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 아이들 이야기〉
작은 종이 딸랑,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입구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인사한 소년을 시작으로 두 명의 소년들이 인사를 하며 더 들어왔다. 주변 고등학교 교복 같긴 한데 워낙 조용히 먹고 나가는 학생들이라 얼굴을 외우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셋 다 남학생들인데도 얼굴이 작고 고운 편이었다. 여자가 뒷짐을 진 채로 소년들을 훑었다. 소년들은 여기 앉을까, 하다가 제일 구석으로 가 앉았다.
“저, 여기 떡볶이 3인분만 주세요….”
벽에 앉은 소년이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주문서를 따로 쓰려던 여자가 접시부터 찾았다. 보통은 여러 가지를 시켜서 같이 먹는데, 저 손님들은 늘 떡볶이만 먹고 가곤 했다. 여자가 나무 주걱으로 떡볶이를 휘저었다. 적당히 촉촉해지자, 여자는 능숙하게 떡과 어묵을 섞어 접시에 담았다.
“…….”
두 명이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고, 한 명의 소년이 그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유독 소심하게 주문했던 소년의 이름은 인우였다.
인우가 입을 꾹 닫고 앞에 앉은 소년을 쳐다봤다.
“…….”
“왜…. 내 얼굴 빨개?”
“아니…. 그냥.”
맞은편 소년이 얼굴을 손등으로 매만졌다. 햇빛이 따갑긴 했지만, 얼굴이 아플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냐, 준희야. 얼굴 안 빨개.”
“아, 그래?”
“응.”
그래도 확인하듯 얼굴을 쓸어 본 준희가 체온이 적당한 걸 느끼곤 손을 뗐다.
나머지 소년의 이름은 재민이었다.
인우와 재민은 곧 놓인 떡볶이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묵 하나를 집어 먹은 준희가 그 둘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곧 인우의 눈이 제가 아닌, 다른 쪽으로 비스듬히 엇나가는 걸 보았다. 덩달아 고개를 쓱 돌려본 준희가 아…. 하고 작게 소리 냈다. 구석 테이블에 앉은 누군가가 보였다.
자주 보던 야구점퍼에다 얼굴도 익숙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희가 그쪽 테이블로 향했다.
“재혁아…. 왜 여기 있어?”
걸어가면서 입을 연 준희가 곧 재혁이 있던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아, 봤어? 그냥 지나가다가 형 있길래.”
“여기 지나가고 있었다고?”
“아, 어. 오늘 훈련 빨리 끝나서.”
집 방향도 아니고, 학교 바로 앞 분식집도 아닌 곳이라 재혁의 말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래도 의심을 하지 않은 준희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들어오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재혁인 줄은 몰랐다. 선 채로 재혁을 쳐다보던 준희가 아니….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좀만 기다려. 형이랑 같이 집 가자.”
기다렸다는 듯 알겠다고 대답한 재혁은 라면 하나를 더 시켰다. 혼자 세 개는 거뜬히 먹으니 분식집에 와서도 그 정도는 먹어 줘야 성에 찼던 탓이다. 곧 중학교를 졸업하긴 하지만 몸만 보면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먹고 있어, 하고 재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준희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동생 때문에 그러지…?”
“응? 그냥…. 아니.”
“우리 동생 애기야. 아무것도 몰라.”
“어….”
애기…. 속으로 읊조린 인우가 이쪽을 쳐다보는 재혁과 눈이 마주쳤다. 준희와 말할 때는 세상 순한 얼굴을 하지만 저나 재민을 쳐다볼 땐 일부러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까부터 눈을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둔 인우가 아예 포크를 놓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준희의 ‘애기’ 발언엔 동의할 수 없었다.
한 달 전, 인우는 준희에게 다른 학교 알파 선배를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길에서 아는 선배와 마주쳤고, 그 선배가 준희에게 호감을 표시해 별생각 없이 번호를 알려 주었던 게 화근이 되었다.
학원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마주친 재혁은, 대뜸 저 준희 형 동생인데요, 하고 말을 걸어왔었다.
동네 유명 인사였으니 얼굴을 모를 것도 없었다. 괜히 반가운 척을 하려던 인우였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재혁이 “우리 형한테 이상한 거 시키면 진짜 죽어요.” 하고 코가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하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 걸 준희만 몰랐다. 번호를 준 인우는 물론, 부추기던 재민까지 연달아 협박에 시달렸고, 당사자인 선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준희는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선배가 유학길에 오른 줄로만 알았다.
* * *
“어, 형. 나 뭐 놔두고 왔다.”
준희의 눈이 재혁을 향했다. 분식집에서 같이 나와, 내리막길을 다 걸어 내려왔는데 뭘 두고 왔단다. 바보야, 형이 그런 거 잘 살피라고 했지. 주먹으로 콩, 재혁의 머리를 살살 밀어낸 준희가 뒤쪽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겠다고 말했다. 머쓱하게 웃은 재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났다.
“빨리 올게.”
준희가 빨리 오겠다는 재혁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형! 나 빨리 갔다가 올 거야. 기다려!”
몇 걸음 안 가서 또 그런 소리를 했다. 운동을 하는 아이니 가파른 길 정도야 쉽게 훌쩍훌쩍 올라갔다. 반 정도 올라간 재혁이 또다시 형! 하고 손을 흔들자, 준희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퍼졌다. 덩치만 크지 완전히 아기다. 친구들에게도 속은 완전히 무르고 애기 그 자체인 재혁을 잘 이야기해야겠다 싶었다. 서로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을 텐데.
생각에 잠겼던 준희가 갑자기 느껴지는 진동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빠? 도착했어요?”
몇 시간 만에 목소리를 들어 보는 아빠다. 연착이 되긴 했지만 무사 도착한 모양이었다. 특히 아빠가 걱정됐던 준희가 몇 번이나 안부를 물었다. 체력이 약한 아빠 곁에 아부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작년에 임신하는 사고 아닌 사고를 겪은 아빠를, 준희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병원의 권유로 아이를 낳진 않았지만, 그래도 쭉 신경이 쓰였다.
“나 잘 있을 수 있지. 지금 재혁이랑 집에 가려고, 재혁이 기다리고 있어요…. 응, 아니, 우연히 만났어요. 네.”
아빠들이 요양차 여행을 가는 기간은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이었다. 방학 때나 제가 학교를 쉴 땐 종종 같이 가곤 했지만, 요즘은 주로 둘만 떠나곤 한다. 발리는 준희도 좋아하는 여행지였다. 정글 숲 한가운데 위치한 풀빌라가 가족의 쉼터였다. 이번에도 거기 갔으려나? 생각해 본 준희가 그곳에서 봤던 원숭이가 떠올라 잠시 웃었다.
제가 어릴 때였다. 아빠와 발코니에서 원숭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원숭이가 아빠를 공격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아빠는 팔이 긁혔고, 아부지는 도망간 원숭이를 향해 근처에 있는 걸 다 던졌었다. 작은 협탁까지 밖으로 내던진 탓에 물어낸 돈만 꽤 되었다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끽끽 우는 원숭이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당시엔 무서웠었다.
그런 기억이 있는 반면,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많았다.
대왕처럼 왕관을 쓰고 테이블에 앉은 모습이나 치렁치렁한, 배까지 오는 목걸이를 다섯 개 넘게 걸고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 그랬다.
준희는 아빠들이 참 이상한 걸 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다 제가 원해서 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해 달라면 다 해 주는 아부지 때문에 아무도 안 살 법한 목걸이나 스카프를 집에 들고 올 때가 많았다고. 지금도 서랍을 뒤지면 정체 모를 천 쪼가리나 팔찌, 목걸이 같은 게 발견되곤 한다.
“네, 아부지…. 네에, 사랑해요.”
범진과도 통화를 끝낸 준희가 오르막길 위쪽을 쳐다보았다.
아예 잃어버렸나? 길가 어디에서도 재혁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물건을 찾았으면 금방 나와야 할 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준희가 주변을 살폈다.
준희가 통화하는 사이, 재혁은 분식집 유리문을 홱 열고, 인우와 재민이 있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뭘 놓고 왔다는 건 개뻥이었다. 의자를 끽, 빼서 앉은 재혁이 준희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포크로 떡볶이를 멋대로 집어 먹었다.
“우리 형 왜 자꾸 데리고 다니는데요.”
갑자기 나타난 것도 어이없는데 대뜸 그런 질문이었다. 쩍쩍 떡을 씹으며 눈을 세우고 묻는 재혁에게, 인우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길게 살아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형에게 사사건건 참견하는 동생은 살면서 처음 봤다. 떡볶이 좀 먹은 게 이렇게 행패 부릴 일인가?
“뭐 안 했어. 떡볶이만 먹었잖아.”
“안 했다고? 진짜 그냥 집에 가려고 했어요?”
“어…. 이것만 먹고 집에 가려고 했,”
“맞아요?”
대각선 방향의 재민을 쳐다보며 되물은 재혁이 테이블에 있던 물통을 매만졌다.
“응…. 맞아.”
“우리 형 이상한 거에 물들이면 가만 안 놔둬요. 내 누군지 알죠.”
준희도 가끔 이런 이상한 말투를 구사하던데, 동생도 똑같았다. 표준어긴 한데 묘하게 끝이 특이한 말을 들은 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부턴 여기서 먹지 말고. 토끼 분식에서 먹어요.”
식당까지 정해 주는 재혁이 어이는 없어도, 인우와 재민은 속내를 감췄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토끼 분식에서 먹겠다고 약속까지 나눴다.
재혁은 누가 봐도 인우와 재민보다는 나이가 많게 보였다. 고등학교 입학도 안 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짧게 깎은 머리도 그랬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180cm를 돌파한 데다 몸무게도 90kg이 넘었다. 봐도 봐도 중학생다운 구석은 없었다. 인우와 재민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재혁이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 * *
형이 니한테 뭐라고?
목쑴!
목숨의 뜻도 모르는 재혁에게, 범진은 준희가 목숨이라 가르치곤 했다.
재혁은 놀다가도 범진이 그렇게 물으면 목쑴! 하고 크게 외쳤다. 처음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지만, 재혁도 알파의 본성이란 게 있어 형을 불쑥불쑥 괴롭히거나 쪼끄만 게 힘으로 밀고, 준희를 넘어뜨릴 때가 있었다.
힘과 고집이 세지는 재혁에게 매번 당하면서도 준희는 애기, 애기, 하면서 동생을 감싸 안기만 했다. 그걸 보던 범진이 특단의 조치로 재혁을 교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작은 타의였지만, 자라면서 재혁도 형을 목숨처럼 여겼다. 몸이 약한 형에게 그딴 본성 따위를 들이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밖에선 사고도 많이 치는 골목대장이었지만 집에선 그러지 않았다.
재혁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턴 형이 좋아하는 과자나 젤리 같은 걸 제 용돈을 아껴 사 오곤 했다. 그러면 준희가 그것들을 모아 보물 상자에다 담아 뒀다.
상자가 반 정도 차면 둘이 같이 방에 앉아, 아빠가 못 먹게 하는 달달한 불량식품 같은 걸 나눠 먹곤 했다.
충치가 생기는 건 당연했고, 선재만 나란히 충치가 생긴 아이들을 의아하게 여겼었다.
재혁은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준희는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들이었다.
책을 그렇게 싫어해도, 읽어 주기 시작하면 재혁은 가만 앉아 준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재혁아.”
어느덧 크게 자라 버린 재혁이 대답 대신 형을 가만 쳐다봤다.
“집에 가서 책 읽어 줄까.”
“책?”
“너 어릴 때 책 읽어 주면 되게 좋아했잖아.”
“아씨, 형은 내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알아.”
중학교 3학년이면 아직 애기가 맞지 않나? 준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보통 중학생들보다 훨씬 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애기는 애기지.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걷고 있는 재혁을 올려다본 준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애기 아니야?”
준희와 눈을 맞추며 두어 걸음 더 걸어간 재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니, 뭐….”
“형아 눈엔 애기 같은데….”
“…….”
“애기라고 부르면 싫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뭐….”
“…….”
“불러도 상관은 없는데….”
누가 재혁에게 애기라고 했다간 대번에 주먹이 날아갈지도 몰랐지만, 형이 하는 아기 취급엔 쿨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애기라고 불려서 그런지 그렇게 간지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불과 작년에 ‘중2’였으나, 형 앞에선 중2병도 그냥 지나갔다.
“애기가, 커도 너무 크긴 한데….”
“원래 컸거든.”
심술 섞인 투로 반응한 재혁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야구부원이나 같은 학교 재학생이 보면 기겁할 만큼 순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덤이었다.
천천히 속도를 늦춰 걷던 재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오라는 가을은 오지도 않고, 징글징글한 폭염의 연속이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준희는 밖에서 활동하는 걸 많이 힘들어하는 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치고 나왔던 점퍼를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 입고 있는 재혁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둘 다 땀이 송골송골했지만, 준희가 훨씬 버거워했다.
걸어가자고 해서 가고는 있는데…. 경사진 길을 쳐다본 재혁이 준희의 팔을 툭 쳤다.
“형, 그…. 나 오늘 훈련을 대충해서.”
따라서 걸음을 멈춘 준희가 몸을 돌려 재혁을 올려다봤다.
“형이라도 좀 업어야 할 것 같은데….”
핑곗거리를 만들어 낸 재혁이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그거 좀 업고 간다고 훈련이 될 리도 없지만, 형이 거절할까 봐 먼저 선수를 치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준희는 재혁의 요청을 들어주곤 한다.
“이게 훈련이 되나?”
“돼.”
준희의 말을 잽싸게 끊은 재혁이 등을 보였다.
잠깐 널찍한 등판을 바라보던 준희가 팔을 뻗어 동생에게 엉거주춤 업혔다.
야구점퍼에선 언제나 특유의 소리가 난다. 한두 번 업힌 게 아니니 익숙해진 소리. 이젠 좀 부끄러운 감정도 들었다. 그렇게 가볍지도 않을 텐데.
“형아 무겁지.”
“아니, 깃털인 줄?”
“…그럼 훈련 하나도 안 되겠다.”
재혁이 커다란 보폭으로 앞을 향해 내걸어갈 때마다 준희의 몸이 같이 흔들렸다. 팔을 앞쪽으로 쭉 뻗은 준희가 재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돼. 훈련은 되지.”
“이렇게 안 해 줘도 돼. 담엔 형아가 업어 줄게.”
재혁의 마음을 읽은 준희가 다정한 투로 반응했다.
“형 다 뿌서져.”
“안 뿌서져…. 맨날 너만 힘든 거 하고.”
범진의 어투가 입에 익은 두 사람이 특이한 억양으로 말을 나눴다.
“아, 훈련이라니까….”
“오늘만 얘기하는 거 아니야.”
“그건 형이 자주 아프니까 그렇지. 그럼 아프지 말든가.”
“이제 아프고 그런 것도 없는데, 뭐.”
“내가 보기엔 아냐. 나한테 팔씨름 이기고 말해.”
“옛날엔 이겼는데.”
“전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중얼거린 준희가 최대한 상체에 힘을 줬다. 나름대로는 수월하게 업을 수 있도록 돕는 거지만, 재혁은 이렇든 저렇든 아무 상관도 없어 했다.
“아프면 안 돼, 형.”
몇 초간 침묵한 재혁이 대뜸 그런 소리를 했다.
“형은 내 목숨이야. 알지?”
“…그거 그냥 아부지가 하는 말,”
“아니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가만히 있던 준희가 재혁의 말을 따라 알겠거든? 하고 말했다.
“우씨, 놀려.”
“놀리는 거 아닌데.”
“누가 봐도….”
“재혁아.”
“어.”
“재혁이도 형아 목숨이야.”
“…….”
“형아가 꼭 형아 목숨…. 재혁이, 지킬게. 지켜줄게.”
괜히 목이 답답한 기운에, 재혁이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떴다. 누가 누굴 지킨다고 하는 게 이렇게 마음이 먹먹한 말인 줄은 몰랐다. 정말 깃털처럼 가벼운 형을 업고, 그런 형이 저를 지켜 준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재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좋으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힘부터 쎄져야겠네.”
“그래, 그래야겠다.”
“형 오늘부터 나랑 같이 운동해.”
집에 가서 맛있는 거나 먹을 작정이지만, 재혁은 각오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등 뒤에 업혀 있던 준희가 첫날이니까 좀만 살살, 하고 엄살을 부렸다.
어느덧 도착한 아파트 단지 앞에선 두 사람을 특이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학생들끼리 업고 업히는 광경이 흔하진 않았다.
재혁은 가족, 특히 형이나 아빠와 관련된 일이라면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엔 범진의 세뇌가 큰 몫을 했다.
야구부에선 시한폭탄으로 불렸지만, 형에겐 아기, 아빠에겐 강아지였다.
혼자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재혁이 아파트 출입문 앞에서 준희가 팔을 뻗어 카드키를 대는 걸 지켜보았다. 시원하다, 말하는 준희의 말처럼 안쪽엔 서늘한 공기가 가득했다.
“내려 줘.”
“이제 살 만해?”
무릎을 살짝 굽힌 재혁이 준희를 내려 주었다. 가볍게 닿는 재혁의 말에, 준희가 응, 살 만하네, 하고 맞장구를 쳤다. 금방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둘은 20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나, 내가 먼저 왔다고 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뛰어나간 재혁이 먼저 집 앞으로 가 준희를 기다렸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발소리를 들은 재혁이 곧 드러난 준희의 얼굴에 반색했다.
재혁은 팔을 벌린 채 준희가 마저 다가오길 기다렸다.
누가 집에 들어오면, 원래 집에 있던 사람이 마중을 나가 안아 주곤 한다. 먼저 간 셈 치는 건 뭐야, 웅얼웅얼 말한 준희가 조용히 다가가 재혁을 안아 주었다. 보기엔 재혁이 형을 안아 준 구도지만 준희의 마음이 그랬다. 재혁은 순하게 웃었다.
“너네 형 소개 좀.”의 너네 형, 까지만 나와도 재혁은 불같이 성내며 싸움을 내곤 했다. 어떻게 형이 오메가인 걸 알았는지 속속들이 밝히지 않으면 상대방을 놔주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범진과 선재가 학교에 불려간 적도 몇 번이었다. 그때마다 선재는 재혁을 차분하게 달랬지만, 범진은 뒤에서 잘했다고, 계속 그러라고 재혁을 부추겼다.
“형, 대학은 가지 마….”
“갑자기 웬 대학….”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 가면 뭐해….”
“그건 모르겠는데 그래도 가지 마…. 박정후랑도 연락 그만하고….”
“정후가 그런 거 아니라던데…?”
재혁은 틈만 나면 준희의 오래된 친구인 정후를 경계했다. 얼마 전에 정후가 제 친구를 때렸다고 거짓말을 해놓았는데, 준희가 정후에게 직접 물어본 모양이었다. 준희의 반응에 재혁이 자기 입으로 그런 거 했다고 하겠어…? 했다. 가만, 고개를 끄덕이던 준희가 그건 그렇겠다, 반응했다.
안고 있는 자세가 불편했던지, 준희가 팔에 힘을 풀었다. 환영 인사를 그쯤 하기로 했다.
재혁은 문을 열어 준희를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운동화를 벗고 손을 씻으러 가는 형을 지켜보다가 제 신발도 벗었다. 하도 아버지 말을 같이 들어선지, 저도 형이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고, 누군가를 만나 연애하고…. 하는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형이 지금도 서류상으론 성인이긴 하지만 기준은 고등학교 졸업이었다.
아버지가 형에게 하는, 니는 쭉 아부지랑 살자, 하는 말이 꼭 지켜졌음 싶었다. 너무 착하고 순한 형을 누군가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열불이 터져 못 살 것 같았다. 이런 걸 브라더 컴플…. 뭐라고 하던데. 어쨌든, 누가 그렇게 놀려 대는 한이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넷이서도 이렇게 좋으니까.
재혁은 너도 손 씻어, 하고 화장실에서 나온 준희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엔 형이 좋아하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할 생각이다.
재혁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합숙의 영향도 있었고, 주말마다 먼저 나서 요리를 한 덕도 있었다. 가사도우미가 따로 있긴 하지만, 오늘도 직접 해 먹을 생각이었다. 레시피를 확인하려 휴대폰을 켠 재혁이 가족이 배경인 화면에 눈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