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2) (20/29)

* * *

11월 20일 새벽부터 범진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날부터 보이는 족족 케이크를 사 둔 터라 집 밖은 케이크로 성을 쌓은 상태였다.

일찍 일어난 준희가 범진을 따라서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아부지, 하다가 옆에서 서성이는 아저씨들을 향해서도 아저시, 말했다.

5시부터 호출당한 범진의 동생들이었다. 범진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진짜 아저씨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범진과 액면가가 비슷했다. 남자들은 덩치가 크거나 날렵한 근육형 몸매거나, 딱 두 종류로 나뉘었다. 범진은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한때 100kg가 넘은 적도 있었지만 칼을 제대로 쓰면서부터는 몸을 다듬었다. 그래도 90kg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았는데, 선재와 연애 같은 걸 하면서 체중이 80kg대로 떨어지게 되었다. 말을 자세히 안 해서 그렇지, 선재를 보려고 산을 탔을 때 별꼴을 다 겪었다. 키를 훨씬 넘는 철조망을 기본 다섯 개 이상씩 넘고, 꽁꽁 언 암벽을 타느라 칼도 들고 다녔다. 단숨에 오르지 못하면 그대로 미끄러지는 구역도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선재는 여태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멧돼지를 본 것도 사실이었다. 칼을 꺼내 들고 한판 붙을 생각을 하는데 다행히 새끼들 때문인지 돼지는 범진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갔다. 졸졸 어미를 따라붙는 새끼 돼지들만 세 마린가, 네 마리는 되었는데.

“얌마.”

범진의 부름에 근처에 있던 남자가 예, 하고 다가왔다.

준희는 얼핏 범진과 비슷한 아저씨들을 잘 따랐다. 가까이 붙은 남자를 향해 아저시, 하고 팔을 벌렸다.

“쓰읍.”

범진은 준희가 아저시, 아저시, 하고 아는 체하는 것까지는 봐주었으나 제게 하는 것처럼 안기려고 들면 금방 안 된다고 씁, 하는 소리를 냈다.

어정쩡하게나마 준희를 받아주려던 남자가 머쓱한 듯 손을 뒤로 돌렸다.

높이 팔을 들었던 준희는 씁, 소리에 방향만 틀어 범진의 목을 안았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터라 아이와 높이가 맞았다. 범진이 준희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니 알파 아저씨들, 아부지가 뭐라고 그랬냐, 하고 물었다.

“아젓씨.”

“그니까 그 아저씨들 다 머냐고.”

“…쓰으…. 레기이?”

어설픈 발음으로 쓰레기를 말한 준희가 범진에게 매달린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번쩍 안아달란 나름의 표현이었다. 마지막 초까지 꽂은 범진이 팔로 준희를 들어 올렸다. 그래, 쓰레기한테 그래 안아달라 하면 되냐, 안 되냐.

“안 대요.”

졸지에 쓰레기가 된 남자가 헛기침을 흐흠,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인성이 개차반인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범진은 가족을 과보호하기로도 유명했다.

선재는 동생들에게도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 한때 미인에다 오메가라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거기까진 범진도 그러려니 했지만, 소문이 더러워지면서부턴 가만있지 않았다. 그때 범진은 동생들 줄을 세워 몽둥이찜질을 시킨 것도 모자라, 더는 생활과 연관이 없는 조직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소문의 근원을 찾으려고 했었다. 난데없이 집에 찾아갔고, 문이 열리면 선재 사진 한 장을 보여 주고 가만히 쳐다보는 식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아는 체를 하는 순간 범진의 눈이 돌아갔다. 범진이 심하게 두들겨 팬 전 조직원은 총 셋이었다. 그중 한 명은 여태까지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 정도로 지독한 성미를 아니 동생들도 굳이 선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칠 때는 있긴 한데, 그때도 말을 시키거나 먼저 쳐다보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가족을 건들지만 않으면 괜찮다. 범진의 동생들이 되새긴 생존법이었다. 인성적으로 모자란 부분이야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 범진은 좋은 오야지인 편이었다.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범진은 누구보다 밑바닥의 생태를 잘 알았다. 가족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밑에 딸린 새끼 조직들이 줄줄이 와해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았다.

당시 일자리를 잃은 동생들의 생계를 몇 달간 범진이 책임졌다. 범진이 암만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특정 구역의 자릿세 같은 건 여전히 범진의 몫이었다. 한 달에 그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만 3천이 넘었다. 범진은 그걸 다 동생들의 몫으로 돌렸다. 그렇게까지 해주는 형님이 시키는 잡일이었다. 반 일반인 신분에도 남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범진에게 충성을 다했다. 오늘처럼 새벽에 구조물을 가져오라, 선물을 사 와라, 꽃장식을 해와라, 시켜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어수선한 파티 준비도 얼추 끝이 나나 싶었다.

풍선이 펑, 하고 터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풍선이라도 달아야 좋지 않겠습니까? 누가 의견을 냈던 게 시작이었다. 아치형 구조물에 딸려온 이벤트 풍선을 쳐다본 범진은,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대가리 폼으로 달린 줄 알았드만은, 하고 의견 낸 동생을 칭찬했다. 머리가 벗겨진 동생이 민둥머리를 긁적이며 예, 했다.

그렇게 부푼 풍선들이 하나둘, 집과 꽃, 구조물에 매달렸다. 촌스럽고 조악하긴 했지만 범진은 만족했다. 미적 감각이 선재를 볼 때만 발동하는 게 이런 순간에 드러났다.

마지막까지 풍선을 불던 남자의 입엔 하트 모양 풍선이 물려 있었다. 범진의 품에서 풀려난 준희에게 하나 불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남자는 혼자 팔랑팔랑 걸어 다니는 준희에게 눈짓을 하며 풍선을 흔들었다. 준희가 에, 웃으며 다가오자 풍선을 가볍게 위로 던졌는데, 그 풍선이 그대로 잔디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뻥, 소리가 난 건 순식간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덩치 둘은 갑자기 들리는 큰소리에 약한 편이었다. 그 둘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이 소리를 워! 질렀다.

침묵이 30초간 내려앉았다. 그 후, 집에서 선재가 범진을 찾았다. 범진아, 하는 소리를 범진이 먼저 들었다. 밖에서 입 모양으로만 씨발, 개발, 하던 범진이 곤란한 얼굴이 된 남자들을 한 대씩 쥐어박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범진은 계획이 무산되면 새 계획을 즉시 세우는 편이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들었다고, 놀란 듯 말하는 선재의 반응에 작전을 변경했다. 그냥 나와서 축하나 받자고, 선재를 집 밖으로 나오게 했다.

나가자마자 덩치들 한가운데 껴있는 준희가 보였고, 선재는 황당한 얼굴로 범진을 쳐다보았다. 품에 재혁을 안은 채였다. 잠에서 갓 깬 아기가 바깥 공기에 놀라 선재의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선재가 아기를 어르며 이게 뭐…. 하고 범진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때, 제일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새, 생신,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엇박으로 울리는 손뼉 소리와 생일송이 어색하게 어우러졌다.

생신 축하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내들은 ‘사랑하는 누구누구’ 같은 가사는 입에 담지 않았다. 애초에 범진이 이름을 알려준 적도 없고, ‘사랑하는’도 입에 담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일단 범진이 알려준 적이 없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걸리는 부분들을 통으로 ‘생신 축하합니다.’로 바꿔 부른 탓에 노래는 한 패턴으로 끝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수가 와르르 쏟아졌고, 선재는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범진의 동생들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만 위로 들어 짝짝, 손뼉을 쳤다. 범진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대놓고 선재를 쳐다보는 게 꺼림칙했던 탓이다. 그들은 그저 스피커나 되기로 마음을 모았다.

범진이 만족한 듯 웃고, 선재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다.

“…….”

그때부턴 동생들이 필요 없었다. 입이 귀에 걸려 있다가 덩치들을 쳐다본 범진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바깥쪽을 향해 흔들었다. 이제 나가라는 뜻이었다. 예! 하고 작전이라도 짠 듯 동시에 대답한 남자들이 서둘러 울타리를 벗어났다.

“…고맙다고 인사도 못 했는데…. 누군지도 잘 모르고….”

“니 그때 봤잖아. 내 고향 동생들.”

고향 동생이라고 하기엔 체격들이 심상치 않았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남자도 있었는데…. 준희가 멀어진 남자들을 뒤따라가다가 아아젓시…. 하고 울타리에 얼굴을 넣었다. 뚱뚱한 강아지 같은 뒷모습을 쳐다보던 선재가 준희를 불렀다. 준희 이리 와, 했다.

“녜에.”

뒤를 돌아보다 잔디밭에 엉덩이를 꽁, 찧은 준희가 헤에, 하고 무안한 듯 웃으며 일어났다.

다가온 준희에겐 범진이 한 소리를 보탰다.

“쓰으, 니 그렇게 아무나 다 따라가면 아부지한테 혼난다고 몇 번을 말하냐.”

“아부지 가튼 아저시이….”

범진과 비슷하게 보였던 걸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범진의 다리를 끌어안은 준희가 혼나기 싫다고 투정 비슷한 것을 부렸다. 범진이 허, 웃곤 준희를 안아 올렸다.

“니는 여서 선물 다 뜯어봐야지.”

범진의 말에, 준희도 범진에게 안긴 채로 선재를 쳐다봤다.

둘을 쳐다본 선재가 못 이긴 척 앞으로 향했다. 돌계단을 하나 밟고, 잔디가 깔린 쪽으로 내려갔다. 범진이 잽싸게 종이를 깔아 준 덕에 그 위에 앉을 수 있었다. 재혁은 여태 잠투정도 없이 선재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선물은 의자부터 골드바까지…. 쓸데없고 화려한 것들 천지였다. 1,000만 원이 넘는다는 소파형 의자도 있었다. 천에 싸여있어 의자인지도 몰랐던 준희가 범진의 품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의자로 직행했다. 웬 의자냐고 물었더니 그게 ‘맹품’이라고 범진은 말했다. 가격도 1000만 원이 넘는다고 했다.

“이거 다….”

아침이라 잠긴 목소리로 선재는 말을 이었다.

“꼭 네가 산 것 같네….”

방금까지 함께 있었던 남자들의 선물이지만, 어째 범진이 다 샀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었다. 비싸고, 눈에도 잘 띄는 게 하나같이 범진의 취향이 반영돼 있었다. 범진이 옆에서 뭐? 맘에 든다고? 하며 선재에게 되물었다.

제 선물은 보지도 않고 이런 게 더 좋다고 하냐고, 뜻을 잘못 이해했다.

하나 남은 게 범진의 선물이었다. 평범한 종이 상자로 보이는데.

선재는 범진의 말에 고개만 저으며 하나 남은 선물 포장을 풀었다.

“…….”

제일 처음 보인 건 크레파스였다.

“니가 그, 크레파스 없는 게 그래 서러웠다고 해서.”

툭, 뱉은 범진의 말에 선재가 고개를 들었다가 숙였다. 아마 자다가 그런 잠꼬대를 했지 싶었다. 맨정신엔 그렇게 말한 기억이 없는데. 어디까지 말했는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젤 비싸 디지는 걸로 달라 하니까 그거 주든데. 쫌 갠찮냐.”

어디 쓸 데도 없는 걸, 쓰기에 괜찮을 것 같냐고 묻고 있었다.

선재는 크레파스를 꺼내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호기심 때문인지 재혁도 크레파스에 손을 얹으려 했다. 선재가 아이 손이 닿기 쉽도록 크레파스를 내려주었다. 작은 두 손이 크레파스 케이스 위에 닿았다.

금방 고개 숙인 선재는 아이와 손장난만 쳤다. 30초가 가고, 1분이 갈 때까지도 선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거 신기해? 하고 아이에게만 물었다. 삐딱하게 서 있던 범진이 별로냐? 하고 시비 걸 듯 물어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선재는 그렇게 대답을 피하다가, 잘 쓸게, 까지만 말했다. 무슨 말을 더하고 싶기도 하지만, 했다간 눈물이 날까 봐 그러지 못했다.

크레파스 밑에 깔린 건 작년에 봤던 골드바와 새로 산 듯한 골드바, 그리고 현금이었다. 5만 원권 다발이 상자 아랫면을 수북하게 채우고 있었다. 작년과 똑같은 물질적 선물 공세에 선재의 웃음이 터졌다. 크레파스와 재혁을 안은 채로 범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좋냐?”

선재가 반응할 땐 범진의 입술도 씰룩이며 올라갔다.

“좋다.”

조오타, 하고 늘여 말한 선재가 범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뒤론 셀 수 없이 많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범진이 사 온 것도 많았지만 동생들도 케이크를 챙겨온 탓에 개수가 한 번에 파악되지 않을 정도였다.

호기심에 케이크 쪽으로 다가간 준희는 선재의 어깨 위에 놓인 범진의 얼굴을 웃으며 쳐다봤다. 주니, 하고 손가락으로 하얀 케이크 하나를 가리키기도 했다. 범진이 선재를 안은 채로 먹어라, 하자, 선재가 뒤를 슬쩍 돌아보려 했다.

“씁, 니는 내한테 집중하고.”

뒤에서 아이가 꺄, 하고 즐거운 소리를 냈다. 선재는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범진을 조금 더 안고 있기로 했다. 졸지에 샌드위치가 된 재혁이 갑자기 드리워진 어둠에 팔로 범진의 배를 치고 있었다.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마워….”

선재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고맙냐, 하고 중얼거린 범진은 고개만 살짝 돌려 선재의 머리칼과 목에 닿는 대로 입을 맞췄다.

“하아, 젖내 뒤지….”

“말조심해….”

조용히 범진의 말을 막은 선재가 속으로만 웃었다. 한 일주일쯤 된 것 같은데. 범진이 제 몸에서 애기 냄새 혹은 젖내가 난다고, 얼굴은 물론이고 겨드랑이도 틈만 나면 빨려고 들었다. 그때마다 애기를 안고 있으니 그렇다고, 너한테도 재혁이 냄새가 난다고 말해도 범진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채재혁이 냄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앙, 하고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케이크 맛을 다 보았는지, 아이가 입에 크림을 묻히고 등장했다.

엉성하게 안은 두 사람, 엄밀히 말하면 세 사람을, 준희도 옆에서 껴안았다. 짧은 팔을 용케도 뻗어 선재와 범진의 등을 꼬물꼬물 만졌다. 눈을 돌린 선재가 준희 케이크 먹었어? 묻자, 준희가 살짝 떨어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도 품에서 선재를 놓고 준희를 쳐다봤다.

먹어도 몰래 먹으야지, 하고 아이 입을 엄지로 쓱 쓸어주었다.

낯선 사람들이 집과 접한 길로 들어선 건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출장뷔페까지 부른 범진은 30인분 주문을 넣었다고 했다.

먹을 입이 네 개뿐인데 30인분은 어디서 나온 계산식인가 몰랐다. 심지어 재혁은 입으로 칠 수도 없는데도 말이다.

선재는 하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요리를 둘러보며 얼굴만 쓸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동생들을 부르라고 해도, 범진은 우리 먹을 것도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까지 왜 하나, 싶긴 한데 웃음은 자꾸 걸렸다.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가도 피식, 입꼬리를 올린 선재가 고개를 자꾸 저었다. 얼굴을 감싸고 주변을 돌자 범진이 곁으로 와 그래 좋냐? 물었다.

“좋….”

눈을 쳐다본 선재가 좋네, 그래, 하고 포기한 듯 대답했다.

업체에서 준비해 준 식사용 테이블은 총 여섯 개였다. 선재는 재혁과 준희가 앉은 테이블을 한번 쳐다보았다. 등받이가 푹신푹신한 소파형 의자를 골라 아이 둘을 먼저 앉혀 놓은 참이었다. 범진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든 선재가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찰칵, 소리가 몇 번이나 났다.

“야, 니 내랑도.”

찍다가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얼굴을 내뺐다.

“나 세수도 안 했는데.”

“닌 씻으나 마나다.”

“말을 꼭,”

“아, 안 씻어도 좆니 이쁘다고.”

조용히 말한 범진은 선재의 손에서 폰을 뺏어 셀프캠 모드로 전환했다. 손으론 선재의 어깨를 꽉 쥐고 힘을 줬다. 화면에 두 얼굴이 들어오자 선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같이 찍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찰칵, 찰칵, 하고 범진은 사진을 다섯 장이나 찍었다. 혼자 선재의 뺨에 뽀뽀를 하고, 손으로 머리를 붙였다가, 낸테도 뽀뽀해 봐라, 하고 선재의 뽀뽀를 기다렸다. 선재는 군말 없이 입을 갖다 대주었다. 셔터 소리와 쪽, 소리가 동시에 났다.

재혁의 이유식까지 놓고 시작된 아침 겸 점심 식사였다.

살짝 싸늘하긴 하지만 햇볕이 따뜻해 밖에서 식사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원래는 조리사도 있어야 하지만 범진이 돌려보낸 탓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진은 세팅을 하는 동안에도 누가 선재를 쳐다보는 것 같으면 그 사람 앞으로 가 괜히 눈을 치떴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조리사가 근처에 계속 있는단 말엔 범진이 구성을 변경했다. 결국, 일도 안 하고 두 배의 페이를 받고 돌아간 조리사만 큰 이득을 보았다.

선재는 쉽게 배가 불렀다. 도미와 전복 요리가 특히 맛있긴 했지만, 첫 끼다 보니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범진이 옆에서 이것도 먹어보라고, 조리사의 역할을 자처해 구워온 소고기도 두 점밖에 먹지 못했다. 배가 불러서 못 먹겠다고 말하자 범진은 배에 손을 넣어 왔다. 얼마나 배가 부른가 보자고,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리 와 봐라. 몸을 빼려고 하면 두 팔로 안았다. 어쩔 수 없이 범진에게 내준 배는 숨 쉴 때마다 살짝씩 부풀고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범진은 일부러 선재의 귀에다 대고 하아, 하아, 숨소리를 크게도 들려줬다.

영채가 집을 찾은 건 출장뷔페가 다 정리되고 난 다음이었다.

새벽부터 깨었던 준희는 물론, 아침에 깨서 식사까지 하고 들어온 선재와 재혁까지 침대에서 같은 자세로 잠이 들었다. 범진도 선재를 뒤에서 안고 있긴 했지만 잠은 자지 않았다. 입으로 뒷머리칼을 문지르며 선재야, 선재야, 하기만 했다. 잠결에 선재가 왜…. 대답해도 계속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을 영채에게 맡긴 두 사람은 백화점과 가구점을 들렀다가 호텔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샴페인과 간단한 요리도 주문했으나 이미 배가 너무 찬 상태였다. 쉴 겸 침대에 누워 범진을 쳐다보면, 범진은 니 생일이니까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면서도 계속 발기했다. 픽 웃은 선재가 먼저 범진을 끌어안았고, 그때부턴 쭉 섹스만 했다. 일찍 나온 터라 섹스를 몇 번 한 뒤에도 해가 중천이었다.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범진은 선재의 선물들을 들고 들어오느라 손이 모자랐다. 그나마도 가벼운 것들만 들고 온 것이다. 가구 같은 건 며칠이 지나야 배송된다고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선재는 범진이 사 준 크레파스로 준희와 그림을 그렸다. 해가 질 즈음 또 외출을 했는데, 그땐 아이들도 함께였다.

한 수제버거집을 통째로 빌린 범진은 거기서 또 생일 파티를 열었다.

패스트푸드점 대신이라고 했다.

선재는 하루 종일 잘 참다가, 버거 세트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못 보도록 등을 돌리고, 범진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범진은 선재의 뒷머리에 손을 댄 채로 준희에게 말을 걸었다.

애기 니도 여서 파티 하자? 하고 준희를 들뜨게 만들었다.

준희의 녜! 소리를 들은 선재가 훌쩍이면서도 웃었다. 외국 펍 느낌이 나는 버거집이라 조명이 많이 밝진 않았다. 선재는 눈물을 얼추 다 흘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울어서 벌게진 얼굴로 치즈버거를 맛있게 먹었다. 범진이 그러고 먹냐, 놀렸지만 끄덕끄덕, 고갯짓을 하고 먹기만 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고이면 범진이 손으로 입을 닦아 주듯 눈을 닦아 주었다.

사는 동안 이런 생일도 다 있었다.

꿈인가, 해서 볼을 꼬집어 보면 아팠다.

선재는 그날 밤까지의 일들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스케치북을 한 장 찢어, 크레파스로 어설프게 그림일기를 그렸다. 옛날엔 거짓말 가득한 일기를 썼는데, 다 커서 쓰는 그림일기엔 거짓말이 없었다. 정말로 행복했고, 정말로 좋았다.

* * *

재혁은 준희와 달리 눈에 띄게 자라는 편이었다. 잘 크는 아이가 마냥 좋기도 하지만 첫째인 준희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한 구석도 있었다. 나중에, 재혁이 제 형을 무시하거나 괴롭히면 대처를 어찌해야 할지 벌써 막막했다. 알파인 아들을 기르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엔 막연히 잘 지내겠지, 했는데 범진에게 하는 걸 보면 생각만큼 순한 편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조언받은 대로 해 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범진을 일부러 재혁 곁에 두려고 하고, 둘만의 시간을 갖게 하는데도 아이가 그런 걸 썩 원하지 않았다. 갓 태어났을 때가 제일 순했다. 그땐 범진이 꽤 안고 있기도 했으니까.

좀 안고 있어 보라는 말을 범진은 들어주지만, 아이가 허락하지 않았다.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우는 아기를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선재는 그럴 때마다 매번 제가 다시 안았다. 그러면 아이는 울음을 그쳤고, 곤히, 순한 얼굴로 잠에 빠지곤 했다.

잠깐 그 생각에 잠겨 있던 선재가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인파에 눈을 크게 떴다.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인가? 개중엔 어린이집 아이들의 공연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선재가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트는 범진을 쳐다봤다.

“괜히 너무 큰 데서 하는 거 아니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렸지만, 범진이 뭔 걱정이냐, 하고 선재의 아래턱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차에서 선재가 먼저 내렸고, 범진이 뒤이어 내렸다. 범진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엔 무감각한 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스킨십하고 뽀뽀하려고 달려드는 범진에게 경고도 하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해 봤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선재도 이제 어깨동무나 허리를 감싸는 것엔 별말을 안 했다.

잠시도 떨어지기가 싫은지, 범진은 건물로 들어가는 내내 선재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극장은 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너무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또 너무 협소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압박을 느끼거나 겁을 먹을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을 것 같았다.

먼저 의자에 앉은 선재가 범진이 옆에 앉는 걸 지켜봤다. 범진도 자리에 앉자, 근처에 앉은 다른 가족들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준희를 보러 가고 싶지만 이런 게 처음인 아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라 가만히 있기로 했다. 긴장되는 마음에, 선재가 범진의 셔츠 소매를 쥐었다.

“나 이런 거 처음이야.”

“니만 첨이겠냐?”

턱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말한 범진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봤다. 영화관만큼 캄캄한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카메라 세팅을 하거나 텅 빈 무대 쪽을 바라보거나 했다. 시선을 거둔 범진이 선재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

“뽀뽀해 준다매.”

“…좀.”

범진은 건물 입구에서 한 말을 잊지 않았다. 뽀뽀를 하려고 하자, 선재가 좀 있다가 해 준다는 말을 했었다. 좀 전에 일어난 일이니 선재 또한 당연히 기억했다. 안 하면 내가 한다, 하고 가까워지는 범진의 얼굴을 선재가 손으로 막았다.

“가만있어.”

“해 주냐.”

“가만.”

해도 나중에, 차에서 해 주겠단 말이었는데. 선재는 주변 눈치를 보다 범진의 뺨에 뽀뽀를 소리 나지 않게 해 주었다. 다행히 바로 뒤엔 사람이 없었다. 앞쪽 좌석에서도 이쪽을 볼 것 같진 않고.

잠시 멈춰 있던 선재가, 입에도 제 입술을 붙였다. 뺨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최소 3초는 붙이고 있어야 뽀뽀다, 쭈욱 빨아야 뽀뽀다, 그런 말을 해 온 범진인지라 바로 뗄 수도 없었다. 초를 세기 시작한 선재가 살짝 눈을 감았다.

1초, 2초, 3초. 혹시 모르니까 1초 더. 그렇게 입술을 떼자 범진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크게 끄덕끄덕했다. 야, 니 이제는, 하고 입을 열었다가 음흉하게 웃기만 했다.

“…….”

반은 밉고, 반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쳐다보자 범진이 단숨에 얼굴을 붙여 왔다.

“불만 있냐.”

“뭐.”

“확….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게.”

“한 입 거리?”

“내가 니 그래서 아껴서 먹고 있다 아니냐.”

“…….”

쓸데없이…. 재치는 좋아서.

속으로만 참 밉다고 생각한 선재가 자세를 틀어 앞을 쳐다봤다. 크게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스피커가 켜진 모양이었다. 아직 무대엔 아무도 없었다. 보기엔 그다지 크지 않은 무대인데, 아이들은 크게 느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무대의 끝과 끝을 쳐다본 선재가 아예 지잉, 울리는 소리에 연단 쪽을 바라봤다.

시작은 준희보다 더 어린아이들의 무대였다. 아이들은 그저 무대에 나와 바구니에 담겨 있던 작은 종잇조각을 무대 사방에 뿌리고 퇴장했다. 그마저도 잘 해내지 못한 아이는 울먹거리는 얼굴을 하곤 친구들의 등만 보며 무대를 활보했다. 귀여워서 슬쩍 웃은 선재가 범진의 팔을 만지며 귀엽다, 했다. 범진은 껌을 쩍쩍 씹으며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제가 어린이집에서 일했을 때는 이런 행사를 한 적이 없었다. 물론 행사 일정에 잡혀 있긴 했지만, 그전에 늘 범진이 등장했고,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었었다.

경험이 없던지라 준희에게 할 수 있는 조언도 거의 없었다. 긴장한 아이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말만 했지만 어디 아이 마음이 어른과 똑같을까. 오늘 아침까지도 어린이집 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자 아이는 잔뜩 긴장을 했다고 했다.

“나온다, 야.”

심드렁하게 앞을 쳐다보던 범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껌을 씹던 것도 잊고 입꼬리를 올렸다.

단체로 하얀 날개를 단 아이들은 처음에 무대를 꾸몄던 아이들보단 확실히 큰 느낌이 있었다. 마지막쯤 등장한 준희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눈에 띄게 작았다. 갑자기 훅 낮아진 높이에 선재도 아이가 저기 있구나, 싶어 긴장을 했다. 실제로도 조그만 아이인데 멀리서 보니 더 작게 보였다.

촬영용 카메라를 들 생각도 못 하고 선재는 무대만 쳐다봤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아이 동선을 따라갔다.

동요 두 곡과 가요 한 곡이 연이어 나왔다. 동요는 귀에 익은 것들인데 가요는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준희는 노래가 흐르는 동안 외웠던 안무를 어떻게든 해내는 모습이었다. 발꿈치를 들고 ‘이만큼’을 표현하는 대목에선 옆에 있던 아이의 팔에 몸이 밀리기도 했지만,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하얀 날개가 율동을 할 때마다 팔랑거렸다. 조명이 무대에 집중돼 있어 아이들 눈엔 캄캄한 좌석만 보일까. 선재가 괜히 팔을 들고 인사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애기 저거 겁먹었다.”

범진은 낄낄 웃는 것 같다가, 그런 말을 하면서는 몸까지 들썩거렸다. 몇 번이나 가만있으라 손으로 범진의 허벅지를 누른 참이었다.

겁먹었단 말엔 선재도 무대 쪽으로 시선을 기울였다.

범진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던 아이가 또 준희를 쳐서 준희는 아예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이번엔 일어나지도 못하고 당황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범진이 훅, 앞으로 지나간 순간 선재도 몸을 일으켰다.

웃고, 즐거운 분위기인 건 맞지만 준희가 즐겁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앞에 있던 선생님이 손짓을 하는 사이, 범진이 무대 아래쪽에 서서 박수를 짝, 쳤다. 아이에게 그냥 이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선재도 엉거주춤 일어난 채로 준희를 기다렸다. 노래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범진이 저러면 아이는 늘 범진에게 안겨 오곤 한다. 내심 안심한 선재가 준희를 바라보는데, 웬걸. 아이는 일어나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입술을 앙다물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다른 아이들을 따라서 하트를 그리고, 빙글빙글 돌았다.

노래가 완전히 멎고 박수가 쏟아지고 나서야, 준희는 범진에게 울면서 달려갔다. 아부지, 하고 잉잉 울었다.

몇몇 아이들이 이미 부모의 품으로 돌아와 있었다. 선재도 작고 하얀 천사를 안고 돌아오는 범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널따란 가슴팍에 눈만 푹 묻고 우는 준희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선재는 돌아온 준희를 제가 다시 안으며 잘했다고, 너무 멋있었다고 추켜세워 주었다.

“준희 너무 잘했어.”

“주니가 넘어져서….”

“아니야. 그래도 다시 했잖아. 우리 아기 너무 멋있었어.”

아기와 멋있단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 범진이 준희의 볼을 고무공 만지듯 손가락 세 개로 쭉쭉 주물렀다. 셔츠엔 준희의 눈 모양과 눈물 자국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아이를 만지던 범진이 니 잘하든데? 했다. 1등이란 말도 덧붙였다. 범진의 말은 철석같이 믿는 준희였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까지도 삐죽거리던 얼굴에서 정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피식 웃은 선재가 준희의 이마를 반듯하게 만져 주었다. 땀과 눈물에 젖은 작은 얼굴을 꼼꼼하게 쓸어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선재는 선생님께 인사드린 뒤 아이를 안은 범진에게 다가갔다.

준희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아직까지도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천사 의상 위에 겉옷을 걸쳐 준 선재가 마지막까지도 잘했단 말을 잊지 않았다. 아이는 선재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네에, 대답하곤 커다란 전봇대 끌어안듯 짧은 팔을 벌려 범진에게 매달렸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식당은 조용한 룸이 있는 소갈비 식당이었다.

준희가 여기서 파는 양념된 소갈빗살을 참 좋아했다. 집에서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공연장에선 멀지 않았다.

겉옷을 입고 차에 탔던 준희는 쓸리는 감각이 불편했던지 겉옷을 벗었다. 날개옷 벗자고 말하면, 멋지다는 이유로 조금 더 입고 싶어 했다. 그 탓에 팔랑거리는 날개를 매달고 아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본 범진이 사진을 찍었다. 찰칵하는 소리에 선재가 뒤돌아보자, 언제 얼굴 앞까지 왔는지 뺨에 입술이 닿았다.

룸에 들어가기 전에 주문을 끝낸 범진은 준희의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더 담았다.

이미 간단히 세팅된 상이었다. 자리를 잡은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아기만 찍지.”

제게도 초점이 맞춰지자 선재가 몸을 옆으로 틀었다.

“가만있어 봐라.”

그 말에 선재는 일부러 물도 마시고, 물수건을 꺼내 아이의 손도 닦아 주었다. 앞에선 범진이 정신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면 손을 뗄 때까지 연속 촬영을 했다. 차라리 한 번 보여주고 마는 게 나을 정도였다.

직원이 고기를 가져다줄 때까지도 셔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떤 사진이 유독 마음이 들었던지, 범진은 아예 선재의 사진 하나를 고정해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준희에겐 애기 니 이거 다 먹어라, 하고 고기를 몰아주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고기가 아니라 적당히 잘 익은 고기를 아이의 앞에다 놓아 주었다.

선재는 그 고기를 손톱보다도 더 잘게 잘랐다. 준희는 이곳 고기를 밥알처럼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 버릇이 있었다. 원래 먹던 그 맛인지 아이가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체를 양옆으로 기울였다. 푹 젖어 있던 눈도 거의 다 마른 것 같았다. 선재가 그 모습을 보다 미소지었다.

“아부지이…. 주니….”

그렇게 계속 고기를 먹나 했던 준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범진을 우물쭈물하며 쳐다보았다.

고기를 씹고 있던 범진이 고개를 까딱이며 반응했다.

“재여기한테는…. 비밀…. 하…꺼예요….”

입에 양념을 묻히고 그 말을 했다. 맛있는 것과 숨기고 싶은 일은 별개인 일이니까. 속으로 생각한 선재가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더하지 않자, 고개를 돌려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이 선재를 흘끗 보곤 어,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부지가 그런 거 말하겠냐? 하고 준희를 안심시켰다. 아이는 말도 못 하는 재혁에게 무슨 말이 어떻게 전달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준희는 매번 재혁과 대화를 나누긴 했다. 옆에 있던 선재가 준희를 위로하려 했다.

“준희 잘했는데 왜 말하면 안 돼?”

“주니가….”

난데없이 무대에서의 감정이 생각난 듯, 아이는 입에 고기를 넣은 채로 표정을 굳혔다. 눈 근처가 벌게지더니 입술도 뒤집힌 초승달 모양으로 바꾸었다.

“우리 준희 잘했는데 왜.”

“비미일…. 재여기….”

“그래, 그래…. 알았어. 비밀 하자.”

형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잘했다는 말보단 비밀을 지켜 주겠단 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선재는 그렇게 말하고 아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숟가락에 고기를 가득 떠서 아, 하고 소리 냈다. 입에 있던 음식을 겨우 삼켰던 아이는 선재의 눈을 쳐다보다 입을 와앙 벌렸다.

공연도 했고, 배도 부르고, 비밀도 지켜졌겠다, 나름의 큰 관문들을 넘은 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난 직후에만 좀 지친 것 같았지, 식당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전혀 졸려 보이지 않았는데. 피로감이 한꺼번에 작은 몸을 덮어버린 것 같았다.

방석 위에 손수건을 깔아 준 선재가 아이 머리가 그쪽으로 가도록 눕혔다. 날개를 벗겨 주자 아이는 팔도 위로 쩍 벌리고 누웠다.

“첫 끼네….”

중얼거리듯 말한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언제 쳐다봐도 높은 확률로 눈이 마주친다. 고개를 살짝 내리고 있던 범진은 눈을 든 채 선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젓가락을 든 선재가 먼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웬만해선 밖에선 계속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흥분시켜서 좋을 게 없으니까. 태연한 척, 선재가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집었다.

“또 시비야.”

범진이 젓가락을 툭, 치는 바람에 고기가 불판 위로 떨어졌다.

“여 와 보라니까.”

처음 하는 말이면서 몇 번은 한 척을 했다.

테이블은 벽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범진과 벽면을 흘긋거린 선재가 못 이긴 척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옆걸음을 걸어 범진의 곁으로 가 앉았다.

범진은 넓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일부러 가까이에 앉으려고 옆쪽으로 조금도 비켜앉지 않았다. 범진은 곁에 선재가 앉자마자 어깨를 안았다. 순식간에 범진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렸다. 선재가 눈을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나 배고파.”

“누가 못 먹게 하냐.”

뚱하게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젓가락을 쥐었다.

믿음이 가는 건 아니었다. 밖에서도 발기를 해서 니 이거 쫌따가 주께, 하고 손을 억지로 앞섶에 가져다 댄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이런 공간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밥은 먹게 해 주겠지, 싶었던 선재가 다시 구워진 고기로 젓가락을 내밀었다.

“아.”

어깨를 감싸고 있던 범진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어깨를 꽉 잡힌 선재가 인상을 쓰며 젓가락을 놓았다.

“계속 시비 걸래…?”

“이게 시비냐.”

“그러, 업.”

대답을 하려던 입이 범진의 입술에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입술이 뭉개지는 뽀뽀였다. 쪽, 닿은 게 아니라 퍽, 닿았다. 코끝도 아팠다.

“한 개 줘 먹어라.”

“…….”

참 치사하다. 뽀뽀 한 번당 고기 한 점씩 먹게 해 주겠단 심산이었다. 예전엔 배가 터지도록 먹이기만 했다면 요샌 이런저런 조건을 거는 일이 늘었다.

시험 삼아 한 점을 먹어 본 선재가 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범진을 쳐다봤다. 며칠 전에도 초밥을 사 와선 이런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초밥 하나당 겨드랑이 한 번 빨게 해주기가 조건이었고, 밤은 한정적인 탓에 지금도 겨드랑이 빨기 찬스가 3회인가 남아 있었다.

금세 한 점을 삼킨 선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범진이 계속 어깨를 잡아 안은 탓에 몸은 거의 딱 붙은 상태였다.

“안 먹어, 이제.”

“뭐 씨. 먹어야지.”

이렇게 심술을 부리면서 꼭 먹어야 한다고는 말했다. 뭘 먹으면서 뽀뽀를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까. 선재는 입술에 살짝 묻은 기름을 손으로 닦아냈다.

하아, 속으로만 한숨을 쉰 선재가 상체를 조금 세워 범진에게 뽀뽀했다. 그리곤 손으로 범진의 입을 닦아 주고 제 입도 닦았다.

“입에 기름 다 묻잖아….”

작은 소리로 불평한 선재가 고기 한 점을 또 가져와 입에 넣었다. 이번엔 앞만 보고 고기 맛을 보자, 범진이 뺨을 잡고 고개를 옆쪽으로 돌렸다. 고기 씹는 게 뭐가 좋다고 입이 헤벌쭉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쭉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고 싶었지만, 범진이 뺨을 놔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존니 이쁜 오리 한 마리가 또 겨 나왔다고 혼자서만 좋아했다.

선재는 소리도 잘 새지 않는 입으로 씨, 하고 읊조렸다. 물론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다. 범진이 뺨을 눌렀다 풀었다 하며 선재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뭐라고 불평하는 게 웃긴지, 곧 버릇처럼 이마를 쿵 하고 붙여 왔다.

“내가 이럼 싫냐.”

이마를 비빈 범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선재의 얼굴을 밀었다.

힘을 줘 얼굴을 빼낸 선재가 바로 앞에 있던 물을 꿀떡꿀떡 마셨다.

“어, 내가 이럼.”

물을 다 마신 선재가 작은 통 안에 담겨 있던 티슈를 꺼내 입술을 깨끗하게 닦았다.

“누가 싫대.”

티슈를 구기며 테이블 위에 휙 던진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장소만 좀 가리라는 거지….”

장소를, 하고 흐리게 덧붙인 선재가 괜히 얼굴을 만졌다.

“니 구미호지.”

“뭐.”

“꼬리 달고 왔나 보자.”

갑자기 허리 안으로 쑥 들어오는 손에 선재가 뒤쪽으로 물러났다. 남은 공간이 거의 없던 자리라 등이 곧 옆쪽 벽에 닿았다.

“이런 게 앞에 있는데.”

범진이 손을 바닥에 댄 채로 서서히 거리를 좁히고 들어왔다.

어? 이런 게, 하고 선재의 턱을 위쪽으로 들었다.

“내가 장소 가리 줘야 되냐.”

“좀….”

나와, 하고 범진의 팔을 밀어내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내 니한테 물어본다 아니냐.”

“…….”

“여서 키쓰하면 안 되냐고.”

그다지 입에 담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범진이 하는 짓은 여전히 꼴통 같기만 했다. 어느 날, 내가 보통 꼴통이냐 혼잣말한 범진에게 대꾸하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숨을 고른 선재가 한 차례 더 범진을 밀어냈다. 집에서, 하고 입을 열었지만, 범진은 듣지 않았다.

입 끝을 제대로 올린 범진이 선재의 턱을 잡았다.

“니가 대답 안 했다?”

“집에 가서 하자고 말했는데….”

더는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었다. 선재는 소극적으로 중얼거리며 범진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금도 하고?”

선재가 범진의 확인에 말을 보태지 못했다.

그리곤 앞에서 해도 되냐, 할 거냐, 그런 말만 하는 범진의 얼굴을 제가 먼저 잡았다.

범진이 이게 뭐냐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선재가 손바닥에 힘을 주고 끌어당기자, 범진이 힘 하나 주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곧 입술이 닿았고, 선재는 먼저 눈을 감았다.

혀를 내밀고 범진의 혀를 찾았다. 뜨겁고 축축한 감각이 곧장 느껴졌지만, 벽에 등이 퍽, 닿아 입이 잠시 떨어졌다. 본격적으로 얼굴을 끌어당긴 건 선재지만, 그 순간부터 과하게 흥분한 범진이 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냅다 달려드는 범진의 무지막지한 힘에 선재가 발로 바닥을 끌며 위로 들려 올라갔다. 벽과 붙은 채였는데도 목이 사정없이 꺾이려 했다. 결국 뻣뻣한 통증을 느낀 선재가 범진의 어깨를 때렸다. 찰싹찰싹, 소리가 났다.

예전에, 범진이 죽도록 싫었을 때도 숨쉬기가 힘들면 어깨를 막무가내로 치곤 했었다. 선재는 문득 그런 때를 떠올렸다. 반은 물러나고, 반은 물러나 주지 않던 범진의 모습을.

붙은 입술에서 츄읍, 하는 소리가 새고 있었다.

입술을 일부러 슬쩍 뗀 범진은 가까이서 선재를 쳐다봤다. 선재가 눈을 감았다가 뜨고, 또 떴다가 감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범진이 선재의 입술을 다시 물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어서 안쪽 살이 보일 정도로 당겼다.

“그러케 빠며…. 아파….”

받침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재밌다는 듯 살을 당기던 범진은 뒤늦게 입술을 놓았다. 금세 오동통해진 선재의 입술에 침이 가득 묻었다. 아릿한 느낌에 입에 손을 가져간 선재가 다른 손으론 범진의 어깨를 뒤쪽으로 밀어냈다.

“누가 안 해주야고….”

입에 이물감이 남았다. 발음을 뭉갠 선재가 입을 아예 막은 채로 범진을 쳐다봤다.

“니 안 해 주잖아.”

“내가 언제…? 집에서, 아니, 사람 없으면 다 해 주는데.”

억울함을 느낀 선재가 안 해도 될 말을 술술 했다. 사소한 말에도 자극을 받는 범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얼굴을 붙이는 게 보였다.

“그르냐.”

“…….”

“어, 그냐고.”

제 어깨를 꽉 잡고 끌어당기는 범진의 손힘에 선재가 상체를 뒤쪽으로 젖혔다. 영락없이 품에 안긴 자세였다. 선재가 범진의 턱 쪽을 올려다보았다.

“해 주는 줄 몰랐네.”

“…….”

“하…. 왜 내가 씨빨, 그거를 몰랐지?”

어깨를 안은 채로 가볍게 뽀뽀한 범진이 찡그린 선재의 얼굴 위에서 씩 미소 지었다.

* * *

“재여기…. 주니에 침대에….”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준희는 재혁을 씻기고 돌아올 때까지 잠을 참을 때가 많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준희가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재혁의 자리를 봐주었다. 어설프게 깔린 침대 위 이불에 작게 웃은 선재가 재혁을 그 위에 눕혔다.

“아기 여기서 자?”

끔벅끔벅 무거운 눈꺼풀을 든 준희가 눈앞에 선재가 있다는 것에만 반응했다. 에, 하고 웃은 아이는 뒤늦게 네에, 하고 대답했다.

“준희 동생 올 때까지 기다려 주고…. 좋은 형아네.”

선재가 재혁을 생각하는 준희의 마음을 읽어주었다. 보드라운 이마를 쓸자 포근한 체온이 손으로도 전해졌다. 나풀거리는 갈색 머리카락도 쓰다듬었다. 손에 물기가 남은 탓에 아이 머리가 조금 젖었다. 물기가 마를 때까지 머리칼을 쓸어 준 선재가 금방 잠든 준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법 자란 재혁은 몸도 잘 가누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며 혼자 반응하기도 한다.

선재가 이쪽을 쳐다보던 재혁에게도 눈길을 보냈다. 어째 준희가 동생을 돌보기보단 재혁이 형을 돌보는 구도가 되었다. 선재는 아이들만 봐도 재미를 느꼈다. 가만 제 형을 쳐다보는 재혁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절로 미소가 피었다.

하얗고 귀여운 아이 얼굴에 범진이 보인다는 것도 신기하고.

범진에게도 매번 말하곤 하는데, 재혁은 정말 작고 맑은 범진 같았다.

“형아 잔다….”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오? 소리를 내는 재혁을, 선재는 다가가 조심해서 안았다. 재혁이도 자자, 하고 중얼거리며 옆에 눕자 아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밝게 켜진 조명을 가리켰다.

자기 전에 불을 꺼야 한다는 걸 아이는 아는 것이다. 재혁을 두고, 선재는 거실 불과 안방의 모든 조명을 소등했다. 방 안은 유독 캄캄했다. 겨우 바닥을 짚어 아이의 발을 찾은 선재가 침대 위에서 재혁을 끌어안았다.

재혁이나 준희나 둘 다 쉽게 잠드는 편이다.

선재는 안은 지 5분도 안 되어 쌕쌕 소리를 내며 잠든 재혁의 몸에서 팔을 서서히 풀었다.

이불을 끌어올려 배까지 덮은 선재가 멀뚱멀뚱 어둠을 응시했다. 민가가 별로 없는 동네라, 집을 어둡게 만들면 눈을 감은 듯 암흑이 된다.

협탁 위쪽을 쳐다본 선재가 혹시 보나 싶어 손을 흔들었다.

범진이 설치한 홈카메라였다. 합법적으로 설치하는 카메라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범진은 거실과 안방에 각각 카메라를 설치해두었다. 선재도 영상 통화 대신 카메라를 통해 인사 같은 걸 할 때가 있었다. 바쁜가? 많이 못 잤으니까 빨리 잠들었을 수도 있겠다…. 손을 흔들거나 앞에서 렌즈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범진은 늘 전화를 걸어오는데. 어쨌든 술은 안 마셨으면 싶었다. 마셔도 혼자 마시면 좋겠고.

범진은 생각보다 인기가 많은 편인 것 같았다. 제 눈엔 별로…. 못생긴 것 같은데 잘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상했다. 그렇게 욕을 달고 사는데도 꾸준하게 오메가나 일반 여성들의 추파를 받는 게 진짜…. 이해가 안 가서…. 다들 눈이 이상한가? 나름 대식가인 편인데 활동량이 많은지 몇 년간 살이 좀 빠졌다. 그것 때문에 쓸데없이 턱선도 살고. 하지만, 그래도 별론데…. 잠이 안 오니 선재는 괜히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별로, 별로, 하다가 혼자서만 속이 상했다.

억지로 눈을 감은 선재가 조금만 자자고 재촉했다.

아이처럼 무슨 잠투정인가 싶지만, 범진이 곁에 없으면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범진이 출장 일정을 질질 끌다 오늘에야 겨우 집을 비웠으니 적어도 하룻밤은 혼자 지내야 했다. 아이들도 있으니 혼자인 것도 아니지만. 괜히 손을 뻗어 재혁의 손등을 만져 본 선재가 감은 눈에 힘을 줬다.

양을 세다가 소를 세 보기도 하고….

결국은 범진을 세게 되었다. 범진 한 마리…. 범진 두 마리…. 다리도 네 개로 만들어 상상했다.

그렇게 서른다섯 마리까지 세던 선재가 진짜 범진을 떠올렸다.

범진은 요즘, 인공호흡을 하면서 자자고 할 때가 많았다.

키스면 키스지 무슨 인공호흡이야. 선재가 그렇게 말하면 죽어도 키스는 아니라고, 니 폐활량 늘려 줄라고 하는 거라며 되지도 않는 진지한 대답을 냈다.

바로 전날 일인데 엄청 옛날 일 같네.

선재는 30분이 지나도 잠들지 못했고, 결국 아이들을 방에 남겨 둔 채 혼자 주방으로 향했다. 너무 밝은 불을 켜기는 좀 그러니 주방 안쪽에만 들어오는 조명을 밝혔다.

나온 김에 녹차도 한 잔 우리고, 사 두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소설책도 거실 테이블에서 가져왔다.

식탁 안쪽에 자리 잡은 선재는 빳빳한 책의 머리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내용인 듯한데, 선재는 본문을 읽으면서는 범진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겁내지 않았을 것 같지만 결국 범진도 사람이고, 사람은 누구나 작고 약했던 때가 있다. 그때의 범진을 누군가 보살펴 줬더라면 어땠을까. 선재는 아이들을 볼 때나 유아 동화 같은 걸 읽으면 꼭 그런 가정을 해 보곤 했다.

중학교 때 범진은, 선생님에게 너 같은 새끼는 안 태어나는 게 나았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그때 그 새끼 어떻게 조팼는지 아냐. 범진은 웃으며 주먹질하는 시늉을 했지만, 선재는 덩달아 웃지 못했다.

그냥 가슴만 아팠다.

버릇처럼 최범진, 하고 작게 읊조린 선재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책 위에 얼굴을 묻었다.

상체를 엎드린 선재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꿈에선 범진이 나왔다.

범진은 꿈에서도 막무가내였다. 자는 얼굴도 개이쁘냐, 하고 뺨을 마구 꼬집어댔다. 하지 말라고 하면 코를 꼬집었고, 그것도 싫다고 하면 귀를 깨물어 왔다.

아.

왜 이렇게 아파.

제대로 된 반격을 하려던 찰나였다.

안 그러면 얼굴을 쫌 돌리 주든가. 이쪽도 보게.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꿈이 아닌가?

순간 눈을 뜬 선재가 제 뺨에 닿은 범진의 손에 놀라 몸을 떨었다. 쪽잠이었지만 늦은 시각이라 꽤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멍한 시야에 잡힌 건 분명 범진이었다. 범진이 바로 옆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건지 자세를 완전히 잡은 상태였다. 놀랐던 선재도 서서히 평정심을 찾았다.

“뭐야?”

“뭐기는 니 서방이지.”

범진은 내 안 보이냐? 하고 얼굴을 들이댔다.

“아니, 내일 온다면서, 아.”

머리를 밀어낸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의아한 듯 응시했다.

“니 빨리 볼라고 조옺나게 일만, 어? 조, 빠지게 하고 왔다 아니냐.”

좆빠지게와 좆나게밖에 들리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티가 났다.

표정을 찌푸린 선재가 손을 들어 범진의 입을 막았다.

웬만해선 그냥 넘어가지만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경박한 비속어가 섞이면 진짜 심하단 신호를 이렇게 줬다.

도가 지나친 욕설엔 꿀밤 맞을 각오도 하라고 했었으니.

주먹을 쥔 선재가 범진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어이. 그 정도로 내가 말을 듣겠어요.”

범진이 선재의 손목을 위로 들었다.

그러곤 해 봐라, 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이가 없다….”

속으로만 하려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때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범진이 하도 어이가 없어 말이 그렇게 나왔다. 선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어이가… 하고 덧붙이는 것까지 했다.

눈을 든 범진이 선재의 손을 풀어 주며 실실 웃었다. 식탁 의자 두 개를 바짝 붙이곤 선재의 몸을 익숙하게 끌어안았다.

“니만 어이없는 줄 아냐.”

“뭐….”

“어? 니만.”

선재는 말없이 범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하아, 이 쌍판때가리….”

빤히 쳐다보다 거친 말까지 입에 담은 범진이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못마땅하게 변한 선재의 얼굴을 다시 보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니 이쁘다고.”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선재는 미세하게 미간을 조이면서도 범진의 말엔 입을 다물었다.

범진의 몸은 바깥 공기 때문에 약간 차가운 상태였다. 몸보다는 옷이 차가운 거겠지만.

“내가.”

꼭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붙인다. 갑자기 입술을 퍽, 붙인 범진의 행동에 선재가 눈만 살짝 감았다 떴다.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범진은 바로 위에서 선재를 내려다보았다.

“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그러면서 대답 들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범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 퍽, 억지로 뽀뽀를 해 왔다.

거센 박치기를 당하듯 입술이 꾹 짓뭉개졌다. 범진은 선재의 윗입술을 입으로 잡고 쭉쭉 빨았다. 차가운 입술에, 선재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범진을 쳐다봤다. 장난하듯 입술을 물어 빨던 범진이 선재의 뒷머리에 손을 댔다. 그리곤 입술을 벌려 선재의 입을 가뒀다.

하루에 몇 번 입을 맞추는지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오늘은 범진과 저녁에도 만나지 못했었다. 괜히 애틋했다.

부드럽게 키스하던 범진이 입안에서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입을 떼며 보자, 하고 작게 중얼거린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재도 눈을 떠 범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 앉은 데다 범진이 꼿꼿하게 상체를 세워, 선재가 눈을 들어야 시선이 마주쳤다.

“뭘 보냐.” 그 눈빛이 좋은지, 범진이 괜한 시비를 걸었다. 입을 내밀어 선재의 눈을 핥았다.

범진이 눈을 핥아도, 선재는 다시 떠서 범진의 눈을 쳐다봤다.

“뭘 보냐고.”

허리를 끌어안는 범진의 손길에 선재가 눈을 더 위쪽으로 들었다.

몸이 붙자 완전히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각도가 어긋났다.

범진이 알겠다는 듯 손을 깊이 뻗어 선재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왜. 내 없어서 못 자겠드냐.”

계속 쳐다보던 눈빛에서 뭔가를 읽은 모양이었다. 선재는 거기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못 잔 건 맞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하러 간 사람을 괜히 귀찮게 만들긴 싫었기 때문이다.

“어? 내 없음 잠도 못 자냐.”

“애도 아니고…. 내가,”

“그냐? 내가 알기로는 니 거의 얼란데.”

“어…. 업.”

반박을 하려던 입이 범진의 입에 다시 막혔다.

되물어 놓고 입술을 맞부딪힌 범진 때문에 선재가 뒤로 밀려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범진이 팔을 뻗어 선재의 등을 받치고, 최대한 제 쪽으로 끌었다.

선재도 반사적으로 범진의 목에 팔을 걸었다. 입이 떨어지면 죽는 것도 아닌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선재지만 이어진 키스를 묵묵히 받아 주었다.

10여 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범진은 갑자기 일어나 선재를 들어 식탁 위에 앉혔다. 집요하게 눈을 맞추던 범진은 바지춤에 손을 얹더니 성기부터 툭 꺼냈다. 잠자는 선재를 볼 때부터 발기해 있던 자지였다. 그게 꺼떡이는 와중에도 범진은 선재를 품으로 당겼다. 손으로 엉덩이를 살살 치자, 선재가 자연스럽게 범진에게 매달려 엉덩이를 들었다. 범진이 그 틈에 선재의 잠옷 바지와 속옷을 잡아당기듯 벗겼다.

“아, 제대로 벗고…. 잠시만….”

“씹….”

마음이 급한지 범진이 거친 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손짓이 어설펐다. 흥분하기 시작하면 특히 옷을 제대로 벗기지 못했다. 단추를 뜯었고, 팬티를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찢어버린 잠옷만 몇 벌인지 몰랐다.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가 드러나자마자 냅다 삽입을 시도했다.

반쯤 들린 채 범진을 말린 선재가 바지와 팬티를 제대로 벗었다. 둘만 있는 집에선 뭔들 못 할까. 아이들이 잠든 방과도 거리가 꽤 있는 편이다. 키스의 여파로 선재의 양 뺨에도 열기가 오른 채였다. 선재가 툭 떨어지는 팬티를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출 시간은 없었다. 범진이 그대로 선재를 눕혔고, 아래로 내려온 다리를 어깨에 걸었다.

졸지에 식탁 위에 눕게 된 선재가 천장과 꺼진 조명등, 그리고 범진을 순서대로 쳐다봤다. 제 다리를 어깨에 건 범진이 성기를 문지르며 구멍으로 진입하려는 게 느껴졌다.

허리를 살짝 들며 표정을 찡그린 선재가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였다. 범진의 성기도 성기지만 제 성기도 이미 절반은 고개를 든 상태였다. 열로 뭉쳐진 범진의 성기가 구멍을 비비다 이내 각도를 홱 틀었다. 입구를 열고, 끈적한 점막을 툭툭 두드리며 진입했다. 선재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 아아….”

좆 끝에서부터 기둥, 뿌리 근처까지 서서히 밀어 넣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끌어 제 쪽으로 당겼다. 갑자기 깊은 곳까지 삽입돼, 선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허벅지를 안은 범진이 하체를 뒤로 끌었다 빠르게 퍽, 치듯 삽입했다.

“아흑…! 범, 으, 범진아…. 좀, 만 살살….”

충동을 못 참아 그러는 걸 알기에, 선재가 범진을 조용히 달랬다. 손을 뻗자 범진이 그 손을 잡았다.

범진은 인상을 쓰면서도 초반엔 선재에게 맞춰 주는 편이었다. 지금처럼 급하게 흥분했을 때도 선재가 손으로 몸을 쓸어 주면 허어, 하고 느리게 숨을 다듬었다. 잠시 선재의 다리를 놓고 얇은 티셔츠 한 장을 마저 벗은 범진이, 선재의 허리 바로 옆에 손을 턱 갖다 댔다. 느슨하게 삽입돼 있던 좆을 적당히 밀어가며 선재의 얼굴을 쳐다봤다.

태어나 이렇게 빨아 보고 싶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내미는 범진도 저 자신이 피곤했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어디서든 빨고 싶고 입을 대고 싶어, 주둥이와 좆대가리가 쌍으로 늘 울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도 알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싶지도 않았다. 미치거나 죽거나. 처음부터 둘 중 하나였다. 선재가 죽지는 말라고 했었으니 그냥 미쳐버린 것이다.

“아, 아흐….”

선재의 다리를 접어서 당긴 범진이 허리를 느긋하게 썼다. 점막 안쪽에서 묻은 애액 때문에 제 좆은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상태였다. 구멍을 빠져나오고 들어갈 때마다 주변도 끈적하게 젖어 갔다.

잠시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인 범진은 선재의 구멍을 뚫고 있는 제 좆을 사나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살벌하게 솟은 핏줄이 흉하게도 좆을 휘감고 있었다. 상스럽기 그지없는 좆이 선재의 연한 살을 물고 뜯는 광경이 자극적으로 와닿았다. 눈썹을 일그러뜨린 범진이 선재의 성기에도 손을 댔다. 발딱 서 있긴 하지만 위협은커녕 만지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을 것 같은 좆이다.

“으읏, 아…. 흐, 하으.”

입술을 깨문 채 소리를 뱉던 선재가 착, 착,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내렸다.

범진과 달리, 삽입에 반응하는 성기가 범진의 손에 잡혀 있었다. 범진은 제 성기보단 약하게 그걸 쥐고 흔들었다. 곤란한 표정을 지은 선재가 다시 천장 쪽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탓에 자지가 들어올 때마다 들리는 살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식탁 안쪽으로 몸이 밀려도 범진이 다시 선재의 엉덩이를 식탁 밖으로 끌어냈다. 허공에서 엉덩이가 흔들리도록 만들었다.

“씨팔, 하아.”

“아, 아, 아파, 아파…!”

흔들리던 엉덩이를 보고 흥분한 범진이 몇 번 세게 박았다. 손에도 순간적인 힘이 들어가 미끈거리는 성기를 뒤틀 듯이 잡았다. 뒤는 괜찮은데, 선재는 앞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팔을 앞쪽으로 뻗었다. 잠깐 선재의 성기임을 잊은 범진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진짜 아프냐.”

“너 하듯이, 그렇게 하면, 아흐,”

“어.”

“아프, 아프다고….”

섹스 중에 아픔을 느껴 깜짝 놀라는 경우는 잘 없었다. 흥분한 건 알겠는데 성기까지 세게 쥐니 통증이 심했다. 놀랐던 감정은 얼굴로 금세 드러났다.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혔다가 눈 끝을 적시며 툭 떨어졌다.

“왜, 나…. 아프게….”

범진이 윗입술을 혀로 쓸면서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선재가 감정을 표현하는 게 이럴 땐 특히나 좋았다. 좋으라고 좆을 만져 준 건데 순간적으로 힘이 너무 실렸나 보았다. 제 좆을 흔드는 것처럼 쥐면 아파하는 걸 잠시 잊었다. 눈을 비벼 준 범진이 내벽에서 물이 나오도록 점막을 살살 긁어 주며 허리를 썼다. 간질간질한 감각을 느꼈는지, 선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통증 때문에 처지나 싶던 성기가 다시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게 그래 아팠냐.”

범진은 손으론 선재의 얼굴을 연신 만져 주었다.

“…….”

“니, 쫌 지릴 때까지 둬야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한데 꼭 저렇게 말을 했다. 선재는 아랫배에서 느낌은 왔지만 애써 표정을 숨겼다. 범진이 성기를 넣었다 빼는 속도에 맞춰 식탁에선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선재가 불안한 듯 팔을 옆쪽으로 뻗었다. 식탁 모서리를 잡고 범진에게 말했다.

“사, 사살, 살살…. 해…. 으….”

“살살 한다 아니냐….”

“식, 흐…. 탁….”

“뿌사지면 하나 더 사면, 되지.”

범진은 일정한 속도로 살을 벌리고 들어왔다. 안쪽 내벽도 범진의 크기에 맞춰 안정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범진은 곧게 섰다가도 사선으로 살짝 비틀어 서서 삽입을 했다. 선재가 좋아하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잡는 자세였다. 울퉁불퉁한 듯 부드러운 내벽을 찍어 주면 어김없이 투명하고 진득한 물이 자지 끝에 묻어 나온다. 범진은 번들거리는 자지를 다시 힘차게 박아 넣었다. 몇 번 그런 삽입이 반복되자, 선재도 신음만 간신히 내뱉었다. 울긋불긋 자극에 올라온 배를 쳐다본 범진이 선재의 허벅지를 더욱 바짝 제 몸에 붙였다.

“아, 아흐, 흡.”

소리를 참을 땐 참는데, 범진이 숨을 뱉을 때 삽입해 오면 신음이 어떻게든 새고 만다.

범진은 한동안 선재의 다리를 안고 삽입하다가, 양 발목을 손으로 잡고 크게 벌렸다. 모든 게 다 보이는 자세였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잡아당긴 선재지만 발목이 꽉 붙잡혀 자세를 바꿀 수도 없었다.

다리가 허공에서 민망하게 벌어져 있었다. 아랫배가 자극으로 울렁대긴 했지만, 수치심은 다른 문제였다. 무릎을 닫으려고 해도 범진이 놔주지 않았다. 범진은 선재의 발목을 위로 든 채로 퍽, 퍽, 소리가 나는 엉덩이 사이를 집요하게 훑었다.

“다, 다리, 왜, 흐, 아흐.”

“하, 니, 힘, 풀어도 되는데, 왜.”

고개를 들고 선재를 쳐다본 범진이 아래가 젖어 드는 느낌엔 다시 결합부를 쳐다봤다.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구멍이 좆을 넣고 뺄 때마다 움찔거리며 물을 조금씩 내고 있었다.

“응…. 으…. 흐으….”

“좀 보자, 좀….”

“아, 흐…. 그만…. 으으….”

그만하라고 손을 내린 선재지만 성기에서 정액이 흐르고 있었다. 볼수록 소변과는 다른 체액이었다. 내벽을 긁듯이 자극하면 정액을 싸고, 짓누르듯 문지르면 실금을 하는 걸 범진이 제일 잘 알았다. 이번엔 내벽을 넓히려고 사방을 긁어 주며 박고 있었다. 좋았냐, 물은 범진이 선재의 다리 한 짝을 아래로 내려 주며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선재가 몸을 옴찔, 떨면서 남은 정액을 마저 뱉었다.

범진은 계속해서 속으로 파고들었다. 약하고 예민한 살이 퉁퉁 부을 정도로 자지를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다리 하나만 어깨에 걸친 채였다. 선재는 성기가 치고 들어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나머지 다리를 벌렸다. 마찰 때문에 발개진 사타구니를 그대로 내보였다.

“흐으, 윽, 버, 범진아, 아….”

선재가 손을 뻗으며 범진을 불렀다. 다시 거세진 추삽질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손을 꼭 잡아야 했다. 식탁 위에서 질 낮게 붙어먹다가도, 손을 놓았다가도, 범진은 선재의 손 잡아달란 말에 꼭 손을 내밀어주곤 했다. 그러면서 삽입한 성기를 은근히 뺐다가 넣고, 끈적해진 선재의 점막을 다시금 젖게 만들었다. 엉덩이가 마찰 때문에 징, 울리는 느낌이 들 때마다 선재는 한쪽 다리를 더욱 크게 벌렸다. 그럴수록 범진이 파고들었고, 성기는 더욱 깊은 곳에 삽입됐다.

“아, 아흡!”

꽉 잡힌 손이 덜덜 떨렸다. 얼굴을 옆으로 하며 목을 꺾은 선재가 어렵사리 소리를 참았다. 범진이 어깨에 올리고 있던 선재의 다리를 내리곤 상체를 숙였다. 어깨에 손을 대 선재를 안듯이 일으켜 줬다.

흐물거리는 상체를 겨우 세운 선재가 빳빳한 자세로 선 범진을 힘겹게 쳐다보았다.

범진도 얼굴과 목 부근이 달아오른 건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삽입된 성기 때문에 선재가 불편한 듯 으응…. 하고 은근한 소리를 냈다. 범진이 혀로 선재의 뺨을 핥으며 허리를 안았다. 그 상태로 얕게 삽입하는 것도 범진의 특기였다. 깊지 않은 내벽을 꾹꾹 눌린 선재가 범진의 어깨를 안은 채로 등과 엉덩이를 떨었다.

“이래 좀 박아 줄까….”

“하고…. 흐…. 있잖아….”

범진의 성기가 휘어진 채 선재의 내벽을 자극했다. 뭉근하게 하체를 쓰던 범진이 선재의 귀를 빨다가 머리를 품에 안았다.

선재도 범진의 몸을 끌어안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신음만 이따금 냈고, 내벽이 눌리는 느낌이 들면 울먹이며 몸을 떨었다.

“우…. 흐, 윽…. 오줌…. 싸, 쌀 것 같아….”

도저히 면역이 생기지 않는 반응이었다. 요의가 느껴질 때마다 부끄러워 몸이 벌벌 떨렸다. 다리를 벌린 채로 그런 말을 읊조리는 선재의 반응에 범진이 얼굴을 떼고 씩 웃었다. 선재는 갑자기 멀어진 얼굴에 눈만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싸는 거 오랜만에 보까.”

“…싫어, 아, 안아….”

안아 줘,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하체는 붙어 있다 못해 내벽을 열고 들어와 있는데, 얼굴만 범진의 치기로 약간 떨어져 있었다. 선재가 손을 뻗자 범진이 손목을 쥐고 위로 들었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선재의 성기가 내벽을 누를 때마다 옴질거리며 흔들렸다.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잡고 제 몸 쪽으로 느긋하게 붙였다. 자지 끝으로 앞쪽 내벽을 짓누르듯 찍자, 선재가 발가락을 있는 힘껏 오므라뜨렸다. 하체가 저릴 정도로 느껴지는 요의에, 선재가 무릎을 모으려 했으나 범진이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아, 흐으, 안, 으…. 아….”

의지와 무관한 소변이었다. 몸의 구조와 예민한 곳을 완벽하게 아는 범진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위로 튀어 오르는 소변을 어떻게든 참아 보려 힘을 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리를 벌린 채로 소변을 내버린 선재가 수치심에 울상을 지었다. 찔끔, 싼 뒤 몇 초 정도는 참았지만, 범진이 다시 삽입을 해 버리면 속절없이 소변이 샜다.

울먹이며 범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선재가 다리를 덜덜 떨었다.

“이래 싸대는데 얼라가 아니냐….”

범진이 아이에게 하듯 선재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선재는 훌쩍이면서도 범진을 안으려고 두 팔을 위로 뻗었다. 능글맞게 말했지만, 범진도 선재가 찔끔거리며 싸는 걸 보는 동안 삽입을 한 채로 자지의 크기를 부풀렸다. 아까보다 뻑뻑해진 감각에, 선재가 범진을 안자마자 아프다고 웅얼거렸다.

“이…. 아…. 파, 밑에…. 갑자기….”

“하아, 니 싸는 거 보다가 말자지 돼뻐렸다 아니냐.”

장난하듯 대꾸한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능숙하게 주물렀다. 얕게 머물러 있어야 하는 지점에서 자지가 커진 게 원인이었다. 자세를 잡아 준 범진이 안쪽으로 자지를 깊이 밀어 넣었다. 아까 벌려 놓은 내벽으로 진입한 터라 무리 없이 쑥 들어갔다.

선재는 말없이 범진을 안고 있기만 했다. 범진이 얼굴 보자, 말하면 잠깐 얼굴을 보여 주다가도 가슴팍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범진은 천천히 움직이다 속도를 조금씩 냈다. 끈적해진 내벽이 자지를 잡아 오면 그 감각으로 안쪽을 휘저었다. 다 빼지도 않고, 길을 내면서 안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어갔다. 조용히 있던 선재도 그 감각엔 우는 소리를 냈다. 짧지만 정확히 흐으응…. 하는 소리가 범진의 귀에 닿았다.

“니 씨발, 여따 싸면 애 배지.”

범진이 선재의 가장 안쪽 내벽 돌기를 좆 끝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부어오르면 늘 이렇게 닿곤 했다. 선재가 몸을 꿈틀거리면서도 범진을 꼭 안았다.

“자, 자꾸…. 비비지…. 흐, 마….”

이후론 임신이 어려울 거라는 병원의 진단이 있었지만, 범진은 선재를 마음껏 농락했다. 벌어진 돌기를 꾹 누르며 당장이라도 임신시킬 것처럼 굴었다.

“안 비비면. 긁어 주까.”

하체를 살짝 뒤로 뺀 범진이 각도를 바꾸고 삽입했다. 배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선재가 무릎을 크게 떨었다.

“여기는 씨발, 내만 건들 수 있는데.”

가장 안쪽 점막을 향해 꾹, 자지를 삽입한 범진이 힘주어 말했다. 사방으로 벌어진 내벽은 기둥이 스칠 때마다 애액을 소량씩 내보냈다. 찔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질수록 선재는 범진을 꼭 껴안기만 했다. 범진은 섹스나 키스를 하다가도 혼자 화낸 적이 많았다. 익숙한 반응에, 선재가 범진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응, 흐…. 너만…. 해…. 네…. 네 것만…. 흐윽….”

“내 뭐,”

범진이 속도를 올리며 선재의 살을 쳤다. 뭉그러진 엉덩이 사이로 검붉은 자지가 빠르게 드나들었다. 범진은 거센 소리가 나는 와중에도 선재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얼굴을 반쯤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든 선재가 범진과 눈을 맞췄다. 목을 끌어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자, 흐, 자지, 흑, 네 자지만, 흐, 흐윽!”

“그래, 씨팔. 내 이 좆같은 자지만, 평생 갖다 박힐 줄 알아라, 후으.”

선재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팔을 놓았다. 순간 배 속에선 톡, 톡, 튀는 느낌이 들었다. 범진이 깊은 자리에 싸면 늘 이런 느낌이 들곤 했다. 범진은 사정하는 와중에도 선재의 뒷머리에 손을 대 지탱해 주었다. 뒤로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은 선재가 범진의 손에 머리를 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범진은 그런 선재를 쳐다보며 허리를 천천히 썼다. 많은 양의 정액을 다 싸고도 모자란 듯, 선재의 몸속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노래해줘.”

섹스의 열이 남은 채로, 선재는 범진을 커다란 인형 안듯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노래를 요청했다. 팔로 선재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범진이 눈썹을 이리저리 휘며 뭐? 했다.

“노래 불러 달라고…. 나 자게….”

“노래 뭐.”

선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당긴 범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잘 수 있게…. 자장가 아무거나…. 몰라….”

끔벅끔벅, 눈을 느리게 뜨면서도 못 잔다는 식으로 구는 선재가 범진의 눈엔 귀엽게만 보였다. 씻겨 주는 와중에도 선재는 졸았다. 제 손으로 직접 구멍에 손을 넣어 정액을 빼 주기도 했는데, 그때도 선재는 비몽사몽이었다. 니, 내가 어디 손 쳐넣는지도 모르냐고, 장난하듯 말을 건네도 선재는 으응, 하고 흐물댈 뿐이었다.

요구에 응할 생각이라도 든 건지, 범진이 선재를 최대한 끌어안고 입을 열었다.

자장간데, 가사는 확실치 않았다.

“애미가 섬그늘에….”

“…….”

거의 동시에 눈 감았던 선재가 다시 눈을 떴다.

“씨입…. 따러 가면….”

“맞을래…?”

“뭐. 불러 줘도 옘병이냐.”

“진짜….”

짜증 난다고 중얼거린 선재가 팔을 더욱 깊이 넣어 범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다.

진짜 싫어, 제일 싫어, 범진의 귀에도 그런 소리는 들렸다. 품속에서 한참을 비비적거리던 선재가 코가 눌리는 각도에선 움직임을 멈췄다. 가만히 숨을 쉬며 범진의 체취를 맡았다.

속을 숨길 수도, 숨길 필요도 없다. 선재는 짜증이 나는 와중에도 범진의 품속에서만 그런 감정을 표현했다. 자연스럽게 선재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댄 범진도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말없이 쓸고, 갈증이 인다 싶으면 그 얼굴을 은근하게 들어 올렸다. 붉은 기가 곳곳에 도는 선재의 얼굴이 위를 향했다 가슴팍에 묻히길 반복했다.

“야….”

“…….”

뺨 한쪽을 범진의 가슴에 대고 있던 선재가, 나른해진 눈을 들어 범진을 쳐다봤다.

“더 가까이 와 봐.”

몸을 끌어안고 있는데도, 범진은 더 가까이, 더 깊이 안길 원했다. 처음에는 의문점이 생겼던 선재도 이젠 익숙하게 범진을 향해 다가갈 줄 알았다. 상대방의 체온이 마치 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때까지. 등에 닿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선재가 범진과의 거리를 완전히 좁혔다. 다리가 꼬이고, 가슴과 배도 완전히 닿았다. 선재의 뒷목을 끌어당긴 범진이 고개만 숙이면 닿는 작은 얼굴을 뚫릴 기세로 쳐다보았다.

“이기 쌍판이냐. 꽃도 니보단 드럽게 생겼겠다.”

“좋은 말이지…?”

“개좋은 말이지.”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린 선재가 자포자기한 듯 그래, 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비에 젖은 꽃을 보면 그 꽃을, 한여름 초록 나뭇잎 위에서 부서지는 햇빛을 보면 그 빛을, 범진은 선재와 똑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제일 최근에 들은 말이 목련 나무를 발로 퍽퍽 차며 이기 이쁘냐, 니가 낫다, 하는 말이었으니, 그것도 그 맥락이었을 거다. 하얗고 커다랗게 열린 목련꽃을 떠올린 선재가 저를 그렇게 봐 주는 범진에게 포근한 마음을 느꼈다. 별로 잘나지도 않은 제게 예쁘다, 좋다, 해 주는 범진이 고마웠다.

범진의 어깨를 잡고 힘을 준 선재가 얼굴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옆으로 누운 채로 발끝을 세운 선재가 곧 닿은 범진의 얼굴, 그중에서도 입에 입술을 살포시 갖다 댔다. 눈을 감고 뽀뽀를 해준 선재가 여러 번 반복해서 쪽, 쪽, 소리를 냈다.

“말 이쁘게 해….”

“…….”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건 범진이 제일 잘했다. 실 웃으며 귀까지 벌게진 범진이 선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퍽 맞췄다.

“그랄까.”

전혀, 그래 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범진은 새는 웃음을 참지 않고 선재에게 반복해서 입만 맞췄다. 다정한 뽀뽀는 아니었다. 벅, 벅, 닿는 입맞춤에 선재가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입으로, 읍, 때려, 왜….”

“힘드냐.”

“힘든 건 아닌데….”

“아니. 니 힘들다.”

“…….”

범진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얼굴 하얘지는 거 봐라. 안 되겠다. 인공호흡 해야겠다.”

“…….”

매일매일 이런 장난을 치다 잠이 든다. 오늘도 헛웃음을 지은 선재가 다가오는 범진의 얼굴엔 입을 벌렸다. 입술이 완전히 맞닿고, 인공호흡과는 거리가 멀다 싶게, 뜨거운 혀가 입안으로 쭉 들어왔다. 누가 혀를 집어넣고 인공호흡을 해 준다고. 같이 혀를 섞기 시작한 선재가 눈을 감은 채로 살짝 웃었다.

이러니까 혼자 있으면 잠이 안 오지.

짧은 결론을 내린 선재가 쓰다듬어지듯 닿는 혀에 편안함을 느꼈다.

키스를 하고 있지만,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 서서히 흐릿해 가는 정신에 선재가 혀를 천천히 놀렸다.

이내 아예 멈춘 움직임에 범진이 선재의 입에서 입을 천천히 뗐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졸려 했던 터라 금방 잠들어 버린 선재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잠든 거다. 쩝, 입맛을 다신 범진이 시계를 한 번 보곤 저도 눈꺼풀을 닫았다. 동시에 잠들면 꿈에서 만난다는 미신을, 범진은 믿는 편이었다. 선재의 꿈에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잠을 청했다.

* * *

집에서 돌보아도 되는 재혁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한 건 준희 때문이었다.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재혁은 근처에 준희가 안 보이면 되지도 않는 심통을 부렸다. 준희를 따라갈 거라고, 아침에 집이 떠나가라 운 적도 있었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이사도 곧 해야 했다. 결국, 당분간은 준희를 유치원의 본격 학습반으로 옮기기보단, 재혁을 어린이집에 함께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반이 달라 오늘처럼 준희가 쉴 때 재혁이 어린이집에 가는 날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둘이서 손을 잡고 함께 다녔다.

오늘은 그런 준희 말고도 집에 한 아이가 더 있었다. 준희와 동네에서 만난 아인데, 따로 유치원이나 학원은 다니지 않는 아이였다. 이름은 정후. 점심에 밥을 사 오는 범진과도 종종 마주치곤 했다. 처음에 범진은 별 반응을 하지 않다가, 아이가 알파라는 정보를 얻은 뒤부턴 아이에게 유치한 시비를 걸었다.

범진은 영채가 없는 날이면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꼭 사와 집을 들르곤 했다. 선재가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말을 해도, 내가 니 개밥 먹는 꼴은 못 본다고, 미운 말을 해 선재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밖에서도 끼니를 걱정해 줘 고맙긴 한데 제가 차리는 모든 게 개밥 같단 소리 같아서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먹은 건 닭다리살이 올라간 덮밥이었다. 양도 많았다. 덕분에 놀러 온 정후까지 먹을 수 있었지만, 범진은 밥 먹는 동안은 정후가 집에 있는 줄도 몰랐다. 니 뭐냐? 하고 다 먹고서야 정후에게 나름의 아는 체를 했다.

“니 이름이 박정식이라 했냐.”

“아닌데여?”

“정식아.”

“정훈데여. 정식이 아니에여. 박정후.”

“정식이 니 우리 애기가 그래 좋냐.”

“…….”

또 정식이라 불린 것에 발끈할 것 같았는데, 정후는 눈썹을 모으고 범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밥을 먹고 나선 거실 테이블로 와 다 같이 앉아 있었다. 준희는 앞에서 가족 이름과 정후의 이름을 쓰며 한글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집중을 한 터라 소리는 잘 못 듣는 듯했다.

“와, 임마 말 안 하는 거 바라.”

“임마 아닌데여?”

“어쭈. 대드냐.”

“아닌데여?”

“니 애기 좋아하지.”

“아저씨도 주니 좋아하자나여.”

“내가 좋아하는 거랑 니가 좋아하는 거랑 같냐. 니 우리 애기랑 손이라도 잡으면 아저씨가 니 다리몽댕이 뿌사뿐다.”

“몬댕이 뿌산뿐다?”

적당히 하라고 범진의 등을 손으로 밀고 있던 선재가 그 말엔 퍽, 소리가 나도록 등을 쳤다.

“뭐.”

“애 좀 괴롭히지 마.”

뭐, 하며 옆에 앉은 선재를 쳐다본 범진이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애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은근하게 입을 맞추려 들었다. 고개를 홱 돌린 선재가 범진의 뺨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아니다, 정식아.”

고개가 돌아간 김에 범진은 정후에게 또 말을 시켰다.

“…….”

반쯤 포기한 정후가 미간을 가득 좁히고 범진을 쳐다봤다.

“우리 애기 손에서 불 나오는 거, 니 아냐.”

작게 소리 낸 범진이 정후에게만 말했다.

“네에?”

“딱 여기서 불이 나그든. 여기 가운데.”

손까지 펼쳐 말한 범진이 정후를 속이려 들었다. 빤히 커다란 손바닥을 쳐다보던 정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불 안 났는데여?”

그 말엔 범진의 표정이 변했다. 죄 없는 꼬마에게 그럼 몇 번을 잡아 봤냐고 추궁하듯 물었다. 옆에서 범진의 등만 쳐다보던 선재가 어깨를 당겨 범진의 입을 막았다.

힘을 빼고 뒤로 몸을 푼 범진이 선재의 양반다리 위에 그대로 뒤통수를 골인했다.

고개 숙인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잡았다.

“그만하라니까?”

“손잡았다는데.”

맥 풀리듯 웃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거꾸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놀면서 손잡고 다니고 그러지.”

“…….”

범진은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몇 초 더 있다가 야, 뽀뽀해 봐,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선재는 싫다고 했다가 범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댔다.

“다아 했다.”

소리를 낸 건 저쪽에 있던 준희였다.

아이가 삐뚤빼뚤 이름이 쓰인 종이를 높이 들었다. 범진의 어깨를 밀어낸 선재가 준희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민선재. 쵀범진. 쵀재혁. 쵀준희.

제일 아래엔 오늘 집에 놀러 온 박정후까지 쓰여 있었다.

종이를 쳐다본 범진이 쵀에 감탄을 했다.

우리 애기 왜 이렇게 창의적이냐고, 웃긴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들으면 비꼬나? 싶을 건데 준희는 헤에, 하고 좋아했다. 특유의 말투가 그래 어쩔 수는 없었다. 준희는 곧 테이블을 지나쳐 범진의 품에 안겼다. 폭 안긴 채 정후를 쳐다보았다.

“정후 것도 썼어….”

“애기 아부지 따라 해 봐.”

고개를 든 준희가 범진을 쳐다봤다.

“박.”

“밥.”

“정식.”

“정십.”

“정식이 아닌데여?”

저렇게 모아 놓기도 힘들 것 같았다. 뒤에 있던 선재만 소파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헛웃음을 쳤다.

영채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다 정후까지 와 있으면 매번 이런 풍경이었다.

유일하게 중재하는 이가 선재였다.

성질이 있는 정후지만 한편으론 무던해서 다행이었다. 아이는 범진이 암만 이상한 소리를 해도 순간적으로만 반응하고 말았다. 계속 집으로 찾아오는 걸 보면 그랬다. 애초에 집에 놀러 올 때도 “주니 보러 왔는데여?” 하고 제 할 말만 하곤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아!”

기지개를 켜던 선재가 놀란 소리를 냈다. 바로 고개를 돌린 범진이 선재에게 왜, 하고 물었다.

“재혁이가…. 선생님한테 연락받은 거 있어?”

말하며 일어난 선재가 현관문 쪽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안전한 골목에 차가 서긴 하는데, 그래도 집까지 혼자 올라왔을 줄은 몰랐다. 문을 열자 재혁이 선재에게 아빠, 했다.

30분이나 일찍 하원한 재혁이 얼핏 보이는 창틈으로 집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커튼이라도 제대로 쳤다면 아이를 아예 못 볼 뻔했다. 안쪽에서 문을 열 줄은 아는데 벨을 누를 줄은 몰라서…. 아이는 차에서도 저 혼자 걸어가겠다고 말한 게 분명했다. 재혁을 데리고 집에 들어온 선재가 범진에게 다시 물었다. 진짜 연락 안 받았어?

쓰읍, 생각하던 범진이 뭔가를 떠올리곤 받았네, 받았다, 했다. 범진은 재혁과 관련해선 진짜 급한 일 아니면 선재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 드물었다. 쉽게 까먹곤 했다.

“말을 해줘야지. 재혁이, 아기 안 그래도 혼자 막 돌아다니는데.”

“재여기 아기 아닌데?”

선재의 옷을 잡아당긴 재혁이 도도하게 말했다.

“아, 어. 재혁이 아기 아니야….”

선재가 고개를 숙여 재혁에게 맞는 반응을 보였다. 맘에 드는 대답을 들은 재혁은 곧 거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부지, 하고 아는 체를 한 번 하곤 정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직 아기라, 아무래도 집을 찾는 사람들을 다 낯설어하는 편이었다.

정후가 자주 집을 찾아도 그랬다. 아이는 조그만 몸으로 올곧게 서서 정후를 쳐다보기만 했다. 시선을 느낀 정후가 고개를 위로 들어 안녕, 했다.

재혁은 인사하지 않았다. 귀여운 호랑이 가방을 멘 채로 범진과 정후 사이로 들어가 털썩 앉기만 했다. 범진의 품에 안겨 있던 준희가 아가,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재혁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형아에 칭구…. 하고 다 아는 걸 새삼 중얼거렸다.

그래도 가운데 재혁이 앉아 버렸으니, 범진이 정후 약을 올리는 일은 없을 듯했다.

정후는 바로 옆에서 꼼지락대는 재혁을 더 불편해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정후가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준희를 불렀다.

주니야, 밖에서 놀자, 했다.

“어쭈? 니 낸테 허락받아야지. 어디서 냅다 델갈라고?”

정후는 기도 안 죽고 대꾸했다.

“아저씨, 저 주니랑 나가서 놀아도 돼여?”

“안 되지.”

말문이 막힌 정후가 범진을 쳐다봤다. 범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되겠냐? 까지 덧붙였다.

둘의 대화에 선재만 웃었다. 준희와 재혁은 말이 없고, 정후는 가만있다가 아, 왜여? 하고 반항했다. 범진은 괜히 진지한 척을 했다.

선재는 웃다가, 그럼 다 같이 놀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미적지근하던 재혁은 준희가 나간다고 하니 껌딱지처럼 나도, 나도, 했다. 아이들이 현관을 나서자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이제 가.”

“니 이렇게 내를 버리냐.”

“버리긴 뭘….”

“하아, 고소나 때려 뻐려야지. 혼인 빙자 뭐시기 하는 거, 니도 알지.”

“옛날에 혼인신고랑 다 해놓고 무슨 혼인 빙자….”

범진은 그런 게 있다고 끝까지 우기며 선재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댔다. 슬쩍 피하면 두 배 세 배로 힘을 실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결국, 대낮에 귀까지 빨린 선재가 벌게진 귓불을 손으로 감췄다. 범진은 그제야 만족한 듯 저녁에 밥 먹으러 나가자, 하고 집을 나섰다.

* * *

매번 새롭게 오는 여름이지만, 형태는 비슷했다.

연례행사처럼 하게 된 캠핑을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계곡을 찾았던 게 시작이었다. 범진은 재혁을 낳자마자 바로 계곡에 데려가 준다고 했지만, 당시 선재의 몸이 외부의 열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아기도 갓난쟁이여서 미루게 된 계획이었다. 그렇게 다음 해부터 계곡을 찾았고, 이후로 바다나 글램핑 캠핑장을 가기도 했지만 첫 기억이 무서운 법이었다. 아이들은 계곡을 천국처럼 생각했다. 몸으로는 큰 반응을 하지 않는 준희도 계곡물을 발견하면 만세를 하며 혼자 뱅그르르 돌곤 했다.

“압! 압부지!”

선재는 재혁이 큰소리를 친다 싶으면 긴장부터 하고 봤다. 재혁이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짐을 정리하던 선재가 놀라서 텐트의 입구를 열었다.

“압! 부! 지!”

잠깐 짐을 정리하는 사이에 범진과 재혁, 준희 모두가 계곡물에 들어가 있었다.

범진에겐 물이 얕지만, 재혁이나 준희에겐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의 수심이었다. 윗옷만 벗고 물놀이를 시작한 세 사람을 보니 다 범진이 주도했겠지 싶었다. 바위 위에 서서 가만 세 사람을 쳐다보던 선재가 아부지! 하고 또 외친 재혁을 집중적으로 보았다.

범진이 등에 준희를 업은 채로 니 왤케 느리냐, 하며 재혁을 약 올리고 있었다.

성질이 난 재혁이 물 표면을 퍽퍽 치며 아부지! 아부지! 하자 범진이 웃기다는 듯 섰다.

“니 아부지한테 승질 냈냐?”

“아압! 부지!”

아이가 그렇다는 듯, 작은 손으로 또 계곡물을 짝짝 때렸다. 작은 손인데도 소리가 꽤 컸다. 범진을 닮아, 불같은 성질이 저렇게 표출될 때가 있었다. 화아, 쪼끄만 게, 하고 팔 걷어붙이는 시늉을 한 범진이 또 준희만 업은 채로 물속을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 짧은 다리로 범진을 따라가는 게 벅찼던지, 재혁이 몇 걸음 가다가 우뚝 서서 범진을 향해서 또 아부지! 했다.

“왜 애 약을 올려.”

“내가 언제.”

준희는 계곡물 속에서 범진의 등에 매달려 있는 걸 가장 좋아했다. 거기까진 좋은데, 재혁과는 놀아 주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재혁아, 하고 입을 연 선재가 아빠랑 놀자, 했다.

발육이 심상치 않았던 재혁은 벌써 형과 덩치가 비슷했다. 준희만 길러서 몰랐지만, 알파 아이인 재혁은 뼈대부터가 남다른 감이 있었다. 짧고 오동통한 다리인 건 준희와 같았지만 억세다는 느낌이 아기 때부터 있었다. 기질도 형에 비하면 거칠고 사나운 데가 있고.

범진을 따라가려고 했던 것도 잠시, 선재의 부름에 금방 고개를 돌린 재혁이 물 밖으로 잽싸게 빠져나왔다.

배부터 발까지 물에 흠뻑 젖었는데도 아이는 성큼성큼 잘도 물을 빠져나왔다.

“아빠가 업어 줄까.”

“재혀기는 애기 아니야.”

처음에 잠깐 그러고 말까 싶었는데 이젠 입에 익어버린 수준이었다. 속으론 그럼 누가 애기라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웃겼지만, 선재는 티는 내지 않았다. 아무리 쑥쑥 자라도 제 눈엔 아기였다.

“맞다. 우리 재혁이 애기 아니지.”

“형아는 애기. 재혀기는 애기 으응.”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재혁을 보자 더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혼자 조용히 터진 선재가 고개를 옆으로 하고 웃다가 다시 재혁을 봤다. 하도 범진이 애기야, 애기야, 하고 준희를 불러 준희는 애기인 줄 아는 모양이다. 범진이 장난으로 머리에도 물을 묻혔는지, 가까이서 보니 아이 머리 모양이 뾰족뾰족했다.

“응, 재혁이 애기 아니야. 파인애플 먹을까?”

“네에.”

이럴 땐 같은 핏줄이다 싶다. 재혁도 준희처럼 대답은 꼭 네, 라고 하곤 했다. 준희가 갈수록 존대어를 썼는데, 재혁도 그럴까? 아이들에겐 따로 높임말 교육을 시킨 적이 없었다. 재혁이 형을 따라 말을 높여도 좋지만,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냥 아이가 하는 대로 받아 줄 생각이었다.

통에 담아 온 과일 하나를 찍어 재혁의 입에 넣어 준 선재가 어느새 거대한 빨랫감처럼 물속을 벗어나는 범진의 모습을 흘긋 쳐다보았다.

어깨 너머로는 준희의 얼굴이 보였다.

“니, 안 되니까 그래 가 버리냐?”

준희를 돌바닥에 고이 내려 준 범진이 재혁을 향해 말을 던졌다. 끝까지 아이 약을 올리려고…. 가까이 다가온 범진의 배를 툭 친 선재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병원에서도 어린 알파 아이의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고 들은 적이 있다. 선재는 아이를 최대한 곱게 기르고 싶었다.

“그만.”

순식간에 엄한 얼굴을 한 선재를 쳐다본 범진이 팩 웃었다.

검지로 선재의 턱을 들어 올리듯 툭 친 범진이 뭐, 니 이쁜 거 보라고? 했다.

“좀….”

밖에서 범진을 향해 표정을 굳히는 건 일상이었다. 보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도 교육만 해놓으면 말을 알아듣곤 하던데. 범진은 어째 몇 년이 가도 웬만한 말은 다 안 들었다. 엉뚱한 소리만 골라서 했다.

“아가, 형아가 주께?”

보라색 아쿠아 슈즈에만 물이 조금 맺힌 준희가 앉아 있던 재혁 곁으로 가 파인애플을 먹여 주려 했다.

재혁은 형의 ‘아가’라는 소리엔 반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준희가 내미는 파인애플 조각을 한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과즙이 많은 과일이다 보니 아이들 입가가 금세 흥건해졌다. 아가, 하고 파인애플을 또 건넨 준희를 본 선재가 텐트로 들어가 물티슈를 찾았다.

물티슈가 어디 있을 텐데. 구석으로 가 가방을 뒤지던 선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텐트 천을 걷고 들어온 건 범진이었다.

“차에도 물티슈 있지?”

“어.”

있긴 있다, 하고 다가온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내가 갈까? 했다.

“어델 갈라고.”

방금까지 차에 물티슈가 어쩌고, 하며 대화를 했는데도 범진은 모르는 척을 했다. 대놓고 동문서답하겠단 기세로 입꼬리를 올리는 범진을 보자 또 무슨 짓을 할 건가 싶었다. 선재는 뚱뚱한 가방을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범진은 털썩털썩 걸어오다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선재와 눈을 맞췄다.

“왜.”

“니 왜 표정을 그래 짓냐.”

“무슨 표정….”

“니가 그래 쳐다봐서 내가 이래 됐다 아니냐.”

범진이 고개를 푹 숙이자 선재의 눈도 아래쪽으로 향했다. 무릎을 덮는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물에 젖어 몸에 완전히 붙은 모양새가 됐다.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천 위로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언제 발기를 했는지 불룩하게 솟은 성기의 모양도 적나라한 형태로 잡혀 있었다. 굵은 막대기 하나를 넣은 듯 대놓고 솟아 있는 천을 본 선재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가, 아가, 하는 준희의 소리는 같은 거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준희가 재혁을 잘 돌봐 주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선재는 텐트 구석구석을 확인하며 갑자기 아이들이 들어올 상황도 생각했다.

“맨날 무슨 생각 하는데….”

몸을 일으킨 범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의 바지 안에 손을 넣었다.

“니 생각뿐이 안 하지. 지금은 니랑 어제 한 생각하고 있다.”

실없이 웃는 범진을 따라서 선재도 허,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선재는 그러면서 드로어즈 안에서 꺼낸 범진의 자지를 손에 쥐었다. 이미 절반 이상 발기해 각이 꽤 솟아 있는 상태였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다가간 선재가 입에 범진의 성기를 물었다.

어제 한 섹스라면 저도 좀 전까지 문득 떠올려 보던 장면이다.

범진은 금요일이면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출근을 했다. 그동안 웬만해선 섹스를 하지만, 어제는 정도라는 것도 지키지 못했다. 아이들이 등원한 9시 반부터 1시가 될 때까지 발가벗고 서로의 몸을 얼마나 빨고 핥았는지 모른다. 방에서 시작해 욕실, 주방, 거실을 짐승처럼 기어 다니며 범진과 섹스했다. 발에 범진이 침을 잔뜩 묻혀, 바닥엔 온통 발자국 같은 게 남았다. 정신도 한 번 잃었고, 좋다고 자지러지는 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질렀다. 아파트로 이사한 후로는 혹시 주변을 지나는 사람이 우연히 소리를 들을까 걱정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건 다행이었다.

“휴지 없어….”

목 안쪽에 박혀 들면서 사정된 정액은 입 밖으로 나와서도 멋대로 튀었다. 입가는 물론 눈에도 정액이 묻은 선재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범진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발기한 것을 흔들며 풀썩 앉은 범진이 선재의 눈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버릇이 된 탓에 입안에 있던 정액은 모두 삼킨 뒤였다. 목 끝에 남은 이질적인 느낌에 마무리하듯 침을 삼킨 선재가 범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밖에서 아가 또 먹을래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쉬었다가 또 뭘 먹겠다고 하는 재혁에게 놀란 준희의 반응이었다. 아가 아아, 하는 소리에 안심한 선재가 입을 열었다.

“바지나 입…. 으, 어.”

범진이 그 타이밍에 입을 쓸어 말을 선명하게 끝맺지 못했다.

벌게진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고, 닦아 주던 범진이 침을 꿀떡 삼키더니 양손으로 선재의 얼굴을 제대로 잡았다.

어, 하고 대답한 범진은 선재의 눈과 코, 입을 차례로 빨았다. 틈만 나면 빨아대, 얼굴에 범진의 입술이 닿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귀까지 빨아 피부를 붉게 만든 범진이 만족한 듯 입을 뗐다.

빨고, 씹고, 닦아 주고, 빨고, 씹고, 닦아 주고. 누가 보면 무슨 짓이냐고 할 이 짓을 범진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선재도 얼굴 곳곳이 닦이고 빨리면서부터는 범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쳐다보면 눈을 핥고, 고개를 돌리면 목덜미를 쪽쪽 댄다. 다시 입을 댔다가 끈적하게 고개를 뺀 범진이 말을 덧붙였다.

“안 빨 수가 없다.”

“좀 있다 빨라고…. 빨아도….”

“언제, 씨. 틈만 나면 빠는 기지.”

젊어서 지치지도 않나 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선재가 재차 닿는 범진의 입술에 대충 입술을 맞춰 주었다. 입술 살을 물고 장난치듯 질질 끌 걸 알면서도 반응을 해줬다. 예상한 것처럼 아랫입술이 범진의 치아에 물려 쭉 늘어났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선재가 아프단 말 대신 손을 올려 범진의 뺨을 가볍게 짝 쳤다. 아무리 때려도 소용은 없었다.

범진은 언젠가 니랑 이러고 있는 게 뒤질 만큼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스치듯 한 말이었는데 왜 기억에 남아 버린 걸까.

하도 많이, 비슷하게 말해서 그럴까. 뭘 하고 있던 순간인지도 기억엔 없었다.

선재는 갑자기 간지럼을 태우며 이게 손버릇도 드러워졌다고, 입을 맞부딪히는 범진 때문에 아!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간지러움에 허리를 비틀어도 범진의 손이 계속 들어왔다.

옆구리를 꼬집듯 간질이는 손길을 저지한 선재가 두 팔을 넓게 벌려 범진의 어깨를 안았다. 이런 식으로 포옹을 하면 범진은 행동을 멈추는 편이다. 품에 넘치게 범진을 안자, 역시나 범진은 행동을 멈췄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텐트 안엔 서로의 숨소리만 작은 효과음처럼 남았다.

살다 보면 어떤 생각이나 의지가 불꽃처럼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선재에겐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범진을 안은 채 그의 숨소리를 듣고, 그의 심장박동과 손길을 느끼는 시간이 한없이 길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 보는 생각은 아니었다.

범진은 물론, 아이들과 오랫동안 함께하려면 건강해야 했다.

괜히 몇 달 전부터 아침마다 녹즙을 챙겨 먹고 있던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건강하고 싶었고, 삶에 미련이 생겼다. 오지도 않은 시간이 아쉬웠고, 모든 순간이 눈물 날만큼 귀했다.

“…애들이랑 홍삼 먹자.”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그런 말을 하는 선재를, 범진은 이해하지 못했다.

텐트에서 나가기 전에 마지막 키스라도 나눌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대뜸 한다는 말이 홍삼이었다.

허, 웃은 범진이 선재의 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뭔…. 키쓰나 해 봐라.”

“안 돼. 홍삼부터.”

손에서 빠져나간 선재가 가방을 뒤적여 안주머니에 넣어 왔던 홍삼 스틱 네 개를 꺼냈다. 두 개는 아이용이라 맛이 꽤 달달한 편이었다.

“압빠?”

대충 닫아 놓았던 텐트 입구를 연 건 준희였다. 준희의 작은 머리가 하나, 바로 아래에 상체를 굽히고 들어온 재혁의 머리가 하나 더. 껍질에 싸인 완두콩 두 알처럼 보였다.

“압빠 아파요?”

간지럼을 태울 때 소리를 냈던 걸 준희가 듣고 걱정한 것이었다.

“아니, 아니야. 준희랑 재혁이 이리 와. 간식 먹자.”

옆으로 물러나 목을 벅벅 긁는 범진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선재는 들어온 아이들에게 홍삼 스틱 하나씩을 까서 손에 쥐여 주었다. 둘 다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안 먹겠다 투정을 부리진 않았다. 아이들은 똑같은 자세로 스틱을 쥐고 내용물을 쪽쪽 빨아 먹었다. 선재는 범진에게도 스틱 하나를 건넸다.

“자.”

“난 쫌따가 니 입으로 먹을란다.”

조용히 읊조린 범진이 배 째란 식으로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입에 스틱을 물고 있던 준희가 그런 범진의 배 위에 제 배를 겹쳐 누웠다. 스틱을 야무지게 문 채 범진 위에 누워 옆을 쳐다보았다. 범진이 준희의 머리를 잡고 자세를 마저 고쳐 주었다.

“준희 누워서 먹으면 안 돼.”

“옝, 옥끔만.”

조금만 더 먹고 일어나겠단 말이었다. 입에 스틱이 물려 있어 발음이 좋지 않았다.

바로 옆에선 재혁이 다 먹은 스틱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잠이나 자자, 하고 준희의 등을 다독이는 범진의 소리는 무시한 채, 선재는 재혁의 스틱을 받았다. 잘 먹은 아이가 기특해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도 주었다.

“…….”

그러자 재혁이 선재를 빤히 쳐다봤다.

예전엔 엉덩이를 치면 그래도 안겨 오기는 했는데. 유치원 형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저는 진짜 아기가 아니라고, 요즘은 안기는 것도 안 하려고 했다. 아기가 아니란 말은 전부터 해왔지만, 최근 들어선 행동으로도 표출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재혁은, 나름대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선재에게 안기고도 싶고, 아기를 하기 싫기도 한 재혁이 한참 동안 선재를 바라보았다.

“재혁이, 왜.”

“…….”

생각을 읽은 선재가 슬쩍 재혁을 떠봤다. 독립 성향이 강한 알파 아이가 어릴 때부터 보이는 특성인 걸 감안해도, 재혁은 그 속도가 이른 편이었다. 준희가 네 살일 때를 떠올려 보면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재혁에게 두 팔을 뻗은 선재가 응? 하고 재혁을 쳐다봤다.

재혁은 나름대로 중대한 결정을 한 듯 앙다문 입술을 하고 선재에게 다가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아이가 두 팔을 뻗어 선재에게 안겼다.

* * *

몸이 약해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미룬 준희는 내년부터 학교에 간다. 조심할 건 조심하고 보자는 주의였다. 선재는 굳이 급하게 보낼 필요가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저 또한 어릴 땐 몸이 많이 약했었다. 기억이 많이 없어서 그렇지, 자주 기절했었다는 병원 기록이 분명 존재했다. 지금은 다른 이유로 기절을 하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선재가 조금은 무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왜 웃는데.”

“…간지러워서.”

범진이 계곡물에 발을 씻겨 주고 있었다. 씻을 것도 없는데 한 시간에 한 번씩 니 발 씻자, 하고 발을 계곡물에 넣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물에 잠긴 발을 가만 쳐다보다가 갑자기 엎드려선 발가락을 깨물었다. 그다음은 발가락에 손깍지를 끼고 이거 봐라, 하고 힘을 줘 선재를 넘어뜨렸다. 물로 발등을 적셔주다가 못 참겠다고, 갑자기 발을 입에 넣기도 했다. 간지럽다고 얼버무린 선재가 범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이번엔 발만 씻겨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좀, 더럽게.”

속단하면 안 되는 걸 잠시 잊었다. 범진이 선재의 발을 물 밖으로 꺼내 잽싸게 입을 댔다. 그리곤 자국이 남나 보는 거라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며 발등을 쭉쭉 빨기 시작했다. 야, 남네, 하고 붉은 자국이 남은 걸 확인하곤 발을 조금 더 높이 들어 발바닥까지 빨려고 했다. 제일 궁금한 건 여기였다고 하면서. 그 움직임엔 선재가 발로 범진을 밀어냈다. 범진은 계곡물에 빠져도 그게 그리 좋은 모양이었다. 누가 입을 억지로 잡아당긴 듯이 크게 웃고 있었다.

선재는 물에 빠진 범진을 두고 텐트로 도피하듯 돌아갔다. 안에선 아이들이 졸린 눈으로 누워 장난을 치고 있었다. 계란 과자를 뜯어주었는데, 그게 준희의 품속에 꼭 안겨 있었다. 아기야, 하면 일단 둘 다 쳐다보긴 했다. 아기야, 말한 선재가 한숨 자라고 아이들에게 얇은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빠, 하고 과자를 내민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몸에서 힘을 풀었다.

“벌써,”

자네, 하고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였다. 밖에서 갑자기 야,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진의 목소리였다. 물에 빠졌다고, 살려달라고, 되지도 않는 거친 고함을 치고 있었다. 하아. 소란에 마른세수를 한 선재가 텐트 밖으로 나가 보았다. 범진이 계곡물 속에 가만 앉아 야, 안 살리주냐! 하고 큰소리를 내는 게 보였다.

“미쳤어?”

다가간 선재가 물 밖에서 범진을 쳐다보았다.

“인제 알았냐.”

“다 쳐다보잖아.”

선재가 건성으로 듣는 범진을 조용히 나무랐다.

“하아, 안 살리주냐고, 니, 그래서.”

“…….”

정말 미치겠다. 결국 첨벙, 물속에 다리를 담근 선재가 손을 내밀었다. 앉은 범진의 허리를 겨우 적시는 정도의 얕은 수심이었다. 거기서 살려달라고 외친 거였다. 범진은 선재를 쳐다보다가 쫌, 하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배영하듯 커다란 몸까지 뒤로 던진 범진 때문에 선재가 손을 거뒀다. 진짜 뭐 하는 거야? 한 발을 더 내밀어 물어본 선재가 범진이 이리 오라 손짓하는 걸 보았다.

“내 지금 디진다….”

디지러 간다…. 하고 허공을 쳐다보며 말을 해, 선재가 한 발을 더 뗐다. 죽을 것 같진 않지만 장난을 치다 멀리 떠내려가는 상상은 들었다. 허벅지까지 물에 빠트린 선재가 범진의 발이라도 잡으려 했다. 그만하라고, 무슨 짓이냐고.

“하아, 이거.”

갑자기 몸을 일으킨 범진은 선재의 팔을 끌어 품에 안았다. 아이들이 놀던 곳과는 다른, 갑자기 깊어지는 지점이 있는 구역이었다. 발을 헛디딘 선재가 어깨까지 쑥,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범진이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뒤에서 선재를 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왜. 내 진짜 디질까 봐?”

“시끄럽게…. 그러니까.”

말을 뱉은 선재가 범진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은근히 깊은 곳으로 몸을 끄는 범진 때문에 가슴까지 물이 닿았지만 별로 무섭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바다에 빠졌던 후론 적당한 수심에서도 헤엄을 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발짓까지 했다. 뒤에서 어깨를 감은 범진의 팔을 꼭 잡고, 선재가 두 다리를 앞으로 뻗어보았다.

“니 쫌 하는데?”

아기들 개헤엄보다도 못한 발짓을 범진이 칭찬했다. 뭐가….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의 어깨를 잡고 또 앞으로 발차기 같은 것을 했다. 범진이 없었으면 미친 사람처럼 벗어나고도 남았을 수심이었다. 어깨까지 잠긴 물에, 선재가 범진을 더 세게 잡았다. 그러지 않아도 범진은 단단히 저를 잡아주었지만.

잘한다고, 물 무섭다 하드만은, 하고 귓가에 닿는 조용한 음성을 선재가 들었다.

“내랑 있으니까 안 무섭지.”

“…응.”

“하아, 이래 앵기쌌는 게.”

물속에서 허리를 안은 범진이 몇 번 더 하아, 하고 숨 쉬었다.

범진과 물에 들어간 적이야 많지만, 이렇게 편안한 건 처음이었다. 선재는 범진이 처음에 왜 그렇게 튕겼냐고 물은 질문은 듣지도 못했다. 상체를 완전히 범진에게 지탱하고 발을 앞으로 쭉 뻗은 선재가 발가락이 물 위로 나오는 것도 물끄러미 보았다. 잔잔한 파동이 일면 주변으로 햇빛이 떨어졌다. 엄청 예쁘다, 말하면 범진이 뒤에서 니 이쁜 거 이제 알았냐고 했다. 딴소리를 진지하게 내뱉었다.

* * *

밤이 되어, 선재는 텐트를 빼꼼 열어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혹시 잠에서 깰까 봐 발꿈치를 최대한 들고 아이들을 살폈다. 아이들은 캠핑 매트 위에 여름 이불을 깔아 주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다. 이불도 좋고, 형아도 좋다는 재혁이 분명 준희의 손을 잡고 잠들었는데. 몸부림을 친 것인지 옆으로 한참 떨어져 있었다.

텐트 천을 조용히 닫은 선재가 뒷걸음질을 쳤다.

가족 단위의 피서객들이 주인 곳이라 해가 저물면서는 고즈넉한 분위기만 남았다.

랜턴 하나만 켜 두고 자리를 비운 범진은 10분이 더 지나고 나타났다.

누가 술을 먹는다고 맥주에 소주에, 막걸리까지.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술이라면 다 사 들고 등장했다. 내리막길을 척척 걸어 내려오는 범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선재가 발을 떼며 중얼거렸다.

“누가 마시라고…. 그거를….”

갑자기 보폭을 크게 한 범진이 또 꿍시렁거린다고, 선재 앞으로 훌쩍 다가와 아프지 않게 박치기를 했다.

“불만 있냐.”

“아야.”

이마를 떼자마자 또 턱, 닿아오는 느낌에 선재가 고개를 돌렸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범진이 사 온 술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고 선재의 얼굴을 잡았다.

“아오, 씨바, 이거를.”

“욕 안 하다가 또.”

양 뺨이 눌린 채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인 선재가 집게손가락을 범진의 입에 갖다 댔다.

뭐가 즐거운지 소리는 소거하고 웃기 시작한 범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범진은 얼마간 그렇게 웃다가 사 온 술을 바위 아래 물가에 담가 놓고, 맥주 네 병만 위쪽으로 들고 올라왔다. 두 병은 왠지 제 몫인 것 같아, 선재가 긴장을 했다. 범진과 마실 땐 나름대로 홀짝이곤 하는데, 술이 워낙 약해 두 병은 어떻게도 안 될 것 같았다.

“나 잠들 것 같은데.”

“자면 되지. 누가 뭐라 하냐.”

범진이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따며 대꾸했다. 차가운 병을 받아 든 선재가 범진을 쳐다보다 바위에 먼저 앉았다. 태어난 지 30년이 훨씬 지나 알게 된 제 술버릇은 까무룩 잠들어 버리기였다. 그래도 범진이 있어 어디서 잠들든 상관은 없을 터였다. 이럴 땐 가족이, 범진이 있는 게 특히나 더 좋았다.

건배 대신 뽀뽀하는 걸 좋아하는 범진에게 맞춰, 선재는 한 모금씩 홀짝댈 때마다 범진에게 입맞춤을 해 줬다. 밤이라 잠깐씩 입 맞추는 건 괜찮을 듯했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잠든 사람들도 많았다.

여름이지만 가벼운 밤바람은 불었다. 서서히 취하기 시작한 선재가 닿는 대로 범진에게 뽀뽀했다. 목에 입을 맞댔고, 어깨에도 뽀뽀를 했다.

범진은 요즘 선재에게 술 먹이는 재미로 살았다. 다 재밌고 좋지만, 요즘 제일 좋은 게 그거였다. 새 술을 따 준 범진이 선재의 허리를 깊이 안았다.

“내가…. 요즘은 술에 약한 건 아닌데…. 자꾸 술에 약하게 하니까….”

술에 취한 선재가 말도 안 되는 말을 시작하면 범진도 한껏 실실댔다. 논리적인 척 말을 이어도 호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선재가 생각하는 제 술버릇과 범진이 보는 선재의 술버릇은 달랐다. 그랬냐? 하고 선재를 안은 범진이 이마에, 달아오른 뺨에, 입을 맞췄다.

“밖에서 매일 이러면 안 돼…. 알지…. 자기가… 잘….”

맥없이 키스를 받아 주며, 선재는 섹스할 때만 쓰는 호칭도 절로 입에 담았다. 기분이 좋아져 몸서리를 친 범진이 선재의 머리를 제 가슴팍에 붙이고 대답했다.

“알지. 조온나게 알지.”

“잘하니까…. 내가 못하니까 잘해 줘야 해…. 술도 다….”

“어쭈.”

들고 있던 술을 옆에 놓은 범진이 아예 작정하고 선재의 고개를 들었다. 눈은 또렷하게 뜨는데, 초점이 좀 나가 있었다.

“저거 내 혼자 다 먹으라고?”

범진은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쥔 얼굴을 앞으로 당기고, 술이 맺힌 입술에 입을 맞췄다.

“우읍….”

그러기도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선재가 범진의 팔을 맥주병으로 툭툭 때렸다.

“왜.”

고개를 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조몰락대며 물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직 있어서…. 술만 먹어야지….”

“키쓰 함만 하고.”

“…….”

눈 아래가 붉어진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야, 서로 사랑하면 키쓰를 해야지. 맞냐, 아니냐.”

“…그거는….”

곧 응, 하고 대답한 선재가 범진의 말을 기다렸다.

“쎅쓰도 뒤질나게 하고.”

“그런데…. 그거는 집에서만 하는 거 아니야…?”

되는대로 대답한 선재가 범진의 웃음을 유발했다. 짓궂게 장난하던 범진이 선재를 끌어안고 그럼 내가 니 생각해서 키쓰만 한다, 했다.

그 말에 고개를 든 선재가 술은…. 했다.

“하고 마심 되지.”

술병을 건네받은 범진이 제 옆에 맥주병 네 병을 나란히 세워 놓았다.

엉성한 자세로 범진에게 딱 붙어 있던 선재가 다가오는 범진의 얼굴에 입술을 열었다. 술기운 때문에 기분이 더 좋았다. 밤에 가려진 이 순간은 기억에 남을까? 예전엔 어둠이 싫었지만, 어둠 속에서 키스를 하고 있으면 천하무적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은 너무 좋다고, 매일매일 이러자는 말을 해 주고 싶다. 기분이 좋아진 선재가 입술을 맞댄 채로 범진의 어깨를 안았다.

“으응….”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선재의 칭얼거림이 샜다. 뭐, 하며 선재의 이마를 손으로 쭉 만진 범진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안아 줘….”

“하아, 씨, 좆 터진다….”

“안아….”

몸을 지탱해 들어 올린 범진이 품에 준희라도 안은 듯 선재를 달랬다. 다른 게 있다면 은근하게 엉덩이를 주무른다는 거였다. 혼자 쓱 웃은 범진이 입술을 뻐끔거리는 선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 상체를 약간 뒤로 뺀 채, 자연스레 안겨 온 선재의 얼굴을 마주 봤다.

“니, 내가 니 딴 새끼랑 바람나면 어짠다고 했지?”

“같이, 같이 죽어. 그런데 나는 그런 거 안 해…. 왜냐하면…. 죽으니까….”

뭔 개소리냐…. 중얼거린 범진이 이번만큼은 선재의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런데 너나…. 너나 바람피워서 산에 가지 말지….”

이젠 눈앞에 산이 있다고 산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화가 안 되겠다 싶은 범진이 그 말엔 팩 웃고 말았다.

“내가 니 두고 어째 따른 쌍판을 빨겠냐.”

“그럼 사랑해, 해 줘. 나는 사랑하는데….”

“나도 씨, 개씹, 좆나게 사랑하지.”

“….”

범진의 눈을 쳐다보다 어깻죽지에 푹, 고개를 묻은 선재가 욕쟁이…. 했다.

* * *

뒤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준희는 적응력이 좋았다. 제 나이에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들보다 더 작은 몸집이긴 했으나 야무지기는 1등이라고 했다. 선재는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뺨이 다 상기될 정도로 좋아했다. 저는 어릴 때도 적응을 못 하는 바보였는데 아이는 몸이 조금 약한 걸 빼면 모든 면에서 우수한 편이었다. 뭘 잘하거나 못하는 건 언제나 나중 문제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따돌림만 당하지 않고, 혹시 놀림을 당해도 울지만 않았으면 했는데. 심성도 곱고, 미술에도 재능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선재는 며칠 내내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미술 진짜 시켜볼까?”

“니는 학교서 먼, 말만 하면 귀를 이래 팔랑팔랑대냐.”

범진은 오늘 사무소에 나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간 지 30분 만에 돌아왔다. 왜 다시 왔냐는 선재의 말에 범진은 니랑 놀라고 왔다고 했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점심시간 언저리는 되어야 그런 농땡이를 피우는데. 의아한 선재의 반응에 범진은 몇 번 장난을 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사무소 직원들과 놀러 가기로 한 날인데, 저는 돈만 쥐여주고 왔다고 했다. 내가 금마들이랑 왜 노냐, 말하며 진짜 안 가도 되냐고 묻는 선재를 끌어안고 핑글핑글 도는 시늉을 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안 갔나, 싶었지만 범진은 날씨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태풍이 불어도 갈 곳이 있으면 갔다. 선재의 어깨에 턱을 댄 범진은 끈질기게 선재를 따라다녔다. 니 내랑 뭐 하고 놀아 줄래, 하고 선재를 귀찮게 했다.

그러다 만들게 된 게 부침개 반죽이었다. 뭘 하고 놀지 마땅한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한 선재에게 범진이 대뜸 전이나 부쳐 먹자, 했다. 범진은 선재와 부침개를 만들어서 먹는 걸 좋아했다. 맛은 별로 없는데, 앞에서 반죽을 만드는 선재를 쳐다보는 게 이상할 만큼 재미가 있었다. 마침 영채가 준비해놓고 간 부침개용 재료들이 냉장고에 있었다. 그것만 넣고 섞으면 되는 건데도 선재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앞에서 범진은 일부러 도와주지 않고 선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을 하면 괜히 시비를 걸었다.

“잘한다고 하니까 그렇지.”

선재는 제 귀가 얇다고 핀잔을 주는 범진이 얄미웠다. 반죽을 꾹꾹 누르며 섞은 탓에 재료 풀이 다 죽어가고 있었다. 범진이 은색 볼과 선재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싱글벙글한 웃음은 얼굴에 대놓고 걸려 있었다. 선재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범진이 성큼 걸어가 선재의 어깨를 안고 얼굴을 코앞으로 들이댔다.

“비켜봐. 이거 다 하고….”

불편한 듯 상체를 움직이는 선재를, 범진이 힘주어 끌어안았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였는데 범진이 갑자기 안아 몸이 더 동그랗게 말렸다.

“아, 좀.”

“하아, 냄새.”

뺨에 코를 갖다 댄 범진이 코 모양이 삐뚤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냄새를 맡았다.

어떤 날엔 꽃 같고, 어떤 날엔 과일향 같은 게 난다. 범진은 생전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들에 애정을 품었다. 그 향기 사이로 들어오는 특유의 살 냄새는 몇 년을 맡아도 질리지 않는 것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자극적인 향기에 범진이 혀까지 내밀어 선재의 뺨을 쓱 핥았다.

“아, 싫어….”

선재가 손을 올려 가리려고 했지만, 손등에 범진의 혀만 닿았다. 물컹한 감각에 선재가 손을 재빨리 내렸다.

“니 오늘 괜찮드냐.”

“…….”

범진이 갑자기 한쪽 눈썹을 올리고 질문했다.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거품기를 볼에 탁, 소리 나게 놓은 선재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괜찮드냐고.”

“뭐가….”

늦은 새벽에 관계를 한 터라 둘 다 정신없이 잠들고 말았다. 선재는 시간이 좀 지난 뒤의 섹스 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부끄러운 건 똑같았다. 범진이 하는 이런 말을 들으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 범진이 선재의 반응에 입꼬리를 쓱 말아 올렸다.

“내가 뭐라 했냐?”

“…….”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몸 괜찮냐고 물은 게 다긴 하니까. 잠에서 설핏 깨, 몸을 비비적거리다 하게 된 섹스였다. 방을 분리한 덕에 아이들 눈치는 안 봐도 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붙어먹게 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전엔 아이들이 있으니 가서 하자, 정도는 합의를 봤는데 요즘엔 그런 게 없었다.

뒤늦게 고개를 저은 선재가 비켜, 하고 범진의 뺨을 손으로 느릿하게 밀어냈다.

“내가 니한테서 비키는 거 봤냐.”

안 비킬 거라는 의지를 당당하게 드러냈다. 전이나 부쳐 먹자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보다.

범진이 잡은 어깨에 힘을 줘, 선재가 상체를 오그린 채로 범진을 쳐다보았다.

사실 혼자 얼굴을 붉히는 데도 이유는 있었다. 섹스 얘기 자체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있지만, 일어나서 지금까지 팬티를 몇 번이나 갈아입었는지 모른다. 섹스를 하고 그냥 잠든 탓에 범진의 정액이 자꾸 속옷에 묻어나왔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생각이 자꾸 났다.

“어, 봤냐고.”

“그래도, 읍.”

범진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입술을 부딪쳐왔다. 선재는 범진에게 맞춰 그럼 한 번만, 혹은 이번에만 이렇게 해줘, 하는 식으로 말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도 그럴 참이었는데. 범진은 선재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부터 쭉 내밀었다. 잽싸게 혀도 넣어, 얼결에 키스나 나누는 꼴이 되었다. 범진이 혀를 깊이 넣을 때마다 선재의 목이 뒤로 조금씩 꺾였다.

범진은 예나 지금이나 불같았다.

좋아 죽을 것 같으면, 정말로 좋아 죽을 것처럼 굴었다.

단순히 혀를 넣어올 때도 그 갈증이 전해질 정도였다. 혀뿌리까지 밀려드는 감각에 선재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뿌리치고 싶기도 하지만, 그냥 버티고 싶은 마음도 든다. 선재의 뒤통수를 받친 채로 성기 밀어 넣듯 혀를 쑤셔댄 범진이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입을 벌렸다. 침이 줄줄 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깊은 점막까지 닿은 혀 때문에 선재는 헛토악질을 했다. 범진은 얼굴을 떼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밀어붙였다.

범진이 틈만 나면 하는 말이 있다.

이거 누구랑 또 해봤냐, 니 첫 씹이 언제였냐, 그 새끼 많이 좋아했냐.

선재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지만 범진이 믿지 않았다. 범진을 만나기 이전엔 손에 꼽을 정도로 섹스를 해보았었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쾌락을 몰랐고, 사랑과 섹스에 무감했었다.

어쩌다 보니 범진이 그런 걸 다 알려준 격이었다.

하루는 그런 생각이 들어, 선재가 범진에게 되물은 적이 있다.

해보고 싶던 질문이긴 했지만 선재는 지금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범진이 누구와 사귀었고, 누구와 섹스했었는지는 궁금하면서도 묻고 싶지 않았는데.

‘넌 처음이 언젠데? 사랑했어?’

많은 말이 생략된 질문이었다. 범진은 툭 건네진 질문에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했다. 왜 그런 게 알고 싶냐고 했다. 선재는 엉뚱하게 반응하는 범진을 끌어안고 계속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그날 기대한 만큼 범진이 듣기 좋은 소리를 했던 건 아니다.

떡만 뒤지게 쳤다는 범진은, 섹스를 중학생일 때 처음 해봤다고 했다. 그럴 것 같아서 제가 안 물어봤던 건가. 선재는 예상했던 그대로를 입으로 담는 범진에게 속이 상했다. 대충은 알았으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범진은 그런 선재를 보고 좋아했다. 니 설마 질투 그런 거 하냐고, 고개를 숙이려는 선재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감은 눈엔 어찌나 세게 입을 맞췄는지 오래오래 잔상이 남았다. 별과 덩어리가 눈앞을 스치는 와중에, 범진은 이런 말을 던졌다. 사랑은 니랑 첨 해본다, 했다.

그런 말에 바보처럼 웃었다.

그날이 필름처럼 천천히 지나갔고,

진한 키스를 하는 동안 부침개 반죽은 분리가 되어 이상한 물질이 되어 있었다.

범진은 뒤늦게 입을 뗐다.

“하, 씨, 이뻐 죽는 거.”

“하아, 하아.”

숨을 헐떡인 선재가 입을 더듬었다. 침이 흐르긴 하는데 감각이 무뎌져 손으로 더듬어 닦아내야 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상체를 뒤로 뺀 선재가 바닥에 뚝, 떨어지는 침도 손으로 쓸어 닦았다. 범진은 선재가 뭘 하는지를 집요하게 지켜봤다.

눈빛을 느낀 선재가 범진과 스치듯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무안한 기분에, 부침개 줘…. 했다. 옆에 있던 볼을 쳐다본 범진은 한쪽 뺨을 사정없이 구겼다. 웃음이 섞인 표정인데 어딘가 오묘했다. 뭔가를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랫입술까지 씹으며 일어난 범진이 씨발, 하고 선재를 내려다봤다.

“낸테 잘못이 있냐. 니가 잘못했냐.”

앞을 다 잘라먹은 말이었다. 범진은 벨트와 바지 지퍼를 차례로 풀며 한 번 더 물었다. 누구 잘못이냐고. 동시에 손으로 툭, 꺼낸 자지는 뿌리까지 제대로 발기해 울퉁불퉁하고 거친 모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자지를 본 선재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목까지 차오른 숨이 겨우 진정되나 싶었는데.

선재는 사랑하면 불안하다는 감정을 이해했다.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발 디딘 곳은 부러질 듯한 난간 위 같다.

선재는 발개진 얼굴로 제 바지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돼, 쉽게 벗겨지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느린 움직임엔 범진이 붙었다. 선재의 바지를 무릎까지 벗겨냈다.

“씨팔, 내가 죄가 많다.”

누가 잘못했냐고 물은 질문에 범진은 스스로 답을 냈다.

선재는 흥분한 범진의 눈을 쳐다보았다. 팬티를 벗기던 범진이 선재와 눈을 마주치곤 또 한쪽 뺨에 힘을 주었다. 깊이 팬 흉터에 어둠이 고였다.

섹스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터라 선재의 구멍은 많이 부은 채였다. 주름 곳곳이 통통해져 있었고, 주변은 붉었다. 범진이 손으로 엉덩이를 벌리자 하얀 덩어리까지 꿈틀거리며 나오려 했다. 곧 바닥에 고인 건 범진의 정액이었다. 침을 삼킨 선재는 그 감각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범진은 선재의 얼굴과 구멍을 번갈아서 쳐다보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도 씨발,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요즘은 밖에서도 욕을 잘 하지 않는데. 선재는 집에서 둘만 있을 때 툭툭 나오는 범진의 욕에 어쩐지 마음이 멋대로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범진의 팔을 만지던 선재가 맘대로 하라고 중얼거렸다.

곧 선재의 얼굴을 짜부라질 듯 손에 넣은 범진이 짧고 깊게 입을 맞췄다.

“다리 벌려라.”

벌게진 얼굴론 그런 말을 했다. 선재는 뒤쪽으로 반쯤 누우며 무릎을 열었다. 가슴이 뛰어 죽을 것 같았다. 지독하게 사랑하고, 집착하고, 애가 닳는 범진에게 저도 뭔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아무 데서나 보여줄 수 있고 벌릴 수 있다. 선재는 발갛게 솟은 성기와 구멍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덩어리져 나오는 범진의 정액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뭐가 되든 상관없다. 범진과 있으면 겁나는 게 없었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재는 범진의 성기가 삽입되는 순간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몸을 완전히 붙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더 해줘, 범진아.

사랑해, 최범진.

투둑투둑,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런 사랑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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