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9/29)

* * *

30분이나 지났을까. 범진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실실 웃으며 저를 따라붙었다.

“대들지 마라.”

“….”

준희가 먹을 과일을 준비하던 선재였는데, 그 말엔 고개가 돌아갔다. 실 웃는 범진이 또 대들지 말라고, 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뭘 어쩔까.

“두 번 말하게 할래?”

“…알았어.”

그렇게 확인하듯 물으면 대답을 안 할 수도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 선재가 바나나 껍질을 손으로 벗겼다. 작은 나이프로 아이가 먹기 적당할 만큼 조각을 냈다.

준희는 거실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있었다. 선재는 범진이 왜 다시 일을 나가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걸 물었다간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싸움 같은 걸 해놓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가? 왜 옆에서 건들거리며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왜 자꾸.”

“왜 자꾸?”

“….”

“뭐만 하면 찔찔 짜는 게.”

선재는 바구니에 있던 포도를 몇 알 떼 그릇에 담았다. 잘라놓았던 바나나도 마저 담자 구색이 딱 맞았다. 범진의 말은 이미 하나도 안 들렸다. 계속 웃는 걸 보면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란 생각만 들었다. 최소한의 생각이나 시간도 없이 접근해오는 범진을 피하고만 싶다. 선재는 뒷정리도 하지 않고 준희가 있는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희, 과일.”

“주니에 가일.”

손뼉 치듯 작은 손바닥을 몇 번 맞댄 아이에게 과일 접시를 건넸다. 밑면이 넓어 아이가 옆에 두고 먹기에 딱 좋은 접시 모양이었다. 준희는 꿀벌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보통 영화는 오래되면 세월의 티가 묻는데,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그런 게 덜했다. 거실은 소파와 침대를 두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넓었다. 거실 한 가운데의 미니 소파에 자리를 잡은 준희를 내려다보던 선재가 입을 열었다.

“준희, 들고 먹을 수 있어?”

“녜에.”

과일은 될 수 있으면 맨손으로 먹게 한다. 바나나가 좀 그렇긴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이라 어쩔 수 없다. 아이용 포크를 써 보게 한 적도 있지만, 힘이 없어선지 잘 찍어내지 못했다. 바나나 한 조각을 먹는 것까지 확인한 선재가 뒤로 돌아 과일 껍질을 정리하러 주방으로 갔다.

어디로 간 것 같아 돌아온 건데… 또 범진이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말할 거 있으면 거기서 말해. 입을 열어 그런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우브…읍.”

범진의 입술이 제 입술에 그대로 닿았다. 힘 좋은 혀가 입 안으로 막무가내로 들어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키스지만 언쟁이 오간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다. 선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어떻게든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이게 지금 상황이랑 어울리는 행위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 *

선재는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염려해 윤형에게 문자까지 했다. 아는 동생이고, 잠시 같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전혀 아니니까, 까지 썼다가 지웠다. 어떤 오메가가 아는 동생 집에, 그것도 알파인 동생 집에 애를 데리고 얹혀살 수가 있나? 선재는 결국, 그저 오해하지 말아달라고만 썼다. 다음에 얘기 자세히 해드릴 테니, 괜한 수고는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윤형에게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설마 신고를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게 되면 걱정한 대로 일이 커져 버리고 만 거다. 선재는 윤형이 집에 찾아왔을 당시의 비디오폰 화면을 따로 저장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

“….”

차창을 쳐다보며 혹시 있을 일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선재는 옆으로 고개를 틀어 범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닿은 눈을 금세 알아차린 범진이 고개를 돌리고 손, 했다. 커다란 손을 쳐다보던 선재가 범진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손도 안 주냐?”

“…운전이나 해.”

“하아, 이게 진짜.”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며 안 되겠다고 말하는 범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낮에 그렇게 화를 냈었는데. 이제는 그때 느꼈던 살벌함을 저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선재는 눈을 피하며 앞유리창을 쳐다봤다.

도로는 늘어났다 좁아졌다 했다. 저녁 시간대라 차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 게 보였다.

범진은 나오기 전까지도 시비를 계속해서 걸었다. 유치하고 짜증 나는 말만 반복했으며, 뭐라고 항변이라도 할라치면 입을 비벼왔다. 불같이 차올랐던 화가 다 식은 다음이었다. 그렇게 화가 나도 10분… 10분이 뭔가. 1분도 안 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선재는 여전히 젖은 눈을 들고 범진을 쳐다보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될 수 있다면 저도 태연하고 싶었다. 범진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이 많으면 사는 게 쉬울 것 같았다. 범진의 말대로 뭐만 하면 ‘찔찔 짜는’ 사람은 되기 싫었다.

“손 줘보라니까.”

“….”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긴 해서, 이쯤 되면 말을 들어야 한다. 선재는 앞쪽에 모으고 있던 손 하나를 범진의 손바닥 위에 가져갔다. 그러면 손 여기저기가 감기고, 샅샅이 만져지게 된다. 처음엔 깍지를 끼는가 싶었는데, 손가락 살점이 빨개질 때까지 요리조리 꼬집고 만지기만 했다. 선재가 룸미러를 통해 카시트에 앉은 준희에게 눈길을 보냈다.

준희는 처음에 카시트에 앉는 걸 무서워했다. 으으응, 하고 고개를 저으며 선재에게 매달렸었다. 빠끔히 드러나는 풍경만 쳐다보다 시선이 위로 올라가니 많이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달랜 다음에야 준희를 거기 앉힐 수 있었다. 범진이 유아용품 매장에서 샀다는 카시트는 준희의 몸에 딱 맞았다. 일주일이나 되었을까. 처음엔 범진이 그런 곳에 갔다는 것도 상상이 안 갔고, 준희를 위해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낯선 느낌도 많이 받았었다.

고맙다고 말했을 때 범진은 어떤 반응을 보였더라. 아마 지저분한 말로 받아쳐서, 제가 금방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도 엉덩이를 꼬집히듯 잡혀 몇 걸음이나 물러났던 기억이 있다.

“니 어떡할래. 바람이라도 쐬든가.”

“주니…! 주니…!”

조용히 바깥 구경을 하던 준희의 입이 열렸다. 도착한 곳은 공터처럼 생겼지만, 텅텅 빈 주차장이었다. 앞에 있는 건물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차에서 이미 내린 범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걸 보면 따라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선재가 뒷좌석을 한 번 쳐다보고, 범진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안에 사람 많아?”

“아니.”

“아기랑 가도 돼?”

“어.”

“그럼 같이 가.”

“….”

“왜… 가면 안 돼?”

“…대신에 니. 마스크 써라.”

초가을에 웬 마스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범진은 차 보닛을 빙 둘러 선재가 있는 조수석까지 금세 다다랐다. 문을 열고 글로브 박스를 뒤지더니 얇은 비닐에 싸인 마스크 하나를 꺼냈다.

“자.”

“…왜.”

“니 보여주기 싫어서.”

“….”

선재는 턱에 닿는 까칠한 포장지에 인상을 썼다. 안 쓸 거면 차에 있고. 하는 목소리에 그럴까도 생각이 들었지만, 뒤에서 내리고 싶어 하는 준희의 음성이 신경 쓰였다.

“…줘. 줘야 쓰든 말든 하지….”

범진이 포장된 마스크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뒤늦게 포장지를 찢는 범진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평범하고 하얀 마스크였다. 그걸 건네받으려던 선재가 범진이 마스크를 뒤로 빼는 바람에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범진은 마스크를 바깥으로 내민 채 몇 번이나 털었다.

“얼굴 보자.”

“….”

달라는 마스크는 안 주고, 차 문을 연 채로 제 얼굴을 쳐다보기만 한다. 선재는 갑자기 들린 턱에 눈가를 찌푸렸다. 범진 뒤에 둥둥 든 해는 아직까지도 밝았다. 노란빛이 스미긴 했지만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선재의 눈가와 이마, 콧잔등이 동시에 오므라들었다.

“…눈 아파.”

“….”

1분 가까이 그 얼굴을 쳐다보던 범진이 별말은 않고 손에 들렸던 마스크의 줄 부분을 선재의 귀 한쪽에 걸었다. 그리곤 나머지 줄도 선재의 반대편 귀에 가볍게 걸어주었다. 가끔 현장에 볼일이 있을 때만 쓰고 나가는 마스크였다. 제게도 여유 있게 맞아선지 선재에겐 터무니없이 컸다. 결국, 뒤쪽에 남아도는 줄을 몇 번 묶어주니 사이즈가 대충은 맞았다.

“뭐 해….”

“가만 안 있냐. 이걸 묶어야 밖에를 나가지.”

귀 뒷부분이 몇 번 쓸리고 나서야 범진의 손이 떨어졌다. 손으로 더듬어 보니 한쪽으로 치우쳐져 모양이 이상할 것 같았다. 범진은 만족을 했는지 그제서야 뒤쪽으로 물러서듯 몸을 비켜주었다. 선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반대편 뒷좌석 문 앞에 가서 섰다.

“이리 와.”

“으응, 주니가….”

“걷고 싶어요…?”

“네에.”

아이는 안기기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안아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아이지만, 내려서 걷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재가 준희의 작은 신발을 바닥에 닿도록 만들었다. 금방 딱딱한 면이 닿는 느낌이 들어선지, 아이는 무릎을 굽혔다 펼치며 방긋방긋 웃었다. 올여름 삑삑이 소리가 나는 샌들을 신겼는데, 그 느낌이 남아 그러는 것 같았다.

“준희 그렇게 해도 소리 안 나는데.”

“으응…? 네에.”

“삐약이 신발 때문에 걷고 싶었던 거야?”

“네에.”

“오늘은 삐약이 신발 아니라서….”

“네에. 주니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까. 선재는 준희의 얼굴을 쳐다보며 옅은 웃음꽃을 틔웠다. 작은 감만 한 손이 제 손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보드랍고 고운 손. 선재가 확인하듯 그 손을 살포시 잡았다.

“장부만 확인하면 된다.”

“….”

옆에서 스윽 모습을 드러낸 범진에게선 담배 향이 났다. 그새 어디서 담배를 태우고 온 것 같았다. 선재의 고개가 준희 쪽으로 돌아갔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데도 냄새가 나는 거니, 준희부터 살피게 되었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고, 차도 몇 대 없었다. 사람을 많이 부리는 것 같았는데 주변이 황무지 같아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크게 궁금한 건 아니지만.

선재가 준희의 얼굴에 손을 한 번 댔다가 뗐다. 아이는 담배 냄새 같은 건 전혀 못 맡는 듯했다.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손짓을 하거나, 삑삑이 신발을 신은 듯이 무릎을 크게 들었다 놓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1층에 사무실이 있고, 2층엔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부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라고 했다. 시원하게 뻗은 팔로 가리킨 식당 창가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준희를 제대로 걷게 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범진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이런 일도 할 수 있는 걸까. 떠올려보면 범진을 만난 곳도 강원도의 한 재개발 구역이었다. 저번에, 고깃집 사장도 범진에게 땅에 관해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고.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말이 지금 이런 일만 하는 거라면 선재도 한시름을 덜 듯했다.

싸우고, 칼에 찔리고 하는 일은 안 했으면 싶었다.

선재는 앞을 향해 걷는 범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아까 다투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일은 일이다. 선재는 사무실에 뻘쭘하게 들어서서도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범진이 앉아있으라고 한 데는 직원들이 시선이 한눈에 집중되는 곳이었다.

“아안….”

“아냐, 준희 인사 안 해도 돼.”

선재는 소파 위에 발을 딛고 일어서려는 준희를 타일렀다. 직원과 눈이라도 마주쳤는지, 달랑 들린 발을 위로 올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배에 손까지 모으는 걸 본 선재가 준희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안냐세여….”

준희가 선재의 품에 안기면서도 인사를 건넨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바로 앞에 앉아있었던 탓에 아이의 시선을 끈 것 같았다.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을 쳐다본 선재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갔던 범진이 5분도 안 되어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선재가 몸을 일으키며 옆쪽으로 물러났다. 범진을 보고 일어서긴 한 거지만, 범진이 볼일이 더 있어도 여기서 앉아있고 싶진 않았다. 선재는 준희를 소파에서 내려준 뒤,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따뜻함이 섞인 가을바람이 선재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흔들었다.

“준희도 이게 좋지.”

“네에.”

“나무랑 꽃 보러 가자.”

“녜에….”

사무실 안쪽에 걸린 큰 시계는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재는 범진의 차 쪽으로 향했다. 그 근처에 있던 나무 아래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았다. 범진은 장부만 보면 된다고 하더니, 그 장부 보는 일이 간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담배나 뻑뻑 피우며 욕질만 할 것 같았는데 또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준희 좋아하는 나뭇잎.”

“주니 나무우.”

화단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털어서 주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 표정이 예뻤다. 선재는 그 얼굴을 계속 보려고 몇 번이나 새 나뭇잎을 주워다 작은 손에 쥐여 주었다. 결국, 열 개쯤 쥐고 있게 되자 준희의 손에서 한두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많이 쥐여 준 탓이었다.

“이거….”

계속 걷다 보니 차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다시 뒤쪽으로 방향을 튼 선재가, 화단 바깥쪽에서 새 나오는 인부들 목소리를 들었다.

“…그죠. 몸매도 잘 빠지고요.”

“그 새끼 듣는다. 조용히 말해라.”

“씨발, 인생이 뭔지. 나이는 비슷한데 누구는 부리고, 누구는 부려지고.”

여러 개의 작은 공이 튀어 나가는 듯한 대화였다.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지가 조폭이었으면 다냐고.”

“조폭 그거 진짜냐.”

“지금도 일은 보는 것 같던데요.”

“야, 그 새끼 전에 직원들 족치는 거 못 봤냐? 애인 있는 것 같아서 오메가냐고 묻기만 했는데도 씨발.”

“걔들도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물은 거 같던데.”

“그니까. 성질머리가 씨발, 어우.”

“근데 오늘 보니까 뭐… 그럴 만하던데요.”

점차 커지는 웃음소리 사이에, 선재가 아까 보았던 젊은 남자가 두 팔을 앞쪽으로 뻗고 무언갈 잡는 시늉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골반을 볼썽사납게 쓰며 섹스하는 듯한 흉내를 냈다.

“그 새끼 좆집이면 얼마나 맛있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 새낀데.”

“와, 이 형이 뭘 모르네. 오메가는 남자 새끼들이 더 쫄깃쫄깃하고 맛있어요. 떡집 가도 오메가는 남자들밖에 없는데. 내가 형 조만간 떡집 한번 데려가 줍니다.”

“됐다, 씨발.”

“옆에 꼬맹이도 나중에,”

선재는 거기까지만 듣고 준희를 냅다 안았다.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지만, 분명히 보았던 사람이니 제 얘기가 맞는 것 같았다. 근처에 꼬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도 준희뿐이었다. 화단 쪽에서 정신없이 걸음을 떼니, 소리는 일순간에 멀어졌다. 주차장 한가운데 서자 천천히 부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으응…?”

“…다른 데서 놀자. 준희야.”

“…녜에.”

선재는 품에서 느슨히 안은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찬찬히 쓰다듬어주었다.

얼마나 급하게 안았는지 작은 손에 쥐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바닥에 뿔뿔이 흩어져버린 채였다.

“주니… 나무….”

“응. 다시 주워줄게.”

“녜에, 아, 아부… 주니 아부지이….”

“아저씨 안에 있어.”

“…아부지이….”

자꾸 손을 뻗는 아이를 따라 선재의 고개도 돌아갔다. 사무실 문을 열고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걸어오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선재는 무의식적으로 코끝을 찡그렸다. 마스크가 위로 조금 올라갔다. 굳이 마스크를 씌워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고.

선재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며 마스크부터 다시 썼다.

귀에서 범진이 지어놓은 매듭이 만져졌다.

뒤뚱거리면서도 정확히 범진을 향해 나아간 아이는 곧 범진의 품에 안겼다.

* * *

“표정 봐라… 아직도 삐쳤냐.”

“…뭐가.”

“내가 니를 뭐 때린 것도 아니고.”

“….”

“금마 그거 패지 말래서 패지도 않았드만.”

“…나 괜찮은데.”

차 안에서, 선재가 마스크를 벗으며 말을 이었다.

줄곧 얼굴이 가려져 있었는데 삐쳤는지 어쨌는지를 무엇으로 판단했나 몰랐다.

범진은 출발할 생각도 않고 운전석에 앉아 선재의 얼굴에만 시선을 던졌다.

뒷좌석 카시트에 몸을 안착한 준희는 차만 탔다 하면 바깥을 내다보곤 했다. 출발하지 않는 차에서도 마찬가지다. 딱히 바뀌는 게 없는데도 신기한 걸 봤는지, 손가락을 내미는 아이의 움직임이 선재에게도 어렴풋이 보였다.

“보자.”

“…뭘.”

“얼굴.”

“….”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 얼굴을 보자고 말하는 범진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선재는 조수석에 앉아 고개만 옆쪽으로 약간 튼 채였다. 충분히 보이는 얼굴을 더 어떻게 보여야 할까? 갑자기 다가오는 범진에겐 자연스레 상체가 뒤로 기울었다.

“가만 안 있냐….”

“…뒤에 준희 있어.”

“그냥 본다고.”

“….”

준희 쪽을 힐끔거리며 말을 한 선재가, 허리에도 손이 감겨오자 몸을 꼿꼿하게 세우려고 힘을 줬다. 다행히 아이는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려서 이쪽을 안 보는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뭘 할 것인지 예상되는 건 없지만 왠지 범진이 하는 행동 전반이 아이에게 유해할 거란 생각이 있다.

범진은 상체를 반쯤 들고 조수석까지 몸을 뻗었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범진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붙었다. 시트 가죽 밀리는 소리가 뻐억, 뻐억, 나는데 차 안은 고요로 뒤덮인 듯했다. 완전히 거리를 붙인 범진과 얼굴이 닿은 건 금방이었다. 정확히는 제 이미와 범진의 턱이 닿았다.

“가만 앉아있지… 따라오겠다고 해서는….”

“아기가 나가고 싶어 해서….”

“사무실에 가만 앉아있지도 않고.”

손을 올린 범진이 관자놀이쯤에 있던 선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뒤로 넘겼다.

“…그것도 아기가 답답해하니까.”

“나갔다가 내 잃어버리면 어쩔라고.”

“…안 잃어버려.”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고개가 꺾인 상태로 올려다봤다. 짙게 깔린 눈빛이 얼굴을 대놓고 훑는 게 느껴졌다. 이따금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짓엔 절로 눈이 감겼다. 도착했을 때만 해도 창창했던 노란 해가 서서히 시든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에 색이 바뀐 범진의 눈이 너무 자세히 보였다. 평소엔 고동색이지만, 빛을 입으니 연한 갈색 구슬 같았다.

제 얼굴도 다 보이고 있겠지. 선재는 허리를 세게 끌어당기는 범진의 손길에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더욱 가까이 붙었다.

“말 안 하고 어디 가면 혼난다… 니….”

범진은 그런 말을 하고 선재의 뺨을 손으로 비비듯이 쓸었다. 자국이 붉게 남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어디 가면 혼난다니. 애한테나 할 법한 말을 왜 저에게 할까. 범진의 손은 뺨과 입술, 눈 밑 통통한 살점에도 차례로 닿았다.

“어…? 대답 안 하냐…?”

“…알았어.”

선재는 낮게 깔린 범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게 싫었다. 아이가 볼 수도 있고… 왠지 모르게 껄끄럽다.

범진은 무표정에 가까운 선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입술까지 아래로 찧었다. 되는 대로 고개를 숙인 탓에 선재의 콧잔등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곤 인중, 그다음엔 정확히 입술. 차례로 닿는 입술에 선재의 고개도 조금씩 들리고 있었다. 차 안이라 그런지 공기가 금방 뜨거워진 것 같았다.

선재는 곧 출발한 차 안에서 차창부터 반쯤 열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열기를 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준희 맛있어?”

“녜에…. 주니 꼬기.”

원래는 가공육이나 잘게 간 고기가 아니면 잘 먹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선 생고기나 양념 고기 같은 것도 잘 먹게 되었다. 선재는 적당히 익힌 고기를 한 점씩 준희의 앞에 놓아주었다.

“뜨거워… 식혀서.”

“네에.”

고개를 끄덕여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다가, 입술을 모으고 후, 하고 바람 부는 시늉을 하니 그제야 아이의 입술도 동그랗게 모아졌다. 후우, 하고 바람을 부는 대신 ‘우’ 하는 목소리를 내고 말지만.

“말하는 거 아니고… 후… 하고 바람 부는 거야.”

“우… 주니, 우.”

“우…라고 말하는 거 아닌데.”

선재가 웃는 얼굴로 준희의 뺨을 쓸어주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뭔갈 먹으니 조금 나아졌다. 앞에 앉은 범진은 또 종업원에게 가라고 하고 제가 고기를 굽는 중이었다.

종업원을 향해 거만한 손짓을 한 건 있지만,

식당에선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선재의 눈이 한껏 올라간 범진의 눈썹에 닿았다.

웬만해선 밥상에 손을 안 대는데, 고기를 구울 땐 달랐다. 베테랑 종업원이 구워줘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태반이었고, 그때마다 집게와 가위는 범진의 손에 들리게 되었다. 선재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범진이 맛있지 않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할 뿐, 뭐가 보통 고기와 다른지도 잘 몰랐다.

큼지막하게 썰린 고기가 불판 구석에 가득했다. 뼈도 크고, 핏물도 잔뜩 고여 있었다. 선재는 아이 먹을 거라는 핑계를 대고 그런 고기들을 더 구워서 먹는 중이었다. 범진은 스테이크도 늘 레어로 먹었다. 어쩔 땐 핏물이 접시 가득 남아 제 입맛이 가실 때가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불판에 있는 고기라… 선재가 큼지막하게 잘린 고기 한 점을 불판 구석에서 살살 구웠다.

“니는 고기도 먹을 줄 몰라서 큰일이다.”

“…뭐가.”

“평생 먹여줘도 알겠냐, 이 맛을.”

“아기 먹이려고 굽는 거야.”

음식으로 한 수를 두는 범진에게 괜한 심술이 생겼다. 원래라면 그래, 하고 말았을 거지만 제가 먹지 않는 척을 해봤다. 원래는 제 고기였는데. 선재는 범진이 쳐다보고 있을까 윤기 있게 익은 고기를 준희의 접시에 느릿한 움직임으로 가져갔다.

“….”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 게 이상했다. 범진의 일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범진과 함께 있는 게 평범하게 느껴졌다. 주차장 한가운데서 준희를 안고 있었던 당시의 느낌을 뭐라 설명할 순 없다. 그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기분. 아무도 없고, 가진 것 하나 없이 둘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었다. 말도 잘 못하는 아이와 그 아이를 지켜야 하는 제겐 힘이 하나도 없다. 단순하고 당연한 결론에 맥이 빠지고, 좌절감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범진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은 계속해서 들었는데.

달콤한 냄새가 퍼지는 식당에 앉아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범진은 앞에서 고기로 훈수나 두고 있는데.

선재는 고개를 들어 범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뭐가.”

“지가 쳐다봐놓고. 확.”

“….”

선재는 앞을 향해있던 시선을 거뒀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범진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저와는 전혀 다른 사람.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 그런데, 주차장에서 준희를 안아준 사람.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준희를 안은 범진은, 아이가 품으로 파고들 때도 제법 능숙한 갈무리를 했다. 품이 워낙 크니 준희가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는 갔다. 왠지 사진 같던 그 장면. 제가 느낀 기분이 있으니 잊기는 힘들 것이다.

밥만 먹을 수 없듯이, 나쁜 사람도 매번 나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선재는 준희를 대하는 범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가졌다.

만약 아이까지 어떻게 하려는 사람이었다면, 저는 이미 세상에 없지 않을까. 극단적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범진이 밉고 싫은 것과 별개로, 준희에게 최소한의 역할을 해줄 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인 사람이지만 기이한 안락을 안기는 것도 범진이니까. 다 망가진 집에서 따뜻한 요리를 해 먹으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선재는 핏물이 맺힌 고기를 억지로 먹으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범진의 흉터를 흘끗거리며 엉뚱한 생각을 피어 올렸다.

식사가 끝난 뒤, 범진은 사무실에 한 번 더 들렀다.

선재와 준희는 차 안에 있었고, 10분도 안 되어 사무실 문은 열렸다. 범진은 제 직장 건물에도 침을 뱉고 꽁초를 버렸다. 주변에 조명이 켜져 범진이 뭘 하는지는 어둔 밤이어도 볼 수 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담배 연기를 날리는 범진의 모습이 선재에겐 익숙했다. 지저분하게 침을 뱉고, 사나운 표정으로 앞을 향해 걸어오는 것도. 선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뒤쪽에서 졸고 있는 준희에게도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아이만 괜찮으면 괜찮다. 아이만. 선재는 다시 앞을 봤다. 커다란 몸으로 어둠을 헤치고 걸어오는 범진이 보였다.

* * *

어린이집을 다시 알아보면서, 선재는 준희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췄다.

원래 일도 할 수 있고, 준희와 함께 다닐 수도 있는 곳을 알아보았는데 범진과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좋은 어린이집만 알아보면 되었다. 선재는 심사숙고 끝에 걸어서 8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을 선택했다. 차로 등·하원을 시켜도 되지만, 가끔은 직접 배웅하고, 마중하는 것이 가능한 거리. 너무 큰 어린이집도 일찌감치 제외시켰다. 아이는 집처럼 편안한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준희 잘할 수 있지?”

“녜에.”

“친구가 괴롭히면 선생님한테 꼭 말해.”

“녜에.”

준희가 막대사탕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맺힌 것처럼 반짝이는 두 눈. 선재가 그 눈을 가만 쳐다보다 아이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파도 얘기하고, 선생님한테.”

“녜에.”

“또….”

“…삿탕….”

말을 하다 말고, 선재는 준희가 내미는 사탕을 건네받았다. 범진이 어제저녁에 준 것이었다. 준희야, 아니면 야, 애기야, 라고 부르는 범진의 부름에 준희는 방 안에서도 금방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쓰고 독한 사탕이나 졸음 방지 껌을 주는 통에, 몇 번이나 주지 말라고 말을 한 뒤였다. 어제는 다행히 딸기 맛 막대사탕을 줬다.

“까줄까?”

“네에에….”

“아저씨가 이상한 사탕 주면 먹으면 안 돼.”

“삿탕?”

“응, 준희 표정 이렇게 되는 거.”

선재가 표정을 찡그리고 준희를 쳐다봤다. 맛없는 거. 하고 덧붙이기도 했다.

“으, 네에. 주니 압파요.”

준희의 손가락이 제 작은 입을 가리켰다. 쓰고 화한 사탕을 먹을 때 들었던 느낌을 아프다고 표현한 모양이었다. 선재가 그러니까, 하고 맞장구를 쳤다.

보니 사탕은 딸기보단 딸기우유 맛이었다. 포장 껍질을 뜯은 선재가 사탕 막대를 준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이는 사탕을 받아들자마자 입을 슬쩍 벌려 맛을 봤다.

“아암….”

“맛있지?”

“녜엥.”

금방 사탕을 입에 넣은 탓인지 발음이 절반은 안으로 먹혀들었다. 선재는 시계를 보고 준희의 엉덩이를 살짝 두드렸다. 가야지, 준희.

오늘은 볼일이 있으니 차를 태워야 했다. 선재는 준희에게 이렇게 맛있는 사탕만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준희의 네에, 하는 대답을 들었다. 오피스텔 1층 복도를 걸어 나가자, 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알록달록한 차에 몸을 실은 준희는 창밖에서 양손을 흔드는 선재의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오늘은 범진이 집에 없는 날이었다. 새벽에 나가며, 오늘 밤이나 되어 서울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포항으로 간다고 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선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장부터 뒤적였다. 날이 선선해서 가벼운 아우터는 걸쳐도 될 것 같았다.

며칠간 몸이 계속 좋지 않았다. 열도 나고, 범진과 섹스를 한 뒤에만 일시적으로 그 증상이 사라지곤 했다. 가끔 있는 반응이긴 했지만, 며칠 전부터는 컨디션까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선재는 그럴 때마다 본능적으로 화장실 수납장에 있는 약 한 알을 더 삼켰다. 차악만을 선택해오던 인생에서, 최악의 일이 벌어지는 건 불공평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범진이 오래 집을 비우는 날을 기다리다 보니 오늘이 되었다.

선재는 식탁에 있는 식빵 한 조각을 토스터 안에 넣었다. 어제저녁엔 밥까지 제대로 먹지 못했었다. 약 부작용일까. 3, 4일에 한 번만 먹어야 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범진과 격한 섹스를 하게 되면 전날 먹었어도 그 약을 한 번 더 삼킬 때가 있었다. 약을 먹을 이유가 너무도 많았다.

꾸준한 복용은 가능하지만, 휴지기도 필요하다는 약사의 말도 언뜻 생각이 났다. 약을 받을 땐 몇 달 치 양을 한꺼번에 처방받아 휴지기가 먼 이야기처럼 생각되었는데. 범진과 같이 지낸 지는, 잠시 떨어졌던 기간들을 제외해도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섹스를 얼마나 했는지 셀 수도 없다. 시간은 쉽게 닳았다. 눈을 바짝 뜨고 있어도 흘러갔고, 멈추지 않았다. 선재는 삐- 하는 소리가 들린 토스터 쪽으로 가 바싹하게 구워진 식빵을 한입 물었다.

병원은 걸어서도 갈 수 있었다.

근처에 오메가 진료도 보는 병원이 있어 가는 데까진 어려움이 없었다.

선재는 가는 길 내내, 그리고 건물 앞에서까지 휴대폰을 쉼 없이 확인했다.

원래라면 자고 있을 때인데, 지금은 포항으로 갔으니 뭘 하는지 모른다. 일 때문에 간 거니 아침이라도 깨어 있지 않을까. 선재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메시지에 조급한 심정이 되었다. 이런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가는 것일 뿐인데도 괜한 긴장이 되었다. 약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그리고 그 약을 범진이 알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드나 보다.

선재는 병원 건물로 들어서며 숨을 고르듯 쉬었다.

시원한 공기가 끼치는 공간에서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민선재 씨?”

진료실 안쪽에 있던 간호사가 대기석 앞쪽으로 다가와 이름을 불렀다. 선재는 아우터를 몇 겹으로 접으며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인상 좋은 중년의 남자였다. 선재를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가 불편하셔서….”

선재는 아우터 주머니에 있던 알약 케이스를 꺼내 보였다. 약 이름과 선재를 번갈아 쳐다보던 의사가 선재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약이네요.”

“…이거, 전부터 먹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몸이 좀 안 좋아져서요.”

“으음. 어떻게 어디가 안 좋죠?”

“네, 열이 나기도 하고… 몸이 몸살 기운 있는 것처럼….”

“지금도 그래요?”

“아뇨, 지금은 괜찮은데… 혹시 약 때문인가 싶어서요. 제가 반년 정도를 먹어서….”

“일단 간단한 검사부터 해보고 다시 말을 하죠…. 부작용 사례가 있는 약이긴 합니다.”

의사는 섣불리 얘기할 수 없다는 의견을 선재에게 전달했다.

일단은 검사하고… 잠시 기다립시다.

알파는 일반인에 비해 높은 회복 속도를 보이지만, 오메가는 병에 들어도 그 치료 속도나 경과가 더뎌 진료 자체가 까다로운 편이었다. 선재는 썩 크지 않은 병원에서도 이런저런 기구가 있어 놀랐다. 늘 큰 병원에만 보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병원이 집 근처에 있어 다행이다.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사를 받았다. 엑스선 촬영을 하고, 장기를 들여다보는 초음파도 보았다. 팔에 꽂히는 주삿바늘이 커서 몸이 긴장을 한 것 빼고는 아프거나 번거로운 과정도 없었다.

“선재 씨, 다시 들어가실래요?”

“네.”

검사하고 기다리는 것까지 해서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범진에게선 사진 몇 장이 도착해 있었다. 바다 사진이었다. 하늘도 그렇고 참 파랬다. 밑엔 야, 좋지. 하는 간단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빤히 화면을 쳐다보던 선재가 부름에 휴대폰을 끄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약 꾸준히 드신 건 맞죠?”

“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분이… 열성은 아니시죠.”

“…네.”

“그러면 약효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임신하셨네요. 3주도 안 되긴 해서….”

“….”

선재는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의사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3주는 간단한 시술로, 네. 그럴 수 있으니까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선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많이 굳어졌던가 보았다. 에둘러 ‘그럴 수 있다’라고만 얘기한 의사의 말에 선재는 뒤늦게 안심을 했다. 간단하게 범진의 흔적을 지울 수 있다.

“저, 그럼 오늘도 가능할까요?”

“네. 시술도 주사요법이라. 이후로 약만 드시면 됩니다.”

“약, 피임약도 다른 거 처방해주시면….”

“네, 알겠습니다. 일단 조금 대기하고 계시고.”

선재는 뒤에 이어지는 말은 더 듣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고, 그냥 잘 들리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몇 명 앉아있는 게 보였다. 눈을 들고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은 임신한 상태였다. 그는 배가 잔뜩 불러온 채로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불안해서. 선재는 금세 그 눈을 피했다. 그리곤 기다란 소파 구석으로 가 앉았다. 빨리 이름이 불렸으면 했다.

“민선재 님?”

병원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고 선재를 찾았다.

선재가 처음 왔을 때보단 대기 인원이 늘어, 한 사람을 특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재는 구석에서 일어나 그 간호사와 눈을 맞췄다. 간호사는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하며 진료실과는 반대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

이동식 병원 침대로 보이는 침대 두 개와 높이가 있는 의자를 제외하면 병원에 있다는 것도 실감하기 어려울 공간이었다.

선재는 간호사가 안내한 시술실로 들어와 멀뚱히 사람들을 기다렸다. 사실 너무 긴장한 탓에 침대나 의자만 보였던 것이지, 약 냄새는 진동했고, 주사기와 작은 약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트레이도 그제야 눈에 띄었다. 광이 나지 않는 은색 도구들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큰 병원이 아니다 보니… 어딘가 하나씩은 이상했다. 처음에 보았던 온갖 기계들은 이곳에 없었다. 검사실도 좋았었는데. 선재는 간호사가 들어와 웃음을 건네는 것까지 보고도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옷 아직 안 갈아입으셨네요.”

“아.”

“저기, 탈의실에서 가운이랑 바지 입으시면 되시고요.”

“…네.”

“주사는 각각 세 대 맞으실 건데, 복부랑 페로몬 조절샘, 분비샘으로 들어갈 거예요. 한동안 열감이 더 심해질 수도 있어서 약은 꾸준히 복용해주셔야 하고요.”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에, 선재는 메슥거리는 속을 느꼈다. 어쨌든 몸의 어딘가를 망가뜨려서 아이를 지운다는 건 물리적으로 아이를 지우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이 느껴졌다. 단순히 감기약을 먹고, 백신을 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시술이라는 것도 어쨌든.

선재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거울 속에 비치는 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손은 배에 닿아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사진으로도 뭐가 찍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을 떼어낼 뿐인데. 대체 얼굴이 왜 금세 파리해졌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입술까지 희게 질린 채였다. 선재는 두 손으로 얼굴을 크게 한 번 쓸었다. 힘을 싣고 두 눈두덩을 꾹 누르자 안에서 진동하는 듯한 떨림이 느껴졌다. 잠을 푹 자지 못한 탓도 있겠지. 한숨을 크게 내쉰 선재가 탈의실 문을 열었다. 간호사 한 명뿐이던 공간에 사람들이 꽤 늘어 있었다. 주사만 맞으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침대에 누워주시고….”

“네.”

일단은 혈관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선재는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반듯하게 뉜 채 천장을 바라봤다. 고무가 제 팔 윗부분을 단단히 감싸는 것이 느껴지고, 거꾸로 보이는 의사의 얼굴도 시야에 잡혔다. 말이 주사 요법이지 약간의 절개가 필요한 시술이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메스를 드는 의사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다시 거꾸로 보이는 의사의 얼굴. 선재는 두 눈을 뜬 채 의사의 턱과 코, 내리깔린 눈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아, 우욱…!”

난데없는 반응이었다. 속에서 이는 토기에, 선재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까부터 느껴졌던 메슥거림을 끝내 억누를 수 없었던 탓이었다. 거꾸로 보이는 의사의 얼굴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선재는 빨갛게 올라있는 팔을 접은 채로 얼굴을 가렸다. 나오는 건 없는데 헛구역질이 반복됐다.

“괜찮으세요?”

간호사가 금세 몸을 붙여와 등을 두드렸다. 선재는 얼굴, 특히 입과 코를 가린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괜찮다고 말을 해도 5초나 10초만 지나도 다시 구역감이 들었다. 준희를 가졌을 때 입덧을 한 적이 있어, 이 반응이 입덧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아랫배에도 은근한 통증이 있고, 종내엔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이게 되자 의사는 라텍스 장갑을 낀 채로 침대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선재와 눈을 마주쳤다.

“속이 많이 안 좋습니까…?”

“네…. 조금….”

“몇 분 쉰다고 나아질 것 같진 않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과하게 긴장하면 종종 이런 반응이 있기도 합니다. 크게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 더 대기해보는 거로 합시다.”

“…네.”

선재는 그 말과 동시에 장갑을 벗는 의사의 움직임을 망연히 좇았다.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주사도 한 대 맞지 못했다. 팔에 묶여 있던 고무줄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풀려나갔다. 애꿎은 팔에만 피가 몰려, 한동안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선재는 쏜살같이 정리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10분 정도 시간을 가져보고, 그게 안 되면 다음에 해도 된다는 의사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누워서 쳐다보고 있을 땐 그 얼굴이 그렇게도 괴이하게 보였는데.

선재는 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안정을 취하라는 이유로, 간호사는 밝았던 불을 꺼주고 갔다. 창가에서 새는 빛만 안쪽 바닥에 곧 고이게 되었다.

탈의실로 들어간 건 5분 정도가 더 지나서였다. 선재는 아우터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부터 확인을 했다. 전화가 온 건 없고, 아까에 이어 바다 사진이 몇 장 더 도착해 있었다. 오고 싶냐는 메시지도 아래에 있었다. 선재가 답장을 하려고 화면을 터치한 사이,

“…여보세요.”

전화가 왔다.

[니 뭐 하는데.]

“나… 청소하느라.”

[어디.]

“거실에. 정리하고….”

선재는 잘도 그런 말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거짓말을 못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운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청소를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울었냐?]

“아니.”

[소리가 씨… 왜 잘 안 들리냐.]

“감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것 같은데.”

[…야.]

“…어?”

[니 내가 예전부터 뭐라 했냐.]

“…뭐….”

[구라치면 뒤진다고 존나 얘기했지.]

“그런 거 안 쳤어.”

선재는 급히 대답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거짓말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평소와 다르게 너무 급하게 대답하고, 또 너무 술술 얘기한 게 화근이 돼버린 것 같았다. 뭘 모를 텐데도 이렇게 들어오면 기분이 다급해진다.

[영상통화 받아라.]

“응.”

선재는 범진과 통화를 하며 천천히 옷을 입고 있었다. 범진은 웬만해선 영상통화를 걸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을 때만.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을 때만 걸었는데. 응, 하고 대답하면서도 선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느껴졌다. 빠르게 문을 열고 나오자, 꺼졌던 화면이 다시 밝아지는 게 보였다. 선재의 표정은 이미 사색이 된 채였다. 무슨 정신으로 응, 하는 대답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바로 받아야 할 것 같아 손이 이미 화면에 가 있었다.

“….”

말없이 전화를 받자, 범진이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얼굴을 가까이하는 게 보였다. 선재는 병원 통로 벽을 배경으로 한 제 모습에 패닉이 올 것 같았다. 계속 헛구역질을 하다 범진의 연락을 받았으니 낯빛도 눈에 띄게 상해 있었다.

[씨발, 집 아니네.]

“…그게, 사실은 아파서.”

[…아프다고?]

“계속 아프다고, 몸 아프다고 했던 거. 진료받으러… 니가 괜히 걱정할,”

[야.]

“…응.”

[니 진짜 죽는다.]

선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젖힌 범진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알았다고 얘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별소리는 하지 않는다. 범진이 지금 화난 건 단순히 거짓말을 해서인 것 같았다. 선재는 좀 더 영리한 방식으로 전화를 받을걸, 싶어 최대한 말을 아끼게 되었다. 하고 나서 후회해봤자 그 순간이 돌아오진 않는다. 또 집에 있다느니, 청소를 하니, 그런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 나올 것 같아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범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게 진짜, 하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간호사는 갑자기 옷을 입고 나타난 선재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의사는 긴장 반응을 들어 선재를 위로했지만, 사실 임신한 아이가 우성 알파인 경우에 초기에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산모나 산부들을 몇 번이나 보아 왔었다. 배아 상태라도 성인인 모체를 그렇게나 휘둘렀다. 제대로 케어받지 못하면 목숨도 위험한 상황이 종종 생기곤 한다. 간호사가 조용하게 소파에 앉아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선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너무 죄송한데…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네. 그렇게 하세요.”

“네, 그럼 결제랑 약….”

“컨디션은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약 같은 경우는 시술을 하고 복용하는 거라, 오늘 따로 나가는 처방전은 없어요.”

알겠다고 대답한 선재가 봉투에 고이 넣어왔던 지폐 몇 장을 꺼냈다. 혹시 몰라 모아두었던 현금이었다. 각종 검사를 하느라 20만 원이 가까이 나온 터였다. 일반 내과에 갔었다고 말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지 않아야 했다.

선재가 거스름돈을 받고 병원을 나섰다. 시원한 병원 내부보다 무거운 공기가 훅 끼쳐 들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굳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압박감도 한결 가셨다. 어느덧 마시게 된 바깥 공기에, 선재의 어깨가 큰 폭으로 올라갔다. 밖은 적당히 맑고 시원했다.

* * *

범진은 7시도 안 되어 집에 돌아왔다. 새벽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준희와 밥을 먹는 도중이어서, 선재는 범진의 밥도 그릇에 퍼 담았다. 밥을 먹었냐고 묻지는 않았다. 먹으나 마나 어쨌든 식탁에는 꼭 앉을 테니까.

선재는 식사를 끝낸 준희의 입부터 닦아 주었다. 아이 밥부터 먼저 먹이느라 제 밥은 하나도 줄어 있지 않았다. 고등어살을 발라주고 있던 탓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선재는 범진이 화장실에 간 사이, 아이를 방 안으로 잽싸게 들여보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그림책을 보고 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권 안 되는 그림책들이 책장 밖으로 다 튀어나와 있었다.

“준희 애벌레 책 보고 있자.”

펼치면 애벌레 인형을 만질 수 있는 촉감 그림책이었다. 글은 별로 없고 거의가 다 그림이었다. 선재는 준희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펼쳐준 뒤 아이의 손을 한 번 더 닦아 주었다.

범진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겉모습만 대충 보았지 표정이 어떤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다. 범진도 주방 쪽을 짧게 쳐다본 뒤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으니까. 선재는 괜히 초조해지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범진이 등을 보이고 식탁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

“뭐 하냐.”

“치우려고….”

“…지랄하지 말고 앉아라.”

“….”

선재가 제 밥그릇을 들고 있다가, 그걸 도로 식탁 위에 놓았다. 가득 찬 밥을 들고 뭘 하려 했나 몰랐다. 범진이 눈을 들고 저를 쳐다보는 통에,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선재는 안쪽에 넣어놓았던 스툴을 뒤로 빼 그 위에 앉았다. 범진의 눈에 무심코 제 눈을 맞췄다.

“말할 거 없냐, 나한테.”

“….”

“없냐고.”

“없어.”

“진짜 없냐?”

“…없어. 감기 걸려서 병원 갔는데, 네가 괜히.”

“애라도 떼고 왔다고 오해할 줄 알았냐.”

누가 마음에 돌 하나를 던진 것 같았다. 가만히 범진을 쳐다보고 있던 선재가, 그 기색은 내비치지 않으려고 표정을 최대한 굳혔다.

“….”

“니 지금 애새끼 뱄지.”

“…아니… 아냐.”

“뭐?”

순간이었다. 범진이 갑자기 몸을 일으킨 것은. 소리와 움직임에 놀란 선재가 스툴 위에서 티 나게 들썩거렸다. 식탁을 빙 둘러 이쪽으로 오는 것 같자, 선재는 우선 몸부터 일으켰다. 그리곤 벽면에 몰린 채로, 다가오는 범진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오해한 거야.”

“뭐가.”

짙게 진 범진의 그림자 안에서 선재는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알 리가 없는데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저는 분명 현금까지 결제하고… 병원에선 어떤 관계라도 진료 내역을 알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 분명 모른다. 모르는데, 지금 이런.

범진이 주먹을 쥔 채 힘을 주고 있는 게 보였다. 소리만 안 났지 광포하게 솟은 힘줄이 지금 범진이 느끼는 감정 상태를 다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선재는 뺨에 손을 한 번 갖다 댔다가 고개를 숙였다. 맞을까? 변명을 대는 것도 의미 없고, 사실 왜 이러고 있는지도 점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비슷했던 상황이 자꾸 떠올랐다. 침대 위에서 머리채를 잡혔던 어느 날의 새벽이 생각났다. 그리곤 곧 눈에 들어온 주먹. 천천히 위로 들리는 것이 보였다. 선재는 눈을 감고 이를 꽉 물었다. 때리지 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눈꺼풀을 완전히 닫았다.

다음엔.

둔탁하게 울리는 타격음이 귀에 그대로 내려꽂혔다. 선재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울음에 입을 더 세게 다물었다. 입술 안쪽을 연신 깨물고 있었던 탓에, 피 맛까지 났다.

…이상했다. 몸에는 진동이 느껴지는데 얼굴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없었다. 눈을 살짝 뜨자 여전히 그 앞에 선 범진이 보였다.

씨… 하는 소리가 바람처럼 들렸다. 선재는 다시 손을 올리는 범진 때문에 또 눈을 꾹 감았다. 이번에도 쾅, 하고 파열음 같은 것이 났지만 또 얼굴이 아프지 않았다. 힘이 풀려 주저앉은 선재가 주먹을 들고 위쪽을 퍽, 내리치는 범진의 모습을 정확히 훑었다. 여태 벽만 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벽면에 장식된 나무 장식이 깨져 선재의 머리 위로 부스러기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범진의 손등이 까진 탓에 하얘졌다. 빨갛고 하얬다. 피가 방울처럼 맺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준 선재가 일어나 범진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만해.”

“가만 안 있냐?”

“….”

“진짜 패주랴?”

“….”

“하지 말래서 안 했더니, 혼자 개좆같은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네, 씨이팔.”

“….”

“좆물도 가려서 받냐? 이 개씹 같은 게.”

선재는 눈을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화가 난 듯한 얼굴에선 그 외의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이쯤 되면 지레짐작한 게 아닌 것쯤은 알 수가 있다. 대체 어떻게 알아서…. 선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예전에 했던, 범진의 화를 겨우 억눌렀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범진의 몸을 안았던 게 기억이 났다.

“….”

선재는 다시 주먹을 위쪽으로 드는 범진의 몸을 그대로 안아버렸다. 그만해. 방에 있는 준희가 쿵쿵거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벽에 묻은 피와 범진의 손을 아이 앞에서 무마할 자신이 없었다. 선재는 그때처럼 뒤에서가 아니라, 앞에서 범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두툼하고 단단한 몸이 그대로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리곤 화가 나서인지, 심장 뛰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것을 들었다. 선재는 두려워하면서도 그 몸을 놓지 않았다. 제발 그만하라고 말했다.

“…하아, 이 씨팔.”

“그만해. 이제.”

“이게 뒤질라고. 어디서 하라 말라냐.”

“알겠으니까, 그만… 그만 좀 해.”

“야.”

“응.”

선재는 입은 열면서도 고개를 들어 범진을 향한 눈길은 보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범진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난 듯한 목소리. 당연하다. 제가 이렇게까지 몸을 끌어안고 있으니 성질대로 행동하지 못해 열이 끓을 것이다. 선재는 그러면서도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범진을 안은 채 끊길 듯한 대답을 이어주었다.

“애 낳아라.”

“….”

뭐? 하는 되물음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선재는 그 말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범진의 그늘진 얼굴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낳으라고.”

“그런….”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 끝이 따가웠다. 선재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범진을 제대로 올려다봤다. 뺨까지 이어진 흉터가 불규칙한 빛을 받고 더 흉한 모양으로 뻗어 있었다. 선재의 입이 겨우 열렸다.

“그런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니 지금 씨바, 누구 앞에서 수작질이냐.”

“수작…이 아니라, 내가….”

“뭐!”

몸이 떨릴 정도의 큰 소리였다. 선재는 코앞에서 호랑이 울음이라도 들은 듯해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공간도 없는데 범진에게 몸이 밀리고 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벽에 다시 붙었다.

“….”

“마지막으로 묻는 거니까 알아서 대답해라.”

“….”

선재는 한 손으로 벽을 치며 입을 연 범진을 막막하게 올려다보았다.

“애새끼 진짜로 안 뱄냐.”

“….”

“니 배에 든 거 이거 사람새끼 아니냐고.”

“….”

범진은 손까지 배에 대가며 그런 말을 이었다. 피가 밴 손등이 제 배 위에 있었다. 선재는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입술을 뻐끔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확신하고 묻는 범진에겐 해줄 말이 더는 없는 것 같았다. 뜨거운 손의 체온이 배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어? 대답 안 하냐!”

또 큰소리. 선재는 반사적으로 감긴 눈을 한동안 뜨지 못했다. 말이 귀에서 맴돌기도 해, 몇 번이나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눈앞의 범진은 사람이라기보다 움직임에 가까웠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더 흐린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선재는 금방이라도 치밀 듯한 감정을 가까스로 눌렀다. 휘청이는 다리를 똑바로 세우고 입을 열었다.

“범진아, 나 좀 이해해주라.”

“뭐?”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난 준희도 있고, 읍.”

갑자기 꺾인 고개에, 선재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더 부정하는 것도 무의미할 일인 것 같아 선회를 했더니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범진이 그대로 부딪혀온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뒷덜미를 잡은 범진의 손이 아니면 완전히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각도였다. 선재는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어떻게도 피하지 못했다. 남은 에너지 하나 없는 상태에서 당한 키스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뜨겁고 질척한 혀가 제 혀를 감고, 무서운 기세로 입 안을 휘젓는 것에, 그냥 눈물밖에 맺히지 않았다.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말을 해서 들을 사람이,

범진은 아닌 걸 왜 모르는 체했던 걸까.

마지막으로 했던 애원이 이런 입맞춤에 가뿐히 삼켜지고 말았다.

범진은 키스도 섹스하는 것처럼 했다. 더 넣을 수 없을 때까지 넣었고, 코가 뭉개지고 피부가 희게 질려도 아무 상관도 않았다. 선재는 안면 전체가 아파 눈물이 났다. 축 내려가 있던 두 팔로 범진의 등과 어깨를 계속해서 때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힘이 실려 안 아프진 않을 텐데. 선재는 앞으로만 치고 들어오는 범진의 입술과 혀에 덜컥 겁이 났다. 방심하고 있을 때 사력을 다해 밀어내면 발이 몇 cm쯤 뒤로 가기도 하지만 입술은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물이 나고, 고통스러웠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잔인한 키스였다. 씹힌 입술에선 피마저 흐르는 것 같았다.

“아… 으아, 아읍.”

입술 사이로 흐른 침이 줄기 모양으로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선재는 이제 배까지 아파 와 입 안으로 소리까지 질렀다. 목 끝을 찔린 탓에 생리적인 눈물이 쭉쭉 뽑혀 나왔다면, 이젠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양보할 줄 모르는 범진을 향해 울음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세게 힘을 준 탓에, 아랫배가 섹스한 다음 날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범진과 괴팍한 밤이라도 보낸 듯한 감각이 일었다.

“그만해…. 제발… 엉어엉….”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선재는 울분을 토해내듯 어물거리며 말을 했다. 너무 억울하고 막막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매번 삼켰던 울음이 이번엔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고개는 계속해서 꺾인 채였다. 범진은 선재의 뒷덜미를 잡은 채로, 그 얼굴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으…엉, 으어엉….”

그리곤 벌어진 입술 끝에 묻은 침과 피를 대수롭지 않게 손으로 쓱 닦아주었다. 섬세하진 못해서, 그렇게 간단한 손길에도 통증이 있었다. 이젠 손만 닿아도 아픔이 느껴졌다. 엉엉, 하고 우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땐 그나마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때이기도 했다. 지금은 높고 공허한 벽만 있는 집 안에 갇힌 기분만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할까. 선재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범진의 아이를 가진 채로, 이렇게 되어버린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계속해서 울었다.

울고 있는데도 울고 싶기만 했다.

* * *

“고개 돌리지 마라….”

“…그만.”

“이게… 어디서.”

“내가 할….”

“가만있어라… 좋은 말로 할 때….”

선재는 제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는 범진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 여기저기를 살피는 것 같았다. 입가가 따끔거려 상처가 있으리라곤 예상됐지만, 다시 범진의 손길을 받는 게 싫었다. 선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젖은 상태였다. 쇳소리가 섞일 정도로 울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아도 피로감이 엄청났다. 온몸이 쑤셨다.

“아프냐?”

“….”

선재가 말은 않고, 앞에 털썩 앉은 범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게 씨팔, 그 짓을 누가 하라드냐.”

범진은 임신주수와 의사와 나눈 대화까지 다 꿰고 있었다. 시술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아는 눈치였다. 선재는 거기까지 듣고 휴대폰에 그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놨나 몰랐다. 위치 추적으론 해당 건물이나 주변만 짚을 수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건물에 있는 내과에 들렀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대화 내용까지 알고 있는 것 같자 더는 둘러대기도 어려웠다. 선재가 찌릿찌릿한 배에 손을 댄 채로 범진을 허무하다는 듯 쳐다봤다.

“….”

“니한테만 내가 두 번씩 말하는 거 알고 있냐.”

엄지를 거꾸로 세운 범진이 그 손을 그대로 선재의 얼굴로 가져갔다. 몇 번 눈썹을 긁는가 싶더니 다시 알고 있냐고, 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

“내 허파 뒤집지 마라”

“….”

“못 알아들었냐.”

“…아니.”

진지하게 얼굴을 붙여오며 묻는 통에,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선재의 시선이 범진의 얼굴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새끼를 뱄으면 까야지…. 씨이팔….”

제가 낳는 게 알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하는 범진이 너무 싫었다. 낳아서 좋을 거 하나 없다는 제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작정 낳으라고. 비틀린 소유욕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닌데. 선재가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엔 몰래 그럴 수가 없었다.

“어쭈… 한숨 쉬냐.”

“….”

“함만 더 해라…. 꼴 받는 거 보고 싶으면.”

“….”

범진은 그러면서 선재의 목덜미에 제 입과 코를 마구잡이로 갖다 댔다. 킁킁거리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붉게 오른 살갗을 핥기도 했다. 위협하듯 말하지만, 아까처럼 화가 난 건 아닌 것이다. 선재가 긴장을 하면서도, 범진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거짓말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임신을 했니 마니 하는 문제는 이미 논외가 되어 있었다. 범진은 낳으라고 말하기만 했다. 까라. 낳아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선재는 범진과 함께 있을 때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새카매지는 현상을 너무 많이 겪었다. 지금도 다른 생각이 들진 않았다. 범진의 말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애 안 낳을 거냐.”

의사를 묻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두 눈을 들고 제 눈을 쳐다보는 범진을 향해, 선재는 약한 고갯짓을 했다.

“…낳을게.”

삶은 제 희망과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창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듯이. 건너길 소년이 버린 병 조각을 주워 먹은 새가 간밤에 죽어버리듯이. 그냥 그런 일인 것이다. 선재는 제 삶을 창밖에 널린 이불 빨래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버텨도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준희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선재는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는 범진을 향해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아기, 낳을게.

“씨발, 그래야지.”

“….”

“이리 와 봐라.”

“….”

체온이 많이 내려간 손이 배에 닿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고개를 든 채 범진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배꼽 아래에 닿은 손이 이렇게나 컸다. 그런 게 느껴졌다.

“나중에 배 얼마나 부르는데.”

“…많이.”

“누가 많이 부르는 거 모르냐. 씨….”

선재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범진의 기분이 다 풀렸음을 확인했다. 아이를 낳겠다고 했을 때부터 낯이 민망할 정도로 밝아지는 걸 느낀 터였다. 지금은 판판하기만 한 배 위에 범진은 한참이나 손을 대고 있었다. 씨발, 내 새끼를 니가 낳아주냐…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좋아 보이긴 했지만, 뭐가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잘못된 소유욕을 갖고 애를 낳아달라고 하는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감회는 새로운 모양이었다.

선재는 피곤하다는 말을 하고 베개에 머리를 받치고 누웠다. 범진이 손을 들어 비스듬히 닿은 베개의 각도를 굳이 고쳐주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달려들었는데. 선재는 억지로 눈을 감은 채, 범진이 하는 행동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안정을 취하자 찌릿했던 배도 금세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저 없애고만 싶었는데, 범진의 입에서 애새끼, 사람새끼, 하는 말을 듣는 바람에 제 배 속에 있는 게 생명인 걸 뒤늦게 실감했다. 잊고 싶었던 사실이었는데.

준희 같은. 준희만 한 아이가 될 수도 있는 작은 생명.

꿈꾸기 직전에 떠오른 준희의 얼굴은 꿈속까지 이어졌다. 준희의 손을 잡고 놀이동산을 돌아다니는 꿈이었다. 아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해 한 번은 가려고 했던 그 놀이동산. 아직 키가 작아 탈 수 있는 기구가 많지 않은 그곳. 선재는 둘만 있는 동산에서, 더 조그만 아이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뒤편에선 범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빨리 안 오냐고, 늦는다고.

해처럼 밝고 하얀 달이 뜬 밤이었다. 기어코 걸어온 아이는 범진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애가 내미는 작은 손을, 준희가 잡았다. 약하다고 뽀뽀를 하고, 작은 품으로 더 작은 몸을 안아주기도 했다.

돌아가는 회전목마 조명에 밝아진 얼굴.

그땐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었다. 선재도 즐거운 마음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갔다. 빨리 오라는 범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선재는 다음 날 기상해, 화장실로 가 피임약부터 먼저 검은 쓰레기봉투에 싸서 버렸다. 더는 피임할 것도 없는데 들켰다간 쓴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곤 병원에 전화를 걸어, 3일 뒤에 잡아놓았던 시술 예약도 취소했다. 변동 사항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는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선재는 현관문 밖을 나선 채로 통화를 했다. 혹시 간단하게 시술받을 수 있는 날짜가 언제까지냐 묻기도 했다. 낳겠다고 말을 해놓았는데도, 그런 질문은 멋대로 나오는가 보았다.

“그러면 그때 전화를 다시….”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드리겠습니다, 까지 어색하게 말한 선재가 전화를 끊고 열린 문 사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드로어즈만 달랑 입은 범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선재의 미간이 잘게 구겨졌다.

“…들어가.”

“내가 개냐.”

“….”

“어, 씨발, 내가 개새끼냐고.”

비실비실 웃는 범진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복도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선재는 다가오는 범진 너머의 뒤편을 무심코 살폈다. 다행히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맨몸에 가까운 범진과는 곧 자연스레 몸이 붙었다. 늘 보던 몸인데도 어제 그 사달이 나서인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었다. 선재가 어깨 언저리에 닿은 눈을 쉽게 떼지 못했다. 검은 문신은 한 번 더 커버업을 받은 덕에 화상 흉터를 거의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그러진 결이 눈에 띄었다. 그 어딘가. 언저리쯤을 바라보던 선재의 눈이 위를 향했다. 탁한 기운을 뿜는 범진의 눈과 그대로 시선이 맞닿았다.

“니 뭐 했는데….”

“뭘….”

“여기서 뭐 했냐고.”

“…통화… 병원에 예약 취소하고.”

“또.”

“쓰레기도 버리고….”

“내가 이 손으로 쓰레기 만지지 말라고.”

“….”

“몇 번을 말했냐.”

범진이 선재의 손목을 쥐고 위로 들었다. 어? 이거. 하는 말과 동시에 몸도 가까이 붙었다. 선재는 몸을 의식해서 뒤로 뺐다. 이 상황에서, 멋대로 부푸는 중심이 제 몸에 닿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쓰레기. 이 손으로.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한 번 화장실 청소를 했을 때인가. 범진이 없을 땐 자주 했는데, 집에 있을 땐 처음 했던 날이었다. 뭘 하냐고 묻는 범진에게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하니 불같은 화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디 더러운 거에 손을 대냐고.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 되지도 않는 성을 냈었다. 그 후론 쓰레기에도 손을 못 대게 했다. 선재는 쓰레기를 모아두었다가 문 앞에 놔두곤 했고, 저녁이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그 봉투와 음식물을 다 거둬가곤 했다. 범진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었다.

“말도 씨발 디져라 안 듣지.”

“….”

“어. 민선재. 디질래.”

웃었다가 싸늘했다가, 무표정했다가.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엔 웃는 얼굴이었다. 잇새로 새는 듯한 웃음을 한 번 낸 범진은 계속해서 디질 거냐고 물었다. 선재의 눈이 그 얼굴에 계속 닿아 있었다. 죽일 사람한테 화장실 청소는 왜 안 시키며, 쓰레기는 왜 못 버리게 하는지. 어디 하나 마땅히 이해 가는 구석이 없었다.

곧 다가온 범진은 입술로 선재의 눈부터 빨았다. 그리곤 코, 입술로 차례로 옮겨갔다.

마무리로 귀를 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부터 다 젖은 얼굴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니 인상이 써졌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긴 선재가, 들어가라고 현관문을 여는 범진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들어온 범진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애써 무시한 선재가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있는 아이는 이불 속에 폭 싸인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모습이 그림자처럼 겹쳤다. 소리가 나는 모빌을 가만가만 바라보던 아기.

“준희 깼네….”

“으우….”

잠에서 덜 깬 아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이불을 걷어 준희 옆에 몸을 눕힌 선재가 아이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곤 의식이 됐는지 다른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세게 닦았다. 무슨 흔적이든 남았을 것이다.

“오늘도 어린이집 가야지.”

“네에에….”

“가기 싫어?”

“으으응… 주니 칭구들….”

“준희 친구들 많이 사귀었어?”

“주니 칭구… 주니 아가….”

“…응?”

“압빠 주니랑… 아가….”

“….”

“주니… 아가.”

“…준희 꿈꿨어?”

“녜에….”

옹알이를 하듯 엄마, 아빠, 아빠, 준희, 아빠, 아기, 이런 단어만 반복하는 아이의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품으로 전달되는 체온이 참 따듯하고 고왔다. 무슨 꿈을 꾼 걸까. 저 또한 꿈이라면 할 말이 있었다. 웬 놀이동산에서 아이와 서 있었는데, 이름 모를 아이가 다가오는 꿈을 꿨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범진의 아이라는 생각이 꿈에선 그런 식으로 풀린 모양인데. 아이도 비슷한 꿈을 꾼 듯해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주니 아가 이써…?”

“…준희 아기가 아니라….”

“주니도 아가….”

아기를 장난감이나 친구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갖고 싶다고 뚝 떨어져 주는 게 아닌데. 선재는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말해야 할까, 싶으면서도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판단했다. 배가 많이 불러와 말할 수밖에 없게 되면. 그때 배 속에 장난감이 있다는 듯이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쳐다보던 선재의 눈이 복잡한 심정으로 일렁거렸다.

“…준희 아기 좋아?”

“네에, 주니 칭구….”

“아기는 준희랑 못 놀아주는데.”

“주니가 뽀뽀해주께….”

“…아무한테나 뽀뽀하고 그럼 안 되고….”

선재는 아직 실체도 없는 애한테 뽀뽀를 해주겠다는 준희의 말이 제일 걸렸다. 배 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결정이 서지 않았다. 준희가 하는 말만 신경이 쓰였다.

“네에…. 아가… 주니 아가한테만.”

“아기한테만 뽀뽀할 거야?”

“네에….”

그러겠단 아이에겐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선재는 한동안 계속, 손을 준희의 뺨에 가져간 채로 시간을 보냈다.

하얗고 보드라운 뺨. 그걸 만질 때, 마음에도 꽃씨가 훌훌 날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오늘도 그런 기분을 느낀 선재가 옅은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웠다. 울긋불긋한 얼굴에도 포근한 표정이 가만히 떠올랐다. 손으로 아이 뺨을 계속 만지니, 아이 또한 편안함을 느꼈는지 금세 눈을 감고 얕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제 아이지만 참 예쁘다. 선재는 준희를 지켜보며, 사랑이 이런 거라 새삼 느끼고 있었다. 얼굴에 서린 평온함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것. 그런 마음.

사랑과 증오의 척도가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면, 범진은 저를 죽도록 싫어하는 것일 테다.

그런 생각이 들자 준희의 뺨에 머물러있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췄다.

언제나 최악만은 피하려고 했던 선택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닐까.

선재는 이불 위에 가 있던 다른 한쪽 손을 제 배로 가져갔다. 아무 미동도, 박동도 없는 배에 손을 대고 가만히 있어 보았다.

‘늦어도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오셔야 해요.’

4주가 넘어가면, 간단한 시술로는 아이를 지우지 못한다고 했다. 선재는 배에 가져간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병원에서 해줬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낳겠다는 말은 했지만, 그럴 마음이 들어 말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렇게 얘기해야 평화가 찾아오리란 걸 알았을 뿐이다. 준희 생각이 나 무서웠다. 그래도 다음 주 화요일까진 시간이 있다. 그때까진 생각을 계속해서….

걸핏하면 손을 올리고, 상스러운 욕을 하는 남자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어제도 그 손을 제게 그대로 날리는 줄로만 알았다. 선재는 갈라진 나무 벽부터 처리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오늘 슬쩍 그 주변을 지나쳤는데, 어제 있었던 일이 그대로 생각나 괴로웠다. 아까 보았던 범진의 손도 그 기억을 자꾸 떠올리게 만들었다. 거무죽죽하게 변한 손등. 특히나 뼈가 돋은 부위가 처참했다. 간단한 처치도 안 한 건지 피가 난 부위는 꽤나 부어 있었다.

문밖에서 씨발롬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재는 다시 잠든 준희를 깨우지도 않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올 때 문을 대충 닫아서인지 틈이 살짝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틈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뻗쳤다. 문이 열리고, 범진이 드로어즈도 입지 않은 게 곧 눈에 들어왔다. 욕실로 가려다 잠깐 방을 들린 것 같긴 한데. 선재가 뒤를 돌았다 급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표정을 굳힌 채 범진이 있는 쪽으로 갔다.

“최소한….”

“뭐.”

“바지는 안 입어도 속옷은 입고 문 열어. 준희 앞에서 이러고 있지 마.”

준희 앞에서 못 보일 꼴을 보인단 생각이 들면 어투에도 날이 서기 마련이었다. 저야 뭘 봐도 상관없지만, 준희는 아니다. 생판 남과 같이 살게 만든 것도 미안한데, 그 사람의 알몸까지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선재의 얼굴에 미미하게 짜증이 고였다.

“하아, 이게 애한테도 질투하네.”

“…뭐?”

“니나 말 잘 들으세요. 빡치게 좀 그만하고.”

“…알겠, 알겠으니까 놔.”

당장 말이 통하지 않았던 건 둘째치고, 선재는 말부터 돌려야 했다. 범진은 장난치듯 팔을 목에 두르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헤드록을 거는 정돈데 시간이 갈수록 무게를 어느 정도 실은 채 몸을 압박해오곤 했다.

이번에도 또 그걸 하려는지. 선재가 각오를 하고 두 다리에 힘을 줬지만, 중심을 잡기도 전에 힘이 실려 와 한쪽 무릎을 무력하게 접고 말았다.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그대로 고꾸라지려고 하는 걸 범진이 낚아채듯 잡았다.

“닌 씨발… 사내새끼가….”

사나이가 이 정도는 버텨야지, 하고 속 긁는 소리를 할 걸 알고 있다. 선재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범진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형질을 아예 제하고라도 범진의 체격은 어딜 가나 한눈에 띄곤 했다. 그 몸으로 다른 사람이 저와 똑같길 바라는 것 자체가 엉뚱한 발상이었다. 사나이가 이 정도는 해야지, 에서 멈추면 또 모르겠다. 몇 분도 안 지나 마누라가 어쩌고, 할 때가 있어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기 어린이집 보내야 한다고 말한 선재가 자꾸 붙어오는 범진의 몸을 크게 한 번 밀었다.

….

분명 적당히 솟아 있던 부위를 제 눈으로 보았었는데.

어느 틈엔가 저리 흉흉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각이 거의 위로 향한 게 성기가 아니라 굵다란 몽둥이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연 선재가 준희가 먹을 요거트와 아몬드를 차례로 꺼냈다. 머리에서 맴도는 잔상을 지워보려 노력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요거트를 숟가락으로 떴다.

선재는 식탁을 탁, 하고 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에 드로어즈를 주워입고 서 있는 범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거진 정도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점심에 밥 먹지 말고 있어라.”

“왜.”

“씨발 어제 일은 어제 일이고….”

묻지도 않았는데 어제 일은 어제 일이란 말이, 그와 비슷한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어제 일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선재가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며 범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살짝 벌건 기운이 있는 게, 이제 와 보니 술에라도 취한 듯한 얼굴색이었다.

* * *

선재는 나가기 전까지도 목과 뺨에 생긴 자국을 어떻게든 지우려고 했다. 거울을 보았을 때 범진에게 빨린 자국만 눈에 들어왔다. 범진이 지하 주차장에 왔다고 연락을 준 지도 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선크림이라도 발라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허옇고 흡수도 잘 안 되는 스포츠용 선크림이 있었는데, 어디에 있었는지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5분이 지나버렸다.

결국, 옷장 안에 던지듯 둔 크림을 찾아, 얼굴과 목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을 짜 발랐다.

“….”

빨간 자국은 어느 정도 가려졌는데, 꼴이 우스웠다. 찹쌀가루라도 묻은 것처럼 보였다. 이게 아닌데. 이미 충분한 시간이 지나 범진의 참을성이 극에 달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찹쌀가루를 묻힌 것 같던 얼굴과 목을 벅벅 비비며 집을 나서게 되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빨리 잡혔다.

어제는 밤까지 긴장을 한 탓에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을 가는 것부터가 힘든 일정이었다. 범진과 그 난리까지 쳤으니 다음날이 되어도 그 여파가 조금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몸이 리셋되면 얼마나 좋을까. 게임처럼 말이다.

범진은 저와는 전혀 다른 하루를 사는 것 같았다. 커다란 몸을 하고도 가뿐해 보였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생각해보면 오늘부터 그런 것도 아니다. 범진은 어젯밤부터 낯빛에 밝은 기운이 돌았었다.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한 이유로 말이다. 만약 그런 약속을 제가 저버리기라도 하면 또 화를 참지 못하고 행패를 부리겠지. 선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범진의 차를 찾을 때까지도 복잡한 생각들을 거두지 못했다.

“야. 니 이번엔 진짜 뭐 발랐네.”

생각은 곧, 앞 차창을 통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범진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썬크림.”

“보자.”

“뭘.”

“썬크림이든 씹크림이든 뭘 어떻게 발랐는지는 봐야지.”

“….”

범진의 손에 휙 돌아간 고개 때문에, 선재는 어쩔 수 없이 아침에 계속 봤던 남자의 얼굴을 또 쳐다보게 되었다. 어두운 공간이라 그런지 흉터도 그렇고, 얼굴 곳곳에 팬 부위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고 머리 색은 칠흑같이 검었다. 조금씩 바뀌고 있는 표정 같은 건 하나도 안 보였다.

“화나게만 하지 마라….”

몇십 초나 뚫어지라 얼굴만 쳐다보던 범진은 대뜸 그런 말을 했다.

“….”

“난 니한테 잘하려고 하는데.”

“….”

“니가 삐딱선 타면 나도 가만 못 있는다. 내 성깔 모르냐.”

“….”

“니도 최선을 다해라.”

“….”

“난 이게 내 최선이다.”

최선. 선재는 귀에 그 단어만 맴도는 걸 느꼈다. 범진이 하는 최선이란 걸 하나도 못 느낀 건 아니다. 준희 앞에서 성질을 죽이려 노력하고, 저와 준희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쭉 하던 의뭉스러운 일도 거의 하지 않게 된 걸 알고 있다. 때리는 시늉은 하지만 때리지 않게 된 것도 안다. 어제도. 선재는 그걸 떠올린 뒤 곧바로 범진의 손에 시선을 보냈다. 얼굴이 잡힌 상태라 눈만 그쪽으로 굴러갔다.

“뭘 쳐다보냐.”

“…손은.”

“손 뭐?”

선재는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미간 사이를 좁혔다. 저번에, 칼에 찔려 응급수술을 받았을 때도 이런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쪽팔린다고 했었나.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아파하고 다치는 것 따위에 자존심을 상해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나이가 실감되곤 했다. 선재는 다시 손에 대해 말하려다 관두었다. 준희가 보기에 안 좋을 것 같아서였는데. 어떻게 말을 하든, 처치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범진은 아침에 했던 것처럼, 뺨과 눈가, 귀를 찝찝할 정도로 빨았다. 입맞춤인데 도통 입맞춤 같지가 않았다. 추하고 민망했다. 부끄럽고 지저분했다. 네모난 차 안을 가득 채우는 소리에, 선재의 고개가 여러 번 돌아갔다. 왼쪽 뺨에 입이 닿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완전히 꺾으면 목에 범진의 입이 닿았다. 다시 왼쪽으로 홱 고개를 틀면, 오른뺨에 그 입이 맞닿았다. 볼이 꼬집히듯 살을 빨렸다. 그러기를 몇 번이었다.

“야….”

“…왜.”

“얼굴에 뭐 바르지 마라.”

이제야 출발할 마음이 생겼나 보다. 응. 선재가 대답은 하면서 옆유리로 고개를 틀었다. 옷 터는 시늉을 하며 다시 앞쪽을 봤다. 범진은 운전석 문을 열어 고개를 아래쪽으로 숙이는 듯했다. 뒤이어 들린 캬아악, 퉤. 하는 소리에 침을 뱉은 걸 알았다. 맛 드럽게 없네. 하고 선크림 맛을 감상했다. 마무리하듯 뱉은 침은 차 운전석 앞에 고였다. 범진은 그 침을 발로 비비고 차를 출발시켰다.

12시 반이니, 두 시간 뒤에는 준희를 데리러 가야 한다. 가까운 데서 밥을 먹게 되면 좋겠다.

선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범진은 예약한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거기 제대로 된 의자 있습니까. 하고 건들거리는 투로 말을 시작했다. 선재의 눈이 반사된 유리로 보이는 범진의 얼굴에 닿았다. 범진은 마누라가 임신을 해서 딱딱한 의자는 좀 그렇다는 말을 했다. 중간중간에 욕도 섞였다. 아직 배도 안 나왔는데 무슨 소리를 저렇게. 저는 시술을 몰래 할 방법이 정말 없나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선재가 인상 쓴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힘주어 쓸어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 * *

범진은 나쁜 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되는대로 사는 것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었다. 그 심플한 악의에 걸려든 것이 자신이고.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범진의 관심은, 그 욕구는, 날이 갈수록 삐뚤어지고 커갔다. 젊고 어린 나이니까, 제게 싫증을 내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잘 모르게 되었다. 작년 가을엔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삶을 꾸렸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 범진에게 붙잡혔고, 지금 다가오는 가을엔 그의 아이가 배 속에 있었다.

신이 정말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것일까.

선재는 시계와 창문을 번갈아 보다 옷을 갈아입었다. 곧 터질 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이 월요일이고, 내일까지 병원에 가지 못하면 범진의 아이를 낳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범진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를 낳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낳겠다고 한 건 그날 밤의 상황 모면에 불과했고, 날이 가면서는 확신이 들었다. 맞아 죽어도 아이는 낳을 수 없겠다고.

범진은 이 관계를 얼마든지 파투낼 수 있다. 물론 1년 동안 비정상적인 욕구 같은 건 하나도 줄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겨우 스물다섯밖에 안 된 남자다. 아이가 좋아서 아이를 낳아달라 하겠나. 그저 제 비틀린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준희는 제가 죽을 때까지 돌보겠지만, 배 속에 있는 아이라면 말이 다르다. 선재는 범진의 아이까지 거둘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분명 지금에나 유효할 것이다. 아이가 커지고 배 속에서 움직임 같은 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마음이 흔들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빨리 병원을 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내일까지 가면 된다지만, 범진이 확실히 늦게 들어오는 날이 월요일이라 오늘이 기회인 것 같았다.

아직 오전이고, 범진과는 따로 점심 약속도 하지 않았다. 점심 약속은 집을 나서기 전에 잡곤 하는데 오늘은 별말이 없었다. 그런 날은 보통 몇 시간씩 떨어진 거리에 있곤 했다. 선재는 나가기 직전에 범진에게 전화를 걸 셈이었다. 며칠 전부터 발목이 아파 지나치듯 말해오곤 했다. 같은 건물에 한의원이 있는 걸 아니, 일단은 거기 가겠다 말할 생각이었고, 휴대폰은 시술을 받는 그 잠깐 사이에 꺼둘 예정이었다. 그러면 녹음도 되지 않겠지.

나중 일은 잘 모르겠다. 자연유산이 아닌 걸 알게 된 범진의 반응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은 지금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선재는 태어날 아이가 불쌍해서라도 무조건 오늘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탁을 대충 치우고 현관문을 열 때까지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선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범진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렸다.

“어, 저, 나 한의원 가려고.”

[발목? 아직도 계속 아프냐?]

“어. 가서 치료받고 연락하든지 할게.”

[한… 두 시간만 기다려봐라. 내가 태워다 줄 테니까는.]

“이미 나왔어. 그냥 침만 맞고, 빨리 집에 들어갈래.”

[…니 맘대로네?]

웃음 섞인 그 말에, 선재가 잠시 말을 잃었다. 알고 하는 말은 아닌데 어딘가 찔리긴 했다. 티 나서 좋을 건 없으니 웃기라도 해야 했다. 선재는 어색하게 웃은 뒤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을 기다리라 한 걸 보면 확실히 먼 곳에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한 번 멈춘 뒤 1층까지 곧장 내려갔다. 창가에서 보던 것만큼이나 날이 좋았다. 어제부터 몸이 좀 안 좋긴 했지만 제 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이게 범진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향한 선물이 될 거라는 확신은 바뀌지 않았다.

건널목을 건너고, 준희의 어린이집이 있는 길가를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애매해 시술이 끝나도 준희의 하원 시간과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사정을 말하고 그냥 데리러 갈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고, 시야에 곧 익숙한 건물이 들어왔다. 한 번 봤다고 눈에 익었다. 한의원이 있는 것까지 확실히 확인한 선재가 작은 신호등 옆에 섰다.

걸어오는 동안도 그랬지만, 확실히 몸이 안 좋은 것 같긴 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건너편 신호등을 응시했다. 빨간색 불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게 보였다.

너무 급하게 걸었던 탓인지 팔과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팔다리만 그러면 잠깐 섰다 갈 수 있겠는데, 멈춘 순간 눈앞도 어딘가 이상했다. 빨간 불이 회색이 섞인 것처럼 보였고, 작은 점 같은 것들이 눈을 감을 때마다 시선 정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선재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댄 채로 눈을 감았다 떴다. 사람들이 저를 지나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파란불이 들어온 것 같지만,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만 몇 번 깜박였다. 푹, 하고 옷이 날리는 듯한 소리. 누구 것인지도 모른 채, 선재는 눈을 감았다.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주변에서 선재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근처로 모여들었다. 잠자듯 평온한 얼굴을 한 선재를 쳐다보던 한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선재는 저녁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하얀 벽만 있는 일인실. 언젠가 입원했던 병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가 투박하고, 약물 냄새도 많이 나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자 구석에서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던 범진이 눈에 들어왔다. 선재의 손이 위쪽으로 들렸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는데 잘 나오지 않아 손을 든 것이었다.

“…깼냐.”

범진은 툭, 말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몸을 뗐다. 선재의 핏기 없는 얼굴이 범진을 향해있었다.

“…며…몇 시….”

목을 쥔 손도 파리하기 짝이 없었다. 작은 뼈, 큰 뼈 할 거 없이 돋아난 것이 한눈에 보였다. 범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 손을 아래로 내렸다. 얇은 이불 속에 넣었다.

“애는 니 밑에 있으니까 걍 자라.”

그 말에 고개를 옆으로 젖힌 선재가, 작은 손가락이 고사리처럼 쥐어져 있는 걸 봤다. 보조 침대와 이불도 순서대로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자 시간이 9시나 되어 있었다. 멍하고 어지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빨리 떠올려지지 않았다.

“그러게 어딜 혼자 돌아다니고 지랄이냐….”

“…말했잖아, 한의원… 발목 때문에….”

목이 계속 아프긴 했지만,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선재가 이불에 손을 넣은 채로 헛기침을 몇 번 더 했다. 머리가 웅웅 울리고, 뼈마디도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발목 어디.”

“만지면 더 아프니까….”

선재의 고개가 양쪽으로 흔들렸다. 처음엔 별로 아프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진짜 아프긴 했다. 범진이 장난하듯 주물렀던 탓일까. 세게 주물러야 낫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우악스레 발목을 만져댔는지 모른다. 그때 생각이 나, 선재는 다리를 이불 안쪽으로 끌었다.

“부었네.”

이불을 들춘 범진이 기어코 제 발목을 잡았다. 오른쪽 발목이었다. 발목부터 발등, 발가락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출발할 때까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의아하긴 했다. 걸을 때도 좀 따끔거렸을 뿐, 지독한 통증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

발에 닿는 체온이 낯설었다. 뜨거운 손이 발과 발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놓는 것이 느껴졌다. 선재는 범진의 손에 잡힌 발에 힘을 줬다. 이러고 싶진 않다. 계속 힘을 주자 범진이 쓰읍, 하고 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올라간 한쪽 눈썹이 이후로도 계속 꿈틀댔다.

발이 어느 정도로 아팠는지가 생각나니, 오늘 뭘 하려고 했었는지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혹시 오는 길에 그렇게 되었나. 시술을 받고 오는 길에 그렇게 되었다면 적어도 아이는 지워졌을 텐데. 하지만 병원 입구를 지나친 기억은 없었다. 내일은 꼭 가야 하는데, 몸은 왜 이렇게 아픈가 몰랐다. 앞이 암전되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어지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았고, 몸 곳곳이 계속 부서질 듯 아팠다. 배에도 알싸한 통증이 감돌았다.

“의사가 뭐라고 했는데….”

눈이 계속 발에 가 있는 채로 그런 말을 꺼냈다. 범진의 눈도 제 발에만 닿아 있었다. 강하게 쥘 것처럼 굴었지만 근육이 풀리는 정도로만 발을 만졌다 말았다 했다.

“니 임신해서 그렇다고 하드라.”

“…왜?”

“니 배에 있는 그게, 내랑 똑같은 새끼라서.”

“…응.”

범진의 말은 잘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랑 똑같은 새끼라면 형질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그거라면, 병원에서도 대충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의사가 위로하듯 건넨 말 중, 그와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잘은 생각나지 않지만, 아예 모르는 말을 들은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니 몸이 많이 상할 거라드라.”

“아.”

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몸이 상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빨리… 실체가 정확히 느껴지지 않을 때 지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렇게 병원에 있으면 내일 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일단 쉬어라.”

범진은 발을 쥔 채 제 할 말만 했다. 자세히 얘기해주진 않고, 그냥 그 정도로만 말했다.

“…집에 가도 될 것 같은데.”

“뭐. 이러고?”

“어. 지금은 괜찮으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자라.”

범진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아예 닫았다. 원래라면 혼자서 되지도 않는 말을 할 사람인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낯설었다. 아픈 걸 알아서인지 시비도 걸지 않았다. 선재는 준희의 작은 주먹을 확인하듯 쳐다본 뒤 눈을 감았다. 아침에 퇴원해도 시간은 있으니까.

잠은 오지 않았다.

발에 닿은 범진의 손이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렇게도 주무를 줄 알면서, 며칠 전엔 왜 그렇게 쥐어짜듯 만졌는지 모르겠다.

“…뭐 하냐. 안 자고.”

그 말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생각을 하느라 눈꺼풀이 티 나게 흔들린 것 같았다. 사실 금방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준희도 세심히 못 살핀 부분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옆을 쳐다본 선재가, 침대 끝에 걸린 작은 팔에 인상을 썼다.

“…아기 좀 편하게 해줘.”

“야… 씨. 아프면 다냐….”

“내가 하고 싶은데 못 하잖아.”

저 또한 범진에게 그런 걸 맡기고 싶지 않다. 발을 만지던 범진이 부러 씨, 하고 읊조리며 간이침대에 있던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왜 드는데…?”

“임마 이거 이러고 있는 거 제일 좋아하니까.”

범진이 고개를 까딱이듯 아래로 숙였다. 잠에서 언뜻 깬 준희가 몸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익숙한 품인 듯 작은 몸을 꿈지럭대는 아이의 움직임이 언젠가와 같았다. 볼이 잔뜩 눌렸는데도 저러고 있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계속 그러면 불편해해.”

“압부지… 주니… 주니 아가….”

선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준희가 며칠째 아기가 어딨냐고 물은 걸 안다. 제게서 마땅한 대답을 구하지 못하자, 이젠 그 말을 범진에게 묻는 것이었다. 말을 못 알아들은 범진만 그래 니 애새끼 맞다. 하고 헛소리를 했다. 선재가 그 말에 범진을 쳐다보았다.

“그런 말 쓰지 말라니까.”

“야…. 나는 더한 말도 들었는데 잘만 컸다.”

“….”

전혀 잘 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진은 제 생각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이의 엉덩이를 한 번씩 두드리며 야, 맞지. 하고 확인까지 구했다. 준희가 눈을 감은 채로 방긋 미소지었다.

뭐가 맞냐고 묻는지도 모르겠고, 자는 아이에게 저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재의 두 팔이 기어코 앞으로 향했다.

“그만해…. 내가 안을게.”

“정신이 있냐…. 손 안 넣냐… 확.”

“….”

“니 쉬어야 된다고.”

“…그럼 그렇게 하지 마.”

“…알았다.”

범진은 그제야 이불을 대충이라도 접어 간이침대 위에 올렸다. 안고 있던 준희를 그 이불 위에 천천히 눕혔다. 처음엔 냅다 눕히려 했지만, 선재의 손짓에 따라 목과 머리를 받쳐 내려주었다. 활발하게 놀았을까. 잠에서 깨면 살짝 칭얼거리기라도 하는데 오늘은 그런 게 없었다.

“야.”

준희를 쳐다보던 선재의 고개가 옆쪽으로 돌았다. 언제 침대 옆으로 왔는지, 왼쪽에 서서 삐딱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반쯤 누워 쳐다보고 있으려니 커다란 몸집이 더 크고 우람하게 보였다. 뚱뚱한 근육이 붙은 건 아닌데, 뼈대가 워낙 장골이라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었다. 선재의 눈이 위쪽을 향해있다 순식간에 퍼졌다.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낀 탓이었다.

“야… 씨.”

“….”

선재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중심을 잡았다. 낮에도 이렇게 어지러웠었는데. 가까이에서 아프냐? 하고 묻는 범진을 향해선 고개를 저었다. 그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절할 것처럼 어지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범진이 거리를 좁히면서부턴 머리가 난데없이 맑아진 느낌도 들었다. 쓴 체향이 주변에서 연기처럼 퍼지고 있었다.

얼굴 다 상했네, 하고 입을 연 범진이 선재의 뺨을 툭 건드렸다.

“가진 건 쌍판뿐인 게….”

범진의 말마따나, 그 쌍판을 범진은 구멍이라도 뚫릴 듯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있던 선재가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살짝 어긋나 다른 곳을 쳐다보고는 있지만, 범진의 눈이 얼굴에 닿는 건 너무도 잘 느껴졌다.

민망하고 무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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