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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아-153화 (153/236)

< -- 2학년 2학기 -- >

회식자리는 그냥 간단한 저녁을 먹고 난 후 술, 술, 술로 이어졌다. 기분 좋은 일 때문에 모인 자리가 아니라서인지 다들 몸을 사리는 눈치였고 이차에서 파장이 된 술자리에서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술을 마신 탓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2교시부터 강의라 늑장을 부리며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는 학교에 올라갔다.

어떻게들 안 것인지 나는 환타지아의 'ㅎ'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환타지아 직원 뽑는다며부터 시작해서 면접에는 뭘 물어보느냐? 시험도 치느냐? 근무조건은 어떠냐? 를 물어보며 나를 쫓아다니는 선배와 동기, 그리고 심지어 후배들까지 몰려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잠깐만 잠시 기다려 봐."

내 말에 모두들 쫑긋 귀를 세우고 집중을 했다.

"면접은 원장님이 보시는 거니까 나는 모르고 직원은 현재 뽑고 있긴 한데 지원자가 많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그리고 지원자가 많으면 시험을 칠게 될 것 같고 역시 다른 조건들도 /18 쪽165마찬가지니까 그건 각자가 알아서 해."

냉정하다 싶은 말이었지만 나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알려준 것이었다. 괜히 어떻게 하면 된다 따위의 말을 해서 엿먹이는 것보다는 사실 그대로를 알려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었다. 다들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때 성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영일아 나도 지원해도 될까?"

"뽑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원장님이지만 누구는 안 된다는 말은 특별히 없으셨어."

'하지만'아마도 안 될 거야. 라는 말은 입안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내가 말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타지아 직원이 되려면 그 기준이 외모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성기는 그런 내말에도 용기가 나지 않는 듯 한숨을 크게 쉬더니 곧 강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강의를 듣기 위해 성기의 뒤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다. 내가 강의실로 들어가자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가장 뒤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행히 잠시 후 교수가 들어와서 수업이 시작되었고 그제야 내 쪽으로 쏠리고 있던 시선이 앞쪽을 향해 돌려졌다. '아씨'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왜 다들 나만 쳐다보는 거야?

한껏 기분 나쁜 표정으로 앉아 있었더니 교수가 나를 지목해 책의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 물었고 대답을 못하고 서 있던 나는 교수에게 주의하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강의다 보니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일 수밖에 없었다.

점심 때 식당에서 만난 수진이가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일 없다고 대답을 했다.

"그럼 인상 쓰지 말아요. 얼굴에 주름 생기겠어요."

"인상 쓰는 거 아니야."

애써 인상을 펴면서 대답한 후에 점심으로 나온 짜장밥을 열심히 퍼먹기 시작했다.

"물도 먹으면서 먹어요."

"고마워."

수진이가 내민 물컵에 든 물을 마시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내가 밥먹는 모습을 보느라 그런 것인지 평소보다 더 적은 양의 밥을 먹었다.

"너 자꾸 밥 남기면 죄 받는다."

"학교밥은 양이 너무 많아요."

"그럼 처음부터 조금만 달라고 해. 남기지 말고."

"그렇게 말해도 이만큼은 먹어야 한다고 주시던데요."

밥을 다 먹고 나서 식당을 나오는데 일학년 몇 명이 수진이 쪽으로 다가왔다.

"수진아 점심 먹었어?"

"응 방금 먹고 나오는 길인데."

"그럼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수진이가 허락을 구하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갔다오라고 손짓을 했다. 일학년들은 수진이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슬쩍 내다보니 그 일학년들은 꽤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곳으로 수진이를 데려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진이는 환타지아 원장딸인데.... 설마 그런 이유 때문에 수진이를 데려간 건가? 밖을 내다보니 수진이 곁으로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뭔가 묻고 있었고 당황한 듯 하던 수진이가 잠시 후 열심히 대답하고 있었다. 수진이에게 가봐야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수진이가 아이들 사이를 뚫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에요."

가볍게 대답한 수진이는 목이 마르다고 음료수를 사달라며 나를 매점으로 끌고 갔다.

"뭐 마실래?"

"오빠거랑 같은 거요."

"난 사이다 마실건데."

"나도 그거 줘요."

사이다 두 개를 사서 비어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수진이는 내 맞은편에 앉더니 곧 입을 열었다.

"환타지아에 누가 그만 뒀어요?"

"응. 너 몰랐어?"

"네 아빠 저한테 그런 말씀 안 하시거든요."

하긴 딸한테 환타지아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긴 하다.

'오늘은 3번방에 손님이 삽입하겠고 그걸 잡고 안 놓고 흔들어 대어서 난리가 났었어.'

순간 원장이 수진이한테 말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던 나는 그만 마시고 있던 사이다를 뿜어버렸다.

"앗 차거."

".... 미안해"

수진이에게로 내가 뿜은 사이다가 쏟아졌고 수진이는 졸지에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매점으로 가서 티슈를 사다가 닦아주었지만 사이다의 끈적거림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수진이가 아무래도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해서 택시를 태워 보내주었다.

오후 수업이 남아 있던 터라 수진이는 집에 가서 바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학교로 오겠다며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는가?

오후 강의에 수진이가 늦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나는 건물 뒤의 벤치로 가서 누워 버렸다. 바람이 살랑이면서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고 있었고 기분 좋은 따뜻한 햇살을 쬐면서 누워 있던 나는 잠시 후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벤치에서 일어나야 했다.

"낮잠 자냐?"

남이사 낮잠을 자던 말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나가던 길이면 그냥 지나갈 것이지.

"아니요."

"그럼 좀 비켜봐 나도 좀 앉자 너 이 벤치 세 놓은 거 아니잖아."

세 놓은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앉아 있는 사람을 밀어내는 것도 사람의 도리가 아닌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벤치 하나에 사람의 도리씩이나... 나도 정말...

"아까 보니까 수진이랑 같이 밥 먹던데. 요즘 둘이 자주 같이 다닌다."

"네"

"달나라요?"

이민정의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거기 원장님께서 좀 보자고 하셔서 갔는데 너 거기서 나오더라."

그게 왜?

나는 시벌게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면서 입을 열었다.

"딱 한번 갔었어요."

"그 전에도 봤었는데."

'아씨'도대체 내가 달나라 갈 때마다 거긴 왜 간 거래?

"몇 번 간적 있어요."

"거기 단골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이 내 마누라라도 돼? 왜 뒷조사를 하고 난리야?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네가 달나라 가는 거 수진이가 알고 있냐?"

'그걸'내가 어떻게 알아? 묻지도 않는데 왜 내가 말을 하겠어?

"수진이랑 같이 다니지 마. 너 그런 의도로 수진이 만나는 거라면 말이야. 그 애 상처 받아."

섹스 프렌드는 수진이가 먼저 하자고 했거든. 그리고 나는 피해 다니다가, 다니다가 결국은 지친 거고... 하지만 나도 가끔 부담이 되기는 한다. 이렇게 다니다가 원장한테 걸리면 결국 코 꿰서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그만 하세요."

"그래 난 이만 간다."

이민정은 벤치에서 일어나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수진이도 저렇게 쿨하면 좋을 텐데. 사실 이민정을 보면 실수로 남자랑 자고 나서 실수였다면서 남자를 털어낼 것 같았다.

하긴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강의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자 알림음이 울려 폰을 꺼내들었다.

[무사히 강의실 도착 했어요. 늦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연락하는 거예요. 그럼 수업 끝나고 봐요.]수진이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그냥 폰을 주머니 속에 넣어버렸다.

이민정의 말을 듣고 난 후 괜히 심란해져서 강의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열심히 강의를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의 중에 계속 멍하게 있었던 적은 없었다.

어제부터 이상하게 자꾸 뭔가가 어긋나는 듯한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후 강의가 끝이 나자 나는 가방에 책을 넣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아직 강의가 남아 있었지만 멍하게 있을 바에야 그냥 밖으로 나가자 싶었던 나는 조교에게 일이 생겼다고 대충 둘러대고는 출석을 해결해 놓고 학교를 내려왔다.

지난 일학기에 출석 때문에 고생을 했던 터라 가능한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었지만 만일 빠지게 되면 환타지아 핑계를 대거나 친한 조교한테 부탁을 해두곤 했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지만 시원한 바람이나 쐬자 싶었던 나는 한강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바다에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 이상 가야지 되고 갔다왔다 시간만 해도 네시간 이상이 걸리던 터라 바다는 포기하고 그냥 바람 부는 강가에나 가자 싶었던 것이었다. 30분 정도 달리니 버스의 차창 밖으로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강이 보이자 나는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우와'역시 강바람이 그런가 시원하네.

오히려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아직은 늦여름의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아 덥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진작 한번 와 볼 걸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강가로 다가갔다.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젊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운동 삼아 강가를 거닐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강가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환타지아에서는 창도 없는 방에서 손님들을 마사지 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는데 퇴근하고 나서 집에 가도 자느라 바쁘고 이렇게 자연을 느끼고 바람을 맞았던 것이 언제 적 일인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환타지아를 그만두고 나가서 헤어숍을 연다는 넘버쓰리가 생각이 났다.

얼마나 스스로 대견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내가 나중에 미용실을 열게 된다면 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우선은 방마다 꼭 창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삽입도 할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고 또 여자 직원들이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손님들을 안내할 때 떡대들이 아니라 여직원에게 그 일을 시키면 되니까 그럼 사고 날 일도 없을 거고 말이지... 그리고 VIP가 아니더라도 손님들은 서로 얼굴 보지 않도록 개별화된 시스템으로 관리를 하면 더 좋을 테고...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행복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내건 미용실이 생긴다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그런데 미용실을 하나 오픈 하려면 도대체 돈이 얼마 정도 들까? 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자 반대로 우울해 지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가진 돈은 학교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는 충분히 충당될 돈이었다.

이것이 일년동안 번 돈이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이년간 번 돈이 얼마쯤 될까?

적어도 20년 이상은 벌어야 환타지아 같은 미용실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엔 내 월급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진다는 것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 나이가 40대가 되는데... 원장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 거 아닌가? 그럼 일선에서 물러나서 명목상의 원장을 하고 있어야 하게 되면... 갑자기 생각하기도 싫어진 나는 계단에서 일어나 한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인지 얼마 달리지 않아 숨이 차고 힘들어졌지만 나는 계속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지쳐서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헥 헥 헥 헥 헥 헥 헥 헤엑 후우"

한숨을 몇 차례 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 볼까? 버스를 타고 옥탑방으로 돌아오고 있는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아진 상태였다.

============================ 작품 후기 ============================코멘트 달아주신 현오님, 블로우스트님, 챠베스님, GODTOP님, 멍충대마왕님, 이비앙님, 똥색사탕님, 비밀이야~님, 아르너미스님 감사드립니다.

오래간만에 코멘트 남겨주신 분들 반갑습니다.

주말이라서인지 코멘트가 평소보다 많은 것 같긴 하네요.

지난 회엔 백진아가 삐진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영일이도 참 여난이 심한듯 하네요... 그럼 오늘도 즐감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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