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5/29)

* * *

“아, 아흐.”

“니 씨팔, 소리 낼래?”

뒤에서 자지를 쑤셔 넣던 범진이 선재의 턱을 뒤쪽으로 들었다.

“…그, 러면 천천히 하라고….”

“씨발, 짜증도 내네. 이게.”

턱을 앞으로 던진 범진이 아래가 훤한 선재의 골반을 단단히 쥐었다. 반쯤 나왔던 자지를 다시 밀어 넣자, 엉덩이와 허리가 차례로 떨렸다. 깊숙이 위치한 내벽을 찌른 범진이 후으, 하고 숨을 고르면서도 자지를 쉼 없이 돌려댔다.

매일같이 해댄 좆질인데 병원에서, 그것도 오랜만에 하려니 자지를 감싸는 내벽의 느낌도 새로웠다. 씨팔, 하고 선재의 엉덩이를 뒤에서 치는 범진의 허리 짓에 속도가 붙었다.

“으… 으흐, 읍.”

안쪽까지 콱 박혀오는 지독한 감각에 선재가 온몸을 떨었다. 엉덩이만 달랑 들려 범진의 성기를 받던 선재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아까처럼 우뚝, 멈춘 범진이 선재의 턱을 다시 뒤로 들었다.

“진짜 씨팔, 조용히 안 하냐…?”

“우으….”

말 한마디 내뱉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범진은 벌게져서 입만 뻐끔대는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다 욕지거리를 조용히 내뱉었다. 씨….

“흐으, 네가 너무 아프… 세게, 하잖아.”

겨우 입을 벌린 선재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와중에도 허리를 쓴 범진이 속도를 천천히 하며 자지를 박았다.

“됐냐….”

“흑, 응.”

한 번 훌쩍거리고 뒤를 돈 선재는 팔을 세워 자세를 제대로 잡았다. 범진은 그게 ‘씹’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엄청나게 흥분했다. 씹, 씨발, 하고 골반을 잡아당기며 자지를 처박았다. 속도만 좀 낮췄다 뿐이지, 더 커진 자지 때문에 깊숙한 곳까지 가서 박히고 있었다. 좆 끝에서 느껴지는 살랑임이 뭔가 싶었다. 은밀하게 열린 부분에 자지가 닿자, 범진도 온몸이 불끈거렸다.

퍼억, 하고 진득하게 범진의 성기가 박혀올 때마다 선재는 간신히 소리를 참았다. 고개를 위로 들었다 푹 숙이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구멍이 범진의 것에 맞춰 벌어졌다 조여지고 있었다.

워낙 넓게 벌어진 탓에 주름도 한 올 남지 않았다.

그 매끈한 구멍을, 자지는 가차 없이 밀고 들어왔다. 푹 박힐 때마다 선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도 속도를 맞춰주는 듯해 소리는 어떻게 참기가 가능했다.

“아, 거기, 으, 시, 싫어….”

“뒤질라고, 씨밸.”

아랫배를 손으로 만진 선재가 너무 깊게 꽂히는 성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구멍도 찢어질 것 같았다. 범진은 늘 이만큼 벌어진다고 희롱을 하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은 달랐다. 아직도 범진의 성기를 무난하게 받기엔 많이 모자랐다.

범진이 위에서 아래를 향해 찍어누르듯 박으면, 선재의 몸이 앞으로 밀려갔다.

느려진 만큼 한 번에 힘이 와닿았다.

뒤로 빠질 때 나는 찌걱이는 소리도 훨씬 노골적으로 들렸다.

눈을 질끈 감은 선재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니도 씨발, 슬슬 간다. 안 그냐.”

느릿느릿하게 박으며 그런 소리를 하는 범진이 다리 한 짝을 세우고 구멍 안으로 자지를 진입시켰다. 자지에 감겨 같이 삼켜지는 구멍이 볼만했다. 눈을 내리고 결합부를 쳐다보던 범진의 눈빛에 사나운 기운이 돌았다.

하얀 엉덩이를 위로 든 범진이 한참이나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범진은 진득하게 박기를 반복하다 아예 안까지 처박은 다음엔 허리를 돌리며 자지가 내벽 사방을 쳐대도록 했다. 천박한 몸짓을 지탱하고 있던 선재의 팔꿈치가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 옆으로 빠졌다. 상체가 베개 위로 무너지자마자 선재는 손으로 입부터 틀어막았다.

틈을 주지 않은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들어 몇 번을 더 쳐댔다.

붕대 대신 붙이게 된 허리 위 반창고가 쭈그러지다 반이 떨어졌다.

배 속에서 정액이 퍼지는 걸 느낀 선재가 손으로 아랫배를 만졌다. 이제 편하게 쉬고 싶은데, 범진이 사정을 하면서도 느리게 추삽질을 이어 몸에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선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뒤쪽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엉덩이를 안 놓아주는 범진 때문에 이런 이상한 자세로 뒤를 돌아야 했다.

“…나 힘들어.”

“이게.”

씨, 하고 욕을 할 것 같던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천천히 풀었다.

성기가 빠져도 구멍이 닫히지 않았다. 선재는 옆에 있던 속옷만 대충 입은 채로 침대 위에 누웠다. 뒤가 정액 때문에 축축이 젖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범진은 병원복 바지만 입은 채로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물을 마시고, 니도 마실래, 했다.

“아니….”

남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곤,

“니도 다시 태어나면 니 함 따먹어봐라.”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 맛을 자기만 보는 게 아쉽다고 약을 올리면서, 그렇다고 딴 새끼한테 맛보게 하면 죽일 거라고 혼자 놀리고 혼자 화를 냈다. 선재는 아무런 반응을 해주지 않았다.

곧 밥을 시킨 범진은 도시락 두 개를 받아들고 특실로 들어왔다.

이러고 있으니 제가 환자 같았다.

선재는 민망한 마음에 옷부터 주섬주섬 입었다.

얼마간 쉬었더니 아까처럼 몸의 힘이 다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범진이 내민 도시락엔 고기와 생선이 가득했다.

요즘은 도시락도 잘 나온다고 생각하며, 선재가 툭, 툭, 떨어지는 머리를 받치고 숟가락을 들었다.

“에이 씹….”

등과 배에 붙은 반창고가 너덜너덜했다.

“…가서 다시 해달라고 해.”

“씹질하다 떼졌다고 말해도 되냐.”

“…그렇게 말 안 해도 되잖아.”

그렇게 반응하자 범진이 웃겨 죽으려고 했다. 계속 웃다가 배 땡긴다, 씨팔, 하고 단단한 복근을 손으로 탁, 쳤다. 당긴다고 하면서 배를 또 왜 치나 몰랐다. 옆에 있던 생수에 입을 댄 선재가 식사나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디서 사 온 것인지, 도시락인데도 밥에 고슬고슬한 윤기가 돌았다. 갓 지은 것처럼 흰 김이 솟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껏 웃던 범진도 앞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 용기를 뜯었다.

먼저 수저를 뜬 선재가 조기구이와 불고기, 적당히 익은 김치를 밥 위에 올려 야무지게 입 안으로 가져갔다. 니가 애새끼냐, 하고 또 시비를 거는 범진이 선재가 뭘 할 때마다 트집을 잡았다. 적당히 뜬 밥을 입에 넣었을 때도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씨팔년, 했다.

무슨 년하고 욕하는 걸 안 하겠다더니 이렇게 가끔씩은 했다.

그러라지.

선재는 속으로만 대범해 보이는 말을 내뱉으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곤 식사를 이었지만, 밥이 머슴밥 수준으로 많았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다고 생각할 즈음, 범진은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뭐요, 하고 공격적으로 말을 뱉은 걸 보면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스윽 닫힌 문을 쳐다보던 선재가 하던 식사를 마저 했다.

문이 다시 열린 건 5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범진이 왔나 싶어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는데, 모습을 보인 건 박창현이었다.

“형수.”

상체를 숙이는 박창현을 향해, 선재도 일어나서 허리를 접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예의를 차렸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도시락 뚜껑이라도 닫으려 두리번거리던 선재가 원래 범진이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는 박창현을 보았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

“최범진,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습니다.”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서두를 꺼낸 박창현은, 중대한 기밀이라도 발설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형수도 분위기는 대충 파악하셨죠.”

범진은 워낙 성질이 불같았다. 앞에 있는 박창현은 물론이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틈만 나면 성질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곤 했다. 병원에서도 그러니 평소엔 오죽할까. 선재는 막연히 범진과 척진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박창현이 말하는 분위기, 라는 게 외부의 일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당장엔 그런 범진의 모습들만 떠올랐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선재를 보며, 박창현이 답답하단 얼굴을 했다.

“저희 동생들 하루에 하나씩은 꼭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

고개를 든 선재가 박창현의 눈을 쳐다봤다.

“형수도 저희 가족이지 않습니까. 저희한테 도움을 주실 수 있으면 주셔야죠.”

사람이 죽어 나간단 말엔 흠칫했지만, 박창현이 호소하며 입에 담은 가족, 이란 단어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도 형수, 형수님, 하는 말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긴 했다. 하지만 불러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선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꾹 닫힌 입을 차마 열지 못했다. 도움을 줄 능력이 제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답답하십니다.”

작년에 보았던 박창현의 얼굴이 보였다.

“…저는 범진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고….”

답답하단 말엔 선재도 입을 뗐다.

“저희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거만함이 밴 얼굴로 선재를 내려다보던 박창현이 태도를 바꿨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에둘러 거부 의사를 비친 선재를 어떻게든 설득해보려는 눈치였다.

“지금 형수가 안 나서주면 그, 준희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네?”

그 이름엔 선재가 곧바로 반응을 했다. 얼굴색이 붉게 오르고, 표정도 바뀌었다.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을 쳐다보던 박창현이 쐐기를 박았다.

“범진이 그놈이 워낙 한 성질 하는 놈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약을 올려놨는지, 준희 얘기도 꺼내더라고요.”

“누굽니까, 누가 아기 이름을….”

난데없는 상황에 돌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선재는 줄곧 남의 일 대하듯 박창현의 말을 들었지만, 준희라는 이름엔 걷잡을 수 없게 몰입했다. 쿵, 떨어진 듯한 심장이 비현실적으로 진동했다.

“형수, 긴말 필요 없고, 그 사람들한테 잘못 한 번만 빌어주면 됩니다.”

“….”

“범진이가 어디 머리 조아릴 놈입니까. 그쪽에서 형님이랑 형수 관계도 알고, 준희 정보까지 캤으니 형수가 나서줘도 무관할 겁니다. 한 번만 잘못했다고 빌어주십쇼.”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범진과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머릿속이 준희로만 가득 차고 있었다.

앞에서 손짓까지 하며 말하는 박창현의 모습은 가짜 같고 환상 같았다.

주변이 타들어 가는 환시까지 겪은 선재는 고개를 흔들어가며 그를 제대로 마주 봤다.

“생각 한번 해보십쇼.”

박창현도 착잡한 표정을 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선재는 밖으로 나간 박창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닫힌 문만 계속해서 응시했다. 범진은 5분, 1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문을 연 것도 박창현이었다.

* * *

오랫동안 차근히 계획된 일이었다. 박창현은 병실을 나오면서 천천히 닫히는 문을 한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깝긴 한데, 그런 생각을 하며 하얀 복도를 걸어 나갔다. 두려움과 곤란함, 난감하면서도 걱정하는 마음이 선재의 얼굴에선 다 드러나고 있었다. 박창현은 그 얼굴을 떠올리며 복도 끝까지 걸어 나갔다. 반달 모양의 데스크에서 자신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간호사에게도 윙크를 한 번 날려주며.

박 사장에게 이중 계약을 하라 지시한 건 박창현 자신이었다. 사장님이 좀 처맞아주세요. 내 돈은 넉넉히 챙겨드릴 테니. 일단은 최범진을 돌아버리게 만들어야 했다. 그건 쉽다. 구역을 어지럽히고 동생들을 좀 죽여놓으면 된다. 박창현은 다른 조직과 결탁해 박 사장과 일을 꾸몄다. 하도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이 많아 거기까진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하나 삐끗한 건 칼잡이 새끼가 정보도 없는 조선족 놈이라 칼질하는 실력이 영 시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최범진이 보통 새끼가 아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아무런 연관도 없는 놈에게 일을 줬다. 그 전날에도 따로 만나, 잡히지만 말란 말을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일이 끝나도 방심하지 않는 최범진은, 그날 그 공사판을 나오며 유독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 덕에 치명상은 입히지 못해도 일단은 한 풀 주춤하게는 만들어놓았다. 그렇다면 다음. 들고 일어나기 어려운 최범진에게 서둘러 엿을 먹여야 한다. 엿이라 함은 민선재를 죽인 뒤 그의 표정을 보는 것이었는데, 최범진은 운 좋게 칼도 비켜 맞았고, 회복 속도도 좆같이 빨랐다. 이대로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준희.

그 애의 이름에 완전히 눈빛이 변하는 걸 봤다. 생각 한번 해보십쇼, 하고 자리를 급히 떴던 건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순진한 오메가를 옆에 끼우고 사는 맛이 어떨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았고. 아무리 오메가라도 남자엔 관심이 없는데, 최범진이 환장을 하고 달려드는 것에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후우, 비상구에서 담배를 태운 박창현이 허공에서 붕붕 뜨는 연기를 쳐다본 뒤 비상구 문을 한 번에 열어젖혔다.

최범진이 휴대폰도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고, 그동안 민선재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이다. 처음부터 애 얘기를 할걸. 최범진과 조직 동생들 얘기를 할 때부터 표정이 안 좋았는데, 애 얘기를 하니 낯빛부터가 완전히 바뀌었다. 당장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봐도 무방한 상황이었지만, 웃음이 비죽비죽 나오려고도 하니, 그럼 좀 생각해보라 얘기를 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결론은 어차피 나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원래가 그런 인간인 듯하니까. 최범진처럼 속이 다 보이는데 그 속이 판이하게 달랐다.

복도를 넓은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 박창현이 주변을 유심하게 살폈다. 아직 뜻이 맞는 동생들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최범진은 계속 칼잡이에 대한 거짓 정보에 놀아나고 있는 중인 듯했다.

그동안 굴욕적으로 조직 안에서 대해졌던 걸 생각하면 이가 으득으득 갈렸다. 태생이 무자비하고 인정머리 없는 새끼. 별 씹스러운 것들 앞에서조차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최범진이 아끼는 걸 없애고, 상실한 최범진의 표정을 보고, 거동이 그나마 불편할 때 그 새끼를 죽인다.

빠를수록 좋았겠지만, 최범진을 민선재로부터 떼어놓기가 어려웠다. 차에서 부탁을 하자니 최범진에게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고, 집에 있는 민선재를 부르자니 연결된 카메라로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게 께름칙했다.

“형수, 생각 좀 해보셨습니까.”

문을 열자 벌떡 일어나 저를 맞는 민선재가 보였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제가 옆에 있을 겁니다. 있고… 형수는 잘못만 빌어주시면 됩니다. 위험한 일도 아니고, 그냥 무릎만 꿇으면 됩니다. 그걸 범진이가, 형님이 하겠습니까. 이런 부탁 참, 죄송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희 다 살자고 이러는 거니 한 번만 이해해주십쇼.”

“….”

“해주실 겁니까.”

“네, 하게, 하겠습니다.”

이미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박창현이 그런 선재를 보며 비웃음 같은 미소를 몰래 지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방금 연락을 해보니, 지금도 한 시간 내로 오시기가 가능하답니다.”

“….”

“형수 듣고 계시죠.”

“…예.”

“저랑 같이 가보실 겁니까?”

“…범진이한테는….”

“말하면 우리 둘 다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 새끼 자존심에….”

“…네.”

제가 아는 최범진은 민선재를 죽이지 못한다. 그 새끼가 그렇게 종일 사진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 틈만 나면 감시 카메라와 연결된 휴대폰 화면을 볼 정도로 누군가에게 집착한 적도 없었다. 최범진 엿 먹이기에 최적화된 형수님. 파리한 낯을 하고 코트 자락을 움켜쥐는 민선재에게, 박창현은 최대한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 * *

경기 외곽으로 빠진 차가 비포장길을 거침없이 밟으며 나아갔다. 야트막한 산들이 빼곡히 들어선 구역이었다. 주변엔 작은 호수가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데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차창으로 주변을 쳐다보는 선재의 눈이 이따금 박창현에게 닿았다. 가는 데가 어디냐고 물으면, 박창현은 가보시면 안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어느 산길에 접하자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이 좀 많이 거칠죠,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선재의 눈이 다시 차창 밖을 향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범진이 무릎 굽히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잘 안다. 제가 구하는 용서가 준희에게 어떤 보탬이라도 된다면 백번도 더 용서를 구할 생각이 있었다. 그 아이에게까지 제 삶의 불행을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굳게 마음을 먹은 선재가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여기가 원래 개발단지였는데.”

“네.”

“보다시피 부도가 나서 다 망했습니다.”

“네, 그러네요.”

“덕분에 산장은 저희가 쓰고 있지만요. 저기, 보이시죠.”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산장이었다. 주변에 나무판자와 건축자재가 질서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기다란 나무 기둥을 한번 밟고 넘어가자, 몸이 크게 들썩였다.

차가 완전히 멈춘 곳은 산장 앞 공터였다. 안절벨트를 풀며 옆을 쳐다본 박창현이 선재에게 손짓으로 산장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서 내리시면 됩니다.”

선재가 네, 하고 짧게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다. 덩그러니 지어진 산장은 외관이 그럴듯해 운영하는 곳처럼도 보였다. 건물을 바라보고 있던 선재가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시선을 퍼뜨렸다.

주변엔 박창현의 세단 한 대와 오래 방치된 듯한 소형차 한 대가 전부였다. 박창현의 존칭 때문에 만나기로 한 사람의 나이가 얼핏 가늠되는 것도 같았다. 또래는 아니겠지. 선재는 막연한 그림을 그리며 앞서 걷기 시작한 박창현의 뒤를 따랐다.

“조심하세요.”

“예.”

1층 내부는 엉망이었다. 전깃줄과 쓰레기, 얇은 나무판자가 바닥에 잔뜩 깔려 있어 발을 내딛기도 어려웠다. 단독 산장이 아닌, 호실이 나뉘어 있는 규모가 큰 산장이었다. 얼추 완공이 된 산장이 이렇게 유령호텔처럼 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아, 박창현의 등만 보며 걷던 선재가 작은 기름통 같은 것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제가 잡아드릴까요.”

“아니요, 뭘 잘못 봐서. 잘 따라가겠습니다.”

곧 드러난 계단은 그나마 정리가 잘된 편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야 났지만, 창문 때문에 앞도 잘 보이고, 장애물 같은 것도 없었다. 끽, 소리가 나는 계단을 밟던 선재가 박창현이 왼쪽으로 빠르게 코너 트는 것을 보았다.

왼편 제일 앞방. 박창현의 말대로, 조금 낡은 방이긴 했지만, 누군가를 만나는 걸로는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판자가 널널하게 깔려 있었다. 확실히 비밀 유지는 될 법한 공간이었다.

“여기 앉아계십쇼.”

“네.”

“그분은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코를 훌쩍거린 선재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는 매끈한 목재 의자였다. 일부러 가져다 놓은 듯 겉면이 반짝이고 있었다. 팔걸이를 한번 만져본 선재의 눈이 창 쪽으로 향했다.

무언가로 덧댄 듯 빛이 거의 통하지 않는 창. 창은 원래부터 여러 겹인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납작한 판자 같은 것을 넣어 빛이 통하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박창현은 그 타이밍에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들린 소리에 문 쪽을 쳐다본 선재가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범진의 수상한 일터엔 작년에도 가본 적이 있었다. 오래된 노래방 같은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듯했고, 그때 저는 상대적으로 깨끗한 방에서 음료수를 받아 마셨었다. 그때 박창현이 건넨 음료수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나…. 선재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곱게 먹어야 일도 차질 없이 끝날 듯했다. 지금의 박창현은 준희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후우.”

시간은 초조함과 무관하게 잘도 지나갔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건드린 선재가 11분이 지나는 걸 확인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휴대폰을 꺼두는 게 좋을까.

박창현과 이곳으로 오며 입을 맞췄던 말이 있었다.

“창현 씨랑 근처에서 밥 먹었어.”

선재는 박창현이 시킨 말을 연습하듯 따라서 해봤다.

“휴대폰은 꺼진 줄 몰라서.”

13분째, 지나가는 시간을 확인한 선재가 휴대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큼, 공기가 별로인 탓에 드물게 나오던 기침이 멎지 않았다. 선재는 재채기도 몇 번씩이나 이어서 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바람을 쐬어야겠다. 곧 꿇릴 무릎을 생각하면 무안한 심정이 들었지만 그런 감정을 내세우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어서 그 용서라는 걸, 선재는 빌고 싶었다.

* * *

“예, 사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에이, 그게 섭섭하셨으면 저도 할 말 없습니다.”

너스레 떨 듯 말을 한 박창현이 이젠 보이지도 않는 산장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했다.

보이는 건 컴컴한 산뿐이었다.

방 앞에서 휘발유를 부었으니 타들어 가는 건 시간문제다. 저기 어디서 불 냄새를 맡고 있을 민선재가 그려졌다.

박창현은 씩 웃으며 박 사장과의 통화를 이었다.

깽값치고는 너무 소소하다며 서운한 소리를 하는 박 사장부터 일단은 달래야 했다. 꼼짝없이 몇 주간은 병원에 있어야 할 신세긴 했다. 원래의 몫보단 더 얹어줘야 그가 아쉬운 소리를 안 할 듯했다. 어디, 꽃이라도 사들고 병문안을 가야 하나. 차도를 슬쩍 쳐다본 박창현이 다시 검푸른 산의 어귀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최범진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 * *

같은 시각, 계속해서 나오던 기침을 손으로 막은 선재는 눈앞에서 기다란 줄처럼 파고드는 검은 연기를 보았다. 좁은 문틈 입구로 한 줄기, 두 줄기, 이내는 커다란 안개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가가서 보니 문고리나 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냄새도, 오래된 건물에서 날 법한 냄새가 아니었다. 은은하게 나고 있을 땐 몰랐는데 문 앞으로 다가가며 맡은 냄새는 지독한 기름내에 가까웠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도 함께 나고 있었다.

선재는 그 길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보려 했지만, 밖에서 잠긴 문은 안쪽에서 열리지 않았다. 틈으로 검은 연기가 계속 밀려 들어오고, 문은 손댈 수 없이 뜨거워진 뒤였다. 안으로 펑펑 솟는 연기엔 정신이 쉽게 흐려졌다. 선재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향해 발길질도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불꽃이 일어 안으로 튀기만 했다.

창현 씨! 하고 내지른 그의 이름도 더는 소용이 없을 듯했다. 그는 처음부터 제 편이 아니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핑글핑글 도는 정신으로 테이블까지 다가가 휴대폰을 조작해봤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통신 장애 아이콘을 보지 못한 선재가 통화 버튼만 계속해서 눌렀다. 119와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검은 연기에, 선재는 화장실로 대피해 연기부터 피했다. 한꺼번에 연기를 맡은 탓에 정신이 먼 곳으로 던져지는 듯했다.

시간이 어떻게, 얼마나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얀 욕조 안에 몸을 옹송그린 선재는,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한줄기씩 들어오는 검은 연기가 새 같다는 생각을 했다.

휘청이는 검은 새.

방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만 해도 준희가 생각나 눈물이 흘렀는데, 화장실로 들어와서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연기를 마셔 판단력이 흐려진 선재 앞으로 검은 새가 지나다녔다.

날개가 참 가늘다.

선재는 연기를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 * *

선재는 꿈을 꿨다.

이리 와 선재야. 누군가 저를 부르는 꿈. 오래전에 들었던 어머니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제게 잘해주었던 선생님 같기도 했다.

허허벌판에서 그런 목소리만 들었다. 선재는 허름한 차림의 제 모습을 더듬어 보았다. 왜 아무것도 없이 이러고 있을까.

아기야, 준희야, 뒤이어 들린 소리는 제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재는 앞으로 가다가 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들리는지 몰라 걸음을 멈췄다.

야! 씨발, 야!

그다음에 들린 소리는 범진의 것이었다. 선재는 이 소리도 곧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허나 잦아들지 않았고, 꿈에서 점차 깨어나게 되었다.

눈을 떴을 때 범진은 제 뺨을 치고 있었다. 선재는 통증 때문에 표정을 찡그렸는데 그제야 범진은 웃었다. 하, 씨팔! 하고. 뒤이어서 별짓을 다 한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는 정신을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다시 눈을 감았을 땐 꿈은 꾸지 않았다.

“아….”

깨어난 건 몇 시간 뒤인 듯했다. 아까 잠시 깨었을 땐 범진과 범진의 뒤로 보이는 하늘이 파랬었다. 지금은 인공적인 흰 빛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선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병실인 것 같은데, 범진이 지내던 곳은 아닌 것 같았다. TV도 보이지 않고, 소파도 없었다. 병원에서 쓰는 듯한 심플한 의자 두 개만 놓여 있었다.

그 의자 중 하나를 차지한 게 범진이었다. 선재는 눈을 아래로 내려, 잠든 범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상박을 드러낸 채 팔짱을 끼고 있어 근육이 더 불거지며 튀어나와 있었다. 배에 있던 반창고는 새로 바른 것 같았고, 어깨엔 못 보던 거즈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

선재는 하나하나 돌아오는 기억에 눈가를 움찔거렸다. 범진 몰래 박창현과 일을 벌였던 게 기억이 났다. 밥을 먹었다고 하기엔 강을 너무 많이 건넜다. 화장실 욕조에서 쾅,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게 아주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범진이 들어온 거였나. 그것까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죽은 목숨이겠다. 선재는 깨자마자 범진에게 무슨 말을 들을까만 걱정했다. 이번엔 무슨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

어느새 천장을 향해있던 선재의 눈이 빠르게 감겼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몸까지 움츠렸다. 터벅터벅, 여기 있던 게 저 말고는 범진뿐이었으니 점차 가까이서 들리는 발소리도 범진의 것일 터다. 선재는 최대한 자는 척을 하려고 했다. 긴장 때문에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쥐기도 했지만 눈만은 푹 감았다.

….

걸음 소리는 갑자기 뚝 멈췄다.

멀리서 보고 있을 땐 무슨 소리를 듣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는데 막상 범진이 앞으로 다가온 것 같자 맞지도 않은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주먹으로 제 얼굴을 치겠지, 하는 생각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는 척하네, 이게.”

“….”

“눈뜬 거 아니까, 떠라.”

크게 흔들리던 속눈썹이 서서히 위로 고개 들었다.

눈꺼풀이 열리는 걸 들여다보던 범진이 침대 기둥에 손을 턱, 가져가 그 기둥을 세게 쥐었다.

“씨발, 뭐. 춥냐?”

“…아니….”

“야.”

“…으응.”

“니 멋대로 행동하지 마.”

“….”

“대답 안 하지?”

“응….”

“따라 해.”

“….”

“나는.”

“…나는….”

“최범진이 말만 듣겠습니다.”

“….”

“이게 확.”

범진이 손 올리는 시늉을 하자, 선재의 눈이 질끈 감겼다. 이번엔 맞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어깨를 덮은 거즈는 화상을 치료한 흔적인 것 같았다. 선재는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최…범진 말만 듣겠습니다….”

“….”

갈라진 목소리가 가시 돋친 공처럼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짧게 대답할 때는 몰랐는데 목이 까슬거리는 것이 사포로 문댄 것처럼 아팠다. 다시 천천히 눈을 뜬 선재가 아직도 눈앞에 있는 범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목 아프냐?”

“좀….”

“잘하는 짓이다.”

“…준희는….”

“자알 맡겨놨다.”

생각보다는 혼나지 않고 있다. 선재는 한 대도 맞지 않았고, 욕도 별로 얻어먹지 않았다. 더 가까이서 보게 된 범진의 어깨는 넓은 거즈 면에 뒤덮여 있었지만 축축한 물이 배어 나와 상당한 통증을 예상케 했다. 설마 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일까. 범진이 화장실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왔는지는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펑, 하고 화장실 전체가 터지는 듯한 굉음을 듣긴 한 것 같은데.

선재는 말이 끝나도 제 얼굴이 뚫릴 듯 쳐다보는 범진의 눈빛에 시선을 피했다.

“형님.”

“….”

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맞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니가 뭘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요.”

허, 하고 새는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그러게.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선재는 초점이 거의 사라진 눈으로 범진을 응시했다. 차라리 진짜 밥이나 먹고 들어올걸. 준희를 위해서도 무슨 일을 하면 안 되는 인간이 저인가 보다. 선재는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에 서러움을 느꼈다. 혼자 저지르고, 혼자 다치고, 혼자 울려고 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을까.

때리려고 시늉하는 범진이, 진짜 한 대라도 쳐줬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맞을까 봐 무서웠는데, 주제에 맞는 걸 겁내는 것도 같잖았다.

선재는 곧 화가 난 듯 보이는 범진의 얼굴에 눈을 감았다.

그래, 때려.

기다렸다.

기다렸고,

닿은 건 입술이었다.

목이 아프고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게 입술이란 것쯤은 알 수가 있었다. 범진의 혀가 제 입 안으로 부드럽게 진입해 들어왔다. 입 안에도 검댕이 가득 묻었을 것 같은데. 선재는 계속해서 눈을 감은 채로 범진의 혀를 받아들였다. 단단하고 심지 굳은 혀가 오늘은 조금 반갑게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혀를 느끼고 있었다. 살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 * *

“…아프지 않아?”

“좆나 아프지.”

“…미안.”

“미안은 합니까, 형님?”

“나는 그 사람.”

한숨 더 자고 일어나자 정신이 제대로 들었다. 범진은 아까부터 계속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드레싱 된 어깨가 눈에 들어와 말을 걸었는데, 박창현과 관련해선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 범진이 일을 더 크게 벌일까 무서웠다. 선재는 제가 억울한 면도 있지만, 일단은 모든 일을 함구하기로 판단했다. 입을 굳게 닫았다.

“야… 형님은 진짜 머리를 굴리는 순간 다 들키네.”

“….”

“박창현 그 새끼 내가 다 아니까, 혼자 개지랄 떨지 마세요.”

“….”

“내가 씹, 이 바닥이 몇 년인데.”

범진은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햄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입이 빌 때마다 박창현 욕을 했다.

이불을 덮은 채로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도 비슷한 욕지거리가 반복되면서부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띵하고 손이 저렸다.

박창현은 어떻게 되는 거지.

범진은.

선재는 이어 떠오른 아이 때문에 머리가 다시 핑글핑글 도는 걸 느꼈다.

한배를 탔다던 박창현의 말과 형수님, 하고 저만 보면 인사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정말 범진과 한배를 타게 된 것일까.

너무 불안했다.

위험한 일을 겪고 나자, 목숨이 꼭 한겨울 길가에 일렁거리는 촛불처럼 느껴졌다.

언제든 불어서 꺼트릴 수 있는.

선재는 점점 차오르는 숨을 최대한 조절해서 쉬었다. 후우, 하고 크게 내쉬고, 들이마시는 건 천천히 했다.

가까이 다가온 범진이 숨쉬기 어렵냐고 물었다.

“…아니….”

제가 죽는 건 괜찮지만 아이는 조금도 아프거나 힘들어선 안 된다.

오늘도 아이 때문에 박창현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선재는 눈가가 조여드는 걸 느끼며 범진을 쳐다봤다.

“근데 표정 왜 이따군데.”

범진이 선재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죽 잡아 올렸다.

“….”

눈 안에 얕은 물기가 차고 있었다.

구경하듯 얼굴을 바라보던 범진이 엄지를 들어 선재의 눈을 대충 쓸었다.

“만날천날 질질 짜기나 하고.”

“….”

“나이 처먹고 쪽팔리지도 않냐.”

“….”

“씹질할 때나 흘리지, 씨팔. 아깝게.”

“….”

“…니 안 죽인다.”

“….”

“니 안 죽는다고.”

범진은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다 티 난다고 했던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선재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그 말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무슨 의도로, 마음을 얼마나 읽고 저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촛불 같은 저와 준희의 목숨에 커다란 손이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찬바람이 잠시 멎는 것 같았다.

* * *

범진은 그날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밤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아침이나 정오 즈음에 병실을 찾곤 했다.

병원에선 하루 정도의 입원을 요했지만, 선재는 5일이 넘어가도록 입원 중이었다. 면역력이 낮아 상태가 좋아졌다가도 다시 안 좋아지길 반복했던 탓이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호흡엔 큰 문제가 없었는데, 다음날부터 산소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래도 한나절 정도 치료를 받자 연기 흡입 때문에 저하된 몸의 기능은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밤마다 트라우마 때문에 악몽을 꾸는 게 아니면 살만한 정도가 되었다. 불 꺼진 병실에서 눈꺼풀을 떨던 선재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깼다.

“잠이 안 오십니까.”

범진이 감시 명목으로 붙인 낯선 남자는 스무 살도 안 돼 보였다. 선재는 눈만 뜨면 제 근처에서 그런 말을 건네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으니까 들어가 보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게 들어간 겁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의 뺨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았다. 무안한 듯 웃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선재는 채 낫지 않은 몸으로 밖에 나간 범진을 떠올리다 긴 숨을 내뱉었다.

배가 더는 당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범진은 예전처럼 밤에 활개를 치고 다니는 듯했다.

덧난 어깨에서 고름이 나오는데도 이런 건 괜찮다고 했다.

선재는 퍽 괜찮아진 몸을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며, 진짜 입원이 필요한 사람은 범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었다.

어제부터 퇴원 수속을 밟으란 권유도 듣기 시작한 참이었다. 퇴원해도 된다는데… 하고 말이라도 꺼내면 범진은 병원에 있는 게 더 낫다는 말만 했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선재는 이제 그런 것부터 걱정했다.

아이도 엊그제 데려와 얼굴을 잠시 보여줬던 게 전부다. 지금은 어떻게 지낼지. 선재는 잠에서 깨면 아이의 얼굴만 멍하니 떠올려보았다. 병원에 있으면 제대로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긴 하겠지만, 그 얼굴을 못 보니 속이 탔다.

조용한 병실 안엔 작은 조명등만 하나 켜진 상태였다.

입구 통로 쪽에 서 있던 남자는 벽에 등을 부딪치며 졸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3시가 되어 있었다.

내일모레까지 기다려봐라, 하고 던지듯 말한 범진의 말을 믿어야겠지.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진 모른다. 범진은 퇴원을 권유하는 사람들에게 두 눈을 부라리면서 며칠 더 있겠다고요. 하고 으름장을 놓듯 말했었다. 선재는 어둠 속에서 눈과 이마를 매만졌다. 잠이 오기는커녕 불안감에 안면 근육이 조금씩 떨렸다.

얼마 뒤, 얕은 잠에 빠진 선재는 30분이나 한 시간에 한 번은 깨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 깼을 땐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익숙한 얼굴의 아주머니가 따뜻한 식판을 들고 침대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요 앞에 허구한 날 덩치들 서 있더니 오늘은 없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덩치들을 생각한 선재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총각이 어찌 이리 고와?”

잠에서 방금 깬 선재의 모습을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신기한 듯 말을 던졌다.

그 말에 꾸벅, 인사한 선재가 테이블을 펼쳐 식판을 받아 들었다.

새벽 내내 벽에 등을 쿵쿵 부딪치던 남자는 다소 늦게 모습을 보였다. 얼굴과 머리카락이 젖은 걸 보니 복도 화장실에서 물칠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저기, 이거 드세요.”

“제가 왜… 형수님 드세요.”

“아뇨. 저는 아침 원래 잘 안 먹어서.”

“….”

남자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저녁부터 저를 지키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밥을 못 먹었을 것이다. 병실을 지키는 남자들의 얼굴은 거의 매일 바뀌었다. 유독 어린 듯한 남자가 신경 쓰였던 선재가 식판을 테이블 끝으로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로 오라 고갯짓을 한 뒤, 저는 슬리퍼를 신고 침대를 벗어났다.

“드세요.”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던 남자는 선재의 표정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범진과 함께 일하는 남자들은 알파인 경우가 많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체취가 났던 걸 생각하면 거의 열성이겠지. 범진이 일부러 열성 알파만 병원에 들인 건 눈치껏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 그럼… 하고 다가온 남자의 얼굴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어렸다.

몸이 다부져서 그렇지 얼굴은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 정도로 보였다.

“….”

그저 안쓰러웠다. 선재는 남자가 혹시 불편해할까 병실 제일 안쪽에 있는 창가로 향했다. 밖을 쳐다보는데 온통 회색이었다. 눈이 내렸다고 했는데, 흔적은 남지 않은 듯했다. 낮은 건물 옥상에도 아무 흔적이 없었다. 드넓은 차로와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침부터 다들 바삐 어디로 가는구나. 저도 아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퇴원부터 해야 하는데.

뒤에서 들린 소리에, 선재가 고개를 돌렸다.

“형수님, 죄송해요.”

“아뇨. 전혀 그런 생각….”

형수님, 하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 이젠 아무런 뜻 없이 들렸다. 남자에게 그런 생각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니 뭐 하냐?”

범진이었다. 범진은 침대에서 밥을 먹고 있는 부하를 바라보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색이 된 남자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맨발로 침대 밖에 섰다. 형님, 하고 인사했다.

범진은 커다란 몸에서 고개만 옆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뒷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범진 쪽으로 몸을 붙이고 입을 열었다.

“내가 먹으라고 했어. 어제 계속….”

“형님… 제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남자의 입 안에 벌써 밥과 소고깃국이 들어가 있었다. 그 탓에 발음이 좋지 않았다. 빨리 삼키기라도 하려고 우물우물, 몇 번 더 씹으려는 찰나. 범진의 눈썹이 확 내려갔다. 주먹을 들어 남자의 얼굴에 꽂았다. 침대에 등을 부딪친 남자가 뒤로 구르며 바닥에 퍽, 떨어졌다.

“이 씨발새끼가…. 누가 밥 처먹으라고 세운 줄 아나, 개, 씨빨럼이.”

남자는 침대에서 떨어지며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토하듯 뱉었다. 바닥에 펼쳐진 음식물에, 선재의 흰 병원복에도 뿌연 국물이 튀었다. 범진은 떨어진 남자를 향해 침대를 빙 돌아서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다리를 올려 가차 없이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놀란 선재가 범진의 팔을 잡았다.

“그만… 범진아, 그만해. 내가….”

“일하는데 어디서 잡고 지랄이냐….”

잡고 있던 옷깃에서 손이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본 선재가 짜증스럽게 뒤쪽을 쳐다보는 범진의 표정을 살피고 뒤로 떨어졌다.

“어디서….”

이 개씹, 하고 이가 맞물린 채 새 나오는 욕설이 소름 끼치게 들렸다.

범진은 씨발, 하고 뒤로 물러난 선재를 한 번 쳐다본 뒤에야 다시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우욱, 욱, 하고 음식물과 투명한 액을 같이 쏟으며 범진의 발에 밟혔다.

명치 쪽을 구두 앞코로 차이자 진심으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선재의 귀에도 꽂혔다. 저 때문에 저렇게 맞고 있는 남자가 너무 불쌍했다. 몇 번이나 다시 발이 움직였지만, 범진을 막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덩달아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선재가 범진의 뒤에서 저기, 하는 말만 입에 담았다.

“안 꺼지냐, 씹새끼야?”

범진은 저보다 훨씬 작은애를 마무리하듯 발로 후드려 깠다. 방금까지 괴로운 표정을 짓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범진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아픔은 숨길 수가 없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며 병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일을 이렇게까지 만드는 범진이 이해가지 않았다.

“형님.”

산처럼 뒤돌아서 있던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일할 때 건드리지 마세요.”

손가락으로 선재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

“어디서, 씹, 남자들 일하는 데 껴듭니까?”

이젠 범진이 저를 뭘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선재는 미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에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서웠다.

가까이 다가온 범진이 선재의 턱을 짧게 쥐고 흔들었다.

“저 새끼가 뭐라고 감싸냐.”

“….”

“한 번만 더 해봐라. 아주 그땐 니도 죽는다.”

턱이 잡힌 선재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에게선 녹슨 철문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손도 차가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인 걸 깜박 잊었다. 선재는 범진에게 잡힌 턱에 힘을 모조리 뺐다.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말이 들리면 고갯짓으로 재빨리 반응했다.

* * *

어린 남자에게 그 난리를 친 범진은, 곧 퇴원 수속을 밟으러 병실을 나섰다. 혹시 아직 그 사람이 있을까 병실 주변을 두리번거린 선재가 전혀 엉뚱한 사람과만 눈을 마주쳤다. 저 때문에 다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복도 근처를 두리번거린 것인데,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듯이. 어린 남자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범진은 20분도 안 돼 돌아와 옷 입고 짐을 챙기라는 소리를 했다. 어딘가 급해 보였고, 그렇게 급한 와중에도 사람 하나를 팰 정신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군말 않고 짐 정리를 시작한 선재가 준희에 대해 물었다. 아기는 지금 어디 있는데? 요 며칠 범진이 맡겨놓았다는 곳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뒤늦게 불안해진 선재의 얼굴에 푸른 빛이 돌았다. 한 번밖에, 그것도 짧게 본 게 전부니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왜. 팔기라도 했을까 봐. 그 한마디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선재는 준희를 차에 태우고 왔다는 범진의 말에 서둘러 주변 정리를 끝냈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도착했다. 서둘러 걷는 건 선재 쪽이었다.

1층 입구로 나온 선재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불룩한 가죽 가방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에 신경이 금방 예민해졌다. 아까 그 애에게 밥을 먹게 했다고, 범진은 최선을 다해 저를 약 올리고 있었다. 익숙한 차 앞으로 먼저 다가선 선재가 차내를 쳐다보았다. 눈만 뜬 채 허공을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자고 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시 뒤를 돌았을 때야 범진은 가까워져 있었다. 선재가 급히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으아….”

“준희야.”

한 몇 년 전에나 아이를 안아본 것 같았다. 그만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이를 안아주다가 고개를 숙인 선재가 아이의 얼굴과 팔, 다리를 차례로 확인했다. 다쳤거나, 아파하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범진의 눈치를 보면서도 선재는 그런 걸 먼저 살폈다. 아이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원체 유한 아이라 어디서든 적응을 쉽게 했을 테지만 제대로 보게 된 아빠의 얼굴엔 서러운 마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삐죽삐죽한 얼굴을 쓰다듬은 선재의 손이 오랫동안 그 얼굴에 머물렀다.

“…어디 가?”

“집 가지.”

“여기가….”

곧장 출발한 차는 한 시간이 넘도록 도로 위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접어든 길에 경기 평택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여러 곳에 서 있었다. 차 유리를 쳐다보던 선재의 눈에 생소한 풍경이 비쳤다. 그런 걸 본 지도 얼마나 지났을까. 차는 이내 공터 같은 구역을 가로질러 나갔다. 곧 보인 건 적은 수의 건물들뿐이었다. 불안정한 도로를 얼추 지나서야, 단독주택이 늘어선 동네가 보였다. 근처엔 산뿐이었다.

“입주일 앞당겨서 들어온 거니까는.”

“….”

“필요한 거 있음 나한테 얘기하고.”

“….”

벨트도 매지 않고 운전을 하던 범진의 몸이 차에서 쑥 빠져나갔다. 2층짜리 단독주택 앞에서였다. 창문이 유독 검어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다른 주택도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아직 완공이 안 된 듯 보였다. 범진을 따라 걷기 시작한 선재가 준희의 손을 저도 모르게 세게 잡았다.

선재는 범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입을 작게나마 벌렸다. 쓸데없이 큰 집이었다. 준희도 널따란 공간이 신기한지 고개를 큰 폭으로 두리번거렸다. 문도 많은 것 같고, 주방도 쓸데없이 넓었다. 총 2층으로 나뉘어 있는 공간이었고 천장도 매우 높았다. 선재는 고개를 들어 거실 전등을 쳐다봤다.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넓은 집을…. 선재는 위쪽을 쳐다보느라 범진이 2층으로 간 것도 알지 못했다. 잘 모르는 공간이라 돌아다니기도 꺼려졌다. 아이와 어디서 있을까…. 둘러봤을 때 거실 벽면에 놓인 소파가 하나 보였다. 범진이 올 때까지는 거기 앉아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몇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로 길이가 꽤 길었다. 선재가 초롱초롱한 눈을 한 준희를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형님.”

위쪽을 쳐다보자 범진이 2층 복도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방 어디 쓸래.”

“…나?”

“형님이 혼자 방을 왜 씁니까. 애 어디서 재울 거냐고.”

범진이 턱으로 준희를 가리킨 걸 보지 못했다. 몇 초 뜸을 들인 선재가 입을 열었다.

“나랑 가까운 데서.”

“우리 옆방에?”

범진이 입 밖으로 낸 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기만 하자, 범진이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우고 입을 열었다.

“뭘 멀뚱하게 쳐다보고.”

“…방을 나눠서 쓴 적이 없….”

“씨팔 뭐, 애랑 평생 그러고 살게?”

욕설까지 섞어가며 물은 말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넓은 공간에다 천장까지 높아 범진의 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집안을 채운 가구가 얼마 없어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서늘한 공기를 느낀 선재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댔다.

“다 알아들어. 그렇게 얘기하지 마.”

“지랄한다….”

뒤돌아서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어본 범진은, 곧 계단을 타고 빠르게 1층으로 내려왔다.

“…여기 딱 카메라 달고.”

한 번에 소파까지 다가온 범진이 거실 천장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위에 복도랑.”

이번엔 2층 복도 난간 쪽.

“방이랑 창고에도 달라고.”

뭘 위해서. 원하는 게 있기는 한가. 선재는 속으로만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이제 준희 때문에라도 도망갈 용기나 의욕이 남지 않았다. 범진이 그렇게 협박을 하듯 말을 하는데,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런 선택을 하나? 선재는 속으로만 이런저런 말들을 했다.

“허어. 내 안 보냐.”

“…보잖아.”

곁눈질하듯 옆으로 향한 눈이 범진의 얼굴에 닿았다.

“제대로 봐야지.”

…말대로 범진의 얼굴을 몇 초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다시 앞쪽으로 돌렸다. 선재가 맞은편 벽면을 쳐다보며 옆에 앉은 준희의 팔을 쓸었다. 그렇게 있기도 잠시, 얼굴이 홱 돌아가 범진을 눈앞에 또 두게 되었다. 턱이 범진의 손에 잡혀있었다. 이렇게 잡아 돌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카메라 어쩌고, 한 뒤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작았던 선재의 얼굴은 살이 빠지면서 더 작아져 있었다. 눈과 입술을 번갈아 쳐다보던 범진이 미간을 팍 찌푸리다 말을 꺼냈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냐.”

“….”

“니 밥은 니가 처먹어야지, 씹….”

병원에서 어린 남자에게 식사를 권했던 얘기를 또 이렇게 꺼내고 있었다. 밥맛이 없어 아침을 거를 때가 많고, 범진도 그런 모습을 자주 봤다. 다 알면서도 성질을 부리고 싶어 이러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표정을 풀지 않은 선재가 고개를 옆쪽으로 뺐다.

“어디, 씨….”

또다시 원점이었다. 턱이 범진의 손가락에 놀아나고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린 탓에, 범진은 선재의 턱을 더 위쪽으로 쳐들었다.

“살 좀 찌웁시다.”

“….”

“떡칠 때 먹을 것도 없다.”

“….”

“주디 틀어 막혔어요.”

“알았어.”

마지못해 대답하자 범진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아이가 곁에 있으면 저를 괴롭히지는 않는데. 선재는 오늘따라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 범진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차에서도 어린애에게 밥을 줘서 좋더냐고 몇 번이나 묻질 않았나.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선재는 옆에 있던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나, 범진의 눈빛을 피했다.

“…아기 어디로 가면 돼.”

등을 보인 채로 물었더니 범진은 반응이 없었다.

“….”

준희를 안은 채 슬쩍 옆으로 몸을 돌린 선재가 아직도 소파에 앉아 씩 웃고 있는 범진을 눈치 보듯 내려다보았다.

“방… 그래. 내가 가르쳐줘야지.”

무릎에 손을 댄 범진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선재가 그를 따라갈 생각으로 아예 자세를 돌렸다. 2층에서 방에 대해 물어보았으니 2층으로 올라갈까. 선재는 어렴풋이 예감하며 범진이 뒤를 돌기만을 기다렸다. 그를 따라가려고 했다.

“….”

기대와 달리, 범진은 가만히 서서 선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린 선재가 아이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주방 옆으로 창이 길쭉하게 나 있었다. 선재는 높은 천장까지 이어진 그 창문에 눈을 던지며, 조용히 한숨 쉬었다.

범진이 코앞으로 다가온 건 금방이었다.

손으로 입 끝을 문지르는가 싶더니 선재의 어깨를 한 손으로 꽉 쥐었다. 다른 어깨엔 아이의 머리가 닿아 있었다. 꽉 잡힌 어깨에, 선재가 표정을 찡그리며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같은 거 없는데.”

“…방, 읍.”

머리가 뒤로 휙 밀려, 아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선재가 입 안을 파고드는 범진의 혀를 가까스로 지탱했다. 입술이 삼켜지며 쭉쭉 빨리는 키스였다. 이런 게 어떻게 키스인가. 선재는 수없이 한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었다. 추웁, 하고 혀를 빨아올리고 입 안의 연한 부분을 꾹꾹 누를 때마다 인상이 써졌다. 미간과 눈가가 하얘졌다.

“아… 하아.”

곧 떨어지긴 했는데 범진이 도장 찍듯 입술에 힘을 줘 뽀뽀했다. 선재의 머리가 뒤로 쭉 밀렸다.

마지못해 입을 뗀 범진을, 아이도 뒤돌아서 쳐다보았다.

“뭐. 말할 거 있냐.”

입술을 손으로 닦은 선재가 범진을 올려다봤다. 또 키스하려고 돌진을 하는 듯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만해. 아기 방이나… 읍.”

짧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그만 하,”

말을 할라치면 또 입술이 붙었다.

부러 쪽, 하는 소리를 내며 뽀뽀해오는 범진이 참 얄궂게 느껴졌다. 선재는 뒷걸음을 쳐보기도 하고, 창 앞으로 가 몸을 피해 보기도 했다. 스프링 달린 피에로처럼 갑자기 등장하는 범진은 도망가냐, 하며 다시 뽀뽀를 해왔다. 아이가 고개를 젖히며 범진의 행동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진심으로 당황한 선재가 아이의 웃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숨바꼭질을 하듯 몇 번이나 범진을 따돌린 탓에 결국 서 있는 자리는 주방 근처가 되었다. 이런 게 재밌나? 범진은 모르겠지만 선재는 재미가 없었다. 준희도 까르르, 웃고 있는 걸 보면 이런 놀이에 재미를 못 붙이는 것 자신뿐인 것 같았다. 야, 도망가냐? 말하고 입술을 부딪쳐오는 범진에게선 쓰고 기분 나쁜 체향이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런 냄새를 묻히기 위해, 범진이 얼마나 짐승처럼 섹스하는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선재는 혼자 얼굴이 빨개진 채 주방으로 대피해 있었다. 갑자기 섹스 생각이나 하고.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었다.

요란히 진동하던 휴대폰 덕에 잠시 소강 상태였다. 소파에 앉아 화면을 확인하던 범진의 얼굴이 장난기 하나 없이 바짝 굳어 있었다.

“애 재우고 오지?”

바빠 보였지만 선재를 향해 말 거는 건 잊지 않았다.

“아직 낮잠 시간 아니야.”

“그래도 재우고 나 부르세요.”

놀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재우고 오라니 괜히 몸이 긴장됐다.

범진은 어, 하고 위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가보세요, 했다.

대꾸는 생략한 선재가 아이를 안은 채로 2층으로 올라갔다.

나무 무늬 계단이 매끈매끈했다.

2층 복도는 아이 키보다 조금 높은 난간으로 가려져 있었다. 틈이 듬성듬성 나 있긴 하지만 아이의 발이 빠질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2층 복도에서 돌아다니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짧은 감상을 마친 선재가 계단 바로 옆에 있던 방문을 밀어 열었다.

1층 거실처럼 텅텅 빈 느낌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 창문 아래에 가득 나열돼 있었다. 못 보던 매트도 깔려 있고, 침대는 새것 같았다. 원래는 싱글 침대 위에 아이를 재웠는데 방 안에 있는 침대는 아이의 작은 몸에 맞춰서 나온 침대 같았다. 울타리같이 생긴 가드는 위로 펼칠 수도 있었고, 접어놓기도 가능했다. 선재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침대 가드를 올렸다 내려보았다. 아이는 창문 아래로 다가가 철푸덕 앉았다. 푹신한 매트 위에서 이야, 이야, 하고 몸을 들썩거렸다.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애를 어떻게 재우란 건가. 선재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창밖도 유난히 밝았다. 다가가 커튼을 내린 선재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공간을 쳐다보았다. 밝은 오전이라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따뜻하고, 분위기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짐을 이곳에 다 옮겨놓고 무슨 방을 정하라고 그랬는지.

선재는 2층에서 저를 내려다보았던 범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도통 알 수 없는 행동만 골라서 한다.

한동안 장난감을 가지고 놀 것 같던 아이는 10분도 안 돼 꾸벅꾸벅 졸았다. 낮잠 시계는 정확한 편인데, 오늘은 아침에 별로 잠을 못 잤나 보았다.

범진에게 어디에 아이를 맡겼는지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를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눈을 뜨는가 싶던 아이는 방긋 웃으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가슴팍을 몇 분간 살살 두드려주자 팔과 다리에서도 힘이 쭉 빠졌다. 한동안 부드럽게 몸을 만져주던 선재가 조용히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문도 조심해서 닫았다. 소음이 거의 없는 문이었다.

옆방도 구경하려던 선재는 범진이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문 앞에서 행동을 멈췄다.

“구경해봤어요.”

“아니.”

“드가봐라.”

턱으로 앞을 가리킨 범진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다가왔다.

바로 옆에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간 선재가 뒤이어 들어오는 범진의 기척을 느끼고 옆을 쳐다봤다. 범진은 저를 휙 지나쳐 가며 셔츠부터 벗어젖혔다.

곧 드러난 등 근육이 문신과 함께 갈라지고 있었다.

맨몸인데도 갑옷을 두른 것처럼 단단하게 보인다. 어깨 화상은 거즈를 대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거뭇한 문신 위로 붙은 작은 테이프들을 떼어내는 범진의 손길이 거칠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선재가 바닥으로 휙휙 날리는 그 테이프들을 주워서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떼도 돼?”

“예.”

범진은 거즈까지 떼어내 바닥에 던지려고 했다. 나 줘, 하고 거즈를 받은 선재가 그걸 테이프 조각 위에 올렸다. 방에 쓰레기통이 없는 탓이었다. 범진은 뭔가를 어디에 버려야 한다는 자각이 부족한 편이었다. 놔둬봤자 주변 환경만 더러워지니, 선재가 나서서 범진 주변에 있는 쓰레기를 치워주곤 했다. 그 버릇이 저도 모르게 나와, 선재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범진은 등에 있던 반창고도 떼어냈다.

“그건 떼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이, 형님. 괜찮습니다.”

범진이 걱정되는 것보다 통증이 전달되는 기분이라 표정이 구겨졌다. 칼에 찔린 듯한 흔적이 그대로 나 있었다.

“걱정도 해주고 황송하네.”

“….”

“옷이나 벗으세요.”

범진은 부정적인 사람 같기도 하고, 매사가 긍정적인 사람 같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말을 저 듣고 싶을 대로 들을 때가 많아 살면서 감정 소모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진의 옷 벗으란 말에 입고 있던 니트를 매만지던 선재가, 범진이 뒤를 돌아보면서는 망설이지 않았던 척 옷깃을 위로 들어 올렸다. 머리를 빼내고, 안에 덧입었던 흰색 반팔 티셔츠도 덩달아 벗었다.

망설이거나 어려워하면 범진이 더 좋아하니까, 선재는 기왕 할 거 빨리 끝내자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바지에 닿은 손은 느릿하게 움직였고, 아래로 내린 시선에 들어온 유두에는 민망하단 생각만 들었다. 범진이 하도 만져, 작은 자극에도 톡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지금도 옷에 쓸렸기 때문인지 벌써 동그란 모양으로 솟아 있었다. 선재의 상체가 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차마 바지를 못 내리고 침대로 가 앉은 선재가 범진의 눈치를 살폈다. 범진은 이미 바지와 드로어즈를 다 벗고, 반쯤 발기한 성기를 내놓고 있었다. 눈썹을 한껏 올린 채 선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느리다, 느려….”

“지퍼가… 따로 있으니까….”

“누구는 지퍼 없냐….”

히죽거리듯 말하는 범진에겐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오피스텔에선 범진이 하고 싶다고 하면 그냥 했다. 병원에서도 저를 만지는 걸 가만 내버려 뒀고, 섹스까지 결국은 했었다. 그때 범진은 문밖에 있는 동생들이 선재의 목소리를 들을까 많이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성질을 내면서도 선재의 요구를 들어주며 속도를 조절했었다.

“히야, 내일 하겠네.”

왜 괜히 망설이게 되나 몰랐다.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으로 바지 버클에 손을 대는데, 이마에 땀까지 맺히고 있었다.

범진의 성기는 갈수록 고개를 위로 들고 있었다.

선재를 앞에서 쳐다보던 범진이 눈썹을 긁으며 성큼 다가왔다.

“뭐 하냐.”

범진은 선재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자지부터 비비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바지를 부여잡은 선재가 좋은 반찬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거리낌 없이 앞으로 다가가 자지를 비비자, 선재는 인상을 찌푸리고 뒤로 물러섰다. 붉게 부은 유두에 범진의 시선이 닿은 걸, 선재도 느꼈다.

“젖 내가 만져서 부었나 보네.”

“…아….”

범진이 그새를 못 참고 이미 드러난 선재의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쥐었다. 지속적인 자극 탓에 평소에도 붉었고, 유륜도 탱탱하게 올라있는 편이었다. 순간 묘한 기분을 느낀 선재가 눈을 질끈 감고 범진의 팔을 잡았다.

“하지 마. 옷은 벗고….”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

사실 준비할 건 없다. 선재도 그걸 잘 아니, 바지를 안 벗었다고 범진이 기다려줄 것이란 기대감은 갖지 않았다. 이내 바짝 다가와 젖꼭지 두 개를 다 잡고 빙빙 돌리는 범진의 손길은 집요한 면이 있었다. 결국, 앞으로 상체를 한껏 굽힌 선재의 머리가 범진의 바짝 오른 성기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또 젖꼭지가 범진의 손에 잡혔다.

눌리듯이 젖꼭지를 잡히면 아프기도 하고, 기분도 이상했다. 열에 잔뜩 오른 선재의 얼굴을 쳐다본 범진이 몇 번이나 그 행위를 반복해서 했다. 애초부터 튀어나왔던 젖꼭지가 자극에 정도를 모르고 솟아올라 있었다. 톡 튀어나온 유두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범진이 한쪽 손으로 선재의 팔을 잡았다.

“나 혼자 봉사하라고?”

“…봉, 누가, 해달… 해달라고… 했….”

범진은 선재의 손을 자지까지 이끌었다. 크고 울퉁불퉁한 불 막대기 같은 것이 선재의 손끝에 닿았다. 선재는 고개를 옆쪽으로 돌린 채 범진이 쥐여주는 대로 가만있기만 했다. 아직 완전히 발기하진 않은 상태라 많이 징그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자지가 엉성하게 잡힌 채로, 범진은 선재의 젖꼭지를 빙빙 돌리듯 간지럽혔다. 손끝으로 긁기도 하고 슬쩍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재의 표정이 바뀌었다.

“치사하시네.”

“….”

“혼자만 좋아하고.”

누가 좋아한다고…. 선재는 그러면서도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간지럽고 기묘한 느낌에 목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세게 쥐면 아프지만, 이젠 세게 쥐어도 이상한 느낌이 먼저 왔다. 손끝으로 유륜까지 긁히자 아랫입술이 절로 깨물렸다.

“이 얼굴로… 젖 가지고 이렇게 느끼기 있냐.”

범진은 선재의 턱을 들어 위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눈을 슬며시 뜬 선재의 표정이 초 단위로 달라졌다. 범진이 일부러, 젖꼭지에 닿은 손에 힘을 줬다 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놓고 아랫입술을 문 선재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보려는 듯, 범진이 고개를 숙여서까지 그 변화를 살폈다.

“좀 벗어라, 이제.”

가까이서 그런 말을 하는 범진을 더는 쳐다보기가 꺼려졌다. 선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범진의 성기에 닿아 있던 손을 거두며 바지부터 벗으려고 했다. 발기한 성기가 각도를 점점 높이는 것이 보였다. 힘을 못 이기고 터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이다. 바지를 발밑까지 벗어 내린 선재가 팬티에도 손을 댔다. 하필 회색 시트여서 잠깐 앉아있어도 물이 금방 들 것 같았다. 곤란한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박인 선재의 손이 팬티 속 맨살에 닿았다. 줄을 끌어 아래로 내리는데, 주욱 늘어지는 애액 때문에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거 때문에 안 벗었냐, 하고 묻는 범진의 말에는 기분이 나빴다.

시트는 곧 오줌을 싼 듯 젖어 들었다. 방에 들어설 때부터 섹스할 게 예상이 되다 보니 엉덩이 새가 자연스럽게 젖어 든 탓이었다. 유두를 꼬집히고, 벗은 범진의 몸을 보면서는 의식될 만큼 젖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표정을 굳힌 선재가 발가벗은 몸을 하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범진도 선재의 엉덩이를 따라 침대 위로 따라 올라왔다.

“아!”

범진의 손이 기어가던 선재의 엉덩이 사이로 순식간에 가 닿았다. 생각할 틈도 안 주고 구멍 주변을 쓸고 심지어는 가볍게 삽입까지 했다. 바로 넣어도 되는지를, 범진은 이런 식으로 확인하곤 했다. 화들짝 놀라 뒤집힌 선재가 갑자기 천장을 보게 되었다. 범진은 선재의 자세가 바뀌나 마나 손을 빼지 않았다. 더 앞으로 다가가, 한쪽 엉덩이를 옆쪽으로 들어 올렸다.

“엉덩이 좀 들어봅시다, 형님….”

짝짝, 가볍게 엉덩이를 때린 범진의 행동에 선재의 미간이 순식간에 조여들었다. 이어 바로 들어온 두 개의 손가락에 판판한 아랫배가 파르르 떨렸다. 푹 죽어 있던 선재의 성기도 서서히 반응했다. 저는 모르는 지점을 범진이 꾹꾹 누르듯 건드리면, 이렇게 성기가 위로 고개를 들곤 했다. 범진의 팔을 잡은 선재가 뒤로 계속 들어오는 손가락에 앓는 소리를 냈다. 뒤에서 오는 자극에 고개 드는 성기가 수치스러웠다. 체모도 적은 데다 색까지 희어 발기했다기보다 불그스름하게 부은 것처럼 보였다. 선재가 애써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목과 가슴팍에도 열이 슬슬 오르고 있었다.

“눈 보고… 눈 보세요.”

“….”

어린 남자를 때리고, 제게 경고를 할 때만 해도 무섭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부드럽게 목을 잡아채며 눈을 맞추라는 범진의 말엔 기분이 이상해졌다. 범진이 상체를 끌어안은 탓에, 엉성하게 안겨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있는 자세였다. 위를 쳐다보면 범진의 입술이 곧장 닿을 것 같았다.

제 자지에 비하면 예쁘게도 생긴 선재의 것을 쳐다보며, 범진은 손가락 두 개를 계속해서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내벽 중간 정도에 위치한 돌기를 눌러주면, 이렇게 성기가 서곤 했다. 안쪽까지 넣어 길을 벌리는 것도 잊지 않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들었다. 바로 아래서 들린 얼굴에 열이 오른 게 보였다. 곧바로 벌어진 입술에 제 입을 가져간 범진이 혀를 안쪽으로 길게 내뻗었다.

“박아줄까.”

입을 뗀 범진이 고개가 꺾인 선재를 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선재는 그 말에 대답할 수도 없이 금방 웅크린 자세가 되었다. 범진이 팔에서 힘을 풀어 최소한의 거리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숨을 허덕이는 사이, 앞으로 다가온 범진이 꺼떡이는 자지를 선재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이내 털썩 앉아 다리를 넓게 벌린 범진이, 선재의 턱을 들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거무스름한 성기가 잔뜩 발기한 걸 보고, 선재도 천천히 다가가며 입을 벌렸다.

“으읍….”

귀두가 작은 입 안을 벌리며 천천히 들어갔다. 범진의 손도 느긋하게 선재의 머리 뒤에 가 닿았다. 천천히… 선재는 범진의 이런 손길에 괜히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고, 감정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반사적인 반응일까. 하도 목 끝을 찔러댄 전적이 있으니 자동적으로 눈물이 나는 건지도 몰랐다. 입 안에 가득 들어온 성기에선 강한 맥박이 느껴졌다. 머리를 드는 힘에 선재도 같이 목에 있는 핏대를 세웠다. 엎드린 채로 성기를 빨아주려니 움직이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차게 고개를 흔든 선재가, 눈을 들고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왜.”

범진이 얼굴을 가까이 붙여오며 물었다.

“…잘… 못 움직여… 못 하겠어….”

“꼴랑 그거 해주고?”

제 침으로 번들거리는 범진의 성기를 보자 눈이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

혹시나 몰라, 선재가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못 느끼고 있었는데 침이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민망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던 것도 잠시,

범진이 선재의 몸을 뒤로 밀어 반듯하게 눕혔다. 엉덩이와 허리를 잡아당기는 힘이 얼마나 센지. 상체를 일으키려던 선재의 몸이 그대로 다시 시트 면과 밀착이 됐다. 다리도 곧 M자로 벌어졌다. 이렇게 하면 풀어진 구멍이 잘 보이는 걸 범진이 제일 잘 알았다. 선재의 구멍은 다시 점점 벌어져 입술처럼 오물거리는 모양이 되었다. 구멍이 꿈틀댈 때마다 투명한 애액이 얇은 줄기로 흘러내렸다.

다른 곳을 쳐다보던 선재의 미간이 일순 좁혀졌다. 회음부와 구멍을 귀두 끝으로 살살 비비던 범진이 곧장 삽입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아흐… 흑,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병원에서도 한 번 관계하긴 했지만, 제가 입원하고 퇴원한 뒤론 처음이었다. 받는 것만도 힘에 겨웠다. 완전히 펼쳐진 주름이 범진이 성기를 밀어 넣을 때마다 안쪽으로 같이 빨려 들어갔다. 틈이 없어 애액도 더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아, 아… 아파….”

“…다 풀어놨는데 뭐.”

“…갑자기… 그러니까.”

범진이 천천히 움직이며 상체를 숙였다. 선재는 범진의 가까워지는 얼굴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느리게 삽입하며 얼굴을 붙여올 때는 없었으니까.

거의 넣거나 빼지도 않고, 범진은 얼굴만 가까이 붙여왔다.

“좀 빽빽하네.”

“…아….”

“아직 아프냐.”

“…응…으….”

“혀 내밀어봐라.”

밖으로 살짝 내민 혀를, 범진은 쭉, 쭉, 소리가 나도록 빨아 재꼈다.

앞으로 범진의 상체가 닿으니 자세가 불편했다. 선재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범진에게 내준 혀를 집어넣지도 못하고 위아래가 다 막힌 꼴이었다.

범진은 한참이나 혀를 빨다 입을 떼고 선재를 내려다봤다. 오늘은 유독 양 뺨이 동그랗게 붉어져 있었다. 이마에도 열이 올라 불그스름하고, 귀도 빨갰다. 씩 웃은 범진이 허리를 움직여 한 번에 선재의 예민한 내벽을 긁고 지나갔다.

“아, 흑!”

이쯤 되면 몸이 제대로 풀어진 것 같았다. 싫다는 듯 혀를 내민 선재는 그러면서도 안쪽에서 애액을 은근하게 쏟았다. 자지 끝으로 그 감각을 느꼈던 범진이 깊은 곳만 골라서 찍었다.

아, 하고 선재가 허리를 뒤틀었다. 부어오른 내벽을 벌리는 범진의 성기에 아랫배가 아려왔다. 범진은 허리를 뒤로 뺐다 퍽, 하고 깊은 곳까지 한 번에 꽂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튀어 오른 선재의 배가 이젠 살짝만 삽입해도 위로 들려 올라갔다. 성기가 내벽을 벌리고 들어올 때마다 돌기 하나하나가 다 열렸고, 더 깊은 곳에 자리한 배 속, 아기집의 입구까지 멋대로 풀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눈물까지 흘리는데, 내벽은 민감하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선재의 얼굴을 위에서 쳐다보던 범진이 넓게 벌어져 있던 다리를 위쪽으로 들었다.

양 발목을 잡고 넓게 벌리자, 선재가 하지 말라고 손을 뻗었다. 범진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반쯤 박혀있던 자지를 안으로 완전히 밀어 넣고, 귀두까지 빼냈다가 깊숙한 곳까지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선재가 배를 위로 들며 몸부림쳤다. 퍽, 퍽, 하고 연속해서 박혀 들자 다리가 어떻게 벌어진 지는 의식도 못 하는 듯했다. 범진이 계속해서 발목을 위로 든 채로 허리를 썼다.

“아으, 그만, 흐윽, 흑!”

“씨팔, 그만하란, 것도, 많다….”

끊어 말하는 찰나마다 힘주어 박아대, 범진의 목소리가 선재의 귀엔 잘 닿지 않았다.

정상위로 얼마간 박아대다 속도를 늦춘 범진이 성기를 빼고 선재의 옆에 털썩 누웠다.

“…끝, 났으면….”

선재는 숨이 찬 듯 말하면서도 옆을 더듬거려 속옷부터 찾았다.

“뭐라냐.”

그러면서 범진은 선재를 모로 눕혔다. 옆으로 선 엉덩이를 향해 범진도 덩달아 몸을 붙였다. 그리곤 선재의 다리 한 짝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제 다리로 선재의 허벅다리를 지탱한 범진이, 자지를 풀어진 구멍 안으로 재차 삽입했다.

“아… 이렇게, 싫, 아!”

다리 한 짝이 범진의 다리에 걸린 채로, 선재는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몸을 떨었다. 옆으로 누운 채여서 성기도 이상한 곳에 닿는 것 같았다. 선재가 다리 한 짝을 든 채로 우는 소리를 내었다. 부끄럽고, 이상하고, 아무튼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삽입되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천천히 뺐다 넣으며 내벽의 모양을 고스란히 느끼던 범진이, 얼굴을 들고 선재의 붉어진 한쪽 뺨을 빤히 응시했다.

“좋은 거 해주는데도 씨바….”

“아흐, 흐윽…! 이제 그, 그마안….”

“원래 이렇게, 언제 하는지 아냐….”

“아, 아아, 흐으, 아흐!”

“임신해서, 니 배 튀어나오면, 그때도 이렇게 쑤시면 된다….”

난잡하게 선재를 쑤셔대던 자지가, 그 말엔 더욱 힘을 받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범진은 줄곧 서 있던 유두까지 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이 자세가 되니 뭐든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던 선재도 그만하면 한계에 다다랐다. 엉덩이 사이로 완전히 들어간 성기는 선재의 안쪽 내벽, 아무도 닿지 않은 부위를 모조리 훑고 비비길 반복했다. 아흑, 헛구역질을 하듯 앞으로 고개가 쏠린 선재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선재의 발그스름한 성기에서도 물 같은 정액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처음 있는 반응에, 선재는 울면서도 그걸 어떻게 멎게 하는지 몰랐다. 범진이 어느 곳을 찌르면, 기다렸다는 듯 조금씩 흐르고, 민감한 내벽 부근을 연속해서 비비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비참해 미칠 것 같았다. 쾌감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적이 살면서 한 번도 없어서. 선재는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성기 끝엔 또 맑은 기운의 정액이 맺혔다 떨어지고 있었다.

“진짜 그마애… 흐으….”

“왜… 부끄럽냐.”

“…흐윽, 흑.”

“드럽게 이쁜 게 이쁜 짓도 하네.”

선재의 얼굴에서 손을 뗀 범진이 뺨에 입을 맞췄다. 다정한 입맞춤은 아니고, 힘이 실린 우악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물기 서린 뺨이 잔뜩 짓눌렸다 펼쳐졌다. 선재는 그러면서도 계속 들어오는 범진의 성기에 다시 울상이 되었다.

“으윽, 흐으….”

“뭘 했다고 땀을….”

땀에 젖은 머리칼이 선재의 얼굴에 가닥 져 붙어 있었다. 그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비비듯 넘겨준 범진이 후, 하고 바람을 불어주었다.

바람에 눈가를 찡그린 선재의 몸이 계속해서 은근하게 흔들렸다. 찌걱거리는 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선재는 느릿느릿하게 눈을 떴다가 감으며 울었다. 다시 정상위로 자세를 잡은 범진을 따라 반듯하게 눕고 나서야 흐릿했던 앞이 제대로 보였다. 범진은 적당한 속도로 삽입을 하며 선재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었다. 막바지에 다다라선 또 선재의 다리를 높게 들고 허리를 치기 시작해, 깊숙한 곳에서 좆물을 뿜었다. 사정 순간까지 뒤로 쭈욱 밀린 선재가 새집 지은 머리를 한 채 몸을 일으켰다.

훌쩍이며 뒷머리를 손으로 빗는 모습을, 범진이 내내 쳐다보았다.

* * *

과분할 정도로 좋은 집이었다.

선재는 아침에 기다란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좋아했고, 나무로 된 바닥을 소리 내 밟아보는 것도 좋아했다. 1층은 대리석 바닥이지만 2층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선재는 아이와 2층에서만 놀았다. 2주가 지났지만, 아이도 집에서 노는 것이 재밌는지, 친구들이 보고 싶단 얘기를 아직까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범진 때문에 이런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범진만 없으면 모든 게 완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재는 눈을 뜬 채로 이런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이불을 뺨까지 덮어, 앞이 이불 색으로 물든 채 보였다. 보인다 해도 범진의 문신이 전부지만. 등이 큼지막한 그림으로 메꿔져 있다면 가슴팍엔 자잘한 문신이 많은 편이다. 매일매일 쳐다봐도 새로운 문신이 보였다. 오늘은 정체 불명의 무늬. 뱀처럼도 보이고, 글자 같이도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 문양에 가까웠다.

….

범진이 워낙 곁을 비우는 걸 싫어하니, 아침에도 할 짓 없는 사람처럼 이러고 있을 때가 많았다.

10분이 지나서야, 선재는 곁눈질을 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준희가 깰 시간이라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 조심해서, 그리고 느릿하게 일어난 선재가 옆을 확인했다.

씨발, 하고 범진이 눈을 떴다. 잠귀가 밝은 편도 아닌데 희한하게 이럴 땐 잘 깼다.

“…아기 밥 줘야 돼.”

저나 범진은 몰라도 준희는 밥을 먹어야 한다. 선재는 그런 생각으로 매번 이런 실랑이를 벌여오고 있었다. 8시나 9시. 준희가 태어났을 때부턴 몸이 자명종이라도 된 듯 눈이 떠지곤 했다. 이 집에 왔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매일 듣는 말일 텐데도, 범진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손으로 까딱까딱, 선재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는 건 잊지 않는다.

범진을 쳐다보고 있던 선재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곤 몸의 중심을 뒤로 기울여, 범진의 곁에 나무토막처럼 누웠다.

눈을 껌벅이며 천장을 쳐다보고 있자 진짜 나무토막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선재는 매일 아침 이런 식으로 몸만 남은 듯한 기분을 느껴오곤 했었다. 오늘도 다를 바 없다 느끼며, 시계를 보거나 눈을 감는 식으로 시간을 더디게 보냈다.

아이라도 울면 상황이 좀 달라질까 싶은데, 준희는 깨어나도 혼자서 잘 노는 편이었다. 실제로 아득하게 들리는 멜로디 소리는 준희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다. 요즘 제일 좋아하는 연주하는 아저씨 장난감. 머리를 두드리면 띠잉띠잉 하고 연주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새벽에 들어온 범진은 유독 표정이 없었다. 물을 뒤집어쓴 듯했고, 맡기 선득한 피 냄새도 풍기며 집으로 들어왔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일 때는 많았지만 표정까지 굳히고 집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얼굴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선재는 새벽까지 기다리라는 범진의 말에 졸음을 참고 기다렸는데, 막상 범진의 얼굴을 보자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을 느꼈었다.

옆을 슬쩍 본 선재가 여전히 저기압인 듯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

몇 분째, 멈춘 듯한 시간이 어떻게든 지나고 있었다.

범진은 겨울에도 옷을 잘 입지 않았고, 밖에서도 답답하면 웃통을 훌렁 벗어젖히곤 했다. 워낙 열이 많은 몸이라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드로어즈는 걸쳤네…. 원래라면 아무것도 입지 않을 텐데. 둘만 있었다면 범진이 뭘 입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있으니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기가 좀 그랬다. 준희의 입장에선, 어쩌면 몰랐어도 될 사람이 아닌가.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선재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또 30분.

눈과 눈썹이 점차 좁아져 갔다. 자세가 불편해선지 허리에 쥐도 날 것 같았다. 범진이 아무리 저기압이었다 해도 섹스하는 건 잊지 않았으니까. 그 가라앉은 분위기에서도 섹스를 끝마쳐 골반이 저릿저릿했다. 산짐승 같던 범진의 모습을 떠올린 선재가 잠을 청할 듯 눈을 감았다. 아이 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만 빼면 방은 조용한 편이었다.

깜빡 잠이 든 선재가 눈을 떴다.

문밖에서 으응, 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희, 준희, 하며 아이는 복도를 걸어 다니고 있는 듯했다.

몸을 일으킨 선재가 9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팔을 잡아채는 움직임이 느껴지자 뒤를 돌아보았다. 범진이 인상이 쓰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홉 시 반이야.”

“…다시 올 거냐.”

“…어…? …어.”

아까보다 훨씬 정돈이 된 목소리로, 범진은 물었다. 방금 잠에서 깬 게 아닌가? 눈을 감은 채였지만 얼굴이 지나치게 평온했다. 다시 올 거냐니. 명령조로 얘기하기만 해 이런 질문이 독특하게 들렸다. 속뜻은 다르지 않지만 듣기에 어딘가 낯설다. 어, 하고 대답한 선재도 뭘 다시 오겠다는 건지 헷갈려하며 방을 나섰다.

“준희 잘 잤어?”

“네에….”

금방 두 팔을 뻗어오는 아이는 줄곧 밖에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계속 이렇게 곁에 두고 키우고만 싶은데…. 시간이 언제까지 허락할지 모르겠다. 준희도 언젠가는 커서, 제 인생을 살게 되겠지. 선재는 오지도 않은 날들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사서 걱정을 했다. 좋은 사람만 만나고, 부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길. 결혼도 조금이라도 아프다면 안 하는 게 낫다. 선재는 그렇게 되면 제가 준희를 지켜줄 생각이었다. 그땐 뭐라도… 뭐라도 되어 있겠지. 제발 그랬으면 한다.

“뭐 먹을까?”

선재는 여전히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 음식이야 간을 거의 안 해도 되니까 문제 될 건 별로 없었다. 뭘 해도 맛있게 먹어주니까. 준희는 음식 투정도 하지 않고, 식습관도 좋게 든 편이었다.

선재가 주방으로 내려와, 으깬 감자와 삶은 계란부터 찾았다. 그야말로 손만 대면 요리를 망치는 재주를 가져,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그걸 똑같이 따라 해오고 있었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는 창우가 주로 죽을 끓였는데. 생각을 하다 소금을 뿌리니 한꺼번에 많은 양이 쏟아져 나왔다. 아, 하고 선재는 숟가락으로 소금이 잔뜩 묻은 감자 한 부위를 움푹 퍼냈다.

이젠 소용없는 일이다. 선재는 미역국이 든 국 냄비에 불을 올렸다. 준희가 잘 먹는 백김치와 어묵볶음도 냉장고에서 꺼냈다. 반찬과 국은 대부분 배달돼 오는 것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월요일마다 배달되는 반찬은 수도 많고 양도 많았다. 맛도 있었다. 범진은 원래 이렇게 해왔다고 했다. 선재는 왠지 그 말엔 김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시킬 수 있으면 진작 시켜서 먹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요리도 못하는 저를 놀리듯 요리를 시켜놓고, 이제 와 반찬들을 주문해 먹는 범진의 심보가 못되게 느껴졌다. 물론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지만. 선재는 아이가 먹을 만한 반찬을 추가로 더 꺼냈다. 노란 호박전과 시금치 볶음을 꺼내고 찬장에 있던 김까지 뜯었다.

“먹을까?”

작은 스푼을 들고 눈을 깜박이는 아이 얼굴이 참 예쁘다. 선재는 준희가 밥 먹는 모습을 넋 놓고 쳐다볼 때가 많았다. 국에 밥을 말아주면 좀 흘리긴 해도 나름대로 야무지게 먹으려고 노력을 한다.

“맛있어?”

으깬 감자를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니 금방 고개를 끄덕인다. 또 어린이집에 못 가게 되었는데도 요즘은 투정을 별로 하지 않는다. 입에 묻은 미역 조각을 손으로 닦아준 선재가 제 앞에 놓인 감자 요리를 더 잘게 으깼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계단 밟히는 소리에 선재의 얼굴이 옆쪽을 향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곧 드러난 범진은 검정 드로어즈 차림이었다. 넓게 벌어진 어깨의 문신이 화상으로 조금 어그러진 것이 티가 났다. 원래도 상처나 흉터 때문에 울퉁불퉁했는데 이젠 그 모양이 멀리서도 짐작될 정도였다.

“…밥 먹게?”

“왜… 안 주고 싶냐.”

아침부터 왜 시비야…. 선재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식탁에 꺼내어진 반찬 대부분이 아이가 먹을 만한 반찬들이었다. 범진은 맵고 자극적인 반찬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자신이 요리했을 때는 범진의 입맛이 어떤지도 잘 몰랐다. 요리 드럽게 안 는다, 그렇게만 말하고 일단 그 싱거운 음식들을 먹긴 먹었으니까.

냉장고엔 범진이 좋아하는 오징어무침과 제육볶음이 용기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제육볶음만 전자레인지에 넣은 선재가 대충 30초를 두 번 눌렀다. 저번에 30초만 하니 제육볶음은 계속 차가웠다. 와 씨발, 돌리는 것도 내가 하는 게 낫겠다. 범진은 그렇게 말하고 30초를 더 데웠다. 그럼 본인이 하지…. 선재는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범진의 어깨를 보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땐 피부가 벗겨져 문신도 흐릿해진 상태였다.

“….”

“형님은요.”

“난 아침 원래 잘….”

“원래 같은 게 어딨냐.”

“….”

“내 앞에서 앉아 드세요.”

이로 씹듯 발음을 하니 ‘드세요’는 잘 들리지 않았다. 선재는 일어선 채로 준희의 얼굴과 손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

전자레인지에서 대앵, 하고 낮은 종소리 같은 것이 났다. 그 안에서 제육볶음 용기를 꺼낸 선재가 뚜껑만 열어 식탁 한가운데 그걸 놓았다. 매운 냄새가 확 풍겼다.

선재는 빠르게 밥공기에 밥을 퍼낸 다음, 밥그릇 하나를 더 꺼냈다.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지. 밥그릇 하나는 범진의 앞에, 다른 하나는 범진이 앉은 자리 맞은편에 놓았다.

“어디.”

“….”

“쏘다니지 마세요.”

“….”

앉자마자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겠지. 종종 저런 말을 할 때가 있다. 처음엔 많이 무서웠지만, 지금은 진짜 집에만 가만히 있으면 된단 것도 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선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하러도 나가지 말고. 택배도 내가 갖고 들어갑니다.”

“응.”

“…대답은 잘한다.”

선재는 범진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 준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름대로 꼼꼼하게 숟가락을 그릇에 툭툭 털고 먹는 게 귀여웠다. 그래도 묻을 건 다 묻는데. 선재는 손을 뻗어 아이의 턱에 맺힌 국물을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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