었을까.
“범위를 좀 넓혀봐요. 어쩌면 양 변호사님 의뢰인 중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
“돈 많은 의뢰인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흠….”
“이 사진 화질 엄청 좋아요. 그럼 당연히 보통이 아닌 카메라를 썼다는 말인데, 난 왜 그런 사람들은 기자 아니면 흥신소 직원들밖에 안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누군가를 고용해서 사진을 찍게 하고 양 변호사님한테 보낸 걸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진우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머저리 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골이 다 아팠다.
“그게 아니면 양 변호사님 사진 찍으려고 비싼 카메라를 산 건지도 모르죠. 그러려면 어느 정도 재력도 필요한 거 아닌가? 아니다, 정신 이상자니까 빚을 내서라도 샀을지도.”
무심하게 흘린 말에 진우는 가벼운 소름이 돋아서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만 해요, 진짜 소름 돋아.”
“일단 생각해 보라고요, 어쩌면 전에 사귀던 사람 중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진우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에는 각자 생각에 빠진 탓에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 * *
“양 변호사님.”
불을 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사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섹스하는 것도 아니고 할 것 같은 분위기도 아닌데, 침대에 나란히 누운 것에 기분이 묘하던 찰나에 들린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왜요?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좀….”
“내가 맨날 그 생각만 하는 줄 아나 봐.”
사준은 몸을 옆으로 돌려 진우를 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는 게 더 놀라운데요?”
진우 역시 사준처럼 몸을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눈동자는 잔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기대하는 거 같아서 뭘 해야 하나 싶어지는데.”
“그런 기대 안 했어요.”
사준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손이 한 번씩 훑고 지나갈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양 변호사님 탓은 아니니까요.”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전하고자 하는 위로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진우는 입술을 혀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이 기자님은, 다정하네요.”
“…….”
“고마워요.”
“…자요.”
사준은 손바닥으로 진우의 눈꺼풀을 아래로 내려주고는 자신도 눈을 감았다. 고마워하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말이 잘 안 나왔다. 자신은 다정하지 않다. 다정한 남자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할 거니까. 양진우에게 접근했던 동기 자체가 불순 덩어리였다. 양진우가 남자와 경험이 있고 관계를 정리할 때 귀찮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선택한 거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눈으로 보면 좀 곤란하다. 도대체 양진우는 왜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 지금 자신이 잘해주는 건 나중을 위해서인데…. 끝난 뒤에 최악은 아니었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최소한의 양심이랄까. 그런데 양진우는 그 생각은 전혀 못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계속 그런 놈들하고 만난 거겠지만.’
사준은 조금 무거운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눈을 감았다.
* * *
진우는 거울 앞에 서서 옅은 한숨을 뱉었다. 지난 주말 사준이 목을 많이 빤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입술로 빨아 댄 곳이 시간이 지나면서 멍든 것처럼 진한 자국이 남았다. 크기도 작지 않아서 셔츠를 입어도 위로 다 튀어나왔다.
진우는 사각 반창고를 뜯어 목덜미에 붙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 대도 아닌데 이런 자국을 가리려고 한다는 게 웃겼다. 반창고를 붙인 채 셔츠 단추를 잠가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인 제공자는 새벽같이 출근해 버려서 불평을 말할 타이밍도 놓쳤다.
출근하면서 진우는 사준에게 문자를 남겼다.
[애도 아니고 자국은 좀 적당히 남기시죠]
평소라면 보내지 않을 문자지만 좋아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사준의 반응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답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일이 바쁜 건지 사준에게는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김유민이 진우에게 아는척했다.
“좋은 아침, 주말 잘 보냈어요?”
“네, 잘 보냈어요. 변호사님은… 목 왜 그래요? 다치셨어요?”
셔츠 깃 위로 튀어나온 반창고를 발견한 김유민이 물었다.
“아, 좀….”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김유민이 진우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싸움이라도 하셨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주말에 아는 사람 개를 좀 봐줬는데 발톱에 긁혔어요.”
진우는 이미 뱉은 변명을 곱씹으며 개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확률상 개가 할퀴는 것보다는 고양이가 할퀴는 경우가 더 많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뱉은 핑계였다.
“사나웠나 봐요.”
“조금요.”
진우는 속으로만 써니와 무니에게 사과했다. 세상 순한 개들을 이런 식으로 팔아먹은 게 양심에 찔렸다.
“큰 개는 원래 사냥 본능이 있다잖아요. 조심하셔야 해요.”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김유민이 말했다. 그렇죠, 라는 말과 함께 동의하려던 진우는 순간적으로 멈칫한 채 옆에 선 김유민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됐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의심하는 것보다는 짚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김 변.”
“네?”
“내가 큰 개라는 말을 했던가요?”
진우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김유민을 바라봤다. 김유민이 진우를 보며 입꼬리를 한쪽만 끌어 올렸다. 의미심장한 미소에 진우가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아까 개라고 하셨잖아요, 보통 작으면 강아지라고 하니까. 그냥 은연중에 진돗개나 도베르만 같은 큰 개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상한가요?”
“아….”
김유민의 심플한 대답에 진우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이사준 때문에 엄한 의심을 다 한다 싶어 고개를 젓는데 김유민이 진우를 빤히 바라봤다.
“안 내리세요?”
엘리베이터가 닫히지 않도록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을 보고 진우가 바로 내렸다.
“큰 개를 맞춘 게 그렇게 놀랄 일이세요? 저 눈치는 원래 좀 있는 편인데.”
김유민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진우는 그냥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차마 아주 잠깐이지만 스토커로 의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 *
오후에 법원에 들른 진우는 김현이 마약 사건 증거 목록을 확인했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 목록은 확실한 것들뿐이라 재판까지 가면 고생할 게 너무 뻔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감형에 중점을 둬야 하려나.
김현이 재판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며 걷는데 건너편 복도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달 정도는 마주치지 않았던 누나였다. 진우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스쳐 지나면서 고개만 까딱 숙였다.
“진우야.”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건만 누나가 불렀다. 못 들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진우는 고개를 들어 누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고 진우가 대꾸하자 누나 역시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시간 괜찮아? 차라도 한잔할까?”
진우는 잠깐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준과 주말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평소처럼 거절의 말이 안 나왔다. 그러자 먼저 제안한 누나가 오히려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정말?”
“뭐야….”
그냥 예의상 했던 말인가 싶어 진우가 콧등을 찡그리자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늘 바쁘다고 했으니까.”
“그냥 한 말이면 그냥 가고.”
“그런 거 아냐.”
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얼굴에서 진우는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매번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제안한다는 건 언뜻 생각해 봐도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둘은 법원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평일 오후 카페에는 카페인을 충전하기 위한 사람들 때문에 사람이 꽤 많았다.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진우와 누나가 앉은 테이블만 고요했다.
마주 보고 앉은 게 몇 년 만이더라.
진우는 누나를 보며 속으로 별 의미 없는 햇수를 헤아려보다 혀를 찼다. 말 그대로 의미 없는 햇수였다.
“어떻게 지내?”
언제까지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어서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지내.”
“결혼은?”
생각나는 질문이 없어 던진 말이었는데 누나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걸 네가 물어보니 신기하네.”
“축하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니까.”
누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만나는 사람은 있어.”
“누구? 판사? 검사?”
법조계 사람일 거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진우가 묻자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변호사야? 어디 로펌인데?”
질문을 하면서도 진우는 어쩌면 자신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L&B는 업계 1위였으니까.
“아냐, 사업해.”
“재벌이야? 선봤어?”
“그런 거 아냐, 동창회에서 만났어.”
의외라고밖에 안 느껴지는 대답에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가 허락했어?”
아버지라면 당연히 이 바닥에 놀고 있는 사람을 사위로 맞이하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경제력을 갖고 있거나. 그런데 누나가 말하는 분위기를 봤을 때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 허락 하나에 벌벌 떨 나이는 이제 지난 거 같지 않니?”
진우는 입술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누나의 말이 단순히 본인의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게 느껴져서 섣불리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니까 무서워서 나도 너한테….”
“누나.”
진우는 누나의 말을 끊었다.
“지금 그런 얘기까지 하고 싶지 않아.”
의도했던 것보다 더 딱딱한 어투로 말이 나와 누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아. 갑자기 우리 관계를 휙휙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분명 상처받았었다. 그 상처를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지 않은 일로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사준 말처럼 가족이었기에 기대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고, 그랬기에 실망도 더 컸다. 그걸 이렇게 갑자기 단순한 말 몇 마디로 덮을 수 없었다. 같이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낸 것이고 어떤 면에서 발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리를 확 좁히려는 누나의 행동은 부담스러웠다.
“…그런 고집은 하나도 안 변했네.”
누나는 언짢거나 짜증 난 얼굴이 아니라 담담하게 말했다.
“고집이 아니라….”
“알겠어, 나중에 결혼할 사람 소개해 줄게.”
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누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 동생이 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러면 소개해줘.”
못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진심이었다. 어차피 게이임을 숨겨야 한다면 결혼식장에서 얼굴 보고 말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결혼식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작 얼굴 한번 보고 말 사람을 굳이 따로 시간을 내서 소개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알게 돼서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누나의 입매가 경련하듯 씰룩거려서 진우는 변명 아닌 변명을 뱉었지만 제대로 전달됐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진우야.”
“갈게, 일이 있는 걸 깜박했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누나의 표정을 더 보고 싶지 않아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피해자는 자신인데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해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다음엔 내가 살게.”
진우는 다음을 기약하며 카페를 벗어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답답함이 밀려왔다. 내내 무시하고 담담한 척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가족에게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생각보다 상처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트라우마인가?
몇 년 만에 차 한잔하는 게 이렇게나 힘들어서야. 다음에는 이것보다는 좀 더 나으려나….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진우는 다음에도 누나와 차를 마실 것 같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모호한 기분에 휩싸여 혀를 차는데,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니 김유민이었다.
“네, 무슨 일 있어요?”
진우는 법원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받았다.
― 아뇨, 그건 아니고. 일은 다 끝나셨나 해서요.
“네, 증거물 목록 확인했어요. 〈스쿠프〉 보도자료는 불법 촬영이라 채택 안 하기로 했고요.”
― 그거 다행이네요. 회사로 오실 거예요?
진우는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회사로 돌아가서 잔업을 좀 할까 하는데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 아는 사람 많이 만나네.”
― 네?
중얼거린 혼잣말에 김유민이 반응을 보였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오늘은 여기서 바로 퇴근할게요. 내일 봐요.”
서둘러 전화를 끊은 진우는 자신의 차 앞을 서성이는 이사준에게 다가갔다.
“이 기자님, 거기서 뭐 해요?”
“양 변호사님 차 있는 거 보고 기다렸어요.”
사준이 춥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싱글거렸다.
“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려요? 전화를 하지.”
진우가 리모컨으로 차 문을 열자 사준이 얼른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띠를 맸다.
“일하느라 바쁠 수도 있으니까, 좀 기다리다 안 오면 갈 생각이었어요.”
진우는 누나와 대화를 빨리 끝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랬다면 이사준과 엇갈릴 뻔했으니.
“근데 법원엔 왜 왔어요?”
“나도 일 때문이죠.”
“특종 보도했으면 됐지, 또 뭘 하려고요?”
“우리 팀장님이 그거 갖고 만족하겠어요?”
어림도 없다는 듯한 사준의 말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오늘 아이템 회의 때 엄청 털렸어요.”
“왜요?”
“청학동 예절교육 관련해서 취재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런 걸 뭐에 쓰냐고 하더라고요.”
“이 기자님한테 예절 교육받으란 말은 안 해요?”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귀신이네, 귀신. 안 그래도 그 말 하던데요.”
사준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창밖을 봤다. 짧은 겨울 해 때문에 이미 거리는 깜깜했다. 시가지로 나오자 앙상한 가지를 숨긴 채 화사한 전등을 매단 가로수가 드문드문 보였다. 내내 바빠서 몰랐는데 거리는 어느새 연말 분위기가 가득했다.
“…방금 누나 만났어요.”
진우는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래요?”
“덕분이니까 저녁 살게요.”
대화가 영양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이었다. 그런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건 이사준 때문이었고, 그래서 고마웠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한 감사인지 진우는 사준에게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처럼 눈치가 빠르다면 사준도 충분히 이해했을 거라 생각할 뿐이었다.
“뭐 사줄 건데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사준이 바로 입을 열었다.
“햄버거 먹으러 갈래요?”
“비싼 것도 괜찮은데.”
“햄버거 안 먹은 지 좀 됐거든요. 가서 먹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요.”
“이 기자님, 하루도 안 빠지고 술을 마시려고 하네요.”
“어제는 우리 안 마셨습니다.”
사준이 매일 마시는 건 아니라는 듯 딱 잘라 말하자 진우는 피식 웃었다.
“근데 잠입하고 그러면 햄버거 자주 먹는 거 아니었어요?”
“편의점 햄버거는 좀 먹죠, 오늘은 가게에서 파는 걸 먹고 싶어서.”
사준이 메뉴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여 진우는 가까운 프랜차이즈 버거 가게로 차를 몰았다.
햄버거를 먹고 나온 뒤 이사준이 바라는 대로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어디로 갈래요? 가고 싶은 가게 있어요?”
“양 변호사님이 자주 가는 가게요.”
진우는 무슨 의밀까 싶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사준을 바라봤다.
“변호사들은 비싼 술 마시지 않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네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혼자 가는 가게는 별로 없는데….”
진우가 마땅한 장소를 찾기 위해 과거에 갔던 술집들을 떠올리는데 사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에 그 바도 괜찮아요.”
전에 그, 바…? 진우는 설마 하는 얼굴로 사준을 바라봤다. 지금 둘이서 게이 바를 가자는 거야?
“거기 취재 때문에 갔으면 어떤 데인지 알잖아요.”
“뭐요? 게이 바라는 거?”
진우는 정신 차리라는 듯 말했으나 사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이 기자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양 변호사님이랑 할 거 다 하는 마당에 뭘 그런 걸 따져요?”
정말이지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는 타고났다. 어쩌면 처음부터 거기에 가자고 할 생각이어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웃기다 싶어 핸들을 돌려 이사준과 처음 엉키게 됐던 바로 향했다.
* * *
여전히 분위기만큼은 좋은 가게였다.
바 테이블에 앉으려는 이사준을 진우가 부스 석으로 잡아끌었다.
“왜요?”
“저기 앉는 건 파트너 구한다는 의미에요.”
그 말에 이사준이 대뜸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어쩐지, 저기 앉아 있으면 말을 많이 걸더라.”
“매번 저기 앉았어요?”
“아뇨, 자리 없어서 테이블에 앉은 적이 더 많아요.”
진우는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여기서 만났을 때는 진짜 너무 황당했는데 지금은 여기서 만난 게 다행처럼 느껴진다니,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근데, 그럼 그날 양 변호사님은 파트너가 필요했었다는 거네요.”
사준은 혼자 스툴에 앉아 있던 진우를 떠올리며 물었다.
“섹스파트너 말고요.”
“그럼요?”
오해하지 말라는 의미로 진우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사준은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 게이는 남자라면 다 좋아하는 줄 알고, 남자하고 떡 치는 거에 환장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아무튼 원나잇 할 사람 구한 건 아니었어요.”
자신의 연애관에 대해 설명해 봐야 비웃음당하거나 믿지도 않을 것 같아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하여튼 우리 양 변호사님은 비밀도 많아.”
“이 기자님도 다 말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건 지난 김현이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 일을 따져 물을 건 아니지만 이사준이 은근히 입이 무겁다는 건 확실했다.
“뭐 마실래요?”
진우는 화제를 전환하며 물었다.
“뭐가 맛있으려나….”
사준은 바 테이블 너머 벽에 진열된 술을 눈으로 훑다가 입구로 향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지나치게 익숙했다.
정보원은 아니었고, 이곳에 드나든다는 재벌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알고 있던 뒷모습이었다. 사준은 설마, 설마 하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뒤통수만 보이던 남자가 곁에 서 있던 제 일행에게 뭔가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옆모습이 정확히 드러났다. 휘어지는 부드러운 눈매와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여과 없이 사준의 눈에 박혔다.
쿵, 심장이 철렁했다고 해야 할까, 눈앞이 하얘졌다고 해야 할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대상이 이런 식으로 눈앞에 나타나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이 본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맞으면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한 냉정한 이성이 짧은 순간 치열하게 부딪혔다.
“이 기자님?”
뒤엉킨 혼돈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내는 목소리에 사준이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네…?”
“뭐 드실 거냐고요.”
“아, 어, 양 변호사님이랑 같은 거로 할게요.”
진우는 의아한 얼굴을 한 채 사준이 멍하니 바라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우는 사준의 얼굴을 티 안 나게 살폈다. 분명 누군가 아는 얼굴을 본 표정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전 애인을 본 표정에 더 가까웠다.
조금 전 사준의 표정은 진우가 여태 만났던 남자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을 봤을 때, 움찔해서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그 얼굴과 매우 흡사했다. 정신 팔려서 같은 걸 마시겠다고 대답하는 것까지 그들과 판박이였다. 궁금증과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진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준이 게이 바에서 과거 연인을 만날 리 없으니 지금 느낌은 착각일 것이다.
“왜 그래요? 취재원이라도 봤어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사준은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진우는 더 캐묻지 않고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헤네시 두 잔이랑 생초콜릿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텐더가 자리를 뜨자 진우가 입을 열었다.
“코냑 안 마시는 건 아니죠?”
“일부러 비싼 술 사주는 거예요?”
“그냥 오랜만에 괜찮을 거 같아서요.”
잠시 후 주문한 술과 함께 나온 정육면체 모양의 초콜릿 조각은 생김새부터 고급스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초콜릿을 입에 물었다. 입안 전체에서 녹아내리는 게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향이 강한 코냑과도 잘 어울려서 몇 잔이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을 음미하면서 바를 빙 둘러보자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의 테이블을 힐끔거리던 남자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사준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진우와 사귀었던 남자일 확률이 높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진우는 그 테이블을 등지고 있어서 아직 그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나야 하나….’
사준은 남자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진우에게 말을 건넸다.
“누나랑은 무슨 얘기 했어요?”
머릿속으로는 적당히 일어날 타이밍을 계산하며 사사로운 잡담을 나누던 중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럼, 다녀와서 그만 집에 가죠.”
진우는 벌써 가냐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게이 바에 사준이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요.”
진우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사준의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까부터 힐끔거리던 그 남자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진우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일행 있어요.”
사준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운동이라도 하는 건지 남자는 체격이 꽤 좋았다. 그러고 보면 전에 여기서 진우와 헤어졌던 남자도 어깨가 넓었었다. 남자 고를 때 몸 보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준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만약 그렇다면 몸 ‘만’ 보는 거겠지.
“알아요, 눈이 있는데 그걸 못 봤을까.”
진우 생각에 빠져 있던 사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사준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빠르게 훑어봤다.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그의 얼굴이 비호감으로 번들거렸다.
“근데 왜 거기 앉아?”
사준은 당장 꺼지라는 말을 조용하게 했다.
“당신, 재밌네. 이 남자랑 요즘 재미 좋은가 봐?”
남자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건방진 말투로 물었다.
“대답할 의무 없는 것 같은데.”
사준은 다시 한번 딱딱하게 말했다. 언성을 높여서 시선을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얘 쉽죠? 애정 결핍이잖아.”
남자는 사준의 성질을 긁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살살 약 올리듯 말했다. 아마 사준을 진우의 현 남자친구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걸 감안하고 봐도 미련한 악의였다.
“돈도 잘 쓰고, 걸레처럼 다리도 잘 벌리고.”
일부러 걸레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하는 걸 들으며 사준은 이 상황이 좀 유치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진우가 말했던, 같이 즐겨 놓고 깔린 놈한테만 뭐라고 하는 게 이상하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사준은 와인 잔과 비슷한 코냑 잔의 손잡이를 잡고 빙빙 돌렸다. 왜 이러는 걸까.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아까운가? 하긴, 그럴만하다. 양진우는 사귈 때만큼은 헌신적이었을 테니 아쉬울 만도. 그래서 스토커도 들러붙었나?
“그 걸레 못 잊어서 이런 식으로 껄떡대는 건 뭔데? 걸레 빨고 싶어 하는 세제?”
사준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이 피식 웃었다. 남자는 아무리 봐도 세제와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빨랫비누면 모를까. 아니다, 그런 비유는 빨랫비누한테 실례다. 하여튼 양진우. 사람 보는 눈 더럽게 없다. 생긴 것만 반반한 이런 놈을 왜 만났을까. 그것도 재주라고 해야 하나?
“네 입에 물린 걸레나 뱉어.”
사준은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술잔을 입에 댔다.
“뭐? 이 미친놈이….”
소리를 높이려던 남자가 주변을 의식해서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표정을 정돈했다.
“속고 있는 거야, 당신. 저 새끼 얼마나 독종인데.”
“속은 거라고 해도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누구한테 속을 만큼 내가 멍청한 사람도 아니고.”
“하…?”
“그리고 나를 안 만난다고 해도 그쪽을 다시 만날 것 같지도 않은데.”
사준이 가소롭다는 듯 말하자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누가 다시 만나고 싶….”
“뭐 하는 거야?”
어느 틈에 온 것인지 진우가 테이블 앞에 서서 무섭도록 차가운 얼굴로 남자를 깔아봤다. 말에 온도가 있다면 너무 차가워서 다 얼려 버릴 것 같은 말투였다.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섬찟했다.
사준의 앞에서 나불나불 입을 놀리던 남자는 진우를 보고 굳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너에 대해 모르는 거 같아서 조언 좀 해 주려고 했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냐? 한때는 자기였는데?”
진우는 어깨에 닿은 남자의 손을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툭 밀어냈다. 그리고는 꺼지라는 말을 뱉으려는데,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등신 같은 게, 좆만 살아서는.”
살벌한 욕설에 진우와 남자의 고개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사준을 쳐다봤으나 그는 태연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아니, 좆도 없나?”
“너 이 새끼.”
남자가 욕을 뱉었지만 사준은 그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불청객은 이제 퇴장할 때 된 거 같은데, 눈치가 왜 그렇게 없어?”
“…씨팔, 끼리끼리 논다더니.”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남자는 콧김이라도 뿜어댈 것처럼 씩씩거렸지만 사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차분했다. 무슨 말을 해도 타격을 입지 않을 것 같은 사준을 쏘아보던 남자는 진우의 어깨를 퍽 치고 원래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우는 민망함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사준을 바라봤다. 자신 때문에 불쾌한 일을 겪었으니 미안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 기자님, 그런 욕도 하네요.”
진우는 자리에 앉으면서 사준의 눈치를 슬쩍 봤다. 자신의 기분과는 별개로 사준의 기분은 신경 쓰였다.
“욕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안 하는 거지.”
사준은 테이블 가까이 몸을 붙여 상체를 진우 앞으로 쑥 뺐다.
“근데, 어디부터 들었어요?”
“…세제부터.”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당황한 진우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2년 전쯤에 헤어진 남자가 사준의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헛소리할 게 뻔해 바로 끼어들려고 했는데 둘이 나누는 대화가, 좀 더 정확히는 이사준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게 좋아서 그냥 듣고 말았다.
“거의 다 들었네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자 사준은 바를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 머저리는 아니겠죠?”
“네…?”
사준은 남은 술을 다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혹시 여기 오면 용의자를 추려볼 수 있을까 했는데 술맛 떨어져서 못 있겠네요.”
진우는 사준이 왜 여기 오자고 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진우가 사귀었던 남자 중 스토커가 있고, 만약 그 스토커가 오늘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다면 가게에 들어올 거라고 추측했기 때문이었던 거다.
심장이 부드럽게 뛰면서 자신의 위치를 호소했다. 진우는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이사준의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너무도 크게 다가와 곤란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말았다.
“이 기자님.”
“왜요?”
진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준의 겉옷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우리… 호텔 갈래요?”
더한 말도 많이 했고, 할 줄 알면서, 고작 이런 말이 더 부끄러웠다.
사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진우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것처럼 그를 훑어봤다.
“스토커가 집 앞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설픈 변명을 입에 담자 사준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양진우 씨는 생각보다 거짓말도 못 하고 유혹도 못 하네요.”
진우는 입안 볼살을 깨물었다. 거짓말을 못 한다는 말이,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다고 들려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조금 전 병신처럼 시비를 걸던 놈 앞을 과시하듯 지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사준은 옆에서 걷는 진우를 힐끔 바라봤다. 그의 옆모습에 조금 전에 자신들처럼 가게를 나서던 남자의 얼굴이 잔상처럼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 * *
호텔에 들어와 체크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방으로 향하는 동안 진우는 내내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호텔에 오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방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사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처음 왔던 그 방 같은데요?”
사준의 말에 진우도 그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체크인할 때 스위트를 요청하긴 했지만 설마 같은 방에 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호텔 방 구조는 비슷비슷하지만, 창밖에 보이는 풍경까지 똑같을 리 없으니 여기는 그 방이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양 변호사님이 이 방으로 달라고 했어요?”
놀리듯 말하는 사준을 보며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체크인할 때 옆에 있었잖아요.”
체크인 당시 직원이 남은 방이 스위트룸뿐이라며 넘긴 방이었다. 일부러 이 방을 노린 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혹시 나 모르게 직원이랑 짰을까 봐.”
“그런 거 안 하거든요.”
드라마를 봐도 너무 본 것 아니냐는 뉘앙스로 말을 흘리는데 사준이 진우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럼 뭐, 우연이라 치고. 같이 씻을래요?”
호텔까지 온 마당에 빼는 것도 웃기고,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 다분했기에 진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는 엉겁결이라 제대로 보지 못한 스위트룸을 제대로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쿨쩍, 쿨쩍,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와 아래를 헤집는 소리가 욕실 타일을 때리면서 음란한 소리를 만들었다.
“허리 더 낮춰 봐요.”
물기가 가득한 욕실에 사준의 목소리가 습하게 울렸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에 샤워하자던 이사준은 안쪽을 씻겨 준다며 진우를 몰아붙였다.
진우는 욕실 벽을 짚은 채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를 취했다. 혼자 하겠다고 했지만 이사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뜨거운 물로 한차례 풀고, 오일을 쏟아부은 엉덩이 사이로 세 개나 들어온 손가락이 아래를 헤집으며 진우가 느끼는 부분을 집요하게 찔러댔다.
“나 이제 양진우 씨가 어디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죠?”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것처럼 멋대로 말하며 사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곧은 손가락이 몸에 있는 핵을 건드리는 것 같아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진우는 손에 단단히 힘을 준 채 욕실 벽을 붙잡았지만, 허리가 덜덜 떨려서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아마 사준이 골반을 붙잡아 지탱하지 않았다면 진작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 흐, 이제 그만, 흣….”
진우가 짧은 손톱으로 타일 벽을 긁어대며 바르작거리자 사준이 뒷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왜요? 쌀 거 같아요?”
상태를 확인하는 적나라한 질문에 뜨끈뜨끈한 열이 올랐다. 딱히 민망한 질문도 아니건만 예민해진 몸에는 말할 때마다 닿는 숨결조차 자극적이었다. 빙글, 안쪽에 들어있던 손가락이 풀어진 내벽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싸도 되는데.”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그 말에 진우의 등줄기가 파르르 떨렸다. 손가락이 안쪽에서 벌어졌다가 다시 하나처럼 모여서 앞뒤로 쑥쑥 움직이자 찌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잔뜩 발린 오일 때문에 움직임 자체가 자연스러웠다.
“아, 흣….”
미처 삼키지 못한 목소리가 타일 벽을 세게 때리자 진우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사준을 바라봤다.
“손가락 말고 내 거 넣어줄까요?”
“아니, 흣, 왜 욕실에서 이러는, 건, 데…!”
진우가 신경질을 부리자 사준이 킥킥 웃었다.
“내가 풀어준다고 했는데 양진우 씨가 쌀 거 같다면서요.”
말도 안 된다. 혼자 풀겠다는 진우를 몰아붙인 건 처음부터 이사준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엉덩이에 닿아 있는 사준의 중심 역시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왜 아닌 척 능청인지.
“지금, 하아, 나만 그래?”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자 사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고집 세.”
이렇게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센 사람이 연애할 때는 왜 그러는 걸까? 애정 결핍이라는 전 애인의 말은 어느 정도 아니, 상당히 신빙성 있는 말 같았다.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기대하니까 조금만 잘해주면 홀랑 넘어가서 호구 짓만 하던 게 아니었을까.
사준은 순종적인 양진우를 바라보며 안쪽을 헤집던 손가락을 뒤로 잡아 뽑았다. 내벽에 발라놓은 오일이 주르륵 쏟아지면서 구멍이 빠끔거렸다.
“넣어도 돼요?”
“아, 좀, 침대에서….”
“끝에만 넣었다가 뺄게요. 터질 거 같아서 그래.”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이다. 그런 걸 아는데 엉덩이골에 닿는 뜨끈한 열기가 거절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진우가 말이 없는 틈을 타 사준이 귀두를 입구에 맞췄다. 손가락으로 충분히 풀어준 것 같은데도 빠듯하게 조여 물어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몰린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짝, 물에 젖은 엉덩이를 내리치는 손길에 차진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악! 뭐 하는 거예요?”
놀란 진우가 비명을 지르며 노려보자 사준이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콧대가 그대로 드러나면서 야성미까지 느껴졌다.
“힘 좀 빼요, 끊어지겠어.”
당당한 요구에 진우가 입술을 감쳐 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끝에만 넣는다면서요…!”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어요? 양진우 씨도 안에 찔러 주는 거 좋아하잖아.”
뻔뻔한 말과 함께 사준이 이번엔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엉덩이가 가볍게 흔들리면서 슬쩍 힘이 빠진 틈에 사준이 그대로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쑥 박아 넣었다.
“아, 하읏….”
단숨에 박힌 성기에 진우가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 기자님, 당신 진짜, 하아… 매너 거지 같은 거, 알, 아…?”
“그런 거치고는, 후으… 너무 좋아하면서 조이는 거 같은데요?”
사준은 짐짓 여유를 부렸으나 안쪽이 꽉꽉 조여대는 게 금방이라도 싸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아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쌀 것 같아서 사준은 콧등을 찡그렸다.
뜨거운 물에 익은 것인지, 아래를 풀어주는 손가락 때문에 열이 오른 것인지 붉게 달아오른 몸이 먹음직스러웠다. 거기다 살짝 젖은 눈꼬리, 매끈한 피부 같은 것들이 모두 시선에 사로잡혀 자신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사준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싸 달라고 한번 말해 볼래요?”
진우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사준을 바라봤다. 지금 콘돔도 안 쓰고 있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싸지는 않을 거니까, 하아….”
사준은 자신이 사기꾼 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끝에만 넣는다는 말을 시작으로 지금 또 무슨 말을 시키는 건지. 하지만 그런 파렴치한 말을 듣고 싶을 정도로 진우가 야했고, 귀여웠다.
“…시켜서 말하면 듣는 의미가, 있나?”
말을 할 때마다 안쪽에 들어있는 게 움찔거려서 진우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럼 안 시킨 셈 치면 되죠.”
사준이 능청을 떨자 진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말을 하는 것도 버거웠다.
“말해주면 세 번만 흔들고 뺄게요. 응? 지금 힘들잖아요. 침대에서는 양진우 씨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명명백백한 헛소리였다. 세 번만 흔들어? 그럼 하나, 둘, 셋 이걸 센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사준은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면서 졸랐다. 굵은 살덩이가 열을 가득 머금은 채 아래를 자극하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게 이렇게까지 좋을 일인가 싶은데 너무 좋았다.
사준은 진우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아래로 내려 발딱 일어나 쿠퍼액을 줄줄 흘리는 진우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앞뒤로 흔들었다. 앞에 자극이 가해지자 뒤가 절로 조였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엉덩이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살덩이에 내벽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야릇한 감각에 발바닥이 다 간지러웠다.
심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몸이 빠르게 흥분했다. 진우는 허리를 일으켜 세운 채 사준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사준의 어깨에 뒤통수를 문지르며 사준의 손에서 번지는 쾌감을 속절없이 느끼기 바빴다.
아, 흣….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찰나 사준이 진우의 귀두를 엄지로 꾹 막았다.
“혼자만 즐기기 말고.”
진우는 사준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물에 젖은 손은 힘도 안 들어가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게다가 있는 대로 흥분시켜 놓고 배출을 막는 건 약은 짓이다. 남자라면 사정의 욕구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말해줘요.”
낮은 목소리가 달큰하게 고막을 자극했다. 진우는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싸, 흣, 안에, 싸줘….”
마침내 가냘픈 애원이 흘러나왔을 때 사준은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야하게 들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파괴력이 더 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읏…!”
사준이 성기를 더 세게 쥐는 바람에 진우의 입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진우가 놔 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사준이 거칠게 움직였다.
퍽퍽퍽, 엉덩이를 때리는 것처럼 성기를 거칠게 처박던 사준은 낮은 욕설과 함께 뒤로 쑥 빼버리는 동시에 진우의 성기를 놓아줬다. 진우는 파들파들 떨면서 욕실 벽에 정액을 뿌려댔다. 눈앞이 하얘지면서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지려는 찰나, 경련하듯 움찔거리는 구멍 틈으로 사준의 성기가 다시 한번 밀고 들어왔다. 고환이 엉덩이 사이를 때리면서 절정에 달해 예민해진 구멍 안쪽을 두꺼운 성기로 짓눌렀다.
“아, 흐, 흡.”
배출의 오르가슴이 가시기도 전에 가해진 삽입의 오르가슴에 진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이제, 흣, 침대 가….”
진우가 조르자 더 버티지 못한 사준은 깊게 박아 넣었던 성기를 끄집어내 바닥에 정액을 뿌려댔다.
결국 욕조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침대로 장소를 옮겼다.
씻은 몸의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았으나 둘 다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할래요?”
사준이 콘돔 포일을 뜯으며 물었다.
“뒤로 해도 좋고 양진우 씨가 위로 올라오면 더 좋고.”
진우는 시트를 한번 붙잡았다가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그냥 이대로 해요.”
마음 같아서는 얼굴 보면서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의미를 두는 게 들킬 것 같았다.
“아, 그것도 좋죠. 양진우 씨 얼굴 야하니까.”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진우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사준이 진우의 허벅지를 넓게 벌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나 봐요.”
달콤한 명령과 함께 사준이 진우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리며 이미 한 차례 풀어진 구멍 사이로 성기를 들이밀었다.
“하아, 좋아….”
안쪽을 가득 채우는 살덩이에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결합된 몸에서 퍼지는 쾌감이 좋다는 말이 아니었다. 진우는 사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사준의 몸에 완전히 달라붙자 그의 체온이 구멍이 숭숭 난 곳을 메워 주는 것만 같았다. 인정하기 시작한 뒤로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이 널을 뛰었다. 오늘 일만 해도 사준이 자신의 편을 들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처음부터 양진우에게 몸 따로 마음 따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을 마주한 채 사준이 느릿하게 움직이자 쾌감이 피어올랐다. 새까만 눈동자에 홀릴 것만 같아 진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아, 이 기자님, 좋아요….”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흘러나오고 말았다.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사준은 진우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진우의 아랫입술을 당겨 물었다. 살짝 깨물었다가 놓아주고 입술을 댄 채 사준이 허리를 툭툭 쳐올렸다.
“…나도, 양 변호사님 좋아요.”
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찌릿, 꼬리뼈에서 시작된 짧은 전율은 이내 척추를 훑고 올라가 정수리를 강타하며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자극을 선사했다. 그렇게나 여러 번 섹스했는데, 처음으로 같은 마음이었다.
양진우한테도 드디어 구질구질하지 않은 로맨스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