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Never enough(1)
* * *
“아침 먹을래요?”
씻고 나온 사준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묻자 진우는 눈꺼풀을 깜박였다. 여기서 처음 묵었을 때도 사준은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사준이 침대 위에 있었고, 지금은 자신이 침대 위에 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아니, 사실 가장 큰 변화는 마음가짐이겠지만….
“싫어요?”
또 거절이냐고 묻는 것 같아 진우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바람에 허리가 찌르르 울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연어 샌드위치.”
또렷하게 말하자 사준이 피식 웃더니 수건을 바닥에 던져 놓고는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높이를 맞춘 채 진우를 바라봤다.
“어제 햄버거 먹었으니까 아침은 밥 먹어요.”
“아….”
“여기 호텔에 한식당 있던데 거기서 먹고 가는 거 어때요? 아니면 룸서비스로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
진우는 방 안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한껏 굴러다닌 방에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서 먹어.”
섹스하는 중도 아닌데 진우의 입에서 반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의식한 건지 아니면 무의식인지 모르지만, 양진우가 느끼는 거리감이 확 줄어든 것만은 확실했다. 사준은 속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래요?”
당장에라도 밖에 나갈 것처럼 굴었으면서 사준은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진우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커다란 손이 살결을 스치자 몸에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사준은 진우의 어깨에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불 속에서 발가벗고 있는 거, 왜 이렇게 야하죠?”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 내내 벗은 몸을 봐 놓고 새삼 벗고 있는 게 야하다니.
“아직 시간 있는데.”
사준의 말에 진우가 눈동자를 움직여 테이블 위에 있는 시계를 힐끔 봤다.
“조금만, 괜찮죠?”
사준이 허벅지 안쪽을 큰 손으로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뜩이나 사귀는 남자한테는 호구 기질이 강했었는데, 그 기질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좋네요.”
칭찬하는 말에 진우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졌다. 말로 하는 것보다 솔직한 반응이었다. 사준은 어제 마주친 그 남자가 말했던 애정 결핍을 이제는 100%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양진우는 그냥 몸만 붙이는 것보다 달콤한 말을 듣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 그런 낌새가 있긴 했지만 ‘애정 결핍’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명확하게 정의하자 그 실체가 좀 더 뚜렷해졌다.
사준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진우의 목덜미와 어깨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떼며 진우를 흥분시켰다. 간밤의 열감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은 사준의 입술에 반응하며 부드럽게 떨렸다.
진우가 팔을 들어 사준의 목에 감자 입술이 겹쳐졌다. 어젯밤의 정사를 떠오르게 하는 깊은 입맞춤에 목에서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준의 손이 진우의 가슴판을 더듬었다가 옆구리를 쓸어내리고 허벅지 안쪽을 자극하더니 엉덩이 사이 은밀한 곳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이미 풀어져서 말랑거리는 몸은 너무 쉽게 사준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찌걱찌걱,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음란한 물소리에 진우의 호흡이 박자를 잃고 흐트러졌다.
“하, 아침부터….”
“난 밤에 하고 아침에 또 하는 거 좋던데, 양진우 씨 몸이 완전히 풀어진 게 진짜 말랑거리거든요.”
사준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을 작정인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더니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금방 벌어지는 거, 존나 야해요.”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인 음탕한 비속어에 진우가 입술을 감쳐 물었다.
“위로 올래요?”
진우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서 사준을 바라봤다.
“어제는 내가 계속 위에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위랑 뒤에 있던 것이 맞지만.
“이번엔 양진우 씨가 움직여서 빨리 끝내고 밥 먹으러 가요.”
위해주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사준은 아침부터 제 위에서 야하게 움직이는 진우를 보고 싶은 목적이 더 컸다. 야한 양진우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몇 번이든 쌀 수 있으니까. 싫다, 좋다 말하기 전에 재빠르게 콘돔을 씌운 사준이 제 위로 진우를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사준의 허리에 걸터앉은 진우는 팔을 뒤로 뻗어 성기를 감싸 쥐었다. 안 한다고 하면서 진을 빼봐야 결국 하고 말 거라면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진우는 콘돔에 싸인 미끌거리는 성기를 주물렀다가 허리를 들어 입구에 맞춘 다음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귀두를 살짝 머금자 기다렸다는 듯 성기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아, 하으. 한숨 같은 신음이 절로 흘러내렸다. 배 안쪽이 차오르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 진우가 숨을 몰아쉬자 사준이 상체를 일으키며 골반을 아래로 확 잡아당겼다.
“하윽…!”
뜨겁고 단단한 기둥이 제일 깊은 곳까지 단박에 파고들자 뒤틀린 신음이 절로 튀어 올랐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을 느끼며 덜덜 떠는 진우의 등허리를 사준이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온이 닿는 면적이 커지자 흥분도 배가되는 것 같았다.
사준은 느릿느릿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출렁거리면서 두꺼운 성기가 안쪽을 자극했다.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 으응….”
진우는 고개를 움직여 사준의 입술을 찾았다. 감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입술이 닿기 무섭게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다가 혀를 밀어 넣어 얽자 위아래가 다 사준과 연결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준은 하반신에 힘을 주고 위로 쳐올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살과 살이 부닥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흥분한 몸이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아, 읏… 나보고… 움직이라, 더니… 흣.”
“한참 걸릴 거 같아서요.”
“못 참겠어서가 아니, 고?”
“들켰네?”
사준은 능청을 떨면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성기가 내벽을 문지르고 비벼댈 때마다 점막이 열락에 젖어 꿈틀거렸다. 철퍽철퍽, 젤과 쿠퍼액이 뒤섞인 아래가 흘레붙으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사준은 진우한테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위에 올라탄 양진우가 페이스를 맞추려는 것처럼 허리를 돌릴 때마다 딱 죽을 맛이었다. 오래가지 않아 정액을 터트릴 것 같아 빠르게 밀어붙이자 진우가 사준의 어깨에 짧은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아, 하으, 으흣…!”
일순간 진우의 내벽이 꽉 조여들며 목이 뒤로 넘어갔다. 사준은 온몸을 쥐어짜는 것 같은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액을 쏟아냈다. 부르르, 전신이 떨리는 감각은 깔끔한 절정이었다.
진우가 몸을 축 늘어트린 채 사준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자 사준은 진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침부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저지른 다음이었다.
“…샤워 다시 해야겠다.”
씻은 게 무색하게 땀에 젖은 몸을 보고 사준이 중얼거리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따로 할 거야.”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설마 또 하자고 하겠어요?”
“그런 거 진즉 팔아 버린 줄 알았는데?”
“신뢰가 너무 없네.”
그런 건 신뢰할 만한 면을 보여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거 보면 확실히 양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 진우는 늘어진 몸을 추슬러 느릿하게 일어섰다. 아침 먹고 출근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 * *
‘하아, 이 기자님, 좋아요….’
‘…나도, 양 변호사님 좋아요.’
좋아한다는 말에 좋아한다고 대답했으니 맞는 거지? 그런 거겠지?
사무실 책상에 앉은 진우는 처리해야 할 서류를 외면한 채 어젯밤 일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설마 고백이라고 생각 안 한 건 아니겠지? 그냥 분위기 띄우려고 한 말이라던가…. 아니, 근데 분명히 양 변호사님 좋다고 했잖아. 그럼, 역시… 그거 맞는 거지?
진우는 아닐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밀어붙였다. 사실 저울의 추가 기운 상태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부풀어 오른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잃어버린 진우는 몇 번이나 어젯밤을 떠올렸다. 사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재생되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진우는 열이 올라 붉어진 뺨을 책상에 비비면서 식혔지만, 진정되기는커녕 심장 박동만 빨라졌다. 사귀는 건가? 맞지? 서로 마음이 통하면 그다음부터는 연애잖아. 오늘부터 1일입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사귀자고 말하는 것도 좀 유치하고. 굳이 말로 안 해도 다 아는 거 아닌가.
이사준은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었을까? 분명 처음부터는 아니었을 건데…. 내가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서 그런 마음이 든 건가? 아니면 나보다 더 먼저였나? 그러고 보면 장태준을 질투하는 것 같은 말도 했었지. 스토커 때문에 집에 오라고 한 것도 걱정한 거겠지? 하긴, 사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데 선뜻 집에 오라고 한 것부터가 그런 거겠네…. 와, 씨, 미치겠다.
진우는 책상에 이마를 문질렀다. 사준이 보여준 호의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연애가 처음도 아닌데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좀처럼 진정이 안 됐다. 당장 퇴근하면 보게 될 사준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자연스럽게 대화는 할 수 있을지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애도 아니고 왜 이러냐, 어떡하지? 보통 연애할 때 어땠더라? 어떻긴 뭘 어때….
진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가진 경험치는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것들뿐이라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심호흡과 함께 몸을 일으켜 앉은 채 뺨을 긁적였다.
‘이거 뭐,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십 대네.’
매번 이런 식으로 홀려 버리니까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거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상황에서 침착한 게 이상한 거다.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를 향한다는 건 이성애자끼리도 힘든데 동성이라면 말해 뭐하겠나. 그 엄청난 확률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후으….”
진우는 긴 한숨을 뱉으며 미뤄뒀던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이사준을 어떻게든 밀어내야 할 때였다. 이 이상 생각하면 분명 오늘 내로 처리할 일을 반도 못 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분명 생각을 안 하려고 했는데, 서류철 속에 있던 사건 파일 내용이 명예 훼손이었다. 그리고 진우한테 명예 훼손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장태준이었다.
장태준이 알면 괜찮을까? 나야 마주칠 때 잔소리 몇 번 듣는 게 다겠지만 이사준은 회사에서 매일같이 봐야 하는데…. 아니, 근데 장태준이 우리 사이 갖고 뭐라 하는 것도 웃긴 거 아닌가? 저는 신입 기자랑 사내 연애하려고 하면서? 그래, 눈치 볼 이유가 없지. 그래도 일단 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분명 이사준이 헤테로임을 들먹이면서 안 좋은 소리만 잔뜩 할 거다.
진우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마음이 자꾸만 부풀어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 * *
칼같이 퇴근해 대형 마트에 도착한 진우는 커다란 카트에 이것저것 재료를 채우며 바쁘게 움직였다. 저녁으로 부대찌개를 끓일 생각이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같이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영화나 소설, 혹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완벽한 연애를 현실에서는 할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런데도 그린 것처럼 예쁜 연애를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고 싶었다.
재료를 다 고른 진우가 셀프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자 띡, 띡, 단조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상품을 바코드에 찍고 내려놓는 단순 행동을 반복하며 진우는 또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지금 상황은 어쨌든 양진우가 이사준 집에 얹혀사는 거니까. 동거하려면 좀 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데… 역시 이사 갈 집을 알아봐야 하나? 스토커 때문에라도 이사 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되면 둘이 같이 살 집을 알아봐야 하는 거 같은데…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특별히 이사준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같이 살 집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어쩌지 못하면서 진우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이렇게 기대하다 실망하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마트에서 나와 운전하는 동안에도 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집 생각뿐이었다. 너무 큰 집은 아니었으면 했다. 싸워도 눈이 닿는 곳에 있어야 금방 풀릴 거니까.
진우는 자신이 살던 집과 이사준의 집을 비교하다 또 혼자 실실 웃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스토커한테 고마울 정도다. 처음에 이사준이 같이 살자는 말을 한 것도 스토커 때문이었으니까.
집에 돌아와 부대찌개를 다 끓이고 한참이 지났지만 사준이 올 기미가 안 보였다. 진우는 먼저 먹을지, 좀 더 기다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언제 오느냐고 물어볼지 고민하다 결심한 듯 밥솥을 열었다. 원래도 퇴근 시간을 보고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들쑥날쑥한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오늘 저녁은 약속하고 만든 게 아니라 혼자 들떠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 안 오느냐고 따지는 건 혼자 너무 들뜬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연락하면 분명히 탓하는 어조로 말하게 될 거고 그런 행동을 달갑게 여기는 상대는 여태 한 명도 없었다.
다음에는 미리 물어보고 만들어야겠다.
진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밥을 푸고 찌개를 옮겨 담아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움직였다. 절그럭,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혼자인데도 유독 크게 느껴졌다.
띠릭―.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에 거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진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현관까지 나가면 기다리고 있던 티가 너무 날 것 같아 최대한 담담하게 있고 싶었다. 연애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사준처럼 의연하게 굴고 싶었다. 괜히 설레발치다가 남자랑 처음 연애하는 사준이 부담 느끼고 도망이라도 치려고 하면 안 되니까. 실패하는 연애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왔어?”
소파에서 고개만 돌린 채 묻자 거실에 들어선 사준이 의아한 눈길로 진우를 빤히 보다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어?”
“아니, 그냥요. 이젠 반말이 더 익숙해졌나 싶어서요.”
“어? 아니, 뭐…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진우가 멋쩍은 듯 말끝을 늘이자 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편하게 해요.”
사준은 겉옷을 벗어 소파 위에 툭 던져 놓으며 말을 이었다.
“나 양 변호사님이 반말하는 거 좋아요, 섹시하니까.”
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황당해했다. 아무래도 이사준의 미적 기준이 의심스럽다.
“근데 이거 무슨 냄새예요?”
사준이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아, 부대찌개 끓였는데 밥 안 먹었으면 먹든지.”
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던지고 손에 쥐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청각은 사준을 따라 움직였다. 부엌에서 냄비 뚜껑을 열어본 사준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양 변호사님은 먹었어요?”
“어, 난 먹었어.”
진우는 서류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사준의 반응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여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 이런 거 할 거면 미리 연락해요. 기껏 했는데 같이 먹으면 좋잖아.”
“…일 때문에 바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더 연락해야죠.”
무슨 의미냐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자 사준이 싱긋 웃었다.
“기껏 차렸는데 혼자 먹기 아깝잖아요.”
“아까울 것도 많네.”
진우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목 언저리가 뜨끈뜨끈하고 가슴 한쪽이 간질거려서 견디기 어려웠다. 혹시 이사준이 독심술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 있을 리 없다.
“잘 먹을게요.”
찌개를 데우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켜면서 사준이 말하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달력은 한겨울이고 뉴스에서는 매일 한파를 보도했지만, 진우의 마음은 봄이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유독 썰렁하고 쓸쓸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스토커 역시 진우의 기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마지막 사진을 보낸 뒤로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평화로웠다.
“이대로 사라져 주면 좋겠는데.”
“네?”
중얼거린 혼잣말에 옆에 서 있던 김 변이 반응을 보였다.
“아, 아니에요.”
진우는 퍼뜩 정신을 차린 채 고개를 저었다. 점심 먹으러 가려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는데 혼자 딴생각에 빠져서 옆에 김 변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변호사님 요즘 딴생각 많이 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그랬어요?”
진우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김유민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퇴근도 빨리하려고 하고, 서류 보다가 멍하게 있기도 하고. 아, 아니, 일을 못 한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김 변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 덧붙이다가 눈동자를 슬쩍 굴려 진우의 안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연애라도 하세요?”
“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연애는 무슨….”
연애한다고 하면 질문이 쏟아질 게 너무 뻔했기에 진우는 서둘러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그냥 이사 갈 생각하느라.”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뱉은 말은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이사 가시게요?”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아니고 그냥 생각 중이에요.”
“이사할 거면 생각할 게 많으시긴 하겠네요,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고마워요.”
진우는 싱긋 웃으며 때마침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김유민이 사준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괜히 더 찔렸다. 그나저나 진짜 말 나온 김에 이번 주말에는 이사할 집 같이 보러 가자고 해 볼까…. 겸사겸사 데이트도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식당을 향해 발을 내디디던 진우는 데이트라는 단어를 떠올린 진우는 손을 꼭 쥐었다.
사소한 것에도 자꾸만 간질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유치하다는 자각이 있는데도 멈추질 못하겠다.
* * *
타닥, 타닥.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실에 가득했다. 진우는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준을 보면서 커피를 내렸다.
오늘은 금요일 밤, 방송이 있던 날 치고는 빨리 온 편인데 뭐가 그리 바쁜지 사준은 씻고 나오기 무섭게 노트북과 씨름 중이었다.
“마셔.”
소파 테이블 위에 머그잔을 두며 진우가 말했다.
“고마워요.”
사준은 입으로는 고맙다고 했으나,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은 좀처럼 머그잔을 향해 움직일 기미를 안 보였다. 진우는 소파에 앉으면서 사준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언제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바빠?”
“아뇨, 거의 다 했어요.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별건 아니고. 내일 뭐 해?”
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머그잔으로 입가를 가린 채 말했다.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은데 요즘 양진우 심장은 이사준한테 미친 듯이 반응하고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일을 하려고 해도 두근거렸다. 틈이 맞을 때마다 섹스했으면서 고작 이런 게 뭐가 대수라고 이렇게 표정 관리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바닥에 앉아 있던 사준이 목을 뒤로 젖혀 진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준의 뒤통수가 진우의 무릎을 톡톡 건드리자 발가락이 다 간질거렸다.
사준은 괜히 시선을 피하는 진우를 보며 입술을 할짝댔다. 처음과는 다르게 거리감이 거의 없어진 거 같은데 아직도 가끔 저런 식으로 어렵다는 듯이 구는 게 신기했다.
“내일은 친구 결혼식 있는데.”
“아….”
진우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럼 일요일은?”
“일요일에는 일해야 해요. 팀장님이 시킨 게 좀 있어서.”
주말에 일정이 있다는 말에 진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한가한 사람이 아닌 건 알았지만 모처럼 큰맘 먹은 상태라 그런지 살짝 서운해지려고 했다.
“특종 터트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장태준은 또 뭘 시킨 거야?”
진우는 자리에 없는 태준을 원망하는 투로 물었다.
“특종은 특종이고. 다음 뉴스 또 준비해야 하니까. 제 아이템 다 별로라고 하더니 팀장님이 하나 던져줬어요.”
“장태준이 대단한 거 줬어? 뭔데?”
별생각 없이 묻던 진우는 입을 딱 다물었다.
“아, 말 안 해줘도 돼.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고….”
취재 준비 중인 아이템에 관해 물은 건 실수였다.
“뭘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굴어요? 안다고 해서 양 변호사님이 뭘 할 것도 아니면서. 재벌 비리 관련인데 아직 심증만 있어요.”
진우와 다르게 사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또 그런 걸….”
진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재벌 비리를 보도하겠다는 말인데, 연예인 마약 사건만큼이나 골치 아플 게 뻔했다.
“그러게요. 우리 팀장 냄새는 진짜 끝내주게 잘 맡아요. 어디서 그런 걸 알아 오는지 모르겠어.”
진우는 제 무릎에 뒤통수를 비비는 사준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디 회산데?”
“삼하 건설.”
사준은 진우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변호사님도 알죠? 거기 사장이 김현이 스폰서라는 얘기 있던데.”
“…이 기자님.”
진우는 엷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나한테 일부러 얘기하는 거죠? 김현이 스폰서가 내 클라이언트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랬었나?”
사준이 몰랐다는 듯 능청을 부리며 몸을 돌렸다. 사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늘 미팅에서 태준이 삼하 건설 얘기를 꺼냈을 때, 사준은 진우에게 물어보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진우가 정보를 넘길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양진우는 고객 정보를 순순히 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이 진우에게 물어보겠다고 한 건 진우가 태준과 따로 만나지 않길 바라서였다. 기민한 태준이라면 진우의 변화를 금방 알아차리고 쓸데없는 말을 할 것만 같았다. 근데 좋은 꿈 꾸고 있는 사람을 억지로 깨워서 현실을 들이밀 필요는 없는 거다.
어느새 사준은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헐렁한 반바지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큰 손이 진우의 허벅지 뒤쪽을 가볍게 주물렀다.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진우가 사준을 피해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사준이 팔을 뻗어 진우의 허리춤을 매만졌다.
“넘어가려고 하는 거 아닌데. 양 변호사님이 물어봤잖아요.”
사준은 진우의 사타구니에 뺨을 비비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김현이 변호 준비하면서 들은 말 없어요?”
“난 해 줄 말 없어, 고객 정보잖아.”
“치사하게, 나한테는 말 안 해 주는 거예요? 우리 팀장한테 정보 흘린 거 양 변호사님인 거 같은데.”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태준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진우는 눈만 흘겼다. 김현이 사건 취재할 때 태준에게 힌트 준 건데 그걸 하필 또 사준에게 맡길 건 뭔지. 장태준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해 줄 말 없어. 그럴 목적으로 이러는 거면 손 치워.”
진우가 사준의 손을 제법 냉정하게 밀어내며 눈을 뾰족하게 떴다. 사준은 얄밉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진우를 향해 샐쭉하게 웃었다.
“우리 변호사님은 일할 때는 어쩜 이렇게 칼 같은지 몰라, 다른 건 느슨한데.”
사준은 진우의 팬티와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잠깐, 하지 마…!”
진우가 반쯤 아래로 내려간 바지 고무줄을 붙잡자 사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했다. 커다란 강아지처럼 순종적인 척하는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살짝 귀여워 보여서 난감했다.
“왜요?”
“할 마음 없었거든?”
“그럼 지금부터 할 마음 생기게 해 줄게요.”
“무슨….”
“직업의식 투철한 변호사님이 섹시해서 꼴렸어.”
“일 안 해? 바쁜 거 아니었어?”
“나중에 해도 돼요, 지금은 이게 더 하고 싶어졌어요.”
말을 툭 내뱉은 사준은 더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진우의 팬티와 바지를 한 번에 잡아 내리고 진우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양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이사준…!”
순식간에 다리 사이가 허전해진 진우가 말 좀 들으라는 듯 소리쳤지만 사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 사이로 혀를 쏙 내밀어 진우의 성기 기둥을 쑥 핥아 올렸다. 말캉거리는 게 성기에 닿자 몸 중심에 열기가 확 몰아쳤다.
으응, 진우의 목에서 가릉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오자 사준은 진우의 성기 기둥을 혓바닥으로 핥아 올리다가 귀두를 입술로 살짝 물고 쯉쯉 빨았다. 성기 전체가 감싸인 것도 아닌데 진우는 허리가 빠질 것 같았다. 가죽 소파 위에서 엉덩이가 미끄러지면서 다리가 바들거렸다. 이왕 빠는 거 제대로 빨아 줬으면 싶은데 사준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귀두 끄트머리만 입술로 물고 쪽쪽 빨았다.
아, 하아…. 모자란 성감에 진우가 아쉬움 가득한 숨을 몰아쉬자 사준이 입에 물었던 성기를 뱉어내고 셔츠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헐렁한 셔츠 속으로 파고든 사준이 진우의 배꼽 주변을 혀끝으로 길게 핥아 올렸다. 매끈한 피부 위로 퍼지는 축축한 혀의 감촉에 발가락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그만하라고 하려던 말은 입이 아니라 머릿속 밖으로 튀어 나갔다.
진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만 연신 비틀었다. 간질거려서 도망치고 싶은데 사준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배꼽 안쪽을 파고들었다. 미끄덩거리는 혀가 욕심을 부리며 좁은 배꼽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읏, 거기 하지, 마… 이상해….”
촉수처럼 움직이는 혀가 배꼽을 자꾸만 간지럽히자 아랫배 안쪽이 덩달아 뜨거워졌다. 축축해진 성기 끝에 말간 액이 고이더니 주르륵 떨어지며 기둥을 타고 흘러내렸다.
츕츕, 음란한 소리가 진해질수록 성기에서 흘러내리는 액의 양도 많아졌다. 음모까지 젖어 드는 음란한 느낌을 참지 못하고 진우가 허리를 튕겨 올렸다.
“아, 으, 잠깐….”
“잠깐 뭐요?”
사준은 듣고 있다는 듯 대꾸하더니 입술을 옮겼다. 한껏 희롱당한 배꼽이 달콤하게 욱신거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각에 녹아내릴 것 같은데 사준의 입술이 이번엔 갈비뼈에 닿았다. 촉촉, 갈비뼈의 흔적을 따라 사준의 머리가 점점 위로 올라왔다.
사준은 목적지를 향해 느긋하지만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간지럽히듯 장난스럽게 움직이던 입술이 애무에 달아오른 가슴팍에 닿았다. 사준은 진우의 심장 고동을 입술로 느끼면서 살짝 웃었다. 발딱발딱 뛰는 심장이 진우가 어떤 마음인지 알려 주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심장 엄청 뛰네요.”
“읏….”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진우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사준이 유륜을 할짝댔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기에 모이면서 몸 전체가 뜨거워졌다.
“아, 거기 하지, 마아….”
흥분을 숨기지 못한 진우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게 흥분을 더 부추긴다고는 생각 못 하는 건지 진우는 사준이 붙잡고 있는 허리를 연신 바르작거렸다. 사준은 진우의 몸을 혀끝으로 핥으면서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만났던 방송국 회의실이나 로비, 법원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양진우 변호사를 떠올렸다.
꼼꼼하게 차려입은 정장 속에 이런 야한 몸을 감춰뒀다니, 놀라울 지경이다. 이런 몸으로 그렇게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든다. 홀딱 벗겨 놓고 깨끗한 피부가 울긋불긋해질 때까지 괴롭히고 싶은, 가학심과 비슷한 마음이 자꾸만 음심을 자극했다. 사준은 뻐근해지는 제 아랫도리를 느끼며 혀를 길게 내밀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진우의 유두를 맛보듯 핥아 올렸다.
“아, 흣.”
유두가 약하다는 걸 숨기지 못한 신음이 사준의 고막을 자극했다. 톡 튀어나온 유두를 입속으로 깊게 빨아들이자 진우가 허리를 가볍게 떨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성기 끝에서 또 한 번 사정 전 분비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진우는 발가락을 말아쥐고 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았다. 옷 속에서 움직이는 사준의 머리카락이 피부를 스치며 간지럽힐 때마다 뇌까지 다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응, 읍….”
사준이 예민하게 곤두선 유두를 혀끝으로 농락하기 시작했다. 유륜 전체를 입술로 빨았다가 톡 튀어나온 부근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극이 거세질수록 진우의 유두가 부풀어 오르면서 딱딱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더 빨아 달라는 것처럼 가슴을 바짝 내민 채 진우는 사준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신음했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입술이 닿은 곳부터 전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양진우 씨는 젖꼭지 빨아 주는 거 진짜 좋아한다니까.”
놀리듯 중얼거리자 진우가 도리질 쳤다. 있는 대로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게 아니고….”
“아니긴요, 젖꼭지 좀 빨아줬다고 여기까지 다 젖었는데.”
사준은 쿠퍼액이 흘러 축축하게 젖은 회음부를 손가락으로 슬쩍 문지르며 말했다. 사준이 말을 할 때마다 뜨거운 입김과 혀가 닿아서 허리가 달달 떨렸다.
“아, 으음….”
진우가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자 사준이 쭙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더니 셔츠 속에서 빠져나왔다. 괴롭히듯이 빨릴 때는 부끄러운데 막상 떨어지자 아쉬움이 더 컸다. 손을 대지 않은 구멍까지 달콤하게 욱신거렸다.
사준은 진우의 붉어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셔츠를 위로 말아 올렸다.
“벗어요.”
진우가 홀린 것처럼 양팔을 위로 들어 올리자 사준이 헐렁한 셔츠를 단숨에 머리 위로 벗겨버렸다. 털썩, 바닥에 옷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상체가 썰렁해졌다.
붉게 달아오른 상체를 보며 사준은 입맛을 다셨다. 생기가 도는 것만 같은 피부가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 뿌듯했다. 사준은 진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다 고개를 숙여 쇄골을 이로 긁어내렸다. 그리고는 여태 입으로 희롱하던 유두가 아닌 반대쪽 유두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여기도 섰네요.”
“읏…!”
“빨아달라고 안달하는 거 같아.”
“그런 거, 아니….”
“양진우 씨처럼 젖꼭지 예민한 사람 처음 봤어.”
음란함을 지적받은 것 같아 진우는 귀까지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런 걸 보고 개발 당했다고 하는 건가?”
“지금 무슨 소릴, 흣….”
아니라고 반박하기 전에 사준의 혀가 유두에 닿았다. 일부러 보란 듯이 혀를 길게 내밀어 핥아 올리는 외설적인 행동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사준은 민감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혀끝으로 건드리다가 입술을 모아 세게 빨아댔다. 마치 뭔가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세게 빨아대는 것에 온몸이 다 빨리는 것만 같았다. 얼얼할 정도로 세게 빨려서 아릿하면서도 짜릿했다.
쯉쯉, 사준이 엄마 젖을 빠는 아이처럼 게걸스럽게 빨아대자 유두 대신 진우의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올각올각 흘러나왔다. 이러다가는 가슴만 빨려서 사정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극이 강렬했다.
“아, 흡, 으응….”
질질 흘러나온 액이 기둥을 타고 엉덩이 사이까지 적셨다. 유두를 빨리는 것만으로 너무 느끼는 것만 같아 진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사준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부끄러워서 밀어내고 싶은데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어 밀어낼 수도 없었다.
사준은 진우의 유두를 한쪽은 혀끝으로 농락하면서 다른 한쪽도 손가락으로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양쪽을 동시에 점령당하자 한쪽만 빨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감이 진우의 몸을 덮쳤다.
“아, 흣… 그만, 자꾸, 거기… 하지, 으읏….”
“하지 말라는 거치고는 너무 느끼는 거 같은데요?”
사준이 유두를 이로 잘근잘근 깨물면서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요, 더 빨아 달라고. 그럼 원하는 만큼 빨아 줄 테니까.”
진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말이 야하면서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뭐, 말 안 해도 빨긴 할 거지만.”
“그게, 무슨….”
결국 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말 아닌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양진우 씨는 몸이 더 솔직해.”
사준의 손이 아래로 움직여 진우의 성기를 가볍게 훑으며 아래로 움직였다.
“젖꼭지 좀 빨아 줬다고 여기까지 젖었잖아.”
음탕한 말을 담담하게 속삭이는 것에 수치심이 몰려왔다. 진우가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사준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사준은 손을 아래로 내려 회음부를 꾹 눌렀다. 축축하게 젖은 회음부를 손가락으로 누르자 안쪽이 다 저릿저릿했다. 편편한 부분을 손끝으로 쓰다듬듯이 문질러 대는 통에 오싹오싹했다.
삽입한 것도 아닌데 애무만으로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진우가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자 사준이 몸을 일으켜 진우의 눈가를 혀끝으로 할짝댔다.
사준은 소파에 앉아 있는 진우의 다리 사이에 무릎으로 서서, 달래주듯 얼굴 여기저기에 버드 키스를 내리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회음부를 뭉근하게 누르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내려가더니 주름을 세는 것처럼 움직였다. 세밀하게 밀착한 주름 사이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안쪽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아읏, 구멍이 벌어지는 감각에 진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 양진우 씨가 흘린 걸로 이미 구멍까지 다 젖었어.”
사준의 말대로 쿠퍼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구멍이 손가락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여기도 흐물흐물 풀렸어요.”
사준이 진우의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혀끝으로 귓바퀴를 할짝댔다.
“혼자 풀어두기라도 했어요?”
“아니거든…!”
“그럼 진짜 젖꼭지 빨아 주니까 여기까지 적신 건가?”
진우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음탕했다.
“여자도 아닌데 구멍까지 적시다니, 얼마나 야한 거야.”
사준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야하게 들려 진우는 사준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게 아니고….”
“아니면? 물 좆이에요?”
“뭐?”
“질질 흘리는 좆 보고 물 좆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건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찰나, 입구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쭉 펼쳐졌다.
“뭐가 됐든, 그냥, 야하네요.”
사준이 손가락을 곧게 뻗어서 진우의 내벽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진짜, 밝히는 거 같아서, 존나 야해.”
혀끝이 고막을 자극하고 손가락이 안쪽을 자극하자 허리가 다 저릿했다. 진우는 사준에게 완전히 몸을 농락당하는 것만 같았다.
사준은 손가락을 앞뒤로 움직이며 진우의 유두를 다시 빨기 시작했다. 끈적하게 손가락이 움직이자 꺼덕이는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손가락은 두 개가 됐고, 사준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구멍에서 질퍽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을 쓰다듬는 것처럼 사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풀어진 구멍이 절로 발름거렸다.
“아, 흣, 읍….”
오싹오싹한 쾌감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내벽이 멋대로 사준의 손가락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면서 더 두껍고 더 큰 걸 원하는 듯 오물거렸다. 뜨거운 열기가 주는 쾌감을 기억하는 몸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온몸으로 욕심을 부렸다.
“아직도 할 마음이 안 생겼어요?”
진우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준을 바라봤다. 눈까지 풀어져 시야가 가물거렸다.
“응?”
조르듯 묻는 사준의 목소리가 진우의 엉덩이 사이를 자극했다. 진우의 입이 아니라 발씬거리는 엉덩이가 대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해도 되죠?”
확인 사살하는 질문에 진우가 마침내 항복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사준이 진우에게서 살짝 떨어져 바지춤에서 성기를 끄집어냈다. 사준은 테이블 아래 있던 바구니에서 젤을 꺼내 성기에 대충 바르고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도 죽 짜냈다. 쿠퍼액으로 젖은 구멍이 질척해지자 성감이 한층 더 진해졌다. 진우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더 넓게 벌리면서 사준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사준이 진우의 허리를 아래로 잡아당겨 소파 끝에 엉덩이를 맞췄다.
“다리 잡아요.”
무릎 뒤를 붙잡으라는 말에 진우가 머뭇거리자 사준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얼른.”
진우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양쪽 무릎 뒤를 손바닥으로 붙잡자 몸이 반으로 접히면서 엉덩이가 위로 들렸다. 자연스럽게 은밀한 입구가 훤히 드러났다.
사준은 소파 등받이를 붙잡은 채 흉흉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로 흥건하게 젖은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뜨거운 열감이 느껴지는 살덩이가 엉덩이골을 문질러 대자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다 간질거렸다. 빨리 넣어주길 바라며 진우가 마른침을 삼키자 사준이 속닥였다.
“하아, 콘돔 가지러 가기 귀찮아요.”
“소파 테이블 아래, 흣, 있잖아….”
훤히 보이는 개수작인데 말을 단호하게 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네.”
사준이 짧게 혀를 차더니 진우의 엉덩이 사이를 귀두 끝으로 꾹 눌렀다.
“콘돔 쓰기 싫어요.”
“아니, 잠, 흣….”
“이 정도는 그냥 알아서 눈치채주면 안 되나?”
눈치 없음을 탓하는 어조에 진우는 기가 막혔다. 처음부터 거지 같은 핑계를 댄 건 자기면서 이런 식으로 덤터기 씌우는 건 아니지.
“이사준, 너… 읏.”
사준이 허리를 느긋하게 아래로 내리자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면서 숨이 차올랐다. 진우는 다리를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흡….”
사준이 허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성기를 쑤셔 넣자 압박감이 더 진해졌다.
“하아, 그만 좀, 조여요. 이제 반 넣었는데 끊어지겠어.”
“네가, 큰 거잖아…!”
신경을 긁으며 탓하는 어조에, 그 언젠가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말을 입에 담은 순간이었다. 안쪽을 느릿하게 파고들던 사준의 성기가 한 번에 퍽 치고 들어오니 깊게 박혔다. 하윽…. 단숨에 차오른 아래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내벽을 가득 채운 사준의 성기가 불끈거리며 한층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진우가 놀란 눈을 하고 올려다보자 사준이 싱긋 웃었다.
“하아,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는데.”
“무슨….”
“양진우 씨가 보기에도 내가 크구나.”
사준의 말 앞에는 경험 많은 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만 같았다. 진우가 눈을 흘기자 사준이 달래듯이 진우의 뺨에 버드 키스를 날렸다.
“왜 그렇게 봐요? 내 좆 커서 좋다는 의미 아니었어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에 진우는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섹스할 때 사준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무슨 말을 하든 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데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내일 결혼식 끝나고 봐요. 얼굴만 비추고 올 테니까 같이 밥 먹어요.”
대꾸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지금 사준의 말을 진우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사준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아까 이 말 하고 싶었죠?’ 라고 묻는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역시 눈치 귀신.’
진우는 사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같이 하는 시간 동안 이사준을 앞지를 수 있는 날이 올까? 진우가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끄덕 움직이자 사준이 샐쭉하게 웃으며 허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사준의 성기에 꿰뚫린 몸 전체가 흔들리면서 아래쪽에서부터 쾌감이 파동처럼 번졌다.
“아, 흣, 이사준, 으응….”
이름을 부르자 사준이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유두를 입에 물었다. 쯉쯉, 입술을 모아 유두를 빨아대자 진우가 참지 못하고 허리를 튕겼다. 양쪽에 자극이 가해지자 점막이 꿈틀거리며 사준의 성기에 차지게 달라붙었다.
“여기 빨아 주는 게 그렇게 좋아요? 하아, 또 조였어.”
“아니, 으응, 하아, 이사주운….”
말을 제대로 하기 전에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했던 물음이 아닌 것처럼 사준이 움직였다. 퍽퍽퍽, 고환까지 쑤셔 박을 기세로 강하게 때려 박을 때마다 진우는 눈앞이 다 어질거렸다. 사준과 맞닿은 모든 곳에서 쾌락이 피어오르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하아, 쌀 거 같아….”
사준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에… 싸지, 마. 흣….”
“왜요, 임신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
“내가 다 빼 줄게요.”
사준이 진우가 느끼는 지점을 쿡쿡 찌르면서 놀리듯 허리를 흔들었다. 추삽질이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꼭 누군가한테 쫓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진우는 사준의 어깨에 매달린 채 신음했다.
“아, 으응, 이사준, 하아, 이, 사준….”
저를 안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듯 연신 이름을 부르자 사준이 진우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왜 자꾸, 그렇게 불러, 후으… 하아… 뭐 해 달라고.”
“아, 아니이… 사준, 아, 흐으읏…!”
퍽퍽퍽,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이 아래서부터 치달아 올라 정수리를 강타했다. 배 속에서 벼락이라도 치는 것만 같아 진우는 온몸을 경련하며 절정에 달하고 말았다. 사준이 진우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동시에 안쪽에 박힌 성기가 불끈거리더니 뜨거운 액을 쏟아냈다. 사준이 쏟아낸 것으로 내벽이 가득 차면서 점막이 멋대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절정이 가라앉질 않아 몸을 움찔움찔거렸다.
“아, 하으….”
과한 쾌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진우가 칭얼거리듯 한숨을 뱉으며, 언제 고였는지 모를 눈물을 주르륵 떨어트렸다. 이러다가 안에 싸주면 느끼는 몸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사준은 땀이 밴 이마에 달라붙은 진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달콤한 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이 너무 다정해서 진우는 힘이 빠진 팔을 움직여 사준의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배시시 웃었다.
* * *
“시간 맞춰서 갈 거야. 신부도 아니고 신랑인데 일찍 가서 뭐해?”
사준의 목소리에 눈을 뜬 진우는 비어 있는 침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8:15
결혼식 약속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전에 다른 볼일이 있는 건가?’
친구로 짐작되는 사람과 통화하는 사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우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상대는 오늘 결혼식에 이사준이 오지 않을까 봐 신경 쓰는 듯했다. 평소에 일 때문에 모임 같은 걸 자주 빠지는 편인가? 그러고 보면 사준은 늘 밖으로 돌아다니지만, 친구를 만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사준은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소홀히 하는 걸 거다. 사준의 성격이라면 그때그때 관심이 가는 것, 흥미를 끄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자연스럽게 동기나 친구들한테 소홀한 면이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이사준의 관심사에 양진우가 포함이 된 것 같지만 그것도 지금뿐인 게 아닐까? 아니지, 연인 사이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거지. 처음에는 열렬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식는 법이고, 그러다 소홀해지고 그걸 못 견디면 헤어지는 거고, 잘 극복하면 계속 만나는 거고. 그런 식으로 사랑하다 헤어지는 관계라면 평범한 거 아닐까. 처음부터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몸이 목적인 관계보다야 백번 낫지.
진우는 그간의 제 연애를 떠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잠은 다 잔 거 같으니 슬슬 일어날까 하는 찰나, 통화하던 사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 것 같은 기색에 진우의 청각이 더 예민하게 곤두섰다. 자는 줄 알고 있어서 신경 쓰는 걸까? 아니다, 사준은 통화할 때 누가 듣건 말건 늘 평소와 비슷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와 새삼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은 진우가 듣지 않길 바라서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 것이다. 진우는 사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어째선지 그러면 그럴수록 더 선명하게 들렸다.
사준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넥타이를 맸다.
― 근데, 너 오늘 같이 오냐?
“누구랑?”
― 정운이가 너 만나는 사람 있는 거 같다고 하던데.
전화 너머에서 들린 동창의 말에 사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운이면 오늘 결혼식 주인공을 말하는 건데, 새신랑이 남의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을까. 사준은 속으로 박정운을 욕하며 침실 문을 힐끔 쳐다봤다. 진우는 아직 깨지 않은 듯싶었지만, 들으라는 듯 말할 내용은 아니었다.
“데려갈 사이 아냐.”
― 왜? 결혼할 사이 아니라서 그래?
“결혼은 무슨, 그냥 한 번 만나는 거야.”
― 한 번씩 만나는 게 쌓이다 보면 결혼하고 그러는 거지. 우리 나이에는 스쳐 가는 만남만 반복하는 게 더 시간 낭비다?
“말 한번 꼰대같이 하네.”
― 아니,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내 일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 야,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만난다는 사람 얼굴 좀 보여 달라는 게 그렇게 짜증 낼 일이냐? 어차피 너 결혼식에도 우리 부를 거 아냐? 이럴 때 미리 안면 트면 좋지.
“얼굴 보여주고 말고 할 사람 아니라고. 내일모레면 안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보고 싶어 하는 건데?”
사준은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목에 맨 넥타이를 마무리했다.
― 하여튼 이사준. 승질머리 하고는, 알았다, 알았어. 더럽게 튕기네. 남자라도 만나? 뭘 그렇게 숨겨?
“끊는다.”
―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따 늦지 말고 와.
사준은 대답 대신 전화를 뚝 끊어 버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발끈해서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낸 바람에 진우가 들었을 것 같았다. 진우가 들었다면 기분 상해할 것 같았고 그러면 애써 잡아 놓은 모양이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요즘 양진우는 정말 말랑말랑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말 그대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같다고나 할까?
사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 뒤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꽉 붙잡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방문을 열었다. 침대를 보자 아무 미동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진우가 보였다. 슬그머니 다가가 이불 속에서 빼꼼 튀어나온 단정한 얼굴을 바라봤다. 얌전해 보이는데 이불 속에 있는 몸은 그러지 않았다. 목덜미에도 사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유두는 아마 퉁퉁 부어 있을 거다. 엉덩이 사이도 붉을 거고, 그 속은…. 아무튼 현재 양진우의 온몸은 사준의 흔적투성이였다.
피식, 사준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시선을 느낀 것인지 진우가 눈꺼풀을 느릿느릿 밀어 올려 눈을 떴다.
“이제 일어났어요?”
“어….”
“나 지금 나가요.”
“벌써?”
“결혼식은 11신데 잠깐 들를 때 있어서요.”
“…일?”
사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표정이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사준은 눈썹을 위로 슬쩍 밀어 올렸다.
“왜요? 할 말 있어요?”
“아니, 제대로 정장 입은 거 처음 본다 싶어서.”
“아… 평소에 넥타이 잘 안 하니까.”
“잘 어울리네.”
별소릴 다한다는 듯 사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따 1시에 청담역 근처에서 봐요.”
“알겠어.”
진우는 이불 밖으로 팔만 쭉 뻗어 흔들어 보였다. 얼른 나가보라는 듯 재촉하는 손길에 사준은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도 진우는 자느라 통화하는 건 못 들은 것 같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한 번 만나는 거야.’
‘얼굴 보여주고 말고 할 사람 아니라고. 내일모레면 안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보고 싶어 하는 건데?’
혼자 남은 침대 위에 사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결혼을 추궁하는 친구에게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던 걸까.
심장이 요동을 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성애가 당연한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은 때때로 곤란한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런 난감하고 거지 같은 상황에 경험이 많은 진우 역시 가끔은 짜증 나는데, 이사준처럼 면역이 없는 사람은 더 곤란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까처럼 짜증을 낼 수밖에 없지.
그래,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진우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섭섭할 수 있는 말이지만 섭섭해하면 안 될 일이었다. 친구의 연인을 궁금해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근데 거기다 대고 애인이 남자라고 떳떳하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동창들이 다 모이는 결혼식 날 커밍아웃 하는 미친 짓을 누가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러니 굳이 통화하는 걸 들었다는 티를 내서 그걸로 서로 언짢아질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들었다고 하면 사준은 난감해할 거고, 진우는 변명거리를 찾는 듯한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자신이 병신들과 연애를 많이 해 본 덕분에 싸움을 피하는 기술이라면 누구보다 월등하다고 자부했다.
* * *
사준은 주례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결혼식의 클라이맥스인 신부 입장은 진즉 끝났고, 10분이 넘어서는 주례는 지루하다 못해 졸릴 지경이었다. 사준은 목을 좌우로 가볍게 꺾으면서 결혼식장 안을 둘러봤다. 이 중에 주례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있을까?
문득 피어오른 의문에 사준은 고개를 저었다. 없을 거다. 솔직히 지금 이 식장 안에 신랑 신부 가족을 제외하면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십 대에는 친구들이 결혼하면 신기하고, 진심으로 축하해줘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도 처음 몇 번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얼굴도장 찍고 인맥 관리하는 여타 다른 행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결혼식이었다.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주례가 끝나고 마침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라는 사회의 말과 함께 신랑 신부의 행진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주인공들한테는 좋은 날이긴 한 모양이다. 새신랑 박정운은 입이 찢어져 귀에 걸릴 정도로 신나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 좋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사준은 손뼉을 치고, 사진을 찍어 결혼식에 왔다는 흔적을 남겼다.
옷을 갈아입으러 신랑 신부가 자리를 뜨자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친 동창들이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층 아래 준비되어 있다는 피로연장으로 가는 길에 여러 말소리가 섞여들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지난번에 너 TV 나온 거 봤다.”
“너는 결혼 언제 하냐?”
동창들의 안부 인사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던 사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 왜 안 하나 했다. 어떻게 하나같이 이렇게 같은 질문을 해대는 건지.
“너는?”
“나도 슬슬 해야지.”
“그래, 할 때 불러라.”
예의상 대꾸하는데 아침부터 전화해서 귀찮게 굴던 녀석이 끼어들었다.
“이사준 요즘 만나는 여자 있을걸?”
“누구? 오늘 같이 안 왔어? 같이 오지.”
내년쯤에 결혼한다던 동창의 눈이 반짝거렸다. 남의 연애 얘기에 관심이 많은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질 않았다.
“너는 왜 같이 안 왔는데?”
“아, 걔가 주말에도 일하는 애라.”
사준의 물음에 동창이 머쓱해 하며 대꾸했다.
“이 새끼, 만나는 사람 한번 보자니까 더럽게 안 보여줘, 진짜.”
“뭘 보고 싶어 하냐? 이사준이면 어련히 예쁜 여자 만나겠지. 결혼식 때 보면 연예인급인 거 아냐?”
“하긴, 이 자식 학교 다닐 때도 얼굴 겁나 봤지.”
자신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뭐가 그리 신이 난 건지 저들끼리 얘기하는 둘을 보며 사준은 얼굴을 구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 얘기 좋아하는 건 변하질 않는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물이 아니었나?
“나 여자 만난다는 얘기한 적 없는데.”
사준은 시큰둥하게 말을 던지고 몸을 돌렸다. 변한 것 없이 남 말 하길 좋아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부아가 치밀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뭐야, 그럼 박정운이 잘못 안 거야?”
어쩜 저렇게 생각의 폭이 좁을까. 여자를 안 만난다는 말에 만나는 사람까지 없애는 건 어디서 나오는 발상인지.
“나 먼저 간다.”
사준은 함께 있어 봐야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동창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야, 왔는데 밥도 안 먹고 가?”
“사진 찍었으면 됐지.”
“뭐야, 너 만나는 사람 없다더니, 데이트 가는 거 아냐?”
사준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얼굴로 엷은 한숨을 뱉었다.
“아니, 일 있어서 가야 돼. 나중에 보자.”
귀찮음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럴 때는 기자라는 직업이 참 좋았다. 언제 어느 때고 일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업이니까. 거기다 저렇게 쓸데없이 소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니 전망도 좋은 편이다.
피로연장이 있는 층을 지나 계단을 걸어 내려오던 사준은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어 내리다가 멈칫했다. 아침에 양진우가 마음에 들어 했던 얼굴이 떠올라 오늘 하루는 이대로 다닐까 싶었다.
1층까지 내려온 사준은 입구에 있는 커다란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11시 45분.
양진우하고는 1시까지 만나기로 해서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여기서 동창들의 쓸데없는 수다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 같이 결혼, 결혼, 하면서 떠드는 놈들의 말이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물론 사회 통념상 결혼이라는 걸 할 나이가 됐다는 건 알고, 동창들이 유야무야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결혼식이라는 장소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화제가 그쪽으로 쏠리는 것도 이해된다.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듣고 있으려니 짜증 나서 듣고 싶지 않은 마음만 들었다. 누구랑 하겠다고 정한 건 아니지만 때가 되면 언젠가 자신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듣기 싫은지…. 사준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식장을 벗어났다.
진우와 만나기로 한 청담역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은 사준은 핸드폰으로 새로 올라온 뉴스를 확인했다.
자신의 볼일이 빨리 끝났다고 진우에게 빨리 나오라고 할 마음은 없었다. 양진우는 아무 때나 불러도 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진우가 그러자고 했기 때문이었기에 자신이 끼어들어 일정을 바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준은 커피를 마시면서 빠른 속도로 뉴스를 읽어 나갔다. 한참 보고 있던 정치면이 지겨워 사회면 탭을 누르면서 가볍게 기지개를 켜던 사준은 눈을 크게 떴다.
1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웃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왔다. 한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들고.
“긴가민가했는데, 맞네.”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던 건지 남자가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나 기억 안 나?”
“…….”
사준은 쉽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누군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착각할 수 없었다. 헷갈릴 수도 없었다. 그건 며칠 전에 스치듯 봐서 그런 게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조금 묻었을 뿐, 남자의 얼굴이 그때 그 시절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짧은 고교 시절을 공유했던 임재민.
그 애였다.
역시, 지난번 진우와 함께 갔던 바에서 본 게 맞았던 모양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설마 저쪽에서 먼저 아는 척할 줄은 몰랐다.
“아, 고등학교 같이 다녔었는데, 중간에 전학 가긴 했지만….”
“기억해, 임재민.”
사준은 두서없이 자신을 설명하려는 임재민의 말을 뚝 잘랐다. 그러자 임재민이 다행이라는 듯 상큼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네.”
임재민이 한 번 더 인사하자 사준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오늘 종일 변하지 않는 놈들만 봤는데, 여기도 변하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사준은 임재민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입속으로 침음했다. 전에 양진우가 우는 걸 봤을 때는 임재민이 떠올랐는데, 지금 보니 닮지도 않았다. 미미한 죄책감이 불러일으켰던 환상이었나 보다.
“잠깐 앉아도 돼?”
임재민이 빈자리를 가리키며 물어서 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어?”
맞은편에 앉은 임재민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뭐…. 너는?”
“나도 똑같지.”
“한국에는 언제 온 거야?”
사준은 무난한 화제를 입에 담았다. 사실 며칠 전에 우연히 지나가다 널 봤다는 말이 보통의 친구 사이라면 가장 평범한 말이겠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봤다고 하면 어디서 봤느냐는 질문이 나올 거고, 본 장소가 게이 바라는 사실을 알면 왜 거기 있었느냐고 물을 것만 같았다.
“이제 삼 개월 좀 넘었어.”
“한국에 안 올 줄 알았는데.”
임재민이 사준을 보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왜?”
고개가 삐뚤게 기울어져서 그런지 말도 삐딱하게 들렸다.
“그냥, 그때 담임이 너 이민 간 거라고 했으니까.”
덤덤한 척 대꾸하자 임재민이 작게 키득거렸다.
“아, 아버지 일 때문에 간 거였지. 지금은 독립했어.”
임재민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더니 명함 지갑에서 검은색 명함을 꺼냈다. 검은색 명함에는 금박으로 [La vie en rose]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쓰여 있었다.
“가게 오픈 준비 중이야.”
“아….”
“애인이랑.”
임재민의 애인 성별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사준은 적당한 반응을 찾지 못했다. 애인이 남자라는 걸 아는 티를 내야 할지, 임재민이 말하지 않았으니 아는척하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 달에 오픈하기 전에 지인들만 모아서 시식회 먼저 할 건데, 시간 되면 너도 올래?”
사준은 명함을 뚫어져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임재민을 바라봤다. 임재민은 원래 사교성은 좋은 편이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들어주길 잘했다. 시끄러운 남자애들 틈에서 혼자만 정갈한, 그런 애였다.
“…시간 되면.”
“그러지 말고 꼭 와, 나는 다 맛있는데 다른 사람들 입맛에는 어떨지 모르겠거든.”
“네가 요리하는 거야?”
“아니, 애인이.”
임재민이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 목덜미를 매만졌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아, 맞다. 넌 무슨 일 해? 혹시 지금도 일하는 중인데 내가 방해한 거 아냐?”
임재민이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다행이다, 정장 입고 있어서 비즈니스 미팅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아냐, 이건 오늘 결혼식 때문에.”
“결혼식? 거기 다녀온 거야?”
“고등학교 때 박정운이라고, 너도 기억하려나? 오늘 걔 결혼했거든.”
“박정운…? 기억하지. 말 많았던 애, 맞지? 입이 커서 말이 많은가, 맨날 그 생각했었는데.”
말하는 어조가 좋게 기억하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역시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럼 오히려 자신을 더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닐까? 도대체 이렇게 아는 척하고, 새로 오픈하는 가게에 초대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도통 짐작이 안 됐다.
“하긴, 슬슬 결혼할 나이긴 하네. 너도 결혼하라는 소리 많이 듣겠네?”
조곤조곤 말하는 임재민을 바라보며 사준은 입가를 매만졌다. 대화가 묘하게 불편한데 어느 부분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 사람들 남들 하는 거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알잖아.”
“그렇게 말하는 너도 한국 사람이지 않아?”
조소하며 묻자 임재민이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근데 왜 여기 있어? 결혼식 끝나면 밥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러지 않나?”
“약속 있어서.”
“아, 혹시 애인?”
아침부터 비슷한 질문을 몇 번이나 받다 보니 짜증이 밀려와 사준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런 거 없어.”
사준은 차갑게 대답하고 말았다. 대답과 동시에 순간 진우가 떠올랐지만 자신은 임재민처럼 남자를 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냉랭한 대꾸에 멈칫했던 임재민이 어색함을 풀려는 듯 싱긋 웃었다.
“일은 무슨 일 해? 물어보면 안 되는 건 아니지?”
임재민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기자.”
“와, 진짜? 그럼 나중에 우리 가게 취재 같은 거 부탁해도 되나?”
“그건 좀 어려울 거 같은데, 그런 쪽은 내 담당이 아니어서.”
“아, 아쉽다. 지인 찬스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네?”
“어…?”
“이사준, 너 학교 다닐 때 기자 되고 싶다고 했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했어.”
임재민은 확신에 찬 말투로 단언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말에 사준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명함은 없어?”
그 말에 사준은 늘 갖고 다니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가 아차 싶었다. 임재민과 연락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일할 때 습관이나 다름없는 명함 건네기가 여기서도 나와버렸다. 임재민은 사준의 명함 앞뒤에 적힌 글자를 꼼꼼하게 읽더니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진심일까? 사준은 임재민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봤지만, 그 속까지 알 수는 없었다.
징―.
사준이 대답하기 전에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미안.”
임재민은 사준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거기 사거리 앞에 있는 카페. 커피? 아까 다 샀지, 응, 알겠어, 바로 나갈게.”
웃으면서 전화 받는 임재민을 보며 사준은 전화 너머의 상대가 애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전화를 끊은 임재민을 향해 사준이 입을 열었다.
“애인?”
크게 궁금한 게 아니었는데도 질문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응, 오늘 시식회 메뉴 리스트 짜기로 했거든.”
임재민은 커피 두 잔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시간 많이 뺏은 거 아니지?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꼭 와.”
사준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지만 딱히 갈 마음은 안 들었다. 어색할 게 분명한 자리를 일부러 찾아갈 리 없지 않나.
임재민이 카페를 나간 뒤 사준은 약간 멍했다. 꼭 여우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고교 시절 일이니 이미 10년도 넘었는데 임재민을 보자 불편한 감정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대화를 나눌 줄은 몰랐다. 임재민이 자신을 아주 많이 싫어하고 있을 줄 알았으니까.
사준은 엷은 한숨과 함께 조금 전 임재민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임재민의 감정을 눈치챈 데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어쩌면 임재민이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더 빨리 알게 된 건지도 모른다.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변 친구들까지 임재민 시선의 방향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임재민이 이사준 좋아하는 거 같아. 존나 징그럽다.’
‘난 네 망상이 더 징그러운데?’
‘미친, 넌 뭐가 그렇게 태연해? 갑자기 고백이라도 하면 어쩔래?’
설마, 남잔데, 남자한테 고백할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야, 야, 우리 내기할래? 임재민이 이사준한테 고백한다? 안 한다?’
‘지랄.’
‘남자한테 고백받으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한데?’
‘아냐, 이사준, 넌 궁금해. 그러니까 임재민이 고백하게 해 봐. 존나 재밌겠다.’
‘미친놈, 재밌을 것도 없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나를 좋아한다면 조금쯤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그 나이 대는 타인의 상처보다 내가 우월감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할 나이였으니까.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십 대의 치기라고 하기에도 못된 짓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
그날 교실에 누가 있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는 기억 안 난다. 중요한 건 낄낄거리다 게임 비슷하게 시작한 내기였고, 이길 자신이 있었다. 원래도 임재민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부추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아할지 같은 건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바로바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종의 천성이었다.
몇 번의 관심, 몇 번의 호의.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에 흔들렸다. 임재민이 아니라 이사준이. 임재민이 고백하기 전에 먼저 일을 칠 것 같았다. 그건 안 된다. 내기를 떠나 이건 잘못된 감정이다. 무리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모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고백할 게 분명한 그날, 먼저 말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고백 자체를 못 하게 막았다. 그때 그 녀석의 얼굴이 딱 그날의 양진우 같았다. 소리 죽여 울던 그 얼굴.
즉시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임재민은 이민을 떠나서 사과할 기회도 놓쳤다. 교실에 있던 비어버린 그 애 책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뒤늦게 첫사랑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남자들과 얽히는 걸 의도적으로 피했다. 애초에 여자들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상냥했고 부드러웠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항상 무언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성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양진우는 그 타이밍에 사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 * *
진우는 몸을 앞으로 숙여 핸들에 턱을 댔다.
조금 전까지 사준과 얘기하던 호리호리한 남자가 바로 앞에서 검은색 SUV에 오르는 게 보였다. 남자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도, 해사하게 웃는 것도 날이 맑아서 너무 잘 보였다.
진우는 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카페 통유리 너머로 사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준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카페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카페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우가 가려던 카페에서 사준이 누군가와 얘기하는 게 보였는데 그 상대가 게이였다. 어떻게 게이인 걸 확신 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 없지만, 그냥 보면 안다. 감이다. 오랫동안 게이로 살아왔다. 같은 동류를 알아보는 눈만큼은 자신 있었다. 누가 봐도 스트레이트처럼 보이는 장태준 역시 게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저렇게 티를 줄줄 내는 게이는 못 알아보는 게 더 용했다.
가게 밖에서는 사준의 뒷모습밖에 안 보여서 어떤 표정으로 상대와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상대가 시종일관 웃고 있었으니 그리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준을 바라봤다. 지금 나간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봐도 되나? 이사준이랑 무슨 사일까. 혹시 저 사람이 게이인 거 모르나? 일반인들은 잘 모를 수 있긴 하다만…. 이사준 정도의 눈치를 가진 사람이 모를 수 있나? 기자라는 게 워낙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단순한 취재원일지도 모른다.
진우는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개뿔. 취재는 무슨 취재, 결혼식 끝나고 자신과 약속이 있었는데 그사이에 취재원을 만난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럴 리가 없다. 그럼 저 사람은 뭘까? 그냥 우연히 만나서 잠깐 얘기한 건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반갑게 얘기할 만큼 친하게 지내는 게이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거 같은데….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떠올라 한숨이 자꾸만 나왔다. 진우는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차에서 내렸다. 이러고 있어 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고의 방향이 부정적으로 흐르는 것도 병이라고, 아침부터 별것도 아닌 일에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심호흡으로 표정을 정돈한 뒤 카페 문을 연 진우는 빠른 걸음으로 사준에게 다가갔다. 정장을 입고 긴 다리를 꼬고 있는 사준은 오늘따라 유독 근사해 보였다. 혹시 방금 전 그건 헌팅이었나? 멋을 부리지 않았는데 멋있어 보이는 모습에 문득 떠오른 새로운 가설이었다. 세상에는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왜 여기 있어?”
“어? 양 변호사님? 여긴 어떻게 왔어요?”
진우의 등장에 사준이 놀란 듯 목소리를 키웠다.
“지나가는 길에 보여서.”
진우는 자리에 앉으며 사준이 보고 있던 명함을 힐긋 쳐다봤다. 그리고는 라비앙 로즈라는 상호명과 아래쪽에 쓰여 있는 청담동이라는 주소까지 빠르게 눈으로 읽었다.
사준은 안주머니에 명함을 챙겨 넣었다. 단순한 헌팅이었다면 명함을 저렇게 챙겼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진우는 조금 전 나간 사람의 정체를 묻지 못했다.
“결혼식은 벌써 끝난 거야?”
“요즘 결혼식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잖아요. 양 변호사님은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요?”
“근처에 일이 있었어.”
진우는 손목시계로 시선을 내린 채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 거짓말하는 걸 즐기는 건 아니지만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얼마나 거짓말을 뻔뻔하게 잘하느냐에 따라 승률이 갈리는 것이기도 하니까 못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였다.
사준은 진우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커피 마실래요? 아니면 밥부터 먹으러 갈까요?”
“밥 안 먹었어? 결혼식 다녀온 거잖아.”
약속을 잡을 때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생각하지 못했던 게 떠올라 묻자 사준이 별소릴 다 한다는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거기서 안 먹었죠, 양 변호사님이랑 먹기로 했잖아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준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진우는 그 얼굴을 보고 조금 전 사준의 앞에 있던 남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묻지 못할 것이라면 생각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뭐 먹을래?”
“냉면.”
이미 정해뒀던 것인지 사준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메뉴를 입에 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진우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사준을 빤히 바라봤다.
“왜요?”
“진심으로 하는 말?”
“싫어해요?”
“아니, 지금 그 메뉴가 한겨울에 먹을만한 건 아닌 거 같아서.”
“요즘 누가 계절 따져 가며 음식 먹어요? 겨울에도 수박 먹을 수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겨울 수박이 맛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여기 근처에 맛있는 집 알아요.”
사준이 자신 있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진우도 따라 움직였다.
* * *
“가만 보면 메뉴 고르는 거 참 특이해.”
냉면 가게에 자리 잡은 진우는 별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냉면이 맛이 있으면 얼마나 맛이 있겠나, 라는 생각은 뜨끈한 육수를 마신 순간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뭐 좋아해요? 물? 비빔?”
사준의 물음에 고민이 밀려왔다. 육수를 먹어 보니 냉면도 맛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뭐가 더 맛있어?”
“다 맛있는데, 아니면 하나씩 시켜서 먹어 볼래요?”
“그래.”
“여기요, 물냉면 하나 비빔냉면 하나 주세요. 앞접시도 주시고요.”
주문을 마친 사준이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진우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여기 회냉면도 맛있으니까 나중에 먹어봐요.”
조금 뒤에 먹음직스러운 냉면이 나오자 사준은 비빔냉면을 비비더니 앞접시에 덜어서 진우의 앞에 놔줬다. 지난번 햄버거도 그렇고, 사준의 메뉴 선정이 좀 엉뚱하다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썩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먹고 싶은 것, 맛있는 것이라는 이유를 차치하고 사준이 고른 가게는 삼십 대 남자 둘이 와도 크게 이목을 끌지 않는 장소들이었다.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달달함을 만든다고나 할까. 동성의 애인은 사귀어 본 적도 없다면서 이런 센스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밥 먹고 뭐 할래요? 오늘 하고 싶은 거 있던 거 아니에요?”
눈앞에 놓인 냉면을 호록호록 먹고 있던 진우에게 사준이 물었다.
“부동산 가볼까 했는데….”
“이사할 집 알아보게요?”
“슬슬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어느 동네로 할지는 정했어요?”
“회사 생각하면 지금 있는 이 기자님 동네가 괜찮을 거 같은데….”
진우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사준의 얼굴을 살폈다. 이사라는 게 당장 오늘내일 사이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사준의 의견도 중요했다. 사실 당장 지금 이사준이 사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겠네요. 우리 집이 양 변호사님 회사에서도 더 가깝죠?”
사준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동의하며 물었다.
“응, 그래서 부동산 가보려고 하는데.”
“아는 사람 있어요? 없으면 저 이사 올 때 계약했던 부동산 가볼래요? 거기 아저씨 친절해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기자님은 어떤 집이 좋아?”
“전 다른 건 별 상관없는데 해는 잘 들었으면 좋겠어요. 아침에 해 보면서 일어나는 게 좋더라고요. 양 변호사님은요?”
“나도 해 잘 드는 게 좋고, 욕조가 넓은 게 좋아.”
“하긴, 원래 양 변호사님 살던 집 욕조도 엄청 컸죠. 야하게.”
사준이 히죽 웃으면서 하는 말에 진우는 당황했다가 이내 혀를 찼다.
“야할 것도 없네, 애도 아니고.”
“그래요? 난 야하던데.”
“아, 그만하고 먹어, 내가 다 먹겠네.”
그냥 두면 넓은 욕조가 왜 야한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 것만 같아 진우는 사준의 말을 막아섰다. 진우의 반응에 사준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예전 같으면 얄미워 보였을 텐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이런 장난을 치는 게 기분 좋아서 간질간질했다.
“가끔 보면 원래 알던 사람이 아닌 거 같아.”
진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사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요?”
“그래, 이 기자님, 당신이요.”
“그래요? 근데 당연한 거 아닌가. 양 변호사님이랑 사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일할 때 보던 거랑 다르죠.”
진우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태도가 다른 게 당연하다는 말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말로 해석하면 너무 오버인가? 이러다 언젠가 이사준 상대로 스토커 짓을 벌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스토커 초기 증상은 망상이라던데….
“그리고 양 변호사님도 달라요.”
사준이 식탁 아래로 진우의 종아리를 툭 건드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의 의미를 추측하며 진우는 냉면 먹는 데 집중하려 했다. 그러지 않으면 사준이 말할 때마다 심장이 움찔움찔거려서 냉면 먹다가 심부전이 올 것만 같았다.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냉면을 먹고 진우와 사준은 부동산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집 좀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어서 오세, 어이구, 총각 오랜만에 얼굴 보네.”
자동적인 인사를 건네던 부동산 사장이 사준의 얼굴을 보더니 아는척하며 반겼다.
“거기, 앉아서 잠깐 기다려요. 이분들 상담하고 바로 안내해 줄 테니까.”
“네.”
사준은 부동산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아요, 뭐라도 마실래요?”
진우는 사준의 옆에 앉아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손님들을 바라봤다. 신혼부부로 짐작되는 두 사람은 사진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부동산 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진우는 두 사람이 상담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부부가 원하는 집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비슷해서 절로 귀가 쫑긋 섰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릴게요.”
상담을 마친 신혼부부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부동산을 나섰다. 진우는 그 뒷모습을 보며 옆에 있는 사준의 손을 슬쩍 내려다봤다. 짧게 깎은 손톱과 마디가 곧은 큰 손은 진우의 손과는 크기도 모양도 달랐다. 문득 만져 보고 싶고, 잡아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사준과 그런 사이가 됐어도 길에서 저런 식으로 손을 잡는 건 무리였다. 사실 다 큰 남자 둘이 손을 잡고 다니는 걸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힐끔거리고 말 거다. 그런 시선을 받는 건 진우 역시 사절이었다.
“두 분은 어떤 집을 알아보려고 오셨나?”
부동산 아저씨의 물음에 진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동네에 집을 구하고 싶은데요.”
“예산은 어느 정도 돼요? 매매? 전세? 월세?”
진우는 사준을 힐긋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신혼부부가 말한 집이랑 비슷한 조건이면 좋겠어요.”
“집 볼 줄 아시네, 근데 그런 집은 누구나 다 원하지.”
“네, 그러니까 그런 집 있으면 연락 좀 주세요.”
“음, 일단 몇 군데 있긴 한데….”
부동산 사장은 신혼부부가 보고 갔던 사진들을 보여주며 다시 한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격을 비롯해 이사할 수 있는 시기에 관련된 설명을 들은 뒤,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또 다르다는 말에 진우는 실제로 집을 보러 갈 날짜를 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오늘 보고 싶었는데, 집주인과 연락이 안 되는 바람에 당장 보러 갈 수는 없었다.
“그럼, 다음 주에 연락해 주세요.”
“그래요, 다른 데 가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나랑 보러 갑시다.”
부동산 아저씨의 당부 아닌 당부에 진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제일 나을 거 같아?”
부동산을 나오면서 진우가 묻자 사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다 괜찮을 거 같아서, 가서 봐야 알겠는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양 변호사님 마음에 드는 집이면 어디든 상관없죠.”
사준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우가 운전석 문을 열며 물었다.
“그럼, 이제 뭐 할래?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아직 이른 시간이라 영화를 봐도 괜찮을 것 같았고, 서울 외곽으로 나가 드라이브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뭘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그만 집에 가요.”
기대를 배신하는 사준의 말에 진우는 어깨를 쭉 늘어트린 채 차에 올랐다. 그냥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했으면 순순히 따라나섰을 것 같아 괜히 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진우는 특별한 말 없이 집 방향으로 핸들을 조작했다. 차가 도로에 진입했을 때 내내 가만히 있던 사준이 진우의 손을 제 앞으로 잡아당기더니 슬쩍 붙잡았다.
“뭐, 뭐야?”
“직진하는 구간이니까 이제 한 손으로도 할 수 있잖아요.”
진우는 손을 빼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사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잡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얼굴에 순간 열이 확 몰렸다. 그런 식으로 티를 낸 줄은 몰랐다.
“이렇게 하고 싶었죠?”
사준은 진우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우면서 싱긋 웃었다. 그저 손을 쥐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인데 심장이 요동을 쳤다.
“집에 가서 이렇게 손잡고 해요.”
“뭐, 뭐를?”
사준은 슬쩍 기울여 진우와 눈높이를 맞추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 잘 드는 집에서, 낮에 손깍지 끼고 섹스, 어때요?”
저렇게 물어보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대답 대신 액셀을 꾹 밟아 속도를 올렸다. 아까는 집에 가는 게 아쉬웠는데 이제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 * *
차에서 내린 사준은 공동현관 앞에 있는 우편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주말에 우편물이 올 리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가까이 다가가 보니 흔해 빠진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사준을 따라 움직이던 진우 역시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가 우편함에 있는 편지 봉투를 보고 미간을 확 구겼다. 순식간에 스트레스 지수가 확 높아졌다. 편지 봉투는 전에 진우에게 사진을 보냈던 것과 같은 색, 같은 재질의 봉투였고 겉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한테 온 거 같은데.”
진우가 한숨과 함께 손을 뻗자 사준이 그 팔을 막았다.
“우리 집에 온 거잖아요.”
사준은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는 봉투를 망설임 없이 찢더니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봉투에는 엽서 크기만 한 종이 한 장만 달랑 들어있었고 그 종이 위에는 잡지에서 오려 붙인 듯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떨어져]
글자를 눈으로 읽은 진우와 사준은 서로를 보며 한숨을 뱉었다가 이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양 변호사님, 지금 웃음이 나와요?”
사준이 타박하듯 묻자 진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는 이 기자님은 왜 웃어?”
“아니, 진짜 태평한 사람이네. 이거 협박 편지 받은 거예요. 양진우 씨.”
사준이 진우의 앞에 종이를 펄럭펄럭 흔들어 보였다.
“누가 그걸 모르나? 남이 협박받았는데 당신은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양 변호사님이 웃으니까 따라 웃은 건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진우는 사준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뺏어서 뚫어져라 쳐다봤다. 일부러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려고 수고를 한 것 같았는데 ‘돌려놔’ 이후에 ‘떨어져’라니 어이가 없다. 협박하려면 좀 더 그럴듯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속옷이 배달 오던 게 더 소름 끼친다. 혹시 처음에 속옷을 보낸 상대와 사준의 집으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다른 사람… 일리는 없겠지.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인 거 같죠?”
종이를 보고 있던 진우는 사준의 질문에 침묵으로 긍정했다.
스토커의 대상인 진우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핀트가 안 맞았다.
“이번에도 경찰에 신고는 안 할거죠?”
사준의 물음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적을 남겼을 리도 없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면 언젠가 사준이 말했던 것처럼 폭력성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견에 더 무게가 실린다. 이렇게 조악하게 협박할 거면 그냥 한번 만나자고 사정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는 없잖아요.”
사준이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 진우는 긴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이사하려고 하잖아.”
그 말을 뱉은 순간 답답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아침에 들었던 사준의 전화 통화만으로도 신경이 쓰였는데, 게이랑 만나고 있던 모습을 본 것도 모자라 스토커의 편지까지. 즐거웠던 건 잠깐뿐이고 오늘 하루만 몇 개째인지, 정말 너무할 정도로 연속적인 불행의 시그널이 쌓이고 있었다.
“변호사님.”
사준은 고작 세 글자밖에 안 적혀 있는 종이에서 눈을 못 떼는 진우를 불렀다.
“어…?”
진우가 고개를 들어 사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사준이 싱긋 웃었다.
“오늘은 우리 집 말고 변호사님 집에 가요.”
“뭐? 갑자기? 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얼른.”
사준은 진우의 손에 들린 종이를 뺏어 확 구겨 버렸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봤다면 불쾌할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사준은 진우의 손목을 잡아당겨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 나섰다.
* * *
진우의 집은 거실에 있는 큰 창문 때문에 해가 잘 드는 집이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아무리 겨울 해가 짧아도 지금은 해가 지지 않았고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은 집 안 구석구석까지 뻗어 현관까지 비추었다. 그리고 그 현관에서 진우는 신발도 벗지 못한 상태로 사준에게 붙잡혔다.
“흣, 잠깐만… 지금 뭐 하는, 하읏….”
진우는 사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쑥 밀어 넣은 채 동그란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성기 전체가 사준의 입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대로 먹혀 버릴 것만 같아 무언가 붙잡아야 했다. 츄릅, 타액을 구석구석 발라 할짝거리는 소리에 진우는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꽉 말아쥐었다. 사준이 입에 문 성기를 혓바닥으로 자극할 때마다 아래가 자꾸만 저릿거렸다.
“흣.”
진우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뜬 채 사준을 내려다봤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더니 사준은 현관문을 닫기 무섭게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진우의 바지 버클을 풀고 성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진우는 현관문에 등을 대고 사준에게 급소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한참 성기를 빨아대던 사준은 이제 진우의 성기를 손으로 감싸 쥐고 흔들면서 진우의 허벅지에 입술을 문질렀다. 촉촉,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피부에서 작게 젖은 소리가 울렸다.
“흣, 잠깐만….”
오싹오싹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올라와 진우가 사준을 밀어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준은 혓바닥의 넓은 면적으로 진우의 허벅지를 핥았다.
“양진우 씨 피부 진짜 부드러워요.”
“그렇다고, 왜, 거기를….”
부드럽게 할짝대는 애무에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에 피가 몰리고 몸이 뜨거워졌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집 안은 공기가 차가워서 추울 법도 한데 온몸에 열이 올라 오히려 더웠다.
사준은 진우의 허벅지를 연신 핥다가 입술로 피부를 살짝 붙잡은 채 쪼옥 소리가 나도록 세게 빨았다. 입술이 떨어지자 진우의 깨끗한 피부에 붉은 흔적이 남았다. 목덜미나 가슴에는 많이 남겨봤지만 다리는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사준의 정복욕을 부채질했다.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살짝 벌려 안쪽도 물고 빨았다.
“아, 응….”
섹스할 때도 자주 애무 당하는 부위가 아니다 보니 다리가 꺾일 것만 같았다. 진우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사준을 바라봤다. 넥타이까지 꼼꼼하게 맨 사준은 아침에 입었던 정장 차림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자신은 하반신을 훤히 드러낸 채 있는 게 민망했다.
“왜, 여기서, 이러는 건데….”
차라리 침대로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진우가 말했지만 사준은 대답 대신 허벅지 안쪽을 세게 빨기 바빴다. 사준이 속옷 라인이 닿는 부위를 꼼꼼하게 핥고 입술로 빨아대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고 성기 끝에 고인 쿠퍼액이 아래로 흘렀다.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 뭐 하는… 읏.”
“응, 지금 확인해 보는 중이에요.”
사준은 태연하게 대꾸하더니 이번엔 진우의 고환을 입에 물었다. 여린 표피를 한 번 빨았다가 입을 크게 벌려 한입 가득 물고 혀로 굴리자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대로 사준이 씹어 먹는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어 옅은 공포감과 함께 흥분이 밀려와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가 욱신거렸다.
“무슨 확인을 한다는 거… 흣, 진짜, 그만….”
진우가 칭얼거리듯 말하자 사준이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 편지, 우편함에 오늘 넣어둔 거 같지 않았어요?”
사준이 외설적인 분위기를 잔뜩 풍기며 진우를 바라보고 물었다.
“아마도…?”
진우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사준은 제 손가락을 입속에 넣었다가 뺐다.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붉은 혀가 날름거리는 걸 보며 진우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단단히 힘을 줬다.
“오늘 집에 와서 넣은 거면, 우리가 그 편지를 보는 것도 어딘가에서 지켜보지 않았을까요?”
진우는 사준의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짝할짝, 도톰한 입술이 빨고 있는 건 사준의 손가락인데 진우는 자신의 성기가 빨리는 것만 같았다. 잘 차려입은 남자가 선정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포르노의 한 장면 같아서 제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흣….”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빨아대던 사준이 말간 액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진우의 귀두를 입술로 살살 빨면서 엉덩이 사이로 젖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꽉 다물려 있던 주름이 벌어지자 진우의 입도 같이 벌어졌다.
“아, 잠깐, 읏….”
아래를 침범하는 이물감에 놀란 진우가 허리를 숙이며 사준의 머리통을 꼭 끌어안았다. 대낮부터 현관에서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음탕하게 느껴졌고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못된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는 잠깐이 아닌 거 같은데요? 오물거리는 게 꼭 더 달라고 하는 거 같아.”
사준은 손가락을 꾹꾹 밀어 넣더니 내벽을 살살 문질렀다.
“양진우 씨는 내 손을 너무 좋아하네, 아까 밖에서도 잡고 싶어서 눈을 못 떼더니, 구멍은 잡아먹을 것처럼 달라붙고.”
“흐, 그런 거 아니, 하읏…!”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했지만 사준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느끼는 부분을 꾹꾹 눌러서 진우는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뜀박질한 것도 아닌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제도 해서 그런지 금방 풀어지네요.”
사준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어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벌리며 구멍을 늘렸다. 뻑뻑했던 점막이 사준의 손가락에 맞춰 풀어지는 게 느껴져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빡빡했으나 사준의 말처럼 금방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여기서 이러냐고….”
진우가 최소한 침대로 장소를 옮겨주길 바라며 같은 말을 반복하자 사준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흡…!”
몸을 숙이고 있을 때와 다른 부분을 자극당하자 높은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사준은 진우의 안쪽을 건드리면서 몸을 바짝 밀어붙였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준은 평소와 다르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뜩이나 남성미가 넘치는데 이러고 있으니 더 했다. 서로의 상체가 달라붙자 온몸이 사준에게 압박당하는 것만 같았고, 단번에 가까이 다가온 사준의 체취가 후각을 은밀하게 자극했다.
“어쩌면 우리 따라서 왔을지도 몰라요.”
사준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현관에 있는 어안렌즈를 통해 밖을 확인했다.
진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사준을 빤히 바라봤다. 설마, 지금 스토커가 따라왔을지도 모르니까 현관에서 섹스하자는 거야? 진우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 안쪽을 꽉 조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여요? 밖에서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흥분돼요?”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읏…!”
사준은 진우의 내벽을 슬슬 문지르던 손가락을 쭉 빼냈다. 그리고는 지퍼만 끌어 내려 성기만 끄집어냈다.
“따라왔을지도 모르니 들려줘야죠.”
진우는 사준을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바라봤다. 스토커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자극해서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깐, 아니, 진짜… 여기서 하려고?.”
“응, 진짜 할 거예요. 정장 입고 해 보고 싶었죠?”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면 이렇게 멋대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사준은 진우의 다리 한 짝을 들어 올려 팔에 걸었다. 다리가 활짝 벌어지고 은밀한 부분이 쫙 벌어지며 드러났다.
“잠깐, 만….”
사준은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로 진우의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흣.”
“솔직히 말해봐요, 손가락보다 이게 더 좋죠?”
질문했으면서 사준은 대답은 듣지 않고 구멍 틈으로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안쪽이 차오르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애달픔이 번졌다.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 진우는 사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사준에게 잠식당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후으, 힘 좀 빼봐요.”
사준이 진우를 달래주는 것처럼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진우의 성기를 손으로 감싸 훑어 올렸다.
“아, 잠깐, 흡….”
“소리는 참지 말고.”
사준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듯 팔에 걸치고 있던 진우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했다.
“잘 감고 있어요.”
쑤욱, 굵은 성기가 깊은 곳으로 파고들자 온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진우는 사준이 시키지 않았어도 다리로 허리를 꽉 감아 당길 수밖에 없었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잡아 벌리며 남은 성기를 밀어 넣었다. 굵은 성기가 아래를 파고들자 진우의 몸이 점점 위로 들리면서 땅에 닿아 있던 발도 위로 들렸다. 까치발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데 사준이 나머지 한쪽 다리도 위로 잡아당겼다.
“윽…! 떨어질 거, 같, 아읏….”
추락의 공포를 느낀 진우가 사준의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자 사준은 허리에 감고 있던 다리도 제 팔에 걸쳤다. 진우는 몸이 완전히 반으로 접힌 채 허공에 들려서 사준에게 갇혀 버렸다.
“흣, 너무 깊어….”
진우는 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양진우 씨가 자꾸 소리 참으니까 어쩔 수 없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준은 진우를 거의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응, 아… 하읏, 핫, 아응….”
격렬한 몸짓에 진우의 등이 현관문을 두드렸고 참지 못한 교성이 자꾸만 튀어 올랐다. 사준의 팔에 걸쳐진 다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구둣발이 자꾸만 허공을 걷어차는 것만 같았다. 사준은 진우의 어깨 너머에 있는 어안렌즈로 밖을 확인했지만, 쉽게 꼬리를 드러낼 생각은 없는지 밖은 텅 비어 있었다.
“아, 하읏, 앗, 안 돼… 너무, 흣, 그만, 들어… 아읏.”
“너무 야한 목소리 아니에요? 하아, 스토커가 양진우 씨 소리만으로도 싸겠어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윽…!”
“읏, 왜 이렇게 조여요. 나 방금 좀 쌌어요.”
“시끄러워, 진짜….”
진우는 사준의 목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입속으로 혀가 자연스럽게 밀려 들어오며 뒤엉키자 아래가 절로 움찔거렸다. 피부가 민감해지고 맞닿은 모든 곳에서 쾌락이 피어올랐다. 진우는 사준의 아랫배에 성기를 문지르고 혀를 빨아댔다.
“아, 으응….”
온몸을 뒤덮어 버리는 절정에 진우가 사정하며 아래를 꽉꽉 조여댔다. 그에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사준의 성기가 안쪽에서 불끈거렸다. 허리 짓이 더 빨라진다 싶더니 사준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는 허리를 털었다.
“아, 흣….”
“안 쌀 생각이었는데, 후으… 그렇게 싸 달라는 것처럼 조이면 어떻게 해요.”
사준은 허리를 둥글게 돌리며 자신이 싸 놓은 정액을 내벽에 바르듯이 움직였다. 질척한 액이 안쪽에 스며드는 걸 느낀 진우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정도로는 안 되나 보네.”
사준이 밖을 살피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스토커가 문이라도 두드릴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니고, 기웃거려서 얼굴이라도 보여주지 않을까 했죠.”
진우는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 번 더 해봐요.”
“뭐?”
“이번엔 양진우 씨가 밖에 봐요.”
사준은 진우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대로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진우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벌어진 구멍 사이로 사준이 다시 한번 성기를 밀어 넣자 싸 놓은 정액 탓에 진우가 말릴 틈도 없이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들어왔다.
“흣, 이런 자세는….”
“이런 자세, 뭐요? 아까보다 깊게 들어가는 거 같은데요?”
영역표시 하는 개처럼 한쪽 다리만 들어 올린 자세로 성기를 받아들이자 기분이 묘했다. 부끄러움이 또 다른 성감으로 느껴져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준이 허리를 앞뒤로 가볍게 흔들자 질척하게 젖은 구멍에서 야한 소리가 났다.
“아, 흡…!”
“소리, 참지 말라니까요.”
사준은 진우가 무의식중에 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더니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아, 아응… 흣, 하읏.”
완전히 풀어진 내벽이 자극당하자 입에서 새된 신음이 자꾸만 튀어 올랐다. 발딱 일어선 성기를 무의식중에 현관문에 비비적대자 차가움에 몸이 움찔거렸다. 안쪽에 들어온 뜨거운 살덩이와 차가운 현관문의 상반되는 온도에 기묘한 쾌감이 몰려왔다.
“밖에 잘 보고 있어요?”
“아, 으응….”
진우는 억지로 눈을 떠 흐릿한 시야로 밖을 살폈지만, 앞집 현관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아, 으응, 없어… 아무것도, 없어… 흣.”
“정말요? 싸고 싶어서 대충 말하는 거 아니죠?”
“아니, 하응….”
진우가 도리질 치며 고개를 돌려 사준을 바라봤다. 붉어진 얼굴과 흥분이 가득한 눈동자가 사준의 흥분을 부추겼다. 퍽퍽, 사준의 치골이 진우의 엉덩이를 요란하게 때려댔다. 질퍽하게 젖은 아래가 비벼질 때마다 물이 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진우는 현관문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하, 씨발… 안 되겠다.”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던 사준이 성기를 한 번에 쑥 잡아 뽑았다. 강렬한 쾌감을 향해 상승하던 몸이 아래로 떨어진 것 같았다. 아쉬움을 느끼는 구멍이 발씬거려 진우가 원망 섞인 눈길을 보내자 사준이 말했다.
“제대로 하고 싶어요.”
사준은 진우의 손목을 붙잡은 채 침실로 움직였다.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거실을 지나쳐 방에 들어선 사준은 진우의 바지를 훌렁 벗겨버리고 침대에 엎드리게 만들어 골반을 움켜쥐었다.
진우는 상체만 침대 위에 올려놓고 하체는 침대 아래로 내놓은 채 사준에게 붙잡혔다.
“읏, 옷도 안 벗고, 뭐가 급해서….”
침대까지 왔으면 그냥 편하게 해도 되지 않으냐는 의미로 말하자 사준이 웃었다.
“양진우 씨가 좋아하니까 일부러 안 벗는 거예요.”
사준의 낮은 목소리가 음란하게 젖은 몸에 떨어졌다.
“한 번 싸고, 후으, 그다음에 양진우 씨가 벗겨줘요.”
진우의 골반을 움켜잡은 사준은 부풀어 오른 성기를 한 번에 밀어 넣더니 거친 추삽질을 이어나갔다. 거대한 성기가 안쪽을 벌리고 깊은 곳을 찍어 누를 때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강렬한 쾌감에 눈앞이 다 반짝거렸다. 몸속에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 같았다. 몸이 팡팡 튀어 오르며 성기 끝에서 흘러나온 말간 액이 시트에 얼룩을 만들었다.
사준은 진우가 입고 있던 니트를 위로 밀어 올리고는 드러난 척추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깨끗한 피부가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게 미친 듯이 야해 보였다. 사준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채 잘게 흔들자 엉덩이 사이에 고환이 문질러졌다.
“아, 으응, 흣….”
사준이 격렬하게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등을 간지럽히는 넥타이 때문에 피부가 미세한 떨림을 호소했다. 어딘가로 떠밀려 갈 것만 같은 느낌에 진우는 이불을 움켜쥐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시트를 꽉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질린 것처럼 보여 사준은 진우의 손등을 감싼 채 깍지를 끼우더니 진우의 귓바퀴를 할짝댔다.
“나 말 잘 듣죠?”
“뭐…?”
“손도 잡아 주고 양진우 씨가 좋아하는 대로 옷도 입고 있고.”
흉기나 다름없는 것으로 아래를 쑤시는 주제에 사준은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하아, 진짜… 여기 너무 좋아, 빼고 싶지 않아요, 진짜….”
사준이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약처럼 느껴지는 달콤한 말에 진우는 그대로 사준에게 몸을 맡겼다. 사준이 주는 쾌락에 취한 성기 끝에서 끈적한 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 * *
눈을 떴을 때 진우는 등 뒤에 느껴진 체온에 나른한 한숨이 나왔다. 몇 번째 싸다가 잠든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품에 안겨 있는 게 기분이 좋아서 몸에서 긴장이 쭉 빠졌다. 정신없이 흔들렸고 쌌다. 정신이 승천해서 몸과 완전히 분리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사준의 정장을 벗겨 주는 동안에도 사준이 자꾸만 제 몸을 만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우는 마른 입술을 할짝였다. 사준이 보일러를 켠 것인지 집 안에는 이제 훈기가 돌고 있었다. 진우는 눈동자를 굴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른 시간에 침대에 들어온 덕분에 아침이 되려면 한참은 남은 시각이었다.
같이 밥 먹고 일찍부터 침대에 들어와 같이 뒹굴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평범한 주말을 보낸 것 같았다. 과정에 스토커가 끼어 있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주말이다.
징―.
속으로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는 진우의 귀에 짧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눈동자를 굴려 불이 들어온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자신의 핸드폰이 아니어서 건드리지는 못하고 고개만 살짝 들어 눈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꼭 왔으면 좋겠어. 주소는 명함에……]
저장이 안 된 번호였고, 끝이 잘린 문자 내용은 쉽게 유추가 됐다. 어쩐지 이 문자 말고 또 다른 문자도 섹스 중에 왔을 것만 같았다. 정확히 알고 싶으면 사준의 손가락을 끌어다가 잠금을 풀면 되지만 진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한때 태준이 왜 본인의 가치관과 다른 성향을 보이는 하 기자를 좋아하는 걸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알겠다. 그냥 좋은 거다. 그런 가치관이나 기준 같은 걸 뛰어넘을 정도로 좋아하기 시작해 버린 건 멈추거나 되돌리거나 없던 일로 만들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자신도 사준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리는 눈처럼 소리소문없이 쌓인 ‘좋아한다’라는 마음의 무게가 어느새 이렇게나 거대해졌다. 사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사준은 자신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바이다. 원래 여자를 좋아하는데 호기심에 남자한테 접근한, 질 나쁜 바이. 심지어 남자는 양진우가 처음이라는 말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한다면 속아 넘어갈 것만 같다.
이제 자신도 주체하기 어려웠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처음이 아니어도 된다. 그저 지금의 마음을 배신하는 일만 아니라면, 과거 정도는 못 본 척 넘어갈 수 있었다. 과거에 누구를 만났건, 누구와 잤건, 지금을 속이는 게 아니라면 거짓말에 속아줄 수 있다.
진우는 몸을 돌려 사준을 바라봤다. 쌔근거리는 숨을 내쉬는 사준을 바라보고 있자 무의식인지 사준이 진우를 당겨 안았다. 몸이 완전히 밀착하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역시 확인하지 않길 잘했다. 이사준이 만난 사람이 게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때서. 이사준에게 특별한 사람만 아니라면, 그 남자가 게이든 아니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
* * *
온전한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침대가 빈 상태였다. 진우는 잠에서 덜 깬 정신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고 방문을 열었다. 일이 있다고 했으니 사준이 먼저 나갔을 줄 알았는데, 커다란 덩치가 구부정한 자세로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뭐 해?”
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가 물었다.
“일어났어요? 아침 먹을까 해서.”
그 말에 식탁을 보자 딸기잼과 식빵, 소시지가 보였다. 한동안 비워 둔 집이라 냉장고에 먹을 것이 없었을 테니 일부러 나가서 사 온 것 같았다.
“밥하는 거 처음 보네,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식탁에 앉아 물을 한 잔 마시면서 진우가 중얼거렸다.
“양진우 씨처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하죠. 그래도 혼자 산 세월이 있는데.”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준이 만든 계란프라이는 노른자가 흐트러지지 않은 예쁜 동그라미 모양이었다.
“난 완숙이 좋은데.”
“그래요? 그럼 다시 해 줄게요. 그건 내가 다 먹으면 되니까.”
사준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나? 두 개?”
“하나면 돼.”
사준은 능숙하게 계란프라이를 구웠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런 것까지 할 줄 알면, 같이 살아도 되겠다는 결정에 더 힘이 실리잖아.
아침을 먹은 뒤 사준은 미리 말한 대로 일 때문에 외출했고, 진우는 혼자 사준의 집에 돌아와 소파에 늘어졌다. 봐야 할 서류가 있지만 몸이 나른해서 글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었다. 진우는 거실을 빙 둘러봤다. 거실 곳곳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흔적이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았다.
처음에는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어색했는데 언제 이렇게 익숙해진 걸까. 이전에 사귀던 사람들하고는 하지 못했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사준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해주고 있었다.
징―.
생각하는 것도 없이 멍한 정신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지난밤이 떠오르는 진동 소리에 진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진우는 귀찮은 마음을 담아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어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태준]
찔리는 게 있다 보니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긴장됐다. 받지 말아버릴까 하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어차피 언제가 됐든 볼 사람이라 무작정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어, 왜.”
진우는 지루한 목소리로 용건만 말하라는 듯 전화를 받았다.
― 일해?
“내가 너야? 오늘 일요일이거든.”
― 네가 언제부터 주말 꼭꼭 맞춰서 쉬었다고?
어이없다는 말에 진우는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그리고는 태준이 뭔가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 쳤다.
“나 너한테 알려 줄 거 없는데.”
삼하 건설 때문에 연락한 거라면 사준에게 말했던 것처럼 알려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친구고 연인이어도 고객의 정보를 쉽게 넘겨줄 수는 없다. 나름 단단히 마음먹고 한 말인데 태준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뭐가 있다는 거네.
젠장, 먼저 선을 그은 게 독이 되고 말았다. 진우는 핸드폰을 고쳐 쥐며 태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었는데, 네가 그렇게 먼저 말하는 거 보니까 지금 우리가 그쪽 취재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은데?
이럴 때 보면 친구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진우는 잘 안 들리는 척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리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지만 지금 전화를 끊어봐야 어차피 지금뿐이었다. 평생 안 보고 살 게 아니라면 어설프게 피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 정보 누가 준 건지 잊었어? 네가 굴러온 정보를 안 쓸 사람은 아니잖아.”
덤덤한 목소리로 뻔한 거 아니냐는 듯 말했지만, 태준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듯 웃었다.
― 네가 언제부터 우리 취재 아이템에 관심이 그렇게 많았다고?
“…….”
― 이사준이야?
알면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나? 장태준 직업병이 고질병이라는 건 몹시도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꼭 이렇게 친구의 사생활에서도 기자 정신을 발휘해야 하나 싶었다.
― 양진우, 정신 차려. 이사준은 헤테로야.
예상했던 잔소리가 태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진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그걸 누가 모르는 줄 아느냐는 의미로 느릿하게 대꾸하자 태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그럼 또 술 퍼마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알아?
“…….”
진우는 늘어뜨려 놓았던 몸을 추슬러 똑바로 앉았다.
“그것도 알아.”
― 알면서도 하는 거 보면 이젠 그냥 즐기는 거 아냐? 너 심리적 마조? 뭐 그런 거야?
“웃기지 마.”
― 그런 게 아니면 당장 그만둬. 이사준은 좋은 기자고 좋은 부하직원이지만, 좋은 애인은 절대 아니야.
“하아….”
― 거기다 너같이 머릿속이 하트인 애한테는 가당치도 않아.
“…….”
장태준 입에서 하트 같은 소리가 나오는 거 보니 확실히 지금 상황이 이상하긴 한 모양이네.
― 잤어?
“애들도 아니고 내가 누구랑 자고 다니는지까지 말해야 해?”
―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너랑 잔 새끼들 좆이 어떻고 저떻고 나한테 말한 게 한두 번이야?
“그건 헤어진 다음이니까 말한 거고.”
― 그럼 이사준이랑은 사귀는 중이라는 거야?
“…….”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태준에게 쓸데없는 정보까지 질질 흘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태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한숨 쉬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저가 한숨을 쉬는 것인지. 진우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 양진우, 내 말 잘 들어. 이사준이 지금은 네가 좋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한 달도 안 돼서 여자가 좋다고 할 거야. 걔는 네가 좋은 게 아니라 남자랑 하는 섹스에 취해 있는 게 뻔해. 처음 먹어 본 거에 홀리는 거, 흔한 일이잖아. 그렇게 경험해 보고도 몰라?
늘 그렇듯이 사실만 전달한다는 어조로 태준이 명확하게 말했다. 이미 한 달이 넘었다고 하면 더 게거품 물겠지. 길게 끌어 봐야 좋을 게 없다면서.
진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본 것처럼 말하네?”
― 그걸 꼭 봐야 알아? 그 정도로 경험했으면 이놈이 진짜인지 아닌지 정도는 견적 뽑고도 남겠다. 이사준은 그냥 즐기는 거야, 진지한 마음으로 연애 같은 걸 생각할 사람이 아니야.
확신하는 태준의 말에 진우는 발끈했다.
“너 그렇게 부하직원에 대해 잘 알아? 사생활까지 단정적으로 말할 정도로?”
― 내가 걔랑 몇 년을 있었는데 그걸 모르겠어. 요령이 좋은 놈이라 회사까지 끌고 오는 경우가 없어서 그렇지.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이사준 정보원 8할이 여자라고. 너같이 연애에 목숨 거는 애가 만나면 좋을 게 없어.
진우는 태준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다 아는 얘기를 남한테 듣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태준도 모르는 것 같지만 사준은 게이와도 인연이 없는 것 같지 않았다. 안다, 이사준은 누가 봐도 아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면 태준의 말대로 슬퍼하면서 술 퍼마실 결말이 뻔히 예상된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런데, 그런데도, 어쩌면, 혹시, 이런 부사가 붙는다. 어쨌거나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이사준은 다정했으니까. 나한테는 진심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그래서 태준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싫었다. 걱정 어린 조언이고 충고라는 걸 알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몸에 좋은 약이 쓰다지만 아직은 단 게 더 좋았다.
“…그만해.”
진우는 태준의 잔소리가 더 길어지기 전에 막았다.
― 그만하긴 뭘 그만….
“장태준, 제발. 나도 안다고. 근데 그냥 둬, 끝나면 그때 생각한다고.”
― 뭘 그때 생각해? 또 술 마시면서 욕이나 늘어놓을 거면서.
여태까지 진우가 헤어질 때마다 했던 일을 태준이 콕 짚어 말했다.
“안 해, 안 한다고. 헤어져도 너한테 연락 안 하면 되잖아. 지금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는데? 그리고 솔직히 너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좋게 본 새끼 하나도 없잖아.”
짜증을 섞어 뾰족하게 말하자 태준이 헛숨을 집어삼켰다.
― 어디 사람 같은 새끼들을 만났어야 좋게 보지.
“…….”
― 난 도대체 네가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까지 데이고도 또 헤테로라니.
“…달라.”
― 뭐가?
태준은 자신이 보기에 이사준은 진우가 이제까지 만났던 놈들과 하나 다를 것 없다는 듯 물었다.
“이전까지는 헤테로라는 걸 숨긴 개새끼들이었고, 이사준은 헤테로인 걸 알고 만난 거니까 다르지.”
진우의 입에서 초라한 변론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이사준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완벽한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는 안 했다.
긴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어도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평생을 기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으로 시작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엔딩은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 행복한 기억이 많은 연애를 한 번쯤은 해도 되는 거 아닌가?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 다 하는 것 같은 그런 연애.
태준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또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억지로 참는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됐고, 설마 그 잔소리 하려고 전화한 거야? 이유나 말해.”
진우는 일 얘기로 말을 돌렸다.
― 하아, 김현이 공판 자료 좀 달라고.
“그걸 왜 나한테 달라고 해?”
절차가 귀찮아서 그렇지, 태준도 재판 자료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 서류 작성하고 기다릴 시간 없어. 삼하에 닿을 핵심이 지금으로서는 김현이가 제일 유력하니까, 네가 가진 것만 넘겨.
진우는 머릿속으로 김현이 재판 자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네가 뇌물이라도 받아. 내부자가 돼서 밝혀 보는 거 어때?”
―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알 바야?”
진우는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자료를 넘겨주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미 재판 과정이 다 오픈된 마당이라 숨겨야 할 자료도 아니었다.
* * *
주기적으로 바쁜 양진우와 늘 바쁜 이사준이었다. 큰일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나면 또다시 일이 몰아쳤다. 부동산에 다녀온 후 벌써 이 주 가까이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사이 진우는 부동산 사장과 함께 이사할 집 두 곳을 봤지만, 설명으로 들었던 것과 다르게 ‘이 집이다.’하는 느낌이 드는 집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준과 집에 대해 느긋하게 얘기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삼하 건설 일이 끝나야 시간이 날 거 같은데….’
진우는 달력을 보며 사준이 시간이 될법한 날을 짐작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취재는 재벌, 종교단체, 연예인까지 얽힌 것이라 쉽게 끝나지도 않을 것이고 1회 방송으로 끝날 게 아니었다. 후속 기사까지 나갈 걸 생각하면 앞으로도 계속 바쁠 것이 뻔했다.
* * *
사준은 어금니를 짓씹으며 카메라 렌즈를 통해 1시간 전 태준과 하 기자가 들어갔던 가게 입구를 주시했다.
“아, 씨발.”
찬 바람이 쌩쌩 불어서 귀가 다 떨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은 신입인 하 기자가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욕을 짓씹는데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우가 연락한 게 아닐까 추측하며 핸드폰을 꺼낸 사준은 액정에 떠오른 연락처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락처는 저장해 놓지 않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연락이 와서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임재민.
헤어진 다음 날 시식회 날짜가 잡혔다며 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답을 안 했다. 그날이 오늘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는데 설마 전화까지 할 줄이야. 문자에 답이 없으면 씹힌 거라고 생각할 법하지 않나?
사준은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와, 전화는 받네. 문자에는 답 없더니.
“바빴어. 답장한다는 걸 깜빡했네.”
사준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뱉었다.
“지금도 일하는 중이야.”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날씨에 덜덜 떨면서 밖에 서 있는 건 일이 아니면 하지 않을 거니까.
― 언제 끝나는데? 늦게 와도 돼. 어차피 늦게까지 있을 거니까.
도대체 임재민은 왜 이렇게 자신을 부르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단순히 오랜만에 본 동창을 초대하고 싶어서라기에는 이유가 빈약했다.
“꼭 내가 가야 하는 거야?”
― 그래도 같이 학교 다닌 정이 있는데 와 줬으면 좋겠는데.
정말 표면 그대로의 의미뿐이라면 상관없다만, 사준에게는 그 말이 빚을 갚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진짜 늦을 거야.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끝나면 연락하든지 할게.”
― 응, 알았어.
임재민의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순간 태준과 하 기자가 가게에서 나왔다. 깐깐해 보이는 남자가 태준과 건희에게 봉투를 슬쩍 내밀었을 때 사준은 카메라 렌즈에 눈을 바짝 들이댄 채 숨죽이고 셔터를 눌렀다. 언뜻 보면 태준이 뇌물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한참 찍고 났을 때는 손가락에 감각이 없는 것만 같았다.
사준은 몸을 부르르 떨며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팀원들과 늘 만나는 장소인 술집에 먼저 도착한 사준은 추위에 언 몸을 녹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10시도 안 됐으니 임재민 가게에 가고자 하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뜻 결론이 나질 않았다. 고민하면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데 가게 문이 열리고 하 기자와 태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자신보다 먼저 출발했으면서 늦게 온 것을 타박하자 하 기자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태준이 삼하 건설 회장과 만나는 자리까지 쫓아갔으면서, 사준이 숨어서 사진을 찍고 있는 줄은 몰랐던 기색이었다. 사준은 하 기자에게 상황을 짧게 설명해 주고 숨어서 찍은 사진을 태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건 갖고 있어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다 지울 겁니다.”
찍은 사진을 사용할 방법과 취재 방향에서 짧게 얘기하는데 태준이 더 못 버티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지금은 머리도 더 안 돌아간다.”
밥 먹자고 만난 자리에서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인지, 태준은 술기운 때문에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선배님은 안 가세요?”
태준을 따라 하 기자가 움직이며 사준에게 물었다.
“어, 난 좀 더 있다가 갈 거야.”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준이 손을 흔들어 보이자 하 기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태준과 가게에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사준은 남은 맥주를 천천히 마시면서 임재민에게 갈지 말지 고민했다. 만나서 좋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계속 오라고 하는 건 할 말이 있다는 건가?
고민 끝에 사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하는 게 답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으니 그냥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임재민 목적이 뭔지 모르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 * *
라비앙 로즈.
택시에서 내린 사준은 장미꽃이 각인처럼 새겨진 간판을 눈으로 확인한 뒤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었다.
딸랑―.
문에 달린 풍경이 작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준은 입구에 서서 가게 내부를 바라봤다. 화이트 톤의 가게 내부는 깨끗했고, 생각보다 넓었다. 오픈 키친에 바 테이블이 있었고 홀 중앙에는 대형 테이블이 있었는데, 오늘만 쓰기 위해 여러 테이블을 이어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따로따로 떼면 4인용 테이블 네 개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사준은 가게 구조와 테이블 크기를 가늠하며 테이블 위에 깔린 식기들을 바라봤다. 사람은 없었고, 사용 흔적이 남은 식기만 가득했다. 부를 사람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대충 훑어봐도 열 명은 넘게 다녀간 것 같았다. 가게를 쭉 훑어보는데 키친 바 아래서 뭔가 하고 있던 임재민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 연락 없어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언제 온 거야?”
술을 꽤 마신 것인지 발그레한 얼굴로 임재민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올 사람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사람 많이 다녀간 거 같네?”
“내 손님은 아니었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오다 보니까 많아진 거지.”
“술집일 줄 알았는데.”
사준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아냐, 술을 팔긴 하지만 일단 음식이 메인이야.”
“그래, 그렇게 보이네.”
“진짜 올 줄 몰랐어.”
“네가 오라고 계속 연락했잖아.”
이제 와 무슨 딴소리냐는 듯 사준이 불퉁하게 말하자 임재민이 생글거렸다.
“그렇긴 했지, 이쪽에 앉아.”
임재민은 바 테이블 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다 끝난 거 아냐? 그냥 다음에 밥 먹으러 올게.”
“그렇게 말하고 안 올 거 아냐? 왔으니까 먹고 가. 금방 되니까. 지금까지 일했으면 밥도 못 먹었을 거 아냐.”
거절할 타이밍을 쉽게 내주지 않아 사준은 임재민이 말한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야?”
임재민이 사준이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을 건넸다.
“어.”
“진짜 기자 같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데 풍경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재민아, 오늘 엄청 춥다, 빨리 정리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는 사준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인사해, 내 애인. 쉐프님이야.”
임재민의 군더더기 없는 설명에 사준은 순간 멍했다. 이렇게 남자를 애인이라고 소개한다고?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임재민이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던 사람.”
남자는 사준을 흘긋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재민이 동창이시라고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얘기를 들었을까?
“이사준입니다.”
사준은 악수를 하며 남자를 바라봤다. 험상궂은 인상이 요리보다는 주먹질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남자로 나이는 사준보다 여섯 일곱쯤 더 많을 것 같았다.
“뭐 만들어줄까?”
남자가 임재민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카프레제랑 에그 인 더 헬.”
임재민은 메뉴를 말하더니 사준을 바라봤다.
“괜찮지? 아니면 파스타 먹을래? 리조또도 있는데.”
“상관없어.”
사실 뭘 먹어도 맛을 느낄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사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일 끝났으니까 술 괜찮지?”
“어.”
임재민은 사준에게 맥주를 한 병 건네주고는 앞치마를 메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사준은 맥주를 마시면서 주방 안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사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 무척 안정적으로 보여서 어쩐지 과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부터 먹어봐.”
사준은 제 앞에 놓인 카프레제를 흘긋 보고는 맥주를 마셨다.
“버거도 하나 해 줄게.”
말은 임재민이 했지만 음식은 남자가 했다. 임재민은 바 테이블에 맥주를 몇 병 꺼내 쭉 늘어놓더니, 키친에서 나와 사준의 옆에 앉아 맥주 병뚜껑을 오픈했다.
“이미 많이 마신 거 아냐?”
“아냐, 별로 안 마셨어. 그리고 오랜만인데 한잔해야지.”
임재민은 건배하듯 술을 채운 잔을 슬쩍 들었다가 입에 댔다. 애인도 있으니 취해도 알아서 챙기겠지 싶어서 사준은 더 말리지 않았다.
어느새 임재민이 남자에게 부탁한 음식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지만, 사준은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맥주만 연거푸 마셨다. 빈속에 가까운 탓에 속이 뜨거워지는 기미가 있었는데 음식에 손이 가질 않았다. 충분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도.
임재민의 애인은 같이 술을 마실 생각은 없는지 키친에서 나와 메뚜기떼가 지나간 것 같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아서 가게 안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아까부터 술만 마시네, 음식 맛이 어떤지 듣고 싶은데.”
마침내 임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을 때 사준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 왜 부른 거야? 정말 음식 맛보라고 부른 거야?”
“…그냥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이제 와서? 왜?”
사준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의미로 묻자 임재민은 엷은 한숨을 뱉었다.
“평생 못 보고 살 줄 알았는데, 만났잖아. 그래서 반가웠어.”
사준의 입가에 순간 조소가 번졌다.
“우연히 만난 동창이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갑자기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는 건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갑자기 커밍아웃?”
임재민이 어이없다는 듯 냉소와 함께 사준의 말을 따라 했다.
“…….”
“갑자기가 아닐 건데, 너 이미 고등학교 때 알고 있었잖아.”
사준은 임재민과 눈을 마주쳤다.
“임재민, 너 혹시 그때 일로 나 원망해?”
“원망? 무슨 원망? 말을 이상하게 하네?”
임재민이 가볍게 대꾸하며 맥주를 마셨다.
“내가 무슨 원망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네가 나한테 말도 못 하게 했던 거? 아니면 네가 애들이랑 내기했던 거?”
따지는 어조가 아닌데도 추궁당하는 것만 같아 사준은 목이 탔다.
“보통 가해자는 쉽게 잊는 편인데 아직도 기억해? 어지간히 양심에 찔렸나 봐?”
“…사과라도 받고 싶은 거야?”
“네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이미 지난 일이잖아. 그때 네가 비겁했던 건 맞지만 그 나이대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임재민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며 웃었지만 사준은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술로 목을 축인 사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임재민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그냥 내가 이렇게 산다는 거 알려 주고 싶었어.”
“왜?”
사준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임재민을 바라봤다. 사준의 상식 속에서 몇 년 만에 만난 동창에게 커밍아웃한다는 선택지는 몇 번을 되짚어 봐도 없었다.
“…사실, 나 너 카페에서 처음 본 거 아니야.”
임재민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사준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날 바에서 사준만 임재민을 본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디서 봤는지는 안 물어보네?”
즐거운 것처럼 임재민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에는 적으니까. 말하고 지낼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았어. 그날 너랑 같이 있던 사람 인상 되게 좋던데, 둘이 그런 사이, 맞지?”
임재민이 진우의 얼굴까지 본 것이 확실해지고 말았다. 사준은 새 맥주를 잔에 따르고 단번에 잔을 비웠다. 말을 하면 할수록 속이 답답해졌다.
“그런 사이가 뭔데? 애인이라도 되냐는 거야?”
임재민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임재민이 처음 만나서 친근하게 가게에 오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소수자들끼리 통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니까.
“아냐.”
잔이 비기 무섭게 새로 술을 따르면서 사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라고…? 그날 봤던 사람은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고작 한 번을 봤으면서, 뭘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그런 거 아냐.”
“…….”
“그냥 필요해서 거기 있던 것뿐이지.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야.”
임재민이 뭘 어떻게, 얼마나 봤는지 모르지만 사준은 일단 부정했다. 필요하면 취재 때문에 아는 동성애자와 같이 간 것뿐이라는 말까지 할 생각이었다. 처음 그 바에 출입한 목적은 분명 취재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임재민의 질문은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성애자가 아니면 양성애자야?”
“…….”
사준의 성향은 진작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하는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입을 벌리고 누군가 돌을 밀어 넣은 것처럼 성대가 막혀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임재민은 사준을 가만히 보더니 보란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때 나 좋아했잖아.”
“…….”
“인정하면서 변한 줄 알았는데, 넌 그때나 지금이나 비겁하네.”
이번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어질거렸다. 지난번 결혼식 때 만났던 동창들을 보며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놈들이라고 조소했는데, 임재민이 보기에는 그 녀석들이나 자신이나 다를 게 없다는 거다.
“그런 적 없어.”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을 뱉자 임재민은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뭐, 그럼 그렇다고 하든가. 이미 지난 일에 시시비비 가리는 것도 웃기지. 지난 일이잖아.”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임재민은 그저 아주 먼 과거에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있는 기억일 뿐이지 감정은 아니었다.
“근데 네 이기심 때문에 남한테 상처 주지는 마. 열일곱이야 어리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지금 우리 나이는 어리다는 핑계가 안 통할 나이잖아.”
“자꾸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
“할 만하니까 하지. 잠깐 봤는데도 그 사람이 너한테 빠진 게 너무 눈에 보이던데?”
동류로서 통하는 뭔가가 있다고 말하는 걸까? 사준은 얼굴을 굳힌 채 임재민을 바라봤다.
“솔직히 네가 그럴 틈을 줬으니까 그런 거 아냐? 이 나이 먹도록 남자만 좋아한 사람이면 일반인한테는 눈길 안 줘. 힘들 거 아는데 누가 그런 짓을 해?”
그거야 사람 나름인 거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틈을 준 거 아니냐는 지적에 입이 안 움직였다. 사준이 쉽게 반박하지 못하는 것에 임재민은 확신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짓을 세상 사람들이 보통 뭐라고 하는지 알아?”
“…….”
“쓰레기.”
“뭐?”
“너는 아니라고 내빼면서 다른 사람 마음 갖고 노는 게 재미있어?”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네.”
사준은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여유를 되찾았다. 하마터면 임재민 페이스에 휘말려 버릴 뻔했다. 맥주로 목을 축인 사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갖고 놀긴 누가 갖고 놀아? 그 사람은 나한테 사귀자는 말 같은 건 한 번도 한 적 없어.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지레짐작해서 말하는 게 더 웃긴 거 아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갖고 노는 거랑 뭐가 달라?”
“사귀자고 말하면 대답할 거야. 그럴 마음 없다고.”
임재민이 기가 찬 얼굴로 사준을 바라봤다.
“내 말 취소해야겠다. 너 그때보다 더 나쁜 놈이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해.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무조건 날 좋아해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타인이 날 좋아한다고 내가 그 마음에 일일이 응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
“…….”
“내가 좋아하니까 상대도 날 좋아해야 한다는 억지가 어디 있어?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스토커 같은 범죄 저지르는 거 같은데?”
“말은 잘하네.”
임재민이 말간 얼굴로 웃으며 비아냥거렸지만 사준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솔직히 그 사람도 나랑 사귈 마음까지 가진 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냥 같이 있는 게 즐거워서 노는 것뿐일지도 모르는 건데, 사람 마음 속단하면 안 되는 거지. 말도 안 한 걸 내가 짐작해서 움직일 필요 있어?”
그리고 이렇게 다정한 쓰레기가 어디 있어? 사준은 속으로 말을 덧붙였다. 자신은 양진우와 함께 있는 동안 양진우가 기분 좋을 것들만 해 준다. 그럼 문제 될 거 없는 거 아닌가? 여태 양진우가 만났던 쓰레기들하고 동급으로 취급받는 건 사양하고 싶다.
“사람 마음을 속단하지 않아서, 동성애자랑 같이 게이 바를 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임재민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그렇게 부정하는 이유가 뭐야? 동성애자라고 하면 누가 너 죽여? 아니, 그래, 가족이나 회사에 커밍아웃하는 건 힘들 수 있다 치지만 나 같은 사람한테는 그냥 말해도 되는 거 아냐? 난 그러길 바라서 너한테 말한 건데.”
“네가 잘못 짚은 것뿐이야.”
사준은 다시 한번 부정하며 잔에 따라 놓은 술을 들이켰다. 맥주만 몇 잔째 마시고 있어서 입안이 썼다.
“너 보고 있으니까 동족 혐오 이런 단어 떠오른다.”
“혐오할 동족이 아니래도.”
“자아 부정인가?”
임재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새로운 맥주를 사준과 제 잔에 차례로 따랐다.
“뭐가 그렇게 싫은 건지 모르겠는데, 평범하게 살 수 있어.”
“평범? 남자끼리 만나는 게 무슨 미래가 있다는 거야?”
술기운에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자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임재민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와 일자로 굳어졌다.
“아직도 그런 생각 하네. 너 진짜 하나도 안 컸다. 그렇게 속이면서 사는 게 더 피곤하지 않아?”
맞는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하지만 사준은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혀.”
사준은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임재민은 술잔을 빙빙 돌리다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겠어. 내가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네. 그래도 너랑 같이 있던 그 사람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같으니까 적당히 거리라도 두라고, 동성애자인 동창으로서 충고해 주고 싶네.”
“그런 충고 필요 없어.”
“아니, 나는 그 사람 보면 너 같은 사람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무조건 조언해 줄 건데?”
“네가 만날 일 없을 거 같은데.”
사준은 피식거리면서 맥주를 마셨다. 처음 임재민을 봤을 때는 마냥 경계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는데,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임재민이 꺼낸 동성애자에 대한 화제 때문인지 지금은 좀 편해졌다.
사준은 긴장이 풀어진 채 임재민이 건네는 술을 모조리 다 마셨다. 잔에 따라지는 술이 언제부터 와인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술을 홀짝홀짝 마시던 사준은 어느새 떨어지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취하고 말았다.
“이사준, 집 어디야? 데리러 오라고 연락할 사람 있어?”
“어, 음….”
평소라면 알아서 갈 수 있다고 말했을 것인데 취한 정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 어… 양 변호사님.”
“뭐?”
“양진우 씨….”
사준은 뿌옇게 흐려진 정신 속에서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전화한다?”
“…….”
임재민은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사준의 핸드폰을 들어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는 [양 변]이라고 저장된 연락처를 찾았다.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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