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으에엥….
요즘 아이는, 이렇게 우는 일들이 많아졌다.
시간대도 비슷했다. 아침에는 멀쩡하게 깨어나지만, 오전 11시나 오후 1시 사이에, 어김없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울음소리를 들은 선재가 침대에서 벗어나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곁으로 갔다.
아이 침대 근처엔 놀이방 같은 구역이 둥글게 조성되어 있었다. 혹시 범진이 무슨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범진과 같이 살게 된 후론 장난감과 책을 더욱 많이 사들이고 있었다. 어제도 장난감 택배만 가득 받았는데, 그런 비용으로만 100만 원이 넘게 지출된 것 같았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그 정도 되지 않을까. 범진이 뭘 사는 데는 참견하지 않아 선재도 돈은 편하게 쓰고 있었다. 하나 편한 게 있다면 그 점일 것이다.
울던 아이는 선재가 다가오자 금세 울음을 그쳤다.
앞에 있던 작은 피아노 장난감을 두드리며 덩달아 무슨 말 같은 걸 했다.
“준희 왜 울고….”
그런 말을 하자, 또 금방 울상이 된 아이 얼굴이 보였다.
말을 잘못했다 싶은 선재가 앞에 있던 사자 인형을 들었다.
“…사자랑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녜에.”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어린이집을 참 재밌어했는데, 갑자기 못 가게 되자 잘 놀다가도 우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선생님 놀이라도 해줄 요량으로 그 곁에 앉은 선재가 사자 인형 옆에 있던 고양이 인형을 들었다. 뭐가 더 좋냐고 물으니 아이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빨갛게 젖은 얼굴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둘 다 좋은가 보네.”
“녜….”
몇 개월 전만 해도 대답도 잘하지 못했는데, 이젠 네, 네에, 하는 대답은 쉽게 한다.
선재는 범진이 깰까 조용조용히 말을 하는 중이었다. 아까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자마자 이리 오라는 범진의 말을 듣고, 한 30분 정도 그의 품에서 뜬 눈으로 누워있었다.
또 잠에서 깨 이리 오라고 할지도 모른다.
선재는 아이와 최대한 길게 놀아주기 위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준희 어린이집 갈까.”
“….”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에게, 선재는 다른 단어를 생각해서 입 밖으로 꺼냈다.
“선생님이랑 친구들. 영준이랑 유아.”
아이는 그제야 눈을 반짝였다.
“보고 싶어?”
“…녜에.”
알아들은 걸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하는 아이의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선재는 아이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었다.
“준희 낮잠 시간인데….”
잠자던 버릇이 있어 즐겁게 노는 와중에도 안아주면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곤 한다. 선재는 준희가 눈을 천천히 뜰 때까지 품에서 아이를 가만가만 달래 주었다. 또래 친구들이 많은 어린이집이, 집에 있는 것보단 확실히 좋을까. 선재는 저 때문에 집에 있게 된 아이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야… 이 씨, 또.”
곁에 없는 걸 알아챘는지, 범진의 짜증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를 안은 채 일어난 선재가 범진이 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서 갔다.
“왜….”
“…내 잘 땐 같이 자라고요.”
“아기 울어서 잠깐,”
“쯧, 눈치 없는 건 지 애미랑 똑같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지. 어린이집 못 가게 돼서… 이러는 거니까.”
품에 안긴 아이를 어르듯 들어 올린 선재가 범진을 기분 나쁘단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린이집?”
“…그래.”
“니 일하던 거기?”
상체를 일으킨 범진이 목을 뚝뚝 꺾었다.
잠이 들려는지, 품에 안긴 작은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예 아이 쪽에만 시선을 맞춘 선재가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니 일하는 데는 안 되고….”
손을 폈다가 주먹을 쥐는데도 뚝뚝, 하는 소리가 났다.
범진은 저게 버릇인 듯했다. 이 집이 난장판이 되었던 날을 떠올리며, 선재는 범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른 데 어디 보내든가.”
“….”
“점마 보내면 난 니랑 있고 좋지.”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는데.
무표정하던 얼굴에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들었다.
씹, 얼굴 봐라, 하고 일어난 범진이 선재의 코를 손으로 쭉 잡아 늘였다.
아이를 안고 있던 선재가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 마.”
“안 할라 그랬는데.”
뒤로 갑자기 물러난 탓에 아이도 팔다리를 움직였다. 이렇게 잠이나 깨우게 되고. 범진은 약 올리듯 말을 던지고 주방으로 가 물을 떠 마셨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큰 컵에 채운 냉수를 벌컥벌컥 잘도 마셨다.
고개를 돌린 선재가 아이를 안고 창가 쪽으로 갔다.
어린이집 얘기가 나오니, 범진 때문에 그만두게 된 어린이집과 거기서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만 같았다.
원장 선생님도 무뚝뚝했지만 좋은 분이었고, 선생님들과도 마음이 잘 맞아 힘든 일에도 보람을 느꼈었다. 특히나 시원시원한 성격의 혜윤이 일한 첫날부터 오빠, 오빠, 하며 따랐던 게 기억이 났다. 그런 혜윤이 소개해준 사람과도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선재는 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원장과 혜윤에게 사정이 생겼다는 문자를 써낸 선재는, 혜윤에게서 오빠는 괜찮은 거냐는 문자를 답으로 받았었다. 남자는 몸이 그렇게 망가지고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선 함구하는 듯했다.
“애 침대에 눕히세요.”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몸엔 문신이 가득하다. 매일매일 보는 문신인데도, 선재는 늘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팍 중간까지 내려온 문신은 진한 것도 있고, 흐려진 것도 있었다. 알 수 없는 문양과 동물들이 가득했다.
“어? 눕히고 오라고.”
창가에서 멀뚱멀뚱 저를 쳐다보는 선재가 답답했던지, 범진이 언성을 높였다.
선재도 그 말엔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30분이나 잘까. 아까 눈물을 흘려, 아이 눈 끝 쪽이 물기에 젖어 있는 걸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조심해서 만져준 선재가 이불을 동그란 배까지 덮어 주었다.
몸을 돌린 선재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저를 쳐다보는 범진과 눈을 마주쳤다.
이리 오라는 듯, 범진은 말없이 고개를 아래쪽으로 숙였다.
오늘은 웬일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한 선재가 몇 걸음 걸어 범진이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내가 꿈을 꿨는데.”
그렇게 말을 시작한 범진이 선재의 어깨를 잡았다.
“형님이 또 도망을 가더라고.”
“….”
끌어당기는 힘에, 선재의 턱과 상체가 범진의 가슴에 순식간에 닿았다.
“왜 그랬냐….”
꿈이 뭐… 꿈이 저와 무슨 상관인지. 선재는 범진과 어색하게 몸을 붙인 채로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렸다. 왜 그랬냐고요, 하며 또 물은 범진도 장난인 듯 가볍게 말했다. 범진은 굳은 표정을 한 선재의 얼굴을 굳이 돌려서 쳐다봤다.
“지가 잘못해놓고, 씨발, 표정.”
“….”
“하여튼간 도망가면 뒤지는 줄 아세요.”
선재는 얼굴이 붙잡힌 채 억지로 범진을 봐야 하는 이 순간이 싫었다.
어? 하고 눈썹을 올린 범진은 그런 선재의 눈 끝을 멋대로 잡아 올렸다.
씨팔, 이래도 뒤져주네, 했다. 범진은 뜻 모를 말을 할 때가 많았다. 또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선재는 범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만 있었다.
선재는 제 몸이 거대한 생선이라도 된 것 같았다.
도마에 철푸덕 놓여 천장을 보게도 되고, 범진과 맞추기 싫은 눈을 맞추고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범진은 곧 회 쳐서 먹을 생선을 보듯 저를 봤다.
이번에 범진은 선재의 몸을 돌려놓고 뒤에서 안았다.
커다란 손으로 선재의 잠옷 상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움푹 들어간 젖꼭지를 만지며 니 애 낳았을 때 젖도 나왔냐, 했다.
제대로 된 질문이지만 대답을 하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선재는 아니, 하고 눈을 감았다. 손도 크고 팔통도 다 자란 악어 몸통만 하다. 범진의 팔을 잡을 때면, 선재는 어릴 때 TV에서 자주 보았던 야생 동물 생각이 먼저 났다. 늪을 헤치고 나오는 악어가 범진보다는 생각도 있고, 이성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라도 안 하면 너무 억울하니까. 선재는 여덟 살이나 어린 범진을 향해 속으로만 불평을 토로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제 딴엔 최선을 다해 모욕했다.
“내 주변에 보니까 남자들도 젖 나오든데요.”
“….”
“하자 많은 놈 새끼 배서 그른가.”
범진은 선재가 예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다 꿰고 있는 듯했다.
“그 새끼가 형님 가둬놓고 거의 살았다 아닙니까.”
자극에 톡 튀어나온 유두가, 범진에게 끊임없이 희롱당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몸을 비틀던 선재가 범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 좀….”
“내 점마 형님 안 닮았으면 바로 죽였다. 알죠?”
선재가 그 말엔 눈 밑을 떨었다. 화가 나, 악문 치아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해봐. 나도 죽을 거니까.”
“뭐? 씨발련아?”
“나도….”
범진이 선재의 젖꼭지를 확 비틀 듯 꼬집었다. 고통에 상체를 숙인 선재였지만, 곧 범진의 팔에 붙잡혀 몸을 뒤로 다시 젖혀야 했다.
“씨팔, 뭐 수고스럽게 니가 처죽냐. 내가 니도 죽이면 그만이지.”
은근한 자극만 전달되던 젖꼭지가 떨어져 나갈 듯 늘어지고 있었다.
선재는 겁이 나는 와중에도 그런 소리를 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범진이 아이를 괴롭히지 않는 것도, 아이 소리만 나오면 제가 이렇게 단호한 말을 해서인 것 같았다. 굳이 두 사람을 죽이긴 뭣한 모양인지. 이렇게 덤비듯 말을 하고 나면 몸이 좀 괴롭긴 하지만 아이는 건들지 않았다.
“형님.”
“….”
“말 안 들리요.”
젖꼭지에서 손을 뗀 범진은 검지 하나를 선재의 귀에 쑤셔 넣었다.
“…아, 왜 이래.”
“안 들리냐고요.”
“들려.”
“낸테 뽀뽀나 함 해보세요.”
“….”
“키스 말고.”
“….”
앞만 쳐다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선재가, 뒤로 돌아 범진을 바라봤다.
성기를 빠는 것도, 섹스도, 심지어는 키스도 아닌 걸 하라고 하는 게 수상하긴 했지만, 뽀뽀로 끝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뭘, 하고 입을 연 선재가 뒤로 천천히 눕는 범진을 바라봤다.
“위로 올라와서.”
“….”
범진이 선재의 겨드랑이 한쪽에 손날을 끼워 넣었다. 상체를 비튼 선재가 내가 하겠다고 범진의 손을 뺐다.
“씨이팔, 가까이 안 오냐.”
곧 일어날 듯 두 눈을 부라리는 범진을 향해, 선재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범진의 손이 다시 겨드랑이에 꽂히고,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히 들린 건 아니지만 힘이 세다는 건 여과 없이 느껴졌다. 엉덩이는 침대에 있지만, 팔꿈치는 범진의 가슴팍에 닿은 희한한 자세가 되었다. 선재는 범진의 턱과 가까워진 시선을 위로 들었다. 눈을 내리깐 범진이 더 올라오라 말했다.
“어디, 젖에다 뽀뽀하고 싶냐.”
잠시 말을 잃은 선재가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냥 다 젖이라고 부르는구나.
선재는 괜한 생각을 하며 범진의 턱에 이마를 가까이 붙였다. 그리곤 조금 더 고개를 들어 범진의 입술을 쳐다봤다. 까칠하게 올라온 입술 위를 왔다 갔다 하는 혀가 보였다.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그 입에 빠르게 입술을 붙였다 뗀 선재가 범진의 가슴팍에 닿아 있던 손을 뗐다.
“그게 지금 한 거라고 손을 떼냐.”
범진이 선재의 팔목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몸이 범진 위로 엎어지자, 선재가 미간을 좁혔다. 알겠으니까… 하고 팔을 떼며 다시 얼굴을 위쪽으로 들었다.
입술을 범진의 입 위로 맞춘 선재가 쪽, 하는 소리까지 내며 뽀뽀했다.
이번엔 바로 손을 떼지 않고, 그 자세로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함 더.”
“…했잖아.”
“확….”
윗입술이 들려 올라가는 게 보였다. 눈을 부라리자 금세 울퉁불퉁해지는 이마를 쳐다보며, 선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얼굴만 가까이 가져가 또 쪽,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더.”
“….”
“바로 떼지 말고 가만있어봐라.”
“….”
몇 cm쯤 떨어져 있던 입술이 다시 붙었다. 이번엔 범진 말대로 입을 붙이고 가만히 있었다. 까슬한 느낌이 입술 살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가볍게 눌리고 있던 선재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지려던 찰나,
범진이 선재의 뒷머리를 세게 눌렀다.
치아까지 들어오는 범진의 입술에, 선재가 범진의 가슴팍을 밀 듯이 손을 올렸다.
팔꿈치가 접히는 건 물론이고, 입술도 망가질 것처럼 짓눌리고 있었다. 선재는 둔기로 입을 짓눌리는 느낌에 고개부터 저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재의 등과 머리를 끌어당기고 있던 범진은 자세도 순식간에 바꿨다. 몸이 퍽,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범진의 몸이 순식간에 제 몸을 타고 올라왔다. 입은 계속 닿은 채였다. 조금씩 떨어졌던 걸 빼면 계속해서 문질러지고 있어, 그의 입과 코에서 거칠게 쏟아지는 숨을 고스란히 느끼게만 되었다. 누운 채로 키스 당하는 것도 섹스만큼이나 불쾌했다.
입이 떨어진 건 5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벨이 울렸다.
범진이 씨발, 하고 옆쪽을 쳐다보며 비디오폰을 확인했다.
불뚝하게 솟은 자지가 바지 위로도 그대로 티가 나고 있었다. 저 씨팔, 하고 시계를 본 범진은 누워 있던 선재를 한 번 내려다봤다.
“옷 입어라.”
잠옷을 위아래로 다 입고 있는데 무슨 옷을 더 입으란 말인지 몰랐다.
“무슨 옷….”
숨을 제대로 못 쉰 탓에, 소리를 제대로 내기도 어려웠다. 선재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뭐라도 걸치라고.”
범진은 그렇게 말하며 비디오폰 쪽으로 갔다. 선재도 상체를 일으켜 범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문이 열렸다는 기계음과 함께 화면도 검은 화면으로 전환이 되었다.
잠옷이 좀 그렇긴 한가. 선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식탁 의자에 걸쳐 두었던 카디건에 팔을 넣었다. 혼자 민망한 마음이 들어 침대로 가 구겨져 있던 이불을 한쪽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통로 쪽에서 먼저 들린 목소리는 범진의 것이었다.
씨발새끼가 시간은 왜 제때 지키냐고 뭐라고 하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선재에게도 안면이 익은 한 남자였다.
어디서 보았고,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당장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 형수.”
그가 고개 숙이자 지워졌던 기억이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씨발아, 쳐다보지 마라.”
전엔 그러지 않았으면서, 선재는 범진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했다. 잔뜩 발기한 채 저를 쳐다보지 말라고 하니 그게 더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선재는 가벼운 묵례만 하고 박창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박창현도 범진의 눈치를 살피고 더는 말도 붙이지 않는 듯했다.
선재는 둘이 거실 창가로 가는 것까지 보고 화장실로 가 얼굴을 씻었다.
입술 주변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꼭 만화 캐릭터 같기도 했다.
오목하게 만든 손에 찬물을 받아 입술을 담갔다. 그러자 열이 올랐던 부분에 찬 기운이 돌면서 감각이 무뎌졌다. 선재는 물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면 다시 물을 받아 입술로 가져갔다. 몇 번이나 그랬을까.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범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니 뭐 하는데.”
“…입 아파서.”
선재가 손에 고였던 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범진은 팔을 뒤로 해, 화장실 문을 닫았다. 달칵, 하는 소리에, 선재가 고개가 위쪽으로 들었다.
“….”
“점마 카메라 설치하라고 불렀다.”
“….”
“내 바로 근처에 있을 거니까, 니 허튼짓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족쳐지는 줄 알아라.”
“….”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들이었다. 선재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범진의 얼굴만 비스듬히 훑었다.
그 시선에 가만 눈 맞추던 범진이 쩝, 하는 소리를 냈다.
“씨발꺼….”
손을 올린 범진은 선재의 뺨에 그 손을 갖다 댔다.
“이 씨팔, 개, 젖같이 이쁜 년.”
선재는 그저 기분이 나빴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고 욕을 내뱉기 시작하는데, 모욕적인 기분만 들었다. 단정하게 뻗은 선재의 눈썹이 조금씩 꿈틀댔다.
“이 쌍판으로 다른 씹창놈 만나는 건 내가 못 내비두지.”
갑자기 나타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에 대해, 범진은 자랑이라도 하는 투로 말을 잇고 있었다. 화장실 조명에 얼굴 흉터는 더욱 깊게 팬 것처럼 보였다.
어쩌라는 말인지도 모르겠고.
범진은 이런 식으로 늘, 제 하고 싶은 말을 상황을 따지지 않고 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갑자기 얼굴을 쳐다보다 저런 말을 늘어놓는데, 상스럽기 짝이 없어 없는 정도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닿았던 범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줄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던 선재는 눈만 든 채로 범진을 올려다봤다. 뺨이 앞쪽으로 당겨지는가 싶더니, 범진이 얼굴을 붙여왔다. 나머지 손도 위로 올린 범진이 선재의 양 뺨을 제 입 쪽으로 끌어당겼다. 선재의 발뒤꿈치가 들렸다. 침대에서 나누지 못했던 키스를, 범진은 어떻게든 하고 말았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범진의 혀가 아까처럼 뜨겁고 컸다.
입을 벌려 범진의 혀를 한참이나 받고 있는데, 밖에서 뭐가 퍽,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뒤로 뺀 선재가 화장실 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문 닫힌 화장실까지 그 소리가 들렸는데, 아이 침대에선 더 정확히 들렸을 것이다. 밖에서 어,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창현이 아이를 달래듯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범진을 옆으로 밀어낸 선재가 곧바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박창현은 형수, 하고 창틀에 걸터앉아 그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고 있었다. 바닥이 엉망이었다. 벽을 파내고, 전선 같은 것도 나뒹굴고 있었다.
으잉, 하고 들린 아이 소리에 선재는 더는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침대로 가 곧바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화장실에서 껄렁껄렁 나온 범진은 박창현에게 다 했냐? 물으며 천장을 쳐다봤다.
선재는 아이를 안고 주방으로 갔다. 그나마 빛이 들지 않는 구역이었다. 괜찮아, 하고 작은 등을 두드린 선재가 아예 뒤로 돌아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크게 울 것 같았지만 곧 칭얼거림을 멈췄다. 범진과 박창현은 목청이 컸다. 듣고 싶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가 다 들렸다. 이렇게 된 게 다 내 덕이라고 말하는 박창현의 말에 선재의 얼굴이 빨개졌다. 예전에 약을 먹인 게 자랑이라고 저러나 보았다. 범진은 처음엔 들어주는가 싶더니 재미 좋냐는 말엔 박창현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할 거나 하라는 범진의 말에, 박창현은 군말 없이 제 할 일을 했다.
* * *
“뭘 한다고?”
[밥 먹고 쉬고 있다니까….]
“뭐 먹었는데?”
[반찬 있는 거… 감자조림이랑….]
“그거 형님이 했잖아. 맛대가리 좆나게 없겠네?”
으어어어억! 휴대전화를 든 범진이 씩 웃으며 선재의 목소리를 들었다. 구둣발 아래에 밟힌 건 석 달 치 잔금을 치러주지 않은 박 사장이었다. 겁도 없는 인간이 이중으로 계약을 해 다른 조직과 트러블까지 있게 했다. 이미 구역싸움까지 끝내고 우선권을 얻긴 했지만, 일의 원흉에겐 지당한 처사가 필요한 법이다. 범진이 눈썹을 든 채 고개를 내렸다. 구두 앞코로 목젖을 누르니 목이 졸려 죽겠는 모양이었다.
“나 새벽에 갈 건데 그때까지 깨 있어요.”
[…그래.]
“왜 씹, 싫으냐?”
미적지근한 반응에 열이 받은 듯, 범진이 박 사장의 목을 더욱 세게 밟았다.
안 그래도 범진의 발에 매달려 있던 박 사장이 감전된 듯 떨기 시작했다. 곧 전화 너머로 들린 아니란 소리에, 범진은 다시 표정을 펴고 박 사장의 얼굴을 찼다. 정통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박 사장이 철푸덕, 바닥에 부딪혀 눕고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두 끝으로 얼굴을 들어본 범진이 그 위에 침을 뱉었다.
“형님.”
[왜.]
“밑에 아무것도 입지 말고 있으세요.”
[….]
“이, 씨팔께, 또 주둥이 여무네.”
[….]
정적이 감돌았다. 범진은 또 좆같이 말을 했다 생각하며 씁, 하고 입맛을 다셨다.
얼마 전부터 선재에게 나름대로는 착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특히 무슨 년, 하고 말이 나가는 건 거의 고쳤다.
시작은 꿈 때문이었다.
꿈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만 꿨던 범진은, 가끔 예지몽처럼 꾸게 되는 이상한 내용들엔 주의를 하는 편이었다. 누가 죽거나 사고가 일어나기 전엔 꼭 기분이 묘해지는 꿈을 꾸곤 했었다.
얼마 전까지 꿨던 꿈도 그랬다.
선재가 곁에 있는 건 똑같지만, 죽여보라 말한 걸 제 손으로 지키기라도 하듯, 선재는 갑자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어떻게도 찾을 수 없게 도망을 가버리기도 했다. 한 번만 꿔도 씹스러웠을 꿈이 며칠 내내 반복되자, 범진은 직접 선재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니, 내가 씨발년이라 하면 기분 잡치냐.’
그때,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나, 하는 표정으로 선재는 범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리송한 반응에 어? 씨팔년아, 이러면 기분 안 좋냐고, 하며 범진은 예시까지 들어 선재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선재는 범진이 악독한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지만 범진은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그래도 형님한테 욕 안 하려고 내가….”
잠시 가만히 서 있었던 범진이 박 사장의 안쪽 허벅지를 강하게 밟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부러진 부위였는지 반 기절 상태였던 박 사장의 몸이 반사적으로만 반응했다. 짧은 텀으로 떨었고, 지그시 눌리면 몸이 홱 접혔다.
“씨밸년이라고 하면 싫다면서.”
[…그걸 누가 좋아해.]
범진은 선재가 그렇게 말을 얼버무리는 게 좋았다. 누가 좋아해, 같은 말을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한 대 후려쳐주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선재의 입에서 나온 그런 말은 어쩐지 듣기에 좋았다. 일부러 그런 말을 들으려고 씨발년, 하고 싫으냐? 물은 범진의 장난이 두세 번 반복되었다. 범진의 귀에도 비슷한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그걸 누가 좋아하냐고.
비실비실 웃으며, 범진은 박 사장을 밟고 찼다.
핏물이 줄줄 흐르는 코를 신발 밑창으로 누르고, 부러진 뼈는 누르듯 밟았다. 움푹 들어가는 부위에 발이 닿으면 박사장은 그 정신에도 소리를 질렀다. 눈은 감긴 채였다.
범진이 어억, 소리를 들으며 팩 웃었다. 눈앞에 왜 얼굴이 떠다니나 몰랐다.
범진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고 박 사장을 제대로 기절시켰다. 손을 들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동생들이 다가와 뒷정리를 시작했다.
지어지다 만 건물이었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뼈만 남은 건물 안에서, 범진은 아래쪽을 내다보며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철제 바닥은 녹이 잔뜩 슬었고 엘리베이터는 작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요란한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장소를 일부러 이곳으로 잡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만하면 됐다고 손짓하는 범진을 향해 동생들이 예, 하고 물러섰다. 말만 동생이지 저 중엔 범진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고, 40이 넘은 형님도 있었다. 청소를 시키려고 데려온 동생들이니 이렇다 할 성과도 못 내고 돈도 없이 바닥을 기는 인생들이 많았다. 범진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몰랐다.
깨어나면 금고라도 하나 받을 요량으로, 범진은 녹슨 창틀 앞에서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가만 있으면 선재 생각을 하게 된다.
범진은 처음에, 호기심으로 선재에게 접근했던 때를 떠올렸다.
범진은 근처 사무소에서 처음 보는 개 한 마리를 끌고 나와 산책하듯 주변을 돌고 있었다. 발정이 난 듯 빨간 고추를 드러내고 앞으로 걸어가는 개가 참 개새끼 같다 느끼며 구역을 돌던 참이었다. 제 관할도 아니었고, 신경 써봐야 몫이 많이 떨어지는 구역도 아니라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않았었다. 그래도 일의 진전을 살피러 사무소를 들러야 할 필요는 있었고, 그때 난로 옆에 매어진 개 한 마리가 범진의 눈에 들어왔던 게 일의 시작이었다.
다 비웠다는 건물 앞에서, 낯선 사람 하나가 주변을 돌고 있었다.
호기심에 말을 걸었던 범진은, 선재의 무반응에 뒤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쭈, 하는 마음으로 다가가 불러세웠는데.
얼굴이 드럽게 예쁘단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겁이 났는지, 분노를 하는지, 하여튼 좋은 표정은 짓지 않았는데, 거기에 괜한 재미가 붙었다.
범진은 그 얼굴로 무슨 표정을 더 짓나 싶어 개를 앞으로 끌어 겁을 줬다.
은근히 풍기는 냄새가 인공적인 향보다는 오메가 체취에 가까운 듯했다.
인형탈처럼 커다란 옷에 둘러싸인 아기를 보자, 저 애를 직접 낳았겠다 싶은 확신도 들었다.
일터에 가면 남자고 여자고, 오메가들은 제게 붙어와 아양을 떠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년은 처음 본다는 생각에, 범진이 실실 나오는 웃음을 그때도 멈추지 못했다. 평범하게 배우자를 만나서 애를 낳은 남자 오메가를 처음 봐 신기한 마음이 컸다. 어쩌자고 이런 동네로 흘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올 정도면 평범한 삶은 못 살았겠나. 범진은 그 건물 근처를 빙 둘러서 사무소로 돌아올 때까지, 선재의 얼굴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오메가 하나가 올 예정이라는 소문은 들었었다. 보통은 손님을 받게 하고, 깡패들 좆집으로도 활용된다. 여자가 들어올 때도 있지만 깡패들이 가까이 두는 오메가는 남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남자라고 내구성 하나는 끝내줬기 때문이다. 쉽게 죽지 않았고, 질병에도 강한 편이었다. 허나 그런 용도로 쓰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버려 두면 저도 종종 들러 따먹을 수 있겠지만.
범진은 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매어주며 선재에 대해 물었다.
오메가 너덜이 받기로 했냐?
테이블에 몰려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범진을 향했다. 그들도 그 사실을 처음 안 눈치였다. 예? 하고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범진에게 대꾸했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행님. 왜요. 마음에 드십니까?
머리가 다 벗겨져 삭발을 한 남자는 50대가 훌쩍 넘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형님 소리를 듣던 범진이 이도 저도 아닌 반응을 보였다.
그리곤 1분도 지나지 않아, 다른 새끼들 좆물 묻히지 말란 경고를 입에 담았다. 몰려 있던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이 아른거리긴 했지만 침 바르듯 으름장을 놓을 정돈가?
하는 생각은 다음 만남에서 씻은 듯이 지워졌다.
마지못해 문을 연 선재를 보자마자, 범진은 당장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단 충동에 시달렸다.
키스는 그날 하고, 사까시도 멀지 않은 날부터 받게 되었지만.
자지가 시도 때도 없이 퉁퉁 불었다.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선재의 체취가 자지를 미칠 듯이 발기시켰다. 사까시로 겨우 자지를 죽여도 다시 좆물 같은 걸 흘리며 위로 솟곤 했다. 선재가 아무리 빨아줘도, 그땐 섹스를 하고 싶었으니 성에 차지 않는 게 있었다. 범진은 선재와 섹스를 하려고 여행 계획도 다 짜놓았다. 오랜만에 서울에 데려가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조직 스케쥴을 앞으로 당겨 잡고, 나머지 시간은 선재와 보낼 계획을 잡았다.
박창현이 약을 먹였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범진에겐 거의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앞에서 흐물거리는 선재를 보자니 꼴리기만 했고, 이성이나 양심 같은 건 원래 없었다.
범진은 선재와 섹스를 하고 감자탕집으로 갔을 때만 해도 간지러운 기분만 느꼈었다.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식당에서도 원래 하던 대로 담배 심부름을 시키고, 선재에게도 술을 따르라 시켰다. 갑자기 박차고 나가는 선재의 모습을 보면서는 좀 멍한 기분이었었다. 화도 났지만, 갑자기 저러는 이유를 몰라서였다.
밖으로 나오자 도로도 길도 휑하니 비어 있었다.
선재는 식당 앞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범진은 차를 끌고, 선재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몸을 조수석 쪽으로 내밀었다.
선재는 말이 없었고,
범진은 그때부터 치솟는 화를 참지 못했다.
결국, 차에서 내려 선재의 뺨을 쳤다.
모텔로 돌아와 사과도 하고, 섹스를 하며 오해를 풀었는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집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는데, 그 후로 선재와 통화가 되지 않았다.
오후 3시에 처음으로 걸었는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들렸고, 그 다음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범진은 5시쯤 빌라 건물을 찾았고, 거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식탁과 거실은 깔끔했다. 방에만 좀 어질러져 있는 느낌이 있었고, 서랍에서 돈을 꺼내 간 것 같았다.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는 3일 만에 알았다.
왠지 서울로 향했을 것 같았는데 서울 외곽의 허름한 모텔에 묵고 있단 정보를 받았다.
늙은 남자가 운영하던 골목의 한 작은 모텔이었고, 앞에 적힌 저렴한 숙박비용 때문에 선재는 그곳을 택한 것 같았다. 여관이나 여인숙같이 생긴 건물에 이름만 모텔인 시설이었다. 범진은 일이 끝나자마자 그 모텔 근처로 갔다. 길이 좁아 차를 아예 뒤편에다 세워야 했다. 원래는 좁은 골목이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주차하는 편인데, 눈에 띄면 선재가 또 도망을 갈 것 같아서였다. 다시 잡는 게 일은 아니지만, 선재가 혼자서 뭘 하는지는 좀 궁금해진 참이었다.
아침이 되면 밖으로 나와 편의점을 찾는 선재는, 초반엔 얼굴이 많이 부어 있었다.
범진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는 선재의 뺨과 제 손을 번갈아서 쳐다보기도 했다.
세게 안 때렸는데 뭐 저렇게 유난스럽게 부어오르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주로 죽이나 김밥, 작은 순두부 같은 걸 사서 모텔 안으로 들어가면 저녁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틀은 그 모습을 온전히 지켜봤지만 3일 째부턴 범진도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처음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을 땐 화가 나서 당장 차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하는 짓이 궁금하다는 미친 욕구 때문에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게 일주일이 되고 열흘이 되었다. 얼추 패턴이 파악 된 후로, 범진은 선재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차 안에서 딸칠 준비도 했다. 집요하게 쳐다보다, 선재가 사라지면 눈을 감고 선재를 생각했다.
선재가 처음 한 아르바이트는 조사서 같은 걸 들고 다니며 사인이나 체크를 받는 일이었다.
범진은 선재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종이짝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보기도 했다.
생활에 활력을 더해주는… 안마기 홍보지였는데 선재는 당연히 하나도 팔지 못했다. 아마 체크나 사인을 받으라고 해서, 정말 그것만 하지 않았을까. 보통은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따위의 항목을 짚으며 제품과 연관시키기 마련이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선재는 그런 쪽으로는 어떤 재능도 없었다. 범진은 심각한 와중에도 하는 짓이 어이없어 실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떤 개새끼가 알짱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개새끼는 한둘이 아니어서,
범진이 그동안 처리한 숫자만 다섯이 넘었다. 번호만 물어보는 개새끼는 개새끼에 포함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하며 들이대는 개새끼나 자신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개새끼 정도만 범진이 처리했다.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부하와 동생들이 잡일 하듯 처리했다. 그들 입장에서도 비수기라, 범진에게 수고비를 받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런 일이 아니면 범진은 선재를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생각을 해봤다.
선재가 작은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접근이, 키스가, 섹스가, 요구가, 폭력이, 선재에게 어떻게 가닿았을지에 대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생각다운 생각이란 걸 해봤다.
불같던 성미도 고요히 가라앉았나 싶었는데,
민선재가 웬 씨발놈을 만난단 정보에는 눈에 그대로 뒤집혔었다.
혼자서 뭘 사부작사부작하는 게 재밌어서 지켜봤지만, 그 꼴까지 보고 싶진 않았다. 다른 알파 좆물내 풀풀 풍기는 민선재를 눈앞에 뒀다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이긴 싫어서 식사를 한 날 오피스텔로 쳐들어갔다. 전부터 나타나고는 싶었지만 어떻게 등장해야 할지 모르겠던 게 범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도망가는 꼴을 보면 속이 제대로 뒤집힐 것 같아 꺼려지기도 했었다. 성질 때문에 또 손이 올라갈 수도 있고.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 * *
그니까, 씨발년아~ 이렇게 하지 말라고요?
….
범진은 건물을 나서며 통화내용을 떠올렸다. 욕설을 듣는 사람의 감정을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게 전부다. 범진은 그래도, 선재가 싫어하니까 좀 자제해볼 생각은 들었다. 씨팔년이, 하고 괜히 읊조려본 범진이 검정 가죽 장갑을 털어내듯 벗었다. 일이 일이다 보니 손이 눈에 띄게 거친 편이었다. 제 얼굴이 상처 입는 건 상관 없지만, 선재의 예쁜 얼굴에 생채기가 생기는 건 신경이 좀 쓰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으니 선심 쓰는 셈 치고 장갑을 끼게 되었다. 이로써 네 번은 된 것 같다.
앞서서 걷던 동생들이 서둘러 차 시동부터 걸었다.
중단된 공사 현장이라 사람을 족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다. 근방의 현장 소장과도 안면이 있어 돈을 좀 찔러주면 주변에 쥐새끼 한 마리도 없이 세팅이 된다. 훌쩍 다가온 봄이라지만, 밤은 아직 추웠다. 찬 기운에 노출되면 볼도 이마도 다 빨개지는 선재의 얼굴을 떠올린 범진이, 찬바람 사이를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윽!”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커다란 몸이 휘청했다. 순식간이었다. 범진은 등을 파고든 저릿한 느낌에 재빨리 뒤로 돌았다. 개, 씨팔, 하고 식별되지 않는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상대는 180cm 정도 되는 키에, 몸은 호리호리한 편이다. 손이나 목 등, 드러난 부위에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 누군가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빠르게 위아래를 살핀 범진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썼다. 고깃덩이처럼 등에 칼이 꽂힌 채였다. 남자는 확실히 죽이란 사주라도 받았는지 땅을 뒹굴면서도 곧 칼 손잡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볍게 피한 범진이 다리를 들어 남자의 배를 세게 가격했다. 아랫배를 꾹 누르자, 그의 입에서 꽉 막힌 기침이 몇 번 새 나왔다.
죽은 듯 힘이 빠져 있던 남자가 일어선 건 순간이었다. 범진이 뒤를 돌아본 사이였다. 사력을 다해 범진의 다리를 밀쳐낸 남자가, 어둠 속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형님!”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던 동생 하나가 범진을 보고 고함을 치며 달려 나왔다.
* * *
이 집에서 처음 겨울을 맞았는데, 그 겨울을 범진과도 함께 하고 있었다. 선재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 거짓말 같기만 했다. 손에선 아이의 작은 옷들이 개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새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는 일이 많아졌다. 실제로도 아이는 적응을 잘한다고 했다. 너무 어리고 늦된 오메가 아이라 어디에 보내기도 겁이 났었는데. 준희를 떠올린 선재의 얼굴에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11시. 그러면서 시계를 확인한 선재는 휴대폰에도 시선을 한번 던졌다.
새벽에 올 거라던 범진이 아침이 되어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자주 하던 전화도 한 통이 없었다. 욕설로 장난을 쳤던 게 마지막 통화였다. 오고 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제 온다고 해놓고 연락도 없이 안 온 적이 없어 의아한 기분은 들었다. 보통 새벽에 온다고 하면 2시나 3시였다.
선재는 새벽 4시까지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들었다. 안 깨어 있으면 뭐라고 할 게 분명해서 참고 있었는데 아침에, 준희를 등원시킬 때까지도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준희가 9시 30분 차를 타니 그로부터도 한 시간이 넘게 지났나.
….
내내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또 한 번 쳐다본 선재가 냉장고 앞으로 갔다. 말없이 점심에 올지도 모르니까 계란찜이라도 하나 해놓는 게 좋겠지. 범진은 차가운 계란찜을 좋아했다. 거의 유일하게 맛있다고 말해주는 음식이었다. 이야, 잘하는 거 하나 찾았다. 비꼬듯이 말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맛있게는 먹었다.
그릇에 물을 담은 선재가 거기에 달걀 세 개를 깨 넣었다. 그리곤 수저통에서 젓가락 하나를 꺼내 휘휘 젓기 시작했다. 물을 너무 많이 넣었나? 싱크대 안쪽으로 달걀물 몇 방울이 튀었다. 제대로 섞으려고 하면 이렇게 다 튀고, 대충 저으면 잘 섞이지 않는다. 결국, 노란 물을 좀 버리고 나서야 농도가 맞았다.
10분에서 14분. 계란찜은 보통 그 시간 안에 익는다. 어느새 김을 뿜는 냄비에선 우유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처음으로 우유를 넣고 해보았는데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얼마 뒤 뚜껑을 걷어보자 뽀얀 찜계란의 윗면이 드러났다. 웬일로 아래가 타지 않았다. 목을 빼고 냄비 안을 들여다보던 선재가 뚜껑을 다시 그 위에 덮었다.
금세 지저분해진 주변을 정리하는데 휴대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쪽으로 걸어간 선재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액정엔 범진의 번호가 떠 있었다. ‘주인님’하고. 당연히 범진이 저장한 것이었다.
“여보세요.”
[형수, 저 박창현인데요.]
“…네. 안녕하세요.”
[지금 형님이 많이 다쳤습니다. 형수가 좀 와야 할 것 같아요.]
“네?”
[가족이 형수뿐이라.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선재는 잠시 멍했다. 가족이 아닌데…. 박창현은 정말 저와 범진이 결혼이라도 한 줄 아는 모양이다. 범진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건지. 금방 뚝 끊어진 휴대전화를 쳐다보던 선재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주변을 대충 정리한 뒤, 선재는 얇은 코트를 꺼내 벽 옷걸이에 걸쳐 두었다. 아까, 준희를 데리고 1층까지 내려갔을 때 스웨트셔츠만 입은 것으론 한기가 느껴졌었다.
가야 하나… 하면서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재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범진이 다쳐서라기보다 박창현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생각이 컸다. 처음에만 거만한 눈을 하고 저를 쳐다봤었지, 이후로는 범진 때문에라도 예의를 차리고 인사하는 편이었다. 선재는 알겠다고, 말을 아꼈고 옷을 꺼내 입었다. 아침에 샤워를 했으니 세수만 하면 되겠지. 로션을 바르고 모자를 썼다.
준비를 다 하고 집 밖을 나선 선재는 1층으로 내려가 차도와 가까운 곳에서 박창현을 기다렸다.
흰 볼캡을 써서 얼굴을 못 알아볼까도 싶어, 굳이 인도 끝에서 몸을 내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짧고 가벼운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에서 형수! 하는 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선재는 도롯가 한복판에서 큰소리를 지르는 박창현에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자주 하는 생각이지만 범진과 일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말투나 행동이 한 공장에서 찍기라도 한듯 비슷할 때가 많았다.
“웬만하면 땜질로 때우겠는데.”
차에 타자마자 박창현은 그런 소리를 했다. 땜질. 선재는 범진에게서도 그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맥락상 대충 치료를 한다, 혹은 임시로 처치해놓는다는 뉘앙스의 단어였다. 선재가 앞을 잘 보지 않는 박창현에게 네, 하고 손을 앞 유리 쪽으로 뻗었다.
“깊이 찔려서요. 그래도 재수 좋게 안에는 좀만 찢기긴 했습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박창현이 핸들을 홱 돌렸다. 비정상적으로 차로에 끼어들고 또 끼어들다 앞차와 부딪힐 뻔했다. 선재는 이런 상황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이씨, 선재 앞이라고 욕설은 자제한 박창현이 지나가는 운전자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30분 뒤, 박창현의 검정색 세단은 한 대학병원 앞에 섰다. 먼저 가서 범진이 보세요. 그렇게 말한 박창현이 선재를 응급실로 통하는 병원 입구에서 내려주었다.
그때까지도 선재는 정신이 없기만 했다. 어쨌든 사람이 다친 거긴 한데… 감정에도 동요가 없었다. 범진을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그가 칼에 찔려 위험해졌다는 게 도무지 상상이 안 갔기 때문이었다. 병원 복도로 들어선 선재가 벽면에 붙은 커다란 시계로 오후 1시에 가까워진 걸 확인했다. 수납처 데스크 근처에 응급실 면회 접수 칸이 따로 있었다. 그리로 가 이름을 말하자 곧장 답변이 들려왔다.
40분 정도 기다린 뒤에 면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선재는 네, 하고 뒤를 돌아 주변을 살폈다. 응급실 옆쪽으로 많은 대기석이 있었지만, 차마 그쪽으로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응급실 앞에 있는 벤치와 등받이 의자엔 척 봐도 인상이 나쁜 사내들이 줄줄이 앉아있었다.
개중 맨 앞에 앉아있던 남자는 이 날씨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범진이 반팔 아래로는 문신이 없는 것과 달리, 남자는 팔 전체가 문신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런 그가 옆을 툭 치더니 선재를 가리켰다. 선재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형수님입니까?”
“맞네. 형수님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떼 지어 일어난 남자들이 선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굵고 엄숙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선재가 몸을 뒤로 뺐다. 뒤편에서도 안녕하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게 서 있던 선재가 네, 하고 대기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1층 전체에 울리고 있는 것 같은데도, 남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만 그들을 훑었다. 인사를 받은 선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 안녕하세요.”
고개를 연신 숙이며 앞으로 다가간 선재가 대기석 뒤편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자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가만히 앉아 면회 시간을 기다리려는데, 앞쪽에 앉아있던 남자 한 명이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형수님, 저희한테 뭐 시키실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어, 없는데요….”
순간 말을 더듬은 선재가 얼굴을 붉혔다. 어찌나 쩌렁쩌렁하게 말하는지 주변에서 자고 있던 남자가 잠을 깼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선재는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커피라도 한 잔 사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모자를 쓰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재는 이렇게 주목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크게 하고 보는 남자 때문에 근처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모자를 더욱 깊이 쓰고,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커피 외에도 담배, 점심에 관해 묻고, 선재는 정말 괜찮다는 말만 반복해서 했다. 그럼 저, 하고 남자가 돌아가고서야 숨이 좀 트였다. 선재는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모자를 깊이 쓰고 있다가, 주변이 잠잠해지자 챙을 위쪽으로 들어 주변을 다시 살폈다.
곳곳에 시계가 걸려 있었다. 대기석 중앙에 위치한 기둥에도 작은 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선재는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하며 준희를 데리러 갈 생각만 했다. 어린이집 차가 2시 반에 도착하니, 그전까진 오피스텔로 가야 한다. 선재가 다시 형수님, 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박창현이었다.
“지금 가보실래요. 수술이 잘 끝나서 곧 일반병실로 올라가긴 할 겁니다.”
“40분 정도 걸린다고….”
“예,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유독 딱딱하게 느껴지는 박창현의 어투에, 선재도 그때부턴 긴장을 했다. 차에서 넌지시 듣긴 했지만, 수술이나 일반병실 같은 단어를 응급실 앞에서 듣고 있자니 조금 겁도 났다. 이쪽입니다, 하는 박창현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킨 선재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에 있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박창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하고 경계 안쪽에 있던 박창현이 건넨 건 면회 중임을 알리는 목걸이였다. 선재가 그걸 목에 두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깁니다, 하고 박창현이 가리킨 곳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먼저 가라는 걸까… 박창현은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뒤늦게 반응한 선재가 그를 지나쳐서 커튼이 있는 쪽까지 걸어서 갔다.
옆으로 천을 살짝 걷어내자 잠든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
분위기도 심각하고, 응급실 근처에 수상한 사람들도 많이 있어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허나 범진의 몸에 매달린 장치들이 그 염려를 지울 만큼 단조로웠다. 허리에 하얀 붕대가 친친 감겨 있는 걸 빼면 새로 생긴 상처 같은 것도 없었다. 선재는 더는 보고 있을 게 없어 눈만 굴리다 뒤쪽에 있던 박창현에게도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아까 마취 잠깐 깨서 형수만 찾았거든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연 박창현이, 침대를 향해 턱짓했다.
“….”
“어디 있냐고, 데리고 오라고 해서.”
마취에 깬 직후면 정신이 오락가락했을 텐데. 그때도 저를 찾았다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찾을 사람이 없나. 선재는 평소에도 도망가지 마라, 가면 죽인다, 같은 말을 많이 들어 왔었다. 범진이 저부터 찾았다니 그런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실제 들리는 소리는 기계음과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전분데.
“안 깨네. 범진아.”
셋이서 있을 땐 이름을 부를 때가 많다. 하지만 굳이 깨울 필요가 없는데. 말릴까 말까 고민하던 선재가 한 번 더 범진아, 하고 던져진 말엔 뒤를 돌았다.
“굳이… 안 깨워도 될 것 같은….”
“씨팔… 굳이 안 깨워도 되는 건 뭐냐….”
거칠게 갈라지는 음성에 선재가 다시 앞쪽을 쳐다보았다. 깨어나며 선재의 음성을 들은 건지, 찌그러진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처음엔 상태가 나쁘지 않았지만, 반격을 한다고 힘을 주는 바람에 칼이 조금 빠졌다. 다시 찌를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대로 병원으로 갔는데, 수술이 필요하단 의견을 들었다. 내출혈이 있어 어쩔 수 없다고. 그냥 꿰매만 주쇼, 말하던 범진이 긴급수술을 받은 건 7시쯤이었다.
깨어나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선재를 보는 눈엔 초점이 짙었다.
“….”
“하이씨. 개쪽팔리네….”
“….”
선재는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범진은 여전히 위협하듯 말을 할 때가 잦았고, 별거 아닌 일에도 성질을 부리고 손을 올렸다. 맞은 적은 없지만 올라간 손에 얼마나 자주 몸을 움츠렸는지 모른다. 육체관계에서의 상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선재는 범진이 원할 때마다 몸을 열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간신히 적응하긴 했어도 몸이 힘들 정도로 몰아붙이면 삶 자체에 회의감이 들곤 했다. 준희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나쁜 선택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야…. 가까이 와봐….”
박창현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 자리를 피했다. 반대쪽에선 의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례가 있는지 다른 침대로 먼저 향한 의사를, 박창현은 옆쪽에서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수술을 하든 말든, 이리로 와보라고 하는 말투엔 변함이 없었다.
선재는 코트 앞자락을 손으로 여민 채, 범진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가 고개를 숙였다. 볼캡에 가려진 얼굴을 올려다보던 범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보라는 거냐… 썅…. 모자 벗어라….”
“….”
잠시 가만히 있던 선재가 볼캡을 벗고 머리를 매만졌다. 정리를 하지 않아 곳곳이 눌리고 뻗쳐 있었다.
“고개 더 숙이고….”
“….”
몸이 자유로울 땐 이러고 있으면 꼭 뭐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닌데 자꾸 얼굴을 가까이하라는 게 무슨 마음일까 싶었다. 선재는 더, 좀만, 하고 말하는 범진 때문에 코가 붙을 듯이 얼굴을 아래쪽으로 내밀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범진의 얼굴에, 선재도 짧은 감상을 했다. 잠을 그렇게라도 자서인지 낯빛이 좋아졌단 생각과 수염이 그새 좀 올라온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
“뭘 보냐….”
“…안 봤어.”
“난 니 잘 보이는데….”
“….”
“니도 딱 내 보이겠구만.”
“….”
“보라 할 때 봐라. 말 안 들으면 진짜 날 잡아서 개 패듯 뚜들기 팬다….”
처음에 깼을 때만 해도 무슨 말을 더하겠나 싶었는데, 말하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팰 거라는 말에 힘을 싣는 게 평소와 똑같았다.
자주 들어왔던 말이라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이 생각만 났다.
면회가 끝나면 바로 택시 타고 집으로 가야지.
범진이 제 얼굴을 샅샅이 훑는 것에도 처음처럼 민망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얼굴이 뚫릴 듯 쳐다보던 범진에게서 히야, 하는 특이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니 얼굴이 약이니까 옆에서 제대로 붙어 있어라, 했다.
선재는 대답하지 않고 범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보이는 게 그것뿐이었다.
* * *
“어디로 가시죠?”
뒷좌석에 몸을 실은 선재가 병원명을 댔다. 며칠째, 준희를 등원시킨 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범진은 수술한 당일 밤에 일반 병실로 옮겼다. 알파이다 보니 회복 속도가 빨랐고, 자상이나 창상을 입었을 때 맞아야 하는 주사 처치도 따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특수 성별의 우열을 쉬쉬하는 편이었다. 우성인지 열성인지에 따라 입원 기간이나 치료 방법이 다르긴 했지만, 혹여 따를 문제에 있어 더 예민한 태도를 보였다. 서류에도 작게만 기재된 게 전부였다.
선재는 작성해야 하는 입원 서류에서, 우성으로 표기된 범진의 형질을 새삼 확인했다. 열성인 자신이 B 오메가였으니 A 알파인 범진은 당연히 우성 알파. 살면서 본 우성 알파라면 범진이 전부일까. 오며 가며 만났을 수도 있지만, 선재는 그날부터 우성 알파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다. 우성 알파는 어떻다더라, 우성 알파는 어떻다는 식의 부정적인 말들. 소문과 진실이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선재는 빠르게 걸어 복도 끝 엘리베이터까지 갔다. 6층이라 계단보다는 엘리베이터로 가는 편이 나았다. 시간을 확인한 선재가 얼마 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범진의 병실은 6층 끝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실이고, 분위기는 아늑했다. 이른 저녁까지 해가 드는 창은 크기가 컸고 병원 냄새도 많이 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고 있으면 잔기침이 나는데, 특실 안에서는 그런 증상이 없었다.
문을 옆쪽으로 밀고 들어가자, 밥을 먹는 범진이 보였다.
안면이 낯이 익은 남자 하나가 선재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선재는 코트를 벗어 한쪽 팔에 걸친 채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선재가 오기 전까지만 옆에 있기로 한 남자였나 보았다. 남자는 곧 특실을 나섰다.
“밥 먹었냐.”
“응.”
“옆에 좀 앉아라.”
범진이 옆에 앉으라고 하는 건 제 옆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듣고 소파로 향했던 선재는 별 욕을 다 얻어먹었다. 이제는 아니까. 선재는 범진이 앉아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굳이 엉덩이를 걸쳤다.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식판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숟가락을 탁, 놓은 범진이 옆쪽으로 손을 뻗었다. 눈을 그쪽으로 돌린 선재가 거기 껌통이 하나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해줄게.”
아무리 빨리 회복하고 있다고 해도, 몸을 마음대로 뻗어도 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범진은 거리가 있는 냉장고나 협탁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댈 때가 있었다. 냉장고 위의 껌통을 먼저 잡은 건 선재였다. 원통형 용기를 내민 선재가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범진의 눈치를 봤다.
“누가 이런 거 해 달랬냐.”
“아니… 나는 불편할까 봐.”
“씨발, 가만 앉아서 쌍판이나 잘 보이라고.”
“….”
수발 아닌 수발을 해주며 느낀 것은, 범진은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단 것이었다. 병수발이 원래 이런 건가. 선재는 범진의 곁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TV로 영화를 보거나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스킨십이나 키스를 당하는 것이 전부. 무슨 심보로 그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쭉 빨아올리듯 키스를 당한 날이면, 입술이 오리처럼 부어 병원을 나설 때도 민망한 감정이 들곤 했다. 시간에 맞춰 오피스텔에 도착하더라도, 선재는 굳이 집에 들러 마스크 하나를 쓰고 아이를 마중 나가곤 했다.
“젖 좀 만지자.”
껌을 쩍쩍 씹으며, 범진은 선재를 향해 팔을 슥 뻗었다.
범진의 얼굴을 스치듯 쳐다본 선재가 위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TV 화면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선재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쭉 넣은 범진이 판판한 가슴을 일부러 꼬집듯 그러쥐었다.
손가락 끝을 세워 유두를 치듯이 건드리자, 위쪽을 향해있던 선재의 눈도 조금씩 일그러졌다. 범진이 그 얼굴을 옆에서 쳐다보며 튀어나온 유두를 손으로 살살 굴렸다. 좋냐? 하자, 선재는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범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저를 쳐다보는 그 두 눈에, 범진의 성기가 병원복 위로 단단하게 끓어 올랐다.
“하까.”
“…의사가 무리하지 말라고,”
“씨팔, 내 걱정하는 척 좀 고마해라.”
짜증 난다는 듯 씨팔, 하고 말을 꺼낸 범진이 계속 저를 향해있던 선재의 얼굴에 입을 갖다 댔다.
코끝에 살짝만 닿았던 입술이 이내 크게 벌어졌다. 선재는 코를 다 삼킬 듯 빨아당기는 범진 때문에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하지 말라고 말을 하는데 코가 먹혀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입을 뗀 범진이 혀로 인중과 코, 눈을 단번에 핥아 올렸다. 침으로 번들대는 얼굴을 한 선재가 바로 앞에서 히죽거리는 범진의 얼굴을 신경질이 난 채로 쳐다보았다.
“드럽냐?”
“….”
더럽긴 하지만 더럽다고 하면 그 더러운 짓을 얼마나 더 할지 몰랐다.
선재는 고개를 저으며 옆에 있던 티슈에 손을 뻗었다.
“안 드러브면 좀 더 빨고.”
“…더러운 건 아닌데.”
급하게 말문을 연 선재가 옆으로 뻗은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드러운 거 아니면 뭐.”
범진은 씹고 있던 껌도 안 뱉고 선재의 입에 그런 식으로 혀를 댄 거였다.
그 말을 하고 휙, 병실 바닥에 껌을 뱉은 범진이 선재가 무슨 말을 할지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기다렸다.
“너 무리하면 안 좋으니까.”
“개소리. 씹할.”
얼굴을 구긴 범진이 선재를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고개가 위로 들린 선재가 묵직하게 전달되는 통증에 눈가가 하얘지도록 눈을 감았다. 다쳐서 수술까지 했다는 사람이, 기세가 하나도 줄지 않았다. 결국, 힘을 버티지 못한 선재가 뒤로 넘어갔다. 침대에 등이 닿자, 범진은 섹스라도 할 듯 자연스럽게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다.
병원복 고무줄 위로 자지가 튕겨 나온 건 금방이었다. 반쯤 솟은 살덩이에, 선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도 올 수 있고.”
“뭐.”
“배에 덧나면.”
“씨팔, 배때지 터지라고 염불을 외네.”
완전히 솟지 않은 자지라 위에서 큰 폭으로 흔들대고 있었다. 성기는 범진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덜렁대며 물을 한 방울씩 흘렸다. 다른 곳에 눈을 둬도 성기가 그 꼴인 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안 보이는 척 눈을 들어 범진의 눈을 쳐다본 선재가, 어제 들었던 영화 얘기를 했다.
“영화 보자며….”
“이라고 영화를 보자고.”
“…옆에서 좀 만져줄 테니까.”
“니 씨팔, 머리 많이 좋아졌네.”
범진의 태도가 그제야 누그러졌다. 원래 자리로 가 누운 범진은 위로 솟은 자지로 선재의 손을 가져왔다. 곱고, 자지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손을 굳이 거뭇한 제 자지 위로 억지로 올렸다. 잠깐 손이 떨리는가 싶더니, 말한 게 있어 그래도 잡긴 잡는다. 범진이 자지를 감은 손을 쳐다보다 리모컨을 들었다.
“서른셋이나 된 기,”
“….”
“그것도 안 보고 뭐 했는데.”
“….”
범진은 영화 얘기를 했다.
“제대로 안 치냐.”
자지를 쥔 채 가만히 있기만 하는 선재에게 윽박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재는 어, 하고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애초에 한 손으로 쥐기에도 벅찬 성기였다. 손바닥을 치는 핏줄에도 여전히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극은 자극이니 범진의 성기는 위로 꺾이며 제대로 발기했다.
TV에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난도질하는 영화가 나왔다.
TV 받침대에만 간신히 시선을 둔 선재가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진은 선재의 뒷머리를 잡아 눌렀다. 손이 떨어진 선재는 얼굴 앞까지 닿아온 성기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귀에서 으악, 하고 또 누가 죽는 소리가 들렸다. 기둥 중간까지 입에 담은 선재가 얼굴을 왔다 갔다 하며 침 흘리는 성기를 빨았다. 억, 으악, 하는 소리와 성기 빠는 소리만 공간을 채웠다. 범진이 뒷머리를 잡고 있어 입술이 기둥 부근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
“니 씨발, 다른 새끼한테 이 짓 해주면 그 자리에서 낸테 뒤지는 줄 알아라.”
배가 아프지도 않은지, 몸을 뒤쪽에 기대고 있던 범진이 허리를 단숨에 숙였다.
“우우….”
눈동자를 돌려도 범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으로 상체를 숙이고 알겠냐고, 하는 범진 때문에 그의 턱만 조금 보였다. 응, 하는 대답은 범진의 성기를 물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으, 우우, 하는 소리만 범진의 귀에 닿았다.
“이 씹, 개젖 이거를.”
범진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선재의 머리채를 들고 눈이 위로 향하게 만들었다.
성기를 물고 있던 선재가 입이 앞으로 쭉 빠진 모양새로 범진을 쳐다보았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면 그나마 범진의 얼굴이 보였다.
“그대로 빨아라.”
새빨갛게 오르기 시작한 선재의 눈이 깊숙하게 감겼다 뜨였다. 고개가 범진을 향해 반쯤 들린 채로는 얼굴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렇게 빨라고 하니, 그렇게 해야겠지만…. 선재는 입술만 조금씩 움직여가며 입 안에 있던 성기를 미욱하게 빨았다. 범진이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이 씨발, 제대로, 하며 선재의 머리를 계속해서 다잡았다. 눈동자가 빠질 것 같은 느낌에, 선재는 눈물을 흘렸다. 그 얼굴을 가까이 다가와 쳐다보던 범진이 자지에서 좆물을 냈다. 성기가 박히듯 힘있게 들이치는 정액에, 선재가 눈가를 찌푸렸다. 와중에도 눈을 제대로 뜨라고 말하는 범진 때문에, 선재는 울면서 눈을 떴다. 눈을 감싸고 있던 뼈에도 통증이 일었다.
성기를 입에서 빼내자 정액이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범진은 자지를 내놓은 채로 선재의 턱을 들고 줄줄 흐르는 정액을 쳐다봤다.
“디지게 쌌네.”
잡혀있던 얼굴을 빼낸 선재가 팔을 티슈가 있는 쪽으로 가져갔다.
범진이 그 팔을 세게 잡고 뒤로 던지듯 밀었다.
“….”
말을 하면 정액이 쏟아질 것 같아, 선재는 골난 얼굴로 범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뱉게?”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다시 팔을 앞쪽으로 뻗었다.
이번엔 어깨가 잡혀 침대 위에 눕혀졌다. 목 끝에 고였던 정액이 뒤로 반 정도는 넘어갔다. 눈살을 찌푸린 선재가 위에서 저를 포박한 범진을 한계에 다다른 듯 쳐다보았다.
“원래 삼키면서 뭐.”
“….”
“너무 많냐?”
떨리는 미간을 다잡은 선재가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위에서 어깨를 잡고 있던 범진이, 썅, 하고 짧은 욕을 하며 옆에 몸을 뉘었다. 천천히 함 삼켜봐라, 하며 선재를 끌어안았다.
왜 이러는 건가.
선재는 난데없이 안긴 자세가 되어, 더는 티슈를 뽑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범진의 말대로 입에 있던 정액을 조금씩 삼켰다.
목 끝에 있던 건 한꺼번에 넘어왔고, 입천장과 치아에 묻었던 정액은 서서히 밀려들었다. 비릿하고 요상한 맛이 혀 전체에서 느껴졌다. 냄새가 남을 정도로 많이 사정된 정액이었지만 역하진 않았다. 비위가 약해 토악질이 날만한데도 그런 반응까진 나오지 않았다. 묽게 남아 있던 정액마저 삼킨 선재가, 범진의 품에서 약품 냄새를 맡았다.
* * *
“내 손 어떻습니까.”
10분이나 갔을까. 잠이 들려던 선재를 깨워, 범진은 손을 내밀었다.
“…뭐가.”
“형님이 따갑다고 해서 장갑 좀 끼고 다녔는데.”
얼굴을 많이 만지던 범진의 버릇은 겨울이 돼도 변함이 없었다.
손이 거칠어도 상처가 남진 않았는데, 겨울이 깊어가자 손바닥에 가시라도 박힌 듯한 느낌이 났다.
얼굴을 매번 긁히다 결국 참지 못한 선재가 아프단 한마디를 했는데, 범진은 그 후로 조심하는 눈치였다. 처음엔 참으라고 하더니 얼굴에 진짜 상처가 난 걸 보고 자중하는 듯했다. 주팬 것도 아닌데 뭐 이런 게 생겼냐고 열 받은 듯한 얼굴을 했었다.
“…부드러워졌네.”
“크림도 발라주세요.”
대답 없이 침대에서 내려간 선재가 코트에 있던 핸드크림을 꺼내서 왔다.
튜브를 기울여 크림을 범진의 손 위에 짜내고, 제 두 손을 가져가 익숙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범진의 크고 거친 손을 만지고 있으면 25년 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딱딱한 굳은살에, 손가락 마디가 불거지긴 했지만 앞으로 쭉 뻗어 답답한 인상은 들지 않는 손이었다.
원래라면 꽤나 날렵한 손이었을 것 같은데.
선재는 여러 번 빠진 듯한 손톱에도 눈길을 주며 크림을 마무리하듯 발랐다.
“근질근질하다.”
“…다 했어.”
큼지막한 손에서 떨어져 나간 선재의 손이 범진의 손에 다시 잡혀 올라갔다.
“내가 그만하라 했냐.”
“….”
맞을 짓만 골라서 한단 말도 뒤이어 들렸다. 손의 열에 녹은 크림이 온데간데없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쯤 되면 의미 없이 비비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선재는 그걸 알면서도 범진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손으로 다시 그의 손을 어루만지듯 쓸었다.
범진은 한 손을 내놓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선재가 여전히 마사지하듯 손을 주물러대며 범진이 뭘 하는지 지켜보았다.
“여 밑에서 만두랑 죽 좀 사 와라.”
범진은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고개를 들고 있던 선재가 눈을 다시 손으로 내리며 범진의 손만 만지고 있던 척을 했다.
“니 밥 안 먹었지.”
“…먹었는데.”
“원래 씨발, 처먹냐?”
손을 위로 쳐든 범진 때문에 선재의 어깨가 뒤로 빠졌다. 이번엔 정말 맞는 줄 알았다.
음식을 사온 건 박창현이었다.
범진은 여기다 펼쳐놓고 가라고, 박창현에게 명령을 했다.
그리곤 붙박이장처럼 생긴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기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저럴 거면 핸드크림을 왜 발라 달라고 하는지 몰랐다. 선재는 앞에서 음식을 부리는 박창현에게도 시선을 한 번 주었다.
“제가 할게요.”
“됐습니다, 형수.”
박창현은 손으로 포장 용기를 만지면서도 뒤로 돌아 범진이 뭘 하는지 지켜봤다.
범진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입구 근처에서 통화를 하는지 뭐라고 하는지가 다 들렸다.
“보기 좋습니다. 형수랑 범진이.”
“아뇨.”
그러고 할 말이 없었다. 별로 안 좋은데요, 같은 말을 하기도 그렇고, 좋다고 굳이 속일 필요도 없는 듯했다. 선재는 일회용기 안에 있던 만두에 군침이 도는 걸 느꼈다. 사실은 범진의 말이 맞았다. 병원에 오기 전에 늘 끼니를 대충 때우고 와, 시간이 갈수록 허기가 돌곤 했다. 오늘은 대충도 때우지 못하고 급하게 왔으니 반박하기도 민망했다.
“범진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고무줄을 벗겨내며 말을 툭 던진 박창현의 눈이 선재에게 닿아있었다.
“저거 배 낫지도 않았는데 또 구역 정리하러 가야 하고.”
“….”
“그래도 형수 때문에 안정 많이 찾은 것 같아 보기는 좋습니다.”
“….”
“잘 돌봐주십쇼.”
“…네.”
마지못해 대답한 선재가 고개를 들어 박창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형수도 저희랑 한배 타셨으니까.”
“….”
박창현은 손으로 직접 뜯은 죽 용기를 선재 앞으로 내밀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것이, 파래나 김이 들어간 죽인 듯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습을 보인 건 범진이었다. 힘이 남아도는지 문을 던지듯이 열었다.
“야, 니 조선족 그 새끼 정보 빼놨냐.”
박창현을 향해 바로 손가락질한 범진은 주변엔 관심도 없었다. 아, 그거, 하고 입을 연 박창현이 선재를 향해 짧은 인사를 건넸다. 선재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병실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쾅, 하고 또 세게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은 반동 때문에 완전히 닫혔다가 반쯤 다시 열렸다. 이 씨발놈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진은 친구에게도 저렇게 고압적으로 굴 때가 많았다. 스멀스멀 김이 나는 죽에 시선을 기울인 선재가 플라스틱 수저 비닐을 뜯었다. 아까부터 죽이 무슨 맛일지 궁금했다.
“맛있다….”
막상 맛을 보니 파래맛은 많이 나지 않았다. 선재는 묻혀있던 전복살도 숟가락으로 들어내 입 안에 넣어보았다. 쫄깃하게 씹히는 느낌이 좋았다. 범진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큼지막한 만두에도 손이 갔다. 반으로 가르자 불그스름한 속이 드러났다. 뜨끈한 김치만두도 맛을 본 선재가 또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괜찮겠지.
선재는 박창현의 말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