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5/29)

* * *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인데, 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았다. 이르게 핀 꽃도 다 떨어질 듯했다. 선재는 아침에 멀뚱멀뚱 깨어, 바로 옆에서 잠든 범진과 준희를 차례로 살폈다. 빗물이 타닥타닥,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봄비가 유난스럽게 내린다고 생각하며, 선재는 범진의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7시 22분. 흐린 아침의 봄비 소리가 쓸데없이 청량했다.

시계를 잠시 쳐다보고 놓았던 휴대폰을, 선재는 다시 들었다.

메시지 표시가 하나 들어와 있는 게 뭔지 궁금해서였다.

범진이 누군가와 연락하는 건 자주 봐 왔지만, 휴대폰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자는 범진을 확인한 선재가 손으로 잠금화면을 밀었다. 비밀번호 창이 뜨자, 선재는 작게 뜨고 있던 눈을 더 작게 떴다. 범진의 생일을 누르자 잘못된 비밀번호라고 떴다. 태어난 연도와 붙여도 틀렸다는 진동이 징 울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범진의 얼굴을 확인한 선재가 제 생일인 1120을 눌렀다. 역시 잠금이 풀리지 않았다.

“….”

오기를 갖고 제가 태어난 연도와 생일을 합쳐서도 입력해 보았다.

징, 울리는 진동이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생일을 두 번 이어붙여 여덟 숫자를 만들어도 결과는 똑같았다.

선재는 계속해서 숫자를 조합해서 넣다가 30초 기다려 달라는 안내 글귀에 인상을 썼다.

기다렸다가 또 해볼 심산이었다. 선재는 손가락을 화면 바로 앞에 둔 채로 범진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잠에서 깰 것 같으면,

“아….”

범진이 눈을 뜬 채 옆을 쳐다보고 있었다.

“니 뭐 하는데.”

“시계….”

선재는 위로 들고 있던 휴대폰을 침대 위에 놓았다. 범진이 손을 내려 다시 선재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었다. 그리곤 손을 아까처럼 위로 들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2초, 1초.

시간이 다 지나 잠금화면으로 전환되었다.

“눌러봐라.”

밑에서 쑥 튀어나온 키보드에, 선재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뭘….”

“니 이름 이니셜도 하나 붙여야지….”

“….”

“나는 쎅쓰도 좋아하니까 겸사겸사 에쓰….”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도 잠시 망설이던 선재가 S를 누르고 제 생일인 1120을 다시 덧붙여 보았다. 확인을 누르자 제 사진이 배경인 화면이 떴다. 엊그제만 해도 이 사진이 아니었는데 어느 틈에 또 사진을 바꿨나 보았다.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보려고… 내 사진.”

너무 쉽게 바뀐 화면에 당황한 선재가 떠오르는 대로 입에 올렸다.

“봐라.”

갤러리엔 폴더가 몇 개 없었다.

맨 앞에 있는 폴더를 누르자, 1,056장의 전체 사진이 주르륵 떴다.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인물사진뿐이었다. 대부분이 제 사진이었다. 아니면 범진과 같이 찍힌 사진, 그게 아니면 준희가 눈에 띄었다. 아이 사진도 찍는구나, 싶어 한 장을 클릭해 보면 준희가 소파에 앉은 모습이 크게 확대됐다. 그것 외에도 눈사람처럼 옷 입은 아이의 모습이나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 같은 게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이거 나 보내줘….”

“알았다.”

털모자를 쓰고 마당 잔디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선재는 이전 버튼을 누르고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 것 외엔 봐도 봐도 제 사진뿐이었다.

잠든 모습은 언제 찍었는지.

뭘 먹고 있는 사진도 많고, 아이와 둘이서 브이하고 있는 사진도 눈에 띄었다. 그런 거야 직접 포즈를 취했으니 기억에 남지만. 대부분이 그냥 찍은 것들이었다. 옆에서 찰칵, 하는 소리를 자주 듣긴 했지만 보고 대부분은 지우는 줄 알았다. 눈을 덜 뜨거나 순간적으로 찍혀 얼굴이 이상하게 나온 사진도 많았다.

스크롤이 끝까지 닿을 때까지, 선재는 제 얼굴만 실컷 봤다.

휴대폰 옆 버튼을 누른 선재가 범진에게 그걸 건넸다.

왜, 하고 다시 휴대폰을 손에 쥐여준 범진이 선재의 손을 높이 들었다.

“니 딴거 하고 싶었던 거 아니냐.”

“…뭘.”

“이런 거.”

정작 움직이는 건 범진의 손가락이었다. 범진은 메시지함과 어플을 열고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대부분이 일과 관련돼 있었지만, 자기네들 업소에 놀러 오란 메시지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안 보는 듯 다 읽고 있던 선재가 이따금 미간을 찌푸렸다. 형… 하고 시작된 문자도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잠시만….”

제 손가락을 화면에 댄 선재가 형… 하는 문자를 위에서 찾아 터치했다.

강민우라는, 일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 있던 그 직원의 메시지였다. 형… 너무 하세요, 하고 시작된 메시지가 길게도 쓰여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짓밟고 무시해도 되느냔 내용이었고, 도중엔 제 이야기도 있었다. ‘그 사람’과 결혼한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남자 오메가가 좋은 거면 이대로도 자길 가끔 만나달란 내용이었다. 선재가 거기까지 보고 범진을 쳐다보았다.

“형이라고 그러네….”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말을 꺼낸 선재를 향해, 범진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따른 사무소에서 함 마주쳤는데.”

“….”

“그때부터 지가 먼저 형이라고 불렀다.”

“….”

“낯짝 두꺼운 오메가들 얼마나 많은지 아냐…. 알파나 그냥 남자 새끼면 재수 없어서 패주기라도 할 건데.”

선재는 민우의 체구를 떠올렸다. 영원과 쌍둥이 같았던. 작은 키와 작은 체구 때문에 일단은 오메가라고 의심부터 받고 볼 외양이었다. 민우의 눈물을 본 이후로, 사무소에선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었다. 제가 오는 날마다 일부러 모습을 감추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잘렸던 모양이었다. 메시지에 그런 뉘앙스의 문장이 있었다.

“귀엽던데.”

“귀엽다고. 그기 귀엽냐. 토 나온다.”

“…그래?”

“니 콧물이 더 귀엽다.”

“….”

“이게 어디서 지 서방을 떠보고.”

범진이 습관처럼 선재의 잠옷 바지와 팬티 안에 손을 넣어, 동그란 볼기를 한 손에 쥐었다. 잡아당기듯 놓자, 선재가 불편한 듯 몸을 비비 꼬았다.

“금마가 내 결혼한 거 아는데도 지랑 만나자고 하던데.”

“….”

“만나까.”

선재에게 떠보지 말랬는데, 범진은 이제 제가 떠보고 있었다.

엉덩이에서 손을 빼낸 범진이 선재의 머리칼을 한 가닥 두 가닥씩 만졌다.

만나까, 하는 말에 고개를 든 선재가 무표정하게 범진을 올려다봤다.

“니 괜찮다면 만나고.”

실 웃으며 그런 말을 건넨 범진이 선재의 작은 얼굴을 위쪽으로 더 들어 올렸다.

“….”

“어짤까.”

“…만나지 마.”

선재는 그런 말을 하고 범진에게 두 팔을 뻗어 안겼다. 더 잘래… 중얼거리며 범진의 가슴팍에 먼저 머리를 묻었다.

쉬지 않고 선재를 떠본 범진이 만족한 얼굴을 했다.

머리통이 애새끼처럼 부드럽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선재의 뒷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잠시 뒤 깨어나 준비를 했는데,

그게 꿈이었다.

눈을 뜬 선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2시에 예약을 잡았는데 너무 많이 자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을 짚으며 느릿하게 일어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두 발에서 쥐가 나 당장 척척 걷기가 꺼려졌다. 뻐근함이 느껴지는 두 손은 이미 덩어리처럼 부은 상태였다. 원래도 깨고 나서가 가장 힘들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뒤뚱거리며 앞으로 걸어간 선재가 문을 열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비는 그친 듯 보였지만 날이 여전히 흐렸다. 선재는 문턱을 넘어 시계부터 확인했다. 11시. 보통 한 시간 전에 출발을 하니 그리 늦잠을 잔 건 아니다. 짧게 계산해본 선재가 주방에도 눈길을 던졌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배치 그대로였다. 소파에도 앉은 흔적이 없는데.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날이면, 준희는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 영화를 오전부터 보곤 했다. 조금 더 걸어서 주변을 살핀 선재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 놀이방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일단 소파로 가 앉았다.

텔레비전을 켜고 아무 채널이나 틀었다.

얼굴이 익숙한 연예인이 나와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집에 준희가 없는데 이렇게 태평할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빨리 지워졌다. 10분쯤 지나자 지끈지끈 울리던 쥐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손은 그대로였다. 사람 손이 아니라 괴물 손 같았다. 선재는 주먹도 쥐었다가 펴보며 손에 피가 돌길 기다렸다.

5분이 더 갔을까.

차 소리가 들렸다. 큰 창이 있지만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선재는 고개를 뺐다가, 현관 쪽에만 시선을 기울였다. 곧 삑, 하고 도어락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준희였다.

“아아…!”

빠앙, 하고 풀썩 주저앉은 아이는 신발 벗기를 어려워했다. 선재를 바라보다 이내 범진을 향해 발을 탈탈 털고 있었다. 엉덩이만 마룻바닥에 간신히 걸친 채로 그러는 아이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뒤에 있던 범진이 커다란 몸을 아래쪽으로 푹 수그렸다.

“니 신발도 아직 못 벗고. 큰일이다.”

“주니가… 다음에 하꺼예요….”

나름대로 자신 있다는 투였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몸을 일으키는 범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 인났냐.”

“방금….”

범진은 신발을 벗으며 왜 전화 안 하고, 했다.

“…들어올 때 되면 들어오겠지 싶어서.”

선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주방으로 쫄래쫄래 걸어가는 아이의 손엔 김이 들려 있었다. 그걸 쳐다본 선재가 다시 고개를 들고 범진에게 물었다.

“김 사러 갔다 왔어?”

“어. 먹고 싶다 한다 아니냐.”

요즘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긴 했다. 그것도 재래시장 할머니가 구워주는 김. 범진과 몇 번 가본 적이 있으니, 범진도 아이가 무슨 김을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편한 복장 위에 집업 하나만 걸친 범진의 차림에 자동적으로 상황이 그려졌다. 식탁에 김을 놓고 다가오는 아이를 향해 선재가 손을 뻗었다.

“준희 김이 먹고 싶었네.”

“녜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위로 올라온 아이의 몸이 여전히 조그맸다.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손목도 약하다. 선재는 제 손 위에 올려본 아이의 손에 찡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아이가 아침에 집에 없는 걸 안 순간 놀라 나자빠졌을 텐데. 당연히 범진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었다.

선재는 갑자기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손 봐라.”

니 손, 하고 범진은 선재의 왼편에 앉았다.

그리곤 왼손부터 가져가 원래 하는 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제가 주먹을 쥐었다 폈을 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풀리는 느낌이 나지 않았었다. 범진이 만져주자 비로소 피가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손엔 아이의 손을 잡고, 한 손은 범진에게 내준 채로 선재는 눈을 감았다. 옆에서 아이가 범수도 김 머거요, 하고 배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태명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범진이 대뜸 범수, 라고 불러 아이 태명이 그리 굳혀졌다. 뒤늦게 겨울이라는 태명을 붙여도 줘봤지만, 범진이 하도 범수라고 해 나중엔 선재나 준희도 범수라는 태명으로 아이를 부르게 되었다.

범수….

손이 가볍고 시원해졌다. 고개를 아이 쪽으로 슬슬 기울인 선재가 몸을 아예 반듯하게 눕히고 범진에게 두 다리를 내밀었다. 아이가 동그랗게 앉아 선재의 얼굴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졌다.

눈을 살짝 뜬 선재가 열심히 손을 뗐다 붙였다 하는 아이를 향해 물었다.

“준희 뭐 해.”

“주니도 안마….”

안마는 어떻게 알고.

잘하네, 웃으며 중얼거린 선재가 얼굴에 꾹꾹 닿는 작은 손을 느꼈다. 살짝 뜨고 있던 눈을 감자, 얼굴 위에 작은 발자국이 남는 것 같았다. 눈밭을 지나가는 아기 사슴 한 마리가 생각이 났다.

비교할 수 없는 힘으로 발을 만져주던 범진은 유난스럽지 않게 뽀뽀를 했다.

방에선 쭉, 쭉, 하는 소리가 나도록 발가락을 빨면서 마사지를 했는데. 이젠 입술만 댔다가 주무르고, 주무르다 얼굴에 갖다 붙이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 감각에도 미소를 띤 선재가 몸의 힘을 완전히 풀었다. 갓 구운 김에다 밥을 먹고 병원에 갈 생각을 하니 왠지 기분도 좋았다.

* * *

눈과 코와 입.

범진은 갈수록 선명해지는 아이의 얼굴이 신기한 듯했다.

선생님이 앞에 있는데도 초음파 화면까지 다가가 그걸 살폈다.

“…범진아, 좀 나와.”

“쓰읍. 저게 내를 닮은 것 같은데.”

못마땅하단 얼굴로 돌아서고 있었다.

선재는 가만히 쳐다보는 준희가 차라리 더 어른 같다고 느꼈다. 저게 아기라고 하면, 아이는 아가, 아가, 하고 좋아했다. 화면이나 사진 안에도 진짜 아기가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발달 상태도 좋았고, 선재도 몸 상태가 괜찮았다. 부종이야 어쩔 수 없는 거니 좀만 더 버티잔 심정이었다. 초반에 자주 기절을 하거나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는데 이젠 그런 증상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선재는 2주도 안 남은 수술일에 긴장도 되었지만, 아기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경험을 해본 터라 처음처럼 떨리진 않았다. 준희를 가졌을 땐 온갖 게 다 걱정되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탈도 없이 쑥쑥 크는 아이 때문에 한시름 던 것도 있고. 준희는 2.6kg으로 태어나 간신히 미숙아 신세를 면했지만, 범수는 벌써 3kg이 훨씬 넘었다.

괜히 온몸이 붓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선재는 검사실 밖을 나섰다.

상담을 기다리는 동안 범진은 키 재기에 열중했다.

1cm가 크게 나온다고 두 번을 더 재보았다. 결과는 같았다. 187cm에 83kg. 선재도 눈으로 결과판을 훑었다. 세 번 다 똑같이 나왔는데 뭐 때문에 계속 재고 있나 몰랐다.

범진은 와, 하고 선재에게 다가가 내 아직 성장긴가 보다, 했다.

옆에 턱 앉는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싱겁다는 듯 웃었다.

달에 두 번 내지는 세 번씩 병원을 찾고 있었다. 시설에서 나온 후 다니게 된 병원은 오메가 산부의 내원율이 높은 전문 병원이었다. 예전에 준희를 임신했을 때 들어본 적이 있던 병원이었고, 그때도 진료비가 턱없이 비싸다는 소문이 있어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병원 내부가 특별히 고급스럽다는 인상은 들지 않지만 연계된 시설 같은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사진으로 본 산후조리원이 호화 호텔 같았다.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선재도 그곳만은 꼭 가보고 싶었다.

“근데 그거 얼마야?”

“뭐.”

“조리원.”

“알아서 뭐 할라고.”

“혹시 알아…. 갚아줄 수 있을지.”

예전엔 진짜 범진의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냥 하는 말이었다.

“갚아봐라. 그럼.”

“얼만데.”

“갚고 나서 말해준다.”

금액도 모르는 돈을 어떻게 갚으라는 건지. 선재는 범진의 말이 헛소리인 걸 알면서도 굳이 불평 섞인 생각을 해봤다.

범진이 그런 선재를 쳐다보다 얼굴 가득 미소를 걸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돌린 선재는 아이만 신경 썼다.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빨아 먹던 아이가 선재의 시선에 망설이듯 으응… 하다 빨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제일 좋아하는 우윤데, 그걸 선재가 먹고 싶어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니, 하고 웃은 선재가 다시 준희의 입에 빨대를 물려 주었다.

곧 이름이 보여 들어가게 된 상담실에서도 좋은 결과만 받았다.

선재는 손발만 덜 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병원을 나섰다.

하얗고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선재는 범진의 손을 잡았다. 범진이 수납을 하느라 손이 없어지면 아이와 함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가자, 하는 의미로 옷자락을 쥐면 범진이 손을 턱 잡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춤을 췄다. 아이를 안은 범진의 모습도 좋고, 이 손을 잡고 긴 복도를 걸어갈 상상만 해도 좋았다. 주차장에서도 커다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범진이 손을 꽉 잡으며 힘을 싣는 것도, 조수석 문을 열고 허리를 안아주는 것까지 다 좋았다. 빠짐없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삶이 좋았다.

* * *

6월 22일에 태어난 범수는 그날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들 중 가장 무거웠다.

건강했고, 얼굴은 범진을 똑 닮아 있었다.

선재는 눈에 별이 떠가는 와중에도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범진은 내내 선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의사에게 괜찮은지 몇 번을 묻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못 들으면 의사를 벽에 내몰기까지 했다. 욕설을 퍼붓는 건 예사였다. 피를 많이 흘린 선재는 한 차례 수혈을 받고서야 회복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범진이 병원에서 어떻게 했는지 따위는 기억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그때도 범진이 있어 안심했을 뿐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범진의 커다란 몸이 위로 펼쳐지는 게 보였다.

“야.”

“….”

대답이 없자, 범진은 엄지에 침을 묻히고 선재의 입술을 쓱쓱 쓸었다.

“말 좀 해봐라.”

“…왜….”

아픈 데가 없었는데, 말을 하니 목도 아프고 배도 아픈 것 같았다. 선재는 인상을 쓰고 범진을 쳐다보았다.

“…뭔 잠을 그렇게 자냐.”

“…아기는.”

몇 번 깬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 제대로 깨어난 적은 없었다. 선재는 처음으로 아기에 대해 범진에게 물었다.

“있다.”

“있는 게 아니라… 건강하냐고….”

“개건강하다. 병원에서 제일 뚱돼지란다.”

뚱돼지란 단어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아이가 건강하다니 그걸로 됐다. 수술 직전에 준희를 병원 전용 시설에 맡겼는데, 지금은 몇 시나 되었을까. 시계를 향해 눈을 돌리던 선재의 눈이 허공만 짚었다.

“몇 시… 준희는….”

“니 말 좀 하네.”

“…준희는….”

“어? 계속 눈떴다가 잠만 자드만.”

“준희….”

“잘 있다. 방금도 보고 왔다. 잔다.”

범진은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계속해서 뱉었다. 좋아하드라, 까지 들은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방처럼 생긴 공간은 어린아이들의 임시 숙소 같은 개념이었다. 따로 작은 침실도 마련돼있고, 밥도 삼시 세끼 잘 나온다고 했다.

“이제 데리고 오자….”

“어, 깨면 델고 올 거다.”

음, 하고 작게 기침한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찰이라도 하는지, 범진의 얼굴은 바로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야.”

야, 하고 계속해서 불렀다.

선재는 대답 대신 범진의 눈을 쳐다보았다.

“야.”

“왜 자꾸….”

“고맙다. 씨발.”

애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범진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선재가 그런 생각으로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범진의 침이 묻은 입술이어서 부르터도 아프지 않았다.

“살아줘서 고맙다. 씨팔….”

“….”

“하아… 씨팔….”

그렇게 가까이 있던 얼굴이 갑자기 뒤로 빠졌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범진의 눈에 차오르던 게 있었다. 처음 보는 눈물이었고, 제 얼굴로 떨어지기 직전에 범진은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서 씨발, 씨발, 했다.

선재는 기억이 희미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았나?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고, 범진이 저 때문에 운다는 생각이 들자 찡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너 울어…?”

울겠냐? 하고 뒤돌아본 범진의 눈가가 시뻘겠다. 눈을 뜨고 세수를 하는지, 세수만 했다 하면 세안제 거품이 다 들어가 매번 눈이 시뻘게진 채로 화장실을 나왔었다. 그때 모습이랑 똑같은데 눈물 때문에 저리된 게 생소하면서도 짠했다. 선재는 얇은 이불 안에 있던 손을 꺼내 범진에게 내밀었다.

인상을 쓴 범진이 뭘 하냐고, 손을 이불 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잠시만….”

최근 기억이 가물가물해선지 범진의 얼굴을 옛날에 쓸어본 것만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범진의 얼굴을 만지던 선재가, 왼손도 범진의 얼굴로 가져갔다. 움푹 들어가는 흉터와 튀어나온 눈썹뼈, 높은 콧대가 손으로 만져지고 있었다. 선재는 아이에게 하듯 범진의 눈가에 엄지를 대고 울지 마, 했다. 이미 마른 눈을 눈 끝까지 쓸어주었다.

“울기는 씨발….”

“….”

“니나 울지 마라. 숨 차니까….”

“….”

웃긴다고 생각했었는데.

눈물 때문에 앞이 뿌옇게 보였다.

선재는 범진의 말대로 안 울려고 했다. 목이 젖고 배가 아픈 게 이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간신히 눈을 세게 감았다 떴고, 마음을 추스르며 범진의 얼굴을 보았다. 손으로 계속해서 만지고 있던 그 얼굴을.

살아줘서 고맙다고 해 고마웠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나 보았다. 선재는 울컥이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범진에게 어떤 말만은 꼭 해주고 싶어졌다. 범진의 얼굴에 손을 댄 채로, 선재가 입을 열었다.

“…아해….”

“뭐?”

“좋아한다고….”

“…얼마나.”

“많이….”

“많이?”

범진은 와중에도 정도를 확인하려 들었다. 마음은 울렁이지만, 얼굴론 웃음을 지은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사랑해.”

“….”

“사랑해….”

확인하듯,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만졌다. 눈과 코, 뺨과 뼈를. 그의 온기를.

“…내가 더 니를 사랑한다. 니는….”

내만큼 못 사랑한다, 하고 다가온 범진의 입술이 입에 닿았다. 선재는 눈을 감고 가볍게 닿은 입술의 체온을 느꼈다. 이게 사는 거네. 이게 살아 있다는 거구나.

쿵쿵, 이제는 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

뛰다가, 저만치 멀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속도로.

쿵쿵.

다른 심장인 동시에 같은 심장이 되었다.

* * *

2주간 머무르게 된 산후조리원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없는 게 없었고, 유리관 같은 복도 건물 너머로 펼쳐진 푸른 잔디와 꽃은 한 그루의 거대한 꽃나무를 연상케 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거대하고 거대한 꽃나무. 테라스에 앉아 그 풍경을 쳐다보고 있으면 하루도 너끈히 갈 것 같았다.

아기를 낳을 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혈을 받은 것도 뒤늦게 안 선재는, 이렇게 몸이 회복되어 감사하단 마음만 있었다. 예전엔 그렇게도 신을 원망했는데, 이젠 감사도 드릴 줄 알게 되었다. 얼굴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그 신.

선재는 테라스에 앉아 배를 통통 두드려보았다.

따뜻한 날에 이러고 있는 것보다 호사는 없을 것 같았다.

점심은 방에서 먹어도 되고, 식당에서 먹어도 되었다. 오늘은 식당에서 먹었는데 어찌나 맛이 좋았는지 아직도 생각이 났다. 원래는 두 끼를 먹어도 많이 먹었다 느낄 정도로 식욕이 없는데, 이곳에선 세 끼를 다 챙겨 먹고 있었다. 밥에 뭘 넣은 걸까. 하얀 쌀밥일 뿐인데도 그렇게나 달았다. 오늘 먹은 전복구이는 레시피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버터 아무거나 발라도 그런 맛이 날까?

나중에 도전이라도 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난 선재가 문을 열어 시설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들 친구들이 생겼는지 삼삼오오 모여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피하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끼어드는 타입도 아니었다. 유복하고 평온하게 살아온 그들이 아는 세상을, 선재는 모르기도 했다. 흥미를 잃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수도 적은 편인 선재는 범진이 없으면 주로 혼자만 있었다. 테라스도, 범진을 기다릴 때나 나와 보는 장소였다. 낯이 익은 산부에게 조용히 눈인사만 건네고 방으로 돌아온 선재는 휴대폰부터 들었다.

“어디야?”

[거의 다 왔다. 왜.]

“…아니, 테라스에서 계속 있었는데… 안 오길래.”

선재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떨어진 지 세 시간이나 되었을까. 급한 일이 있어 나갔던 범진은 정말 일만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사 들고 말이다. 니 좋아하는 그거 샀다고 말하는데, 케이크보다는 범진이 보고 싶었다. 왠지 보채는 느낌이 들어, 선재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하며 마무리를 하려 했다.

[왜 끊을라 하는데.]

“…다 왔다면서.”

[다 왔으면 전화 끊어야 되냐.]

“…그건 아닌데….”

[밥은 맛있드냐?]

“응.”

[뭐 먹었는데.]

“전복이랑… 떡갈비. 근데 전복이 진짜 맛있어서.”

[…닌 씨발, 말도 별로 하는 거 없는데 왜 이래 뭔, 말만 하면 꼴리냐.]

범진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일 있을 땐 니랑 전화 안 하는 거다. 씨팔, 뭔… 개자지도 아니고.]

“그럼 끊자.”

웃음을 참은 선재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지금은 일 다 끝나서 상관없다. 개자지 타임이다.]

범진이 만든 타임엔 기가 찼다.

“왜 상관없어. 여기도 사람 많은데….”

[뭐, 씨. 부러워서 쳐다보겠지. 니가 봐도 내 자지 직이준다 아니냐.]

시도 때도 없이 서는 성기를 원망하는 줄 알았는데, 대뜸 자랑이었다. 허, 하고 선재는 헛웃음만 지었다.

[이게 웃네.]

“그럼 웃지.”

[함만 더 웃어바라.]

“…뭐.”

[또 웃어보라고.]

“내가 기계야. 하라면 바로바로 나오게….”

[니 지금 반항했냐.]

“그래, 했다.”

[쫌만 더 해봐라.]

뭐만 하면 더 해보란다.

선재는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고 싫어, 했다.

범진은 반항을 또 했다고 좋아했다.

못 말린다.

미소가 뜬 제 얼굴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선재는 범진이 못 말린단 생각만 했다. 그렇게 좋을까? 매일매일 뭐가 그렇게 좋아서. 선재는 범진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갔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건 저도 하고 있으니까.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신호 불량인가? 갑자기 뚝 끊긴 전화에, 선재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전화가 올 것 같아 눈이 계속 그리로 갔다.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휴대폰에서는 반응이 없는데,

문이 열렸다.

케이크 상자를 든 손으로 문을 열어젖히는 범진이 보였다.

손에 케이크가 들려 있는데도 그건 신경도 안 썼다. 대롱대롱 흔들리던 상자가 바닥에 턱 놓이고, 범진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선재를 향해서만 직행했다.

“보고 싶어서 디지는 줄 알았다.”

“아까 봐놓고.”

앉아 있던 선재를 팔로 끌어안은 범진이 그기 본 거냐, 했다.

선재도 그때부터 아무런 말을 않았다.

느릿하게 일어나, 범진의 커다란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잔뜩 부른 배가 없으니 몸이 어디든 닿고 있었다. 복부를 꾸욱 누르는 성기엔 인상이 써졌지만. 뭘로 누르든 약간의 쓰라림은 남은 상태다.

“배 아파….”

“이 씨… 내가 씹….”

범진은 몸을 조금 떨어뜨리고 다시는 애새끼 낳나 봐라, 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고개를 든 선재가 범진의 입을 막았다.

“욕도 최대한 쓰지 말고… 이제 준희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주면 닌 뭐 해줄 건데.”

“뭐 해줄 생각 없는데….”

위를 올려다보며 말을 흐린 선재가 살폿 미소지었다.

“억울하다.”

순간 입술이 닿았다.

입에 입을 맞춘 범진이 또 억울하다, 하고 선재의 입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했다.

“억울해 디지겠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웃고 있었다.

다시 쪽, 닿는 입술엔 선재도 입술을 오므렸다.

범진은 뽀뽀에서 그치지 않고 혀도 선재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은 몸을 만지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뽀뽀나 안는 것도 몸 가는 대로 못 하는데 키스는 오죽할까. 혀가 입 안 살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힘 좋고 굵다란 혀가 연한 열매가 터질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선재가 두 팔로 범진의 목을 감고 제대로 키스했다. 먼저 범진의 혀를 쓸었고, 성기 빨 듯 그의 혀를 입술로 빨았다. 펠라를 하는 것처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니 범진도 혀에 힘을 줬다.

똑똑.

문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선재가 범진에게서 화들짝 떨어져 나갔다.

“씨바….”

욕을 한 범진의 입이 침으로 번들대고 있었다. 떨어져서 그 입술을 쳐다보던 선재가 닦으란 신호를 줬다. 그리곤 잠깐 있으라 말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이 옆쪽으로 미끄러지듯 열리자, 범진의 눈도 그리로 향했다.

문을 두드린 건 직원이었다. 직원은 어제부터 받기 시작한 마사지를, 오늘도 받아야 효과가 크단 말로 서두를 열고 있었다. 범진은 어제 선재가 마사지하는 걸 보지 못했었다.

아, 하고 짧은 생각에 잠겼던 선재가 범진을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가자.”

갑자기 다가온 범진이 턱짓을 하며 두 사람 앞에 섰다.

“남편이 봐도 상관없지요.”

“아, 네. 보호자분도 따로 마사지를 받으실 수 있게….”

“나는 필요 없고.”

말을 꼭 딱딱한 눈덩이를 던지듯 한다. 위를 올려다본 선재가 팔꿈치로 범진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리곤 직원을 보며 가겠다고, 10분 뒤에 도착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선재는 마사지도 어제부터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 몸이 많이 안 좋았던 경우, 조리원에서 안마받는 시기도 뒤로 늦춰지곤 했다. 8일이 지나 첫 마사지를 받았던 선재는 처음 느끼는 감각에 많이 아파했었다. 한 번 받아봤으니 그나마 나을까.

곧 범진의 손을 잡고 2층에 위치한 마사지실로 향했다. 2층 복도엔 늘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는데, 그게 마사지 오일 향이라는 건 어제 처음 알았다.

“마사지 끝나면 준희 데리고 와.”

“알았다.”

“직원들한테 말 좀만 더 착하게 하고.”

“존나게 착하게 말했는데.”

“별로 안 착했어.”

문을 밀자, 전문 마사지샵 같은 내부가 드러났다.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선재와 범진을 반겼고, 제일 앞쪽에 자리한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선재는 탈의실에서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마사지용 침대에 누웠다. 범진이 입구에서 짝다리를 짚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들어온 마사지사를 쳐다보며 어이, 하고 입을 열었다.

“그짝 오메가 맞습니까.”

“네? 아, 네. 맞습니다.”

누운 채로 마사지사를 쳐다보던 선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제보단 좀 나으실 거예요.”

“네.”

손짓이 섬세하긴 한데 손가락 하나하나에 실리는 힘이 대단했다. 시원하면서도 아팠다. 선재는 뚝, 뚝, 소리가 나는 것까진 어떻게 참았는데 종아리에 가해지는 힘엔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많이 아프세요?”

“조금, 네….”

“이쪽은 어떠세요.”

“그쪽은 좀 괜찮….”

“….”

“…아, 아니, 아파요… 아파요.”

“네, 강도 좀 줄일게요. 아프실 때마다 말씀해주세요.”

네, 하고 대답한 선재가 적당한 통증은 참으려고 했다. 어제 1회 받은 걸로도 붓기가 많이 줄어든 참이었다. 뚝, 하는 소리가 발목에서 났지만, 선재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20분이나 지났을까. 부드러운 오일이 잔뜩 발렸다. 피부 마사지를 하듯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에, 선재가 긴장을 풀었다. 여유가 생겨 목을 뒤쪽으로 해 문 앞에 서 있던 범진도 쳐다보았다.

짝다리를 짚고 쳐다보는 건 똑같은데 앞섶이 불룩해져 있었다.

“시원하냐.”

그래도 사람이 있다고 변태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응.”

유독 많이 부었던 발목 위로 따뜻한 열이 닿았다. 적외선 기기를 작동한 마사지사가 15분만 쬘게요, 하고 마사지실을 나섰다. 방 안은 어두운 편이었다. 작은 별 같은 조명만 아기자기하게 움직였다. 드륵, 하는 문소리를 들은 선재가 손을 범진 쪽으로 뻗었다.

“밖에 앉아 있어.”

“됐다.”

터벅터벅 다가온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따뜻함에 몸의 긴장이 풀린 선재가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 떴다.

범진은 뒤를 한 번 쳐다보았다. 닫힌 문에 시선을 한 번 주고, 선재의 얼굴을 만지며 상체를 숙였다.

“야.”

“…왜.”

마지못해 대답한 선재가 코앞에 붙은 범진의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니 내 들으라고 아앙, 아앙, 했지.”

느끼한 흉내에 어이없는 웃음만 나왔다. 재빨리 손을 낚아챈 범진 때문에, 선재의 손은 곧 튀어나온 범진의 앞섶에도 닿게 되었다. 눈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안에 큰 공 같은 걸 넣은 것 같았다. 손을 더듬거린 선재가 위쪽으로 눈을 들었다.

“참아봐…. 가서 만져줄게.”

“키쓰도 할 수 있겠냐.”

“응. 하면서 손으로 해줄게.”

더 흥분할까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성기는 더욱 불뚝이며 튀어 올랐다. 조금만 만져줄까. 선재는 누운 채로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누가 볼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범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 선재가, 손으로 범진의 앞섶을 누르듯 매만져주었다.

“하아, 씹.”

“…….”

“아, 됐다. 가서, 씨. 니 마싸지 받는데.”

제대로 맺어진 말은 아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범진이 하체를 빼고 잠이나 자라, 했다.

“…나도 만지고 싶은데….”

“…….”

“손은 안 아프니까….”

“니 진짜 디진다.”

선재의 이마부터 머리까지를 큰 손으로 쓰다듬던 범진이 얼굴을 붙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눈을 감은 선재가 그럼 손잡아 줘, 했다. 놀고 있던 범진의 한쪽 손이 선재의 손등을 단박에 쥐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선재도 범진의 손을 제대로 맞잡았다. 누워서 범진의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일까. 잠이 솔솔 왔다. 몸도 그렇지만, 기분도 물처럼 흐물흐물해지는 듯했다. 다 녹아서 사라지면 어쩌지. 선재는 범진의 손이 튜브라도 되는 듯이 소중하게 잡았다. 좋냐, 묻는 범진에겐 좋다, 대답했다.

* * *

선재는 입원 12일째가 되던 날에 퇴원을 해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맛있고, 사람들도 친절했지만, 집이 너무 그리웠던 탓이다. 통나무 벽면에서 풍기던 캐러멜 시럽 같은 냄새가 왜 자꾸 생각이 나던지. 집에 가고 싶다는 선재의 말을, 범진은 다음 날 바로 실행해 옮겨 주었다.

집 가는 길이 내내 낯설었다.

6월이 7월로 바뀌었고, 날도 많이 무더워진 뒤였다.

도심에서 창을 열면 더운 공기만 끼쳤는데, 그래도 물가를 둘러서 집으로 가는 길은 선선하고 맑았다. 거의 멈춘 수준으로 나아갈 때만 차창이 열렸다. 선재는 품에 있는 아기에게 바깥바람이 좋지 못할까 그마저도 오래 하지 못했다.

곧 도착한 집 근처 경관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무들이 새파랬고, 활짝 피었던 꽃이 더 활짝 피어 있었다.

벌레 우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현관과 가까워지자 시원한 공기가 훅 끼쳤다. 미리 에어컨을 틀어뒀는지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선재는 보에 싸인 아기를 데리고 안방까지 한 번에 들어갔다. 적당한 실내기온을 확인한 뒤에야 흰 천을 느슨히 풀어주었다. 아기는 기운이 좋은지 팔다리를 마구 움직이며 천을 어떻게든 걷어내고 있었다. 준희는 이맘때 움직임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를 떠올린 선재가 아기 머리 바로 위에 자리를 잡은 준희에게도 말을 건넸다.

“준희 아기 신기해?”

“녜…. 주니 아가야.”

“아기 준희 거 할 거야?”

“네에.”

조막만 한 손을 머리 위에 살포시 대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웃는다. 선재가 그런 준희의 머리도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준희가 동생, 아니, 재혁이 많이 사랑해줘야 해.”

“네에. 째여기. 사랑해요.”

풍뎅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든 아이는 재혁의 이마에 고운 입술도 갖다 댔다. 쪽 하는 소리도 안 나고 떨어진 입술이 예쁜 모양을 그렸다. 재혁도 좋을까? 형이 뽀뽀해주자 팔을 허공으로 뻗으며 나름대로 기분을 표현했다. 준희도 잘 울지 않는 아기였는데, 재혁도 그러려나? 알파 아기는 처음이라, 서서히 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준희 옷부터 갈아입자.”

“주니가, 주니가 해보께요.”

조리원에서도 그랬지만, 준희는 형이 되었다는 이유로 뭔갈 혼자서 해보려고 많이 노력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속으로만 생각한 선재가 혼자 끙, 하고 티셔츠를 벗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유독 목이 좁은 티셔츠였다. 몇 번이나 시도해도 티셔츠는 목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용케 빼낸 한쪽 팔은 몸통에 끼어버렸고. 그 모습까지 쳐다본 선재가 손짓을 하며 웃었다.

“준희 이쪽으로 와봐. 혼자서는 나중에 해도 돼.”

“…주니 형아라서….”

“배워서 아기한테 가르쳐주고 싶었어?”

“녜에….”

“안 그래도 돼. 준희도 아기야.”

짱짱한 티셔츠에 공간을 주니 아이가 쉽게 몸을 뺐다. 선재는 통풍이 잘되는 여름 생활복을 골라 아이에게 입혀 주었다. 겨우내 내복을 입었고, 6월에도 짧은 소매는 입히지 않았는데. 하얗고 짧은 팔다리가 드러나니 제 눈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밝은 연둣빛 여름옷이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너무 예쁘네. 춥진 않지?”

네에, 하고 방문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밖에서 아부지, 주니 잠옷, 하고 갈아입은 옷을 자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진이 걸쭉하게 반응하는 소리도 뒤이어 들려왔다. 이쁜 거, 했다.

니 누구 거냐, 하는 소리는 가까이서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방문이 천천히 열리는 게 보였다.

품에 준희를 안고 방으로 들어온 범진이 오리탕 시켜줄까, 물었다.

“응.”

선재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아기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제 배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다 이렇게 혼자서 잘 노는 모양이었다.

성질이 거센 범진과 얼굴을 닮아 힘들겠거니,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게 사실이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재혁을 순조로이 돌봤던 것도 다 선생님들 덕이라 생각했었는데.

“아기가 너 닮았는데도… 울지를 않네.”

“그기 먼 말이냐.”

범진이 준희를 안은 채로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낮은 침대라, 범진은 양반다리를 한 채 준희를 그 사이에 앉혔다. 범진의 다리 사이에 폭 빠진 준희가 선재와 범진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아부지랑 안 닮아서 다행이다….”

그런 범진의 반응에도 선재는 한 술을 더 떴다. 재혁의 볼을 살살 쓸며 범진이 들으란 식으로 말했다.

뭐, 하고 무슨 말을 할 것 같던 범진이 예상과 달리 조용했다.

준희를 안은 채로, 말없이 재혁의 머리가 있는 쪽에 제 거대한 몸을 눕히기만 했다. 그리곤 이 색끼 이거, 뭔 복이냐, 하고 머리털도 많이 안 난 아기를 향해 보란 듯 눈썹을 들었다.

“아가 뽀뽀….”

그때 들린 준희의 소리에 선재와 범진의 눈이 집중되었다. 범진을 따라 덩달아 눕게 되자, 바로 앞에 놓이게 된 아기의 머리통에 또 입을 맞추고 싶어졌나 보았다. 목을 쭉 빼고 가볍게 입 맞춘 아이가 헤, 하고 선재를 쳐다보며 웃었다. 선재도 웃어주며 잘했어,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범진이 골이 난 듯 말했다.

“아부지한테는.”

아부지한테도… 하고 다가간 아이가 손으로 대충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범진의 뺨에도 뽀뽀를 해주었다. 입술에도 쪽, 하고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이 나쁘고 불안했을 텐데.

이제 그런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자자, 하고 준희를 끌어안은 범진이 눈을 감았다. 저러고 잘 생각인가. 아이도 범진의 굵은 팔에 매달려 에, 웃다가 조용해졌다.

선재는 두 사람을 쳐다보다 다시 재혁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부터 팔다리를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다. 조리원에서 알파치고도 발육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 매일 걱정만 하며 지낸 준희 때와 달리 마음이 가벼웠다. 선재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범진의 팔을 잡고 잠든 준희의 얼굴에도 눈길을 보냈다. 저렇게 몸을 마는 게 아이는 편한 것일까? 웃다가 범진에게 눈이 닿자, 범진이 아기의 이름을 지어온 일도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제일 비싼 데서 받아왔다는 이름이 구겨진 종이에 적혀 있었다.

성질이 급해 전화로 먼저 들었다는 범진은, 제 멋진 글씨체로 재혁, 이라는 이름을 써서 선재에게 보여주었다. 이름도 진짜 범수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선재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했었다. 요즘 애들 이름 같지는 않지만, 범수보다는 나았다. 요즘은 ‘유’자나 ‘민’자를 많이 넣는 것 같던데. 사실 범수든 재혁이든 상관은 없었다.

“재혁아.”

아직은 입에 익지 않았다.

조용히 웅얼거린 선재가 범진아, 하고도 불러보았다.

자는 줄 알았던 범진이 왜, 하고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선재는 오리탕 언제 먹어, 했다.

“가서 먹을까.”

범진이 고개를 돌려 말을 하는데도 준희는 팔에 가만히 붙어 잠만 잤다. 꼭 강아지 같았다.

“범수 생각 안 하지….”

멀쩡한 이름을 두고 태명으로 아이를 칭하고 있었다. 아직까진 입에 익어 어쩔 수 없나 보았다. 아니, 입을 연 선재가 재혁, 재혁이, 하고 고쳐 말했다.

* * *

재혁은 준희와 비슷한 듯 달랐다. 보챔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범진의 품에 오래 안겨 있으면 꼭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처음엔 으잉… 하는 수준으로 칭얼거리다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우는 일들이 있었다. 처음, 빨개진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선재는 범진이 약한 아기에게 짓궂은 장난이라도 건 줄 알고 범진부터 뭐라고 했었다. 허나 20분 이상 범진에게 안기면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걸, 이제는 안다. 초반엔 왜 이러는지를 몰라 병원에도 데리고 갔었는데, 의사가 알파끼리는 가족이라도 서로의 페로몬을 많이 불편해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자랄수록 그 증상이 덜 할 거라고 하니, 거기엔 안심을 했다.

“재여가… 말해바….”

선재는 요즘 이런 음성이 들리면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재혁 때문에 밤에 깨는 일은 없었다. 잠투정도 없고, 아침에 일어나 먼저 우는 아기도 아니었다.

아침에 울지 않는 이유는 준희의 덕이 컸다.

잠에서 깬 아이가 조금이라도 찡얼거리면 준희가 다가가 재혁의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어주곤 했다. 작은 손으로 더 약하고 고운 것을 쓰다듬는 아이의 모습. 잠에서 깼지만 잠든 척을 한 선재가 눈을 비스듬히 뜨고 둘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재여기 형아가 뽑뽀해주까…?”

그러면 말을 건넸다고, 아이는 귀를 재혁에게 대보곤 한다.

무슨 소리가 날 리도 없는데 고개를 끄덕인 준희가 재혁의 손을 잡고 뽀뽀를 쪽 해주었다.

재혁의 성장세를 보아, 두 돌만 되어도 준희를 앞지를 듯했다.

재혁은 발달 검사만 했다 하면 상위 1% 내외에 꼭 머무르곤 했다. 키도 1등. 몸무게도 1등. 심장 기능도 1등. 시력도 1등. 발 크기도 1등. 모든 게 다 1등. 알파 아기들 사이에서도 그 정도니 준희와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될까. 형제가 알파와 오메가인 경우, 주로 알파 아이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재혁은 그런 아이로 클 것 같진 않았다. 재혁이 불평하는 건 범진이 저를 안을 때뿐이다. 준희가 저렇게 말을 시키고, 뽀뽀를 해주면 천사같이 웃으며 맘맘맘맘, 같은 말을 옹알거리곤 했다. 곧 진짜 말도 할 듯했다.

“형아안테 사랑애 해주세요….”

“암맘마맘.”

“주니도 재여기 사랑애….”

밤알 모양으로 구부러진 작은 두 손 안에, 비슷한 크기의 작은 손이 들어와 있었다.

준희는 아기의 손에 뽀뽀를 쪽, 하고 아끼는 장난감을 재혁에게 주겠다 말했다.

그게 준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 표현인 것 같아 선재의 마음이 힘껏 일렁였다.

재혁이 못 태어날 뻔했을 때도, 준희는 뭘 아는 듯이 아기가 가면 안 된단 말을 했었는데.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삶이 조각이고 퍼즐 피스라면, 뭐 하나 맞는 게 없었던 시간.

선재는 아직 깨지 않은 범진 쪽으로 몸을 돌려 팔을 벌렸다. 허리를 안으며 품 안으로 파고들자, 더 강하게 등을 끌어안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해, 사랑해, 같은 말은 너무 작고 사소했다. 선재는 범진의 가슴팍에 코가 눌릴 정도로 얼굴을 파묻은 채 그의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포기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선재는 문득, 그게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쓴 나무향이 밴 가슴팍에서 엉뚱하게도 죽음을 떠올렸다. 죽어도 좋을 만큼 범진이 좋은 것 같았다. 선재는 고개를 들고 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 범진이 찌푸리며 눈을 떠, 왜, 하고 걱정이 깃든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냥… 하고 작게 웅얼거린 선재를, 그 얼굴을, 범진이 두 손으로 잡고 뽀뽀했다. 입술이 강하게 닿았다 떨어지자, 이번엔 선재가 위로 올라가 범진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둘은 곧 하나인 것처럼 끌어안았다.

재혁에게 정신이 팔린 준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재는 눈을 감았다.

“맴생이는 먹었냐….”

“좀 있다가….”

범진은 선재를 끌어안고 다시 자려다, 흑염소 생각이 나 눈을 슬쩍 떴다. 몸이 허약해진 선재를 위해 흑염소 농장에 직접 가서 달여온 약이었다. 아침부터 저를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는 걸 보면 일어난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꽉 쥐며 입을 열었다.

“가물치도 오늘 온다.”

“그거는 맛 진짜 이상할 것 같은데….”

조용히 웅얼거린 선재가 고개를 들었다.

범진이 눈을 씰룩거리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봐도 봐도 뒤지게 이쁘냐.”

이거는, 하고 입 맞춘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내내 조물거렸다.

“너도 이뻐.”

선재는 범진의 질색하는 반응이 웃겨 일부러 이쁘단 말을 덩달아 할 때가 있었다. 입이 쭉 튀어나온 채 그런 말을 하자, 범진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는 게 보였다. 니 씨, 하고 씩씩거렸다.

선재는 그 반응을 모른 체하고 거대한 범진의 몸을 할 수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뺨에 닿는 맨몸 살결이 오늘은 더 좋았다. 검은 문신 범벅이긴 하지만, 개중엔 제 얼굴도 있고. 선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새끼 짐승이 어미에게 하듯 머리통을 비비적거렸다.

고개를 숙인 범진이 그런 선재의 머리를 안고 중얼거렸다.

“니 지금 좆나게 박아주고 싶다….”

그러면 선재도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그럼 좆나게 박아주든가….”

둘밖에 못 듣는 말을 할 땐, 선재도 나쁜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곤 했다.

더 저급하고, 더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서도 그를 사랑하고 싶기만 했다.

순식간에 벌게지는 얼굴을 한 범진이 씨팔, 하고 입 모양으로 욕했다.

그걸 똑같이 따라 한 선재가 다시 범진을 끌어안았다.

범진과 사랑할 수 있다면 몰염치한 욕쟁이의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이 다 욕하는 사랑을 해도 괜찮고,

흠이 있는 사랑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짓이겨지고 누가 내다 버려도 그게 문제인가.

주워다 쓰면 고운 사랑이 된다.

이렇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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