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Try everything
* * *
소파에 드러누운 사준은 날짜를 헤아려보다 천장을 향해 짧은 한숨을 뱉었다. 독한 술 냄새와 허공에 흩어진 숨은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회사에 출근했고 취재를 했고 방송도 했다.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것처럼 굴었다. 끝나버린 관계를 되돌리는 방법을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 있는 게 싫어서 돌아오지 않았던 집에 며칠 만에 왔더니 혼자 있는 건 더 싫었다.
“양 변호사님….”
“양진우 씨….”
“양진우….”
말라 비틀어진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저 이름을 불러본 것뿐인데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서 목구멍에 뜨거운 게 왈칵 치밀어올랐다.
불현듯 떠오르는 대화들이 사준의 고막을 타고 들어와 머릿속을 술렁이게 하고 가슴을 콕콕 찔렀다. 양진우 집에 있던 타인의 흔적들은 미련이 아니라 흉터였다. 알고 있었다. 양진우가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걸. 외로움도 많이 타고. 그래서 혼자 있는 게 싫어서 계속 사람을 찾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실은 섹스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남자끼리 그 이후에 뭐가 더 있을까. 여자와 남자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일련의 과정이 이어지지만 남자와 남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섹스를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연애라고 부를만한 걸 할 수가 없다고, 해봤자 그건 그저 유사 연애 정도밖에 안 된다고 여겼다. 왜 몰랐을까.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이사준과 양진우는 연애하고 있었는데…. 왜 이후가 없다는 걸 핑계로 이건 연애가 아니라고 단정 지었을까.
여태까지 살면서 양진우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양진우는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아무리 상처받아도,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도, 다시 기어 올라와서 자신의 손에 행복을 쥐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사준은 천장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가 주먹을 쥐어봤다. 잡히는 것도 없고 무엇을 잡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욕심만 손안에 남았다.
* * *
진우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유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요.”
“…….”
“김 변, 그렇게 입 다물고 있을 거면 그만 갈게요. 피해자랑 가해자로 마주 보고 있는 거 껄끄럽네요.”
경찰서는 직업상 종종 오게 되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서 진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김유민을 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륵,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진우가 취조실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이었다.
“다정하게 군 변호사님도 잘못한 거잖아요… 나 싫다고 한 적 없잖아요. 점심도 같이 먹었잖아요. 다정하게 해주셨잖아요….”
떨리는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진우는 입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김유민을 완전히 혐오할 수 없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이 여자는 자꾸만 자신의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진우는 긴 한숨을 뱉어냈다. 김유민을 만나러 오기 전 확인했던 진술조서 내용 때문에 속이 답답했다. 조서에 따르면 김유민은 취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신입 시절, 로펌 문화에 적응을 못 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진우만 자신을 신경 써 줬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음을 키웠다고.
문제는 진우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제 어떤 순간에 자신이 김유민을 신경 써줬던 걸까. 대체 어떤 호의를 보였던 걸까.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는데 받아들인 상대는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릴 정도로 오해할만한 행동이었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아무래도 착각은 자유라고 할 게 아니라 착각은 병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김유민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자신도 착각이라는 병에 걸려 있던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서 아무 말도 안 한 게 아니라 김 변인 줄 몰랐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 한 겁니다.”
진우가 김유민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착각이에요. 김 변이 나한테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몰래 숨어서 지켜볼 게 아니라 직접 말했어야 했어요.”
“변호사님은….”
김유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지막 의리인지 양심인지 아우팅 발언을 참는 모습에 진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럴 필요 없다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김 변이 저지른 행동들은 범죄예요.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선처는 바라지 마세요.”
“…그때 집에 그 새끼만… 안 왔어도….”
김유민이 손톱을 깨물며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때 이 기자가 안 왔으면 김 변은 강간 미수가 아니라 강간범이 됐을 거고, 납치 미수가 아니라 납치범이 됐을 겁니다.”
진우는 빠르게 말을 뱉고는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변호사님…!”
김유민이 다시 한번 진우를 불렀다. 필사적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김유민이 진우를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이사준한테 갈 건가요? 그 새끼는 안 돼요…! 정말 안 된다고요….”
김유민이 곧 죽어도 싫다는 듯이 머리를 저어가며 부정했다. 김유민은 자신이 한 짓보다 그로 인해 받게 될 법적 처벌보다, 진우가 이사준과 다시 만날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아뇨.”
진우가 대답하자 김유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이제 누구와도 뭘 하지 않을 거예요.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걸 덕분에 잘 알았으니까.”
마지막 말을 일부러 날카롭게 뱉은 진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김유민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뭘 한 것도 없는데 몸에서 힘이 빠졌다.
진우는 경찰서 복도 벽에 기댄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김유민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얘기는 다 끝난 거죠?”
벽에 기대서 있는 진우에게 담당 형사가 다가와 물었다.
“네, 앞으로는 불러 달라고 해도 저한테 따로 연락하실 필요 없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아요.”
“…네, 알겠습니다. 저희도 이런 식으로 가해자 요구를 다 들어주지는 않는데, 변호사님 얼굴 보기 전까지는 인정을 안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범행은 명확한데 갑자기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담당 형사는 진우를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조사 결과 보셔서 아시겠지만 보통이 아니었어요. 저 여자, 변호사님 윗집에 방 얻었던 거, 사진 보셨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집에 카메라나 도청기 같은 건 설치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
측은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경찰에게 진우는 할 말이 없었다.
“맞다, 혹시 모르니 변호사님 핸드폰 한번 확인해 보세요. 위치 추적 앱 같은 거 몰래 깔아뒀을지도 모르니까요. 요즘 스토커들 그런 건 기본이더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어? 그냥 가시게요?”
자신을 붙잡는 소리에 진우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뭐 더 할 게 있나요?”
“아, 따로 할 건 더 없고요. 그날 신고했던 분도 오늘 경찰서 온다고 들은 거 같아서 안 만나고 가시나 해서….”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신고했던 분이라면 이사준인데 어떤 면에서는 김유민보다 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따로 연락받은 건 없네요, 기자니까 다른 취재 때문에 오는 건지도 모르죠.”
진우는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이사준이 올지도 모르는 공간에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핸드폰을 꺼내 경찰이 말했던 것처럼 혹시 자신이 모르는 앱이 설치된 게 있지 않나 확인했다. 사실 앱을 많이 까는 편이 아니어서 모르는 앱이 설치되었다면 바로 알았을 것이다.
앱 설치가 아니라 핸드폰 자체에 뭔가 설치했을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조사를 맡기는 게 나으려나. 눈은 핸드폰에 고정하고 머리로는 딴생각하느라 앞을 살피지 않았는데 무언가가 진우의 어깨를 툭 때렸다.
“아, 죄송합니….”
자동적인 사과를 뱉던 진우는 앞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만나지 않길 바랐는데 이렇게 만나는 걸 보면 운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양 변호사님.”
“…….”
진우는 김유민과 대화를 마치고 나왔을 때보다 좀 더 피곤한 얼굴로 사준을 바라봤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일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진우는 볼일이 있어서 온 거면 그냥 가라는 듯 말했다.
“아뇨, 오늘 양 변호사님 피해자랑 면담한다고 들어서 온 거예요. 이렇게라도 와야 얼굴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끝난 거예요?”
사준이 진우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기자님, 스토커예요?”
“네?”
“남의 일정을 왜 알고 있어요? 참고인이라고 해도 경찰이 일부러 알려줬을 거 같지는 않고. 친분 있는 경찰한테 물어봐서 알게 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남의 일정 캐고 다니는 거 스토커나 할 짓 아닌가요?”
사준은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성가시다, 귀찮다, 짜증 난다, 불쾌하다 같은 감정이라도 담겨 있다면 좋을 텐데 진우의 목소리에는 그런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말의 내용은 비난이었지만 감정의 온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서 꼭 TV 속 뉴스 앵커가 말하는 것 같았다.
사준은 마른세수를 했다. 진우의 말이 맞았다. 양진우가 경찰서 방문하는 날을 꼭 알려달라고 아는 경찰에게 부탁했다. 경찰은 취재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으나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진우가 얼굴을 안 보여줄 것 같아서 욕심을 부려서 온 거다. 근데 막상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것 같아서 입이 잘 안 움직였다.
스토커나 다를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밀어내는 모습에 속이 쓰렸다. 만약 집 앞에서 기다리기라도 하면 신고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잠깐 시간 좀 내줘요.”
사준이 다시 한번 부탁하자 진우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앞장서 걸었다.
* * *
“말씀하세요.”
진우는 경찰서 뒤쪽 주차장 근처에서 사준에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장소를 옮기자고 하고 싶었는데 진우의 분위기를 봤을 때 그런 걸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사준은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입가에 맴도는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날 밤에 말했던 거….”
“네.”
“그거 그냥 한 말이 아니고….”
“알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진우가 사준의 말을 자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기자님이 말한 거, 제가 알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
사준은 진우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텅 빈 눈동자에는 거짓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양진우는 정말로 알았다. 이사준이 뭘 말하는지 알았지만 뭔가 할 생각은 없다. 알았지만 믿지 않는다. 딱 그것뿐이었다.
사준은 그제야 진우의 마음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우와 한번 만나볼까 하는 결정을 했을 때 이런 단호한 부분이 마음에 든 것도 있었다.
관계가 끝난 뒤에 질척하게 굴 것 같지 않아서, 혼자 상처를 받을지언정 자존심 때문에라도 매달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상처받더라도 처음 바에서 봤을 때처럼 양진우 혼자 알아서 잘 정리할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의 감정이 정리되기 전에, 아니 정확히는 이제 시작돼 버렸는데 진우가 이렇게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기면 당겨지지 않을까 했는데 당길 수 있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기자님이 그런다고 해서 제가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언젠가 술에 취해 이성적인 척 내뱉었던 논리가 그대로 사준을 꿰뚫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불편하네요. 가보겠습니다.”
진우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차에 올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차의 후미를 보며 사준은 주먹을 꼭 쥐었다.
불편하다. 싫은 것도 아니고 불편하다. 진우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여러 번 재생됐다.
얼굴을 봐야 한다는 마음에 불쑥 찾아왔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할지 정한 건 아니었다.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말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는 얼굴을 보자 할 말이 없었다.
그날도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지만 막상 두 번이나 이렇게 나오자 무서워졌다. 혹시 이미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사준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말을 못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붙잡을 수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준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한숨이 턱밑까지 치밀었다.
“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생전 처음이었다. 사람을 상대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 * *
진우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사준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얘기 좀 하자는 사준의 얼굴은 조금 간절해 보였고, 조금 절박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아마도 그건 진우가 지금까지와 다르게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걸 거다.
손에 쥐고 놀던 장난감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그것 말고는 다른 게 있을 리 없다. 여태 만났던 놈팡이들도 그랬다. 헤어지고 난 뒤에는 뭐가 아쉬워졌는지 은근히 주변을 맴돌면서 껄떡댔다.
“애도 아니고.”
진우는 답답함을 짜증으로 가린 채 중얼거리며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에 달린 전구들이 보였다.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전구 때문에 나무가 더 흉측해 보였다.
결국 그런 거다. 아무리 꾸며봐야 겨울나무의 본질은 앙상함 그 자체다. 양진우가 아무리 사랑받고 싶다고 노력해봐야 그럴 수 없는 것처럼.
진우는 액셀을 꾹 밟아서 회사로 서둘러 움직였다.
“뭐야, 어지간하면 그냥 받아주지. 뭘 또 스토커라고 신고까지 한대. 둘이 사이좋지 않았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개인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려던 진우는 문이 열린 회의실에서 흘러나온 말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게, 김 변 정도면 얼굴도 괜찮고 집안도 괜찮았던 거 같은데 그냥 결혼해서 살지.”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직장 동료가 나를 감시했다는 건데 그게 끔찍하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쫓아다녀봤자 얼마나 그랬겠어.”
“에이, 얘기 못 들었어요? 김 변 약물 소지 위반 혐의도 있잖아요. 까딱 잘못 먹기라도 했어 봐요.”
“흠, 그래도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힘으로는 남자가 이길 건데.”
“아니, 다 필요 없고 여자가 덮쳐주면 감사합니다, 해야 하는 거 아냐?”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진우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어휴, 두 분 같은 사람들 때문에 스토커 피해자들이 신고를 안 하는 거라고요.”
진우는 회의실을 그대로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와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이 정도 말이 돌 건 대충 예상했던 일이다. 스토커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쉽게 신고하지 못한 건 이런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토커가 남자였다면 어떤 얘기가 돌았을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원래 사람들은 남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법이고 본인이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한다. 여자가 덮쳐주면 감사합니다? 웃기는 소리.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원치 않는 관계는 강간이고 범죄다. 변호사라는 새끼들이 그것도 모르나?
진우는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내린 채 눈을 감았다. 일하려고 왔는데 일도 손에 안 잡힌다. 조금 전 만나고 왔던 이사준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길을 잃은 아이 같은 얼굴로 뭔가 얘기하려던 그 얼굴. 만약 그 표정도 연기라면 직업을 배우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아, 근데 그날 클럽에서 봤을 때는 연기 잘 못 하던데….’
진우는 김현이의 마약 파티가 있던 날 어설프게 들이닥쳤던 이사준을 떠올리며 작게 웃다가 클럽 뒷골목에서 했던 키스가 떠올라 입술에 손이 갔다.
이사준이 양진우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아니라고 해도 순간순간 설렜던 것까지 몽땅 없던 일로 만드는 건 역시 어려웠다.
“아, 씹….”
진우는 눈을 번쩍 뜨고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이런 걸 떠올려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진우는 몸을 일으켜 모니터로 몸을 돌리고는 메일함에서 이자벨의 연락처를 찾았다.
* * *
사준이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엘리베이터 홀에 있는 게시판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누가 징계라도 받았나?’
승진 시즌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사고 방향이 흘렀다. 무슨 내용인가 확인하기 위해 게시판으로 향하는데, 내용을 확인한 것인지 같은 팀 김 작가가 돌아서는 게 보였다.
“뭐예요?”
사준은 김 작가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 특파원 뽑는대요. 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박 기자가 한국으로 돌아올 모양인가 봐요.”
“그래요?”
“네, 내년에 나갈 사람 뽑는대요. 인수인계하고 비자 받고 하려면 은근히 시간 걸리니까 미리 뽑나 봐요.”
사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특파원 자리는 보도국 내에서 은근히 경쟁이 치열한 자리였으나 사준은 관심이 없었다.
“박 기자가 있던 곳이 워싱턴이었나요?”
“아뇨, 뉴욕이요.”
“지원자 엄청나겠네요.”
사준은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걷던 김 작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네, 맞아요. 이번 주말에, 네, 11시 예식에 세 명이 갈 거예요.”
김 작가는 곧 있으면 결혼할 예정이라 아마도 그 준비에 관한 통화인 것 같았다. 사준은 먼저 들어간다는 손짓을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손바닥으로 제 뺨을 쓸어봤다. 자신의 얼굴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 이런 걸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 진우에게 지적받은 뒤로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 *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중식당 룸에 자리 잡고 있던 태준은 진우를 보며 한마디 했다.
“진짜 바빴어. 삼하 건설 터트렸으니까 네가 잘 알 거 아냐?”
진우는 태준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하 기자님은 같이 안 왔어? 저녁 먹자고 하기에 같이 올 줄 알았는데.”
“걔는 요즘 나보다 바빠.”
“특종 따려면 바쁠 만도 하지.”
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진우의 얼굴을 보다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시켜.”
자신은 평소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양진우의 얼굴은 수척했다. 원래도 작은 편인 얼굴이 저러다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부려 먹었다고 사 주는 거야?”
“아니, 부려 먹으려고.”
메뉴판을 펼쳐 보던 진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또 뭘 시키려고 하는 건가 싶은 의심의 눈초리로 태준을 바라봤다.
“4월에 선거 있잖아, 그거 관련해서 간단하게 자문 몇 개만 해주면 돼.”
“뭐야, 그거 아직 멀었잖아.”
“선거가 4월이라고 그때 할까? 그 전에 미리 한번 짚어주는 방송 할 거야.”
“아, 네, 그러세요. 난 또 연말이라 밥 한번 먹자고 하는 줄 알았더니.”
진우는 메뉴판을 덮어서 내려놓더니 벨을 눌러 점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디너 코스와 이과두주를 주문했다.
차례차례 음식이 나오고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둘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자벨한테 연락했더니 놀러 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른 동기 근황과 김 변이 스토커였다는 사실과 삼하 건설 재판 진행 과정 등 평소 둘이 만났을 때 하는 얘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잡담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이 반 정도 비었을 때 태준이 입을 열었다.
“왜 이사준 얘기는 안 해?”
돌리는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화제에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얘기?”
“그냥, 뭐든. 쓰레기든 개자식이든, 너 잘하는 거 있잖아.”
“흠….”
진우는 눈동자를 크게 굴리며 창밖을 쳐다봤다.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별로야?”
이번에도 태준은 돌리는 것 없이 바로 물었다. 진우는 눈동자를 둥글게 굴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준 얘기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미련이나 아쉬움이 흘러나올 것 같아 싫었다. 그리고 태준이라면 조금의 흔적만으로도 진우의 속을 훤히 들여다볼 것이 뻔했다.
“그럼 다른 사람 만날 거야?”
“어?”
“다음 사람 찾으러 다닐 거냐고.”
진우는 고추잡채를 입에 넣고 씹다가 술과 함께 넘겼다. 태준의 말처럼 자신은 하나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면 언제나 다음을 찾아 움직였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거라는 그 유치한 말을 믿었으니까. 찢어진 마음을 어떻게든 기워내고 싶었으니까. 다음에는 이러지 않아야지, 다음에는 더 괜찮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들로 움직였다.
“아니, 이제 그런 거 귀찮아.”
“…뭐?”
“생각해 보니까 사는데 연인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진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태준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누군가와 헤어진 후 이 정도로 비관적인 양진우는 처음 봤다. 언제나 멍청할 정도로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했는데, 지금의 양진우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양진우.”
“내가 미련했던 거지. 그냥 적당히 즐길 사람이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건데.”
진우는 태준의 말을 뚝 자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더는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지금은 별로 즐기고 싶은 마음도 안 들고.”
사람한테 기대했다가 상처받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으면서 왜 사람을 믿은 건지 모르겠다.
태준은 진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더 말하지 않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밥 먹고 나왔을 때는 술 때문인지 기분이 적당히 달아오른 상태였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알았어, 그놈의 자문 타령 좀 그만해. 안 그만둔다니까.”
진우는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 태준을 뒷좌석에 욱여넣었다. 태준은 문을 닫는 순간까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진우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이든 꺼내는 순간 속에 있던 무언가가 다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하고 싶지 않았다. 태준이 택시를 타고 먼저 자리를 뜨고 진우가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와, 눈이다!”
진우의 옆을 스쳐 가는 커플 중 여자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연말이라는 분위기가 만들어 낸 들뜸이 가득한 게 느껴졌다. 진우는 그 속에서 혼자만 동떨어진 것만 같았다.
톡, 톡, 때마침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눈을 보며 진우는 목에 감긴 머플러를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괜히 코가 시큰거려서 너무 추웠다.
택시를 잡으려던 진우는 마음을 바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해가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무섭도록 추운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시작됐을 때 사준은 누나 집에서 뒹굴었다. 취잿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휴일이라는 걸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사준!”
“윽.”
큰 소리와 함께 짝 소리가 나도록 등짝을 내리치는 손길에 사준이 놀라서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뭐야, 왜 이래?”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너 왜 그러는데?”
사준은 도끼눈을 뜨고 있는 누나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마당이 보이도록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무니와 써니가 태평한 얼굴로 겨울 햇볕을 쬐고 있는 걸 보니 괜히 부러웠다.
“이사준, 너 그렇게 청승 떨 거야?”
그냥 좀 뒀으면 좋겠는데 누나가 사준의 등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내가 무슨 청승을 떨었다고 그래?”
“네가 하는 게 청승이지, 아니야? 왜 그래? 헤어졌어? 너 싫다고 도망갔어?”
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너 우리 집 마당에서 텐트 치고 데이트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사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데이트라…. 그래, 데이트가 맞을 거다. 그때 양진우 꼬시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텐트에서 야외섹스 비슷한 것도 하고 거실에서도 하고. 말랑거리는 양진우를 멋대로 주무르고 만지작거리는 게 즐거웠다.
성인용품 취재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홍대에 갔던 것도,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 마시던 일들도 모두 데이트였다. 양진우가 설레하는 걸 알고 있었고, 기뻐하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즐거워한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한 꺼풀 벗겨 놓은 양진우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아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랬는데….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 덤덤한 얼굴로 그저 알겠다고만 대답하는 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넋 놓고 있을 시간에 나 같으면 사과하러 가겠다.”
누나의 면박에 사준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초등학생들끼리 싸운 거 아니거든?”
사준은 뚱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초등학생들도 싸우면 사과하는데 다 큰 어른이 그걸 왜 못해?”
억지 논리인데 반박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사준은 엷은 한숨을 뱉었다.
“사과 안 받아줄까 봐 무서워서 그래?”
“…….”
사준은 입을 다문 채 마당을 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사과를 받아줄까 안 받아줄까, 화를 풀까 안 풀까, 그런 단순한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어디서부터 거짓인지도 모르겠고, 뭐부터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요약하면 간단하다. 나쁜 새끼가 착한 애 좀 데리고 놀까 했다가 오히려 나쁜 놈이 홀딱 빠져 버렸다는, 진심이 돼 버렸다는 삼류 스토리였다.
진심, 언제부터였을까? 자각하지 못했지 사실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양진우랑 함께했던 것 중에 싫은데 억지로 한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누나.”
“왜?”
“내가 갑자기 남자 애인 데려오면 어떻게 할래?”
사준은 툭 던지듯이 물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고 나온 물음이었다. 누나는 사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몇 살이지?”
“뭐?”
사준은 예상 밖의 질문에 눈만 끔벅였다.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 것인지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네 나이에 새삼스럽게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땐 아닌 거 같고. 가족한테 보여줄 정도면 너도 고민했을 거 아냐. 내가 헤어져라, 마라 해서 끝낼 생각이었다면 보여줄 생각도 안 했을 거 같고… 물론 당장 괜찮다,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누나는 사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일단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인가?”
“…아니.”
사준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의 준비는 누나가 양진우를 볼 수 있을 때나 필요한 것이지 지금 상황에서는 필요가 없었다.
“뭐야, 그럼? 그런 거 왜 물어봐?”
그러게, 다시 못 볼 거 같은데 이게 무슨 미련인지 모르겠네. 사준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소리 내어 말하면 그게 진실이 될 것만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준은 가만히 있다가 방치해 놓았던 핸드폰을 들었다. 역시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끝내고 싶지 않았다.
누나는 사준을 가만히 보더니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눈 온다.”
마당을 보며 하는 말에 사준이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봤다. 해가 떠 있는데도 떨어지는 흰 눈이 유독 차가워 보여서 괜히 마음까지 다 시린 기분이었다.
살면서 맞이해 본 가장 쓸쓸한 새해였다.
* * *
사준은 팀원들이 자주 애용하는 가게로 태준을 불렀고, 태준은 심드렁한 얼굴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사준은 괜히 목을 좌우로 꺾으며 딴청을 부렸다. 막상 말을 꺼내려니 민망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태준뿐이었다.
“뭐야, 심각한 거야? 노영태 의원 비리라도 찾았어?”
첫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준을 보며 태준이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말을 꺼내기가 더 힘들었다. 휴일에 이렇게 부른 걸 당연히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일 때문에 부른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태준이 미간을 찡그린 채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양 변호사님 말인데요.”
머뭇거리던 사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태준의 얼굴에 어이없음이 서렸다.
“양진우가 왜?”
추궁하는 것처럼 들리는 물음에 사준은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씹어 뱉듯이 말을 뱉었다.
“팀장님이 저 좀 도와주세요.”
“안 돼. 아니, 싫어.”
각오하고 말을 뱉었건만 돌아온 대답은 0.3초도 안 걸렸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아주 당연하게 하는 말에 사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
“부하 사생활 깊게 터치할 마음 없다고 했잖아.”
“친구 사생활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싫다고 한 거야.”
태준은 손사래 치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사준의 말을 얄밉게 따라 한 태준이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진우가 원래 성실한 호구였거든?”
“…….”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병신 같은 새끼들만 만나서 밑천 거덜 나는 짓을 그렇게 성실하게 할 수가 없더라.”
“…….”
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사준은 알았다. 장태준 팀장은 지금 자신에게 화가 났다. 부하직원, 팀원 이런 것 때문에 봐주고 있지만 사실은 양진우 얘기로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티가 났다. 그 증거로 지난번에는 거지 같은 새끼였는데 이제는 병신 같은 새끼다.
“근데 지금은 인간 불신까지 걸렸어. 인간 불신에 성실한 호구라니, 최악이지.”
탓하는 어투에 사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팩트 체크 안 하십니까? 양쪽 말 다 들어봐야 아는 거잖아요.”
사준이 말하자 태준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너도 사정이 있는데 내가 양진우 편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거야?”
“…….”
“아니면, 네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도와줄 마음이 들 수 있다, 이 말인가?”
“…….”
“뭘 바란 건지 모르지만 나한테 뭔가 기대하고 왔다면 틀렸어.”
태준은 바랄 걸 바라라는 듯 말했다.
“나한테 팩트는 지금 양진우가 미친놈처럼 일만 하고 있다는 거야.”
“…….”
“전에 그런 얘기 한 적 있지? 네가 본 양진우와 내가 본 양진우가 다른 것 같다고. 그런 의미에서 뭐 하나 알려 줄까?”
사준은 태준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태 양진우가 만났던 사람 중에 잘못했다고 빌었던 얼간이가 하나도 없을까?”
태준은 사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있었어. 당연히 있었지. 양진우랑 헤어지면 당연히 아쉬웠을 거야. 근데 그렇게 후회하면서 빌고 매달린 놈들, 양진우는 단 한 명도 받아주지 않았어. 그거 때문에 속상해도 절대 안 받아줬어.”
“…….”
“네가 본 양진우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본 양진우는 그래. 같은 사람한테 두 번 상처 받는 건 못 할 짓이니까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거겠지.”
깨진 믿음은 돌이킬 수 없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흉터로 남을 뿐이다. 그게 양진우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물며 이사준은 처음부터 다 거짓이었으니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해. 네가 이러는 거 걔 더 괴롭히는 거야.”
“…….”
사준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떨궜다. 태준이 공사 구분이 정확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혹시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아주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부하직원 이사준과 친구와 만났던 남자 이사준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태준은 사준을 보다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랄하게 쏘아붙였지만 속이 불편했다. 최근 만났던 양진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지금 저를 찾아온 이사준 역시 그랬다. 유들유들 능청을 떨면서 말했으면 무시했을 텐데, 지금 이사준은 말이 확 줄어서 보는 사람도 불편하게 했다.
“하아… 삼하 건설.”
“네?”
사준은 일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양진우 요즘 삼하 건설 소송 때문에 바빠.”
삼하 건설 비리라면 해가 바뀌기 직전에 건축 비리부터 뇌물, 비자금까지 대대적으로 보도한 곳이었다.
“걔라면 우리 보도한 내용부터 싹 훑어보고 준비할 거니까.”
태준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 * *
점심시간, 진우는 한정식 룸에 혼자 앉아 있었다.
해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가족과 만나는 게 얼마 만이더라.
진우는 어색한 기분에 목덜미를 한번 쓸어보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거리는 전체적으로 앙상해서 추워 보였다. 진우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목덜미를 매만졌다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가 문에 시선을 주길 반복했다.
며칠 전, 해도 바뀌었으니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다며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보통 때라면 일을 핑계 대면서 거절했을 텐데 매형 될 사람을 보여주겠다는 말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전에 잠깐 만났을 때 했던 말이 있었기에 누나가 나름 각오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긴장됐다.
누나는 저녁을 같이하고 싶다고 했으나, 어색한 분위기라면 오래 있고 싶지 않아 일을 핑계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일이 바쁜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삼하 건설 대표가 뒤로 나쁜 짓을 해도 너무 많이 했고, 그게 언론에 줄줄이 보도된 덕에 정신없이 바쁘다.
진우는 며칠 후 있을 재판과 함께 앞으로 일을 고민했다. 1심 선고받으면 보석 신청 먼저 하고 항소심에서 감형이나 집유를 노려야 할 거 같은데…. 차라리 병보석을 우겨 보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되면 장태준은 길길이 날뛰겠지만 아프다는데 지가 어쩌겠어.
드륵―.
머릿속으로 어떻게 최대한 감형을 받게 할지 고민하는데 미닫이문이 열리고 누나가 들어섰다.
“진우야.”
누나는 약간 어색한,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운 얼굴로 진우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에게 눈짓을 보낸 다음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는 진우와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작은 이사업체를 운영한다는 남자는 누나가 왜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이 좋았다. 언변이 화려하거나 몸짓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결혼 날짜는 잡은 거야?”
“아직 확정은 아니고 세 개 중에 하루로 하려고. 어차피 허락 같은 건 기대도 안 하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부모가 흔히 말하는 자식 농사 망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들 하나는 게이, 딸 하나는 결혼하겠다고 가출. 이쯤 되면 나머지 아들 하나 역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 할 거면 빨리해. 나 여름에는 한국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왜…?”
누나가 무슨 말이냐는 얼굴을 해서 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삼하 건설 일 끝나면 좀 쉴까 생각 중이야.”
“아, 하긴… 너 계속 일했으니까.”
“그건 다들 마찬가지 아닌가? 그죠?”
진우는 누나의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렇죠, 다들 일하느라 바쁘니 지금은 밥 먹을까요?”
남자가 서글서글한 말투로 식사를 권해서 진우는 젓가락을 들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 두 사람은 결혼식은 작게 해도 준비할 게 많은 것 같다는 걸 시작으로 최근 신혼집을 구한 이야기까지 호들갑스럽지 않게 늘어놓았다.
사실 진우 입장에서는 억만 광년 정도 떨어진 이야기여서 어색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남자의 분위기 자체가 온화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먼저 나가 있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누나가 말해서 진우와 남자는 가게 앞으로 나왔다. 둘만 남게 되자 왠지 모르게 어색해 진우는 옆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사실 누나한테 한 말이 있어서 만나자마자 게이라는 얘기 들었습니다, 이딴 소리를 하면 어쩌나 했는데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혹시 모르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게 남자는 대화 중간에 진우에게 물었었다.
‘만나는 분은 없으신가요?’
그 질문의 뉘앙스에서 진우가 만날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네, 지금은 없어요.’
‘아쉽네요, 다음에 누가 생기면 꼭 같이 봅시다.’
남자는 누군가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 대신 기약 없는 다음을 약속하는 매너를 보여줬다.
“가족은 처음 보는 자리라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남자가 어색함을 깨보려는 듯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도 누나가 만나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다행이네요. 다음에는 매형이라고 부를게요.”
“하하하, 다음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겉치레와 비슷한 인사였는데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시원스레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누나가 만나는 사람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 * *
사준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길 건너편에 있는 진우를 바라봤다. 태준이 알려 준 힌트, 삼하 건설을 핑계로 진우한테 점심을 같이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오전 취재가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점심은 못 먹을 시간이지만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급하게 왔는데 진우가 처음 보는 남자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회사 근처. 대충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둘이 그런 사이가 아닌 건 알겠는데, 그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만 봐도 속이 뒤틀렸다.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낚아채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보다 훨씬 다정하고, 양진우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본 누군가가 그에게 끊임없는 애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은 사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사준은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양 변호사님.”
“진우야.”
두 사람이 동시에 진우를 불렀다.
“이, 기자님…?”
진우는 사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변호사님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사준은 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누나가 오랜만에 와서, 점심을….”
진우는 놀라서 묻는 말에 술술 대답하고 말았다.
“아, 누나….”
사준은 정신을 차리고 진우의 누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양 변호사님이랑….”
“누나, 나 일 때문에 이만 가 봐야겠다. 다음에 뵐게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진우가 말을 뚝 자르고는 빠르게 자리를 뜨자 그 뒤를 사준이 뒤쫓았다.
“양 변호사님.”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진우는 제 옆에 서서 걷는 사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앞을 보며 물었다.
“요즘 삼하 건설 변호 준비하신다면서요. 혹시 도움 드릴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 건 저도 취재했으니까.”
사준은 미리 준비해 놓은 대답을 술술 말했다.
“필요한 자료는 하 기자님한테 다 받았어요.”
진우는 여전히 사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하 기자는 건설 비리 담당이었고 뇌물이랑 비자금은 제가 취재했는데, 필요한 거 없어요?”
“없어요. 감사하지만 도움은 안 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거 때문이면 그만 가 보셔도 돼요.”
진우가 차갑게 선을 긋자 사준이 진우의 손목을 붙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억지로 멈춰 세우자 진우가 사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봤다.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사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요?”
“알잖아요.”
진우는 사준의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사준이 사람 마음을 오락가락하게 하는 걸 잘 알면서도 또 마음이 수런거려서 곤란했다. 멍청하게 끌려가고 싶지 않은데 마음은 자꾸만 기대를 품었다.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얼굴 볼 이유가 있던가요?”
진우는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누른 채 일부러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또 잘못 말했네요.”
사준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삼하 건설은 핑계예요. 양진우 씨 보고 싶어서 왔어요. 몰랐다면 지금 알아주세요.”
사준은 어떻게든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입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표정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순간 진우는 심장이 철렁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다 털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무언가가 남아 있었던 것인지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진우는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 태준의 말처럼 그 정도로 헤테로에 데어봤으면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어야지, 아직 다 떨치지 못한 미련스러운 마음이 자꾸만 헛된 기대를 품으려 했다. 이사준은 한순간 변덕일 뿐인데 자신은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건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진우는 얼굴에서 천천히 감정을 지워냈다.
“후으… 이 기자님.”
“…네.”
“혹시 섹스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래요?”
진우는 남자랑 이라는 단어는 생략하고 물었다. 굳이 그렇게 묻지 않아도 이사준 정도의 눈치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섹스하고 싶은 거면 다른 사람 찾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그 정도는 이 기자님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사준은 턱까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알량한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었고 울컥 짜증이 솟아올랐다.
“양진우 씨야말로 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지금 그거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건데, 그런 식으로 사람 의심하는 거….”
빠르게 말을 뱉던 사준은 한 박자 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말은 다 흘러나온 다음이었다.
“의심하는 게 내 잘못인가요?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게 다 탓이라는 거?”
진우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의미를 담아 어이없다는 눈길로 사준을 바라봤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고작 몇 번 붙잡아 놓고 모든 걸 다한 것처럼 포장하지 마세요. 이 기자님이 말을 꺼냈으니 저도 확실하게 말할게요. 저는 다시 뭘 할 마음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 기자님한테는 ‘다시’라는 표현 자체가 틀린 거 아닌가?”
진우는 이 이상 말하는 것도 성가시다는 듯 끝에 가서는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섹스가 하고 싶은 거라면 제가 아니라….”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지 마세요.”
사준은 손바닥을 펼쳐 진우의 말을 막았다. 더 말을 하면 지금도 엉망인 관계가 더 엉망으로 꼬여서 영원히 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
사준이 말을 막는 바람에 생긴 가벼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둘 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만 바라봤다. 진우는 이 자리를 1초라도 빨리 떠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준은 어떻게든 진우를 붙잡을 게 필요했다. 말이든 행동이든 어떤 구실이 필요했는데 입이 안 움직였다. 그 순간, 진우의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징―.
진우는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가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기 무섭게 하이 텐션의 고음이 빠른 템포로 말을 쏟아냈다.
“이자벨?”
진우는 사준을 힐끔 보더니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사준을 향해 고개를 슬쩍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먼저 가보겠다는 듯, 그는 이럴 때마저도 깍듯하게 선을 그으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단숨에 멀어지는 진우를 멍한 눈으로 보던 사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넓은 보폭으로 움직여 진우의 어깨를 살짝 잡아 뒤로 당기더니 핸드폰을 대고 있지 않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까는 화내서 미안해요, 그래도 하나만 말할게요.”
“…….”
“그렇게 밀어내도 내가 이대로는 양진우 씨 포기 못 해요.”
“…….”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심이라는 거 증명해 보일게요.”
사준은 진우의 어깨를 놓아주고 그대로 돌아섰다. 진우는 사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느라 핸드폰 너머에서 하는 말을 몽땅 흘려듣고 말았다.
바빠서 다행이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동안에는 이사준 생각도 덜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여태 이별을 이겨내는 방법도 늘 이랬다. 그래서 이번에도 견뎌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엔 안 그랬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사준_스쿠프: 밥 먹었어요?]
진우는 사준이 보낸, 지독히도 사적인 의미가 담긴 문자를 보고는 메시지 함을 위로 올려봤다. 이런 문자를 오늘만 보낸 게 아니다. 지난번 점심에 만나 일방적인 선전포고 이후로 사준은 끊임없이 문자를 보냈다. 지겹도록 단조로운 일상에 갑자기 툭 치고 튀어나오는 문자는 날씨 얘기나 교통 상황같이 시시껄렁한 걸 시작으로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주를 이루었고 마지막에는 항상 질문이었다.
밥 먹었어요? 우산 챙겼어요? 옷 두껍게 입었어요? 바빠요? 뭐 해요?
별것 아닌 것 같아서 대답해줘도 그만인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나는 당신이 궁금해요, 걱정돼요, 라는 티가 나는 행동이기도 했다.
“왜 이러는 거야….”
진우는 한숨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사준이 보낸 사적인 문자에 답을 한 적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사적인 대화의 물꼬를 트면 사준이 그 틈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손에서 놓쳐버린 장난감을 다시 쥐기 위해서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필사적이지 않나? 처음엔 귀찮아지면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쯤 지나자 언제까지 이럴지 궁금해지고 있었다.
진우는 매고 있던 넥타이의 삼각형 부분을 손으로 매만졌다. 일 때문에 방송국에 가기로 한 날인데, 사준을 만나고 싶으면서 동시에 만나고 싶지 않았다.
* * *
“양 변호사님이랑 미팅 어디서 할까요? 사무실에서 할까요?”
아이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김 작가가 백 작가한테 물었다.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하자.”
“그럴까요? 그럼 오시면 연락 달라고 해야겠다.”
“오늘 양 변호사님 와요?”
작가 둘이 얘기하는 걸 듣고 사준이 반응했다.
“네, 우리 다음 주 방송 선거법 관련이잖아요. 그거 관련해서 개정법 설명해 준다고 하셨어요.”
“그거 미팅 누가 해요?”
“개정법 확인만 하는 거라 저랑 백 작가님이 할건데요.”
“몇 시에 오는데요?”
사준이 묻는데 회의실에서 나오던 태준이 사준을 빤히 바라봤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너 오늘 박 의원 법안 발표 기자회견 가야 하잖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는 어투였다.
“그거 어차피 보도자료 다 나와서….”
“그래서?”
“안 간다는 건 아니고요.”
사준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우한테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자에는 답도 없었고 전화는 안 받을 게 뻔했고 보러 가 봤자 만나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쌓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양진우가 도망가지 않게, 다치지 않게 천천히 접근하고 싶었다. 그래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지라 이런 식으로 일 때문에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그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몇 시 약속이에요?”
태준이 팀장실로 들어간 뒤 사준이 김 작가한테 다시 물었다.
“이따 3시까지 온다고 하셨어요.”
사준은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미팅은 못 해도 1시간은 할 거니까 회견 끝나고 바로 넘어오면….
“이따 미팅하는 장소 저한테도 좀 알려 주세요.”
“이 기자님도 양 변호사님한테 확인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일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김 작가의 물음에 사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거면 따로 연락해 보셔도 될 건데, 연락처 알지 않아요?”
“아뇨, 그렇게 급한 건 아니니까 이따 온 김에 보면 좋을 거 같아서요.”
사준은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오랜만에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괜히 긴장됐다. 짧게라도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잠깐이라도 말을 나눌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분명 그렇게 기대를 품고 하루를 시작했건만 점심 무렵부터 일이 꼬였다. 기자회견 때문에 국회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원래 예정돼 있던 박 의원이 아니라 다른 당 의원이 법안을 발표하겠다더니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선수를 쳐버렸다. 그 바람에 발표 예정이었던 박 의원 쪽은 다른 의원이 법안을 도둑질당했다며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쳤고, 선수 쳐서 발표한 의원 역시 가만있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사준은 국회를 쉽게 뜰 수가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오늘까지 꼭 이래야 하나 싶은 심정이 들면서 요즘 들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뒤집어엎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음, 이 기자님 올 것처럼 말하더니 안 오네요.”
선거법 관련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김 작가가 말했다.
“이 기자님 온다고 했었어요?”
진우는 궁금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묻고 말았다.
“오늘 양 변호사님 온다고 하니까 언제 오냐, 몇 시에 오냐 꼬치꼬치 묻더라고요. 아까 카페 이름도 문자로 보내줬는데, 여태 안 오는 거 보니 안 올 건가 봐요.”
“안 오는 게 아니고 못 오는 거 같은데?”
백 작가가 핸드폰을 꺼내 국회 관련 최신 뉴스를 보여줬다. 법안을 갖고 날치기를 당했네, 도둑질을 당했네 하는 내용의 뉴스를 흘긋 보고는 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국회가 이 난리라면 국회 담당 기자가 자리를 비우는 건 힘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 일어나죠.”
진우는 사준에 대한 정보가 자신의 귀에 더 들어오기 전에 대화를 마무리했다.
“변호사님, 잠깐 사무실 들렀다 갈 시간 되세요? 저 청첩장 나왔거든요. 갖고 나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김 작가가 하는 말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장태준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같이 가요.”
원래는 그냥 밖에서 작가들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사준이 방송국에 없는 게 확실해졌기에 진우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방송국에 들어와 김 작가한테 청첩장을 받은 진우는 태준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냥 갈 줄 알았더니.”
태준은 진우의 속마음을 훤히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면서 소파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냐, 금방 가야 해. 할 말 있어서 온 거야.”
“뭔데.”
“이번 선거법까지만 하고 나 이제 너희 팀 자문 못 할 거 같다.”
진우의 말에 태준은 사준을 탓하는 것 같은 한숨을 뱉었다. 혹은 이럴 줄 알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이 기자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그럼?”
“삼하 때문에 바쁘기도 하고.”
“너 변호사 되고 나서 안 바쁜 적 없어.”
“맞는 말이긴 한데, 이번 소송 너무 지겨워. 이거 정리되면 좀 쉴까 해서.”
“쉰다고? 로펌 그만둘 거야?”
태준의 물음에 진우는 눈동자를 둥글게 굴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재벌들 뒤치다꺼리하는 거 이제 물린다.”
“…….”
“일단 후배 중에 괜찮은 사람 찾아볼게. 자문 담당은 필요할 거니까. 간단한 건 내가 서면으로 해도 되고.”
“왜 서면이야?”
“쉬는데 방송국 들락거리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한국에 없을 수도 있어.”
태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이나 회유가 먹히지 않을 상태라는 걸 빠르게 간파한 눈이었다.
“네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사람 찾으면 일단 소개나 해줘.”
“어, 나중에 연락할게.”
태준의 사무실에서 나온 진우는 비상구 계단을 이용해 지상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사준이 시시껄렁한 문자라도 보내지 않았을까 했는데 핸드폰은 잠잠했다. 문자가 와 있어도 답을 보내지 않았을 거면서 굳이 확인하려는 심리는 대체 뭔지. 진우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양 변호사님!”
운전석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들린 큰 소리에 진우의 고개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사준이 조금 전 진우가 지나왔던 길을 뛰어오는 게 보였다.
단숨에 진우의 앞에 선 사준은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진우는 붙잡힌 것도 아닌데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사준을 바라봤다.
“무슨, 급한 일 있어요?”
이렇게 뛰어서 자신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냐는 듯 진우가 묻자 바닥을 보고 숨을 고르던 사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날이 찬데 얼마나 달린 건지 그의 얼굴이 빨갰다.
“일은, 아니고요, 후으… 얼굴, 보려고, 하아….”
사준은 고르지 못한 숨 사이사이로 말을 뱉었다. 말이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에 가까웠는데, 그래서인지 진우는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하면 아직은 싫어할 거 같으니까. 이럴 때라도 봐야죠.”
어느 정도 호흡을 되찾은 사준이 말했다. 진우는 여상한 눈길로 사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보겠다고 달려오는 이사준의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로 닫아놓은 마음의 문이 덜컥이면서 또다시 열려 버릴 것만 같았다. 고작 이 정도에 흔들린다니 말도 안 된다. 이 사실을 알면 역시 쉽다며 비웃을 것 같았다.
사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진우를 보며 입속에서 혀를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춘 것까지는 다행인데 여전히 진우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진우의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는 건 예상했던 일이다. 문자에 한 번도 답이 없는 것만 봐도 모를 수 없는 일이니까.
“결혼식, 오실 거예요?”
사준은 진우가 들고 있는 아이보리색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며칠 전 저것과 똑같은 것을 자신도 김 작가한테 받았기 때문에 봉투의 내용물이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별일 없으면 가야죠.”
진우의 대답에 사준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한 번 더 만날 수 있는 날이 생긴 것에 일단 만족이었다.
“다른 용건 없으시면….”
“변호사님.”
그만 가보겠다고 말하려는데 사준이 또다시 진우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유독 부드럽고 조금 달콤하게 들렸다면 착각일까? 진우는 눈을 느릿느릿 깜박였다. 이딴 사소한, 호의 같지도 않은 호의에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심장이 자꾸만 덜그럭거렸다.
“오늘 퇴근하고 전화해도 돼요?”
“네?!”
조용하게 물어오는 내용이 너무 뜻밖이라 진우의 목소리가 크게 튀어 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언제부터 이런 걸 물어봤다고…. 진우는 기가 막혀서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준은 진우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 전에 목소리 듣고 싶은데, 안 돼요?”
진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얼굴에 열이 오를 것 같았고 그런 모습을 사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 역시 방송국에 오는 게 아니었다. 진우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문자는 마음대로 보내면서 전화는 왜 물어봐요?”
“문자에 답을 안 해 주니까요.”
“…….”
“문자에 답도 안 해 주는데 전화라고 받을 거 같지는 않고, 그러다 귀찮아져서 차단해 버리면 내가 손해잖아요.”
차단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듯 말하는 사준을 보며 진우는 헛숨을 삼켰다. 그렇게나 이사준하고 떨어지고 싶고,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 차단은 생각도 못 했다는 아이러니를 지금에서야 깨닫고 말았다. 일 때문에 얽혀 있다는 핑계를 대려면 댈 수야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진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진우는 엷은 한숨을 뱉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세요, 전화. 바쁘면 못 받을 수도 있지만.”
* * *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진우는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봤다. 전화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막연하게 퇴근하고 전화할게요, 라고 했으니 그게 오늘인지 내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전화해서 뭘 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언젠가 사준과 전화했을 때 했던 폰섹이 떠올라 귀 끝에 열이 몰렸다. 설마 그런 걸 생각한 건가? 그런 거라면 절대 거절이다. 아니, 미친놈이라고 욕을 한 바가지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진우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소파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기다리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샤워하고 머리가 조금 식은 뒤에 나왔을 때까지 핸드폰은 잠잠했다. 진우는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가 핸드폰을 거실에 두고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정을 내린 뒤 물을 한 잔 마시고 침실로 움직이려는 순간, 타이밍을 재고 있던 것처럼 전화가 울렸다.
진우는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한 번 보고 엷은 숨을 내쉬었다가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 아, 다행이다. 안 받을 줄 알았어요.
“퇴근해서 집에 왔으니까요.”
한가해서 받은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자 사준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 저녁은요? 먹었어요?
“네, 아까 회사에서.”
― 아까 보니까 살이 좀 빠진 거 같던데, 바빠도 밥은 잘 챙겨 먹어요.
사준의 말에 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살이 빠졌다는 말은 자신보다는 사준에게 더 어울릴 말이었다. 체격이 좋은 편이라 크게 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전체적으로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턱선이나 콧대가 더 선명해진 게….
― 변호사님?
자연스럽게 낮에 봤던 사준을 떠올리던 진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네.”
― 말이 없어서 전화 끊은 줄 알았어요.
“…왜 전화한 거예요?”
―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아까 말했잖아요.
사준이 속삭이듯 말하자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했다. 전화해도 좋다고 하지 말 걸 그랬다. 이렇게 다정한 척 굴면 언젠가는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이 기자님.”
― 천천히 할게요.
진우가 또다시 선을 긋는 말을 할 것 같아 사준이 먼저 말을 뱉었다.
― 다시, 아니 다시가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해 보고 싶어요.
얼마 전 진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 사준이 말을 정정했다.
― 내가 멍청했고 미련했고 이기적이었다는 거 알았으니까… 지금도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그래도 포기가 안 돼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가 안 된다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처음에는 거짓이었는데 지금은 진심이 됐다? 왜? 손에서 놓쳐버린 장난감이 아쉬운가? 더 데리고 놀고 싶었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끝내 버려서 그런가? 여러 가지 물음표가 동시에 떠올랐지만 모든 물음표는 궁극에는 하나로 귀결됐다.
이사준은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그저 전화 통화를 하는 것뿐인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차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진우는 핸드폰을 바꿔 들고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에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 기자님, 컵라면 좋아해요?”
― 컵라면이요? 글쎄요, 그건 좋아한다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가끔 먹죠. 왜요? 컵라면 먹고 싶어요?
진우의 질문이 기쁜 것처럼 사준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우는 질문을 무시하고 혀를 움직였다.
“컵라면 만드는 거 되게 쉽잖아요.”
― 그쵸, 실패하기 힘든 게 컵라면 아닌가?
“근데 그것도 너무 오래 기다리면 불어요.”
― …….
“나는 사람 관계에 있어서 타이밍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불기 전에 먹어야죠.”
― 지금 나랑 변호사님이랑 타이밍이 어긋났다고 말하는 거예요?
역시, 이사준.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맞아요, 내가 알았다고 했잖아요. 지금도 이 기자님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겠거든요. 근데 그것뿐이에요.”
* * *
사준은 핸드폰을 쥔 채 짧은 한숨을 뱉었다. 지금 진우는 우리 관계에서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준이 뭘 하려는 건지 알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양진우는 하나도 모른다.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아서 더 두꺼운 벽을 세우고 그 안에 잔뜩 움츠러든 것 같았다.
사준은 마른세수를 몇 번 했다. 진우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속이 쓰렸다. 처음부터 그냥 한번 만나볼 생각, 섹스나 한번 해 볼 생각, 모호한 경계를 확인할 계기로 삼을 생각으로 만날 사람이 아니었다.
“…또 전화할게요.”
사준은 마른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지금 뭘 더 하려고 하는 건 욕심이었다. 전화를 끊은 사준은 침대에 드러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봤다. 꽉 닫아버린 마음의 문을 여는 법 같은 걸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걸 알려만 준다면 지금 심정으로는 영혼까지 팔 수 있을 것 같다.
* * *
꽃이 만개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봄이 왔을 때도 사준은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 계절이 바뀌었지만 진우와의 관계는 누군가 일시 정지를 눌러 놓은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문자에는 답이 없었고 전화는 세 번에 한 번 정도 받았다.
물론 사준 역시 온종일, 24시간, 365일 양진우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튀어나왔고 그 기억은 평화롭게 사준을 구타했다.
[언제 끝나요? 저녁 같이 먹을래요?]
사준은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으면서 습관처럼 문자를 보냈다. 어차피 답장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는 건 양진우를 생각하고 있다는 일종의 사인이었다.
[양 변: 8시]
문자전송이 끝나기 무섭게 떠오른 글자에 사준은 눈을 깜박였다. 순간 진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문자를 보낸 것인가 싶어 이름까지 확인했다. 내내 사준만 말하던 메시지 창에 갑자기 떠오른 글자 때문에 심장이 요동을 쳤다. 사준은 칼국수를 먹으려던 것도 잊고 다시 문자를 입력했다.
[뭐 먹고 싶어요?]
[양 변: 매운 거요]
또 답이 왔다. 사준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놓치면 누가 글자를 지워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빨간 양념이 묻은 음식들이 떠올랐다.
* * *
진우는 자동차 핸들을 꽉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자에 답을 하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지우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한테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있던 삼하 건설 2심은 검사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준비했던 변론을 제대로 펼칠 기회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삼하 건설 대표가 벌인 짓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서 변호할 기분이 안 난 건지도 모르겠다.
“하아….”
진우는 머리를 헝클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는 사회봉사 몇백 시간이 아니라 감옥에 가게 생겼다. 재판만 별로였다면 이렇게까지 짜증 나지 않았을 텐데, 같이 변론을 준비했던 변호사들은 재판이 끝나자 진우를 뒤에서 씹기 바빴다. 화장실은 언제 누가 올지 모르니 주의해야 하는데 멍청이들이 화장실에서 진우 뒷담화를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진우는 입구에 서서 그들이 하는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양 변, 김 변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네?’
‘그러게 왜 그런 어쏘를 스토커로 신고하냐고.’
‘신고할 게 아니라 결혼을 해야 했다고 본다, 변호사 밥줄 끊기는 거 아닌지 몰라.’
‘양 변이 너냐? 양 변은 삼하 하나 날려도 될걸?’
‘아니지, 이제 국내 클라이언트는 다 날려도 되는 거 아닌가?’
‘아, 그렇게 되면 양 변 거 나한테 좀 주면 좋겠다.’
낄낄거리는 말을 들으며 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김 변이 유능하긴 했죠.’
화장실로 들어서며 진우가 툭 말을 뱉었다. 예상치 못한 진우의 등장에 소변기 앞에 서 있던 변호사들이 놀라서 얼굴을 굳혔다.
‘근데 세 사람 몫을 하는 줄은 나도 몰랐네.’
진우는 세면대에서 손을 닦으면서 거울에 비친 남자들을 힐끔 봤다.
‘박 변.’
‘네, 네?’
‘나중에 스토커랑 꼭 결혼해요. 내가 화환 보내줄 테니까. 뭐, 스토커도 사람 가려서 붙을 거 같긴 하지만요.’
‘지, 지금 뭐라고…!’
흥분한 고릴라처럼 소리치는 박 변을 두고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진우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머저리들, 당장 다음 재판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화장실에서 저러고 있고 싶을까? 진우는 조금 전 있던 일을 떠올리곤 손바닥으로 핸들을 탁탁 두드리며 짜증을 부렸다.
“그래, 씨발, 어차피 갈 사람이라 씹어댄다 이거지. 망할 새끼들. 죄다 스토커에 시달려 봐야 정신 차릴 놈들.”
아무리 욕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는데 핸드폰 액정에 새로운 문자가 떠올랐다.
[이사준_스쿠프: 해물찜 어때요?]
진우는 문자를 흘긋 보고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매운 거 먹고 싶다는 말에 일부러 골랐을 게 분명한 티가 나는 메뉴였다.
계절이 바뀔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 사준과 진우는 각자 일방적으로 밀당 중이었다. 진우는 밀기만 하고 사준은 당기기만 하는 이상한 밀고 당기기. 이 지지부진한 관계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끝내려면 이렇게 연락하면 안 되는 건데…. 진우는 망설이면서도 손가락으로 키패드를 조작했다.
[가게 주소 알려줘요]
진우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문자를 보내고 조수석에 핸드폰을 툭 던졌다. 이젠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 * *
퇴근 시간에 맞춰서 식당 안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사준이 손을 들었다. 진우는 덤덤한 얼굴로 사준의 맞은편에 앉아서 가게를 둘러봤다. 넓은 홀에는 저녁 먹으면서 한잔 걸친 사람들이 많아서 시끌시끌했다.
“매운 거 먹고 싶다고 해서 맵게 해달라고 했는데, 괜찮죠?”
사준이 눈꼬리를 살짝 접어가며 웃으며 물었다.
“네.”
사준은 물을 따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진우의 앞에 놓아주면서 진우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저녁을 먹자는 말에 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요즘 진우는 쉽게 예측이 되지 않았다. 아니, 원래 양진우는 사준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함께 저녁을 먹게 된 건 기쁘지만 전화를 허락해줬을 때처럼 어떤 말로 속을 뒤집어 놓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만 떠올리면 야속하고, 기대하게 하는 진우가 나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전에 자신의 행동 때문에 진우가 기대했다가 실망했을 걸 떠올리면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이렇게 같이 밥을 먹어주는 것만도 사치라고 여겨야 할 판이다.
“이 기자님.”
푸짐한 해물찜이 앞에 놓였을 때 진우가 입을 열어서 사준은 시작됐구나, 하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네?”
“무슨 문자를 그렇게 자주 보내요? 기자가 그렇게 한가해요?”
문자를 그렇게까지 자주 보낸 것 같지는 않은데…. 하루에 세 번이 평균이고 많으면 다섯 번이다. 그중에 진우가 답을 해 준 건 오늘이 처음이고.
“한가한 게 아니라 필사적인 건데요.”
“하…?”
진우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 치자 사준이 씩 웃더니 진우의 앞으로 해물찜 접시를 밀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어서요.”
“…….”
진우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눈으로 훑어봤다.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오는 말에 당황하는 건 오롯이 진우의 몫이었다.
“먹어 봐요, 여기 진짜 맛있어요.”
진우는 해물찜을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맛있어 보이기는 했다.
“이 기자님.”
“일단 먹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이러다가 밥도 못 먹고 헤어질 것 같아 사준이 말리는 어투로 말하자 진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소주 한잔할래요?”
진우의 질문에 사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직원을 불러 술을 시켰다.
“다른 거는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차 끌고 왔죠? 대리 부르는 거 싫으면 내가 운전할까요? 나는 술 안 마셔도 되는데, 양 변호사님 내가 데려다주면 되니까.”
“아뇨, 집에 가는 건 제가 알아서 갈게요.”
진우는 사준에게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또박또박 말하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사준은 진우가 먹는 걸 보면서 자신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같이 얼굴을 보면서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도파민이 마구 분비되는 것만 같았다.
“어때요? 입에 맞아요?”
“맛있네요.”
진우는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빨간 해물찜을 꼭꼭 씹어 삼켰다. 사준은 진우의 잔이 비면 얼른 술잔을 채워 주면서 자신도 술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진우가 술 마시는 페이스가 평소보다 빠르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바에서 만나 자신이 도발했을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빨리 마시는 건 처음 봤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사준이 별 의미 없다는 듯 툭 던져 묻자 진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로, 그냥 평소랑 똑같았어요. 재판은 좀 불리해졌고, 그거 때문에 다른 변호사들이 뒤에서 좀 씹어댔고.”
“…….”
“스토커랑 이 사건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죠.”
사준은 눈동자를 빙글 굴렸다. 저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 얘기처럼 늘어놓는 건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진우의 화법에 익숙해진 지금은 알았다. 양진우는 신경 쓰이면 쓰일수록 대수롭지 않은 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준은 답답한 속을 소주 한 잔을 마시면서 달랬다. 지금 진우가 어떤 재판을 맡은 줄은 알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삼하 건설 대표가 나쁜 짓을 했으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그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스토커랑 연결 짓는 멍청한 짓은 또 누가 하는 건데?
“내가 혼내줄까요?”
사준은 잔에 있던 술을 단숨에 비어내고 진우에게 말했다. 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도대체 누가 누굴 혼내줘? 우습게도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데 그게 얼굴에도 고스란히 티가 난 모양이다.
“양진우 씨 괴롭힌 사람들이요.”
사준이 덧붙인 말에 진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기자님, 재밌는 말을 다 하네요.”
“진심인데, 지금 내 기분은 양 변호사님 괴롭힌 사람들 신상 공개해서 망신이라도 주고 싶은데요.”
“흐음, 그럼 이 기자님도 명단에 있어야 할 건데?”
“그걸로 기분이 좀 풀린다면 내 이름도 적어야죠.”
사준이 스스럼없이 말하자 진우는 말을 잘못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술잔을 입에 댔다. 지금 대화는 사준의 잘못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꿍해 있다는 티를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우는 입에 감도는 알코올의 쓴맛을 가라앉히기 위해 혀끝으로 입천장을 꾹꾹 눌렀다. 뭐 한다고 만나서 밥을 먹자고 한 건지….
진우는 사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사준은 자신의 기색을 살피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은근한 여유가 있었다. 사준의 말 한마디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는 건 아직도 양진우였다. 이사준이 좀 더 필사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보다 더 흔들렸을까? 그럼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다였다.
그럼 왜 식사에 응한 걸까? 단순히 이사준이 양진우한테 쩔쩔매는 걸 보면서 치졸한 우월감에 젖고 싶기라도 했나? 그런 거라면 누가 더 유치하고 누가 더 치사한 걸까? 진우는 자신이 사준을 왜 만나러 온 것인지에 대해 떠올리다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뭐가 됐든지 간에 이미 늦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부질 없음은 진즉 깨달았다. 사준은 처음부터 장난이었고, 반쯤 호기심이었고, 무엇보다 양진우의 마음이 어느 순간 진심이 됐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그걸 이용해 즐기려 했다.
“양 변호사님?”
사준은 딴생각에 빠진 진우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 먹어요.”
진우는 젓가락을 들고 싱긋 웃어 보이며 속으로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이사준과 얽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이사준이 한결같이 보내온 문자를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또 무언가를 기대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어서야, 도대체 사시는 어떻게 패스한 건지 모르겠네.
사준은 말없이 젓가락질하는 진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뭔지 모르지만 지금 또 무언가가 미묘하게 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알았을 뿐이지 진우에게 묻거나 따질 수는 없었다.
* * *
같이 저녁을 먹은 이후 진우는 연락 두절이었다. 그동안은 문자를 보내면 그래도 읽음 표시라도 떴는데 지금은 읽지도 않았다. 전화는 당연히 안 받았다.
그때 느꼈던 미묘한 어긋남은 역시 틀린 감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이든 회사든 찾아가고 싶었지만, 스토커에 시달렸던 진우를 떠올리면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자극해서 공포심이라도 불러일으켰다가는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만 같았다.
태준에게 물어보자니 빈정거리기만 할 것 같아서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사준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김 작가의 결혼식만 기다렸다. 결혼식에 진우가 오면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말을 붙일 생각이었다. 마지막인 것처럼 그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반드시 결판을 내겠다고 다짐하면서 직접 결혼하는 당사자만큼이나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결혼식은 빌어먹게도 연기가 됐다.
김 작가 예비 시아버지가 운전 중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그쪽 집안이 쑥대밭이 됐단다. 발견이 빨라서 돌아가신 건 아니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소식과 함께 결혼식은 잠정 연기 됐다.
“곧 괜찮아지시겠죠.”
사준은 김 작가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속이 쓰렸다. 제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카드가 그대로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아무것도 안 남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타이밍이 아주 좆 같았다. 여태까지 살면서 마음먹은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건 처음이었다. 유치하게도 온 우주가 힘을 모아서 자신과 양진우 사이를 방해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 김 작가의 결혼 연기 소식을 들은 진우는 김 작가한테는 미안했지만 내심 안도하고 말았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사준과 마주쳤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안도와 함께 진우는 누나의 결혼 준비를 도왔다. 돕는다고 해서 크게 뭘 한 건 아니고 가끔 누나가 부탁하면 차를 운전해 주는 정도였다. 누나와의 사이는 여전히 어색했지만, 전에 만났을 때처럼 껄끄럽거나 불편해서 숨어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예비 매형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시간은 소리소문없이 흘렀다. 진우는 사준에 대해 떠올리는 횟수가 줄었고 그때 받았던 상처 위에는 딱딱한 딱지가 앉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딱지가 떨어지면 흉은 남겠지만 아프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초조함은 오로지 사준의 몫이었다. 사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답이 없는 연락을 하는 것에 피가 마를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 양진우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라도 하는 건 아닐지 불안했다.
설마 다음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양진우가 다음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예전에 봤던 진우의 전 애인처럼 자신도 찌질하게 깽판 놓으려고 해야 하나?
진우와 해물찜을 먹은 날로부터 이 주가 지났다.
사준은 모든 인내심을 동원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더 버티지 못하고 토요일 아침, 사준은 차를 끌고 진우의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등장하면 놀랄 테니까 그냥 얼굴만 살짝 보고 올 생각이었다. 스토커가 할 법한 핑계와 행동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들키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딱 한 번만 보고 오자. 그냥 멀리서 얼굴만 보는 거야.
“하, 씨발….”
사준은 어이가 없어 욕을 뱉었다. 자신의 행동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등장하는 흔해 빠진 구남친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걸려서 접근금지 명령이라도 받으면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양진우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스토커한테 한번 심하게 데였으니 그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래도 안 걸리면 얼굴만 보는 건 괜찮지 않나? 그랬다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라도 보면 어쩌려고?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사준은 자신의 또 한 번 혀를 찼다.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차를 모는 속도가 더뎠다. 하지만 한심한 짓이라는 자각이 있음에도 진우의 집에 가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사준은 결국 진우의 집 공동현관이 잘 보이는 곳에 주차했다. 그리고는 누군가 오가는 사람이 없는지 주시했다. 잠복 취재를 할 때처럼 차 안에서 반쯤 멍한 정신으로 현관을 본 지 10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얇은 카디건을 입은 진우가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고 그에 사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오랜만에 봐서 반응한 게 아니라 진우의 얼굴이 수척했고 몸에 맥아리가 없어 보여서 놀라고 말았다. 거짓말 아니고 양진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사준은 핸들 앞으로 몸을 숙인 채 진우를 빠르게 관찰했다.
‘뭐지? 어디 아픈가?’
최근에 일교차가 컸다. 낮에는 한여름에 가깝게 더웠는데 밤에는 가을처럼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며칠 전에는 꽃이 다 피어서 봄이구나 했는데, 어제는 비가 미친 듯이 내려서 꽃이 다 떨어지는, 그런 변덕 심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준은 진우가 차에 오르는 걸 보고 따라서 시동을 걸었다. 딱 봐도 아슬아슬할 정도로 아파 보이는데 어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에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아서, 얼굴만 보고 오겠다는 결심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진우의 차를 뒤쫓으며 사준은 신입 시절 연예부에서 일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몰래 연예인 뒤를 쫓았고, 당시 사수한테 이건 스토커 아니냐고 했다가 한 대 맞았었다. 연예인 뒤 쫓아다니는 건 스토커고, 정치인 뒤 따라다니는 건 알 권리를 위한 공익 행위냐는 욕도 같이 먹었다. 그때 어느 쪽이든 기자라는 게 참 성가시고, 미움받을 직업이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뭐, 그래도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잘 쫓아다니는지 그때 배웠고 이렇게 써먹고 있으니 이득인 건가?
사준은 좌회전하는 진우를 보며 차선을 바꿨다. 그대로 진우의 차는 상가 건물 앞에 멈췄고 운전석 문이 열렸다. 진우는 여전히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움직였다.
사준은 핸들에 몸을 기댄 채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려 진우가 들어간 건물에 붙어 있는 간판을 눈으로 읽었다.
[이우경 내과]
진우가 어디에 온 건지 확실해지자 차라리 나았다. 그래, 사람이 아프면 당연히 병원엘 가야지. 병원에 들어간 진우는 30분 정도 지나서 나왔고 1층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사준은 주차장에서 집 안으로 들어간 진우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떠올렸다. 가구 배치를 바꾸지 않았다면 힘이 없어서 소파에 드러누울 것이다. 약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냥 잠들 것 같았다. 그러다 한밤중에 추워서 눈을 뜰 거고, 으슬으슬 떨리는 몸으로 빈속에 약만 억지로 먹은 뒤 침대로 기어들어 갈 거다. 그게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플 때 하는 흔한 행동이기도 했다.
사준은 핸들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아픈 걸 알고 나니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안 들었다. 사준은 진우가 들어간 방향을 빤히 쳐다보다가 결심한 듯 차에서 내렸다. 잠깐 확인만 하자, 만약에 안 되면 그냥 돌아가고. 그냥 확인만 하자.
사준은 같은 말을 여러 번 중얼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진우의 집 앞에 섰다.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한 뒤 손가락으로 벨을 누르려다 도어락에 시선을 멈췄다.
비밀번호를 바꿨을까, 아니면 안 바꿨을까. 진우는 당장 바꿀 것처럼 말했지만 정말 바꿨을까? 사준은 도어락으로 손을 내렸다. 바꿨든 바꾸지 않았든 진우를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가능성 정도는 가늠해 봐도 되지 않을까?
사준은 도어락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어 올리고 키패드에 손가락을 옮겼다. 초조함을 억누른 채 하나하나 숫자를 입력하고 마지막에 별을 누르자 띠리리릭― 경쾌한 알림과 함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사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비밀번호를 바꿔 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몰랐는데, 진우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와 함께 기대감이 흘러넘쳤다.
사준은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축 늘어진 진우가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준은 진우의 곁에 서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넘겨줬다.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진우가 눈을 뜨더니 이사준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연신 눈을 깜박이던 진우가 피식 웃었다.
“무슨, 이런 꿈을 다 꾸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사준의 심장이 욱신욱신 떨렸다.
“꿈 아니에요, 일단 침대로 가요. 옮겨줄게요.”
사준은 진우의 무릎 뒤로 팔을 넣고 허리를 받쳐 안아 들었다. 그저 들고 있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뜨끈뜨끈해서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준은 넓은 보폭으로 걸어서 진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줬다.
“답답해도 덮고 있어요. 밥 안 먹었죠?”
진우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열 때문에 정신이 붕 떠서 뭐가 뭔지 제대로 분간이 안 가는 듯한 얼굴이었다.
“좀 기다려봐요.”
사준이 침실 밖으로 나가는 것과 동시에 진우는 눈을 감았다.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묵직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방심했던 탓일까. 때아닌 감기는 지독했다.
금요일 밤부터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싶었는데 토요일 아침이 됐을 때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프면 사람이 약해진다고, 주마등처럼 오만 생각이 다 들었는데 꿈속에서 이사준을 만났다. 다시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꿈까지 꾸는 건 무슨 청승인지.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병원을 간신히 다녀왔다.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다시 잠들었는데 꿈에 다시 이사준이 나왔다. 이번에 나타난 꿈은 꼭 진짜 같았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다. 걱정된다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사준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에 목구멍으로 자꾸만 뜨거운 게 치밀었다. 그대로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치솟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사준이 사라지고 다시 혼자가 됐을 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양진우는 곁에 누군가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우스운 건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음에도 혼자인 게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라며 쿨하게 말하던데, 왜 자신은 그게 그렇게나 어려운 걸까.
뒤죽박죽 섞인 기억이 진우를 가족 앞에서 커밍아웃하던 날 밤으로 데려갔다. 얼굴에 피가 잔뜩 몰려 소리 지르는 아버지와 기절 직전의 어머니, 댐이 터진 것처럼 울어 버리는 누나와 혐오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형까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피부를 도려내는 것만 같은 끔찍함에 눈을 질끈 감자 이번에는 처음 만났던 남자가 결혼하기로 해서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다고 얘기하던 날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다음에는 스치듯 만났던 남자들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던 날이 떠올랐다.
시기와 장소 모두 불분명했고 모호했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느낀 감정은 똑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배신감 뒤에 밀려오는 끝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감.
혼자 있지 않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 치던 모든 순간이 결국에는 늘 양진우를 벼랑으로 밀어 넣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벼랑 끝을 붙잡고 버텼지만 이제 더는 힘이 없었다.
언제 장소가 바뀐 건지 이제 꿈속의 진우는 높은 벼랑 끝에 매달린 채 허우적거렸다. 떨어지지 않게 손톱이 빠질 정도로 힘을 주다가 문득 이렇게 버티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어졌다.
진우는 허무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그대로 손에 힘을 풀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은 추락이 아니라 해방에 가까웠다. 버티지 않고 놓아버리면 이렇게나 편한 것을.
“양진우 씨.”
낮게 들린 음성과 함께 누군가 진우의 손목을 탁 붙잡았다. 놀란 진우가 눈을 번쩍 뜨자 사준의 얼굴이 보였다.
“어…?”
진우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있는 장소와 사준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모호했다. 병원에 갔다가 집에 들어온 뒤에 사준이 왔던 건 꿈이 아니었나? 여기에 어떻게 있는 거지? 언제부터?
“악몽 꾸는 거 같기에 깨웠어요. 너무 끙끙 앓아서….”
바닥에 앉아 있던 사준이 상체만 일어선 채 진우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훔쳐주며 말했다.
“이사준…?”
진우가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말았고, 그에 사준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네.”
사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고막을 때리자 그 현실감에 진우의 정신이 돌아왔다. 진우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우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는 간신히 소파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사준을 바라봤다.
“이 기자님이, 여기 왜 있어요?”
비쩍 마른 성대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따끔거렸다.
“그냥,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와 봤는데 양 변호사님 아픈 거 같아서….”
사준은 진우와 눈높이를 맞추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지긋한 시선을 견디기 어려워 진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사준이 바꾸지 않은 비밀번호를 알았다는 것이다. 진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사준을 노려봤다. 왜 함부로 들어온 것이냐는 원망 섞인 시선에 사준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함부로 들어와서 화난 건 알겠는데….”
“그럼 가요.”
진우가 다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휘저어 보이자 사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프잖아요.”
“필요 없어.”
“고집부리지 말고 죽 사 왔으니까 그거라도 먹어요.”
사준이 애원하듯 말하자 진우는 긴 한숨을 뱉었다.
“이 기자님.”
“…….”
“제발 부탁이니까 가세요. 그냥 감기예요. 이 정도로 유난 떨지 않아도 좀 쉬면 나을 거라고요.”
진우가 고집스레 말하자 사준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억지처럼 들리는 말에 진우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플 때는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라 지금 누군가가 곁에 있는 건, 하물며 그게 얼마 전까지 뭘 해도 좋다고 느꼈던 상대라면 위험했다.
“비밀번호 안 바꿨으면서….”
사준이 조용하게 말하자 진우가 눈을 크게 떴다. 올 일이 없을 줄 알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들킬 줄 몰랐으니까.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변명이 맴돌았지만 사실 모두 핑계다. 완전히 지워낼 수 없었다. 잊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조금만 더, 떠나기 전까지 잠깐만 두자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들켜버렸다.
“그대로잖아요, 그때 바꾼다고 했으면서….”
사준이 감정을 꾹 누른 채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처음에는 바뀌지 않은 비밀번호에 안도했으나, 조금 지나서는 매번 혼자서 비밀번호를 누를 때 진우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떠올라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고, 믿고 싶지 않다고 밀어냈지만 온전히 지워내지 못하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요동을 쳤다.
“내가 미운 거 알겠는데, 일단 약 먹어야 하니까… 약 먹는 것만 보고 갈게요.”
진우는 손에 잡히는 이불을 꽉 붙잡았다.
“…이 기자님 나한테 왜 이래요?”
“그러니까….”
사준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진우가 좀 더 빨리 말을 뱉었다.
“지금 이럴 거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지적당하자 사준은 숨이 막혔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
“지금 나한테 왜 이래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사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진우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눈동자에 그득 차오른 눈물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이제 싫어요.”
“…….”
“정말 싫어, 흡….”
진우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억눌러 놓았던 무언가가 가슴속에서부터 들끓어 올랐다. 순식간에 끝까지 치밀어오른 것은 단단히 세워 놓았던 벽을 부숴버렸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진우는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들켰다는 부끄러움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서러움은 열에 들뜬 머리로 감당할 수 없었다. 어쩌면 기대했는지 모른다. 쭉 헤테로로 살았던 이사준이 남자임에도 양진우가 좋아진 거길, 성별 따위는 상관없을 정도로 좋아졌기를,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의 구원이 될 수 없다. 이사준은 처음부터 양진우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온 이사준을 보니 멍청하게도 또 기대하고 싶어진다.
“흐으윽….”
사준은 진우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아픈 사람의 나약함을 파고드는 건 치사한 짓이지만 그 치사한 짓을 해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사준은 간신히 한마디 했다. 그리고는 진우의 눈물이 멎을 때까지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너무 많이 울면 탈수 증상 올지도 몰라요.”
“…….”
“밥 먹고 약 먹어요. 그리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때 얘기해요.”
사준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만큼 진우도 그럴 거라 짐작했다.
“…….”
말없이 한참 동안 눈물만 쏟아내던 진우는 울음을 멈춘 뒤에 사준의 말에 따랐다. 물을 마셨고, 죽을 먹고 약을 먹은 다음 땀에 전 몸을 씻고 나왔다.
그 사이 사준은 침대 시트를 새로 갈아놓았다. 진우는 말없이 침대에 기어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열 때문에 몸은 뜨끈뜨끈했지만,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진우가 눈을 감을 때까지 사준은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사준은 잠든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서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울어서 붉어진 눈가를 보니 속이 쓰렸다. 뭘 그렇게 속에 담아두고 있는 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섬세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건데. 사준은 이미 몇 번이나 했던 후회를 또 했다.
* * *
사준은 들이치는 아침 햇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침대가 비어 있는 걸 보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자 진우가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쥐고 이것저것 버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양 변호사님?”
“아, 일어났어요?”
진우의 쾌활한 목소리에 사준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좀 찌뿌둥하긴 한데, 누워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
“불편하게 자던데, 괜찮아요?”
진우는 사준이 침대에 얼굴만 올려놓고 자던 걸 떠올리며 물었다.
“저는 괜찮은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준이 목을 좌우로 꺾으면서 물었다.
“계속 미뤘었는데 청소 좀 할까 해서요.”
진우는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는 건 쓰레기봉투의 크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맞다, 어제 간호해 줘서 고마워요.”
어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제 그만 가보라는 듯한 말에 사준은 주먹을 꼭 쥐었다.
“양 변호사님, 얘기 좀 해요.”
진우는 사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이야기 들을 준비가 됐다는 자세였는데, 괜히 더 불안했다. 사준은 자리에 앉지 않고 진우의 맞은편에 섰다.
“무슨 얘기요? 비밀번호 얘기를 할 거라면 그거 오늘 바꿀 거에요. 자꾸 미뤘는데 이제 진짜 바꾸려고요.”
사준이 말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 놓았던 것처럼 진우가 말을 늘어놓았다.
“아뇨,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에요.”
“그럼요?”
“자꾸 그렇게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잖아요.”
“…….”
진우는 사준을 조용한 눈길로 응시했다. 어제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쏟아내던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깨끗해 보였다. 사준은 진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양 변호사님은 대단해요.”
“뭐가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사준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듯 말했다.
“근데 그 힘든 걸 변호사님은 계속했다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대단해요.”
사준은 진우의 앞에 몸을 낮춰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진우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다봤다.
“양 변호사님이랑 진짜 잘해보고 싶어요. 내가 잘못했던 거만큼 앞으로 더 잘할게요.”
“앞으로…?”
진우가 중얼거리자 사준이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기자님, 나는 그런 거 이제 안 믿어요.”
“…….”
“그러니까, 꼭 이 기자님 때문은 아니고요. 그런 말에 기대하거나 설레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동성끼리 만나는데 다음이 어디 있어요?”
진우가 피식 웃으면서 어깨까지 으쓱해 보였다. 진우는 다음도, 앞으로도, 아니, 그 단어들이 내포한 모든 미래를 부정했다.
“이 기자님.”
“…….”
“저 뉴욕 가요.”
사준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아직 장태준이 얘기 안 했나 보네, 자문도 그만두기로 했어요.”
“…….”
“삼하 재판 마무리되는 대로 갈 거예요. 갔다가 언제 올지는 안 정했어요. 어쩌면 그냥 계속 거기 있을지도 모르고요.”
빠르지 않은 어조로 말하는 양진우 주변만 푹신푹신한 공기가 감싸고 있었다. 그는 어제 쏟아낸 눈물만큼 개운해 보였다.
“왜요…?”
멍청한 목소리로 사준이 묻자 진우가 살짝 웃었다.
“그냥, 여기 너무 지겨워요.”
사준은 순간적으로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양진우가 이곳을 떠난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급격하게 차오른 물음표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리기 전에 깨달았다. 멍청하게도 자신은 진우가 계속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아무리 싫어도 자문 담당이라면 마주칠 일이 생길 것이고, 장태준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으면 인연은 끊어지지 않을 거라고, 그런 모든 주어진 상황에 기대 안일하게 굴었다. 필사적인 것처럼 굴었지만 하나도 필사적이지 않았다. 사준은 자신의 태평함에 가벼운 자기혐오가 일었다.
“이 기자님 마음은 고맙지만 늦었어요.”
진우가 사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웃으며 말했다. 성스럽게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우리는 거기까지였어요.”
아무리 빌고 또 빌어도 늦었음을 알리는 말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랑 너무 똑같지 않나? 뒤늦게 깨달아 버린 마음, 외국으로 떠나버린 상대.
뇌가 녹이 슨 것처럼 생각이 자꾸만 삐걱거렸다. 뭐부터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정신이 멍했다. 사준은 진우의 무릎을 꽉 쥐었다. 어제는 진우가 눈물을 떨어트렸다면 오늘은 자신이 그럴 것 같았다.
“평생 좋아할게요.”
사준은 믿어 달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진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안 믿어요?”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이 기자님인 거 같은데요?”
진우는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지만 사준의 눈에는 진우의 얼굴이 씁쓸해 보였다.
“그럼 그렇게 쓸쓸하다는 얼굴 하지 말고 제대로 차요… 내가 너무 싫다고, 꼴도 보기 싫다고 그렇게 말해요.”
사준은 젖은 눈을 한 채 중얼거렸다.
“근데 양 변호사님이 그렇게 말해도 나는 계속 좋아할 거예요.”
“…….”
사준은 진우의 담담한 척하는 모습에 자꾸만 목이 메었다. 뭔가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뭔가 증명해야 했다.
“변호사님.”
“네.”
“…우리, 섹스해요.”
“…….”
진우는 대답 없이 사준을 바라봤다. 마지막이니 그냥 찐하게 한 판하고 끝내자는 건가 싶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사준이 눈을 마주쳐왔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는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찐하게 섹스하고 그다음에 사랑한다고 말할게요… 섹스 이후에도 다음이 있다는 걸 보여줄게요. 그러니까… 나 좀 용서해줘요….”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눈에서 멋대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타인이 우는 걸 볼 때와 자신이 울음을 터트릴 때는 너무 달랐다.
진우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받아들였다가 또다시 배신당하면 완전히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지금 순간 이사준이 간절하다는 것도 알겠고 진심으로 양진우를 원하는 것도 알겠지만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였다. 진우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기자님이, 하고 싶으면 해요, 섹스.”
“…….”
“추억으로 한 번쯤은 나쁘지 않겠죠. 어제 병간호도 해줬으니까 이 기자님이 하고 싶다고 하면….”
“…….”
“섹스는 괜찮아요.”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사준의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게 아니라….”
사준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진우는 여전히 담담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어요.”
진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감정은 주지 않겠다는 그 단호함이 사준의 심장을 세게 할퀴었다. 진우는 사준의 뺨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상처를 핥아 주는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저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사준의 얼굴이 흠뻑 젖었지만, 진우는 눈물을 닦아주지는 않았다.
사준과 진우는 서로의 마음이 같아서, 혹은 같지 않아서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자꾸만 반복하고 있었다.
사준은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진우를 바라봤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우는 사준의 머리를 또 한 번 쓸어 넘겨주며 웃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잖아요. 이 기자님은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자신의 마음을 일시적이고 가볍게 취급하는 말에 사준은 답답함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믿어 달라는 말조차 안 나왔다. 몇 번을 말해도 사준의 마음은 진우에게 닿지 않았다. 전해지지 않는 감정이 버거워서 사준의 눈에는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해요, 그럼.”
사준은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진우의 어깨를 밀어 소파에 쓰러트리고는 트레이닝복 바지춤을 붙잡았다. 그대로 옷을 벗길 줄 알았는데, 사준은 더 움직이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준의 눈물이 진우의 뺨에 떨어졌다. 타인의 눈물이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은 기묘했다. 진우는 자신이 우는 것인지 사준이 우는 것인지 헷갈리는 심정으로 묵묵하게 사준을 바라봤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구는 사준을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걸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사준은 진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른 감정을 이렇게라도 토해내지 않으면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양진우 씨….”
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진우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모습에서 사준은 진정한 끝을 봤다.
양진우는 갈대가 아니라 대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세찬 바람이 불면 휘어지지만 본질은 곧음 그 차제였다.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결정한 마음을 번복하는 일은 없다. 앞으로 남은 평생, 양진우가 이사준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다.
* * *
일주일 후 사준은 진우가 비행기를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달 후 진우가 소개했다는 변호사가 법률 자문을 해 주겠다며 사무실에 들렀다.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변호사는 미인으로, 양진우랑 연수원 때부터 친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사준은 속으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했을 뿐이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는데 기억은 이상하게 선명해졌다. 잊으려고 발버둥 치면 더 기억하는 꼴이 될 것 같아 일부러 생각나면 생각했고 그리워지면 그리워했는데, 그런 감정에 타성은 없는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워지고 서운해지고 보고 싶어졌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게 아니라, 눈에서 멀어졌더니 마음에서는 더 선명해졌다. 겉으로 보면 사준은 평범했으나 마음은 점점 더 야위어 갔다. 번번이 이별할 때마다 이런 감정을 겪어내고 이겨냈다던 양진우는 정말 대단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청담동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퇴근하려던 사준은 무더운 날씨에 손부채질했다. 시작된 열대야 때문에 한밤중인데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집으로 가려던 사준은 거리를 빙 둘러보더니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는 홀린 것처럼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딸랑―.
청량하게 울리는 풍경 소리와 함께 두리번거리자 임재민이 오픈 키친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사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가게를 둘러봤다. 늦은 저녁 겸 술을 한잔 마시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앉아, 밥 먹었어?”
“아니, 밥은 됐고.”
“그럼, 술?”
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 테이블에 앉았다.
“근데 어쩐 일이야?”
사준은 임재민이 잔에 따라준 맥주를 마시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냥, 근처에 일이 있었는데 생각난 김에 온 거야.”
“아하, 난 또 나한테 따지러 온 줄 알았네.”
임재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것에 사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그냥, 지금 네 얼굴 보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그 원망의 대상으로 날 정한 건가 싶어서.”
“네가 원망 당할 짓을 했다는 말처럼 들리네.”
임재민은 턱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을 말한 건데 너는 그게 억울할 수도 있으니까.”
사준은 임재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임재민이 진우에게 무언가 말했다는 건 예상대로였지만, 그 씨를 뿌린 게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원망할 마음은 안 들었다. 화를 내기에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양진우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결과는 완벽한 KO다.
양진우는 이제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뉴욕 정도 뭐가 어때서,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 얘기고. 진우와 사준의 관계는 모든 게 불확실했다. 심지어 양진우는 관계를 끊어내고 싶어 했다. 그랬는데 이렇게 멀어져 버리니,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있던 것과 천지 차이였다. 그때는 보고 싶은 마음만 참으면 됐는데 지금은 물리적 거리까지 생겼다.
양진우는 정말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눈에서 멀어진 이사준을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을까?
“이사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사준을 향해 임재민이 물었다.
“뭐가?”
사준은 임재민이 준 땅콩 몇 개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시큰둥하게 물었다.
“동성끼리는 미래가 없다는 거 말이야.”
“…….”
“다른 건 몰라도 헤어지면 남보다 못하는 사이가 되는 건 확실해.”
“글쎄다…. 그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데 이사준, 넌 사귄 적도 없던 거 아냐? 아니면 사귀고 싶어진 건가?”
임재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사준의 잔에 새로운 술을 따랐다. 사준은 잔에 차오르는 맥주를 보며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아쉬운 게 생겼으면 매달려 보지 그래?”
“그럴 수 있으면 했지.”
멀어져 버린 진우를 떠올리며 사준이 중얼거렸다.
“그래, 뭐,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근데 왜 내 눈에는 네가 아직도 폼 잡는 것처럼 보이냐.”
순간 누군가 명치를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사준은 무슨 의미냐는 눈길로 임재민을 빤히 쳐다봤다.
“아냐.”
차라리 말을 말지, 임재민은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얄밉게 발을 쏙 뺐다. 사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임재민이 뭘 알고 한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모든 걸 다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했던 김 작가 결혼식은 마지막 카드가 아니었다. 사준은 혀를 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어, 나중에 봐.”
사준은 가게 밖으로 나와 핸드폰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는 연락처를 뒤적이다가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뭐야, 무슨 일 있어?
전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태준이 물었다. 누가 일 중독자 아니랄까 봐 태준은 사건이 터진 것인지 묻는 기색이었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요?”
― 일 얘기 아닌데 보자는 거야?
“네.”
태준은 알 만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척하고 다녔지만 태준이라면 진즉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 양진우에 관한 거라면 나는 할 말이 없는데.
“…….”
― 어디 있는지도 알고, 뭐 하고 지내는지도 알고,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지도 아는데, 알려 줄 수 없다는 거야.
태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눈에 보이는 거짓말 대신, 알지만 너에게는 말해주지 않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팀장님.”
― 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 뭔데. 그렇게 목소리 깔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건 부하직원으로 드리는 부탁이 아니고 팀장님 친구랑 만나던 사람으로 부탁하는 거예요.”
― 그럼 거절이야.
태준은 내용을 듣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
― 전에도 다 말한 거 같은데. 한 번 상처 준 놈이 두 번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내가 뭔가 해서 양진우한테 원망 듣고 싶은 마음도 없어.
“…죽을 거 같아요.”
사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토하듯 말을 뱉었다. 내내 괜찮은 척하고 있던 껍데기를 치워 버리고 쏟아낸 마음은 절절했다. 처음엔 진심을 전하면 다시 이어질 줄 알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른다. 진심을 전하는 것만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없다. 전화를 끊으려던 태준은 멈칫했다가 깊은 한숨을 뱉고 말았다.
― 이제 와서 그러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괜찮아질 줄 알고 어떻게 좀 버텨 보려고 했는데, 정말 이대로 있으면 죽을 거 같아요….”
한마디씩 말을 뱉을 때마다 사준은 깨달았다. 유약해 보이던 양진우는 유연한 거였다. 그 유연함으로 모든 상황을 버텨냈고 이겨낸 거다. 사준은 작게 흐느꼈다.
태준은 숨을 죽이고 전화기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사준의 목소리가 예상보다 훨씬 절실하게 느껴져 듣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팠다. 태준은 잠깐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는데?
“…뉴욕 갈래요.”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온 말에 태준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 * *
삼 개월 후.
진우가 미국으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COVID-19가 전 세계를 뒤덮을 조짐을 보였고, 현대 시대 전염병은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기 바빴다. 사람들은 모두 흐트러진 일상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 했고, 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근 진우는 이자벨의 로펌에서 법률 상담을 시작했다. 하고 싶지 않았는데 뉴욕에 도착한 날부터 한 달이 넘게 이어진 이자벨의 설득과 협박, 회유와 타협에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사무실에 출근은 했지만 고객과는 화상 채팅으로 상담을 진행했다.
“또 봐요.”
마지막 상담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 진우는 작게 입을 벌렸다.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한 눈이 도시를 하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난겨울 임재민의 가게에서 이사준을 데리고 돌아오던 쓸쓸한 밤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뉴욕의 교통 체증을 떠올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연말이 되면 들뜨는 건 한국뿐이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은 1년 내내 이 시기만 기다린 것처럼 들떠서 거리를 활보했다. 이 시국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근처에서 저녁 먹고 늦게 들어갈까.’
내리는 눈송이를 손으로 받으며 딴생각을 하던 진우는 정면을 바라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헛것이라도 보는 심정이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남자가, 있어도 안 되는 남자가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특유의 분위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진우가 도망치듯 몸을 뒤로 물린 순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우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눈을 둥글게 뜨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양진우 씨.”
선명하게 들린 이름 석 자에 그대로 발이 묶였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들린 이름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사준이 우연히 여기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해요.”
몇 개월 만에 나타나서 갑자기 꺼낸 말에 진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준은 마치 이 말을 하기 위해 몇천 마일을 날아온 사람처럼 굴었다. 진우는 넘어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채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사준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진우의 손목을 붙잡아 제 얼굴 위로 당겼다. 사준이 고개를 좀 더 숙이자 진우의 손이 머리칼을 건드렸다. 쓰다듬어 달라는 것처럼 사준이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자 진우가 잡힌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사준이 힘을 주는 게 더 빨랐다.
“할 수 있어요.”
“……?”
“지금이라면 보여줄 수 있어요.”
사준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양 변호사님 좋아하는 얼굴 지금은 보여줄 수 있어요.”
그는 마스크를 살짝 아래로 잡아당기고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감았던 눈을 떠서 진우를 바라봤다.
“떨어져 있으면 죽을 거 같아서, 이렇게 쫓아올 만큼.”
“…….”
“좋아해요.”
기대와 설렘, 초조함, 그러면서도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을 온전히 숨기지 못한 오묘한 감정이 사준의 얼굴 위에 아른거렸다. 그 모든 감정이 진우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사준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진우의 허리를 팔로 감아 잡아당겼다.
“잘할게요.”
“…….”
진우의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밀어내는 건 무리였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혀가 안 움직였다. 사준은 진우의 마스크를 잡아 내리더니 콧등에 제 콧등을 살짝 비비면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포기 안 한다고 했죠? 평생 쫓아다닐 거니까….”
말이 끝나기 전에 진우는 사준의 양 뺨을 감싸 당겨 입술을 겹쳤다. 빈틈없이 맞물리자 사준이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준은 진우를 꽉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강한 악력에 안정감이 밀려왔다.
* * *
“읏, 잠깐….”
진우의 목소리가 욕실 타일을 때리고 크게 울렸다. 조금 전까지는 눈이 내리는 거리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까운 호텔에 도착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4층까지 걸어 올라왔다. 그러는 내내 사준은 진우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것 같은 손의 온기는 보고 싶다는 어떤 말보다 더 절절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놓고 싶었는데 사준은 그럴 틈을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키스가 쏟아졌다. 입술을 물고 틈새로 파고든 혀는 입안 구석구석을 핥고 마음을 건드렸다.
사준은 못다 한 말을 키스로 대신하는 것처럼 진우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했다. 쏟아지는 키스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리던 진우가 간신히 씻고 싶다고 말했을 때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싶었더니 이번엔 몸이 뒤로 밀렸다.
사준이 당기는 방향에 따라 옷이 바닥에 떨어지며 허물처럼 흔적을 만들었다. 어느 순간 몸에는 거품이 잔뜩 묻었고, 욕실에는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했다.
“아, 흡….”
등 뒤에서 진우를 끌어안은 사준은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앞을 가볍게 훑어 올렸다. 오랜만에 자극받은 중심이 파르르 떨리면서 허리까지 진동했다. 그저 한번 손길을 받은 것뿐인데 싸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잠깐, 여기서는, 싫어….”
진우는 욕실 벽을 손바닥으로 짚은 채 사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품 묻은 몸이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려 해서 불안했다. 실상 사준이 팔로 허리를 단단히 감아쥐고 있어서 미끄러질 일이 없는 데도 불안했다.
“그만, 흣, 나가서….”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사정하듯 말하자 사준이 반걸음 정도 떨어지더니 진우의 몸에 샤워기로 물을 뿌려댔다. 거품이 사라지고 커다란 타올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진우가 몸에 묻은 물기를 닦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하자 사준이 진우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바닥에서 발이 떨어진 것에 놀란 진우가 사준의 어깨를 붙잡자 사준은 욕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물기는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욕실 밖으로 들려 나온 진우는 얼마 가지 않아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잠깐, 좀….”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고 푹 가라앉은 매트리스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진우가 중얼거렸지만 사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덮치듯 진우의 위로 올라왔다.
“하아, 이렇게 바로 만날 줄 알았으면 더 좋은 방 잡을 걸 그랬어요.”
“…….”
사준은 급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체취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몇 번의 심호흡을 반복하던 사준은 진우의 몸을 더듬었다.
손으로는 갈비뼈를 쓸어내리고 옆구리를 가볍게 주물렀고, 빗장뼈에 닿았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손과 입술을 이용해 어루만지듯이 움직이는 몸짓은 애무라기보다는 실체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사준의 입술이 배꼽 옆에 닿자 온몸에 달콤하게 퍼지는 감각에 진우가 바르작거렸다. 과한 자극이 아닌데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허리가 흔들렸다.
“잠깐만….”
진우는 사준의 머리를 가볍게 밀어냈다.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 정신없이 몰아쳐서 벌써 힘이 들었다. 자꾸만 밀어내는 손길에 사준은 고개를 들어 진우를 바라봤다. 정말 싫다면 안 하겠지만, 속으로는 벌써 열두 번도 더 진우를 탐하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진우가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입국 힘들지 않았어요?”
진우는 궁금한 것 중 가장 표면적인 걸 입에 담았다. 팬데믹이 선언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국가 간 이동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만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준이 어떻게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출장도 보류하는 마당에 휴가를 내고 오기에도 무리가 있을 것이었다. 사준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진우의 배꼽을 혀로 할짝댔다.
“궁금해요?”
“당연하죠, 지금 상황에서….”
“엄청 힘들게 왔어요. 팀장님한테 욕은 바가지로 먹었고 팀원들은 나한테 사선을 넘는 거라고 하던데요.”
사선이라…. 확실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뉴욕의 상황은 순위권에 들 정도로 좋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와야 했어요.”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벌려 허벅지에 입술을 문지르며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아니, 잠깐만…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요.”
진우가 혼란스러운 듯 사준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허벅지 안쪽 여린 살이 빨리자 허리에 힘이 빠졌다.
“읏, 이 기자님…!”
그만하라는 듯 살짝 언성을 높이자 사준이 몸을 일으켜 세워 진우를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새까만 눈동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뜨거운 무언가로 일렁이고 있었다.
진우는 사준의 시선에 사로잡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섞은 적도 많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한 적도 많지만,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양 변호사님이 물어보는 거 다 대답할게요.”
사준은 말을 하면서 틈틈이 진우의 허벅지에 버드 키스를 날렸다. 쉼표와 쉼표 사이에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촉, 촉 소리가 고막을 야릇하게 자극했다.
“거짓말도 안 할 거고, 숨기는 것도 없이 다 말할게요.”
귀여운 버드 키스를 날리던 사준은 보란 듯이 혀를 빼내 허벅지를 길게 핥아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랑하게 해줘요.”
사준을 밀어내려던 진우의 손에 절로 힘이 빠지고 말았다. 눈치 빠르고 기분 좋게 할 말은 잘하던 이사준이지만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일체 입에 담지 않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몸을 섞는 행위를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고 표현하는 것에 진우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준은 제 얼굴에 닿아 있는 진우의 손을 입가로 갖고 가 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혀를 내밀어 핥아 올렸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자 사준이 싱긋 웃었다.
“확인하고 싶어요.”
“…….”
“양진우 씨랑 이어지고 싶어.”
사준은 지금 하려는 행위가 단순히 성욕을 배출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확실히 표현했다. 진우는 혀끝으로 입천장을 꾹꾹 눌렀다. 단순히 성욕을 해소하러 오기에는 이사준이 너무 멀리 오긴 했다. 결국 진우는 사준을 밀어내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응? 하게 해줘요.”
사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르더니 진우의 중심을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욕실에서 달아올랐던 성기는 또 한 번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지자 한층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성감에 괜히 부끄러운 기분까지 들어 진우가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사준이 고개를 숙여 성기를 덥석 입에 물었다.
“흣, 거기, 그렇게….”
축축한 입안 점막에 감싸이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 살아나는 것처럼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저 입에 문 것뿐인데 쌀 것 같아 진우는 사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 하지, 마….”
입으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떨어지면 아쉬울 것 같아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사준이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귀두부터 뿌리까지 빨아 주길 몇 번, 진우는 더 참지 못하고 몸을 파르르 떨며 성기 끝에 고인 정액을 왈칵 쏟아냈다.
단숨에 절정에 치달은 탓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도 쉽게 사정한 것이 민망해 진우가 상체를 일으켰다.
“미, 안, 해요.”
입에 싼 것에 대해 급하게 사과의 말을 뱉는데 다리가 들리면서 몸이 휙 밀렸다. 등이 매트리스에 닿았고 무릎이 접히면서 엉덩이가 위로 솟아올랐다.
“이 기자님, 흐앗…!”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엉덩이로 미지근한 액이 뚝뚝 떨어졌다. 진우는 제 아래를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사준은 입에 머금고 있던 정액을 진우의 엉덩이 사이로 흘리듯 뱉어내고는 손가락으로 은밀한 부위를 문질렀다.
“아, 흐읍….”
미끌거리는 정액이 벌어진 구멍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감각에 진우가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싼 것이 다시 엉덩이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이상했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협탁 위에 있던 콘돔 포일을 뜯어내고 윤활액을 부었다.
“흣…!”
아까와 다르게 차가운 점성을 가진 액에 진우가 허리를 비틀었지만 사준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괜찮아요, 아프게 안 할게요.”
사준은 달콤한 목소리로 달래면서 다른 손으로는 진우의 성기를 주물렀다.
“아, 하윽, 흡….”
엉덩이가 벌어지며 들어온 이물감에 진우는 천장을 향해 밭은 숨을 내쉬었다.
“힘들어요?”
사준이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어도 너무 오랜만이었기에 힘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이물감이 몹시도 어색했다.
“이상, 해서….”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진우를 보고 사준은 입술을 짓씹으며 손가락으로 안쪽을 건드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꾸물꾸물 움직이면서 꽉꽉 조여대기 바빴다. 그런 생각할 주제가 안 되는 건 아는데, 마음속에서는 진우가 오랜만이라는 사실이 기뻐서 주체가 안 됐다.
설령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고 해도 아무 말도 못 할 상황인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수 있는 걸까. 아무래도 소유욕과 독점욕은 애정과 비례하는 것 같다.
사준은 양진우의 이런 모습을 봤을 과거의 사람들을 향해 들리지 않을 심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진우의 안을 자극하는 손가락은 시종일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엉덩이 안쪽이 간지러울 정도로 풀어주자 뻑뻑한 이물감에 힘을 잃었던 진우의 성기가 다시 꼿꼿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사준의 정성스러운 애무에 통증이 대부분이었던 감각이 점점 사그라지고 안쪽에서 미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진우는 침대 시트를 바투 쥐고는 허리를 움츠렸다 펴길 반복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에 아랫배가 수런거리고 머리가 어질거렸다.
진우는 숨을 몰아쉬며 사준의 다리 사이를 힐긋 쳐다봤다. 이미 터질 것처럼 발기한 성기는 배꼽 아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흉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성기를 보며 진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빨아 줄까요?”
진우가 눈동자를 힐긋 아래로 굴리며 묻자 사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은 넣고 싶어요.”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던 손가락을 쑥 빼내고는 새로운 콘돔을 뜯더니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손으로 가볍게 훑어 올렸다. 그리고는 귀두에 콘돔을 걸어 돌돌 말린 것을 아래로 풀어 내렸다.
“하아, 그냥 하고 싶은데, 아직 뻑뻑할 거 같으니까….”
더 풀어줄 여유는 없고 그냥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으니 콘돔 윤활액의 도움이라도 받겠다는 말이 몹시 야하게 들렸다.
사준은 진우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는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구멍이 빠끔 벌어지고 뜨거운 열기 끝이 입구에 닿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진우가 눈동자를 빙빙 굴리자 사준이 피식 웃더니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두꺼운 귀두가 몸속으로 들어오자 진우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손가락으로 충분히 풀어 놓은 것 같은데 부족했던 건지 아래가 한계까지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 하으….”
진우가 앓는 소리를 내듯 숨을 몰아쉬자 사준이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힘 더 빼봐요, 내 거 다 잊어버렸나 보네.”
다정하게 속삭인 음담에 어이가 없어 진우가 짧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 틈을 노린 것처럼 사준의 성기가 쑥 밀려 들어왔다. 단번에 반 이상 밀어 넣은 사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하, 진짜, 너무 조여요.”
이러다가 좆이 끊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어 사준이 중얼거리자 진우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장이 위로 밀리면서 아랫배가 가득 차오른 느낌을 견디기 어려웠다.
헐떡이던 진우는 손을 아래로 내려 제 아랫배를 슬그머니 문질렀다.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것뿐인데 사준이 보기에는 유혹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사준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허리를 더 아래로 내리며 성기를 깊게 밀어 넣었다. 한 번에 처박고 막무가내로 흔들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섹스가 오랜만이라는 티를 내는 양진우를 또 볼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이건 또 이것대로 너무 좋았다.
“다, 들어 왔, 어…?”
띄엄띄엄 묻는 말에 사준은 진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부드러운 음색이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진우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오랜만이어서 힘든 것인지 사준이 커서 힘든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준이 조심스럽게 밀어붙이자 꽉 다물어진 안쪽이 벌어지면서 굵은 성기가 깊게 박혀 들었다.
“으, 하아읏….”
사준의 고환이 진우의 엉덩이 사이를 짓누르듯이 비벼댔다. 사준은 진우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치고는 얼굴을 바싹 가까이한 채 속살거렸다.
“나 봐요.”
진우는 언제 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눈을 천천히 떴다. 촉촉하게 젖은 시야에 사준의 잘생긴 얼굴이 감격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하아, 진짜, 너무, 좋아요….”
짧은 감탄은 꾸밈이 하나도 없었다. 솔직함이 주는 파괴력에 놀란 진우가 아래를 꽉 조이며 시선을 피하자 사준이 진우의 턱을 붙잡아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웠어요.”
“…….”
흔들림 없는 시선에 붙잡힌 진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양진우 씨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요.”
사준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리를 가볍게 흔들자 몸속이 진동하며 찌릿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어딘가로 떠밀려 갈 것 같아 진우는 이불을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사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물기가 덜 마른 피부 위로 사준의 인내심을 대변하듯 솟아난 땀 때문에 피부가 미끄러웠다. 진우는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사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몸이 밀착하고 한층 더 안정된 자세가 되자 사준이 깊게 박아 넣었던 성기를 입구 근처까지 쭉 빼냈다.
“나는 당신이 좋은 거예요. 너무 늦어서….”
사준은 말을 마치지 않고 허리 짓을 시작했다. 퍽, 마침표 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준의 귀두가 진우의 전립선을 세게 짓눌렀다.
“아, 하읏…!”
참지 못한 채 교성을 흘려보내자 사준이 같은 부분을 집요하게 찔러댔다. 찌걱찌걱, 윤활액의 도움으로 찌걱거리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울려댔다.
“으, 흐읏.”
“이제 절대로 놓지 않을 거니까, 놔 주지도 않을 거니까….”
사준은 진우가 흘리는 높지 않은 교성 사이 사이마다 말을 뱉었다.
“아, 하응, 쌀, 거 같아….”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면서 절정이 다가왔다. 몸속에서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팡팡 튀어 오르고 눈앞이 번쩍거렸다. 진우는 눈까지 풀어져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 팔과 다리로 사준을 옭아맸다.
“믿어요.”
“흣….”
“나 믿어줘요.”
결심한 듯 흘린 말에 진우가 참지 못하고 사정하자 풀어진 점막이 차지게 달라붙으며 사준을 자극했다.
“하, 씨, 더 멋있게 하고 싶은데, 진짜….”
사준은 못 참겠다는 듯이 허리를 빠르게 치댔다. 철퍽, 철퍽, 살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다가 일순간 사준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탁 풀어졌다.
“하아….”
사준은 몸을 늘어트리며 진우를 꽉 끌어안았다. 긴 시간을 날아와 간신히 손에 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만 솔직하게, 조금만 더 영리하게 굴었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아까웠고 아쉬웠다. 진우는 손을 움직여 사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온전히 마주 앉은 자세에 심장도 맞닿아서 쿵쾅거렸다.
“…한 번 더 해요.”
사준이 진우의 안에서 느릿하게 빠져나가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 * *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렸다. 진우는 몸을 일으켜서 부스스한 정신을 추스르며 침대 헤드에 있는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윙―.
작은 기계음과 함께 블라인드가 위로 올라가자 창밖의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내리는 눈이 보였다. 밤새 내릴 작정인지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하얗게 내리는 눈 때문에 하늘이 밝았고, 그 희미한 빛 덕에 형체만 보이던 방 안의 풍경이 점점 선명해졌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봤다. 커다란 침대가 방 대부분을 차지했고 작은 티 테이블 옆에 커다란 캐리어가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그냥 보이는 호텔에 끌고 온 건 줄 알았는데 사준이 묵는 숙소였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호텔에 들어올 때 체크인을 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덩달아 떠올랐다.
진우는 눈을 깜박이며 바로 옆에서 잠든 사준을 바라봤다. 코앞에 있는데 지금도 현실감이 없어서, 진우는 사준의 코끝에 손가락을 슬쩍 갖다 댔다. 쌔근거리는 고른 숨결이 닿자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진우는 손을 뻗어 사준의 앞머리를 건드려 봤다. 만질 수 있는, 숨 쉬는 사람이 분명한데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진우는 사준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다 배시시 웃고 말았다. 발바닥부터 간질거리는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꼬물거리는데 두꺼운 팔이 허리를 감아 당기는 게 느껴졌다.
“윽.”
반쯤 강제로 침대에 누운 진우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파요?”
사준이 눈을 번쩍 뜨고는 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조금…?”
진우는 허리에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이사준은 다정한 만큼 끈질겼다. 보고 싶었던 마음이나 그리워했던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어서, 진우는 허리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고 말았다.
“내가 깨운 거예요?”
진우가 묻자 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가로 저었다.
“깨워도 되니까, 가지 말고 양진우 씨도 더 자요.”
사준은 진우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품속에 당겨 안았다. 진우는 단단한 사준의 가슴팍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막상 이렇게 눈을 뜨고 대화하자 비로소 현실감이 든다.
사준의 기세에 물 흐르듯이 흘려 꼭꼭 닫아놓았던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지만 슬슬 겁이 났다. 이대로 이렇게 다시 만나서 시작해도 되는 걸까? 근거리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데 원거리 연애를 한다고? 생각만으로도 어두운 미래였다. 게다가 사랑에 있어서 진우는 여전히 두려웠다.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타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에, 이대로 사준에게 휩쓸려가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사준은 눈을 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진우를 흘긋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 몇십만 명씩 죽는 거 보면서 생각한 건데요.”
진우가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방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보도국은 바빴겠네요.”
“한가하진 않았죠.”
사실이라는 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어쩐지 씁쓸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아마 언론은 언론대로 바빴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생활의 중심이 바뀌는 마당이니 정치인의 학벌 세탁, 재벌의 뇌물, 연예인의 성 추문 이런 것보다는 백신이나 감염 속도 같은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타인과 접촉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기자들을 환영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문득 진우는 사준이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말이죠.”
“…….”
“내가 그 뉴스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하나였어요.”
“뭐요?”
“병에 걸리면 걸리는 건데, 그 전에 양진우 씨는 보고 죽어야겠더라고요.”
“…….”
“사실은 양진우 씨랑 같이 살면 더 좋겠지만요.”
진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는 언제 가는데요?”
진우는 사준의 대답을 짐작했다. 휴가나 출장이라면 길어야 일주일 아닐까? 아니, 근데 이 시국에 출장이라니 장태준 진짜 미쳤나?
“안 가요.”
진우가 속으로 장태준을 욕하려고 하는 순간 사준이 툭 말을 던졌다.
“일시적으로 온 거 아니에요.”
진우는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사준을 올려다봤다.
“특파원.”
“뭐요…?!”
진우는 벙찐 얼굴로 되물으면서도 태준이 예전에 뉴욕에서 특파원을 했었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렸다.
“팬데믹 이후에 원래 가려던 사람이 안 가겠다고 해서 나한테 기회가 왔죠. 팀장님이 밀어 붙여준 것도 있고. 그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왔겠지만.”
진우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사준을 바라봤다.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요. 싫으면 여기 계속 있어도 되고.”
사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는 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은 평생 내 옆에 있어 줘요. 아니, 옆에 있게 해줘요.”
진우는 어느새 습기가 차올라 그렁그렁해진 눈동자로 사준을 바라봤다.
“당장 사랑해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밀어내지는 말아요. 내가 증명해 보인다고 했잖아요.”
“…….”
사준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진우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촉,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사준의 다리가 진우의 다리 사이로 들어오며 두 사람의 다리가 야하게 엉켰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몸이 따끈하게 달궈진 이불 속에서 부딪치자 몸과 마음이 다 따끈따끈했다.
이렇게 따뜻하면 이불 속에서 절대 못 나가는 게 아닐까?
진우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펑펑 쏟아지는 눈 때문에 밖이 너무 추워 보였지만, 사준과 함께하는 이불 속은 따뜻했다.
이번엔 정말로 봄 같은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