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9)

* * *

“맛없습니까.”

“아니….”

반듯한 테이블 정중앙의 화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범진은 옆에 앉은 준희만 신경 쓰는 선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근데 왜 안 먹는데요.”

“입맛이 없어서….”

대낮부터 고깃집에 온 건 범진의 선택이었다.

선재는 자꾸 쳐다보는 범진의 눈빛을 느끼면서도 눈을 제대로 들진 않았다.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밤에 어떻게 범진을 사정시켰는지가 자꾸 생각나려 했다.

맨들맨들한 발을 확인하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었음에도, 미끄러운 뭔가를 밟은 듯한 감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형님.”

“응.”

“형님 젖에 피어싱 하나 할까?”

설익은 고기를 그대로 입에 넣어, 범진의 입가엔 핏물이 배 나오고 있었다. 괜히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아, 선재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어? 할까요?”

“…싫어.”

“왜요. 꼴릴 것 같은데.”

“….”

“얼굴 이래 생겨놓고 젖에 그딴 거 달고 있으면, 이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지만, 그런 걸 상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찝찝했다. 선재는 이야, 하며 괜히 저 들으란 식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범진이 싫었다. 최대한 티를 안 내고 아이에게 죽을 떠먹여 주고 있지만, 범진과는 잠시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진짜 하기 싫습니까.”

범진은 거의 생고기나 다름없는 고기를 입에 몇 점 넣더니, 다 지나간 말을 또 반복해서 했다. 말엔 아까보다 가시가 돋아 있었다. 눈으로 범진의 얼굴을 살핀 선재가 조용히 대답했다.

“어, 안 할래….”

기어들어 간 선재의 끝음에, 범진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면 씹.”

짧고 상스러운 욕을 지껄이며 혼자 무슨 상상을 더 해보는 듯했다. 선재는 앞에서 구워지고 있는 소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이에게 죽만 먹이고, 저는 밑반찬만 조금 주워 먹었다.

밥을 먹으러 아침부터 고깃집에 올 줄은 몰랐다. 엄밀히 따지면 오전 11시니 아침은 아니지만, 첫 끼로 소고기를 넣기는 무리였다.

선재는 어제저녁에도 뭘 먹지 못했다. 범진이 종일 끌고 다녀 입에 음식을 넣을 겨를이 없었다. 배가 고플 만도 하지만, 고기라면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아침엔 양념육도 잘 못 먹는다. 붉은 소고기가 불판에서 금방 분리되고 있었다. 익혀도 잘 못 먹겠는 걸, 범진은 익히지도 않은 채 입에 넣고 있었다.

“왜 안 먹습니까. 이거 좋은 고긴데.”

“아침엔 고기 잘 안 먹어.”

“드세요.”

범진이 집게로 고기 한 점을 내밀었다. 핏물이 뚝뚝 흐르는, 손바닥만 한 고기였다. 어느 부위인지 잘리지도 않은 걸 내밀고 있었다.

“….”

“입에 넣어보세요. 이거.”

범진이 집게를 흔드는 바람에, 고기에선 나온 기름과 핏물이 동시에 불판 쪽으로 떨어졌다. 숯에서 치이-하는 소리가 났다.

“…나 안 먹,”

“누가 씨, 형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랍니까. 내 말 듣고 잡수세요.”

선재는 범진을 한 번 쳐다보고, 옆에서 죽을 오물거리는 준희를 곁눈질로 살폈다. 정말 안 먹고 싶은데 범진이 보이고 있는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 결국, 젓가락으로 그 고기를 받아든 선재가, 울며 겨자 먹기로 잘리지도 않은 그 고기를 입 안에 넣었다. 한쪽 면이 아예 안 익은 것인지 받아들 때부터 벌건 피가 흥건했다.

“맛있죠.”

선재가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일단 막고 보았다.

병원에 갈 정도로 속이 안 좋았었는데 이런 것까지 먹으면.

선재는 입 안에 고기를 머금은 채로, 약국에서 사지 못한 약 생각을 했다.

그리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제저녁부터 오늘까지 별다른 증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범진과 함께 있으면 그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게 아닌가.

눈가를 찌푸린 선재가,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고기를 씹으며 침을 삼켰다. 육즙과 핏물 때문에 입 안에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선재는 따라 놓았던 물을 마시며, 덩어리진 고기를 알약처럼 목구멍 안으로 어떻게든 쑤셔 넣었다. 그러면 넘어가긴 했다.

아무리 소고기라도 이렇게 안 익혀서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선재는 범진에게 트집잡히지 않으려고 밑반찬이라도 많이 먹는 시늉을 했다.

아이가 죽을 남겨, 그 죽을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먹었다. 범진이 그게 맛있냐고 묻는 말엔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선재는 식사가 끝난 뒤, 제 다리 위에 두었던 점퍼를 아이에게 입혀 주었다.

범진은 카운터로 가 계산을 했다.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30만 원이 넘는 돈이 나온 것 같았다. 겨우 한 끼 먹는 건데 그 정도 돈을 막 쓰는 범진의 정체가 갈수록 의심이 되었다. 선재는 여태 봐 온 것도 있고, 범진의 말버릇이나 행동 같은 것으로 범진의 직업 같은 걸 유추했다. 어떻게 돈을 벌고, 그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지만 우선 깡패나 조폭 같은 단어만 떠올랐다. 머릿속엔 그런 범진과 어떻게 하면 덜 엮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형님.”

거칠게 차를 출발시킨 범진은 말도 뜬금없이 했다.

“응.”

“병원엔 또 안 가도 되고요.”

범진을 흘끗거린 선재가 대답을 피했다. 안고 있던 아이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귓구녁 내가 열어주까요.”

“….”

품으로 아이를 안은 선재가 그땐 아니란 말을 했다. 일정이 정확하지 않아 저도 병원에 갈지 안 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가운 그거 괜찮아 보이던데.”

“….”

“형님한테 잘 어울리드라고요.”

“….”

“안에 암것도 안 입었을 거 아닙니까.”

희롱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선재는 앞만 쳐다봤다. 품에 안은 아이의 등을 적당히 토닥이며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안 입긴 뭘 안 입나. 속옷을 입은 채로 걸친 가운이었는데. 선재는 의욕을 잃어 이렇게 받아치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아이를 안은 채 앞유리창에만 시선을 던졌다.

“진짜 말을 자주 씹네.”

“아니. 묻는 말 아니어서….”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자, 선재가 범진을 쳐다보며 급히 입을 열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

워낙 말을 흘려들어 가운 이후로는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선재는 노곤한 제 정신 탓을 하며 말을 둘러댔다. 혹시 몰라 아이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고, 품으로 가득 당겨 안았다.

“내 말 제때 듣고 대답하세요.”

“…어.”

“…씹팔, 이래 굼뜬 년은 또 처음이네.”

범진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운전대를 크게 꺾었다. 한적한 길거리여서 위험 요소는 없었지만, 워낙 운전을 거칠게 했다. 괜히 범진의 성질을 돋운 것 같아 선재는 답답한 마음을 느꼈다. 그런 변태 같은 말에 일일이 반응을 해야 하나. 속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꽉 들어찬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도로가 나왔다.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거치는 좁은 도로였다. 선재는 범진의 차로 어제오늘 왔다 갔다 하며, 근방을 이렇게나마 살폈다. 걸어서 길가로 나왔을 때도 마땅한 건물 하나 없었지만, 식당가에서 집 쪽으로 와도 새롭게 눈에 띄는 풍경이 없었다. 청테이프가 잔뜩 붙은 식당을 포함해, 근처엔 죄 문을 닫은 업장뿐인 것 같았다. 선재는 어느새 도착한 집 앞에 내려 범진이 가는 걸 지켜보았다. 점점 작아지는 차를 가만히 쳐다보며 마음을 놓았다. 드디어 범진과 헤어졌다는 생각에, 선재는 가벼운 걸음으로 아이와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병원을 가게 된 건 2주가 넘어서였다. 분명 일주일 안으로 방문해달라고 했는데, 범진 때문에 기회가 잘 나지 않았다. 바쁘지도 않은지 이틀에 한 번꼴로 꼭 점심을 먹고 가는 범진은 언제 오는지, 아니면 오지 않는지 신호도 주지 않았다. 역정을 낼까 봐 어딜 가면 꼭 가야 한다고 얘길 해야 했다. 선재는 평일 중 범진이 언제 제일 바쁜 것 같은지를 생각하고, 금요일에 병원 예약을 잡았다.

“병원에서 꼭 오라고 그래서….”

[이, 씨…밸련이… 하필 금요일이냐.]

범진은 2주가 가는 동안, 금요일엔 집으로 오지 않았다. 그걸 기억하고 금요일에 예약한 선재지만, 범진이 그 마음까지 읽었을까 욕설엔 입이 다물렸다.

“나도 갑자기 연락받은 거라.”

[그래서, 병원 형님 혼자 갈라고?]

“가야지. 나는 몰랐어. 너 금요일에 안 되는 거.”

선재는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자신에게 놀랐다. 위기에 처하니 이런 기지도 발휘되나 보았다.

그동안, 범진이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하는 말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범진과 탈의실 앞에서 만났던 기억도 좋지 않았고, 가라오케로 끌려가 기절까지 한 것도 잊히지 않았다. 그런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과 병원처럼 잘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게 두려웠다. 한 번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될 수 있으면 그렇게 되는 상황 자체를 안 만들고 싶었다.

그럼 그러든가, 하고 반쯤 포기한 범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씨발년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건 덤이었다.

그래도 이쯤에서 끝나 다행이다. 선재는 눈을 감고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후우, 하고 범진 몰래 숨을 골랐다.

아이의 어린이집까지 예약하자 일은 순조로이 끝날 듯했다.

내일 준희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병원을 들른 다음 시내에서 옷가지 같은 걸 살 생각이었다. 짐을 최대한 적게 챙겨와 여름에 입을 옷이 없었다. 벌써 6월이 되었으니 여름 준비도 슬슬 해야 했다.

선재는 식탁 앞으로 가, 거기 놓인 상자 안에서 달걀과 쌀, 소고기 등을 꺼냈다. 그나마 가깝던 마트가 폐업한 뒤엔 시내의 마트에서 배달을 받아오고 있었다. 이틀 전에 전화 주문을 해놓으면 3일을 넘기지 않고 물품들이 배달돼 온다. 맨 밑에 있던 빵까지 꺼낸 선재가 빈 상자를 신발장 근처로 내놨다.

이렇게 익숙해져 가는 동안, 범진이 뺨을 때렸던 패거리와는 만난 적이 없었다. 범진에게 또 해코지를 당할까 근처를 얼씬거리지도 않는 듯했다.

밤이 되면 저나 준희의 숨소리만 들리는 이곳의 밤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선재는 천으로 된 커튼을 묶어, 방 안에 햇빛이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낮잠에서 깬 아이가 자동차 장난감으로 바닥을 쓰는 게 보였다.

“준희 내일 친구들이랑 좀만 놀자.”

“에.”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선재는 또래 아기를 만나면 늘 반가워하던 준희가 내일 얼마나 좋아할지를 생각했다. 아직 너무 어려 어린이집에 보내긴 좀 그렇지만, 워낙 순한 아이라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것이다. 미소를 띤 채 아이의 손을 잡은 선재가 또 에, 하고 반응하는 준희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끝마친 선재는, 택시를 타고 준희부터 시내의 한 어린이집에 맡겼다. 20분 정도 지켜보았는데, 또래 아이들과 특히나 마음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선재는 유리 창문을 통해 처음 보는 아이에게도 잘 웃어주는 준희의 모습을 보고 안심을 했다. 일부러 빨리 왔는데, 아이를 맡기고 곧장 병원으로 향해도 될 뻔했다. 시간이 많이 남은 선재는 하루 맡기는 비용을 결제하며 원장에게서 이런저런 말들을 들었다. 철학이 있는 분이어서, 말을 듣는 내내 지루함이라곤 없었다. 준희보다 더 어린 아기도 많다는 말과 체계화된 24시간 돌봄 시스템이 선재가 듣기에 가장 솔깃했다. 돈이 좀 들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곳에 아이를 맡기는 게 좋았다. 우연히라도 이 어린이집을 알게 돼, 선재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린이집 근처에서 탄 버스는 병원 정류장 바로 앞에서 섰다.

저 혼자 움직이는 거니 버스를 타도 괜찮았다. 선재는 낡은 시내버스 후면에 적힌 13이란 숫자를 머릿속에 제대로 새겼다.

도착한 시각은 11시였다. 11시 30분에 도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선재는 병원 입구로 들어가 접수도 순조롭게 끝마쳤다. 내원 기록이 있어, 새로 작성해야 할 서류 같은 것도 없었다.

금요일이라 2층에서 대기하는 인원이 전보다 많았다. 선재는 진료실 근처 의자에 앉아 제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민선재 님?”

대기 인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특정 과만 그런 모양이었다. 무안할 정도로 곧장 불린 이름에, 선재가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났다. 바로 맞은편에 있던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의 의사가 보였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닌데, 상담을 하며 얼굴을 계속 쳐다봐선지 낯이 익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아,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어… 검사상으로는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요즘은 좀 어떠세요.”

“요즘….”

선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오긴 했지만, 증상이 없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보다는 좀 덜한 것 같네요.”

에둘러 말한 선재의 눈이 모니터 쪽을 향했다. 전화를 받았을 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정말 별 이상이 없는가 보았다.

“원래 검사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 따로 병원에 오라고는 연락하지 않는데.”

“네.”

“선재 씨한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잠깐만요.”

의사가 손짓하자, 바로 옆에 서 있던 간호사 한 명이 알겠다는 듯 진료실 밖으로 나가주었다. 선재의 심장이 밖으로 나온 것처럼 쿵쿵, 뛰기 시작했다. 못 할 말이라도 있나? 선재는 자연히 큰 병 생각을 했다. 듣도 보도 못한 희귀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간호사가 나가고도 한참 뜸을 들이는 의사 때문에, 선재의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증폭되었다.

“어, 선재 씨 혹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신 건 아닌가 해서요.”

“네?”

“지속적으로 폭행이나 학대를 당하고 있다든가….”

의사는 말을 얼버무렸다. 큰 병에 관해서는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말을 듣던 선재가 입술만 조금씩 움직였다. 어떤 대답도 내지 못했다.

“사실 그날 지하층에서 어떤 남자가 행패 부리는 걸 봤습니다. 곧 선재 씨랑 만나는 것도 봤고요. 거의 끌려다니시길래, 다음에 내원하시면 물어보려고 했습니다만….”

시간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선재는 기어코 그 꼴을 보였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감사하긴 한데 그런, 그런 건 아니라서요.”

“부담 없이 말씀하세요. 대처할 방법이 있으면.”

“아뇨…. 괜찮습니다.”

섣불리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단 생각이었다. 선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말을 두어 번 더 했다. 의사는 선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저 말이 사실인지만 가늠해보는 듯했다.

범진이 무섭긴 하지만, 그의 화를 돋우고 싶지도 않았다. 의도가 뻔한 범진의 장난이었겠지만, 범진은 밥을 먹으며 부러 살벌한 이야기 같은 걸 해오곤 했다. 손이 잘리니, 머리가 뽑히니, 같은 말들. 선재는 그 앞에서 매번 무덤덤한 척 굴었지만 속은 그러지 못했다. 범진이 무서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

“그때 아이와 둘만 사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신경이 많이 쓰이더라고요.”

“….”

“이거 제 명함인데, 무슨 일 있으시면 저한테 직접 연락해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서요. 진료받으러 오시는 오메가 분들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아서… 늘 유심히 보려고 하는 것도 있고요.”

의사가 베푸는 호의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의사는 안경을 올리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돕겠노라 말을 했다. 가까운 사람도 아니고, 원래 알던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이 있는 것에 선재는 놀라며 진료실을 나왔다.

그대로 대기석에 앉은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정말 도움을 처해야 하는 상황일까? 그러나 어떤 도움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면 모르겠다. 범진은…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니까. 나중에 있을 일 같은 것만 생각이 났다. 일어나지도 않은 보복이 두려운 선재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자리를 나서려던 선재가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잉, 하고 진동이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형님. 병원입니까.]

“…어.”

[나 지금 일이 빨리 끝나서 그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 그래.”

[집에 빨리 기어들어 가세요.]

“…아기 데리러도 가야 하고… 네가 먼저 도착할 수도 있으니까.”

[내 사실 병원 앞인데요.]

“어?”

[병원에 있는 건 맞나 보네. 내려오세요.]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대화. 선재는 잠시 넋이 나가, 끊어진 휴대폰을 계속 잡고 있었다. 임신한 남자가 선재 앞을 지나쳤다.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선재 또한 그런 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백창우와 지내며 힘들었던 시간들은 지금에 비하면 정말 별 게 아니었다. 왜 작은 일에도 고통을 받았을까. 지금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기만 했다.

터덜터덜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선재의 몸엔 힘 하나 없었다. 1층 약국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가지고 왔던 처방전을 만지작거린 선재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처방전 유효기간은 길어야 2주였다. 그것도 선재가 오메가라 지연할 수 있는 일수였다. 이대로 다시 진료실에 가기도 그렇다. 선재가 1층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 밖엔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처럼 뜨거운 공기가 선재의 팔에 닿았다. 어디 있다는 거야… 주차장 앞쪽을 내다본 선재의 시선이 옆쪽에도 가닿았다. 익숙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범진의 레인지로버는 주차장의 선을 전혀 지키지 않은 채 주차되어 있었다. 경계라고 쳐놓은 선을 마구 침범하고, 세 대가 주차될 수 있는 공간에 멋대로 바퀴를 걸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한 선재가 속도를 높였다.

선재는 조수석 문 앞까지 가 표정을 찡그리고 섰다. 분명 차에 타고 있을 범진이지만, 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불안하고 더웠다. 햇빛 때문에 눈가가 자꾸 내려앉았다.

몇십 초나 갔을까. 차 문은 뒤늦게 열렸다.

“형님.”

선재가 차에 오르기도 전에, 범진은 형님, 하고 선재를 불렀다.

“어…?”

“이 쌍판으로 어째 아새끼를 한 개만 깠어요.”

“뭐?”

“씨발 주변 개새이들 박고 싶어서 어째 참았나 싶다.”

“….”

범진의 눈이 이상한 방향으로 번뜩였다. 애써 못 들은 체를 한 선재가 안전벨트를 매려고 손을 옆으로 뻗었다.

“어? 내가 묻잖아요.”

“그게 무슨 질문인데….”

“뭐요.”

“…그런 질문이 어딨냐고. 너도 대답 못 하는 거면 나한테 묻지 말지 그래.”

“내가 형님이라면요? 내가 형님이면 낸테 벌써 대줬지.”

말이 어디로 튈지도 모르겠고, 듣고 싶지도 않다. 선재는 말로 범진을 설득하려고 한 걸 또 포기하게 되었다. 차 안인데도 앞 유리로 떨어지는 햇살이 뜨거웠다. 에어컨 때문에 찬 공기가 돌고 있었지만 열이 올랐다.

“입이나 벌려보세요.”

“….”

몸을 쭉 뺀 범진이 선재의 목덜미를 확 잡아챘다. 잠깐 버티던 선재가 우악스러운 힘에 고개가 꺾인 채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범진의 혀 기둥은 억세기 짝이 없었다. 눈가를 찡그린 선재의 입 안에서 범진의 혀가 활개를 쳤다. 목젖까지도 훅 뻗어오는 혀 때문에, 선재가 범진의 가슴을 힘껏 밀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키스를 끝낼 수 있는 결정권은 범진에게 있었다.

“형님 대가리는 그냥 장식입니다. 뭘 할라고 하지 마세요.”

입을 떼자마자 그런 소리를 한 범진이 급하게 차의 속도를 높였다. 침 범벅이 된 턱과 입을 티슈로 닦는 선재의 손이 몇 번이나 얼굴에서 미끄러졌다. 한 번을 정상적으로 돌지를 않는다. 이런 골목에서 이렇게 속도를 내는 건 범진뿐이었다. 선재는 얼굴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러는 동안 범진이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든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낯선 도로의 연속이었다. 선재는 뒤늦게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범진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았었다. 어디 가? 어디로 가는 건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늦어도 3시 이전에는 준희를 데리러 가겠다고 어린이집에 말했었는데. 범진은 너무 멀리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길눈이 어두운 선재였지만 100km/h가 넘는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마땅한 종착지가 나오지 않는 게 불안한 마음을 들게 했다.

“배고픕니까.”

“아니. 어디 가는지나 말해.”

“내가 어디 가는 거랑 형님이랑 뭔 상관인데.”

휴게소에 들른 범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차에서 내려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흡연 구역이 코앞에 있는데도 주차장 한복판에서 뻑뻑 연기를 뿜는 모습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배고프냐,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냐, 가만히 있어라. 그 정도가 전부였다.

“어디로 가는지는 말을 해줘야지…!”

웬만해선 흥분하지 않는 선재에게도 한계란 있는 법이다. 언제까지 같은 질문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큰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어디에 가는지만 말해달라고 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사람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선재는 크게 지른 소리에 자신도 놀라고 말았지만, 범진이 상체를 숙여 차창 안을 들여다보는 행동을 취하자 놀란 티도 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어렴풋이 웃는 범진의 얼굴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 일그러뜨린 얼굴인가 싶었는데 입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선재가 어떻게 큰소리를 치는지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눈이 치떠진 채 선재가 있는 쪽을 쳐다보는 통에, 이마엔 굵은 금이 가 있었다.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자신에겐 다른 곳에 맡기고 온 아이가 있다. 선재는 조금 전에 고함을 지른 이유에 대해 혼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누구나 도출이 가능한 결론이지만 그게 곧 범진이 화내지 않으리란 확신이 되어주진 못했다. 순식간에 차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선재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디지게 시끄럽네.”

“…어디 가는지 말해줘. 그래야 아기 어린이집도 시간을 맞추고.”

“서울 갑니다. 서울.”

“왜?”

“알아서 뭐 하게요.”

범진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도 가감 없이 내뱉었다. 저 씨팔, 하고 앞을 쳐다보며 웃었다.

차를 타기 전에도 가래침을 많이 뱉는 것 같았는데, 운전석에 올라서도 범진은 창문을 열고 침을 뱉었다. 고속도로에선 창문을 열지 못하니 제 다리 사이에도 침을 뱉곤 했다. 선재는 한숨을 쉬며 밖을 쳐다봤다. 여름과 어울리는 새파란 산이 주변에 가득했다.

미끄러져 나아가는 검정 차 한 대가 주차장을 크게 돈 뒤 휴게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 * *

두 시간이 지나, 선재는 차량 시계를 쳐다보며 이따금 아랫입술을 물었다. 서울임을 알리는 건물이나 표지판들이 속속들이 눈에 띄었다. 진짜 왔네. 미쳤구나. 두 시간이 다른 곳에 가버릴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서울에 도착하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선재는 앞만 보는 시늉을 하면서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자꾸만 살폈다.

“뭐 봅니까?”

“…뭐가.”

“볼 거 뭐 있다고 쳐다보는데.”

“그냥 보는 거야.”

“씨이팔, 잘도 그냥 보겠네.”

“…진짜 그냥 보는 건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선재의 말은 어느 건물 앞에서 멈췄다. 범진은 운전도 장난감 차를 운전하듯이 했다. 선재는 옛날에 따놓은 면허가 있긴 했지만, 실운전 경험은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범진보다는 제가 운전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고는 생각되었다. 운전도 참 성격처럼 한다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내진 않았다.

“내릴 겁니까.”

범진은 주차를 한 것 같지도 않게 주차하고 내릴 거냐 물었다. 인도에 걸린 바퀴가 위태로웠다. 주변을 살핀 선재가 이곳이 주차해선 안 될 구역인 것도 금방 파악했다. 지나는 사람들이 웬 차가 여기 있나 하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재는 보닛 앞에서 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키는 범진의 모습을 가만 쳐다봤다.

왠지 발가벗고 도로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느릿하게 벨트를 푼 선재가 벌써 뒤돌아서 걷기 시작하는 범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범진은 보폭도 크고 걷는 속도도 빨랐다. 잠깐 멈칫하면 뛰어가야 속도가 맞을 정도였다. 선재가 어느 건물의 지하로 사라지는 범진을 보고,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범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건물 2층은 주점이고 3층은 박스나 종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건물의 인상을 떠올리는 선재의 얼굴이 미묘하게 떨렸다. 차에 앉아있을걸. 범진이 지하층에 있는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며 뒤를 흘끗 쳐다보았을 땐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 남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 선재가 범진처럼 문을 당겨 열었다.

“….”

내부는 바닥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선재가 끽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 앞에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범진이 뒤를 돈 채 누군가에게 이것저것 말을 하고 있었다. 다 들리진 않았지만, 누군가를 손보니 마니 하는 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괜히 따라왔단 생각은 갈수록 더 들었다. 선재는 사실 배가 조금씩 고팠는데, 밥이라도 먹을까 싶어서 범진을 따랐던 것도 있었다. 뒤늦게 제 안일한 생각을 탓한 선재의 눈이 범진의 뒤통수에 완전히 붙박였다.

“형님.”

범진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앞으로 다가가자 범진과 말을 나누고 있던 사람의 얼굴도 드러났다.

“형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형수라고 했는데, 남자는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옆을 슬쩍 쳐다본 선재가 곁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

“아직 형수까진 아닌데.”

범진이 재밌다는 듯 말을 더했다.

“곧 형수 될 몸 아니시냐.”

낯선 남자가 그런 말을 하자, 범진이 크게 웃었다. 선재만 뭐가 웃긴지를 모르고 멀뚱하게 서 있었다.

이후로 씹, 씨발, 하는 소리가 오갔다. 어두운 공간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범진밖에 없다는 게, 선재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믿을 사람이 범진인 것만큼 절망적인 일이 또 있을까? 선재는 뒤로 물러나, 욕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이리 오세요, 형님.”

낄낄 웃던 범진이 뒤로 물러나 있던 선재에게 다시 손짓했다.

“임마랑 놀고 있으세요.”

범진이 턱으로 가리킨 건 저를 형수라 불렀던 남자였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는 건 없지만 둘이 친구인 건 맞아 보였다.

한 발짝도 떼지 않는 선재 대신, 남자가 앞으로 다가와 선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좀 있다가 저랑 같이 노십시다.”

남자는 저를 박창현이라고 소개했다. 선재가 악수에 응해주자, 고개를 숙이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

범진은 뒤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창현에게 시간을 묻기도 하고, 씨발, 하고 몸을 풀기도 했다.

“잠깐만 놀고 있으세요.”

더는 영업하지 않는 노래방 건물이었다. 앞쪽에 있던 방 하나를 가리킨 범진은 뒤쪽으로 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선재는 범진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느꼈다. 옆에서 가만 서서 저를 쳐다보는 박창현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차에 가 있을게.”

옆에서 그런 선재를 쳐다보던 박창현이 고개를 푹 떨어트리며 웃었다. 손엔 짤그락 소리가 나는 열쇠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문 닫혔는데 뭐를 어떻게 올라갈라고요.”

범진의 시선이 닿은 건 노래방 입구였다. 철문으로 닫혀 있긴 했지만, 다시 열면 되는 게 아닌가? 범진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던 선재가, 곧바로 뒤로 돌아 철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째선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힘을 더 줘야 열리지.”

불쑥 다가온 범진이 저를 내려다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든 선재가 카운터에 몸을 기댄 박창현을 흘끔거렸다.

“…나 저 사람이랑 있기 싫어.”

“…왜요.”

“처음 보는 사람이고….”

“점마 내 친군데.”

범진은 제가 대단한 신임이라도 얻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선재는 끼리끼리인 사람들을 차례로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냥 여기서….”

“아님 내 따라다닐래요.”

“…뭐 하는데.”

“뭐 하긴 일하지.”

일이라고 했으니 위험한 건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재가 눈을 들고 범진을 올려다봤다. 미심쩍게 웃고는 있었지만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런 표정을 짓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겠어.”

“뭐.”

“너랑 있겠다고.”

그러든가요, 하며 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팔을 벌려 선재가 억지로 팔짱을 끼게 만들었다. 이내 들어선 좁은 통로를 걸으면서는 벽을 퍽퍽 쳤다. 오래 방치된 건물인지 시멘트 가루 같은 게 벽과 천장 어디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랑 안 놀게요? 하는 박창현의 소리가 들리자, 범진만 욕을 했다. 좆나 씹 같다며 웃었다. 어디가 재밌는지 모르겠지만 선재는 이제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입구 쪽엔 흐린 빛이라도 있었는데 통로 안으로 들어오자 어두운 빈방들만 늘어서 있었다. 폐가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있어야 되는지를 몰랐다. 선재는 가다가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범진은 맨 끝에 있는 방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그 방의 문만 제대로 닫혀 있었다.

“보고 싶다 하니 함 보세요.”

“보고 싶다고는 안 했는데….”

말을 하는 사이 제일 안쪽에 있던 문에 발끝이 닿았다. 무의식적으로 범진의 팔을 뒤로 잡아당긴 선재가, 문 가운데에 길게 난 유리로 안쪽을 언뜻 확인했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유리를 스쳤다.

범진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가 일어서는 게 보이고, 그는 무릎을 들고 안 그래도 피범벅이던 남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쳤다.

선재는 거기까지만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범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나 그냥 여기 있을 테니까.”

“그니까 점마랑 놀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

가까이서 있으니 퍽, 하는 소리도 적나라하게 들리고 있었다. 소리에 눈가를 찌푸린 선재가 범진의 팔에 두르고 있던 제 팔을 슥 빼냈다. 저런 걸 볼 바엔 박창현인가 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 저기서, 하고 입을 연 선재가 말도 끝맺지 않고 통로를 빠져나갔다.

카운터 뒤편에 있던 박창현이 왜요, 안 보시고? 하며 말을 걸어왔다.

키나 덩치가 그다지 크지 않아, 날쌔단 인상을 먼저 주는 남자였다.

광대뼈나 턱이 날카롭게 돌출되어 있어 그런 이미지가 더 부각되는 것도 같았다.

박창현의 눈이 선재의 얼굴 여기저기에 닿았다. 그나마 밝은 불이 켜진 방을 향해 손을 뻗은 박창현이 선재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논다는 말이 좀 그랬죠, 형수.”

형수란 말이 제일 이상했다.

선재는 박창현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박창현에게서 그런 호칭으론 안 불렸으면 했다. 자기들끼리 얼마나 장난을 치고 노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사자 앞에선 웃거나 조롱하진 않았으면 하는데.

다른 방이 낡고 방치돼 있던 것과 달리, 선재가 들어선 방은 깨끗하고, 테이블이나 의자도 제대로 구비가 된 공간이었다. 이 노래방 전체를 비밀기지처럼 쓰는 모양인지, 곳곳의 쓰임새 자체는 명확해 보였다. 얼굴을 매만진 선재가 의자 하나를 빼고 거기에 몸을 붙여 앉았다. 몇 시간 서 있던 것도 아닌데 다리가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박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이, 선재는 휴대폰으로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2시를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사정이 있어 저녁이나 밤에 가게 될 것 같다 말하자, 원장은 그러시라며 되려 선재를 안심시켰다. 아이가 잘 있냐는 질문엔 너무 잘 있다고 대답하며, 사진까지 전송을 따로 해주었다. 선재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사진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다.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으며 손을 들고 있는 아이 사진. 뭘 하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종종 기분이 좋으면 두 손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곤 한다.

“형수, 목마르셨죠.”

“….”

휴대폰 화면을 끈 선재가 안으로 들어오는 박창현의 모습을 쳐다봤다.

박창현의 손에 들린 건 두 개의 음료 캔이었다. 컵에 뭘 따라 줬으면 받아마실 생각도 안 할 텐데, 박창현이 앞에서 캔을 따는 것까지 보여주자 저건 마셔도 되겠다 싶었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포도 향이 나는 탄산음료를 받아들었다.

그새 밖으로 나가 사 온 건지, 캔 표면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선재는 고맙단 말을 하며 내용물을 절반 이상 마셨다. 목이 따갑긴 했지만 시원하고 맛도 좋았다. 입안에서 감도는 탄산의 느낌에 표정을 찡그린 선재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적당히 어두운 공간에서 빛이 빗물처럼 튀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조명이라도 켰나. 선재는 갑자기 튀는 듯한 눈앞 장면에 눈꺼풀을 힘주어 닫았다 열었다.

입구 쪽에서 캔 하나를 들고 선 박창현의 표정이 보이는 것도 같고, 안 보이는 것도 같았다. 정신없이 튀는 듯 느껴지던 빛들이 이제는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선재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한 번 감긴 눈을 쉽게 뜨지 못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억지로 열었지만, 곧 눈이 완전히 감겼다. 테이블 위로 상체가 엎어졌고,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형님, 형님.

듣기 싫은 호칭이 어디서 또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뜬 선재가 앞을 쳐다봤다. 잠깐 잠이라도 들었던 걸까. 범진이 옆에서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형님. 언제까지 잘 겁니까.”

“아니….”

“눈은 또 왜 이러고.”

“어? 공기가 나빠서 그런가….”

선재는 눈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깨자마자 공기 탓을 했다. 잠꼬대에 가까웠다. 옆에 앉은 범진에게선 피 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여서 나고 있었다. 셔츠는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절로 엉뚱한 말이 나오는 것일까. 몽롱한 정신으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한정적이었다.

“갑시다.”

“어… 응.”

앉아있을 땐 조금 멍한 정도였는데, 일어서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선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다시 앉았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범진이 뭐라고 하는 소리도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왜요.”

“…어….”

“어이, 정신 차려보세요.”

테이블 위로 한쪽 팔이 쭉 미끄러졌다. 선재는 상체를 일으켜 팔을 추슬러야 할 걸 알면서도,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팔을 당기려고 힘을 주면 뒤쪽으로 나자빠질 것처럼 중심축이 무너졌다. 옆에서 그런 선재를 쳐다보던 범진이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잠 옵니까, 하고 물으며 선재의 뺨을 쳤다.

“때리, 때리지 마.”

“뭐, 어디 가서 잠이라도 잘래요.”

범진이 그냥 재우진 않을 것 같아서, 선재는 그 정신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바닥이 일어나고 천장이 낮아지는 와중에도 눈에 힘을 줬다.

“…가자. 괜찮으니까….”

선재는 범진에게 몸의 중심을 거의 내맡긴 채로 계단을 올랐다. 범진이 업으려고 할 때마다 몸부림을 쳐 두 발로 걸어 오르려고 했다. 누가 봐도 범진이 한 팔로 선재의 허리를 삐뚜름하게 들고 올라가는 모양새였지만, 선재는 흐릿한 정신에 제 힘으로 올라간다 믿고 있었다. 범진에게 업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이 씹, 어디서 구해서.

차에 타자마자 범진이 욕하는 걸 들었다. 선재는 제게 떨어진 말인가 싶어 운전석 쪽을 쳐다보았다. 범진은 생각보다 유쾌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눈을 끔벅거리던 선재가 손을 들어 목을 만졌다. 물을 마셔야 할까. 정신만 조금 멍하다고 생각했는데 목 안쪽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님.”

“응….”

“밥은 먹어야죠.”

“…어….”

선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통화를 언제 끝냈는지, 얼굴을 붙여온 범진에게서 특유의 쓴 향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냄새나….”

범진은 선재가 그렇게 말하든 말든 웃통을 벗어젖혔다. 피가 묻은 셔츠를 쓰레기처럼 구긴 범진이 그걸 뒷좌석으로 던졌다. 휙, 날아가는 셔츠에 남았던 체취가 그대로 선재에게 닿았다. 범진은 뒷좌석에 손을 뻗어 포장이 된 새 셔츠를 꺼내 빠르게 입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했다.

“형님.”

“응….”

“단추 좀 잠가줄랍니까.”

“…뭘….”

“단추요.”

“네가 하지….”

셔츠 단추를 대충 잠가놓은 탓에, 쇄골과 가슴에 빼곡한 문신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선재는 검은 덩어리 같기도 하고, 빽빽하게 낙서된 벽 같기도 한 범진의 가슴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눈을 돌릴 힘이 없었다. 그냥 쳐다보며, 저게 뭐지, 싶은 생각만 하는 게 지금 선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쳐다보지만 말고 좀 해주지요.”

“….”

“어? 손.”

범진이 선재의 한쪽 손목을 낚아챘다. 흐물거리는 손이 허공에서 힘도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있었다. 그 손을 몇 번 흔든 범진이 제 내민 가슴팍으로 그 손을 가져갔다. 선재는 갑자기 닿은 범진의 단단한 가슴에 손을 뒤로 하면서도, 마음처럼 잘 안 돼 입만 뻐끔거렸다. 야, 저기… 하고 엉뚱한 말을 했다.

“저기 뭐요.”

“그니까….”

범진은 선재의 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가 제 근육 진 몸 곳곳을 만지게 했다. 따뜻하고 딱딱한 가슴에 손이 닿은 선재는 눈앞의 상황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그거, 하며 말의 서두만 열 뿐, 생각이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아… 잘….”

“이 손도 올리고.”

범진이 선재의 다른 쪽 손도 올렸다. 두 손이 다 범진에게로 향해지자, 선재가 중심을 못 잡고 앞으로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 고개가 콘솔 박스에 닿을 지경이었다. 범진이 까딱거리는 선재의 머리를 위로 들어 제정신이 아닌 얼굴을 쳐다봤다.

“야.”

“…우응….”

“니 씹, 아무거나 받아 처먹으면 되냐 안 되냐.”

위협적으로 말하면서도 범진의 한쪽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 채였다.

“아, 안….”

“되냐고.”

“아, 안… 돼.”

“안 되지. 엉?”

앞에서 중심도 못 잡고 쓰러지려 하는 선재를 놀리는 게 재밌는지, 범진이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선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벌어진 입에 손가락도 넣어보고, 그 입에 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근육이 완전히 이완된 선재가 범진의 키스엔 입 안쪽에 고여있던 침을 턱으로 줄줄 흘렸다. 범진이 그걸 바라보다 씨팔, 하고 턱을 닦아주었다.

“닌 씹팔, 이래 생겼다는 자각이 없냐.”

범진이 여전히 웃으며 선재의 뺨을 손으로 가볍게 쳤다.

말을 못 알아들은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머리가 아픈지 이따금 눈가가 찡그려지긴 했지만, 범진의 말엔 반응이 없었다.

“말 안 들리냐.”

“…안….”

“그딴 거 처마시면 되냐 안 되냐.”

범진은 아까 했던 질문을 반복해서 했다. 차를 출발시키지도 않고 선재를 가르치듯 말하며 실실 웃고만 있었다. 혀가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던 선재가 으, 하는 소리를 냈다.

“으… 안….”

“안 되지?”

“으…응….”

“싸가지없이 어디 말을 낮추고.”

“…네에….”

범진이 대답을 바꾼 선재를 굶주린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좀 전까진 웃고 있었는데 점차 웃기지만은 않았다. 기분이 좋은 것만큼 범진의 성기가 발기되고 있었다. 적당히 올라있던 바지춤이 큼지막한 모양으로 부풀고 있었다. 범진이 앞섶을 주물럭대며 선재를 쳐다봤다.

“니 씹구멍에다 이거 박아줄까.”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범진은 아예 지퍼를 열고 자지를 만지기 시작했다. 눈두덩에 힘이 풀린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또 우으, 하고 입을 열었는데, 이번엔 무슨 대답을 따로 하진 않았다. 범진이 답답한 듯 혀로 입을 쓸었다.

“뭐 씨팔, 씨부리봐라.”

“으….”

“그래.”

점점 흥분하는 범진과 달리, 선재는 입만 벌린 채 범진을 쳐다봤다.

“이 씹년이.”

마땅한 반응이 오지 않아 답답함을 느낀 범진이 운전대를 세게 가격했다. 그 소리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선재의 어깨는 이미 축 늘어진 채였다. 입을 반쯤 벌리고 범진을 쳐다볼 뿐, 범진이 만족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범진은 자지를 꺼내놓은 채로 액셀을 밟았다. 앞 유리로 위쪽을 들여다본 뒤, 제일 가까이 위치한 모텔을 향해 방향을 꺾었다.

* * *

“방 아무거나 주쇼.”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범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등에 누가 업혀있긴 했지만 이런 사람들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카드키 하나를 범진에게 내밀었고, 옆에 위치한 모니터 화면을 켰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초저녁도 안 된 시각인데 저렇게 꽐라가 돼서 들어온다고? 남자는 멀쩡한 범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음침한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손님들의 뒷사정을 떠올려보는 게 남자의 유일한 취미였다. 깡패놈들 소굴이라 그런지 약에 취한 오메가 남자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업혀있던 사람도 그 부류인 듯했다. 남자는 5층 복도 CCTV에 찍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살폈다.

“나… 이제 그만….”

5층 객실 문 앞에서 카드키를 댔던 범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선재는 아까보단 정신을 차린 듯 목소리를 제법 안정적으로 냈다. 박창현이 먹였던 약은 열성보다는 우성에게 제대로 작용하는 특수 흥분제였다. 범진도 열성에겐 먹여본 적이 없어, 선재가 어떻게 나올지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몽롱해져서 말을 고분고분하게 하는 걸 듣는 게 재밌었는데, 이제 그 재미는 없을 듯했다.

“형님 기분 좋드죠.”

“…뭐….”

선재는 눈을 끔벅거리며 범진을 향해 느릿느릿 대답했다. 이젠 범진의 말이 어느 정도 들리고는 있었다. 딱딱하고 넓은 등판에 얼굴을 대고 있었는데, 그게 범진의 등이란 생각을 하고 뺨을 뒤로 뺄 정신까지 들었다. 선재는 범진이 침대 위로 내려주는 걸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둘러보니 모텔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나, 는….”

머리에 불이 켜지듯 생각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늪에 빠진 것처럼 축 처진 상태였다. 선재는 나는, 이라고 말하면서도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하품을 하듯 입을 벌리며 손으로 그 부근을 만져보았다. 손도 제 것이 아닌 양 엉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님은 뭐요.”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셔츠를 벗은 범진은 단추가 뜯기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고개를 위로 든 선재가 상체 중에서도 가슴과 쇄골, 어깨를 가득 채운 문신을 바라봤다.

“…왜….”

“뭐?”

“옷… 왜….”

세 개쯤 채워져 있던 단추 중 하나는 아예 침대로 튀었다. 선재의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범진이 새 셔츠를 갈아입던 모습이 떠올랐다.

“옷 왜 벗냐고?”

웃통을 까고 앞으로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범진을, 선재는 일단 피하고 보았다. 헤드 쪽으로 상체를 빼며 다가오는 범진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범진이 큰 보폭으로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몸집이 워낙 크니 그런 동작에도 작은 바람이 일었다.

“니랑 떡칠라고.”

“….”

코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범진과 이 공간이, 선재에겐 다 꿈같고 허상 같기만 했다. 아직도 또렷하게 앞을 바라볼 순 없었다. 가까워진 범진의 흉터는 선명하게 보였지만, 그의 눈빛을 정확히 읽어내는 건 어려웠다. 선재는 한 손을 얼굴에 대고 제 얼굴이 아닌 것처럼 문질렀다. 이제 막 마취에서 깨어나는 듯, 서서히 느껴지는 감각들이 무디게 다가왔다.

“어이.”

“….”

“뭐 하는데요.”

범진이 선재의 팔을 잡고 더는 얼굴을 문지르지 못하도록 했다. 대충 잡은 것 같은데도 선재는 범진의 무지막지한 힘을 느꼈다. 제 잡힌 팔목을 바라보던 선재가 범진의 눈 쪽으로 시선을 다시 던졌다.

“…형님 나랑 하고 싶어서 약 처먹은 거 아닙니까.”

범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선재는 약을 먹은 적도 없고, 범진과 하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도 없지만 그의 말엔 반박할 수 없다고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맞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몸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다. 두꺼운 갑옷이라도 입은 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재는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긴장을 애써 누르려고 했다.

범진이 쥐고 있는 팔목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그 팔을 잡은 채 침대 위로 올라온 범진이, 동시에 불룩한 앞섶을 주물럭거렸다. 이미 많이 튀어나온 성기가 범진의 손에서 막무가내로 주물러지고 있었다. 눈을 든 선재가 곧 밖으로 튕기듯 드러난 성기에 고개를 돌렸다.

“해줄 테니까 바지 벗어보세요. 내가 벗겨줄까요.”

“아….”

흉측한 살덩이를 꺼떡이는 게 누군데… 뭘 해준다는 건지 몰랐다.

그런 생각도 잠시, 갑자기 손을 뻗어오는 범진 때문에 선재가 먼저 손을 아래로 내렸다.

내가, 하고 입을 열며 손을 바지 지퍼로 가져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발기한 범진의 성기가 시야 끝에 걸리고 있었다. 손으로 제 지퍼 부근을 만지기만 하던 선재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손에 다리를 오므렸다.

“뭐…!”

“씨팔, 니만 보냐.”

흥분한 범진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선재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어떻게든 바지를 잡았지만, 범진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바지가 벗겨지고 하얀 팬티만 남았다.

“이쁜 거 입네.”

“…내가, 할….”

“아까부터 니가 한다냐. 하지도 않으면서.”

범진은 선재의 동그랗게 올라온 엉덩이를 팬티 위로 만졌다. 짝, 가볍게 쳤다가 주무르는 시늉을 하며 손을 떼길 반복했다. 범진이 엉덩이를 잡을 때마다 선재의 손도 제 엉덩이에 닿았다. 아까부터 엉덩이 사이가 젖은 탓에, 축축해진 면이 선재에게 만져졌다. 범진이 짝, 하고 때리고 주무를 때마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만… 내가 빠라줄게….”

“형님 상태가 이런데 동생 된 도리로서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장난하듯 말한 범진에게, 선재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웃으며 팬티를 벗기려는 범진을, 선재는 어떻게든 제지하려고 했다. 다리를 써 저 거대한 몸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했다. 상상 속에선 격하게 그를 차고 있었지만, 정작 제가 하는 건 어린애의 물장구에 불과했다. 범진은 선재의 움직임을 신경도 안 쓰고 하얀 면 팬티를 벗겼다. 약효 때문에 슬쩍 올라온 성기가 범진의 눈에 들어왔다.

“이야, 좆도 씹.”

범진은 제 거무튀튀하고 그야말로 좆같이 생긴 좆과 선재의 매끈한 좆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숱이 적은 체모는 결마저 고왔다. 그 가운데로 핏기가 조금 비치는 성기가 애처로이 떨리고 있었다. 범진은 망설이지 않고 선재의 엉덩이 사이에 손날을 끼워 넣었다. 손가락으로 엉덩이 살을 벌리고, 차에서부터 축축했을 구멍 근처를 손가락을 지분댔다.

앞을 가리느라 그쪽은 신경 쓰지 못했던 선재가 화들짝 놀라 손을 다시 뒤로 가져갔다. 이쪽을 가리면 저쪽이 보이고, 저쪽을 가리면 이쪽이 보이니 참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 하지, 하지 마….”

“이래 젖어놓고요.”

되묻듯 말을 건넨 범진이 구멍을 섬세하게 두른 주름을 손가락으로 주욱 쓸었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쥔 선재가 범진의 손목을 잡고 그를 쳐다봤다. 뼈 하나하나가 얼마나 억센지, 사람 손목을 쥐었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범진은 그런 선재의 눈을 쳐다보며 손가락 하나를 구멍 안으로 갑자기 삽입했다. 조용히 숨 쉬던 선재의 숨소리가 범진의 귀에 들릴 정도로 커졌다.

“형님.”

“빼, 빼….”

“말 이제 잘하네요.”

“…빼, 아….”

범진이 입구 근처의 내벽을 꾹 누르듯 만졌다. 워낙 마디가 두드러진 손이어서, 선재는 웬만한 사람의 성기가 삽입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안쪽에서 스멀스멀 흐르는 애액이 범진의 손가락 끝을 적셨다.

“진짜 싫습니까….”

“싫… 어… 이, 이 미친…!”

범진은 선재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주고 있었다. 그만하라거나 하지 말란 말에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범진을 향해, 선재가 제 딴엔 심한 욕을 했다. 새끼야, 하고 덧붙인 소리는 선재만 겨우 들었다.

당황한 마음에,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능숙한 손장난 때문에 허벅지가 연신 떨렸다. 축 처지지 않은 정도로만 힘을 받았던 성기가 위로 고개를 점점 들고 있었다. 성기 자극으로 발기하고 사정하는 알파와 오메가인 선재의 몸은 많이 달랐다. 앞을 자극해봐야 아프기만 할 뿐이다. 실질적인 성기의 발기는 내벽 자극으로 이루어지는 걸, 몸의 주인인 선재가 제일 잘 알았다. 이런 몸뚱이를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는 게 눈물 날만큼 수치스럽고 비참했다. 와중에도 발기가 되는 걸 멈추지 못했다. 범진이 내벽을 누르고 휘저을 때마다 무릎이 떨리고, 성기가 바짝 위로 솟았다. 선재는 결국 눈물까지 맺고 범진을 쳐다보았다.

“그냥… 그냥 해….”

차라리 섹스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희롱을 몇 분이나 당하고 있는지 몰랐다. 범진은 선재의 몸 안쪽을 속속들이 익히려는 듯 집요하게 내벽 점막 하나하나를 다 만졌다. 선재가 다리를 크게 떨면 그 부근을 손끝으로 긁고, 쓸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원을 그리며 구멍을 넓게 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범진의 손이 구멍을 벌릴 때마다 선재는 안쪽 점막을 내보이며 애액을 질질 흘렸다. 하얀 침대 시트가 물을 쏟은 듯이 널따랗게 젖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선재는 눈을 감고 그냥 하란 말을 반복했다.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이야, 울 만큼 좋습니까.”

그게 아니었지만, 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닫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만큼 머리가 어지럽거나 상황 분간이 미숙하게 되지도 않았다.

범진은 그 틈에 구멍에 삽입했던 손가락을 쑥 빼냈다. 손 끝에, 녹은 젤리처럼 달라붙은 애액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가락을 벌려 얇고 투명한 실을 만든 범진이 그걸 선재의 눈앞으로 가져가 보여주었다.

“싫다면서 이딴 거 싸도 되고요.”

“….”

선재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범진의 손가락과 얼굴을 순서대로 올려다보았다. 수치심을 주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말인 걸 아는데도 무감하게 받아들이는 게 힘겨웠다. 선재는 꽉 다문 이에 힘을 주었다.

한쪽 입꼬리를 기이하게 올리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 한 짝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앞으로 솟은 선재의 성기가 반동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발기를 이렇게나 했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재는 훌쩍이며 등을 시트에 댔다.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고 제 몸쪽으로 끌어 몸이 뒤로 넘어갔다. 범진은 위로 고개를 든 반듯한 성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예쁜 게 좆이면 좆같다는 말도 어디서 못할 것 같았다.

“자주 보여주세요. 이거.”

선재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씨….”

범진이 선재의 턱을 쥐고 세게 돌렸다.

골이 난 얼굴이 선재의 눈에도 들어오고 있었다. 대체 뭐에 화가 나서. 선재는 잡힌 턱이 바스러질 것처럼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좀 전까진 느긋하게 약이나 올리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얼굴이 변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무릎에 손을 댄 범진이 힘을 줘 선재의 다리 사이를 크게 열었다.

“다리 안 벌리냐.”

이미 양쪽으로 열린 무릎을, 범진은 더 벌리려 들었다. 안 벌리냐, 하고 선재를 쳐다보자,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쳐다보던 선재가 다리에서 힘을 완전히 풀었다. 열리는 다리 새로 드러난 건 범진이 지독하게 괴롭혀놓은 구멍이었다. 하얀 엉덩이 사이로 드러나는 구멍이 선재가 숨을 쉴 때마다 벌어졌다가 오므라들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걸 느낀 선재가 자꾸만 무릎을 안으로 모았다.

“장난하냐. 씨팔.”

범진은 제대로 열 받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본능적으로 감추려는 행위도 참아주지 않았다. 선재는 무릎에 닿은 범진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곧 다리가 찢어질 듯 벌어지자, 선재의 손이 사타구니로 향했다. 정말 찢어지는 줄 알았다.

“아파, 아!”

“가만 좀 있으세요….”

구멍만 내려다보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위쪽으로 조금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하체를 붙여오자, 사타구니에 붙어 있던 선재의 손가락이 위쪽을 향했다. 제지하려고 했던 건데 손끝에 닿은 건 범진의 거친 음모였다. 곧바로 손을 뺀 선재가 엄지를 손안에 넣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범진의 귀두가 구멍의 주름을 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빨아준다고….”

“예, 빨아도 주든가요.”

주먹 쥔 선재의 손을 큰 손으로 누르듯 쥐며, 범진은 거무튀튀한 제 성기를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미 주름이 풀어질 정도로 열려 있던 입구여서 아무리 거대한 것도 입구 정도는 곧바로 쑤셔 넣기가 가능했다. 귀두까지 잡아넣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운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드러나고 있던 점막은 물론, 구멍을 섬세하게 두르고 있던 주름까지 범진의 성기와 함께 안으로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좆기둥이 반쯤 삽입되자, 선재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파… 흑.”

“어이, 씹… 처음입니까. 누가 보면 내가 니 첨 딴 줄 알겠다.”

범진이 비웃듯 입술로 호를 그렸다. 상체를 숙이며 선재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어떻게든 소리를 막으려 했지만, 입에 물기도 벅찼던 범진의 성기였다. 몸집 차이도 많이 나는 알파의 성기를 받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재는 결국 끝까지 들어온 듯한 성기엔 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벽이 잔뜩 벌어져, 배에도 압박감이 있었다. 눈을 감자 범진의 손이 눈가에 닿았다. 범진은 눈을 감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제대로 안 쳐다보냐….”

“….”

엉덩이를 가른 게 성기인지 몽둥이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선재는 밑이 빠질 것 같은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뭉근하게 삽입이 되는 성기긴 하지만 벅차단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위에서 고개를 숙인 범진이 괴로워하는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게 보였다.

“후으.”

“아, 아흐, 흐… 흐윽.”

“씹, 드럽게 좁네.”

“아, 흐으… 파….”

“언제 했는데.”

속도는 더디게 붙고 있었다. 허리를 느릿하게 쓴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붙잡고 못 들을 대답을 종용했다. 기둥을 뺐다가 밀어 넣기를 천천히 하자, 꿈틀거리는 내벽이 힘껏 벌어지며 자지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언제, 했냐고.”

범진은 일부러 말을 끊으며 했다. 언제, 하고 성기를 박았다 빼고, 했냐고, 하며 또 박았다 뒤로 빠졌다. 그 추삽질에 몸이 아래위로 흔들린 선재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아프긴 해서, 두 눈에 고였던 눈물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상체를 앞으로 내민 범진이 그 얼굴을 코앞에서 바라봤다. 팔로 선재의 어깨를 가두고 성기를 또 퍽, 박았다.

“몰라, 으… 으, 흑.”

코가 닿을 듯 가까워진 범진에겐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선재는 퍽, 퍽, 박히며 흔들리는 와중에도 말소리를 더듬거리며 냈다.

“그걸, 씨팔, 모른다고 하냐….”

범진이 선재의 윗옷을 말아 올렸다.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붙여서 쳐올리자, 선재의 사타구니는 금방 빨간 물이 들었다. 손을 올리고 젖꼭지를 세게 꼬집은 범진이 성기를 계속해서 쳐올렸다.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난잡하게 공간을 울렸다.

“흐윽, 흑! 아…흑, 아, 흐윽!”

조용히 울고 싶은데 그마저도 범진은 못 하게 했다. 선재는 범진의 성기가 박힐 때마다 새는 소리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하지만 내벽을 짓누르고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힘도 포악하게 실린 범진의 찧는 동작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깊게 위치한 점막까지 찔리자, 선재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개씨발, 좋냐.”

그 소리에 범진도 흥분을 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선재의 턱을 잡았다.

턱이 들린 채로, 선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뺨이 빨갛고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말이든 소리든 참을 수 있다면 참고 싶었다. 정신은 얼추 제 것 같았지만 몸은 여전히 달뜬 상태였다. 코를 훌쩍인 선재가 범진을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이쁜 거 알고 이딴 표정 짓냐.”

범진이 음험하게 웃으며 선재의 뺨을 손가락으로 쳤다. 어? 하고 눈의 흰자가 보이도록 선재의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얼굴에 괜한 가학심이 이는지 씨이발, 하고 입술을 벌려 잇몸을 찌르기도 하고 헛토악질이 나오도록 혀 안쪽을 손가락으로 쑤시기도 했다. 침에 젖은 손가락을 빼낸 범진이 허리를 더욱 세게 흔들었다. 괴롭힌 얼굴엔 금세 손자국이 남았다. 잘 쑤셔 박고 있던 범진이 그 얼굴에 시선을 두며 좆을 더 빳빳하게 부풀렸다. 안에서 커지는 느낌에, 다리를 달달 떤 선재가 아프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파, 아… 그마….”

“아픔 참아야지 씨, 후으.”

얼마간 그렇게 박던 범진은 선재의 다리 한 짝을 제 어깨에 걸고 추삽질을 이었다.

힘 빠진 다리가 성기가 진입할 때마다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범진은 내벽을 좆으로 포악하게 비비며 선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어깨에 올리고 있던 선재의 다리가 얼마 걸려 있지도 못하고 옆으로 벌어지며 떨어졌다.

다리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범진은 선재의 입에 키스하며 성기를 갖다 박았다. 몇 번만 마찰이 있어도 선재의 살결은 붉은 물이 들곤 했다. 다리 한쪽이 괴팍하게 눌린 채로 성기가 박히던 선재가 손을 들어 범진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입과 뒤가 모두 범진의 것으로 막히자 숨이 막히고 가슴까지 답답해져 왔다.

“우읍! 우으으!”

선재의 얼굴 전체가 새빨개질 때까지, 범진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찔걱대며 살 찍히는 소리만 선재의 귀에 꽂혔다. 그건 그거대로 괴로웠다.

뒤늦게 입을 뗀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부터 꽉 쥐었다.

“엎어보세요.”

선재가 눈물을 팔등으로 닦은 뒤 범진을 쳐다보았다. 겨드랑이까지 볼썽사납게 올라간 옷이 신경 쓰여 내리고 싶었지만, 범진이 빨리 엎어져나 보라는 듯 턱짓을 해 그럴 여유도 없었다. 선재는, 반쯤 벌어진 구멍을 하고 뒤로 돌아 엉덩이를 내밀었다. 쉽게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건 이상한 걸 먹은 탓도 있겠지만, 그냥 범진 자체가 두렵고 무서워서도 있었다. 굴욕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생각은, 이제 하지 못했다. 선재는 팔꿈치부터 손까지 시트에 대고 엎드린 채, 벌어졌던 구멍을 본능적으로 닫으려 했다. 뒤에서 뻐끔대는 구멍을 쳐다보던 범진의 눈에 불꽃 같은 빛이 튀었다.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잡고 위로 솟은 자지를 구멍 안으로 다시 삽입했다.

아까만큼 천천히 할 필요도 없고, 안쪽이 좁다는 느낌도 덜 들었다.

범진은 통통한 선재의 엉덩이를 잡고 뜨거운 좆기둥을 넣었다 뺐다 했다.

구멍이 꿈틀거리며 제 좆을 물고 늘어지는 건 어느 각에서 봐도 장관이었다.

눈을 결합부에 둔 범진이 거칠게 좆질을 이어나갔다. 선재의 볼기를 한두 대씩 때리면, 하지 말라며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범진은 선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충동이 들었다. 짝, 하고 선재의 엉덩이를 또 때렸다.

“아흑, 흐… 때리지… 흑, 마…! 흑!”

수치심으로 가득 물든 선재의 얼굴이 이따금 뒤로 돌았다. 아무리 손으로 엉덩이를 가려도, 범진이 그 손을 치우고 때리는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엎드렸다고 해서 엉덩이를 때리는 것까지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선재는 구멍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성기에 몸이 밀리면서도 빨개진 엉덩이를 한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범진이, 이번엔 선재의 손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렇게 잠시 지켜보는가 싶더니, 허리를 앞으로 강하게 밀었다. 갑자기 전달된 힘에 중심을 못 잡은 선재의 얼굴이 베개에 그대로 붙었다.

거기에 더 자극을 받은 듯이, 범진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연속으로 박혀 드는 성기에 선재가 발등을 들었다 내려놓기만 반복했다. 통통한 선재의 엉덩이 때문에 찰싹찰싹, 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에도 흥분한 범진이 선재의 구멍 안으로 제 거무튀튀한 성기를 더욱 빠르게 박아 넣었다. 일어날 새도 주지 않는 범진 때문에, 선재의 뺨은 계속해서 눌렸다.

“그으, 흐윽, 흑! 아! 흑!”

갑자기 엎드리고 있던 상체가 쑥 들렸다. 범진이 팔꿈치를 잡아 들어 상체를 일으킨 거였다. 와중에도 박혀 드는 성기에, 선재의 허벅지가 바짝 섰다. 팔꿈치가 뒤로 잡아당겨 질수록 성기는 끝을 모르고 박혀 들었다. 결국, 고개를 꺾으며 소리를 터뜨린 선재가 더는 울음을 안으로 삼키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씨발, 뭐, 어디 초상났냐.”

속도를 줄이며 성기를 박기 시작한 범진이 두 팔꿈치 중 하나를 유독 강하게 잡아당기며 물었다.

선재가 옆얼굴을 보였다.

범진이 성기를 구멍 안으로 푹푹 밀어 넣으며,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선재는 그 시선에 차라리 눈을 감았다.

퍽, 갑자기 놓인 팔이 시트 위로 곧장 닿았다.

다시 엎드리게 됐지만 범진의 성기가 삽입된 것 똑같았다. 바로 앞에 있던 베개를 옆으로 치워낸 선재가 힘겹게 자세를 잡았다. 범진이 움직이지 않을 때 서둘러 자리라도 정리를 해야 덜 힘들다. 뒤에서 선재를 쳐다보던 범진이 엉덩이를 양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됐냐.”

“….”

선재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쑥 허리를 민 범진이 젖은 엉덩이를 적당히 쳐댔다.

퍽, 박혀 든 성기가 다시 내벽 맛을 보고 날뛰기 시작했다. 양 볼기를 꼬집듯 쥐어 본 범진이 제 두툼한 성기를 연속해서 밀어 넣었다. 구멍도 이젠 자연스럽게 범진의 것을 삼켰다. 잔뜩 벌어진 구멍에서 애액으로 번들대는 성기가 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선재의 흐느낌을 제외하면 질퍽대는 소리만 방을 채우고 있었다. 시트를 짚고 있던 선재의 두 손에 얇은 핏줄들이 사정없이 솟았다.

마무리하듯 스퍼트를 올린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와 골반에 손자국이 남도록 꽉 잡았다.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자 안쪽에 고여있던 애액도 착, 착, 소리를 내며 튀어댔다.

다시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선재의 매끈한 등을 바라보며, 범진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선재의 살점이 입에 닿을 때마다 범진은 그걸 빨아올렸다.

그야말로 닿는 대로. 범진은 성기를 박아넣으며 선재의 얼굴 곳곳에 혀를 댔다.

찰싹거리는 소리와 찔걱이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리고 있었다.

난장이 된 침대 위에서 선재가 엎드려 울었다. 안쪽 내벽에서 범진의 정액이 튀듯이 사정되고 있었다. 정액은 배 속을 울리며 찌릿하게 퍼져 나갔다. 선재는 시트에 대고 있던 팔을 덜덜 떨었다. 아픔 사이로 약하게 밀려드는 쾌감에 발가락이 사정없이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미세하게 남은 약 기운 때문이었다.

꾸역꾸역 좆물을 싸지르던 범진이 빨갛게 오른 선재의 귀를 입에 담았다. 혀를 내밀어 귓바퀴 사이사이를 게걸스레 빨았고, 귓구멍에도 마무리하듯 혀를 쑤셔 넣었다.

더는 힘이 없어진 선재의 팔이 시트에서 쭉 미끄러졌다.

범진은 귀를 계속해서 빨다가 상체를 들었다.

제대로 박혀있던 좆을 천천히 빼내자 선재의 구멍 일부도 같이 딸려 나오는 게 보였다. 선재의 엉덩이나 성기와는 영 딴판인 제 좆기둥이 잔뜩 젖어서 밖으로 빠지고 있었다. 범진은 좆이 내벽을 쭉쭉 문지르며 나오는 감각까지 모조리 느꼈다. 귀두까지 모두 빼내자 안에 고여있던 정액과 애액이 뒤섞인 채 밖으로 쏟아지는 게 보였다. 이상한 감각을 느낀 선재가 다리를 모았지만, 범진이 두 손으로 엉덩이를 벌려 치부를 한참이나 드러내게 되었다. 엉덩이만 든 채로, 선채는 한참이나 울음을 참았다.

* * *

정신을 차린 선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린이집에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눈가를 아무리 닦고, 목을 열심히 가다듬어도 정상적으로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물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몰랐다. 선재는 뒤늦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장 가고 싶었지만, 범진이 내일 가자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

전화를 하면서도 엉덩이가 아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의 관계였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고, 범진 같이 난폭한 알파와 하게 될 줄은 더 몰랐다. 범진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자동적으로 손이 엉덩이에 갔다. 만지지 않아도 떨림이 남아있었고 몸 곳곳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선재는 잠들기 직전까지도 무슨 일을 당했는지 떠올라 괴로워했다.

범진은 한밤중에도 외출을 했다. 불을 꺼주고 나갔지만, 배려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울상을 한 채로 잠들었고, 새벽에 깨었을 땐 범진의 넓은 품에 안겨 있는 것에 흠칫했다. 그때부터 잠은 오지 않았다.

손으로 슬쩍 범진을 밀어내면, 잠결인데도 성질을 부리며 제 어깨를 감아왔다.

야이씨, 하는 잠꼬대에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선재는 등이 배기도록 같은 자세로 누워 있다 범진이 움직이는 것 같으면 몸을 옹송그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안 자냐.”

“….”

눈가가 몇 번 찌푸려지나 싶더니 범진의 눈 한쪽이 뜨였다.

대꾸하지 않은 선재가 고개만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차라리 들어오지 말지. 선재는 범진이 나간 사이에 잠깐 잠들었던 걸 빼면 거의 몇 시간 째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몸과 마음이 피로해도 눈은 쉽게 감기지 않았다. 뒤가 여전히 아팠고, 배는 뻣뻣하게 당겼다.

“근데 형님 배고프겠네.”

먹은 게 없긴 했지만 배고프단 생각은 언제부턴가 들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이 배려하듯 한 말에도 조용히 있었다.

입구 쪽 자동등 불빛이 자꾸 깜박이고 있었다.

“옷 입으세요. 뭐라도 먹게.”

금방 몸을 일으킨 범진이 엉성하게 누운 선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나 배 별로 안 고파서.”

“구라친다.”

“구라… 아니고 진짜, 속이 안 좋아서….”

“속이 안 좋으니까 뭘 먹어야지. 옷 입어라.”

그렇게 말하며 옷을 입기 시작한 범진은 언제 새 셔츠를 가지고 왔는지 그걸 뜯어서 입었다.

선재가 멍한 얼굴로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옷가지를 집으러 침대 밖으로 벗어났다.

입을 옷이 없어 가운만 대충 걸치고 있던 상태였다. 범진처럼 발가벗고 자기가 좀 그래서 원래 입었던 옷을 입으려 했는데, 그건 범진이 못 하게 했다. 옷을 못 입으면 못 잔다는 거짓말까지 치고 나서야, 옷장에 걸려 있던 가운을 걸칠 수가 있었다. 냄새도 나고 피부에 닿는 느낌도 나빴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옷을 입기 시작한 선재를, 범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부담을 느껴도 어쩔 수 없었다.

선재는 바지에 다리를 넣고, 가운을 헤쳤다. 유두에 꽂힌 범진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구겨져 있던 티셔츠를 펼쳐 입었다.

그걸 빤히 본 걸 굳이 드러내고 싶은지, 범진은 나가면서 형님은 쌩젖도 이쁘단 소리를 했다.

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모텔 프런트 앞엔 딱딱하고 네모난 소파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란 범진의 말을 들은 선재가 그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시원한 벽이 등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누가 프런트에서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선재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무슨 꼴로 이 모텔에 들어왔는지를 상상만 해도 얼굴이 벌게지는 것 같았다.

선재는 눈을 감고 있다가 입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뒤통수에 닿는 눈빛이 따가워도 어쩔 수 없었다. 눈치도 보지 않는지, 프론트 유리에서 비치는 남자의 시선은 집착적인 면이 있었다. 범진처럼 의뭉스런 남자와 드나들면, 체향을 맡지 못하는 보통 사람이라도 저를 오메가로 인식하겠지. 선재는 막연한 생각을 지우려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체 주차장은 없던 모텔이어서 범진은 다른 건물 지하에 차를 주차했다고 했다. 어둑해진 주변을 밝히는 불빛이 보였다. 몸을 일으킨 선재가 뒤이어 들린 빠앙-하는 클락션 소리에 걸음을 뗐다.

한밤중이고, 골목 안인 것 같은데도 범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클랙슨 소리를 누가 불편해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듯했다.

어기적거리며 걸어간 선재가 범진의 차 조수석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가운 냉기와 텁텁한 냄새가 동시에 나고 있었다. 선재가 최대한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뭐 먹고 싶은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선재가 고개를 돌렸다.

“뭐 먹고 싶냐고.”

범진이 다시 말했다.

시간을 확인한 선재는 주변부터 둘러봤다. 근처에 뭐가 있었는지는 기억에도 없었다. 범진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수상한 건물로 들어갔고, 그곳에선 약에 취해 밖으로 나왔다. 제가 먹은 게 약이라는 확신은 갈수록 뚜렷해진 것이었다.

“…그냥 저기 가자.”

아무거나 먹자고 하면 범진이 멀리까지 운전해서 나갈 것 같았다.

선재는 근처를 돌아보다 불이 들어온 식당 하나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주택가가 밀집된 구역이라 흔한 주점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쪽으로 방향을 튼 범진이 일방로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내리세요.”

선재는 범진이 다른 곳에 차를 댈 건가 보다 했다. 근처에 마땅한 주차장이 없어 골목 사이에서 빈 곳을 찾아야 할 듯했다. 문을 열고 차를 빠져나간 선재가 범진의 차 후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차에서 범진만 내렸다. 범진은 담배 하나를 문 채로 차에서 내려, 멀뚱한 얼굴을 한 선재를 쳐다봤다.

“안 드가고 뭐 하는데.”

“차 여기 대게…?”

“어.”

아무리 밤이지만 일방로인 골목 한복판에 차를 대는 경우가 어딨나.

선재는 후, 하고 연기를 뱉으며 지나가는 범진의 모습을 어안이 벙벙해져서 쳐다봤다.

아니지. 바로 앞에 식당이 있긴 해서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선재는 범진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가로수 아래서 보이는 범진의 몸은 평소보다 더 컸다.

그 뒷모습을 쫓으며 걷던 선재가, 먼저 들어가란 범진의 눈짓을 받고 식당 문을 옆으로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얼큰한 고깃국 냄새가 풍겼다. 선재는 식당이라는 간판만 보고 이곳으로 왔지, 정확히 뭘 파는지는 들어와서 알았다. 메뉴판엔 여러 메뉴가 지워진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 위에 붙은 종이에 크게 감자탕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50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였다. 계산대 쪽에서 들린 소리에, 선재가 출입문 쪽을 한 번 쳐다봤다.

단일메뉴니 감자탕 2인분을 시켜놓으면 될 것 같았다.

“감자탕 2인분 주문할게요.”

선재가 주인인 듯 보이는 남자를 쳐다보며 감자탕을 주문했다.

예, 하고 대답한 남자가 작은 모니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근처엔 나이 든 남자들이 술을 기울이고 있고, 구석 쪽 테이블에선 여자 넷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굴이 붉게 오른 남자들이 술잔을 부딪치고 있는 게 보였다.

곧 들어온 범진은 문도 무식하게 열어젖혔다.

와도 꼭 이딴 데를 오느냐고, 범진은 큰 소리로 말했다. 주변 눈치를 본 건 선재였다. 카운터에 있던 사장이 목을 긁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그래도 장사하시는 데니까….”

앞에 앉은 범진이 선재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손을 들었다. 다가온 사장을 향해 범진이 고개를 들었다.

“담배 팝니까.”

“예?”

“담배 하나 주세요.”

“어, 손님, 저희는 일반식당….”

범진이 가벼워 보이는 담뱃갑을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이거.” 하고 내민 담뱃갑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범진과 담뱃갑을 번갈아서 바라보던 주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눈이 어느새 모두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범진의 표정엔 아무런 기색이 비치지 않았다. 주인이 붉은 담뱃갑을 멍하니 쳐다보다 선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혼자서 무안한 표정을 한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범진은 여전히 주인을 쳐다보며 담배, 하고 말하고 있었다. 사장이 선재를 쳐다보자 손으로 담뱃갑을 턱 하고 내리쳤다.

“어이, 지금 내랑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손님, 저희는….”

“너거 뭐.”

인상을 팍 찌푸린 범진이 귀찮다는 듯 담뱃갑을 옆으로 밀었다. 툭 떨어진 담뱃갑이 사장의 발에도 한 번 부딪혔다.

“담배 안 팔 거요.”

범진이 확인하듯 물었다.

어느새 범진에게만 시선을 둔 사장이 아닙니다, 팝니다, 했다. 사장은 상체를 숙여 담뱃갑을 주워줬지만, 범진이 그거 갖다 버리세요, 했다.

“…예.”

고개를 끄덕인 사장이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그거 낸테 한 겁니까?”

한숨 소리를 들은 듯, 범진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까지 물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되지도 않는 행패를 부리려고 하는데, 선재는 그걸 막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여전히 제게도 불똥이 튈까 두려웠다. 주인이 계산대 쪽으로 가려다 급히 자세를 돌리고 아닙니다, 말했다.

곧 밖으로 나간 사장의 뒷모습을, 선재가 미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쳐다봤다.

그만하라 팔이라도 휘젓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선재는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는 이물감과 통증에 의자에도 어색하게 앉아있는 채였다.

이런 처지로 범진에게 뭘 말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서러워지는 마음에, 선재가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움직였다.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다 배 많이 고픈가 보네, 했다.

선재는 그 말에 헛기침만 했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번 크게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자탕 냄비를 든 종업원이 테이블로 걸어왔다.

감자탕은 가운데 위치한 가스버너 위에 놓였다. 냄비를 올리고 불을 켜는 종업원의 손길이 재빨랐다. 선재는 뒤이어 전달된 앞접시 두 개 중 하나를 범진 앞에 놓아주었다. 수저는, 하고 미소가 걸린 범진의 얼굴을 쳐다본 선재가 말없이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냈다. 웃음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바로 드셔도 됩니다, 종업원이 자리를 떠나자 또 둘만 남았다.

범진은 냄비를 쳐다보다 여기, 했다.

그 소리에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술은 안 줍니까, 하고 주문하지도 않은 술을 찾았다. 냉장고 바로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아, 예, 하고 술을 갖다 주었다. 그리곤 카운터로 가 모니터를 누르는데, 눈이 이쪽을 흘끔흘끔 향했다. 선재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있어도, 없어도 불편하다. 짧은 감상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선 건 식당 주인이었다. 검은 비닐을 든 채였다. 주변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온 것인지 딱 그만한 무게가 실린 것처럼 보였다. 범진이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선재에게만 뭘 보냐고 물었다.

다가온 주인을 향해 고개를 든 선재가, 그제야 범진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범진은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감사하단 말도 없이 놔두고 가라 다른 테이블을 향해 턱짓했다.

“예….”

읊조리듯 대답한 주인이 계산대로 돌아갔다.

팔팔 끓기 시작한 감자탕 국물에 빨간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배는 고프고, 앞에 있는 음식도 맛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낮부터 거의 쫄쫄 굶었고, 음료수를 받아서 마신 것도 허기와 갈증 때문이었다. 허나 시한폭탄 같은 범진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으려니 그 간단한 걸 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 생길까 마음을 졸이게 되고, 배고픔에도 무뎌지고 있었다. 선재는 제가 건넨 숟가락으로 국물 맛을 보는 범진을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뜨겁냐, 씨팔.”

끓고 있으니 당연히 뜨겁겠지.

선재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감자탕을 뻔히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범진이 어이가 없었다.

이내 버너 불을 끄더니 안 먹냐 물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만 두었던 숟가락을 든 선재가 대꾸는 없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때, 옆에 있던 소주병 하나를 깐 범진이 병 주둥이 쪽을 잡고 선재를 향해 까딱거렸다.

숟가락을 놓고 소주병을 건네받으려던 선재는 범진이 어디, 하고 인상을 찌푸려 움직임을 멈췄다. 범진은 옆으로 고개를 틀어 턱을 가볍게 내렸다. 앞에서가 아니라, 옆에서 술을 따르라 명령하고 있었다.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이런 식당에서 작부 취급까지 하려는 범진에겐 기분이 많이 상했다. 고개를 들고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그것만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범진만 목소리를 얹었다.

“술 좀 따라보라고.”

“….”

확인하듯 소주병을 흔들던 범진이, 그런데도 계속 꽂히는 선재의 시선에 눈썹을 구겼다.

“뭐 하냐, 씨발년아.”

식당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갑자기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재는 관자놀이부터 뺨까지 듬성듬성 이어진 범진의 얼굴 흉터를 쳐다보다 침을 삼켰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욕까지 얻어먹었는데, 범진이 원하는 대로라면 옆으로 가 술까지 따라줘야 했다. 그건 정말 하기 싫었다. 같은 남자끼리 그러고 있으면 이상한 시선은 늘 오메가인 제게만 꽂혔다. 그런 걸 가타부타 설명하기도 싫고, 당장에 느끼는 모멸감을 쉬이 털어낼 수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선재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테이블을 찍듯이 소주병을 놓은 범진이 위쪽으로 눈을 들었다.

“밥을 먹든지… 사람을 불러서 옆에 앉히든지… 네 맘대로 해.”

차분히 말을 이은 선재가 테이블에서 벗어났다. 기가 찬 듯한 범진이 눈앞에 보이고 있었지만, 말을 멈추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네 맘대로 하라, 까지 말한 선재가 직원들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당 문을 나섰다. 범진은 이 문을 부서질 기세로 열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었다. 아무리 세게 열어도 그렇게는 열 수가 없었다. 상식도, 생각도, 기본도 없는 놈.

문을 열자마자 끼쳐오는 초여름의 서늘한 공기에, 선재가 드러난 팔뚝을 손으로 매만졌다.

골목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큰 차도도 주변에 있고, 멀리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구역 근처엔 택시도 많을 것 같았다. 그걸 타고 역으로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선재는 아직 막차가 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근처 역을 찾으려 휴대폰을 켰다. 강원도와 이어진 열차가 있는 건 알고 있는데, 집이 있는 태백까지 가려면 경로가 복잡했다. 버스가 제일 나을 것 같아 터미널을 찾으려 제일 가까이에 있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거기 앉아 뭐든 알아본 다음, 콜택시를 부를 생각이었다.

“….”

식당에서 점점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몇 걸음 걷자마자 엉덩이에선 통증이 느껴졌다. 모텔에서 나설 때부터 상태가 별로였으니 갑자기 나아질 걸 기대한 게 잘못이었다. 선재는 가다가 서고, 멈춰있다 걷길 반복했다.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섹스를 이런 식으로 폭력적으로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구멍이 아직도 덜 닫힌 채였다. 선재는 참으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비참한 신세가 그런 데서 단번에 느껴졌다.

나쁜 자식.

밥이나 제대로 먹었다면 이렇게까지 서럽진 않을 텐데.

선재는 사실, 뒤늦게 느껴지는 배고픔 때문에 더 격해지는 감정을 느끼던 참이었다.

멀게 보이던 정류장이 점점 가까워질 때쯤이었다.

선재는 또 잠시 멈췄다가 발을 천천히 뗐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오메가가 아니라, 그냥 베타 남자로 태어났었더라면 말이다. 선재는 낯선 지역에서 혼자 잠들 아이 생각도 나고, 오늘 당한 일도 생각이 나 더는 눈물을 삼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간지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눈물도 툭 하고 뺨으로 떨어졌다.

엉덩이는 물론 사타구니나 종아리, 배도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목도 쿡쿡 쑤시듯 따가웠고, 머리에도 울리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목덜미부터가 뻣뻣한 걸 보니 자세를 잘못 잡은 여파도 있는 것 같았다.

눈물 때문에 얼굴도 차가웠다.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었지만 서러움을 참긴 힘들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인도를, 선재는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차도가 바로 옆에 있어선지 가끔씩 휙,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도 명확하게 들리는 편이었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적막하고 고요해, 제 숨소리를 크게 듣고 있을 때가 많았다. 울음 섞인 훌쩍임을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요건이었던 것이다.

그때, 고요를 깨는 소리가 바로 옆 차도에서 들려왔다.

족히 몇 초는 울렸을 듯한 클락션 소리였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선재가 익숙한 차량 한 대를 보았다. 차창이 모두 열려 있어 안쪽이 금세 훤히 보였다.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인 범진이 눈을 들고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니 뭐 하냐.”

한쪽 팔만 대충 핸들에 올린 채로, 범진은 인상을 쓰고 물었다.

구겨진 이마를 바라보던 선재가 몸을 앞쪽으로 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류장에 앉았다 가기는 글렀다. 차가 자주 지나다니진 않는 차도라, 당장 택시를 잡을 수도 없었다. 선재는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택시를 예약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무작정 걷는 것밖엔 하지 못할까. 꽤 걸어가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멀리 보이는 빛들을 보며, 선재가 마음을 다잡았다.

“안 타냐?”

범진이 차선 하나를 떡 하니 차지하고 저를 따라오고 있었다.

“….”

“그냥 타지?”

“….”

“슬슬 열 받는데 그냥 타라?”

최대한 그쪽으론 눈을 보내지 않은 선재가 휙 지나가는 다른 차의 후면에 시선을 던졌다. 차가 많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한 대씩은 지나가고 있었다. 차가 낸 바람에, 선재의 단정한 머리칼이 한껏 흩날렸다. 범진이 나타나기 전까지 처량맞게 울고 있었는데, 범진이 저를 따라오면서부턴 눈물이 뚝 멈췄다. 그래도 흘린 눈물 때문에 뺨이 깨어질 듯 차갑긴 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닦은 선재가 앞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어이, 씨발아.”

“….”

겨우 다듬어놓은 마음에, 범진은 다시 돌을 던졌다.

“안 타냐!”

그리곤 고함을 질렀다.

잠깐 멈췄던 선재가 마른 침을 삼키며 계속 앞으로만 나아갔다. 범진은 고개를 푹 숙이다 차를 세웠다.

와, 씨발, 하고 차 문을 열었다.

욕까지 어렴풋이 들었지만, 선재는 범진이 뭘 하는지까지는 보지 못했다.

그저 범진이 쫓아오지 않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야!”

하지만 뒤에서 들린 소리에 범진이 여전히 쫓아오는구나, 싶었고, 다시 야! 하고 들린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리는 걸 알았다. 그제서야 우뚝 멈춘 선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뭘 볼 새는 없었다.

돌자마자, 범진의 손바닥이 그대로 뺨에 내리꽂혔다.

선재의 고개가 범진의 완력에 사정없이 돌아갔다. 쫘악, 하고 뺨 때리는 소리가 인도 위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힘을 이기지 못한 선재가 풀썩 주저앉아 얼굴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아무리 사력을 다해 때린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선재는 범진과 체격부터가 달랐다. 거기다 무방비였다. 너무 놀라 무표정하던 선재의 눈 아래가 순식간에 붉게 올랐다.

“…꼴 받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냐. 썅년아.”

여차하면 발길질까지도 할 기세였다. 씨발! 하고 소리 지른 범진이 바닥을 발로 찼다. 손으론 선재를 막무가내로 일으켜 세웠다. 반강제로 일어선 선재가 금세 붉어지는 얼굴을 들어 범진을 쳐다봤다. 두 눈에서 방울이 된 눈물이 소리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선재 자신은 눈치채지 못한 눈물이었다.

“내가 씨발. 몇 번이나 얘기했지.”

“….”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범진은 진심으로 화가 나,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화가 나서…? 눈가가 젖어서 앞이 자꾸 사라졌다. 범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선재는 퉁퉁 불기 시작하는 뺨을 만지며, 화를 내는 범진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봤다.

“이 씨발!”

범진은 성질을 못 이기고 다시 손을 위로 크게 들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선재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딱딱한 바닥에 그대로 엉덩이부터가 닿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들었다. 하체가 난도질당한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바닥에 손을 댄 선재가 기어코 우는 소리를 냈다.

“으아…으….”

목이 막히고,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막막하기만 했다. 맞아서 울고 있게 될 줄은, 그것도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을 줄은 언제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범진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것일까? 선재는 울면서도 복잡한 생각들이 섞여드는 걸 막지 못했다. 흙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얼굴도 지저분하게 되었다.

범진은 삐딱하게 서서 그런 선재를 빤히 내다보기만 했다. 씨팔… 하고 조용히 욕을 내뱉으며 한숨을 쉬었다.

“말 씨발, 잘 들어라.”

“으윽, 으으….”

대답을 구하는 범진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이고 있었다. 일어나라, 하고 제 팔을 잡고 위로 드는 범진의 힘이 너무 셌다. 선재가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눈앞의 범진을 다시금 올려다봤다. 범진은 알았냐, 말 잘 들으라고, 하며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선재는 울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운 날 얼굴이라도 내놓은 것처럼, 뺨이 눈물 때문에 꽁꽁 굳어 있었다. 여름이 왔는데, 왜 따뜻하지가 않지. 선재는 이리 오라는 범진의 손을 보고 천천히 따라서 걸었다. 얼굴을 세게 만지며 눈물을 닦았지만 흙 때문에 더 더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범진은 곧 도착한 차 옆에서 담배 하나를 물었다. 선재에게 눈을 둔 채로 차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 얼굴을 쳐다본 선재가 범진의 차 조수석에 먼저 몸을 실었다.

* * *

엘리베이터에서도 별말을 않던 범진은 객실로 들어온 뒤에야 선재의 얼굴을 제대로 살폈다.

“얼굴 보자.”

“….”

“그러게 씨이팔….”

손을 처음 써보는 사람처럼 범진이 선재의 턱을 쥐고 흔들었다. 한 대를 때렸지만, 얼굴은 그 이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턱이나 이마도 붉었다. 뭣보다 눈이 부어, 한쪽 눈에 져 있던 속쌍꺼풀이 더 얇게 구겨지며 제 모양을 그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벌건 눈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깔 이거 더 붓겠네.”

“….”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선재는 범진이 턱을 쥐고 흔들어대는 대로만 얼굴을 움직였다.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범진의 뒤편으로 빛이 깜박깜박했다.

통로 쪽 조명은 아예 고장 난 게 맞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코를 훌쩍였던 선재가 범진이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도 코를 훌쩍였다.

“뭘 자꾸 우는데요.”

“…우는 거 아니고, 아까 추워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여름인데.”

“….”

“그게 춥다고요.”

범진이 제 손에 잡힌 선재의 턱을 살살 흔들었다. 어? 그게 춥습니까, 하고 또다시 물었다.

그런 말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선재는 지금 멍하기만 했다.

입을 꾹 닫고 초점만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범진은 입도 붓고, 눈도 붓고, 뺨도 한쪽이 부풀어 오른 선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씻고 오세요.”

씨발, 하고 말문을 연 범진이 그런 정상적인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선재는 위를 올려다보다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은 한참 후에나 떨어져 나갔다. 선재는 범진이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여는 걸 보고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범진은 그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가래침을 카펫에 뱉고, 깊은 밤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선재는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부터 살폈다.

당장 아침에 준희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혹시 저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맞은 데가 부풀고 있는 건 물론이고, 피부 아래에 바람을 불어 넣은 듯 곳곳이 다 부어올라 있었다.

“아으….”

선재는 손을 들어 이마도 한 번 만져보았다. 확인하듯 힘을 줘 꾹 누르는데, 열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종일 먹은 것도 없이 이 고생을 했으니 멀쩡할 리가 있나. 선재는 아랫배가 아려오는 걸 참고 소변을 본 뒤 얼굴과 손을 씻었다. 물이 닿으니 그나마 안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벽 너머엔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몸을 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온몸이 뻐근해 뜨거운 물을 맞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선재는 물이 안 닿는 곳에 옷을 벗어두고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아프고 뻐근한 부위를 중심으로 물을 맞자, 기분 탓이라도 몸이 개운해진 걸 느꼈다. 선재는 벗어뒀던 옷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입은 채로 욕실을 나섰다.

“니가 알아서 하라고.”

창문가에서 통화를 하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못 하면 니가 내 손에 뒤지는 기지.”

장난하듯 말하지만, 진짜 장난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바로 앞 침대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하루는 쉽게 지나지 않고 있었다. 더디고, 또 더디다. 선재는 코가 간지럽고 아픈 느낌에, 작은 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실내는 매캐하고 더운 공기로 가득했다. 담배를 몇 대나 태운 건지, 방안이 부연 연기로 채워진 게 눈으로도 보였다. 에어컨이 강하게 작동되고 있었지만 텁텁함을 지워주진 못했다. 선재는 수건으로 머리 물기를 닦으며, 이발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었는지나 떠올렸다. 특히 옆머리가 많이 자라 귀 뒤로도 머리카락이 넘어갈 정도였다. 곧 이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재는 수건을 털었다.

“형님.”

계속 통화 중이었는데, 그건 저를 부르는 호칭 같았다. 선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셔.”

“….”

“미안합니다.”

뒤늦게 어, 하고 고개를 끄덕인 선재는 그래, 까지 덧붙였다. 말이 끝난 것 같아 다시 벽면을 쳐다보는데 터벅터벅, 범진이 걸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범진은 큰 보폭으로 걸어 단숨에 선재가 앉아있는 침대 앞까지 와서 섰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던 선재의 턱을, 범진이 손으로 들어 올렸다.

“미안합니다.”

“…어.”

짧은 대답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를 모르겠다고 할까. 범진은 아까처럼 거칠게 턱을 잡아채지는 않았다. 그냥 얼굴을 들고,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그냥요.”

“….”

뜻 없는 행위에, 선재도 깊은 생각을 거두었다. 아프지 않으면 그걸로 다행이다.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의 눈에 작은 범진이 비치고 있었다. 새까만데 투명하다. 신기한 듯 시선을 떼지 못하던 범진이 입술을 혀로 쓸었다. 선분홍 띠를 두른 눈가가 물기 때문에 촉촉했다. 울었기 때문도 있지만, 범진에게 맞아 얼굴 곳곳이 붉은 분칠을 한 듯 올라있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범진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 그래 계속 감을래요.”

“뭐를….”

“감지 말라고.”

세상에 눈을 안 감는 사람도 있나. 선재는 범진의 시비라면 여태까지도 적응이 안 되었다. 한편으론 약이 올랐다.

눈이 시리듯 아팠는데, 눈까지 감지 않으려고 하자 눈물이 금세 흘렀다. 선재는 빤히 뜨고 있다가 눈물이 툭 떨어지는 느낌에 눈꺼풀을 짧게 닫았다 열었다. 그 모습을 본 범진이 선재의 뺨을 엄지로 힘주어 쓸었다. 그리곤 뒤로 돌아 객실의 불을 껐다 켰다 했다. 제일 작은 불 하나만 남겨둔 채로, 범진은 함만 더 하자, 말했다.

어둑한 공간에서 투둑투둑, 단추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 함만 더 쑤시자고.”

“씻었는데….”

“씻었으니까 해야지.”

관계의 흔적이 모두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아직도 팬티엔 범진의 정액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외출을 했을 때도 그랬지만 씻고 침대에 앉아있는데도 그런 느낌은 계속해서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관계를 한 터라, 몸이 제대로 반응을 못 하는 탓이었다. 오메가라고 해도 길이 들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선재는 죽은 창우와도 거의 섹스리스로 살았다. 몸이 서툴게 열리는 것도 싫었지만, 범진이 몸을 길들이는 건 더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상태로 섹스를 하고, 그를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선재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다리를 벌리자 범진은 좋아했다.

형님, 씨발, 그래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고 선재를 어르듯 말하며 프리컴을 싸대는 성기를, 범진은 선재의 구멍에 곧바로 박았다. 형님 구녁, 원래 이래 걸레처럼 벌어져 있습니까, 하고 제 성기를 물고 있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했다. 선재는 범진을 올려다보며 그런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흔들리고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이면서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은 죽어도 하기가 싫었다.

* * *

아침이 되자 한여름 못지않은 빛이 객실 창을 뚫고 들어왔다.

본격적인 여름은 아닌데 어제도 그렇고, 햇빛이 꽤 강한 편이었다.

선재는 얼굴에 손을 대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잠든 범진은,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씹, 씨바,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빛이 포도알처럼 맺혀있던 흔적이 얼굴에 남았다. 선재는 열기가 있는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시계를 쳐다봤다.

9시.

식당에서 돌아와 섹스를 하고, 새벽 세 시엔 범진이 사 온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었다. 밥을 먹고 또 섹스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에 남은 게 거의 없었다.

바닥엔 샌드위치 포장지와 맥주캔, 범진의 담배가 앞이 조금 탄 채로 버려져 있었다.

담배가 카펫을 그슬린 탓에, 아이보리색 털이 검어져 있었다. 선재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바닥에 발을 대보았다.

옅게 느껴지는 통증은 있지만 처음 했을 때처럼 끔찍한 수준은 아니었다.

선재는 창문을 쳐다보며 조용히 한숨 쉬었다. 지금 일어났으니 강원도엔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범진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선재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쓰레기부터 주워 버렸다.

테이블에도 맥주캔이 두 캔이나 있고, 먹다 남은 아몬드도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손으로 테이블 아래를 받친 선재가 아몬드와 음식물 찌꺼기, 담배 한 개비를 손으로 쓸어 받았다.

멀쩡했던 객실이 엉망이었다.

담배가 맥주에 젖어 있어 선재의 손도 금방 젖었다. 선재는 그 손을 쓰레기통 위에서 털고, 화장실로 가 손과 얼굴을 씻었다.

밖으로 나오자 범진이 으, 씨발, 하고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부터 쇄골, 가슴을 가득 채운 문신이 생물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범진은 큼지막한 가슴근육을 한 번 치고는 어깨를 뒤로 꺾었다. 두둑, 하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선재는 물기가 거의 다 마른 손을 가운에 비볐다.

“잘 잤습니까.”

쳐다보자, 범진은 웃고 있었다. 날카로운 외부 빛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진 채긴 하지만 입은 분명 올라가 있었다.

“어.”

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침부터 어딜 자꾸 돌아다니는데요.”

범진은 내키는 대로 말을 높였다 낮췄다 했다. 침대를 지나치려던 선재가 우뚝 멈춰 서서 범진의 눈을 쳐다봤다.

“방 좀 치우게.”

“그걸 니가 왜 하는데요.”

범진의 눈썹이 확 일그러졌다. 우람한 상체를 뒤로 기울이며, 젖나 별나시네, 했다. 곧 침대 위에 발라당 누운 범진이 이불을 걷고 하체를 드러냈다. 퉁겨져 나온 성기가 아침부터 단단한 모양으로 위로 솟아 있었다.

“이리 올라와 보세요.”

“….”

“아, 손만 쓰게요. 올라와 보세요.”

그래도 선재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하자, 범진이 호통을 치듯 언성을 높였다. 이씨, 하고 손까지 들었다.

“귓구녁 진짜 제대로 함 뚫어줄까요.”

“…아니.”

손으로 뺨을 쓱, 쓸어내리듯 만진 선재가 범진이 누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침부터 핏줄이 돋은 성기를 쳐다보자니 역하단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까맣고 거친 음모도 더욱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선재는 엉성하게 꿇어앉은 채, 범진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에 할 땐 뭐 거의 내 자지랑 딱 맞든데요.”

범진이 웃으며 말을 했다.

방금까지 화내다가 또 저렇게 웃고 있었다.

선재는 입을 닫은 채 범진의 말을 들었다.

“요만했는데 이만큼 벌어져가지고.”

요만, 했다고 말할 땐 새끼손가락을 들고, 이만큼, 이라고 할 땐 팔뚝을 내밀었다. 선재는 제 몸이 얼마나 벌어지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거기에 말을 덧붙인다는 것도 웃겼다. 범진이 저 부끄러우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걸 아니, 표정은 더욱 굳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범진이 툭 던지듯 한 말에 선재가 다시 눈을 들었다.

“손으로 하는 건 이제 껌이긋네.”

입에선 짧은 웃음이 샜다. 턱으로 아랫도리를 가리킨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버티거나 가만 있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던가. 선재는 어제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몸을 좀 더 범진 쪽으로 붙인 선재가, 두 손을 내밀어 범진의 성기를 쥐었다. 워낙 거뭇해 푸른 핏줄만 눈에 좀 들어올 뿐이다. 눈을 아래로 하고 선재의 손을 쳐다본 범진이 야, 하고 짧은 감탄을 했다.

“손도 씹, 참 개, 젖같이 생겼다.”

희고 곱다는 걸, 범진은 그렇게 표현했다.

짧게 끊어 말하는데도 흥분이 실려 있었다. 범진의 성기에만 시선을 맞춘 선재가 어색하게 손을 움직였다. 정확히는 허벅지 쪽에 시선을 둔 채였다. 징그럽게 살아있는 동물 같은 성기엔 차마 눈이 가지 않았다. 부드러운 선재의 손바닥이 움직이자, 범진의 성기가 더욱 딱딱해지며 뒤로 꺾일 듯 팽창했다.

성기는 손바닥 안에서 반동을 거듭했다. 불뚝이며 솟는 성기 때문에 선재는 손을 몇 번이나 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아서, 다른 한 손까지 동원해 범진의 성기를 비벼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뗄까 봐 두 손을 모두 쓰는 거지만, 범진은 오히려 더 좋아했다.

“야.”

범진이 손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성기에서 두 손을 뗀 선재가 한 손으론 계속 만지라는 범진의 말에 한 손을 다시 성기로 가져갔다. 이렇게 하면 못한다고 욕을 할 게 뻔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선재는 한 손으로만 범진의 성기를 쥔 채로 범진이 손을 까딱이고 있는 방향으로 몸을 붙였다. 다소 붙은 선재를, 범진이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성기를 쥔 채 범진에게 안기려니 팔이 불편했다. 딱딱하고 뜨거운 가슴에 뺨이 닿자 민망하기도 했다.

“씨발, 얼굴 안 비주냐.”

“….”

느릿하게 범진의 성기를 만지는 채로, 선재는 고개를 들어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팔로 선재를 끌어당겨, 닫혀 있던 입에 굵다란 혀부터 밀어 넣었다.

처음엔 뺨만 가슴에 붙었는데, 범진이 끌어당기는 힘에 온몸이 바짝 붙었다. 팔이 눌려 범진의 성기를 제대로 만질 수조차 없었다. 선재는 억지로 입을 열고 들어오는 범진의 혀에 눈부터 꽉 감았다. 갈수록 고개가 꺾여 자세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입 안 살이 씹히고, 목구멍이 찔리는 키스에 선재는 소리를 질렀다.

“뭐.”

범진이 입술을 떼며 선재를 내려다봤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에선, 범진의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재는 범진의 눈을 쳐다보다 입을 다시 닫았다. 범진이 씨팔, 구멍 다 안 여냐, 하고 다시 키스해왔다. 또 확, 꺾이는 고개에 선재가 몸부림을 쳤다.

키스하고, 빤히 쳐다보고, 키스하고, 빤히 쳐다보고.

범진은 선재를 한쪽 팔에 가둔 채 그런 짓만 반복해서 했다.

입 근처가 거대한 빨판에 빨린 듯 벌겋게 달아오른 선재가 기어코 그만하란 말을 했다.

“그만하라고?”

“…입 아파.”

“니 씹, 진짜 마하, 이도 지랄하네.”

팔로 선재를 감은 채, 범진은 손을 위로 올렸다. 선재의 뺨을 밀어내듯 손가락 네 개로 쿡쿡 찔렀다. 구겨져 있던 선재의 얼굴이 그 손장난에 맥없이 밀렸다. 입술은 앞으로 튀어나와 동그랗고 뾰족한 모양이 됐다. 그 입술을 쳐다보던 범진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입을 맞췄다. 얼굴이 다 일그러질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려, 선재는 또 아프다고만 말했다.

“읍, 그만… 아파.”

“씨팔, 진짜 죽이까.”

범진의 잇새로 웃음이 샜다. 선재는 더는 고개를 들지 않고 범진이 하는 대로만 가만히 있었다. 안겨만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키스나 짧은 입맞춤을 때리듯이 하는 범진에겐 절로 그만하란 말이 나왔다. 죽일까, 하고 웃으며 말했지만, 선재는 그 순간에도 오금이 저렸다. 더는 입을 맞추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또 그런 말을 했다간 범진이 진짜 저를 죽일 것 같았다.

“좆이나 빨아바라.”

한참을 안고,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던 범진이 턱으로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팔에도 힘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어느새 성기도 더는 쥐지 않고 있던 선재가 몸을 일으켜 아까보다 더 발기해 있는 범진의 성기로 엉덩이를 끌며 다가갔다.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킨 범진은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갔다.

내린 눈으로, 점점 벌어지는 선재의 입을 진득하게 응시했다.

매끈하고 젖은 입매가 귀두로 벌어지는 광경을 끈질기게 훑었다.

제 배에 닿은 손을 쳐다보던 범진은 그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제 손에 비하면 약하고 작은 손가락을 장난치듯 뒤로 꺾어봤다. 화들짝 놀란 선재가 머리를 뒤로 빼려 하는 걸, 범진은 다른 손으로 제지시켰다. 선재의 뒷머리를 꾹 눌러 성기를 못 뱉게 했다.

“내가 뱉으라 하드냐.”

무지막지한 힘에, 대포 같은 성기가 순식간에 선재의 목 끝으로 꽂혔다. 우욱, 하고 몸을 들썩인 선재가 눈에서 눈물을 떨어트렸다. 여러 번 입으로 해봤지만, 목구멍이 고무가 아닌 이상 크기에 맞춰 늘어날 리가 없었다. 선재는 눈물을 또 툭 떨어트리며 눈을 감았다.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성기를 빨기 위해 목을 천천히 움직였다. 뒤에 닿았던 범진의 손도 그런 움직임엔 힘을 주지 않았다.

몸을 웅크린 채로, 선재가 범진의 성기를 문 채 고개를 움직였다.

범진이 선재의 입 속에서 반쯤 사라졌다 튀어나오는 좆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몽둥이 같이 부푼 성기는 핏줄 때문에 매끈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입술이 불거진 데를 지날 때마다 좆 끝에서 침이 질질 새 나왔다. 선재가 입으로 빨아주고 있는 덕에, 음모에도 그 침이 튀었다. 범진의 얼굴에 험한 기색이 스쳤다.

“자알, 빠네.”

못 빠는 선재를 두고, 범진은 일부러 그런 소리를 했다.

선재는 얼굴 전체가 아프기만 했다. 눈앞이 흐려지다 툭 떨어지는 액체에 다시 맑아졌다. 범진의 앞에서 몇 번째 우는 건지를 몰랐다. 목 끝을 찔려 눈물이 난 거지만 그래도 굴욕스러웠다. 선재는 무릎을 꿇은 채로 범진의 성기를 빨고 있었다. 범진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오른쪽 얼굴이 훤히 드러난 채였다. 일부러 머리카락을 내리려고 얼굴을 조금씩 움직이면, 범진이 다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때마다 눈가를 찌푸린 선재의 얼굴도, 범진은 재밌다는 듯이 쳐다봤다.

한참을 빨아주고, 손까지 동원한 뒤에야 범진은 정액을 쌌다.

목 깊숙한 자리에 싸서, 반은 뱉고 반은 삼켜야 했다. 한참을 쿨럭댄 선재의 얼굴이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벌겋게 변하게 되었다.

“맛있드냐.”

범진이 선재의 턱을 휙 들었다.

당연히 맛은 하나도 없었다.

선재는 눈만 다른 데로 돌린 채로, 범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고, 범진이 자지를 세우고 화장실로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20분쯤 뒤에 나온 범진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드로어즈를 그제야 주워 입었다.

바지를 입고, 단추가 뜯긴 셔츠를 맨몸에 대충만 걸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선재도 옷을 갈아입고 침대 주변을 정리했다.

범진이 뒤에서 또 개좆같은 짓을 한다고 언성을 높였지만, 손에 있던 쓰레기는 마저 쓰레기통에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도 범진은 니가 씹, 여기서 일을 하느냐고 성질을 냈다. 선재는 범진을 쳐다보며 고개만 젓고 말았다. 1층에 도착하자, 전날 저를 끈질기게 훑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선재는 범진을 따라서 모텔 밖으로 나갔고, 키는 범진이 반납했다.

“날씨 죽이네.”

해가 모텔의 그늘망에 걸려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범진을 따라가며 위쪽을 올려다본 선재가 눈을 찌푸렸다. 10시도 안 되었는데 볕이 강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주차돼있던 차는 어떻게 봐도 범진의 차인 게 티가 났다.

원래라면 두 대의 차가 주차될 수 있는 자리에 범진의 차가 막무가내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범진은 굳이 두 칸을 쓴 비용을 지불했다. 조수석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그래도 돈은 순순히 내는 것 같아 마음을 놓았다. 그런 걸로 따지고 들면 머리가 정말 새하얘질 것 같았다.

출발하자마자, 빛으로 일렁이는 강과 커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선재는 창밖만 쳐다보며, 범진이 어떻게 운전하는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쌍욕을 하며 차를 퍽퍽, 치는 범진을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이따금 급브레이크를 밟아 휘청이기라도 하면, 전혀 잘못 없는 사람을 향해 범진은 큰소리를 질렀다. 당황해하는 남자를 향해 씨팔롬이 뒈지고 싶냔 말을 했다.

그게 아니면 범진은 콧노래를 불렀다.

날씨 좋죠, 형님, 하고 말을 걸면 선재가 그제야 옆을 봤다.

응.

그렇게 대답하면 또 비실비실 웃었다.

길을 나아가던 차가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 선재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했다. 30분이나 지났을까. 눈을 번쩍 떴을 때 보인 건 휴게소 간판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적당히 맑은 바람이 얼굴에 닿는 게 느껴졌다. 뒤편에 자리한 산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선재는 담배를 태우는 범진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자.”

저를 툭, 치는 범진의 얼굴 앞엔 옅은 담배 연기가 남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연기가 안개처럼 퍼져 나가는 게 보였다.

캬악, 하고 가래를 모은 범진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계단에다 침을 뱉었다.

엄마, 저도 주세요. 저도요.

어디선가 들린 소리. 선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커피를 들고 있었는데, 맛이 궁금한지 저도 달라 고집을 부리고 있던 거였다. 선재가 그 모습을 보다 오늘 처음으로 작게라도 웃어보았다. 준희 생각이 났다.

“안 되는 것도 존나 많다.”

앞쪽에서 들린 범진의 목소리에, 선재가 다시 앞을 봤다.

특정 메뉴가 안 된다는 여자 직원의 말에, 혼잣말을 그리도 크게 하고 있었다.

범진을 상대하던 직원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범진이 뒤를 돌아 형님, 뜨거운 거 먹을래요, 하고 물었다. 사람들이 거대한 몸을 한 데다가 살벌한 흉터까지 얼굴에 있는 범진과 자신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선재가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거나 괜찮아. 아무거나.”

급히 대답했지만 메뉴는 하나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문대 너머로 시선을 던진 선재가 만두 담긴 라면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나 만두, 만두라면 먹을게.”

범진이 선재를 보다 손가락질을 하며 메뉴 사진을 가리켰다. 곧 계산하는 걸 보니 주문은 어떻게든 한 것 같았다. 맘을 졸이고 있던 선재가 범진 쪽으로 따라붙었다.

거의 집에서만 봐서 범진이 밖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몰랐다. 강원도에선 기껏해야 고깃집과 병원에서의 기억이 전부다. 병원에서는 화가 나서 그랬다고 생각했고, 고깃집은 주인과 잘 아는 사이여서 별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제, 감자탕집에서 얼마나 당황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나.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사람들은 또 저와 범진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앉지.”

선재는 애써 말소리를 높였다. 범진이 히죽거리며 선재의 뒤에서 몸을 불쑥 내밀었다.

“이제 뭐 하자고 말도 하네.”

“…어.”

손님들이 앉은 구역에서 완전히 떨어진 테이블이었다. 선재는 빠르게 의자를 꺼내고, 그 위에 몸을 붙여 앉았다.

“형님은,”

범진이 맞은편 의자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어?”

“얼굴이 그래 돼도 이쁘네.”

선재가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이쁘단 말은 안 들리고, 얼굴이 그렇게 되었단 말만 신경이 쓰였다. 한쪽 뺨이 볼거리에 걸린 것처럼 부어 있었다. 많이 운 탓에, 눈꺼풀도 통통하게 올라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준희가 저를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만 자꾸 되었다.

딩동, 하는 알림음과 사람들의 말소리, 멀리서 들리는 음악 소리가 뒤섞인 채 들려오고 있었다.

선재는 번호표에 22라고 적힌 숫자를 훔쳐보듯 쳐다본 뒤, 그 번호가 어디선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음식은 제가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선재는 휴게실 통유리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범진의 말대로 날씨가 참 좋았다. 하늘도 파랗고, 구름은 작고 선명한 것만 몇 개 떠 있었다. 준희도 맑은 날을 좋아하는데. 먼 데서 잠을 잔 아이를 떠올린 선재의 얼굴이 금세 어둡게 변했다.

딩동, 딩동. 연속해서 들린 전자음에 고개가 돌아갔다. 여러 숫자가 뜬 전광판에서 22번도 찾을 수가 있었다. 선재는 몸을 일으켰다.

“형님이 가지러 가려고?”

“어, 그거 줘.”

“됐습니다.”

범진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었다. 빠르게 테이블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는데 크게 벌어진 어깨가 단숨에 눈에 띄었다. 부랑자처럼 찢어진 셔츠를 걸치고 있던 범진은 차에 도착해서야 새 셔츠로 갈아입었다. 흰 셔츠였다. 저는 이렇게 얼굴이고 몸이 다 상해서 돌아가는데, 범진은 멀쩡한 걸 넘어, 평소보다 더 멀끔한 모습으로 휴게소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곧 받아든 식판에서 희뿌연 김이 솟는 게 보였다.

만두라면과 김밥 세줄.

선재는 수저의 짝을 맞춰, 돌아온 범진에게 한 쌍을 내밀었다.

범진은 식판을 밀어내며, 수저만 받아들었다.

“이렇게만 먹어도 되냐.”

수저를 아무렇게나 기울여, 라면과 김밥을 가리킨 범진이 선재를 쳐다봤다. 세 줄을 다 제 몫으로 시켰나 보았다. 어, 하고 작은 소리로 대답한 선재가 수저를 들어 식사를 먼저 시작했다. 바로 옆 테이블을 보니 범진은 덮밥을 따로 주문한 것 같았다. 번호표가 하나 더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덮밥 두 그릇을 테이블로 가져온 범진은 니도 하나 시켜줄까, 물었다.

선재는 눈앞의 라면과 김밥도 다 먹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너 먹어.”

“니 어제도 밥 못 먹었잖냐.”

“…새벽에 샌드위치 먹어서.”

얼버무리듯 말하며, 선재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렸다. 큼지막한 만두가 라면 국물에 빠져 있었다. 김이 풀풀 나는 라면 앞으로 얼굴을 가져간 선재가 후,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부드러운 면발을 입에 넣자, 따뜻하고 매콤한 기운이 입 안에 감돌았다. 선재는 국물도 맛보았다. 맛도 좋고, 따듯해서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범진은 덮밥 두 그릇을 깔끔하게 해치웠다. 선재는 김밥을 많이 남겼다. 세 줄이나 되었고, 알이 통통해 한입에 넣기도 힘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보게 된 광고판엔, 속이 꽉 찬 대왕김밥이 어쩌고, 하는 글자가 써 있었다. 제가 먹은 게 그 대왕김밥인 것 같았다. 선재는 포장도 뜯지 않은 김밥 두 줄을 집으로 들고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범진이 식판을 치워 실행하진 못했다. 집에 들고 가도 먹을 여유나 있을까.

별일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오늘은 하루가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바로 옆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휴게소 커피숍인데도 은은한 커피향이 안정감을 갖게 했다. 향기를 맡는 건 좋아하지만 마시는 건 좋아하지 않는 선재는 커피엔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그전에도 커피나 술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준희를 임신했을 때 아예 멀리하게 되니, 그 후로도 제 손으로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선재는 간만에 먹으니 더욱 맛이 없다고 생각하며 빨대에 입대는 시늉만 했다. 찔끔찔끔 흘러들어오는 까만 물에선 쓴맛만 났다. 범진은 쓰고 지독한 걸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어제도 웬 껌을 사서 씹어먹던데. 제 체향만큼이나 쓴 향기가 나는 껌을, 그렇게 잘도 씹어 먹었었다.

어제 일을 떠올리던 선재가 속으로만 쓰게 웃었다.

엉덩이가 떨어졌다가 다시 붙은 것처럼 얼얼했다. 처음 관계한 직후처럼 아프진 않았지만, 범진이 왔다 갔다 한 느낌은 남아 있었다. 찌릿할 때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 선재가 손으로 애먼 커피잔만 쓰다듬었다.

“다른 거 시켜주랴.”

고개를 숙이고 있자, 범진이 말을 걸어왔다. 다리로 툭 차며 건들기도 했다. 선재는 고개를 들어 괜찮다고 말했다. 다른 음료가 마시고 싶단 태평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빨리 집으로 가고 싶고, 아이가 보고 싶기만 했다. 원장이 사진을 보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신경이 안 쓰일까. 뭉게뭉게. 준희의 얼굴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정오가 가까워져 출발한 차는 빠른 속도로만 앞으로 나아갔다. 범진은 고속도로에서도 난폭하게 운전했다. 칼치기를 하고, 사람들을 향해 클랙슨을 크게 울렸다.

쌍욕을 하고, 상대방 운전자가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고 가는 광경은 한 시간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산과 터널을 얼마나 지나쳤을까.

태백 터미널에 눈앞에서 스치고 있었다.

“어디에 있다고?”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 걸 범진도 알고는 있었다. 선재는 그 질문에 어, 하고 뜸만 들였다. 휴대폰은 방전되었고 주소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린이집 건물 앞에 있던 식당과 카페의 이름은 기억이 났다. 더듬더듬, 상호명을 말해주자 범진은 짐작되는 거리가 있는지 곧장 어느 길로 진입해 들어갔다.

도착한 건물 앞에선 선재만 내렸다. 선재는 계단을 두 개씩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아이가 보고 싶어 애가 탔다. 어린이집엔 준희 말고도 많은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사정이 있어 며칠을 내리 맡겨지는 아이들도 있다지만… 선재는 준희를 맡기고 뭘 했는지 너무 잘 알아 아이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이는 원실에서 해맑은 표정으로 선재를 반겼다.

준희 미안해.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선재는 그런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뜻도 모르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선재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조금씩 움직였다.

그래도 웃고 있어 다행일까.

선재는 확인이라도 하듯 준희의 얼굴을 자꾸만 바라봤다.

제 얼굴을 못 알아볼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붓기 같은 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고개를 들고 빤히 쳐다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닌가 보았다.

아이와 차에 타서는, 마지막 고비라는 생각으로 버티기만 했다.

범진은 유턴이 가능한 길도 아닌 데서 차를 멋대로 꺾고, 사람들에게 자꾸만 고함을 치고 욕설을 내뱉었다. 뭐요? 하고 따지려던 사람도 있었지만 곧 범진의 수준을 파악하고 말을 아끼는 듯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있을까. 대낮부터 뭘 하는 짓인지 몰랐다.

선재는 겁이 많은 아이가 울기라도 할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준희의 얼굴을 살폈다.

그때마다 엣? 하고 쳐다보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라고 말하며, 선재는 하얗고 부드러운 아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주었다.

익숙한 동네가 눈앞에 보인 건 그로부터 몇 분이 더 지나서였다.

사람도 건물도 없는 길거리.

적막한 분위기가 감지되자 비로소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선재가 아이를 안고 있던 손에서 힘을 천천히 풀었다. 지이, 하는 소리를 낸 아이가 선재의 품속에서 버둥거렸다.

텅 빈 길가 풍경은 언제나와 같았다.

청테이프가 지저분하게 붙은 가게들, 오래 방치된 듯한 건물과 뿌연 유리창.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작은 나무들은 손질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희망이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선재는 토막처럼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숨기며,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 토닥일 때마다 아이는 품을 깊게 파고 들었다.

낡고 낮은 폐건물이 언덕 위로 보이고, 범진이 그 앞에서 방향을 꺾었다.

빌라 건물과 주택이 띄엄띄엄 자리한 골목 한복판에서 차는 멈췄다.

선재는 익숙한 빌라 건물 앞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범진이 그 건물 앞으로 차를 붙이며 시동을 껐다.

“재밌었다, 그쵸?”

“…어.”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린 범진은 자기 집이라도 들르는 것처럼 선재의 뒤를 따랐다. 선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부터 방에 두었고, 밖으로 나와서는 식탁에 앉은 범진을 불편한 기색 없이 대했다.

주스를 컵에 따라 범진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그걸 마시며 진짜 재밌었다, 말하는 범진에게선 어떤 나쁜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게 재밌구나. 선재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입을 맞춰오는 범진의 행동에도 무덤덤한 눈으로 일관했다. 혀가 들어올 때 느껴진 쓴 향기에 목구멍만 조금 따가웠을 뿐이다.

계속 키스를 하려고 몸을 붙인 범진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에 씨발, 했다.

걸려온 전화를 계속 무시하다가 마지막에야 받았다.

알아서 못하냐고 윽박을 지르듯 말한 범진의 목소리가 컸다.

결국, 좀 있다 오든가 할게요, 말한 범진은 10분도 안 되어 집을 나섰다.

선재는 범진의 레인지로버가 골목을 떠나는 걸, 거실 창가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돌아다니지도 않고, 차도 없는 거리라 범진의 차가 어디까지 가버렸는지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더는 특유의 엔진음이 나지 않자, 선재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준희의 로션이나 작은 가습기 받침대로 쓰게 된 캐리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방안을 쭉 둘러본 선재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캐리어도 펼치지 않고 준희를 안았다. 서랍에 손을 넣어 돈을 잡히는 대로 쥐었다. 혹시나 몰라 마지막으로 거실 창을 확인하듯 내다보았다. 누구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재는 준희를 안은 채 집을 나섰다. 사색이 된 얼굴로 빠르게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1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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