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타지아-20화 (20/236)

< -- ... 졸도한다.-- >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에구구'머리야.'에에에엑'그러나 잠시 후 나를 덮친 기억들로 나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술을 그렇게 마셨으면 차라리 필름이라도 끊어지던지 이건 하나도 빠짐없이 어제의 일이 생각이 나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우선 오늘은 환타지아로 출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폰을 들었다.

전화를 막 하려던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28 쪽20

"두르르르 두르르르"

어제 지명 손님이 있을 때 진동으로 해 놓고는 그냥 놔 둔 탓에 손을 울리는 폰의 진동에 놀라 떨어트릴 뻔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번호를 확인하니 환타지아였다. 어차피 전화를 하려고 하던 찰나에 잘 됐다싶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영일입니다."

[괜찮아? 혹시 지금 바로 출근할 수 있어요?]

"네?"

[지금 원 선생이 병원에 실려 가서 영일군이 와서 카운터 좀 봐 줬으면 하는데 아니면 병원으로 가든지]

"우선 출근하겠습니다."

나는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환타지아로 향했다.

택시의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기대어 있던 내게 어제의 일들이 하나 둘 씩 떠오르기 시작했고 내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돼지껍데기집에서 넘버투와 같이 폭탄주를 연거푸 7잔을 마시고 나니 머리가 어찔어찔 했다. 그래도 질쏘냐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다시 잔을 들기 시작하고 몇 잔을 더 먹었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것이 내 주량을 심히 초과한 상태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나마 1차인 돼지 껍데기 집에서는 그렇게 조용하게 지나갔지만 2차로 노래주점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노래주점의 가장 큰 방을 빌렸지만 인원이 워낙 많다보니 의자를 몇 개 더 넣어 거의 구겨져 앉아야만 했다. 80명이 되는 인원이 기껏해야 6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에 구겨져 들어갔으니 그 북적거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주점에 들어가서도 또 술을 나오자 열심히 부어라 마셔라하던 나는 사람들을 하나씩 붙들고 술을 먹이기 시작했다. 잔에 따라서 주는 것도 아니고 병째 들고 쫓아다니며 억지로 술을 먹이기 시작하자 나에게 쫓긴 사람들이 한쪽 구석으로 몰려 있게 되었다.

이미 취기가 올라 정신이 없던 나는 그런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후끈한 열기에 점점 방안은 더워졌고 그러던 중 갑자기 내가 셔츠를 옆으로 벌리며 뜯어버렸다.

단추가 사방으로 날렸고 그렇게 뜯어서 벌린 옷을 벗어 바닥에 패대기친 나는 곧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광란을 춤을 추자 사람들은 미친놈 쳐다보듯이 날 쳐다봤지만 나는 그런 관중이라도 있는 것에 흥분해서 더 심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흥에 겨운 내가 바지를 벗으려고 하자 놀란 넘버투가 무리에서 튀어 나와 날 붙잡았다.

"영일아 여기까지 더 이상 하면 너 분명히 후회한다."

"무슨 후회 이거 놔요."

나는 넘버투의 손을 마구 뿌리치며 바지의 지퍼까지 내렸고 팬티를 반쯤 내렸다. 그런 나를 떡대들이 군침을 흘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에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최영일 그러지 말고 나랑 술이나 마시자."

결국 넘버투에게 이끌려 소파에 앉혀진 나는 넘버투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그동안 겪었던 손님들에게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내 동정을 순자할매에게 뺏겼다는 이야기에서 넘버투는 내게 술을 뿜어내었고 나는 얼굴에 묻은 술을 뚝뚝 흘린 채 넘버투를 노려보았고 놀란 넘버투가 얼른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술을 권한 넘버투에게 억지로 병째 술을 마시게 했고 나중에 넘버투가 테이블로 쓰러져 버렸고 나는 다음 타겟으로 넘버쓰리를 노렸다. 별로 나와 마주친 적이 없던 넘버쓰리였지만 환타지아의 대가리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을 타켓으로 하는 나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이기지 못해 결국 테이블로 쓰러지고 그리고 또 그 다음 그 다음 사람들이 나를 상대했다.

돼지껍데기의 위력인지 술을 아무리 먹어도 쓰러지지 않는 나를 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지쳐 떨어져 나갔고 내게 술을 그만 마시자고 하자 같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바지를 벗고 춤을 추겠다는 엄포를 놓아서 놀란 사람들이 다시금 날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혔고 그런 와중에도 나는 틈을 노려 바지를 벗어 던져 버리고 팬티 차림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결국엔 노래주점에서 3명의 견습생에게 끌려나와 억지로 집으로 돌려보내진 후에도 같이 집에 들어왔던 견습생들을 놓아주지 않았고 거의 새벽까지 술을 사오라며 땡깡을 부렸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잠이 든 것인지 그리고 그런 나를 두고 술이 취한 채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 견습생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난동을 피웠는데도 아침에 눈이 떠진 게 신기했다. 그리고 나에게 전화를 건 원장에게도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하긴 어제 원장은 노래주점에서 노래 한곡만을 부르고는 사라져 버려서 어제 노래주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쯤 환타지아의 대가리라고 불리는 몇 몇 인물들은 아마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것이고 거기다 아까 넘버투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었나?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를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환타지아 앞에서 멈춘 택시기사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요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려 환타지아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어제 있었던 일 자체를 필름이 끊어져 기억이 안 나는 척 하기로 결심했다.

"영일군 빨리 왔네. 안 그래도 지금 난리야 다들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저 난리들인지? 영일군은 괜찮은가?"

"네 전 괜찮습니다."

그래 나도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정말 돼지껍데기의 위력인가? 다음부터는 술 먹기 전에 항상 돼지껍데기로 배를 채워야겠다.

"우선 원 선생은 병원으로 갔고 지금 구선생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네. 아무래도 오늘 예약손님들에게 내가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영일군이 카운터 좀 지켜줘."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내가 카운터로 다가가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사무직원과 환타지아 입구에 서 있던 떡대 다섯 명이 움찔거리며 옆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에이씨'다들 기억하는 거야? 역시 돼지껍데기는 나한테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닌 거야?

내 얼굴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다들 얼굴이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오전은 어떻게든 지나갔다. 원장이 몇 번이나 오신 손님들을 돌려보내야만 했고 성격에 맞지 않게 싫은 소리 하느라 힘이 드는지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영일군도 힘들지요? 조금만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좀 쉴 수 있을 거야."

'으헉'설마 나 때문에... 견습이 몇 명 결근을 해서 빈 방이 많다는 원장의 말에 나는 속을 뜨끔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각 방에서 견습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나왔다. 아마도 술을 먹고 속이 불편한 견습생들이 다들 밖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어쩌지?'

어쩌긴 어째 쌩까야지.

나는 가능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카운터에 서 있었다. 나에게 비난과 원망을 할거라고 생각했던 무리들은 오히려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옆으로 피하고 있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술 좀 먹이고 더워서 옷 좀 벗고 춤 춘 것 밖에 없었는데 그게 사람을 피할 만큼의 일이었나?

나는 내심 섭섭했지만 이미 필름이 끊겨져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 터라 갑자기 기억이 난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견습생 무리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곧 뒤로 떡대들의 무리가 다가왔고 그들은 견습생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우엑'뭐야? 지금 나한테 윙크한 거야? 고개를 돌리다 시선이 마주친 떡대가 나한테 윙크를 한 듯 보였다. 설마 내가 잘 못봤겠지. 하지만 잠시 후 또 시선이 마주친 떡대는 이번에는 양쪽 눈을 번갈아 가며 윙크를 했다.

'우엑'점심 먹으러 가야하는데 뭐야?

원장이 카운터로 나왔다.

"내가 지금 나갈만한 상황이 안 되니까 다들 먼저 점심 먹고 와 해장국 먹으면 되겠네."

안 그래도 쓰린 속을 해장국으로 풀어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다들 해장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장국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연인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내 맞은편에 20번 방 형이 앉아 있었다.

"너 정말 순자 할매한테 동정을 빼앗겼냐?"

"푸악"

해장국을 삼키고 있던 내 입에서 역류한 해장국이 내 앞에 앉아 있던 20번 방 형과 그 옆에 3번방 형의 얼굴로 날아갔다.

"으악 더럽게 뭐하는 거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20번 방과 3번방 형은 세수를 한다며 화장실로 달려갔고 전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내 얼굴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뭐해요? 다들 밥 안 먹어요. 해장국 식겠네."

나는 한마디 하고 나서 얼른 숟가락을 들어 해장국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수하러 간 20번 방과 3번 방 형이 돌아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환타지아로 돌아와 버렸다.'으아'어떻게 하지 내입으로 다 불었는데 이제 와서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확 그냥 내일부터 잠수를 타 버려... 그렇지만 잠수를 타면 백진아와 그 외 기타 등등과 함께 돈까지 포기해야 하는데 으악 진짜 미치겠다.

"그게 형들이 화장실에 있어서."

이제 이렇게 둘러대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둘러대는 게 낫지.

그냥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듯 돌아서는 20번방 형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괜히 고민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다시 돌아선 20번 방 형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씨'가던 길 계속 가지 뭘 어쩌려고 다시 오는 거야?

"영일아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정말 순자할매한테 동정 뺏긴 거야?"

"아니거든요."

"그럼 그 소린 왜 나왔대?"

"그건 나도 모르죠. 그리고 전 어제 필름이 끊기는 바람에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그래? 너 괜히 둘러대지 말고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건데."

"그러니까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필름 끊겨서 기억이 안 난다면서 네가 그 말을 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아씨'뭐라고 대답해 이렇게 나오면...

"그게 사실이 아니니까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거죠."

나는 계속해서 추궁하는 20번 방 형에게 나는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질렀고 결국 너무 혈압을 올린 탓인지 아니면 어제의 과음 탓인지 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뒤로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원장 방 소파에 앉아 있었고 내 옆에는 얼굴이 누렇게 뜬 넘버쓰리가 널부러져 있었다.

'헉'어떻게 사람이 하루 만에 저런 몰골이 될 수 있지마치 어제와 다른 사람인 듯한 그 모습에 놀란 내가 넘버쓰리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소파의 끝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잠시 후 원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영일군 정신이 들어?"

"아 네."

"다행이야. 그러게 왜 그리 혈압을 올리고 그래. 그냥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하면 될 일이지."

"그게 아니라는데 자꾸 맞다고 하니까."

"그래 알았으니 그만하고 이제 영업 끝났으니 주말 동안 푹 쉬고 월요일날 보자. 혹시 집에 혼자 못 가겠으면 데려다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퇴근을 하려던 것인지 아니면 나를 기다렸던 것인지 20번 방 형이 카운터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야 괜찮냐?"

"괜찮습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야 삐졌냐? 뭘 그런 걸 가지고 삐지고 그러냐? 그냥 웃자고 한 소리인데,"

"형이 웃자고 한 소리에 전 뒤로 넘어 갔습니다."

"그래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까지 그 말을 싫어 할 줄 몰랐어."

"형은 그런 말 들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하긴 나도 싫겠다. 차라리 남자랑 했으면 했지 순자할매랑은 진짜 싫다."

'컥'뭐라고? 차라리 남자랑 하는 게 낫다고... 그럼 순자할매랑 한 나는 뭐야?

순간 기분이 더 팍 상한 나는 뒤따라오는 20번 방 형을 무시하고 앞으로 척척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내 염장을 지르기로 결심한 것인지 환타지아를 나서는 형에게 형의 여자친구가 달려와 안겼다.

"어젠 회식이라고 안 된다고 하고 오늘은 또 뭐야?"

"연지야 너 여기까지 온 거야?"

"오빠 보고 싶어서 왔어."

"그래 그럼 너도 같이 가자 나 영일이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그러거든."

"그래요."

'아씨'싫다고 좀 그만 가라 너희 둘딱 붙어서 무슨 사람 염장을 지르려고 작심한 것인지 따라오는 두 사람을 나는 노려보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두 사람은 내 시선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혼자 갈 수 있다고요."

"내가 혼자 못 보내 그러니 데려다 줄게."

그러면서 억지로 따라오는 커플을 달고 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도 희희낙락하는 둘을 보며 나는 이를 갈고 있었고 잠시 후 둘에게 한방 먹일 멋진 방법이 떠올랐고 곧 나는 갈던 이에 힘을 풀었다.

버스에서 내려 원룸으로 가기 위한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 다다른 나는 뒤따라오던 커플을 돌아보았다. 형은 여자친구의 허리에 한 손을 두르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연신 여자친구의 손을 더듬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 연지씨 젖가슴 사이에 있는 작은 점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요. 아 참 그것보다 안쪽 허벅지 쪽에 있는 점이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형 내일 봐요."

나는 그 순간 젖 먹을 힘을 다해 원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 영일이 너 죽었어. 너 거기 서."

"오빠 그만하고 얼른 가자."

내가 달리는 뒤로 형의 성난 고함소리와 함께 형을 말리는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 나가 원룸으로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볼 일 없고 월요일엔 학교를 다녀와야 해서 하루 환타지아를 빠질 생각이라 한 삼일정도 안 보면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아 있겠지라고 생각한 나는 달려오느라 가빠진 숨을 진정시키며 침대에 엎드렸다.

"두르르르르 두르르르르"

'아씨'진동을 해 놨던 폰이 뒷주머니에서 울리자 엉덩이가 간질거렸다. 한손으로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폰을 꺼낸 나는 발신자 확인도 안하고 폰을 받았다.

"영일이냐? 여기 00병원 1201호인데 매운 떡볶이 좀 사와라."

"네?"

"한 번에 딱딱 못 알아 듣냐? 떡볶이 좀 사오라고. 병원 밥 싱거워서 못 먹겠다."

"저 지금 집인데요."

"난 지난 번 네가 입원했을 때 같이 있어줬다."

"아 네 지금 갈게요."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넘버투의 날이 선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원룸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병원근처의 매운 떡볶이집에 들어가서 지난 번 넘버투가 사왔던 메뉴인 떡볶이랑 순대랑 튀김을 사들고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지만 내가 도착한 병원에선 이미 도착해 있던 환타지아 무리들로 시끌벅적했고 내가 병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병실 안에 적막이 깔렸다.

나를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숨기며 한쪽으로 피해가는 무리들을 보며 나는 넘버투에게로 다가갔다. 오히려 넘버투는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대하고 있어서 역시 대가리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잠시 후 나는 넘버투가 태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넘버투에게는 돼지껍데기의 효력이 없었던 것인지 돼지껍데기 집에서 나와 폭탄주를 연거푸 7잔 마시고 난 이후부터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지고 없었던 것이다. '이런'이럴 줄 알았으면 순자할매와의 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하는 건데... 나는 아무래도 넘버투가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당사자는 아무 기억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의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우선은 나한테 좋은 상황이라고 봐야겠지.

술을 마시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인지 내가 병실로 들어오고 잠시 후 씩씩 거리며 간호사가 들이닥쳤지만 곧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고 있었고 심지어는 술병조차 보이지 않는 병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갔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니 왜? 너 여기서 자."

"왜요?"

"나도 너 지난번 아플 때 옆에서 잤거든 네가 입원실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밤에는 같이 있어주지 못했지만 만약 네가 안 쫓겨났으면 밤샘도 불사하려고 했어."

'내가 자라고 했던 것도 아니 잖아요'라는 말을 억지로 입안으로 삼키며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야 어디 앉아 여긴 환자자리야"

그렇게 말하며 내 엉덩이를 발로 밀어내는 넘버투를 한번 노려봐 주고는 침대 옆의 벽에 기대섰다. 환타지아에서 몰려온 무리들 덕에 제대로 앉을 만한 공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성이냐? 나 입원했는데 넌 병원에도 안 와보냐? 의리 없게 말이야. 지금 빨리 튀어와. 그래 여자친구도 데리고 와."

'헉

'설마 지금 20번 방 형을 부른 거야?

나는 넘버투의 통화내용을 고스란히 들으며 어떻게 하면 20번 방 형이랑 마주치지 않고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나마자 조금 전 있었던 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을 텐데...'

아씨'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염장을 질러도 좀만 참을 걸 괜히 벌집을 쑤셔가지고는 결국 피하지 못하고 벌에 쏘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지?'

"선생님 다른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네가 다 사왔네. 먹고 싶었던 거"

"그래도 혹시 또 모르잖아요. 생각나는 거 없으세요?"

"그렇게 말하니 생각 나는 게 있기는 한데."

"네 말씀하세요. 제가 사가지고 올게요."

"그럼 냉면 한 그릇만 사와라."

"냉면요?"

'임신 하셨어요?'

라는 말이 바로 입술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겨우 꿀떡 삼켰다. 이 밤에 어딜 가서 냉면을 사오냐고?

"왜 싫어?"

"아뇨 사오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그 말을 남겨 놓은 채 얼른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냉면을 사기 위해 온 시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냉면을 사지 못한 나는 요즘 유명한 봉지냉면을 사들고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것도 냉면이긴 하니까 혹시나 싶어서 물냉면 비빔냉면 두 종류를 모두 사들고 병원에 도착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20번 방 형과 딱 마주치고 말았고 나는 들고 있던 냉면 두 봉지를 형 얼굴로 던져 버리고 부리나케 도망을 치고 말았다.

"헉 헉 야 헉 너 헉 거기 헉 안 서."

"헥 헥 형이라면 헥 서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숨을 헐떡거리며 온 시내를 누비고 다니며 첩보영화를 한판 찍었고 결국 형 손에 붙잡힌 나는 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진 형과 함께 바닥을 뒹굴어야했다.

"헉 헉 헉 헉 헉"

"헥 헥 헥 헥 헥"

한참이나 헐떡인 후에 겨우 숨을 돌린 형이 나한테 말했다.

"야 너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두고 보자."

"형 두고 보자는 사람이 치고 무서운 사람 없대요."

"뭐 그래서 지금 죽어보고 싶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데 형 아까 혹시 제가 던진 냉면 가지고 계세요?"

"내가 그걸 왜 가지고 있어."

"아씨 그거 원선생님이 사오라고 하신 건데."

"그래서?"

"뭐 다시 사가야 한다고요."

그렇게 그날 밤 20번 방 형과 나는 땅바닥에 누워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만담을 즐기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연신 진동으로 울어대는 폰의 흔들림도 느끼지 못한 채 말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