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4/29)

* * *

아…

오늘은 마지막까지도 악몽을 꾸지 않았구나.

선재는 푸른 기운과 하얀빛이 섞인 아침에 눈을 떴다.

범진이 뒤에서 저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종종 이렇게 자곤 하니까…. 다시 눈을 감으려던 선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에서 이물감이 느껴진 것도 그때였다. 아랫입술을 문 선재가 뒤쪽을 슬쩍 보고 경악했다. 아직도 범진의 성기가 제 구멍 안에 꽂혀 있었다.

“….”

여차하면 준희가 깰 수도 있다. 선재는 저를 뒤에서 안고 있는 범진의 손가락 하나를 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곤 바깥쪽으로 힘껏 꺾었다.

“아… 씨발… 뭐냐….”

“그러고 자면 어떡하라고…? 빨리… 이, 이거부터 빼.”

알아서 빠질 만도 한데, 범진의 성기가 그게 가능한 크기는 아니었던 탓이다. 선재는 빠져나가는 범진의 성기에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며 마지막 진동을 느꼈다. 억지로 고여 있던 애액도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범진의 성기가 빠지자마자 위쪽에 두었던 속옷과 잠옷부터 챙겨 입었다.

다리가 휘청거려 한 번에는 입을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선 아이가 세상이 밝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엔가… 손질해준 이불이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갈 건데.”

침대 근처에서 바지까지 입은 범진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여기 온 것도 이해가 안 가고, 잠까지 잤다는 것엔 고개가 저어졌다. 범진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티셔츠를 장난하듯 주워 입었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티셔츠는 범진이 평소에 입는 것보다 좀 작은 듯했다. 큰 몸을 감싸고 있기엔 역부족이었다. 복근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산 타고 돌아서 가면 된다.”

“뭐?”

“여 뒤쪽으로 가서.”

손으로 위쪽을 가리킨 범진이 큰 원을 하나 그렸다.

“차 있는 데까지 가면 길 나온다.”

“…어차피… 오늘 볼 건데 굳이.”

“급하게 먹고 디진 귀신이 몸에도 좋다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운 거 아닌가. 선재는 범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잘 몰랐다. 새벽에 와서 니 한 번 먹고, 같은 말을 했으니 그런 맥락일까 하는 짐작은 되지만.

“…그래.”

“니 내 눈 봐라.”

“아.”

선재는 갑자기 제 얼굴을 치켜드는 범진의 손길에 목이 아팠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병든 거시기처럼 폰 쳐다보고 있드만.”

“….”

“많이 이뻐졌네.”

범진은 낯빛이 좋아졌다, 얼굴이 괜찮아 보인단 말도 꼭 저렇게 표현하곤 했다. 뒤이어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내 쌍판은 어떻냐.”

“….”

“씹, 바쁜데 또 입 닫고 있네.”

“…너도 예뻐.”

선재는 범진이 낯빛이 좋아졌단 의미로 쓴 예쁘다란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야 범진에게 뜻을 전달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범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난리를 쳤다. 징그럽고 토가 나온다며 성질을 부렸다.

“니 진짜 어디가 많이 아픈가 보네. 어디서 그딴 개더러운 소리를 해서.”

“…아니, 낯빛 좋아졌다고…. 너도.”

선재는 어젯밤 범진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야 휴대폰 불빛으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지만, 범진의 얼굴은 처음부터 어둠 속에서 보였었다.

“진작에 말을 그리하지. 씨발. 웩.”

저렇게 노발대발할 거면서 예쁘단 소리는 왜 그렇게 입에 달고 사나 몰랐다.

선재는 뒤돌아서 창문을 여는 범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창밖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 맞다.”

뭘 잊기라도 한 건지, 창문에서 고개를 뺀 범진의 움직임이 기민했다. 선재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이, 범진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빠르게 벗었다.

“니 이거 오늘 볼 때까지 갖고 있어라.”

“…뭐?”

“그래야 안 아프지.”

“…너 그렇게 해서 가겠다고…?”

“어.”

범진은 짧은 대답만 대충하고 탈의한 상체로 창문을 뛰어넘었다. 화려한 검은 문신이 눈앞에서 휙 하고 사라졌다. 저러고 어딜 간단 말인가. 정말 미친 건가. 선재는 범진이 뛰쳐나간 창문 밖에 제 고개도 넣어 보았다. 두리번거려도 범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침 해만 멀리, 푸른 기운 속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창문을 닫은 선재가 제 손에 쥐어진 검은 티셔츠 한 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으로 산을 내려갈 범진이 상상되었다.

문신도 그렇고, 몸도 좀 크나. 인상도 험악하게 지을 것이다. 누가 본다면 사람이라도 묻고 왔을 줄 알 텐데. 선재는 그런 걱정을 하며 티셔츠에 제 코를 갖다 댔다. 잔잔하게 퍼지는 쓴 향에 기분만은 좋아졌다. 거짓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아프지 않았다.

세 시간이나 잤나. 범진과 뒤엉킨 채로 말이다. 선재는 범진을 보내고, 곧장 침대 안을 파고들었다. 잠에 빠진 준희 옆에 몸을 누이고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저녁에도 많이 자서 그런지 별로 졸리지는 않았다. 범진과 두세 시간 잠을 잔 덕도 있을 것이다. 침대 밑에서 자야 했기에 공간도 여의치 않았었다. 그런데도 깊은 잠에 빠져들어, 하마터면 못 깰 뻔했고.

바닥에 깔고 누웠던 이불은 제자리를 찾았다. 선재는 그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준희가 깨어나기만 기다렸다.

한 시간 뒤부터 식당 출입이 가능하니. 오늘은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어볼 참이었다. 매번 죽기 일보 직전인 상태로 도시락이나 죽만 받아서 먹었었는데. 혹시나 얼굴이 익숙한 봉사자를 마주친다면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를 벌써 상상해보았다.

선재는 협탁에 있던 전화기로 1번을 눌렀다. 계속 간단한 요깃거리를 방으로 배달이 오게 해두었는데, 오늘은 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직원의 목소리에 선재가 차분하게 화답했다. 오늘은 죽을 안 주셔도 된다고 말했다.

불은 꺼둔 채여서 바깥의 빛으로만 공간이 조금 밝았다.

수화기를 손에서 놓은 선재가 갑자기 밝아지는 침대의 한 면을 바라봤다. 불이 들어온 휴대폰이 보였다.

범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걸려오는 전화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제까진 아무 일도 없었지만, 오늘은….

“여보세요.”

[밥 먹냐?]

“아니. 좀 있다가 먹으러 가려고.”

[난 지금 차 타고 가고 있다.]

“어… 다행이네. 그래도. 난 누가 볼까 봐….”

[씨팔, 길도 아닌 거 타고 올라가는데 누가 보냐.]

“내려갈 때는?”

[내리갈 때도 똑같지. 아까 멧돼지도 봤다.]

사람들 눈에 안 띄어서 다행인가. 멧돼지를 봤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다신 그렇게 하지 마. 따로 볼 수 있게도 해주는데,”

선재는 제 배 위에 올려놓았던 범진의 티셔츠를 괜스레 어루만졌다. 그렇게 할 정도로 이곳을 왔어야 했나. 그렇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었나.

[이게 갈수록 명령질이나 하고.]

그러면서 대놓고 실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령한 적 없고….”

[그기 명령질이다. 어디서 하늘 같은 서방님한테.]

왜 한동안 서방님 소리를 안 하나 했다. 어린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도 면역이 꽤 된 상태다. 선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지 마. 면회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

[뭐?]

“여기 카메라도 다 설치돼 있어서.”

[니 방에 카메라나 달 걸 잘못했다.]

범진은 딴소리를 했다. 건물 근처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찍힐까 염려한 것인데, 혼자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니 양심이 있으면 도망은 이제 가지 마라.]

“여기서 어떻게.”

[누가 그거 말하냐. 다시 같이 살게 돼도 말이다.]

“….”

[와, 또 속 뒤집히라고 대답 안 하는 거 봐라. 배도 티 나와 놓고 도망을 또 갈라고. 씨바 자중 좀 해라.]

자중 같은 말을 범진의 입에서 들어 기분이 오묘했다.

“…도망 안 가면, 넌 뭐 해줄 건데…?”

선재는 그런 말을 하자마자 입술을 손으로 매만졌다. 생뚱맞은 말을 한 것 같아 민망했다.

[뭐?]

“아니. 끊자. 나 이제 밥 먹으러 가야….”

[니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

[도망만 안 가면은.]

“….”

[니 애 밴 채로 아랑 돌아다니면 누구를 만나겠냐. 내 같이 미친 알파새끼나 또 만나지.]

“….”

범진은 혼자서 말을 이었다. 저 같은 것과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냐는 말을 듣는데, 선재도 그때가 생각이 나 아득해졌다. 강원도에서 보았던 범진은 인간 같지도 않았다. 다짜고짜 키스하고, 겁을 주고, 걸핏하면 이상한 짓을 시켰었다.

뭐라고 말하는 범진을 뒤로한 채, 선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던 범진과 지금의 범진이 같으면서도 다르게 느껴졌다.

[야! 듣고 있냐!]

“아, 어….”

[좀 이따 보자는데도 말이 없냐.]

“그래, 알았어.”

선재는 전화를 끊고 다시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배 위에 올려두었던 범진의 티셔츠를 만지며 옛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땐, 정말 범진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의 말에 진심으로 대답하는 것, 찰나라도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 소중한 아이의….

어제 많이 잤는데도, 아이는 제 곁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 손을 준희의 가슴팍 위에 올린 선재가 천천히 그 가슴팍을 쓸어 주었다. 연한 가슴뼈가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걸 느끼는 건 언제나 좋았다. 힘을 거의 주지 않은 채로, 아이의 숨결과 체온을 느꼈다.

“아브… 아브지이….”

잠에서 거의 깰 무렵, 꾸고 있는 꿈이 있다면 잠꼬대를 이렇게 하고 만다.

선재는 아부지란 소리를 듣자마자 준희의 이마에도 손을 올려 주었다. 어쩐지 슬프게 들려 잠을 빨리 깨워주고 싶었다.

“준희야….”

“…녜…에….”

“응. 꿈꿨나 보네.”

“아부지랑… 주니 아부지….”

“…재밌게 놀았어?”

“네에… 주니 아부지가 안아죠서….”

선재는 아이의 얼굴과 목,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고 만져주었다. 혹시 모를 외로움을 느낄까 손이 바빠졌다. 아침이면 아무리 바빠도 범진에게 한 번은 안기고 어린이집에 가곤 했는데. 범진이 잘 땐 어쩔 수 없지만, 깨어나 있을 땐 그 광경을 언제나 봐 오곤 했었다. 시비 걸듯 다가와 아이를 안아주던 범진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그 아부…지. 오늘 볼 수 있어. 오늘 준희 보러 와.”

“주니 보러어?”

둥근 떡처럼 부어오른 눈두덩이 힘껏 올라가는 게 보였다. 반짝이는 두 눈도 금세 드러났다. 웃는 얼굴을 한 선재가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준희 보러.”

“주니 보고 시펐서요….”

“…그 말 아부지, 그 사람한테 해줘.”

“네에….”

방 안은 아직도 그리 밝지 않았다. 아부지란 말이 입에 익지 않은 선재가 그 사람, 하고 냉정하게 말하는데도 준희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 누워서 고개를 끄덕이자 작은 온몸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발에도 힘을 준 것 같았다. 아이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한 선재가 좀 있다 밥 먹자,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네에, 하고 대답한 아이의 다리가 위로 들리는 게 느껴졌다. 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나 보았다.

* * *

다가온 아침 식사 시간에, 선재는 틈만 나면 시계를 쳐다보았다. 팔에 범진의 티셔츠를 두른 채였다. 꼭 수건을 갖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낯익은 사람이 보이면 괜히 등 뒤로 그 티셔츠를 숨기게 되었지만, 그게 아니면 토시라도 팔에 두른 척을 했다. 밥 먹을 때마다 퍼지는 범진의 체향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준희가 아부지? 하고 두리번거린 걸 빼면 수상하게 보일 것도 없었다.

선재는 방으로 돌아와, 장영수와 간단한 면담 시간을 가졌다.

장영수는 선재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 오늘은 몸이 좋아 보이시는데, 굳이 범진을 만나야겠느냐고 물었고, 만나더라도 외출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준희를 안은 채 그런 말을 들었다. 선재는 제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에게만 시선을 줬다. 장영수가 하는 걱정이 이해는 되지만, 범진이 저를 때릴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주의하란 말에 알겠단 대답을 하고, 또 걱정하지 말란 말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나쁜 인간을 만나려면 이렇게도 많은 관문이 필요했다.

선재는 그럼에도 멋대로 산을 넘고 시설로 찾아온 범진이 생각나, 이상한 타이밍에 웃었다.

장영수가 의아하다는 기색을 내비쳤고, 선재는 헛기침을 했다. 품에 있던 아이가 그걸 따라 했다. 저는 켁켁, 했지만 아이는 헥헥, 했다. 선재는 죄송하단 말을 하고 장영수의 말을 더 들었다. 손으론 아이의 등을 계속 만졌다.

[선재 씨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선재가 주의력 있게 듣는 것도, 아닌 것도 같자, 장영수는 막판엔 표정을 굳혔다. 사고가 발생하면 직원들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는 무서운 말까지 전해왔다. 선재는 범진이 그렇게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런 말엔 조금 긴장을 했다.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손길에 금세 졸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였다.

준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낮엔 꼭 잠을 자곤 했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잠드는 시각도 정확해졌다. 좀 전까지 헥헥, 하고 기침하던 시늉을 하던 아이의 눈꺼풀이 잔뜩 무거워져 있었다. 선재는 준희의 등을 쓰다듬으며, 장영수가 마무리하듯 말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접견실이 따로 마련돼있긴 하지만 외출하는 경우엔 무인기에서 따로 발급되는 외출 카드를 가지고 나가면 된다고 했다.

장영수가 그 기기의 위치를 말해주면서도 께름칙한 표정만은 얼굴에서 거두지 않았다.

장영수는 납치당할 가능성까지 이야기했다. 시설 입소자 중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분명 있으니 명심하시라고. 선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이라면 그럴 것도 같았지만, 말로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했다간 평생 못 볼 수도 있단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 선재는 뭐! 하고 큰소리를 치며 흥분할 범진의 모습을 그렸다. 갑자기 떠오른 모습은 장영수가 나갈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준희 침대에서 잘까?”

“…네…에.”

눈을 감은 채 대답하는 아이의 소리가 작았다. 선재는 준희의 귀와 옆머리 부근을 손으로 매만지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방에 있는 테이블은 입소한 다음 날, 한 귀퉁이에 놓였던 것이다. 선재가 유리 테이블의 겉면에 얼굴을 비춰보며 준희를 한쪽 팔로 지탱해 안았다.

이불을 흩쳐놓듯이 펼치고 나와, 아이에게 금방 덮어줄 수 있었다.

가볍게 주먹을 쥔 채 잠에 빠진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선재는 그걸 한참이나 쳐다보면서도 곁으로 가 자리를 잡진 않았다. 침대 반동으로 아이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선재는 침대 한쪽으로 대충 밀려나 있는 제 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온돌방이라 어딜 가나 훈훈한 기운이 있었다. 입고 있던 얇은 아우터를 침대 위에 올린 선재가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제 몸을 뉘었다. 모로 누운 채 벽을 바라봤다.

아침까지 범진과 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뒤에서 저를 안고 있던 범진의 손. 선재는 그 손이 닿았던 배에 제 손을 갖다 대 보았다. 아랫배가 조금 튀어나온 것이 느껴지고, 배는 따뜻하다. 범진도 그걸 느꼈을까.

너무 놀란 마음에, 범진의 손가락을 냅다 꺾어버린 것도 기억이 났다.

선재는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올렸고, 배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통통거림에 안정을 찾았다. 며칠 내내 찝찝하게 꾸물대던 느낌만 들었는데 오늘은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느낌만 있었다.

이내 입꼬리를 내린 선재가, 꿈속에서 제 모습을 봤다.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 *

“준희 저녁 되면 더 추워.”

다시 받은 준희의 옷은 사이즈가 얼추 맞았다. 모두 새 옷이었다. 원래는 아우터만 몇 벌 제공되었는데, 속옷부터 잠옷, 평상복까지 범위를 가리지 않고 옷장에 채워졌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왔다면 제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씁쓸해졌다.

시설은 일반 빌라같이 생겨, 밖으로 나오는 것도 간단히 유리문만 밀고 나오면 되었다.

들어갈 때야 도어락 키가 필요하지만 나가는 건 손쉽다. 선재가 기기에서 발급받은 카드와 도어락 키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섰다. 한 손에 잡은 아이는 벌써 두꺼운 차림으로 해 입혔다. 저녁이면 기온이 가파르게 떨어지곤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준희야.”

“네에.”

말을 시키면 새끼 자라처럼 목을 빼는 게 귀엽다. 선재는 할 말도 없으면서 걸어가는 내내 준희야, 하고 말을 걸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네에, 네에, 하고 목을 위쪽으로 들었다. 주변을 살피며 선재를 쳐다보려고 했다.

“준….”

“아부, 아부지이이….”

주차장은 꼭 운동장처럼 생겼다. 선재는 올 때까지만 해도 푸르렀던 잔디들이 일부분은 벌써 노랗게 새버렸다. 제 손가락을 잡고 있던 준희의 손이 한순간에 탁 풀렸다. 아이는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50m 앞에 범진이 서 있었다.

차가 주차된 걸 보면, 저기서 담배를 피웠거나 잠깐 통화를 했던 것 같았다. 아이가 입은 점퍼 시보리 끝에 반쯤 튀어나온 작은 손가락 네 개가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다. 안아달라 팔을 뻗으며, 범진이 있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야 씨,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안아 올린 범진이 준희의 볼에 코를 갖다 대는 게 보였다. 힘 조절은 또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선재의 걸음이 빨라졌다. 준희가 뒤로 피하면서도 꺄르르 웃는 게 보였다. 오래간만에 본 게 반가운지 눈엔 눈물까지 글썽글썽했다. 가까이 다가간 선재가 말은 않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주니이잉….”

시설에선 투정도 잘 안 부렸는데. 아이는 범진의 품에 안기자마자 말끝을 흐리며 울먹였다. 선재의 눈이 대롱대롱 흔들리는 준희의 다리에 닿았다.

“준희 다리 그렇게 흔들면… 위험해. 하지 마.”

“녜에에….”

“야, 니 나는 안 봐 주냐.”

“….”

“어? 안 봐 주냐고.”

“봤어.”

“그기 본 거냐. 확….”

일부러 인상을 크게 찌푸린 범진이 선재의 왼팔을 세게 끌어당겼다. 범진은 거리가 가까워진 선재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곤 슬쩍 벌린 입으로 키스를 했다. 짧게 하는데도 오죽 격해서 선재의 머리가 뒤로 밀렸다. 입 안에서 구르는 범진의 혀는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 입을 크게 벌려 제 입술이 다 잡아먹힌 꼴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입술을 쭈욱 빨아당기는 통에 떨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선재는 짧지만 짙은 입맞춤이 끝난 뒤, 민망한 얼굴로 준희를 안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준희만 해맑게 아부지, 아부지, 했다. 무안했다.

먼저 앞서 걷는 범진은 근처에 주차해둔 차 뒷문부터 열었다. 선재가 뒷좌석으로 가 준희를 카시트에 앉혀 주었다. 벨트를 단단히 매주고, 너무 차갑진 않은지 확인했다. 히터를 켜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차내는 그리 싸늘한 편은 아니었다. 선재가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기분 좋아?”

“녜!”

두 팔을 위로 들며 대답을 한다. 기분이 최고로 좋다는 의미다. 그 모습을 본 선재가 미묘하게 웃으며 좀만 기다려, 하고 차 문을 닫았다. 차 뒤쪽으로 돌아가 조수석에 안착하자, 옆에선 언제나처럼 범진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무도, 누구도, 해하지 않은 일상 같았다.

선재는 범진이 운전을 하며 이것저것 알려줘, 시설의 위치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알아들었냐?”

“응.”

“내가 봤을 땐 니도 좀 돌빡 같아서.”

“…뭐?”

“뭐 내보다야 낫겠지만.”

범진은 그러면서 선재의 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신호등 노란 불에 차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저거는 뭔 호사냐. 니 배 속에서 살면 기분 디질 것 같은데.”

“….”

선재도 고개를 숙여보았다. 범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곧 출발한 차에, 범진이 팔을 조수석으로 뻗었다. 이 씹, 하고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세게 쳤다.

“욕하지 마. 준희 있는 데선 안 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이….”

범진은 뭐라고 말하려다 제 분을 못 이기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창문을 열어 가슴팍까지 몸을 내밀었다. 차를 퍽퍽 치며 브레이크를 밟게 한 운전자에게 위협하는 행동을 했다. 손을 올려 가운뎃손가락을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가락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선재는 굳이 타겟이 되는 행동만 골라 하는 범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이럴 땐 똑같았다.

“그렇게 하면 너한테 좋을 게,”

“야.”

“…왜.”

“닌 씨발, 왜 이리 신기하게 생깄냐.”

“….”

어떻게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도 똑같다. 선재는 좀 전까지 가운뎃손가락을 내밀고 있던 범진의 얼굴이 저렇게 금세 싱글벙글해질 수 있는지를 의아해했다. 확실히, 사고 체계가 다른 사람 같다. 그래도 씨발, 만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도록 했다.

“어, 말해봐라.”

범진은 계속해서 옆눈질로 선재를 쳐다봤다. 손으로 선재의 허벅지를 힘주어 만지기도 하고, 얼굴을 잡아당기듯 쓸기도 했다. 뺨이 주우욱 밀린 선재가 제 손으로 뺨을 감쌌다. 손이 짧게 스쳤는데도 소양감이 남았다. 오른손으로 왼뺨을 슬슬 만지던 선재가 얼굴을 붉혔다. 아프고 얼얼해서는 아니었다.

밥 먹기에 어중간한 시간대긴 한데, 선재는 이른 저녁을 먹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백숙집이었다. 좁은 산골길을 통과한 뒤 드러난 강은 고요한 바다 같았다. 깊어 보였고 반짝거리는 표면도 예뻤다. 선재는 차에서 내린 뒤, 한동안 강물에만 시선을 빼앗겼다.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 아래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범진은 어떻게 이런 데를 잘 알고 있는 걸까. 경기 외곽이긴 한데 저는 근처에도 와본 적이 없었다. 시설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런 데도 와보는구나 싶었다.

주변을 감상하며 뒷좌석 쪽으로 향하는데, 아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범진이 내려준 것 같았다. 카시트에서 애를 들어 올릴 땐 꼭 들쳐메듯이 높게 들어 불안할 때가 많았는데. 선재는 밝은 표정으로 차 옆에 서 있는 준희에게 손뼉을 한 번 쳤다.

“준희 이리 와.”

“네에.”

10분도 안 돼 이런 곳에 도착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게 살기에도 참 좋을 것 같았다. 아이가 자연을 좋아하니 보여줄 것도 많겠고. 선재는 식당과 레포츠 시설만 즐비한 주변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름이면 시끄러울까? 지금은 겨울에 접어들어 조용한 걸지도 몰랐다.

식당에선 두부전골과 능이백숙을 주문했다.

잘 아는 사장님인지 범진에게 오랜만에 본다는 말을 했고, 범진은 나이 든 남자처럼 예, 예, 했다. 건성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저만하면 양반이다 싶었다.

오후 4시를 약간 넘긴 시각. 확실히 사람들이 밥 먹는 시간대는 아니었다. 선재는 달그락 소리가 나는 주방을 곁눈질하고, 준희에게 한참 낮은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주었다.

테이블이 높아 아이의 목이 빼꼼하게 나와 있었다. 이 높이면 뭘 먹기는 불편하겠다.

결국, 자리를 옮겼다. 나무와 한지로 장식된 문을 열자 단단해 보이는 테이블이 길게 드러났다.

준희가 맨 먼저 앉았고, 선재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범진은 맞은편에 앉았다.

“나중에 여따 집 짓고 살까.”

“…가정집은 없던데.”

“내가 지으면 그마이지.”

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로 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능이백숙과 두부전골이 차례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놓이기 시작한 밑반찬은 가짓수가 많았다. 인기가 많은 곳인지 한 번 서빙될 때마다 직원 서너 명이 함께 움직였다.

범진은 이게 몸에 와따라고 했다. 손으로 가리킨 건 능이백숙이었다.

“그래야 아새끼도 숨풍숨풍 낳는다.”

“….”

직원들도 많은데 굳이 저런 소리를 했다. 선재는 모른 척하며 준희의 방석을 옆쪽으로 끌었다. 준희 좀 더 앞으로.

“임신하셨나 봐요.”

“아, 네.”

선재는 갑자기 옆에서 들린 말에 대답부터 얼떨결에 했다. 붙임성이 좋은 직원이었다. 선재의 얼굴을 보며 피부가 어찌 이리 좋냐고도 하고, 남자 오메가를 처음 본다는 말도 했다. 선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아줌마. 말 많다.”

어린 직원이었으면 당황했을 텐데, 이런 경우가 아예 없진 않은지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직원의 태도가 능숙했다. 선재는 갑자기 불편해진 분위기에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능이백숙만 쳐다봤다. 두부전골도 그 옆에서 질세라 끓고 있었다.

선재는 처음에, 준희가 두부를 좋아하니 두부전골을 골랐다. 범진은 메뉴를 고르라고 해놓고도 뭐 그딴 걸 먹냐 인상을 썼다. 처음부터 능이백숙을 먹으러 온 거였으면서 메뉴 고르란 소리는 왜 했는지 몰랐다.

백숙은 원래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맛이 어떠려나. 선재는 두부를 아이 접시 위에 놓아주며 입맛을 다셨다.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인데 군침이 돌고 있었다. 밥을 양껏 먹지는 않았다지만, 그래도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선재는 주니 두부, 하며 숟가락으로 흰 두부를 떠먹는 아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맛있어?”

“녜, 아뜨, 뜨거.”

식힌다고 식혔는데 뜨거운 모양이었다. 선재가 납작한 그릇을 가져와 입김을 불었다. 준희도 앞을 쳐다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후우, 하고 작은 바람이 불었다.

“니 내가 전부터 생각했는데.”

“….”

선재가 말은 않고, 접시를 든 채로 범진을 바라봤다.

“어디 가서 입 쭉 내밀지 마라.”

또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선재는 범진을 향해있던 시선을 거뒀다. 얼추 식은 두부를 다시 아이 앞에 놓아주었다.

“아기 있어.”

범진의 눈이 준희에게 잠깐 닿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실실 웃으며 혀로 입술을 쓸고 있었다.

무슨 변태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선재는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을 그대로 드러냈다.

“뭘 쳐다보냐.”

“….”

이게, 확… 하는데도 웃음을 못 참는 게 보였다. 선재는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이미 끓고 있던 능이백숙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그렇게 말고.”

살점을 나물만큼 찢어냈더니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고 했다. 범진은 닭다리를 분질러 큰 그릇에 옮겨 담았다. 냄비 안에서 끓고 있던 능이버섯도 거의 다 들어냈다.

“니 한 달 안에 4kg은 찌워라.”

범진은 내용물로 넘칠 듯한 그릇을 선재 앞에 놓았다. 그러면서 떡도 찰진 게 맛있단 소리를 했다. 찰진 게 맛이 좋지. 하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찰진 떡 맛있는 게 뭐. 니 혹시 변태 같은 생각 했냐.”

입을 꾹 닫은 선재가 범진을 빤히 쳐다봤다. 진짜 떡 얘기를 한 게 아니면서 화살을 제게 잘도 돌렸다.

선재는 두부, 두부, 하고 말하는 아이의 소리를 듣고 전골에서 두부 몇 점을 더 건져내 주었다.

닭고기는 싫다고 해 백숙은 먹일 수가 없었다.

“준희 닭은 싫어?”

“녜에. 두부…우….”

“두부는 줄 건데….”

손바닥만 한 두부를 조각내 후후 부는데, 범진이 한 말이 생각났다. 선재는 찝찝한 표정으로 손으로 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더는 입으로 불기가 싫었다.

끓고 있던 전골의 불을 끄자, 자작한 국물에 일던 거품도 금세 사라졌다.

선재는 그제야 제 몫의 식사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릇에 담긴 닭다리는 먹으려고 보니 더 컸다. 범진이 살도 한가득 담아줘 거의 2인분은 돼 보였다. 버섯도 가득했다.

….

몇 술을 떴는데도 양이 전혀 줄지 않는다. 그래도 맛이 좋아 계속 먹고는 있는데, 순간 뭘 잘못 씹었는지 치아에서 빡 소리가 났다. 물렁뼈도 웬만하면 그냥 씹어 먹겠지만 잘 씹히지도 않았다. 토종닭이라 물렁뼈까지 부드럽게 되진 않는가 보았다.

범진이 선재를 쳐다보고 있다 손을 내밀었다.

선재가 앞으로 내민 큼지막한 손에 고개를 들었다.

“뱉아라.”

뭘 뱉어. 선재는 눈을 든 채로 고개를 저었다. 휴지를 찾고 있는데, 테이블 위엔 물수건뿐이었다. 그사이 명령하듯 말하는 범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뱉으라고.”

“….”

턱까지 잡아채자 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이 씹, 하고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재는 결국 범진의 손 위로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내뱉고 말았다. 하얗고 걸쭉한 게 보기에 안 좋았다.

범진은 내 손이 그래 더럽냐, 하고 손에 있던 음식물을 휴지에 싸 옆에 뒀다. 휴지는 왜 저쪽에 있어서.

“네 손이 아니라 입에 있던 게….”

더럽다고 할 참이었는데, 범진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손 딲았다.”

봐라, 하고 보여준 손은 깨끗했다. 크고 뭉툭한 와중에도 길게 뻗은 느낌이 있었다.

“….”

“내가 니 만질 때는 손도 발도 다 깨끗하게 하고 만진다. 니가 좀 깨끗하냐? 쯧.”

비꼬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있었던 상황과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선재는 범진의 말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입에 있던 음식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범진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니까.

선재는 그릇에 있던 닭고기를 다시 발라 먹기 시작했다. 가끔 성질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 땐 제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범진은 유일하게 저를 깨끗하다고 말해주는 이였다. 말이 상스럽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속뜻은 그랬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제 입에 있던 음식물이 가장 더러웠는데도, 손 씻었단 소리나 하는 범진이 내심 고마웠다. 밤엔 지저분하게 굴지만 그래도 말을 저렇게 해주면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니가 낸테 싸질르는 오줌도 성수다. 성수.”

미쳤나? 금방까지 고마움을 느끼던 걸 다 취소할 것이다. 선재는 인상을 쓰고 범진을 쳐다봤다. 여기서, 아이도 있는데 저런 말을 했다. 아무리 생각이 모자란 사람이라도….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진은 살이 붙은 닭 뼈를 입에 통째로 넣은 채로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그리곤 큰 뼈만 입 안에서 툭 뱉어냈다.

* * *

“아부지 돌….”

준희는 강 근처를 거닐다 말고 큼지막한 돌 하나를 가리켰다. 냄비 뚜껑만 했다. 그 돌을 아버지 돌이라고 했다.

“주니 도올.”

작고 동그란 돌을 쥐면서는, 이게 준희 돌이라며 내밀었다.

“아빠 돌은 없어?”

준희가 제일 크고, 제일 작은 것에만 반응하는 걸 알면서도 서운했다. 이도 저도 아닌 걸 표현하긴 힘들 것이다.

있다, 있다, 하고 말하는 아이는 뒷모습을 보였다. 빨리 아장아장 걸어가 손으로 겨우 쥘 수 있는 돌 하나를 집었다.

“압빠 꺼.”

어떻게 딱 어중간한 돌을 주워서 왔다. 예상치 못한 센스에 웃음이 난 선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웃었다. 아이도 이잇,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마워. 아빠 돌도 찾아줬네.”

“녜에.”

쭈그리고 앉아, 다가오는 준희를 맞았던 선재가 아이의 엉덩이를 톡톡, 가볍게 쳤다. 범진은 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퍽, 퍽, 하며 차 바퀴를 차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바퀴 상태가 좀 안 좋은 것도 같았다. 황토색 진흙 같은 게 묻었다 굳어버린 티가 났다. 네 바퀴가 다 그랬다.

강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갔다.

시계를 확인한 선재가 아이 손을 잡고 범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범진은 바닥에 침과 담배를 동시에 뱉었다. 구둣발로 찍어내듯 그걸 밟는데, 성의는 없어 보였다.

“가야 돼. 이제.”

“안다.”

범진은 운전석 좌석에 있던 생수병 하나를 까 벌컥벌컥 마셨다. 선재는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주며 주변을 킁킁거렸다. 희한하게, 차에선 담배 냄새가 안 났다. 선재가 조수석 쪽으로 가려 차내에서 몸을 뺐다.

“…왜.”

범진이 뒤쪽으로 돌아서 가려던 선재의 팔목을 낚아챘다. 확 들리듯 잡혀선지 회초리로 맞은 것 같았다. 선재의 미간이 잘게 부서졌다.

“혀 내밀어바라. 함만 빨게.”

“….”

아까보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른 저녁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여름이면 대낮일 시간인데, 겨울이 됐다고 하늘이 금세 어두워지고 있었다. 선재가 어둑한 주변에 시선을 몇 번 더 보내다 입을 열었다. 에, 하고 혀를 조금씩 내밀며 눈가를 찌푸렸다.

범진은 찬 공기에 드러난 선재의 혀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다가가 입으로 혀를 쭉 빨아 당겼다. 소라살이라도 파먹듯 쭉 빨아, 선재의 혀가 범진의 입 안으로 먹혀들 듯 들어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쪽쪽 빨리게 되자, 선재의 얼굴이 급속도로 물들어갔다. 아무리 어둡다지만 제 얼굴색은 다 보일 듯했다. 혀를 빼고 싶어도 범진이 무지막지하게 빨아대, 제 입 안으로 다시 들이기는 힘에 겨웠다. 안으로 들일라치면 더 노골적인 소리만 주변에 퍼졌다.

선재는 범진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서 제일 큰 심장 소리가 제 귀에 꽂히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백숙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최 씨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재는 범진의 윗옷 자락을 쥐었다. 범진의 입 때문에 고개가 뒤로 자꾸 꺾이긴 했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범진이 저를 원하는 게 느껴졌다. 당장은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선재는 한 번만 빤다는 범진의 말이 거짓말일 걸 알면서도 혀를 내밀어주었다. 그렇게 한 것 같았다.

* * *

숙소로 들어올 땐 다른 직원의 확인을 받았다. 장영수와는 전화 통화만 했다. 무슨 일이 없었냐는 장영수의 말에, 선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외출 확인용 무인기에 카드를 넣고, 시간을 체크받았다. 두 시간 중 한 시간 59분을 사용했다. 범진은 운동장 같은 주차장에서, 아직 시간 좀 있다고 하면서 2분을 남기고 저를 보내주었다.

“준희 이리 와. 씻자.”

“네에.”

물티슈로 한 번 닦아주긴 했지만, 물로 씻겨내자 맑은 황톳물 같은 게 묻어 나왔다. 준희는 강 근처에서 내내 흙장난을 했다. 돌을 줍고, 그 돌을 성처럼 쌓았다. 아버지 돌 위에 아빠 돌을 올리고, 그 위에 제 돌을 올렸다.

산책까지 했는데 아직도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밤에 배고플 일은 없을 것이다.

선재는 TV를 틀었고, 때마침 걸려온 범진의 전화를 받았다.

애니메이션 채널에선 옛날 만화가 나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든 채 아이를 쳐다본 선재가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컨을 다시 들었다.

“어…. 시간 안 넘었어.”

처음 보는 옛날 만화가 신기한지 준희의 두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아이 표정을 확인한 선재가 리모콘을 침대 위에 놓았다.

“응.”

발에는 준희가 먹다 남긴 과자봉지가 걸리고 있었다. 아, 오늘 케이크 사려던 걸 깜박했네. 생각보다 시간이 짧아 도넛도 못 사 왔다. 선재는 뒤늦게 그걸 떠올리며 과자봉지를 주워 올렸다.

“…어?”

[그짓말 함만 쳐보라고.]

“뭐.”

[좋아한단 말 좀 해봐라.]

선재는 과자봉지를 쥔 채 쓰레기통 앞으로는 가지 못했다. 버려야 하는데, 잠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범진은 제 침묵이 불만스러웠는지 갑자기 욕을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씨발, 그짓말이라고, 하면서 거짓말인 걸 강조했다.

“…좋아해.”

[이름도.]

“좋아해. 범진.”

[니 뭐 양키냐? 그럴듯하게 안 하냐, 확.]

“….”

[쓰읍. 구라를 이래 못 쳐가지고,]

안 하기도 좀 그랬다.

선재는 좋아한단 말을 중얼거리듯 했고, 뒤엔 범진의 이름도 부르듯이 붙였다.

범진은 말이 없었다.

10초가 넘게 지난 뒤에야 그럭저럭하네. 하고 짧게 말했다.

선재는 전화를 끊은 뒤에야 손에 들려 있던 과자봉지를 버렸다.

쓰레기통 위에 걸려 있던 벽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입술 부근에만 벌건 물이 들어 있었다. 손을 올려 입술 근처를 만진 선재가 뒤늦게 열로 오르는 얼굴을 느꼈다. 추잡하게 혀를 내밀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범진이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 혀를 계속 내밀고만 있었다. 범진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떠올리다 아이가 앉은 채로 졸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양반다리 위에 베개를 올리고 있던 준희는 둥근 등을 더 둥글게 말며 앞으로 쏟아지려 했다.

“준희야. 준희 누워서 자자.”

준희가 보던 만화 영화는 끝이 나 있었다. 범진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고 여겼는데, 시간이 많이 가 버린 것 같았다.

좋아한단 말을 또 시킨다면, 그땐 외국인처럼은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잠을 잘 잔 덕일까? 자정이 지나도 졸리지 않았다. 준희도 낮잠에 저녁잠까지 자, 30분 전에야 잠이 들었다. 누운 채로 까만 벽을 바라보던 선재가, 아이의 동그란 손을 제 손으로 쥐어 보았다.

혹시 깨어날지도 모르니 살짝만 쥐었다가 놓고, 또 쥐었다가 놓기. 매일매일 잡은 손인데, 매일매일 좋다는 게 희한했다. 범진은 이런 마음을 알까. 선재는 준희를 대하던 범진의 태도를 떠올려보다 눈만 깜박였다. 나름대로 느끼는 게 있으니까 준희에게도 잘 대해주는 것이겠지만.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난다면, 범진도 저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범진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빚을 졌으니, 그게 보답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선재는 체향이 남은 범진의 티셔츠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민망하긴 한데, 이러면 기분까지 좋아져 어쩔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지는 두 시간도 채 안 되었다. 줄곧 배나 가슴팍, 그게 아니면 팔에 두르고 있었는데. 준희밖에 없는 방 안을 이리저리 살핀 선재가 다리 사이에 끼고 있던 티셔츠를 양 허벅지로 조금 비볐다. 맨다리로 비비적거리니 체향이 더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불을 대충만 덮고 편안함을 느꼈다.

오늘은 새벽녘이 되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선재는 눈을 굳게 감고도, 또렷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악몽을 꾸기 직전엔 여러 소리가 들렸다. 비닐 바스락거리는 소리,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 날카로운 바람 소리.

사실은 졸렸던 걸까. 악몽을 꾸기 직전에나 들었던 그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선재는 작은 압정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우박이 유리창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모른단 생각에, 선재가 눈을 뜨고 창가를 쳐다보았다.

“….”

비나 우박이 내리는 건가 싶었는데. 창밖에서 그런 소리를 내고 있는 건 범진이었다. 면회가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저기에 서 있나 몰랐다. 압정 떨어지는 듯한 소리는 범진이 손끝으로 낸 거였다. 손끝으로 창틀을 건드리고 있었다.

닥닥닥, 하는 소리가 났다.

선재는 뜸 들이는 척하며 이불 속에서 벗어놓았던 바지를 제 두 다리에 급하게 끼워 넣었다.

엉거주춤 다가가 창문을 열어주자, 범진이 가볍게 뛰어 방 안으로 넘어왔다.

“이게 맛있냐?”

범진이 내민 건 잔뜩 구겨진 도넛 박스였다. 납작하고 이상한 서류 가방 같은 걸 들고 있나 싶었는데 도넛 박스였다. 한 팔로 아무렇게나 들고 와선지 종이 면이 찌그러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거 주러 왔어?”

겁도 없이. 정말 겁도 하나 없이. 선재는 구겨진 도넛 박스를 받으며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어.”

“….”

범진이 선재를 쳐다봤다. 열린 채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에도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창문 안 닫냐. 내 안 갈 건데.”

“…깜박해서.”

진짜 몰랐을 뿐이다. 선재는 뒤늦게 덩어리째 들어오는 한기를 유리창으로 막았다. 부드러운 마찰음이 나면 창문이 단단히 닫힌 것이다. 소리를 들은 선재가 와중에도 창밖을 살폈다. 어제는 새벽 3시에 왔지만, 지금은 자정이 좀 지났을 뿐이다. 사람이 불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

범진은 방 안을 돌아다니며 웃통을 벗었다. 한 번 와봤다고 아주 자기네 집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소변도 거침없이 봤다. 밖에서 폭포 소리 같은 걸 듣고 있던 선재가 잠든 준희의 얼굴에만 눈빛을 보냈다. 다가가 소리를 좀 줄이란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아이가 조금이라도 뒤척일까 마음이 불안했다.

바닥엔 찌그러진 도넛 박스가 놓여 있었다.

선재는 오늘 범진과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도넛 이야기는 안 한 것 같아, 갑자기 이런 걸 들고 등장한 범진이 도깨비 같다 느꼈다.

아닌가? 잠깐 스치듯 말을 했었나? 제가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다. 그건 범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도넛을 제가 좋아하니 사 온 것 같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고마운 마음은 들었다.

선재는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 범진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았다. 드러난 상체가 창가에 어린 빛으로만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어깨는 떡 벌어져 있고, 팔과 배, 가슴까지 딱딱한 근육으로 굴곡지지 않은 데가 없었다. 어둑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점점 가까워지자, 범진의 온갖 문신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어깨엔 징그럽고 무서운 표정을 한 악마 같은 형상이 있고, 곳곳에 뱀과 호랑이, 검은 무늬가 점철되어 있다. 가슴팍 쪽에 있는 독수리와… 선재는 시선을 점차 내리다 제 얼굴과 눈이 마주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왜 또 딴 데 보는데.”

“….”

“만지고 싶으면 만져봐라.”

“…아니… 별로.”

선재는 범진이 한 실없는 말에도 방어하듯 대답했다. 기필코 만지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니 잠깐 그래 있어라.”

선재는 범진이 뭘 하려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바지를 벗고 다리 사이를 손으로 막무가내로 주무르는 범진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드로어즈에선 곧 큼지막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범진은 상처라도 낼 것처럼 거세게 성기를 흔들었다. 위로 살짝 솟은 성기가 고개를 계속 들었다. 탁탁, 살 비벼지는 소리가 선재 얼굴 바로 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선재는 제 얼굴에 집요하게 닿은 범진의 눈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뭘 하는 거냐 묻기에는 뭘 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범진은 이따금 얼굴 들어봐라, 혹은 혀를 내밀어보란 말만 했다. 선재는 그렇게 했고, 쳐다보지 않아도 보이는 범진의 성기에 얼굴을 붉혔다. 제게 닿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부끄러웠다.

범진은 오줌이라도 싸듯 다리를 넓게 벌린 채 자위했다. 손이 성기를 스칠 때마다 살 소리가 척척, 났다. 위로 올라간 대가리에선 침이 질질 뱉어져 나왔다.

범진은 선재의 앉은 모습만 봐도 발기했다. 얼굴만 봐도 발기했고, 말하는 것만 들어도 발기했다. 순식간에 발기한 자지는 갈수록 어둑한 색을 띠며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범진이 입술을 혀로 쓸며 선재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한발씩 앞으로 다가가다 보니, 선재의 코나 이마에도 대가리 끝이 닿고 있었다.

“물고 니 하고 싶은 대로 함 빨아봐라.”

위로 들린 채 꺼떡대는 자지가 선재의 눈을 치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선재가 손을 올려 얼굴을 매만졌다.

“아파, 눈…. 좀 뒤로….”

“알겠다.”

큰 자지가 새파란 핏줄을 세운 채 툭툭 불거져 있었다. 한 걸음 물러난 범진의 움직임을 쳐다본 선재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조금 들었다. 흉포하게 발기한 성기를 제 손끝으로 쥐어보았다. 입에 넣기 위해 살짝만 건드리는 건데도, 성기가 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옷 씹, 가슴까지 올리고 해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진이 선재의 잠옷 셔츠를 잡아 뜯었다. 작은 단추가 다 뜯겨 가슴과 배를 드러냈다. 살짝 볼록한 배까지 드러나자, 범진은 비로소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꺼떡이는 자지도 선재의 입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선재가 입을 여는 게 보이자, 범진도 손을 뻗어 선재의 젖꼭지를 꼬집듯이 쥐었다. 하도 많이 만지고 꼬집어대 유두는 벌써부터 톡 튀어나와 있었다.

선재는 눈을 감고, 입 안에 들어온 범진의 성기를 열심히 빨았다.

웬만하면 쉽게 죽는 성기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선재는 앞니 끝을 세우고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젖꼭지가 비틀리고 있는 채여서 눈 끝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범진의 큰 성기 때문에 목이 아픈 것도 있지만, 가슴에서 오는 자극 때문에도 눈을 바로 뜰 수 없었다. 침이 자꾸 고여 성기를 문 채로 목구멍을 움직여야 했다.

“목으로도 잘 씹네.”

선재가 눈을 떠 위를 쳐다보았다. 목으로 씹으…려고 그렇게 움직인 게 아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범진이 젖꼭지를 툭 치는 바람에 또 눈을 희한하게 뜨고 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씨팔… 니… 씨발, 니는 죽을 때까지 내 좆만 빨아야 된다.”

뭐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범진은 갑자기 선재의 머리채를 쥐고 위로 들었다. 선재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이 젖꼭지를 세게 꼬집을 때마다 두 손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몸이 떨렸고, 얼굴은 시뻘게졌다. 쉽게 사정하지 않는 범진의 성기에 턱도 빠질 것 같았다.

제 침으로 번들거리는 범진의 성기에선 쓴맛이 났다. 쿠퍼액 때문인지, 체향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선재는 목구멍을 깊이 열고, 범진의 성기를 최대한 많이 머금을 수 있도록 했다. 자극에 떨리고 있던 손도 성기로 가져갔다. 입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기둥 부근을 손끝으로 살살 긁기 시작했다.

후으, 하고 범진은 거친 숨을 토했다. 선재는 다른 쪽 젖꼭지까지 꼬집는 범진의 손길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머리를 앞뒤로 계속해서 흔들었다. 범진의 손이 뒷머리에 닿아 있어 속도를 내기는 수월했다.

얼마나 빨고, 얼마나 범진의 말대로 씹어댔을까.

목 안으로 탁한 기운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눈을 감은 채, 목 안에서 지익지익, 분출되는 범진의 정액을 느꼈다. 후우, 하고 고개를 꺾으며 사정하고 있는 범진이 보였다. 불거진 핏줄은 여전히 굵고 뜨거웠다. 제대로 콜록거릴 수가 없어 눈물만 흘렀다. 계속 목을 찔러댔으니 당연했다. 선재는 우으… 하는 소리를 냈고, 범진의 허벅지에 손을 댔다. 그제야 입 안에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입 벌리고.”

잠깐의 여유도 없이, 범진은 제 앞에 앉아 턱을 만졌다. 닫혔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며 입을 벌려보라 했다.

“….”

선재가 천천히 정액으로 범벅이 된 입 안을 드러내 보였다. 진득한 액이 입 안에서 실처럼 늘어지고, 목구멍과 혀, 입천장에 곤죽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범진이 손을 올려 선재의 눈가를 비비듯 닦아 주었다.

“니 구녁 어디든 내만 좆물 쌀 수 있다.”

“….”

“알았냐.”

선재는 범진이 눈가를 닦아주고 있어 눈이 따가운 것 같았다. 입에 있던 정액을 여러 번에 걸쳐서 삼키고, 범진의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따가워 눈물이 자꾸 흘렀다.

범진은 이제 목구멍을 찌르지도 않는데 왜 짜냐고 했다.

선재는 그래도 울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범진이 밉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범진이 싫었기 때문이다.

* * *

선재는 벽을 보고 누울 때까지도 훌쩍댔다. 목도 턱도, 이물감 때문에 제 얼굴에 있는 기관처럼은 생각되지 않았다. 범진이 깐 이불은 어제 것과 똑같았다. 저도 오늘 한 번 깔고 누워보았으니, 이젠 바닥에서 눕는 것도 익숙했다.

“아, 하지 마.”

“아프냐.”

“안 아파.”

범진이 선재의 코를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훌쩍이던 소리가 범진의 손에 막혀 기이하게 났다. 못마땅한 얼굴을 한 선재가 범진의 팔을 쥐었다. 그만하라고 말해도, 자꾸 이런 장난을 쳤다.

“내 손에다 코 한번 풀어봐라.”

“…콧물 나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니까 풀어보라고.”

선재가 발버둥을 쳤다. 또 코를 세게 잡히는 바람에, 더는 안 아프다 말도 할 수 없었다. 범진은 그 틈에 제 어깨를 쥐고 몸을 뒤로 돌렸다. 완전히 마주 보도록 만들었다.

“….”

“어제 뒤돌아서 잤으면 오늘은 얼굴 보고 자야지.”

“….”

잔뜩 젖고 빨갛게 된 얼굴을 내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닐 것이다. 선재는 범진이 말을 하는데도 눈을 들지 않았다. 시야에 잡히는 동물 문신의 가짓수나 셌다. 뱀, 독수리, 용… 이 무늬는 왜 새긴 걸까, 하는 의미 없는 생각도 중간중간 끼어들었다.

“나도 보자.”

“뭐….”

“니 보는 거 나도 좀 보자고.”

범진이 고개를 숙이며 자기 가슴팍을 요리조리 살폈다. 딱히 보고 싶어서 보고 있던 문신은 아니었는데. 선재의 눈이 범진의 얼굴로 향했다.

“….”

“이제는 뭐. 쌍판 보고 싶냐.”

금방 고개를 든 범진과 눈이 마주쳤다. 선재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진이 두 손으로 제 뺨을 꾹 누르듯 잡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턱이 얼얼한데 세게도 잡는다. 아프다고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의 팔을 잡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범진이 웅얼웅얼하던 선재의 입에 제 입을 갖다 댔다. 손으로 뺨을 세게 눌러서, 튀어나온 입이 오리 같았다.

“…니 작년에도 좆나게 예쁜 오리 같았는데.”

“….”

“씹, 쌍판 봐라.”

범진의 입술이 또 닿았다. 선재는 입에 닿는 범진의 입술이 꽤 까슬까슬해 눈가를 찌푸렸다. 바보처럼 튀어나온 입도 숨기고 싶었다. 강제로 오리입을 만들어 놓고 키스는 왜 하는지… 속으로 투덜대며 범진의 입맞춤을 받았다. 처음엔 입에만 닿았는데, 눈과 뺨, 귀, 이마에서도 쪽쪽대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엔 코까지 깨물렸다.

“아, 아파.”

“닌 뺨도 사탕 같이 생겼냐. 이거는 물어도 안 아플 것 같은데.”

범진이 그런 말을 하고 뺨을 향해서도 입을 벌리는 게 보였다. 선재가 눈을 꾹 감고 깨물리는 느낌을 견뎠다.

“아… 진짜.”

선재는 범진의 입이 떨어지자마자, 손을 올려 볼록하게 튀어나온 뺨을 가렸다. 범진이 코앞에서 또 어딜 괴롭힐까, 하는 얼굴로 히죽대고 있는 게 보였다. 선재가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싫으냐?”

“…아프니까….”

“안 아프게 하면.”

“안 아프게 안 하잖아.”

“씨팔… 하면은.”

선재의 입이 여전히 앞으로 쭉 나와 있었다. 범진이 뺨을 누른 채 손을 안 떼주었기 때문이다.

“….”

“나는 씹, 니 이뻐가지고 이라는 건데.”

뺨에 닿은 범진의 손가락에서 하나둘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선재가 붉은 자국이 남았을 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문질렀다.

“….”

“이것도 봐라. 금방 선다.”

그 놓은 손으로, 범진은 선재의 팔목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다리 사이로 가져가 금세 강직된 것을 만지게 했다.

손에 닿은 이상한 느낌에, 선재의 손가락이 일제히 퍼졌다. 알겠다고, 하지 말라고 조용히 말했다.

“씹, 다 하지 말라냐.”

“….”

“이거는.”

또 문신이나 쳐다보려 했는데, 범진의 다음 행동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힘으로 제 몸을 끌어당긴 범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선재는 범진의 품에 안긴 채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처음 포옹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복잡했다.

“이건 안 아프겠지.”

낮게 깔린 범진의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와닿았다. 선재는 범진의 목소리가 제 귀에서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응.”

분명 아프지는 않아서. 선재는 대답하며 고개도 끄덕였다. 범진과 완전히 밀착된 상태라, 끄덕거리기는 쉽지 않았다.

“니도 안아야지, 썅….”

범진의 등을 더듬거리던 선재가 위쪽을 향해서도 손끝을 대보았다. 뜨겁고 단단한 등 근육을 지나, 유독 튀어나온 견갑골에 두 손이 닿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팔딱팔딱 뛰는 게, 물고기가 많은 물 표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런 걸 만질 수 있다면 정말 이런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욕하지 마.”

“닌 그럼.”

“….”

“도망 안 갈 거냐?”

범진과 완전히 붙어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어디 현실감이 있겠나. 장소는 심지어 시설이었다. 범진이 있어선 절대 안 될.

선재는 취한 사람처럼 끄덕거렸다. 해봤자 범진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는 행위에 불과했다.

“…안 갈게.”

“평생 나랑 살아 주냐?”

“…어.”

선재는 안쪽으로 들어온 범진의 손에, 고개가 들리는 걸 느꼈다. 턱을 잡고 위로 드는 범진의 손길에 목이 빳빳해졌다.

“니가 그래 주면 나도 평생에 걸쳐서 함 고치보고.”

선재는 또 알겠다고 말하려다 말이 이상함을 깨닫게 되었다. 평생 도망가지 않는 것과 평생에 걸쳐 언행을 고친다는 건 정도가 달랐다.

“그럼 안 고쳐질 수도 있는 거잖아.”

“니 뭘 믿고 내가 하루아침에 그걸 고쳐주냐.”

“….”

“니 봐라…. 내가 지금 당장 개짓거리 안 하게 됐다고 쳐봐라. 근데 니는 10년 뒤에 도망을 가버리네? 그면 결국 누구 손해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참 그럴듯하게 말했다. 선재가 무표정으로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니 안 튀끼는 거 보고… 나도 씹, 결정을 하든가 해야지.”

범진이 그런 말을 하며 선재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주었다.

모난 손길이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선재는 바짝 당겨져, 범진과 온몸이 닿고 있는 이 순간을 어떻게 느끼면 좋을까 생각했다. 이 자세로 계속 있고 싶은 건 아닌데, 제 손은 여전히 범진의 등에 닿아 있었다. 찬물과 더운물을 한꺼번에 맞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튀어나온 배가 범진의 배에 닿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인정해야 할 건 해야 했다. 선재는 아까 범진의 티셔츠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던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 편안함이 몸을 에워싸는 걸 느꼈다. 뜨거운 숨과 진한 체향, 온몸을 옭은 팔과 다리가 이렇게.

선재는 범진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 실었다.

“안고 있는 건 좋냐?”

“….”

선재는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곤 마음에 걸렸던 것들도 있어, 범진과 눈을 맞춘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이 씹, 조옥거튼….”

범진은 평생에 걸쳐 고치겠다는 욕을, 오늘만은 아무런 제동 없이 할 건가 보았다. 좆같은, 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에 실려 무슨 욕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한동안 뭐라고 살벌한 욕을 더 하던 범진이 입을 벌리며 고개를 숙여왔다.

선재도 입을 벌렸고, 그 후로 한 시간이 지날 동안 입을 붙이고 있게 되었다.

잠시 떨어졌던 것만 빼면 정말 그러고만 있었다. 숨이 차고 침이 흘렀지만 한 시간이 그렇게 갔다.

질척하게 입을 붙이다 잠이 들었는데, 깬 것도 금방이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두 시간 정도 잔 건가. 선재는 눈을 뜬 채로 주변을 살폈다. 소리를 듣고 깼는데, 분명.

“아브지이….”

아이가 침대에서 고개만 뺀 채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놀란 선재가 풀어헤치고 있던 잠옷 셔츠를 손으로 여몄다. 단추가 다 뽑혀 잠글 수도 없었다.

“준희 안 잤어?”

“네에…. 주니 일어나따아….”

잠깐만, 하고 중얼거린 선재가 침대 위에 있던 범진의 티셔츠를 급히 입었다. 걸치고 있던 셔츠 위에 입어 꼴이 우스웠다.

“왜… 무서운 꿈 꿨어?”

“으으응…. 아부지이.”

준희의 눈이 범진에게 향해있었다. 준희가 범진을 본 이상, 아이와도 거대한 비밀을 공유해야 할 듯했다. 어디서 범진을 봤다고 말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터였다. 선재는 퉁퉁 부르튼 입술을 손으로 연신 쓸었다.

준희는 방금 깬 게 아닌 모양이다. 잠에서 막 깨면, 이렇게 쌩쌩하지 않다. 생기가 도는 눈동자가 깬 지 최소 30분은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그 눈을 쳐다보던 선재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범진의 다리를 넘어, 화장실이 있는 통로로 향했다. 거기 있는 작은 조명을 켜고 아이 눈을 바라봤다.

“준희 아부지 본 거 모른 척해야 해.”

“모른 처억…?”

“아, 그니까… 비밀. 아부지 본 거 비밀.”

“녜에.”

“누가 준희한테 방에서 아부지 봤냐고 그러면.”

“주니는 모라요.”

“응, 준희는 모르는 거야.”

“녜에.”

“옳지, 준희가….”

“아부지….”

저를 쳐다보고 있던 눈이 미세하게 어긋났다. 선재의 고개도 뒤쪽으로 향했다.

눈에 들어온 건 어둠 속에서 도넛을 먹고 있는 범진이었다. 어느 틈에 드로어즈는 대충 걸쳤나 보았다. 가만히 앉아 도넛 하나를 입에 우걱우걱 넣는데 몸에 비하면 도넛이 너무 작았다. 도넛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기까지 본 선재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애기 아부지 보고 싶었냐.”

“녜에.”

욕실 주변 조명만 켜둬, 방 안은 적당히 밝았다.

준희는 소리도 없이 걸어가더니, 범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그만 손을 다리 위에 올리고 범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준희 왜 그렇게 앉아.”

근처까지 다가간 선재가 아이의 어깨를 만졌다.

“주니도….”

“이거 먹고 싶냐.”

“녜에….”

그래서 무릎을 꿇고 순서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나 보았다. 간식을 받을 때 꼭 이렇게 앉아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를 저은 선재가 도넛 하나를 통째로 건네는 범진을 제지했다.

“준희 체하면 안 되니까 이것만….”

아이는 뜨겁지도 않은 도넛을, 군고구마 잡듯 두 손으로 잡았다. 반으로 잘라준 도넛이 아이 입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맛있어?”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그제야 다리를 풀었다. 두 발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편하게 바닥에 두었다. 두 손으로 도넛을 들고 있는 건 똑같았다.

범진이 니도 먹으라며 도넛 하나를 선재에게 건넸다.

선재는 도넛 반 개를 이미 손에 든 채였다. 나머지 한 손으로 범진이 건넨 도넛을 받아 들었고, 번갈아 가며 두 개의 도넛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이런 데서 다 같이 도넛을, 그것도 새벽 4시에 먹고 있어 웃기단 생각이 들었다.

“웃냐?”

“웃기잖아….”

“애기야, 니 아부지가 웃기냐.”

입에 있는 도넛을 우물거리던 준희가 뜻도 모르고 에, 웃었다. 아니다. 알고 웃은 걸까?

아이는 도넛을 다 먹고, 손을 닦은 다음엔 기다렸다는 듯 범진의 품으로 가 안겼다.

“아부지…. 주니 아부지….”

“내가 니 아부지다. 그래.”

괜히 저런 말을 했다.

선재는 둘 곁에 서서 범진이 저를 쳐다보는 걸 못 본 체했다.

“내일은 오지 마.”

저 또한 괜히 그런 말을 했다.

범진의 품에 안긴 준희의 몸이 축 처지는 게 보였다. 입으론 아부지, 하고 있었지만, 새벽인 데다 단 음식까지 먹어 졸음이 금방 쏟아진 모양이었다.

범진이 그런 준희를 제법 안정적으로 안고 있었다.

“느 엄마가 오지 말라는데.”

“안 대…. 안 대요…. 주니 아부지이….”

“왜 그렇게 말해.”

“니가 오지 말람서.”

“누가 볼까 봐 그러지.”

“내가 깡패만 10년을 했다. 그거 들키겠냐?”

잘났다. 선재는 고운 풀처럼 흩날리는 아이의 머리칼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척했다. 손을 대고 눈도 그쪽에 두었다.

반짝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닦아준 선재가 아이를 안아 들어 침대에 뉘어주었다.

어떻게 안 들키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기술이 있어 보이니 나름대로 대처하겠지.

선재는 그러면서, 오늘 본 강제 격리자의 퇴소 조건 따위를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지냈다간 범진이 사고를 칠 것 같았다. 감시를 어떻게 시키는 건지, 범진이 매일 새벽 이 방으로 찾아오고 있질 않나. 이럴 바엔 그냥 같이 사는 게 나을 것이다.

선재는 범진이 시설 카메라에 찍히는 일만은 없었으면 했다.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라도 범진이 감옥에 가는 건 원치 않았다.

* * *

범진은 그 후로도 자주 시설을 찾았다. 지정된 면회 일은 물론이고, 새벽에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익숙하게 했다. 범진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쯤 전화를 주면, 선재도 잠을 자지 않고 창밖을 쳐다보다 말다 했다.

크리스마스도 시설 안에서 보냈던 선재는 이브날, 준희와 함께 시설 앞에 있는 트리를 꾸몄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단발성 이벤트였다. 준희는 별을 쥐고 어디에 그걸 걸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1m 60cm쯤 되는 트리는 준희에겐 너무 높았다. 결국, 아이들이 화려하게 꾸며놓은 나무 중간 부분이 아니라, 제일 아래쪽 초록 잎사귀에 아이는 별 하나를 걸어두었다. 그리곤 잘 자라라며 별의 귀퉁이를 쓰다듬었다.

방엔 선물도 와 있었다. 목도리와 귀마개였다. 시설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준희에게도 작은 목도리와 귀마개가 도착해 있었다. 준희는 선물을 보자마자 창가로 다가가 팔을 열심히 뻗었다. 결국, 선재가 안아서 들어 올려 준 다음에야 아이는 밖을 볼 수 있었다. 산타가 금세 가버려 아쉬운 듯한 얼굴을 했다.

준희 착한 일 많이 했나 보다.

선재가 하라버지, 하고 주변을 살피는 아이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사라진 할아버지를 찾는 듯하던 아이도 그땐 짧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선재의 뺨에도 준희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행복.

그런 게 있다면 이런 형태겠지. 미니 전구가 가득 걸린 트리는 초저녁부터 오색빛깔로 반짝거렸다. 벌써 불이 들어온 트리에도 눈길을 보낸 선재가 안고 있던 준희와 함께 그걸 쳐다보았다. 저녁을 먹고 구경을 가려 했는데, 방에서도 트리가 잘 보였다. 아이의 휘둥그레진 눈 안에 초록빛이나 빨간빛으로 된 작은 점이 고였다 사라졌다.

그날 밤에도 찾아온 범진은 어울리지 않게 백팩을 메고 있었다.

선재가 다가가 창문을 열어주자, 그 백팩부터 먼저 방 안으로 던지듯 넣었다.

가방 안엔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던 **시장 튀김이 제일 위에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인데 어디서 튀김을 따뜻하게 공수해 왔나 몰랐다. 정식으로 말한 게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걸 먹어봤냐, 로 시작했던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선재는 통화하던 걸 떠올리고서야 제가 이걸 먹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사왔냐는 선재의 질문에, 범진은 걍, 이라고 대답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을 겁줘서 이 새벽에 사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재는 거기에 대해선 말을 안 하기로 했다. 각종 튀김이 담긴 일회용 용기를 꺼내자, 작은 케이크와 와인도 딸려 나왔다. 남은 케이크가 없어서 조각 케이크를 여러 개 사 왔다는 범진은 씨발, 하고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선재가 그 앞에서 범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거도 봐라. 예쁘냐. 범진이 그렇게 말했을 땐, 백팩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선재가 백팩 안을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범진이 주머니를 바스락거리며 내민 건 반지였다. 유심히 보지 못했는데, 범진은 이미 반지 하나를 끼고 있었다. 케이스 안에 담긴 반지는 선재의 중지에나 들어갈 법했다. 이게 뭔데? 하고 묻자, 범진은 씹, 뭐긴 뭐야. 하고 억지로 선재의 손을 끌어 반지를 끼워 주었다. 역시나 약지엔 안 맞았다. 왔다 갔다 하는 반지를 쳐다보던 선재가 너무 크다는 말만 했다. 반지도 꼭 저다운 걸 골라, 중국 부호나 할 법한 큼지막한 금반지를 선물했다. 알알이 박힌 보석의 개수도 많았다.

범진은 그게 결혼 반지라고 했다. 니 이제 진짜 나랑 결혼한 거라고 억지를 부렸다. 선재는 혼인 신고할 때도 그랬지만, 뭐만 하면 진짜 뭐를 했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범진이 웃겼다. 헐렁거리는 반지를 끼고 알겠다고 말했다.

범진에겐 낮에 느꼈던 감정이나 행복에 대한 단상 같은 걸 굳이 꺼내어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처음부터 시설에 입소했었더라면, 하는 가정도 무의미했다.

선재는 범진이 건네준 와인을 기다란 유리컵에 받아 마셨고, 모양이 이상해진 조각 케이크도 맛있게 먹었다.

임산부도 먹을 수 있다는 와인에선 정말 와인 맛이 났다. 쌉쌀하고 상큼한 게 미각을 자극했다. 톡톡 쏘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범진의 머리카락엔 부서진 마른 잎들이 묻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산을 넘고 다니는 건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였다. 맛대가리가 없을 줄 알았다며, 다 비운 줄 알았던 백팩 제일 안쪽에 손을 집어넣은 범진은 맥주캔 하나를 따서 마셨다. 선재는 와인이 맛있었지만, 범진은 그렇지가 않았나 보았다. 물 마시듯 맥주 한 캔을 그 자리에서 다 마신 범진은 술 냄새를 풍기며 선재의 얼굴을 코앞에서 쳐다보았다. 매일 하는 말을 그때도 했다.

니, 도망가면 안 된다.

선재도 매번 하던 대답을 똑같이 했다.

알겠어.

날은 새벽이 되어, 크리스마스 당일이 돼 있었다.

선재는 입을 헹군 범진과 앉은 상태로 키스를 나누었다. 입을 단단히 헹궈, 맥주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체온만 느껴졌을 뿐이다. 선재는 범진이 손으로 배를 만지는 것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닿은 손을 굳이 저지할 필요는 없었다. 4개월에 육박한 배는 하루가 다르게 그 모양을 부풀리고 있었다. 범진과 자주 만나고, 또 범진의 옷이 한가득이어서 그런지 건강상의 문제도 없었다. 배 속 아이도 건강하다고 했다.

범진은 선재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범수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범진이 난데없이 범수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차고 넘치는 귀여운 태명 중에 범수가 뭔가. 사람 이름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태명을 그렇게 붙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선 범수가 남자아기라고 했다. 그 얘기를 해주자 대뜸 범수, 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같은데. 떠올려봐도 또렷한 이유가 짚이진 않았다.

앉아서 키스하고, 누워서 키스하고, 서서 키스하고. 자세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계속해서 입을 붙이고 있는 건 같았다. 선재가 좀 일어서고 싶다고 하면 범진은 그 앞에서 일어서는 것만 봐주었다. 눕고 싶다고 하면 눕는 것까지만 기다려주었다. 선재는 일어서나 앉으나 누우나 계속해서 닿는 범진의 입술에 정신이 없었다.

곧 섹스할지도 몰랐지만, 그즈음에 깨어난 준희 때문에 서둘러 입을 떼게 되었다.

아이는 눈을 살짝 뜬 채로 범진의 모습을 정확히 식별했다. 아부지가 왔다고 좋아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범진이 저렇게도 좋을까? 선재는 준희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몰랐다. 트리를 꾸밀 때도 아부지랑도 하고 싶단 애기를 꺼냈던 아이를.

범진은 노골적인 소리를 내다가도 준희가 아는 체를 하면 그에 맞는 반응을 해주곤 했다.

왔냐, 하거나 아부지다, 했다.

범진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뭐가 옳고 나쁜지를 모르는 사람인 것도 같았다. 선재는 준희에게 뽀뽀를 받는 범진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이 남자와 아직도 이렇게, 크리스마스까지 보내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작년 초봄에 범진은, 개를 데리고 어느 동네를 활보하고 있었다.

선재는 그때 보았던 범진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지금도 얼굴은 같았다.

선재는 좋냐? 하고 준희를 안고 바닥으로 훅 떨어트렸다 다시 올려 주는 범진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랬던 범진이, 지금은 얼마나 겁나나.

선재는 자꾸 흘러내리던 반지를 중지에 끼웠다.

그랬더니 딱 맞았고, 빠지지 않았다.

생긴 건 이래도 엄청 비싼 돈을 주고 산 것일 터였다. 그런 확신만은 들었다. 굵고 큰 금반지. 보석이 가득 박힌 난해한 디자인의 반지. 범진의 네 번째 손가락에도 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범진에겐 안 어울리는 듯 어울렸다.

준희가 밤에 자주 깨게 된 건 범진 때문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눈을 뜨면 아부지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준희는 산타보다 범진을 더 좋아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선재는 범진과 준희를 쳐다보다 창밖에 내리기 시작한 눈에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준희야, 눈 온다, 하는 말만 했다. 다행히 새벽이라 사람들이 그 눈을 맞으러 나오진 않을 듯했다.

주차장과 분수대, 계단과 시설, 나무들 위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범진의 품에 안겨 꺄, 하고 조용히 감탄했다.

범진은 옆에서 니 같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뭐가? 하고 선재가 묻자, 니가 눈이랑 닮았단 말을 했다. 선재는 범진을 쳐다보다 말았다. 이젠 무생물과도 닮았다고 하는 범진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아서였다. 범진은 제 딴에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선재 같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그냥 예쁘다고 했다. 말에 욕이 섞여 곱게 들리지 않는 데는 있었지만, 어쨌든 마음은 그랬다. 선재도 이제 그 정도는 알았다.

눈은 아침까지 내렸다.

선재는 자신만큼이나 피곤해하는 준희와 점심때까지 잠을 잤다.

범진과는 잠결에 통화를 했고, 눈 내린 산을 두 바퀴나 돌았다는 말을 들었다. 잠에서 깨선 그것부터 물어보았었다. 그래서 괜찮아? 범진은 씨발 씨발 하며 좆나 괜찮다고 했다.

웃음이 피식 났다.

중지에 끼워진 반지는 낮에 보니 더 난감한 디자인이었다.

그래도 그걸 낀 채 식당에 갔고, 그곳에 있는 조각 케이크는 먹지 않았다.

방에 범진이 사다 준 조각 케이크가 아직도 종류별로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재는 준희와 밤새 내린 눈을 밟으며 점심 산책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설 앞 통로엔 눈이 한쪽으로 쌓인 상태였다. 인위적으로 작업을 한 그 길을 지나면 커다랗게 울타리가 진 산과 야생나무들이 눈 앞에 펼쳐지곤 했다. 눈을 안 치웠을 것 같아 그리로 간 거였는데 생각처럼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눈길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준희가 신이 나 그 길을 밟으면, 선재가 작은 발자국 위에 제 발을 대며 준희를 따라갔다.

뽀득뽀득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선물 받은 목도리와 귀마개를 한 아이의 모습이 멀어지지 않도록 했다.

눈 밟는 소리처럼.

떠올리면 언제나 떠올릴 수 있기를.

선재는 저 작은 아이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울지 않기를 바라고, 사람을 잃지 않았으면 했다.

눈밭에 털썩 앉은 준희에게, 선재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갔다.

범진도 이 거리쯤에 있었으면 했다.

범진이 넘었을 울타리 옆에서 눈 장난을 치고 있자니, 범진 생각이 났다.

선재는 두 손으로 눈을 쥐어 꾹꾹 눌렀다. 작은 눈사람을 만들고, 아이가 코 모양의 나뭇가지를 주워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곤 이런 생각을 했다.

범진과 계속 함께 있고 싶다.

* * *

장영수와의 면담 시간은 지루했다. 매일 똑같은 질문을 듣고, 대답을 하고, 각종 심리 테스트와 치료를 받아야 했다. 혹시 모를 협박에 의해 자진 퇴소를 신청한 오메가가 아님을 어떻게든 증명해내야 했다.

선재는 그래도, 거짓말은 친 적이 없었다. 교묘하고 섬세한 심리 테스트에서 가짜로 뭘 적어낸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다.

처음엔 몸 상태도 안 좋아 불안 상태로 판정되었지만 12월 초와 말, 총 네 번 진행된 검사에서 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장영수와의 면담은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다 선재 씨를 위해서 하는 일임은 알고 계시죠?”

“네.”

“다시 입소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어요. 이제.”

“네.”

“최범진 씨가 뭐라고 한 건 아니죠?”

“네,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말이었다. 범진은 다음에 같이 살 생각만 하는 것 같았지, 시설에서 빨리 나와야 한다고 재촉한 적은 없었다. 스스로 새벽에 이곳을 찾아올 수 있어 그런가 보다 싶긴 했지만, 어쨌든 시설에서 하루빨리 나오라 협박받은 적은 없었다.

“최범진 씨한테도 자초지종이 있었다는 걸 저희 쪽에서 알게 되긴 했지만.”

백성우의 얘기를 하는 듯했다. 범진에게 맞은 백성우는 전치 20주가 넘는 부상을 당했지만, 아이를 위협하는 듯한 CCTV가 자료로 제출이 돼 피의자였던 범진과 처지가 뒤바뀌게 되었다 했다. 선재는 아직도 백성우의 몰골이 왜 그랬는지, 그날 무슨 생각으로 오피스텔까지 찾아왔는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아 알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 확실히 제 삶에서 사라져주기만을 바랐다.

시설을 방문한 사건 관계자에게도 범진이 저와 아이 때문에 폭행을 저질렀다고 계속해서 말해온 터였다.

그렇게 말해야겠다는 마음은 첫날부터 가졌던 것이다.

“백성우 씨만….”

“네?”

“백성우 씨만 제 앞에 안 나타나게 해주세요.”

“…최범진 씨는요?”

선재는 눈을 들어 장영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서류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백성우보다 이대로 시설을 퇴소하면 꼼짝없이 같이 살게 될 범진을 더 걱정하는 투였다.

“괜찮아요.”

“최범진 씨 좋아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땐 사이가 별로….”

“싸웠단 말씀이세요?”

어물대며 둘러댄 말에, 장영수는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게 아니라, 사랑싸움 같은, 네.”

“예?”

선재는 거짓말도 그런 어설픈 거짓말을 했나 싶어 사랑싸움, 이라는 단어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장영수는 머리를 손가락을 긁적이는가 싶더니, 앞에 있던 서류를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람 살아도 괜찮겠어요?”

“…네.”

“아이는요.”

“…아이가 그 사람을 더 좋아해서요.”

선재는 옆에 앉아있던 준희에게 눈길을 보냈다. 무슨 자리인 줄도 모르고 매번 따라오긴 하는데, 아이도 이제 소파에 앉아있는 게 익숙해진 듯했다. 고개를 숙이고 소파 가죽 무늬를 쳐다보던 아이가 얼굴을 들었다. 선재의 시선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래도, 아이가… 알파면 모르겠는데.”

“….”

“제가 어떤 부분 염려하는지도 아시죠.”

“…그 사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장영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기관에서는 어쨌든 범진을 위험인물로 두고 있었다. 성인이고, 시설에서 언제든 나가도 좋다는 선재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판단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아이. 선재의 생각을 슬쩍 떠봤던 장영수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만약 추후에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저희 쪽으로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

“선재 씨.”

“네.”

“제 말 들으셨죠?”

“…네.”

선재는 왜 기분이 나쁜지도 모르면서 기분이 나쁘다 여기고 있었다. 범진을 바닥으로 보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질문은 준희 때문에라도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장영수는 낯선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다시 한 번만 더 물을게요.”

“네.”

테이블 서랍을 연 장영수는 거기서 손바닥만 한 녹음기 하나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민선재 씨는 외압으로 인해 시설 퇴소를 희망하는 게 아니죠?”

“네.”

“최범진 씨와는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혼인 신고를 한 게 맞고요?”

“네.”

“여기 작성하게 될 퇴소 동의서는 100% 본인의 의사로 작성하게 되는 겁니다. 맞습니까?”

“네.”

이런 식의 녹취와 서류 작성은 처음이었다.

정말 나가게 되는 걸까.

선재는 이후로도 몇 개의 질문에 맞다거나 아니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이상하게 긴장으로 쿵쿵댔다.

장영수가 건넨 서류엔 여러 항목을 동의와 비동의로 나누어 체크할 수 있는 공란이 있었다.

선재는 10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서류를 정성껏 작성했다.

서술형식으로 답해야 하는 문항에도 꼼꼼하게 글자를 써넣었다.

어째서 손이 떨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요즘 들어 오른쪽 손목에 힘이 빠질 때가 있는데, 그 때문인가 보았다.

선재는 결국 형편없는 필체로 특정 문항에 응답했다.

범진이 보면 놀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으로 놀린 적은 없지만, 워낙 필체가 좋으니 이 서류를 봤다면….

글쎄.

선재는 범진이 좋아할 얼굴만 떠올렸다. 글자가 어떻고는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가겠다고 쓴 거냐고, 나랑 같이 산다고 네가 말을 했냐고. 뭐 그런 말만 하지 않을까? 선재는 건넨 서류를 눈으로 훑어보는 장영수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장영수는 바로 퇴소할 수는 없단 말을 이어서 했다.

면회를 하는 것도 절차가 있었으니, 퇴소 관련해선 당연히 복잡한 절차가 따를 것이라 했다.

선재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선재를 쳐다보고 있던 준희가 똑같이 네에, 하고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범진은 그날 많이 좋아했다.

니가 나가겠다고 했냐?

그렇게 물었고, 선재는 낮에 예상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하는 범진 때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작게 웃었다.

그런 선재를 향해 범진은 왜 웃냐고 물었다.

자꾸 봐주니까 뵈는 게 없냐? 했다.

그런 건 아닌데. 선재는 대답을 하려다 말았다.

곧 범진의 입술이 붙었고, 입을 열고 그의 혀를 안으로 들이기만 했다.

뜨거운 숨이 오갔다.

범진은 선재의 손을 자꾸만 곁눈질해 쳐다보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아예 선재의 팔목을 높이 들어 어딘가를 살피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를 잡아당기는 걸 보아, 반지가 제대로 끼워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굵고 촌스러운 금반지.

그게 선재의 손에서 잘 빛나고 있는지를 쳐다본 것이다.

키스 도중에, 범진은 입을 떼고 이걸 빼는 날이 니 초상날이라는 말을 했다.

선재는 범진이 거짓말을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았다.

며칠 동안 반지를 제대로 끼지 않았는데, 그걸 범진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도 말을 저렇게 하다니.

처음에 웃었던 것처럼 웃음이 나려 했다.

범진은 혼자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맞추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떼고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뒤질 때도 내 함 찾아봐라.

….

혹시 아냐? 내가 대신 죽어줄라 할지?

그런 말을 웃으면서 했다. 죽이겠다고 했다가, 죽을 때 되면 저를 찾으라고 했다가. 말에 앞뒤가 하나도 없었다.

선재는 칼질까지 가르쳐주겠다는 범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건 안 배우겠다고 대꾸했다.

다시 닿은 범진의 입술과 혀는 작은 심장 같았다.

쿵, 쿵, 쿵… 작은 심장이 모여 큰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곁에 있으면 늘 크게 들리는 범진의 심장 소리. 선재는 여전히 그 소리를 신기하게 들었고,

12월의 마지막 날은 고요하게 오고 있었다. 창밖이 푸른 어둠으로 부푼 게 보였다.

* * *

“주니, 주니가 내려가요.”

“응, 준희 내려가자.”

준희는 선재가 반쯤 안은 채로 태워주는 미끄럼틀에도 늘 준희가 내려간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긴장감에 괜히 하는 말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타기 적합한 실내용 미끄럼틀인데도, 아이는 겁을 먹곤 했다.

선재가 준희의 두 팔 사이에 손을 넣고 있다가, 준희의 소리를 듣고 미끄럼틀을 조심해서 태워주었다. 속도가 거의 안 나는데도 아이가 주먹을 꼭 쥐는 게 보였다.

“준희 무서우면 타지 마.”

“네에.”

그래놓고 내일 또 태워달라고 할 거다. 무섭긴 하지만 재미도 있나? 실내 놀이터에 오면 꼭 미끄럼틀을 한 번은 타고 마는 아이의 마음이 알쏭달쏭했다.

준희는 이곳에서 밥도 잘 먹고, 실내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좋아했다.

놀이터가 제일 안쪽 건물에 있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돼, 하루가 멀다하고 준희와 찾아오곤 한다.

선재는 미끄럼틀만 빼면 여기저기 다니며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서 하는 준희가 기특했다.

유독 몸집이 작아 큰 아이들에게 밀려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모습이었다.

선재는 납작한 쿠션 위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준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준희 재밌어?”

“녜에.”

“아까 친구가 밀어내서 안 서운했어?”

“녜….”

“그래?”

“녜에.”

대답을 하면서 뛰기가 곤란했는지, 준희는 발짓을 멈추고 선재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계속 놀 수 있겠어?”

“…으으응. 주니가 해주께.”

아이는 제가 지루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쿠션에서 내려가 선재의 손을 잡은 준희가 공이 가득한 풀장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잡는 힘도 제법 생기고.

선재가 다른 생각을 하며 준희에게 이끌리는 척 뒤를 따라주고 있었다.

공으로 가득 찬 풀장엔 준희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보호자와 함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선재도 준희가 이끄는 쪽으로 향했다. 고무 계단을 넘고, 풀장 안으로 다리를 빠트려 보았다.

“조아?”

“…응?”

“조아요?”

“응, 좋아. 준희야.”

저를 따라 하는 듯한 말투에 웃음이 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즐거운 걸 나누려는 아이의 마음이 따뜻했다. 몸이 아팠을 때도 아이가 얼마나 제 생각을 많이 해주었나. 침대와 바닥을 오르내리며 뭔갈 해주겠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사진처럼 남았다. 선재는 노란 공 하나를 주워 준희에게 가볍게 던져주었다.

까르르 웃으며 공을 못 잡은 아이가 두 손으로 빨간 공 하나를 쥐어, 잡았다고 했다.

“그 공 아닌데….”

“우응?”

두리번거리며 노란 공을 찾는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야구공보다 작은 공인데도 아직은 두 손으로 잡는 게 편할까? 갓 태어난 소동물이라도 만지듯 소중하게 노란 공 하나를 건져 올린 준희가 이 공이라며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준희 잘하네.”

“주니가아?”

“응, 준희 잘해.”

그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다가와 제 다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시끌시끌하고 원색 컬러가 난무하는 환경인데도 준희만 보이고 준희의 목소리만 들렸다. 선재는 기분이 좋다고 다리를 끌어안은 준희의 행동에 그저 웃기만 했다.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도 좋다고 말했다.

“선재 씨.”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선재가 장영수가 눈짓으로 실내 놀이터 밖에 위치한 의자를 가리키고 있는 걸 보았다.

준희에게 조금만 기다리라 말한 선재는, 밖으로 나가 장영수가 건네는 보관용 서류를 받아 들었다.

“전화로 하긴 좀 그래서.”

“…네.”

“10일 퇴소로 결정됐어요. 생각은 변함없고요?”

“네. 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재는 서류를 한 손으로 쥔 채 장영수를 향해 고개 숙였다. 강제성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선의로 저와 준희를 보호해주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장영수와는 오랫동안 상담 명목으로 통화를 나눠 오기도 했다. 특유의 무게감이 있던 말투.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선재 씨.”

어떻게든 범진과 떼어놓으려 노력하던 장영수의 말투에 부드러움이 스몄다.

“네.”

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영수를 바라봤다.

“꼭 행복하세요.”

활짝 열린 실내 놀이터 유리문 안쪽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재는 약속까지 하자는 장영수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얼떨결에 걸었다. 네, 하고 간단하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무얼 지키려 한 거였을까. 저나 준희가 잘못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를 하고 싶어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선재는 매일같이 시설을 드나드는 범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영수가 말한 행복을, 범진과 함께해서 느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확신할 수 없지만, 결국 택하게 된 게 범진이었다.

결론만 보자면 그랬다.

범진을 변호해줬고, 그의 안부를 물었고, 창문으로 드나드는 게 들통날까 아이에게도 비밀이란 말을 수없이 했다. 전화가 오면 창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렸고, 상담을 하면서는 혹시 범진과 같이 못 살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치를 봤다.

왜 그랬을까?

선재는 그래도 보는 건 계속 봐요, 하고 지나가는 장영수의 모습을 뒤돌아서까지 지켜보았다.

* * *

“아, 씹, 추워서 디졌다.”

선재는 창문으로 넘어오자마자 추위를 핑계 삼아 몸을 끌어안는 범진의 행동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갑냐.”

“아니.”

“얼굴 좀 보자.”

범진이 두 손으로 마찰열을 냈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세게 비빈 후에야 점퍼에 얼굴을 묻은 선재의 뺨에 제 두 손을 갖다 댔다.

“오늘 뭐 했는데.”

“그냥 밥 먹고.”

범진은 오늘 낮에도 묻고, 저녁에도 물었던 걸 또 묻고 있었다.

선재도 했던 대답을 똑같이 했다.

“밥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있어.”

요 입, 이걸로, 하며 범진은 선재의 입술을 엄지로 만졌다. 처음엔 장난을 치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입을 몇 번이나 맞췄다. 밥은 니 입으로 들어가서 무슨 호사냐고 했다. 범진이 자주 쓰는 말이기도 했다.

“니랑 안 떨어지고 싶다.”

“….”

선재는 겨울 산을 타고 넘어온 범진에게서 마른 나뭇가지 냄새를 맡았다.

요 며칠 눈이 내리다 말다 해, 산은 차가운 물기가 가득한 것 같았다.

범진의 점퍼와 바지 곳곳에 살얼음이 묻었다 녹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안 떨어질 수 있는지 니가 낸테 차차 가르쳐줘라.”

“….”

범진은 단순해서, 말의 앞뒤가 없었다. 하고 싶거나 떠오르는 말이 있으면 즉각 하고 봐야 속이 후련한 타입이었다. 뽀뽀를 몇 번 했다고, 입술에선 따뜻한 체온이 감지되고 있었다. 선재는 알겠냐고 물으며 또 입을 맞추는 범진에게 대답을 할지, 고개를 끄덕일지 생각했다.

얼굴에서 범진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쪽,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닌 씨발, 좀만 덜 이뻤어도 내 눈에 안 띄었을 건데.”

“….”

“이번엔 걍 조졌다고 생각해라. 인생.”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열라치면 닿아오는 입술 때문에 한마디 꺼내는 게 어려웠다.

뺨을 빨리고, 눈과 이마, 인중까지 빠짐없이 빨리는 바람에 선재의 얼굴은 연한 붉은 반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간지러워.”

귀에도 범진의 혀가 닿자, 선재가 인상을 썼다.

“씨발, 빨고 싶다.”

“…좀 있다가 해.”

범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니가 뭔데 이래라저래라하느냐 투덜댔다.

선재는 떨어질 줄 모르는 범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퇴소일 정해졌어.”

“…언제.”

“10일.”

“내 그때 니 데빌러 오면 그대로 깜빵 가는 거 아니냐.”

“….”

“엉? 저, 짭새 쫙 깔려 있고.”

농담도 싱거운 것만 골라서 했다. 그게 진짜라도, 범진은 저를 데리러 올 것 같지만.

“…씹, 잡히든 말든 니 쌍판이나 실컷 보고 들어가지.”

“….”

“그리고.”

“….”

“내가 말을 잘못했다.”

“뭐.”

“니 인생. 조지라고는 했는데, 뭘 그래 조질까는 싶다.”

“….”

“내랑 살아 주면 해달라는 거 다 해주기로 했는데.”

“….”

“나중엔 좀 덜 조지게 될랑가 아냐?”

범진은 그 말을 하며 쩝, 하는 소리를 냈다. 곧 닿은 입술은 원래 범진의 입술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머리와 옷에 녹은 살얼음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선재는 바닥에 툭 떨어지는 범진의 점퍼에 눈을 감았다. 입 안을 휘젓는 혀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 입맞춤을, 이 새벽과 범진의 말을, 선재는 정성을 다해 기억하기로 했다.

나중에 이 기억이 소중한 것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선재는 차가운 범진의 몸 여기저기에 손을 올렸다. 머리를 털어주었고 축축하게 젖은 목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쓰디쓴 체향을 뒤덮은 겨울의 산 냄새를 밤새 맡았다.

* * *

정신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1월 10일은 아침부터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밥을 먹고도 인사하러 갈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

선재는 준희를 데리고 식당과 사무실에 들러 여태 안면을 텄던 사람들에게 잘 지내란 인사를 전했다.

장영수는 출장 일정으로 내일모레나 시설을 들를 거라고 했다. 선재가 장영수의 개인 번호로 간단한 메시지를 작성해 보냈다. 그동안 감사했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고.

“주니도 잘 지내께요.”

상대방의 잘 지내란 소리에, 아이가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게 들렸다.

선재는 웃으면서 앞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픈 사람들이 많은 만큼, 낫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선재는 그동안 오가며 짧은 대화라도 나누었던 사람들이 보이면 다가가서 건강을 잘 챙기라는 말을 꼭 해주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지내면서 오지랖만 늘었나 싶었다.

선재는 품이 큰 후드티를 입고, 그 위에 점퍼를 걸친 채였다. 챙겨갈 짐은 없었다. 처음부터 시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쇼핑백에 든 건 범진의 옷뿐이었다. 혹시 모른다고 직원이 억지로 건넨 세면용품과 빵이 아니면 쇼핑백도 필요가 없을 뻔했다.

시계를 쳐다보니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8시부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었던 범진은 한 번 전화가 온 뒤로 더는 연락이 없었다.

차에서 잠이라도 든 걸까. 괜히 8시부터 시설까지 오고 난리였다. 분명 천천히 오라고 했는데.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은 채 시설 건물의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키와 관련 서류를 모두 반납했지만, 이곳을 떠나는 게 믿기지 않았다. 3개월간 꿈을 꾸듯 편안했고,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아부지, 아부지, 주니에~ 아부지.”

오늘 범진을 본다고 말을 해둔 터라, 아이는 문을 나서자마자 매번 하던 식으로 범진을 부르기 시작했다.

편안했던 3개월.

전적으로 시설의 덕만 본 건 아니었다. 초반엔 악몽을 많이 꾸고, 몸 상태도 안 좋아 고생을 꽤 했으니까.

범진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아팠을 것이다.

“주니에~”

아이는 어디로 가면 범진의 차가 있는지 이제 빠삭하게 안다. 아부지, 하는 말이 덧붙은 준희의 흥얼거림은 범진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끝이 났다.

입김 사이로, 범진이 먼저 달려간 준희를 한 품에 안아 드는 게 보였다.

범진은 야이씨, 좋냐, 하고 늘 하던 말을 했다.

천천히 다가간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준희를 단단히 잡고 선재에게 메롱 하는 시늉을 했다. 혀를 내밀어 보란 뜻이었다. 아이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선재가 미간을 조금 찌푸린 뒤 혀를 내밀었다. 범진이 그 혀를 능숙하게 잡아 제 입으로 빨아당겼다.

범진과 계속 살면 입 안 살이 다 헤지지 않을까.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범진과 키스했다. 쇼핑백을 쥔 손에선 굵직한 금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범진의 손가락에서도 똑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선재는 입을 뗀 뒤 준희부터 안아 들었다. 가벼운 쇼핑백만 든 채여서 어려울 건 없었다. 아이를 뒷좌석으로 가 카시트에 태우고, 옆에서 그걸 쳐다보는 범진에게 시선을 보냈다.

“…왜?”

“왜? 니는 아직도 왜냐는 말을 하냐.”

손끝으로 눈가를 긁은 선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또 말이 없냐고 물어올 걸 알면서도 그랬다. 선재는 역시 예상과 비슷한 반응을 하는 범진을 피해 조수석으로 갔다. 문을 열고 따뜻한 차내의 분위기를 느꼈다. 선재가 조수석에 타기가 무섭게 운전석에 몸을 실은 범진이 선재의 손을 잡았다. 히터를 켜둔 채 본인은 나가 있었던 모양인지, 닿은 손이 차가웠다.

“아, 추워 디지겠다.”

“차에 있지.”

“저기서 보고 있으면 니 방부터 2층 유리까지 니 뭐 하고 있는지 다 보이는 거 아냐.”

하여튼 안 해도 될 짓은 혼자 찾아 다 했다. 좋다고 웃는 범진의 낯에서 선재가 시선을 거뒀다. 차가웠던 손이 금세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일단 가자.”

범진이 출발시킨 차는 한 시간 넘게 도로 위를 달렸다.

차가 거의 없는 길거리를 누비기도 하고, 번화했지만 오전이라 고요한 어느 역 근처를 지나치기도 했다.

여기로 가면 더 가깝나, 하고 운으로 가까운 길을 찾던 범진은 이상한 길로 들어섰다.

좁은 흙길이었다.

겨울이라 바짝 말라 있었지만, 날이 따뜻해지면 물기로 늘 젖어 있을 듯한 길이었다.

선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범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디 가?”

“집에.”

보이는 건 고즈넉한 풍경뿐이다. 선재는 눈이 녹지 않은 탓에 하얗게 보이는 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잔가지들이 옷을 벗고 서 있는 게 눈에 훤했다.

커다란 비닐하우스와 작은 주택들도 몇 채 보였다. 길을 더 지나자 저수지 근처에 늘어선 식당들이 눈에 들어왔다.

근방에서 다시 길을 꺾은 범진은 포장되지 않은 길도 능숙하게 달렸다.

뒤쪽을 쳐다본 선재가 차가 들썩일 때마다 두 손으로 즐거운 티를 내는 아이를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속도를 늦춘 범진이 차창을 내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민가와는 많이 떨어진 곳이긴 해도 아래쪽에 집 몇 채가 있긴 했다. 차도 너머로는 아까 보았던 저수지도 모습을 조금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 구경 좀 하라고 차를 앞에 댔다는 범진은 뒷좌석 문을 열고 준희부터 안았다.

“같이 가자.”

구경을 하라고 해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범진은 잠시도 못 참고 선재에게 같이 가자 손을 내밀었다.

범진과 준희를 번갈아 쳐다보던 선재가 저수지와 등을 지고 범진의 손을 잡았다.

대충 다듬어 놓은 길이었다. 어려움은 없었지만, 아이와 같이 다닐 땐 조심해야 할 듯했다.

범진의 손을 잡은 채 길을 걷던 선재가 담장에 가려져 있던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고동색 통나무가 큼지막하게 지붕과 벽에 덧대어져 있는. 얼핏 펜션 같기도 한 집이었다. 전에 살던 단독주택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일부러 깔아놓은 듯한 잔디 구역이 넓었다. 마당 한구석엔 큰 지붕이 설치된 정자도 있었다.

“이게 뭔데…?”

“뭐기는. 니 아 낳을 때까진 여서 살라고.”

범진은 산 봐라, 물 봐라, 하며 좋은 공기를 마셔야 살도 찌고 건강하게 애도 낳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일단은 너무 추웠다. 경기에서도 영하 5도쯤 되었는데, 산동네 근처로 들어오니 특유의 한기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영하 10도 아래로도 충분히 내려갔을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자는 범진의 말을 선재도 순순히 따랐다. 점퍼 모자를 쓴 아이의 얼굴은 범진의 몸에 묻혀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좀 춥다….”

통나무 벽과 뾰족한 지붕 모양으로 솟은 천장이 멋들어진 집이었다. 구석에 있는 난로는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것 같긴 했는데 멋있긴 멋있었다. 기분 좋은 시럽 향기가 어디서 나고 있었다. 선재는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도 추위 때문에 손을 떨었다. 그 손을 잡고 있던 범진이 아이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향했다.

“준희 여기서 살 거래.”

아이도 추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 준희지만 볼은 새빨갰다. 안으로 들어와도 나아진 게 없었다.

선재는 벽면에 있던 스위치를 만지던 범진이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방 구경할까.”

“녜에.”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는 방은 그나마 따뜻했다. 문고리가 세 개쯤 보이고, 계단도 있었지만 둘은 집구경 하는 걸 잠시 관뒀다. 식은 바닥이었지만 차갑진 않았다. 먼저 앉은 선재가 품 안으로 준희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러면 안 춥지.”

“녜에.”

근처에 어린이집은 있을까. 병원이야 차가 있으니 왔다 갔다 하면 된다지만, 아이는 집에만 있는 것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이전에도 종종 그래왔으니. 그래도 기껏해야 6, 7개월 정도긴 해서… 괜찮을까. 선재는 품에 있는 아이를 고개 숙여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금방 웃어주는 아이의 코를 제 코로 비볐다. 히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실에선 입김이 나왔는데, 방은 좀 덜하다.

그래도 이렇게만 있을 순 없어, 선재는 아이에게 잠깐 기다리란 말을 하고 방을 나섰다.

당장 필요한 것도 사러 나가야 할 텐데.

다행히 옷 같은 건 오피스텔에서 몇 벌 가져와 둔 것 같긴 했다. 소파나 옷걸이에 익숙한 옷들이 대충 걸려 있었다. 전자제품도 눈에 익은 것들이 보이고, 아이 수저 같은 것도 주방 쪽을 지나며 보게 되었다.

선재는 거실 창으론 범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어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개씨팔들이 뒤질라고. 내가 씹, 어제까지 처리 다 해놓으라고 했지. 가만있으니까 우습냐? 화아, 사장 새끼 바꿔, 씨발롬아.”

보일러에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선재는 괜히 추운 티를 낸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뒤를 돌아본 범진과 눈이 마주쳤다.

“….”

“이 씹….”

혀로 입술을 쓱 훑은 범진이, 한 시간 내로 안 오면 죽일 거란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근데 방은 별로 안 추워.”

다가가며 그런 소리를 했더니, 범진의 굳었던 표정이 풀리는 게 보였다.

범진은 천천히 다가오는 선재를 향해 제 몸을 불쑥 붙였다. 선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옆으로 숙여 말간 얼굴을 쳐다봤다.

“니도 죽이까.”

“죽인단 소리도 좀 그만하고….”

“…뭐.”

“행패 부리고 그러면 신고만 당해. 여기까지 왔으면 좀 조용히 살자….”

“얼어 죽게 생겼는데 무슨, 씹.”

“같이 살아만 주면 내 말대로 다 해주겠다면서.”

“…이게… 씨.”

“그 사람들 와도 욕하고 그렇게 하지 마. 겨울이니까 춥지.”

“어쭈.”

범진은 같잖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으면서도 무슨 말을 더하진 않았다. 그냥 허, 하고 웃었다.

“…옷은 거실에 있는,”

“야.”

“왜.”

“내 버리지 마라.”

“….”

“버리면 닌 내 죽이는 거다.”

언제는 죽이랬으면서.

그렇게 죽인단 말을 쉽게 하면서 오늘은 저렇게 말했다. 선재는 칼질을 가르쳐주겠다던 범진의 말을 떠올렸다.

“칼로… 무슨… 그렇게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는 죽여도 되는데.”

“….”

“내 버려서 내 죽이진 말라고.”

하늘이 파랬다.

선재는 대꾸할 새도 없이 닿아오는 범진의 입술에 고개를 위로 들었다.

숨과 혀가 얼마나 다른지는 모르겠다. 거의 비슷하다. 선재는 뒷머리를 받쳐 든 범진의 손에 안정감을 느끼고 목에 힘을 뺐다. 실눈을 감았다 떴다 해서, 파란 하늘이 범진의 머리 너머로 작게 보이고 있었다.

나쁘고, 저열하고, 모자란 사람도 사랑을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할 수 있고, 다쳐가며 무언가를 포기할 수도 있다.

범진의 방식이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이 관계는 어쩌면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을지 모른다.

그가 지핀 사랑의 불씨가 옷깃을 점점 태우게 됐을지도 모른다.

기회가 있다면 언제나 범진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얼 하는가.

선재는 범진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도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는 것들이, 그럴 수 없었던 것들이 우리 앞에서 눈 녹듯 사라지게 될 것도 같았다.

선재는 눈을 감았다.

검붉은 눈앞이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아도, 그 하늘이 얼마나 파랬는지는 기억에 남는다.

눈앞에 마음이 없어도, 사람은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애타게 제 몸을 안는 범진의 팔에, 그가 가진 마음이 느껴졌다.

거의 망가졌던 삶을, 제 인생을,

서툴게 기워주는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잘못된 행동과 방식을,

이해하고 싶어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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