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밥을 다 먹고, 준희에겐 애니메이션 영화를 틀어주었다. 아이는 뭘 보기 시작하면 화면에 빨려 들어갈 수준으로 집중하고 그걸 쳐다본다. 지금도 작은 머리통이 앞으로 쭉 나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멍하니 웃던 선재가 갑자기 홱, 팔을 잡아채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리 와보세요, 조용히 말한 범진이 선재의 팔을 잡은 채 다리를 여유 있게 벌렸다. 준희가 먹던 걸 정리하던 손에서 툭, 가벼운 그릇이 떨어져 나갔다. 이거… 하고 딴청을 부리자 범진은 눈썹을 어디까지고 올렸다. 말 안 듣냐? 하고 위협적인 말도 보탰다.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범진의 허벅지 위에 올라간 선재가 엉성한 자세로 범진을 내려다봤다.
범진은 짝, 소리가 나도록 선재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리곤 찰흙 반죽을 만지는 것처럼 양손으로 엉덩이를 주물럭댔다.
“이제 왔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선재는 또 짝-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를 맞았다. 아픈 건 아니지만 어딘가 부끄럽다. 당혹한 얼굴을 한 선재의 입이 금방 열렸다. 범진이 어깨 위에 억지로 올려놓았던 팔도 단숨에 내려갔다.
“하지 마.”
“왜 내 거 내가 만지는데.”
선재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범진의 얼굴 아무 곳에나 시선을 두었다.
아예 안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
“말 좀 잘 들으라.”
희한한 억양으로 말하는 범진에게 이제는 적응이 됐다. 범진이 살짝만 움직여도 선재의 다리는 대롱대롱 흔들렸다. 가만히. 위에서 범진을 내려다보던 선재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선재는 범진의 다리 위에 앉은 채, 점점 밝아지는 범진의 얼굴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새벽에 보았던 범진의 무표정한 얼굴. 그것만 자꾸 떠올랐다. 그래도 몸을 사리라고 하니, 어떻게든 사리면 괜찮긴 하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범진과 생활하다 보니 이런 게 다 익숙해졌다. 이리 오라 고개를 푹 숙였다 드는 범진을 향해, 선재가 얼굴을 앞으로 붙였다. 엉덩이가 양쪽으로 벌어졌다 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입이 맞닿자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더욱 우악스레 주물렀다. 범진 위에서 엉덩이를 쭉 빼고, 그와 키스하고 있었다. 3분, 5분. 그런 시간이 예사로 갔다.
* * *
“…뭘 보냐.”
“…밖에.”
“밖에 뭘 보냐고.”
곁이 비면 귀신같이 알아챈다. 창가를 서성이던 선재가 범진의 말소리에 금방 뒤를 돌았다. 갓 깬 듯 일그러진 얼굴을 한 범진이 선재를 향해서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냥 본 건데.”
“왜, 좋아 뵈냐.”
부쩍 여름과 가까워진 듯한 풍경에, 아이와 어디 놀러 가고 싶단 생각을 해봤던 건 사실이었다.
“응.”
“어디 가고 싶은 데 있냐.”
“…없어.”
“이게 앞뒤 안 맞는 소리 또….”
한 대 때릴 것처럼 성질을 부리던 범진이 말을 뚝 멈췄다. 선재는 범진을 눈을 쳐다보다 다시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리 오라고만 하지 않으면 바깥을 계속 쳐다보고 싶었다. 여름이 다가와 집 뒤에 있는 나무들이 푸르러진 게 신기했다. 초봄에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나뭇가지가 시들시들했는데.
곧 들린 범진의 목소리는 제게 향해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 6시요…. 알아서 하세요…. 예.”
누가 들어도 건성건성. 밖을 쳐다보던 선재의 귀도 쫑긋 열렸다.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하는 걸 보면 급한 일인 듯했다.
“형님.”
“으응.”
뒤를 돌아보자, 범진은 기다렸다는 듯 턱짓을 했다. 한쪽 눈이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오라고 턱을 내리는데, 짜증이 나 죽겠는 모양이다. 대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곁에 제가 없으면 짜증 내는 걸 알고는 있다. 커튼을 반쯤 친 선재가 침대 위로 올라가 범진의 옆에 누웠다.
“자꾸 옆에 없을 겁니까.”
“…저기 있었는데.”
창가를 쳐다본 선재의 눈이 이내 범진에게로 향했다.
“누가 저기까지 가랬냐고.”
“….”
갑자기 목소리를 굳힌 범진 때문에 선재는 무슨 말을 더하려다 말았다. 처음엔 입을 여는 것도 하기가 싫고 겁이 났는데, 요즘은 그래도 싫다, 좋다, 같은 말은 하고 있었다. 범진 곁에 눕자, 범진은 선재의 어깨를 세게 쥐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큰 손에 꽉 쥐어진 어깨가 아픈지 선재가 표정을 찡그렸다. 결국, 힘 때문에 하얗게 변하는 어깨를 빼내고, 선재는 제 손으로 그 어깨뼈를 쥐었다.
“아파…. 어깨….”
“아프면 뭐. 내가 안 해야 됩니까….”
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범진은 다시 어깨를 잡아 오지 않았다. 아프다고 하면 예전부터 한 걸음 물러나 줄 줄은 알았다. 의외로 남의 아픔에 아량은 베풀 줄 아는 걸까. 선재는 범진 주변에 있는, 특히 어린 남자들에게 엄살을 부리라고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최근에 집 앞 작은 정원에서 또 어떤 남자를 때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남자가 주소를 잘못 알아 주변을 빙빙 돌았는데, 그 때문에 혼까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범진에게 맞으면서도 어떤 엄살도 부리지 않았다. 이따금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이 선재에게 들려져 왔다. 선재는 혹시 남자가 죽기라도 할까 봐 준희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가도 금세 바깥으로 나와 보곤 했다.
아프다고 말하지. 아프다고 말하면 좀 봐줄 텐데.
다음에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런 말을 해줄 생각이 있었다.
“뭔 생각 하냐.”
범진이 선재의 이마에 이마를 부딪치며 물었다. 순간 정전기가 통해 선재의 눈두덩이 크게 떨렸다.
“아무, 것도 안 해.”
“생각하는 거 다 보이는데.”
또 쿵. 범진의 이마는 뜨거운 편이었다. 선재가 제 이마에 닿은 범진의 이마에 눈을 들었다. 열나는 건가.
“왜.”
“…이마 뜨거워서.”
“얼마나.”
범진이 이마를 또 쿵… 붙여오는데 이번엔 떨어지지 않는다. 닿은 이마에서 뜨거운 체온을 전달해왔다. 범진은 온몸이 용광로 같았다. 조용히 끓는 것도 아니고, 몸에 어느 부위가 닿건 툭툭, 하는 맥이 전달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 좀….”
범진은 그 틈에 선재의 잠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섬세하지 못한 손가락으로 선재의 유두 돌기를 스치는 척하며 비볐다. 선재는 닿고 있던 이마와 몸을 전부 뒤로 뺐다. 누가 봐도 붉어진 얼굴이어서, 범진도 그 얼굴을 쳐다보다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뭘 그만할까.”
“….”
범진은 그렇게 말하며 선재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겼다. 살짝 떨어졌던 몸이 다시 처음처럼 붙었다.
“제대로 해달라고 시위하냐.”
“….”
선재가 눈가에 힘을 주고 범진을 쳐다봤다. 아침에 하는 섹스만은 피하고 싶었다. 고개를 저었지만, 범진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잠옷 안으로 넣어왔다.
다시 들어온 손은 또 악착같이 유두만 건드렸다. 손가락으로 성의 없이 스쳐도, 선재는 유두의 크기를 잔뜩 늘리곤 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잠옷 안에서 움직이는 범진의 팔 때문에, 옷깃이 펄럭펄럭했다.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자극을 참은 선재가 눈 떠라, 하는 범진의 말엔 눈을 떴다. 고개를 들고 범진을 올려다보자, 태연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엔 음흉한 기운이 가득했다. 좋냐, 하고 젖꼭지를 괴롭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자극에만 눈을 떤 선재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 * *
“머멍이?”
“아니, 멍멍이 보러 가는 거 아니고….”
선재는 준희의 옷을 갈아입히며 고개를 저었다. 드물게 오전에 밖으로 나갔던 범진이 오후 4시가 되어 나타났다. 대뜸 한다는 말이 밥 먹으러 갈 거니까 옷을 챙겨 입으란 것이었다. 선재는 갑자기 웬 외식일까 싶어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범진과 아무 데서나 외식을 하는 게 여전히 꺼려졌기 때문이다. 좀 망설이면서 준희의 옷을 꺼내고 있는데, 확인하듯 전화를 하는 걸 들어보니 원래 아는 식당 같았다. 6시,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아침에 전화를 했던 그곳인가 싶었다.
“밖에서 밥, 맘마 먹어요.”
“머멍이?”
“아니….”
선재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준희가 무슨 멍멍이 얘기를 하는지 안다. 골든레트리버인데, 건설사에서 기르는지 사람이 입주하지 않은 옆집 마당에 개만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순한 개들인지 준희가 울타리 끝까지 가 머멍이, 머멍아, 하면 개들도 다 같이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준희를 쳐다보곤 했다.
“준희 강아지들 보고 싶으면 나가는 길에 잠깐 볼까.”
“네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선재는 준희에게 가벼운 반팔과 반바지를 입혔다. 근래는 범진이 집 밖으로 아예 나가지 말라고 해 외출을 극도로 꺼리는 중이었다. 자신은 괜찮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얼마나 답답하겠나. 옷을 입혀 주니 멍멍이부터 얘기하는 준희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선재는 옆에 두었던 유아용 크림을 준희의 얼굴에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그렇게 입고 가겠다고?”
“어….”
“…죽고 싶냐?”
“뭐?”
“옷 다시 갈아입어.”
“왜.”
“냄새가 이렇게 나는데 미쳤냐.”
1층 주방에 볼일이 있었던 선재의 움직임이 계단 한복판에서 멈췄다. 현관 앞에 서 있던 범진의 눈이 급속도로 사나워졌다. 제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훌쩍 다가와 냄새까지 맡자 그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선재는 범진의 눈길에 같이 제 행색을 살폈다. 범진은 저런 식으로, 오메가 특유의 체취를 불편하단 식으로 말할 때가 있었다. 집에선 아니지만, 밖으로 나가면 냄새가 더 난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옷을 꽁꽁 싸매 입으면 체취가 덜한 건 맞지만, 품이 큰 검정색 티셔츠와 무릎만 살짝 드러낸 면 반바지라고 냄새를 더 풍기게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슨 문젠가, 싶었지만 선재는 험악해진 범진의 얼굴에 그만 몸을 돌려 2층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니 입는 바지, 그거나 입으라는 범진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계단을 턱턱 밟아 오르는 선재의 표정이 불퉁하게 바뀌었다.
안방으로 들어간 선재는 옷장 맨 위 칸에 넣어두었던 트레이닝복부터 꺼냈다. 초봄에 자주 입은 바지여서 오늘처럼 텁텁한 날에 입으면 좀 덥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긴바지를 입으라고 난리를…. 범진의 말을 떠올린 선재가 혹시 싶어 팔에 코를 대보았다. 단내가 끼쳐오는 건 있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마저도 싫으면 섹스를 안 하고 약을 먹게 두면 될걸. 선재는 이 정도의 페로몬이 올라온 것도 다 범진 탓이라는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얼마 뒤, 거울엔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입고 있던 검은 티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였다. 갑자기 들어온 범진이 티셔츠도 이걸 입으라 손수 건네줬었다. 범진에게도 너르게 맞는 무지 면티라 제 몸에선 품이 어마어마하게 남았다. 기장도 길어, 입으니 꼭 바보처럼 보였다. 거울 앞에서 모습을 들여다보던 선재가 소매라도 조금 접었다. 그래도 색깔이 하얀색이어서 덜 답답하게는 보이지만.
“입었냐?”
“….”
“딱 좋네.”
굳이 확인하겠다고, 범진은 방문을 열어젖혀 안쪽을 들여다봤다. 거울로 범진과 눈을 마주친 선재가 몸을 옆쪽으로 조금 돌렸다. 만족한 듯 됐다, 좋다, 같은 말만 하던 범진이 선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선재에게 입을 맞췄다 떼며 불만 있냐, 물었다.
물어놓고도 선재가 무슨 반응을 할 것 같으면 다시 입을 붙여왔다.
“아, 읍.”
“있으면 말해봐라.”
말은커녕 입만 조금 벌어져도 범진의 입술이 붙었다. 원치 않게 진한 뽀뽀를 당할 때마다 선재의 얼굴 군데군데가 찌푸려졌다. 그만, 하는 짧은 말을 할 때도 입이 막혔다. 방문을 향해 어기적거리며 걷는 내내, 선재는 범진의 입술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는지 몰랐다.
* * *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엄청난 규모의 육식당이었다. 저녁 시간대와 가까워지긴 했지만, 초여름이라 해가 길었다. 대낮처럼 밝아 주변 시설물들이 한눈에 보였다. 선재는 창밖을 구경하면서도 준희가 옹알이처럼 말하는 소리에 일일이 대답을 해주었다.
“준희 지지야.”
주차장 바로 옆 인공연못에서 비단잉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잉어 떼를 가리킨 준희가 연못 앞으로 가 엉덩이를 대고 털썩 앉았다.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비단잉어를 쳐다보는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일어나서 보자.”
청반바지에 묻은 흰 흙을 털어내는 선재가 풀풀 날리는 모래 먼지에 기침을 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다른 인공연못 조성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범진은 선재와 준희로부터 한 5m쯤 떨어져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안방에서 흡연을 할 때는 있지만 준희와 있을 땐 담배를 안 피우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흘끔 본 선재가 준희와 함께 일어나 범진을 기다렸다.
“가치 집에 가장….”
“이거? 물고기?”
“가치 가요.”
“안 돼…. 물고기는 여기가 집이야.”
비단잉어를 집에 데리고 가자는 아이의 순수함엔 웃음이 나왔다. 선재는 비단잉어를 가리키며 물고기들 집은 여기라고 한 번 더 준희에게 말해주었다. 고개를 들자 범진이 가자고 고갯짓을 하는 게 보였다. 연못에 정신이 팔린 아이를 번쩍 안아 든 선재가 범진이 가는 쪽을 뒤따라갔다. 아이는 품에서도 계속 집에, 집에, 하고 잉어 이야기를 했다.
곧 도착한 바비큐장은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돔형으로 되어 예약석과 일반석이 따로 있는 듯했다. 범진이 성큼성큼 걸어서 간 구역이 예약석인가 보았다. 다른 구역엔 사람들이 많은데 범진이 앉은 곳에만 사람들이 없었다. 선재도 범진의 맞은편에 아이와 함께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와 범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신세가 많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범진의 도움을 받은 사람일까. 막연히 생각한 선재가 눈을 준희에게로 돌렸다. 아이는 아직도 꼬오, 꼬오, 하며 잉어 이야기를 했다. 선재가 꼬꼬가 아니라 물고기, 라고 고쳐주었다.
“그런데 이쪽은….”
두 사람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자, 선재는 고개를 돌려 둘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손으로 이쪽을 가리킨 사장을 본 선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는….”
“마누라지, 뭐겠습니까?”
“….”
“아하.”
박수까지 치며 그럴 줄 알았다고 하는 사장은 곧바로 직원을 불러 주문을 넣었다. 주문을 받았다는 확인 알림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사장은 범진과 주변 구역에 대해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선재는 범진이 밖에선 이렇게 말을 하겠구나, 싶어 골이 멍했다. 어딜 가나 형수니 부인이니 했던 소리를 들었던 것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범진 곁엔 범진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많았다.
“안창살 좋아하냐.”
“….”
“좋아하냐고.”
“고기 잘 몰라.”
선재는 준희의 작은 손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오면서 뭐가 신기한지 이것저것 만지기도 해 얼룩이 금방 묻어나왔다. 곧 움푹 파인 숯불 화로에 백탄이 세팅되었다. 선재는 조약돌이 가득 깔린 바닥에 발을 굴리며 그 소리를 들었다. 고기가 익는 냄새도 좋았고, 돌에서 나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
얼마 안 지나, 근처에 있던 직원이 다가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범진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직원의 얼굴을 험상궂게 쳐다보다 손사래를 쳤다. 얌마. 됐다. 하고 직원에게서 집게를 빼앗았다.
“….”
“좆 씹었냐.”
“…굳이 구워주겠다는데.”
“이거나 처먹어봐라.”
범진이 이걸 먹어보라고 하며 불판 구석에 고기를 몇 점씩 놓아주었다. 직원이 굽던 것과 달리 얼마 익히지도 않아 핏물이 줄줄 흘렀다.
계속 쳐다보던 눈빛을 못 이긴 선재가 고기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부드럽긴 한데 날고기 맛이 너무 많이 났다. 소금 맛으로 고기를 삼킨 선재는 물부터 찾았다. 준희를 위해 구워지고 있는 떡갈비가 맛은 더 있을 것 같았다. 범진은 소금만 약간 찍은 피맺힌 고기를 잘도 먹었다.
몰래 고기를 익혀 두 점이나 더 먹었을까. 바비큐장에 있던 여러 문 중 하나가 열렸다. 날렵한 체형의 남자들이 둘, 뒤이어 둘이 또 들어오고 있었다.
날렵한 체형의 남자들은 어딘가 수상하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 선재가 뒤쪽에 있던 문이 굳게 닫힌 걸 확인했다. 다시 앞을 보는데, 문을 열고 한두 명씩 더 들어오는 것 같았다.
눈이 이쪽을 향해있어, 선재도 눈치 보듯 그들의 얼굴을 자꾸 들여다보았다. 느릿느릿하게 걸어오는 탓에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 선재에게 시선을 던진 범진이 뭐 보냐, 하고 뒤를 돌았다 금세 일어났다.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들은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쾅, 하고 맨 뒤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던 남자가 테이블을 가격하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야, 씨.”
범진은 급한 듯 저쪽을 보다가도 선재의 눈에 눈을 맞췄다.
“니 일단 내 쳐다보지 말고 벽으로 가라. 저쪽에 가 있고….”
그리곤 모르는 체를 했다. 선재는 아이를 끌어안고 범진이 하란 대로 했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벽에 붙었고, 범진을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제일 먼저 다가온 사내 둘은 작고 날카로운 잭나이프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범진은 가까이에 있던 남자의 손목부터 꺾어 그걸 떨어트렸다. 쨍, 하고 조약돌 사이로 떨어진 잭나이프 날에서 번뜩, 빛이 솟았다. 뒤이어 달려드는 남자는 무릎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한번에 무릎뼈를 차고, 꺾듯이 밟은 범진이 그 뒤로도 같은 부위만을 집요하게 밟았다.
이렇게 있으면 되는 걸까. 정말 이렇게만 있으면. 무감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식사 시간이 이렇게 된 게 거짓말 같았다. 범진은 떨어져 있던 잭나이프를 들어 제 것처럼 사용했다. 좀 더 가까이서 뒹굴어 있는 남자의 아킬레스건에 날을 쑤셔 넣고 푹, 소리가 나게 찢었다. 선재는 근처에서 난리가 난 사람들의 얼굴만을 힐긋거렸다.
“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사내 둘은 널브러져 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뒤쪽에서 다가오던 남자들도 서서히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번엔 다 같이 오려는 듯했다. 선재는 어느새 코앞에서 어깨를 흔드는 범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안 들리냐?”
“….”
그제야 고개를 들어 범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핏방울이 몇 방울 튄 것 말고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선재는 품에서 고개를 돌리려는 준희의 머리를 힘주어 안았다. 뭐든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가라. 일단. 집에는 절대 가지 말고.”
“….”
“멀리, 시골에. 시골 같은 데. 알겠냐.”
선재는 그 길로 식당을 뛰쳐나왔다. 범진은 흥분한 듯 단어 몇 가지만 가지고 반복해서 말을 했다. 시골. 멀리. 시골. 난장판이 된 식당에서 여전히 사람들의 고함이 새 나오고 있었다. 쾅, 하고 울린 굉음에 잠시 뒤를 돌았던 선재가 그래도 계속해서 뛰었다.
커다란 굉음엔 아이도 이잉, 하고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작은 머리통을 꼭 껴안은 선재가 타이르듯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식당 앞엔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이 많았다. 제일 앞에 정차된 택시에 몸을 실은 선재가 그제야 준희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괜찮아.”
국도로 들어선 택시 안에서, 선재는 몇 번이나 뒤를 쳐다보았다. 범진이 따라오고 있는 것일까. 태백에서 도망을 쳤을 때와는 상황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언뜻 보았던 사내들만 다섯이었다. 아무리 범진이라고 한들, 다섯 명을 한꺼번에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들은 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부정적이고 무서운 생각을 하면서도 괜찮아, 말하며 울지 않았다. 준희와 같이 울 수는 없으니까. 아이의 두려움 속에서 또 하나의 두려움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고속도로를 타달란 선재의 말에, 기사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가끔 룸미러를 통해 선재를 쳐다보는 일은 있었지만,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사위도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휴게소에 잠시 들를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예, 하고 짧게 대답한 택시 기사는 역시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재는 휴게소 불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것저것 물어온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품에 안긴 준희가 배고픔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고 어지러워했다. 한 시간이 넘게 도로에만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차에서도 잠을 잘 자는 편인데, 배가 고파 그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들어선 휴게소에서도 미터기는 계속 켜져 있었다. 빨리 돌아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움직임을 서둘렀다. 차 밖에 준희를 내려주자 아이는 그제야 밝은 얼굴을 했다.
시간이 없으니 식당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선재는 매대에서 통감자 구이를 사고, 편의점에선 물과 쌀과자 한 봉을 샀다. 이제 더는 어디로 가기도 힘들 것이다. 돈은 정해져 있고… 요금은 이미 10만 원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사를 온 뒤로 돈 쓸 일이 별로 없어 범진의 카드를 챙기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갑에 20만 원 정도가 있으니 적당한 동네가 보이면 그쪽으로 빠질 생각이었다. 최대한 외곽으로. 범진이 말한 시골까지는 모르겠지만 구석진 길로 들어서다 보면 작은 마을 정도야 나올 것이다.
“맛있어?”
“네에.”
떡갈비 빨리 좀 먹일 걸…. 꼼꼼하게 익힌다고 그걸 먹이지 못한 게 미안했다. 선재는 그 난리가 났는데도 떡갈비 생각이 났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퍼석한 감자나 아이에게 먹이자니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님, 저… 저기, 모텔 앞에서 세워주시겠습니까….”
외곽으로 향하던 택시를 급하게 세웠다. 요금이 12만 원을 넘어가고 있었다. 산에 빙 둘러싸여 한 번만 더 빠지면 조용한 동네가 나올 것 같았다. 그치만 시간도 너무 늦고, 돈도 모자랐다. 이만 세워달라고 말한 선재가 13만 원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무인 모텔을 처음 와본 선재는 로비에 들어가서도 주인만 계속해서 기다렸다.
10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CCTV를 본 주인에게서 인터폰이 걸려왔다. 매뉴얼을 다 듣고 나서야 겨우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5만 원을 현금 결제하자 수중엔 4만 원 정도가 남았다. 3층. 303호. 선재는 열쇠를 들고 준희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아가 집?”
준희가 말하는 아가 집은 오피스텔을 뜻했다. 자신이 아가일 때 살았던 집. 오피스텔에서처럼 엘리베이터를 타니 그런 생각이 드는가 보았다. 아가 집. 시간이 좀 지났다고 예전의 제게 아가, 라고 칭하는 준희가 기특하면서도 귀여웠다.
“응…. 여기 아가 집이야.”
아니라도 그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재는 엘리베이터, 그리고 3층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준희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303호의 문을 연 선재가 아이부터 먼저 들여보냈다. 담배 냄새가 조금 나 환기부터 시키고 에어컨을 가동했다. 객실은 꽤 깨끗한 편이었다.
“졸려?”
준희는 들어오자마자 두 팔을 높은 침대 위로 뻗었다. 갈래… 위에 갈래… 하고 말했다. 택시에서 졸려도 잠을 자지 못한 걸 안다. 신발을 벗기고 손과 얼굴을 닦아준 선재가 준희를 침대 위에 올려주었다. 아이는 구멍이 푹푹 나는 구스 이불 위에 몸을 뉘더니 1분도 안 되어 잠이 들었다. 깜박, 깜박. 느리게 감겼다 뜨이는 두 눈 위로, 선재의 손바닥이 살포시 닿았다.
공간을 어둡게 만들고, 선재는 샤워부터 했다.
일단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범진이 말하는 걸 떠올려보면, 무조건 구석진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슨 마을, 이라고 되어 있는 안내판을 본 것도 같으니 아침이 되면 그리로 가볼 생각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선재는 마을 회관 같은 곳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돌봐줄 임시 보호자가 정해지지 않았던 때, 어촌 마을의 한 회관에서 친구들과 잠을 잤었다. 봉고를 타고 우르르 내려 거기가 어딘지, 주변엔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곳. 뭣도 모르는 어린 오메가 아이들은 그곳에서 며칠 밤을 보내고 각자의 위탁 시설로 보내졌다. 선재는 다행히 가정집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다 씻고 나온 선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든 준희의 곁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연락이 없는 범진에게 섣불리 전화를 걸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자정이 될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한 선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눈을 감았다.
벌써 아침이 밝았다고 생각하면, 꿈속에서 아침을 맞은 것이었다.
눈을 떴을 땐 깜깜한 모텔 방 안이었다.
모텔이었지. 맞다.
범진의 문신을 쳐다보며 잠에서 깰 거라고 생각했는데 낯선 천장만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더듬어 휴대폰을 켜본 선재가 그대로인 화면에 눈만 깜박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다, 괜찮아지면 괜찮아졌다, 그런 말이라도 전달이 돼야 할 텐데. 선재는 범진이 칼에 찔렸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내내, 범진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는데.
욕실 불을 켜둬, 방엔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선재는 늦은 새벽까지도 휴대폰을 바라보다 선잠에만 연속해서 빠졌다.
짧은 꿈속에선 계속해서 범진의 연락이 왔다.
[이게 어디서 쳐, 울고….]
그런 말을 들었던가. 눈을 떴는데도 그런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곧 그리로 가겠다는 범진은 꿈속에서만 있었다.
범진이 올까.
생각하고 있으면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 봐야 했다.
모텔방에서 할 수 있는 건 휴대폰과 복도를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범진에게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를 뻔히 보고, 또 저와 준희도 위험할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하는 생이별은 달갑지 않았다.
선재는 막막한 미래 때문에 더는 짧은 잠에도 빠져들지 못했다.
새벽 4시가 넘어 혼자 눈을 끔벅였다.
닫힌 문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휴대폰 화면도 똑같았다.
아이 생각이 문득 들면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선재는 따갑고 얼얼한 눈을 한 채로 자세를 틀어 아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곱게 잠든 아이의 얼굴이 너무 예뻐, 눈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눈을 감고 조용히 울었다. 가도 가도 지옥인 날들을 아이에게 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
머무르던 손에 잠을 깬 모양인지, 준희가 눈을 뜨고 선재를 바라보았다.
“배고파…?”
선재의 말을 제법 따라 해, 배고파? 같은 말은 이제 거의 똑같이 했다.
“아니, 준희야….”
눈을 뜬 선재가 눈물을 감추려,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주니 간자 이써, 이써요. 주니에 간자….”
“응, 아냐. 배 안 고파. 다시 자야지….”
제가 배고파 우는 줄 아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준희는 아까 먹었던 감자를 기억해내고 그걸 제게 주려고 했다. 상체를 일으키려 두 팔을 앞으로 뻗기까지 하자 선재가 그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곤 토닥이듯 아이 가슴팍을 살살 두드려주었다. 원래도 많이 피곤했던 아이는 감자가… 하다가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8시에 기상할 생각이었으니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이게 꿈이기를.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 * *
밝은 아침이 와 눈을 떴을 땐, 너무 많이 꾼 꿈 때문에 현실감이 뚜렷하게 들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대부분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선재는 모텔 창문을 열어 주변을 슥 둘러 보았다. 집 창가에서 아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나무나 잔디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도 집이 있을 땐 잠잘 곳을 걱정하진 않았는데. 선재는 밖을 내다보며 마을 회관에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랐다. 어린아이도 있으니 며칠 지내게 해주시지 않을까. 신분 노출이 최대한 안 되는 곳. 그런 곳을 찾는 것도 중요했으니 작은 마을로 들어갈 생각뿐이었다. 범진도 저를 쉽게 찾았는데, 범진의 적이라고 저와 준희를 찾지 못할까.
괜한 일이 일어날까 계속 두려웠다. 범진과의 관계를 추궁당하거나, 오해를 한 사람들이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계속해서 증폭됐다. 선재는 그 난리통에도 시골이라든지, 멀리, 그런 말을 한 범진 때문에 더욱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손엔 휴대폰이 계속 들려 있었다. 밤부터 지금까지, 범진에게 전화를 해볼까도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님…까지 찾아놓고도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범진이 전화를 걸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선재는 전화를 했다가 범진을 공격했던 무리가 전화를 받을까 차마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연락이 가능한 상황이면 범진이 벌써 연락을 했을 것이다.
“일어났어?”
“…네에.”
아이는 뒤에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창을 연 채로 다가간 선재가 아이의 얼굴부터 매만졌다. 붉어져 있던 탓에 손부터 대보았는데, 역시 지나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준희 더워?”
더워서 빨개진 건가.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옆에 있던 물 한 병을 까서 물려주자, 아이는 그제야 손을 들고 창문가를 가리켰다. 하늘밖에 안 보일 텐데. 하늘의 색이 아이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천천히….”
아무리 천천히 마신다 한들 작은 페트 째로 물을 마시는 경우는 잘 없다. 포트 옆에 컵이 놓여 있긴 했지만,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 모금씩 마실 수 있도록 물병을 기울여 주는데도 꽤 많은 양이 흘렀다. 선재가 아예 준희의 턱에 손을 대고 물병을 기울였다.
“더웠구나.”
어느 정도 물을 마신 준희가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뺨에 연지곤지를 한 것 같았다. 찬 기운이 밴 손으로, 선재는 준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갑자기 시원한 손이 닿자 으응… 하고 소리를 내긴 했지만 이내 편안한 듯 가만히 있었다. 확실히 더위를 느꼈던 것 같다.
“에어컨 괜히 껐네…. 끈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러고 보면 창문 밖에서도 선선한 기운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오전인데도 더위가 한창이었다. 선재는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다시 가동시켰다. 그리곤 뚜껑을 닫은 물병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준희는 시원한 물병이 마음에 드는지 인형을 안 듯 꼭 안았다.
그렇게 일어난 준희와 먼저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아이는 요즘 기저귀를 차고 있어도 슬슬 기분이 나쁘다는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소변을 뉘어준 선재가 잘했다고 준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불에 쉬야도 안 하고 잘했네. 발달이 느린 편이라 기저귀도 늦게 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으론 속도가 비슷한 편이었다. 칭찬을 받고 빵긋 웃은 준희가 입술을 내밀었다. 선재의 입술이 아이의 작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아무한테나 뽀뽀해달라고 그러면 안 돼.”
뽀뽀를 해줄 때마다 같은 말을 해준다. 선재는 준희가 끄덕거리는 것까지 봐야 안심을 했다. 이상한 사람이 하도 많은 세상이니 별걱정이 다 되었다. 예전에는 그런 걱정도 막연히 했지만, 범진을 만나고부턴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세상엔 정말 범진 같은 나쁘고 이상한 사람이 존재했던 것이다.
선재는 준희를 다 씻긴 다음, 휴대폰 지도부터 확인했다. 모텔 뒤쪽으로 연결이 된 길로 접하면 작은 단위의 부락이 나온다는 정보를 얻었다. 마을이 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멀리. 시골. 그런 말을 하며 핏줄을 세우던 범진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범진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선재는 태백에서 있었던 일까지 기억나는 듯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이불 위에서도 잘만 노는 어린 준희를 몇 분이나 말없이 지켜보았다. 손으로 이불을 꾹 눌렀다 떼면 풍선처럼 부푸는 모양이 된다. 푸욱, 작은 손에 꺼진 이불이 다시 원래 형태를 되찾길 반복했다. 그게 재밌는지 자꾸 웃고 있었다. 저런 것으로 행복해하는 아이를. 선재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범진이… 모든 일을 범진이…
택시에 타자마자 일단 아무 곳이나, 아, 고속도로 타주세요, 하고 넋 빠진 사람처럼 말을 했었다. 두 시간이 좀 안 되는 거리를 달리다 눈에 보이는 아무 지역으로 들어왔고, 아직 시골 동네까지는 가지 못했다. 가게 될 곳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도 저와 준희를 찾지 못할 만한 곳이어야 했다. 선재는 범진의 마지막 얼굴과 외침 같은 말만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모텔 건물에서 나오자, 길가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백반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 한 분이 시장 안쪽 길에 있던 미용실과 같이 운영을 하는 식당이었다. 작은 식당이라 자리도 네 개 정도밖에 안 되었다. 선재는 그곳에서 준희를 다리 사이에 앉힌 채로 밥을 먹였다. 6,000원짜리 백반치고는 맛이 있었다. 준희도 오물오물, 특히나 연두부를 잘 먹었다.
“맛있어? 이거 또 줄까?”
끄덕끄덕. 네에, 하고 밥을 조금씩 떠 입 안에 넣는 준희의 표정이 밝았다. 모텔방에서 있던 홍조도 현저히 사그라들었다. 아마 여행을 온 것 같을까. 선재는 준희가 제발 그런 기분이길 바랐다. 실질적으로 달아나는 신세는 아니라도, 그 비슷한 건 맞았다. 불안만 남은 삶. 선재는 준희가 그걸 느끼지 못하게 의식해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정류장에서 20분 정도를 대기했다. 식당에서 양해를 구하고 손수건에 물을 가득 적셔왔다. 햇빛이 오전인데도 거세져, 차가운 수건을 아이 얼굴에 계속 대주어야 했다. 그사이 타게 된 낡은 버스는 길 위에서 끝없이 덜컹댔다. 버스 안은 텅텅 비었고, 한 10분쯤 가서야 할머니 한 분이 추가로 탑승을 했다.
선재는 의자 간 거리가 멀어 아이만 의자에 앉혀두었다. 이따금 커다란 거울로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길 주변으로 펼쳐진 논과 밭이 푸르렀다. 옆으론 집이 띄엄띄엄 자리해 있었다. 아무 마을이나 보이면 내리자고 생각했는데, 여태 보았던 마을은 선재가 그렸던 그림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도에서 보았던 마을은 언제 나오는 걸까. 앞창을 계속 쳐다보기를 얼마간. 드디어 지도에서 보았던 마을의 이름이 스치는 것 같았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려고 벨을 누르는데, 벨에선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급하게 기사를 쳐다본 선재가 크게 외쳤다.
“여기, 여기서 내릴게요.”
버스는 커다란 느티나무 앞 정거장에서 섰다.
근처에 벤치와 평상이 있었다. 그럴듯한 막으로 덮인 평상은 여름에 빛을 피하기 좋은 장소인 것 같았다. 저기 좀 앉을까? 하고 묻자, 아이는 느티나무와 선재를 차례로 바라보며 네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 안도 더웠지만, 밖은 상상을 초월했다. 몇십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금방 한증막에 들어온 듯한 더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선재는 우선 아이부터 평상에 앉히고 상태를 살폈다.
준희 덥지, 물어도 아이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떠 선재를 끔벅끔벅, 쳐다보기만 했다. 물을 마실 거냐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발견하고, 선재가 손을 뻗었다.
땀을 닦아주고 뺨을 꾹꾹 눌러주는데, 아이는 이쪽을 가만 쳐다보기만 했다. 응… 하는 소리가 나자 선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빠 얼굴 빨개서?”
“마아….”
“준희야, 여기서는 이제부터 아빠라고 해야 돼.”
“….”
“아빠, 해봐.”
“…빠아빠.”
“응, 그렇게….”
인구 밀도가 낮은 도시일수록 오메가나 알파의 존재를 낯설게 생각했다. 서울에서도 불이익이 따를까 준희에게 아빠, 아빠, 하고 따로 교육을 했으니 여기선 말할 것도 없다. 집에서야 뭐라고 불리든 상관이 없지만.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에도 힘이 있었다. 선재는 위를 한 번 보았다가 조용히 다리만 흔들며 노는 준희의 등을 토닥였다. 좀만 더 걷자, 아기야.
“아빠가 안아줄까.”
준희가 선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날이 덥긴 해도 걷고는 싶을까. 워낙 걷는 걸 좋아하는 아이다.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은 선재였지만 준희의 반응은 같았다. 으으응.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선재가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래도 10분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이 목적지였다. 대부분이 낮은 단층 가옥으로 이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선재는 차 한 대 없는 좁은 차도에서 손을 들고 길을 건넜다. 준희가 선재의 손을 보고 덩달아 손을 들었다.
“옳지. 붕붕이 있으면 위험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
“녜에.”
길가에 핀 들꽃은 봄이 제철인가 보았다. 시들시들하고 검은 것이 곧 꽃잎을 떨굴 것 같았다. 선재와 준희는 한참이나 그 꽃길을 걸었다. 얼마 뒤, 준희의 작은 손이 그 꽃들 일부를 가리켰다.
“꽃… 무울… 물….”
“응. 꽃이 시들면 물 줘야 하지.”
선재는 회관으로 짐작되는 건물로 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점점 더워졌기 때문이었다. 걷는 속도를 맞춰주며 대답도 해주었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만 더욱 간절하게 들었다. 꽃 이름을 알려주고, 시든 꽃에게 물을 줘야 한다고 계속 너스레를 떨 여유가 없었다. 좀 있다 다시 구경하자, 하고 마무리하듯 대답한 선재가 아이의 손을 꽉 쥐었다.
“마아….”
“준희 아빠, 해야지.”
“무울….”
오늘은 유독 엄마라는 호칭을 자주 썼다. 아이는 그러면서 검게 시든 꽃을 계속 걱정했다. 선재는 회관 거의 앞에 다다라서도 꽃 이야기를 하는 준희에게 결국 또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딱딱하게 굳은 둑길을 다 건넌 다음이었다.
“준희야, 지금은….”
그때였다. 선재의 손 안에 있던 준희의 손에서 힘이 턱 빠져나갔다. 작은 공을 쥐고 있었는데, 그 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것만 같았다. 놀란 선재가 옆으로 곧장 몸을 돌렸다. 햇빛을 받아 뜨거워진 바닥 위에, 준희의 작은 몸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덩달아 주저앉은 선재의 몸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아이를 안아 올리는데도 준희의 팔이 뒤로 축 처졌다.
“주, 준희… 준희야…!”
회관을 나서던 60대 남자 한 명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연한 선재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바짝 마른 냇가 근처에서였다. 어디서 온 거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젊은 사람. 복합적으로 이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의아한 마음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준희야, 하는 소리를 또 듣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요….”
“아, 아이가 갑자기 쓰러져, 쓰러졌습니다. 어떻, 어떻게….”
남자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낯선 아이를 쳐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한쪽으로 꺾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봐서는… 아, 이리 따라와 보세요.”
“네… 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선재의 흰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앞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선재는 그럴수록 품 안의 작은 아이를 더 끌어당겨 안았다.
시든 꽃에 대해서 말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시든 꽃에 물을 줘야 한다고, 그렇지 않느냐고, 제게 그런 걸 자꾸 물어보는 줄 알았다. 선재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준희의 마음과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 답답함을 떠올리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쓰러진 아이에게 죄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남자는 파란 대문과 붉은 대문 사이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기, 하고 가리킨 곳엔 그나마 신식으로 보이는 주택 하나가 솟아 있었다. 저 집에 병원인가… 어디서 일을 한 아줌마가 있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는 바짝 따라붙은 선재의 급한 마음을 읽고 발 굴리는 속도를 높였다.
주택 대문은 허술했다. 남자가 그 앞에서 주먹으로 문을 몇 번 두드렸다. 끽, 소리가 나는 대문이었다. 선재가 고개를 들고 문 뒤에서 나타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낮부터 뭐고?”
“여기, 애가….”
남자가 준희를 가리켰다.
선재는 대문 밖으로 나온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안고 있던 아이를 여자에게 보였다.
“…아를 어쨌드노. 걸맀나.”
여자는 남자와는 억양이 달랐다. 걷게 했냐고,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선재가 겨우 뜻을 파악하고 대답을 했다. 네, 좀 걸었습니다….
“…따라와바라.”
선재는 멀뚱하게 서 있던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남자와 여자는 별로 친한 것 같지 않았다. 죄송하다고, 감사하다는 말까지 한 선재가 여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2층짜리 주택이었다. 2층이래 봤자 옥상에 옥탑방이 하나 딸린 형태였다. 1층 마루를 두어 번 두드린 여자가 선재를 쳐다봤다.
“이기다 놔야지, 아를.”
“아, 예… 예.”
여자는 마루 구석에 있던 침통에서 손가락만 한 침 하나를 꺼냈다. 뾰족한 부위로 준희의 손끝을 망설임 없이 찌르기 시작했다.
“…이게….”
뭘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준희가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를 만류하려던 선재가 손을 거두었다.
“이 날씨에 와 아를 걸맀노?”
여자는 아예 말까지 하며 준희의 손끝을 찔렀다. 작은 손가락 끝에서 피가 퐁퐁 솟았다.
“…사정이 있어서…요.”
선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휴지를 뜯어 아이의 손가락 끝을 슥슥 닦아냈다. 흐물흐물한 휴지에 장밋빛 피가 계속 스몄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젊은 놈이 여까지나 왔을꼬?”
“….”
눈을 힘껏 들고 말한 여자의 이마에 주름이 여러 줄 갔다. 입만 뻐끔거리는 선재를 쳐다보다 구겨진 휴짓조각에 손을 댔다. 그리곤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턱짓하며 준희를 가리켰다.
“이 아, 니 배로 낳았제?”
“….”
“우리 아들이 그짝이라서 안다.”
“아….”
당황을 해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뒤이어 들린 말에 선재의 표정이 풀렸다. 시골 마을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들이 그쪽이라니. 오메가를 말하는 거겠다 싶어 순식간에 마음이 놓였다.
“…뭔 사정이 있어서 이까지나 왔노.”
“….”
그래도 여자의 그런 질문엔 자세히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때 문이 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선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드러난 이는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다. 여자가 말한 그 아들인가 싶었다. 동지애를 느낀 것도 잠시, 익숙한 소리에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
“이, 이으응….”
“준희야….”
울먹이며 눈을 뜬 아기의 소리에 더는 그쪽을 쳐다볼 수 없었다. 선재는 누워있던 준희를 한 품에 안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절대 못 잊을 기억을 이렇게 새겼다. 다시는, 절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을…. 품에 안긴 따뜻한 아이의 체온이 이렇게 간절할 때가 없었다. 선재는 중심을 못 잡을 정도로 아이를 깊이 끌어안았다. 무른 뒤통수에 닿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 * *
“준희 계속 보고 싶어?”
담벽 아래엔 개구멍이 하나 있었다. 원래 있던 터에서 집만 올린 것이라 대문을 포함한 담벽은 많이 낡아 있었다. 준희는 담 밑에 난 구멍을 신기해했다. 쉽게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이거어.”
“응, 개구리 또 보네.”
“아야.”
“아야한 것 같아?”
보고 있던 건 무당개구리였다. 아이는 주홍색을 띠는 배를 보고 제 배를 아야, 하고 쓰다듬었다. 등은 푸르고 배는 빨개 병에 걸렸다 착각한 모양이었다. 선재가 아픈 건 아닌데, 하고 준희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아 개구리를 쳐다보았다.
개구리 몇 마리가 개구멍 안쪽에 더 있었다. 선재는 양서류라면 질색인 편이었다. 그래도 준희가 좋아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하는 척을 해주었다.
“가자, 준희야. 다른 거 보자.”
“으으응.”
좀 더 보겠다고 말을 끄는 아이 때문에 선재는 그 옆에 앉아 다른 곳을 쳐다봤다.
손은 습관적으로 아이의 얼굴로 향했다. 지금은 미지근하다. 이 동네로 오면서, 준희가 더위에 취약한 걸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전까진 여름에 무리를 시킨 일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알기 싫은 걸 알게 된 셈이었다. 뺨이나 이마를 자주 만져주긴 하지만 이렇게 체온 체크를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만지지는 않았다. 개구리를 쳐다보는 준희의 눈이 햇빛에 반짝, 빛이 났다.
“이것만 볼 거야?”
“압빠 가아…?”
“응, 아빠 가려고.”
“…주니도 가께요.”
같이 가준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고 담벽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집을 크게 두르고 있는 벽이라, 아이와 구경할 게 많았다.
“나비….”
“나비 좋아?”
“네에.”
준희가 가리킨 나비를, 둘은 한동안 멈춰서 쳐다보았다. 담벽 제일 위에 앉은 나비였다. 나비는 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긴 해도 훨훨 날아가지는 않았다. 여름 한복판에 작고 예쁜 조각이 하나 떨어진 것 같았다.
일주일 전, 선재는 준희와 이 마을, 이 집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준희가 마을 입구에서 실신까지 해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눈앞이 아득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은인 같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축 늘어진 준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시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갈 데 있나?’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회관에….’
‘니도 참, 얼굴은 멀쩡하게 생기가 생각이 그렇게밖에 안 들드나.’
‘….’
그날 선재는 저녁밥을 얻어먹다가 주인집 아주머니께 끝도 없이 타박을 당했다. 묘하게 범진의 말투와 비슷했다. 범진이 여기저기 뒤섞인 말을 구사하니 꼭 어떤 말투가 닮게 느껴졌던 탓이다. 염치없지만 준희가 있어 밥까지 얻어먹고 있는 신세였다. 그게 아니라면 부끄러움 때문에라도 금방 집을 떠났을지 모른다. 옆자리에서 흰죽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자니 마음이 미어져 왔다.
‘성샌님 하지 마…. 나빠…! 나쁜 성샌님!’
얼마나 지난 뒤였을까. 갑자기 입을 연 준희에게 시선이 쏠렸다. 아주머니와 선재, 아주머니의 아들까지 모두 준희를 바라봤다. 준희가 아는 호칭은 아빠, 엄마, 그리고 선생님이 전부였다. 제 아빠를 혼내는 아주머니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선생님’뿐이었다. 억양도 센 데다 부정적인 말만 계속하니 준희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엉엉 울며 나쁘다고 말하는 준희를 끌어안은 건 선재였다. 당황스럽고 죄송해, 어쩔 줄을 몰랐다.
‘주, 준희. 그러면 안 돼. 그렇게 하면 안 돼.’
준희의 가슴팍에 모아진 양손이 선재의 눈에 들어왔다. 피에 물든 작은 손톱들이 가지런했다. 그 손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엉덩이 때리는 시늉을 몇 번이나 했다. 쓰읍. 그럼 안 돼. 아프지 않게 시늉만 했지만, 준희는 뭐가 서러운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선생님이 나쁘다고 계속 울었다.
‘맹랑한 기… 어디서 어른이 말하는데 끼어드노.’
준희는 전혀 맹랑한 아이가 아니다. 어린이집에서도 장난감을 빼앗기면 한마디도 못 하다가 다 빼앗기고 나서야 조용히 눈물을 보이는 아이였다. 겁도 많고 큰 소리로 투정할 줄도 모른다. 그런 아이가 왜 이러는지…. 선재는 맹랑하다는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아이를 더 혼내야 하나 싶었다.
범진과 있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 선재가 느끼기엔 범진보다는 아주머니의 태도가 덜 위협적이었다. 그런데도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엉엉 우는 준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혼내기에는 준희의 컨디션 문제도 있어 그냥 가만히 안고 있는 것밖엔 못 했다. 밥을 먹고 곧바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가 맹랑해서 위에 방을 쓸라 하겠나?’
‘…예?’
‘위에 방을 내주고 싶어도 아가 맹랑해서 그걸 맘에 들어 하겠냔 말이다.’
선재는 우는 아이를 안고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창고로 쓰고 있다는 옥탑이었다. 다행히 안 쓰는 생활용품만 들여놓은 수준이라 내부는 깨끗한 편이었다. 작은 화장실도 하나 딸려 있었다. 원래 셋방을 줄 용도로 냈다는 옥탑방인데, 동네 사정을 잘 모르고 그걸 올린 것이라 무용지물이 되었다 했다. 선재는 너무 기뻐 절까지 하려는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준희 왜 그랬어? 어른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끅….’
‘잘못했어?’
‘…네에….’
잠들기 직전까지도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꽤 애를 먹었다. 선재는 준희를 끌어안고, 하루종일 받았을 스트레스가 심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더운 날, 하염없이 걷고, 기절까지 한 아이에게 계속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작은 몸을 달래고 안아줄 수밖에. 첫날. 옥탑 창으로 들어오는 달은 유독 크고 하얬다. 선재가 그 달빛에 눈두덩이 부은 아이 얼굴을 짠한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 * *
“선재 씨, 뭐 하세요?”
“…어, 집에 있으셨네요?”
집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주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재는 간혹, 주영과 작은 마당에서 만나게 될 때마다 무안한 기분을 느꼈다. 괜히 집 여기저기를 활보한다는 인상을 줄까 민망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아들인 주영은, 언뜻 봐선 오메가 같지 않다. 선도 굵직한 편이고 키도 커 선재가 얼굴을 들어야 눈높이가 맞았다. 그래도 아무런 체취가 느껴지지 않고, 성격도 유순해 마음이 편안했다. 상대가 오메가일 때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었다.
“편하게 구경하세요. 저 보면 매일 옥탑으로 올라가시던데….”
“아뇨, 아닙니다….”
“저도 답답한 거 싫어서…. 그 마음 잘 알아요.”
아주머니에게 대충 듣기를, 주영은 안 좋은 일을 당해 요양차 부모님 댁에 머무르는 것이라 했다. 사람, 특히 알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한 걸 보면 아주 안 좋은 일이겠지. 선재는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주영은 한여름에도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제가 입은 옷과는 비교도 안 되게 더워 보였다.
“…주영 씨도 산책, 하세요.”
“전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주영의 씁쓸한 표정에 선재도 고개를 숙였다. 답답한 게 싫으면서도 밖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이 크게 느껴졌다. 아주머니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저게, 나쁜 일을 당해서.
“그럼 같이 담벼락 근처라도 돌아요.”
“같이 걸어주시는 거예요?”
“네, 같이 걸어요.”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은 채, 주영이 있는 1층 마루를 쳐다보았다. 이쪽으로 오라 손짓을 했다.
“…그럼….”
다가온 주영에게선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했던 선재는 오래된 오메가 친구들이 없었다. 특수 대학에 진학해 사귀게 된 소수의 친구들과는 백창우 때문에 연락이 다 끊겼고. 지금 연락을 하면 다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지 않을까. 선재는 씁쓸하게 웃으며, 옆으로 다가온 주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기 아버지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어요. 이렇게 예쁜 아기가.”
“….”
“…제가 실례되는 말을 했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선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고가 있어서, 먼저….”
“아, 죄송해요.”
“아닙니다. 모르셨으니까. 그리고 시간도 꽤 지난 일이라서요.”
선재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시간이 꽤 지나서 어떻다는 것일까. 정말 꽤 지난 것이 맞나. 생각을 해보면 죽은 남자를 절절히 그리워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1년 전 초봄, 선재는 준희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생각으로 강원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이만은 지킬 수 있길 바랐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럭저럭 소망이 이뤄진 건가. 범진은 준희에게만큼은 해를 가하지 않았다.
“…다음에 제 이야기도 해드릴게요.”
“아뇨,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제 이야길 들었다고 해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선재는 고개를 저으며 주영을 쳐다보았다. 하얀 얼굴이 조각처럼 빛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텅 빈 눈. 저를 쳐다볼 때마다 아무것도 없는 그 눈과 마주 보게 되었다. 텅 비어 슬픈 눈을. 선재는 그런 성격도 아니지만,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은 이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랑… 괜찮으면 친구하죠. 아주머니께 나이는 들었어요. 제가 한 살 형이라고.”
“와, 그러면 영광이죠. 전 제가 형인 줄 알았어요.”
아무리 담벽이 집 근처를 크게 두르고 있다 해도, 산책로 같은 느낌은 나지 않는다. 선재는 어느덧 담 한 바퀴를 다 돌아, 준희가 하는 장난 같은 행동에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삐야기. 삐야기.”
“…삐약이 소리 같아? 저거 참샌데.”
짹짹, 하고 참새 우는 소리에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아이의 허리를 안으며 새를 가리킨 주영의 손길이 다정했다. 범진이 아무렇게나 홱 안아 올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손길이었다. 선재는 마음을 놓고 주영과 준희를 내려다보았다.
“….”
“왜?”
“시어… 빠빠… 시러요….”
며칠이 지났지만, 준희는 아직 이 집 사람들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낯선 사람이 예뻐해 주면 무조건 싫다고 말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나름대로 듣고 행동하는 것인지. 선재가 제 다리를 붙잡고 뒤로 숨은 준희의 어깨에 손을 댔다.
“괜찮아, 준희야. 낯선 사람 아니야.”
“삼촌이 서운하네.”
“으으응… 시려….”
그래도 준희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어요. 그런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결국 선재가 준희를 안아 올렸다.
“아직 낯을 가려서 그런가 보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준희? 준희라고 했죠.”
“네.”
“준희는 아빠랑 똑 닮아서 좋겠네.”
“….”
주영이 제 얼굴 앞으로 다가오자 고개까지 휙 돌려버린다. 선재가 그런 아이를 안고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주머니의 아들인 걸 아는 것일까. 실제로 준희는 첫날 이후로 계속 아주머니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만 들어도 잘 가고 있던 방향을 틀곤 했다. 대충 짐작을 한 선재가 준희의 튀어나온 입과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괜찮다니까. 괜찮아요.
문득, 범진이 뽀뽀를 하겠다고 달려들던 때가 떠올랐다. 선재는 그때 준희의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무작정 피하려고 했다. 야, 도망가냐? 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입을 맞추던 남자. 그때 아이는 제 품에서 즐거운 듯 웃고 있기만 했다. 아직 어리니 아무것도 모른다. 선재는 무엇이 나쁘고, 나쁘지 않은지를 모르는 준희가 새삼 걱정이 되었다.
제일 나쁜.
나쁜 남자. 최범진.
아직도 그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 * *
“준희 그쪽으로 계속 가면 아야해. 위험해.”
날은 어느덧 한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도 열흘. 선재는 옥상 난간 쪽으로 걸어간 준희의 어깨를 뒤쪽으로 끌었다. 낮은 난간 때문에 아이가 다칠까 걱정이 되었다.
“나무 보러 가고 싶어?”
준희가 고개를 돌려 선재를 쳐다봤다. 그리곤 도리도리. 바깥으로 나가는 건 좋지만, 1층으로 가기는 싫다는 의사였다. 주영과 제대로 인사한 뒤로, 준희는 1층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1층으로 내려갈래? 물으면 으으응… 하고 울상이 되었다.
“삼촌이랑 아주머니 싫어서 그래?”
“….”
첫날의 여파 때문일까. 선재는 준희가 아주머니를 싫어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했다. 유난히 억양이 센 아주머니는 이후로도 준희만 봤다하면 저 맹랑한 기,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첫날과 달리 장난기가 점점 섞여 들어갔다. 그런 미세한 투까지 아이가 파악할 수는 없겠지. 선재가 부드럽고 연한 준희의 머리칼 위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햇빛 안 뜨거워?”
“네에….”
웬만해선 네, 라고 대답하는 아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아이. 선재는 이 집에서 준희의 낯선 모습을 많이 보았다. 싫다고 말하며 제 다리 뒤로 숨는다든가, 좁혀지지도 않는 미간에 힘을 주고 주영을 바라보는 모습 따위들. 경계심이 너무 없어 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한 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형.”
“…어?”
“옷 갈아입으셨네요.”
“아, 어. 고마워.”
주영의 눈이 선재의 바지에 가 닿았다. 어제, 선재는 주영에게서 물건을 하나 받았다. 이거요. 옷 없으시죠. 주영이 건넨 건 짧고 얇은 반바지였다. 시간 단위로 더워지는 여름날이라, 그 바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선재는 고맙다고 말하며 바지를 받아들었다. 날이 더워지고 있으니 옥탑에선 선풍기가 아니면 생활하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속옷만 입고 있기엔 아주머니나 주영의 2층 출입이 걱정되었다. 제 집도 아닌 곳에서 남세스러운 꼴을 보일 순 없었다. 이번 여름만 어떻게 넘겨보자. 선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티셔츠도 범진의 것. 크고 길어 에어컨이 켜진 1층 공간에서도 땀이 맺히곤 했다. 어떻게, 그걸 눈치챈 주영이 반바지를 선물해준 것이었다. 직접 사 오기라도 한 건지 포장지에 쇼핑백까지 있었다.
“덕분에 잘 입고 있어.”
“티도 하나 드릴까요. 짧은 거.”
“아니, 이것도 반팔이긴 하니까.”
“네.”
주영의 눈이 계속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가… 선재도 덩달아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짧긴 해서, 1층에서 식사를 할 땐 긴 바지를 입을 생각이긴 했다. 악의가 있어 쳐다보는 건 아닐 것이다. 선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곧 준희의 옆쪽에 서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이리 왔어.”
“마아, 가….”
“가? 어딜 갈까?”
“빠아….”
“….”
선재의 눈이 주영과 준희를 순서대로 훑었다. 준희가 말하는 빠아, 아빠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선재는 알고 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자주 아빠를 찾게 되었다. 저를 향해 아빠, 하고 말할 때도 있지만 마치 다른 곳에 있는 아빠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빠 기억나? 하고 선재가 물었던 건 며칠 전의 일이다. 준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뽀뽀하는 시늉을 했다. 선재를 향해 쪽. 고개를 갸웃거리는 선재의 입에 또 쪽. 범진이 하던 행동이었다. 창우는 준희가 너무 어릴 때 죽어, 아이가 기억하기엔 무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설마. 놀란 선재가 몇 번이고 그거 아니야,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따로 있어. 준희 아버지는 그 사람이 아니야.
“빠…아….”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가만히 앉아 화분을 쳐다보는 줄 알았더니 주영의 눈치를 보며 울고 있었다. 입으론 아빠, 하고.
왜 이렇게 겁을 먹지…. 울먹이는 준희를 안아 든 선재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아이가 우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울지 마, 알겠어… 작은 등을 토닥여주자 아예 울음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더워서 짜증이 나는 걸까. 선재는 준희를 안은 채로 옆을 보았다. 주영을 뻘쭘하게 만들긴 싫었다.
“….”
주영은 여전히 제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울지, 하고 괜한 소리를 하려던 선재의 입이 굳게 닫혔다.
“아.”
“….”
“형 다리 예뻐서요. 부러워요. 저는 다리가 못생겨서.”
그러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 더운 날, 주영은 여전히 긴팔에 긴바지 차림이었다. 울고 있는 준희를 달래던 선재의 시선이 주영의 긴바지에 닿았다.
“그래도 더운데….”
“괜찮아요. 아, 저 볼일이 있어서.”
“어어.”
귀로는 계속 빠아…빠… 하고 울먹이는 준희의 목소리가 전달되고 있었다. 터벅터벅, 이내 주영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하자, 준희의 몸에서도 긴장이 풀려갔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선재가 1층 마당 쪽을 내다봤다. 주영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 * *
선재는 아이가 낮잠 드는 시간대를 지켜주려 하는 편이었다. 작은 아이의 몸을 뉘어주고, 선풍기도 통통한 다리에 닿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가만히만 있으면 땀이 줄줄 날 정도는 아니다. 준희도 미지근한 바람에 금방 편한 얼굴을 했다. 곁에서 부드럽게 토닥여주자, 아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지이잉. 가까이에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뭐지? 엉뚱한 곳에서 전화 한 통이 온 걸 빼면 어디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선재는 순간 쿵 내려앉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휴대폰엔 ‘주인님’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번호도 범진의 번호가 맞다. 세 번, 네 번이나 진동이 울렸을까. 잠든 준희와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던 선재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어디냐!]
너머로 들린 목소리는 범진의 것이다. 갑자기 큰소리를 질러 귀가 아팠다.
“…여기 어딘지 몰라… 마을….”
[골 찢어지는 소리 할래? 빨리 주소 부르세요.]
“마을….”
선재는 마을 입구에 있던 큰 바위를 떠올렸다. 그 바위에 ‘소한마을’이라는 검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기 직전에 휴대폰으로 알아도 봤던 터라 기억엔 제대로 남아 있었다.
[마을 뭐요.]
“소한… 소한.”
[…여러 개 뜨는데. 일단 알았다. 추적해서 가면 되니까.]
선재는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트리고 ‘주인님’이라는 저장명을 다시 봤다. 휴대폰에 추적 장치가 달려 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 그럼 그동안에 뭘 하느라….
“…는.”
[뭐?]
“너는….”
[….]
“어딘데…?”
[어디긴. 칼 맞고 황천길 갔다가 지금은 서울이지. 방금 깼다.]
“….”
[미안하다. 정신이 없어도 현금은 줬어야 했는데.]
“….”
[어디서 먹고 자고 하냐.]
“…여기 좋은 분들 만나서.”
[좋은 놈 누구, 씹….]
“그런 거 아니고, 가족. 가족분들.”
방금 깨어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범진은 쌩쌩했다. 아파 죽을 것 같은 사람의 톤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오래 의식이 없었으면 심각한 수준이 아닌가. 범진의 목소리로만 상태를 유추할 수가 있는데, 듣기만 해선 다친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아니, 아무 일도 없던 사람 같았다. 범진은 범진인데….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에, 그의 목소리에도 의심이 들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막연히, 범진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선재는 대답하면서도 화면을 자꾸만 들여다봤다. 주인님. 범진이 분명한데, 아직까지는 실감이 안 나고 있었다.
[농담인데 쫄았냐.]
“….”
무슨 말을 들어도 다 범진 같기만 하지만.
선재는 범진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었다. 30분이나 되는 통화 시간 내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날이 자꾸 생각나 코끝이 시큰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지만 막막한 기분. 또 이런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암담했다. 사는 것이야 이제 무섭지 않다. 범진이 폭력적인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범진과 산다는 이유로, 범진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엉뚱한 일에 휘말리게 되는 건 공포스러웠다. 준희의 삶까지 위험으로 흔들리게 만들 순 없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 하는 처지다. 선재는 오직 준희 때문에 목이 아팠다. 눈 근처가 따끔따끔. 붉은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게요.]
“…응.”
[…싫으냐?]
“…아니.”
[사진 찍어 보내고.]
“응.”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사진 찍어서, 니 사진 찍어서 보내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한 범진 때문에, 선재는 군데군데가 붉은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두 장 더. 옥탑방 창문과 작은 서랍장 사진도 추가로 찍었다. 그 사진들을 첨부하며 여기서 지내. 하고 메시지를 썼다. 범진은 사진을 전송하자마자 확인했다. ‘졸라’ / ‘예쁘다’ 하는 답장 두 개가 금방 도착했다. 선재는 그 메시지에 대해선 따로 회신하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준희 옆에 몸을 뉘었다. 다행이지만 무섭고, 무섭지만 안심되는 이 기분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낮은 유달리 느리게 지나갔다.
저녁이 되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또 울리는 전화를 받은 선재가, 이제 밥을 먹으러 간다고 말했다. 빠아? 하고 고개를 든 준희의 손을 잡은 채였다. 선재는 준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쉿. 하고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응… 밥 먹고, 인사드릴 거야. 어… 그래 주면 난 고맙지.”
비가 내려, 대문 밖으로 나서서 전화를 받을 순 없었다. 1층 처마 아래서 조용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범진이 계좌번호를 받아오라고 말하기도 해 기분은 좋았다. 아주머니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생겨 그것만은 뿌듯했다. 마루엔 이미 저와 준희의 밥까지 푸짐하게 차려져 있는 상태였다. 밥상에 앉은 주영의 얼굴도 보였다. 으응. 하고 통화를 마무리한 선재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았다.
“저 아주머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어디 뭐, 니 서방이가?”
“그건 아니고, 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이라는 게 잘 풀맀나 보지?”
“네. 그리고 계좌번호 주시면 제가….”
“됐다.”
“…그래도.”
“내가 뭐, 그거 받자고 밥해줬는 줄 아나. 됐다, 치아라.”
“….”
진심으로 불쾌한 얼굴이었다. 성의만은 받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한 번 더 물었다간 분위기가 더 나빠질 것 같아 입을 닫게 되었다. 옆에 앉은 준희는 원래 그랬듯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아주머니 앞에선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뭐라고 한 소리를 들을까, 선재는 여태 물에 만 밥을 준희의 입에 넣어 주는 둥 마는 둥 해왔다. 남은 밥을 싸서 2층 방까지 올라와 먹여야, 준희는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냠냠, 그때는 잘도 먹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선재는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겨우 준희가 먹을 몫만 들고 2층 방으로 올라왔다.
“마지막 날인데 먹지 그랬어….”
“바압….”
“이리와.”
좀 있다가 제대로 다시 인사드릴 생각이었다. 선재는 아무리 그래도 은혜를 그냥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릇에 퍼온 밥과 반찬을, 준희가 먹기 쉽도록 숟가락으로 나누었다. 불이 켜진 옥탑 창문이 둘의 모습을 반사하고 있었다. 밖은 비 내리는 늦저녁이라도 여름이라 서슬 퍼런 빛이 남아 있었다. 창문을 한 번 올려다본 선재가 밥과 소시지와 나물을 숟가락 위에 얹었다. 자, 아아….
“아!”
아이에게 숟가락을 내밀고 있던 선재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바닥에 찧었다. 무심코 눈이 갔던 창문에 귀신이라도 비친 줄 알았다. 검정색 옷을 입어, 보이는 건 얼굴뿐이었다. 주영인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겨우 안심한 선재가 바닥에 흩어진 밥을 손으로 주워 담았다. 입을 벌리고 있던 아이도 의아한 듯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가 올려볼 즈음엔 주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살짝 열어둔 문에서 끽,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이 조악해 여닫을 때마다 성가신 마찰음 같은 게 나곤 했다. 창문에 서 있던 주영이 어느덧 문밖에 서 있었다.
“…놀랐잖아.”
“…진짜 가는 거예요?”
“응? 어. 그동안 고마웠어.”
“친구 하자면서요. 친구를 버리고 이렇게 가도 되는 거예요?”
“아, 연락… 내가 연락할게.”
“풉.”
주영의 비웃음이 좁은 옥탑 전체에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선재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옆에 앉아있던 준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동자까지 차오른 물이 툭, 투둑, 연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내 으앙, 하는 소리가 뒤이어 터졌다. 손을 뻗어 준희를 안은 선재가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아냐, 준희. 괜찮아.
스윽, 무릎에 팔을 대고 앉은 주영이 선재의 시선에 뚜렷하게 잡혔다. 그 각에서 보니 음영 때문에 얼굴의 선이 거칠게 보였다.
“장난해요, 형?”
“…어?”
“장난하냐고요.”
말을 여러 번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생경하게 와닿았다.
화난 듯한 얼굴까지 보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잘못한 게 있을까. 그렇다면. 선재는 최대한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가겠다고 하는 게 지금! 잘못인 거 아니야…!”
품에 얼굴을 묻은 준희가 계속 눈물을 쏟아냈다. 으앙, 으앙, 하는 소리가 옷 속에 파묻혀 서럽게 새 나오고 있었다. 선재는 고개를 들고 주영을 쳐다봤다. 왜 저런 말을… 반쯤 걸터앉은 주영의 발목에 무언가 반짝하는 게 보였다. 벨트 같은 것이 둘려 있었다. 언뜻 보면 시계 같기도 한.
“아무 데도 못 가. 알았어요?”
눈을 피한 선재의 뇌리에 뭔가가 스쳤다. 저건 범죄자에게나 부착하는 전자발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것이 떠오르진 않는다. 맞지도 않은 뒤통수에서 얼얼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주영이 긴바지만 입고 있었는지. 알파라면, 왜 몸에선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았던 건지. 그제야 전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극악무도한 성범죄를 지은 알파에 한해, 특수 성별취 자체를 소거하는 처벌이 존재했다. 향기가 없는 알파. 모든 걸 잃어버린 알파. 선재는 주영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았다. 오메가라고 속이면서까지… 해야 하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 이거 봐? 어디 가게? 하며 다가오는 주영을 보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이, 일단 둘만… 둘이서만 얘기하면 안 될….”
“왜. 애 때문에?”
“…그래, 아직 너무 아기고….”
아이를 울게 둔 채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갈 순 없었다. 선재는 어떻게든 주영과 둘이서 있어 보려 노력했다. 아이를 달래고 나갈 테니, 밖에서 조금 기다리라 말할 참이었다.
“그래서?”
“그, 러니까… 둘만… 둘이서만 얘기해도….”
“그러지 뭐. 손 놔.”
“…어…?”
“애 놓으라고.”
“….”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선재의 얼굴이 창백하게 얼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주영의 발놀림엔 거침이 없었다. 발에 밟힌 이불자락을 휙, 차버리고 선재가 있는 곳까지 곧장 걸어서 왔다.
“안 놔? 내려놓으라니까?”
바로 앞에 선 주영을, 선재는 앉은 채로 올려다봤다. 품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놓으란 건지 몰랐다. 주영은 무슨 짓이라도 벌일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나가, 나가 있으면 내가 아기 달래고 나갈 테니까.”
최대한 숨겠다고, 준희는 제 품에 얼굴을 깊이 묻고 있었다. 주영이 가까이 다가온 걸 느꼈는지 아이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줄곧 두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안고 있었는데 주영이 다가오면서는 한쪽 손을 아이 머리로 가져갔다.
“놓으라고.”
“그건 안 돼. 겁먹었잖아.”
“그게 뭐!”
순식간이었다. 준희의 팔 하나를 잡아당긴 주영 때문에, 선재는 아이를 품에서 놓쳐버렸다. 준희가 우는 얼굴로 일으켜졌다 금방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꽝 찧은 준희의 울음소리는 되레 잦아들었다. 크게 우는 것도 못 하고, 이잉… 잉… 하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형은 안 돼. 야, 너는 가.”
“…잉… 으… 이잉….”
“나가. 못 알아듣냐? 꺼지라니까?”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킨 주영이 준희를 무서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으…. 아앙….”
“그만둬!”
선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엉엉, 팔로 눈물을 닦는 준희가 옥탑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둘이서 얘기하자며? 하는 주영의 얼굴은 너무 하얘 푸른빛까지 돌았다.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주영에게 팔이 붙잡힌 상태였다. 아이를 따라가려 해도 알파의 힘을 이겨내기는 무리였다. 결국, 문밖으로 울면서 나가는 준희를 안아주지 못했다.
지켜주지 못했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참고 있던 감정이 바늘에 찔린 듯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놔! 놓으라고! 밖에, 비도 오는데! 미쳤어? 놔!”
선재가 몸부림을 치듯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 큰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었다. 금방 충혈이 된 눈에서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앞의 준희도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성질 있네…?”
주영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선재의 팔을 세게 쥐었다.
“놔! 아악!”
선재가 퍽,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영이 갑작스럽게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쉰 주영의 한쪽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짜증 나게.”
선재의 귀로 어? 짜증 나게, 하는 말이 한 번 더 꽂혔다. 선재는 손을 쓸 순 있어도 폭력에 저항하거나 상대하는 것으로는 그 손을 써본 적이 없었다. 힘 차이도 엄청났던 탓에, 그대로 눕혀져, 가슴팍 위에 올라탄 주영의 작은 움직임도 제지하지 못했다. 뒤이어 날아오는 주먹에 다시 얼굴이 돌아갈 뿐이었다. 오른뺨이 금방 발갛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영은, 그런데도 놓아달라고 고함을 지르는 선재를 향해 큰 소리로 욕을 내질렀다. 조용히 안 해? 씨발!
퍽, 마지막으로 가해진 주먹에는 눈앞의 모든 것이 흔들렸다. 주영의 얼굴이 멀어져갔고, 준희가 나간 문짝이 흐릿한 모양으로 변했다. 그 틈으로 보이는 늦저녁의 색도 환하게… 환한 색으로…
흔들흔들, 겨우 움직이던 선재의 눈두덩이 까만 눈동자를 덮었다.
결국, 남은 것이 어둠.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혼자 남았다.
* * *
“씨바알?”
벌써 세 바퀴째였다. 근처 국도에서 전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동네를 세 바퀴 돌 때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추적도 휴대폰이 켜졌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게 미쳤나… 범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조수석으로 던졌다. 상향등을 켠 채로 주변을 돌아, 길을 지나던 남자 한 명의 눈총을 샀다. 범진은 친히 조수석 창문을 열고 불만 있습니까? 하는 되물음을 했다.
“….”
잉…
아예 욕질을 하려던 범진의 시선이 남자가 있는 곳 너머에 닿았다. 지붕 모양의 그늘막 주변에서,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음성이었다. 범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남자에겐 이미 관심을 거뒀다. 차에서 내려 그늘막 쪽을 유심히 보았다.
“…준희냐?”
절대 이 마을 애 같지는 않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늘막 아래를 쳐다보던 범진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우으…에엥….”
다리 사이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앉아있던 아이가 누군가를 본 듯 울음을 터뜨렸다. 극도로 눌려 있던 훌쩍임이 비로소 울음이 되었다. 범진의 눈에 군데군데가 젖은 옷이 들어왔다. 그리고 얼굴. 차 불빛에 드러난 아이의 얼굴은 준희가 맞았다. 씨발… 뭐야?
아무리 회복력이 빠른 알파라지만 의식을 열흘이나 잃고 있었으니 하루 정도는 더 쉴 필요가 있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 범진도 그 말을 들어 선재에겐 아침에 데리러 가겠다고 전했다. 하지만 반나절 이상을 쉬고 보니 더 나빠질 것도, 더 좋아질 것도 없다 판단을 내렸다. 그길로 차를 운전해 근처까지 왔는데,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소한 마을이라는 단서와 이 근방에서 깜박이는 신호를 보고 주소를 찍었었다. 허나 얼추 도착해선 통신 자체가 불가하다고 떴다. 휴대폰을 꺼놓지 말라니까 또 꺼놨냐고, 성질을 부리려고 하는데 그럴 상대가 없었다. 씨, 하고 주변만 빙 돌던 와중에 발견한 아이엔 눈썹이 뾰족하게 위로 올라갔다. 애가 혼자. 그것도 울면서 밖에 있는 게 불길한 예감을 하게 만들었다.
두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준희를, 범진은 어색하게 안았다. 펑펑 우는 아이의 몸은 차가운 편이었다.
“…우으앙… 빠아…빠… 으아앙….”
그래도 여름이라 몸이 떨리거나 하진 않았다. 범진이 준희를 안은 채로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불 꺼진 집이 반이었다. 9시도 안 되었지만, 노인이 있는 집이 많아서인지 불이 켜진 집은 눈대중으로도 정확히 셀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손을 조수석 창문에 넣은 범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낮에 선재가 보내주었던 사진 파일을 켜기 위해서였다. 옥상 한쪽에 있는 방 안. 낡은 서랍장. 범진은 사진 파일을 차례로 올리다 선재의 얼굴이 찍힌 사진에선 그 상황에서도 멈칫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씨.
결국, 몇 초 더 들여다보다 준희를 조수석에 앉혔다. 춥냐? 물었더니 준희는 고개를 저었다. 지입… 지베… 하고 말하는 준희의 시선이 곧 운전석에 몸을 실은 범진의 옆얼굴에 닿았다.
“빠아… 주니… 주니….”
“….”
마을 입구에 차를 댄 범진이 고개를 돌려 준희를 쳐다보았다. 아빠, 아빠, 하고 말하는 준희에게 사탕을 하나 꺼내주었다. 졸음 퇴치 사탕이지만 달달한 맛이 나는 것이다.
“…느 애미가 들으면 기절하겠네….”
“…기저얼….”
기절을 따라 말하다 표정이 찡그려졌다. 사탕이 생각보다 씁쓸했기 때문인가 보았다. 범진이 맛없냐? 묻고, 준희가 입을 오물오물하다 눈을 깜박였다. 좀만 참아봐, 짜식아. 달아지니까. 범진은 준희의 표정이 풀릴 때까지 얼굴을 바라봐주었다.
아이는 곧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을 바라본 범진이 손가락으로 통통한 뺨을 톡, 치고 차의 시동을 껐다. 가만있어라, 가만. 하고 말을 하니 금방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엉엉엉, 하고 몇 시간은 울 것 같더니 금방 울음을 그치는 게 귀엽긴 했다. 사탕은 아이가 먹기엔 쓴지 준희는 사탕을 굴리는 내내 눈을 꾹 감았다 뜨고 또 꾹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뒤쪽을 가리키며 어느 집 방향을 범진에게 알려주려 했다. 작은 손가락을 따라 눈으로 집을 훑은 범진이 준희의 뺨을 톡 쳤다. 니 똑똑하네, 했다.
준희가 가리킨 쪽에 위치한 집 대부분이 단층에다 낡아, 선재가 보냈던 사진 속 집을 찾기는 쉬울 것 같았다. 옥탑 형식으로 된 집 자체가 두 집뿐이었다. 잘 보이진 않지만 한 집은 불이 꺼졌고, 한 집은 불이 켜져 있었다. 차를 두고 걷기 시작한 범진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방 사진을 보려고 한 건데, 결국 또 선재의 사진에서 멈췄다.
그렇게 보면서 걷다가, 불이 켜진 집 앞에 도착한 범진이 위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짜고짜 대문을 걷어차자 끼이익, 성가신 소리가 났다. 대문턱을 넘어선 범진은 불이 켜진 마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집이 맞는 것 같다. 사진에서 보았던 창문과 비슷한 창문이, 1층 부엌 안쪽에 나 있었다.
“뭐고?”
순간 방문이 휙 열렸다. 탐탁지 않은 여자의 시선이 범진에게 닿았다.
“어이, 아줌마. 내 뭐 좀 물읍시다.”
“…뭐.”
“여기 어디….”
“뭡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방 문이 열렸다. 범진이 고개를 쭉 빼고,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행색을 살폈다. 아까부터 어디서 좆같은 냄새가 난다 했는데 저 새끼한테서 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썹을 팍 찌푸린 범진이 마루에 발 한 짝을 턱, 올렸다.
“화아, 이 시골 개촌구석에서 풋좆냄새가 나네.”
기는 바닥이 그 모양인 탓에 이런 냄새는 익숙했다. 여기에 특수 성별이 있다는 것도 놀랄 노자인데 약물 거세까지 받은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최소한으로 잘 봐 줘도 저놈이 성범죄자인 건 무를 구석이 없어 보였다. 풋좆. 더는 좆도 아닌 그것을, 범진네 바닥에선 풋좆이라고 표현했다. 입을 어디까지 끌어당겨 웃는 낯을 한 범진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줄 거 있으면 빨리 내놔라.”
“…무, 무슨 소립니까?”
“뭔 소린지 씨팔, 내가 아냐? 3초 줄 테니까 데리고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흥분한 마음과 달리 톤은 정돈돼 있었다. 귀찮다는 듯 눈가까지 찌푸린 범진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서 있는 풋좆새끼를 눈만 들고 쳐다보았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갔다.
“이놈아가 뭐라카노, 지금!”
앉아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일.”
“지금 무슨!”
“이.”
“이 쌍놈새끼가 어디서 들어와서 행패고, 이거!”
“삼, 씨발아.”
한 발을 올려두었던 범진이 그대로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단 두 걸음. 서 있던 남자의 머리채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간 범진이 제 손에 있던 머리를 가차 없이 벽에 박았다. 쾅! 쾅! 가까이에 붙자 익숙한 체향도 섞여서 나고 있었다. 최소한 가까이에 있었다는 뜻이다. 범진의 눈에 순식간에 핏발이 돋았다.
“아, 알았다! 알았으니까, 아, 아 좀 놔줘라! 엄마야!”
“…아줌마… 니도 알았어요?”
움직임을 멈춘 범진이 코피를 흘리는 남자의 얼굴을 벽에 또 쾅, 박았다.
“고마해라, 고만! 우리도 그럴라고 그란 건 아니고!”
말이 없었다. 범진은 코뼈가 드러나기 시작한 남자의 얼굴을 다시 벽에 쾅, 박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씨이팔.”
이번엔 관자놀이 쪽이었다. 벽은 결이 곱지 않았다. 남자의 옆머리에서 흐른 피가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새끼 이렇게 만들고 싶진 않은데.”
범진은 손아귀에 잡혔던 머리를 또 벽에 갖다 박았다. 벽에 지저분한 도장 무늬처럼 피가 묻었다.
“…그, 그만… 위에… 있으… 위에….”
“이 개씹새끼.”
범진은 이미 흐물흐물한 남자의 머리를 던지듯 놓았다. 그리곤 발로 공을 차듯 남자의 허리를 찼다. 뻥 소리가 나도록 차자, 남자가 입구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애를 이렇게 만들어 놓는 법이 어딨냐는 그의 모친 앞에, 남자가 풀썩 쓰러지듯 뉘어졌다.
앞장서, 씹썅아. 아랑곳하지 않고 부러 성기 쪽을 누르듯 밟은 범진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잘 거냐? 엉? 이 상황에서 쳐자게? 맥을 못 추리는 남자의 얼굴을 신발 앞코로 쿡쿡 찌르기도 하며 몸을 한번 쭉 훑었다. 확인하듯 발로 밀며 바지 밑단을 걷어내자, 예상처럼 굵다란 발찌가 채워져 있었다. 선재야… 이 재수도 드럽게 없는 게.
그 재수 없음의 시작이 자기 자신이라는 걸, 범진도 모르지 않았다.
기어가듯 2층 계단을 타기 시작한 남자를 따라 범진도 발걸음을 옮겼다. 폭이 좁고 높은 계단이었다. 곡소리를 내는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앞에서 살피고 있었다. 저게 뭐라고, 저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노, 하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범진이 그 모습을 보고 허, 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옥탑 앞에 다다른 남자는 호주머니를 더듬거려 열쇠 하나를 꺼냈다. 옥탑 입구와 창문은 굵은 체인으로 감겨 있는 채였다.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넣는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탁, 하고 풀리듯 열리는 자물쇠에, 범진이 입 안에 있던 침을 그 집 옥상 바닥에 힘껏 뱉었다. 캬아악, 퉤.
발을 끌며 물러나는 남자와 문 사이로, 누구인지가 뻔한 사람 한 명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몸을 옆으로 하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꺾은 범진이 후두득, 코피를 쏟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야, 불 켜.”
“….”
전깃줄이 보기 싫게 늘어진 천장에서, 빛 하나가 반짝하고 들어왔다. 작은 전구였다.
선재의 얼굴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범진이 손으로 그 얼굴을 살폈다.
“…개새끼야… 팼냐?”
“호, 혼자 다친 겁….”
“화아, 이 씨발롬이 주먹으로 팼네.”
해왔던 게 그런 짓이라, 손바닥으로 맞았는지 주먹으로 맞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아, 하고 고개를 푹 숙였던 범진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남자에게 다가갔다. 뒷걸음질을 치는 남자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억, 하고 나가떨어진 남자를 향해 달려든 건 역시나 그의 모친이었다.
“니 미, 미칬나! 저거… 저런 거 하나가 뭐라고! 도시에는 저런 아들 많다 아이가! 우리 아들 시골서 이라고 있는 게 불쌍해서 결혼이라도 시키줄라 했드만은, 이게 무슨 일이고… 아이고!”
“씨팔년이 남의 마누라 데리고 뭐가 어째?”
범진이 큰소리로 내질렀다. 암만 잘잘못을 못 가린다지만 범진의 커다란 몸에는 여자도 위협을 느꼈다. 울며 한탄하던 여자의 얼굴이 기이하게 억눌렸다.
여자도 때리려다 만 범진이 문턱을 퍽, 하고 쳤다. 뒤질라면 한 번만 더 지랄하소, 말하고 방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그렇게 선재의 얼굴 앞으로 가 1분이고 2분이고 계속 쳐다보았다. 푸릇푸릇한 얼굴에 눈빛을 보내던 범진이 이내 씨발, 하고 욕을 읊조리며 선재를 안아 들었다.
“…으….”
“괜찮냐.”
범진은 옥상에 널브러진 모자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그 집을 벗어났다. 방 문턱, 계단, 그리고 집 대문까지 차례로 넘자, 약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 공기를 쐰 덕에 선재의 의식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주… 준희… 준희는?”
가물가물한 정신이지만, 선재는 아이의 행방부터 먼저 물었다.
“차에.”
그제야 울음 같은 숨이 토해졌다. 선재는, 억지로 세 사람의 형태를 맞춘 범진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범진을 보고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건 처음이었다. 산장에서 범진의 도움을 받고 살았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기억나지 않아 비교를 할 수 없었다.
투박하게 걷는 소리가 정확히 들려오는데, 몸이 탁 풀렸다. 근본적인 원인 따위는 잠시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주영과 그의 어머니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만 한숨을 돌릴 뿐이었다.
시야에 가득 찼던 옥탑방 대신 까만 밤. 터벅터벅 걷는 범진의 발걸음 소리가 이 세상의 유일한 소리처럼 와닿았다. 조용한 세상이다. 그동안, 비는 얼마나 내렸던 것일까. 울면서 밖으로 나가던 준희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톡, 이마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안개처럼 가벼웠다.
비를 맞아야 했다면 부디 이런 비였기를. 아이의 어떤 것도 휩쓸지 못하는 비였기를.
선재는 눈을 꾹 감으며, 안에 고여있던 물방울을 눈꼬리 끝으로 흘려보냈다.
* * *
“저녁에, 아까는 삼촌이 장난한 거야.”
“….”
“그래도 준희는 삼촌 보기 싫지?”
“네에.”
“응, 그래서 이제 그 삼촌은 안 보러 갈 거야.”
“….”
최대한 아이의 입장에서 설명해줘야 했다. 선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관광호텔까지 와서도 준희를 안심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응급실에 가자는 범진을 극구 막은 건 선재였다. 병원을 갔다가는 아이의 상상력이 어떻게 자극될지 몰랐다. 더는 공포심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충분하다. 선재는 제 몸이 성치 않은 와중에도 준희의 팔과 컨디션만 살폈다. 주영이 아이를 떼어놓을 의도로 팔을 당긴 거지만 약하고 무른 뼈라 걱정이 되었다.
“팔 이렇게 들어봐. 아파?”
“으으응….”
준희가 고개를 저었지만, 그 속도는 느릿느릿했다.
“…준희 아픈데 안 아프다고 하면 안 돼.”
“…네에….”
“….”
“아야….”
“아빠는 괜찮아. 장난친 거야, 삼촌이.”
준희의 손이 선재의 얼굴에 닿았다. 푸른 색소가 올라온 눈두덩에서, 아이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팔을 이리 들어보라, 춥지는 않으냐 묻고 살피는 선재 때문에 타이밍이 약간 늦어졌을 뿐이다. 준희가 팅팅 부은 선재의 눈가 부근을 작은 손으로 살살 쓸어 주었다.
“아파… 아야해….”
“…뭐 묻은 거야. 내일 되면 없어져.”
“업써져…?”
“그럼….”
선재도 제 얼굴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준희가 이렇게 물어올까 줄곧 염려가 되었었다. 뺨이 올라온 건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눈두덩은 옆에서 봐도 툭 튀어나올 정도로 상해가 심한 편이었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반반 섞인 멍까지 들어 있으니 준희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애써 고개를 돌린 선재가 괜찮아, 하고 아이를 다독였다.
“….”
욕실에 들어갔던 범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패밀리룸이라 평수가 굉장히 넓었다. 따로 딸린 방도 두 개나 있었다. 다이닝룸에 앉아, 거실로 향하는 범진을 가만 쳐다보았다. 손은 계속 아이의 얼굴에 닿아있는 채였다.
늦은 체크인이 불가능한 호텔이라 선재는 준희를 품에 안은 채 1층 로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 했다. 얼굴이 이 꼴이니 사람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컸다. 언제나, 범진과 어딜 가도 정상적인 범주의 눈빛은 받아보지 못했다. 선재는 일을 시끄럽게 만들기 싫다는 생각으로 목이 뻐근할 때까지 고개숙인 채 범진을 기다렸다.
범진이 또 행패를 부리지 않을까. 그런 것도 걱정돼 시원한 로비에서도 땀이 차는 기분이었다. 선재는 방을 기다리는 그 20분 동안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 지나간 느낌을 받았다. 품에 안긴 준희가 왜애…? 하고 묻는 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준희 덕분에 그 상황에서도 웃음이 났다.
“배 안 고프냐?”
“나는 괜찮은데….”
아기가 밥을 못 먹어서… 하고 덧붙이려 했는데 그럴 새가 없었다. 범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런트에 콜을 넣었다.
프런트에선 되는 메뉴도 있고, 안 되는 메뉴도 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
몇 초나 갔을까. 곧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되는대로 올려보내면 될 것이지…. 그런 말도 말이지만, 굳이 욕을 덧붙여가며 대화를 잇고 있었다. 욕이 없으면 말 자체를 못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을 준희가 듣고 있다. 선재는 아이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며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준희 배고프지?”
고개를 끄덕이는 준희의 눈가가 붉었다.
“얼굴 따가우면 말해.”
“네에.”
샘플로 들고 다녔던 아이 로션을 다 썼다. 요 며칠, 준희에게 발라준 건 그 집 1층에서 쓰고 있던 바디로션이었다. 어른, 그것도 바디용이라 기름지고 향기도 심하게 나는 편이었다. 그래도 아예 안 바르면 여름이라도 버짐이 피기 쉬웠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바른 거긴 했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준희의 겨드랑이나 다리 등, 살이 잘 접히는 부위에 발진이 일어나 있었다. 우려했던 것만큼 성분이 좋지 않았나 보았다.
조건이 너무 최악이었다. 약한 아이 몸을 이렇게 만든 게 제 탓 같기만 했다. 선재는 티를 내진 않아도 로션을 발라주는 내내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그걸 부추기는 듯 옆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고. 이 씨, 뭐 씨? 하고 쌍욕 수준은 아니라도 이런 데서 저러고 있는 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몸이 성하지 않은 건 범진도 마찬가지였다.
선재는 범진이 배를 드러낸 걸 보고 속으로 많이 놀랐다. 찔렸다는 부위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는데, 얼굴에도 못 보던 상처가 하나 생겼다.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부위에도 넙데데한 밴드가 발라져 있었다. 거긴 위험한 부위가 아닌가. 잘은 모르지만, 많이 다친 건 확실해 보였다.
그 컨디션에도 저렇게 욕을 하고 싶을까.
준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선재는 표정을 딱딱하게 경직했다. 아이가 욕 같은 걸 모르기에 망정이지….
“…바압. 머거요?”
“으응, 밥 이제 먹을 거야.”
희한한 게 하나 있다면, 준희가 범진의 거친 말에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것이다. 주영이나 아주머니에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아이였는데.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선재가 아이를 찬찬히 관찰하듯 살폈다.
30분쯤 지나 방으로 들어온 건 커다란 이동식 트레이였다. 중식과 한식 위주의 요리가 겹겹이 쌓인 수준으로 실려 왔다.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고.”
“먹으라고 갖다 줘도 트집이네.”
“…트집이 아니라.”
“바압…. 주니 아암….”
장식도 화려해 아이가 신난 듯 굴었다. 선재는 준희의 턱을 한 손으로 만지며 그 요리들이 세팅되길 기다렸다. 넓은 식탁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랐다. 식탁에 오르지 못한 요리는 바닥에 놓였다. 새우요리와 튀긴 닭고기 요리를 발밑에 뒀다.
안 되는 요리가 많다더니.
그것마저 가능했다면 방이 아니라 뷔페가 될 뻔했다. 고개를 저으며 앉은 선재가 준희부터 품으로 끌었다. 시간이 10시가 넘었다. 최소한 한 시간은 소화를 시켜줘야 할 텐데. 시계를 쳐다본 선재가, 호박죽을 한술 떠주며 입을 열었다.
“준희 이거 먹고 바로 잠들면 안 돼요.”
“녜!”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 우리 아기.”
차에서 저를 볼 때만 해도 마아, 마아, 하고 펑펑 울었는데 빨개진 눈이 무색하게 들뜬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배가 고팠던 걸까. 잠깐 생각을 하던 선재가 아이의 입에 호박죽을 넣어 주었다. 팔을 올려 수저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어느 순간 선재가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팔과 어깨가 의식될 정도로 떨렸었다. 손에도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다. 주영에게 짓눌려 있을 때, 몸을 잘못 움직인 것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기절한 사이에 더 맞았거나.
“니 손이 왜 그러냐.”
“…뭐가.”
“줘봐라.”
“…준희 밥 먹이고.”
왜 이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범진은 선재의 손을 냅다 잡아끌었다. 선재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탁, 소리를 내며 식탁과 바닥을 차례로 굴렀다. 선재는 아이가 놀랐을까 미간을 잔뜩 좁혔다.
“…아기 놀라.”
“준희야, 놀랐냐?”
“마시써요, 주니 마딧게.”
“….”
말뜻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아이가 엉뚱한 대답을 냈다. 준희가 먹고 있던 건 부들부들한 갈빗살 요리였다. 선재가 더는 먹여주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큰 숟가락을 들고 갈빗살이 있는 접시에 팔을 뻗고 있었다.
“놔… 아프니까….”
“아프니까 보자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뭘 하고 있는 건지. 선재는 아이 앞에선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큰일까지 치르지 않았나. 범진이 양보할 수 있는 데까지는 양보하리라 생각했다. 아프다…까지 말했으니 제게 뭐라고 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더 아파.”
“이게, 씨….”
버릇 같은 말이다. 선재는 범진에게 손이 꽉 잡혀 그게 더 아팠다. 제 딴에는 뼈가 이상한지 어떤지를 보는 것 같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팔을 마구 잡아당기는 통에 어깨뼈가 빠질 것 같았다.
“아프냐?”
“아프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저를 못 괴롭혀 안달인지 모르겠다. 선재는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잊고 싶었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아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고 싶었다. 밥을 먹는 것도 그냥 밥만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애꿎은 프런트 사람들이 범진 때문에 곤욕을 치렀단 생각은 갑자기 든 것이었다. 선재는 모든 게 망가진, 무너진 이 일상을 제 힘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예감만 했다. 절망했고, 무기력했다. 어떤 건 죽도록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냐?”
“아니.”
“손 좀 만졌다고.”
“우는 거 아니라고 하는데 왜 자꾸 그러는데.”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게 확….”
“….”
미친 건가. 선재는 범진 앞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성질을 부리는 것까지 참아주진 않을 것이다. 온몸이 뻐근하고, 주영의 얼굴이 생각나는데도 그런 눈치를 봐야 했다. 선재는 악착같이 눈물을 참고 있었다. 여기서 울면 준희가… 준희를 차에서 만나던 순간부터는 솔직한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괜찮아, 그 말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거짓말인데. 괜찮을 거 하나 없는 상태인데.
선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희 잠시만. 노력해서 가다듬은 목소리로 준희에게 짧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열린 욕실 문 안에는 습기가 조금 차 있었다. 거울을 손으로 닦은 선재가 거기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툭 튀어나온 푸른 눈두덩이 흉측했다. 시야가 계속 좁아진 이후로는 거울을 쳐다보지 않았다. 로비 유리문과 차창에서 언뜻 비치는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선재는 호텔방에 도착해 씻을 때도 거울만은 쳐다보지 않았다. 습한 거울 한쪽을 닦고, 바라본 제 얼굴이,
이렇게 비참할 줄 알아서였다.
“야, 뭐 하냐?”
“….”
닫혔던 욕실 문을 열고 불쑥 들어온 건 범진이었다.
선재는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주저앉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범진은 테이블 위에서 그랬듯 또 통증이 있는 손을 멋대로 끌려고 했다. 타악, 힘주어 손을 뿌리친 선재가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만해… 아파.”
“씨바, 그니까 보자고.”
“…뭘 자꾸 본다는 건데. 네가 이렇게 안 해도 아프니까 그만해.”
“뭔 개소리냐?”
“….”
“안기고 싶다는 소리를 참 씹스럽게도 하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제멋대로다. 버틸 힘이 없다. 선재는, 범진이 품으로 이끄는 힘에 포기한 듯 몸을 맡겼다. 팔꿈치를 붙잡은 범진의 손에 반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나오는 건 반사적인 눈물뿐이다. 뚝뚝.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안긴 탓에, 눈물은 기다란 빗방울 무늬가 되어 범진의 티셔츠에 새겨졌다.
* * *
선재는 준희가 잠드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보았다. 자주 보던 모습이지만 기분이 새로웠다. 천천히 감기는 눈과 고르게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작은 가슴뼈. 흰 뺨에 돋은 솜털이 새삼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옥탑방을 나가던 아이의 뒷모습은 돌이키지 않아도 떠올랐다. 한동안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선재는 준희의 가슴과 배를 따뜻한 손으로 만져주었다.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세상에서 즐겁게 뛰어놀았으면 좋겠다.
깊은 잠에 빠진 준희를 두고, 선재는 식탁 주변을 간단히 정리했다. 준희가 디저트로 먹던 과자봉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검은 봉투에 쓰레기를 모아 담은 선재가 소파에서 통화를 하는 범진에게 가벼운 시선을 던졌다.
정리니, 쓸어버린다느니… 족쳐버린다느니….
그런 소리를 듣자 머리가 멍해졌다.
범진은 상대에게 알겠으니까 끊으란 말을 했다. 그리곤 휴대폰을 소파 구석에 던졌다. 떨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떨어졌다. 매사가 대충대충이었다.
“내가 오늘은 니 성질 좀 받아주려고.”
“….”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하는가 보았다. 선재는 갑자기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 범진의 팔에 몸을 움츠린 자세가 되었다.
“소원도 하나 들어준다.”
“….”
장난기가 어린 말이었다. 선재는 시선을 범진에게 두었지만, 곧 두 다리가 들려 눈으로 엉뚱한 데를 짚게 되었다. 갑자기 저를 안아 올린 범진의 행동을 잽싸게 피하지 못했다.
한 침대엔 준희가 잠들어 있었다. 괜히 아이 잠을 깨울까, 선재는 입을 다물고 범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만 있었다. 아이가 누워도 쑥 들어갈 정도로 탄성이 약한 침대였다. 바로 옆 침대에 눕게 된 선재가 몸을 옆쪽으로 옮겼다. 범진이 누울 만큼 자리를 비웠다.
“일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
“원래 씨, 내가 사과나 하는 인간인 줄 아냐….”
털썩, 몸에 힘을 완전히 빼고 앉은 범진 때문에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범진은 쌍시옷 섞인 숨을 한참이나 거칠게 몰아쉬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선재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진은 곧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선재 옆에 눕는가 싶더니 곧장 몸을 돌리고 입을 맞춰왔다.
뽀뽀같이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입을 뗄 때마다 범진의 숨결이 남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말을 않았다.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는 범진에겐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진은 윗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왔다. 선재가 살짝 밀어내는 것 같자 능글맞게 웃으며 누가 한댔냐, 하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가슴팍에 닿은 손을 빼내지 않았다. 차가운 손이 가슴과 윗배를 서슴없이 쓸자, 선재가 몸을 떨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였을까. 선재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범진아.”
유두를 건드리던 범진의 눈엔 뜨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왜.”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잖아.”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범진의 손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선재는 얼얼한 안면을 들어 범진의 눈에 최대한 초점을 맞췄다. 제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뭐, 돈 줄까.”
그런 게 소원일 리가. 범진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선재가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나 놔주면 안 돼?”
“씨발, 만지는 것만 좀 하자.”
“…지금은 마음대로 해. 섹스도 하고 싶으면 하자.”
“지금은 마음대로 하라고?”
그제야 뉘앙스를 파악한 듯, 범진의 얼굴이 성난 짐승처럼 변했다.
“응, 나 준희랑 둘이서만 살고 싶어.”
“뭐라고 했냐, 지금.”
“둘이서 살고 싶다고….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준희랑 행복….”
너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제일 하고 싶은 말이어서 짧은 단어에도 목 끝이 따갑게 젖어 들었다.
“….”
범진은 말이 없었다. 눈이 푸른 눈두덩에 닿기만 할 뿐 입이 열리지도 않았다. 뭐? 씨발? 하고 손을 날릴 것 같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마 얼굴이 이 꼴인 게 제가 봐도 불쌍해서가 아닐까. 선재는 범진이 아픔에는 양보하는 태도를 보이는 걸 익히 알았다. 틈을 타 제대로 말했다.
“나 너무 아파, 범진아.”
“….”
“너랑 있으면 내가 너무 아파. 나 아프기 싫어. 준희랑 안 아프게 살고 싶어.”
“그래서.”
“놔줘. 나. 이만하면 됐잖아.”
“씨팔.”
“나 살고 싶어. 살려줘. 준희랑 나 한 번만 살려줘.”
말을 잇던 선재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을 때부터 머릿속엔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지, 하다 보니 필사적으로 말하게 되었다. 그저 살고 싶은 마음. 평범하고 온건한 삶. 그걸 이렇게 간절히 바라게 될 줄은 몰랐다. 선재는 정말 살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었다. 살려줘, 한 번만, 나.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은 두 손을 모으고 빌 때부턴 줄줄이 이어져 떨어지게 되었다.
선재는 울면서도 계속 살려달라고 말했고, 마지막엔 존대어까지 써가며 빌었다. 두 손도 가지런히 모았고, 무릎도 꿇은 채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