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화 (12/29)

4부


식욕이 많이 떨어지는 날엔 우유만으로 끼니를 때우고 넘어갈 때도 많았다. 준희를 가졌을 땐 우유 비린내를 잘 못 맡았는데, 이번엔 우유는 괜찮았다. 배가 고파도 뭘 먹기가 힘들고, 집엔 범진이 없으니 우유만 먹어도 하루가 그럭저럭 갔던 것이다. 범진이 이런 일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일수로 따지면 한 3일, 4일 정도라 들키진 않았다. 동네 병원에서 임신 판정을 받았을 때의 일이었고, 곧 지울 예정이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데.

요즘은 세 끼를 다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범진이 애를 안 지울 거면 밥이라도 열심히 먹으라고 말해 더 그러는 것도 있었다.

아침에도 머리에 새집을 지은 범진과 식탁에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확인 명목으로 앞을 지키고 있는 범진에겐 보란 듯 밥을 먹어줘야 했다. 그게 아니면 병원에 끌려갈지도 모르니.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원래 아이를 지우려 했던 건 선재 자신이었는데. 범진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뒤로는 기분도 묘했다. 태동 같은 반응이 있어도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신경 쓰이는 애완동물이라도 한 마리 기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아무리 징그러운 동물이라도 집에 있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나. 선재는 어릴 때, 상추에 붙은 달팽이를 손가락 한 마디 넘게 키워낸 적이 있었다. 너무 징그럽고 싫었는데도 꼬박꼬박 밥 주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아이에게 좀 미안했다. 믿을 구석이라곤 저밖에 없을 아이가 처음으로 안쓰럽게 느껴졌다. 처음에, 주사를 맞으려고 했을 때 거부 반응을 보인 것도 제가 아니라 아이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좀 무서웠다. 선재는 그럴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곁에 준희가 있으면, 괜히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준희는 빤히 쳐다보는 선재의 시선에 영문도 모르고 웃었다. 그 예쁜 얼굴에 미소가 걸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어느 정도 놓을 수 있었다. 정신이 똑발라지면 배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들리지도 않고, 감각할 수도 없을 테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편했다.

선재는 준희를 깨우기 전에 아침을 먹는 편이었다. 준희는 엊그제 배탈과 배앓이를 동시에 앓아, 계속 죽만 먹는 중이었다. 선재도 아이가 먹는 죽을 떠와 식탁으로 가져온 상태였다. 처음엔 식혜처럼 물만 많은 물밥이 되었는데, 하다 보니 걸쭉한 죽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준희 이유식을 만들 때 많이 만들어 봐 두 번 실패하지는 않았다.

으, 소리를 내며 범진이 거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소리를 들은 선재가 생각을 하다말고 숟가락부터 들었다. 당근과 계란이 들어간 죽이었다. 간이 적당히 되어 제 입맛에도 맞았다. 숟가락으로 죽을 떠내자마자 범진이 걸음을 이쪽으로 척척 옮기는 것이 보였다.

“…죽 먹냐?”

범진은 선재의 얼굴은 스치듯 보고, 식탁에만 시선을 던졌다. 죽그릇 하나만 달랑 올라가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눈썹도 사납게 꿈틀거렸고, 선재의 얼굴에 눈길을 보내면서는 한숨까지 쉬었다.

“흰죽 아니고 당근이랑 계란 들어가 있어서.”

“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침부터 염병할래?”

어? 염병하실 겁니까? 하고 확인하듯 되묻는 범진은 선재가 앉아있는 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맞은편에 있던 범진이 가까워지자, 선재는 등을 의자 등받이에 제대로 붙였다. 오늘은 어쩐 일로 얇은 잠옷 바지를 입고 있는 채였다. 상반신이 드러난 것 정도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아침에 많이 먹으면 속도 더부룩하고.”

“그럼 니 점심은 나랑 먹자.”

“너 바쁘잖아.”

“하, 디질래?”

선재는 쥐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 위로 떨어트렸다. 어? 하면서 범진이 몸을 자꾸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요상한 몸짓이었다. 옆에 바짝 서서 어? 할 때마다 하체로 팔을 밀어대는데, 흉흉하게 선 것이 감각되지 않을 리 없었다. 툭 불거져 튀어나온 것을 앞으로 밀어대는 게 꼭 섹스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기분이 이상해진 선재가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밥 먹는데 그만 좀….”

“그만 뭐.”

“그만 괴롭히라고…. 그럼 이것도 못 먹어.”

“그래서.”

범진은 음흉하게 웃으며 옆에 있던 의자를 하나 빼 앉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선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뭘 원하는지를 몰라서였다. 범진은 선재가 앉아있었던 의자를 몇 번 흔들더니 쿠션 면을 손으로 두어 번 쳤다. 선재를 쳐다보며 안 앉냐고 말했다.

“….”

아침부터 무슨 심술이 나서 이렇게 저를 괴롭힐까? 선재는 망설이다 의자에 다시 앉았다. 뒤로 등을 기울인 범진은 선재가 앉은 뒤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숟가락 쪽으로 턱짓을 한 번 하고, 선재가 그 숟가락을 들자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 했다.

“안 먹냐?”

“…먹어.”

원래는 앞에 앉아 가만히 보고 있거나, 서서 몇 분 정도 들여다보는 게 전부다. 선재는 오늘따라 옆에서 끈덕지게 쳐다보는 범진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다. 이렇게 자꾸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리 죽이라도 쉽게 소화될 것 같지가 않았다.

“야.”

“왜.”

“니 애 갑자기 왜 안 뗄라고 하냐.”

“…별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선재는 마음을 속속들이 얘기하지 못했다. 너한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단 말은 하기가 좀 그랬다. 지금은 그럴싸한 이유를 만드는 중이어서, 병원에 가자고 할 때마다 컨디션이 나쁘단 핑계만 계속 대고 있었다.

“그럼 오늘 갈까?”

얼굴을 내밀며 범진이 물었다.

“…싫어.”

“왜?”

“아파.”

“…어데가 그래 아픈데요.”

몸을 뒤로 쭉 뺀 범진이 다리를 꼬았다. 어데가, 하고 덧붙이면서는 내려가 있던 입꼬리도 올라가는 듯했다. 그 얼굴을 잠깐 바라본 선재가 숟가락으로 죽이나 가득 떴다. 입 안에 뭐라도 넣자는 심정으로 죽을 먹기 시작했다. 범진은 제가 뭘 먹을 땐 대답이 굼떠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다.

“이게 걱정을 해줘도….”

“….”

죽을 가득 머금은 채로 범진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것 같던 범진이 일순 말을 멈췄다. 죽은 살짝 데우고 떠온 것이라 적당히 미지근했다. 입 안에 가득 넣어도 무리가 없었다. 계속 범진을 쳐다보며 입 안의 죽을 삼키던 선재가, 또 죽을 떠먹으려고 고개를 내렸다. 내리면서는 범진의 가슴팍을 지나쳐야 했고, 제 얼굴이 범진의 가슴팍 어디쯤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보았다. 저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꼴리라고 그래 쳐다보냐?”

“뭐?”

범진은 짝, 소리를 내며 선재의 얼굴 문신을 때렸다. 인상을 찌푸린 선재가 아예 다른 쪽을 쳐다봤다. 며칠 전에 사진첩을 확인하다 발견한 바로는, 저 사진은 봄에 찍은 거였다. 예전에 살던 이층집에서 찍었던 사진이었고, 그때도 범진이 얼굴 한 장 빨리 찍어서 보내라고 해 찍어 보낸 거였다. 해가 쨍쨍했던 날, 1층 창문 앞에서 찍은 거라 눈이 많이 시렸었다. 그래서 겁먹은 듯한 얼굴이 되었는데, 그걸 저 가슴팍에다 새길 줄은 몰랐다. 범진은 그 얼굴이 귀엽다고 했다. 니 얼굴이 그렇게 귀여우니까 내가 더 개새끼가 되는 거라고 말했었다.

“아니면 그래 왜 쳐다보는데.”

“…말 좀 그만 시켜… 밥 먹게….”

“뭐라고?”

“밥 좀….”

“누가 못 먹게 하냐?”

“….”

선재는 범진을 마지막으로 쳐다본 뒤 식사에만 집중했다. 매번 말없이 지켜볼 사람은 아닌 걸 안다. 시비도 이 정도면 많이 유해진 거니까 죽을 거의 비워가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긴 했지만, 이따금 웃는 것 빼고는 행동도 크게 취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 없이 와, 씨발, 하고 감탄하듯 욕하는 것 말고는 말도 거의 없었다.

“…어디 갈라고.”

“그릇 정리하고… 준희 깨우러.”

“낸테 뽀뽀 안 해주냐.”

“….”

요즘은 입이나 뺨에 뽀뽀하는 걸 자꾸 바란다. 선재는 범진에게 팔이 붙잡힌 채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자세로 범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차피 안 보내줄 거니까. 선재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상체를 숙여, 범진의 뺨에 뽀뽀를 해줬다. 범진이 일부러 쪼옥, 하고 크게 소리 나도록 뽀뽀하는 것과는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그냥 대충 닿았다 떨어진 정도다.

“그게 뽀뽀라고 하냐? 쭉 빨아야지.”

뽀뽀를 뭘로 아는 걸까? 범진은 손으로 자기 뺨을 세게도 때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파 보였다. 여기에 뽀뽀를 하란 제스쳐였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나 몰랐다. 선재는 잠깐 표정을 찡그리다 범진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범진의 손이 뒷머리로 들어오는 걸 느껴, 어쩔 수 없이 뺨을 빨 듯이 뽀뽀했다. 범진이 그러는 것처럼 쪼옥, 하는 소리가 났다.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가만있어라….”

할 거 다 하고, 그릇을 개수대로 가져가려 하는데 범진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선재는 제 얼굴빛을 낱낱이 쳐다보려는 범진의 의도를 느껴 얼굴을 붉혔다. 곳곳이 붉어진 얼굴에, 범진은 만족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하고 손가락으로 볼을 툭 쳤다. 이쁜 거, 하는 말까지 덧붙인 뒤에야 자리를 떴다. 화장실로 가 소변을 누는 듯했다.

적나라한 소리가 들려서, 선재는 그릇을 빨리 개수대에 넣고 준희가 있는 방으로 뛰어가듯 걸어갔다. 문을 닫고 준희가 누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준희야….”

엊그제 배탈이 난 아이는 새벽이 되어서도 많이 울었다. 속이 어떻게 아픈지 낑낑거리기도 하고, 눈물만 뚝뚝 떨구기도 했다. 이미 병원은 다녀온 다음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 약을 먹었는데도 자꾸 아파하는 것 같아 약이라도 한 번 더 먹여야 하나 싶었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11시에 겨우 잠들었는데 또 깨서 울자 뭘 어째야 좋을지를 몰랐다. 단순 배탈이라 아파도 어쩔 수 없단 말을 의사로부터 들은 뒤였다. 선재는 뭐냐고 묻는 범진에게도 배탈… 하고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아는 게 그것뿐이었다.

준희를 응급실로 데려간 건 범진이었다. 응급실에 가면 뭐라도 해준다는 범진의 말을 들었을 때, 선재는 골이 띵했다. 아이가 계속 아파해 다른 생각은 들지도 않았었다. 선생님이 그냥 배탈이라고 했는데. 선재는 준희가 크게 울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의사의 말만 믿었다.

준희는 응급실에서, 간단한 검사를 거치고 작은 손에 링거를 꽂은 뒤에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총 세 시간이 걸렸다. 배탈 증상도 있지만, 오메가 남자아이들이 겪는 배앓이 증상이 더해져 고통이 심했을 거라는 주치의의 말을 들었다. 선재는 가까스로 올라오는 감정을 참았고, 집에 도착해서는 준희와 같이 잤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범진이 방바닥에서 얇은 이불 하나만 깔고 잠을 자고 있었다. 거실 침대에서 자는 줄 알아, 하마터면 발로 밟을 뻔했었다.

“주니….”

“잘 잤어요?”

아이는 다행히 어제부턴 상태가 괜찮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어린이집은 가지 않았고, 오늘도 하루 더 지켜볼 생각이긴 한데.

“녜….”

“여기 이제 안 아파? 괜찮아?”

“녜에….”

아이 배에 손을 갖다 대자, 조그만 손 두 개가 선재의 손 위로 올라왔다.

“맘마 먹을까. 준희 지금 맘마 먹을래?”

“녜에. 주니 맘마.”

원래는 밥 자체를 맘마라고 불렀는데, 언젠가부턴 죽만 맘마라고 인식했다. 맘마를 먹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얼굴이 어제보다도 훨씬 좋아 보였다. 응급실에 다녀온 후론 줄곧 잠만 잤다. 어제도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깼고, 저녁까지도 잠을 많이 잤다. 그 탓에 밤잠을 못 잘 거라 생각했는데, 얼굴을 보니 여태까지도 잘 잔 것 같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선재의 손이 아이의 몸 곳곳에 닿았다. 얼굴부터 배, 다리, 발까지.

응급실에서, 준희는 희게 질리다 못해 노래진 발을 연신 오므렸다 펼쳤다. 집에서도 계속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아플 때마다 오므라들었던 작은 발가락을 응급실에 도착해서야 눈치챘다. 많이 아팠을 거라고 말하는 주치의의 말은 몇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준희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땐 눈물이 많이 났다. 짜증이 나면 짜증이 난다고, 아프면 고함을 지르며 울기라도 하지. 타고난 성정 때문에 눈물만 똑똑 떨어트리던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애기야.”

욕실에서 나온 범진이 상체를 드러낸 채 방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선재가 주변에 있던 아이 수건을 범진의 어깨에 걸쳤다. 문신을 가려주는 건 거의 버릇이 되었다.

범진에게 빚지고 있단 마음과는 별개였다. 수납처에서도 범진은, 꽤 많은 돈을 진료비로 낸 것 같았다. 응급실 비용이 따로 붙는 데다 오메가 유아의 경우 보험이 안 되는 약물이 많았다. 일반 병원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값비싼 약물 처치를 해, 준희는 금방 회복을 했고, 잠도 잘 잤다. 지금은 이렇게 괜찮아서.

“아부지이… 주니….”

선재는 어깨에 수건을 대충 매단 채로 준희를 안아주는 범진의 모습을 가만 지켜봤다.

나름대로 조심해서 안는 걸 아는데,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았다.

“안 아프냐?”

“녜에.”

“아프지 마라.”

“녜에.”

아이는 눈을 끔벅거리며 범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은 불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진짜 안 아프길 바라서 하는 말 같았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다 지켜본 선재가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준희는 다시 졸려오는지 눈만 끔벅이며 그 품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손으로 범진의 가슴팍 어디를 가리키며 암마아, 했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이 얼굴 문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맘, 마암, 말했다.

아빠는 곧잘 하는데, 엄마 발음은 맘마랑 헷갈리는지 그 중간 어디쯤 정도로만 발음했다.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오늘은 굳이 엄마라고 말하는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선재가 아빠한테 오자, 이제. 하고 손을 다시 뻗었다. 그제야 고개를 슥 든 아이가 선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준희 오늘까지는 친구들 보러 가지 말자…. 알겠지.”

“녜에…. 주니….”

“그래. 쉬고….”

“주니 칭구들… 말해 조야 대요….”

오늘 자신이 어린이집에 가지 못한다는 걸 친구들에게 알려달라는 소리였다. 알겠다고 대답한 선재가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죽을 먹이긴 해야 하는데, 아이는 여전히 큰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좀만 더 자자.”

네, 하고 대답한 아이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침대 위에서 다시 잠들었다. 히죽거리며 알 수 없는 눈빛을 하던 범진이 그때까지도 방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을 향해 조용히 하라 입 모양으로만 말했고, 둘은 같이 방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바로 보이는 현관 쪽엔 버리지 않은 쓰레기들이 가득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도 비워야 하는데. 아이 때문에 이틀 동안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사람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게 되면 범진이 꼭 뒤를 따라왔었다. 그렇게는 되기 싫으니 처리해주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했다.

얼마 전에, 범진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윤형을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때 범진은 맥락도 없이 씨발놈이 어쩌고저쩌고했다. 거울을 주먹으로 치며 좆같은 씨팔놈이라고 했다. 윤형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선재는 범진을 말리느라 진을 뺐다. 얼마간 연락이 없었던 윤형은 그날 정말 괜찮으신 거냐는 메시지를 또 보내왔다. 선재는 괜찮다고 말했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문장도 썼다. 메시지창엔 이미 그 비슷한 메시지가 오고 간 흔적이 있었다. 윤형에겐 정말 악의가 없는 것 같았다. 범진을 신고하지 않는 게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새 메시지로 그런 말을 써 보낸 선재가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땐 정말 범진의 입을 꿰매고만 싶었다.

* * *

계절은 지치지도 않고 모습을 바꾸었다.

늘어진 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빨간빛을 띠고 있었다.

우욱. 창문 너머를 쳐다보던 선재가 입을 막고 욕실로 직행했다.

범진이 나간 지는 한 시간 정도가 되었다. 같이 있을 땐 괜찮은데,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면 이런 증상이 금방 나타나곤 한다. 밥을 먹은 지는 꽤 되어, 토악질을 해도 나오는 건 없었다. 창가에서 바깥 구경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선재는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몸이 야속했다. 변기를 붙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힘껏 헛구역질을 한 뒤에야 자세를 일으킬 수 있었다. 손으로 세면기 물을 틀어 조금이라도 물기를 적셨다. 목 위로 압박감이 들다 보니 얼굴 근처가 안 붉은 데가 없었다. 눈은 당연히 새빨갰고, 뺨과 턱, 목 부근도 잔뜩 올라있는 상태였다. 콧물이 맺힌 걸 쳐다본 선재가 물로 그 부근부터 씻어내었다. 이어 뺨과 턱, 목에도 차례대로 물기를 적셨다. 찬물로 씻어선지 홧홧해졌던 느낌은 금세 가셨다.

선재는 밖으로 나와 드레스룸 수납장 아래에 두었던 범진의 옷 한 장을 크게 펼쳤다.

범진이 빨래통에 던져놓은 옷들 하나를 골라 매번 이곳에 넣어두곤 했다. 범진의 옷을 입어야 증상도 덜하고, 컨디션도 괜찮아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한 시간 전에 나간 범진이 다시 들어올 확률은 낮다.

변태 같은 눈짓을 받는 것도 싫고, 범진의 옷에 밴 체취를 맡는 걸 들키는 것도 싫었다. 선재는 제 잠옷 바지와 티셔츠를 벗고 범진의 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달랑 입었다. 가을날이라, 집 안이 춥거나 하진 않았다. 범진의 바지까지 입긴 좀 그러니 최대한 사이즈가 커 보이는 티 한 장만 걸친 것이다. 웬만해선 윗옷을 입지 않는 범진 때문에 이런 한 장 한 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다. 옷을 입자마자, 선재는 아랫면을 들어 올려 냄새부터 맡았다. 거북했던 속이 일시에 잠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원래는 다른 티셔츠 하나를 돌돌 말아서 가지고 다녔는데, 오늘은 남는 여분의 티셔츠가 없었다. 제 체취는 최대한 지워야 하니 이런 민망한 차림일 수밖에 없다. 선재는 걸어 다니면서는 옷을 들어 올리지 않았고, 어디 앉았을 때만 티셔츠를 위로 들어 올려 얼굴로 가져갔다.

쓰고, 어딘가 상쾌하기도 한… 이상한 향이다. 선재는 깊이 들이마시면서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원래는 지독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맡았다 하면 몸이 덜 아프니 어쩔 수 없이 긍정적인 감상을 하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선재는 그 차림으로 집 안을 활보했다. 준희의 이불을 제대로 펼쳐 붙어 있는 먼지들을 제거하고, 자동 물걸레 청소기를 돌렸다. 적당한 소음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청소기가 바닥에 물 자국을 냈다.

청소기를 쳐다보던 선재는 냉장고에서 요거트도 하나 꺼내 먹었다. 준희가 늘 먹어오던 건데, 요즘은 제가 더 많이 먹고 있었다. 유제품엔 거부감이 덜하다 보니 한바탕 입덧이 지나가고 나면 꼭 그런 것에만 손이 갔다. 티스푼으로 요거트를 한술 뜬 선재가 발로 청소기 버튼을 눌렀다.

뚝, 멈춘 청소기에선 안쪽으로 물먹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난데없이 청소기를 끈 건 갑자기 조용히 간식을 먹고 싶어서였다. 소리에 그리 민감하지 않았는데, 최근엔 좀 달랐다.

범진의 소리에도 현기증을 느낄 때가 있었다. 보통으로 말하면 괜찮지만 어디 매번 보통으로 말하는 사람인가. 어! 뭐! 하는 식으로 언성을 높일 때마다 귀와 머리가 동시에 아프곤 했다. 하지 말라고 말하면 또 하지 말란다고 비꼬았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하긴 해야 했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소리는 좀 줄여줬기 때문이었다.

요거트 하나를 다 비운 선재가 그 통을 물로 꼼꼼하게 헹궜다. 다용도실 안쪽엔 분리수거함으로 쓰는 타포린백이 있었다. 통을 그쪽으로 던진 선재가 아, 하고 탄식을 했다. 다섯 번 던지면 네 번은 실패하는데, 오늘도 실패였다. 결국, 다용도실까지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요거트 통을 손수 버려야 했다.

선재는 양치를 한 뒤 거실 침대로 가 잠을 청했다.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지는 때다. 갑작스러운 입덧 증상 때문에 잠깐 잊었던 거지, 안정을 찾자마자 다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가 2시에 오니, 시간은 네 시간이나 남았다. 준희는 많이 아팠던 날 이후로 밥도 더 잘 먹고, 웃기도 더 많이 웃었다. 그 얼굴을 떠올린 선재가 끔벅끔벅 졸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낮잠을 잘 땐 범진의 자리로 가 자는 편이다. 그렇게 하면 몸도 훨씬 편안하고….

야.

눈을 떴을 땐 범진이 앞에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는데, 범진의 얼굴 때문에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범진은 재밌다는 얼굴로 앞만, 그러니까 제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거 내 옷 아니냐.”

“….”

어쩐 일이냐고 말을 돌리기엔 타이밍이 어중간했다. 자기 전에 커튼을 쳐둬 거실은 어둑한 편이었다. 덩달아 어두워진 얼굴을 쳐다보던 선재가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빨라고 벗어둔 건데 왜 주워 입었냐.”

가까이 다가온 범진 때문에, 선재의 손이 눈 끝에서 멈췄다. 대체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 건지. 깨기 전까지 계속 저를 쳐다보고 있던 건가. 범진이 어? 하며 몸을 가까이 붙여왔다.

“…그냥 깨끗한 것 같아서 입었어.”

“니 바지는 어따 벗어놓고.”

“잠깐 잔다고… 잠….”

“니가 잠잘 때 어디 이것만 입냐.”

범진이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선재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여름에도 잠옷 바지를 입었던 걸 범진이 모를 리 없었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선재가 몸을 뒤로 빼며 이불을 걷었다.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입으러 갈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일어나면 입으, 우읍.”

선재의 머리가 갑자기 옆으로 쏠렸다. 범진이 잡아끌어 냅다 입을 맞췄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범진의 혀가 유독 뜨거웠다. 얼굴이 빠르게 맞붙어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 손을 쥐고 제 어깨 위로 올린 범진이, 혀에 더 강한 힘을 실었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혀가 빨리고 있는데, 손도 범진의 어깨 위에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런 자세로 키스하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지만, 손을 내렸다간 또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선재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모르고 범진의 혀가 들어올 때마다 입을 적당히 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범진의 입놀림에 가슴팍까지 벌게지고 있는 중이었다. 범진의 옷이라도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났다. 선재는 입술은 물론 혀까지 안쪽으로 옭고 빨아대는 범진 때문에 눈가를 찌푸렸다. 요즘은 깨무는 것까진 안 하지만 예전엔 피도 많이 났었다. 처음에도 얼마나… 맨 처음 범진과 키스하던 때를 떠올린 선재가 자연스럽게 인상을 썼다.

범진이 그 틈에 잠깐 느슨해졌던 공간을 다시 좁혀왔다. 선재의 뒷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입을 더 벌려댔다. 귀까지 새빨개진 선재가 눈을 세게 감은 채로 범진의 혀를 맞았다. 안 닿는 곳이 없는 범진의 혀에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막거나 밀어내기엔, 그럴 만한 명분이 별로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분도 크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코로 숨 쉬는 것도 제법 괜찮아져서, 범진이 놓지 않으면 키스 시간은 거짓말처럼 길어졌다. 선재도 범진이 입을 벌리며 들어올 때마다 입술 사이를 더 열어주며 고개를 빼지 않았다. 범진의 손이 뒷머리에 닿아 있기도 했지만, 따로 힘을 준 적도 없었다. 몇십 분간 그러다 보면 땀까지 났다. 선재는 이마에 맺히려 하는 땀 때문에 범진의 어깨를 몇 대 쳤다. 머리가 어지러운 듯,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입술을 비볐다. 범진의 침으로 범벅된 입술에서 반짝반짝 광이 났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선재의 입꼬리 근처에 맺혔던 타액이 턱을 향해 주르륵 떨어졌다. 엄지손가락으로 그 턱을 닦아준 범진이 선재의 맹한 눈에도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아니어서 선재의 손이 범진의 어깨에 한 번 더 닿았다. 그만 좀….

“그만….”

“또, 씨발.”

“아니… 했잖아.”

“진짜 해볼까. 하는 게 뭔지 보이주까.”

둘은 주어 없이 대화를 이었다. 선재는 미친 사람처럼 웃는 범진을 향해 한쪽 눈만 연신 찡그려댔다.

“…안 보여줘도 되니까 저리 가.”

“내가 내 집에서 어딜 가라고.”

“….”

“내 집에서 명령하냐, 니 지금.”

“….”

“엉?”

이불 속에 손을 넣은 범진이 엉덩이를 콱 잡자, 목에 열이 올랐다.

범진은 그 정도론 성에 안 차는지 나머지 한 손마저 넣어 두 손으로 선재의 엉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좀.”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이 도를 지나쳤다. 그러면서 코앞에서 눈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의 눈이 1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닿아와 시선만 애꿎은 데로 피했다. 커다란 손에서 놀려지는 엉덩이엔 알싸한 통증마저 일었다.

“명령하냐고.”

“안 해. 안 할게.”

“또 뭐를 안 하냐. 마누라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명령을 안 하겠다고 말하니, 마누라면 그 정도는 해도 된다는 저 심보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선재는 결국 또 알겠다고 말했다. 그만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찼지만 겨우 삼킨 채 범진의 팔을 밀었다.

“뭘 알겠는데.”

“명령…해도 되는 거.”

“니가 뭔데 명령을 하냐고.”

범진은 어떤 말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입을 꾹 다물었던 선재가 여전히 웃는 낯을 한 범진을 향해 그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도통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도 않아서.

“…마누라는 명령해도 된다면서.”

어쩔 수 없이 했다. 범진이 잘 웃다가 멍한 얼굴이 되는 걸 보았다. 범진은 이 씨팔, 그런 건 잘 아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속뜻이 잘 파악되지 않는 말이었다. 선재는 갑자기 자리를 뜬 범진 때문에 근처에 있던 아무 바지나 찾아서 입었다. 본인이 원해서 해줬는데, 막상 들으니 또 별로인가 보았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범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샤워를 하고 와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입맛을 다신 범진은 깔끔하게 한 판만 뜨자고 했다. 옷에 흰 가루 같은 걸 묻히고 왔던 범진은 현장에 점검차 다녀왔던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저렇게 씻고 와서까지 하자고 덤비면, 더는 하지 말라고 말도 못 한다. 선재가 급하게 입었던 바지를 다시 벗었다. 내일모레 병원 가니까 살살 하라고 말했다.

* * *

병원에 가기로 한 금요일.

아침부터 아이를 깨웠지만, 준희는 피곤한지 품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선재가 한동안 준희를 안아주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준희, 오늘 친구들 보러 가기 싫어?”

“…우응… 으으응….”

싫지도, 좋지도 않은 듯이 웅얼대며 고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재가 그 얼굴을 바로 앞에서 쳐다보며 아이의 등을 쓸었다.

“다음 주부터 갈까. 월요일부터?”

“…네에에….”

이젠 못 알아듣는 말이 없다. 몇 개월은 차치하고, 며칠 상관으로 느는 어휘력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확실히 알아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뉘앙스는 대충 파악한 것으로 보였다. 선재는 준희를 침대 위에 올려둔 채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주었다.

“준희 배는 안 아파?”

“…주니….”

“응, 준희. 배. 여기.”

선재가 배에 손을 갖다 대자, 준희의 고개가 제 배 쪽으로 향했다. 아이는 곧장 얼굴을 들어 도리질을 했다.

“주니 안 아파.”

“괜찮아?”

“녜에.”

“괜찮으면 다행인데.”

오늘 병원에 가니, 그럼 준희의 진료도 따로 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범진은 어제까지도 애를 지워야겠단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선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어라 반응하지 못했다. 아직도 상태를 봐서 아이를 어떻게 하자고만 말해오고 있었다. 범진의 품에선 범진의 냄새가 났다. 너무 당연하지만 그걸 맡고 있으면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재는 제 몸의 컨디션 때문에라도, 범진이 끌어당겨 안으면 그 품에 얼굴을 푹 묻을 때가 많았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방에 들어오면서 침대에 둬, 준희도 그 빛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선재가 들어온 문자를 확인했다.

[선재 씨, 저 어제 연락드렸던 전담 상담사예요. 오늘도 통화 가능할까요?]

어제 대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었다.

장난 전화도 많이 걸려오니 당연히 받지 않았지만, 얼마 뒤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복지사이자 상담사 장영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저를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1년 전에 어디서 지냈는지, 3년 전엔 누구와 함께였는지 따위의 것들. 준희의 존재도 알고 있었고, 지금 임신한 사실도 물론 알고 있었다. 선재는 그 문자를 읽으며 그런 것만 눈에 담았다. 주된 메시지는 저를 보호해주겠다는 거였지만, 어떻게 이런 정보를 다 알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서 논지 파악이 잘 안 되었다.

그럴 때 전화가 걸려왔고, 장영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것저것 질문을 해왔다. 그녀는 현재 지내고 있는 알파에 대해 물었다. 선재는 곧장 범진을 떠올리고 당황만 했다. 처음에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엔 머리가 텅 비어,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쪽에서 조사에 들어갔다는 CCTV에 대해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시청에서 억지로 저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나, 작성하는 내내 직원에게 보였던 태도 같은 게 문제가 되었다 했다.

주변인의 신고도 있어 이렇게 선재 씨를 전담하게 되었다고, 장영수는 말했다. 선재는 윤형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윤형이 아니면 신고할 만한 ‘주변인’이라는 사람이 주변엔 없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구나. 선재는 금방 떠올린 한 사람이 괜히 일을 피곤하게 만들었단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주겠다는 장영수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범진에겐 말을 하지 않았다. 제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선재는 또 통화를 하자는 장영수에게 그 자리에서 답신을 써 보냈다.

저는 잘 지냅, 까지 썼을 때, 화면은 전환이 되었다. 모르는 번호가 떴고, 통화 버튼도 아래에 떠 있었다. 가만히 그 화면을 쳐다보던 선재가 준희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이가 눈을 감았다 뜨며 히, 하고 웃었다. 선재가 옅은 미소와 함께 휴대폰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창밖을 쳐다봤다.

“여보세요.”

[네, 선재 씨. 접니다. 잘 주무셨나요?]

“네.”

[네. 우선 어제 드린 연락에 대해 좀 생각해보셨나요? 당장 뭘 하자는 게 아니라, 저희가 선재 씨 가족을 조금 지켜볼 필요가 있어서 그러는 거니 너무 불안해하진 마시고요.]

선재는 횡설수설하는 듯한 장영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위험할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최악의 상황이 와도 선재 씨 아이와 함께 살 시설도 제대로 마련이 된 상태고, 여기서 자립할 때까지 10년이고, 20년이고 지내셔도 괜찮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선재 씨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겠죠….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휘험할 일이….”

선재는 위험할 일이 없다는 장영수의 말만 머리에 입력했다. 예전에, 범진에게서 도망을 쳤던 때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다시 범진에게 붙잡혔고, 그 후론 도망 따윈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지금이 그때도 아니지만, 그냥 그랬던 때가 있어 말은 자동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장영수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위험이요? 그런 부분은 저희 쪽에서 다 보호를 해드릴 겁니다. 이번에 법이 강화되기도 해서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아이가 있는 오메가 분들이 주요 조사 대상이었고, 선재 씨에게 문제가 감지되는 부분이 있어 제가 이렇게 전화도 드린 겁니다. 선재 씨도 위험에 대해 말씀하시네요. 많이 힘드셨죠? 불안하시고?]

“…아뇨. 아니에요. 아닙니다.”

선재는 아니란 말만 몇 번을 했다. 이제 와 시설로 들어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손이 배에 닿았다. 늦을 대로 늦어버렸지 않나.

아부지… 주니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진이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선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 채 휴대폰을 등 뒤로 숨겼다.

그 움직임을 본 범진이 준희를 지나쳐 곧장 선재에게로 향했다.

그리곤 손을 뻗으며 선재를 쳐다봤다. 내놔라, 했다.

코앞에서 범진의 손을 쳐다본 선재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쳤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표정도 아니었다. 방 안이 워낙 고요해, 여보세요? 선재 씨? 하는 소리가 울리듯 퍼지고 있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어, 그래. 아니까 내놓으라고.”

선재는 범진의 눈을 한 번 더 쳐다보고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범진이 휴대폰에 제 귀를 가져다 댔다. 준희를 힐끔 쳐다보는가 싶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주니이… 잉….”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준희의 움직임을 본 선재가 아이를 곧장 안아 들었다. 범진이 저를 안아주지 않아 얼굴엔 서러움이 가득했다. 그래도, 방에서 욕을 퍼붓지 않았으니 그것만은 다행이다. 닫힌 문에 귀를 댄 선재가 욕설이라도 들으려고 신경을 집중했다. 품에 안긴 아이만 삐쭉이는 얼굴을 한 채 선재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겼다. 압빠아… 불러도 선재는 고개만 끄덕이며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중을 했는데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욕을 내질러야 할 범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예 집 밖으로 나간 걸까. 괜히 전화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전에 검진을 예약하고, 뒤이어 준희의 진료까지 보기로 했다. 범진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전화 통화에 대해선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조수석에서 옆만 흘긋거리던 선재가 참지 못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았을 뿐이다. 뭐라고 하던데? 선재는 그렇게 물었고, 범진은 운전대를 가볍게 퍽, 치듯 밀어내더니 선재와 눈을 맞췄다. 니가 들은 거 똑같이 들었다, 하고 말했다.

선재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똑같은 말을 들었을까. 시청에서의 일이나 CCTV가 문제되었단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범진이 따로 뭐라고 하지 않아 더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선재는 앞만 보았고, 곧 드러난 병원 건물에 내릴 준비를 했다. 뒤돌아 준희의 상태도 살폈다.

“이….”

이… 하고 말을 멈춘 아이는 병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서 보았다고, 나름으로 티를 내는 거였다. 선재가 그 모습을 쳐다보고 어, 준희 와 봤지? 하고 물어주었다. 준희는 다시 이이… 하며 병원을 가리키더니 네에, 하고 대답했다.

범진은 주차를 끝내고 차 문을 열어 곧바로 담배부터 태웠다. 주차장이 널널해 정문과 가까운 구역에도 자리가 꽤나 비어 있었다. 요즘은 주차선을 함부로 침범하진 않는 듯하다. 선재가 차에서 내리며 선 안에 들어온 바퀴를 굳이 확인했다. 준희의 카시트가 있는 자리까지 걸어가면서도 주차를 제대로 했는지 눈으로 살폈다. 주차 매너가 좋아졌다고 해도,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되어 어쩔 수 없었다.

선재는 뒷좌석 문을 열고 준희의 얼굴을 양손으로 매만졌다.

“준희 의사 선생님 보고… 아, 밥도 먹고.”

선재가 급히 밥도 먹는단 말을 덧붙였다. 의사란 말에, 아이의 입술이 금방 쭈욱 나왔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병원에서 주사도 잘 맞는 편이었는데 최근에 한 번 복통을 앓은 후로는 의사란 단어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준희가 아플 때도 이 병원으로 오긴 했지만, 그때 준희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울기만 했었다. 준희의 기억에 이 병원은, 선재가 쓰러지던 날 멈춰 있었다. 그땐 범진과 병원에 와서 자고, 다음날 일어나 김밥을 먹은 게 전부였을 테니. 선재가 아이를 안아 올렸다. 큰 눈을 끔벅이는 준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준희 아프게 안 할 거야.”

“…주니 배 아야….”

“배 아프게 안 해. 준희 배 아팠을 때도 병원 와서 다 나았는데.”

“…으은… 녜에.”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선재가 그런 아이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뒤통수가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주니 아부지이….”

범진은 주차장 한복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아이를 안고 있던 선재가, 준희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스팔트에 담배를 버린 범진은 그걸 발로 밟아 껐다. 그리곤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있든 없든, 눈에 띌 만한 외양이다. 큰 키와 넓은 어깨, 두꺼운 가슴팍과 길게 뻗은 다리가 좋은 균형을 이루었다. 바르작거리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선재가 햇볕에 잔뜩 구겨진 얼굴로 걸어오는 범진의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준희의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아이는 범진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었다. 큰 보폭으로 걸어오고 있으니 곧 만나겠지. 선재는 준희가 넘어질 정도로 속도를 내지 않아, 그걸 가만히 지켜만 봤다. 범진은 고개를 잠시 옆으로 하더니 침을 껌처럼 뱉었다. 휙, 하고 날린 침이 포물선을 그리다 사라졌다.

“안 드가냐?”

기분이 이상했다. 준희를 자연스럽게 안아 든 범진이 제게 다가오며 그런 말을 해서다. 누가 봐도 가족 같은 그림이라 반응도 멍청하게 하고 말았다. 선재는 어, 아니… 하면서 몸을 틀었다. 아이는 제가 안았을 때와는 달리, 훨씬 높은 곳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아부지, 아부지, 주니 아부지, 하고 음을 붙여가며 범진의 팔에 안겨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준희, 그만… 그렇게 하지 마.”

“녜에….”

“너도… 안을 거면 제대로….”

“떨구겠냐.”

“혹시 모르니까.”

선재는 준희가 범진의 품에서 뒤로 넘어갈 뻔했던 걸 여태 잊지 않았다. 저라면 어땠을까. 그대로 떨어트렸을 것 같은데. 그때 범진은 발군의 운동신경으로 다른 손으로 준희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고, 그저 몸이 쑤욱 떠올라 재밌다는 얼굴만 하고 있었다. 그 작은 입에서 까르륵, 하는 웃음이 터지고서야 안심을 했었다. 범진도 와, 씨, 했던 걸 보면 상황이 위험했던 건 맞았다. 옆에 있던 선재가 놀라서 범진의 팔을 몇 번이나 쳤다. 내려, 내려놔.

아이가 좋아해서 내버려 두는 거지…. 모르겠다. 선재는 준희와 범진을 지켜보며 불안한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장소가 병원이고, 특유의 냄새도 풍기고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있었다. 범진은 한 손으론 준희를 안고, 한 손으론 자꾸 처지는 선재의 손을 잡아끄는 중이었다. 선재는 복도 어디쯤부터 범진의 손을 잡고 가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어지러운 마음을, 범진은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크고 뜨거운 손. 제 배나 발이 차가울 때 그 체온이 얼마나 여실히 감각되었나. 선재는 범진의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며, 하지 않아도 될 생각 같은 걸 했다. 특이, 또는 특수 정도로 표현되는 형질 진료 구역이 곧 드러났다. 선재는 산부인과가 표기된 화살 무늬를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범진은 길을 아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매번 이렇게 앞장을 섰다.

“손 좀 놔.”

“왜. 다른 거 하고 싶냐.”

“아니… 아파.”

별로 아프지 않은데도 그렇게 말했다. 선재는 잡고 있던 범진의 손에서 힘이 더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눈은 여기서 확 밀쳐버린다는 듯 저를 쳐다보지만, 나오는 행동이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래도 범진이라면 이런 데서 키스를 하는 것도 서슴지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을 더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선재가 범진의 풀어진 손을 슬쩍 쥐었다.

“왜.”

“다 왔어. 그만 가.”

촘촘히 붙은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선재는 맨 앞에 앉아있던 어린 남자 오메가를 지나쳐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손을 뻗어 준희를 받아들었고, 아이를 제 옆에 앉혔다.

범진은 앉지 않고, 그 옆에 우뚝 서, 뭐가 좋냐, 하고 준희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이가 재밌다는 듯 범진의 손가락을 잡고 이잇, 이잇, 하는 소리를 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앞에 있는 어린 남자는 혼자였다. 선재는 그 어린애의 등을 쳐다보다 준희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너무 소중해서 아픈 아이. 선재는 금방 찾아온 제 진료순서에도 아이만 넋 놓고 바라봤다.

민선재 님? 하고 들린 소리엔 고개가 돌아갔다. 이미 제 이름이 가장 앞에 와 있었다. 몸을 일으킨 선재가 준희의 손을 잡고 먼저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초음파 촬영을 하고, 작은 새처럼 생긴 덩어리 같은 것도 눈에 담았다. 그게 아기라고 했다. 전엔 점 같았는데 겨우 몇 주 더 지났다고 무슨 모양이 된 게 신기했다. 범진은 화면은 쳐다보지 않고 판판한 제 배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이, 선생. 거 너무 만지네.”

“예…?”

“손으로 배는 왜 누르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선재는 머리를 짚으려다 관뒀다. 누워 있는 상태라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심장 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범진 때문에 뭘 들었는지 헷갈리는 채로 검사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범진을 불만스럽게 올려다봤다.

“그렇게 하면 검사 제대로 못 받아.”

“뭐.”

“…검사를 제대로 해야 안 아프….”

“씨바, 그럼 떼라.”

“….”

어디까지나 범진을 위한 일인데도, 선재는 이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느낄 줄 모르는 범진이 이젠 신기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내 새끼가 어쩌고 하면서 좋은 듯 굴었던 건 정말 뭐였을까.

상담하기 직전까지도 말이 오갔다. 검사를 잘 받아야 안 아프다고 하면, 범진은 욕을 하며 떼버린다고 협박하듯 말을 했다. 다행인 건 준희가 창가에서 바깥 구경을 하고 있단 거였다. 그 외엔 다 최악이었다. 선재는 갑자기 성질을 내는 범진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입을 닫았다.

의사는 범진의 눈치를 보며 주의할 점이나 권장 사항 같은 걸 로봇처럼 늘어놓았다.

앞에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범진의 눈과 마주치면, 금방 선재에게 그 시선이 닿곤 했다.

선재는 기분이 좋은 것 같다가도 갑자기 모든 일을 망치는 범진 때문에 마음이 울적했다. 안 그래도 감정이 바닥을 칠 때가 있는데, 병원에서 이러니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던 소아 내과에 들러 준희의 진료까지 빠르게 봤다. 준희는 청진기에 잔뜩 긴장을 했다가, 닿아도 배가 아프지 않으니 의사를 향해서도 소리 없이 웃어주었다. 선재가 그 얼굴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폭풍에 휩쓸린 듯한 마음이 다시 따뜻하게 채워졌다.

“성샌니임… 주니… 아야 시러요….”

“준희 아야 싫어? 주사도 못 맞겠네?”

“아야야….”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있나. 준희는 팔에 주사 한 대를 맞았다. 몸의 기관 안정화를 위한 주사였고, 어릴 때부터 맞아놓아야 험한 일에 노출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선재는 고등학생 때 그런 주사를 처음 맞았다. 비싸서, 가난한 애들은 구경도 못 하는 주사였다.

개처럼 발정기가 온다고 저를 놀렸던 반 아이 때문에 울면서 집으로 간 일이 생각났다.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던 중이라 충격이 상당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있던 처지라, 주사를 맞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선재는 한 달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그 비싼 주사를 처음 맞았다.

그때 생각이 나, 주사를 안 맞으려고 칭얼거리는 준희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으으잉, 하고 울먹이는 아이에게 금방 사탕 하나를 물려 주었다.

“너무 잘했다, 준희. 주사도 잘 맞고.”

“…주니 팔… 이잉….”

“사탕 다 먹으면 안 아파. 진짜야.”

“…녜에… 끅.”

많이 아픈 주사인데도 알겠다고, 네, 하고 대답하는 아이가 대견했다. 그러면서도 눈에 눈물은 계속 차오르고 있었다. 선재가 손가락으로 그 눈을 문지르듯 쓸어주었다.

“괜찮아, 이제.”

“녜…에….”

사탕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거린 아이가 범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범진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아까부터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채였다. 누가 보면 초음파실에서 욕이라도 얻어먹은 줄 알 것이다. 욕은 본인이 해놓고. 그 얼굴과 손을 뻗으며 걸어가는 아이를 쳐다보던 선재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아이가 향하는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가… 이제. 끝났으니까.”

“야.”

“왜.”

“삐쳤냐.”

“뭘 삐쳐.”

“내가 씨발, 개새끼라서 그렇다. 니가 이해 좀 해라.”

“….”

“니 천사잖아.”

선재는 그런 말을 하며 아이를 안아주는 범진의 모습을 초점 없이 쳐다보았다. 기분이 나쁜 것만 드러내고 있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어? 하고 확인하듯 되묻는 범진에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올 땐 그렇게 하지 마.”

“알았다.”

웬일로 하지 말란 말에도 알겠다고 하고.

막상 순순히 알겠다고 하자 말문이 막힌 건 제 쪽이었다. 선재는 다시 실실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띄운 범진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푹 패는 흉터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간단한 수납만 마치고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주차장은 아까보다 많은 수의 차량으로 채워져 있었다.

준희부터 카시트에 태워준 선재가 뒷좌석 문을 적당한 힘으로 닫았다. 바로 옆에서 운전석 문을 열었던 범진은 아이 벨트를 다 채워줄 때까지 차에 타지 않았다.

“야.”

아무래도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니는 뭐 해줄래.”

“뭘.”

“내가 개새끼짓 덜 하면, 니는 뭐 해줄 거냐고.”

범진은 거만한 투로 말을 이었다. 턱까지 들고 말하는 걸 보니 장난을 치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내가 뭘 해줘.”

“뽀뽀 함만 해줘라.”

“….”

“용서한 겸.”

“용서할 것도 없는데 뭘….”

“하라면 그냥 해라. 씨.”

“…집에서 해.”

병원 주차장에서 할 짓은 아니다. 선재는 확신을 갖고 고개를 돌렸다. 범진은 고개 돌리는 걸 봤을 텐데도 얼굴 붙여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결국, 등이 차 문에 닿은 선재가 찝찝한 얼굴로 범진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하는 시늉만 하면 턱도 없을 거다. 사람이 얼마 없는 걸 눈으로 확인한 선재가 입술을 슬쩍 뗐다가 다시 붙였다. 뺨에 뽀뽀한 건데, 닿은 건 범진의 입술이었다. 틈을 타 얼굴을 돌린 범진의 입술이 제 입에 닿았다. 범진이 만족한 듯 히죽였다.

“….”

“야, 이것도 재밌네.”

인상을 쓴 선재가 빙 돌아서 조수석으로 갔다. 차에 오르며 입술을 닦았다. 범진은 뭐가 즐거운지 웃는 낯으로 보닛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와중에도 손가락을 들고 얼굴을 딴 데로 돌리지 말란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은 선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소리는 안 들리겠지.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준희에게 말을 걸었다.

“준희, 뭐 먹고 싶어?”

“주니… 빠앙.”

“빵 먹고 싶다고?”

“녜에.”

“…밥은 먹어야 되는데.”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범진의 눈이 계속해서 제 얼굴에만 닿아 있었다.

자꾸 쳐다봐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발그레한 뺨을 한 선재가 밥…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이에게 며칠 전부터 빵이 먹고 싶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따져 말하면 도넛. 도넛이 먹고 싶어도 집에만 있어 사 먹지 못했다. 범진에게 말을 하려다 괜한 짓인 것 같아 관두기도 몇 번. 아이에게 빵 먹고 싶다, 빵, 하고 말한 게 며칠 전이었다. 이후로도 빵 사 먹으러 가자, 준희야… 하고 말한 적도 있으니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닐까.

“주니 빵 주데요. 빠앙.”

“…준희가 먹고 싶은 거 맞아?”

“녜에…. 주니도 빠앙.”

카시트에 실어줄 때만 해도 아이의 두 눈이 분홍빛으로 번져 있었는데.

물기에 차 있긴 하지만 들떠서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 번 더 빠앙, 하는 소리에 선재의 고개가 뒤로 돌았다. 10초도 안 지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범진이 확, 씨, 하고 중얼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밥은 근처 김밥집에서 먹었다. 그때 먹었던 그 집에서였다. 준희는 또 그때처럼 김을 붙이고 식사를 했다. 선재의 손이 몇 번이나 그 입에 닿았다. 범진은 갈 데가 따로 있었는지, 저녁에 밥이나 먹자고 말을 해왔다. 지금은 준희도 힘을 많이 뺐고, 선재도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라 무리시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 뜻을 파악한 선재가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병원에서 작게 행패 부린 걸, 범진의 말처럼 용서해줘야 할 듯했다.

집에 가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빵집과 도넛 가게를 여러 곳 들렀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선재는, 범진이 욕실에 간 사이 도넛 포장을 뜯었다. 사실 너무 먹고 싶었는데.

처음 집은 도넛은 체온 때문에 설탕 코팅이 금방 녹았다. 얇은 설탕 옷이 입 안에서 사르르 깨질 때마다 범진에게 말하길 잘했다 싶었다. 범진은 금방 나가야 하는데도 선재를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잔뜩 부푼 뺨을 한 손으로 잡았다 놓길 반복했다. 맛있냐? 묻는 얼굴엔 능글거리는 미소가 가득했다.

선재는 범진이 짓궂게 구는데도 꿋꿋하게 도넛을 입에 넣었다.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기분도 좋아졌다. 그랬던 터라, 상담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줄도 몰랐었다. 범진에게 얼굴이 붙잡혀 휴대폰을 쳐다보지도 못한 선재가, 그만하란 말만 웅얼거렸다. 도넛은 그 와중에도 참 맛있고 달았다.

* * *

“간다.”

“….”

준희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는 쉬운데, 범진을 일터로 보내기는 어렵다. 간다는 소리만 몇 번을 들었는지. 선재는 이번에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범진은 아까부터 구두를 신었다가 벗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른다. 고개를 숙인 선재가 대충 발을 구겨 넣는 범진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번에는 갈까.

“뭘 쳐다보냐.”

“…뭐가.”

“니 뭐 쳐다보냐고.”

위협하듯 쏘아붙인 범진이 구두에서 발을 빼는 게 보였다. 배웅을 안 해주면 안 해준다고 난리를 치고, 이렇게 배웅을 해줘도 순조롭게 나가는 법이 없다. 선재는 안으로 들어오는 범진 때문에 뒷걸음을 쳤다.

“…왜….”

“왜? 내가 왜 같은 거 달고 다니는 놈으로 보이냐…?”

아니. 선재는 그 말을 속으로만 했다. 거리를 좁혀오는 범진을 쳐다보는데, 오늘도 일이 원하는 대로는 흘러갈 것 같지가 않았다. 더는 뒤로 피해도 소용없을 거고. 거기까지 생각한 선재가 움직임을 멈췄다. 집에서 범진이 뭘 하겠다고 달려들 때, 저는 언제나 독 안에 든 쥐다. 다가오는 범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도넛을 실컷 먹었던 날, 범진은 오랫동안 집에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확인한 장영수의 전화에도 따로 회신을 주는 게 어려웠다. 이미 한 번 흐지부지 연락을 끝내지 않았나. 괜한 일이 생길까 염려한 선재는 밤까지 그 걱정을 했다.

그 탓에 다음 날 걸려온 장영수의 전화는 기다렸다는 듯 받았다. 당장 처한 상황이 그리 최악은 아니며, 같이 사는 알파 최범진과는 합의 하에 혼인 신고를 한 게 맞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열심히 변명하면 일이 마무리될 줄 알았다.

장영수는 가정의 형태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어떤지는 저들이 판단한다고 했다. 범진의 평판이 워낙 나쁜 탓이었다. 지금 범진이 책임자로 있는 사무소도 문제가 많다는 말을 덧붙인 장영수는 범진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만 말했다. 선재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고, 대꾸는 하지 않았다. 당분간 전화를 받아달라 말하는 장영수에게 알겠단 말만 했다.

전화를 끊고 나오는데, 범진이 주방에서 식빵을 우걱우걱 씹어먹고 있는 게 보였다. 자는 걸 확인했던 터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놀란 마음이 든 건 당연했다. 선재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내밀었다. 범진을 쳐다보며 또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그 얼굴을 가만 쳐다본 범진이 반쯤 먹었던 식빵을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곤 제 입꼬리 양 끝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랬냐고. 니 이제 보고도 하네, 하고.

선재는 그제야 범진이 원래 식빵엔 입도 안 댔던 걸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린 건가? 먹지도 않던 걸 먹으면서? 범진은 그때도 아무 이유 없이 달려들었다. 쭉쭉, 귀를 빨기 시작해, 빨간 자국이 올라올 때까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이 얼마나 다를까.

신발을 신다 말고 다가온 범진에게도 이유는 없었다. 멈춰 있던 선재는 다가오는 입술에 제 입만 아, 하고 열었다.

범진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오늘 천안에 간단 말을 이틀 전부터 해온 터였다. 선재가 입을 열어주며 범진의 혀를 받았다. 이렇게 빨아 당기듯이 키스하는 날이면 범진의 스케줄도 대충 예측할 수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겠구나. 오늘 일정이야 말을 해줘서 안다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리를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스킨십의 농도도 짙어지곤 했다.

혀 위에 질척하게 올라간 범진의 혀가 구렁이처럼 입 안 여기저기를 훑고 빨았다. 혀끝이 뾰족한 느낌이라 부드러운 살에 닿을 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든다. 찌릿. 선재는 입을 벌린 채로 몸을 떨었다. 아, 하고 벌어진 입술이 타액으로 흥건해져 갔다.

똑바르던 고개가 뒤로 꺾인 건 순식간이었다. 범진이 위에서 누르듯 키스하기 시작하면, 선재는 머리가 완전히 뒤로 꺾이고 말았다. 그 힘에 눈가를 찡그린 선재가 범진의 어깨를 잡았다. 함께 꺾인 다리 때문에 범진을 잡지 않았다면 넘어질 뻔했다.

두 사람의 입 안에서 우우, 하는 소리가 퍼졌다. 이럴 때 말을 꺼내는 건 대부분 선재인데, 혀가 뒤섞인 채여서 두 사람의 뺨이 동시에 울렸다. 범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뗐다.

“왜.”

“…수움… 숨 차….”

허리를 꽉 잡고 있어, 호흡을 곤란해하는 선재의 얼굴이 범진의 시야에 적나라하게 잡히고 있었다. 매끄럽고, 붉고, 깨끗한 얼굴. 범진은 잠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제 침이 가득 묻은 선재의 입술을 보고 있을 때면 아래가 또 묵직하게 차오르곤 했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니는… 어디서 말도 하면 안 되겠다.”

“….”

“숨 못 쉬면 뭐. 어찔까.”

그 젖은 입술에, 범진이 제 입을 짧게 갖다 댔다. 쪽, 하는 짧은 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울렸다. 어? 어찌라고. 그런 말을 반복해서 하는 동안, 입술은 그 배로 닿았다 떨어졌다. 여전히 천장 보는 자세로 범진을 올려다보던 선재의 얼굴이 계속해서 찌푸려졌다. 낮인데도 주방 등을 켜둬, 선재의 두 눈엔 작고 흰 보석까지 두 알 박혀 있었다. 입술을 뗀 범진이 그 눈에도 입을 가져갔다. 언뜻 느껴진 눈동자의 촉감이 이상야릇했다.

“…알겠으니까….”

“씨이팔… 아냐? 니 이뻐 뒤지는 거?”

“….”

“아냐고.”

“…그만해.”

“…뭐?”

“그만하라고. 배 아프니까….”

선재는 여전히 위를 보는 자세로 범진의 팔을 더듬거렸다. 허리에 압박감이 들긴 했지만, 통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범진이 흥분할 것 같아 나름의 조처를 취해보았다. 범진은 지나치게 흥분하면 의도와 상관없이 선재의 입술이나 얼굴,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내곤 했다.

범진이 그 말에 뭐! 하고 호통을 치듯 대꾸했다. 싫으냐? 하며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을 더 줬다.

“그게, 아니라. 배가….”

“씹, 배 아프면 안기야겠네.”

범진도 들은 게 있고 눈치가 있다. 게다가 눈치라면 도사 수준이다. 임신으로 쇠약해진 오메가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뻔히 안다는 소리다. 선재는 어쩐지 제 덫에 제가 걸려들었단 생각이 들었다. 맨몸으로 안아주겠다는 범진이 셔츠 단추까지 뜯어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손사래를 치려던 선재가 반쯤 올렸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씨이팔. 오늘도 명줄 좆나게 짧아졌다.”

스물다섯밖에 안 된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다. 선재는 순식간에 상반신을 탈의한 범진이 뻗어오는 손에 어깨를 움츠렸다. 때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 몸이나 손이 워낙 커 위압감이 상당했다. 범진은 그대로 선재의 머리를 끌어 제 품으로 당겼다.

“어떻게 생각하냐.”

“…뭘.”

어이없다는 것 말고는 별 감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냔 범진의 말에 그런 대답을 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못 들은 체를 하는 게 나았다.

“이게 이제 말도 제대로 안 쳐 듣네.”

“못 들은 건데…. 말 좀 험하게 하지 마.”

뒷머리가 붙잡힌 채 품에 얼굴을 묻은 사람치고는 말을 잘했다. 선재는 준희처럼 뺨이 가득 눌린 채 범진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범진의 나머지 한쪽 팔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는 게 느껴졌다.

“니 맞고 싶냐.”

“….”

“맞을래?”

“…싫어.”

“어디서 좋다 싫다 하냐. 애 하나 뱄다고… 이게.”

보이는 건 식탁과 주방의 풍경뿐이다. 선재는 조금씩 움직이는 범진의 발에 제 발도 함께 떼고 있었다. 시야가 흔들릴 때마다 범진의 몸에서 나는 체향이 더욱 짙게 전달되고 있었다. 쓰고 지독한 향. 감상은 전과 다를 바 없지만, 그걸 느끼는 제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배 속에 범진의 아이가 움트고 있었고, 날이 갈수록 범진의 체향을 편하고 부드럽게 느끼고 있었다. 티 나지 않게 깊은숨을 들이쉰 선재가 천천히 그 숨을 내뱉었다.

“….”

“…팔 가만 내비두고 뭐하냐.”

냄새를 맡을수록 정신에선 깜박이는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선재는 느릿하게 눈을 감은 채로 무게중심 대부분을 범진 쪽으로 기울였다. 힘이 없었다.

“어? 뭐 하냐고.”

“…응….”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시 생각한 선재가 두 팔을 범진의 등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대충 깍지를 끼고 힘을 풀었다. 저 또한 범진을 안은 자세가 되었다.

“…근데 나 졸려서….”

“좋겠네, 씨발. 잠도 오고.”

뭐가 좋겠다는 말이야…. 선재는 흐물거리는 정신 사이로 그런 생각이 얕게 지나가는 걸 느꼈다. 키스할 때까지만 해도 정신이 또렷했는데, 범진의 체향을 너무 많이 맡은 바람에 몸이 순식간에 풀어지고 있었다. 편안하지만, 졸음 자체는 무거운 돌덩이 같았다. 점점 가라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범진은 그 뒤로 뭐라뭐라 욕을 더 했다. 자긴 물속에서 눈 뜨고 있는 것 같은데 니는 잠이 쳐오냐는 말을 했던 것 같다.

* * *

일부러 진동으로 해놓은 휴대폰이 요란한 마찰음을 내는 게 들렸다. 선재가 눈을 떠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네….”

아침마다 장영수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처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굳이 준희가 있는 방까지는 안 가게 되었단 것이다. 선재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이불을 걷었다. 배 위에 올라가 있던 범진의 팔을 걷어낸 뒤, 몸을 일으켰다. 질문은 늘 비슷했다.

법적 남편이 폭행을 하진 않는지.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는지. 기타 어떤 상황에서든 일말의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는지.

선재는 한쪽 손바닥을 눈두덩에 갖다 댄 채 입을 열었다.

“아뇨… 안 때려요. 그렇게 안 합니다. 네.”

“맞을 짓은 한다고 말해라.”

언제 깼는지, 범진이 뒤쪽에서 쩍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선재가 휴대폰을 다른 귀에 갖다 대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최범진 씨인가요? 하는 소리가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뇨… 아, 맞긴 맞는데요. 그냥 장난, 장난한 겁니다.”

장난이라고 하면 믿으려나. 선재는 말하면서도 통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몇 가지 질문을 더 들었고, 범진이 완전히 깨어나 씨이발, 하는 소리를 낼 때까지도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니 남편이라드냐?”

그새 다가온 범진은 속옷 한 장만 대충 걸친 채였다. 원래의 의미를 잃은 듯, 속옷은 아침부터 솟은 성기를 반쯤 뱉어내고 있었다. 사람이 부끄러움 같은 게 전혀 없다. 전화를 끊고 범진의 얼굴을 살핀 선재가 눈을 곧 거실 창 쪽으로 두었다. 그러면서 범진을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법적으로… 그렇게 돼 있으니까.”

선재는 범진에게 눈길도 안 주고 말을 이었다. 주방을 크게 돌아 정수기 앞에 도착해서야 범진의 얼굴을 슬쩍 봤다.

“내가 법을 그래서 좋아한다.”

“….”

지키는 거 하나 없으면서 말은 잘했다. 심지어 처음 하는 말도 아니다. 딴에는 정말 진심인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선재가 유리컵에 냉수를 가득 담았다. 범진이 아침에도 냉수만 마시는 걸 알기도 했지만, 냉수 마시고 속 차리란 의미도 있었다. 뜻을 모르는 범진만 선재가 건넨 물에 만족한 얼굴을 해 보였다. 서방이라서 잘해주는 거냐 놀리는 말도 했다. 끝까지 장난에 화답하지 않은 선재가 그런 범진을 남겨두고 방 안으로 향했다. 시간이 이렇게 간 줄은 몰랐다.

“우움… 주니… 곤도리….”

“준희야.”

“녜에….”

문을 열자마자 곰돌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눈도 안 뜬 채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젓고 있었다.

“준희 뭐해.”

“곤도리….”

잠잘 때도 고이 자는 터라, 가슴팍까지 덮인 이불이 어젯밤 그대로였다.

“눈을 떠야 곰돌이를 보는데.”

“으으응… 주니… 곤도리….”

“많이 졸려?”

“녜에에….”

“계속 자고 싶어?”

“으으응… 곤도리 보러….”

파르르 떨리던 준희의 속눈썹이 이내 위쪽으로 올라갔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유독 까맸다. 작은 돌을 깊이 떨어트려 놓은 듯한 두 눈.

“나가도 돼? 업어줄까.”

“네에… 바앙 먹으러….”

빵을 말하는지 밥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아침이라 발음이 더 모호해진 듯했다. 선재가 준희의 작은 몸을 등에 업고 상체를 숙였다. 많이 작은 아이라 완전히 업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었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땐 또 너무 작았다. 밖으로 나온 선재가 아이를 최대한 조심해서 식탁 의자에 앉혔다. 돌아서서 냉장고로 가려는데 곰돌이 보러 간다, 하고 들뜬 아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침부터 곰돌이, 곰돌이, 하는 이유는 오늘 있을 인형극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인형극 시간. 주로 주인공을 맡는다는 곰돌이가 준희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주니… 바압. 방.”

“응, 준희 밥이지.”

작은 식판에 두부와 김, 밥과 뭇국을 담아주자 대번에 제 밥이라는 걸 안다.

한 입 먹는 걸 쳐다본 선재가 아이 옷을 가지러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

드레스룸 바로 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건 범진 때문이었다.

원래도 방해하고, 장난하는 걸 좋아하지만 아침 시간엔 더했다.

“비켜.”

비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선재는 결국 샐샐 웃기만 하는 범진에게 뽀뽀를 해주고야 통행권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신경에 거슬리는데 불쑥 나타나 방해까지 하니 좀 괴로운 게 아니었다. 미간을 좁힌 선재가 드레스룸 옷장 위에 두었던 멜빵바지와 흰 면티 한 장을 손에 들었다. 범진은 뭐가 재밌는지 그러는 동안에도 뒤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구겨 넣었는지 성기는 드로어즈 안에 간신히 들어간 것 같았다.

팔을 뻗어 수건을 한 장 집은 선재가 그걸 범진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화려한 문신을 기다란 수건으로 가려주었다.

수건 차림이 된 범진은 그러고 집 안 여기저기를 활보했다. 옷을 입으면 될 걸 왜 저러고 돌아다니는지. 선재는 준희의 옷을 입혀 주면서도 시선 끝에 걸리는 범진을 계속 의식했다.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준희만 아부지, 하고 범진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앞에서 작은 양말을 신겨 주던 선재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앵기고 싶냐. 하고 건들거리며 다가온 범진에게 준희는 네에, 네에, 하고 손을 뻗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 통하는 게 의아했다. 범진과 준희로부터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선재가 시계만 살폈다. 이제 가야 돼. 3분 정도 지나 그렇게 말했고, 범진은 그제야 준희를 바닥에 내려 줬다.

“준희는 아저씨한테 안기면 그렇게 좋아?”

“네에.”

유독 들뜨게 와닿는 목소리였다.

선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도 준희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아이는 오늘 곰돌이를 봐서도, 범진에게 아침에 안겨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피스텔 입구를 통과한 뒤엔 먼저 인도 끝으로 가 버스를 기다렸다.

“거기서 버스 오는 거 알아?”

“녜에…!”

“똑똑하다. 우리 아기.”

똑똑하다고 준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선재가 작게 웃었다.

이제 차만 오면 된다.

1분이나 갔을까.

인도 끝에 서 있던 선재가 준희를 내려다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편의점 후문에 서 있던 남자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올 때는 사람이 있다고만 의식했지, 딱히 시선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남자는 폭탄 맞은 듯한 머리를 하고 있었고, 얼굴이 지저분했다. 걸친 옷도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남자가 거리를 점점 좁혀오는 것 같자,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고 오피스텔 건물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쪽으로 걸어가려 방향을 틀었다.

“주니이… 잉….”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선재는 준희의 손을 꼭 잡고, 아이가 하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준희야. 하고 건물 유리문 쪽으로 향했다. 아이는 겁이라도 먹었는지, 손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다. 다가오는 남자 쪽을 더는 쳐다보지 않은 선재가, 제 손 안에 들어온 작은 손으로 분위기를 파악하려 했다.

“으응… 시러… 시러요.”

준희가 싫다고 했던 사람들은 나쁜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머리에 작은 번개가 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골에서의 일도 단번에 떠올랐다. 준희가 싫다고 했던 사람들. 애써 남자 쪽은 의식하지 않은 선재가 유리문 앞까지 겨우 도달했다. 지문 인식기에 손을 대려던 찰나,

“형….”

“….”

“형 저예요….”

“….”

억지로 잊었던 사람들의 목소리. 선재는 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잊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준희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들린 목소리 앞에선 그 의지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미간이 조여들었고, 앞으로 내밀었던 손에서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고개를 옆쪽으로 돌린 선재가 추레한 행색의 남자를 쳐다봤다.

“….”

“…아, 사는, 사는 거 여기서… 알고 있었는데, 제가.”

“….”

겉모습이 멀쩡했다면, 다짜고짜 따질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병든 닭보다도 못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어 차마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몇 달은 감지 않은 듯한 머리가 위쪽을 향해 성가시게 솟아 있었다. 그 머리에 눈길을 준 선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사과, 사과하려고요. 죄송하다고. 죄송….”

어떻게 잊을까. 남자는 백성우였다. 저와 준희를 강원도로 내몬 남자. 개들에게 잡아 먹히라 저를 그곳에 보낸 남자. 선재는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백성우… 얼굴은 때와 상처, 그을음 같은 것 때문에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분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선재는 침을 삼키고 준희를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울먹이는 아이의 소리가 괜한 자극으로 남자에게 닿을 것 같았다.

“…아기… 예… 예쁘, 예쁘네요….”

“…어떻게 알고 온 지는 모르겠지만….”

“네, 네.”

백성우는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씩 반복했다. 단어 선택이 어려운지 말하는 도중에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사과, 받을 것도 없고.”

“아기, 아기가.”

“….”

“아기가, 그때보다, 훨씬 자라…서, 예쁜….”

왜일까. 말이 통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선재는 네, 라고 하며 말을 들어줄 것 같던 백성우가 전혀 다른 소리를 시작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준희에게 꽂힌 백성우의 시선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선재는 아이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고, 그 타이밍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사과, 받아줄 테니까.”

“하, 한 번만 안아보면… 제, 제 조… 조….”

조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선재는 덜덜 떨리는 백성우의 입을 쳐다보다 손을 옆으로 뻗었다. 얼마 전에 경비실에서 지문 등록을 해, 굳이 번거로운 과정 없이도 정문 출입이 가능하게 해놓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둘 늘고 있었지만, 남들 일엔 하나같이 관심이 없었다. 선재도 이렇다 할 피해를 입은 입장은 아니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최선책으로 느껴졌다. 말이 통하면 말을 해보겠는데, 초점을 잃어버린 눈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 센서에 손을 대자 유리문은 빠르게 열렸다.

“다신… 안 왔으면 좋겠네. 준희, 네 조카….”

조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끝까지 해야 했는데.

선재는 갑자기 휙, 하고 한기가 이는 느낌에 말을 멈췄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쳐다보는 백성우가 보였다. 저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땐 고개를 전혀 들지 않았는데, 시선을 위로 들고 뭔갈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준희가 아부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선재의 눈도 뒤쪽을 향했다. 범진이 준희를 대충 안아 들고, 싸늘한 눈으로 백성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개, 개, 개, 개….”

말을 먼저 꺼낸 건 백성우였다. 선재는 일을 치면 범진이 먼저 칠 거라 생각했다. 앞뒤 안 따지고 달려드는 게 범진의 특기이기도 했으니. 허나 질린 얼굴의 백성우가 먼저 입을 열었고, 개…로 시작한 단어는 끝맺음도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개, 개.”

“개, 뭐. 이 새끼야.”

“준희 있잖아. 하지 마.”

선재도 인간이었다. 백성우에게 화가 나는 건 물론이고, 그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범진의 품에 준희가 안겨 있어, 소란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았다. 언제 온 건지, 차도에 커다랗고 귀여운 무늬가 그려진 버스가 한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이를 범진에게서 뺏어오듯 안은 선재가 열린 유리문 바깥을 가만 쳐다봤다.

어린이집 이름이 크게 쓰인 버스에 아이를 태워도 되는 것일까. 선재는 혹시 백성우가 어린이집 이름을 외울까 건물 안쪽으로 비켜서 섰다. 두리번거리던 선생님이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갔으면 했다.

개새끼이!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선재는 준희를 안은 채, 오피스텔 1층 끝에 있는 경비실로 냅다 걸었다. 범진이 백성우를 어떻게 한 건가. 그래서 백성우가 지금 저런 상태가 되어…. 정신없이 걸어가면서도 난잡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저는 모르는 일을 상상하느라 머리가 터져나갈 듯했다.

범진이 있으니 물리적인 해를 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광경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둘은 금방 쌈박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준희에게 이미 욕설을 들려준 뒤였다. 마음이 무거웠다.

선재는 경비실에 도착해, 아이를 잠깐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정문 쪽으로 뛰어갔다.

정문엔 아무도 없었다. 그치만 바깥에서 웅성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이 일어났음은 알 수 있었다.

유리문 밖으로 나간 선재가 이미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뒤질라고 왔냐.”

퍽, 범진의 주먹이 백성우의 얼굴에 꽂히는 소리였다. 다가가던 선재가 잠깐 주춤했지만 이내 범진의 한쪽 팔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살려주면서, 씨발, 눈에 띄지 말라고, 말을 썅, 어, 이 씹창놈이.”

선재의 발이 범진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질질 앞으로 끌려갔다. 범진은 지금 그야말로 뵈는 거 하나 없는 상태였다.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목엔 핏대가 서 있었고 붉기까지 했다. 때릴 때마다 한마디씩 보태니, 말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선재가 한 번 더 범진의 팔에 매달렸다.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 그만해.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범진이 주먹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하지 말라는 선재를 의아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니 정신병자냐.”

“….”

“나와라. 좋게 말할 때.”

“내가 괜찮아.”

“…치워라.”

범진이 귀찮다는 듯 팔을 걷어내자, 선재가 다시 한 걸음 밀려났다. 지나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이고 있었다. 이미 피범벅이 된 백성우의 얼굴에 눈길을 보낸 선재가 또 한 번 악착같이 붙었다. 그리곤 고함을 쳤다.

“내가 괜찮다고! 내가! 나한테 볼일 있는 사람한테 네가 왜!”

“….”

“왜 그러는데! 왜…!”

그때야, 범진이 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일을 이렇게 만드는지, 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선재는 인도에 주저앉았다. 힘이 쭉 빠지고,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야… 씨발.”

“내가 괜찮다고…. 내가…! 내가! 으… 으…어….”

어쩌면 일을 더 크게 벌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닐까. 선재는 그런 마음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음에도, 목 끝까지 찬 감정을 더는 삼킬 수가 없었다. 줄줄 나는 줄도 몰랐던 눈물이 뻥 하고 터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마음에 쌓였던 댐이 무너지고, 저도 그 마음에 갇히게 된 것 같았다. 선재는 눈을 감고 엉엉 울었다. 흉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었다.

준희의 아버지가 죽은 것, 그의 동생의 제안에 의심 없이 강원도로 갔던 것, 거기서 개들의 제물이 될 뻔하고, 범진을 만난 것….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섹스하고 키스한 것, 죽을 뻔한 것,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준희를 아프게 한 것, 그 비 내리는 시골 동네를 아이 혼자 걷게 만든 것…. 선재는 소낙비를 맞고 있는 아이처럼, 쌀쌀한 어느 가을날 주저앉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백성우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남은 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자신뿐이었다.

“야, 일어나라.”

“흐으… 으….”

“그만할 거니까 일나라. 어디 길바닥에 궁디를 대고 처앉고….”

범진이 제 팔을 함부로 잡아 드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범진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범진이 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시야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대충 봐도 열은 넘어 보였다. 슬슬 몸을 일으키는 백성우도 보였고, 길바닥에 흩뿌려진 핏물도 차례로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닿은 손.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아프도록 때리기 시작했다.

선재는 슬프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범진이 엉덩이를 쳐 표정을 찌푸렸다. 퍽, 퍽, 하고 앞으로 밀려나는데도 범진은 그만둘 생각을 않았다.

“이 씹팔, 흙 다 처묻었네.”

백성우가 골로 가기 일보 직전인 얼굴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범진의 얼굴은 멀쩡했다. 팔다리도 괜찮아 보였다. 선재는 제 엉덩이를 터는 무식한 손길에 손을 뒤로 가져갔다.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그만하라고 말했다.

“씨바꺼, 그러고 질질 짜믄 누가 상이라도 주냐.”

“알겠, 으니까….”

“맨날 처알겠단다. 니가 아는 게 뭔데.”

엉덩이를 몇 번 털리자, 서글픈 생각도 쏙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범진은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범진과 함께 있으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되려 했다. 선재는 코피가 흘러 턱 전체가 젖은 백성우의 얼굴을 흘끔 바라봤다. 퍽, 하고 엉덩이에 마지막으로 닿은 손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결이 다른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왔다.

“씨발아. 뭘 보는데?”

범진이 주변에 서 있던 남자 무리를 향해 손날을 허공으로 들었다.

뒤이어 들린 눈깔 갈리고 싶냔 말은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남자 무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범진의 눈치를 보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파라솔 앞으로 나와 구경하던 편의점 직원도 헛기침을 하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선재는 손등으로 눈가를 세게 비볐다. 바닥엔, 범진의 말처럼 흙이 가득했다. 게다가 군데군데 젖어 있어 잠시만 스쳐도 지저분해질 듯했다. 그래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선재는 이제 그런 생각도 했다. 범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고개를 숙인 채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백성우의 모습도 살폈다.

“…병원… 일단은.”

많은 걸 묻거나 부탁하진 않았다. 선재는 우선, 백성우가 누구든 길거리에서 사람을 저렇게 두면 안 된다는 판단만 내렸다. 몇 년 동안 괴롭힌 것도 모자라, 결국 저를 팔기까지 했지만, 이성적인 대처가 필요했다. 선재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병원 이야기를 했다.

범진은 허리에 손을 댄 채 침을 퉤, 뱉었다. 백성우를 병원으로 보내자는 선재의 말이 어이는 없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나 잠시 감상하기로 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눈물은 이내 후드득 떨어졌다. 아까웠다. 이미 허옇게 올라온 자국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아까웠다. 빨아주고 싶다.

선재는 갑자기 제 뺨에 닿아오는 범진의 입에 두 눈을 감았다. 차갑게 젖은 볼이 진득하게 빨렸다. 입이 벌어진 채 닿아선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추읍, 하다가 뾱, 하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얼굴에서 났다. 인상을 쓴 선재가 제 손을 들어 눈을 닦았다.

울음이 갑자기 터진 탓에, 목에 어린 물기가 쉽게 마르지 않았다.

* * *

범진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앰뷸런스를 부르기도 전에 주변을 지나던 순찰차가 범진과 선재를, 뒤이어 백성우를 발견했다. 같이 서에 가려고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만류했다.

이 사람이 먼저 잘못한 게 아닙니다. 도가 넘은 범진의 폭행에 선재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제복도 있었지만, 평상복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선재는 그게 다 누구인지 몰랐다.

범진만 조사를 받으면 된다고 말하는 여자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계속 통화를 해오던 장영수였다. 경찰 연락을 받고 왔다는 그녀가, 선재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은 채 멀어지는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간다고, 씨발, 하며 두 팔을 휘둘렀다. 결국, 수갑까지 찬 채로 멀어졌지만, 뒷모습은 누구보다도 컸다.

선재는 준희와 봉고차 하나를 탔고, 역방향으로 앉은 장영수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장영수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고 말하며 준희의 뺨을 손으로 쓸려고 했다. 준희는 낯선 사람이 저를 만져서인지 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 선재가 그런 준희의 어깨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했다.

도착한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공호수였다. 그걸 중심으로 평범하고 작은 빌라 건물이 몇 채나 자리해 있었다. 외관은 브라운 톤이고, 층수는 4층이나 5층 정도로 높이들이 미세하게 달랐다.

장영수가 앞장서 향한 곳도 그 빌라였다. 사무실도 있는지, 문을 열자마자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선재는 갈색 소파에 준희를 먼저 앉힌 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었다. 그때까지도 선재의 얼굴은 초라했다. 운 자국이 가득 남았고, 꽤 차가워진 바람까지 맞아 표면도 거칠었다.

장영수가 내민 소책자는 시설에 관한 소개가 주된 내용이었다. 3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오메가에 한해 일정 요금을 받고 생활실을 제공해준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선재는 관할부의 감시 대상이라 따로 요금을 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장영수는 이렇게 피해를 본 오메가의 구제가 목적이니, 같은 말을 했다. 선재는 피해를 받긴 받았지만…. 뭐라 말하기 애매한 입장이기도 했다. 범진은….

자꾸 범진 생각이 났다.

‘선재 씨, 그 사람 좋아서 결혼한 거 확실해요?’

좋아서? 범진이 좋아서? 선재는 범진을 좋아해서 혼인 신고까지 한 게 아니었다. 준희를 위해서만 그 서류에 사인을 했다. 바로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하려니 입이 말랐다. 대답이 늦춰지자, 장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자세한 건 묻지 않겠다고 했다.

‘조사가 끝나도 최범진 씨와는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면회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건 저희 쪽 동의도 필요한 일입니다.’

면회에… 그것도 동의가 필요하고…. 선재는 가까스로 그 말을 머리에 입력했다. 듣는 내내 현실감이 없어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영수는 아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단 말을 덧붙였다. 제가 혼자라면 기관의 동의까지 얻을 필요는 없지만, 아이가 있는 경우라면 말이 다르다고 했다. 강제성을 띠는 조처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집에도 못 가는 건가요.’

‘웬만한 거 다 제공되니까, 굳이 안 가셔도 괜찮을 거예요.’

선재는 언젠가 돌아갈 집, 이라는 의미로 질문한 거지만 장영수는 그 집에서 짐을 가져오겠단 의미로 알아들은 듯했다. 말을 고쳐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장영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이제 가자고 말했고,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고 먼저 나가는 장영수를 뒤따라 걸었다.

시설은 깨끗하고 넓었다. 가운데 거대한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여러 개 나누어져 있었고, 선재가 배정받은 방은 108호. 커다란 침대와 장롱, TV가 우선 눈에 띄었다. 신축 건물답게 화장실도 깔끔했다. 원룸이긴 했지만 생활하기엔 적당할 듯싶었다.

선재는 그래도 창문 앞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강제 분리가 될 줄이야.

그 폭행 사건도 전적으로 범진이 저질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선재는 다시 원흉이 되어버린 백성우의 얼굴을 떠올리다 벽 앞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 * *

시설에 입소한 후로 선재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나쁜 꿈을 종종 꾸긴 했지만, 정도와 몰입도가 차원이 달랐다. 여건이 괜찮은 시설에 들어왔는데도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더 악화만 되었다. 심지어 깨워줄 사람도 곁에 없으니, 선재는 새벽에 질린 듯이 깨어나면 다시 잠들기 힘들어했다. 해가 밝을 때까지 방 안을 돌아다닐 때가 있었고, 범진의 옷까지 없어 심한 입덧에도 시달려야 했다.

“맘마 주니가 주께요….”

시설에 들어온 지도 나흘이 지났다. 원래는 2층으로 올라가 밥을 먹어야 하지만, 아픈 오메가에 한해 죽이나 간단한 요깃거리가 따로 배달이 돼오곤 했다. 선재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봉사자를 향해 눈으로만 인사했다.

“오, 준희가 직접 받게?”

“네에.”

잠옷 차림의 아이가 죽과 도시락을 받아드는 게 보였다. 선재는 이불을 배까지만 덮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봉사자와 준희가 뭐라고 말을 나누는 것도 반은 들렸고, 반은 안 들렸다. 상태가 어제보다도 좋지 않았다. 둘째 날부터 급격하게 안 좋아진 몸 상태는 회복의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선재 씨. 좀 괜찮아요?”

“…좀 어지럽네요.”

“오늘도 병원 갈까요?”

가까운 곳에 협력 병원이 있어 병원을 방문하기는 쉬웠다. 허나 어제도 다녀왔고, 링거를 맞은 그 잠시만 몸이 조금 나아졌었다. 어째 더 안 좋아진 몸 상태를 느낀 선재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 좀만….”

“네. 일단 식사하시고 말씀해주세요.”

“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선재는 뒤돌아 나간 봉사자를 쳐다보다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배는 두 손을 포갠 정도로만 나와 있는 상태였다. 아직 몸이 무거울 때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에 부치나 몰랐다. 준희가 그사이에 침대를 타고 위로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보였다.

“준희 왜 자꾸 돌아다니고…. 아침에도 빨리 깼으면서.”

“…주니가 맘마 주께요… 주니가.”

“아냐. 아빠 혼자 먹을 수 있어. 준희는 준희 밥 먹어야지.”

“주니 바압….”

몽롱한 정신에도, 아찔한 기분은 느낄 수 있었다. 아까도 봉사자가 장난하듯 내민 도시락과 죽 용기가 준희를 향해 쏟아지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임을 알면서도 생각은 가차 없이 스쳤다.

준희와 연관된 악몽을 계속 꿔왔기 때문이었다. 깨어나면 다시 꾸고, 억지로 깨어나도 또 그런 악몽을 꾸곤 했다. 아프고, 다치고, 세상에 없는 준희 꿈을 자꾸만 반복해서 꿨다. 선재는 오늘 새벽엔 잠자는 걸 아예 포기하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해가 뜰 즈음에 잠든 탓에, 아직까지도 정신이 없고 어지러웠다.

“준희 맛있어?”

“녜에에… 맘마….”

봉사자가 베드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세팅해주고 가, 준희의 작은 그릇에 그걸 담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아이는 그릇에 담긴 전복죽을 잘도 떠서 먹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아이용품도 다양하게 구비가 돼 있었다. 준희는 작은 숟가락을 입 안에 야무지게 넣었다. 그리곤 선재를 향해 한 숟갈 떠서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번째일까. 선재는 준희 때문에 웃었다. 준희 먹으라니까… 하고 말한 선재는 그제야 제 몫의 음식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욱….”

죽은 좀 괜찮은 것 같았는데. 갑작스러운 구역감에 선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준희에게 담아주거나 아이가 먹는 걸 보고 있을 땐 괜찮았는데, 물컹거리는 죽이 몸에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위도 아프고 배도 아팠다. 선재는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베드 테이블을 정리했다.

이불을 덮고 눕자, 아이가 팔 한쪽을 잡고 저를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아야… 아야 하면 주니도 아야….”

“응. 안 아파.”

“아야 하면 주니가….”

“괜찮아. 준희야. 아빠 안 아파.”

선재는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의 뺨에 제 손을 갖다 댔다. 적당히 따뜻한 체온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준희는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야, 아야, 하는 말을 반복하다 눈물까지 보였다. 준희도 아픈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 제가 그만큼 아플 거라 생각해 슬퍼하는 것 같았다.

준희가 아팠을 땐, 범진이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었다.

뭐든 집에 있는 것보단 낫다고, 그런 말을 하며 다짜고짜 앞장을 섰었다.

그때 보았던 길과 불빛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선재는 까마득한 길을 내달리는 범진의 차 안에서 오직 세 사람만 세상에 남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흰 가로등 불빛과 꺼진 조명, 검은 차도. 아이의 울먹임. 범진이 없었다면 덩달아 정신이 혼미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집에서 이미 넋이 나간 채 준희를 안고 있었겠지. 선재는 저라면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한심하고, 나약한 인간. 그게 자신이니까.

범진은 제 어디가 좋아서….

거기까지 생각하던 선재는 침을 삼켰다. 이어지던 생각이 걸림돌에 턱, 하고 걸린 느낌이었다. 몸이 피곤하고 아파서 일단은 좀 더 자야 할 듯했다. 선재는 하던 생각을 관두고 준희의 작은 어깨를 안았다. 순한 비누 냄새가 나는 아이를 곁에 두고 다시 아침잠에 빠져들었다.

똑똑.

깨어나 시계부터 쳐다보자 벌써 12시가 되어 있었다. 선재는 그와 동시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기울였다. 욕실을 감싼 벽에 막혀 눈으로는 문짝을 볼 수가 없었다. 다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자 선재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이는 언제 깨었는지 모로 누워 저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준희 언제 일어났어….”

“주니 일어났써.”

“깨우지….”

중얼거리듯 말한 선재가 고개를 들었다. 욕실 쪽 벽을 지나쳐 모습을 보인 건 장영수였다.

“선재 씨, 몸은 어때요.”

“…어제랑 비슷한 것 같아요.”

“오늘은 병원 안 가신다고….”

“네. 링거 맞을 때만 좀 괜찮아서요. 나중에 더 아프기도 하고….”

선재의 말에 장영수도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그… 선재 씨가 부탁하신.”

그 말에 선재의 눈이 처음으로 빛났다. 병원을 다녀온 뒤 부탁했었는데. 선재는 시설에 계속 상주하지 않는 장영수와 전화로 연락할 때가 많았다. 몸이 아프면 준희도 기가 죽은 듯한 얼굴을 하곤 했다. 제가 아픈 건 감당할 수 있지만, 아이에게까지 피해를 줄 순 없었다.

선재는 범진과 면회를 하게 해달라고 직접 부탁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범진이 필요했다. 그게 안 되면 옷이라도 구해줄 수 없냐는 말까지 했었다. 장영수는 선재의 말에 한동안 뜸을 들였고,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니 기다려달란 말만 했다.

전화를 끊고도 범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재는 범진이 걱정되었다. 이틀이 지날 때까진 연락도 없었다. 선재도 연락할 수 없었다. 범진의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조사라든지, 통제라든지가 엄격히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는데.

선재는 범진의 행방이 궁금해,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졌다. 만약 험한 꼴을 보게 된다면, 그건 저 때문이 아닌가. 범진은 저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 폭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다. 폭력적인 사람인 건 맞지만, 이번 일은 그것과는 무관했다. 그건 분명했다.

“면회일. 내일로 잡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저희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는 아시죠. 이렇게 어린아이도 있고.”

“네.”

“선재 씨가 확답을 내려주신 적도 없잖아요. 그쵸? 실제로 최범진 씨가 많이 위험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볼게요. 선재 씨는 회복에만 초점을 맞춰주시고.”

얇은 이불을 덮고 있어, 조금 부푼 배도 티가 나고 있었다.

장영수가 그 배와 선재의 눈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새끼 코알라처럼 딱 붙은 준희에게도 눈길을 던졌다.

“우리 애기는… 같이 사는 사람 좋았을까? 무서운 아저씨.”

선재는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장영수의 속내를 잘 알았다. 며칠간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아이의 대답도 비슷했다.

“주니 아부지… 조아요… 주니가 사란해….”

오늘은 사랑한단 말까지 하고 있었다. 선재의 눈썹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처음엔 질문도 잘 못 알아들었는데, 점차 좋아요, 좋아, 하더니 오늘은….

선재가 고개를 돌려 준희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장영수에게 향해있던 눈을 선재를 향해 들었다. 아, 소리가 나게 웃었다. 작고 가지런한 치아가 예뻐서.

선재는 한참이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많이 어지러웠는데, 그 순간만큼은 좀 나았다.

헛기침을 하던 장영수가 그럼 저는, 하고 운을 뗐다. 그녀는 상세 일정을 저녁 즈음에 알려주겠다 했다.

그래도 아버지 노릇은 했나 보네요. 하고 덧붙이는 소리를 들었다. 선재는 대답을 구하듯 저를 쳐다보는 장영수의 눈빛을 애써 피했다. 네, 하고 작게 대답하고 말았다. 품에 안긴 준희는 이후에도 계속 아부지, 아부지, 했다. 며칠째 못 봐선지 아이도 시무룩해진 게 눈에 보였다.

범진과는 어제부터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범진은 양일 진행된 조사 때문에 살이 1kg은 빠진 것 같다고 했다. 선재는 1kg은 원래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건넸다가, 범진의 니 많이 컸다 하는 말을 혹 붙이듯 들었다. 더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리가 어지러워 더는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범진이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야, 뭐 하냐.]

“응.”

[뭐 하냐고. 뭐 하냐는데 응이 뭐냐. 응이.]

“…아, 밥 먹으러. 이제.”

시계를 보니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장영수가 나간 후 준희를 품에 안고 TV를 좀 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선재의 눈이 준희에게로 향했다. 아이는 제 품에 안겨 손가락만 지루하게 꼼지락대고 있었던 것 같았다.

[2신데 밥을 여태 주냐.]

“어. 시간 상관없어.”

[좋네.]

“응.”

[니 거서 살면 편하겠다?]

“…응.”

[편하냐?]

“다 챙겨 주니까… 사람들도 친절하고, 환경도 좋아서.”

[그래?]

“응.”

[…아픈 거는.]

“괜찮아.”

[괜찮기는. 씹. 니 몸 안 좋아서 내일 면회도 하는 거라드만.]

“그냥, 집에서… 그랬던 정도로….”

[지금 니 어디 있는지 아는데.]

선재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다.

[가지는 않을 거다. 지금 가면 내 바로 깜빵행이그든.]

범진은 니 진짜 못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참는다고 했다. 몇 번이나 입을 벌렸던 선재가 뒤늦게 소리를 냈다.

“그래. 내일 보면 되니까.”

태연하게 말했다.

왜 마음이 싱숭생숭할까?

선재는 전화를 끊고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옆에서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잠이 든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야 밤에 잠을 설쳤고, 임산부다 보니 잠이 많아진 탓도 있다지만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서. 투정 한 번 안 부린 아이가 불쌍했다. 잠이 안 와도 품에 가만히 안겨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있었을 아이. 마음이 심란했다.

준희 때문에도, 범진 때문에도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았다.

백성우가 찾아왔었던 그 날이 마지막 가을날이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창밖은 낮에도 싸늘했다. 실내야 땀이 날 정도로 따뜻하지만.

선재는 준희의 작은 어깨뼈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준희야, 하고 이름 불렀다.

아이는 억지로 잠들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잠결에 주니 아부, 하고 중얼거렸다.

약을 먹으면 후에 좀 더 아프긴 하지만, 당장은 증상이 가라앉곤 한다. 옆에 있던 약통에 손을 댄 선재가 따라 놓았던 물과 함께 그걸 삼켰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밥이라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식당이나 주변 구경 한 번 못 해본 아이에게 약간의 즐거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겨울도 곧인가 보았다. 선재는 겉옷을 입지 않고 나갔다가 아이와 다시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예상보다 더 쌀쌀했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제공해준 아우터를 입고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준희에게 제공된 옷은 너무 컸다. 푹 파묻혀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건물 앞을 거니는 내내, 준희의 목에 선재의 손이 닿았다. 네에? 하고 주변을 살피는 아이의 목이 따가울 것 같았다.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몸무게도 덜 나간다. 오메가 아이인 걸 몰랐는지. 옷이 또래 베타 아이 사이즈인 것 같았다. 선재는 준희가 신경 쓰여 바깥을 오래 걷지 못했다.

결국, 또 방으로 돌아왔고, 겉옷은 원래 있던 자리에 걸리게 되었다.

선재는 몇 분 뒤, 아이 손을 잡고 2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길을 잠깐 걸으면서 생각한 건데, 날이 풀리면 호수 구경은 꼭 시켜줘야겠다 싶었다. 근처의 작은 분수와 나무를 언뜻 보았지만, 아이가 좋아할 거라는 확신은 든 참이었다.

2층 식당에서 쳐다봐도 그 주변은 아름다웠다.

선재는 아이가 먹을 계란찜과 고구마, 버섯조림, 찜닭을 접시에 담아와 창가에 앉았다. 검은 쌀이 섞인 밥도 그릇에 퍼 가져왔다.

따로 보온을 시키는지 음식은 아직도 따뜻했다. 간장으로 졸인 찜닭 살을 젓가락으로 바르는 동안, 준희는 바깥을 쳐다봤다. 선재는 그게 호수라고 가르쳐 주었다.

“준희가 보고 있는 거 호수야. 호수.”

“호수우….”

“응. 날씨 좀 따뜻해지면 구경시켜줄게.”

“네에.”

“준희 하루종일 잠만 자고. 미안해.”

“녜!”

아이는 갑자기 들뜬 목소리를 냈다. 호수 근처에서 솟은 물기둥을 보고 그런 반응을 한 것 같았다. 밥에 찜닭 살을 올린 선재가 아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기분 좋아?”

“녜에, 아압.”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밥을 받아먹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찜닭은 딱 아이가 좋아할 정도로 달고 간간했다. 선재도 밥과 찜닭을 입에 조금 넣었다. 맛이 좋았다. 계란찜도 촉촉하고, 색이 노란 것이 보기에도 좋았다. 약을 먹는 게 확실히 낫나. 어제는 잠깐 괜찮다 말았는데.

선재는 좀 전까지 범진과 통화했던 걸 떠올리며 고구마에도 손을 가져갔다.

호박색 속살이 결을 드러내며 찢어졌다. 범진도 고구마나 감자는 잘 먹는데. 아이도 제가 건넨 고구마를 한입에 와앙 넣었다. 뜨거운 걸 잘 못 먹어 몇 번이나 입으로 후후 불어주어야 했다. 준희는 저를 따라 후,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원래는 ‘우’하는 소리만 냈었는데 제법이었다. 아이가 우, 하는 소리를 내던 날도 범진과 함께 있었지. 그날 먹은 양념갈비 맛이 좋았던 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선재는 고기를 떠올리다 입맛을 다셨다. 고기라면 더 역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맛이 돌았다.

…아무래도 돌아가야겠지.

선재는 준희와 범진이 제멋대로 얽혀드는 머릿속을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돌아가야겠다니. 생각이 저를 두고 혼자 떠나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제 생각인데도 제가 따라잡기가 곤란했다.

범진이 내일 오기 때문일까.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 갈비집에 가자고 말해야 할 듯했다.

외출도 두 시간 안에만 돌아오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니 밥을 먹고 오면 금방일 것이다.

그러려면 여기가 어딘지가 중요한데…. 여긴 어디쯤일까?

선재는 이곳의 주소를 자세히 몰랐다. 그래서 맨 처음, 범진이 주소를 묻는 말에도 정확히 대답해주지 못했다. 범진은 대답 없는 선재에게 말해주기 싫으냐 물었었다. 선재는 어차피 오면 큰일이 난다고 말했지만, 알고 있었는데도 주소를 숨긴 적은 없었다.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님을,

그 정도는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엔 케이크를 사야지.

아이에게 자주 먹이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 케이크 하나라도 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범진은 제가 먹고 싶어 하는 건 뭐든 사주었다. 임신을 해서가 아니고, 원래 그랬다. 제가 말을 안 했을 뿐이다.

선재는 그 타이밍에 손을 배로 가져갔다. 갑자기 도넛이 먹고 싶어졌다. 접시에 담긴 음식 대부분을 비우고, 과일까지 가져와 아이와 나누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파인애플과 사과, 포도까지 전부 입에 댔다. 간만에 입맛이 돌고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일까. 좀 있다 머리는 아플 테지만,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준희는 창문에 붙어, 그림처럼 솟는 분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재는 도넛 생각을 하며 준희에게 가자고 말했다.

테이블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럭저럭 괜찮았던 상태는 저녁 즈음이 되자 다시 안 좋아졌다. 선재는 또 약을 먹을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 상태로 침대에 푹 처박혀만 있었다.

들리는 건 아이 숨소리뿐이었다. 선재는 저녁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잠에 빠져 허우적댔고, 간혹 깨어나 준희가 곁에 잘 있는지만 확인했다.

아이는 초저녁까지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다가 한 9시나 10시 정도에 잠든 듯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확인한 시계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 걸 보았고, 다시 깨어 준희를 확인했을 때가 11시였다. 선재는 그 정신에도 아이의 반쯤 접힌 손 안에 제 손가락 하나를 끼워보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 반사적으로 슬쩍 오므라드는 게 느껴졌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선재는 그 후로도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침대 속으로 빨려들 듯한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일어나보니 새벽 3시였다. 다행인 건,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거였다. 침대 이불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엔 범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녁에 잠깐 깼을 때 한 번 받은 것 말고는 통화를 하지 못했었다. 아픈 걸 말했는데도 왜 자꾸 전화를 걸고….

선재는 얼굴을 찌푸린 채 휴대폰을 확인했다. 불을 완전히 꺼둔 채여서 휴대폰 빛이 선재의 얼굴만 정확히 밝히고 있었다. 수동으로 밝기를 해둬, 따로 조도를 낮춰야 했다. 밝기 조절을 끝낸 선재가 무의식적으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창가에 비친 귀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선재는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침대에 반쯤 누운 채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다른 자세는 취할 수도 없었다. 몸을 굳힌 채 시선만 천천히 돌렸다. 느긋한 척을 하고 싶어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귀신일 리가 없다. 약 때문에 헛것을 본 거겠지. 선재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설마. 휴대폰을 쥔 채 가만히 있던 선재의 고개가 다시 창가 쪽으로 천천히 돌았다.

이번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얼핏 봤을 땐 검은 귀신 같았는데 움직이는 걸 보니 귀신의 형상 같진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창문을 바라보던 선재의 표정이 삽시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창밖에 선 이는 범진이었다.

헛것인 것 같아 눈을 비비고 쳐다봐도 같았다. 범진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임은 창문 쪽을 향한 손가락질이었다.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걸어놓으면 밖에서 무슨 짓을 해도 열 수가 없다.

그걸 차마 제 성질대로 깨트리지는 못한 범진이 선재를 쳐다보며 잠금장치를 가리키고 있던 것이었다.

느릿하게 일어난 선재가 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가까워지자 헛것도, 귀신도 아닌 게 완전히 판명이 났다. 검은 티셔츠를 입고 서 있는 범진의 얼굴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왜 빨리 안 여냐는 표정마저도 읽혔다. 의아한 마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던 선재가 주변을 살폈다. 캄캄한 새벽이라 누구도 돌아다니진 않지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옆으로 쭉 밀리며 찬 공기를 안쪽으로 들였다.

“얼어 뒤지라고 쳐다만 보고….”

“아니….”

범진은 말도 듣지 않고 창문을 풀쩍 뛰어넘었다. 아무리 1층 창문이라도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는 아닌데. 범진이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옆으로 비켜나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씨바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훅 닿아오는 몸이 차가웠다. 낮에도 쌀쌀하니 밤은 오죽할까. 게다가 범진은 검정색 반팔 티셔츠만 달랑 입은 채였다. 한걸음에 훌쩍 다가온 범진에게선 밤공기가 가득히 풍기고 있었다. 3시니까… 새벽 공기인가.

“귀신인 줄 알고….”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오갔다. 범진도 침대 위에 있는 준희를 의식해선지 목소리를 최소치로만 내었다.

“어…. 뒤지는 줄 알았다고.”

범진이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귀신을 본 줄 알았다고 변명을 해도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선재의 입이 재차 열렸다.

“귀신….”

“죽을 뻔만 했냐. 니 못 봐서 진작에 죽었다.”

이젠 아예 죽었다고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가온 범진은 선재의 입을 제 입으로 가로막았다.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선재의 입이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닿은 입술은 차가웠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혀는 뜨거웠다.

순간적으로 인상을 쓴 선재의 얼굴도 점차 평온해져 갔다. 입천장과 연한 입 안 살을 고루 건드리는 혀가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 뿐일까. 울리던 머리가 기분 좋은 시원함에 휘감기고 있었다.

선재는 입을 슬쩍 벌렸다 좁히며 범진의 굵고 뜨거운 혀를 받았다. 빨지도 않는데 뭘 빠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 부재중 전화도 30분 전이었지. 아마 도착하고 전화했던 것일까. 범진은 제가 자는 걸 보고 전화도 포기했던 모양이다.

범진은 선재가 입을 벌릴 때마다 굵은 기둥에 더욱 힘을 주었다. 침으로 질척하게 젖은 혀로 선재의 입 안 어디든 다 침범하려 들었다. 그 욕망에, 입술과 입 안이 얼얼해진 선재가 쥐고 있던 범진의 어깨를 꼬집듯 쥐었다.

어쨌든 힘든 건 힘들다.

범진은 입술을 살짝 떼고 눈을 아래로 했다. 그렇게 해도 키스만 안 나누는 자세이지 입술은 계속 닿고 있었다. 선재의 고개가 위로 들려 있었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씨팔, 나라 해라…. 니 함 먹고 깜빵 들어가면 그게 이득이다.”

“….”

그 말에 선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한 말은 아니었는지 범진이 아랫도리를 손으로 우악스레 주무르고 있었다.

“…여기서 뭘 어쩌게.”

“뭘 어찌하기는. 아가리 물고 하면 되지.”

범진은 씩 웃으며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 번에 벗었다.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도 내동댕이치듯 벗어 던졌다.

방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같은 공간인데.

드로어즈를 벗자마자 성기가 툭 튀어나왔다. 언제부터 발기를 했는지 선단이 위쪽을 향해있는 게 망측했다. 어두운 공간인데도 얼마나 솟아 있는지가 눈에 훤했다.

“….”

“조용히 한다고.”

그 말을 하며 다가온 범진은 단숨에 선재의 잠옷 바지 안에 손을 넣었다. 크고 차가운 손이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인상을 쓴 선재가 알았다고 말하며 범진의 팔에 손을 올렸다.

“잠시만, 좀….”

“하아.”

오늘 범진은 좀 미친 사람 같았다. 자진해서 옷 벗을 시간을 달라는 데도 잠옷 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을 절대 빼지 않았다.

성기가 선재의 배에 비벼지고 있었다. 이 추운 날에도 발기한 성기는, 선재와 닿자마자 프리컴을 줄줄 흘려댔다. 선재의 엉덩이가 범진의 손 때문에 불룩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토록 상상만 하던 볼기니 손을 뗄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엉덩이를 만지는 것도 이렇게… 부러 볼기를 쥐고 양쪽으로 벌리는 손길을 느낀 선재가 두 발을 파닥거렸다.

“…놔, 좀….”

벗어나려고 발짓을 했는데, 범진이 그 반동으로 엉덩이를 쥔 채 선재를 안아 들었다. 본의 아니게 범진의 몸에 다리를 둘렀던 선재가 급하게 온몸의 힘을 뺐다.

“들려서 하는 게 좋냐….”

“어, 언제….”

몇 번 그렇게 했다고, 본능적으로 범진의 몸에 다리를 감은 게 수치스러웠다. 선재는 발로 바닥을 짚자마자 범진에게서 반걸음쯤 떨어졌다. 조용히 하는 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차피 범진이 갈 것 같지 않으니….

선재는 옷을 다 벗은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반쯤 선 제 성기에 꽂히는 범진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엉덩이를 하도 만지고, 구멍 근처도 지분대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선재는 제 성기를 숨기기 위해 다시 뒤로 돌았다. 그러면 엉덩이가….

범진은 선재의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흥분했다. 어두운 공간이어도 성기의 모양이나 흰 엉덩이 같은 건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범진이 앞을 보았다 뒤를 보았다 하는 선재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챘다. 잡아채자마자 배의 부피를 느낀 범진이 입을 열었다.

“니 배 좀 나왔네.”

“…원래 조금씩….”

왜 괜히 그런 말을 하나 모르겠다. 전부터 아주 조금씩 부푼 걸 범진도 모르지 않는데. 선재는 거리를 가까이 한 채 그런 말을 듣자 얼굴이 화르르 오르는 걸 느꼈다. 어둠 속이라 색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떼 준다고 해도 굳이 낳겠다고.”

“….”

“…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

선재는 알몸으로 범진의 손길을 받는 게 낯설었다. 섹스할 거면 섹스나 하지…. 선 채로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좀 그런데,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최대한 작게 말하는 범진에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언제는….”

“뭐.”

“낳으라고 그렇게….”

선재는 웅얼대듯 입을 열며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시종 깔려 있던 눈빛에 빛 한 점이 스미는 것 같았다. 깊은 어둠에 더 짙어졌던 범진의 눈썹이 춤을 추듯 꿈틀댔다.

“씨팔, 그 말은 듣겠다고?”

“….”

범진의 성기가 더 강직돼 위로 튀어 올랐다. 눈으로 세밀히 관찰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선재는 얼마나 많이 했으면, 이제 그런 것도 다 아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범진의 반응을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더는 못 참겠다는 소리가 욕과 섞여 들렸다. 선재는 그 말에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범진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소리가 안 나는지 몰랐다. 범진에게 계획이 있어 보이니 그걸 따르기로 했다.

움직일 때마다 꺼떡대는 범진의 성기에, 선재의 눈이 바닥을 짚었다.

“여기 누워봐라.”

바닥에 깔린 건 이불이었다. 적당한 두께의 이불이고, 선재가 좀 전까지 덮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준희가 덮는 이불은 크기가 작은 다른 이불이었다. 와중에도 아이가 깰까 걱정이 된 선재가 준희 쪽을 얼핏 보았다. 아이는 계속 한밤중이었다.

“조용히….”

선재는 이미 진득해진 엉덩이 사이를 모른 체하고 준희 쪽을 곁눈질했다.

범진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면서 제 성기를 쥐고 흔드는데, 여간 상스러운 광경이 아니었다.

선재는 이불에 몸을 뉜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범진의 모습이 유달리 컸다.

“안 벌리주는데 어떻게 드가라고.”

다가오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선재는 범진의 무릎이 이불에 닿는 것까지 보고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물기가 어려 있어 그런지 벌어지자마자 차다는 느낌부터 먼저 들었다.

“….”

숨소리도 죽여야 했다. 범진의 성기가 제 회음과 구멍을 한 번에 이어서 긁었다. 입술을 앙다문 선재가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어차피 이리될 거 씹….”

꽤 젖은 상태였던 선재의 구멍은 범진이 스치기만 해도 안쪽 점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쪽으로 열리는 몸을 어떻게 모를까. 선재는 몸의 반응에, 가슴에 불덩어리를 하나 올린 듯한 기분이 되었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안 보이는데, 범진은 멀건 목만 내보이는 선재가 야속했다. 그렇게 저를 쳐다보라 말했는데도 또. 몸에서 들끓는 성욕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범진은 제 더럽게 침 흘리는 성기를 선재의 구멍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구멍이 풀려 있어 삽입이 어렵진 않았다. 며칠 못해 미끄러지듯 삽입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애액을 머금은 내벽 때문에 뿌리까지 단번에 삽입되었다. 입 한쪽을 올린 범진이 선재의 턱을 쥐고 정면으로 돌렸다.

“누가 박아주는지는 봐야 할 거 아니냐….”

말엔 거친 숨이 은근히 섞여 있었다. 선재의 귀에도 그 음성이 정확히 닿았다. 가시 가득한 바퀴가 귓속에 걸려도 이보단 덜 감각될 듯했다. 선재는 잔뜩 예민해진 몸 때문에 범진의 성기가 들어오자마자 배를 떨었다.

“니 구녁 언제부터 풀고 있었냐…. 씨발… 내 올 줄 알았지.”

낮고 조용하게 닿는 목소리에, 선재의 성기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제멋대로 내벽을 치고, 깊은 곳까지 들어와 비벼지는 범진의 성기엔 감각이 무딜 수가 없었다. 선재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았다. 우는 소리라도 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소, 소리… 날… 날… 흡.”

갑자기 콱 처박힌 범진의 성기에, 선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허리를 위쪽으로 든 채 고개를 꺾었다. 임신한 배가 그 모양을 선명히 드러냈다.

범진이 큰 숨을 내쉬며 허리를 앞으로 쳐댔다. 성기가 구멍을 뚫었다 뒤로 빠지길 반복했다. 선재의 몸은 범진이 더 잘 알았다. 스팟을 찌르고, 주변 점막을 비벼주자 이미 바짝 서 있던 성기에서도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힘없이 축 떨어지는 정액은 어둠 속에서도 투명한 기운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일부러 켜놓은 촛불 같았다. 주륵 흘러내리는 선재의 정액에 범진이 눈에 스파크를 틔웠다. 허리를 더 퍽, 쳐대며 보기 좋게 흔들리는 성기를 집착하듯 훑었다.

구멍도 밖으로 쭉 뽑히듯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범진은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구멍에 제 손도 대보았다. 미끈거리는 구멍을 뚫고 다시 자지를 박고, 또 빼길 반복했다. 이렇게 몰래 해본 적은 없었는데. 거기서 오는 흥분감도 만만치 않았다. 선재의 정강이 쪽에서도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핏대를 세운 채 선재의 엉덩이를 위쪽으로 든 범진이 또 한 번 물을 흘리는 선재의 성기를 쳐다봤다.

“아, 하으….”

“어이…. 조용히 해야지….”

“…으….”

“이거라도 빨아라.”

범진이 손가락 두 개를 선재의 입 안에 넣었다. 영락없이 그걸 빠는 모양새가 된 선재가, 그 타이밍에 박힌 범진의 성기에 두 다리를 위로 든 채 달달 떨었다. 이번엔 오줌이 나올 것 같았다.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범진의 두 손가락을 쪽쪽 빨기 시작한 선재가, 어떻게든 소리를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범진은 저를 가만 쳐다보며 씨발, 했다.

“이 씨팔, 디지라고 별짓을 하네.”

물라고 손가락을 준 거였는데 선재는 그걸 쪽쪽 빨아대고 있었다. 젖병이라도 빠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범진이 더욱 세게 선재의 엉덩이를 쳤다. 최대한 소리가 덜 나게 하려고, 범진은 몸을 완전히 빼서 박진 않았다. 깊이 박고 대충만 빼며 허리를 쓰고 있었다. 안쪽까지 깊이 박은 채로 하체를 빙빙 돌리면 입에 손가락을 문 선재의 허리가 튀었다.

그러면서도 배에는 충격이 덜 가도록 했다. 섹스가 몸에 좋아도, 외부의 충격이 좋을 리는 없을 터였다.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제 쪽으로 힘껏 끌어당겨 마지막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 손을 여전히 선재의 입 안에 물린 채였다.

“후으.”

여태 강하게 박히던 성기가 더 무서운 속도로 제 몸을 침범해오자, 선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실금을 하고 말았다. 퍽, 깊숙이 박힐 때 나오기 시작한 소변이 성기가 삽입될 때마다 보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배 위로 졸졸 흘러내렸다. 부끄러움에, 범진의 손을 문 채 울음을 터뜨린 선재가 그 울음마저도 입 안으로 삼켰다.

나쁜 인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선재의 정신이 현실과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범진이 일부러 평소보다 빠르게 사정을 한 것 같았다. 몸에서 힘이 탁, 하고 풀리자 입에서도 침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선재는 입을 뻐끔거리며 눈을 감았다. 범진은 우는 제 얼굴을 나름대로 정성 들여 만졌다. 그 손길 때문에 울고 있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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