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타지아-136화 (136/236)

< -- 퇴원 그 후... -- >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넘버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미용실을 열어서 환타지아를 나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이번 주에 형이 없이 일을 해보니까 알겠는데 나는 원장을 할 만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냥 딱 접기로 했다. 마누라는 미용실 열어서 원장을 하라는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잖아."

뭐야?

평소에는 전혀 진지한 면을 볼 수 없던 인간이 심지어는 대회준비하면서도 나를 어떻게 골려먹을까 생각하던 사람인데... 그래도 자기 미래는 생각 하나봐.

미용실을 하나 열 정도면... 우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단정 지으세요. 제가 보기엔 원선생님 카리스마 있으시고 실력도 있으셔서 원장노릇도 잘 하실 것 같은데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긴 한데 내가 재미가 없더라고. 헤어디자이너는 재미있는데 원장은 재미가 없어. 그냥 형 밑에서 이렇게 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형이 날 내 쫓을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19 쪽145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그래야겠지?"

넘버투는 네 번째 소주병을 비워내고 다시 소주를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불렀다.

"그만 드세요. 그러다가 내일 출근 못하시면 어떻게 해요?"

"내 주량이 소주 다섯 병이야. 딱 다섯 병만 마시고 그만 마셔야지."

다시 소주 한 병을 주문한 넘버투가 다섯병째 소주를 다 마시고 나서 폰을 꺼내 들었다.

"난데 여기 환타지아 앞으로 데리러 와. 응 술 좀 마셨어.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은 넘버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네"

비틀거리는 넘버투를 부축해서 환타지아 앞으로 가자 넘버투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일씨 고마워. 이만 가 봐도 돼."

내게서 넘버투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몸에 기대게 한 넘버투의 부인이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나도 꾸벅 인사를 했다. 넘버투를 부축해서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 부부를 한참동안이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던 넘버투도 미용실을 열 생각을 했다니... 결혼을 해서 철이 든 건가?

넘버투의 고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내가 지금 넘버투에게 까이고 원장의 눈치를 보면서 환타지아에 남아 있는 이유가 결국은 바로 제 2의 환타지아를 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견습생 일은 적성에 맞지만 나도 넘버투처럼 원장일이 재미가 없으면 어쩌지?

아직 까마득히 먼 훗날의 일을 걱정하느라 나는 그날밤 잠을 설쳐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자 스스로 생각해서 어이가 없어졌다. 원장일이 재미가 없긴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사실 나한테는 딱이고도 남는 일인데 말이다.

대학에 원서를 넣을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나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헤어디자인학과가 있는지조차 몰랐었다. 그러던 내가 헤어디자인학과에 원서를 넣고 1학년 1학기 동안 학교를 겨우 다니고 있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미용에 대한 이론을 배우려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고 힘이 들었었다. 거기다 나와 같이 강의를 듣고 있는 동기들 대부분은 그런 내용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어서 교수가 대충 설명을 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특강을 하러 나온 원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날로부터 미용에 대한 내 생각 자체가 바뀌었던 것이었다.

물론 환타지아에 와서 한동안은 미용도 아닌 이상한 기술을 배우느라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무사히 끝내고 나서 정상적인 근무를 하게 되면서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 과정에 미용과는 관계없는 상황들도 많이 벌어지기도 하고 인생 공부도 하고 미용보다는 다른 부분의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미용실 원장이 적성이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을 한 나 자신은 뭐야?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바라마지 않는 원장이 되려면 우선 낼 모레로 닥친 기말고사를 잘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악'미친 거야. 어제 공부는 안하고 엉뚱한 고민을 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하루나 날려 버리다니...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고 놀란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후다닥 옥탑방을 뛰쳐나갔다.

버스를 타고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해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학교로 갔다. 정말 운 좋게 출석을 부르던 교수가 내 이름을 부르기 직전에 강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강의실로 들어서면서 대답을 하는 나를 쳐다보던 교수가 다음부터는 조금 일찍 다니라는 말을 하고는 다음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휴'다행이다.

자리에 앉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얼른 책을 꺼내서 펼쳤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강의에 교수가 시험 전 마지막 강의라 자습을 하면서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라고 했다.

'악'뭐야? 늦을까봐 택시까지 타고 왔는데... 시험문제는 안 가르쳐 주더라도 책을 한 번 더 훑어봐 줄 수는 있는 거잖아. 하지만 학생들 중 아무도 교수에게 불평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자습을 하던 중에 몇 명의 학생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수업이 끝이 났다. 다행히 다음 강의에서는 열심히 진도를 나갔다.

책을 한권 떼는 것이 목표였던지 한시간만에 책의 반이나 되는 내용을 전부 독파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수가 존경스럽다기보다 이것들이 전부 시험범위라고 생각하니 죽을 것만 같았다. 거기다 이 과목은 이미 어제 다 공부를 한 것인데... 시험 전날인 오늘 진도 나간 것이 학기 내도록 배운 것보다 더 내용이 많다니... 후아... 이러다가는 저번처럼 애국가만 적고 나가야 되는 거 아니야?

강의가 끝이 나고 진단서를 제출하기 위해 학과사무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수진이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고 나도 모르게 지나가다가 열려 있던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히 강의 중간 쉬는 시간이었던 강의실이라서 갑자기 강의실 안으로 불쑥 들어선 나를 보고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수진이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강의실의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 복도로 나갔다.'그런데'나 왜 숨은 거지?

하긴 마주쳐서 좋을 것도 없잖아. 살며시 복도를 걸어가서 학과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저 형 지난번에 말씀하신 진단서 제출하러 왔는데요."

"이리 줘. 그런데 너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쉬고 싶지만 곧 기말고사잖아요."

"하긴 쉰다고 해도 마음이 불편하겠다. 그래 그럼 이만 가봐."

"네 다음 주에 뵐게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이번에는 교수님도 기대하고 계시던데 시험 잘 봐야지."

"네"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환타지아로 출근을 해야 하기에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버스에 올라타서 환타지아 근처의 정류장에서 내려서 환타지아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내 뒤로 달려오더니 내 팔을 낚아채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

잡힌 팔 때문에 달리고 있는 사람과 덩달아 뛰면서 내 팔을 낚아챈 사람을 쳐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뒷통수가 보였다.

그런데 뭣 때문에 이렇게 뛰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뛰고 있는 사람 때문에 달리느라 숨이 차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 작은 골목길 안으로 숨어 든 사람은 내 팔을 놔주었다.

"헉 헉 헉 헉 헉"

"헉 허억 헉 헉 휴 도대체 왜 뛴 거예요? 나 이래 뵈도 어제까지 입원해 있었거든요."

"알아 원선생님이 말씀 하시더라. 너 거기 찢어져서 꿰맸다고."

'아 진짜'말을 해도 어떻게 저딴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어?

지금 저거 말 돌리려고 저러는 거 맞지? 참 나 그런다고 그냥 넘어갈 줄 아냐?

"왜 뛴거냐니까요?"

"그게 내가 실수로 지나가던 여자 엉덩이를 짚었거든."

"네?"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다리가 꼬여서 넘어지려다 보니까 엉덩이가 보이길래 꽉 잡았는데 하필이면 남자친구랑 팔짱을 끼고 가고 있던 중이었지 뭐야. 그래서 막 도망가고 있는데 네가 보여서 반가워서 너 잡고 뛴 거야."

'아악'뭐가 반가워. 그런 상황에서는 반가워하는 것보다 모른 체 하는 것이 더 낫거든.

내가 노려보기 시작하자 미안한지 20번방 형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고개를 돌리고 환타지아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딜 갔다 오는 거에요?"

"나야 원선생님 심부름으로 케잌을..... 아악 케잌 내가 분명 들고 있었는데... 어디 갔지?"

놀란 20번방 형이 주위를 둘러보고 케잌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내 팔을 낚아챌 때부터 케잌 따위는 들고 있지 않았었다.

"너 케잌 못 봤냐?"

"처음부터 안 가지고 있었는데요."

"뭐? 어떻게 하지 아까 넘어지면서 떨어트렸나보다."

"혹시 형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케잌 가져가라고 쫓아온 거 아니예요?"

"... 그 ... 그런가? 어쩌지 영일아 원선생님께서 케잌 사가지고 오라고 하시던데."

"케잌은 왜요?"

"오늘 사모님 생일이라고 하시더라고. 마치고 바로 레스토랑으로 갈 거라서 미리 좀 사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나온 건데.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요. 가서 다시 사야지."

나는 20번방 형의 팔을 잡아끌고는 케잌을 사기 위해 다시 시내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케잌을 사고 나서 나와 20번방 형은 제과점에서 덤으로 준 빵을 하나씩 입에 물고는 밖으로 나왔다.

"네가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중에 갚아요."

처음 케잌은 넘버투가 준 돈으로 샀지만 지갑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 20번방 형은 나에게 돈을 빌려서 새로운 케잌을 사야만 했다. 잠시 후 환타지아에 도착한 20번방 형과 나는 넘버투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케잌 사왔습니다."

"그래 거기 놔둬."

넘버투는 막 손님이 나가고 난 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저도 왔습니다."

"영일아 그럼 이제부터 네가 카운터 좀 봐라. 현성이가 카운터에 있으니 너무 정신 사나와서 안 되겠다. 현성이 너는 방으로 올라가고."

"네"

"네"

나는 카운터로 그리고 20번방 형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넘버투의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정신이 없다니 도대체 20번방 형이 무슨 짓을 했길래 넘버투가 정신이 사납다고 한거야?

하지만 나의 그런 궁금증은 곧 풀렸다. 유난히 오늘따라 나를 반기던 사무직원에 의해서 말이다.

"영일씨 출근했네요. 어휴 이제 좀 살겠네요. 현성씨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어찌나 말이 많은지 손님이 오시면 안으로 들어가는데 20분은 족히 걸리더라고요. 거기다 말을 한다고 정신을 팔아서인지 손님들께 드린 열쇠를 마구 뒤죽박죽 만들어 버려서 그거 정리한다고 오늘 오전이 다 지나갔네요."

"아 그랬어요?"

"하필이면 원선생님 예약도 꽉 찼는데 말이예요. 이제 좀 살겠어요."

오전 영업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무직원은 영업이 끝날 때 쯤이야 생기는 다크서클을 눈 아래고 길게 늘어트리고는 축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넘버투는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나와 견습생과 떡대 무리들은 간만에 한정식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밥을 다 먹고 내가 약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물과 함께 삼키자 그때서야 내 모습을 제대로 본 건지 떡대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좀 다쳤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한정식집에서 나온 환타지아 무리들은 오후 영업을 하기 위해 환타지아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말만 그런게 아니라 오늘아침부터 아랫도리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침에 발기했었는데도 전혀 아픔을 못 느꼈었다. 그리고 환타지아로 들어오기 전에 20번방 형에게 잡혀서 한참을 달렸었는데도 아프지 않았었다. '그럼'이제 다 나은 건가? 아싸 다 나았다.

그럼 제대로 나은 건지 확인해 봐야하는데... 하지만 기말고사 덕에 당분간은 이 녀석의 성능을 확인해 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환타지아로 들어섰다. 오후에도 환타지아를 찾는 손님들은 많아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한번 손님이 휘몰아쳐 들어가고 나자 빈 방이 없던 터라 대기 손님들이 좀 있긴 했지만 카운터가 한가해졌다.

"지난번에 보니까 원장님 따님하고 잘 아는 사이 같던데요."

"아 그거요. 대학 후배라서요. 헤어디자인학과 1년 후배거든요."

"그러면 예전부터 알고 있었겠네요?"

"네 예전부터 알고 있었죠."

"원장님한테 그렇게 큰 딸이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얼마나 놀랬던지."

"저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나는 사무직원이 뭔가를 더 묻기 전에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들었다. 나를 살피는 폼이 뭔가 더 궁금한 것이 있는 듯 했지만 내가 책을 꺼내서 보기 시작하자 애써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뭔가 더 묻거나 하게 되면 아무래도 대답하기 곤란한 말들이 나오게 될 것만 같았기에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지나가고 나자 좀 전보다 더 바빠졌다. 서비스를 받고 나오는 손님과 서비스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손님들의 교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사무직원은 계산을 하고 나는 손님들을 안내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손님을 안내하면서 왔다갔다 하다보니 퇴근시간이 되어있었다. 나는 마지막 손님이 환타지아 문 밖으로 나가고 나자 바로 넘버투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원선생님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래 몸도 안 좋은데 수고했어. 시험공부도 해야하지. 얼른 가봐. 나도 바로 나갈거야."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은 주말이라 수업이 없고 그래서 아침부터 환타지아로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리고 삼일 뒤부터는 기말고사가 시작된다. 나는 괜시리 마음이 급해져서 날듯이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저녁은 간단히 라면으로 때우고 나서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오후에 바쁜 시간을 보낸 탓에 피곤했던지 책을 펼치자 마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암'안 되겠다.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공부해야지.

라고 생각한 나는 알람을 맞춰두고 침대로 가서 누워버렸다. ============================ 작품 후기 ============================코멘트 달아주신 블로우스트님, POWERED님, 비츄형연참해주세요님, 비밀이야~님, 애독자C님, GODTOP님, 챠베스님, 멍충대마왕님, 해동풍님, 현오님 감사드립니다.

그럼 오늘도 즐감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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