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운 시작... -- >
환타지아 안에 리본을 달고 방문한
'착하게 살자.'
손님들에 대한 소문이 쫙 깔렸다.
소문이 안 나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그 손님들 푸른 용이 나한테 보낸 선물이야' 라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그저 못 들은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이 생기면 꼭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환타지아에서 나서기 좋아하는 몇 명이 그런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화환까지 버젓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성이 형은 리본을 매고 나타난 손님들이 누구의 선물인지 내게 확인하고 싶어했다.
"몰라요."
"진짜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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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긴 알지만'절대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어.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은 결국 내가 몸로비를 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는 것이니까. 딱히 몸로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그런 쪽으로 되어버렸다. 현성이 형은 알만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니'알면서 자꾸 묻는 심리는 뭘까? 무슨 소리가 듣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진짜 이해되지 않는 현성이 형에 대한 생각은 한쪽으로 고이 접어두고 오늘도 리본만 안 맺다 뿐이지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내 방에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는 용시스터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오늘 방문한 용시스터지의 숫자는 적었다. 하지만 그 대신 펌과 염색과 영양제까지 충분히 해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나는 지금 붉은 용의 머리를 붉은 색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더 이상의 창의적인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붉은 용이 마지막인 것을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붉은 용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다.
'설마'환타지아에 나가서 바로 다른 미용실로 직행하는 것은 아니겠지?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우선은 지금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붉은 머리를 얼룩지게 만들 수 없으니까
"스타일링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붉은 용은 화사한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붉은 색 머리가 마음에 드는 듯 발걸음도 가볍게 내 방에서 나갔다. 붉은 용이 나가자 마자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으윽'하루 종일 맡은 펌의 약품 냄새에 염색약에 영양제까지 속이 미식거릴 지경이었다. 아직 헤어디자이너로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는 그런 화학약품 냄새에 적응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점심도 겨우 한술 떠먹고 스타일링을 했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안 가냐?"
언제 들어온 것인지 넘버투가 내 등을 무언가로 꾹꾹 누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으악 지금 발로 내 등을 밟은 거야? 아 진짜...
"발 좀 치워주세요."
"일어나면 치우지 말라고 해도 치워."
"제가 똥개라도 됩니까?"
"엉"
'아씨'하나도 재미 없거든.
그런 뒤처지는 개그는 좀 그만 좀 하지.
"그만 일어나라."
"좀 있다가요."
"우리 나갈건데."
"저도 좀 있다 나갈거예요."
"원장님이 너 데려 나오라고 하시는데."
'아악'잠을 잔 것도 아니고 그냥 잠깐만 쉬겠다는데 왜들 날 이리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알았어요 나가요."
무거운 몸을 겨우 소파에서 떼어내고 일어났다. 내가 일어서자마자 넘버투는 내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원장님 데려왔습니다."
"영일군 오늘 수고했어요."
"네"
얼른 옥탑방에 가서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뭔가를 말하고 있는 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 원장이 내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다시 한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영일군 지난번에 일본 대상 받은 것 때문인지 잡지에서 인터뷰요청이 들어와서 그런데 영일군 의사는 어떤지 싶어서 말이에요?"
"인터뷰요?"
"헤어경향에서 기자와 사진사가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데 미용실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에엑"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헤어경향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유명 미용잡지인데... 인터뷰라니. 유명 미용실의 원장도 아니고 유명대학의 교수도 아닌 나를... 물론 환타지아는 알아주는 미용실이다.
거기다가 내가 대상을 타온 미용대회도 알아주는 대회이긴 한데... 갑자기 너무 뜻밖의 일이라 나는 한동안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싫은가 본데 원장님 그냥 취소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미친 넘버투의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넘버투를 옆으로 밀어내고 원장에게 긍정의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인터뷰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기자에게 영일군 연락처 알려 줄테니 시간 조정하고 촬영하게 되면 시간 알려줘요. 환타지아도 나름 준비를 해야 하니까 말이에요."
그렇겠지.
이대로 촬영을 했다간 큰일이 날테니.
우선은 방송실을 폐쇄해야 할 것이고 견습생들 방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할거고 헤어디자이너들에게도 경고를... 아무튼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 많을 듯 느껴졌지만 그것보다도 나는 내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는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날 내가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강의를 듣고 있던 중이라 전화를 받아야 할까 말아야할까 잠깐 망설였지만 원장이 어제 인터뷰 기자에게 연락처를 알겨준다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나서 나는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와 폰을 열고 통화를 시작했다.
"네 최영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헤어경향의 기자 최혜정입니다. 어제 원장님께 연락처를 받고 전화를 드리는 건데 혹시 통화하기 괜찮으십니까?]
"네 지금은 특별한 일 없습니다."
나는 강의가 진행 중인 강의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대답했다. [대학생이라고 하시기에 혹시 수업 중에 전화하게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인터뷰를 오케이하셨다고 전해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승낙했습니다. 인터뷰를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회 때 대상 수상한 것 때문에 인터뷰를 하신다고 하셔서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하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러세요? 대상을 탄 것도 이유가 되지만 사실 다음호부터 신예 헤어디자이너를 발굴해서 인터뷰기사를 실기로 해서요. 거기에 딱 어울린다는 생각에 연락을 드린 것인데 승낙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인터뷰 시간은 언제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인터뷰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게 대중이 없습니다. 잘 풀릴 때는 두 시간 정도면 되는데 사진이 잘 안나오거나 흐름이 끊어지면 대여섯 시간도 걸릴 수 있고 그것도 안 되면 다음 약속을 다시 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걸리면 먼저 원장님과 의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 의논드리고 다시 통화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네 그렇게 하세요. 내일 제가 이 시간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손끝이 떨렸다. '신예 헤어디자이너'그 말은 내가 환타지아 뿐 아니라 헤어 쪽 업계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니 걸려든 걸까?
다시 강의실로 돌아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로 삐져나오는 웃음 때문에 연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유야 어떻든 나를 인터뷰하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그만큼 실력을 인정 받았다는 뜻이 아닐까 해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의자에 앉아서 피식거리고 있자 동기 중 한 놈이 내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야 너 허파에 바람 들었냐? 아까부터 왜 자꾸 쪼개고 그러냐?"
"좋으니까 그러지?"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는데 나도 좀 알고 같이 웃자."
그 말에 인터뷰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다가 생각해 보니 이 말을 한다고 해도 동기들이 같이 웃어줄지 알 수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는 좋은 일이긴 한데 이들한테도 좋은 일이 될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별일 아니라는 어설픈 대답을 늘어놓고는 강의실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하루종일 수업이 있는 탓에 동기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내도록 피해다녀야만 했지만 그래도 왠지 그들에게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가 좀 망설여졌고 결국에는 아직 확실시 되지도 않은 일인데 나중에 말하자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루 종일 빡빡했던 수업을 끝내고 내려오면서 동기들이 술한잔 하러 가자고 하는 것을 환타지아에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는 바로 옥탑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서 벗은 몸을 거울에 비쳐보았다. 물론 인터뷰를 하면서 옷을 벗고 사진을 찍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왠지 신경 쓰였다.
벗은 채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보다가 갑자기 힘이 빠져버려서 욕실 밖으로 나왔다. 인터뷰를 하다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하고 사진이 잘 안 나오는 편인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쨌든 한도 끝도 없이 걱정은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최혜정기자라는 여자 환타지아에 손님으로 와 봤던 경험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지윤경에게 전화를 했다. 걔도 알고 보면 아나운서에 기자 경력도 가지고 있으니 뭔가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건 전화였지만 인터뷰에 대한 말은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신변잡기에 대한 말만 해대다가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안되면 안 되는 거고 잘 되면 잘 되는 거지.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
라고 결심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이 잘 올 리가 없었다. 억지로 잠이 든 나는 밤새 인터뷰를 하는 꿈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턱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씻고 옷을 입고 환타지아에 내려갔다.
평소라면 아침으로 뭐라도 먹었을 테지만 밤새 꿈속에서 시달려서 인지 입맛조차 없어서 밥 생각이 없었던 터라 아침을 굶은 채였다.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어제 또 뭔 일 있었어?"
넘버투가 내 얼굴을 가리키면서 물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근데 왜 그래 얼굴이."
"그냥 인터뷰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뭐? 오늘 인터뷰 한다고?"
"아니요 아직 날짜도 안 잡았어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넘버투가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아직 날짜도 안 잡은 인터뷰 때문에 잠을 못 잔거야? 간이 그렇게 작아서 인터뷰 할 수 있겠냐?"
간 작은 거랑 인터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넘버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도 내 간을 절대 작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평균 사이즈 이상의 크기일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인데 작다니? 말도 안 돼.
"그것 때문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인데."
사실 인터뷰가 겁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환타지아의 실태가 드러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헤어경향의 기자가 방문했는데 원장이 손님에서 페니스를 빨리고 있던 중이었다던가. 아니면 넘버투가 손님의 가슴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다던가 하는 문제가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에 환타지아에서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넘버투에게 살짝 그런 부분에 대해 말해주었다.
"뭐야? 너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거였어? 너 머리 나쁘지?"
"아 진짜 왜 그래요 툭하면 사람을 똥개 취급이나 하고 이번에는 머리 나쁘다고 구박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냐? 네 인터뷰할 일이나 신경 써."
"걱정이 왜 안 되겠어요. 혹시 그 기자가 환타지아에 온 적이 있는 기자라면 어떻게 해요?"
"뭐?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풋 푸하하하하하"
결국 넘버투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넘버투를 나는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 진짜 사람이 진심으로 걱정을 하면 좀 진지하게 들으세요."
"푸하하하하 푸 후후후후 킥킥킥"
넘버투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야 그럼 여태껏 원장님은 어떻게 인터뷰 하셨겠어?"
"원장님 인터뷰요?"
넘버투는 내 앞에 원장님의 인터뷰기사가 실린 대여섯권의 헤어경향을 던져 주었다. ============================ 작품 후기 ============================코멘트 달아주신 성미카엘님, 비츄형연참해주세요님, 블로우스트님, 싸울아비헌터T님, 챠베스님, 비밀이야~님, 하프휴먼님, 멍충대마왕님, smone님, 안돼임마님, 앞에서찌른다님, 해동풍님, 베르주라크님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봐 주신다는 감사드리고... 조만간 연참은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본은 그냥 막간 재미를 드리기 위한 작은 소품이었는데... 역시나그럼 오늘도 즐감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