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버스에서 내린 선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터미널 근처엔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몇 놓여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선재는 캐리어를 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춥다는 생각. 각오를 해 따뜻하게 입고 오긴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싸늘했다. 건물과 떨어진 구역에 쌓인 눈은 얼마 전에 온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눈이 오는구나. 선재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어느새 다다른 의자 위에 아이를 앉혀 주었다.
삭막하고 차가운 풍경. 초봄의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선재는 패딩과 목도리로 꽁꽁 싸맨 아이의 얼굴에 손등을 대보았다. 잠에서 덜 깬 듯한 아이가 눈을 끔벅거리는 게 보였다.
“졸려?”
아이는 대답하는 데는 아직 서툴다. 발달이 느린 오메가 아이들이 종종 있는데, 준희는 그중에서도 유독 더딘 편이었다. 그래도 감정을 느끼고, 의사는 나름으로 표현할 줄 알아 묻는 말에는 반응을 해온다. 고개를 저은 아이의 눈이 선재에게 닿았다.
“우유 사줄까?”
일단은 아무것도 안 먹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선재는 두 팔을 뻗어오는 아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오래 있었다 보니, 바깥 공기를 아이에게 조금 쐬어주고 싶었다. 생각보다 춥긴 하지만 공기 자체는 맑았다. 선재는 태백이라고 크게 적힌 엠블럼 하나를 스치듯 쳐다보았다. 태백.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고, 이곳에서 살게 되리란 생각도 당연히 해본 적이 없었다.
계속 아이를 안은 채로, 선재가 자리를 옮겼다. 눈에 띄는 곳에 택시 승강장이 있었다. 줄은 없고, 빈 택시만 가득했다. 맨 앞에 있던 택시 유리창을 손으로 두어 번 두드린 선재가 트렁크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가 짐을 실었다.
말이 없는 기사를 향해 읽어낸 건, 주머니 속에서 꺼낸 쪽지의 내용이었다. 백성우가 알려준 주소가 볼펜으로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이 동네에 간다고요.”
“예.”
“으음.”
빌라가 많은 구역이라고 했는데 기사는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타지 사람이라면 주로 관광지에 가리라 생각한 탓일까? 선재는 끝까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사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옆에 조그맣게 앉은 패딩 차림의 아이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좀만 더 가면 된다. 이제.”
아이가 고개를 들어 선재를 쳐다봤다.
부디 잘못된 결정은 하지 않았기를.
선재는 아이의 눈을 쳐다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택시가 곧 출발하자 산도 보이고, 평범한 길가도 눈에 들어왔다. 처음 와본 곳이라 그렇지 사람 사는 곳이면 다 비슷할 것이다. 바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강원도 바다가 유명하니 여름이면 아이와 함께 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선재는 희망찬 생각만 하기로 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최악이긴 했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들이었다.
아이와 행복하게만 살면 된다.
선재는 오직 그것만 원했다.
백창우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날, 선재는 늦잠을 잤다. 며칠째 연락이 없는 남자가 이상하긴 했지만, 원래도 외국으로 출장을 가면 연락을 소홀히 하는 편이었다. 무음으로 설정해둔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린 뒤였다. 선재는 부재중 통화가 들어와 있는 번호로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백창우가 죽었다고 말해준 건 백성우. 백창우의 동생이었다. 선재는 원래부터 제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백성우를 알아, 처음엔 당연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두 시간 뒤에 집으로 쳐들어갈 거라는 그의 말엔 마음이 급해졌다.
왠지 준희를 어떻게 하겠단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선재는 그 길로 준희와 간단한 짐만 싸서 집을 나왔다. 창우의 아파트긴 했지만 몇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고급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에서, 선재는 옷도 대충 입은 채로 도로가 나올 때까지 걸었다. 아이를 안고 쫓기듯 동네를 벗어났다.
수중에 있는 돈은 200만 원 정도였다. 당장 가진 돈으론 원룸을 구하기도 빠듯했다. 선재는 첫날엔 모텔로 가 잠을 잤고,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방을 구하러 다녔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단기 월세를 알아보았고,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방을 고르기도 했지만, 아기와 함께 지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부엌과 방이 모호하게 나뉜 좁은 공간이라 어디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그걸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깨끗한 벽면만 보고 계약을 한 거였는데, 그마저도 곰팡이가 핀 벽지 위에 그대로 새 벽지를 바른 거였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곰팡이는 필 터였다. 안 그래도 면역력이 약한 아기를 그런 데서 키울 수는 없을 듯했다.
선재는 오메가 학생들이 무상으로 다닐 수 있는 특수 대학을 나왔다. 2년 과정과 3년 과정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선재가 이수한 학과목들은 3년 과정에 속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이 만난 게 백창우였다. 스물다섯 살 이후로 쭉 백창우와 함께 살아, 뭘 해본 기억이 많이 없었다. 그전에 모아놓았던 푼돈은 백창우의 통장에 모두 묶었다.
아이와 당장에 지낼 돈이 필요해, 선재는 그 돈이 아쉬웠다.
매일 아침 깨기 직전까지도 모든 게 꿈이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눈을 뜨면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화장실에 락스를 하도 뿌려, 방에까지 그 냄새가 퍼지곤 했다. 문을 닫아도 냄새가 샜다. 아이의 피부가 붉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때까지도 어떤 희망이 있었다면 바로 백창우가 돌아올 거라는 헛된 희망이었을 거다. 선재는 백성우가 전달한 말을 여전히 반신반의했고, 곧 창우와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은 선재가 장지를 직접 찾아가면서 완전히 부서졌다. 백창우의 이름을 확인했을 땐 전혀 모르는 언어로 이름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믿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지만, 오래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제 손을 잡고 멀뚱하게 서 있는 아이에겐 죄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아이까지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아이 앞에선 슬픔이 사치였다. 선재는 당장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운 좋게 아이와 함께 출퇴근이 가능한 식당에 취직하게 되었다. 사장도 인성이 괜찮은 편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면 체력을 쓰는 일을 해야 했던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식자재 운반을 처음 했을 땐 며칠 내내 미열에 시달렸었다. 체력적으로 일반 남성에 못 미치는 오메가 남성을 고용한 사장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카운팅과 서빙직으로 전환이 되었지만 선재는 그 몫만은 열심히 해냈다. 얼굴이 새초롬하니 잘생겨 남녀 불문하고 인기를 끌기도 했다. 특히나 선재를 보기 위해 그 식당에 밥 먹으러 가는 주변 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았다. 알파 학생들은 얼굴을 붉혔고, 일반 베타 여학생들도 넋을 놓고 선재의 얼굴을 쳐다봤다.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2층 방에 있던 아이가 자꾸 우는 바람에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준희는 잠투정도 잘 안 하는 순한 아기였다. 첫날과 둘째 날에 조금씩 우는 건 있었지만, 또 며칠은 괜찮았었다. 선재는 열흘 정도 지나 갑자기 크게 울고, 눈앞에 아무도 없으면 방문을 열려고 바닥으로 기어 나오는 아이 때문에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해 그렇게라도 울면서 나오는 아이 때문에 마음도 아팠다. 결국, 손님들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일들이 많아지자, 선재가 먼저 그만두겠단 의사를 표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사장은 외려 고맙다는 얼굴이었다.
보증금 500만 원이 목표였는데, 그때까지도 앞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아이는 허름한 월세방으로 오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 내내 훌쩍였는데, 환경이 아무리 안 좋아도 선재만 앞에 있으면 좋은 모양이었다. 미래 때문에 기운이 없었던 선재도 그땐 웃음을 보였다. 아이 때문이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그즈음 백성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재는 백창우와 연애하는 내내 저를 괴롭혔던 백성우가 하는 말이면 일단 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창우는 백성우의 말대로 진짜 죽었고, 저와 준희는 절벽 끝에 내몰려 있었다. 선재는 조용히 백성우의 말을 들었다.
백성우는 백창우의 죽음을 위로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반성한단 말도 했다.
선재는 휴대폰을 든 채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열성 오메가라는 이유로 백성우에게서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당했는지 모른다. 최근 1년간은 조용했지만, 백창우와 사귀는 내내 백성우는 저를 힘들게 했다. 전화를 걸어 대뜸 집안 돈을 노리느냔 말을 하고, 임신을 했을 때도 그 애를 낳으면 가만히 안 있겠단 말을 버릇처럼 해오던 남자였다. 선재는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진 백성우가 낯설어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 듣고 계시죠.’
‘…응.’
‘정말 다 죄송했고요. 제가.’
‘….’
‘지금 갈 데 없으시다 들었는데, 혹시 강원도도 괜찮으시면 제가 집도 한 채 내드릴게요.’
‘….’
‘그, 조카랑 지낼 데 마땅치 않으시잖아요.’
‘….’
‘거기서 지내시다가, 경기 쪽에 빈집 적당한 거 하나 나오면 거기서 지내실 수 있도록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염려하던 순간은 짧았다.
‘그 애 데리고, 저나 저희 집안사람들 앞엔 나타나지 말아 주십쇼.’
이유가 있는 호의라 다행일까. 선재는 통화를 하며 준희에게 눈짓을 했다. 아이가 그런 선재를 보고 소리도 없이 웃었다.
예전에도 백성우는, 백창우가 열성 오메가와 사귄다는 이유로, 또 그 비밀을 지켜준다는 조건으로 백창우에게서 집안 재산을 포기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백창우는 각서까지 썼고, 선재가 보는 앞에서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선재는 열성인 게 그리 흠이 되는 줄은 백창우와 사귀며 처음 알았다. 장애인. 백성우는 열성 오메가를 그렇게 표현했다. 제 집안도 열성 알파 집안이면서, 그 콤플렉스를 애꿎은 선재에게 다 표출했다.
그랬던 백성우였는데.
이제는 제가 준희를 빌미로 집안 재산을 노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참 백성우답구나. 머리론 그런 생각을 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선재는 백성우가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백성우는 준희의 형질을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말에서 준희가 알파라는 전제가 내내 깔려 있었다. 선재는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입을 다물었고, 백성우가 말해준 주소만 쪽지에 받아 써 적었다.
강원도 태백시.
가본 적이 없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당장에 습하고 춥고, 냄새나는 방부터 나가야 아이에게 덜 미안할 듯했다. 선재는 준희만 쳐다보며 그 결정에 힘을 실었다. 죄송했다고 말하는 백성우에게 네 마음은 알겠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아이 볼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전했다.
선재는 골목으로 들어간 택시 안에서 아이의 몸을 더 꼭 잡았다. 부분 공사 때문인지 길이 거친 데가 있었다. 택시는 골목 안으로 쭉 들어가다, 어느 길목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속도를 점차 늦추더니 어떤 건물 앞에 섰다. 작은 빌라 건물 앞이었다.
“감사합니다.”
눈을 들고 조수석 창으로 비친 건물을 쳐다보던 기사가 선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재도 택시에서 내려 평범한 빌라 건물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낡지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도 않는 건물. 원래는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금색 번지수로만 그 이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선재는 글자가 떨어진 부위에 접착제가 조금 남아있는 걸 보고, 화용이라는 글자를 어렵게 읽었다. 원래는 화용빌라였나 보았다.
“좀 걸을까. 준희 걸어도 돼?”
준희가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혹시 추울까, 선재는 아이가 둘러쓴 패딩 모자를 그대로 두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선재가, 다른 손으로 빌라의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유리와 바닥 면이 스치듯 맞닿는 소리가 났다.
선재는 백성우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생각하며 위로 올라갔다. 요즘은 1층도 높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건물은 1층이 반지하 같았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도 제일 아래층 창문이 바닥에 거의 닿을 듯 위치했었다. 선재는 그나마 2층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이를 조심히 이끌었다. 202호 앞에서 기억하고 있던 비밀번호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445566. 간단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별 표시를 누르자, 문이 탁, 하고 짧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딘가 둔탁한 음이었다. 가만히 서서 앞만 쳐다보던 아이가 문틈 사이로 들어가려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준희 잠깐만….”
선재가 먼저 들어가 집 안을 확인했다.
구조도 생김도 단순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주방이 있고, 오른편에 화장실과 적당한 크기의 방이 나란히 있었다. 거실은 좁은 편이었으나 아이와 둘이 지내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이 때문에 청소를 미리 맡겨둬, 위생에는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선재가 제 다리 뒤에 있던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준희 이제 여기서 살 거야.”
무탈하게. 아이만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은 속으로만 했다. 선재는 아이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천천히 닫히는 문을 보았다. 짧은 전자음이 들리고, 자동으로 잠기는 문에도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 * *
봄의 초입인데도 춥지 않은 집이었다. 아직도 미약한 냉기가 흐르는 바깥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선재는 첫날부터 편안한 잠을 잤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이 지나도 감상은 그대로였다. 이대로라면 아이 얼굴에 핀 두드러기도 금방 가라앉을 듯했다.
서울에서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아이의 피부과는 들렀던 참이었다.
선재는 잠에서 깨자마자 유아용 로션부터 찾았다. 아침이면 건조함이 극에 달한다. 손가락에 로션을 짜낸 선재가 잠든 아이 뺨에 그걸 살살 발랐다. 연고처럼 발라주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며칠째 시간만 나면 상처 위에 약을 도포하듯 로션을 발라주고 있었다.
따뜻한 햇빛이 창의 크기만큼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수납장 위에 올려 둔 시계를 쳐다본 선재가 시각이 열한 시임을 확인했다.
오늘은 좀 나가볼까.
선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서 부서지고 있는 햇빛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음식을 사러 마트를 간 게 아니면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겨울에도 곧잘 외출을 하곤 했는데, 환경이 갑자기 바뀐 데다 아이가 그동안 고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섣불리 뭘 하기가 꺼려졌다. 집도 생각보다 너무 따스하고 편안했다.
너무 집 안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을 텐데.
선재는 거의 처음으로 산책할 계획을 세우며 방 밖을 나섰다. 아이는 새벽에 언뜻 깨었다 다시 잠들어 아직도 꿈나라에 있었다. 제 자는 모습을 보고, 아이도 다시 눈을 감은 것 같았다. 미소를 띤 선재가 어제 쪄두었던 두부를 볼에 넣고 빻기 시작했다. 밥도 넣고, 어설프지만 작게 썰어둔 삶은 당근도 그 안에 넣었다.
아이가 먹을 밥을 많이 해서 같이 먹는다거나, 그게 아니면 빵이나 비스킷 같은 걸 먹어오고 있었다.
선재는 제 몸 돌볼 생각은 안 하는 편이었다.
아이가 아니었으면 마트를 한 번이라도 들렀을까.
선재는 식탁에 올려 둔 소보로빵에 시선을 보냈다. 처음 갔던 마트에선 많은 물품들을 대거 세일하고 있었다. 입구에 내달 폐업 예정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지만, 우선은 그날 볼일을 봤다. 하필 제가 이사를 오자마자 폐업을 할 게 뭔가. 근처는커녕, 15분은 걸어서 발견한 곳이었다. 차도 없는 처지라 그 마트가 폐업하면 급하게 뭘 살 수는 없을 듯한데.
집 때문에 이곳으로 온 거지만, 집을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초저녁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고, 그럴듯한 건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낮은 건물과 다세대 주택이 전부였다. 거창한 걸 찾는 게 아니라, 생활에 영향을 주는 편의시설 같은 건 있었으면 했다. 하다못해 편의점이라도.
동네는 7시만 되어도 캄캄한 밤처럼 변하곤 했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너무 지친 채로 이곳에 왔기 때문인지 고요한 분위기가 아직까지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세방에선 새벽 2~3시가 될 때까지도 주정하는 소리 때문에 잠들기가 어려웠었다. 그곳은 다시 생각해도 아이와 지낼 곳은 못 되었다. 선재가 한숨을 쉬며 완성된 두부밥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때 으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서 준희가 낸 소리였다.
“준희 일어났나?”
혼잣말하듯 물었는데, 아이가 우웅, 으응, 하고 대답을 했다.
앞쪽으로 걸음을 옮긴 선재가 방문을 열었다.
“잘 잤어요?”
방 한가운데 누워 있던 아이였는데 벽으로 가 몸을 붙이고 있었다. 선재의 목소리에 고개를 뒤쪽으로 젖힌 아이가, 소리는 내지 않고 입을 벌려 웃었다.
“밥 먹고 산책하자.”
똑같이 웃음으로 화답한 선재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날씨도 좋은 것 같으니 오늘은 꼭 나가볼 생각이었다. 선재는 안고 있던 아이를 식탁 의자에 앉혀 주었다. 식탁에 있던 작은 숟가락도 아이 손에 쥐여주었다. 혼자 밥 먹는 걸 재밌어해, 반 이상을 흘리고 먹어도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숟가락으로 두부밥을 뜨긴 떴는데, 반 이상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선재가 웃으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입에 들어간 건 반의반 정도나 될까. 선재가 고개까지 숙이며 웃자, 준희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준희는 입에 있는 걸 마저 오물거린 뒤, 또 밥을 떠서 반은 바닥으로 흘렸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선재가, 열심히 식사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엔 햇빛이 더 깊은 각도로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재는 그래도 바깥바람을 생각해, 아이의 옷을 따뜻하게 입혔다.
목도리도 둘러주고 마스크도 씌워주었다.
준비를 끝내고 현관을 열자, 복도에 도사리고 있던 한기가 안쪽으로 스몄다.
서울보다 더 추운 지역인 걸, 집이 따뜻해 잠시 잊었다. 선재는 대충 걸치고 나왔던 코트를 앞쪽으로 여몄다. 그리곤 아이 앞에 반쯤 앉아, 패딩 안으로 작은 손을 밀어 넣어 주었다. 밴드를 조여 그 손을 싸매듯이 했다. 패딩 모자도 이마까지 덮어 주었다. 아이의 눈이 빼꼼 보이게만 되었지만, 그래도 감기에 걸리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손 잘 잡고….”
소매 부근을 잡자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손이 느껴졌다.
선재는 계단 앞에서 완전히 멈추고, 아이가 발을 뻗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이는 발을 크게 들었다가 바닥을 짚었다. 요즘은 적당히 높은 계단도 제법 디딜 줄 안다. 속도야 거북이가 따로 없지만, 늦된 아이라 이마저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준희가 계단을 세 개째 밟았을 때, 선재는 아이를 위로 안아 올렸다. 잘했다고 칭찬하며 1층 유리문까지 걸어 내려갔다.
올라가는 건 꽤 하지만, 내려가는 건 아직 미숙했다. 유리문을 안쪽으로 끌어당기자, 예상했던 한기가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복도도 꽤 추웠는데 그와는 비할 수 없이 찬 공기가 밖을 채우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조금만 걷고 들어가자.”
선재는 품에 안고 있던 준희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아이가 추워하는 기색 없이 길 양쪽을 두리번거렸다.
빌라 건물을 왼쪽으로 낀 채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리 쌀쌀하다지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낮인데.
다른 주택 건물을 쳐다보던 선재가 으응, 하는 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준희 왜.”
아이는 또 으응,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앞을 보니 개 한 마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개의 입엔 침이 가득했다. 본능적으로 준희를 안은 선재가, 빌라 건물 쪽으로 완전히 몸을 붙였다.
다행히, 주인은 있는 개였다. 기다랗게 늘어지는 줄이 눈에 들어왔다. 선재는 아이를 안은 채로 개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개의 목엔 낡은 가죽으로 된 목줄이 매어져 있었는데, 칼심 같은 게 박혀 나쁜 예감을 하게 만들었다. 줄이 팽팽해지다, 이내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길로 들어섰다.
남자는 젊은 것 같기도 하고, 나이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통화 중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많은 종류의 욕을 했다. 선재는 안고 있던 준희를 더 깊이 안았다. 손이 몇 개 더 있다면 귀도 막아줄 텐데. 태연한 척을 하고 싶었지만, 미간이 자꾸만 조여들었다.
들어가야겠다. 빌라 근처에서만 걷고 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빌라 벽을 둘러서 걷던 선재가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뭔데? 여기 삽니까?”
“….”
선재는 그 말이 저를 향해진 말이 아니었으면 했다. 그래서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 보았다.
“이으응….”
적막 속에서 준희가 칭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선재는 멈추었던 다리를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좀만 더 가면 유리문 앞이니 이대로 집에….
갑자기 뒤쪽이 조용했다. 곧 들린 턱턱, 하는 작은 발소리는 개의 것인 것 같았다.
“안 들리냐?”
그제야 모른 척 뒤를 돌아본 선재가 어느덧 가까이에 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관자놀이부터 광대뼈까지 불규칙한 흉터가 진 얼굴. 긴 눈매지만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은 아니었다. 표정을 험하게 짓고 있었다. 키도 덩치도 커서, 선재는 그 모든 걸 올려다봐야 했다.
“안 들리냐고.”
“…들려.”
그러나 선재로서도, 아이까지 안고 있는데 이렇게 위협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에겐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았다. 날 선 반말이 툭 튀어나왔다.
남자는 선재의 말에 대답보다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손으로 입술 끝을 한번 쓸더니 개줄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끼잉! 목이 졸린 개가 소리를 내자, 준희가 몸을 떨었다. 그 움직임을 느낀 선재가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비켜요.”
남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큰 몸을 선재 쪽으로 기울이기만 했다.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선재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비킵시다.”
“오메가네?”
선재는 흠칫했다. 아이를 낳은 오메가에게선 상대방에게 위화감을 줄 만큼의 페로몬이 방출되지 않는 게 정설이었다. 심지어는 죽은 창우의 체취가 남아, 종종 알파로 오인받는 경우까지도 있지 않았나. 거기엔 선재의 차가운 인상도 한몫을 했다.
“이야. 곱게 굴러먹다 온 냄새.”
남자는 대답을 구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선재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 옆을 쳐다봤다. 골목엔 아직도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니지 않는다. 옅은 체향으로 오메가인 걸 금방 알아챈 남자 또한 베타는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서 풍겨오는 듯한 씁쓸한 냄새에, 선재의 코가 찡긋 구겨졌다.
“어디서… 겁도 없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더욱 거리를 붙여왔다. 선재는 더는 말하지 못했다. 남자는 반감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이유를 몰랐지만, 이유가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단순히, 오메가가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는 것이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선재는 그런 부류를 영화에서나 봐 왔었다. 막상 이런 상황에 직면하니 더는 아까의 기세로 맞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선재가 고개가 숙였다.
“히윽….”
품속에서 위쪽을 올려다보던 준희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울 때 이런 버릇이 나오는 걸 선재가 가장 잘 알았다. 손으로 작은 등을 달래자 그래도 큰 울음으로 번지진 않았다. 선재는 일단 잘못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아이를 손으로 달래면서,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어이.”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개줄을 뒤로 휙 끌었다. 목줄을 감고 있던 개가 남자가 있는 쪽으로 맥없이 끌려갔다. 뼈대가 굵고 큰 개였지만 남자의 힘에는 가볍게 제압되고 있었다.
“물어.”
“…….”
“물어, 씨이팔.”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지, 얼굴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남자는 개줄을 끌기도, 풀기도 하며 선재의 다리에 개가 달라붙도록 만들었다. 코를 내밀고 킁킁, 냄새를 맡던 개가 선재의 다리 바로 앞에서 침을 흘렸다. 아이를 안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선재가 옆걸음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말한 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합니다.”
“안 나빴는데.”
“….”
“니가 낳은 거?”
남자는 턱짓을 하며 준희를 가리켰다. 개가 진짜 흥분을 해서 앞다리를 들 때마다 남자가 개 목줄을 짧게 그러쥐었다.
“네가 낳았냐고.”
“….”
선재는 준희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얼굴을 앞쪽으로 들이미는 남자를 피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어쭈. 안 미안하지.”
“….”
“안 미안한데 왜 사과하냐.”
단번에 가까워진 남자는 못마땅한 듯 말하면서도 웃는 낯이었다. 선재는 남자에게서 목이 아플 정도로 강한 담배 냄새를 맡았다. 단순히 담배 향만 있는 건 아니고, 썩은 목재나 쓰레기를 태울 때 맡은 적이 있던 냄새도 함께 느껴졌다. 작게 기침이 나왔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하나도 안 하고.”
선재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눈요기는 돼서 넘어는 가준다만.”
마무리하듯, 마지막으로 입꼬리를 크게 올린 남자의 얼굴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선재는 푹 패는 흉터와 입에만 시선이 가는 걸 느꼈다. 분명히 웃음인데, 웃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있던 남자가 캬악, 하는 소리를 내며 선재의 발 옆에 가래침을 퉤, 하고 뱉었다.
종종 얼굴 봅시다?
선재는 그 말을 뒤늦게 들었다.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멍했다. 개와 남자가 길가를 벗어나는 걸 보고 있는데도 쭉 그랬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남자였지만, 몸집이 너무 거대해 쉽게 작아지지도 않았다.
준희가 울기라도 했으면 정신이 바짝 차려졌을 텐데, 아이는 선재의 품에서 더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아이를 쳐다본 선재가 아이의 엉덩이를 뒤늦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아이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금방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작고 오동통한 입술이 아, 하고 벌어지자 선재도 뒤늦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얼굴 좀 보자.
누가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굴 좀 보자고.
2층이어도 반지하 같은 1층을 끼고 있어 층수로 보면 1.5층 정도의 높이였다. 남자가 안 보여주냐, 하고 읊조리듯 말한 것까지도 가까이서 들렸다. 선재는 방 벽에 등을 붙인 채 집에 없는 척을 했다.
다 보인다. 있는 거.
장난을 치듯이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침 뱉는 소리를 부러 크게 내기도 한다.
그러다 혼자 열이 받은 듯 벽을 차기도 하고.
선재는 벽을 차면서 씨발, 하는 소리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모든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저를 쳐다보는 아이가 보였다.
“아냐, 준희. 계속 놀아.”
얘기해줄 거 있어서 그런다니까?
발로 외벽을 재차 퍽, 치는 소리. 얘기해줄 게 어디 있겠나. 마주치면 또 시비나 걸 것이다. 선재는 첫날에도 그 정도의 수준을 보였던 남자가 갑자기 유하게 나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불과 엊그제 남자를 보았고, 어제 아무런 일이 없어 남자를 그저 동네를 지나친 사람쯤으로 생각했는데.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에이, 씨발, 하는 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선재는 닫힌 창문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앞에 있는 아이는 눈만 마주쳤다 하면 방긋 웃어준다. 말이나 분위기를 읽는 데 서툰 아이가 오늘만은 왜 이리 다행으로 느껴지는지.
씨발, 뒤엔 별다른 말이 덧붙지 않았다.
선재는 벽에 귀를 붙이고 소리를 들었다.
남자는 혼자 성질을 부리다 지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더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 건가.
그때, 쾅, 하고 다른 게 두들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을 향해 신경을 세우고 있던 탓인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에 선재의 어깨가 위로 들렸다. 또 쾅, 하는 소리가 들린 쪽은 방문 쪽이었다. 선재는 두 귀를 의심하며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안 여네.
쾅, 하는 소리는 현관문에서 나고 있었다. 남자는 어떻게 집을 안 건지, 밖에서 문을 발로 차고 있었다. 현관문이라서 다행인가 싶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세게 차는지 한 번만 더 세게 찼다간 준희에게도 그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선재는 현관 앞까지 가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누군지는 문 열고 묻지 그러냐.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엔 엊그제 느꼈던 굴욕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남자는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것 같았다. 멀리서야 긴가민가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많이 잡아도 20대 후반이었다.
아이도 품에 없겠다, 이참에 침은 왜 뱉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앞에서는 체격도 큰 데다 알파 특유의 위압감이 있어 주눅이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했다. 거기다 한참 어린놈인 경우를 떠올리자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 좀 열자.
늘어지는 말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무슨 생각으로 다시 찾아오고, 건물 밖에서 난동을 부리고, 집 앞까지 찾아와 이러는지. 주소는 또 어떻게 알았으며… 선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문고리를 쥐고 가만있는 동안 몇 초의 시간이 더 갔다.
바로 앞에 있네. 좀 열어줘 봐. 할 말 있다니까요.
구슬리듯 반말을 했다가 존대도 썼다가. 자기 멋대로 말을 했다. 선재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뒤를 한번 돌아봤다. 방 안에 있을 아이 생각만 났다. 아이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선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고, 선재는 그게 지금이라 생각했다. 잠금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아오. 목 아파.”
“집 어떻게 찾아온 겁니까?”
“어. 이 건물 니네 말고 사는 사람 없거든.”
“진짜! 뭐 하는!”
남자가 신발을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놀란 선재가 두 손으로 제지해보았으나 통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은 거의 바위 같았다. 질린 얼굴로 같이 집 안으로 들어선 선재가, 남자의 팔을 다시 잡았다.
“나가요. 일단 나가서 얘기합시다.”
“나랑 얘기하고 싶어?”
남자가 씩 웃었다. 길게 져 있던 흉터가 깊이를 드러냈다.
“나가서 얘기하자고요.”
“그러니까. 나랑 얘기하고 싶냐고.”
“….”
“싫음 여기서 난 잔다.”
남자는 이미 주방을 넘고 거실 한복판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질질 끌려가던 선재가 곤란한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할게요. 합시다. 일단 나가, 나가서.”
선재는 준희에게 무슨 소리가 들릴까 모든 말소리를 최대한 줄여서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자는 선재를 남자는 기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과 눈이 마주친 선재가 부담을 느끼고 먼저 옆으로 돌았다. 반쯤 열린 현관 쪽으로 향했고, 느릿느릿 따라 나오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을 했다.
“제가 잘못한 거 있으면 사과하겠습니다. 제발 이러지 마시고….”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선재는 잘못부터 빌었다.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은 잠시 했을 뿐이다. 당장은 준희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남자에게 제동을 걸어야 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단 말도 있지만, 수중에 있는 돈으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뭘 이러지 말라냐….”
남자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선재는 20대 초반에 흡연을 잠시 했었지만, 그 후론 냄새도 싫어하게 되었다. 창우 또한 비흡연자였다. 연기가 남자 얼굴 근처에서 나기 시작하자 선재는 급히 남자를 끌었다. 밀폐된 형태의 건물이라 아무리 1층이라도 아이에게 영향이 갈 것 같았다.
“여기 창도 없고 환기도 안 돼요.”
“그럼 어디서 필까.”
“건물 밖으로 나갑시다.”
선재는 차분하게 말하며 남자를 계단 밖으로 밀어냈다. 남자는 담배를 문 채로도 웃는 낯을 해 보였다.
낯만 그럴까.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뭐가 웃긴지 소리 내 웃기도 했다.
“여기 어떻게 왔는데.”
턱짓을 하는 건 남자의 버릇인 듯했다. 빌라 밖으로 나온 남자가 턱으로 예의 건물을 가리키며 담배를 쭈욱 빨아들였다.
“…그냥 얻은 겁니다.”
“누구한테.”
“….”
“그건 말하기 싫고?”
남자의 입에선 수상한 말만 자꾸 나왔다. 그걸 알아서 뭘 한단 말인가. 숨을 고른 선재가 마지막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제 오지 마시고,”
“누구 맘대로?”
남자가 눈만 내리깐 채 선재를 쳐다보았다. 밥 먹었냐, 같이 가볍게 되묻는 듯한 투였다.
“그럼 이렇게 행패 부리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신고하기 전에,”
담배를 빨던 남자가 순식간에 가까이 붙었다. 신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거라고, 선재는 거기까지 말했어야 하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입이 꾹 다물렸다.
“진짜 비정상을 못 봤네. 이게.”
남자는 담배를 한 손으로 튕기며 웃었다. 바닥에 떨어진 꽁초에서 기다란 줄이 피어올랐다.
“어? 못 봤지.”
그렇게 물으며 다가오는 남자의 움직임에, 선재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뒷걸음질 치는 선재의 속도에 맞춰 발을 떼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을 뻗었다.
“아, 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선재는 갑자기 뻗어오는 팔에 반사적인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남자는 선재의 머리채를 한 번에 잡아챘다. 얼굴이 위쪽으로 들려, 햇빛이 선재의 얼굴 위로 잘게 내려앉았다. 남자는 열이 받는 듯한 얼굴을 그대로 선재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순식간에 입이 맞부딪혔다.
우웁, 웁, 하는 소리가 목 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혀가 입안 점막을 사정없이 쓸었다. 입안 살이 치아에 눌리기도 하고, 뒤로 꺾인 목에선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혀가 섞이고는 있는데, 그걸 키스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살점이 찢긴 탓에, 선재는 피 맛을 느꼈다. 고통에 눈가가 희게 질렸다.
“하윽!”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선재의 입술 양 끝에서 두 줄기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입 안 가득 머금었던 남자의 침도 뒤이어 떨어졌다.
“피 나네.”
* * *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는 희미했다.
선재는 한동안 뭉친 티슈를 입술에 대고 있어야 했다. 남자가 그리하라고, 티슈를 몇 장씩이나 뜯어 건네준 것이었다. 키스보다는 사고에 가까웠고, 사고보다는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웠다. 선재는 자꾸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뭔가가 절절하게 슬퍼서라기보다, 그냥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키스를 당하면서 느꼈던 거라곤 빠져나갈 수 없다는 완벽한 깨달음뿐이었다.
피나네, 하고 말했던 남자는 곧장 손을 들어 선재의 턱과 입 안을 살펴보았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거칠고 컸다. 선재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그 손가락의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부터 흘리기 시작한 눈물이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 주체가 안 되는 눈물을 벅벅 닦는 식이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집에 휴지 있냐고 물었고,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앞장을 서서 2층으로 향했다.
왜 자꾸 우는데요.
입에 대고 있던 티슈 조각이 입술 안쪽에 붙어도,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선재는 티슈를 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저었다. 눈물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남자가 집에 다시 들어온 지도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거실을 둘러보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지만, 방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선재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두 눈이 벌게졌지만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피 계속 납니까. 이제 안 날 건데.”
보자… 하고 다가온 남자는 선재가 손에 힘을 주고 있던 걸 쉽게 떼어냈다. 입에 물려 있던 티슈 뭉치도 남자가 손으로 빼냈다.
“멎었네. 쯧… 그니까 씨, 왜 지랄발광을 해서.”
남자는 굳이 이를 드러내고 말을 이었다. 선재는 언젠가부터 말도 하지 않았다. 입 부근이 얼얼하고 아팠다. 피가 멎은 게 대수일까. 두려움 때문에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패닉이 올 것 같았다. 남자는 처음에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거실 한복판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두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갔다.
“미안하다니까.”
선재는 남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입이 여전히 아프지만, 알겠다고 중얼거렸고, 그 말이 남자에게 가닿지 않은 것 같자 거실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 다시 그 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굳은 듯 말했다.
은은한 꽃향기가 나던 집이었는데, 남자 때문에 쓰고 독한 냄새가 허공을 감돌았다. 숨을 잘못 쉬는 바람에 목과 코가 아프고, 찢어진 입 안과 입술도 따가웠다.
“…이리 와. 대화 좀 하자. 애는 몇 살 때 낳은 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을 툭툭 쳤다. 이리 오라니까. 다시 말한 남자의 말에 선재의 발이 움직였다. 선재는 발을 질질 끌듯이 걸어, 거실과 주방의 경계 역할을 하는 문턱을 넘었다. 누워 있는 남자 근처로 가 고개를 숙였다.
“서른….”
서른이 넘었다고? 누워 있던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자세를 모로 했다. 선재가 잠시 입술을 움직이다, 그런 말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난 나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무지 형님이시네.”
“….”
“이름은?”
“…민…선재요.”
“에이, 말 놓으십쇼.”
남자는 말을 더 할 것 같았는데, 그저 선재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선재만 넋을 빼고 있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쳐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앉으세요.”
바닥을 또 툭툭. 긴장 때문에 선 채로 가만히 있던 선재가 몸을 천천히 구부렸다. 일단은 남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얼굴이 무심한 것과 별개로, 또 무슨 돌발적인 행동을 보일지 몰랐다.
“와, 형님. 그렇게 억울합니까?”
엉거주춤 앉으면서도 눈물이 툭 떨어졌는데, 그걸 보고 남자가 한 말이었다. 남자의 얼굴엔 다시 장난기가 가득했다.
사실 살면서, 선재는 그다지 많은 알파를 접해보지 못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진 시설과 봉사자의 집을 전전해야 했고, 평범한 학교를 다녀 특수 형질 자체를 낯설어하는 사람만 주변에 가득했다. 오메가인 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여학생들의 구애를 꾸준히 받았지만, 소문이 퍼진 후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재미없는 인생. 선재는 언젠가 제가 살아온 날들을 그렇게 정의했던 적이 있다. 고요하고 소리 하나 없는 삶. 선재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의 아이를 낳아도, 그 모든 걸 비밀로 해야 하는 제 처지를 당연하게 여겼다. 축하를 받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가끔은 요란하게 사랑하는 건, 자신이 살아온 날들과 너무 상반된 일이었다.
“가까이 와보세요. 아팠습니까.”
“….”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
“빡돌게만 안 하면 내 괜찮은 새낀데….”
“제가….”
“말 놓으라니까.”
남자는 눈썹을 꿈틀대며 눈을 위로 들었다. 잔잔하던 눈에 빛이 튀는 것 같았다. 선재가 그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형님한테 이 집 넘긴 새끼.”
“….”
“번호 있죠? 낸테 줘보세요.”
“없어….”
억지로 반말을 한 선재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잇새로 웃음소리를 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누가 보면 억지로 하는 줄 알겠네.
“….”
“억지로 하는 겁니까.”
말에 고저가 없어선지 여간 위협적으로 들리는 게 아니다. 똑바로 고개를 든 선재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아니.”
“그쵸?”
“응.”
찢어진 입술도 입술이지만, 뒷머리에도 얼얼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선재는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눈물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형님 밥은 할 줄 압니까?”
“응.”
“나 밥 좀 얻어먹으러 와도 되죠. 이 시간에.”
선재는 흉측하게 부어오르는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그 말엔 기계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왜기는. 동생한테 밥 좀 주라는 기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은 남자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거실 벽면에 걸려 있던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TV 이거 장식입니까.”
이사 오기 전부터 걸려 있던 텔레비전이었다. 선재는 원래도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떼거나 버리는 게 수월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서비스를 받을 만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아직 정리를 다 못… 해서….”
“애 말고는 짐도 없는 것 같은데.”
“….”
“…이야. 애 얘기만 나왔다 하면.”
“….”
“나를 무슨 개썅놈 보듯이 보네.”
“….”
“뭐. 그 정돕니까.”
“….”
“개썅놈 아니고 내 최범진인데.”
선재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았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좋아 보이는 남자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시종 장난치듯 구는 남자를 향해, 선재는 고개만 끄덕였다. 입이 터진 탓도 있지만, 아까부터 남자의 체취를 계속 맡아 목구멍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 말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범진은 잠까지 청했다. 나 30분 뒤에 깨워 주십셔. 그렇게 말을 하고 정말 10초 만에 잠이 들었다.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에 묻은 물기와 티슈 찌꺼기, 말라붙은 피를 천천히 닦아내었다.
그래도 잠이 들었단 게 어딘가. 선재는 서둘러 주방 개수대로 가 손을 씻고, 잠든 범진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 커다란 상체가 호흡할 때마다 크게 부풀었다 꺼지고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다지 긴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지독하게도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었다. 손을 털고 조용히 방문을 연 선재가 옆으로 고꾸라져 잠이 든 준희의 곁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었을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선재는 아이를 능숙하게 안아 푹신한 낮잠 이불에 뉘어주었다. 눈을 떠서 제 얼굴을 보면 놀랄지도 모른다. 입술이 다 터져 꼴이 얼마나 우습겠나. 아, 하고 제 입을 매만진 선재가 금방 손을 뗐다. 살짝만 닿았는데도 통증이 있었다.
선재는 몇 분간 준희를 돌봤고, 그새 범진이 깰까 봐 재빨리 방 안에서 나왔다. 넓은 평수는 아니어서 금방금방 사람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범진이란 사람은, 제가 한 게 행패인지 뭔지를 죽어도 모를 사람 같았다. 최소한 행패라는 자각이 있다면 저렇게 편하게 잘 수는 없을 테니까. 선재가 문턱 앞에 서서, 잠이 든 범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30분이 얼추 되었을 때 선재가 저기, 하고 말을 꺼냈다. 범진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계속 잠에 빠져있었다.
“저기요.”
“…씨.”
일그러지는 범진의 얼굴을 보고, 선재가 흠칫한 듯 입을 닫았다.
“….”
“몇 신데.”
범진이 커다란 손을 들어 얼굴을 세게 만졌다.
“30분… 지났습니다.”
“뭐?”
가까스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연 선재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멈췄다. 아까 범진은 불같이 화를 내며 반말을 하라고 했었다. 그땐 무슨 정신으로 반말을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안정이 된 상태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깡패 부랑자 같은 남자에게 반말을 하는 게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선재는 무슨 이상한 짓을 또 당할지 몰라 반말로 범진을 깨웠다.
“30분 지났다고….”
퉁퉁 부은 입술과 아픈 입 안 때문에 발음은 많이 뭉개진 채였다. 손이 본능적으로 뺨으로 갔다.
“씹팔… 피곤해 뒤지겠네.”
그런 말엔 대답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던 선재가 다른 쪽으로 애써 눈을 돌렸다.
“이리 와봐요.”
상체를 일으킨 범진이 창가에 눈을 두고 있던 선재에게 눈짓을 했다.
“이리 와보라고.”
범진은 두 번, 세 번씩 말하게 되는 상황을 싫어했다. 점차 구겨지는 얼굴에서 그 기분이 드러났다.
“어….”
입을 거의 닫고 대답한 탓에, 선재의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몇 걸음 걸어온 선재를 쳐다본 범진은, 뒤로 돌아 벽을 쳐다봤다. 넓은 어깨와 등판을 내보이며 손으로 뒷목을 잡았다.
“안마 좀 해보세요.”
“어?”
“안마 좀 해보라고, 씹. 니 자꾸 같은 말 또 하게 할래?”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선재가 두 손부터 일단 뻗었다. 목을 이리저리 꺾기 시작한 범진과 거리를 붙이고, 그의 어깨에 두 손을 내려놓았다.
“어. 거기.”
어설프게 조물거리기 시작하는데, 범진은 만족한 듯한 반응을 금방 보였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선재가 최대한 천천히 그 숨을 내뱉었다. 손에 최대한 힘을 줘, 범진의 딱딱한 승모근을 주물렀다.
손으로 어깨를 만질 때마다 셔츠 깃 안에 묻혀있던 문신이 조금씩 드러나 보였다.
단추를 서너 개 풀어헤친 범진 때문에 선재는 맨살을 더 만졌다. 어깻죽지에도 검은 그림이 가득했다. 별로 시원하진 않을 텐데, 범진은 니미, 하며 시원하다는 듯 굴었다.
“손맛은 별론데 기분이 좋네.”
“….”
그렇게 말한 범진은 손을 올려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그만하란 신호일 것이다.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선재가, 그 손짓에 빠르게 손을 뗐다. 한 번 뒤돌아 선재를 쳐다본 범진은 또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혼자 픽 웃고,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가슴팍 문신이 드러날 정도로 풀려있던 셔츠 단추를 잠근 범진이, 손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거울 좀 줘보세요. 하고 선재가 앞에서 거울을 들고 있도록 시켰다.
범진이 거울 속 자신을 비춰보느라, 선재도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일 눈에 띄는 게 흉터인데, 일반 칼로는 저렇게 지저분한 흉터를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선재는 범진의 시원한 이마와 높은 코, 적당히 얇은 입술을 뜻 없이 쳐다봤다. 유독 튀어나온 눈썹뼈 위의 눈썹은 결이 억세 보였다.
“말 잘 듣네.”
“….”
“이제 갖다 노세요.”
거울을 갖다 놓으란 말이겠지. 선재는 범진의 특이한 사투리 억양에 아까부터 말을 한 박자씩 늦게 알아들었다. 정확하게 어디 말씨라고 하기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이곳저곳이 다 섞인 듯한 말투를 구사했다.
“형님 근데.”
“….”
“입술이 부어서 그런가. 오리 닮았다.”
선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거울을 들고 가만히 있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예쁜 오리들 있거든요.”
범진은 그 말을 하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선재는 재미가 없어 입술 끝만 파르르 떨었다. 입 안 상처 때문에 마음처럼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오리를 찾아주겠다고 휴대폰을 켠 범진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표정을 바꿨다.
이야… 이 씨팔새끼, 했다.
문턱에 서 있던 선재가 그 소리를 듣고 침을 삼켰다. 나갈 것처럼 머리까지 만지던 범진이 저 상태에서 무슨 일이 생긴 듯 구는 게 어디 좋은 징조겠나. 혹시 불똥이라도 튈까, 선재는 긴장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손에서 힘이 빠져, 들고 있던 거울까지 놓쳤다. 쨍, 하는 소리가 나자 범진의 눈이 이쪽으로 단번에 닿았다. 사나운 얼굴이었다.
“쯧… 시끄럽게.”
“미안.”
선재는 사과하고 거울을 주웠다. 주운 거울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려 주방으로 갔다.
그 틈에 몸을 일으킨 범진은 큰 그림자를 드리우며 거실을 지나쳤다.
주방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선재가 뒤돌아보자 갑니다, 했다.
입에 익지도 않은 반말로 그래, 하고 대답한 선재가 현관문 앞에서 입을 여는 범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가 오늘은 시간이 없고.”
“….”
“내일 많이 놀아줄게요.”
그 말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범진은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 따윈 안 하는 것 같았다. 구두에 발을 쑤시듯 넣고, 운동화를 신는 것처럼 앞코로 벽을 몇 번 쳤다. 길이 안 든 새 구두 같았다.
* * *
범진은 다음날에도 선재가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또 행패를 부릴까 봐 선재는 문을 열었고, 둘은 같이 밥을 먹었다. 범진이 사 온 도시락 두 개를 나누어 먹었다.
방 안에 있는 아이는 이미 밥을 먹은 뒤였고, 선재 또한 아이 밥을 함께 먹어 배가 고프진 않았다.
하지만 앞에 범진을 두고 안 먹겠다 말할 순 없어서 그냥 먹었다.
범진이 가고 나선 배탈이 났다. 저녁 즈음에, 뭘 먹인 건가 의심이 될 정도로 속이 좋지 않았다. 소화가 다 돼 나오는 것도 없는데 자꾸 구역질이 났다. 선재는 화장실 불을 켜고 계속해서 변기만 붙잡고 있었다. 범진과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까지도 생각났던 게 그의 나이였다. 선재는 토악질을 하면서도 억울함이 치미는 걸 느꼈다. 범진은 고작 스물넷이었다. 나이에 예민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를 갖고 노는 듯이 구는 범진의 나이엔 화가 났다.
도시락에도 이상한 걸 넣었나 싶었다.
선재는 범진에게서 들었던 욕설에도 역함을 느껴, 다시 변기를 붙잡았다.
그런 시간만 흘렀다.
* * *
“내가 원래는 오메간지 뭔지 그 구분을 잘 못 해.”
“…응.”
“근데 형님은 딱 보자마자 알겠더라고.”
“응.”
젓가락을 들고 있던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은 며칠째, 밥을 얻어먹으러 이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상한 도시락을 사 오지 않아, 차라리 이렇게 먹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선재는 없는 요리 솜씨로 냉장고에 있는 것 아무거나 되는 대로 버무려 상을 차렸다. 오늘 상 위에 올라간 건 싱거운 콩나물국과 한 면이 거의 다 탄 달걀부침, 햄구이였다. 범진은 음식이 형편없는 것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형님은요.”
“뭐?”
“알파 자주 봤냐고.”
“별로 많이 못 봤어.”
“그래도 어떻게 애 낳고 할 건 다 했네.”
범진은 대화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 유치하게 시비를 걸거나 희롱하는 걸 좋아했다. 처음부터 이리될 걸 안 선재가 대꾸는 하지 않고 밥 한술을 떴다.
“애 아부지랑은 뭐, 결혼했습니까.”
지나치는 질문 같았지만, 범진은 제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결혼은 안 했어.”
“그면 애 아부지도 모르는 그런 겁니까.”
범진의 표정이 음흉하게 바뀌는 게 보였다.
“…신고만 안 한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쯧, 소리를 낸 범진은 애초부터 궁금해서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해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오메가니, 알파니, 하는 말을 면전에다 대고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친하지 않은 경우라면 더더욱 예의를 차려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선재는 이렇게 찝찝하고 꺼려지는 남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며 이런 얘기를 하는 것에 당연히 거부감을 느꼈다. 대답하기 싫지만, 대답을 할 때마다 음험해지는 범진의 얼굴을 보는 게 곤욕이었다.
“뭔 생각 하는데.”
“어?”
“뭐. 형님한테 오메가니 뭐니 해서?”
“…아니.”
“애 낳은 거 자꾸 물어서 기분 드럽습니까.”
갑자기 표정을 굳힌 범진은 목소리까지 낮추고 말했다.
“…아니.”
“그럼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마십셔….”
흘리듯 하는 말인데도 눈에선 빛 같은 게 튀었다. 저게 안광인가. 선재는 너무 어이가 없어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범진은 혼자 웃고 장난치다가도 갑자기 살벌한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며칠 전에 다쳤던 입 안이 거의 낫긴 했지만, 마음까지 안정된 건 아니었다. 범진이 무슨 일을 벌이기라도 할까 불안감이 앞섰다.
그렇게 밥 먹는 시늉만 하면서, 생각은 내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왜 자꾸 이 집에 찾아오나.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벌써 며칠째였다. 그런 생각에도 미친 선재가, 준희와 함께 갈 수 있는 시설 같은 걸 알아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연고도 없는 이 동네로 와 무작정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겠지. 당장 지낼 수 있는 집이 있다고 해 오게 된 거였는데. 아무리 집이 있어도 이건 아니었다. 차라리 서울역 한복판에서 지내는 게 훨씬 더 안전할 것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동네. 여태까지도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제일 가까이 있는 마트는 폐업 예정이었고, 어딜 가기 위해 택시라도 부를라치면 몇십 분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런 게 궁금해, 동네 주민인 듯한 범진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연스러운 질문 같은 걸 던질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식사를 끝낸 범진은 화장실로 가 이를 닦았다.
어제, 칫솔 남는 게 있냐 물었던 범진은 새 칫솔을 하나 까 양치까지 하기 시작했다.
진짜 별걸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론 벙긋하지도 못했다. 머리채가 잡혔던 날의 아귀힘이 잔상처럼 남아 머리를 떠나지 않는 탓이었다. 그만큼 맞을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한 대 맞고 끝낼 수만 있다면 맞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선재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제 몸 어디가 쥐어 터지는 상상을 해봤다. 그만큼 남자가 이 집에 있는 게 싫었다. 남자는 분명, 아이에게도 여차하면 헛짓을 할 듯했다.
얼마 보지도 않았지만 그런 확신은 들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몇 번 시비를 걸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다. 빌라 근처에서 야, 야, 거리고 휘파람을 불고 암만 욕을 해도. 저러다 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집을 찾아왔고, 안 된다고 했더니 대뜸 키스를 했고, 잠까지 이 집에서 청한 적이 있다. 이후로도 점심시간만 되면 꾸준히 이 집을 찾았고, 어제오늘은 양치질까지 하고 있으니.
선재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준희에게만은 범진의 영향이 끼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될….
“뭐, 뭐 하는 건데!”
범진이 양치를 끝내고 터벅터벅 나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선재가 거의 처음으로 목청을 높였다.
“왜.”
“줘… 이리 줘… 하지 마.”
“내가 뭘 했는데. 안 그러냐. ”
커다란 품에 준희가 안겨 있었다. 급히 다가온 선재를 쳐다보는 범진의 눈이 일순 싸늘해졌다. 그리곤 보란 듯 아이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고 안 그냐, 하고 묻는 건 덤이었다.
“줘… 이러지 마.”
“아니. 형님. 제가 뭘 했습니까?”
한쪽 입꼬리를 올린 범진이 헛웃음을 치며 물었다.
“아기 갖고 이러는 거는,”
“아니,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선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범진이 준희를 높이 들어 올릴수록 입술마저 질려갔다. 선재는 그런데도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범진을 타일렀다. 괜히 언성을 높였다간 아이만 더 겁을 먹을 것이다. 차분하게 몇 번이나 말한 선재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올라갔다 내려온 준희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만. 이제 됐잖아. 이제 줘.”
“애가 좋아하는데. 왜.”
“…아냐. 이런 거 무서워하니까. 들지 마, 높이.”
“말이 진짜 많아지네.”
기어코 범진 쪽으로 손을 깊이 뻗은 선재가 준희를 안아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목이 벌게진 채로 준희를 안은 선재는 급히 범진에게서 떨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준희는 범진을 향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단다, 하고 범진이 준희의 얼굴을 쳐다봤다. 선재도 준희가 겁을 먹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셋 중 가장 무서움에 떨었던 건 자신이었다.
큰 보폭으로 걸어온 범진이 상체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하지 말까요.”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
“그럼 그쪽에서도 뭘 줘야지.”
“….”
“애 절대 안 건들 테니까.”
“….”
“낸테 키스나 함 해보세요.”
선재가 준희를 품에 안은 채로 옆을 봤다. 신발장 앞까지 다가온 범진이 상체를 까딱거리며 웃고 있었다.
“안 할 거면 나도 형님 말 안 들어주고.”
“….”
범진은 이런 식으로 수치심을 주는 게 재밌는 모양이다. 다시 앞을 바라본 선재가 아이의 머리를 품으로 깊이 붙였다. 코앞에 현관이 있으니, 범진이 저 문을 열고 나가주면 좀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짧게 스쳤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선재는 입술을 혀로 쓰는 범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의 머리에 올라가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아기만 방에,”
“뭐. 지금 해도 되겠구만.”
“….”
“안 해줄 겁니까?”
“…아니. 알겠어.”
선재가 승낙의 뜻을 내비치자 범진이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붙여왔다. 곧 닿은 입술 사이로 굵직한 덩어리가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안으로 혀를 밀어 넣기만 하고 가만히 있는 범진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를 안은 채로 범진의 눈을 쳐다봤다. 범진도 눈을 감지 않고 선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만 숙인 채 혀를 내민 범진은, 선재가 키스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재도 범진이 처음 한 말을 돌이켰다. 제가 해주길 기다리는 범진의 음심에 좌절도 했지만, 빨리 이 사태를 끝내야 한단 생각이 결국은 들었다. 선재가 혀를 움직여 범진의 혀와 입 안 여기저기를 건드렸다. 침으로 점철된 살덩이끼리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공기 사이로 퍼져 나갔다.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입을 맞추던 선재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선재는, 길어봐야 10초나 할까 싶은 키스를 몇 분이나 하게 되었단 것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키스를 하면서도 몇 번이나 입을 떼려고는 했다. 허나 범진이 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다시 키스하지 않으면 여태 한 게 도루묵이 될까 격한 반항도 못 했다. 품에 안긴 아이 때문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혀를 집어넣은 채 가만히 있던 범진이라, 처음엔 선재가 리드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범진의 혀에 놀아나는 꼴이 되었다. 뜨겁고 힘 있는 혀가 입 안 곳곳을 사정없이 핥는데, 들쑤신다는 표현이 딱 알맞을 듯했다. 물론 빌라 앞에서 했던 키스만큼 격하진 않았지만…. 선재는 거기까지 생각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격하든 말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드럽게 못하네.”
범진은, 그냥 그런 인간이다. 키스가 끝나기가 무섭게 험상궂게 말하며 거실로 걸어갔다. 준희를 안고 있던 선재가 아예 뒤를 돌아 현관문 쪽에 시선을 던졌다. 완전히 헛사셨네. 그런 말도 덩달아 들렸다. 거실을 쳐다보면, 또 제집을 돌아다니듯이 집 안 이곳저곳을 보고, 만지고 있겠지. 선재는 뒤돌아보기가 싫었다. 반짝이는 입술을 한쪽 소매로 닦기만 했다.
“형님 거기 서서 뭐 합니까?”
“네가 그리로 간 거야.”
범진은 소리 내 웃었다. 잘도 대답하는 선재가 웃기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이리 와봐요.”
선재는 계속해서 현관문만 쳐다보았다. 준희가 품에 안겨 뭔가를 웅얼거렸다.
“아, 또 성질 돋우네.”
뭘 했다고 성질을 돋웠다는 걸까. 선재는 억울한 마음으로 뒤를 돌았다. 품 안에 있는 아이는 가만히 안겨 있던 이유가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얇은 눈꺼풀이 느릿느릿하게 닫혔다 열리고 있었다. 범진이 이 시간에 늘 오니 준희의 낮잠 패턴이 다 망가졌다. 원래도 조용히 못 잤는데, 오늘은 아예 안겨 나오기까지 했다.
“아기… 재우고 갈게.”
“뭘 재워. 잘 자는데.”
“오래 안 걸려.”
“오케. 그럼 1분만 셉니다….”
상식도 논리도 없는 새끼. 마음속으로 읊조린 선재가 준희를 안고 조심해서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방 안엔 햇살이 가득했다. 따로 커튼을 달지 않아, 준희가 낮잠을 잘 때면 창문이 있는 벽과 가까이에 붙여 뉘어야 했다. 선재가 그 이불 위에 준희를 눕혀 주었다. 이대로 좀 더 지켜봐야 하는데. 선재의 손길에 끔벅끔벅, 아이는 눈을 느리게 떴다가 감았다.
쿵, 쿵.
갑자기 들린 소리에 선재의 고개가 돌아갔다. 방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쿵, 쿵. 범진이 거실에서 바닥이라도 치는 모양이었다. 검지나 중지쯤으로 굳이 소리가 들리도록 세게. 크고 요란한 소리는 아니라서 잠든 준희를 예민해지게 만들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기다리라고 했는데 저렇게…. 선재는 다시 쿵, 하고 바닥을 찧는 듯한 소리에 인상을 썼다. 정말 개자식이 따로 없었다.
저도 성질이란 게 있다. 울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잔뜩 무서워도 했지만. 그건 그거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다. 키스를 해보라고 해서 그것까지 군말 없이 했다. 그런데도 저런 행동을 하는데 어찌 성질이 안 날까. 저만 괴롭히면 모르겠는데 아이도 은근히 괴롭히려는 저 마음엔 깊이 묻어뒀던 화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선재는 숨을 골랐다.
그 사이, 닫혔던 문이 틈을 드러냈다.
“빨리 안 나오고… 확.”
문을 연 범진도 더는 참지 못하겠단 얼굴이었다. 그를 올려다본 선재의 얼굴에 어이없단 기색이 비쳤다.
그 말만 하고 나가버린 범진은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니까, 하고 낄낄댔다.
더는 말도 뭣도 통하지 않겠지. 선재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안쪽으로 열려 있던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서 닫았다.
“가까이 와봐요.”
문 앞에 선 선재를 향해 범진은 성의 없이 말했다.
“왜.”
“씨팔 자꾸 토 다네.”
욕설은 헛웃음에 섞여 나왔다. 선재는 어떤 버팀도 범진의 심기만 건드릴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근데도 자꾸 오기가 생겨 말이 말대로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문득씩 보이는 범진의 앳된 얼굴 때문에 그런 오기가 생겨나나 보았다. 눈물이 날 만큼 비참했다.
범진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손으로 바닥을 건드는 건 습관인 듯했다. 선재가 대꾸 없이 가만 서 있자, 바닥을 손뼈로 툭툭 건드렸다. 오라니까?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한 선재를, 범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봤다, 크게 꿈틀거리는 눈썹이 선재의 눈에도 들어왔다. 흉터도 깊이 패고 있었다. 얼굴을 찌푸린 탓에 굴곡진 얼굴 곳곳에 그늘이 생겼다.
범진이 눈을 맞추며 앉으세요, 말했다.
“형님….”
대답 없이, 선재의 눈이 범진을 향했다.
“예쁘면 답니까?”
범진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예? 대답 좀 해보세요.”
“….”
무슨 대답을 바라나 몰랐다. 가만 쳐다보던 선재가 눈빛만 사방으로 퍼뜨렸다. 살짝 눈을 피하는 듯하자, 범진이 얼굴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눈을 돌리고…. 개그튼 년이.”
졸지에 개같은 년이 된 선재의 낯빛이 천천히 변했다. 범진은 욕에도 독특한 억양을 섞을 때가 있었다. 애초에 평범하게 들리는 욕은 거의 없었다. 4, 50대나 구사할 법한 말투도 자연스럽게 입에 담곤 했다. 이번 욕이 그랬다.
“…욕은.”
“예.”
“하지 마. 아기 들을 수도 있으니까.”
아이에게 그런 더러운 말을 들려주긴 싫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그런 지저분한 말부터 입에 익히면 어쩌나 싶었다. 범진이 욕으로만 나열된 문장을 구사하면, 제가 좋은 말만 쓰려고 노력해온 게 다 말짱 도루묵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사람인 것 같진 않지만 최소한의 주의는 주고 싶었다.
“이야, 화내는 겁니까.”
가까이 있던 얼굴을 범진은 더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들이 특히나 부각되고 있었다. 눈썹과 코,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코끝까지 닿게 되자, 선재가 고개를 돌렸다.
“어딜. 씨발.”
범진이 선재의 턱을 잡고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이게, 진짜,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며 선재의 턱을 흔들었다. 나이를, 헛으로, 하며 흔들 땐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처먹었나, 까지 이은 범진은 선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턱을 마무리하듯 던졌다.
“화내는 건 좋은데.”
“….”
“고개 씹팔. 한 번만 더 돌렸다가는 죽는다. 진짜로.”
대답이라도 바라는지. 범진은 던지듯 놓았던 턱을 다시 잡았다. 억지로 고개가 들린 선재가, 범진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입을 열고 알겠다는 말을 얼버무리듯 했다.
“다시 말해봐요.”
순순히 손을 놓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알겠다고.”
이후로 범진은 별말이 없었다. 선재를 곁에 앉혀두고 제 할 일을 했다. 휴대폰을 보고, 전화를 받고, 뭐라고 명령하듯이 얘기를 하기도 했다. 선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나 갑니다. 마지막 통화를 끝낸 범진이 한 말이었다. 선재는 그 말이 반가워 금방 화색이 돌았다. 어, 하고 챙길 것도 없는데 물건 챙기는 시늉을 했다.
“형님.”
들어도 들어도 껄끄럽기만 한 호칭으로, 범진은 선재를 불렀다. 선재는 살면서 ‘형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형이면 형이지…. 게다가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보는데 어떻게 그런 호칭을 잘도 입에 담을까. 먼저 현관문 쪽에 다다른 선재가 귀에서 맴도는 형님, 하는 소리를 지우려고 했다. 다시 “형님.”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았을 땐, 너무 가까이에 있던 범진과 눈을 마주쳐야 했다.
형님이라는 호칭이 어떻단 생각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입을 붙여오는 범진 때문에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됐기 때문이다. 선재의 입 안으로 굵다란 혀를 그대로 밀어 넣은 범진은, 목구멍까지 그 혀끝을 뻗었다. 선재는 구역감 때문에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뒷머리에 닿은 범진의 손 때문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식하게 잡아 뜯는 건 아니지만, 뒤로 넘어가지 못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선재의 입술이 한껏 짓뭉개지고 나서야, 범진은 입을 뗐다.
“폰 줘봐요.”
손을 곧장 입으로 가져간 선재가 그 말을 한 범진의 눈을 불쾌하단 얼굴로 쳐다봤다.
“줘보라니까?”
범진이 손을 위로 슬쩍 드는 게 보였다.
“지금 나랑 뭐 하는데요.”
가만히 있는 선재가 못마땅한지, 범진이 손을 더 높이 들었다. 확, 하고 겁을 줬다.
현관문 앞에서 갈 듯, 가지 않는 범진 때문에 선재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또 범진의 입이 열리려는 것 같자, 선재의 몸이 급하게 옆쪽으로 돌았다. 방으로 들어가 수납장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잠금장치도 따로 안 해놓은 휴대폰이었다. 범진은 이것저것을 누르는가 싶더니, 내 번호. 하고 선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액정엔 번호 열한 자리가 찍혀 있었다.
어물쩍거리는 사이, 범진이 뒷주머니를 몇 번 뒤적였다. 꺼낸 것은 지갑이었다.
범진은 밥값이라며, 5만 원권 지폐 몇 장을 손가락에 끼워 선재를 향해 내밀었다.
선뜻 받지는 못하고 계속 가만히 있자, 범진이 인상을 팍 썼다. 선재의 손이 반사적으로 돈에 가닿았다. 진짜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범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문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고, 준희가 칭얼거리는 소리도 뒤이어 들려왔다. 범진이 건넨 돈은 100만 원 정도였다. 굵고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지폐가 껴있어 많아 봐야 열 장인 줄 알았었다. 뭐가 됐든 밥값 명목으로 받기는 큰돈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선재가 소리가 들린 방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