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Never enough(2) (5/8)

목차

3권

4. Never enough(2)

5. Try everything

6. Never not

[외전] Everyday is a good day

4. Never enough(2)

* * *

진우는 가게 앞 간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밋빛 인생이라…. 진우는 제 인생과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약 30분 전,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에 이사준에게 전화가 왔다. 서로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봤기에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받은 전화에서는 처음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준이 친구인데 얘가 많이 취했네요. 혹시 데리러 와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어딘가요?’

청담동으로 시작하는 주소를 들은 순간 스치듯 봤던 얼굴이 떠올랐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의 남자가 바로 이 가게 안에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많이 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진우의 치정 싸움은 여자가 얽힌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큰소리 내서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게이 치정 싸움이 벌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상대한테 주먹질이라도 해야 하나?

가게 앞에서 망설이던 진우는 이내 결심한 것처럼 주먹을 꼭 쥐고 발을 움직였다. 문을 열자 딸랑거리며 작게 울리는 풍경 소리가 귀에 불편하게 걸렸다.

“실례합니다.”

조용한 실내로 들어서자 체격이 좋은 남자가 홀 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있었다. 남자는 진우를 보더니 바 테이블 가운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사준은 엎드려 있었고, 옆에는 그날 카페 앞에서 봤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 양 변호사님?”

진우를 알아본 듯 남자가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사준과 함께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남자한테서는 취기가 역력했다.

“네, 이 기자님 데리러 왔는데요.”

“반가워요, 제가 전화했던 임재민이에요.”

진우는 임재민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자신이 그를 한눈에 게이라고 알아본 것처럼 임재민도 알아봤다. 그 증거로 임재민은 애매모호하게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근데 변호사님은 이사준이랑 무슨 사이에요?”

“…친구요.”

“에이, 다 알 만한 사이에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죠?”

“…….”

“둘이 사귀어요?”

“…….”

스트레이트로 살아온 사준이 남자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 것 같지 않아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데리러 온 거 보면 보통 사이 아닌 거 같은데….”

“…….”

“이사준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단 말이죠.”

진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바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사준에게 다가갔다. 어지간히 마셔서는 취하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마셨기에 몸도 못 가누고 엎어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양 변호사님 짝사랑이에요?”

진우는 나불나불 움직이는 임재민의 입술이 얄미워서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진우는 손바닥을 쫙 펼쳤다가 꽉 쥐었다.

“이런 놈은 그냥 버려요.”

“그런 충고를 오늘 처음 보는 사람한테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진우는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의미로 딱딱하게 말하고는 사준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집에 가자.”

진우가 대놓고 무시했음에도 임재민은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저도 초면에 이런 참견하고 싶지 않은데, 이사준이 고등학교 때랑 똑같은 거 같아서 말이죠.”

“…….”

고등학교 때라는 말에 진우는 멈칫하고 말았다. 하루 이틀 알던 사이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게이가 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진우에게 충격이었다.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내 말 들어요, 보아하니 당신 이쪽인 거 같은데.”

진우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사준처럼 어중간한 사람 좋아해 봐야 우리 같은 사람만 손해예요.”

“…….”

진우는 입매를 굳힌 채 임재민을 바라봤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들이미는 건 장태준 하나로 족했는데 여기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카운터펀치가 연속으로 날아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사준한테 데리러 올 사람 없냐고 물었더니 양 변호사님 이름을 말했어요. 근데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하던데요? 남자랑 무슨 미래가 있냐면서. 나는 내 애인도 다 소개해줬는데.”

심장이 욱신거리면서 아픔을 호소했다. 더는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은데 임재민은 눈짓으로 홀을 청소하는 남자를 가리키며 계속 입을 놀렸다.

“지금 화나서 한마디도 안 하는 저쪽이 제 애인이고, 이사준은 오늘 얘기해 본 결과 고등학교 때랑 변함없이 쓰레기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면 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추측일 뿐이지만 진우는 사준이 저 남자에게 뭔가 못된 짓을 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 임재민은 이사준을 좋아했고 이사준은 그걸 알면서 모르는 척하거나 혹은 즐기거나, 그런 일을 했던 게 아닐까? 묘하게 지금 자신의 상황과 비슷해서 막연한 가설인데도 신빙성이 있게 느껴졌다. 아니면 이사준이 혹시 좋아했었나…?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요. 만약 변호사님이 제 지인이었으면 저는 이사준이랑 만나는 거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렸을 거니까.”

진우는 머리를 흔들어 차오른 생각들을 밀어내고 자신을 다독였다. 술에 취한 사람이다. 대화할 필요가 없다. 저런 말에 발끈해서 이사준을 변호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진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가타부타 따지면서 말 섞지 말자.

사준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진우는 제 어깨에 팔을 두르게 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준의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은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듯 지나가자 눈가가 다 욱신거렸다. 기다란 숨을 뱉어내자 뽀얀 입김이 번져 나왔다. 답답함으로 부풀어 오른 속이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차에 억지로 사준을 밀어 넣고 돌아오는 길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우는 찡해지는 코끝을 외면한 채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는 어두운 도로를 묵묵히 운전했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 때문에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속도를 올렸지만, 그럴수록 더 어두운 곳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 * *

“음, 하아….”

하반신에서 밀려오는 감각에 사준은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깼어?”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려보자 진우가 사준의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양, 변호사님? 거기서 뭐 해요?”

당황한 사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이내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벗은 기억은 없으니 진우가 벗긴 것 같은데, 여태까지 이런 적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읏.”

뭐라 말하기 전에 진우가 사준의 귀두를 입술로 문 채 쯉쯉 소리를 내며 빨았다.

“아, 흐아… 양 변호사, 님. 아흐, 왜 그래요… 빠는 거 싫어했, 잖아요.”

끄트머리만 자극하는 힘에 금방이라도 쌀 것만 같아 사준이 진우의 머리를 밀어내자 진우가 순순히 물러났다.

“술에 그렇게 취했는데도 잘 서네.”

쪼옥 소리와 함께 입속에서 빠져나온 성기가 허공을 향해 발딱거렸다.

“이제, 넣을래.”

“왜 그러는 건데요?”

갑자기 돌아가는 상황에 사준이 만류하듯 묻자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우리 안 한 지 좀 됐잖아.”

양진우한테 흥분하는 이사준을 보고 싶었다. 아니,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확인하고 싶었다. 사준의 허리 위에 올라탄 진우는 젤이 듬뿍 묻은 손가락으로 스스로 구멍을 풀었다. 찐득한 젤로 젖은 손가락을 찔러 넣고 빙글빙글 돌리자 연쇄 작용처럼 진우의 성기가 딱딱하게 일어서 흔들렸다.

“아… 으응.”

손가락 개수를 늘려가며 내벽에 젤을 꼼꼼히 바르는 모습을 사준은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진우가 뒤를 푸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너무 야하게 느껴져 아래가 터질 것 같았다. 적당히 구멍이 풀린 것을 느낀 진우는 사준의 귀두 위에 엉덩이를 대고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읏…!”

몽롱한 상태에서 쥐어짜이는 것만 같은 쾌감이 몸을 덮치자 사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음, 하, 잠깐, 하아….”

“내가 잠깐이라고 했을 때 기다려준 적 없으면서.”

진우는 허리에 힘을 준 채 그대로 엉덩이를 내려 사준의 성기를 한 번에 먹어 치웠다.

“아흑…!”

아랫배를 빠듯하게 채운 성기에 진우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신음했다. 엉덩이가 움찔거리면서 허리가 징징 울렸다.

“그렇게, 하아, 갑자기 다 넣으면 어떻게 해요.”

사준은 상체를 일으켜 진우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진우는 사준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사준.”

“네.”

“…너 정말 남자는 내가 처음이야?”

사준은 진우의 어깨를 살짝 밀어서 얼굴을 마주 봤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진우는 사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했던 남자가 있던 거 아니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움직여….”

진우가 사준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조르듯이 명령했지만 사준은 쉽사리 움직이질 못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준 때문에 안달이 난 진우가 엉덩이를 꽉꽉 조이며 허리를 살살 돌렸다.

“얼른.”

진우가 내벽을 꽉 조이며 조르자 사준은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리자 진우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설프게 풀어 놓은 구멍이 오물오물 움직이면서 성기에 차지게 달라붙었다. 사준은 진우를 품에 끌어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한 뒤 허리를 흔들었다. 질척질척, 젤로 흠뻑 젖은 구멍에 살이 비벼질 때마다 음탕한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아, 흑, 안쪽, 너무 깊어… 으응.”

“자는 사람 덮친 건 양진우 씨잖아요. 옷도 다 벗겨 놓고 뭐한 거예요?”

“확, 인….”

“응? 뭐라고요?”

“아냐, 흣, 더… 더 세게 해줘….”

귓바퀴를 핥는 것처럼 달콤하게 조르는 소리에 사준은 진우를 뒤로 밀어 침대로 떨어트리고는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수직으로 때려 박듯이 진우의 엉덩이 사이에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푹푹 쑤셔 넣었다.

“아, 하윽… 흐으. 아, 싸, 쌀 거 같아….”

밀려오는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진우가 몸을 부르르 떠는데 사준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점막을 무자비하게 파고드는 것에 진우는 머리가 다 어질거렸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염없이 흔들리던 몸짓이 멈춘 순간 아랫배가 묵직하게 차올랐다.

“아, 하으….”

사준이 슬쩍 성기를 뒤로 빼자 안에 싸 놓은 게 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진우는 성기가 완전히 빠지기 전에 양다리로 사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하아, 빼지, 말고… 그냥, 더….”

“진짜, 오늘 왜 이러는 건데요, 너무 야하잖아.”

사준은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 채 진우의 엉덩이 사이로 다시 허리를 내린 채 거칠게 추삽질을 이어갔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어 뇌를 휘저었다. 과한 쾌감에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진우는 사준의 어깨에 매달리며 작게 흐느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쾌락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밀려오는 절정감과 함께 진우의 눈앞이 또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 * *

그날 양진우는 뭔가 달랐다. 뭐였을까. 왜 그랬지?

자꾸만 매달려오는 진우를 거절하지 못하고 술김에 말 그대로 폭풍 같은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날 아침, 진우는 침대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집을 나간 건 아니고 둘 다 일이 바빠서 마주칠 시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스쿠프〉에서 터트린 기사가 삼하 건설 비리 관련이라 진우는 재판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일이 바쁘면 연락을 못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느낌이 달랐다.

혹시 임재민이 뭔가 말한 걸까? 설마…. 그러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이사준, 아이템 회의에 그렇게 넋 빼고 있는 건 자신 있는 거야?”

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사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예인 마약에 재벌 비리에 사이비 재단까지 3연속 특종을 터트렸는데도 태준은 만족하지 못하고 뉴스거리를 만들어 오라고 닦달하는 중이었다.

사준은 핸드폰 메모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지난번에 말했던 청학동, 이거 학교 폭력 문제도 있는 거 같아요.”

한 번 까였던 아이템을 다시 꺼내 들자 태준이 얼굴을 확 구겼다.

“맞다, 거기 서당 폭력 제보 들어온 거 있긴 한데….”

김 작가가 태블릿 화면을 두드려서 〈스쿠프〉 홈페이지 화면을 태준의 앞에 내밀었다. 태준은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빠르게 읽어 보고는 사준을 바라봤다.

“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아내기 힘든 거 알지?”

태준이 아이들의 거짓말을 어른이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니까 거기 가 봐야죠. 성인 코스 등록해서 좀 파볼게요.”

“길게 끌지 마. 이번 주까지 못 만들면 그냥 버릴 거야.”

“알겠어요.”

사준은 청학동으로 떠나는 일정을 핸드폰에 입력하면서 이번 주도 양진우 얼굴을 못 보겠다고 생각했다. 만나서 얘기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사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어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떨어져서 생각해 볼 좋은 기횐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동거까지 하면서 너무 붙어 있었지.

* * *

진우는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그제, 이사준이 집에 안 들어왔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외박할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일 때문에 집에 못 오는 거라는 건 대충 짐작은 가는데….

취한 이사준을 데려온 다음 날 아침에는 자신이 일부러 피했으면서, 막상 사준이 집에 안 들어오니 신경 쓰여 미치겠다. 얼굴을 마주치면 임재민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묻게 될 것만 같아서 일부러 피했는데….

늦게 들어왔다가 일찍 나간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외박하는 것 자체는 이사준의 집으로 짐을 옮긴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우는 들고 있던 펜 끝으로 달력에 적힌 날짜를 톡톡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다가 핸드폰을 손에 쥐고 태준의 연락처를 찾았다.

이런 일로 연락하기 싫다고 해도, 본인을 제외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태준에게 묻는 것이었다.

― 여보세요?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태준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바빠?”

― 그렇게 묻는 거 보니까 무슨 일 있는 모양이네?

“무슨 일 있기를 바라는 거 같은 말투다?”

― 그럴 리가.

“너희 요새 많이 바빠?”

진우는 더는 발뺌하는 걸 멈추고 물었다.

― 이사준이 며칠 안 보이니 심심해? 그래 봤자 이번 주 목요일에는 올 거 아냐.

“…어디 갔는데?”

― 뭐야, 그런 얘기도 안 해? 너 나한테 사귀는 사이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기가 막혀 하는 태준의 반응에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취재 때문에 인천 갔어.

역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

― 그럴 줄 알았다는 건 직접 들은 건 없다는 거 아냐?

쓸데없이 예리한 태준의 말에 진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 술 마실래?

“아니, 일할 거 있어서 좀 바빠.”

지금 태준과 술을 마시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하면서 사준을 의심하는 말만 늘어놓게 될 것 같았다.

― …그래, 알았다.

태준은 더 꼬치꼬치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기고 까맣게 변한 화면을 보며 진우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일하는 내용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던 건 지금까지와 별다를 게 없다. 그러니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못 들은 척 넘겨 들었던 말들이, 애써 무시해서 눌러 뒀던 말들이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그냥 한 번 만나는 거야.’

‘내일모레면 안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보고 싶어 하는 건데?’

‘동성끼리는 미래가 없다는 소리나….’

똑바로 마주하는 게 무서워서 외면하고 있던 걸 이제는 확인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 *

금요일 늦은 시각, 사준은 현관문을 조용하게 열었다가 거실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집에 없거나, 있다면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진우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처음 이 집에 올 때 갖고 왔던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가방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진우가 짐을 챙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양 변호사님…?”

사준이 부르자 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준을 바라봤다.

“어디 갔다 왔어?”

“취재 때문에 좀 바빴어요. 혹시 기다렸어요?”

태연하게 말하는 사준을 바라보며 진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혹시 기다렸냐니, 당연히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럼 미리 말 좀 해주지.”

“정신이 없었어요, 근데 이 짐은 뭐예요?”

진우는 입속으로 혀를 굴렸다. 지금 하려는 말을 정말 해도 될지 자신이 없었다. 그냥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흐린 눈을 하고 지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건데 보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괜찮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귀는 사인데 그 정도 연락은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조용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묻자 사준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사준이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진우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사준을 바라보며 똑바로 섰다.

“…이 기자님, 나 좋아해?”

담담하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애정을 구걸하는 초라한 애교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좋아하죠….”

덤덤한 사준의 얼굴을 보고 진우는 쓰게 웃었다. 누가 그런 말을 저런 얼굴로 할까. 마음이 짓밟히고 있었다.

“아, 하하….”

꼭 TV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그 작위적인 웃음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걸 진우가 깨달은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귀는 사이라는 말에는 얼굴이 흙빛이 됐으면서 좋아한다니….

이사준을 향해 활짝 열려 있던 마음의 문이 끼이익, 낡은 소리를 내며 닫혀가고 있었다.

진우는 지금 사준의 말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게이가 좋아한다는 건 이사준에게는 그냥 창부의 순정일 뿐인 거다.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들도 진우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좋아함은 양진우‘도’ 좋아한다지, 양진우‘만’ 좋아한다는 건 아니었다. 이사준의 지금 태도에서 남자끼리 뭘 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는 게 훤히 보였다.

이사준의 좋아하죠는, 그러니까 처음에 그가 말했던 좋아요, 는 양 변호사님 (이랑 하는 섹스가) 좋아요, 였는데. 괄호 안의 생략된 말을 모르는 척했다.

교묘한 말장난에 넘어가서 착각에 허우적거린 건 처음부터 끝까지 양진우 혼자였다. 아니다, 원래 착각은 자유랬다. 그러니까 꼭 자신이 잘못한 것만도 아니다. 확실한 건 똥차 가고 벤츠 온 줄 알았는데 더 거대한 똥차였다는 사실이다.

설렘, 기대, 두근거림 같은 간지러운 감정들로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앙상해지고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과 이사준의 위치가 같아지고야 마는, 이 순간을 참을 수 없었다. 언제가 되면, 얼마나 더 경험하면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아질까.

사실은 내내 불안했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조심 걷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금이 갈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이번만큼은 연애에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욕심이 현실을 보는 걸 자꾸만 피하게 했고, 그래서 이 모양인 거다. 어쩌면 좀 더 꿈속에 젖어 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은 없는 걸까.

진우는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렸지만 제대로 웃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 기자님이 전화 통화하면서 내일모레 헤어질 사람이 어쩌고 하는 거 들었어. 그때는 친구들이 추궁하니까 그런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갔는데, 역시 그게 아니었네.”

“…….”

“궁금한 게 있는데.”

“……?”

“임재민 씨랑은 무슨 사이야? 그냥 단순한 동창은 아닌 거 같던데.”

잘못을 추궁하듯이 묻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사준은 바람피운 게 아니니까.

“아….”

“혹시, 첫사랑 뭐 그런 건가?”

진우의 질문에 사준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날 임재민과 마주 봤을 때 스치듯 떠올랐던 가설 중 하나가 맞았다. 남자는 양진우가 처음이고, 남자는 양진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단다. 결국, 그 많은 개새끼들을 만난 건 아무 도움이 안 됐다. 이사준도 그저 스치는 개새끼 중 하나였다.

“나는 당신 좋아해,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했어.”

진우의 말에 사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원망 비슷한 것까지 담고 있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들이밀지 않았다면 사준이 연애 기분만 즐길 생각이었던 게 분명해졌다.

“이 기자님 눈치 빠르잖아, 내 마음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말하지는 말고.”

“…미안해요.”

진우는 무엇에 대한 미안해, 인지 묻지 않았다.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던 게 아니고….”

“그래, 알고 있던 게 아니라 하게 만든 거겠지.”

“…….”

“나중에 내가 따지면 사귀자는 말 한 적 없다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어?”

사준은 입을 꾹 다문 채 멍한 눈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잘만 움직이던 혀가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진우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모르겠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언젠가 끝이 날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감정의 부스러기 같은 건 없이 훨씬 더 깔끔한 상태로 끝을 말하게 될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양진우가 듣고 싶을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우는 사준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드륵,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사준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사준은 자신의 옆을 스치는 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양 변호사님.”

“왜 잡아?”

진우는 사준의 팔을 뿌리치지 않고 붙잡는 이유를 물었다.

“이대로 가면….”

“안 가면? 나 혼자 또 착각에 빠져서 지내라고?”

“…….”

“호의만 잔뜩 흘려놓고. 처음부터 책임질 생각은 없었잖아.”

“…….”

“착각에 빠진 사람이 죄라고, 그렇게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듯이 다 미룰 생각이었어?”

“…….”

“내가 게이니까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게 아니면? 여러 번 헤어져 봤으니 이런 개 같은 상황이 괜찮을 줄 알았어?”

“…….”

“하나도 안 괜찮아. 기분 더럽고 짜증 나.”

“…….”

“근데 왜 나만 이렇게 더러운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억눌러 놓았던 마음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지금 내가 이런 엿 같은 상황에 놓인 건 내 탓이 아니야. 너를 포함해서 내가 만났던 상대들이 거지 같은 새끼들이어서지.”

“…….”

진우는 사준을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말들을 빠르게 뱉었다.

“나는 늘 최선을 다했어.”

“…….”

“최악인 건 너야, 내가 아니라.”

한 음절씩 강조하며 진우가 말을 뱉었다. 살면서 이토록 증오를 가득 담아 말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양….”

“부르지 마…!”

양 변호사님이든 양진우 씨든 어느 쪽도 듣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긴 한숨을 뱉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너보다 몇 년 더 산 사람으로서 충고 하나 하는데,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마.”

마지막 말까지 뱉어내고 진우는 정리해 뒀던 캐리어를 끌고 사준의 집을 나왔다. 올 때는 무척 가볍게만 느껴졌던 캐리어가 나올 때는 절망이 더해져 두 배 이상 무겁게만 느껴졌다.

철컥,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사준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쫓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진우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을 꾹 참고 있는 얼굴을 사준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지금은, 아직은 울면 안 된다.

진우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정면만 바라보며 차를 몰았다.

좋아한 것뿐이다.

혼자 좋아한 거니까 혼자 수습해야 한다. 그걸 못하면 마음을 받아 달라 강요하는 스토커가 되는 거고.

이사준은 상냥하지만 양진우를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사준의 행동이 몽땅 거짓이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사준은 양진우가 바라는 진심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도망치듯 집에 들어온 진우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차가운 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늘 그랬다. 양진우 인생은 라비앙 로즈가 아니라 라비앙 누아르였다.

새삼스러운 건 없다. 그냥 역시 이번에도 이렇게 됐구나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또 괜찮아지길 바라면서, 다음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견디면 된다.

진우는 훌쩍이는 소리 한 번을 내지 않은 채 엎드려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너무 넓었고, 몹시 썰렁했다. 그래서, 너무 추웠다. 눈물이 나올 만큼.

* * *

진우가 나가는 걸 멍한 눈으로 보고 있던 사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끝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현실감이 없었다.

사준은 조금 전까지 진우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상황을 되짚어봤다. 얼마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으니까 임재민과 마주친 게 문제였던 거라는 결론이 바로 나왔다.

임재민이 진우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말을 한 게 분명했다. 원인은 짐작이 됐지만, 임재민에게 따질 마음은 안 들었다. 없는 말 지어서 하지는 않았을 거니까.

자업자득.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다만 조금 더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양진우가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빨랐다.

사준은 진우의 물건이 사라진 거실을 빙 둘러봤다. 늘어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집 안이 썰렁해진 것만 같았다. 사준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시시해.”

허공에 흩뿌려진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탓인지 마음이 황량했다.

* * *

징―. 징―.

토요일 오전, 햇살이 들이치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진우는 요란하게 울어대는 핸드폰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장태준]

사준의 집에서 나온 지 일주일하고 하루가 지난 오늘, 감이 좋은 태준이 이렇게 전화한 거 보면 뻔했다. 지난번 통화에서부터 어렴풋이 뭔가 눈치챘을 거고, 매일같이 이사준을 마주치는 태준이니 뭔가 알아차렸을 거다.

하나 있는 친구의 전화를 피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화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지금 상태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진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리고 천장을 보며 지금 상태에서 다행인 점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우선은 해가 바뀌기 전에 사실을 확인하고 관계를 끝냈다는 점. 새해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헤어졌다면 분명 정초부터 우울해서 올해는 뭘 해도 재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두 번째는 이사준이랑 같이 살 생각으로 새집을 계약하지 않았다는 점. 집까지 계약해 버렸으면 꼴이 아주 우스워졌을 거다. 세 번째는 진우에게 일이 아주 많이 쌓여있다는 점. 삼하 건설 비리를 언론에서 제대로 터트려 준 덕에, 연말은 물론이고 정초까지 미친 듯이 바쁘게 보낼 예정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지난주도 일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산더미처럼 싸인 서류가 반갑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네 번째는 일 때문에 얽힌 사이지만 이사준은 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점. 눈치 빠른 태준이라면 알아서 얽히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손가락을 접어가며 괜찮은 점을 꼽던 진우의 입에서 엷은 한숨이 번졌다.

이번 겨울은 봄처럼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겨울은 겨울이다. 이번에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내년 봄? 최소한 다음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괜찮아졌으면 좋겠는데….

어릴 때는 이틀만 지나도 오래전 일이 된 것 같았다. 처음 겪는 일이 많아서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벅찼다. 그래서 헤어져도 금방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매번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같은 일이 자꾸 반복되니 그 일이 어제 일인지 10년 전 일인지 헷갈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래전 일처럼 안 느껴지고 생생하게 기억이 남았다.

끝이 더러웠던 만남에서 늘 지고 싶지 않아 오기를 부렸다. 바람을 피운 건 저쪽이니까, 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부러웠다.

양진우 입장에서는 그들이 불륜이었지만 보통의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게 정상이었다. 한순간의 밤놀이, 잠시의 한눈은 모두 자신이었다. 그래서 더 지고 싶지 않았다. 괜찮은 척했다. 침착하려 했다. 헤어지는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그렇게 위로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자는 절대 이길 수 없어.

진우는 팔을 들어 눈두덩을 가렸다. 겨울 햇살이 너무 시려서 눈가가 또 시큰거렸다.

지친다.

항상 바랐다. 자신과 헤어진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후회하기를. 그들의 연인이라는 사람들과 절대 잘 살지 말기를.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지친다. 이제 더는 남의 불행을 바라는 우스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진우는 축축하게 젖어 드는 귓바퀴를 무시한 채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 없이 소파에 누워있었다.

* * *

진우가 없는 집은 무척 썰렁했다. 오래 같이 산 것 같지도 않은데 집이 너무 휑하게 느껴져서 사준은 집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집에 안 들어갔다.

“이사준.”

편집실에서 영상 자막을 확인하고 있던 사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편집실 문 앞에는 삼하 건설 특종을 터트린 이후 칼같이 퇴근하던 태준이 서 있었다.

“퇴근 안 하셨어요?”

태준은 사준이 보고 있던 영상을 눈으로 흘긋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거 안 급하잖아, 밥이나 먹고 해.”

일부러 찾아온 티가 나는 행동에 사준은 태준의 용건을 대충 눈치챘다. 거절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사준은 태준을 따라 움직였다. 언젠가 진우를 우연히 만났던 설렁탕집에 둘은 마주 앉았다. 뭐 먹을 건지 묻지도 않고 태준은 설렁탕을 주문한 뒤 메뉴가 나오자 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올해의 기자상 우리 팀에서 나올 거 같아.”

“그래요?”

태준이 툭 던진 말에 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범위였다. 올해 〈스쿠프〉에서 터트린 특종이 몇 갠데 어찌 보면 당연했다.

“본부장이 나한테 추천서 쓰라고 했는데 내가 쓰면 공평하게 못 할 거 같아서 안 쓴다고 했다.”

“팀장님이 쓰셨으면 누구 하려고 했는데요?”

“글쎄.”

태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누가 됐든 우리 팀에서 나오면 좋죠.”

사준은 말하면서 은근슬쩍 태준의 눈치를 살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있으려니 괜히 불편했다. 무엇보다 뭔가 말을 할 것처럼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답답했다.

사준은 밥을 한술 떠서 삼키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양 변호사님 일 때문에 무슨 말씀 하시려는 거면, 팀장님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사준이 먼저 선을 긋자 태준은 설렁탕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양진우는 사골국에 담긴 뼈 같아.”

“…진국이라고요?”

“아니, 그랬으면 국물이라고 했겠지. 걔는 겉만 멀쩡해. 속은 다 빠져서 사골 뼈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애야. 근데 그나마 남아 있던 걸 네가 다 뽑아 버린 거 같네.”

사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너한테 뭘 어떻게 하라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야.”

“…….”

“그리고 양진우도 양진우지만 난 네가 좀 걱정인데.”

“네…?”

“요즘 너 보고 있으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모르겠거든.”

사준은 무슨 뜻이냐는 듯 태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 이쪽 뺨, 면도 제대로 안 됐어.”

태준이 왼쪽 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당황한 사준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무리 바빠도 늘 번지르르하게 다니는 놈이 뭐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면 신경이 쓰이는데? 그러다 취재할 때 헛소리라도 하면 팀장으로서 곤란하니까.”

“…….”

“회사만 출근한다고 일상이 멀쩡하게 돌아가는 건 아니지.”

정곡을 푹 찔려서 사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넋 놓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너랑 양진우가 섹스파트너였든 사귀었든 그런 건 안 궁금한데, 어쨌든 지금은 끝난 거지?”

확신에 찬 어조에 사준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태준은 진우와 오래 알고 지냈으니 그가 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꼭 대답해야 하는 거 아니죠?”

사준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티를 내며 반문했다.

“부하 사생활이니 나도 깊게 터치할 마음 없어.”

“…….”

“근데 친구 사생활은 좀 신경 쓰이니까 하나만 말할게.”

“…….”

“끝난 거면 아무것도 하지 마. 네가 어설프게 중간에 흔들지만 않으면 걔는 시간으로 이겨낼 거니까.”

“…….”

“양진우가 거지 같은 놈 만난 게 하루 이틀이 아니거든.”

사준은 테이블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태준은 대놓고 사준을 거지 같은 놈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와 만났던 거지 같은 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 같은 아이템 우려먹을 생각하지 말고. 다음 주 아이템 거지 같은 거 갖고 오면 소방서 뻗치기 시킬 거니까.”

태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해주고 싶은데, 부하직원이니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간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태준이 건넨 경고는 이해한다. 시간이 지나면 양진우는 괜찮아질 거니까 들쑤시지 말라는 거다. 하지만 그건 태준이 틀렸다. 양진우는 시간이 지났다고 잊는 사람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의 흔적이 집에 넘칠 리가 없었다.

“오래 알고 지낸 거 아니었어요?”

“뭐가? 양진우랑 나?”

“네.”

“뭐, 꽤 오래 알았지.”

“그런데 잘 모르시는 거 같네요.”

“…그래? 그럼 내가 본 양진우랑 네가 본 양진우가 다른 모양이네.”

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사준의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회사에 괜히 죽치고 있지 말고 퇴근해. 너 며칠 동안 집에 안 간 거 다 안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가게에서 나왔을 때 태준이 말했다.

“네, 들어가세요.”

사준은 태준이 탄 택시가 떠나는 걸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한겨울 바람이 쌀쌀해서 등골이 다 오싹했다. 사준은 태준과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태준의 말에 뭔가 힌트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태준은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양진우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 양진우가 지금 괜찮지 않다, 앞으로도 안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반대로 한 거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사준은 서둘러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진우가 사는 아파트를 목적지로 말한 뒤 진우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준은 손가락을 움직여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 * *

[집이에요?]

[지금 갈게요]

[양 변호사님, 우리 집에 두고 간 게 있어요]

진우는 연이어 온 문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사준 집에서 나올 때 짐을 꼼꼼하게 챙겼는데 놓고 온 게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일부러 평일 밤에 갖다준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꿍꿍이가 있는 개수작이 분명한데 문자의 답을 뭐라고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버리라고 할까? 지금은 별로 얼굴 보고 싶지 않은데….’

띵동―.

답장을 보낼 말을 찾지 못한 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예상보다 빠른 도착에 놀란 진우는 허둥지둥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긴장 섞인 숨을 길게 내쉬면서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면 어떻게 해요, 변호사님.”

“어…?”

예상과는 다른 인물에 진우가 눈을 크게 떴다.

“김 변이 여기는….”

진우가 말을 마치기 전에 김유민이 팔을 쭉 뻗어 네모난 벽돌처럼 생긴 것을 목에 댔다. 지직, 따끔거리는 충격과 가벼운 전신 마비, 미미하게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그대로 진우의 몸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씨발….”

진우는 억지로 눈이 감기는 와중에 지금 순간이 스토커의 정체가 밝혀진 순간이라는 걸 깨닫고 말았다.

* * *

움찔,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낀 진우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하자 자신의 집 거실, 소파 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숨 쉬는 게 답답해 입을 움직이자 입가에 붙여 놓은 테이프가 느껴졌다.

돌아버리겠네….

다행히 죽을 정도로 아픈 곳은 없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진우는 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리는 발목에서부터 종아리까지 딱 붙어서 청테이프가 칭칭 감긴 상태였고, 팔은 등 뒤에서 팔꿈치 아래까지 묶인 상태였다.

현관에서 쓰러졌으니 거기서 묶어서 여기까지 끌고 온 모양이다. 김유민이 자신을 끌고 올 때 바닥에 쓸린 것인지 어깨가 다 욱신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얼굴로 내일 보자고 인사했던 직장 동료가 지금은 전기 충격기를 들고 자신의 집을 방문했다. 도대체 이 무슨 삼류 스릴러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인지….

일이 꼬이려고 하면 이렇게도 꼬일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그다음에는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준의 말이 떠올랐다. 멍청하게 김유민이 이사준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고 헛다리 짚은 게 다 민망해지고 말았다.

진우는 자신의 핸드폰을 놓아둔 곳을 확인해 봤지만 어디로 치워 버린 것인지 있어야 할 곳에 핸드폰은 없었다. 대신 소파 테이블 위에는 못 보던 레몬색 테이블보가 깔려있었고, 그 위에는 와인 잔 두 개와 레드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사준한테 집으로 오라고 문자를 보낼 걸 그랬다. 답을 안 했기 때문에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혼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일어나셨어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이자 김유민이 주방에서 초콜릿과 치즈가 담긴 접시를 들고나왔다. 집주인처럼 행세하는 모습에, 입이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데도 또 한 번 숨이 턱턱 막혔다.

“변호사님 와인 드실 때 초콜릿이랑 치즈 드시는 거 좋아하죠?”

진우는 김유민을 보고 있으려니 딱 한 마디밖에 안 떠올랐다.

미쳤어….

김유민은 진우에게 다가와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험하게 다루는 손길이 아니었음에도 소름이 끼쳐 진우가 몸을 움츠리자 김유민이 피식 웃더니 진우의 옆에 앉았다.

“소리 안 지르겠다고 약속하시면, 입에 붙인 건 떼 드릴게요.”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하는 것에 진우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지 김유민이 강아지를 칭찬하는 것처럼 진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간지럽히고 입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하아….”

입이 벌어지기 무섭게 진우는 허겁지겁 공기를 집어삼키고 짧게 헛기침을 하면서 김유민을 살폈다. 세팅한 것으로 보이는 웨이브 진 머리카락, 몸매가 드러나는 보라색 원피스는 평소보다 훨씬 꾸민 티가 났다.

“김 변,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축하 파티요.”

지금 상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김유민이 웃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모르는 척하세요?”

김유민은 와인오프너를 손에 쥐고 손을 움직였다. 와인 코르크에 찔러 넣은 뾰족한 오프너가 흉기처럼 느껴져 진우는 입속에서 침을 삼켰다.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고….”

“변호사님 제가 따라다니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근데 싫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하셨고요.”

진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았고 알고 있었다고 하면 싫다고 한 적이 없다는 말을 인정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아… 그래서, 축하할 일은 뭔데요?”

고민하던 진우가 화제를 돌리자 김유민이 싱긋 웃으면서 붉은 와인을 잔에 따랐다.

“변호사님이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오신 거요.”

진우는 입을 열면 개소리도 정도껏 하라든지, 지랄도 작작 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자극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이것부터 풀어 볼래요?”

진우는 담담하게 달래듯이 말하며 김유민의 안색을 살폈다. 이런 식으로 전기 충격기를 들고 집으로 들이닥칠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얼굴까지 드러낸 건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변호사님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 건데, 저는 처음부터 변호사님밖에 없었어요.”

애원하듯 호소하는 목소리에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된 거 지지부진하게 말을 돌리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데, 김 변. 나 남자 좋아해요.”

결심하고 말을 뱉자 김유민이 움찔하며 진우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래 봤자….”

“알아요. 제가 변호사님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거 같아요? 변호사님이 남자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고, 항상 거지 같은 놈들한테 차이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순간 진우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셔야죠. 언제까지 그렇게 이상한 남자들만 만나실 수 없잖아요.”

이상한 남자들이라는 표현에 진우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준 그 새끼는 정말 최악이었어요. 지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현관에서 섹스한 건 일부러 그런 거죠?”

“…….”

“그 자식 집에 변호사님이 짐 옮겨서 갔을 때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근데 뭐, 역시 제 예상대로였어요. 결국 이렇게 다시 오셨잖아요.”

“…….”

“우리 불쌍한 변호사님, 그런 거지 같은 놈 때문에 또 상처받으셨죠?”

“…….”

“변호사님한테는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김 변이에요?”

진우의 질문에 김유민이 화사한 얼굴로 웃었다.

“네, 맞아요. 세상에서 변호사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다시는 상처받지 않게 해드릴게요.”

연극배우처럼 드라마틱하게 말하는 김유민을 보며 진우는 숨이 막혔다. 말이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김유민은 완전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여태 저런 모습을 숨기고 계속 같이 일했다니, 숨이 다 막혔다.

“제가 이제부터 지켜드릴게요. 이사할 집도 다 알아봤어요. 남향이라 해도 잘 들고, 욕실에 큰 창문이 있고, 자쿠지도 있어요.”

누가 스토커 아니랄까 봐 김유민은 진우의 취향을 잘도 알고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어요, 우리는 거기서 새해를 맞이할 거예요. 평생 돌봐 드릴게요.”

“…그래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거부터 일단 풀어줘요. 이 상태로 이사 못 하잖아요.”

김유민이 진우를 보더니 슬며시 웃었다.

“그건 안 돼요, 변호사님이 모르는 것 같으니까.”

김유민은 가방에서 투명한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따라 놓은 와인에 하얀 가루를 쏟았다. 놀란 진우가 눈을 크게 뜨자 김유민이 웃었다.

“이거, 전에 김현이 사건 증거 자료 중의 하나예요. 뭔지 아시죠?”

마약인지, 미약인지 모르지만 안 좋은 건 확실했다. 증거물을 설마 이렇게 빼돌렸을 줄이야.

“저랑 한 번 하고 한숨 주무시고 나면 새집에서 눈뜨실 거예요.”

속옷을 보냈을 때부터 성적 어필이라는 걸 느끼긴 했지만 실제로 얘기를 듣자 눈앞이 다 어지러웠다.

“여자랑 해 본 적 없으시죠? 괜찮아요. 변호사님은 뭐든 다 잘하시니까.”

진우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김유민 말처럼 여자랑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여자랑 될까? 일단 어떻게든 세워서 한번 해야 하나? 진우는 정체불명의 약물이 섞인 와인을 흘긋 봤다. 조금 뒤에는 김유민이 자신의 입을 억지로 벌려 와인을 쏟아부을 것만 같았다. 순순히 테이프를 뜯어준 게 대화하려는 게 아니고 술을 먹이기 위함이었던 것 같아 자꾸만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우는 붉은 와인과 김유민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래, 다치지 않고 끝나면 한 번 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상한 약을 먹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고 그다음에 생각하자. 어쨌든 그걸 하려면 묶은 몸은 풀어야 할 거니까….

“그럼 약은 먹이지 말아요. 내가 잘 해 볼 테니까.”

진우의 말에 김유민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할 거면 이건 좀 풀어주지 그래요?”

유혹하듯 머리를 살짝 기울여 속삭이자 김유민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역시 그건 안 되겠어요….”

“김 변…!”

“그리고 남자는 여기만 꺼내면 되잖아요.”

김유민이 진우의 사타구니를 손바닥으로 슬쩍 건드리며 웃었다.

“아, 우리 변호사님 뒤로 하는 것도 좋아하시니까 제가 딜도도 넣어드릴게요. 그때 이사준이랑 홍대에서 성인용품 사셨죠?”

김유민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짜증 난다는 듯 앙칼지게 말했다.

“저도 변호사님한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사드릴 수 있어요.”

“…….”

김유민이라면 정말 말한 대로 실행할 것 같았다. 불현듯 엉덩이에 딜도를 꽂고 여자와 섹스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토기가 치밀었다.

“대신 약은 안 드셔도 돼요. 생각해 보니까 기념할만한 첫날 밤인데 저만 기억하고 있으면 좀 아까울 거 같거든요.”

제멋대로 나불거린 김유민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카메라를 켜서 와인병을 거치대 삼아 세웠다. 카메라가 켜진 것에 패닉이 몰려올 것 같았다.

“잠깐만요, 설마 찍으려고 하는 건, 아니죠?”

“찍을 건데요,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김 변, 지금 하는 거 범죄….”

“변호사님, 그런 건 저도 알아요. 법이라면 저도 많이 알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찾는 곳에 갈 거예요. 그거 아세요? 우리나라 남해에 이름 없는 섬이 몇백 개인 거.”

돌았다. 어떻게 옮길 생각인지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김유민이 지금 온전한 정신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만 확실했다. 진즉 경찰에 신고했었어야 했다. 질리면 관두겠지 하고 방치할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해야 했다.

진우가 가벼운 후회로 몸을 떠는 사이 김유민은 진우의 버클에 손을 댔다. 불리한 상황이 주는 공포와 이성과의 신체접촉에 대한 생리적 거부 반응 때문에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지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진우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띡띡띡―.

익숙한 소리에 진우와 김유민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을 향했다. 이내 도어락 잠금이 풀렸고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 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움직이려는데 김유민이 당황하며 테이블 위에 있던 오프너를 쥐고 진우를 향해 휘둘렀다.

“움직이지 마세요!”

오프너를 피하려고 진우를 몸을 돌렸지만, 코르크를 찌르는 뾰족한 부분이 팔을 스치며 날카로운 통증을 만들었다.

“윽….”

그 바람에 균형까지 잃은 다리가 꺾이면서 바닥에 몸이 떨어지며 쿵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양 변호사님?!”

큰 소리에 놀란 사준이 큰 소리로 진우를 부르며 거실로 빠르게 걸어왔다.

“변호사님…!”

김유민이 쓰러진 진우에게 손을 대려는 순간 이사준이 김유민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신이었어? 그 편지? 이상한 속옷? 다?”

“이거 놔, 이 새끼야! 변호사님 괜찮아요?”

김유민은 사준을 향해 소리치고는 진우에게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이중적인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사준은 청테이프로 묶인 진우의 팔과 다리, 흐트러진 앞섶을 보고는 얼굴을 야차처럼 구겼다.

“이 또라이가…! 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치밀어 오른 분노를 숨기지 못한 사준이 김유민의 손목을 부러트릴 것처럼 움켜쥐고 비틀었다.

“그만해…!”

이대로 두면 사준이 김유민을 때릴 것만 같아서 진우가 몸을 떨며 소리쳤다. 사준의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리면서 전신이 심하게 떨렸다.

“그 이상 하면 과잉이니까, 경찰 불러….”

진우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말에 사준은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신고 좀 할게요. 무단 가택 침입으로 사람이 다쳤습니다. 주소는….”

경찰에 신고하면서도 사준은 김유민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놓으면 금방이라도 진우에게 다가갈 것만 같아서 불쾌했다.

* * *

“괜찮아요?”

진우가 치료실에서 나오자 대기실에 앉아 있던 사준이 벌떡 일어나 다가와 물었다. 진우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진술 때문에 같이 가자는 걸 사준이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막았다.

괜찮아 보였는데 병원에서 살펴보니 은근히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전기 충격기에 지져진 목덜미, 와인오프너에 찔린 팔, 넘어지면서 바닥과 충돌해 생긴 멍, 청테이프로 묶여서 벌겋게 쓸린 자국까지.

진우는 몸에 생긴 상처를 치료받고 간단한 심리상담까지 받았다. 그 바람에 시간이 꽤 흘렀는데 이사준이 가지 않고 병원에서 기다린 게 부담스러웠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선 새벽이었다.

“일단 김유민 변호사는 일단 무단 가택 침입으로 조사받는 중인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병원 복도를 걸으면서 사준이 조금 전 경찰서에서 연락받은 내용을 전달했다.

“…그거면 돼요.”

사준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진우를 바라봤다.

“법원에 접근금지 신청하면서 정신 치료도 받도록 할 거니까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회사도 당연히 못 다닐 거고 불법 약물 소지까지 했으니, 뭐….”

진우가 김유민은 당분간 자신에게 접근하기는 힘들 거라는 의미로 말하자 사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강간 미수도 신고해야 하는 거 같은데.”

“…….”

진우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를 사준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가는 진우의 옆에 따라붙으며 사준이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알고 있죠? 그때 내가 안 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거.”

“그렇네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준의 말을 긍정했다. 이사준은 양진우 인생에서 만난 최악의 빌런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결정적 한 방이 있는 히어로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도움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건 따지고 보면 이 기자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진우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롯가에 멈춰 서서 말했다. 사준과 조금이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은데 시간이 늦어 오가는 차가 별로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온 경찰한테 기다려 달라고 할 걸 그랬네.’

진우는 말없이 제 옆에 서 있는 사준을 흘긋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게 결과적으로 절 도와준 건 맞으니까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비밀번호 바꿨는지 안 바꿨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사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조금 의외였지만, 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묻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침착해지려고 엷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웠습니다.”

사준의 눈썹이 불쾌하게 밀려 올라갔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게 있었는데, 조금 전 진우의 인사로 똑똑히 알았다.

진우는 아까부터 사준에게 존댓말로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도움을 받아서 고맙기는 하지만 이 이상은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 것만 같았다. 사준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진우가 원래대로 돌아올지 생각하며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그럼….”

“아, 내가 두고 왔다는 건 뭐예요?”

진우는 사준이 더 말하기 전에 물었다. 고맙긴 했지만 거기까지다. 이 일을 빌미로 사준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나갈 마음은 없었다.

사준은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두고 간 게 있다는 말 자체가 진우를 다시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이제 그 구실은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진우가 이렇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런 거 없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진우가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없긴 한데….”

사준이 이실직고하자 진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경찰서 들렀다가 갈게요. 이 기자님은 경찰서 안 오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말할게요. 참고인이 없어도 증거는 넘치니까.”

할 말을 마치고 다가오는 택시를 잡으려는데 사준이 팔을 뻗어 진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비밀번호, 안 바꿨잖아요.”

사준이 던진 말이 진우의 심장에 무자비하게 꽂혔다. 양진우가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안다는 듯한 말에 속이 쓰렸다. 진우는 붙잡힌 팔목과 사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깜박했을 뿐이에요.”

“그걸 깜박하는 게….”

“깜박할 수 있죠. 나 원래 비밀번호 잘 안 바꿔요. 근데 앞으로는 자주 바꾸는 게 좋을 거 같긴 하네요.”

진우는 사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뱉었다. 이대로 사준의 말을 들어버리면 그게 무슨 말이든지 저 좋을 대로 받아들이고 또 말도 안 되는 이해라는 걸 해 버릴 것만 같았다.

사준은 진우의 손목을 조금 더 세게 붙잡은 채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 얘기 더 안 할게요.”

순순히 물러나는 것에 진우가 안도한 것도 잠시, 사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경찰서 갔다가 우리 집으로 가요.”

“…….”

“오늘 같은 날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사준은 진우를 달래면서 꼬드겼다. 손목을 문지르다 슬며시 손을 잡으려고 하자 진우가 사준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이 기자님, 나한테 이럴 필요 없어요.”

진우는 사준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가 싫어서 그래요. 팔도 불편하잖아요.”

살짝 찔린 것뿐인데 극성스럽게 걱정하는 티를 내는 사준을 보니 처음에 능청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오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이 기자님,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면 진짜 그만 해요.”

덤덤하게 말하던 진우가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혹시 내가 이 기자님 팀원들한테 무슨 말이라도 할 거 같아서 그래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도 커밍아웃을 안 했는데.”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사준이 뭔가 말하려 하자 진우가 더 빨리 말을 이었다.

“아까 김 변 보면서 든 생각인데요, 내가 이 기자님 행동을 멋대로 오해한 거 같더라고요.”

법정 싸움할 때는 이런 걸 간주한다고도 한다. 김유민 같은 행동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줄 알았다는 말, 그건 진우와 사준의 사이에도 해당했다.

사준이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진우는 싫다는 의사 표현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사준은 계속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가짜 애정만 줘도 되는 사람인 줄 알고.

사준은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의 진우를 보며 극도의 초조함을 느꼈다.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줬으니 진우의 마음이 말랑해졌을 줄 알았는데 조금도 그런 기미가 없었다. 사준은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혀를 움직였다.

“양진우 씨, 내가 잘못했어요.”

“괜찮아요.”

진우는 이번에도 무엇에 관한 사과인지 묻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이 무척이나 낯설어서 사준은 자신의 말을 진우가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직감적으로 지금 양진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감각이 몸을 덮쳤다. 지금 보내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좋아해요.”

별다른 준비도 없이 무작정 말을 뱉은 사준은 진우의 표정을 확인했다.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당황할 줄 알았는데, 진우는 아까보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사준을 응시했다.

어두운 도로 위를 몇 대의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차가운 바람이 둘 사이를 가득 메웠을 때 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런 얼굴로 보나…?”

진우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사준은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우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건너편 도로에 시선을 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준을 바라봤다.

“이 기자님.”

이제 진우는 판사 앞에 선 변호사의 얼굴이었다.

“…….”

“당신 분위기 파악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고 그래서 사람이 원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이 뭔지도 잘 알죠?”

“…….”

“듣고 싶은 말을 술술 해주면서 사람을 기분 좋게도 하고, 싫어하는 말을 해서 화나게 하기도 하고. 남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게 익숙해서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거 때문에 쉽게 살았겠지.”

“…….”

“근데, 너만 그럴 거라고 생각해?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

“나는 꾸며내는 걸 못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까 이 기자님, 다시는 나한테 그런 얼굴로, 그따위 말하지 마.”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뱉은 뒤 움직이려 하자 사준이 성큼 다가와 진우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가지 마요. 내가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는데, 정말이에요. 좋아해요.”

다시 한번 말하자 진우는 이젠 성가시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뱉었다.

“알겠어요.”

건성으로 대답한 진우는 사준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준은 턱이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니었다.

“양진우 씨….”

사준이 진우를 좀 더 꽉 끌어안으려 하자 진우가 짜증을 담아 사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적당히 좀 해요,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

“나는 노력하면 나도 남들처럼 다 그렇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생길 줄 알았어요.”

진우는 높낮이의 변화 없이 천천히 말했다.

“근데 노력할 대상 자체가 틀렸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젠 진짜 모르겠거든요.”

사준은 지금 진우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알았다. 그런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 기자님은 나한테 상처 주지 않았어요. 내가 멋대로 받은 것뿐이지.”

단정적인 말투에 사준은 제 몸 안쪽에 있던 무언가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잘못했다고 붙잡으면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다. 미련이 많은 사람이니 용서도 쉽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태준의 말처럼 양진우에게 마지막 남은 무언가마저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 일은 고마워요. 근데 이렇게 보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우는 감정이 통째로 사라져서 빈 껍질만 남은 것 같은 눈으로 사준을 바라봤다. 너무 비어서 오히려 더 틈이 없어 보였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진우는 완벽한 타인처럼 사준에게 말하더니 다가오는 택시에 팔을 뻗었다.

사준은 진우를 붙잡을 수 없었다. 양진우의 모든 행동이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축축하게 젖은 뺨이 얼어붙을 때까지 사준은 홀로 남은 거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뱉는 순간까지도 그게 자신의 진심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사준은 진심을 전해본 적이 없어서 진심을 전하는 방법도 몰랐다.

깜깜한 도로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사준을 신경 쓰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물기만 사준의 진심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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