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선재는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범진의 품 안에서 잠을 깼다.
지난밤, 범진은 제 간청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되묻거나 씨발, 하고 혼자 욕을 한 걸 빼면 반응이라고 느껴질 만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놔주면 안 되냐고 처음 물을 때까지는 이성이 있었는데, 울면서 사정할 땐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준희가 칭얼대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돌아왔다. 몇 분간 준희를 달래 주고 나서야 화장실로 가 얼굴을 닦았다. 상처 입은 얼굴이 더 울퉁불퉁해져 있었다. 참 못났다. 울면서 빌기나 하고…. 그렇게 해줄 사람이 아닌 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
선재는 침실로 돌아와 범진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해본 말이었다고. 중얼거리듯 변명했었다.
여름이라 해 뜨는 시간이 일렀다. 선재는 범진의 아래턱 부근을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왔던 길이 캄캄한 밤길이라 주변이 어떤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거실로 나가 커튼으로 빛을 가리려던 선재의 손이 멈칫했다. 짙푸른 산도 멋있고, 그 사이에서 맹렬히 흐르는 계곡물도 청량해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그 마을만 떠올리면 이런 곳이 전혀 상상되지 않는데. 관광호텔에 걸맞은 주변 경관이었다.
“으응…?”
밖으로 나온 아이가 눈을 비비며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 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이에겐 들렸던 모양이었다.
“준희, 시끄러워서 깼어?”
“으으응… 꾼꾸고….”
“나쁜 꿈 꿨어요…?”
선재는 두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이를 한 품에 안아 들었다. 나쁜 꿈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아이의 행동에 괜한 미소가 걸린다. 선재는 아이에게도 바깥 풍경을 보여주려 다시 창가로 향했다. 창문 밖을 가리키며 고개를 숙였다.
“저거 봐. 예쁘지.”
“녜….”
표정을 찡그린 준희의 눈은 거의 감겨 있는 채였다. 그래도 선재가 물으니 무작정 네에, 하고 대답부터 하고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이 얼굴을 쳐다보던 선재가 오동통한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눈부셔? 묻자, 아이는 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
“아.”
고개를 들자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선재는 침실 문 앞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범진을 뒤늦게 발견했다. 간밤, 애원을 하고 난 뒤의 기억은 별로 없다. 사과를 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고, 섹스는 하지 않았다. 범진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인상에 남은 건 두 손을 모으고 빌던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괜히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어쨌든, 범진이 그 마을까지 와 자신을 구해준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야 어른이니 그렇다고 쳐도, 준희를 구해줬다고 했을 땐 고마워서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나.
그땐 범진 때문에 쫓겼고, 거기까지 갔고, 그 피해를 입은 것 따위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준희가 무사하고, 저는 살았다는 사실에만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해준 범진에게,
살려달라 울며 빌었던 제 모습이 야박하게 느껴졌다. 변명을 하긴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선재는 품 안의 준희를 제대로 얼러 안았다. 범진이 계속해서 보내오는 눈빛에도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안하고 겸연쩍어 계속 눈을 맞추게 되었다.
“…아침부터 뭔 짓이냐….”
“아기가 깨서.”
“니가 애 깨운 건 아니고?”
“다시 가려고 했어. 방에….”
“하아.”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쉰 범진은 선재에게 다가가 손을 올렸다.
선재의 어깨가 급격하게 안쪽으로 모였다. 설마 아이를 안고 있는데 때릴까. 눈을 슬쩍 감았는데, 범진이 손으로 제 머리통을 가득 잡은 게 느껴졌다. 눈을 뜨고 위쪽을 쳐다보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이거 때릴 수도 없고….”
“….”
어제 일 때문에 시비를 거는 거라면 할 말이 없었다. 선재는 비몽사몽이었던 준희가 제 품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맞는 모습을 아이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빠아…빠….”
“어, 준희야….”
선재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곧장 입을 열었다. 눈을 살폿 뜬 준희가 말한 ‘아빠’는 범진을 향한 호칭이었다. 범진의 손아귀에 머리가 잡혀 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시골에서도 내내 범진을 아빠라고 부르는 듯해 말버릇을 고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입을 막 떼기 시작했을 때 익힌 엄마, 아빠, 하는 호칭을 아무에게나 붙이는 건 아니었다. 선재는 그 두 호칭을 모두 들었지만,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엄마나 아빠라고 하는 경우는 여태 한 번도 없었었다. 왜 범진을 아빠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 할 듯했다. 가볍게 달래듯 말한 게 전부라 아이가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무슨 마음에선지 범진은 씩 웃었다.
표정이 처음으로 풀려 선재는 내심 마음을 놓았다. 때릴 생각은 없는가 보다.
“아부지한테 와봐라.”
“빠아….”
선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준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범진은 장난처럼 툭, 그런 말을 뱉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가볍게 손뼉을 짝 쳤다. 그래, 느그 아부지한테 와봐라. 하고 선재를 놀리듯 말했다.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지….”
“내가 먼저 했냐? 저게 어제부터 맞을 짓만.”
“….”
어제 얘기가 나오자 선재의 입이 다물렸다. 밤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다시 저자세가 되었다.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싹싹 빌었던 제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범진에게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까. 잠깐만 험한 얼굴이었지 지금은 또 전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니 괜찮겠지. 선재는 준희를 안은 채 창밖을 내다봤다. 저거 보자, 준희야.
* * *
호텔에선 자체적으로 조식 뷔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조용하면 밥을 먹고 가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 준희가 환경을 낯설어했다. 아이의 표정을 살핀 선재가 뷔페 입구에서 범진의 옷깃을 끌었다. 다른 데 가면 안 돼? 준희가 무서워해서. 고개를 숙이고 준희를 한 번 쳐다보는가 싶던 범진이 대꾸는 없이 발길을 돌렸다.
결국, 손님이 거의 없는 갈비탕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호텔 건물 1층에 위치한 식당이긴 했지만, 투숙객 대부분이 뷔페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테이블이 텅텅 빈 걸 본 선재가 선택한 식당이기도 했다. 공간이 널찍해 범진이 직원을 불편하게 할 가능성도 적을 것 같았다. 주로 좁은 공간에서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거는 편이니까.
메뉴는 갈비탕과 곰탕이 있었다. 아이가 곰탕을 좋아하니 제 것을 포함해 곰탕 두 개를 시키면 될 것 같았다. 갈비탕이나 먹어야겠다고 말한 범진은 이미 제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 시키냐?”
“아기랑 나는 곰탕 먹을게.”
“야, 여기 곰탕 세 개 주문 넣어라.”
“….”
범진이 어린 직원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다른 조건은 살펴놓고, 직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이면 그래도 말을 낮추진 않는데. 선재가 멀뚱멀뚱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직원을 향해 곰탕 세 개요… 하고 다시 말했다.
일한 지 얼마 안 된 직원 같았다. 혹시 범진이 제 말엔 움직이지 않은 직원에게 행패를 부릴까 화제를 급히 전환했다.
“갈비탕 먹는다면서.”
“갑자기 곰탕 먹고 싶어졌다. 왜.”
범진의 마음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아이도 있는데 조용히, 그리고 무사히 밥만 먹고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곰탕은 3분도 안 되어 나왔다. 뿌옇게 위로 오르는 김을 본 아이가 고개를 들고 손뼉을 쳤다. 손이 연해 짝, 하는 소리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준희 밥 말아서 줄게.”
“네에….”
따로 나온 그릇에 국물과 밥을 덜었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곰탕이 계속해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선재는 입을 모으고 후… 불며 국물과 밥을 식혔다. 밥알은 국물 속에서 금방 풀어졌다.
“먹기 힘들면 아빠가 먹여줄게.”
“으으응… 주니가.”
“…그래.”
혼자 먹는 걸 버거워하면서도 좋아하니 어쩔 수 없다. 선재는 숟가락을 쥔 준희의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주먹 쥔 손 사이에 겨우 끼워진 숟가락이 불안했다. 그래도 먹겠다고, 국에 만 밥을 숟가락으로 떠내는 모습이 한편으론 장하기도 했다. 선재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야.”
“…어?”
“하나만 묻자.”
범진의 곰탕은 처음 세팅되었던 그대로였다. 뚜껑도 열지 않은 밥공기를 쳐다본 선재가 범진의 얼굴 쪽으로 눈을 들었다.
“내가 깡패 새끼라서 싫은 거냐.”
“…뭐?”
고개를 갸웃했던 선재가 어제 일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하.”
아까부터 한숨을 계속 쉬었다. 선재는 범진을 흘끔 쳐다보다 제 앞에 놓인 곰탕 안에, 남아 있던 준희의 밥을 떠 넣었다. 여전히 뜨거운 뚝배기에서 김이 드문드문 올랐다.
“밥 먹어.”
“…니. 내가 놔주면 잘 살 자신 있냐?”
“….”
선재는 얼굴을 뚫을 듯 바라보는 범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불만 있으면 도망가든지, 하고 협박조로 말하던 어떤 날만 떠올랐다. 그런 식으로 겁을 주려 하는 것 같았다.
“얼굴 안 다치고 살 자신 있냐고.”
“얼굴을… 왜 다쳐.”
범진의 말은 선재에게 헛소리처럼 들렸다. 선재는 범진에게 향해있던 있던 눈도 어느새 준희에게로 돌렸다. 푸르게 부어오른 눈두덩을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 씨발, 가든지.”
“….”
고깃집에서처럼, 위급한 일이 있어 도망가라는 소리로 들리진 않았다. 선재는 혹시나 하고 범진을 다시 쳐다봤다.
“놔주겠다는데 반응이 왜 그따위냐.”
“….”
“대신에.”
테이블 위로 올라온 손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범진이 갑자기 테이블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준 집에서.”
“….”
“내가 주는 돈으로 살아라.”
그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선재는 놔준다, 까지는 농담으로 들었지만 갈수록 조건 같은 게 붙어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제 했던 말로 놀린다고 보기엔 얼굴이 심각했다. 아침에 장난을 치길래 화두가 넘어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거 못 하겠다면 못 놔주고.”
“….”
애초에 그게 놔준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선재는 범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진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러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거짓말도 아니니까. 더는 의미 없는 섹스나 두려움에 가득 찬 삶 같은 걸 살고 싶지가 않았다. 살려달라고 말했던 그 순간엔 정말 진심이었다.
범진은 또 하아,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잘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선재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이미 놓은 채였다. 반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을 괜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입고 있던 범진의 티셔츠가 제 손길에 멋대로 흔들렸다.
에라이, 하고 걸걸하게 욕을 할 것 같던 범진은 이후로 밥만 먹었다. 그러다 책임자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돌아다니는데도 드럽게 맛없네, 하고 수저를 탁 놓았다. 실제로 범진은 밥을 거의 남겼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더는 주변을 살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준희는 밥을 다 먹었는지 창에 붙어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여름의 산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유리창을 두고, 참 무심한 시간이 흘러간단 생각이 들었다.
선재는 몇 분이 지날 때까지도 범진이 괜한 심술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정을 해봤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손수건이 지저분해진 게 눈에 띄었다. 식사가 거의 끝났으니 그걸 물에나 좀 헹궈야 할 것 같았다.
“준희… 다른 데 못 가게 해줘. 말만 해도 잘 들으니까.”
계속 창문에 붙어 밖을 쳐다보는 아이긴 했지만 혹시나 몰랐다. 선재는 범진에게 부탁하듯 말하고 식당 화장실로 향했다. 계속 들고 다녀야 할 아이 손수건이니 될 수 있으면 깨끗한 상태여야 했다.
방향제 냄새가 적당히 나는 깔끔한 화장실이었다. 입구 문이 닫히자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물에 손수건을 적신 선재가 양손으로 손수건을 비볐다.
“후으.”
앞으로 내려오는 머리칼이 제멋대로 시야를 가렸다. 금방 깨끗해진 손수건을 꼭 쥔 채 차가운 물을 손등으로 맞았다. 그 탓에 손이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직까지도 거울을 쳐다보기가 싫었다. 선재는 빨개지기 시작한 손을 보고서야 고개를 들고 물을 껐다.
“아.”
거울 속엔 저 말고도 사람 한 명이 더 있었다.
범진이었다.
“눈치도 존나 없는 게.”
“….”
언제부터 거울을 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선재는 준희는 어쨌냐고 물으려다 관두었다.
“뭘 어떻게 살겠다고.”
성큼, 다가온 범진의 얼굴은 제가 최근 본 중 가장 어두웠다. 선재는 손에 꽉 쥐고 있던 손수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었다. 범진이 갑자기 입을 맞춰오는 것에 뭘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목덜미가 범진의 손에 잡힌 채. 벌어진 입 안으로 거칠게 맥박치는 범진의 혀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럴 땐 언제나 제 모든 게 범진의 것 같다. 제가 가진 건 하나도 없이.
힘을 못 이기고 뒷걸음질을 치던 선재의 머리가 매끈한 타일에 닿았다. 눈을 찡그려도 소용이 없었다. 짐승 같은 키스에 고개만 자꾸 꺾였다.
생뚱맞은 장소에서 키스를 해오는 것도 참 범진다웠다. 선재는 입마저 추하게 부르틀까 걱정이 되었다. 힘을 줘 범진을 밀어내면 약간씩은 밀렸다. 하지만 곧 성질을 내듯 몸을 바짝 붙여오는 공격적인 행동에 손이 허공을 맴돌기만 했다. 툭툭,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야 할 공간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혀가 남의 입 안에 뿌리라도 내릴 듯 강하게 밀려들어 왔다. 몇 초, 몇 분이 지나면서 선재는 빨개진 얼굴을 하고 범진의 팔을 밀었다. 아까처럼 다시 몸을 붙일 것 같던 범진은 밀리는 대로 입술을 뗐다. 다친 얼굴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라도 가진 것일까. 더는 앞으로 몸을 붙여오지 않았다. 선재는 혀로 볼을 부풀리는 범진을 쳐다보다 손에 들려 있던 손수건을 물에 다시 헹궜다.
아기는. 물소리에 밀려 제 작은 말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범진은 거울 속의, 멍으로 두드러진 제 얼굴에만 시선을 두는 듯했다.
작은 덩어리가 된 손수건을 힘주어 짜낸 선재가 범진을 지나쳐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준희 가만있었어?”
“네에….”
아이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가만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한 손에 잡은 선재가 그 옆에 앉았다. 아까 보고 있던 창문엔 흥미가 떨어졌나 보다.
“왜, 바깥 구경 안 하고.”
“무서.”
“무서워?”
좀 전과 달리, 밖은 관광버스로 빼곡했다. 많은 사람들이 호텔로 들어가고 있는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통유리 안에서도 들리고 있었다.
“사람들 갑자기 많아졌네.”
“네에.”
밥도 다 먹었겠다, 식당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고 식당 문을 나섰다. 계산을 끝낸 범진이 앞서서 차로 가는 것이 보였다.
“빠아.”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준희는 그런 범진을 따라가려 했다. 손을 뻗으며 달려나가려는 준희를, 선재가 손으로 끌었다.
“준희, 안 돼.”
그 자리에서 반쯤 앉아 아이와 눈을 맞췄다.
“준희 아빠 말 안 들어?”
“…으응….”
유독 어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선재가 손을 이끌며 단호하게 말을 하자, 금방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선재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빠한테만 아빠라고 그래야 해.”
“…네에.”
깜박깜박. 벌게지기 시작한 눈가에서 투명한 물이 한 방울 툭 흘렀다. 고집을 부려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할 텐데, 금방 수긍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선재는 범진만 아니면 이렇게 꾸중하는 일도 없겠다 싶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그래도 그러면 안 돼.”
“…녜에….”
“이리 와.”
“….”
두 팔을 뻗으며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를 한 품에 안았다. 보드라운 살결 냄새가 났다. 선재는 준희를 품에 안은 채 검정색 레인지로버가 있는 주차구역으로 걸어갔다. 범진은 핸들 쪽으로 몸을 낮춘 채 그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애써 눈빛을 무시한 선재가 차 앞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따로 카시트가 없어 준희를 품에 안고 타거나 뒷좌석에서 옆에 딱 붙이고 앉혀 차를 타왔다.
“서울에.”
“….”
“호텔 잡아줄 테니까 며칠만 지내라.”
“….”
“집 적당한 데….”
범진은 말을 끌며 핸들을 꺾었다. 애초부터 누구에게 친절히 말해주려고 입을 연 게 아니었다. 말뜻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한 선재만 범진의 옆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도 아까 한 말이 있으니 유추는 해볼 수 있었다. 만약 집이 구해질 동안 호텔에서 지내게 되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범진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까 한 말….”
차는 급한 커브를 그리며 앞을 나아가고 있었다. 깨끗하게 포장된 길 아래로 보이는 절벽이 아찔했다. 울창하게 늘어선 숲길 안으로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리막길인데도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운전대를 휘휘 끄는 통에 선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결국 할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했다.
“속도 좀….”
범진의 고개가 선재 쪽으로 돌아갔다. 불규칙한 길에서 앞까지 제대로 보지 않으니 선재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니… 알겠어. 앞에 봐.
선재는 지금, 범진이 화가 난 걸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중이란 걸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준희가 빠른 속도에는 겁을 먹지 않는단 것이었다. 휙, 꺾일 때에도 몸은 많이 흔들리지 않았다. 가속이 많이 붙었을 때도 브레이크를 대충 잡은 범진은 차간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붙는 상황이 되어서야 제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 * *
한 시간 정도 아이를 안고 있던 선재는 휴게소에서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준희 많이 컸다.”
범진이 담배를 태우러 차에서 잠시 내린 상황이었다. 선재가 꾸벅꾸벅 조는 아이의 머리를 허벅지에 눕히고 뒷좌석 문을 닫았다. 길눈이 어두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서울로 간다는 말이 진짜인지도 모르겠고.
휴게소 건물로 들어가는가 싶던 범진은 생수를 하나 사 왔다. 먹냐? 하고 뒷좌석에 있던 선재에게 생수를 내밀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선재는 룸미러를 통해 범진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곧 출발한 차는 적당한 속도를 내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갑자기 칼치기를 할까 줄곧 준희의 가슴팍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다행히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차창 밖은 여전히 하얬다.
얼마나 더 갔을까. 점점 드러나는 커다란 건물들이 눈에 익은 것도 같았다. 언제,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얼마 가지 않아 서울이 나올 것만 알았다. 범진의 차를 타고 먼 데로 향하면, 늘 기분이 이상했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마터면 큰일이 생길 뻔한 곳에서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다. 선재는 한 번이라도 그런 기억이 무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곧 관뒀다. 아무 소용이 없는 가정이었다.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빨리 잊고 싶다. 선재는 준희의 가슴팍을 약하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시의 한여름 풍경도 운치가 있었다. 차창에 이마를 대고 쳐다보는 하늘이 무서울 정도로 파랬다. 그리고 사방의 가득한 빛. 그 사이에서 많은 차들이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까?
저만 이렇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인지.
선재는 고개를 들어 룸미러에 시선을 던졌다. 휴게소에서 물을 마실 거냐고 했던 걸 빼면 범진은 지금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선재는 집이니 호텔이니 했던 말을 한번 되물어보고는 싶었다. 범진의 말이 모두 진짜였다면 그런 호의까지는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범진만 삶에서 사라진다면 도움을 받을 곳은 여러 군데가 된다. 집도 절도 없는 오메가 미혼부를 위한 시설도 있었다. 선재는 점차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분을 드러내도 괜찮으면 뭔들 못 할까. 집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걸 범진의 도움으로 얻어야 한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 내리냐.”
범진의 말소리를 들은 건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서였다. 어두운 곳으로 빠지던 차는 한산한 자리에 주차가 되었다. 눈치껏 주변을 살펴보자 호텔 주차장인 것 같았다. 선재는 엘리베이터 쪽을 쳐다보며, 차에서 이미 내린 범진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잠에서 깬 아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지자, 손을 곧장 아이 이마에 갖다 댔다.
“안아줄까?”
“…주니 지입?”
“그건 아닌데… 일단 내려야겠다.”
품에 준희를 안은 선재가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기어코 또 서울까지 왔구나. 로비와 통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어디까지 왔는지 믿기지 않았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하층을 가리키던 전자 화면이 곧 로비층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리자 천장이 높은 메인 로비가 드러났다. 위쪽에서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샹들리에는 대낮인데도 조명을 발하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가 범진에게로 다가왔다. 선재는 범진의 뒤쪽에 서서 고개만 살짝 숙이고 걸음을 멈췄다. 이미 예약을 잡아놓은 건지 범진은 카드키만 받아 들었다.
“압빠아….”
“응.”
출발하기 전에 아이에게 모질게 말한 게 여태 미안했다. 선재는 범진의 근처에도 가지 않는 아이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애꿎은 머리만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가까이 다가온 범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20층에 위치한 방이었다. 두 개의 베드가 놓인 방은 널찍하고 고급스러웠다. 커튼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전경이 복잡하면서도 화려했다. 고요한 강줄기도 그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범진아, 나.”
“…뭐.”
범진은 곧 나갈 것 같았다. 처음엔 일주일이었는데 방에선 말이 바뀌었다. 빠르면 이틀 내에 저와 준희를 데리러 오겠다 말했다. 주변을 휘둘러본 범진의 눈이 멈추자마자 선재의 입이 열렸다.
“네가 이렇게 안 해줘도 도와줄 데 있어.”
“씨발 누가 그딴.”
성질이 나는지 낯빛이 금방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이게 니 도와주는 걸로 보이냐.”
“….”
준희는 창가에 붙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유리면에 붙인 아이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할 것이다. 선재는 준희 쪽을 흘끔거리다 다시 범진에게로 시선을 가져왔다. 범진은 이게 정말 놔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금방 나갈 것처럼 보이는 범진에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계속 일그러지는 얼굴에다 대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범진은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린 채 방을 나섰다. 어디 갈 생각은 말라고 경고하듯 손가락질을 하는데, 선재는 거기에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밀치듯 열고 나간 손길이 거칠었다. 선재는 범진이 사라진 뒤로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이게 놔주는 거라면 앞뒤가 하나도 안 맞으니까. 세상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놔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 * *
정확히 3일이 지난 뒤, 범진은 호텔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하우스 키퍼인 줄 알았는데 형님, 하는 소리에 범진임을 알았다. 문을 연 선재가 얼떨떨한 얼굴로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형님이라는 호칭도 참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범진의 낯은 멀쩡한 편이었다. 호텔을 급히 나서던 날도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고작 며칠이긴 했지만 어디서 안 좋은 일을 당한 것 같진 않았다.
범진이 데려간 곳은 지하철역과 멀지 않은 오피스텔 건물 앞이었다.
“이런 데가 제일 안전합니다.”
말꼬리에 여운을 주며 말하는 게 범진답지 않았다. 거기다 범진은 말까지 높였다. 반 존대를 하거나 장난하듯 존댓말을 쓸 때는 있지만 저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선재는 오피스텔 6층에 도착할 때까지 범진의 뒤만 졸졸 따랐다. 속도를 맞추지 못할까 봐 준희를 품에 꼭 안고 범진을 따라갔다.
호텔에 있는 3일간,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범진은 처음부터 집과 돈을 내걸었다. 그렇게만 하면 따로 떨어져서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3일간 고심한 선재는, 일단은 범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정권이 제게 있는 건 아니라 허무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생각은 그랬다. 받아들이나 마나 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로 스스로 결정지었다. 나름대로는 중대한 결심이었다.
범진에게 받은 피해도 많지만, 입은 은혜도 어쨌든 있었다. 선재는 범진이 여전히 미웠지만, 마음 한편에 드는 고마움도 부정하지 않았다. 품에 있는 준희를 그 시골 동네에서 구해준 것도 어쨌든 범진이었다. 범진의 흥미가 식을 때까지 이렇게 지내는 것도 썩 나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범진도 저를 향한 비틀린 관심을 점차 지워낼 게 아닌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위층은 공실이고 아래층에만 사람이 있다고 했다. 선재는 범진의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실제로 들어가게 된 집 안에서도 새집 냄새가 많이 나고 있었다. 갓 들인 듯한 가구에서도 윤이 돌았다. 둘이 살기에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은 있지만, 선재는 감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방이 하나 딸려 있고, 거실과 주방은 분리형으로 큼지막하게 나누어진 구조였다. 입구 복도 쪽에 붙은 드레스룸도 방처럼 컸다.
“그럼.”
“….”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형님.”
“….”
“얼굴 빨리 나으십셔.”
고개까지 꾸벅 숙이는 범진의 태도가 낯설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얼굴을 쳐다보는데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당황한 마음이 든 선재가 얼결에 네, 대답했다.
“….”
“깡패 새끼 지랄 받아주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이번엔 더한 소리를 했다.
굳은 말투로 오피스텔에 대해 말할 때도 듣기 어색했는데, 깡패 새끼, 하는 말엔 제대로 멍해지고 말았다. 선재는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범진을 향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범진도 고개를 숙였으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범진의 눈이 잠깐 아래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곧 걷혔다. 선재는 고개를 들고 범진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범진이 먼저 뒤를 도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문이 열렸고, 범진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처럼 사라졌다.
* * *
그 후로 범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주나 되었을까. 범진에게 알려준 계좌에만 그의 흔적이 찍혀 있었다. 돈은 되는 대로 들어왔다. 어느 날엔 50만 원이 들어오고 어느 날엔 100만 원이 들어왔다. 내역을 확인해보니 2주간 4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와 있었다. 아이와 단둘이 쓰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취미도 없고, 물욕도 없어 식비에만 거의 돈이 들어가니 쓸데없이 많다는 생각만 들었다.
“반난나….”
“바나나 먹을래?”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가 매대 위쪽에 진열된 바나나를 가리켰다. 4일에 한 번꼴로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에 들르고 있었다. 범진과 같이 살 땐 식료품 같은 것도 거의 배송을 받아 왔었다. 간만에 장을 보기 시작했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선재가 바나나 송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절반쯤 후숙이 된 바나나였다.
“먹자…. 그래.”
깊이가 있는 투명 비닐에 바나나를 송이째 담았다. 카트에 넣으니 준희의 눈이 그 짧은 시간에 또랑또랑해졌다. 살짝 웃은 선재가 아이의 하얀 뺨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여기서는 먹으면 안 되는데…?”
“집에서….”
“먹을 거야?”
“네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선재는 카트를 준희의 속도에 맞추고 있었다. 카트 철에 걸린 손가락이 유독 자그맣게 보였다. 손을 대지 말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늘 저렇게 카트 사이사이에 작은 손가락이 걸려 있곤 했다.
어차피 사나흘 먹을 몫만 사는 거라 주변을 쭉 둘러보는 수준이었다. 가다가 준희가 먹고 싶어 하는 게 있으면 그것만 좀 담는 식이었다. 선재는 과일 코너에선 포도를 하나 더 담았다. 알이 크고 과육도 탱탱하게 보이는 것을 골랐다.
지나간 날이 2주.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선재는 주변의 어린이집을 알아보았다. 준희가 슬슬 친구들 이름을 얘기하거나 선생님, 선생님, 하고 예전 어린이집에서의 기억을 더듬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단둘이 있으면 저는 재밌는데 아이는 아닌가 보았다. 선재는 유독 정적인 제 성격을 탓했다. 아무래도, 준희는 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성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놀고, 자고, 일어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준희에겐 큰 즐거움이었던 듯하다.
선재는 동시에 일자리도 알아보았다.
이렇게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선재는 당장의 돈이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을 한 경험이라곤 옛날에 해봤던 아르바이트나 어린이집에서 일을 했던 게 전부였다. 기왕이면 준희도 있으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자리가 있었으면 했다. 예전에 일했을 때도 잡일을 자주 도맡아 하는 걸로 장점을 어필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구인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선재는 문득 범진을 떠올렸다.
집도 돈도 다 그의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선재는 일주일간 모습 한 번 드러내지 않은 범진의 의중이 궁금하긴 했다. 갑자기 수고했느니 어쩌니 하며 이 집의 문을 열고 나갔던 게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선재는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고도 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범진이 싫었다. 돈과 집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긴 했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게 범진답지 않았다. 언제나 난데없이 나타나 제게 시비를 걸고, 괴롭히던 그 남자가 이렇게 쉽게 사라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거기다 누구 좋으라고 돈과 집을 주고…. 선재는 이런 생각까지 들자 행동을 섣불리 하지 못했다.
여전히 ‘주인님’이라고 저장이 된 번호를, 선재는 뭐에 홀린 듯이 눌렀다. 일자리를 구하기 전에, 범진의 허락이 필요하단 생각이 어쩐지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범진의 지원을 받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집에서 살고, 그 돈을 쓰고 있었다. 최소한의 허락, 혹은 언질 정도는 해둬야 할 것 같았다. 선재는 어디까지나 양심에 의해 ‘주인님’을 누르고 통화 버튼도 뒤이어 눌렀다. 신호음이 다섯 번 정도 울리다, 범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형님.]
“…아.”
[뭐 때문에 전화했습니까.]
“어, 저기.”
머리에 가득 들어찼던 질문을 누가 입바람을 불어 날린 것 같았다. 후우. 빈집이 된 머리에선 웅웅, 하는 진동만 울렸다. 선재는 앞에서 놀고 있던 준희의 모습을 보고 겨우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나 일하려고 하는데.”
[…그거를.]
“….”
[왜 나한테 말합니까.]
“…어?”
예상한 대답과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왜 범진이 일을 못 하게 할 거라 생각했을까? 하지 말란 말을 듣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범진에게 말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전화를 건 것이었는데. 저 혼자 유난을 떤 것 같아 마음이 무안해졌다. 바깥출입조차 못 하게 했던 범진이어서 그런 대답은 굉장히 낯설었다. 선재는 전화만 붙들고 있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이제 그런 걸 묻지 않아도 되는구나.
범진이 정말 자신을 놓아준 것 같아 기묘한 해방감도 들었다. 부끄러움과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선재는 서둘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해, 볼일 봐. 그렇게 말하자 전화는 기다렸다는 듯 뚝, 끊겼다. 휴대폰 화면엔 1분을 약간 넘긴 통화 시간만 찍혀 있었다. ‘주인님’이라고 되어 있는 저장명이 어색하게 보였다.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지만 무슨 기분에선지 ‘주인님’을 ‘최범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전화번호부엔 그의 번호뿐이었다. 준희가 다니는 어린이집을 저장하려고 했을 때, 범진이 제 번호만 저장해놓으라 성질을 부렸던 게 생각이 났다. 이제는 어린이집은 물론 어떤 번호도 다 저장해도 되는 자유가 생겼다.
하지만 무안함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결국, 세수까지 하고 나서야 얼굴에 번진 열이 가셨다.
“마아… 아…압….”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아이가 보였다. 집이 아닌 장소라, 엄마라고 했다가 금세 고치는 모습이었다. 낯선 사람이 많으면 준희도 호칭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아이는 엄마나 아빠를 비밀 암호쯤으로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 그렇게 은밀한 호칭으로, 왜 범진을 불렀는지는 아직 이해되지 않지만.
“왜, 준희…?”
“주니 쩌, 저거.”
“두부 먹고 싶어?”
“네에.”
준희가 세 걸음 정도 지나친 시식 코너를 가리켰다. 눈높이에선 보이지 않을 텐데, 희한하게 두부가 있는 시식 코너에선 발을 잘 멈추는 편이었다. 선재가 뒤로 카트를 끌고 가 구운 두부 한 점을 이쑤시개로 찍어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준희 두부가 그렇게 좋아? 이거 사줄까?”
“녜!”
제대로 씹지도 않고 대답을 한다. 집엔 안 그래도 여러 종류의 두부가 있었다. 허나 구이용으로 나온 두부라 식감도 좋고 요리법도 어렵지 않을 듯해 구매해놓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선재가 집 냉장고 칸에 잔뜩 쌓인 간편 연두부를 떠올리다 직원에게서 두부를 건네받았다. 이미 주셨으니 어쩔 수 없네….
사다 보니 짐이 한 아름이었다.
“주니도, 주니가.”
“아냐, 준희는 앞만 잘 보고 걸어.”
집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는 게 다행이면서, 다행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생각 없이 담다 보니 짐이 이렇게나 많아지고 말았다. 여태까지는 간단하게 샀는데 오늘은 유독 비닐에 담긴 내용물이 많았다. 선재는 한 손으로 비닐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준희의 손을 잡았다. 제가 봐도 무겁게 보였는지 들어주겠다고 손을 뻗는 준희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괜찮다니까….”
“으응… 주니가.”
“준희 앞에 봐야지. 부딪히면, 아….”
“선재 씨!”
“….”
입구에서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자, 같은 층에 사는 남자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올해 서른이 되었다는 남자는 무슨 일인지 처음 봤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름과 나이, 직업까지 알게 된 남자였다. 선재는 윤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장 보실 때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제가 왜….”
원래는 이런 말도 못 했을 텐데. 그럴수록 제가 피해를 본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선재는 일부러라도 사람들, 특히 알파에겐 냉정하게 말하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처음엔 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윤형도 알파였다. 우성인지 열성인지 헷갈렸는데 윤형의 입으로 우성이라는 말을 했으니 더 날이 섰다. 선재는 다가온 윤형에게 고개를 최대한 빼고 말을 이었다.
“…천천히 가면 됩니다.”
“아기도 있으신데.”
“괜찮습니다. 가보세요.”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
“저 나쁜 사람도 아니고, 선재 씨 보면 마음이 좀 쓰여서 그래요, 그냥.”
“….”
“빠아.”
어느새 빠아, 하고 선재의 옷을 끈 준희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윤형을 쳐다봤다. 처음에 보았던 엘리베이터에서는 저와 단둘이었는데 오며 가며 준희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윤형이 반가운 표정으로 준희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애기 잘 있었어?”
“…네에….”
조용조용하게 대답한 준희가 선재의 옷깃을 뒤로 잡아끌었다. 싫다기보다는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선재는 딱히 경계하지 않는 준희의 태도에 눈만 깜박이며 그 둘을 지켜봤다. 손에 들고 있던 짐은 무게 때문에 바닥에 잠시 내려둔 상태였다.
“저기, 스티커 끊는 것 같은데요.”
주차금지 구역에 떡하니 대놓은 차 한 대가 익숙했다. 선재는 한 번 보았던 윤형의 차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은은한 진주색이 도는 세단. 광택이 예뻐 한참 쳐다본 탓에 기억하기가 쉬웠다.
“아, 하나 끊기고 말죠… 뭐.”
“….”
“저거 끊긴다고 큰일 일어나겠어요.”
“….”
그걸 저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니 신경이 쓰였다. 대꾸는 않고, 선재는 윤형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허허. 타실 거예요?”
자신감에 차 있던 말투가 한풀 꺾였다.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피한 윤형이 벌게진 얼굴을 하고 할아버지처럼 웃었다. 허허, 하는 어색한 웃음이 몇 번이나 그의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그럼 제가 먼저….”
계속 눈을 피하던 윤형이 마지막엔 선재의 얼굴을 쳐다봤다. 의아한 듯 닿고 있던 눈빛에 눈을 맞춘 윤형은 또 당황한 눈치였다. 눈을 몇 번 깜박이는가 싶더니 선재가 옆에 놓아두었던 짐을 갑자기 들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선재가 손을 뻗고 어, 하며 아이를 끌었다.
“빨리 오세요. 와, 짐 엄청 무겁다.”
너스레를 떨며 말하는 윤형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 같진 않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허허, 하고 웃을 땐 그리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괜히. 윤형의 얼굴에도 흉터가 있어 벽을 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흉터가 있다고 다 나쁜 사람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웃 주민이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에 더 냉담하게 반응하기도 꺼려졌다. 선재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세단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
“응?”
“두부….”
“…아저씨가 가져가는 거 아니야.”
“주니 두부….”
“두부 저기 있어. 가서 달라고 하자.”
짐이 차 트렁크에 실리고 있었다. 비닐에 씌운 양복 한 벌이 뒷좌석에 큼지막하게 접힌 게 언뜻 보였다. 가까이 가서 아이를 먼저 뒷좌석에 태운 선재가 양해를 구하고 저 또한 그 옆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선 깔끔한 과일 향기가 나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언뜻 맡았던 냄새 같기도 했다. 쌉싸름한 레몬. 이 사람은 과일 향기가 나는 사람이었지. 언젠가 한 번 했던 생각을 처음인 양 또 하고 있었다.
범진에게선 쓰디쓴 향이 나는데.
이제는 저를 놓아주기로 했으니, 이런 일에도 예민해지지 않아도 될까.
선재는 괜히 전화를 걸었다 무안을 당한 일을 떠올렸다.
이제 범진은 제게 뜻 모를 호의만 베풀 뿐이다. 그동안 미안했기 때문일까. 더는 다른 알파와 같은 공간에 있어도 뭐라고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선재는 윤형을 그런 ‘다른 알파’ 정도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알파든 뭐든 예전의 범진 같았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장면이긴 했다. 다음 주부턴 일을 나갈 것이다. 범진이 집에서 나가라, 말을 하면 바로 짐을 빼야 할 신세였다. 선재는 자립할 계획을 세우느라 윤형이 말을 걸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선재 씨 제 말 안 듣고 있죠?”
“어, 이쪽은 우회전 차선 아닌가요.”
말을 듣고 있냐는 윤형의 질문엔 엉뚱하게 되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차가 주변을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예 우회전 차선에 가서 서자, 선재가 뒤늦게 한마디를 했다. 이미 차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았다.
“…시간 좀 벌어보려고 그랬죠…. 대답을 안 해주시니까.”
“…네?”
“아니, 어…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돌다 보니.”
윤형은 갑자기 우회전을 빠르게 해 속도를 높였다. 말을 해놓고도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상가 건물들을 쭉 끼고 나와서야 다시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설 수 있었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선재는 말이 없어진 윤형에게 뭐라 한마디를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놀라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선재 씨 말씀이 없으셔서…. 계속… 네. 죄송해요.”
차가 왼쪽 길로 접어들면 오피스텔 주차장까진 금방이었다. 지하로 통하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차내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옆에 앉아 앞유리창을 쳐다보고 있던 준희가 고개를 들고 선재를 쳐다보았다.
“주니 집… 지입….”
불안한 준희의 눈이 선재에게 닿았다. 정상적인 입구를 지나치고 지하로 들어가 무서운 기분이 드는 듯했다.
“여기 준희 집 맞아…. 저거 타고 가면 나와….”
저거, 하고 선재가 가리킨 건 지하층과 이어진 엘리베이터였다. 선재도 이 집에서 지하 주차장에 갈 일은 잘 없었다. 처음인가. 범진과 왔을 때도 오피스텔 입구에서 내려, 주차장이 이렇게 복잡한 줄도 몰랐었다.
운전을 해본 지 오래되어 이렇게 번잡한 주차장에선 주차도 하지 못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연수를 따로 받아야겠다. 아까부터 자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탓에 틈만 나면 그쪽으로 생각이 샜다.
“선재 씨.”
“…네?”
또 뭐라고 물었나? 선재는 다소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른 윤형의 얼굴을 룸미러로 쳐다보았다.
“이제 내리셔도 돼요.”
윤형은 여유 있게 웃는 것도 같았지만, 모습이 어딘가 어수룩했다.
네, 하고 차에서 내린 선재가 준희부터 챙겼다. 준희 이리 와… 옆에 선 아이의 손을 잡고 차 뒤쪽으로 걸어 나갔다. 트렁크에 있던 짐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곧 열린 트렁크에 손을 뻗는데, 윤형이 조금 더 빨리 짐을 들고 트렁크 문을 닫았다.
“제가 들게요. 주세요.”
“…아아, 네. 너무 다짜고짜…. 그랬네요.”
선을 긋는데도 윤형은 부드러운 투로 반응했다. 이랬던 사람이 왜 차에서 마음대로 어딜 가려고 해 제 오해를 샀을까. 처음엔 모든 것에 능숙하단 인상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조금은 미숙한 사람 같았다. 우회전 차선에 왜 서냐고 물었을 땐 제가 미안해질 정도로 급히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했고.
“애기 지하 주차장 무서워?”
“….”
윤형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묻자, 준희는 선재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주니가….”
그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선재와 윤형만 도착한 엘리베이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두세 명은 꼭 같이 타는데, 1층에서도 탑승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6층까지 셋이서만 올라오게 되었다. 선재는 끝까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윤형 때문에 닫힌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어야 했다.
그럼 들어가세요, 그런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 * *
선재는 윤형과 집으로 들어온 그 날부터 구인 홈페이지를 틈만 나면 확인했다. 될 수 있으면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좋은 조건은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구한 게 차로 6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 교사 자리. 작은 놀이터가 딸린 사립 어린이집이고 5세 이하 아이들이 많아 준희에게도 환경이 적합했다. 오메가는 자격증과 무관하게 채용할 수 있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남자 오메가 선생님을 많이 선호하는 추세였다. 무경력자도 가능하다고 조건이어서, 짧은 경력의 선재 또한 수월하게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범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수중에 돈을 얼마라도 쥐고 있어야지. 갑자기 내쫓기면 갈 곳은 시설뿐이다.
선재는 시설도 불사하고 범진에게 저를 돕지 말아달라 말한 적이 있음을 기억했다. 하지만 지낼 곳이 생긴 이상, 만약을 대비해 돈을 벌어두는 게 지금의 최선책이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어떤 상황에선 염치가 없어야 한다.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으니 일단은 일을 시작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오늘 친구들 보겠네, 준희.”
“칭구….”
“응, 친구.”
첫 출근날이고 아침부터 서둘러서인지, 어린이집에 도착한 시각이 터무니없이 일렀다.
선재는 꽤 남은 출근 시간을 어디서 메꿔야 할지 어린이집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건 거대한 아파트 건축 현장과 작은 편의점뿐이다.
면접을 하러 왔을 때도 그랬지만 주변에 뭐가 아무것도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선재는 준희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작은 종이 흔들리며 문이 열렸다.
편의점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진열대 옆쪽에 의자와 테이블도 따로 있었다. 준희를 의자 위에 앉혀 준 선재가 냉장고로 가 오렌지주스 하나를 샀다.
“차가워?”
오렌지주스를 바로 따서 입에 대주자, 준희는 두 눈을 있는 힘껏 감았다. 그리곤 두 주먹을 들고 부르르 떨었다.
“왜. 왜.”
“시, 시여.”
아침이라 오렌지주스에서 신맛을 많이 느낀 모양이었다. 여전히 울상을 하고 시여, 시여, 하는 준희의 뺨에 선재의 손이 닿았다.
“좀만 기다리면 하나도 안 실걸…?”
“…녜…에.”
입 안이 시큼한 와중에도 대답을 하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귀여웠다. 선재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았다. 이렇게 아이만 쳐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 되고 만다. 선재는 해준 것 없이도 예쁘게 잘 자라는 준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발달 속도가 조금 느린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병원에서도 오메가 아이들이 종종 그런다고 하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준희는 선재의 말을 듣고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오렌지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꼴깍꼴깍 잘도 마셨다.
선재는 아이가 반쯤 마신 주스 병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어린이집에 가도 될 것 같았다.
준희 내리자, 옳지… 플라스틱 의자에서 준희를 내려준 선재가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 따뜻한 기온이 확 들이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가장 더운 날들은 지나갔다. 선재는 눈을 찡그린 준희의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어줬다. 그제야 눈을 똑바로 뜬 준희가 어린이집 건물을 아기자기하게 두른 울타리 대문을 제 손으로 열었다.
* * *
예전에 근무했던 곳보다 일하기는 훨씬 쉬웠다. 선생님 한 명이 맡아야 하는 아이의 수도 적은 편이었다. 선재는 처음 보는 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문제는 아이들 이름 외우기. 첫날이라 다 외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불러야 할 때 못 부르니 불편한 상황들이 있었다. 이름표는 형식이었다. 가슴에 이름표를 안 단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선재는 오전 내내 아이들 신상이 기재된 서류에 신경을 집중했다. 사진과 실물을 번갈아 보며 아이들 이름을 익혔다. 키우는 아이가 아이인지라, 개중 특수 성별인 아이들 정보는 더 빨리 외우게 되었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준희는 친구들 얘기를 그렇게 해도 혼자 놀 때가 많았다. 지금도 저렇게 혼자 있다. 저에 비해 적극적인 성정을 가진 거지, 활발한 아이들과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주변에서 맴맴 돌던 다른 오메가 아이에게 다가간 선재가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윤서 왜 이러고 있어.”
“친구들이….”
“친구랑 놀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계속 시끄럽게 뛰어노는 아이들 주변을 돌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도 준희와 비슷한 아이들을 무리 지어 준 적이 있었다. 선재는 윤서를 준희가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준희도 친구 좋아하는데, 윤서, 준희 친구 하면 어때.”
반짝거리는 두 눈이 선재에게 닿았다. 네! 하고 대답한 윤서가 금방 준희의 곁에 앉았다. 준희는 촉감 책을 펼쳐보고 있었다. 갑자기 철푸덕 앉은 윤서에게 놀랄 만도 한데 책 한 페이지를 펼쳐 다가온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선재는 두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놀이방을 나섰다. 나오면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에게도 약간의 주의를 줬다. 어른이 보기엔 괜찮지만, 몸집이 비슷한 어린아이들끼리는 위협이 될 수가 있다.
유리창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한 선재가 앞치마를 뒤적여 돈을 확인했다. 오전에, 볼펜과 파일을 사 오라는 원장님의 지시가 있었다. 볼펜만 서른 자루 정도를 얘기했으니 꽤 많이 필요한 것일까. 주머니에 2만 원 정도가 있어 그 돈으로 일단 편의점을 가보기로 했다.
밖은 아침보다 훨씬 후끈해져 있었다.
아직 여름이 끝난 게 아니다. 아침에만 그럭저럭 괜찮았지 치솟는 기온이 심상치 않았다. 선재가 손날을 이마 끝에 세우고 발길을 옮겼다.
편의점에 도착한 선재는 검정색 볼펜 아홉 개를 계산대에 올렸다. 매대에 진열된 볼펜이 그것뿐이었다. 앞치마에 있던 만 원짜리 하나를 직원에게 건넨 뒤 거스름돈을 받았다.
삭막한 거리긴 해도 바로 코앞에 편의점이 있는 건 마음에 들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위에 달려 있던 종에서 짤랑,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돈과 볼펜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선재가 파라솔 아래에 서서 맞은편 길을 건너다보았다. 원실에 있을 때 주변 소음이 심하다고 느꼈는데, 다 저것 때문인 것 같았다. 아파트 건축현장. 거리상으로 그리 가까운 건 아니지만 규모가 워낙 커 시끄러운 소음이 그대로 들리고 있었다.
“….”
크레인을 올려다보던 선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려가다 멈췄다.
아무도 없던 건너편 길거리에 누가 서 있었다.
하필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알아보기도 쉬웠다.
셔츠 차림의 범진이 담배를 꼬나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로 담배 끝을 씹은 탓에, 테두리가 선명하지 않은 연기가 얼굴 근처에서 풀풀 피어나고 있었다.
얼굴은 구겨진 종이짝 같았다. 찌푸린 인상으로 범진은 담배를 홱, 침 뱉듯 뱉었다.
밝은 낮인데도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실 같은 연기는 선명히 보였다.
선재는 버려진 담배를 쳐다보다, 갑자기 털썩털썩 걸어오는 범진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차도를 두고 있었지만 차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였다.
갑자기 다가오는 범진 때문에, 선재는 몸을 돌려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범진이 하는 수상한 일이 땅과 건물에 관련돼있는 건 안다. 아파트 건축현장 때문에 이 근방을 찾은 것 같지만. 선재는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고 생각하며 오르막길을 걸어 올랐다. 햇빛이 어찌나 강한지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반짝반짝했다.
“아는 척도 안 하냐?”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선재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봐야 하나 싶으면서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이러면 얼굴을 안 보고 사는 게 아니지 않나.
“아는 척도 안 하냐고요, 형님.”
성큼 가까워져 들리는 소리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돌자마자 제 얼굴 전체에 그늘이 졌다. 경사가 있는 길인데도 범진의 키가 워낙 커 제 얼굴에 그늘이 졌다. 방금까진 세상이 하얬는데, 범진 때문에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러고 돌아다니지 마라?”
“뭐가.”
“이딴 거 두르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뭔 소린가 싶었는데, 범진은 갑자기 앞치마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앞으로 몸이 쏠린 선재가 범진의 팔을 양손으로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미간을 좁히며 위를 쳐다보는데, 범진은 앞치마만 제 앞으로 끈 채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해봐라.”
“….”
“…말 안 하냐?”
갑자기 무슨 말을 해보라는 건지 몰랐다.
선재는 범진이 집요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 봤자 코앞이라 범진의 얼굴이 보이지만.
“이게 썅….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새끼나 만나고 다니고.”
설마 윤형을 말하는 것일까. 선재는 스치는 얼굴이 있어도 말은 하지 않았다. 만나러 다닌 적도 없지만, 따로 해명을 하는 것도 웃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슨 마음을 갖고 제게 이러는 건지. 선재의 눈가에 피곤한 기색이 맺혔다.
하라는 대로 했고, 혹시나 몰라 걸었던 전화에서는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나중에 확실하게 선을 그은 건 범진이 아닌가? 왜 묻냐는 말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거를, 왜 나한테 묻습니까?’
그 말이 제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건 맞았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가 되어 기뻤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무심하게 말을 높이던 날에도 처음에만 어안이 벙벙했지 시간이 가면서는 확신처럼 굳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범진이 저를 놓았구나, 하는 확신. 그 확신은 전화 통화에서 완전히 굳혀졌던 것이고. 범진의 말은 선재의 가슴속에 깊이 남았다. 가슴이 아픈 것도, 서러운 것도 아닌데 가슴에 남는 말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여태 질질 끌었던 관계가 그리도 쉽게 끝나는 것에 허무감이라도 들었던 모양이다.
선재는 어? 하고 다시 앞치마를 쥐고 흔드는 범진의 손길에 더는 다른 곳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코가 붙을 듯 바로 앞에 선 범진을 향해 눈을 들었다. 무지막지한 힘에 발꿈치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자존심이 상해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실었다.
선재의 눈이 얼굴에 닿자, 범진이 눈썹을 휘었다.
오랜만에 본 건 범진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으니 작고 예쁜 얼굴이 귀신처럼 보였다. 뭐 이런 게 다 있냐. 둘 다 비슷한 감상을 했지만, 속뜻은 달랐다. 뜨겁고 날카로운 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먼저 눈을 피한 선재가 나 가봐야 해, 하고 입을 열었다.
* * *
어린이집에 도착한 선재는 1층 화장실로 직행했다. 사방에서 쏘아졌던 빛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기온이 내릴 거라던 예보를 믿지 말 걸 그랬다. 아직도 낮이 되면 이렇게 더운데. 최대한 낮은 수온의 물을 손에 담았다. 그리곤 잠수를 하듯 얼굴을 그 물속에 담갔다. 겨우 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아.
어린이집은 평화로웠다. 선재는 2층으로 가 놀이방에 있던 아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리 준희가 있다고 해도, 과하게 특별히 돌볼 수 없음을 안다. 아이도 그걸 아는지 점심시간이 되어도 저를 찾지 않는다. 작은 식판을 내려다보는 준희의 모습을 유심히 볼 수 있는 건 아이들이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선재는 구름 모양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시선이 준희에게 닿으면, 한동안 다른 데로 돌릴 수가 없다. 준희는 오늘 사귄 친구가 너무 좋은 것 같다. 제 식판에 있던 계란말이까지 건네며 식사 시간 내내 밝은 얼굴을 했다.
선재는 의식적으로 손등을 얼굴로 가져갔다. 시원하긴 한데 열이 잘 식지 않는 것 같았다. 체온은 적당한데 화끈거리는 느낌이 남았다. 옛날에,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가도 싶었다. 왜 이러지… 언뜻, 벽에 걸렸던 거울을 슬쩍 봤을 때도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것만 빼면 첫 출근치곤 모든 게 무난하다. 선재는 잠이 든 아이들의 면면을 살핀 뒤 복도로 나갔다. 그래도 남자가 저뿐이라 청소는 도맡아 하고 싶었다. 도구가 다 구비되어 있으니 복도를 물걸레로 닦아볼 생각이었다. 창문 근처에 널린 걸레는 깨끗하게 말라 있었다. 일단 좀 털고….
창에 비친 풍경은 여름날 찍어놓은 사진 같다. 선재는 아까 보았던 크레인을 다시 올려다봤다.
아까도 아득하다 생각했었는데, 여전히 같은 감상이 들었다.
“….”
선재는 뒷걸음질을 치며 걸레 위에 앉은 먼지를 털었다.
범진이 또 길 건너편에 서 있어 의식이 된 탓이었다. 어딜 왔다 갔다 하는 건가. 자꾸 모습을 보이는 게 신경이 쓰였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니 볼일 때문인 것 같긴 한데. 범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왜 하필 이 주변에서 일을 하게 된 걸까. 참 지독한 우연이었다.
“아으빠아….”
갑자기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선재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준희가 옷깃을 잡고 울먹이고 있는 게 보였다. 어린이집에 오면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갑자기 아빠 소리를 했다. 선재는 걸레를 바닥에 접어두고 자세를 낮췄다. 준희를 쳐다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무서….”
“…꿈꿨어?”
조명이 반쯤 꺼진 원실에서 일어나 있는 아이는 준희뿐이다. 선재는 아까 잠들었던 준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나. 선재가 준희의 작은 몸을 품으로 끌었다.
“꿈꿨지? 꿈 아무것도 아닌데.”
“끅….”
낮잠 시간에 조용히 해야 하는 걸 아는 것인지, 아이의 울음이 극도로 억눌려 있었다. 눈물이 떨어지는데도 어깨만 조금 흔들릴 뿐이다. 이렇게 무서워하면 다시 잠들기도 글렀다. 준희의 축축한 눈가를 바라보던 선재가 원실 문을 열었다.
“그네 타러 가자. 그네 타면 괜찮지.”
익숙하게 준희를 안아 들었다. 선재는 준희의 작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눈짓을 했다. 준희 그네 좋아하니까, 그네 타자. 뜻이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했다.
부드럽게 달래 주자 또륵또륵, 반듯한 뺨을 타고 내리던 눈물은 멎었다. 선재가 아이의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작고 약한 등. 숨을 쉴 때마다 올라오는 등에 약한 힘이 실려 있다. 이렇게 작고 여린 아이가 시골집에서 그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면 여러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선재는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도 그런 일을 초래한 범진과,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순서대로 떠올렸다.
놀이터는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선재는 준희를 고무바닥에 내려주었다. 계속 훌쩍거리긴 해도 준희는 앞쪽을 향해 걸었다. 곧 그넷줄을 잡고 저를 쳐다보는데,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간 선재가 아이를 그네 위에 올려주었다.
“잘 잡아.”
“네에.”
가볍게 흔드는 정도로, 선재는 아이의 등을 밀어주었다. 혹시 모르니 줄을 잘 잡으라고 한 건데, 작고 하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선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살살 등을 밀어주니 아이가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왔다 갔다 했다. 재미가 있는지 울음이 그렁그렁했던 얼굴도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선재는 아예 앞으로 가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압!”
“그렇게 재밌어?”
“압! 아붓지!”
“뭐?”
“주니 아붓찌…!”
“그게 무슨 말이야?”
미묘하게 저를 쳐다보지 않는 듯했다. 준희의 눈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또.
범진이 껌을 씹으며 서 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도 아니고, 놀이터 목마 기구 옆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어린이집엔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문이라도 넘었나? 놀이터는 어린이집 뒷문과 굵다란 철창문과만 연결되어 있었다. 낮은 철창문은 범진이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의 높이다. 선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 안 돼.”
준희는 몸을 앞으로 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려서 뭘 어쩌겠다고…. 하지만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나온 탓에, 계속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선재는 결국 준희를 그네에서 내려주었다. 천천히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아이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선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아부지이이….”
“…내가 안고 싶어서 안는 거 아니다이.”
선재는 진심으로 골치가 아팠다. 두 팔을 뻗으며 다가간 아이를 번쩍 안아 든 범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입 끝은 누구를 놀리듯이 잔뜩 올라간 채였다. 애는 저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제발 경계를 해줬으면 했다. 선재가 이마에서 손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이마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내려줘.”
“니 새끼가 먼저 왔는데 어쩌라고.”
“아부디… 주니….”
“…그래, 임마.”
제대로 안을 줄도 모르면서 협박하듯 아이를 내려놓지 않는다. 선재는 미간을 좁힌 채 범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애는 어디서 아부지라는 말을 배워서. 범진이 관광호텔에서 저를 아부지, 하고 칭하기는 했지만 그걸 기억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는데. 몇 번 들은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쓸 줄은 몰랐다. 선재가 범진의 품에 폭 안긴 준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희, 이리 와.”
“…아부지이… 가지, 가지 마데요….”
“….”
가지 마세요…. 범진이 어느 시점부터 눈에 보이지 않던 걸, 아이도 의아해하긴 했었다. 집에서 뽀뽀하는 시늉을 하며 아빠, 한 것도 역시 범진을 향해진 말이었다. 이대로 품에서 떨어지면 영영 보지 못할 걸 알기라도 하는지, 아이는 범진의 품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매달리지 않아도 워낙 품이 커 한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지만.
“얌마. 아부지가 그리 좋냐?”
“네에.”
“느 애미는 씨….”
발, 까지 나올까 선재의 눈꺼풀이 살짝 조여들었다. 씨… 하는 소리가 숨에 섞여들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발’은 나오지 않았는데,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워낙 욕을 달고 사니 한 번 씨, 하고 넘어갔다고 다른 욕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말이 많이 늦긴 했지만, 아이는 최근 들어 다양한 단어를 익히고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아부지. 그 말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제 뭐든 따라 할 것이다. 전까진 범진이 욕을 해도 강하게 말린 적은 없었는데 더는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나마 준희 앞이면 단호하게 말을 하는 편이긴 하지만, 혹시 손이 날아올까 봐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준희 앞에서 뺨이라도 맞으면 준희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게 무서워 눈치를 봐 왔었다.
“아기 줘….”
“임마가 안 내려가는데 어쩌냐.”
“하지 마, 좀.”
“…야.”
“…왜.”
“내가 뭘 하겠냐.”
“….”
범진은 선재가 왜 아이 앞에서 신경이 곤두서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또 안달이 나는 쪽은 선재다. 널따란 품이 편안한지 준희는 뺨까지 구긴 채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뜨고 있었다. 햇볕이 따뜻했다. 선재와 범진의 대화와는 무관하게, 아이는 잠에 빠질 듯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그 눈을 쳐다보던 선재가 한숨만 푹 쉬었다.
“땅 꺼지겠네, 씨….”
“욕하지 마.”
“…내가 하디?”
“….”
“야.”
“…왜.”
“오늘 밥 먹자.”
“…무슨 밥을 먹어.”
선재는 준희만 쳐다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범진의 움직임에 따라 준희의 뺨이 멋대로 눌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봤자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준희는 해준 것도 없는 범진을 왜 저렇게 좋게 여기는 것일까. 애가 재정과 관련된 부분을 알 리도 없고. 거기까지 생각한 선재가 어쩔 수 없이 시골에서의 기억을 또 돌이켰다.
아빠, 아빠, 하고 범진을 칭했던 건 거의 그즈음부터다. 처음엔 제게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다른 곳을 가리키거나 없다는 식으로 말해 범진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이 집에 살았기 때문일까. 처음엔 그런 유추만 할 수 있었다. 준희가 당시의 불안을 감지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준희는 그 시골집에 올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범진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불안한 시간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범진이 올 거라는 나름의 확신이 아이 머릿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아파 범진이 했던 말은 잊으려고 노력해왔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평상 위에서 울고 있었다는 준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지우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났고,
범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말엔 마음이 시렸다.
완전히 마음을 놓아야 우는 준희의 성정을 안다.
그래서 지금, 억지로 범진에게서 아이를 떼어낼 수 없는 것도.
선재의 눈은 어느새 범진의 팔에 가 있었다. 혹시 엉성하게 안아 떨어트리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다.
“목구녁에 기름칠이나 할까.”
“….”
“대답 안 하냐.”
그래도 이건.
선재가 눈을 들어 범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아까도 그렇지만, 지금은 놀이터까지 들어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놓아주겠다고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보았다. 표정 없이 범진을 향하던 눈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놔주….”
“뭐라고?”
“놔주겠다면서.”
“허.”
“….”
“선재야.”
“….”
“내가 미쳤냐?”
황당한 일을 저지른 게 누군데. 범진은 제가 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뭐?”
“내가 미쳤다고 니를 놔주냐고.”
“….”
여전했다. 말을 잃게 하는 데 선수인 것도 똑같았다. 뭘 더 물어봐야 하나. 선재는 제가 들은 말이나,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따위를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전화는 왜 그렇게 받았는지, 말까지 높여가며 잘 있으라 말한 건 무엇 때문이었는지. 무엇보다, 네 위험한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지를. 하지만 저 얼굴. 제 할 말만 하고 마는 저 남자와 대화를 하겠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 * *
근무는 6시까지. 종일반 아이들이 귀가하는 시간은 다 다르다. 선재는 첫 타임 아이들만 귀가시켜주면 되었다. 지금은 5시가 약간 넘었다. 귀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하지만, 선재는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몇 번이나 고갯짓을 했다. 아이들 개인 사물함이 어디 있는지. 위치도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님 가방!”
“아, 미안. 그래.”
유리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자, 뒤에 있던 아이 한 명이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손을 보니 가방에 담아야 할 학용품이 가득이었다. 글자를 쓰기 시작한 아이들은 준희같이 어린 아기들보다 준비해야 할 물건들이 많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선재가 원실 밖으로 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사물함에 있던 1차 종일반 타임 아이들의 가방을 꺼냈다. 총 세 개. 이름을 여러 번 확인하고 원실로 들고 왔다. 통유리로 들어오는 빛은 물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여전히 희고 눈부셨다.
“여기 은호 가방. 지호, 연지.”
아이들은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선재는 이름을 확인하고 텅텅 빈 가방들을 차례로 나누어주었다. 준희는 아직 가방 멜 줄 모르는데. 메어줘도 끈이 금방 흘러내려 손으로 끌고 다닐 때가 많았다. 이번엔 좀 다를까. 그나저나 애는 어디… 주변을 둘러보던 선재가 구석에 앉아있는 준희를 발견했다. 준희는 감자 장난감을 모형 칼로 썰고 있었다. 다가간 선재가 준희 앞에 앉았다.
“준희야, 장난감은 그만.”
“간쟈. 성샌님.”
“…감자 먹어? 나?”
“네에.”
고개를 끄덕이는 준희의 모습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언제라도 선재가 배를 곯았다고 생각하면, 준희는 꼭 감자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지금도 선재가 밥을 못 먹은 것 같자 나름대로 감자 장난감을 모형 칼로 자르고 있던 것이었다. 선재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집에선 어떻게 해도 좋지만, 밖에서 다 같이 정리한 장난감을 다시 꺼내는 행동엔 주의를 줘야 했다. 그래도 저를 생각해 플라스틱 감자를 건네는 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준희의 어깨를 끌었다.
“형아 누나들 배웅해주고 집에 가자.”
“녜에….”
통창으로 드러나는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해가 길어 아직도 빛을 여기저기 걸어둔 듯한 느낌이 났다.
종일 범진에게 시달린 탓인지, 선재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안 된단 식으로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 6시까지 일해. 밥 밖에서 먹으면 준희가 피곤해해. 집에 가면 아기 잘 시간. 별의별 이유를 대고 있었더니 나중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범진은 앞에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어쩌라고. 원숭이랑 말을 해도 이것보다 나을 것이고, 이 생각은 언젠가 해본 것 같기도 했다. 선재는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것 하나 없는 범진과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놓아주기로 했고, 태도도 그렇게 했으면 저를 좀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싶었다.
도통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빱빠, 가아….”
다른 선생님이 올라오자 준희가 선재의 손을 잡았다. 이제 갈 시간인 걸 준희도 눈치챘나 보았다. 시계는 6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재도 올라온 선생님에게 짧은 묵례를 하며 눈을 마주쳤다. 주변을 간단히 정리한 뒤, 미닫이문을 열고 원실을 빠져나왔다.
손에서 구르는 듯한 작고 따뜻한 준희의 손은 언제나 느낌이 좋았다.
“준희야, 오늘 밥 먹고….”
“주니 밥….”
“응, 밥. 밥 먹고 집에 들어가자.”
아까, 범진의 품에서 준희는 결국 잠이 들고 말았었다. 범진만 빼면 참 평온한 풍경이었다. 뜨겁긴 해도 밝은 햇살과 나무, 흔들리는 그네와 잠드는 아이. 선재는 그때도 준희의 젖은 속눈썹에만 시선을 보냈다. 범진의 딱딱한 몸에 볼이 눌리면서도 잠든 아이가 신기했다. 그리곤 어땠더라… 안심하기도 했나.
선재는 1층 신발장에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
인도에 바퀴를 걸고 멈춰 선 차 한 대가 보였다.
모를 수가 없는 차다. 선재는 검정색 SUV 차량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신발장에 손을 뻗었다. 준희의 신발을 내려주고 제 신발에 발을 넣기 시작했다. 샌들을 신을까 하다가 운동화를 신고 왔다. 범진과 만날 생각을 하니 그건 잘한 판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발가락을 내놓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원래도 좋은 감정이 있던 건 아니지만 오늘 말이 안 통했던 범진은 제게 더 안 좋은 인상만 남겼다. 제일 큰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전화를 받고 있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조수석 창문을 내린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부지이이…?”
“준희야, 아저씨 해봐.”
“아젓씨.”
“응, 저 삼촌 그렇게 부르면 돼. 다시 해봐.”
“아젓씨.”
“옳지.”
말은 어찌나 잘 따르는지. 선재는 준희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척 ‘아저씨’라는 단어를 열심히 가르쳤다. 아이가 입은 노란 티셔츠엔 뭐라고 레터링이 되어 있었다. 겟 고잉 토이. 부직포 같은 질감의 레터링인데 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선재가 손을 들어 그 부분도 털어냈다. 탈탈.
“아주 세탁소를 차려라.”
“….”
핸들에 팔을 건 범진이 열린 조수석 창을 향해 말을 던졌다. 투는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선재가 준희의 손을 꼭 잡았다. 맘 같아선 택시 타고 집에 가고 싶지만, 텅텅 빈 도로라 그럴 수도 없다. 감행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범진의 차까지 다다랐다. 선재는 뒷좌석 문을 열고 준희부터 태웠다. 조수석에 탈까 했지만, 그냥 준희의 옆에 몸을 싣기로 했다. 오랜만이라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차내였다. 선재는 팔을 크게 둘러 준희를 어깨동무하듯 안았다. 아이의 작은 두 손을 한 손에 쥐었다.
“죽을래?”
“…뭐를.”
“허어.”
저렇게 웃는 게 버릇이 됐나. 어이없다는 듯 웃는 걸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봤다. 선재는 범진이 위치한 대각선 쪽이 아닌, 앞의 조수석 쪽에 눈길을 보냈다. 말을 시키면 룸미러를 흘끔 쳐다보다 눈을 내렸다. 장난 섞인 말을 들어도 특별한 반응을 해주지 않았다. 선재는 갸웃거리는 아이의 뺨만 손등으로 쓸었다.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뺨에,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멀리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바람과 달리, 차는 한 시간 내내 도로 위에 있었다. 밀리는 구간은 끝도 없이 밀렸다. 몇 번 아슬한 상황이 있었고 그때마다 범진은 차창을 내려 손으로 뭔가를 하는 듯했다. 유심히 본 적은 없지만 가운뎃손가락을 내밀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선재가 그때마다 준희의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창문을 보게 하거나 제 얼굴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우으응? 하고 의아해하는 아이의 양 볼을 두 주먹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러고 있으면 운전석 차창이 스윽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래도 작년처럼 무턱대고 쌍욕부터 내지르진 않으니 그건 다행이다.
애초에 운전을 조심해서 하면 될 것 아닌가?
다른 차들이 끼어드는 걸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양해를 구하고 들어오는 차량에도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그저 제 갈 길만 갈 뿐이다. 그동안 사고가 안 난 게 용하다. 저렇게 살면 기분이 좋을까? 선재는 생전 하지 않던 질문도 마음속으로 던져보는 중이었다. 원래도 이해가 안 갔지만, 오늘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욱 그 속이 궁금했다.
차는 어느 대로변에서 길을 한 번 꺾은 뒤 멈췄다. 지붕 장식이 화려한 건물 앞에서였다. 3층짜리 건물인데 1층부터 3층까지가 모두 같은 식당인 듯했다. 큼지막한 수조가 있는 걸 보고 회를 먹으러 온 건가 싶었다. 메뉴야 뭐든 상관없었다. 준희는 집에서 따로 먹이면 되고. 언제든 기분만 좀 좋아 보인다면 집에 가겠다고 말을 할 예정이었다. 밥 먹다가 한 번은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런 어렴풋한 생각으로 범진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엔 고급 코스요리 전문이라는 글귀와 함께 화려한 요리 사진으로 전환되는 작은 화면이 하나 있었다. 멍하니 그걸 쳐다보던 선재가 3층에서 범진을 따라 내렸다.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안까지 들어갔다.
3층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람도 거의 없고 조명도 적당히만 밝았다. 옆으로 밀고 당기는 형식의 문들이 가득했다. 숫자 2가 멋진 필기체로 붙은 문을 열자 기다란 테이블이 드러났다. 분위기가 아늑해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선재가 준희의 신발을 벗겨 주고 아이부터 방으로 들였다.
“주니 이거….”
코스요리랬는데 이상할 정도로 한꺼번에 나왔다. 한 상에 가득 차려진 요리들이 하나같이 요란하고 화려했다. 가운데 놓인 참치회는 모양이 휘황해 손을 대기도 꺼려졌다.
준희가 가리킨 건 고급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오코노미야키였다.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먹을 몫만 조금 덜어 아이 앞에 놓아주었다.
“맛있냐?”
“녜에.”
시끌시끌한 식당에 끌고 올 줄 알았는데. 이러면 가겠다고 말도 못 하지 않을까. 범진은 와중에도 아이를 향해 건달처럼 말을 걸고 있었다. 선재의 얼굴이 약하게 흔들렸다. 말을 곧잘 따라 하는 아이가 이상한 말투를 배울까 염려가 되었다.
“아부디 주니 이거어….”
“….”
그렇게 아저씨라고 부르랬는데 또 아부지라고 부른다. 바로 앞에 범진이 앉아있으니 표정으로 티도 낼 수 없다. 선재는 괜히 식사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아이야 생뚱맞은 소리를 할 수 있지만, 범진이 다르게 듣는 게 싫다. 범진은 그냐, 하고 영양가 없이 대답했다.
“야, 얼굴 들어봐.”
뒤이어 들린 말에 선재가 고개를 들었다.
“…뭐 발랐냐?”
“…아니.”
뭘 빤히 쳐다보는 듯해 선재도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뜨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걸 보니 또 빨개진 것 같았다. 실내는 에어컨 때문에 시원했다. 아까부터 올랐던 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나 보았다. 선재가 앞에 있던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갑자기 세수를 하러 가기도 뭣하니, 이것으로 열기가 좀 가셨으면 했다.
“뭔 생각 하냐. 시뻘게져서.”
“…무슨.”
“생각하는 김에 저거 진짜 내 새끼인지도 함 생각해봐라. 내가 몇 년 전에 니 어디서 한번 본 것 같긴 하그든.”
그런 이상한 말을 할 줄 알았다. 범진은 뭐가 웃긴지 상체를 뒤로 빼면서까지 소리 내 웃었다. 범진을 향해있던 눈이 금방 아래로 내려왔다. 큰 숟가락으로 오물오물, 앞에 놓아준 음식들을 어떻게든 떠먹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선재는 범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런 아이의 숟가락에 생선 살이나 발라서 놓아주었다. 웃든지 말든지.
얼마나 웃어댔을까.
갑자기 소리를 뚝 멈춘 범진은 앞으로 손부터 뻗었다.
“고개는 들어야지.”
“….”
“고개 안 드냐?”
“….”
조용한 공간이라 범진이 말하면 준희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하곤 한다. 분위기를 나쁘게 몰면 어차피 제 손해란 생각에, 선재가 고개가 천천히 들었다. 물수건으로 얼굴을 무작정 닦아서인지 뺨이 국소적으로 지끈댔다. 그 얼굴을 쳐다보던 범진이 머리를 비스듬히 젖혔다.
“니 뭐 잘못 먹었냐.”
“…왜.”
“쌍파, 얼굴.”
얼굴이 어떻길래, 하는 마음과 쌍판이라고 안 해 다행인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했던 말을 또 하는 걸 보니 얼굴이 많이 이상한가 싶긴 했다. 신경은 쓰이니 손이 또 자연스레 얼굴로 올라갔다. 더듬듯 뺨을 만져보자 돋아난 느낌은 없다. 아프지도 않고.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선재가 뺨과 턱 부근을 계속해서 쓸었다.
“…나 그럼 잠깐 화장실에.”
“됐다. 봐 줄 만하다.”
“….”
봐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런 말이었다. 표정만 딱딱하게 굳힌 선재가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식사라고 해도, 젓가락으로 앞접시에 있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게 전부였다. 아까부터 맛은 느낄 수 없었다. 맛있고 고급스러운 요리인 건 같은데 앞에 범진이 있어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선재의 고개가 틈만 나면 옆으로 돌아갔다. 주먹으로 야무지게 숟가락을 쥔 아이의 손이 유독 작게 보였다.
“우응?”
“아니, 준희 먹어.”
“압빠도 드…드에요.”
어디서 들었는지 드세요,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귀여움에 입술이 움찔, 움직이다가도 경직이 찾아왔다. 한참 뜸을 들이고, 선재는 입을 열었다.
“…어, 아빠도 먹을 거야.”
아이가 보기에도 식사에 시큰둥하게 임하는 것 같을까. 선재는 범진이 저를 어떻게 볼까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불편한 걸 티 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여태 깨작거리며 입을 축이는 정도였는데, 좀 열심히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앞에 있던 젓가락을 든 선재가 초밥이 놓인 접시로 손을 뻗었다. 회는 먹는데 초밥 위에 올라간 날생선은 좋아하지 않았다. 제일 만만한 달걀 초밥을 앞접시로 가져오자 범진이 대번에 뭐라 한소리를 했다.
“먹어도 그딴 걸 먹냐….”
“뭐….”
“이런 걸 먹어야지, 이거.”
범진이 건넨 건 껍질의 결이 그대로 산 생선 초밥이었다. 무슨 생선인지도 모르겠고 껍질의 결도 너무 잘 드러나 거부감이 들었다. 제대로 손질한 건 맞겠지… 색도 검은 데다 껍질 무늬도 선명해 젓가락이 쉬이 가지 않았다. 결국, 범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뒤, 초밥을 입 안에 넣었다. 안 먹으면 한 대 때릴 것 같은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떤데.”
“마잇네….”
입 안에 초밥이 들어 있는 상태론 정상적인 발음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선재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답했다.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말이다. 계속 씹히는 잔뼈에 눈가도 찡그려졌다. 매운 향이 나는 데다 껍질은 왜 이렇게 질긴지 몰랐다.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물로 입에 남은 껍질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찝찝한 느낌이 남은 채로, 선재는 범진의 젓가락에 시선을 던졌다. 저를 약 올리려고 이런 걸 줬나 싶어서였다. 허나 범진은 그 초밥을 잘도 먹었다. 왜, 하나 더 주랴? 하고 묻는 말투에선 진심이 묻어나왔다. 선재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다른 걸 열심히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범진 때문에 신경이 쓰여 못 먹은 것이지, 배가 안 고픈 건 아니었다.
선재는 앞에 있던 알밥을 제 앞접시에 떠와 그걸 입에 넣기 시작했다. 범진은 초밥을 제외한 밥류에 손을 안 대고, 준희는 죽을 먹어 알밥은 처음 형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톡톡 터지는 알에선 상큼한 향기만 감돌았다. 대충 비빈 알밥을 입에 넣은 선재가 그제야 볼을 부풀렸다. 식사가 시작된 후로 거의 처음이었다.
“그게 맛있냐?”
끄덕끄덕. 뭘 하나 먹을 때마다 말을 거니 반응할 준비부터 하고 있어야 했다. 궁금하거나 못마땅하면 본인이 먹거나, 안 먹으면 그만일 텐데. 꼭 이 가게의 주인처럼 말을 걸어왔다.
선재는 생각보다 맛이 좋은 밥 위에 튀김까지 올려 먹었다. 워낙 큰 튀김이어서 가위로 잘라 크기를 맞추었다. 알밥 위에 올리자 튀김 덮밥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범진이 신기한 얼굴을 했다.
“니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본다.”
“….”
범진과 눈이 마주친 선재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실상의 첫 끼니인가. 아침도 대충 먹었고, 점심엔 밥을 거의 걸렀다.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가 버렸는데.
범진과 땡볕에 서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알레르기만 얻은 셈이었다.
선재는 갈수록 뜨거워지는 얼굴을 느끼며 밥만 열심히 먹었다. 맛이 괜찮다, 정도였던 알밥은 먹을수록 손을 부르는 맛이었다. 큼지막하게 썰린 전복의 식감도 좋고, 재료의 조화도 최상이었다. 밥 위에 올린 튀김들은 눈꽃을 맞은 것 같았다. 밥과 먹기 아쉬울 정도로 바삭거리고, 속도 알이 꽉 차 있었다. 종일 굶긴 했지만 이런 식사다운 식사도 오랜만에 하는 것이었다. 더는 시늉이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