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날 오전, 곧바로 퇴원하는 것이 가능했다.
범진이 수속을 밟는 동안 간호사들이 들어와 간단한 처치를 해주었다. 링거 주사가 꽂혀있던 자리에 작은 반창고 하나가 붙었다.
선재는 상담은 하고 가시란 간호사의 말을 병실로 돌아온 범진에게 전했다. 이미 예약이 된 상담이었다. 진료 상담실은 2층에 있었고, 선재는 아이의 손을 잡고 범진을 따라서 들어갔다.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선재는 의사를 앞에 두고도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했다. 옆에 앉은 범진이 신경 쓰여 진짜 묻고 싶은 걸 물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산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범진과 선재를 번갈아 쳐다보며 시종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머금었다. 이렇게 큰 병원에 보호자를 동행하고 오는 임신한 오메가라면 적어도 비극의 주인공은 아닐 터였다. 연이은 중절술에 피곤함을 느낀 의사가, 우성 알파를 임신했을 시 생기는 문제점과 애로사항 같은 걸 늘어놓으면서도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위험한 건 아이보다는 산부분입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해요.”
“…거… 위험하단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요….”
가만히 앉아있던 선재의 표정이 처음으로 크게 변했다. 그래 봐야 미간이 찌푸려지는 수준이지만, 범진의 거만한 말투엔 기분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제 나이의 두 배는 들어 보이는 분께 무슨 말을 저렇게 하나 몰랐다. 다리를 벌린 채 앉아, 그 위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는데 팔도 직각으로 세운 채였다. 정말 버릇이 없었다.
“예…. 위험하니까 위험하다고 그러지요….”
허허, 하고 웃은 의사가 범진의 말에 대꾸했다.
“답답하네…. 어제 실컷 들었으니까 다른 얘기 좀 듣자고요.”
굵다란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의사의 눈은 그래도 변함없이 휘어 있었다. 범진 같은 알파를 한두 번 봐 온 게 아닌 듯했다.
“다른 말… 뭐 있을까요. 산부분 몸이 제일 걱정입니다…. 아이가 우성이라, 아버지 되는 사람과도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하고요. 아니면 오늘처럼 기절하는 일이 자주 있을 수도….”
“아버지 되는 사람이랑, 뭐요?”
“예에. 물리적으로 거리를 가까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 성관계도 주기적으로 해야 우리 산부분 몸이….”
선재는 거기까지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몸이 상한다, 까지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범진 앞에서 물리적인 거리나 성관계 같은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안 그래도 자주 붙어 있어 병원도 날 잡고 가야 했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되면 당장 오후에 하려고 했던 시술 예정 또한 틀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범진은 아침이 되자마자 바빠 보였었다. 집에 데려다줄 테니 저녁이나 먹자는 소리를 했었다. 그러면 낮 동안은 집에 없다는 소리겠지. 잠깐 만들어진 기회가 몽땅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선재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시답잖은 얘기를 자꾸만 하는 의사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제 무릎 위에 앉는 게 불편했는지, 벽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준희가 눈에 들어왔다. 선재는 입 모양으로 준희를 부르며 손짓했다. 이리 와, 준희야.
아이는 병원에서 씻은 탓에 머리칼이 여태 조금 젖은 상태였다. 세수를 시키다 젖은 머리칼을 따로 말려줄 수가 없었다. 수건으로 닦아주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날이 춥지 않아 괜찮긴 하겠지만, 면역력이 약한 아이라 걱정이 된다. 쫄래쫄래 다가온 아이를 품에 안은 선재가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범진은 현실성도 없는 걸 계속 물어보는 중이었다.
“야…. 똑바로 안 듣냐.”
범진의 말에, 준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한 말인 줄 알아, 뜻도 모르고 일단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네에, 까지 대답하려던 아이의 뺨에 손을 갖다 댄 선재가 알겠어,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의사는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를 띠었다.
“일단 많이 드시고, 움직이는 건 해봤자 도움이 별로 안 될 겁니다…. 본인 살만 더 빠져요…. 아이는 뭘 해도 잘 크니까요…. 먹는 건 우리 산부분을 위해서인 거예요. 본디 이… 우성 알파라는 형질이, 영양분 공급이 안 되면 자체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여기 보시면은….”
막대를 든 의사가 커다란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범진이 의자를 끌어 가까이 다가갔고, 선재는 절반 정도 보이는 화면에만 시선을 기울였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사진이었다. 의사는 태아가 어떻게 모체에서 영양분을 빼 가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곳에 의식이 있어서인지, 사진에서도 아무 감흥을 느낄 수 없었고, 의사의 말도 절반 정도는 들리지 않았다. 범진이 흠, 하는 소리를 낼 때만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임신한 제 몸보다는 범진이 무슨 짓을 할지만 걱정이 되었다. 늘 그렇지만 지금도 행패를 부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초음파 사진은 지난주에도 보았던 적이 있다. 그때도 저런 작은 점 같은 게 하나 있었고, 주변부는 검었다. 작은 병원에선, 굳이 ‘아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누가 봐도 중절을 하겠단 표정으로 앉아있으니 그럴 만도 했을까. 그때를 떠올린 선재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봤다. 지금이 10시니까, 그 병원에 다시 갈 시간은 충분하다.
먼저 일어난 범진이 준희를 안고 있던 선재에게 눈길을 보냈다. 선재는 어떤 말도 유심히 듣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범진이 선재가 어떻게 하는지를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타이핑을 하던 의사가 콧소리를 냈고, 선재는 그제야 범진과 눈을 마주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신발이 닿은 준희가 우뚝 서 있던 범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압지이….”
“준희야.”
범진이 선재의 말을 무시한 채 준희를 품으로 안아 들었다. 금세 자리 잡은 아이의 움직임을 느낀 범진의 턱이 위로 가볍게 한 번 들렸다.
“안 가냐…?”
“…가.”
선재는 범진의 눈을 재빨리 피했다. 품에 준희가 있으니 빨리 이 공간을 먼저 나서주는 게 상책일 듯했다. 여태 상담했던 의사 앞에서 이런저런 꼴을 보일 순 없었다.
그사이에 의사와 눈이 마주친 선재가 가벼운 묵례를 했다. 아까부터 그러세요, 하세요, 좋아요, 하고 웃기만 하던 분은 여태까지도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인상이 유하긴 하지만 범진이 무슨 말을 하건 여유 있게 넘기던 태도가 인상에 남았다.
“하아, 존나 붙어 다녀야겠네….”
선재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신경도 안 쓰고 천천히 걸었다. 준희가 슬쩍 보일 정도로 거리를 유지한 채 앞으로만 향했다.
“어? 야… 니 내일부터 나랑 같이 다니자.”
“…뭐가.”
“의사가 말하는 거. 못 들었냐?”
“….”
“내가, 니 디질 수도 있다고 해서 기분이 좆같았그든,”
“….”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잠깐 뒤돌았다 금방 앞을 쳐다본 선재가 걸음의 속도를 현저히 늦췄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던 건지. 몸이 약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라도 들은 것일까. 선재는 신경을 안 쓰는 척했지만, 범진의 다음 말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근데 씨발, 오늘 들어보니까 그건 아니네.”
“욕하지 마. 아기 안고 욕….”
“내가 언제.”
“했으니까,”
“입에 붙었는데 어찌라고.”
“…붙어도 하지 마. 준희 아무 말이나 다 따라 해서.”
“하아, 이 이쁜 거 이거.”
니를 죽일까. 살릴까. 하는 소리도 덧붙어왔다. 선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혹시나 몰라 준희 쪽을 향해 손을 슬쩍 뻗었다. 덥썩 안기겠다는 제스쳐는 없고, 압빠아, 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넓은 엘리베이터지만 밀폐된 공간이라 그 짧은 시간 동안 범진이 이상한 말을 할까 어찌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사람이 셋이나 더 타고 있었다.
허나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입구와 가까이 주차된 차까지 별말은 나누지 않고 걸어가게 되었다.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범진은 김밥을 일곱 줄이나 주문했다. 기본 김밥 외에도 게살, 갈비, 크림치즈 등. 선재는 요즘 김밥은 이렇게 종류가 많은가보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제부터 따로 먹은 게 없어 허기가 졌던 게 사실이었다. 선재는 처음 보는 김밥을 덥썩덥썩 잘도 집어 먹었다. 며칠간 속도 안 좋고, 식탐도 없는 편이었는데 왜 이렇게 맛이 좋은가 몰랐다. 속이 꽉 찬 참치김밥을 집어서 먹었을 땐 한쪽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범진이 체하겠다고 핀잔을 줬다.
“야, 안 뺏어 먹는다.”
“어가….”
입을 닫고 살짝 웅얼거리듯 말해 ‘뭐가’라는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가볍게 코웃음을 친 범진은 만둣국도 하나 주문했다. 캐주얼하고 깔끔한 밥집이라 분위기도 편안한 편이었다. 밥을 먹을 거면 이런 데서 먹는 게 좋았다. 범진은 매번 코스요리나 고기 같은 것만 사주려고 하지만, 입에 안 맞을 때가 많았다. 가격이라도 저렴하면 모르겠지만 어이없는 식대가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 범진의 방식이란 걸 알아서일까. 느껴지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원 근처에 이런 식당이 있어 다행이었다. 준희도 입맛에 맞는지 김 조각을 입 주변에 붙인 채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이 입에도 한입에 들어갈 만큼 작은 김밥도 따로 판매 중이었다. 불고기와 익힌 채소, 잘게 조각난 단무지를 밥이 곱게 싸고 있었다. 커다란 숟가락 다루는 데는 서투니, 선재가 옆에서 김밥을 하나씩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 김 조각은 어떻게 묻히는 건지…. 손으로 닦고 닦아도 계속 김이 묻었다.
“또 묻었다….”
“주니 김빱.”
“응, 김밥 먹고… 묻었네.”
손이 준희의 입가에 가 있고, 또 범진의 행동을 의식하긴 하면서도, 제일 중요한 일은 잊지 않으려 했다.
오늘 오후까지는 어떻게든 주사를 맞아야 한다. 수술이라면 이리 급한 마음이 되지 않았겠지만, 간단한 주사 시술이라면 말이 달랐다. 길어봐야 몇 분. 그냥 주사만 맞으면 된다. 이번엔 헛구역질이 나와도 어떻게든 참아볼 작정이었다. 손과 발을 묶어달라 부탁하는 한이 있어도 주사를 맞고 싶었다. 그 생각에 잠시 결연한 표정이 된 선재를, 범진이 슬쩍 쳐다봤다.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긴 듯한 고운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야.”
“…어?”
“니 뭔 생각 하냐.”
“아무 생각도 안 해.”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해라.”
“그게 무슨 말인데.”
“몰라. 니가 알겠지.”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해라…. 선재는 습관처럼 턱을 들고 말하는 범진을 향해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당찮은 생각을 하고 있고, 마치 그 생각을 범진이 읽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괜한 걱정이겠지. 그래야만 한다.
식사가 끝난 뒤, 선재는 앞에서 범진의 차를 기다렸다. 건물 뒤편에 주차해 이리로 오려면 몇 분가량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따로 요금을 받는 주차장이어서 그만한 시간이 걸릴 듯했다. 범진은 선재가 준희를 챙기는 사이 계산을 끝내고 식당을 먼저 나섰다. 김밥만 일곱 줄을 주문한 탓에 너무 많은 음식이 남았다. 작년 여름인가. 선재는 강원도에서 도망치던 그 날 들렀던 휴게소에서도 범진이 많은 양의 김밥을 주문한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땐 도망가려는 생각만 가득해서, 먹고 체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선재는 배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준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곤 문을 열어, 맑은 가을 공기를 쐬었다. 지금도 급한 일이 있는 건 맞지만 작년처럼 범진이 무섭거나 하진 않았다. 적어도 웬만해선 때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아이를 지우는 걸 들켜선 안 되겠지.
곧 다가온 차량에 선재는 뒤쪽으로 돌아서 준희부터 태웠다. 이젠 카시트도 익숙해졌는지 벨트 부분을 혼자 만지기도 했다.
“괜찮아?”
“녜에.”
“편해?”
“녜에.”
끄덕이는 아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친 선재가, 돌아서 조수석 앞까지 갔다. 검은 유리창이지만 범진이 저를 쳐다보는 것만은 잘 보였다. 범진은 선재가 뭘 하고 있는지 놓치는 법이 없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병원이었다. 어린이집과 마트로 향하는 방향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다 아는데, 그 반대편 방향에 놓인 건물은 아직도 낯선 것이 많았다. 선재는 병원이 최소 30분은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몇 분 안 돼 도착해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급하지 않았어도 됐을까. 이렇게 되면 범진만 제 할 일을 하러 나가주기만 하면 된다.
여전히 다음 일 같은 건 머리에 없었다. 때리지 않는단 확신이 어렴풋하게 있긴 있지만, 시술을 하지 못한 날 범진이 보인 반응을 떠올려보면, 안 맞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당연히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선재는 지하 주차장에 선 차에서 태연한 얼굴을 한 채 내렸다. 준희를 안아 내려주었고, 범진이 주차하는 것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차하는 걸 보면 집에 좀 있다 가겠다는 걸까.
범진은 주차를 마친 뒤 선재가 서 있는 곳까지 단숨에 걸어서 왔다. 뾰족하게 치떠진 눈이 선재의 얼굴에 머물다 살짝 빗나갔다. 동그랗게 돋은 귀에서 멈추었고, 범진은 그 귀를 이로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아예 안 하는 짓은 아니지만, 밖에서 이럴 때마다 선재의 표정은 늘 눈에 띄게 곤란해지곤 했다. 얼굴이 흰 편이라 붉게 오르는 수치감 같은 것도 금세 드러나는 편이었다.
“아, 왜….”
“누가 이렇게 생긴 귀 달고 있으라냐.”
“….”
이젠 밖에서 귀도 가만 놔두지 않을 작정인지. 선재의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에 몇 번이나 닿았다. 스위치엔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10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는 출발할 생각을 않았다. 혹시 제대로 안 눌렀나 싶어 계속해서 손이 갔다. 총 두 대인 엘리베이터지만 한 대는 이사 때문에 스위치로 작동되지 않았다. 반대쪽 귀까지 깨물린 선재가 기어코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만해.”
“…야.”
“….”
여전히 귀 한쪽을 막은 선재가 범진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니 다른 데서 그만하라고 말하지 마라.”
“뭘.”
“니가 그만하라고 하면 존나 하고 싶어지그든…?”
“…허.”
능글맞게 웃는 범진의 얼굴이 선재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할 말은 없었다. 허무하다는 듯 허, 하고 탄식을 내뱉고 준희 쪽으로 몸을 붙일 뿐. 아이는 벽에 있는 무늬 쳐다보는 걸 예전부터 좋아하는 편이었다. 볼록볼록하게 튀어나온 거친 벽면에 흥미가 생겼는지 손을 그쪽으로 가져갔다.
“지지야… 준희.”
“주니 지지….”
“응, 만지지 마.”
잘하면 병원 점심시간 전에 내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들어온 선재는 준희를 신경 쓰면서도 시간 계산을 하느라 다른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의식하는 거라면 범진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 정도. 범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침대에 털썩 누워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체크했다. 선재의 눈이 가끔 닿았지만, 그때도 주변엔 무관심한 눈치였다. 선재가 한 가지 생각을 하느라 다른 것들을 소홀하게 여겼다면, 범진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린이집엔 아침에 연락을 해두었다. 사정이 있어 점심 즈음 아이를 맡기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두 시간 내지 세 시간만 어린이집에 있는 게 되니, 선생님 입장에선 의아한 게 당연했다. 저녁까지 운영하는 종일반 스케줄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선재는 원래 마치는 시간에 아이를 보내 달라고 말했다. 옆에 범진이 있어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었다. 사정에 대해선 아이를 데려다줄 때 대충이라도 얘기할 생각이었다.
“아… 이 새끼.”
탄식하듯 입을 연 범진에게 선재의 눈이 향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일이 틀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범진이 저렇게 반응하는 경우라면, 손 놓고 일을 두고 볼 수는 없단 말이 된다. 선재는 의식하지 않는 척 준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으려는 준희의 움직임을 달랬다.
“준희 오늘 어린이집에 잠깐만 가 있자.”
“녜에…. 칭구들.”
“응, 친구들 보러 갔다가….”
준희는 범진의 차에서도 아무 건물에다 대고 친구들이 저기 있다, 하고 말을 했었다. 결국, 도착한 곳이 지하 주차장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긴 했지만. 선재가 곧바로 그런 준희를 안아 엉덩이를 두드려주었었다. 좀 있다가 가자, 친구들 보러… 차에서 내린 뒤 말했기 때문에 범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화아… 이 씨발롬 이거….”
“….”
선재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방에 있는 아이는 책에 손을 대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범진이 몇 번 더 답답하다는 반응을 하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휙, 하고 저 무거워 보이는 상체를 잘도 세웠다. 그리곤 목을 꺾어 뚜둑, 뚜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눈을 들어 선재를 쳐다봤다.
“야.”
“응.”
“니 이리 와봐.”
까딱거리는 손을 쳐다보던 선재가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거실이 넓어 선재가 걷는 속도로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범진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차라리 기어서 오지 그러냐.”
“…왜.”
무릎이 금방 침대 모서리에 닿았다.
“니 진짜 나랑 같이 다닐래?”
“뭘 같이….”
범진은 의사가 알파 남편과 최대한 가까이 있으라고 했던 소리를 지금 당장부터 실행할 기세였다. 눈앞이 잠시 아득했던 선재가 빠르게 지나가는 생각들 속에서 제일 그럴듯한 생각 하나를 어떻게든 건지려 했다.
“근데 같이 다니는 건 쓰읍….”
병원에서도 같이 다니자고 하고, 지금도 그런 걸 물어봤지만 걸리는 게 있어 보였다.
내심 안심한 선재가 입을 열었다.
“몸 지금은 괜찮으니까, 너 볼일 봐.”
“지금 괜찮으면 뭐 하는데. 어쭈?”
“….”
선재가 팔을 내려다보았다. 범진이 제 팔을 잡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힘주냐? 진짜 살만한가 보네.”
“왜… 아!”
아예 팔꿈치를 잡고 끌어당기자, 더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침대에 푹, 빠지듯 앞쪽으로 넘어진 선재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범진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서 보였다.
“괜찮냐?”
“….”
무지막지하게 앞으로 끌어놓고 그런 말이었다. 선재가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범진의 눈만 쳐다봤다. 자세히 보면 얇은 속쌍꺼풀이 있다. 오늘 어딘가 시선이 날카롭다고 느꼈는데, 속쌍꺼풀 한쪽이 풀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범진에게 붙잡힌 팔을 빼낸 선재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왔다.
“괜찮다고?”
“어… 읍.”
고개를 채 끄덕이기도 전에 입술이 맞부딪혀 왔다. 선재는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에 갑자기 범진의 입술이 닿자 눈부터 꽉 감았다. 범진의 가슴 근처에 있던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커다란 근육이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렇게 움직이는 듯했다.
“우으….”
밀려나지도 않고, 짓궂은 반응만 하는 범진이 얄미웠다. 아예 손을 들고 제 손바닥으로 이쯤을 만지라고 교정까지 해주자 차라리 손을 침대로 떨어트리게 되었다. 범진의 혀가 보다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잠깐씩 떨어지는 입 사이로 숨을 헐떡이던 선재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허, 너, 일 안 가?”
“산통 깨냐.”
시비 투로 말을 한 범진이지만, 시계를 스치듯 쳐다보긴 했다. 선재의 눈이 범진의 얼굴에만 줄곧 닿아 있었다. 범진이 저를 다시 쳐다보기 시작하면서부턴 시선이 어긋났지만. 한동안 선재의 얼굴을 닳을 듯 쳐다보던 범진이 큰 손을 그 얼굴 위에 올렸다.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살살 쓸었다.
“….”
“좀 이따 보자.”
“…응.”
선재는 오피스텔 창문으로 범진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것까지 확인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나온 차는 조심성 따윈 없이 선재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졌다. 창으로 검은색 차 한 대를 지켜볼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선재가 방에 있는 준희부터 챙겼다. 아이는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병원 침대가 불편했는지 새벽부터 깨어 손장난을 치기도 했었으니.
“준희, 많이 졸려?”
“으으응… 주니 갈래요. 칭구들.”
“응. 가자.”
범진이 보통 저녁 즈음에 오니 시간적으론 여유가 있는 게 맞는데, 아무래도 몰래 계획한 일이 있다 보니 갈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았다. 선재의 이마엔 땀까지 한두 방울씩 맺히고 있었다. 여유 있게 준희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서는데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재는 복도를 지나치며 고개를 저었다. 준희의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 *
“원래 하원 하는 시간에 아이 보내면 되죠?”
“네. 그래 주세요.”
“알겠습니다. 준희 선생님이랑 가자.”
“성샌니임….”
가까운 어린이집이 이번만큼 다행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이 걸음에 맞추느라 20분이 넘게 소요되긴 했지만, 아직도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선재는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벽시계를 흘끔, 쳐다본 뒤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리곤 선생님이 준희의 손을 잡고 원실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혹시나 몰라 병원에 전화를 걸진 않았다. 휴대폰은 이제 제 은밀한 계획을 지켜주는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다. 선재는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른 채 어린이집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맑고 기분 좋은 공기가 바깥엔 가득했다. 그 공기를 들이쉬며 바로 앞에 있던 건널목을 건넜다. 멀지 않은 거리에, 병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이 보이고 있으니, 마음의 부담은 아까보다 훨씬 덜했다.
집에서 나왔을 땐 불안했지만, 이제는 가서 주사만 맞으면 되니까.
큼지막한 상가 건물을 지나치는 선재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았다.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어 얼굴을 쓰다듬듯 만져보기도 했다. 가을 공기에 적당히 시원해진 얼굴 체온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선재는 길게 나 있는 인도 끝에 시선을 둔 채로 계속 걸었다. 과일가게와 지하로 통하는 마트, 카페를 점찍듯 지나쳤다.
제일 긴 인도만 지나치면, 마지막 건널목이 나온다. 어제는 그 앞에서 쓰러졌지만, 지금은 컨디션도 괜찮았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고, 범진과 내내 있어서인지 어지럽거나 한 느낌도 없었다. 범진 때문에 건강해진 게 어딘가 이상하긴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범진의 페로몬이 배 속 아이의 페로몬을 눌러주며 안정감을 갖게 되는 거였다. 제일 큰 부분이 페로몬이라고 했지만, 이 외에도 아버지가 눌러주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다. 아이가 악의를 갖고 강한 에너지를 내뿜는 게 아니라, 우성 알파가 배 속에서 발달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말도 들었었다. 선재가 괜히 그 말을 떠올리다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최대한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는데, 병원을 눈앞에 두게 되자 흘려들었던 말도 차근히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길을 걸었을까. 마지막 건널목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멀지 않은 차도에서 접촉사고가 난 두 차량을 보게 되었다. 한 대는 일반 세단인데 한 대는 크기가 작은 경차였다. 다행히 사람은 안 다친 것 같은데. 시선을 그쪽으로 빼앗긴 선재가 파란 불이 들어온 걸 뒤늦게 확인했다. 어떤 사람이 눈앞을 휙 지나간 뒤에야 저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세단 운전자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운전석으로 상체만 넣어 클락션을 울리기도 하고, 상대 차량 운전자를 향해 가슴과 턱을 내민 채로 위협하듯 말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꼭 범진을 떠올리게 했다. 60대 정도로 보였는데, 범진도 늙어서 저럴까 싶었다. 괜한 생각이 빠졌던 선재가 병원 건물을 앞에 두고 또 빠앙- 하고 클랙슨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옆을 쳐다본 선재가 또 빵-하고 날카롭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차 한 대가 인도와 차도 경계에 바퀴를 걸고 아슬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차량에, 선재의 고개가 확실히 옆으로 돌았다. 크고 검은 차. 운전석 창은 활짝 열린 채였다. 선재는 그 안에서 저를 빤히 쳐다보는 범진과 눈이 마주치고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멈췄다.
“…어이, 어디 가시는데요.”
“…어… 한의원.”
눈을 두어 번 끔벅거린 선재가 그래도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니 어디 간다는 말 없었잖아.”
“…집에서… 발목 아파서.”
“그래?”
“응.”
“일단 타라.”
“건물… 저건데.”
“그니까 타라고.”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범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선재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차도 쪽으로 걸어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라 더 운전해서 갈 것도 없었다. 선재는 옆으로 꺾이는 핸들에 손을 차 문에 댔다. 건물 뒤편에 있던 주차장엔 모난 돌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그 돌 위를 구르기 시작한 바퀴가 어느 선에서 우뚝 멈췄다.
“내리라.”
“…어.”
집에서 나간 지 3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선재는 잔뜩 긴장을 해, 범진에게 왜 벌써 왔냐 같은 말도 못 붙이고 있었다. 제일 할 만한 질문이었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졸지에 한의원을 가야 하나 싶어 눈앞만 하얘졌을 뿐이다. 앞을 향할 때마다 모난 돌들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범진이 걸을 땐 그 소리가 더 크게 났다.
선재는 범진의 눈치를 보며 건물까지 들어섰다. 범진이 반걸음 정도 뒤에서 걷고 있었는데, 자꾸 빨라지는 심장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선재는 눈으로 옆쪽을 살피며 한의원이 몇 층에 있는지를 파악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가려던 3층이 아닌, 한의원이 있는 4층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잠시 흔들렸던 엘리베이터가 약간의 소음을 내며 출발했다.
“…요새는 한의원에서도 애새끼 지워주냐?”
“…뭐가.”
숫자 버튼만 쳐다보고 있던 선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끝까지 빙신새끼 대하듯이 구네.”
“진짜 무슨….”
순간 문이 열리고 큼지막한 창문이 몇 개 드러났다. 선재는 앞을 쳐다보며 일단 걸음을 뗐다. 범진이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게 창문으로 반사돼 보였다.
“야. 씨발. 다른 거 필요 없고.”
“….”
“애 떼든 말든 니랑 준희 싹 다 내 밑으로 넣을 거니까는.”
“….”
“닌 씨팔… 어차피 이거 떼나 마나야…. 알아 처먹었냐?”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게 보였다. 건물 복도에서 이러고 싶진 않았다. 이거, 하면서 배를 밀듯이 만진 범진을 피해 몸을 옆으로 끌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초로의 남자는 한의원 쪽에 볼일이 있는 듯했다. 선재의 눈이 범진을 향해 치들어졌다. 분이 서린 얼굴이긴 한데, 형언하기 힘든 감정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았다. 그게 얼굴로 훤히 드러났다. 범진은 담배를 꺼내 무는가 싶더니 계단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먼저 내려간 범진을 무시하고 제 할 일을 할 순 없었다. 선재는 한의원 앞에 서서 오늘은 날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범진이 싫다고 한들, 그런 말을 하고 가버린 사람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지우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범진이 전날에도 준희를 병원에 데리고 와주고, 또 수발까진 아니더라도 옆에서 제 성질과 어울리지 않게 도와준 걸 안다. 다 제가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가 벌어진 일이기에 심정이 복잡해졌다.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선재가 뒤편에 있던 주차장에서 범진의 차를 찾았다. 범진은 시동도 걸지 않은 채로 그저 제 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선재도 앞 유리로 훤히 보이는 범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미안.”
“…씨발 미안 같은 소리 한다. 디질라고….”
“….”
“야.”
“…어.”
“사과하지 마라.”
“….”
“하나도 안 미안한 기.”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미안하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이런 거라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범진은 건물에서만 좀 심각한 표정이었지, 사과를 하지 말라고 했을 때부턴 비실거리며 웃는 낯을 해 보였다.
어쨌든 범진의 아이이기도 했으니까. 선재는 건물에서 그런 생각으로 내려온 거였다. 범진에게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지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똑바로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 들었었다.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던 건데.
사과부터 막히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한의원 앞에서 들었던 범진의 말도 꿈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앞쪽으로 기울어 있던 몸이 붕 뜨듯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주차장 입구를 벗어난 차가, 오피스텔이 있는 방향으로 꺾이고 있었다.
* * *
범진은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셔츠 단추를 한두 개씩 풀었다. 위에서부터 풀어헤쳤는데, 어떤 단추는 아예 뜯겨 나갔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땅에 작은 조각 떨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그리곤 셔츠를 어깨에 걸린 수건이라도 된다는 듯이 손으로 잡아 찢듯 벗었다. 순식간에 드러난 까무잡잡한 등 근육에 선재의 눈이 다른 쪽을 향했다. 거침없이 걷던 범진이 뒤를 돌아 눈짓했다.
“빨리 안 들어오냐.”
손은 이미 바지 지퍼에 가 있었다. 불룩하게 솟은 천 위로 뭔갈 만지나 싶더니 바지도 금세 벗었다. 선재는 손 쪽을 무심히 쳐다보다 급히 고개를 들었다. 범진과 눈이 마주쳤다.
“….”
드로어즈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가림막일 뿐이다. 꺼떡이고 있을 성기의 실루엣이 훤했다. 선재는 여태 신발장 근처에서 굼뜬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신발도 겨우 벗었고, 더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천천히 했다. 드로어즈마저 벗은 범진이 성기를 잔뜩 세운 채 인상을 썼다.
“아… 저거 진짜.”
“….”
“빨리 와라. 하나, 둘.”
이미 검붉어질 대로 검붉어진 성기가 꺼떡대고 있었다. 숫자 세는 소리를 들은 선재가, 걸음을 빠르게 해 침대까지 쭉 향했다.
“아, 알겠으니까.”
화가 났다고는 했지만, 차에서부터 그 분은 거의 풀려 보였었다. 병원 건물에선 분명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모르겠다. 선재는 그래도 제가 책임질 부분도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일단 섹스를 하고 나서 말을 해볼 작정이었다. 아직 시간도 있고, 범진이 다 알게 된 마당에 굳이 주사 요법만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저번에도 가진 생각이지만, 제 몸은 얼마든지 상해도 된다. 그건 별로 개의치 않는다.
침대로 거의 다가간 선재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었다.
얇은 차림이라 뭘 오래 벗고 있을 것도 없었다. 속옷 한 장만 달랑 남자, 우뚝 선 범진에게 스치듯 시선이 닿았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선재는 엉덩이 쪽으로 손을 넣으며 천천히 하나 남은 천까지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 타이밍에 범진의 손이 가슴으로 쭉 뻗어왔다. 임신을 해서인지 몇 주 전보다 훨씬 통통해진 유두가 범진의 손가락에 그대로 잡혔다. 범진은 매번 그랬듯 톡 불거진 것을 아프게 쥐기도 하고, 부드럽게 굴리기도 했다.
발목까지 속옷을 내린 선재가 그걸 핑계로 상체를 숙였다. 범진의 손이 억지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꼭 옷을 벗고 있는 와중에 젖꼭지를 건드니까. 선재가 발을 들어 속옷을 옆쪽으로 던져두고, 침대 위로 기어가듯 올라갔다. 초가을이라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고 잠들기도 해서, 이불은 여름 이불보다 약간의 두께가 있었다. 선재가 그 이불에 손을 댄 채 범진이 침대 위로 올라오는 걸 가만 쳐다보았다.
이럴 땐 꼭 범진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범진의 어깨를 가득 메꾼 문신 덩어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릎으로 비척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온 범진은, 위로 향해있는 선재의 눈과 눈을 맞췄다. 손을 들어 선재의 착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디 젖 만지는데 도망가고….”
“그런 소리 좀….”
“니가 만져봐라.”
“뭐?”
“니 젖 니가 만져보라고.”
“…아, 됐어.”
원체 돌려 말할 줄을 모르니, 젖처럼 민망한 지칭도 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젖을 젖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며 되레 따져왔다. 어? 말해봐. 선재는 그런 시비는 피하려고 집에서 섹스할 때만큼은 과한 저지를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입버릇이 더 천박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제 착각일까. 만지지 않겠다고 하니 일부러 세게 유두를 꼬집는 범진의 손길이 느껴졌다. 표정을 찡그린 선재가 그 팔을 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파. 내가 할, 할 테니까.”
아프게 꼬집혔는데도 몸의 반응은 착실한 편이었다. 선재는 금세 엉덩이 사이가 찐득해지는 걸 느끼고 제 두 손을 유두로 가져갔다. 망측하게 돋은 살점이 더 붉게 올라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꼬집고 당겼는지 얼얼한 감각도 남았다. 선재는 얇은 선을 그리며 새 나오는 애액을 무시하고 딱딱해진 유두를 톡톡 건드렸다. 범진이 볼 때마다 손가락으로 쥐어보기도 했다.
범진은 선재의 어깨부터 허리로 떨어지는 몸선이나 옴폭 들어간 배꼽, 그 아래에 돋아 있는 단정한 성기까지 훑고 있느라 한 곳에 시선을 두지 못했다. 신기할 정도로 맑은 기가 도는 선재의 성기는 한참이나 어린 소년의 것처럼도 보였다. 오메가의 성기가 대부분 이런 걸 알면서도 제 다리 사이에 솟은 좆대가 더욱 고개를 쳐드는 것이 느껴졌다. 빨리 들어가고 싶어 침을 흘리는 좆을, 범진은 늘 자랑하듯 내놓곤 했다. 그걸 본의 아니게 쳐다본 선재만 눈을 피했을 뿐이다. 검푸른 핏줄로 휘감긴 성기가 하염없이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다리 안 벌리냐…?”
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오므라든 다리를 쳐다보던 범진이 양쪽 눈썹을 꿈틀댔다. 뭘 할지 뻔히 알면서도 다리가 자연스레 벌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무릎을 천천히 연 선재가 유두를 만지고 있던 손을 시트 위로 내렸다. 범진의 눈이 그쪽에 꽂히며 휘어졌다.
“니가 만지니까 시원찮지.”
“…그런 거 아니야.”
“닌 씨… 얼굴만 이래 생겼지 만지고 박아주면 좋다고 싼다고.”
선재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범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 또한 예전엔 그런 적이 없었다. 섹스를 하며 소변을 참지 못한 적도 없었고, 경련을 하듯 뒤로 넘어간 적도 없었다. 다 범진 때문이었다. 사실이기도 한 말을 들으며, 선재의 얼굴 곳곳에 붉은 무늬가 일었다. 다리를 벌리자마자 그 사이로 들어온 범진이 손이 엉덩이 사이로 향했다. 질척해진 엉덩잇살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 두 개가 그대로 정갈한 주름으로 둘러진 구멍 근처에 닿았다. 접혀 있던 주름들이 손가락에 쓸리고 있었다.
소리를 목 끝에만 맺던 선재가, 엄지손가락으로 회음부를 누르는 손길엔 목을 뒤로 슬쩍 꺾었다. 반듯하게 살이 오른 부위를 꾹꾹 누르며 구멍을 쓸어대니 자극이 안 될 리 없었다. 결국, 성기마저 세우기 시작한 선재가 목으로 차오른 소리를 침과 함께 삼켰다. 목 끝이 따가울 정도의 자극이었다.
“내가 그동안 좀 참았는데….”
그런 말을 하며 고개를 들지만, 와중에도 회음부를 꾸욱 누르며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럼… 그….”
“니도 들었잖냐…. 해주면 니한테 좋은 거.”
“…으….”
“애 떼고 싶음 떼라. 내 주제에 무슨 새끼냐….”
“…흐.”
그런 말을 할 때가 지금은 아니지 않나. 선재는 구멍에도 손끝이 살짝 들어갔다 나오는 걸 느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배 속엔 아이가 아니라 물공이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그게 하나둘 터지면서 구멍 새로 흘러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구멍에 닿은 손은 애액에 젖어 꽤 부드럽지만, 회음부에 닿은 엄지손가락은 많이 거칠었다. 워낙 손바닥과 손가락 안쪽이 거칠다 보니 쓸리는 느낌도 고스란히 들고 있었다. 민둥한 회음에 나기 시작한 붉은 자국을, 범진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엉덩이 살을 벌리고 들어간 손가락이 드디어 구멍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내벽이 이 정도에 질척해진 건 익숙했지만, 안이 전보다 많이 좁아져 있었다. 한두 번 넣은 구멍인가. 진심으로 몸이 안 좋아 보여 좀 참았었는데, 임신을 해선지 손가락을 죄는 느낌도 전혀 달랐다. 범진은 길을 내려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손가락에 내벽이 닿을 뿐인데도 제 좆이 꺼떡꺼떡 울었다.
“히야, 좆대가리 쳐든 거 봐라.”
어안이 벙벙해서 들여다보자, 범진은 사납게 솟은 제 성기를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니 얼굴만 봐도 선다. 이거. 하고 덧붙인 말엔 입이 더욱 굳게 닫혔다. 선재가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다른 쪽을 쳐다봤다. 내벽에 있던 범진의 손가락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태연한 척을 하려 노력했다. 아직까지는 그런 게 가능했다.
곧 손가락을 빼낸 범진의 손 여기저기에 애액이 묻은 게 보였다. 범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저분해진 손으로 제 성기를 아무렇게나 잡고 흔들었다. 제대로 흔들려는 건 아니었고, 애액을 일부러 묻히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 축축한 소리가 어찌 안 들리겠나. 선재는 눈을 다른 데로 두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을 참지 못했다. 남의 성기가 비벼지고 있는데도 낯이 뜨거웠다.
순간 짝, 하고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때렸다. 밑에서 아이를 어르듯 때리는 느낌이라, 선재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양쪽으로 벌렸다. 자세를 바꾸자거나 다리를 벌리란 말 대신 엉덩이를 때리곤 해서,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미 반쯤 벌어져 성기 받을 준비가 된 선재의 구멍이 범진의 눈에 훤히 들어왔다. 얼굴론 수치심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 굴지만, 몸이 반응을 달리했다. 처음엔 무식하게 갖다 박는 데만 열중했지만, 몸을 적응시켜주면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정복할 때 느끼는 쾌감 외에도, 섹스할 땐 다양한 재미가 있는 법이다. 입꼬리 한쪽을 올렸던 범진이 제 좆을 선재의 구멍에 대가리부터 몇 cm쯤 집어넣었다. 녹진하게 풀려 있던 주름이 그대로 성기를 씹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 너무 세게….”
“한두 번 박히냐….”
“아픈데… 그러면… 어쩌….”
“애까지 배 놓고… 씨팔….”
선재는 그런 말을 하며 가까워지는 범진의 얼굴엔 두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랐다. 정중앙에 자리 잡은 범진이 성기를 약간만 밀어 넣은 채 상체를 굽혀오고 있었다. 손을 올려 젖꼭지를 한 번 비트는가 싶더니, 그대로 턱을 잡고 정면으로 돌렸다.
“제대로 쳐다보고 부탁해라. 부탁할 거면.”
“….”
“진짜 아프냐.”
침을 꼴깍 삼킨 선재가 위쪽을 바라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느리게 허리를 쓰는 범진의 몸짓이 그대로 다 전달되고 있었다. 잔뜩 풀어지고 예민해져 있던 속살에 범진의 성기가 힘있게 닿고 있었다. 제대로 섹스를 한 것도 아닌데, 내벽이 많이 부어올라 있는 걸 선재도 느끼고 있었다. 범진의 성기가 천천히 들어오는데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쓸리듯 밀리는 점막에, 선재의 표정이 시시로 일그러졌다.
“표정만 이래가지고….”
읊조리듯 말한 범진이 선재의 허리를 삽입할 때마다 끌어당겼다. 병원에서 아무리 섹스를 권했다지만, 추이를 지켜보며 섹스할 필요는 있었다. 유독 느리게 허리를 쓰던 범진이 선재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자꾸 얼굴을 돌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손이 무식하게 얼굴로 가긴 했다. 그 정도의 이성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홱 돌릴 때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다시 앞으로 오게 만들었다. 촉촉한 눈가가 성감으로 벌게지는 게 보였다. 그 눈을 짓누르듯 쓸어준 범진이, 동시에 안쪽에서 닿는 내벽 돌기에 큰 숨을 내쉬었다.
구멍을 드나드는 좆이 공기에 노출될 때마다 선재의 애액으로 번들댔다. 아래를 쳐다본 범진이 엉덩이 살을 벌리고 그 광경을 쳐다봤다. 좆을 따라 들어오고 나오길 반복하는 구멍 주변의 살점이 이렇게나 외설스러웠다. 진득하니 왔다 갔다 한 것만으로도, 선재의 성기는 물을 가득 맺었다. 이내 장력을 이기지 못한 정액이 물처럼 질질 흘러 회음과 결합부까지 적셨다. 생식 기능과는 상관이 없어 농도가 물처럼 연할 수밖에 없었다. 수치스럽고 싫다는 얼굴을 한 채 그런 정액을 싸는 선재가 오늘따라 더 자극적으로 보였다. 후으, 잇새로 날 선 숨을 뱉은 범진이 탱글탱글한 볼기짝을 양옆으로 벌렸다.
“흐으… 왜… 으, 흑.”
“제대로 다리 안 벌리냐…?”
“알…흐윽…!”
오늘따라 무릎이 자꾸 오므라들었다. 몇 번이나 범진이 무릎을 벌려대도 다시 그 각을 좁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세는 둘째치고, 어디든 봐야 하는 범진의 성미를 안다. 뒤늦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범진을 본 선재가 의식을 하고 무릎을 열었다.
“지 좋을 대로만 하고… 어….”
범진은 그러면서 엉덩이를 조물락거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상체를 넣고 선재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말을 하면서도 허리 쓰는 건 잊지 않았다. 예민하게 부푼 내벽이 잔뜩 커진 성기에 마구 긁히고 있었다. 살점이 밀리고 또 끌어 당겨지길 반복해, 선재의 몸 곳곳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이미 임신을 한 뒤라 잔뜩 가장 안쪽 돌기는 단단하게 닫혀 있는 채였다. 더는 입을 벌리지 않으니 다행일까 싶지만, 범진이 그 닫힌 장기를 성기 끝으로 퍽, 퍽 치는 게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끈적임과 마찰음, 쾌락과 여린 복통까지. 선재는 눈을 깊이 감은 채 그 모든 걸 견뎠다.
찌걱이는 소리가 얼마간 반복해서 들린 뒤에, 범진은 선재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니가 위에서 해봐라.”
“…왜….”
“떡 치는 데 왜가 어딨냐. 뭐. 내가 계속 박아주까.”
범진은 좆을 박아 넣은 채로 그런 소리를 잘도 이었다. 선재가 필사적으로 참으며 소리를 내는 것도 좋지만, 가끔 위로 올려 하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었다. 게다가 임신한 몸이니 힘을 조절할 필요도 있었다. 선재의 등을 손으로 감싼 채 자세를 돌린 범진이 베개에 제 머리를 턱 뉘었다. 섬처럼 우뚝 남은 선재만 못마땅한 표정을 한 채 범진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여전히 구멍엔 범진의 것이 가득 들어찬 채였다.
“안 하냐….”
두 손으로 선재의 엉덩이를 힘으로 끌어당겼다 놓은 범진이, 마무리하듯 볼기짝을 한 대 가볍게 때렸다.
선재는 언젠가 했던 것처럼, 범진의 단단한 두 다리에 등을 적당히 붙인 채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덩어리가 내벽 안을 꽉 채운 듯했다. 몽둥이가 내벽을 치고, 자세 탓에 내려간 장기를 사정없이 들쑤시고 있었다. 선재는 목을 위쪽으로 꺾은 채로 성기를 집어넣고 엉덩이를 조금씩 들썩였다.
“아, 아흐, 으.”
처음엔 할 줄도 몰랐는데 제법 해내고 있었다. 위에서 바르작거리는 선재를 가만히 쳐다보던 범진의 얼굴에 엉큼한 미소가 돌았다. 어쨌든 구멍 안에 제 좆을 넣고 들썩거리고 있지 않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나름대로 좋은 곳을 찔리기도 했는지, 반듯하게 발기한 선재의 성기에서도 물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원래도 묽은데, 계속 싼 탓에 물과 구분도 되지 않는 걸 흘려대고 있었다. 복근 위로 맺힌 물을 쳐다보던 범진이 선재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이리 좋아하는데….”
“하으, 읏….”
앞으로 솟은 성기보다 간질거리는 내벽이 더욱 예민했다. 선재가 범진의 허벅지에 등을 댄 채로 계속해서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두 손을 뻗은 범진이 선재의 볼기짝 양쪽을 한꺼번에 쥐었다. 앞으로 당겼다 뒤로 밀자, 선재가 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기가 크게 뽑혔다 박혀 들었다.
“아, 아흐읏!”
“좋냐…?”
얼굴을 천장 쪽으로 꺾은 선재가 몸을 발발 떨었다. 범진의 손에 볼기가 앞뒤로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아흑.”
범진이 무릎을 제대로 세워, 선재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구멍 속에 좆대 밀어 넣는 걸 멈추진 않았다. 살 부딪히는 소리가 거실을 크게 울리고 있었다. 범진의 손길에 따라 같이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던 선재가 아, 아흑, 하고 신음하며 범진의 다리 위에 완전히 누울 듯 몸을 뒤로 꺾었다. 바짝 서 있던 성기에서 질질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아…. 으….”
겨우 숨을 고른 선재가 얼굴을 앞쪽으로 들었다.
“다 쌌냐.”
“….”
구멍엔 여전히 범진의 것이 박혀 있었다. 간신히 앞을 봤지만, 아랫배를 가득 채운 듯한 느낌은 계속해서 들고 있었다. 눈을 깔고 아래쪽을 쳐다보니 범진의 복근 위에 제 정액이 가득했다. 사정하면 사정하는 대로 나오는 정액이라, 갈라진 부근에 물처럼 맺혀 있었다.
벌게진 얼굴을 쳐다보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두어 번 손으로 두드렸다. 그러면서 양 볼기를 세게 잡아당겼다가 놓자, 예쁜 좆도 같이 흔들렸다.
“아, 그렇게, 좀….”
“니만 싸냐?”
“…알겠으니까.”
선재는 범진의 복근에 손을 대고, 엉덩이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바닥은 제가 사정한 정액으로 금세 질척해졌다.
범진은 선재가 하는 것만 가만히 지켜보았다. 딴에는 위아래로 몸을 쓰며 찧기도 하는데, 혼자서만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조심해서 엉덩이를 흔들던 선재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또 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싸라는 범진은 싸지 않고, 아까부터 저만 계속해서 사정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도 애액이 많이 나와 앞뒤가 다 질척했다.
“…가….”
“뭐?”
“네가 해….”
“왜.”
“힘들어….”
잠시 멈추고 그런 말을 한 선재를, 범진은 뚫어질 기세로 쳐다봤다. 벌건 물이 든 얼굴에 자지가 터질 것 같았다. 혀로 한 번 입술을 훑은 범진이 이리 오란 손짓을 했다.
“뭐….”
“그대로 엎어 보라고.”
미간을 좁힌 선재가 범진의 눈을 쳐다보다 천천히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범진은 입부터 냅다 맞췄다. 높이가 제대로 맞지는 않았지만 제가 고개를 숙이면 몸이 완전히 붙지 않고도 키스를 할 수 있었다. 손으론 선재의 유두를 꼬집었다. 몸이 튀는 느낌도 있지만, 범진이 다른 한 손으로 선재의 등을 아프지 않게 눌렀다.
“우읍, 웁….”
그대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추삽질을 시작하자, 선재가 입 안에서 신음을 질렀다.
“으읍, 으으!”
찰싹찰싹하는 소리가 침대 위에서 흉하게 퍼져 나갔다.
살이 척척, 붙을 때마다 선재의 엉덩이가 진동으로 요란하게 울렸다.
범진의 굵직한 성기가 뽑힐 때마다 선재의 구멍도 핏줄 솟은 기둥을 꽉 물고 놔주지 않았다. 밖으로 쭉 뽑혔다가 다시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내벽도 사정없이 퍽퍽 찔렸다. 엎어진 탓에 눌려 있던 선재의 성기에서 찔끔찔끔 물이 또 새고 있었다.
“으읍, 읍!”
범진은 쉬지도 않고 큰 폭으로 쳐올렸다.
입술이 맞닿은 채여서 살 치는 소리가 제일 크게 들렸다.
구멍 안을 쑥쑥 드나드는 성기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 몰랐다. 선재는 두 손을 어디 둘 데도 없어 기도하듯 가슴 위에 모은 채로 범진의 키스를 받고 있었다. 뒤에서 박혀 드는 성기 때문에 엉덩이가 뒤집힐 듯했다. 쭉 뽑혀 나갔다 단숨에 들어오는 성기에, 선재는 깊은 곳까지 한 번에 찔렸다. 제 배도 제가 싼 정액으로 흥건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더 사정한 선재지만, 범진은 얼굴만 겨우 달아오른 수준이었다.
입을 뗀 범진이 달달 떠는 선재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뒷머리를 감싼 채 그 얼굴을 관찰하듯 살폈다.
“니 왜 이래 싸냐….”
“…으, 흐으….”
“겁나서 좆나게 박지도 못하겠네….”
선재는 범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자세를 바꾸어 정상위로 섹스하기 시작했을 땐 가슴이 탔다.
몸이 임신으로 인해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이었다. 제일 최근에 섹스했을 때도 몸이 조금 이상하다 느꼈는데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결국, 오르가슴을 견디다 못해 정신까지 잃은 선재가 몇 분 뒤에야 눈을 떴다. 범진의 성기가 독이 바짝 오른 채 꺼떡대고 있는 게 보였다.
이날 범진은 섹스로 사정하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선재를 데리고 뭘 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범진은,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위만은 했다.
원래도 선재만 봤다 하면 발기하는 자지였다. 찡그린 얼굴 바로 앞에서 자지를 탁탁 쳐내던 범진이 선재의 얼굴에 싸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 정액이 묻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선재를, 범진은 그 앞에서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땐 선재가 시선을 피해도 불같이 화내지 않았다.
* * *
범진을 알게 된 1년여 전부터, 새롭게 경험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시골 동네를 떠돌아다녔고, 불에 탈 뻔했고, 잘 모르는 남자에게 맞아 죽을 뻔도 했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너무 많아서일까.
더 끔찍한 일들을 꿈으로 꾸기도 했다. 예전부터 악몽을 꿔오곤 했지만, 최근 들어선 그 빈도가 현저히 잦아졌다. 감은 두 눈을 꿈틀거리던 선재가 꾹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고요하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옆에 있던 범진도 눈을 떴다. 범진이 자세를 옆으로 기울이고 선재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 안 돼… 안….”
“야….”
“…안 돼… 아기….”
“어이.”
가슴팍을 흔들어도 계속 잠꼬대 같은 걸 하고, 야, 하며 뺨을 살짝씩 쳐도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세게 때릴 순 없으니. 범진은 선재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가까이서 큰 소리를 냈다. 야!
“….”
뒤늦게 벌어진 선재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끔찍한 꿈. 강원도 집이었는데, 눈앞에서 건물 전체가 타고 있는 꿈이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집에 준희가 있단 걸 깨닫게 되었다. 미친 사람처럼 불길로 뛰어들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피부 껍질이 오그라들었고, 배도 누가 때린 것처럼 아팠다. 붉고, 또 검은 화염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울 수밖에 없었던 꿈이었다. 준희야. 안 돼. 제 소리를 저만 듣는 게 그렇게 고통일 줄 몰랐다.
“꿈꿨냐….”
“…어….”
범진도 잠결인 듯했다. 깬 지 얼마 안 된 얼굴인 게 티가 났다. 며칠째 비슷한 악몽을 꾸고, 범진이 깨워주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땀 맺힌 이마에, 범진은 손을 아무렇지 않게 올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선재가 제 손으로 이마를 닦았다.
“이게 씨… 닦아줘도.”
“더럽잖아.”
“뭐가 드럽겠냐. 오줌 지리는 것까지 다 봤는데….”
그러면서 허리를 잡아 와, 선재는 엉덩이부터 뒤쪽으로 뺐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도, 팔이 길어 사람을 한 품에 끌어당기는 걸 쉽게 했다. 거기다 힘까지 들어가니 뒤로 빠졌던 엉덩이도 앞으로 조금 붙었다. 졸지에 품에 안긴 꼴이 된 채로. 선재는 눈을 들고 범진을 쳐다보았다.
“…알겠으니까 놔. 놓고 자.”
“뭐만 하면 하지 마라… 놔라… 그만해라….”
“….”
“닌 씨발 내가 그리 싫으냐….”
혼잣말하듯 말하지만 분명 제게 하는 말은 맞다. 새벽이고, 집 안도 고요하니 소리가 거의 송곳 같았다. 형체를 분명히 갖고 귓속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범진은 그 와중에도 제 머리를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씨바… 땀 봐라… 하고 중얼거려도 손길을 거두진 않았다.
“야.”
“….”
선재가 대꾸는 없이 범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시선을 내린 것에 골이 난 눈치였다.
“니가 싫어해봤자다.”
“….”
“닌 어차피 내 거그든.”
“….”
“실컷 싫어해라. 그러다 보면 정이 좀 붙을지 누가 아냐.”
“….”
“니 근데.”
잡혀 있던 허리엔 갈수록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어쩌다 보니 몸도 거의 붙어버렸다.
“안 좋은 꿈을 왜 이래 자주 꾸냐.”
“…모르지….”
읊조리듯 입을 연 선재가 시선을 범진의 턱 쪽으로 내렸다.
“임신해서 그냐.”
“…몰라.”
“…씨팔, 배만 볼록했다가 그냥 쑥하고 나오는 줄 알았드만.”
“….”
“뭔 꿈 꿨는데.”
갑자기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나 싶더니, 범진은 다시 꿈 이야기를 했다.
“그냥.”
딱히 무슨 꿈을 꿨는지 입에 담고 싶진 않았다.
“누구 나왔냐고.”
“누구 나온 거 아닌데….”
“그럼 뭔 꿈. 답답해 뒤진다. 씹.”
범진은 의외로 꿈에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 걸 전혀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꿈자리가 사나운 날이면 행동부터가 달랐다. 선재에게 전화도 자주 걸고, 어디 나가지 말란 말도 서슴없이 했다. 그런 날엔 편의점도 갈 수 없었다. 범진이 그렇게 말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걸 알면서도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무섭게 말하는 범진에게, 선재는 늘 동화가 되곤 했다. 알겠다고 말하고, 준희와 방 안에만 있었다.
“…준희 없어져서….”
“어떻게.”
“….”
“….”
“…집에 불이 나서….”
웬만하면 말을 안 했을 텐데, 범진이 말을 하게끔 이끌었다. 허리를 감은 손이 부드러워지자 긴장이 풀렸다. 말은 한없이 상스럽게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것엔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남들이 그러고 있으면 간지럽게 뭔 짓거리냐고 욕을 하면서, 본인이 그러는 것엔 아무 의식을 않았다.
“니만 있었냐…?”
“…응.”
“이게 꿈에서도 나를 무시하네.”
“….”
“씨발, 무시도 해라. 그래.”
갑자기 박치기하듯 부딪혀 오는 이마에, 선재가 고개를 슬쩍 숙였다. 아프게 닿은 건 아니지만 밀리고는 있었다. 땀이 어느 정도 말라선지, 범진의 이마가 뜨겁게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지 말라는 듯 앞으로 치고 들어오는 이마에, 선재의 고개가 내려갔던 것만큼 다시 들렸다. 너무 가까워서 범진의 눈과 코… 얼굴의 어느 부분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만 밀어….”
“미는 건 니지… 어디서 덤탱이냐.”
“아….”
“…야.”
“왜….”
“좋아한다고 한 번만 말해봐라.”
“….”
“…한 번만 듣자.”
“….”
“그러면 애 떼러도 같이 가줄 테니까는.”
밑도 끝도 없이 말하는 사람인 건 알지만, 그런 말은 정말 난데없었다.
“…같이 안 가도….”
“어이… 민선재 씨…. 누가 그거 말합니까….”
범진은 슬쩍 물러났다 이마를 대고, 또 이마를 뗐다 다시 붙여오길 반복했다.
어느새 몸은 적당히 식어 있었다. 꿈을 꾼 직후엔 끔찍한 기분만 들었는데, 그래도 말을 나누다 보니 예민했던 감정이 꽤 뭉툭해져 있었다. 선재는 이마만 꾸욱, 대오는 범진의 행동에 미온한 반응을 보였다. 더는 그만하란 말도 하지 않았고, 밀지 말라고도 안 했다.
“말도 안 듣고… 씨팔….”
“….”
“또 무시하냐…?”
“…그런 거 아니야.”
“씨발… 정 좀 붙이봐라….”
범진은 그러면서 제 허리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안 그래도 붙어 있었는데, 몸이 눌릴 정도가 되었다. 틈 하나 없이 맞붙은 범진의 몸은 딱딱하고 뜨거웠다.
괜히, 범진과 이렇게 가까이 있구나 싶어 기분이 이상했다.
선재는 그러면서 옛날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어린 오메가들끼리 줄줄이 모여 다니며 보호자를 찾던 시절의 기억.
당시 지내던 시설에 문제가 생겨 선재를 포함한 아이들 모두가 낙동강 오리알이 된 적이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보호자가 존재했던 탓에, 선재를 포함한 네 명의 아이들은 법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3개월간 봉고를 타고 다니며 차에서 잠을 자고, 그게 아니면 마을 회관 같은 곳에서 잠을 자야 했다.
선재에겐 마지막으로 들렀던 바다 근처 마을 회관이 유독 인상에 남았다.
그 바다에서 죽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튜브를 타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살려달라는 말을 하기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았던 탓에, 선재는 물에 뜬 채로 울기만 했었다. 그때까진 제 탓 같았지만, 얼굴이 튜브 아래로 들어갈 듯한 아이를 본 어른들도 선재를 섣불리 구해주지 않았다. 선재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고, 이후론 남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누가 구해주긴 한 걸까.
눈을 깜박거리던 선재가 왜,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범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
왜 그런 생각이 났을까?
선재는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누가 딴 데 보라냐?”
“….”
속수무책으로 휘말릴 수밖에 없는 물길이 있다면,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일까.
선재는 범진의 품 안에서 그 물길이 범진 같다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곧 깼다.
그때도 살았고, 지금도 살아 있었다.
그때 저를 구해준 사람은 기억나지 않지만, 범진은 몇 번이나 저를 구해주었다.
범진 때문에, 범진으로 인해 생긴 일들이 태반이긴 하지만.
모르겠다.
선재는 배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범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잔잔히 깔린 빛이지만, 얼굴이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태동이 없는 시기인데도 배 속에선 물고기가 튀어 노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지금 주 수엔 있을 수 없는 반응인데. 이후로 병원에 간 적이 없어 그런 건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범진이 한, 아이를 지우러 같이 가주겠다는 말이 생각났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면 조만간 좋아한다는 말을 해서라도, 병원에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진 없이 가면 괜한 오해를 사거나 저부터가 먼저 초조한 마음이 된다. 차라리 같이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아기 진짜 지워도 돼?”
“…어.”
대답이 너무 쉽게 돌아왔다. 몰래 병원에 갔던 날 보았던 얼굴과는 표정부터가 딴판이었다. 그날 얼굴에 가득했던 화가 지금은 전혀 없었다.
“….”
“대신 뽀뽀하라고 할 때 따박따박 하고.”
“….”
“어, 알겠냐.”
범진은 처음에 말했던 조건은 금세 잊은 듯 굴었다. 선재는 엉덩이 사이로 쑥 들어오는 손에 양쪽 어깻죽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꼬집듯 꽉 움켜잡는데, 힘이 꽤 실려 있었다. 표정을 찌푸리고 위쪽을 쳐다보던 선재가 알겠으니까… 하고 입을 열었다.
“뭘 알았는데.”
“…뽀뽀 같은 거, 잘.”
“같은 게 아니고 뽀뽀. 키쓰도. 쎅쓰도.”
“….”
꿈에서 깨어난 지 몇십 분이 지났는데도 창밖이 캄캄했다. 5시가 다 됐는데 동틀 기미는 여전히 안 보였다. 얇은 커튼을 쳐둬, 빛이 밝을 땐 안쪽으로 그 기운이 은근히 스미곤 했었는데. 여름이 정말 간 건가.
알았어. 선재는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여름이 간 것처럼 오늘 꾼 꿈도 잔뜩 흐릿해진 뒤였다. 무섭고 슬펐는데 엉덩이가 아파 그걸 다 잊게 되었다.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범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를 주무르기만 했다. 불만이 있으면 뽀뽀를 하라 얼굴을 붙여왔다. 황당했지만 아까 느꼈던 공포가 사라져 그것만은 좋았다.
* * *
“뜨거워요?”
“녜에… 주니….”
혀에 얼마나 뜨거운 것이 닿았는지를 아이는 보여주려고 했다. 엣, 하고 반쯤 내민 혀에 선재가 그랬네, 하고 작은 너스레를 떨어주었다. 보리차가 다 식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정수기 쪽으로 컵을 가져간 선재가 차가운 물을 조금 더 받았다.
“이제 괜찮다.”
“녜….”
준희의 두 손이 컵을 향했다. 잡고 있던 숟가락도 식탁에 놓은 채 물을 마시려고 했다. 자그만 손이 컵에 닿긴 하지만, 선재는 그래도 직접 입에 컵을 가져다 대주었다. 아이는 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물을 꼴깍꼴깍 삼켰다. 자주 듣는 소리인데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으응….”
보리차를 다 마신 아이가 갑자기 얼굴을 들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준희, 왜.”
“주니 아가느은….”
“…아가?”
“녜에….”
“아기….”
“주니 아부지이랑… 아가안테… 주니가 뽑뽀….”
“…아빠는…?”
“압빠?”
지금 할 거라는 듯 작은 입술이 동그랗게 모였다. 의자에 앉아 아이를 지켜보던 선재가, 제 얼굴을 준희의 입술 바로 앞쪽으로 가져갔다. 물기로 흥건한 입술이 뺨에 쪽, 하고 닿았다.
“우리 준희 뽀뽀귀신이네.”
“뽑뽀기시인?”
“…아저씨랑 아빠한테만 뽀뽀해줘. 알았지?”
“녜에에.”
“아니다… 아저씨도 안 돼.”
“아가한테느은.”
“….”
“아가….”
선재는 자꾸 아기 이야기를 하는 준희의 관심을 어떻게 분산시킬지 고심했다. 매번 말을 돌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처음 한두 번이야 받아줘도 자꾸 아기를 찾으면 말문이 막히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뭐라도 느끼는 것인지. 선재는 급기야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진 준희의 눈을 보고 당혹한 마음을 느꼈다.
“왜, 준희 왜 울어.”
“아가… 가면 안 대는데….”
“…아기가 어딜 가.”
“주니 아가….”
오늘 범진과 외출 계획이 있다. 낮에 시간이 나지 않던 범진이 며칠 전부터 잡아둔 일정이었다. 아침에 밥 먹지 말란 말을 한 걸 보면, 뭐라도 먹으러 가는 건가 싶었다. 어딜 가려는 진 모르겠지만. 대충 합의된 게 있으니, 선재는 범진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주며 병원 스케줄에 대해 말을 꺼내 볼 예정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대형마트를 들러야겠다. 준희가 계속 아기 이야기를 하니, 인형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았다. 요즘 보면 우유 먹는 인형부터 해서 다양한 게 많던데. 그게 아기라고 하면 아이도 적당히 넘어가 주겠지. 언뜻 보았던 인형들을 떠올리던 선재가 결국 톡 하고 떨어진 준희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울지 마, 우리 아기….”
“…으에엥….”
왜 울어… 선재가 중얼거리며 아이를 품으로 안아 들었다. 울면서도 원숭이 매달리듯 안기는 아이의 몸짓이 느껴져 조금 무안했다. 범진에게 안기다 제게 안기니 몸이 많이 작게 느껴진 모양이다. 선재는 그렇게 안긴 준희의 등을 쓸어내리듯 토닥여주었다. 미안해, 울지 마.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미안하다고 말했다.
얼마나 등을 토닥이며 얼렀을까. 거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범진이 보였다. 또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게 뻔했다. 선재는 준희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범진이 눈치껏 뭐라도 입어주길 바라며 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입에서 미안하단 말이 계속해서 나왔다.
애기 어딨냐, 하고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톤은 가라앉아 있었지만, 소리 자체는 방 안까지 정확히 닿았다. 품에 안겨 있던 준희가 한 번 꿈지럭거렸고, 뒤이어 더 큰 소리로 애기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품에서 으응, 하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살짝 열렸던 문을 마저 열고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뒤뚱뒤뚱 걷는 뒷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걱정이 더 되었다.
나가는 것까지 쳐다보던 선재가 모습이 사라진 아이를 뒤쫓아 따라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준희의 모습이 보였다.
선재는 거실 창 가까이서 뒷머리를 만지고 있는 범진의 행색부터 살폈다. 아직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진 않았고, 하체는 이불로 대충 가린 채였다. 그 모습으로 목을 한 번 뚝 꺾는가 싶더니 아이에게 이리 와 보라며 손뼉을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준희가 걸음을 빨리해, 선재도 쫓아가는 꼴이 되었다. 아이가 진짜 넘어질지도 몰라서였다.
“오라고 그렇게 하지 마…. 뛰잖아.”
너무 작고 여린 발이라 뛰어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범진이 없을 땐 자유롭게 거실을 활보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불안할 때가 많았다. 활동적인 아이는 아니지만, 다리에 힘이 많이 없어 잘 넘어지는 게 걱정되었던 탓이다. 앞으로 향하던 준희를 위로 들어 올리자, 아이는 투명 자전거를 타듯이 공중에서 발을 몇 번이나 굴렸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범진과 가까워지지 않자 답답한 모양이었다. 이이잉… 하고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향했다. 범진이 있는 침대 위에 아이를 놓았다.
“옷은 입고….”
안아, 까지 얘기하려는데 범진은 맨몸으로 준희를 안았다. 잘 잤냐? 하고 묻는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는 머리도 많이 짧았는데, 한동안 이발을 안 해선지 뒷머리에 새집이 생길 정도로 길어졌다. 엉? 잘 잤냐? 하고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불편하게 그 품에 안겨 있던 준희가 고개를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하고 대답도 했다.
범진은… 누가 봐도 아이와는 안 어울렸다. 잘 안지도 못 했고, 건네는 말도 매번 똑같았다. 좋냐? 잘 잤냐? 자냐? 준희야, 애기야….
다른 말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한쪽 팔로만 달랑 안아 준희 엉덩이가 뒤로 빠진 일도 있었다. 품은 넓지만, 아이를 안전하게 받쳐줄 생각은 않았던 것이다. 주의를 몇 번이나 주고서야 대충 안는 버릇은 고쳐졌지만. 저렇게 앉아있는 채로는 역시 아이를 안을 줄 모르는 게 티가 났다. 준희가 저 작은 다리도 어쩌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쳐다만 보고 있던 선재가, 더는 안 되겠던지 침대로 가 준희를 안았다.
“아… 아부….”
“…준희 이제 어린이집 차 타야지.”
“…녜에.”
아부지, 하고 말을 하다가도 금방 고개를 끄덕거린다. 선재는 아까 울었던 탓에 길게 뻗은 아이의 속눈썹이 눈물로 몇 가닥씩 갈라져 있는 걸 보았다. 손을 들어 그 눈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울지 말고….”
“녜에.”
준희의 눈두덩이 느릿느릿하게 닫혔다 열렸다. 손가락으로 눈을 쓸어줬기 때문인지 이후엔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도 눈꺼풀이 자동으로 감겼다. 괜히 손을 가져가 얼굴 전체를 닦아준 선재가, 그 얼굴을 보고 미소지었다. 눈을 뜬 아이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좋단다.”
범진은 그 풍경에 돌을 던지는 악역을 자처했다. 뒤돌아서 아이를 만져주고 있었는데, 준희의 얼굴을 얼핏 본 모양이었다. 얼굴을 굳힌 선재가 다시 범진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을 들어 널브러진 옷가지를 가리켰다.
“…티셔츠 좀 입지 그래.”
현란하고 번잡한 검은 문신이 어깨와 윗가슴팍에 가득했다. 뱀도 있고, 눈알도 있고, 알 수 없는 무늬…. 게다가 최근에 이상한 문신을 더 새겨, 선재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어느 날, 이거 니 얼굴이라고 가리킨 옆 가슴 쪽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얼굴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제 얼굴이었다. 시간만 나면 얼굴을 찍어 보내라고 하는데, 그중 한 장인 것 같았다. 언제 찍어준 사진인지는 선재도 잘 몰랐다.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를 내며 가슴을 때리는데, 선재는 진짜 얼굴을 얻어맞은 듯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범진은 몇 번 더 제 얼굴 문신을 때리더니 이쁘지. 하고 물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입으면 뭐 해줄 건데.”
“그냥 입지… 좀.”
“와씨, 니 요새 장난 아니다.”
뭐가 장난이 아니라는지 모르겠지만, 선재는 굳혔던 표정을 풀지 않았다. 범진은 그 와중에도 큼지막한 근육을 움직여가며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지 마. 조용히 읊조린 선재지만 말이 통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옷이라도 입고 좀 오지. 속으로 생각하나 입으로 말하나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완전한 알몸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선재는 다가오는 범진을 피해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이 너무 넓으니 가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혹시 뒤에서 장난을 걸면 아이를 안은 채로 넘어지고 말 거니까.
식탁에 다다라서야 그 불안은 가셨다. 선재는 안고 있던 준희를 바닥에 내려주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사탕들을 눈으로 골랐다. 범진이 자주 먹는 검정색 사탕도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전에 모르고 먹었는데, 무슨 약에 담배 절인 맛 같은 게 났다. 그것만은 철저히 피해 하나를 잡은 선재가 포장지를 뜯어 아이의 입에 물려 주었다. 한바탕 운 아이에게 사탕만큼 좋은 선물이 있을까.
아기를 찾으며 울던 준희의 얼굴에 그 흔적이 남았다. 코가 빨갰고, 눈도 그새 부어 있었다. 목에도 물기가 차는지 잊을 만하면 훌쩍댔다.
“준희 맛있지?”
“녜예에….”
아이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곳곳이 붉어졌지만, 다시 울려고는 하지 않았다. 진작에 아기 인형을 살걸. 이렇게 계속 아기를 찾으며 울 줄은 몰랐었다. 기필코 인형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선재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아이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입 안이 다치지 않도록, 사탕으로 도드라진 부분을 피해 가며 만져주었다.
어린이집 차량에 아이를 태워주고 오자, 시각은 9시가 좀 넘어 있었다.
선재는 준희의 밥그릇부터 개수대에 담갔다. 남은 밥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며 시계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배가 고파도 고프단 말을 잘 하지 않으니, 그게 걱정이 된다. 밖에선 더더욱 그러니…. 범진이 그 타이밍에 깨지만 않았더라도 우는 아이에게 밥을 계속 먹였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던 선재의 눈이 자연스럽게 거실 쪽을 향했다. 범진은 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거실에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 때문에 씻고 있단 걸 곧 알게 되었지만.
될 수 있으면 욕실 쪽으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범진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샤워를 하곤 했다. 열이 많은 건 알지만 씻을 때도 그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매번 들었다. 안쪽으로 물이 튀는 건 아닌데, 그냥 그러고 씻는 게 신경이 쓰였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수없이 봤던 몸이라도 제대로 보는 건 언제나 피해왔었다. 본의 아니게 봤을 뿐인 그 몸을 저렇게 드러내고….
“야!”
꼭 이렇게 심부름을 시킬 것도 안다.
냉장고에 반찬 통을 넣은 선재가, 입을 다문 채 욕실 쪽으로 향했다. 얼굴이 겨우 보이는 지점에서 고개를 내빼고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지, 또 야, 하고 저를 함부로 불렀다.
“왜.”
“이것 좀 해줘라.”
“….”
범진은 요즘 새 취미가 하나 생겼다. 면도 크림을 턱에 잔뜩 발라놓고 선재를 불러 면도기를 쥐여 주는 일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선재는 역시 하기 싫은 티를 냈지만, 안 하냐고 물으면 하릴없이 손을 올리곤 했다. 면도의 흔적이라곤 없는 오메가에게 이런 일을 시킬 때마다 이상한 흥분이 일었다. 남자고, 나이도 더 많은 선재를 면도 경험으로 들쑤시는 게 묘한 재미가 있었다.
선재는 범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면도칼 다루는 게 서툴러 긴장만 했다. 의연한 표정으로 칼을 크림 위에 가져다 댔지만, 작은 상처들을 이미 몇 개나 새겼는지 모른다. 범진의 큰 키 때문에 팔을 올리면 손까지 정신없이 떨렸다. 삭, 삭, 소리가 나는 칼날엔 수염보다 피가 더 많이 배 나왔다. 제 얼굴이 그렇게 되고 있는데도, 범진은 웃기만 했다. 서툰 모습을 보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면도기… 저걸로 해. 피 나니까.”
비싼 전기면도기가 있는데도 왜 저에게 이런 걸 시키는지.
“싫은데.”
그렇게 앞에서 서 있자니, 범진의 몸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선재는 범진이 왜 면도를 시키는지는 몰랐지만, 이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었다.
욕실엔 콘돔이 많았다. 피임을 해야 돼서가 아니라, 몸이 찝찝해 욕실에서 섹스를 하게 될 땐 콘돔을 꼭 쓰는 편이었다. 범진도 그런 말은 잘 들었다.
난데없이 섹스할 때가 많으니 임신한 선재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선재는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될 때마다, 면도를 하면서 흥분시키지 않는 방법을 곰곰 생각해보곤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래야 하는지 잘 몰랐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범진은 흥분을 했다.
피 묻은 크림을 씻어낸 범진은 씨발, 좆 봐라, 했다.
근육으로 쩍쩍 갈라진 허벅지 사이에, 핏줄에 휘감긴 거무스름한 성기가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눈을 위로 든 선재가 범진이 입맛 다시는 걸 보았다.
“좆마개 해줄 테니까 함만 대줘라.”
종종 콘돔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갈 데 있다면서.”
“떡칠 시간 없겠냐.”
“….”
가만히 범진을 바라보던 선재가 손에 들려 있던 면도기를 선반 위에 올렸다. 그리곤 세면기 쪽으로 가 거울 속의 범진을 쳐다보았다. 욕조나 세면기에 손을 댄 채로 섹스할 때가 많았다. 선재는 탁, 탁, 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욕실에서 제 바지와 팬티를 엉덩이 바로 아래쪽까지만 내렸다.
엉덩이가 드러나자마자, 범진은 침 묻힌 손가락을 그 사이로 가져갔다. 구멍과 회음부까지 살살 비벼주면 끈적한 액체가 손끝에 묻어나오곤 했다. 이번에도 몇 번 위아래로 비빈 범진이 애액에 젖어가는 손가락을 확인한 뒤에야 선재의 바로 뒤에 가 섰다. 선반에 있던 콘돔 하나를 까 씌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반 편의점에선 팔지도 않는 엑스라지 콘돔이었다. 콘돔의 색 때문에 성기는 더 까만색을 띠었다.
“아….”
“흑자지나 좋아하고. 씨이팔.”
일부러 그런 말을 하며, 범진은 성기로 선재의 엉덩이 사이를 갈랐다.
순식간에 기둥 끝까지 박혀 들어간 성기가 깊은 내벽을 단숨에 찔렀다.
바닥이 면도 크림과 물기, 샤워 거품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넣자마자 퍽퍽 쳐대기 시작한 범진 때문에 선재는 발가락에 힘을 가득 줬다. 세면기를 잡은 손에서도 힘이 점점 들어갔다. 범진이 성기를 넣었다 뺐다 할 때마다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허리가 꽉 잡힌 상태인데도 왜 옆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지 몰랐다. 반쯤 수그린 자세로 박히던 선재가 짙은 숨을 토했다.
“하아, 흐….”
볼썽사납게 기절한 후로는 숨을 고르며 섹스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선재는 턱에 닿은 범진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범진이 저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니 얼굴 봐라, 하며 성기를 밀어 넣었다. 속도를 갖고 뒤에서 쳐올 때마다 거울에 있는 선재의 얼굴이 조금씩 변했다. 찌푸려지기도 하고, 달뜬 얼굴이 되기도 했다.
“씹, 침대 위에도 거울 하나 박으까.”
범진은 허리를 계속해서 쓰며 그런 선재의 얼굴을 옆으로 쓱 돌렸다.
입술을 쭉 빨고, 선재의 다리 한 짝도 제 팔에 걸었다.
짐승의 교미보다도 더 천박한 자세였다. 처음엔 싫고, 또 넘어질 것도 같았는데 범진이 단단히 잡아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선재는 다가온 범진과 입을 맞추며 뒤로 쑥쑥 들어오는 성기를 버텼다. 바닥에 닿은 한 발이 미끄러질 듯 미끄러지지 않았다.
* * *
범진이 차를 세운 곳은 시청 앞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분명 어딜 가냐 물었는데, 그땐 밥 먹으러 간다고 했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밥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물을 새도 없이, 범진은 벌써 차에서 내려 안 내리고 뭐 하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볼일이 있으면 혼자서 보면 될걸. 차에서 내린 선재가 이미 몇 m는 앞서간 범진을 따라서 걸었다.
범진은 건물 구조를 잘 아는 듯했다. 안내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2층으로 곧장 향했다. 선재는 2층에서 가장 처음 보인 개명 절차 안내에, 범진이 이름이라도 바꿀 건가 싶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기에 워낙 적합하지 않은 일을 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범진은 빨리 오라 손짓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자 손을 내밀었다.
“야. 여기서부턴 손잡아야 된다.”
“…왜?”
“안 그러면 니 내가 납치했다고 오해받는다.”
그런 말을 하면서 낄낄 웃는 걸 보니 거짓말인 게 분명해 보였다. 선재는 갑자기 훅 낚이듯 잡힌 손에 표정을 찌푸렸다. 어찌나 세게 잡는지 손이 부러질 것 같았다.
“알겠으니까… 좀.”
손을 놓으라며 앞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자한 인상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특수 성별과 관련된 업무를 맡아 보는 데인 듯했고, 범진은 떵떵거리는 소리로 이거를 쓰면 되냐고 물었다. 손엔 서류가 들려 있었다.
“뭐 하는 건데….”
“나랑 꽁으로 살라 했냐. 도장은 찍어 놔야지.”
“…뭐가.”
“거 앉아서 써라.”
데스크 앞으로 건네진 건 혼인 신고서류였다. 선재는 이름이나 주소란을 먼저 보았고, 그게 혼인 신고서인 건 제일 마지막에 보았다. 기가 차서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있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보였다. 최근에 어린 오메가가 납치되어 결혼한 사건 때문에, 금방 수상한 눈초리를 샀다. 범진이 거짓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눈초리가 한 명, 두 명, 세 명… 늘어갔다.
선재는 잠깐만… 하고 범진의 어깨에 손을 댔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우니 일단 밖으로 나가 얘기를 해볼 심산이었다.
“빨리 써라.”
빨리 안 하면 안 된다는 듯이, 범진은 손짓을 하며 의자를 가리켰다. 둘러보지 않아도 이곳의 사람들이 전부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건 느껴졌다. 망설이던 선재가 의자 하나를 꺼내 그 위에 앉았다.
“니 준희 그거 고아로 키울 거냐.”
그제야 병원 건물에서 범진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가 기억났다. 니랑 준희, 다 내 밑으로 넣을 거라는 말. 그땐 범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몰랐다. 밑이라는 게 이 밑일 줄이야.
준희는 태어나자마자, 제 밑으로 등록이 되었다.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사실혼 관계의 알파가 눈 뜨고 살아 있는데도 임시로 등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백창우가 계속 기다리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려, 선재야. 지금 우리가 가족이 되면 성우라든지, 우리 집안 사람들이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그렇구나. 준희나 저는 계속 기다려야 하는구나.
오메가 편부나 편모 밑으로 정식으로 등록시키기도 가능했지만, 선재는 백창우의 말만 믿다가 시기를 놓쳐버렸다.
희망을 갖고 강원도로 갈 때만 해도 준희와 정식 가족부터 되리라 마음먹었지만, 여유가 나지 않았었다.
범진을 피해 서울로 도망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류를 준비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사유로 반려가 될 때가 많았다. 4번인가 시도를 했는데 4번 모두 허가받지 못했다. 5번째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해도 준희와는 정식 가족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서였다. 제 서류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메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탓에 혼자서는 부모의 자격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
“어이. 뭘 쳐다봅니까.”
범진은 선재를 염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직원을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그리곤 태연하게 씨발 이게 뭐냐, 하고 서류를 선재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름… 한자로 쓰라고.”
한자가 뭔지는 아는데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선재는 범진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돛 범에 벼락 진. 벼락 진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걸 찾아 보여주었다. 범진은 크게 확대된 한자를 천천히 따라 썼다.
이름까지 찾아준 마당에….
선재는 결국 앞에 앉아 제 서류란도 하나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베풀 선에 맑을 재.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부모가 준 이름을 30년이 넘게 쓰고 있었다. 선재는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한자를 종이 위에 꼿꼿하게 썼다.
범진의 말처럼, 준희를 가족도 없는 아이로 만들긴 싫었다. 오메가에다 부모가 없었던 저 또한 초등학교 때부터 갖은 놀림에 시달렸었다. 임시 보호자는 어디까지나 임시 보호자일 뿐, 고아나 다름없었다. 제가 준희에게 그 ‘임시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붙어 있으니 준희가 학교에 들어가서 불이익을 받을 것도 불 보듯 뻔했다. 선재는 마지못해 쓴다는 느낌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그 생각을 하니 범진이 서류만은 무르지 않아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쪽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각자 자기 할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선재는 서류를 다 써놓고 위쪽을 훑어 제 한자 이름을 맡게 썼는지를 마지막으로 체크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범진을 향해 아까 궁금했던 걸 입 밖으로 내보았다.
이름에 정말 벼락 진이 들어가는 게 맞냐고.
처음에 잘못 들은 것 같아 다시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범진은 맞다고 말했고, 자신을 가졌던 엄마가 난데없이 벼락 맞을 놈을 낳았다고 해서 이름에도 벼락을 넣은 것이라 했다. 애미가, 하며 말하는 범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선재는 고개 숙인 범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고동색 머리칼이 실내등 때문에 연하게 보였다.
한자는 못 쓰는데 한글 필체는 근사한 편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쭉쭉 흘려 쓰는데도 모양이 살아 있었다. 제 글씨보다 예뻤다.
* * *
사인까지 하고 나서, 선재는 어쨌든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범진의 마음이 바뀌더라도, 아이만은 어떻게 해주겠지 싶은 마음도 들었다. 준희가 범진을 잘 따르기도 하고, 범진도 그걸 나름으로 받아주질 않나. 지금이야 아이가 어리니 별로 문제 될 게 없다지만,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면 잔인한 현실에 부닥쳐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더 무서워졌다 들었다. 선재는 제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손에 든 서류를 힘껏 합리화했다.
상처받아 어쩔 수 없이 무던해진 제 성격을, 준희는 조금도 닮지 않길 바랐다. 밝고, 잘 웃고, 좋은 일만 있었으면 했다.
“겁도 없다. 겁도 없어.”
“뭐가….”
“니 내랑 뭐 했는지 아냐.”
완전한 접수까진 며칠이 더 소요된다고 했다. 선재는 범진이 흔들어 보이는 서류를 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혼인 신고는 둘째치고, 아이를 호적에 넣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원래 백씨였던 아이는 절차에 따라 최씨가 될 거고, 어쨌든 알파인 아버지를 갖게 될 것이다. 선재는 준희의 진짜 아버지였던 남자에게 언제나 서운한 말을 했던 걸 잠시 떠올렸다. 준희… 언제 해줄 거야? 남자는 지금 해놓으면 위험하다,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말하며 준희를 혼자 내버려 두었다. 괜한 생각에, 선재의 눈시울이 금방 벌게졌다.
“….”
“니가 내 마누라 하겠다고 여기다 사인을… 우냐?”
“눈 건조해서 그래.”
“…니 만약에 이거 서류 좀 썼다고 억울해서 우는 거면.”
“그런 거 아니야.”
서류를 작성하고, 다른 서류를 기계에서 뽑아와 알게 된 건, 범진도 가족이 없다는 거였다. 예전에 범진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 입으로 언뜻 들은 기억은 나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범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 바로는, 이름에 벼락을 넣어 준 어미는 낳은 지 얼마 안 된 범진을 길바닥에 버렸다고 했다. 범진은 형질도 초등학교 졸업할 때야 알게 되었다 했다. 학교는 중학교에 다니다 잘렸다고. 담임을 때려 그리되었다고 했는데, 더 자세한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선재는 조용히 서류란을 채워나갔고, 범진의 눈을 애써 피했다. 뺨까지 그어진 깊은 흉터가 의식하지 않아도 시야에 잡히고 있었다.
“씨발. 어쨌든 닌 이제 도망도 못 간다.”
“….”
“도망가면 바로 고소 때릴 거니까 깜빵 안 갈라믄 평생 제대로 붙어 있어라.”
그런 법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재는 알겠다고 말했다. 범진은 법이 이래서 좋은 거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며 가볍게 걸어 나갔다. 떡 벌어진 어깨와 긴 다리가 유독 사실적으로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범진은 별로 바라는 게 없는 듯했다. 추구하는 것도 별로 없고…. 뜻이 있어 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방식은 다르지만 제가 20대 초반에 가졌던 마음과 비슷할까. 저는 어디에도 분출한 적이 없지만, 범진은 그걸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했는지도 모른다. 위험해도, 안 위험해도, 똑같은 삶. 죽거나 사라져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삶.
선재는 권태롭던, 뜻이 없던 20대 시절을 생각하며 범진의 차에 올랐다. 제겐 준희가 와주어 그 방향이 많이 바뀌었지만, 범진에겐 그런 사람이 없었다. 제게 싫증을 내면 또 똑같이 위험한 절벽으로 그 몸을 던질 것이다. 범진의 미래를 떠올리던 선재가, 조수석에 앉은 채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원래라면 오늘, 범진과 아이를 언제 지울지를 얘기할 참이었는데.
“니 뭐 먹을래.”
“고기만 빼고 다 괜찮아.”
요 며칠 고기 냄새를 맡는 것도 힘에 겨웠다. 불고기 양념 냄새에도 토기가 치미니 아이 밥도 제대로 챙겨줄 수가 없었다. 양념은 양념일 뿐인데, 자연스럽게 양념에 재운 고기가 떠올라 참을 수 없었던 탓이다. 입덧도 심하고, 피로감도 상당했다. 범진과 함께 있을 땐 상태가 괜찮은데 그게 아니면 금방 그때처럼 쓰러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범진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범진이 없을 땐 임시방편으로 범진의 옷이라도 입고 있어야 했다. 티셔츠를 입고, 다른 티셔츠를 잔뜩 구긴 채 손에 들고 다녔다. 증상이 올 것 같으면 그걸 곧장 얼굴에 댔다. 그러면 상태가 조금이나마 괜찮아졌다.
“니 이번에 애 떼면서, 아예 임신 안 되게 막아라.”
유리를 통해 지나는 차들을 몇 대나 보았을까. 갑자기 들린 범진의 말은 저를 멍하게 만들었다. 황당한 얼굴이 된 채로 범진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범진은 뭐가 이상하냔 얼굴로 저를 슬쩍 보았다. 쌩쌩 달리고 있는 차 안이 크게 흔들렸다.
“왜. 건 싫으냐?”
“아니….”
“만약에 내가 니랑 이혼을 해도, 다른 새끼 애 배는 꼴은 못 본다.”
무슨 이혼…. 범진은 혼인 신고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제 싫증을 이혼으로 치는 듯했다. 선재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나 도망 못 가게 한다면서.”
“씨발, 당연하지.”
“근데 이혼을 어떻게 하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 씨팔. 생각만 해도 개빡치네.”
정말 생각만 해도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이 가을날. 범진은 운전석 창문을 활짝 열고 팔을 바깥쪽으로 걸었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열이 뻗친다고 말했다.
“어차피 별로 자신도 없어.”
“뭐!”
“도망갈 자신 없….”
“니 이제 도망가지? 그럼 팔다리 다 묶여서 잡혀 올 줄 알아라. 진짜 반빙신으로 만들 테니까는.”
“….”
도망을 못 가겠다고 말한 건데, 범진은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혼자서 성을 내며, 놀고 있던 발로 운전석 바닥을 쿵, 하고 치기도 했다. 그 모습까지 쳐다본 선재가 도망에 관해선 더는 말을 않았다. 그만해, 하고 화내는 범진을 어떻게든 자제시키려고 했다.
“안 가. 어디 안 갈 테니까…! 그만. 하지 마.”
“닌 죽을 때도 내가 거둬야 되니까!”
“알겠으니까… 그만… 나 배 아파.”
혼자 어디까지 생각한 건지. 죽음까지 말하는 범진이 어이가 없었다. 선재는 마지막 보루로 배를 부여잡은 채 범진을 쳐다봤다. 소리를 크게 내 조금 당기긴 했다. 옆을 대놓고 쳐다본 범진의 얼굴이 그제야 부드러워지는 게 보였다. 원래도 인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 저 정도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선재가 확인하듯 그만, 하고 말했다.
“딴생각하지 마라.”
“…한 적 없어.”
“…아프냐?”
“어. 아파. 그니까 소리 지르지 마.”
“하, 은근히 신경 쓰이네. 이거.”
이거, 하고 말한 범진의 시선이 선재의 배 쪽에 닿았다. 배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던 선재가, 그 눈을 살피며 움직임을 멈췄다.
“….”
“빨리 일정 잡아라. 아니… 오늘 바로라도 하자.”
“…못 해. 시간 걸리고, 병원도 아직….”
범진이 먼저 이런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맥락에서. 선재는 배에 닿았던 손을 허벅지 쪽으로 가져갔다. 범진과 나눌 얘기가 맞긴 했는데, 갑자기 들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저번에 할 수 있었던 주사 시술을 받기엔, 주 수가 꽤 찼다. 5주. 인터넷으로만 알아보았지 이후론 어떻게 아이를 지우는지도 자세히 모른다. 머리가 복잡했다.
범진이 선재의 나중을 생각하는 것만큼, 선재 또한 범진의 미래를 생각했었다.
다시 위험해질 범진의 삶이 자꾸만 떠올랐다. 신경이 쓰였다.
차가 완전히 멈춘 건 어느 한정식집 앞에서였다. 자그만 기와가 지붕 벽 곳곳에 올려져 있었고, 돌다리를 지나며 쳐다본 연못 속엔 거북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선재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메뉴판부터 찾았다. 범진이 밥 먹는 데 쓸데없이 큰돈을 쓰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인당 3만 원이 넘으면 입덧하는 척을 할 생각이었다.
“뭐 하냐.”
“아니….”
신발장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선재가 뒤늦게 메뉴판을 찾았다. 단일 코스 메뉴고, 인당 가격은 2만 5천 원이었다. 발목이 좀… 하고 얼버무린 선재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 큼지막한 좌식 테이블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앉기가 무섭게 찬과 밥이 상 위에 차려졌다. 은행과 밤이 들어간 뜨거운 밥이 작은 돌솥 안에서 김을 뿜고 있었다. 입덧은 헛구역질이 날 때가 대부분이지만, 뭘 먹고 싶을 때도 있었다. 범진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갈비찜이나 생선 반찬에서도 역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건 먹냐?”
갈비찜을 입에 댔더니, 범진이 그런 고기는 먹냐고 물어왔다. 아까, 고기는 싫다고 했었지. 어딘가 민망해진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괜찮네…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니도 뭔 고생이냐.”
“….”
“씨발, 니 아프니까 밥맛 떨어진다.”
“….”
“니가 병원 예약 안 하면 내가 할 거니까.”
밥 먹는데 왜 자꾸 애 지우잔 얘기를 하는지 몰랐다. 차에서 하던 대화가 이어지는 건 알겠지만, 오늘은 그만 얘기하고 싶었다.
“나중에, 내가 할게.”
“니 가만 보니까 병원도 순 빙신 하파리 같은 데나 가고.”
“….”
“내일 아침에 따라가 줄 테니까.”
“…아니….”
“뭐.”
“그만 얘기하라니까….”
“뭘 그만 얘기하냐. 빨리 뗄수록 좋다 아니냐?”
“….”
단물에 절인 듯한 단호박 네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선재는 대꾸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단호박 반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다. 달달하고 향긋했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사람. 선재는 입 안에 퍼지는 단호박이 부드럽다고 느끼면서도, 범진에 대한 의문 때문에 기계적으로만 입을 오물댔다.
아이를 지우려던 걸 들켰을 땐 그렇게 화를 내고, 낳으라 협박까지 하지 않았나.
내 새끼를 니가 낳아주냐는 말도 한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처음에만 좋은 것 같았지, 이후엔 섹스할 때나 얘기를 꺼냈을 뿐이다.
몸이 안 좋아지고, 악몽도 자주 꾸게 되자 저보다 더 아이를 걸림돌로 생각하는 듯했다.
범진은 최근엔 언제나 제 안부만 물었다. 니 괜찮냐고. 니.
괜찮지 않은 것 같으면 욕을 했다.
그런 남자의 아이.
선재는 범진도 뭔갈 알았으면 싶었다. 제게 흥미를 잃으면 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범진이 오늘은 불쌍하게 보였다. 길바닥에 버려졌을 아기 범진이 또 버려질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죽어도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범진이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떼준다고 나서줘도 지랄이냐….”
“밥 먹잖아….”
“하, 이게 씨….”
“자꾸 말 시키면 나 체해.”
“…이게 죽을라고 어디서 협박을….”
“배도 아프고….”
“…하.”
범진이 해준 것. 준희의 아버지가 되어주고, 지낼 곳을, 지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 것. 위험에 빠트리긴 해도, 그 위험 속에서 언제나처럼 나타나 준 것. 말하자면 끝도 없었다. 앗아간 것만큼이나 준 게 많은 범진에게,
평생 친구 한 명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게, 범진이 여태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 되길 바랐다. 아이 때문에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길. 다시는 외줄 타는 듯한 삶을 살지 않길. 선재는 생각을 굳힌 채 수저를 다시 들었다.
범진은 와, 이게, 하면서도 입꼬리를 줄곧 위로 올리고 있는 채였다. 밥을 입에 넣고, 뒤이어 잡채와 산나물을 입에 넣는 선재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재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보며 언제나처럼 중심을 부풀렸다.
* * *
식사를 끝낼 때까지도 식당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이른 시간대에 밥을 먹어서인지, 정문 너머로 보이는 길가에서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선재는 범진이 카운터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밖으로 나와 국화를 구경했다. 일부러 심어놓았는지 일정한 구역에 가득 피어 있는 게 보기에 좋았다. 노랗고, 컸다. 준희가 보면 분명 좋아할 텐데.
동그랗게 조성된 연못 주변으로 긴 도랑도 여러 개 이어져 있었다. 작은 이파리들이 어디로 떠가지도 않고 그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준희가 보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게다가 거북도 있고. 선재는 썩 맑지는 않은 물에 손을 댈 뻔하다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너무 오래 이러고 있으면 아랫배에 불편한 느낌이 든다.
“확 밀어버릴라.”
언제 다가온 건지, 범진이 연못 옆쪽으로 와 섰다. 선재는 뒤에 국화밭을 두고, 곁눈질하는 범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범진은 담뱃갑을 주머니에서 꺼내는가 싶더니, 쥐는 시늉만 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곤 고개를 연못 쪽으로 숙여 침을 뱉었다. 작은 거품이 인 타액이 물 위에서 풀어지지도 않고 그 모양을 유지했다. 물 위를 쳐다보던 선재가 손을 뻗어 범진의 팔을 뒤로 끌었다.
“침 좀… 뱉지 마.”
“뭐?”
“…안에 거북도 있는데.”
“뭐. 어찌라고.”
“….”
“이게 어디서 하라 마라냐.”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선재는 혹시 사람들이 지나가기라도 할까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을 더 보탰다간 아예 큰소리를 쳐버릴지도 모른다. 반쯤 체념한 선재가 위로 들고 있던 고개마저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런 인간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면서.
“니 뭐 하지 말란 소리 질린다.”
“….”
“침 안 뱉으면, 맘대로 니 안고 뽀뽀해도 되냐.”
“….”
“…그만하라 안 할 거냐…?”
사방이 빛이었다. 선재는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그런 말을 하는 범진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그만하라고 해도, 범진은 그만한 적이 없다. 최근 들어 자꾸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의아하기만 했다. 언제든 제 생각대로 해오지 않았나.
“…어차피 내 말 안 들을,”
“이게 진짜 입만 살아서.”
갑자기 목을 둘러오는 범진의 팔에 선재의 상체가 앞쪽으로 기울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스킨십을 해오면 몸의 중심축이 금방 무너지고 만다. 좀 커야지… 사람이. 그만하란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그….”
“또 씨발… 그만하란다.”
“….”
“내가 그만할 것 같냐…?”
선재는 위에서 내리꽂히는 범진의 눈빛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눈이 부셨는데. 침 뱉는 걸 뭐라고 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범진이 뭐라고 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나빠지고 있는 걸까. 느끼기 싫어도 느껴지는 범진의 페로몬과 체향에, 눈앞만 까마득해지고 있었다.
어, 그만할 것 같냐고, 하고 세게 닿아오는 입술엔 반사적으로 눈이 꾹 감겼다. 범진의 입술이 몇 번이나 제 입에 닿았다 떨어졌다. 눈을 뜰라치면 아쉽다는 듯 다시 꾹 닿아오는 입술. 다물린 입술이 앞니에 밀려들 정도로 힘이 실려 있었다. 차라리 키스가 낫겠다 싶게.
선재의 입술 근처가 금방 발갛게 올랐다. 손으로 우악스레 문질러도 이런 자국은 남지 않을 터다.
범진은 선재가 뒷걸음을 칠 때까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선재의 빨개진 얼굴에, 뽀뽀 때문에 주변이 올라온 입술에, 제 손을 올렸다. 입을 잔뜩 맞춘 뒤엔 눈도 한 번 안 마주치니 지독한 갈증이 인다. 범진은 그러면서도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선재가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게 좋았다.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3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